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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일 화요일

불기2564-09-01_반야등론석-K0578-012


『반야등론석』
K0578
T1566

제12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반야등론석』 ♣0578-012♧





제12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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般若燈論釋卷第十二
K0578
반야등론석 제12권


용수 게송
분별명 지음
바라파밀다라 한역
이현옥 번역


20. 관인과화합품(觀因果和合品_)

지금 이 품에서도 공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한 것으로서 
비세사 사람 등이 
앞 품에서 세운 시간[時]에 관한 주장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비세사 사람 및 승거 사람 등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이와 같이 시간이 존재한다. 
결과에 발생과 소멸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종자와 물과 흙 등이 화합할 때 
시간이 실체로서 있어 싹 등이 발생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원인이 없다면 결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까닭으로 앞에서 설한 것처럼 
이유에는 공능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시간이 있어 ‘인연이 화합하여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하면 
지금 이것에 대해 답변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 
만약 뭇 인연이
화합하여 결과가 발생해도
결과가 이미 먼저 있는데
어떻게 화합하여 발생하는가?



【釋】


화합 중에 만약 결과가 있다면 이와 같은 오류가 생긴다. 
왜냐하면 결과가 있어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있으나 화합 중에 발생한다면 결과가 있는데 어떻게 발생하겠는가? 
만약 ‘발생한다’고 말하면 화합 중에 없다. 
왜냐하면 ‘있는 것’과 ‘발생하는 것’의 두 법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결과가 있다면 발생하지 않으니, 이미 있기 때문이다. 
결과가 만약 이미 있다면 다시 발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발생하는 것과 발생하지 않는 것이 서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만약 결과가 있어 ‘인연이 화합한 중에 결과가 없었으나 결과를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지금 이것에 대해 답변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 
만약 뭇 인연이 화합하여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하면
화합 중에 결과가 없는데
어떻게 반드시 화합하여 발생하는가?

【釋】이것은 결과가 발생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발생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만약 발생하는 것이 없다면 발생하는 법의 실체도 없다. 
이것이 그대가 세우려는 주장의 오류인 것이다. 

만약 인연이 화합하여 결과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제 거듭 논파해 나가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 
만약 뭇 인연이
화합하여 결과가 있다고 한다면
결과를 취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실지로는 취할 수 없네.

【釋】
이것은 결과를 취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마음이라도 취하려 하나 취할 수 없다.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증험하겠다. 
화합한 가운데 존재하는 싹을 결과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화합 중에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취할 수 없다면 이 중에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종자 중에 병과 비단이 있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화합 중에 결과라고 부를 만한 싹이 없기 때문이다.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화합 중에 취할 수 없다고 말해도 이 뜻은 있다. 
말하자면 아주 멀거나, 아주 가깝거나, 
그들이 손상되거나, 마음이 미혹하여 번민이 있을 때나 
장애 등이 있을 때는 
취하려 해도 장애가 있어 
물체가 있더라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없다고 말하면 그대가 이유를 들고 주장을 세운 것에 오류가 있다.”


다시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앞에서 설한 오류와 같다. 
이제 장차 다시 설하겠다. 
그들은 위에서 이유를 들어 말한 ‘취할 수 없는’이 이유에 무슨 뜻이 있는가? 
현량(現量)으로 취할 수 없는 것인가? 
육근과 육식과 같은 것은 실체로서 있어도 현량으로 취착된 것은 없기 때문이니, 
그대가 이유를 든 것은 부정인이다. 

만약 험량(驗量)으로써 취할 수 없다면 이유의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치 원인 중에 결과가 있다고 증험한 것과 같다.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식할 수 있다면 이유가 공하지 않다. 
비유하면 결과의 실체가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괴로움과 즐거움 두 부류는 탐냄과 성냄과 여러 견해 등 세 번뇌의 원인이 되고, 
색과 소리 등 다섯 가지도 또한 탐냄과 성냄 등 세 번뇌의 원인이 된다. 
이 원인 등으로 인하여 험량이 있기 때문이니, 
원인 중에 결과를 취한다. 

그대가 비록 현량은 취할 수 없다고 말해도 이제 험량으로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성립할 수 없다. 

만약 현량과 험량으로 다 취할 수 없다면 
이것은 내 주장과 달라서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내가 취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인연이 화합한 중에 
끝내 결과가 없기 때문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대가 아주 멀리 있는 것 등도 취할 수 없으며, 
한결같이 없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은 
세제에도 이런 이치는 없는데 
어찌 하물며 제일의제에서이겠는가? 

제일의제에도 역시 아주 먼 등의 사물이 없으며 
위와 같은 괴로움ㆍ즐거움ㆍ색ㆍ소리 등도 제일의제 중에 없다. 
이렇다면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른바 ‘결과’라고 이름하는 결과도 역시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만약 원인 중에 결과가 없다면 세제 중에 결과도 역시 발생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느티나무가 느티나무를 발생시킬 수 없는 것과 같이 
원인도 또한 원인을 발생시킬 수 없다. 

그대가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킨다고 말하면 
세제 중에서 이미 논파된 것이다.”


또한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만약 원인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순간 
먼저 원인의 체가 없고 결과도 먼저 없다가 나중에 발생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제 증험하겠다. 
만약 먼저 원인이 없으면 나중에도 발생하지 않으니,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석녀 등과 같다. 
자세한 것은 앞에서 험량을 설한 증험을 설한 것과 같다. 

수다라인과 비세사인 등이 
‘원인 중에 결과가 없다’고 헤아려 분별한 것에 대해 총괄적으로 답하였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 만약 뭇 인연이
화합해도 결과가 없다고 말하면
이것은 곧 뭇 인연이
인연 아닌 것과 동일한 것이네.

【釋】여기서 결과가 없다는 말은 말하자면 결과가 공하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원인의 모습[因相]이란 이른바 스스로의 결과를 발생하는 것[自果生], 
간단없이 발생하는 것[無間生], 
자분을 발생하는 것[自分生] 등의 차별이 있다. 
이것을 원인의 모습[因相]이라 한다. 

연의 모습[緣相]은 두루 갖가지 결과를 발생시키고, 
다른 것을 지속적으로 자라게 하며, 
다른 것을 상속시켜 나아가 먼 곳까지 두루 여러 결과를 발생시키지만 
자분(自分)을 발생시키지 않아 널리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을 인연의 차별된 모습이라 한다. 

‘인연 아닌 것과 같네’라 함은 
인연이 아닌 것이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가 공하기 때문이다. 
이 까닭으로 인연은 인연 아닌 것과 같다. 

또다시 이제 원인 중에 결과가 없다고 집착하는 자를 위하여 
‘제일의제 중에 종자 등의 모든 인연은 결과를 발생시킬 수 없다’고 증험하겠다. 
왜냐하면 결과가 공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인연이 아닌 것과 같다.


또다시 경량부 사람이 말하였다.
“연(緣)은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결정된 연(緣)이 있어 결과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결과가 공하다면 주장과 서로 맞지 않는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제일의 중에는 이와 같은 증험이 없다. 
오히려 위와 같이 인연이 아니라는 오류와 같아져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려는 그대의 증험은 무력하다.”


경량부 사람이 다시 말하였다.
“보리종자에서 보리 싹이 발생함을 본다. 
이러한 까닭으로[因]를 든 것은 뜻이 이치에 맞지 않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세제 중에 실체로서 보리종자에서 보리 싹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어도 
제일의에서는 아니다. 
만약 제일의 중에 보리에서 싹이 발생한다고 말하면 이 뜻은 옳지 않다. 
이와 같이 관찰해 본다면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앞서 대답한 것과 같다. 


그대가 결과의 발생과 소멸을 주장하고, 
원인이 되어 결과에 발생의 뜻이 있다고 하면 옳지 않다. 
다시 지금 묻겠다. 
원인 중에 결과가 없다고 집착하는 것은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키고 소멸한다는 것인가? 
아직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고 먼저 소멸한다는 것인가? 

집착하는 자가 답한다. 
나에게 어떤 오류가 있어 두 질문을 하는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주장과 서로 맞지 않는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 결과에 작용을 하고서
원인이 곧 소멸한다면
준 원인과 소멸된 원인이라는
두 실체가 있는 것이네.

【釋】이것은 세제 중에서는 
또한 주는 것과 소멸하는 것이 한 법이지만 
실체가 두 개가 될 수 없는 오류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아직 결과에 작용하지 않았는데 
먼저 소멸한다는 것에 대해 이제 대답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원인이 아직 작용을 주지 않고
먼저 원인이 소멸한다면
원인이 소멸하고 결과가 일어나는 순간
이 결과에는 원인이 없는 것이네.

【釋】이것은 말하자면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까닭으로 원인이 소멸한 후에 결과가 곧이어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소멸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영원히 이미 소멸한 것과 같다. 

이 뜻은 모든 세간에서 다 이해하는 것이니, 
또다시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필요는 없다.


경량부 사람이 말하였다.
“화합한 법이 일어남과 동시에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 
등불과 빛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 뜻은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동시에 결과가 일어난다고 말하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화합과 동시에
결과가 발생한다면
발생시킨 것과 발생한 것이
한 시점이라는 오류에 떨어지네.


【釋】이것은 말하자면 동시라는 오류로 인하여
발생시키는 주체와 
발생하는 대상의 두 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동시에 태어난다는 것에 
위와 같은 오류가 있는 것과 같다. 


다시 어찌하여 다른 시기에 일어난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발생과 대상과 발생시키는 주체는 원인과 결과로 서 둘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증험하겠다. 
결과와 원인이 함께 화합하여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발생하는 대상과 발생시키는 주체는 둘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둘인 것과 같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용기와 심지와 기름 등이 화합하여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세제 중에 등불과 빛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 
등불과 빛이 서로 상망(相望)하여 원인과 결과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의 설은 옳지 못하다.
다시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아직 화합하기 전에 결과가 먼저 일어났어도 
뒤에 회합하는 순간 곧바로 뚜렷해진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없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 만약 아직 화합하기 전에
이미 결과가 일어난다면
저 인연을 여읜 후에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므로 원인이 없는 것이네.



【釋】말하자면 화합의 인연을 여의고도 먼저 결과가 있다면 
세제 중에 실제로도 이러한 일을 볼 수 없다. 
이 까닭으로 나의 부처님 법 중에서는 결과가 먼저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가 ‘나중에 뚜렷해진다’고 한 말은 앞서 이미 답하였다.


다시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원인법은 이미 소멸하였을지라도 
결과가 일어날 때까지는 오히려 원인의 실체가 머물고 있는 것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원인이 이미 소멸하였으나 실체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머무르게 해 
결과의 실체가 된다고 말하면 이러한 뜻은 없다. 

왜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 만약 원인이 변화하여 결과가 된다면
원인은 향해가고 있는 것이네.
먼저 있었는데 다시 발생한다면
거듭 발생한다는 오류에 떨어지네.

【釋】이것은 말하자면, 
원인의 실체가 결과가 되어도 실체를 버리지 않는다면, 
마치 제바달다(提婆達多)가 
이 집을 버리지 않고 저 집에 이르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원인의 실체가 이미 있는데도 
또다시 일어난다면 거듭 발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작용된 것이 전혀 없다. 
변한 것을 원인이라 하지 않는다. 

진흙덩어리가 병이 아닌 것처럼, 
진흙덩어리가 소멸된 후에 
병이 발생하므로 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변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진흙 자체와 같다.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원인과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 
나의 주장은 이와 같아 위와 같은 오류가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원인의 실체를 버리지 않았는데 결과라 부른다면 
단지 이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과의 실체는 없다. 
위에서 설한 오류를 그대는 면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원인의 실체를 버리고 결과의 실체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원인이 다시 결과의 실체 중에 머문다고 말하면 주장은 옳지 않다. 

