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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1일 목요일

불기2565-07-01_앙굴마라경-k0410-003





『앙굴마라경』
K0410
T0120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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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앙굴마라경』 ♣0410-003♧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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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별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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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별논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央掘魔羅經卷第三
K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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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굴마라경』 ♣0410-003♧


● 수행과 생사현실의 극적 변환

곡물로 만든 식품을 마구 먹어치우는 시리얼(cereal) 킬러라고도 한다.
그런데 경전에 등장하는 앙굴마라도 시리얼 킬러였다.
그러나 식품을 마구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고 당시에 유명한 연쇄살인범이었다.

99 명을 연쇄 살해했다고도 하고 999 명을 연쇄 살해했다고도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해 1000 명을 채우려는 그 시점에
부처님이 나타났다.
그래서 앙굴마라가 참회하게 하고 수행에 입문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곧 아라한이 되었다.

여하튼 그렇게 수행을 시작하고 아라한이 되었지만, 세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무서운 연쇄살인범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 배경 사정을 다시 깊게 살펴보니, 그가 단순한 아라한이 아니고
'여래'라는 것이다.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아라한도 대단히 성취하기 힘든데 여래는 더더욱 쉽지 않다.
그런데 세간에서 연쇄살인을 범한 범인이 여래라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의 입장과 수행계의 입장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앙굴마라가 처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시한다.

▸ 일체 중생은 모두
음식으로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나니
이것은 성문의 법이요
대승의 법이 아니니
이른바 대승의 법이란
음식을 떠나서 늘 견고합니다.

어떤 것이 하나인가 하면
이른바 온갖 중생들이
모두 여래장으로써
항상 편히 머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둘인가 하면
이른바 명(名)과 색(色)이니
이것은 성문의 법이요
대승의 법이 아닙니다.

명과 색이 다르다 함은
성문과 연각의 법이니
해탈은 명만 있을 뿐이요
미묘한 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 부처님의
해탈은 미묘한 색이 있어
마치 손바닥 안에서
암라과(菴羅果)를 보듯 합니다.◂


....


처음 수행자가 다양한 법수를 배운다.
그래서 1 법. 2 법. 3 법...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부처님 법을 배운다.
그래서 처음 하나의 법을 배울 때 밥에 대해서 배운다.
왜 많고 많은 내용 가운데 밥을 처음 제시하는가.

생각해보면 수행에서 필요하고 중요한 준비물 하나가 밥이다.
수행자에게는 옷 세벌과 나무밑 거처에 식사만 해결되면
이제 수행할 준비가 된다.
그 상태가 되면 더 이상 세간에 관심을 끊고 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을 하려면 최소한 밥은 해결해야 한다.
아무리 수행을 해도 식사 문제 해결이 중요하다.
그래서 일단 그것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이 수행자와 세간을 서로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된다.
수행자가 식사문제를 세간에 의존한다.
세간에서 수행자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식사를 공양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수행자가 쌓은 공덕은 그렇게 공양한 세간의 몫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행자의 구걸은 세간에서 복을 심는 밭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 이를 통해 수행자는 세간과 접하게 된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수행을 통해 얻은 가르침과 불법을 세간에 베풀어 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수행자와 세간이 서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서로 베풂으로써
서로 선업을 쌓고 무량한 복덕을 받게 된다.

그래서 밥문제 해결은 수행자에게 중요하다.
그래서 많은 법수가운데 제일 먼저 나열된다.

이런 내용은 지혜 제일인 사리자 존자가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후배 스님들에게 가르치는 기본적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리얼 킬러인 앙굴마라가 처음 성문 스님에게 가르치는 이런 내용을
위와 같이 바꿔 제시한다.

사실 앙굴마라는 시리얼 킬러로 활동하기 이전에는 대단히 뛰어난 학자였다고 전한다.
그래서 수행을 시작한 이후 신속하게 아라한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앙굴마라가
수행자들이 처음 배우게 되는 그런 내용들이 옳은 내용이 아니라고 제시한다.

즉, 올바른 깨달음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또 다시 혼동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반전에 반전이 계속 이어진다.

이 내용을 이해하려면
여래장에 대한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여래장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는데 중요하다.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에서
속이빈 움집, 태(胎 garbha), 태아(胎兒)를 의미한다.
또 범어 ālaya를 한문으로 장(藏)이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다. (아뢰야식, 장식)
이 경우는 집의 의미를 갖는다.
piṭaka 를 한문으로 장(藏)이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다. (율장, 보살장)
이 경우는 창고의 의미를 갖는다.
kośa 를 또 한문으로 장(藏)이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용기나 견실함, 포함 등의 뜻을 갖는다.

한자 藏 은 일반적으로는 창고의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집적 처축 포함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본래 범어에서 다른 단어들을 장(藏)이라고 번역하였으므로, 조금씩 의미를 구분할 필요도 있다.


