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고승전』
K1075
T2060
제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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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승전』
♣1075-017♧
제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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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續高僧傳卷第十七
K1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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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승전 제17권
당 석도선 편찬
이창섭 번역
3. 습선편 ② [本傳 11명, 附見 9명]
1) 주나라 면양(湎陽) 선성사(仙城寺) 선광사(善光寺) 석혜명전(釋慧命傳)혜랑(慧朗) 대규(戴逵) 혜효(慧暁)
2) 진나라 남악(南岳) 형산(衡山) 석혜사전(釋慧思傳)
3) 수(隨)나라 국사(國師) 지자(智者) 석지의전(釋智顗傳)
4) 수나라 수도 청선사(淸禪寺) 석담숭전(釋曇崇傳)
5) 수나라 혜일내도량(慧日內道場) 석혜월전(釋慧越傳)
6) 수나라 장주(蔣州) 이도사(履道寺) 석혜실전(釋慧實傳)
7) 수나라 문성군(文成郡) 마두산(馬頭山) 석승선전(釋僧善傳)승습(僧襲) 승집(僧集)
8) 수나라 상주(相州) 업하(鄴下) 석현경전(釋玄景傳)현각(玄覺)
9) 수나라 조군(趙郡) 장홍산(障洪山) 석지순전(釋智舜傳)지찬(智賛)
10) 수나라 구강(九江) 여산(廬山) 대림사(大林寺) 석지개전(釋智鍇傳)
11) 수나라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 석지월전(釋智越傳)파야(波若),
법언(法彦)
1) 주나라 면양(湎陽) 선성사(仙城寺) 선광사(善光寺) 석혜명전(釋慧 命傳)혜랑(慧朗) 대규(戴逵) 혜효(慧暁)
혜명은 속성이 곽씨(郭氏)이며 태원(太原) 진양(晋陽) 사람이다.
진나라 때 징사(徵士)였던 곽기(郭琦)의 후손으로 양(梁)나라 대통(大通) 5년 신해 년에 상주(湘州) 장사군(長沙郡)에서 태어났다.
그의 천성적인 영준한 자태는 보통사람들과는 빼어나게 달랐으며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남다르게 여겼다.
그는 동심에서 벗어나면서부터는 자기 몸에 광명을 달아서인지 조목과 차례를 환히 깨닫고 아주 높은 학식을 소유하였다.
당시 상주 부근의 이름 있는 고승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진(珍) 스님은 그 지위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나 여래의 방으로 들어갈 사람은 혜명일 것이다.”
그리하여 상투를 틀 때부터 날마다 그의 깨달음은 새로워졌으며 8세 때는 시서(詩書)에 능하였고 체모는 웅대하여 식견 있는 사람들은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세심하고 부지런히 닦고 익혀 깊은 이치에 잘 들어갔다.
이 때문에 이치에 대한 분석은 문장의 테두리를 벗어났고 살펴보는 것도 기틀을 벗어났다.
그는 지혜로웠지만 어리석은 자를 놀라게 하지 않았고 그의 곧은 마음은 세속과 끊어진 적이 없었고 도(道)와는 친숙하였지만 외물(外物)과는 멀리하였다.
그래서 고을과 마을에서는 모두 그를 찬양하였고 중히 여겼다.
15세 때 『법화경』을 외우기 시작하여 25일 만에 전부 그 일을 끝마쳤으며 머리를 깎고도 고정된 스승이 없이 배웠고 오로지 방등경과 『보현관경』을 가지고 참회하였으며 『화엄경』에 근거하여 도를 밝혔다.
그후에 그는 양양(襄陽)과 면수(沔水) 지방에서 유행의 길에 올랐는데 두 대선사(大禪師) 은광(恩光)과 선로(先路)에게 천리 밖에서도 찾아가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곧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따랐다.
후에 선성산(仙城山)으로 갔는데 그곳은 본래 옛날의 송선사(松仙寺)가 있던 곳이었다.
여기에는 맹수(孟壽)라는 도사가 처음 살았는데 여러 해 동안 여기에 숨어살면서 빌고 빌어 마음을 바른 길로 돌려 세우니 끝내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는 자기가 살던 집을 희사하여 사원과 탑을 세우는 비용으로 썼다.
혜명이 이 산에 이르기 전 어느 날 저녁 맹수는 꿈 같은 황홀경 속에 신(神)들이 집 주위를 엄하게 호위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희한한 광경에 깜짝 놀라 바위 위에 올라가 멀리를 바라보니 문득 인도의 승려들이 수림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보였는데 그때 마침 혜명이 당도하였다.
맹수는 달려가서 예의를 갖추고 맞아들이고는 자기가 살던 곳을 희사하여 선광사(善光寺)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공양하려고 구름같이 밀려오고 많은 승려들도 모여왔다.
말년에 그 고을의 경내에서 『유마경(維摩經)』을 강의하였는데 대승을 타고 가는 나루터와 도에 들어가 현묘한 이치에 대한 자취,
선종의 지혜로 가리키는 곳에 대하여 그것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90일을 채우고 4부의 사람들에게 사례하고 옷과 발우를 지니고 시종을 따라 옛 수림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법음(法音) 선사가 있었는데 그는 같은 군(郡)인 기현(祁縣) 사람이며 속성은 왕씨(王氏)였다.
그와 이미 알고 있는 사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마침내 벗이 되었다.
그들은 함께 장사(長沙) 과원사(果願寺)의 능(能) 선사에게 가서 선정을 배우고 익혔다.
수십 일도 못 되어 법문이 계발되면서 본질상 의문 나는 점을 묻고 사유하여 다시 열어나갔는데 바른 이치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덕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로 하였다.
그래서 강남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북(河北) 끝까지 돌아다니며 사(思)와 막(邈) 두 선사를 만나서야 비로소 막혔던 의문을 풀게 되었다.
그후 그들은 선성산에 함께 돌아가 겨우 5년을 살았는데 자기들이 죽을 날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곧 법음의 손을 잡고 솔밭에서 서로 웃으며 “이 두 곳이야말로 생을 마칠 만한 곳이로다”라고 말하였다.
시자(侍者)들은 처음 이 소리를 듣고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보름도 못 되어 동시에 병을 만났다.
혜명은 주(周)나라 천화(天和) 3년 11월 5일 흐트러지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똑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서쪽을 향해 염불하면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이 보이는지 합장하고 생을 마쳤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하늘신이 땅에 내려오고 깃발들이 빛을 받아 밝아진 꿈을 꾸었으며,
또 방에서 “착하도다”라고 울리는 소리를 들었고 기이한 향기를 맡고 특이한 음악을 들었는데 이러한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법음은 그달 17일에 본래 거처하던 곳에 앉아서 생을 마쳤는데 나타난 상서로운 현상들은 대체로 혜명의 최후와 비슷하였다.
그리고 혜명과 법음 두 현자는 모두 나이가 38세였다.
그래서 나무 아래에 벽돌로 분묘를 만들어 안장하고 제자인 청신사(淸信士) 정자문(鄭子文)은 사원에 비석을 세웠다.
혜랑(慧朗)
제자인 혜랑은 혜명의 행업을 이어받고 전하여 그의 선정의 기풍을 떨어뜨리지 않았고 안주(安州)와 면수(沔水) 지방에서 교화를 하여 수나라 시대에 도를 밝혔다.
처음 혜명과 혜사(慧思)는 동시에 선정을 닦았는데 형산(衡山)과 초(楚)지방에서는 그들에 대한 찬양이 높았다.
문채가 고결하고 아름답기는 혜명이 혜사보다 낫다.
그는 선정에 깊이 들어가 지혜와 명성이 멀리까지 퍼졌으며 『대품의장(大品義章)』ㆍ『융심론(融心論)』ㆍ『환원경(還原鏡)』ㆍ『행로난(行路難)』ㆍ『상현부(詳玄賦)』 등의 책을 써서 불교의 이치를 통틀어 저술하였는데 식견 있는 자들은 모두 이 글을 외웠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간혹 숨었거나 빠진 내용이 있어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이에 대하여 주석하고 해석해 놓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종지로서 귀하게 여겼다.
그가 산속의 사원에서 살게 되자 학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그의 이름은 남북에 널리 퍼졌다.
대규(戴逵)
보살계(菩薩戒)를 받은 제자로서 제북(濟北)에 사는 대규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학문의 명성이 일찍이 세상에 퍼졌으니 그 이름은 열국(列國)에 드높았다.