그대는 사량(思量)하지 않고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또다시 집착을 가진 승거 사람에게 묻겠다. 
그대의 ‘원인이 일어난다’는 말은 
‘원인이 이미 소멸되었어도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직 소멸되지 않았어도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두 물음은 모두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 이미 소멸되어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인가?
아직 소멸하지 않고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인가?
원인이 소멸하였다면 이미 없어진 것인데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키겠는가?

【釋】이것은 이미 소멸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또 이것은 원인이 아닌데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키는가? 
만약 원인이 일어난 후에도 실체가 소멸하지 않으면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겠는가? 

그대가 설한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실체로서의 법은 항상 머무른다 해도 
앞 사물의 실체가 소멸하여 
나중 사물의 실체를 일으켜 변이(變異)가 있다. 

이 뜻으로 인하여 원인이 실체가 소멸하지 않았어도 
결과를 잘 발생시킬 수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것도 오류이다. 
앞의 실체가 소멸할 때 실체로서의 법도 소멸한다. 
왜냐하면 실체로서의 법은 사물의 실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이미 소멸한 법의 실체와 같다. 
나중에 법의 체가 이러날 때에는 실제 법도 일어난다. 
왜냐하면 실제 법은 사물의 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이미 일어난 법의 체와 같다. 
그대가 설한 것처럼 세제의 도리와 서로 위배된다. 

만약 제일의제의 도리에 의한다면 
어떤 법의 실체가 있어 소멸하고, 
어떤 법의 실체가 있어 발생하여 변이라고 말하는가? 
왜냐하면 모든 때에 비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설한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다시 그대가 앞서 법의 실체가 소멸했다고 말하면 
이 실체는 원인의 실체인가, 
원인의 실체가 아닌가? 

만약 이것이 원인의 실체라면 
앞서 법의 실체가 소멸하는 순간 원인의 실체도 소멸한다. 

게송에서 ‘원인이 소멸한다’고 말한 것은 말하자면 
이미 원인이 소멸되었어도 결과를 일으키는 힘이 있지 않다. 
다시 앞서 법이 소멸해도 원인의 실체가 없다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원인이 결과와 화합하여 머문다면
어떻게 결과가 발생하겠는가?
결과와 화합하지 않는다면
어떤 물체가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가?

【釋】이것은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는 실체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의 자체가 스스로 원인을 발생시키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원인이 결과와 화합하여 함께 머물면 
이미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원인을 곧 작용이 없으니, 
법의 실체가 전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대가 세운 주장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원인이 결과와 화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역시 위와 같이 대답한다. 
사물의 실체는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결과가 공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그 밖에 결과와 같다. 


또한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킬 수 없는 것을 
총체적으로 이미 부정하였다. 
이제 장차 개별적으로 설하겠다. 

안식(眼識) 등의 결과를 부정한다. 
만약 안식이 눈을 원인으로 삼는다면 
이 눈은 본 후에 대상을 취착하는가? 
보지 않고서 대상을 취착하는 것인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만약 눈이 보고서 취착한 후에 
식(識)이 일어나면 식을★★ 작용이 없다. 

만약 눈이 보지 않고서 취착한다면 
색의 경계는 작용이 없게 된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 중에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원인은 결과에 ‘작용하는 원인’을 주기 때문이다. 
만약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으면 우유는 낙(酪)의 원인이 아니다. 
비유하면 우유와 병(甁)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설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 과거의 결과는
과거의 원인과 화합하지 않고
또한 미래의 결과도
이미 생겨난 원인과 화합하지 않네.

【釋】이것은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가 모두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또다시 과거의 원인은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결과와 화합하지 않는다. 

다시 이미 발생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결과가 이미 발생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원인과 화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이미 발생한 결과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원인은
필경에는 화합하지 않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결과와 이미 발생한 원인도
또한 화합하지 않네.



【釋】이것은 말하자면 
시간이 다른 원인과 결과는 둘이기 때문이다. 
이미 발생한 결과는 이미 발생한 것이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원인은 이미 괴멸한 것이다. 
이미 괴멸한 결과와 아직 괴멸하지 않은 원인은 화합하지 않는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이미 발생한 결과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원인과 화합하지 않네.
또한 이미 괴멸한 결과는
아직 괴멸하지 않은 원인과 화합하지 않네.

【釋】여기에서 원인과 결과 둘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부정했기 때문이고, 
시간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대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렇게 관찰하면 원인과 결과는 영원히 화합하지 않는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원인이 만약 화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겠는가?
원인에 만약 화합이 있으면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겠는가?

【釋】지금부터 논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원인은 결과를 발생시킬 수 없다.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종자가 땅에 있을 경우 싹이 높은 산에서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 이제 도리의 입장에서 저 벼 종자 중에 결과가 있다거나 없다고 집착하는 자에게 오류가 있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원인 중에 결과가 만약 공하다면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겠는가?
원인 중에 결과가 공하지 않다면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겠는가?

【釋】여기에서는 종자에서 결과가 발생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결과가 공하기 때문이니, 
앞에서 대답한 것과 같다. 
비유하면 그 밖의 결과와 같다. 


‘원인 중에 결과가 공하지 않다“란 말하자면 
결과가 이미 있기 때문에 원인은 결과를 발생시킬 수 없다. 
비유하면 원인이 원인을 발생시킬 수 없는 것과 같다. 
앞에서 이미 대답했기 때문이다.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결과가 일어나기 전에 이 결과가 먼저 존재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러한 뜻이 없다. 
지금 이 오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결과가 공하지 않다면
공하지 않은 것은 소멸이 없네.
생기와 소멸이 없기 때문에
결과가 공하지 않다는 오류를 얻게 되네.

【釋】여기서는 결과가 연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결과는 자체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있으면서 일어난다면 이러한 뜻은 없다. 
이미 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만약 일어나지 않으나 결과가 존재한다고 말하면 
바로 결과는 실체가 항상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결과가 공하지 않다’는 오류를 얻는다. 

그러나 집착하는 자들은 결과에 공하지 않다는 오류가 있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결과가 공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고,
결과가 공하지 않으면 소멸하지도 않네.
결과가 공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도 없고 소멸도 없네.

【釋】결과가 만약 공하면 생기와 소멸도 없다. 
만약 반드시 있다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생기가 없기 때문에 소멸이 없다. 
이 까닭으로 결과가 만약 공하지 않다면 무엇이 일어나고 소멸하는가? 

또 어떻게 ‘이와 같이 결과는 
생기와 소멸법이 있기 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과가 만약 이미 있다면 일어나고 소멸하는 법을 볼 수 없다. 


비유하면 현재의 모습과 같다.
또 어떤 노가야(路伽耶) 외도가 말하였다.
“결과가 아직 일어나기 전에 결과의 자체는 없다. 
왜냐하면 결과의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이미 일어나면 또 다른 법의 실체는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설은 허망하여 주장에 의미가 없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답하겠다. 
왜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공한데 어떻게 일어나고,
결과가 공한데 어떻게 소멸하는가?
결과가 공하기 때문에
생기도 소멸도 없네.

【釋】이것은 말하자면 
제일의제 중에는 결과가 공하여 
생기가 있다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제일의제 중에 벼 싹 위에 보리 싹이 있다는 것은 실체로서 없기 때문이다. 

실체가 소멸한다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벼의 싹이 소멸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 연에서 일어나는 것은 자체가 모두 공하다. 
이것을 아법(我法)에서는 제일의제로 관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물이 조금이나마 공하지 않다고 말하면 
이들 사물은 인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세제에도 이러한 일은 없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위의 게송에서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결과가 공하지 않다면 
결과가 공하지 않다는 오류를 얻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를 테면 결과가 공하지 않으면 생기와 소멸이 없다는 오류를 얻는다. 

이제 그대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것은 
제일의제 중에 결과가 공해도 생기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환영과 같다. 
제일의제에서 결과가 공한 것은 소멸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환영과 같다. 
결과 또한 이와 같다. 

만약 결과가 다른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삼는다면 
이러한 결과는 일어나는 것도, 소멸하는 것도 없다. 
세제 중에도 결과가 없기 때문에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또한 위에서 
“결과가 공한데 어떻게 일어나며, 
결과가 공한데 어떻게 소멸하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이것은 이른바 생기와 소멸 모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결과가 이미 공하면 생기와 소멸이 없다. 
그러나 외인은 결과에 생기와 소멸이 없다고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니, 
여기에서 논험하겠다. 


내입(內入) 등의 결과에는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니 일어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환영과 같다. 


‘일어나는 것이 없고 소멸하는 것이 없다’고 증험한 것에 의하여 
그대가 ‘결과는 생기와 소멸이 있다’고 주장한 것을 타파하였다. 
그대의 차별법은 타파되므로 그대가 세운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다시 능생(能生)의 원인인 이 원인은 결과와 같은가, 다른가? 
그 오류는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원인과 결과가 같다면
결국 이런 주장은 있을 수 없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역시 이런 주장도 있을 수 없다.


【釋】어째서 원인과 결과가 같다거나 다르다고 할 수 없는가? 
이 과실을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원인과 결과가 만약 같다면
일어나게 하는 것과 일어나는 것이 같게 되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원인은 원인 아닌 것과 같네.


【釋】역시에서 그대가 일으키는 것과 일어나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같다. 
어떻게 같은가? 

또한 마치 불과 장작과 같으니, 
어떻게 하나일 수 있나? 
이 두 비유는 세간에 모두 본다. 

이 까닭으로 내가 지금 증험하겠다. 
원인과 결과는 같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으키는 것과 일어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둘인 것과 같다. 
이것은 같다고 헤아려 분별하는 오류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다시 다르다고 집착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원인과 결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모든 것이 원인의 법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런데도 그대는 원인이 원인 아닌 것[非因]과 같다고 하지 않는다. 
그대의 의도는 원인과 결과 두 법이 상속하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지금 묻겠다. 
원인 중에 먼저 결과가 있다고 집착하면 
이 결과는 먼저 존재하던 것이 발생한 것인가, 
아직 있지 않은 것이 발생한 것인가? 


이 모두 옳지 않다. 
그 오류를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결과가 이미 있다면
원인에서 발생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과가 아직 있지 않다면
원인이 다시 어떻게 발생하겠는가?

【釋】여기에서는 결과에 자체가 있다면 
어떤 원인을 빌려 발생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세제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다. 

결과에 자체가 없다면 
허공의 꽃처럼 세제 중에 사람들에게도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다. 
위의 게송에서 ‘결과가 공하면 어째서 발생하는가?’라고 설한 것과 같다. 
이 관찰로써 제일의제 중에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킨다면 옳지 않다. 
만약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킨다면 이는 원인이 아닌 것이다. 
앞서 외도가 주장한 ‘능히 결과를 발생시킨다’고 성립된 주장과 위배된다. 


다시 지금 위배된다는 말은 
제일의제 중에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음을 말한다. 
세제 중에 환화 등과 같은 것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비세사 사람이 또한 말하였다.
“제일의 중에 원인은 능히 결과를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것은 결과의 원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원인이 결과를 발생하게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끝내 ‘이것이 결과의 원인’이라고 지시하여 말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낙타 뿔로 된 활이 없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금 존재하므로 말할 수 있다. 
‘눈은 원인이고 식(識)은 결과’이며, 
‘벼는 원인이고 싹은 결과’라고 설하는 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말한다. 
만약 식과 싹의 비유가 성립할 수 있다면 내가 세운 주장이 성립할 수 있다. 
그 증험은 이와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일찍이 조금이라도 결과의 발생이 제일의제에 있으면 
‘이것은 원인이고 이것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고, 
이와 같이 지시할 수 있다. 