심지어 한글로 장이라고 하면, 위장, 소장, 대장 등의 장기의 장(腸)를 연상하기도 쉽다. ,
그래서 각 경우 조금씩 의미를 혼동할 수 있다.

그런데 여래장, 즉, 여래의 태란 무슨 의미인가.
장차 여래가 될 태아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연쇄살인범 앙굴마라가 갑자기 아라한이 되고 또 여래가 되는가.
이 문제를 여기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사현실에서 거리를 어떤 이가 거닌다고 하자.
앞에 영희와 철수가 다가온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수없이 오간다.
그리고 자신이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이 때 영희는 어디 있고 자신은 어디 있는가를 손으로 가리켜 보라고 요청한다고 하자.
대부분 손으로 각 부분을 잘 가리킬 수 있다.
이 때 그 부분을 잘 붙잡아 두자.

사실 이 부분은 그가 생각하는 영희나 철수 또는 자신이 아니다.
그 몸도 아니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대부분 이렇게 여기고 그 각 부분을 대한다.
이것이 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그런 가운데 만일 부처님이 현재 계신다면 부처님도 그렇게 가리킬 수 있다.

이 상황에서 각 주체는 그 각 부분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영희는 영희다. 철수가 아니다. 또 나도 아니다. 부처님도 아니다.
철수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소, 양, 돼지, 닭 그리고 부처님을 놓고 손으로 가리킨다고 해보자.
이 경우 각 부분은 그처럼 각기 다른 존재다.
소는 소이고 부처가 아니다.
부처도 부처이고 소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 가운데 그 각 부분을 그처럼 손으로 가리킬 수 있다.
현실에서 이처럼 상을 취해 임하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활동하거나 살아가기 힘들다.
그런데 이것이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욕계 상황이다.

여기서 부처님의 본 정체를 파악하는 문제가 있다.
자신이 어떤 부분을 부처님으로 가리켰다고 하자.
그런 부분의 본 정체는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우선 첫번째 문제가 있다.
생사현실에서 일정부분을 소라고 가리키고 다른 일정부분은 부처님으로 가리켰다고 하자.
이 경우 일정 부분은 왜 소라고 하고 또 일정부분은 왜 부처라고 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영희나 철수 자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부분은 일정한 모습과 성품을 갖는다.
소부분은 소만 갖는 일정한 품성이 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은 예를 들어 32상 80 종호라는 몸의 특성을 갖는다.
또한 10 력을 가진 존재다.
쉽게 말해서 소에게 길을 물어 보면 답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은 세상에서 생사를 벗어나는 방안까지도 알려주신다.
그 각 부분은 생사현실에서 이런 차이가 있다.

그러니, 그 각 부분을 서로 달리 구분해 분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 모두가 망집에 바탕한 분별이다.

부처님이 그런 특성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그 특성은 결국 망집 안에서 그런 망집을 벗어나게 해주는 특성들이다.
즉 중생들에게 올바른 깨달음을 전해주고 생사를 벗어나게 해주는 특성을 갖고 있다.

현실에서 다른 부분들은 그렇지 못하다.
만일 소나 바위 부분을 대한다면 그 부분을 붙잡고 아무리 물어보아도
인과나 계율, 정려, 반야 지혜에 관한 내용은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르다.

그런데 부처님이 가르쳐준 내용은 위와 같은 내용이 망상분별이라는 점이다.
즉 부처님은 그런 설법을 통해서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런 내용들을 통해 본 바탕에는 그런 생멸이나 생사고통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이제 이 문제를 다음처럼 살펴보자.

철수가 낮잠을 잤다.
그래서 자면서 바다에 가서 배를 타고 무인도에 갔다.
무인도에서 황금을 발견해서 창고에 가득 넣어 두었다.
그런데 해적이 나타나서 자신을 묶어 절벽에서 떨어뜨렸다고 하자.

여기서 잠을 깼다.
이제 철수가 본 황금과 해적의 본 정체는
침대 안에서 무엇들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것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부처님이나 여래라고 손으로 가리키는 분은
본 바탕에서는 그 정체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눈을 떠서 철수나 자기 자신으로 보는 부분은
다음 그림에서 1 부분에 그려져 있다.




[img8]
08pfl--image/8식-8.jpg



즉 현실에서 어떤 이가 각 부분을 영희, 철수, 자신, 소, 돼지, 부처님 등으로 여기고
대하게 되는 배경은 위 그림과 같다.

즉 위와 같은 각 정신이 중첩되어진 바탕에서
그런 정신 구조와 기제로 인해 현실에서 그처럼 임하게 된다.