그는 혜명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생각해보면 위수[渭]는 맑고 경수(涇水)는 흐리지만 다 같이 조종(朝宗)의 근원에 합쳐지고 소나무는 길고 화살은 짧지만 다 같이 굳고 곧은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행히 유정들 속에 들고 보니 5륜[五常]의 이치는 3강[三敎]의 범위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궐리(闕里:공자의 고향마을)의 유동(儒童)은 수수(洙水)와 제수(濟水) 일대에서 예경(禮經)을 천명하였고 고현(苦縣)의 가섭(迦葉)은 유사(流沙) 일대로 미묘한 도를 옮겼습니다.
비록 천지를 조롱 속에 단단히 가두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대체로 하나의 세계에 국한된 것인데 어떻게 녹야원에서 법륜을 일으켜 영취산에서 허망한 생각을 쓸어버린 일만이야 하겠습니까?
반교와 만교[半滿]가 출현하여 방편과 실상이 뚜렷이 밝혀졌으니 참으로 가르침에는 깊고 얕음이 있어도 사람에게는 내외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선사는 공덕과 명성을 멀리까지 떨쳤고 행실이 고결하여 사람들 속에서 뛰어났으며 네 가지 이치에 의지하는 것을 터득하고 양(洋)을 기르며 독송을 완성하였고 보따리를 짊어지고 천릿길을 가며 용궁을 거쳐 세계를 감싸 안았습니다.
때문에 안으로는 9부의 경전들을 꿰뚫어 설산의 비밀 창고를 찾아냈고 밖으로는 7략(略)을 겸비하여 벽수(壁水)의 많은 고전들을 탐구하였습니다.
지둔(支遁)은 천태산의 비명[銘]을 지었고 축진(竺眞)은 나부산(羅浮山)의 기문[記]을 썼으며 담(曇)은 7령(嶺)을 노래로 읊었고 태(汰)는 3하(河)를 시로 읊었으며 보(寶)는 『장자(莊子)』를 기묘하게 해석하였고 거공(璩公)은 『논표집(論表集)』을 저술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을 그대는 운몽(雲蒙)못의 물을 다 마신 듯이 하였고 손바닥을 보듯이 하였습니다.
또한 청정한 계율을 지닌 것이 밝은 구슬을 보호하듯이 하였고 율의를 지키는 것이 큰 거울에 마주 선 사람 같습니다.
나운(羅云)의 밀행(密行)을 받아 지니고 빈두(賓頭)의 복전에 뜻을 심었으며 정수(定水)를 어루만지며 곧 각관(覺觀)에 올라 선(禪)의 가지로 높이 그늘을 만들어 장차 희사(喜捨)의 고개를 넘으려고 하십니다.
이 때문에 소상(瀟湘)의 땅도 멀다고 하지 않고 면수의 물에 몸소 오셨고 용천사(龍泉寺)에 지팡이를 꽂으시고 그곳을 정사로 삼으셨으며 수레와 말머리를 돌려서 사원을 세우시고 높은 고개를 뚫어 감실을 만드셨으니 누가 이렇게 모래를 모아 탑을 세우고 산에 살면서 사원을 세우며 누가 수고를 무릅쓰고 돈을 뿌려 땅을 샀겠습니까?
그리하여 개사(開士)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니 소맷자락은 꽃그늘과 같았고 승려들과 벗들은 서로 부딪칠 정도여서 마치 제(齊)나라 직하(稷下)에 학자들이 모여든 것과 같았으며,
선실(禪室)에서 새벽에 일어나시면 두약(杜若)꽃이 피었을 때와 같았고 탑을 저녁에 열면 잠시 무릉도원에 들어간 것 같았으며 향산(香山)의 범종 소리의 메아리는 완함(阮咸)의 휘파람 소리와 함께 울렸고 불일전(佛日展)의 미묘한 소리는 손작(孫綽)의 거문고와 같이 높은 운치를 지녔습니다.
자줏빛 일산은 곧은 소나무와 같아 뛰어난 말재주를 끌어냈으며 널따란 절벽과 신비로운 우물은 고상한 마음을 빛나게 하였습니다.
때문에 재주는 산을 살만하고 공덕은 임금의 수레와 같이 뛰어났으며 높은 봉우리와 같은 아름다운 행위는 아득한 절벽과 같습니다.
제자는 업풍(業風)에 생각이 북받쳐 몸은 욕망의 바다에 잠겼으며 저궁(渚宮)에 빠진 지는 24년이나 지났습니다.
낮에는 무료하게 앉아만 있고 밤에는 놀라운 꿈에 슬퍼서 아직 너와 나의 생각을 잊어버리지 못했으며 수레를 1승(乘)으로 돌려 마음속의 번뇌를 완전히 쓸어내고 3명[三逹]을 밝게 열지 못하였습니다.
쥐가 등나무를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욱더 장안에 갇힌 새처럼 된 것이 슬퍼집니다.
이전에 15세 나이에 집에서 전해오던 책을 물려받아 5례(禮)로 더욱 부드러워지고 3현(玄)을 싫도록 배웠으며 자못 책 끈이 끊어지면 공자처럼 가죽으로 다시 만들어 남은 실마리까지 이었습니다.
20세가 되어서는 제자백가의 설을 주워 모았고 그후 벼슬에 종사하면서 문장과 필묵에 매달렸으며 비록 용문(龍門)1)을 찾지는 못하였지만 회계산(會稽山)에 사다리를 놓아 뱁새를 노래하고 앵무부(鸚鵡賦)를 읊었습니다.
만약 그 한 부분만 구했더라도 옛사람과 비슷할 수 있었지만 다만 사람의 몸은 거품 덩어리와 같다는 것을 깊이 뉘우쳤으며 서로 만나는 것을 마음속으로 슬퍼해서 항상 매미처럼 속세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진여의 맛을 탐냈습니다.
어느 날 운성(隕城)에서 도를 닦는 것을 허락받고 외관(隗館)에서 무릎을 땅에 대니 서로 연계를 맺게 되어 마음이 기뻤습니다.
서로 만나서 함께 다녔지만 옷깃을 다 열기도 전에 갑자기 바람에 나부끼듯 헤어진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뒤이어 속세의 그물에서 옷을 털고 나왔고 신에 달린 끈에서 벗어나 푸른 물에 갓끈을 씻었으며 한음(漢陰)에서 단지를 안고 구전단약[九轉:신선이 되는 약]을 먹으며 수행함으로써 어두운 근심을 없애가니 점차 3공(空)을 깨닫고 괴로움을 참는 경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신선의 다리에서 구슬을 관찰하고 스승을 따르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며 깊은 산골에서 복숭아나무를 꺾었으나 청익(請益)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미천(彌天:道安)이 뛰어난 기개로 습착치(習鑿歯)에게 대답한 것처럼 하고 안문(雁門:慧遠)이 높은 이론으로 때때로 좋은 손님들과 화답한 것처럼 해 주십시오.
겨울날치고는 봄날처럼 따뜻하지만 깨끗한 몸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방은 가까우나 사람은 멀어서 더욱 옷깃과 허리띠에 슬픔만 더해집니다.
나머지 말은 시시하고 간단한 사연뿐이니 바라건대 금옥이 숲 속에 묻히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에 대하여 혜명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사문 석혜명은 제북(濟北)의 대규 선생에게 답서를 드립니다.
대체로 하나의 진여[眞]는 항상 담연하고 미묘합니다.
이 하나의 이치로 모든 성인들이 기회를 타지만 그것을 어기거나 따르는 데에 따라 그 자취가 다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서쪽 관문에서 노자는 도를 밝히고 동쪽 평야에서 공자가 인(仁)을 이야기하였지만 다듬거나 소박한 점에서 솜씨가 바뀌고 유(有)와 무(無)에서 그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지금 이 두 가지 문을 합쳐서 두 가지 교리의 근원을 따진다면 어찌 종지가 3전(轉)에 귀착되어 5승(乘)에 모여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얕은 곳을 통하여 깊은 곳으로 가고 방편의 도움으로 진실을 나타내는 것은 마치 연못의 물을 네 가지로 나눈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이름이 다르지만 바다는 8개의 강물을 끌어들이면서도 끝내 다른 맛이 없습니다.
시주께서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를 지녀 일찍이 많은 서적을 통달하였고 화려한 문장은 세상에서 탁월하여 그 슬기로운 성취로 현문에 참여하였으며 지혜는 5명(明)을 포섭하셨고 학문은 3교(敎)를 겸비하셨습니다.