이제 발생시키는 원인이 없기 때문에, 
그대가 위에서 인용하기를 ‘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결과의 원인이라고 말한다’고 말한 것은 성립할 수 없다. 
또한 그대의 주장은 틀렸다.”



또한 어떤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화합법이기 때문에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 
이 화합법은 시간을 얻었기 때문에 결과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이품의 첫머리에 그대들이 나를 부정하여 
‘결과의 발생과 소멸을 원인으로 하기 때문에 원인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홀로 원인만이 결과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다시 화합과 시간으로 인하여 결과를 발생시킨다. 

그들이 말한 것과 같이 
‘원인은 결과를 발생시킨다’는 말은 정확히 내 주장을 성립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인연의 화합은 실체법이며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자체에서 발생한 후에 결과를 발생시킨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인가? 
그 오류는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자체(自體) 및 뭇 인연에서
화합은 발생하지 않네.
자체에서 이미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결과가 발생하겠는가?

【釋】여기에서 화합은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체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환영 등과 간다. 

또한 제바(提婆)의 『백론(百論)』에서 
화합(和合)을 부정하여 
게송에서 “하나의 화합도 없으며 여러 화합도 없네. 
만약 이것이 하나의 화합이라 말하여 
마땅히 인연을 떠나 있어야 하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제 그대를 위해 바른 뜻을 분별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 ● 그러므로 결과는 연(緣)이 화합한 것에서도
화합하지 않은 것에서도 발생하지 않네.
결과가 있지 않기 때문에
화합법도 없네.◂
 

【釋】여기에서는 
모든 연을 여의고 화합법은 없음을 이른 것이다. 

다시 앞에서 이미 원인이 결과를 발생하게 하지 않는다고 
주장을 부정한 것과 같이, 
지금 화합도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부정한다. 

어째서 발생하지 않는가? 
이른바 이 화합은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 것도, 
먼 곳에서 발생한 것도 아니다. 


제일의제 중에 발생하지 않는다면 
앞서 인연을 부정한 중에 이미 이해시킨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화합법은 결과를 발생하게 하지 않고 
화합법이 아닌 것도 결과를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백론』 중에 
“세간의 명자(名字)는 화합으로 인하여 있으며, 
법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화합도 없다”고 설한 것과 같다. 


이 까닭으로 품의 첫머리에 
외도들이 설한 이유와 외도들이 주장하는 이유는 오류가 있다. 

시간의 법을 부정하여 
원인과 결과에 자성이 없음을 이해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품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내 주장이 성립한다.
『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蜜多經)』 중에 설한 것과 같다.

“극용맹보살이여, 
색에 원인이 없고, 
결과도 없다. 
색에는 원인이 없고 결과도 없으며, 
나아가 수ㆍ상ㆍ행ㆍ식도 원인이 없고 결과도 없다. 
왜냐하면 색에는 화합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색에 화합이 없다면 나아가 수ㆍ상ㆍ행ㆍ식 또한 화합이 없다. 
색을 보지 않고 수ㆍ상ㆍ행ㆍ식도 보지 않아 
작용[行]하는 것이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식취후세경(識趣後世經)』의 게송에서 설한 것과 같다.

“화합처(和合處)를 설하여 
이것을 방편문(方便門)이라 한 것은 제일의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하네.”

「관인과화합품」의 해석을 마친다.






21. 관성괴품(觀成壞品)

【釋】지금 이 품도 또한 공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한다. 

앞의 품에서 인과에는 자성(自性)이 없음을 이미 신해(信解)시켰다. 

여기에서는 모든 법에 
생성(生成)과 괴멸(壞滅)이 없음을 
현시(顯示)하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다.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시간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시간이 곧 생성과 괴멸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만약 시간이 없다면 이 원인도 없다. 
비유하면 뱀의 다리와 같다. 

시간이 존재함으로 해서 
생성과 괴멸 두 법은 시간에 따라 전변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시간이 원인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원인이 성립하기 때문에 
곧 내가 세우려는 주장은 성립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생성과 소멸 두 법은 
생성을 떠나 괴멸이 있는 것인가? 
생성을 떠나지 않고 괴멸이 있는 것인가? 
함께 있으면서 함께 괴멸이 존재하는가? 
이 모두 옳지 못하다.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 생성을 떠나 괴멸이 존재하지 않고
함께 있는 것에도 괴멸이 없네.
괴멸을 떠나 생성이 존재하지 않고
힘께★★ 있는 것에도 생성이 없네.


【釋】우리 불법의 뜻도 그와 같고 그와 같다. 
마치 그대가 말하는 것처럼 
시간이 원인이 된다면 그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약 생성을 더나 괴멸이 존재한다면 
생성에 원인이 없는 것은 괴멸이며, 
괴멸에는 원인이 없다. 
또한 생성의 법은 허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생성이라 하는가? 
이른바 뭇 연(緣)이 화합하는 것이다. 

무엇을 괴멸이라 하는가? 
이른바 중연(衆緣)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생성을 떠나 괴멸이 존재한다면 
생성이 없이 무엇이 장차 허물어지겠는가? 
비유하면 병이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생성을 떠나 괴멸을 없다. 
만약 함께 있어 괴멸이 존재한다고 하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법이 먼저 달리 생성한 연후에 화합한다. 
이 화합법은 다른 것과 분리된 것은 아니다. 

만약 다른 것과 분리된다면 괴멸에는 원인이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함께 있어도 괴멸은 없다. 

이와 같이 만약 괴멸을 떠나거나 괴멸과 함께하는 경우에도 
생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괴멸을 떠나 생성이 존재한다면 
생성은 곧 상주하는 것으로, 
상주는 괴멸의 상(相)이 아니다. 
그래서 실체로서 법이 상주함을 볼 수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괴멸을 떠나 또한 생성은 없다. 


만약 함께 있어 생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생성과 괴멸은 서로 다른 것이다. 
어떻게 한순간에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어째서 다른 사람의 주장에는 오류가 있고, 
자신의 주장은 성립하는가? 
자신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도리를 말해야 할 것이다.”


청변 논사가 대답하였다.
“그대의 주장은 틀리다. 
그 오류를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생성을 떠나 곧 괴멸이 없는데
어떻게 괴멸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죽음을 떠나 태어나는 것이 없으니,
괴멸이 없는데 어떻게 생성이 있겠는가?

【釋】여기에서는 생성을 떠나 괴멸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간의 사람은 다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세히 얘기할 필요가 없다. 

생성을 떠나 괴멸이 없음을 이미 해석하였다. 

다시 함께 있어도 괴멸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생성과 괴멸이 함께 한다면
어떻게 장차 존재할 수 있으리오.
또한 태어남과 죽음을
동시에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네.

【釋】여기서는 괴멸과 생성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음을 증험하겠다. 
왜냐하면 생성은 괴멸의 연(緣)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죽음과 태어남은 함께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함께 존재하지 않음을 이미 해석하였다. 
다시 두 번째로 괴멸을 떠나 생성이 없다고 분별하는 것은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 만약 괴멸(壞滅)을 떠나 생성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모든 실체의 상(上)에 무상(無常)하여
언제나 존재하네.


【釋】여기에서는 괴멸을 떠나 생성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마치 주장명제 중에 모든 실체[體]가 무상하다고 한 것처럼 
이른바 색법(色法) 등의 자체가 무상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무상의 자체(自體)와 같다.


다시 정량부(正量部)의 사람이 말하였다.
“법이 비록 무상하지만 괴멸의 원인이 오면 
법체(法體)는 곧 괴멸하여 모든 시간에 무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비유를 하나 들겠다. 
어떤 사람이 설사하는 약을 복용하여 설사하고서는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 
‘이는 하늘이 나를 설사시킨 것이지 약 때문에 설사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대도 또한 이와 같다. 

무상의 법은 언제나 법체를 허물어뜨린다. 
그러나 괴멸의 원인이 오는 것을 기다린다고 말한다면 
이 사실은 옳지 못하다. 


만약 괴멸의 원인을 얻고 무상이 비로소 법체를 허문다면 
단지 이 괴멸의 원인이 법체를 허무는 것이다. 
어떻게 다시 무상이 허물 수 있겠는가? 


지금 외도에게 묻겠다. 
법체는 괴멸의 성품이며, 
괴멸의 원인이 있어야만 괴멸할 수 있는가? 
괴멸의 성품이 아니며, 
괴멸의 원인이 있어야만 괴멸할 수 있는가? 
이 법체가 만약 괴멸의 성품이어서 괴멸의 원인이 와야 괴멸할 수 있다면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으로 옳지 못한가? 
법체가 생기 할 때 쉴 사이 없이 곧바로 허물어진다. 

또한 생기하고 다시 소멸하여도 두 번째 찰나에 도달하지 못한다. 
어째서 괴멸의 원인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허물어지는가? 
만약 법 자체가 허물어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비유하면 열반과 같고, 
또한 저 괴멸의 원인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허물어진다. 
다시 괴멸에는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괴멸에 원인이 없기 때문에 법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비유하면 무위(無爲)와 같다. 
이 증험으로 인하여 저 괴멸의 원인이 논파된다. 
저 원인이 이미 논파되면 곧 법체가 논파가 된다. 

그대가 세운 주장은 오류이며, 
또한 생성과 괴멸 두 법이 전후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괴멸을 떠나 생성이 없음을 이미 해석하였다. 
다시 동시에 생성과 괴멸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 주장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 생성과 괴멸을 동시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또한 태어남과 죽음이
동시라고 말하는 것처럼 옳지 못하네.

【釋】이는 관할 때 주장이 앞과 같음을 해석하는 것이다. 
다시 서로 성립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 생성과 괴멸을 서로 성립하게 한다 해도
이 둘은 성립은 존재하지 않고
이 둘을 떠나 서로 성립한다고 해도
두 법이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釋】이는 생성과 괴멸 두 법이 성립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외도가 앞에서 “시간이 존재하여 생성과 괴멸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 것처럼 이유가 성립하지 못한다.
살바다비바사(薩婆多鞞婆沙) 사람이 다시 말하였다.
“이 자성(自性)의 괴멸법(壞滅法)은 생기하지 않고 곧바로 소멸한다. 
생기하여 간단(間斷)없이 머물기 때문이다. 
이 머묾은 간단없이 소멸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사실은 옳지 못하다. 
그 뜻을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소멸하는 것은 생기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것도 생기하지 않네.
소멸하는 것이 있다면 괴멸은 없고,
소멸하지 않은 것도 괴멸은 없네.

【釋】이는 만약 법에 무상이 존재한다면 이를 이름하여 소멸이라 한다. 
소멸이 존재한다면 생기는 없다. 
생기와 소멸 두 법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태어남과 죽음과 같다. 
만약 생기하여 간단없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소멸의 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말한 것처럼 생기와 소멸의 법은 세제 중에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멸의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유분별(思惟分別)해서는 안 된다. 
소멸이 없다면 괴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해탈과 같다.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마땅히 생성과 괴멸이 존재해야 한다. 
체법(體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생성과 괴멸이 없다면 또한 체법도 없다. 
비유하면 두꺼비의 털에 생성과 괴멸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물체의 법이기 때문에 반드시 생성과 괴멸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만약 한 사물이 실체로서 생성과 괴멸하는 것이 존재한다면 
마땅히 생성과 괴멸의 법은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성과 괴멸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뜻을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만약 저 생성과 괴멸을 떠나면
물체는 존재하지 않네.
생성과 괴멸의 두 법은
물체를 떠나 또한 없네.