결국 위 그림으로 표시한 제 1,2,3,4,5,6,7,8 식의 구조가
현실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켜 임하게 한 배경이다.
그런 배경에서 각 주체는 현실에서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나 영희, 소, 바위, 등으로 여기고 취하게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그처럼 스스로 자신이나 영희, 소, 바위 등으로 여기고 대한 부분의 본 정체는
또 위와 같은 구조와 기제로 된 것이다.

현실에서 눈으로 본 어떤 모습은 소리나, 향을 얻는 영역에서는 얻지 못한다.
그 외 나머지 영역에서도 그 사정이 같다.
본 바탕 실재 영역도 사정이 같다.

그래서 생사고통 등의 문제는 위와 같은 정신 기제에서 망집을 일으킨 후
그 망집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나 부처님 영희 돼지의 본 정체를 관한다고 하자.
그래서 이를 잘 관하고 이것을 잘 이해하면 그런 망집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망집에서 벗어나고 수행을 행해 업장을 제거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생사의 묶임에서도 풀려나 벗어나게 된다.

그런 다음에 다시 이런 상태에 있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현실에 임한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그런 생사현실에서 그렇게 다른 중생을
잘 제도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른 경우가 바로 부처다.
생사현실에서 대하는 부처는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그 부처의 본 정체도 위와 같은 바탕에 있다.

다만 그 경우는 위와 같은 사정을 잘 파악하고
수행에 정진한 결과,
그 주체의 정신 구조나 기제가
다른 범부와는 달리 더 이상,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키지 않은 상태인 것 뿐이다.

그렇다 해도 그 본 정체가 다른 경우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범부나 일반 중생이 위와 같은 정신구조와 기제에서 망집을 일으킨 상태라면
그런 망집을 벗어난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관계를 잘 살피면
도대체 무엇을 여래의 태아라고 관하는가를 음미할 수 있다.










[img9]
08pfl--image/8식-9.jpg



우선 한 주체의 제 1~8 식과 본 바탕 실재를 놓고 이 관계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래 생사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은 이들 각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본래 이들 실재와 근본 정신 자체는 생사고통을 벗어나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제 6 의식 분별 영역에서 일정한 명칭을 붙여 분별할 뿐이다.
그래서 앙굴마라가 이 점을 들어 명과 색의 관계에 대해
경전에서 내용을 제시한 것이다.

결국 그런 상태에서 수행을 행하면, 결국 망집을 제거하게 된다.
그리고 점차 수행하면 생사 묶임에서 벗어나고, 또 성불하는데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를 결국 부처가 태어나게 되는 태와 같은 것으로 이들을 관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중생은 다 이와 같은 구조에 놓여 있다. 
그래서 대단히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모든 중생을 그 상태 그대로 모두 여래라고 칭하는 것은 또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여래라는 명칭은 단순히 중생을 가리키는 명칭일 뿐이다. 
또 그렇다면 그 사정은 영희, 철수, 소, 양, 돼지, 닭의 명칭도 마찬가지가 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구조를 모두 갖는 것은 모든 생명이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 어떤 경우는 부처나 여래라 칭한다. 
또 어떤 경우는 영희나 철수라고도 칭한다. 
또 어떤 경우는 소,양,돼지, 닭이라고도 칭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모든 중생이 본 바탕에 차별이 없다는 측면만으로 모든 생명을 여래라고 칭할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같은 사정으로 모든 생명을 닭이나 돼지라고도 칭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부처나 여래라고 칭할 때는 단지 그런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다. 
생사현실에서 부처나 여래만 갖는 독특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중생이 그렇게 될 가능성을 그 안에 내재하고 지니고 있다. 
그 사정이 위와 같다. 
그러나 아직 그 상태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아이가 태 안에 있어서 곧 출산할 상태와 같다. 
그런 뜻을 갖는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무시무종의 시간대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처음 현실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붙잡아 상을 취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것은 무상하다. 
그러나 본 바탕 실재를 비롯해서 한 주체의 근본정신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 
이런 점들을 여래의 태의 문제와 함께 잘 살펴야 한다. 





◎◎[개별논의] ❋본문









★1★





◆vjxi3131

◈Lab value 불기2565/07/01


○ 2020_0907_143233_can_ct9.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eter-Paul-Rubens-the-martyrdom-of-st-sebastian




○ 2020_0525_165704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osshill_level_crossing_-_geograph.org.uk_-_1252889




♥Château de Lastours ,France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Description English: Lastours, Aude, France - Lastours Castles. Français : Lastours (Aude, France) - Châteaux de Lastours. Author --Pinpin 17: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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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Aznavour - J'ai Perdu La Tete

♥단상♥방관과 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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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d8--불교단상_2565_07.txt ☞◆vjxi3131
불기2565-07-01
θ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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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천(長壽天)
재계(齋戒)
적문(迹門)
전념(專念)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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