이것을 더욱 늘이시면 잊어버리는 것이 안생(顏生:顏回)의 뛰어난 발자취를 밟을 수 있고 손상시키면 도교가 되어 이씨(李氏:老子)의 현묘한 발자취를 흠모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6경(經)과 제자백가에 해박하고 풍부하더라도 성인과 현인은 기준이 다르고 유묵(儒墨)의 흐름은 갈라지니 간혹 사적은 비었어도 문채는 많은 경우가 있고 말재간은 높으나 요지는 먼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병에 담듯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고 마치 강물이 흘러가듯 말씀하시니 밝은 거울은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큰 종은 두드리는 사람에게 맡겨두는 것이어서 자건(子建:楊雄)은 기이한 문장에 고개 숙이고 장경(長卿:司馬相如)은 그 높은 취지에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때문에 진(秦)나라와 초(楚)나라가 갈라지고 주(周)나라와 양(梁)나라가 풍속을 바꾸었어도 백미(白眉)와 청개(靑蓋),
거북 껍데기와 구슬의 가치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나무에 앉은 봉황새이며 누워 있는 용이어서 물고기와 물의 사이와 다르지 않으며 더구나 지식으로 고통이 공이라는 것을 비쳐보고 마음으로 어지러운 속세를 배척하니 몸은 비록 조정의 벼슬자리에 있으나 재능은 강호(江湖)에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선생은 몸을 이끄는 끈에 탄식을 보냈고 속세의 그물을 말씀하였으니 그 문장은 응탕(應瑒)과 육가(陸賈)와 같고 그 품위는 장욱(張旭)이나 엄광(嚴光)과 일치합니다.
화재가 갑자기 퍼지는 것을 슬퍼하고 맑은 물이 속히 흘러가버리는 것을 애달프게 여겨 곧 물에 발을 씻고 길을 따라 귀를 씻으며 부귀영화와 이별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전단약으로 빈 배를 채우고 상산사호의 부채[四扇]로 병을 몰아내었으며 그후 8정도(正道)를 찾아 하나의 진여를 맛보고 열 가지 속박에서 해탈하였으며 세 가지 근심[三患]을 털어버렸으니 이 공덕이야말로 어찌 지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빈도(貧道)는 6식의 거울[識鏡]을 닦게 하기 어렵고 마음은 먼지에 응결되기 쉬우며 선정의 경지는 꽃이나 물에 부끄럽고 계율은 풀로 매어둔 것보다 못합니다.
재주는 촛불을 끈 상태와 같고 학문은 법을 전하는 데서 떠났으니 안으로는 덕이 큰 사람들에게 부끄럽고 밖으로는 인간세상에 익숙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한 언덕에 머물러서 몸은 갈밭이나 버들 가에 있었으며 천길 절벽 위에 단정히 앉아 뜻을 대나무나 소나무에 의탁하고 4계절을 바람과 서리를 보고 알았으며 한 달 30일을 그믐달을 보고 아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밤에는 산새들의 울음을 듣고 곧 9성(成)의 공을 세우고 낮에는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면서 2자(子:莊子와 惠子)의 학문을 따르고 있습니다.
오두막집과 낡은 옷은 이미 원래부터 있던 것이어서 그다지 슬픈 것은 아니며 주문(朱門:大官)에 매어둔 사두마차[駟]는 나에게 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개탄한 것처럼 등서(䕨䑕)는 침범하기 쉽고 나무 위의 원숭이는 가만히 있기 어려운데 수고로이 영취산마루를 생각하고 고달프게 계족산(鷄足山)을 생각하였습니다.
수림 속에 낙엽 지니 이전에 홀로 깨달은 지혜는 없었고 골짜기에 봄 종다리가 우짖으니 듣는 것이 적다는 한탄은 끝내 끊어질 것입니다.
갑자기 문안 편지를 받고 빛나고 영예로운 구절을 보았습니다.
그윽한 기운은 난초와 같고 맑은 소리는 구슬과 같아서 정성껏 다시 한 번 읽어보며 환성을 올렸지만 사실은 가슴에 손을 얹어 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천지(天池)를 떠났다는 것은 알았으나 북명(北溟)2)의 이야기를 분별하지 못하니 사정은 진흙탕의 우물과 같아서 동해(東海)의 이야기를 듣기가 부끄럽습니다.
바라건대 그대가 저를 좋아한다면 황석공(黃石公:神仙)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니 내일 아침에 기약을 맺어 흰 망아지의 고삐를 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아침을 기다리면서 그 청아한 계획을 공경하려고 합니다.”
당시 이것을 소박한 편지라고 하여 말이 마음을 씻어내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회답하자면 어떻게 문장을 펴나가야 하겠는가?
또 어떤 사람은 대규를 진대(晋代 )때 초국(譙國)의 대규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의 행적을 비교하여 고증하니 그것이 아니었다.
『진서(晋書)』에 이르기를 “『태원(太元) 12년에 은사(陰士) 대규를 불렀는데 오래지 않아 생을 마쳤다”고 하였다.
이것은 양나라 대통(大通) 3년과는 143년이나 지난 것이니 혜명이 살아 있을 때를 계산하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대규는 제북(濟北)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혜효(慧曉)
당시 혜효라는 사문이 있었는데 그의 속성은 부씨(傅氏)였다.
그 역시 선정을 닦는데 공력을 바쳤고 글재주도 혜명 다음으로 뛰어났다.
북쪽 제(齊)나라 땅을 돌아다니다가 영암사(靈巖寺)에 거처하여 수십 년 동안 아주 한적한 곳에서 선정을 닦았으나 사람들은 조금도 남다르게 여기지 않았다.
그후 마을사람들 속에 산을 지킬 임무를 맡은 사람이 있어 혜효는 그 지방을 떠났다.
그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 친척들의 안부를 물어볼 생각으로 현문(縣門)까지 가서는 사람을 시켜 현령에게 통지하였다.
현령은 그때 바로 손님들을 접대하느라고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통인에게 재촉하였지만 손님들이 돌아가지 않아 현령은 또 그것을 연기시켰다.
그때 혜효는 깨달은 바가 있어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현령이 들어오라거나 물러가라고 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직 내 마음에 사랑과 증오가 있어서일 뿐이다.
어찌 고향 땅을 가슴속에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일 보는 사람에게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이르고 석자부(釋子賦)를 지었는데 종이가 다하자 글도 끝났다.
그러고 나서 “만약 현령이 찾거든 이 글을 보여주라.
나는 떠난다”고 하고는 은둔하였는데 그는 부(賦)에 이렇게 썼다.
“아차,
내가 생각을 못하고 있다가 문득 다시금 깨달은 것 있으니 바로 이것이로구나.”
그후 영암사를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으며 그 부를 꺼내 승려들에게 보이고 나서야 곧 혜효의 재능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한 본을 건사하여 인색한 마음을 없애도록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았다.
혜효는 그후 여러 명산들을 찾아다니며 바탕을 수양하고 마음을 안착시켰다.
때로는 인간세상을 살펴보기도 하였지만 다시 한적한 언덕에 몸을 숨겨서 끝내 그가 어디서 생을 마쳤는지 알 수 없다.
석혜사(釋慧思)
혜사는 속성이 이씨(李氏)이며 무진(武津)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넓은 아량을 지녔고 아이들을 사랑하여 이름이 알려졌으며 마을에서는 그가 남모르게 부지런히 배우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어느 날 그는 범승(梵僧)이 속세를 벗어나라고 권고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이것이 상서로운 조짐이라는 것을 깨닫고 부모와 이별하고 불도에 귀의하였는데 그가 들어간 사원이 아란야[練若]는 아니었다.
그는 자주 신승(神僧)들이 재계(齋戒)를 하라고 가르치는 감응이 있어 그것을 받들어 간직하고 본래의 마음을 지키니 깨끗한 행실은 청정하고 신중하였다.
구족계를 받게 되자 도에 대한 뜻이 더욱 높아져 아주 고요한 곳에서 살면서 항상 좌선하며 업을 쌓았다.
하루에 한 끼씩 먹으면서 다른 공양을 받지 않았고,
일을 주선하거나 손님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일은 모두 끊고 『법화경』 등 30여 권의 경전을 몇 년 사이에 1천 번이나 두루 외웠다.
그가 살던 암자를 야인(野人)들이 불을 질렀는데,
그들에게 질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정성껏 잘못을 빌며 참회하여서야 용서를 해 주었는데 그가 다시 초가집에서 살면서 경전을 받아 지니고 그것을 외우자 그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병이 나았다.
어느 날 그는 꿈을 꾸었는데 아름답고 기이한 복장을 한 수백 명의 범승들이 나타나났다.
그 가운데서 상좌(上坐)가 이렇게 명령하였다.
“네가 그 전에 받은 계율은 율의(律儀)가 뛰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것으로 어떻게 바른 도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이미 청정한 승려들을 만났으니 다시 단을 만들고 32명의 사승(師僧)들에게 빌어서 갈마법(羯磨法)을 원만히 갖추고 성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홀연히 놀라 잠에서 깨어난 그는 곧 꿈에서 계율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주 심도 있게 부지런히 노력하여 잡념을 이겨내고 오로지 높은 경지를 바라보며 저녁이나 새벽에도 그만두는 일이 없이 좌선과 독송을 이어가면서 그것을 항시적인 업으로 삼았다.