【釋】물체는 생성을 실체로 삼기 때문에 
생성하여 이미 실체가 없다면 
그대가 이전에 체법(體法)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든 것은 성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지하는 대상인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의지하는 주체 또한 성립하지 못한다. 
다시 그대가 물체로서 원인을 삼는다면 지금 그 오류를 말하겠다.”


경량부[修多羅] 사람이 말하였다.
“물체는 실체가 없어 자성(自性)이 곧 공하다. 
그렇지만 사물 위[上]에 생성과 괴멸의 법은 존재한다.”

살바다(薩婆多) 사람이 다시 말하였다.
“사물이 실체(實體)가 존재한다면 자성은 공하지 않다. 
사물 위에 생성과 괴멸이 존재한다.”


이제 총괄적으로 그 두 부파에 대하여 대답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생성과 괴멸의 두 법이 존재하여
물체가 공하다면 옳지 않네.
생성과 괴멸 두 법이 존재하여
실체가 공하지 않다는 것도 옳지 않네.

【釋】여기서 증험을 세우는 것은 위와 같다. 
체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체가 존재한다면 괴멸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대들이 세운 이유는 성립하지 못한다. 

다시 거듭 오류를 두는 도리(道理)일 뿐이다. 

이 생성과 괴멸의 법은 같은가, 다른가? 
두 경우 다 옳지 못하다. 


이 뜻은 무엇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생성과 괴멸 두 법이
일체(一體)라는 것은 옳지 않네.
생성과 괴멸 두 법이
이체(異體)라는 것도 옳지 않네.


【釋】이는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리석음과 지혜로움과 같다. 
그러나 이 두 법은 똑같이 한 사물에 의지한다. 
비유하면 나머지 물체와 같다. 
이 또한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못하는 오류이다.
비세사 사람이 게송에서 말하였다.

나는 항상 물체에는 생성하고
또 괴멸이 존재한다고 보네.
이 까닭으로 체법(體法)은
반드시 존재하며 공하지 않음을 알 수 있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진실로 보는 것은 
단지 범부의 지혜와 같으며 제일의제는 아니다. 
지금 장차 그대가 그 뜻을 분별하는 것에 대하여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 생기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고,
생기하지 않는 것도 부정하네.
생성을 보는 자는 우치(愚癡)하며
괴멸을 보는 자도 그러하네.◂
 

【釋】이는 생성과 괴멸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외도가 
“생성과 괴멸을 보는 자는 
어떻게 우치(愚癡)하여 제일의가 아님을 알 수 있는가?”하고 물었다. 


청변 논사는 “이에 관해서 이미 대답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대가 뜻이 불충분하다면 지금 다시 말할 것이다. 

제일의제 중에 만약 물체가 존재한다고 본다면 
이 생성과 괴멸은 저 실체에 의지할 수 있다. 
그러나 사물은 실체가 있어야 실체를 발생시키는 것인가? 
실체 없이 실체를 발생시키는 것인가? 
이 모두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 뜻을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유체(有體)에서 실체가 발생하지 않고,
또한 무체(無體)도 발생하지 않네.
무체에서는 실체를 발생시키지 않고,
또한 무체도 발생시키지 않네.


【釋】유체에서 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 중에는 무체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이미 발생한 실체와 같다. 

만약 외도가 “마치 종자(種子)의 실체처럼 
나중 순간에 삭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이 실체는 실체를 발생시킨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싹이 아직 트지 않았을 때에 싹의 실체는 없다. 
싹의 실체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싹이 아직 트지 않았을 때 명자(名字)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아직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아직 발생하지 않은 나머지 물체와 같다. 
무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무체에서 실체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원인의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실체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니, 
또한 토끼의 불과 같다. 

무체에서 무체가 발생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미 앞에서 증험하여 타파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묻겠다. 
실체 등은 스스로 발생하는 것인가? 
다른 것에서 발생하는 것인가? 
똑같이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뜻을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법체(法體)는 스스로 발생하지 않고,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하지 않으며
자기와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하지도 않네.
지금 어느 곳에서 발생을 말하겠는가?

【釋】이와 같이 발생하지 않음을 앞에서 이미 자세히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발생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생성과 괴멸에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근본적으로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제일의제 중에 실체가 존재할 수 있다면 지금 오류에 대해 말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모든 법에 실체가 존재한다면,
곧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떨어질 것이네.
이는 법을 상주(常住)하는 것,
혹은 무상(無常)한 것으로 용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네.

【釋】어째서 그러한가? 
말하자면 이 법은 상주하거나 무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상주한다면 허물어지지 않기 때문에 상견의 오류이다. 
무상하다면 허물어지기 때문에 이는 단견의 오류이다.

어떤 외도가 말하였다.
“나에게 이러한 오류가 없다. 
그 뜻이 무엇인가? 
게송을 인용하여 ‘모든 법에 실체가 존재한다면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단견도 아니네’라고 말한다.”

청변 논사가 물었다.
“어째서 그러한가?”

외도가 다시 『중론』의 게송을 인용하여 대답하였다.

● 생성(生成)과 멸진(滅盡)의 상속(相續)은
결과와 원인으로부터 연유하네.
원인이 소멸하여 결과가 일어나
단멸하지도 않고 혹은 상주하지도 않네.

【釋】외도의 외도는★★ 
원인이 비로소 소멸하는 순간에 결과의 생기가 있으므로 단멸이 아니다. 
결과가 비로소 생기할 때 원인의 소멸이 있으므로 상주가 아니다. 
또한 경에서 “오음(五陰)은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이나 
단멸은 아니다”고 한 것과 같다. 
이 주장 때문에 원인이 결과와 함께 단멸하지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이와 같다면 주장은 상응하지 않는다. 
먼저 소멸하고 나중에 생기한다는 것이 오류임을 이제 말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생기(生起)와 멸진(滅盡)의 상속이
원인과 결과로부터 연유하고
원인이 소멸하여 결과가 생기한다면,
단멸하거나 혹은 상주하는 것이네.



【釋】여기에서는 원인이 소멸하고 다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단멸(斷滅)의 오류에 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이미 소멸한 것은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씨를 태우는 것과 같다.


비세사 사람이 청변 논사에게 말하였다.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사물이 연(緣)으로부터 생기한다면 이 결과는 곧 연(緣)도 아니고, 
그 연을 떠난 것도 아니며, 
단멸도 아니고, 
상주도 아니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는 청변 논사가 앞에서 이루려고 한 것인데 
지금 다시 오류라고 말한다면 옳지 못하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말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이 게송은 
세제 중에서 단멸도 없고 상주도 없다고 한 것이지, 
제일의의 경우는 아니다. 

왜냐하면 제일의제 중에 
일체법은 단멸과 상주의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원인이 변하여 결과가 되고 결과에 머물기 때문에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단멸과 상주의 오류는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그대의 전변설(轉變設)은 증험될 수 없어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없다. 
전변의 주장에 대하여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대가 다시 전변에 관한 분별을 일으킨다면 지금 다시 증험하겠다. 
만약 사물이 변할 수 없다면 끝내 전변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변할 수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다시 만약 모든 실체에 자체가 존재한다면 주장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그 오류는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먼저 자체가 존재하다가
나중에 없다면 옳지 못하네.
열반하는 순간에 다시 단멸한다면
단멸의 오류가 있는 것이네.



【釋】지금 실체에는 생기가 있고 소멸이 있는 것을 현견(現見)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실체에는 자체가 없다. 
왜 그러한가? 
생기와 소멸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다시 만약 모든 실체에서 먼저 자체가 존재한다면 
아라한(阿羅漢)의 심법(心法)과 심수법(心數法)은 나중 순간에 다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곧 단멸(斷滅)의 오류가 된다. 
이 오류를 그대는 피할 수 없다. 

만약 그대의 뜻이 열반하는 순간 곧 단멸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또한 단멸로부터 열반에 들기 이전의 존재들이 상속하는 순간, 
우리들에게는 어떤 단멸의 오류가 있는가? 
그리고 상속(相續)하여 단멸의 오류가 없다면 그대는 잘못 말한 것이다. 


내가 앞에서 열반하는 순간 단멸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대가 “열반에 들기 이전의 모든 존재는 상속한다”고 말한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마치 앞에서 열반하는 순간 다시 단멸한다고 말하듯이 이미 이해시킨 것은 단견의 오류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중에 단멸한다고 하면 해탈에 장애가 된다.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가? 
단견(斷見)으로는 해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대에게 대답하였다. 
그대의 마음의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르니 지금 다시 경청하시오. 
현재의 존재가 임종[末後]하는 순간 이를 ‘사유(死有)’라 이름한다. 
아직 오지 않은 존재 중에 처음 생(生)을 받는 마음을 곧 ‘초유(初有)’라 한다. 

여기서 주장의 뜻을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사유(死有)는 곧 사멸하니
초유(初有)를 취(取)한다는 것은 옳지 않네.
사유가 아직 사멸하지 않았을 때
초유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네.

【釋】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사유가 곧 사멸한다면 미래의 존재를 취하지 못한다. 
곧 사멸하기 때문이고 사유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아라한은 사유와 같다. 
또한 사유를 과거의 존재라 이름한다. 
초유(初有)를 현재의 존재라고 한다. 

만약 사멸하여 다음에 초유가 생기한다면 
이는 곧 무인(無因)이다. 

만약 이 사유가 아직 사멸하지 않았을 때 
초유를 능히 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류가 없다는 것에 대하여 여기서 증험하겠다. 
사유가 아직 사멸하지 않으면 능히 취할 수 없다. 
초유가 아직 사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현재의 존재와 같다.
외도가 다시 말하였다.
“사유는 사멸하려 하면 초유를 능히 취할 수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또한 잘 말하지 못했다. 

그 오류를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이 사유가 사멸할 때
능히 초유가 발생한다면
사멸하는 순간은 곧 같은 존재이고
발생하는 순간은 다른 존재이네.

【釋】여기에서는 사멸하는 순간과 발생하는 순간의 두 존재는 각기 다르기 때문인데, 
어떻게 능히 취할 수 있는가?

외도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마치 그들이 말한 것과 같다. 
상속(相續)이 존재하되 실체가 다르다면 나 또한 이와 같다. 
제바달다(提婆達多)의 사유(死有)는 제바달다의 초유(初有)를 취하지 않는다. 
다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야야달다(耶若達多)의 사유와 같다. 

또한 그대가 이미 사멸하거나, 
아직 사멸하지 않거나 사멸할 때에 초유를 취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위의 두 경우처럼 오류이다. 

또 그대가 사멸하여 아직 현전(現前)하지 않았을 때 
초유를 취한다고 말한다면 앞의 두 경우와 같이 오류이다. 
이와 같이 발생하는 순간과 이미 발생하였을 때 초유를 취한다면 또한 옳지 못하다. 

다시 앞에서와 오류가 있다. 
이 까닭으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사멸하는 순간과 발생하는 순간
초유(初有)를 취하는 것은 옳지 못하네.
그런데도 사멸된 음(陰)이
나중에 또다시 발생하는가?

【釋】여기서는 외도의 인정할 수 없는 이미 사멸된 음이
 거듭 다시 중생(重生)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이 한 순간에 두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초유가 사멸할 때 곧바로 다음의 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지금 마땅히 어느 음(陰) 중에 존재하다 죽으면 곧바로 이 음 중에 태어나야지, 
나머지 음 중에 태어나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사유가 이미 사멸하였는데 
초유를 취하는 것을 성립하지 않는 것을 이미 신해(信解)시켰다. 
사유가 멸할 때 능히 초유를 취하는 것은 성립하지 못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미 사멸하였거나 또한 지금 사멸하는 것은 다 성립하지 못한다. 