이러한 고행으로 말미암아 3생(生)에서 도를 닦아야 할 일들을 얻게 되었다.
또한 미륵보살과 아미타부처가 설법하여 깨우쳐 주는 꿈을 꾸고는 두 개의 불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다 공양하였다.
또 미륵보살을 따라가서 여러 권속들과 함께 용화수(龍華樹) 아래 모인 꿈을 꾸고는 마음속으로 “나는 석가모니의 말법시대에 『법화경』을 받아 지니고 있었더니 지금 미륵보살을 만나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슬픔에 잠겨 서럽게 울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고 더욱 정진하니 신통한 징조가 계속 나타났다.
그는 물병에 물을 가득 채워 공양하는 일을 엄하게 하였고 만약 천동(天童)의 시위(侍衛)가 있으면 『묘승정경(妙勝定經)』을 읽어서 선종의 공덕을 찬탄하였으며 곧 그렇게 마음을 내어 선지(禪支:선정에서 얻는 여러 단계의 경지)의 경지를 닦게 하였다.
당시 혜문(慧文) 선사가 있었는데 그에게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청정하고 정숙하여 도인들과 속인들이 모두 높이 숭상하였다.
그래서 혜사는 그에게 가서 귀의하여 바른 법을 받아 지녔다.
그는 굳은 절개를 좋아하였고 승단의 경영을 업으로 삼아 겨울과 여름 승려들에게 공양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밤낮으로 마음을 다잡아 보편적인 진리와 차별적인 현상을 생각하였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났지만 증득한 것이 없자 다음해의 여름에는 자신을 다잡고 앉아 있기만 하며 생각을 눈앞에 매두었더니 처음 21일 동안 약간의 고요한 관찰이 일어나면서 일생 동안의 선과 악한 행위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에 놀라고 감탄한 그는 다시 갑절로 용맹하게 정진하여 드디어 여덟 가지 감촉[八觸]이 움직여 첫 단계의 선정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선정의 장애가 갑자기 일어나 사지가 나른하고 약해지면서 잘 걸어 다니지도 못하고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관찰하면서 “내가 지금 병든 것은 모두 업보에서 생긴 것이며 행위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본래 외부의 경계에는 없는 것이다.
도리어 마음의 근원을 보면 행위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 몸이라는 것은 구름의 그림자와 같아서 형상은 있어도 본체는 공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관찰하고 나자 뒤바뀐 생각이 없어지고 마음의 본성이 청정해지면서 당하던 고통이 다 없어졌다.
또 공에 대한 선정을 시작하니 마음의 경계가 확연해졌다.
그러나 여름안거를 끝내고 한 해를 더 보냈지만 얻어지는 것이 없는 것을 개탄하고 우울증에 빠져 상심하였다.
그는 살아서 한 일 없이 허망하게 지낸 것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이 부끄러워 몸을 던지려고 절벽에 기대서려는데 등이 절벽에 채 닿기 전에 갑자기 마음이 열리며 깨달음이 생겼다.
그리하여 법화삼매(法華三昧)와 대승법문(大乘法門)을 단번에 통달하게 되었고,
16특승법(特勝法)ㆍ8배사(背捨)ㆍ5음(陰)ㆍ12입(入) 등을 남이 깨우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통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에 감(鑒) 선사와 최(最) 선사를 찾아가 자기가 증험한 것을 이야기하였더니 모두가 함께 기뻐하였다.
닦고 익히는 행위가 지속될수록 이미 전에 얻은 관(觀)이 더욱더 커져서 그의 명성은 멀리까지 퍼졌으며 사방에서 그의 덕망을 흠모하였고 학도들이 날로 많아졌으며 그로 인한 깨달음은 날로 빈번해졌다.
그래서 그는 대승과 소승 가운데 정(定)과 혜(慧) 등의 법으로 불법을 부흥시키고 비유를 써가며 자신과 남들도 다스렸다.
그러나 사람들 속에 정밀한 사람과 거친 사람도 끼어 있어 그들 속에서 시비가 일어나게 되었다.
원망과 질투로 하여 혜사를 짐독(鴪毒:짐새의 깃을 술에 담가서 우려낸 독)으로 독살하려고 하였으나 그 독으로도 해치지 못하여 다른 방법으로 일을 꾸몄으나 그 모해로도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큰 성인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떠도는 말[流言]을 면치 못하였다.
하물며 나야 덕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 책임은 전세에서 빚어진 것이니 때가 오면 반드시 받아야 하며 이것은 내 개인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 불법이 오래지 않아 멸망할 것인데 장차 어느 곳으로 가야 이 난리를 피할 수 있겠는가?”
이때 어두운 공중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만약 선정을 닦으려면 무당산(武當山)이나 남악(南岳)으로 가는 것이 좋다.
여기가 도에 들어가는 산이다.”
그래서 제(齊)나라 무성(武成)3) 연간 초엽에 이 숭산의 남쪽 땅을 등지고 문도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떠나 전 시대의 현인들이 살던 곳에 가서 숨어살려고 하였다.
처음 광주(光州)에 이르자 양(梁)나라 효원제(孝元帝)의 국란(國亂)을 당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수년간 지내는 사이에 그에게 귀의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저자와 같았다.
그러나 그곳은 진나라와 제나라의 변경이어서 군사들의 충돌이 자주 일어나 불법은 붕괴되고 5부의 대중들은 흩어져서 승단이 무너졌다.
그 속에서도 훌륭하고 특출한 사람들은 자기 생명은 가볍게 여기고 불법은 중히 여겼으며 저녁에 생을 마치는 것은 소홀히 생각하고 아침에 도를 듣는 것은 기쁘게 여겼다.
그리하여 서로 험한 산들을 넘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산과 숲을 메울 정도였다.
그래서 혜사는 그들에게 일을 돕는 것으로써 공양하고 진리를 맛보는 것으로써 그들을 가르쳤다.
또한 도인들과 속인들의 복된 보시로 금박으로 쓴 『반야경(般若經)』 27권과 금박으로 쓴 『법화경(法華經)』을 만들어 유리 보배 함에 보관하니 장엄하고 눈부시게 빛났으며 그 공덕이 특출하고 기이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일으켰다.
또한 이 두 경전의 강의를 청탁받으면 즉시 그 내용을 체계 잡아 글을 따라가며 끝까지 강의하였는데 밝은 진리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후 학사인 강릉(江陵)의 지의(智顗)에게 명하여 금자경(金字經)을 대신 강의하도록 하였는데 “한마음에 온갖 행위가 갖추어졌다[一心具萬行]”는 구절에 이르자 지의는 의문이 생겼다.
혜사는 그에게 해석해 주기를 “네가 조금 전에 의문을 가졌던 곳은 『대품경』에서 말하는 차제(次第)의 뜻일 뿐이지 『법화경』의 원돈(圓頓)의 종지는 아니다.
나도 이전에 여름안거를 하면서 뼈저리게 이것을 생각하다가 어느 날 밤 한순간에 이 모든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미 직접 증험한 일이니 의심을 가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지의는 『법화경』의 수행법을 자문하고 받아 지녔으나 서른일곱 가지 경계를 갑자기 펴나가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지의가 물었다.
“스님의 지위는 10지의 경지입니까?”
혜사가 대답하였다.
“아니다.
나는 10신(信)의 전륜성왕의 지위일 뿐이다.”
이때 지의는 그의 말이 사실인가 시험하였더니 그의 깨달음과 수행이 고명하였고 6근과 6식이 청정하였으며 모습은 처음 귀의한 것 같았지만 남몰래 높은 식견을 소유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인왕경(仁王經)』에서 말하는 10선(善)으로 마음을 일으켜 고통의 바다와 영원히 이별한 사람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물러서서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진실을 보고 있어 본적(本迹)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후 대소산에 있을 때 봉화(烽火)가 일고 경보(警報)가 빈번한 폐단이 있어 산속의 승려들도 당황하여 거기에 안착할 수 없었다.
그래서 40여 명의 승려들을 데리고 남악으로 갔는데 그때는 진(陳)나라 광대(光大) 2년 6월 22일이었다.
그는 남악에 이르자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이 산에 머무르는 것은 10년뿐일 것이다.
이 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멀리 떠나게 될 것이다.”
또 말하였다.
“나는 전세에 이곳을 밟아본 적이 있었다.”
이렇게 말하고 돌아다니다가 형양(衡陽)에 이르러 한 아름다운 곳을 만났다.
수림은 높이 솟고 샘은 정갈하여 보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혜사가 말하였다.
“여기는 옛 사원이다.
내가 옛날에 머무른 적이 있다.”
그의 말을 듣고 그곳을 파니 과연 승방과 불전의 터,
승단에서 쓰던 그릇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어느 바위 밑에 가서 말하였다.
“내가 여기서 좌선하는데 도적이 내 목을 베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여기에 나의 전신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 같이 찾아보니 곧 한 무더기의 마른 뼈들이 나왔고 그 밑을 자세히 찾아보니 유골이 발견되었다.
혜사는 이를 받들어 절하고 거기에 뛰어난 탑을 세웠는데 이것은 옛날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그가 전하는 일들을 보면 사실과 일치하였으며 그런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진(陳)나라 시대에 심학(心學)을 하던 자로부터 그의 종지에 귀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대승경론을 오래도록 강의하여 깨우쳐 주었기 때문에 사원의 집회를 알리게 되었고 날마다 그 명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외도들은 앙심을 품고 진나라 황제에게 밀고하였다.
“혜사는 북방의 승려로서 제나라의 모금을 받고 있는 것을 속이고 있으니 남악을 파헤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칙사가 산에 이르렀는데 두 마리의 범이 성나 부르짖는 것이 보였다.
칙사는 깜짝 놀라 물러갔다가 며칠 후에 다시 가보았다.
그런데 작은 벌들이 날아와 혜산의 이마에 침을 박으려고 하자 큰 벌이 날아와 작은 벌들을 물어 죽이고 혜사의 앞에서 그 대가리를 물고 날아가는 것이었다.
진나라 황제는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듣고 이 일에 다시는 마음 쓰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혜사를 모함하던 자들 중에 한 사람은 갑자기 죽었고 두 사람은 미친개에 물려 죽었는데,
이것은 벌들이 나타났던 징조가 사실로 증명된 것이었다.
황제는 이 영험한 감응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도읍으로 영접하여 서현사(栖玄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어느 날 그는 와관사(瓦官寺)로 가는 길에 비를 만났는데 옷은 젖지도 않았고 신발은 진흙땅을 밟아도 더러워지지 않았다.
승정(僧正)과 혜고(慧暠)를 비롯한 여러 학도들이 길에서 그를 만나보고 “이 사람은 신비로운 사람이다.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르렀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온 조정이 그를 주목하고 도인들과 속인들도 다 우러러보았다.
대도독(大都督) 오명철(吳明徹)은 그를 공경하고 존중한 나머지 소뿔 베개를 바쳤으며 별장(別將)인 하후(夏侯) 효위(孝威)는 사원을 찾아가 부지런히 예배하였다.
그는 가는 길에 “오의동(吳儀同:오명철의 字)이 바친 베개를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였는데,
혜사가 있는 곳에 이르러 절을 하려고 하자 혜사는 효위에게 “소뿔 베개를 보고 싶다면 가서 보아도 좋다”고 말하였다.
또 어느 날에는 갑자기 말소리가 울렸다.
“뜰과 집에 물을 뿌리고 청소하라.
성인이 곧 이곳에 오신다.”
이 말대로 잠시 후에 혜사가 도착하였다.
효위는 마음속으로 그를 우러르면서 이 일을 도인들과 속인들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귀인이나 천인,
도인이나 속인을 막론하고 그를 만류하지 못하여 사람과 배까지 바치고 강가에서 송별하였다.
이때 혜사는 말하였다.
“남악에 머무르는 것은 오직 10년뿐이다.
해수만 차면 곧 자리를 옮길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말뜻을 알지 못하였다.
산사로 돌아오자 진나라 황제는 해마다 세 가지 믿음으로 수고롭게 참배하였으며 공양한 물건들은 많이 쌓여 그의 명예는 더할 나위 없이 높아졌다.
그는 그전보다 배가로 설법하였는데 그의 신통과 특이한 기질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어떤 경우에는 작거나 큰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고요하게 몸을 감추기도 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특이한 향기와 기이한 색깔의 상서로운 징조들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생을 마칠 때가 되자 산정에서 산중턱에 있는 도량으로 내려와서 문하의 학도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는 매일 설법하면서 간절하게 책망하였더니 듣는 자들의 마음이 열렸다.
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만약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항상 법화삼매ㆍ반주삼매ㆍ염불삼매ㆍ방등삼매를 닦으며 참회하고 항상 앉아서 고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열 명만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필요한대로 내 스스로 공급해 주어 꼭 서로 이익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없다면 멀리 떠나겠다.”
그러나 고행하는 일이 어려워 끝내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생각도 거두고는 조용히 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이때 젊은 승려 운변(雲辯)이 혜사가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대성통곡하자 그가 갑자기 눈을 뜨고 말하였다.
“너는 악마다.
내가 떠나려고 하자 성인들이 줄지어 마중을 나와 내가 다시 태어날 곳을 토론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나를 방해하고 어지럽히는가?
어리석은 자야,
썩 나가라.”
그리고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단정히 앉아 생을 마쳤다.
이때 모두가 방에 가득한 기이한 향기를 맡았는데,
가보니 그의 정수리는 따뜻하고 몸은 부드러웠으며 안색은 평상시와 같았다.
이때는 진나라 태건(太建) 9년 6월 22일이었으며 그전에 말하였던 10년이라는 세월과 완전히 부합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강동(江東) 지방에서는 불법이 교종에 치우쳐 흥성거렸고 선정은 보잘것없는 상태였다.
혜사는 이 남쪽 땅의 사태를 개탄하고 선정과 지혜를 동시에 열었는데 낮에는 이치를 이야기하고 밤에는 사유를 통해서 결정하였다.
때문에 그의 발언은 원대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것은 선정에 의하여 지혜가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 종지는 허망한 것이 아니어서 남북의 선종에서 그의 업을 따르지 않는 자가 드물었다.
그는 신체가 유난히 특별하여 능히 자기를 이겨내고 지킬 수 있었으며 몸자세는 어디에 기대거나 기울어지지 않았고 걸음걸이는 소와 같았으며 보는 것은 코끼리와 같았다.
정수리에는 육계(肉髻)가 있어 기이한 모습으로 장엄하였는데 그를 보는 사람마다 마음을 다시 먹고 자기도 모르게 복종하였다.
또한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아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생각도 거울에 비치듯이 알았고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았으며 방편으로 가르치고 인도하며 큰 자비를 베풀면서 보살계를 받들었다.
비단옷이나 가죽신은 그것이 생명을 손상시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과 권속들은 거의 다 무명옷을 입었고 추우면 옷 속에 쑥을 넣어 바람과 서리를 막았다.
불법이 동방에 유포된 지 6백 년이 되었지만 오직 이 남악에서 하는 자비행만이 귀의할 만하였다.
나는 일찍이 통역과 번역에 참가하여 여러 번 경을 보았는데 입어야 할 법의(法衣)에 대하여 찾아보고 물어보았지만 지금까지 명주옷을 입는다는 말은 없었다.
더구나 법을 받았다고 해서 그래도 된다는 표시는 없었다.
때문에 만약 번 것이든 얻은 것이든 명주로 옷을 만드는 것을 계율에 준하면 흠 잡히는 것이니 이것을 잘라버리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마음이 탐욕에 집착하는 것인데 어떻게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혜사의 독특한 결단은 성인들의 청렴결백을 높이 준수한 것이다.
그의 저작은 대체로 입으로 전해져 글을 이룬 것으로서 그것을 다듬은 것이 없었다.
그는 『사십이자문(四十二字門)』 2권,
『무쟁행문(無諍行門)』 2권,
『석론현의(釋論玄義)』,
『수자의(隨自意)』,
『안락행(安樂行)』,
『차제선요(次第禪要)』,
『삼지관문(三智觀門)』등 5부의 책을 각각 1권씩 지었는데 모두 세상에 유행되고 있다.
3) 수(隨)나라 국사(國師) 지자(智者) 석지의전(釋智顗傳)
지의는 자(字)가 덕안(德安)이며 속성은 진씨(陳氏)이고 영천(穎川) 사람이다.
진나라가 도읍을 옮기자 그는 형주(荆州) 화용현(華容縣)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양(梁)나라 산기장군(散騎將軍)인 맹양공(孟陽公) 진기조(陳起祖)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서씨(徐氏)였는데 어느 날 꿈에 갑자기 향기로운 연기가 일어나더니 5색 구름이 품속에 감도는 것이었다.
그래서 털어 버리려고 하니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전세의 인연으로 왕도(王道)를 의탁하는 것이다.
복덕이 저절로 찾아오는데 어째서 이를 물리치려고 하는가?”
또한 어느 날에는 흰쥐를 먹는 꿈을 꾸었는데 이것이 재삼 되풀이 되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점을 쳤더니 점쟁이가 말하였다.