마치 내가 말한 바의 도리와 같이 
죽는 순간 모든 음이 이미 사멸하고 
다시 이 음으로써 상속이 발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 오류는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 이와 같이 삼시(三時) 중에
상속(相續)이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네.
만약 삼시가 없다면
어디에 상속이 존재하리오.◂
 

【釋】여기에서 사유가 상속하여 초유를 발생시킨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상속은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 

말[語]이란 세제이지, 
제일의제는 아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내가 세운 주장이 논파될 수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품의 첫머리에서 
외도가 이와 같이 시간은 생성과 괴멸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자세히 말하였다. 
이 원인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세우는 것은 성립하지 못한다. 

생성과 괴멸은 자성이 없다는 것을 
중생에서 신해(信解)시키려는 것이 품에서 주장하는 의도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여기서부터 경(經)을 인용하여 현성(顯成)한다.

마치 『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蜜多經)』 중에 설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극용맹보살에게 말씀하시기를 ‘색에는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으며, 
수ㆍ상ㆍ행ㆍ식에는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다. 
만약 수ㆍ상ㆍ행ㆍ식에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다면 이를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라 한다’고 하셨다.”
「관성괴품」의 해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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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Jean Ferrat - Regarde-Toi Paname.lrc



● 실상의 공함은 어떻게 논증할 수 있나 - 자립논증, 귀류논증


철수가 남자인가 여자인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이 경우 철수가 남자라고 하자. 
그런데 그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 여러 입증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밝혀보일 수도 있다. 

수염이 진하게 난 사람은 남자다. 
철수는 수염이 진하게 나 있다. 
그래서 철수는 남자다. 
이런 식으로 밝힐 수 있다. 


그런데 철수가 면도를 하고 다닌다. 
그리고 복장도 여성들이 입는 취향으로 입고 다녀서 오해를 받는다고 하자. 
그렇다고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직접 신체검사를 하기도 곤란하다. 
그런 경우는 간접적인 방식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렇게 접근해볼 수 있다. 

철수가 남자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어떤 경우가 있겠는가.
중성, 여성, 물건..
이런 식으로 나열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단 그런 경우라고 전제해본다. 
그런데 철수가 매번 목욕탕에서 남탕으로 들어간다. 
또 화장실 사용할 때도 남자 화장실로 들어간다고 하자. 

이 경우도 역시 따라 들어가 신체를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사실들은 앞에 처음 전제한 내용들과 모순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어디인가에 문제가 있다. 

이런 경우 만일 그것이 처음 전제한 내용들이 잘못이어서 그렇다라고 하자. 
그러면 처음 전제한 사실들을 깨뜨리게 된다. 

중성도 아니다. 
여자도 아니다. 
물건도 아니다. 

그러면 남자인 경우만 남는다고 하자. 

만일 그렇다면 이 내용이 철수가 남자임을 '간접적으로' 입증한 것처럼 된다. 
그런데 이 경우 여전히 철수가 직접 남자임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간접적 증명 방식이라고 한다. 

즉 다른 모순되는 경우가 잘못으로 돌아간다는 사정을 보여주어서 
반사적으로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간접적 증명에 사용되는 방식을 귀류논증방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살피는 것은 
생사현실에서 문제삼는 것들이 '그 실상은 공하다'라는 주장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이런 주제와 관련된다. 

여기서 살피는 반야등론석은 
첫 방식을 사용해 공을 논증하려고 한 입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자립논증파라고 칭한다. [쓰와(바)아딴리까 Svaatanrika ) 


그런 가운데 실상의 공함을 주장함에 있어서 파벌분화가 조금 있다. 
자립논증파는 이후 경량행 중관파, 유가행 중관파로 나뉘고 
다시 형상진실파, 형상허위파로도 나뉜다. 

무언가 조금씩 논사들간에 달리 접근하고 달리 보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개별 논서의 내용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을 모두 우이론의 범주에 넣기 쉽다. 
우이론이란, 우이독경이란 사자성구에서 만든 신조어다. 
즉 아무리 글자를 읽어도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논서에 해당할 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사과를 책상 위헤 하나 놓고 
사과, 너의 본 정체는 무엇인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 문제를 살필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사과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가운데 
이것을 옆에 있는 영희나 철수에게 건네면서 
이 사과의 정체를 살펴야 좀더 분명하게 사과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다. 

이 사과의 정체가 공하다. 
이 내용을 밝히기 전에 이 말이 먼저 무엇을 어떤 측면에서 문제삼는가부터 살펴야 한다. 

사과는 자신의 눈에 보인다. 
만지면 촉감이 느껴진다. 
왜 그렇게 내용을 얻으면서 엉뚱하게 공하다고 하는가. 
이것부터 이해해야 한다. 

위 실험 상황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 

위와 같이 사과는 눈에 보이고 촉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는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음도 같이 말한다. 
또 손을 대지 않으면 촉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과에 대해 일반적으로 서술하는 온갖 내용은 
여하튼 관찰자가 관련되어서 경험하고 보고한 내용들이다. 
온갖 과학지식의 사정이 다 이와 같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과의 본 정체를 문제삼는다. 

물론 사과라는 것은 자신의 주관이나 감관이 관계해서 대하면 
위와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주관이나 감관이 관계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것은 어떤 내용일까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살피는 것이다.

이것은 본 바탕에서 사과는 어떤 것일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다면 과연 그 성품이나 모습은 어떤 형태일까.  
이런 의문과 관련된다. 

그것은 눈을 감고 대한 상태와 비슷한가. 
아니면 눈을 뜨고 대한 상태와 비슷한가.
그것도 돗수 맞는 안경을 쓰고 대한 상태와 비슷한가. 
검은 선글래스를 쓰고 본 상태와 비슷한가. 
아니면 그것도 아니고 단지 손으로 만진 촉감과 비슷한가. 
아니면 사실은 자신도 아니고 철수도 아니고 오로지 영희가 본 그 모습과 비슷한가. 
이런 식으로 여러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결론은 공하다. 이런 내용이다. 
조금 풀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있다. 
우선 그것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떤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뼈대[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무아,무자성]

그런 상태로서 현실에서 주관을 통해 내용을 얻는 주체로서는 
끝내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온갖 2 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있다, 없다. ~이다 ~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이런 온갖 2 분법상의 분별을 떠나게 된다. [불이법]
그런 사정 때문에 그 상태는 언설로서 표현할 도리도 없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방편상 나타내기 위해서 
본래 그다지 의미를 갖지 않는 공[`suunya] 이란 표현으로 일단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실상은 공하다라고 표현한다. 

이를 잘못 이해하면 아무 것도 없는 상태 [무]라고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다. 
있다 없다는 2분법상의 분별안에서의 문제다. 
공하다는 것은 이런 있다 없다 이 양변을 모두 떠난 상태를 나타낸다. 

여하튼 이해가 어렵다. 

그런데 실상이 공한가 아닌가를 살피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것은 실상 측면 때문이 아니다.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가 극심한 고통을 장구하게 반복해 받아나간다.
그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그렇게 고통을 겪기 이전 단계에 일정한 예방 수단으로 수행을 행해야 한다. 
그런데 우선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이 예방적 수행 노력부터 행하기 어렵다. 

또 어떤 경우는 그것이 실패해서 심한고통을 받는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도 그것을 벗어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 생사현실이 어떤 바탕에서 나타나는가부터 잘 살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이 
알고보면 침대에 누어서 꾼 바다나 황금의 꿈과 성격이 같음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위 문제해결이 모두 원만하게 잘 성취될 수 있다. 

그러면 예방단계에서 수행을 행해 예방하는 노력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게 된다. 
즉 수행을 방해하는 요소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반대로 현실내용이 알고보면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극심한 고통을 직접 당면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렇게 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망집을 제거하지 못하고 임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일정한 업을 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 
그러면 그 결과로 그런 바탕에서 장구하게 생사고통을 겪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의 이해가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사정이 있다.


여기서 문제삼는 사과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 사과가 알고보면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도 없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만 얻는 것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별로 실다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집착을 갖고대할 만한 것이 아니다. 

마치 꿈에서 꾼 황금과 마찬가지다. 
물론 꿈꿀 때는 대단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런데 꿈 밖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꿈에서 꾼 황금에 상응해서 침대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게 된다. 


또 그렇게 되면 실답지 않은 사과 하나를 가지고 영희와 철수와 서로 얽혀 다투지 않게 된다. 
그러면 이후 사과로 인해 영희나 철수에게 이끌려 붙잡혀 고통을 당하지도 않게 된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게 서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고통을 주고 받는 상태로 서로 얽혀 들어가게끔 된다. 

알고보면 이들 하나하나가 실답지 않다. 
그런데도 욕계 내애서 장구하게 고통을 주고 받는 상태에 묶이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그 주체가 그런 망집에 바탕해서 그런 업을 행하기 때문에 그런 상태로 들어간다. [ 혹- 업 - 고 ]
그런데 그것은 오직 그런 망집에 바탕한 경우다.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원인단계, 업을 행하는 단계, 
그리고 그 결과로 예를 들어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상태나 
하나같이 다 사정이 마찬가지다. 
즉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같이 다 실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정들끼리 
서로 얽혀서 그런 상태에 묶이게 된다. 

실답지 않아도 이런 고통의 문제가 없으면 무방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주체가 각 상황에서 대하는 것들의 본 정체를 잘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것을 잘 파악하면 점차 그에 바탕해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하게 된다. 
그러면 우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게 된다. 
또 그러면 이후 생사현실 안에 임해서도 고통을 겪지 않고 반대로 무량한 복덕과 지혜도 성취활 수 있게 된다.
또 설령 어떤 극심한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도 평안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 [안인의 성취]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다른 중생도 잘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것이 결국 중생제도 불국토 장엄 성불 이런 표현이 나타내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현실적 효용 때문에 사과의 실상과 본 정체를 놓고 처음 탐구하게 된다. 

그런데 사과가 만일 공하지 않다면 어떤가. 
그리고 그와 정반대로 꿈이 아니고 대단히 실답고 중요하다면 어떤가. 
그렇다면 위 각 경우마다 문제가 조금 달라진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이를 대하는 주체의 반응 자체가 매순간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하는 주된 사정이다. 

물론 사과 하나를 가지고 현실에서 그렇게 임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 '사과' 부분이 자신이라면 대부분 또 그렇게 된다. 
한 주체는 생사현실 안에서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에 대해 지극히 집착한다. 
그리고 그 주체가 갖는 온갖 집착은 여기에서 파생한다. 

그런데 여기서 사과를 하나 놓고 살피는 문제는 
동일한 형태로 그렇게 집착하는 내용에도  공통된다. 
그리고 사과를 놓고 살피는 것도 이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살피는 이 문제 해결이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그런데 단지 누군가가 사과는 공하다라고 여러번 반복해 외치고 
크게 소리내 말한다고 해서 현실이 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도 그 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서 사과를 하나 놓고 잘 실험해야 한다. 

★1★

이런 문제를 이전 『회쟁론』을 처음 살필 때에도 기본적으로 살폈다. 
그런데 아직 이전 글들이 정리가 안 된 상태다. 
여전히 정리 중이다. 

그런 가운데 중관론의 재해석서인 반야등론석을 살핀다. 
중관론도 하나의 논서다. 
이 논서를 다시 재 해석해 살피는 것이 반야등론석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대하는 구마라집 역의 중관론도 일종의 재 해석 논서에 해당한다. 
청목 논사의 주석이 게송에 많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게송 부분들만 용수논사가 서술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부분의 이해가 쉽지 않다. 

우선 이 중관론은 경전의 어느 부분에 대해서 살피기 위한 것인가. 
그리고 어떤 이들의 주장을 논파하기 위해서 살피는 것인가. 
이런 배경 사정을 이해해야 각 구절이 나타내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과정 없이 곧바로 대하면 표현을 엉뚱하게 이해하고 대하기 쉽다. 

한편 게송 내용이 일단 짧다. 
그리고 문장이 나타내고자 하는 취지나 내용을 일반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 논의가 진행되는 배경 사정이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하기 때문이다. 
즉 이 논서를 대하는 이가 비약해서 곧바로 대하는 경우다. 

한편 일반적으로 a 라는 주장을 밝히기 위해 b 라는 논거를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a 와 b 라는 문장을 대해서 그 사실을 쉽게 이해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중관론이 앞에서 제시한 우이론의 성격을 갖는다. 
즉 아무리 살펴도 왜 a 에서 b 가 도출된다고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 사정이 있다. 역시 이 과정에서 배경이 되는 내용을 먼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문장 사이에 생략이 많고 비약이 많이 된다고 일반적으로 여기게 된다. 

이는 수학문제 풀이과정과 사정이 비슷하다. 

직각 삼각형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직각삼각형의 빗변은 얼마인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이 경우 어떤 이가 그것은 5 이다. 
왜냐하면 밑변이 3 이고 높이가 4 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시한다고 하자. 

이처럼 빗변이 5 인 사정을 밑변과 높이를 제시해서 답했다고 하자. 
그런데 이 내용을 보고 기존에 피타고라스 정리를 잘 살펴서 이해한 경우는 
이 내용만으로 위 내용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만일 피타고라스 정리가 먼저 이해되지 않는 상태라고 하자. 
그러면 제시한 이유와 결론 사이에 너무 비약이 심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왜 밑변과 높이가 3 과  4면 그것만으로 빗변이 5 라고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게송이 짧다는 것은 자세하게 이 과정을 나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초학자는 이들 논서를 대하면 대부분 우이론을 대하는 상태가 되기 쉽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다. 

중관론에서 살피는 항목은 다양하다. 
그런데 그것은 문제되는 것 가운데 비교적 중요한 것만 예시적으로 나열해 살피는 취지다. 
중관론에서 나열해 살피는 것만 사정이 그렇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는 취지가 아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방안으로만 그렇게 논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중관론을 다시 해석하는 입장에서도 각 입장마다 차이가 나는 것도 그런 사정이다. 

청목 논사나 청변논사, 월칭 호법 및 
이후 많은 논사가 중관론을 논의한다. 
그런데 해석 방식이나 해석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이다. 

그런데 원래 경전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논증을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중관론 이해가 잘 안 되는 경우는 
먼저 경전 내용을 살피는 것도 도움이 된다. 

다만 경전 내용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런 방편을 취하면 
비교적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다는 입장에서 이들 내용을 제시한 것 뿐이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음 문제의식을 갖고 살펴야 한다. 

각 부분에서 살피는 항목은 다르지만, 문제의 초점은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다음 문제의식을 갖고 살펴야 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Catherine Lara - Nuit Magique.lrc



Catherine Lara - Nuit Magique 


우선 『반야등론석』 제 12 권을 살피면 
긴구절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20. 관인과화합품(觀因果和合品_)
21. 관성괴품(觀成壞品)
두 내용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두 내용 다 쉽지 않다. 
분량도 많다. 
그런데 여기에는 용수보살의 게송과 함께 청변의 해석도 혼재해 있다. 

이미 이런 경우 부딪히는 문제점에 대해서 살폈었다. 
이는 한 가게에 주인이 여럿이 있을 때 발생하는 어려움과 비슷하다. 

용수의 중론송에 대해 청목석도 살피고 다른 논사들의 주석도 살필 수 있다. 
그 경우마다 조금씩 다른 점이 발견된다. 
그래서 중관학파 안에서도 입장이 조금씩 달리 나뉘는 사정이 있다. 
이 경우 이 각 논서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약간 혼동이 발생할 수 있다. 

a 입장을 취하면 b 와는 조금 달라진다. 
그런데 어느 경우에나 용수의 중론송을 놓고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려움이 발생한다. 

본인은 여기서 청변의 대변인은 아니다. 
용수보살의 대변인도 아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조금 쉽게 접근해보고자 한다. 

우선 용수보살의 게송에 대한 주석서이므로 그래도 용수보살 게송을 주로 놓고 살피기로 한다. 


그 가운데 다음 게송을 뽑아 놓고 살펴보기로 한다. 

...
▸ ● 그러므로 결과는 연(緣)이 화합한 것에서도
화합하지 않은 것에서도 발생하지 않네.
결과가 있지 않기 때문에
화합법도 없네.◂
 
...
20. 관인과화합품(觀因果和合品_)


▸ ● 생기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고,
생기하지 않는 것도 부정하네.
생성을 보는 자는 우치(愚癡)하며
괴멸을 보는 자도 그러하네.◂
 
..
21. 관성괴품(觀成壞品)


▸ ● 이와 같이 삼시(三時) 중에
상속(相續)이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네.
만약 삼시가 없다면
어디에 상속이 존재하리오.◂
 
...
21. 관성괴품(觀成壞品)


이런 내용을 놓고 살펴보기로 한다. 

대강 읽어보면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행하는 판단과는 
전혀 엉뚱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들이 그래도 긴 구절 가운데 핵심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것이 우이론에 해당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중론이 지금 어떤 내용을 말하려고 하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 다음에 그 내용을 또 어떻게 논증하는가는 두번째 살펴야 할 사항이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보는 내용을 하나 사례로 놓고 
이 문제를 함께 살피기로 하자. 

책상 앞에 종이가 있다. 
여기에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그러면 연기가 나타난다. 
또 재가 나타난다. 

이런 상황을 놓고 위 내용을 적용시켜보자. 

현실에서 이 상황을 놓고 
연기가 무엇때문에 일어난 것인가라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앞에 있던 종이와 라이터로 붙인 불등을 그 원인으로 제시할 것이다. 
그러면 그로 인해 생긴 결과는 연기다. 

그리고 이 순간에 연기를 놓고 말하면 
그 연기는 없다가 그렇게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상황에 연기의 생겨남이 있다고 말하게 된다. 
또 종이가 그렇게 다 타서 없어지면 
종이는 있다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종이의 없어짐이 있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생멸이 있다고 하게 된다. 
그 경우 생멸을 행하는 주어가 각기 있다. 

'종이'가 생겨났다. 그리고 없어졌다. 
'연기'가 생겨났다. 그리고 또 없어진다. 

그런 가운데 종이를 태우면 종이가 타는 현상이 어느 정도 지속된다. 
그래서 뒤에 타는 불은 앞에서 탄 불에 이어진 불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니 여기에는 상속함도 있다고 하게 될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일정한 현상이 이어져 계속된다. 
촛불을 놓고 살피면 이해가 쉽다. 

일반적으로 다 이렇게 이 현상을 이해한다. 

그런데 중론송에서 제시하는 게송 내용을 살피면 
이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한 주체가 대하는 현실상황에서 
무엇이 지금 잘못이고 엉터리라고 제시하는것인가. 
일단 이렇게 문제를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이 논의를 행하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논의가 어떤 부분을 초점으로 논의하는가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서 처음에 제시한 내용부터 먼저 잘 살피고 이를 찾아나서야 한다. 



어떻게 보면 중론 게송의 핵심 부분이 너무 상식에 맞지 않다. 
그래서 위에 든 사례를 놓고 위에 나열한 내용을 
반복해 제시하는 가운데 엉터리 주장을 행하지 말라고 요구한다고 하자. 

눈 앞에서 종이가 불에 타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없던 연기가 생겨나는 것도 보지 않는가. 
그런데 왜 그런 것을 부정하는가. 
이렇게 따지면 이는 이 논서가 밝히려는 초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논서를 살피는 상태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이 논서를 대하게 된다. 
그래서 알아듣지 못하는 논서가 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논의가 진행되게 된 맥락과 배경을 먼저 이해하고 
논서에서 살피고자 하는 초점을 잘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의 이해를 위해 일단 그림을 동원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마땅한 그림을 그려 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전부터 반복해 붙이는 그림을 붙여 놓고 
논의의 초점부터 먼저 잘 파악해보기로 하자. 



[img8]
08pfl--image/8식-8.jpg



앞에서 사과의 사례도 들고 
종이에 불을 붙여 연기가 나는 사례도 들었다. 
그림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다 마찬가지다. 
사과에 해당한 내용은 사과에만 해당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례일 뿐이다. 

그래서 새로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위 그림을 놓고 
그냥 살피기로 한다. 


우선 실험을 위해 눈을 감아보자. 
보이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눈을 뜬다. 
앞에 종이와 라이터가 있다면 그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불을 붙이면 종이가 타면서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 

현실에서 이런 실험은 놀라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초적으로 점검할 것이 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쉽도록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눈을 떠 보니 앞에 조각상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옆에 영희와 철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부분을 검토해보자. 

자신이 본 조각상 모습은 객관적인 실재인가. 
이런 문제를 검토해보자. 

물론 결론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 현실에서 거리를 걷거나 차를 몰거나
자신이 눈으로 대하는 그 대부분이 외부세계이고 
객관적 실재라고 믿고 산다. 

그래서 이 부분을 놓고 기초 실험을 해보아야 한다.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조각상의 정면을 보고 있다고 하자. 
그것은 자신이 본 모습이다. 

그런데 영희가 그  상황에서 옆에 비스듬하게 떨어져 있다고 하자. 
그 경우 영희는 조각상을 보더라도 자신과 같은 형태는 보지 못한다. 
철수도 비슷하다. 

같은 공간에서 조각상을 놓고 보더라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철수는 조각상의 뒷면을 볼 수 있다. 
영희는 조각상의 옆면을 볼 수 있다. 
그 상황에 자신은 조각상의 앞면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상황만 잘 검토해도 
자신이 평소 행하는 판단 가운데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자신이 눈을 떠서 대하는 모습은 자신이 본 모습일 뿐이다. 
그것은 영희나 철수가 대하는 모습이 아니다. 
즉 자신이 본 것은 객관적인 실재가 아니다. 

이것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렇다고 영희가 본 모습이 객관적 실재인 것도 아니다. 
철수가 본 모습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것은 자신이나 영희나 철수가 제각각 본 모습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각각 다 객관적인 실재는 아니다. 
그런 상태에서 여기서 논의되는 초점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이제 다시 종이를 태우는 실험장소로 옮겨가기로 한다. 

눈을 감으면 그 상황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눈을 떠서 종이를 타는 모습을 본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분별을 시작한다. 

앞에 있는 것은 종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것은 라이터다. 
이런 식으로 분별을 행한다.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관찰을 하고 다음처럼 기술한다. 

종이를 불에 태우니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 
연기와 재는 그 이전에는 없었다. 
연기와 재가 나타나게 한 원인은 종이와 불이다. 
이런 식으로 보고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것을 문제삼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실에서 눈을 뜨니 보이지 않던 종이가 보인다. 
또 그 상황에서 불을 붙이니 연기와 재가 보인다. 
그런데 중론에서 이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 그런 모습을 보는 상황에서 일정한 분별을 행한다. 
이 경우 그것을 문제삼는 것도 일단 아니다. 

물론 이 상황에서 무언가 잘못 분별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런 분별을 행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선 여기에서 기본적으로 혼동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림이 필요하다. 