“흰 용이 태어날 징조이다.”
마침내 아이가 태어나던 날 밤에 방이 환하게 밝았다가 하룻밤이 지나서야 그 빛이 없어졌다.
그래서 내외가 다 기뻐하며 음식상을 성대하게 차려 놓고 경축하였는데 불이 꺼지고 탕국이 식자 그 일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두 승려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훌륭하다.
아이는 덕이 몸에 배었으니 반드시 출가할 것이다.”
말을 끝내고 갑자기 사라져 손님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옆방에서는 그전에 먼저 일어난 신령스러운 징조를 생각하여 아이의 이름을 왕도(王道)라고 지었고 또 후에 나타난 징조대로 다시 광도(光道)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서로 바꾸어가며 불렀다.
그의 눈에는 두 개의 눈동자가 있었는데 부모는 이것을 숨겼지만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누우면 합장하고 앉으면 반드시 서쪽을 향하였으며 나이가 10세가 되도록 아무것이나 함부로 먹지 않았고 불상만 보면 절을 하였으며 스님들을 만나면 반드시 공경하였다.
7세부터 사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자 승려들은 그의 소지를 의아해하며 『보문품(普門品)』을 말로 전해 주었는데 처음에 한 번 듣고도 그 뜻을 알았다.
그러자 부모는 이것을 막고 다시는 외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쓸쓸한 감정을 품고 있었는데 홀연히 나머지 문구도 자연히 통달하게 되었다.
이것이 어찌 전세에 심은 공덕의 근본으로 그 행위가 지금까지 연장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15세 나던 해인 승성(承聖) 연간에 양나라 원제(元帝)가 망하자 북쪽 협주(硤州)로 건너가 외삼촌에게 의지하였다.
그는 뛰어나고 명랑하며 슬기로웠고 행동거지는 온순하고 공손하였으며 이름난 스승을 찾아 귀의하여 번뇌를 털어버리기를 소원하였다.
18세가 되자 그는 상주(湘州) 과원사(果願寺) 사문 법서(法緖)에게 귀의하여 출가하였다.
법서는 그에게 10계(戒)를 주고 율의(律儀)로 그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북쪽으로 건너가 혜광(慧曠) 율사를 찾아가서 땅바닥에 경전을 펴놓고 자세한 지도와 가르치심을 받았고 대현산(大賢山)에 숨어살며 『법화경』ㆍ『무량의경(無量義經)』ㆍ『보현관경(普賢觀經)』 등을 외우기 시작하여 20일도 안 되어 이 3부의 경전을 끝까지 외웠다.
다시 광주(光州) 대소산(大蘇山)의 혜사(慧思) 선사를 찾아가 심관(心觀)에 대하여 배웠다.
본래 혜사는 취(就) 스님에게 도를 배웠고 취 스님은 최(最) 스님에게서 법을 받았는데,
이 세 사람은 모두 그 지위를 생각하기 어려운 승려들이었다.
혜사는 늘 “옛날에 영산(靈山)에서 함께 『법화경』을 들었는데 전세의 인연에 따라 다시 이 세상에 왔구나”라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곧 보현보살의 도량을 꾸리고 그에게 네 가지 안락행(安樂行)을 설교하였다.
지의는 이 산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닦았는데 그때로부터 3일 만에 「약왕품(藥王品)」까지 외우자 마음은 고행(苦行)을 반연하였고 이 진실한 정진의 구절에 이르자 이해와 깨달음이 문득 일어나면서 혜사 스님과 함께 영취산의 칠보도량[七寶淨土]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던 자기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때문에 혜사는 “네가 아니면 감응하지 못하고 내가 아니면 인식하지 못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법화삼매의 직전에 일어나는 방편인 것이다.
그후 그는 다시 희주(熙州)의 백사선(白砂山)에 들어가 이전처럼 관행을 하였는데 경전에 의문이 생기면 혜사가 갑자기 와서 은근히 해석해 주는 것이 보였다.
그후에도 혜사는 그에게 대신 강의를 시켰는데 듣는 자들마다 모두 굴복하였다.
그러나 3삼매(三昧:空ㆍ無相ㆍ無願)와 3관지(觀智:空ㆍ假ㆍ中)만은 자세히 물어보게 하고 기타는 모두 그의 이해에 맡겼으며 한 번도 마음에 새겨둔 적이 없었다.
혜사는 직접 법구(法具)인 여의(如意)를 잡고 앉아서 그가 강의하는 모습을 보고 듣다가 배우는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의리상 나의 아들이다.
한스러운 것은 그가 선정의 힘이 적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지의가 스승의 말대로 선정을 새롭게 하자 그의 명성이 멀리까지 퍼졌다.
이렇게 학문을 이룩하고 스승을 찾아가 떠나겠다고 인사하니 혜사가 말하였다.
“너는 진(陳)나라에 인연이 있으니 그곳에 가면 꼭 이익이 있을 것이다.”
혜사가 남악으로 길을 떠나자 지의는 금릉(金陵)으로 가서 법희(法喜) 등 30여 명의 승려들과 함께 와관사(瓦官寺)에서 처음으로 선법을 널리 퍼뜨렸다.
복야(僕射) 서릉(徐陵)과 상서(尙書) 모희(毛喜) 등은 밝은 시대의 귀족이며 명망 높은 선비로서 학문은 불교와 유교를 통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여기에서 선의 지혜를 배우고 향법(香法)을 다 익히고는 매우 기뻐하고 존중하며 지의를 떠받들자 당시에 그는 뛰어나다고 우러르는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장간사(長干寺)의 대덕인 지변(智辯)이 그를 송희사(宋熙寺)에 맞아들였고 천궁사(天宮寺)의 승황(僧晃)은 불굴사(佛窟寺)에 거처하도록 초청하였다.
이것은 그의 도가 널리 알려지고 그의 행위에 감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의 이름 있는 승려들도 그를 맞아들인 것이었다.
지의는 때에 맞게 활동하면서 즉시에 깨달음을 이룩하게 하였다.
백마사(白馬寺)의 경소(警韶),
봉성사(奉誠寺)의 지문(智文),
선중사(禪衆寺)의 혜명(慧命)과 양나라 시대의 숙덕(宿德)인 대인(大忍) 법사 등은 그 시대의 높은 부류로서 강남의 명망 높은 승려들이었지만 자기들이 이전에 강의하던 것을 버리고 선종을 가르치려고 하였으며 제자들을 거느리고 나루터를 찾아 건너갈 길을 택하였다.
당시 우혈(禹穴:會稽山)의 혜영(慧榮)은 장엄사(莊嚴寺)에 머무르면서 오군(吳郡)과 회계(會稽)에 도를 폈는데,
세간에서는 그를 의굴(義窟)이라고 칭송하였고 그의 말재주는 멈출 수 없는 흐름이라고들 하였다.
그는 지의의 설법을 들으려고 일부러 찾아가 질문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로 따지면서 질문하였는데 그 내용은 심오한 진리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는 경솔하고 방종하며 거만하게 눈썹을 치뜨고 부채를 춤추듯 놀렸는데 부채가 갑자기 땅에 떨어졌다.
지의의 대답은 사리에 맞고 정연하였다.
지의가 혜영을 나무랐다.
“선종의 힘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이때 사문 법세(法歲)가 혜영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종래 의룡(義龍:理學의 龍)이라고 하던 사람이 지금은 엎드린 사슴이 되었구나.
부채도 이미 땅에 떨어졌으니 무엇으로 부끄러운 얼굴을 가리겠는가.”
혜영이 말하였다.
“적을 가볍게 보았다가 실수하였지만 아직은 나를 속일 수 없습니다.”
지의는 그곳에서 연속 8차례나 『지도론』을 강의하여 찾아와 배우는 사람들이 숙연하게 하였고,
다음으로 선종을 설교하여 마음의 바다를 맑게 하였다.
그는 말하거나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에도 늘 숲과 못을 생각하였다.
마침내 그는 꿈에서 바위와 절벽이 첩첩히 겹쌓이고 구름 속에 햇빛이 절반쯤 비치며 그 옆에 끝없는 넓은 바다가 펼쳐지고 맑은 물결이 산 아래에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어떤 승려가 손을 흔들며 팔을 펴서 산 밑에 이른 지의를 산으로 끌어올리며 무엇이라고 말하는 꿈도 꾸었다.
지의가 꿈속에서 본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니 제자들 모두가 말하였다.
“그곳은 곧 회계의 천태산(天台山)인데 성인과 현인들이 있던 곳입니다.
옛날에 승광(僧光)ㆍ도유(道猷)ㆍ법란(法蘭)ㆍ담밀(曇密) 등 진나라와 송나라의 뛰어난 스님이 모두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의는 혜변(慧辯) 등 20여 명과 함께 길을 찾아 남쪽으로 가서 이 산에서 살았다.