현재 적는 내용이 모두 글자로 적혀 있다. 
그래서 각 글자부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일단 혼동이 발생한다. 
그것은 언어의 특성 때문이다. 

그래서 위 내용을 다시 자세하게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눈을 떠서 보는 모습은 
위 그림에서 1 부분에 그려 넣을 수 있다. 
그것이 종이던 연기던 마찬가지다. 
종이에서 연기가 나타나는 상황은 우선 1 안에서 얻어지는 내용을 가리킨다. [감각현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보고 종이가 원인이고 그것으로부터 
연기가 나타난다고 분별을 행할 수 있다. 
이 경우 그처럼 행하는 분별은 6 영역에서 일으키는 내용이다. 
이것을 우선 구분해야 한다. 

한편 그럼에 표시된 옆 2,3,4,5 는 그 상황에서 함께 얻는 소리나 냄새 맛 촉감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은 1 만 놓고 살펴서 특성을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일단 1 과 6 안의 내용만 살피면 충분하다. 

그런데 감각현실과 관념 분별의 구분은 간단하다. 
그 상황에서 눈을 감으면 보이다가 보이지 않게 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이 1 에 해당한다. [감각현실]

그런데 불을 태우니 연기가 난다는 관념분별은 사정이 다르다. 
눈을 감고도 그 분별은 행할 수 있다.  

이렇게 일단 두 내용을 구분하기로 한다. 

현실에서 누구나 이 상황에서 
그런 형태로 모습을 보고 분별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그 상황에 일반적으로 연기가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연기의 생멸이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다시 연기가 생멸하는 데에는 종이와 불이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연기는 그 결과다.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그 상황을 놓고 그렇게 여기고 대하는 내용을 
위 그림에 배치해보자. 
그러면 조금 이해가 쉽고 빨라질 수 있다. 

현실에서 대부분 그처럼 감각하고 또 분별을 행한다. 
그런데 적어도 중론에서 이런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장님이어서 눈으로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한다. 
또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치매 상태나 의식상실 상태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눈을 떠서 무언가 보는 것 같지만, 그런 분별을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현실에서 감각하고 분별하는 가운데에도 문제가 많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행하는 망집현상은 이들 현실 안에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이는 중론에서 주된 논의초점으로 두는 것은 아니다. 

이것만이라도 우선 파악하면 중론의 논의의 이해가 쉬어진다. 
그런 상태에서 사정이 그렇다면 중론에서는 무엇을 논의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를 앞에서 대강 살폈다. 

현실에서 위 상황에서 위와 같은 모습을 보고 
그런 분별을 행한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는 곧바로 대부분 망집 상태에 들어간다. 
그것을 시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 사정은 꿈의 비유로 이해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꿈 안에서 종이에서 연기가 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자. 
그런데 이 경우 초점은 그런 꿈을 꾸었는가 아닌가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꿈 밖의 상황에 그런 내용이 정말 있는 것인가. 
이런 부분에 초점이 있다. 

그 사정을 꿈을 놓고 이해해보자. 
꿈을 깼다 그리고 침대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러니 꿈에서본 연기나 종이 재 등이 일체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그런 상황을 파악하면 이제 꿈을 무엇이라고 하게 되는가가 초점이다. 

여기서 꿈 밖의 상황을 파악하게 되면 이를 통해 그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즉 아무리 꿈이 생생해도 그런 사정으로 그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 비유를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생사현실을 놓고 중론에서 논의하는 주된 초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Indochine - Belfast.lrc



중론의 논의의 초점을 이해하기 위해 기본적인 사항을 살폈다. 

현실에서 눈을 뜨고 종이에서 연기와 재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이는 우선 그림에서 1 의 부분에서 그렇게 얻은 감각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고 종이에서 연기와 재가 나왔다고 분별을 한다고 하자. 
그것은 6 의 부분에서 행하는 분별 내용이다. 
이것이 현실의 표면에서 주로 행하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중론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초점은 
이들 내용을 직접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처럼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이 
앞에서 비유로 든 꿈과 성격이 같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런데 중론에서 보이는 다른 논사들의 입장은 그와 반대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다음이다. 
현실 내용은 꿈과 성격이 다르다. 
즉 현실내용은 실다운 내용이다. 
이런 것을 내세우려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 두 입장이 대립된다. 

그런데 이를 밝히려면 원칙적으로 현실 내용을 붙잡고 논의하면 곤란하다. 

꿈의 비유를 생각해보자. 
꿈이 실다운가 아닌가를 밝히려면 꿈안에서 꿈만 살피면 곤란하다. 
꿈을 깨서 침대의 상황을 놓고 꿈 내용을 평가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꿈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고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현실이 실다운가 아닌가 논의도 마찬가지다. 
이 논의에 필요한 것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아니다. 
자신이 본 내용도 아니다. 
영희가 본 내용도 아니다. 
철수도 본 내용도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본 바탕에 있는 객관적 실재가 무언가가 초점이다. 
즉 자신의 주관을 떠나서도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이 무언가가 문제다. 
이 실재를 파악한 후 이와 현실 내용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그래야 현실 내용이 꿈과 성격이 같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고 깨닫게 된다. 

그래서 본 논의의 초점은 실재영역에 현실내용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할 것인가가 초점이다. 

현실 표면에서 감각현실을 얻고 다양한 분별을 행한다. 
그런데 용수보살은 그런 내용이 실재영역에 그처럼 실재하지 않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일단 언설을 통해 표현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언어가 갖는 특성 때문에 기본적으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우선 인과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에서 다음처럼 혼동하기 쉽다. 
즉, 처음 현실에서 얻는 그런 감각현실이나 관념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그것은 논의의 초점이 아니다. 

본 바탕의 실재가 무언가. 
거기에는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그처럼 얻게 하는 참된 실체가 있는가. 
이런 것들이 주된 논의 초점이다. 

그런데 왜 이런 논의를 하는가는 이미 앞에서 그 배경사정을 제시했다. 
이는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3 해탈문 가운데 공해탈문과 주로 관련된다. 
그리고 이것이 밝혀져야 비로소 현실에서 망집을 제거할 수 있다. 
즉, 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서 살아간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본 바탕의 사정을 파악한 가운데 => 이를 통해서 
현실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그 망집 상태를 기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꿈에서 악몽을 반복해 꾸는 상태와 사정이 비슷하다. 
그 꿈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은 
침대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고 평안한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또 사정이 달라진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주로 대부분 반대 입장에 서게 된다. 
그렇게 되는 배경 사정이 있다. 

우선 감각현실과 관념 사이에서부터 혼동을 일으킨다. 
그런 가운데 이 둘을 접착시켜 망집을 일으킨다. 

그리고 다음처럼 생각한다. 

자신이 대하는 현실은 자신만 겪는 것이 아니다. 
옆에 영희도 그처럼 본다. 
철수도 그처럼 본다. 
그리고 오늘만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다. 
어제도 보았다. 별 일 없으면 내일도 또 비슷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종이에 불을 붙이면 연기와 재가 나타나는 관계는 
그런 조건만 충족시키면 수없이 반복해 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천년전도 사정이 비슷하고 앞으로 천년 후도 비슷할 것이다. 

현실 사정이 이렇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꿈과 성격이 같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현실은 꿈과 달리 대단히 실다운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이렇게 잘못 임한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게 된다. 
자신이 눈을 감으면 물론 그 모습을 그처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거나, 
자신이 있거나 없거나, 자신이 한번 눈으로 본 내용은 본 바탕에 그처럼 그대로 있다.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왜 그 모습을 앞과 같이 반복해 대하게 될 것인가. 
또 자신 뿐 아니라 영희나 철수까지 같이 보게 될 것인가. 
이런  입장이다. 

이 두 입장 차이가 크다. 
그런데 현실에서 대부분 뒤 입장을 지지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그 현실내용을 대단히 실답게 여기면서 집착하게 된다. 
특히 그 내용이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부분일수록 그 정도가 극심하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분주히 업을 행하게 된다. 
현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런데 그것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망집 상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심하게 고통받는 상황은 
바로 이런 바탕에서 처하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먼저 그 원인단계에서 이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미 본 것처럼 망집을 갖게끔 하는 사정이 대단히 견고하다. 
그런데 그렇게 잘못 임하게끔 되는 배경 사정은 뒤에 별도로 살펴야 할 주제들이기도 하다. 
그것이 결국 유식학부분에서 설명하게 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 위 그림에서 대강 1-2-3-4-5-6-7-8 이런 구조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끔 된다고 추후에 설명할 부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을 초점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 문제되는 위와 같은 망집을 제거하는데 1차 목표가 있다. 

현실적으로 대부분 자신이 대하는 그런 감각현실과 분별 내용이 실답다고 여긴다. 
그리고 본 바탕에 그 실다운 근거가 있는 것으로 잘못 여긴다. 
그런 사정 때문에 자신과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 다수가 일정 시기에 
일정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이 되면 그런 내용을 반복해서 대하게 된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가운데 그런 내용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업을 행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이후 극심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반복해 겪어 나간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예방차원으로 가장 기본적인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이 논의가 행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논의의 초점은 앞 그림에서 1 과 6 에 
그런 내용을 얻게 된다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논의의 초점은 그림에서 #으로 표시한 그 영역이 어떠한가에 있다. 

중론에서 논의초점으로 두는 내용은 다음이다. 

우선 실재 영역에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 생멸을 문제삼는 a, 그리고 그 생멸, 그리고 그 원인과 결과로 보는 요소, 그들 사이의 관계 등등이 사정이 마찬가지다.  
=>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은 실답지 않다. 
=> 그래서 현실은 꿈과 성격이 같다. 
=> 그래서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 그래서 망집에 바탕해 매순간 어쩔 도리없이 행하게 된다고 여기면서 행하는 업을 중단해야 한다. 
=> 그리고 그 대신 과거에 쌓아 놓은 업장을 제거할 수 있는 수행을 오히려 잘 행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제시하는데 기초가 되는 부분이다. 
그것이 실재의 공함을 밝히는 논의다. 
이렇게 논의의 초점을 먼저 이해한다면, 
이제 이후 그런 내용을 어떻게 밝힐 것인가가 다시 문제된다.

그런데 그런 맥락을 이해한 바탕에서 논서를 다시 대하면 
각 표현이 각 경우마다 가리키는 부분을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여전히 약간의 문제는 남는다. 
논의의 초점과 대상 자체가 본래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논의가 진행된다. 
그런 사정 때문에 좀 더 자세히 살펴야 할 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후 이런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밝혀낼 것인가를 다시 잘 살펴가야 한다. 


이에 대해 경전에서 제시하는 원칙적인 방식을 기존에 먼저 살폈었다. 
사실은 이것이 더 간명하다. 

한편 실재의 공함을 밝히는 방식은 
이미 처음에 본 페이지에서 제시한 방식도 그 방식의 하나다. 
본 바탕인 실재에 현실과 같은 내용을 왜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왜 공하다고하는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정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도 한 방식이다. 

즉,한 주체가 어떤 내용을 얻게 되는 사정이 그렇다. 
한 주체는 오직 그 주관이 관계해 내용을 얻게 된다. 
그런데 지금 문제삼는 실재는 그런 주관과의 관계를 떠난 내용을 문제삼는다. 
그래서 문제삼는 실재는 끝내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사정이 그렇다. 
이렇게 제시하면 또 간단하다. 

그런데 중론에서와 같은 논의가 이어지는 사정이 또 있다. 
경전에서 제시하는 이런 원칙적인 방식으로는 이를 잘 수긍하지 않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배경 사정을 이미 앞에 제시했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현실이 너무 이상하다. 
철수도 영희도 매번 같은 상황을 대한다. 
이런 사정이다. 