이보다 먼저 청주(靑州)의 승려 정광(定光)이 오랫동안 이 산에서 살았는데 40년간 공덕을 쌓으며 선정과 지혜를 겸하여 닦은 신적인 사람이었다.
지의가 아직 이 산에 오기 2년 전에 그는 산에 사는 사람들에게 예고하였다.
“큰 선지식(善知識)이 이곳에 와서 살게 될 것이니 콩을 심어 장을 담그고 부들을 엮어 자리를 만들며 다시 집을 세워서 그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때마침 진나라의 시흥왕(始興王)이 외지로 나가 동정호(洞庭湖)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공경대부들이 그를 전송하였다.
그는 수레를 와관사로 돌리고 여기에 이르러 지의와 담론하였다.
지의가 그윽한 진리를 제창하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을 기울여 희사한 재물이 산처럼 쌓였다.
그러면서 경건하게 절하는 것이 은근하고 정중하였다.
그래서 지의는 탄식하였다.
“내가 어젯밤 꿈에 강도를 만났는데 지금은 부드러운 도적들이 나타나 털로 짠 포승으로 뼈를 자르려고 드니 ‘진흙탕 속에 꼬리를 끈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문인들에게 이별을 알리며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어둠 속에서 활을 쏘면 활시위 소리에 감응한다고 한다.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무명은 곧 어둠이며 입술과 혀는 활이고 마음속의 생각은 활시위이며 음성은 화살과 같기 때문이다.
긴긴 밤 헛되게 말했는지 그것을 깨달을 사람은 없다.
또한 법문은 거울과 같아서 모나고 둥근 것을 나타내는 형상에 맡기게 된다.
처음 와관사에서는 40명이 좌선하여 그 절반이 법문에 들어갔다.
지금은 2백 명이 좌선하고 있는데 열 사람만이 법을 얻었다.
이후로도 이 종지에 귀의하는 사람은 배로 불어나겠지만 법에 의거할 사람은 몇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 교화하고 인도할 것이니 각자 편안한 길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내 뜻대로 하겠다.”
이렇게 말하고는 천태산으로 갔다.
천태산으로 가서는 정광과 만나서 서로 칭송하고 진리의 묘지들을 진술하였다.
이때 정광은 “큰 선지식이여,
내가 젊었을 때 산에서 손을 흔들며 찾던 일이 생각나지 않는가?” 하고 말하였다.
지의는 깜짝 놀라 기이하게 여기며 꿈속에서 있었던 일과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는 진나라 태건(太建) 7년 가을 9월이었다.
또한 종소리가 골짜기에 가득 들려와 대중들은 모두가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자 정광은 “종이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과 인연이 있는 것이니 그대는 여기에 머무를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지의는 점을 쳐서 좋은 장소에 터를 잡았는데 이곳은 정광이 머무르고 있는 곳의 북쪽이며 불롱산(佛壟山)의 남쪽이고 나계(螺溪)의 근원이 있는 곳이며 한적하고 앞이 트여 진여를 찾을 만한 곳이었다.
땅은 평평하고 샘은 맑아 여기저기 오가다가 거기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모자를 쓰고 붉은 옷을 입은 사람 셋이 나타나 소(疏)를 집어 들고 청하기를 “이곳에서 도를 닦아도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곳에 초가 암자를 세우고 소나무와 과일나무를 심었다.
그후 몇 년간 여기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서 다시 저자에서와 같은 모임을 이루었다.
이때 정광이 말하였다.
“지금은 적당하게 조용히 살아가기 좋다.
이제 나라가 안정되면 세 지방이 하나로 통합될 것이며 아마 어떤 귀인이 나타나 당신을 위해 사원을 세워주어 법당이 이 산에 가득히 찰 것이다.”
이때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후 지의는 사원의 북쪽 화정봉(華頂峯)에서 혼자서 고요히 두타행을 닦았다.
그런데 센 바람이 불면서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우레가 진동하였으며 수많은 도깨비들이 한 몸에 백 가지 형상을 나타내면서 불을 토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괴이한 현상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는 마음을 억누르고 앉아서 참아내며 고요히 자신을 잊고 있었다.
그러자 몸과 마음의 번뇌와 고통이 병으로 나타나 마치 불에 타는 것 같았으며 또 사망한 부모가 지의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고통을 말하며 애절하게 구원을 청하는 모습도 보였다.
지의가 다시 법인(法忍)에 의지하여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자 강렬하고 간절한 두 가지 인연의 감응은 곧 없어졌다.
그런데 문득 서역의 신령스러운 승려가 찾아와 말하였다.
“적을 제압하고 원한을 이겨낸 것은 곧 용맹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글은 많아서 다 담지 않는다.
진나라 선제(宣帝)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선사(禪師)는 불법의 영웅이며 호걸이다.
이 시대의 스님들이 종사로 삼고 있으며 도인들과 속인들까지 다 가르치니 이것은 나라에서 바라던 것이다.
마땅히 시풍현(始豊縣)의 조세를 나누어 여러 가지 비용에 충당하고 양호(兩戶)의 백성들의 조세를 면제하며 땔나무와 물을 공양하도록 할 것이다.”
천태산이 있는 현의 이름은 안락현(安樂縣)이라고 하는데 현령인 진군(陳郡)의 원자웅(袁子雄)은 정법을 믿고 숭상하는 사람이었다.
매년 여름안거 때에 항상 『유마경』을 강의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세 갈래의 보배 계단이 공중에서 내려왔으며 수십 명의 범승들이 계단으로 내려왔다.
그러더니 법당에 들어가 예배하고 손으로 향로를 받들고 지의의 주위를 세 바퀴 돌고 한참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원자웅과 대중들은 다 같이 이 광경을 보고 경탄하니 산이 떠들썩하였다.
지의의 행위가 신령스러운 감응과 이어진 것이 다 이와 같았다.
영양왕(永陽王) 백지(伯智)는 외지로 나가 오흥(吳興)을 다스리게 되자 권속들과 함께 산에 찾아가 계율을 주기를 청하였고,
또 7일 밤이나 방등참법(方等懺法)을 행하였다.
그래서 왕은 낮에는 나라를 다스리고 밤에는 관행을 익혔다.
어느 날 지의가 문인 지월(智越)에게 말하였다.
“내가 왕을 권유하여 다시 복을 닦고 재앙을 물리치도록 하려는데 괜찮겠는가?”
지월이 대답하였다.
“관부의 관료들 속에 친우들이 없으니 반드시 추위와 더위를 탈 것입니다.”
그러자 지의가 말하였다.
“세간의 시기질투를 막는 것도 선을 닦는 것이다.”
어느 날 왕이 사냥하러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당장 숨이 넘어가게 되었다.
이때에야 사람들은 지의의 말을 깨닫게 되었다.
지의가 몸소 대중을 이끌고 관음참법(觀音懺法)을 하였더니 오래지 않아 왕은 정신이 좀 드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책상에 기대 앉아 있는데 범승 한 사람이 오더니 향로를 받쳐 들고 앞으로 가서 왕에게 아픈 곳을 물었다.
왕이 땀만 흘리면서 대답을 못하니 곧 왕의 주위를 한 바퀴 돌자 아픈 곳이 편안해졌다.
왕은 곧 몸소 축원문을 지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천태 스님의 덕망은 도안,
혜원과 짝을 이루고 도(道)는 혜광,
도유보다 높아서 멀고 가까운 곳에서 마음을 기울이고 목마르게 우러르며 석장을 짚고 찾아오는 승려들이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그리하여 상법 시대에 끊어졌던 실마리를 잇고 혼몽한 중생들을 구제하였으며 지혜의 빛으로 거듭 밝혀 더러워진 풍속을 구원하였습니다.
더욱이 법문을 넓히고 선종을 관통하여 유위(有爲)의 번뇌에서 해탈하였고 무생의 법인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제자는 업풍(業風)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애욕의 물속에 깊이 빠져 비록 법의 기쁨은 맛보았지만 어지러운 번뇌에 덮인 마음을 제거하지 못하였으며 공연히 선정의 기쁨을 우러르지만 여전히 흩어지고 흔들리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일륜(日輪)은 빨리 달리고 희화(羲和:태양을 실은 마차를 부린다는 사람)의 말고삐는 멈추지 않으며 달은 돌고 돌아 항아(恒娥)의 빛은 멈추기 어렵습니다.
이별이 있으면 상봉도 있겠으니 그 탄식을 어떻게 말로 하겠습니까?