그래서 다시 중론과 같은 논의가 행해지게 된다. 
살펴보면 대단히 번잡하다. 
그래도 시간을 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앞과 같은 형태로 망집을 일으켜 고집을 세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접 그런 상태로 생사고통에 처하기 직전까지 
전혀 굽히지 않고 용감하게 나아가는 사례가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 해결이 요구된 것이다. 


★1★


논의의 초점과 이들 논의가 행해지는 배경 사정은 이전에 『회쟁론』을 살필 때 기초적으로 많이 살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중복된다. 
여기서는 간단히 요약하고 그 이후 내용을 살펴가야 한다. 
그런데 이미 글이 길어졌다. 
그래서 여기서 앞으로의 논의 방향만 대강 살피고 마치기로 한다. 


우선 이렇게 논의삼을 부분을 표시해보자. 
먼저 현실에서 눈을 떠 얻는 감각현실을 ○ 으로 표시해보자. 
이는 소리나 냄새 맛 촉감 등 다른 감각현실도 대표한다. 

한편 이런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행하는 분별 내용은 ■ 으로 표시해보자. 
즉 한 상황에서 이 부분은 종이다. 저 부분은 불이다. 
종이에 불을 붙이자 연기가 난다. 이런 등등의 내용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간단히 기호로 표시하면 ○ 과 ■ 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런 주관을 떠나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실재를 # 으로 표시해보자. 

그러면 이제 그 존부나 내용을 파악할 영역은 # - ○ - ■ 이렇게 표시할 수 있다. 
즉, 실재# - 감각현실 ○ - 관념분별 ■ 이다.
이를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들 관계가 먼저 문제된다. 

여기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해보자. 
만일 실재#영역에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 ○과  관념분별 ■이 
그처럼 그대로 얻어진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침대에서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는 성격이 다르다. 
꿈은 침대의 내용과 서로 엉뚱하게 달랐다. 
그런데 이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경우라면 현실 내용은 한층 실답다고 판단해야 한다. 

또 다른 주제가 문제된다. 
즉 참된 진짜라고 할 실체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다. [무아, 무자성의 판단문제]
이것은 실재가 공한가 아닌가와 같은 논의는 아니다. 
그런데 대단히 밀접한 논의가 된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본 바탕의 실재가 무언가가 문제되는 경우는 
그 실체를 제시하면 된다. 

그러나 실재가 공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 없다는 것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실재가 공하다는 논의는 이 논의도 안에 포함된다. 

이제 다시 실재# - 감각현실 ○ - 관념분별 ■ 의 관계를 살펴보자. 

현실이 실답다는 주장은 다음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감각현실 ○ - 관념분별 ■ 을 얻는다. 
그런데 이들 내용은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영역에서도 그처럼 있다. 
그리고 다시 그런 내용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참된 실체도 있다. 
이런 입장이 있다. 
그것은 결국 현실 내용을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는 입장이다. 
그것은 현실이 꿈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재가 공하다는 것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다. 
이는 결국 다음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감각현실 ○ 과 관념분별 ■ 을 얻는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본 바탕인 실재 # 영역에서는 얻지 못한다. 
더욱이 참된 실체로서 그런 내용은 없다. 
이런 입장이다. 
그래서 감각현실 ○ 과 관념분별 ■ 울 현실에서 얻었다고 해서 
그 내용을 실재 #에 그처럼 있다고 제시하면 곤란하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분별을 일으키는 온갖 내용을 놓고 
그것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을 혼동하면 안 된다. 

종이에서 연기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종이나 연기를 얻을 수 없다. 
또 그 생멸을 얻을 수 없다. 
또 그 원인과 결과에 해당하는 것도 얻을 수 없다. 
또 그것들 사이의 인과관계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이 경우 이는 다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재# - 감각현실 ○ - 관념분별 ■의 관계를 놓고 보자. 
현실 내용이 실답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우선 다음내용을 주장하기 쉽다. 

감각현실 ○ 을 실재 # 영역에 밀어 넣는다. 
그래서 실재 # 영역에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 ○ 과 같은 내용이 그처럼 있다. 
이렇게 주장하기 쉽다. 

또 관념분별 ■을 실재 # 영역에 밀어 넣는다. 
그래서 실재 # 영역에 현실에서 일으키는 관념분별 ■ 이 그처럼 있다. 
이렇게 주장하기 쉽다. 

반면, 이런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다는 입장은 위 주장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에 해당하는 내용은 
실재#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자체를 그렇게 얻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실에서 감각현실 ○ 은 그처럼 생생하게 얻고 또 분별 ■은 명료하게 행한다. 
그런데 문제는 # 실재 영역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혼동하면 안 된다. 

중론 논의나 해석을 보면 이 부분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내용이 언어로 기술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사정이 있다. 

그런데 실재 영역#에서 어떤 내용이 있는가 없는가 문제는 
제일의제나 승의제, 또는 실상의 문제로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우선 구분을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위 주장을 어떻게 밝힐 수 있는가가 다시 문제된다. 
그것은 정작 실재 영역#의 상태를 밝히고자 할 때 
어떤 주체도 그 실재# 내용을 직접 확보해서 증거로 제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실재#가 공해서 어떤 내용을 얻어낼 수 없다는 입장에서는 
사정이 더욱 그러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실재#가 공하지 않다는 반대 입장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 실재#에 대해 그 실재#가 이러이러하다는 식으로 마구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망집현상의 문제 증상이다. 
그래서 중론에서는 이것을 논파하고자 하는 취지다. 

그리고 그런 주장자는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 ○ 을 바탕으로 일으킨 관념분별 ■을 
근거로 하게 된다. 

즉 자신이 눈을 떠서 종이에 불을 대면 연기가 난다. 
그리고 종이가 원인이고 연기가 결과라고 분별을 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내용을 그대로 실재 영역#에 밀어 넣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입장은 대부분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그대로 실재#영역에 밀어 넣어 주장하는 형태가 된다. 

현실에서 종이를 있다고 여겼다. 
=> 그러면 실재#도 그런 종이가 그처럼 있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인과관계나 생멸이 실재한다는 입장은 
사실은 현실에서 그런 감각을 하고 분별을 한 내용이 그 주장 근거가 된다. 
만일 현실에서도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 가운데 
무조건 상상을 펼쳐서 실재가 그렇다고 하는 경우면 대단히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그런 주장을 붙들고 논파시키는 것이 주된 초점이다. 
문제는 어떻게 그 주장을 논파하고 
실재가 공함을 밝힐 것인가가 문제된다. 

여기에서는 일단 중론에서 무엇이 있다 없다는 논의는 
그런 의미를 나타내는 것임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인과가 없다. => 현실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현실에서 분별한 내용이 #실재 영역에 그처럼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다. 

이후 이것을 논파하거나 입증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래서 그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가를 이후 살펴나가야 하다. 

여기에는 다음을 초점을 맞추고 살피면 내용 파악이 비교적 쉽다. 

예를 들어 a 가 있다라고 하는 주장을 한다고 하자. 
그것이 단순히 현실에서 그런 분별을 하게 되었다는 경우는 여기 논의의 초점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 실재 영역에 그처럼 있다는 경우는 
다른 의미를 부가시켜 내세운 것이다. 
그것이 문제다. 
어떤 의미를 부가시키는가. 

어떤 것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그런 분별을 그렇게 행하는 주관과 관계없이도 
독자적으로 실재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주장이 잘못인가 아닌가를 밝히려는 취지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중론 게송에 제시된 내용을 살피면 
좀 더 쉽게 내용을 파악해갈 수 있다. 

현실에서 종이에서는 연기를 보지 못하다가 불을 붙이면 연기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경우 종이에서 연기가 나타났다고 일반적으로 이해한다. 
그렇게 관념분별을 행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을 #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는 단순히 
이런 내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놓고 검토하는 취지다. 
그래서 중론 논의를 그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살펴나가면 
내용을 이해하기 쉽다. 

이후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vmja1817
◈Lab value 불기256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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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Francoise Hardy - Loving You.lrc


♥단상♥ 기일의 선택문제 

mun 님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그런데 태풍 때문에 오락가락 결정을 못하고 있다. 

본인이 그래서 영감추출기를 사용해보자고 했다. 
현실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 

a 안과 b 안 두 안 가운데 어떤 것이 나은가. 
그것은 a 를 택한 경우 그로 인해 이어 발생할 내용과 
b 를 택한 경우 그로 인해 발생할 내용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미리 파악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도 이상하다. 

어떻게 한 시간과 공간에 두 개의 사건이 따로 있을 것인가. 

여하튼 현실에서 이런 선택문제가 제기되면 
대부분 잘 모른다. 
모르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닌데, 그래도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경우 도움 받기 위해서 영감추출기를 개발했었다. 

그런데 한 쪽 안에 대해 可 라고 나온다. 
그러나 그 날 태풍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9/2564-09-01-k0578-012.html#1817
sfed--반야등론석_K0578_T1566.txt ☞제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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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ler-jpn-Eng] 取相悔 シュソウケ repentance according to marks
[Glossary_of_Buddhism-Eng] ZAZEN☞
Japanese for “Zen sitting,” Zen med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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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eng] proscris $ 불어 pro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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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주 11 번째는?
성관자재보살 명호 29 번째는?




11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선남자야 네가 대자대비로
중생을 안락케 하기 위하여
신주(神呪)를 설하고자 하나니
지금 바로 그때라. 속히 설할지니라.
여래께서 네가 설함을 따라 기뻐하니
모든 부처님도 또한 그러할 것이니라."
● 바로기제새바라능다바 婆盧吉帝室佛羅㘄馱婆<十一> ba ru ki te ś va r a ṃ dha va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29
아세다야 노미암 아나 릉가리 다아 다라
阿世怛野<二合>努尾焰<二合>惹曩<引>楞訖哩<二合>哆誐<引>怛囉<二十九二合>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 삼매_게송퀴즈


■ 오늘의 게송
[245일째]
종종수량불가설 $ 116▲無邊轉無邊轉為 一 ● 無等, ○□□□□,如,種,於,種

□□□□□□□, 如其一切悉了知;
種種形量不可說, 於此靡不皆通達。
□□□□□□□, 여기일체실료지;
종종형량불가설, 어차미불개통달。

가지가지 수효를 말 못하는데
그와 같은 모든 것 모두 다 알고
가지가지 형체도 말 못하는데
이런 것 통달하지 못함이 없네.



[246째]
종종삼매불가설 $ 117▲無等無等為 一 ● 無等轉, ○□□□□,悉,於,所,得

□□□□□□□, 悉能經劫於中住,
於不可說諸佛所, 所行清淨不可說。
□□□□□□□, 실능경겁어중주,
어불가설제불소, 소행청정불가설。

가지가지 삼매 말할 수 없어
여러 겁 지내도록 머물러 있고
말할 수 없는 부처 계신 곳에서
청정하게 닦은 행을 말할 수 없고





●K0480_T0391.txt★ ∴≪A반니원후관랍경≫_≪K0480≫_≪T0391≫
●K0578_T1566.txt★ ∴≪A반야등론석≫_≪K0578≫_≪T1566≫
●K0020_T0251.txt★ ∴≪A반야바라밀다심경≫_≪K0020≫_≪T0251≫

법수_암기방안


116 [암핏 armpit] 겨드랑이
117 [바이셉쓰biceps ] 알통
11 위팔 upper arm
29 약지 (RING finger ) ~ 아세다야 노미암 아나 릉가리 다아 다라
● [pt op tr] fr
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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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야등론석_K0578_T1566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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