법을 사랑하고 법을 공경하는 것이 잔잔한 물결처럼 그치지 않으니 원하건대 태어나는 세상마다 천태 스님을 만나서 항상 공양을 닦는 것이 마치 지적왕(智積王)이 지승여래(智勝如來)를 받든 일과 약왕보살이 뇌음정각(雷音正學)을 돌본 일과 같게 하여 안양정토(安養淨土)와 도솔천궁(兜率天宮)에서 한 수레를 타고 호탕하게 노닐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가 천자나 왕에게 믿음과 존경을 받은 것은 모두 이런 유(類)였다.
그후 그는 해안으로 옮겨가 교화하여 구민(歐閩:廣東省 동부와 福建省 남부] 지대를 법으로 다스렸다.
그래서 의문을 제기하고 도를 청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산으로 찾아왔다.
진나라 황제는 직접 만나 예배를 드리고 공경을 표시할 생각으로 신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불문에서 누가 제일 뛰어난가?”
진훤(陳暄)이 아뢰었다.
“와관사의 선사는 풍상을 겪으면서 덕망을 쌓았고 닦은 선정은 깊은 바다를 거울처럼 들여다보듯 합니다.
옛날에 그가 수도에 있을 때 현명한 사람들이 종사로 모셨는데 지금은 천태산으로 발걸음을 옮겨서 법운(法雲)이 동쪽하늘에 자욱합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조서를 내려 그가 수도에 돌아오게 하여 도인들과 속인들이 그의 은혜를 입도록 해 주십시오.”
그래서 새서(璽書:옥새가 찍힌 글)를 내려 거듭 지의를 불러들였다.
지의는 법을 소중히 간직할 임무를 지녔기에 자기 몸을 쉽게 처신하지 않고 그것을 사절하였다.
그후 영양왕이 간절히 간(諫)하고 또 황제의 칙명을 가지고 사신이 일곱 차례나 내려왔는데 그 글은 황제가 직접 쓴 것이었다.
그러자 지의는 도가 유통되자면 왕이 불법에 의거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수도로 갔다.
황제는 그를 맞아들여 태극전(太極殿)의 동당(東堂)에 들게 하고 『지도론』을 강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황제는 명령을 내며 양(羊) 수레를 모는 동자(童子)들이 줄지어 앞에서 인도하고 주서사인(主書舍人)과 익종(翊從)들이 계단을 오르게 하였는데 지의에 대한 예법은 마치 국사(國師)인 관(瓘)의 고사와 같았다.
진나라 황제가 법회에서 나오자 모든 관리들은 지극히 공경하며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문을 듣고서 법을 받들고 도를 이어가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칙명을 내려 영요사(靈曜寺)에 선원(禪院)을 세우고 학도들을 모집하게 하니 그곳에 참석하기 바라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후에도 자주 『태극전』에 칙명을 내려 『인왕경(仁王經)』을 강의하게 하였으며 천자가 몸소 거기에 참석하였다.
이때 승정(僧正) 혜훤(慧暅)과 승도(僧都),
혜광(慧曠) 등 수도의 대덕들은 모두 매우 어려운 질문을 하였으나 지의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법문을 크게 열었다.
그러자 혜훤은 향로를 잡고 이렇게 축하하였다.
“나라에서 10여 차례 재(齋)를 지냈는데 몸소 네 번의 강론을 하면서 문장을 분석하고 이치를 해석하였으니 그 요지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해가 뜨면 별이 사라지듯이 오늘 미묘함을 보고서야 누추함을 알게 되었구나.”
지의의 영예로운 명망은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강남의 법회는 그전부터 서로 다투고 갈등이 생긴 것으로 하여 불만이 있었는데 지의가 이끌게 되자 그 법좌는 숙연하고 화목하여 남음이 있게 되었다.
마침내 온갖 나뭇가지에 꽃망울이 터져 나와 7일 밤 동안 고요히 빛을 뿌렸는데 이것은 실지 일을 통해 마음을 증험한 것으로서 모든 것이 지의의 공덕이었다.
말년에는 그곳에서 나와 광요사에 머무르면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부흥시키자 대중들은 성곽이 진동하도록 분주히 따라다니며 마음에 새기고 귀를 기울였다.
진나라 황제는 광덕전(廣德殿)에서 사례하는 칙명을 내렸다.
“지금 불법을 신앙하면서 스님에게 맡기니 미흡한 점들을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
이때 승려와 비구니들을 총괄하여 검열하니 승적이 없는 사람이 1만 명을 헤아렸다.
조정에서는 경전의 시험에서 낙제한 사람은 모두 승려생활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논의하였다.
그러자 지의가 표(表)를 올려 간하였다.
“조달(調逹)은 6만 마리의 코끼리에 실을 만한 경전은 외웠지만 지옥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고,
반특(槃特)은 한 줄의 게송만 외우고도 아라한의 과보를 얻었으니 독실하게 도를 논한다면 어찌 경전을 많이 외운 것과 관계되겠습니까?”
진나라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승려들을 가려내는 일을 중지시켰다.
이것은 만 사람의 출가가 지의의 한 번의 간언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말엽에 그는 영요사가 좁고 규모가 작기 때문에 다시 한적한 곳을 찾고 있었는데 어느 날 홀연히 꿈속에 한 사람이 단정한 차림새를 한 호위하는 사람과 시종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대주며 말하였다.
“나는 관달(冠逹)입니다.
그대가 삼교(三橋)에 머무르기를 청하는바 입니다.”
지의는 곧 ‘관달이라면 양나라 무제의 법명이며 삼교란 광택사(光宅寺)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는 자리를 옮겨 그곳에 거처하였다.
그해 4월 진나라 황제가 이 사원에 행차하여 업을 닦고 크게 보시하였다.
그때 다시 『인왕경』을 강의하였는데,
황제는 대중 속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절하였고 황태자와 황후 이하 모두가 계율의 모범을 숭상하여 그의 법을 받았다.
그 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교화와 인도는 방향이 없이 소질에 맞게 중생들을 제도합니다.
나라를 지키고 왕을 보호하며 하늘세상과 인간세상을 인도하여 그 빛은 찬란히 빛나며 자취를 스승과 벗들에게 의탁하셨습니다.
비구가 꿈속에 들어오니 부합된 형상은 오래도록 빛났으며 화상으로 거동하시니 그 높은 자리의 덕망은 참으로 빛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10지(地)를 바라보고 4의(衣)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대승과 소승의 두 가지와 내교와 외교의 두 가지는 스승을 존경하고 도를 존중하는 것이니 그 유래는 오래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굽어 살피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저의 소청은 대대로 인연을 맺어 그 본래 소원대로 날마다 증장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금 받들어 청하건대 보살계사(菩薩戒師)가 되어 주십시오.”
이렇게 전하는 그의 손에는 향이 들려 있었고 눈 아래로는 눈물이 떨어졌다.
이것은 덕으로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몸을 굽혀 행차하며 그를 따르게 한 것이었다.
금릉(金陵) 땅이 뒤집히자 그는 지팡이를 집어 들고 형주와 상주 지방으로 떠났다.
분성(盆城)에 이르렀을 때 꿈속에 한 늙은 승려가 나타나 말하였다.
“도간(陶侃:동진(東晋)의 명장(名將))의 상서로운 코끼리가 경건히 허리 굽혀 보호하고 있다.”
그가 광산(匡山)에 가서 쉬다가 그곳에서 혜원의 그림과 사적을 보았는데 그 영험이 증명된 것으로서4) 그때의 꿈과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양에서 반란이 일어나 사원이 불에 탔지만 유독 이 산만은 침해당한 것이 없었다.
참으로 이것은 코끼리의 힘으로 보호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적운봉(迹雲峯)의 풀을 깎기도 전에 그 반란이 진압되었다.
때마침 대업(大業)이 변방에 있다가 회해(淮海) 지방의 총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지의의 풍문을 듣고 덕을 가슴에 새겼으며 흠모하는 마음이 이어져 한결같이 계율을 지키면서 스승으로 받들어 섬기려고 서신을 보내어 누차 초청하였다.
지의는 처음에는 덕이 적은 사람이라고 말하였고 다음에는 이름난 승려에게 양보하였으며 마지막에는 같이 배운 승려를 천거하였다.
그러나 이 세 번의 사양도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마침내 지의는 네 가지 소원을 요구하였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록 선을 배우기 좋아하나 행위가 법에 부합되지 않고 나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진 노년기에서 승상(繩床)이나 지키면서 가슴을 어루만지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단지 가짜 명성뿐이며 허풍을 친 것도 있어 나쁜 소문이 사실보다 더하니 바라건대 저에게 선법을 배우려고 기약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둘째,
태어나면서 변두리 강남 지방에만 있었고 오랫동안 난리를 만나서 몸은 상서(庠序:학교 교육)에 어둡고 입은 훤량(暄涼:문안인사)에 서툴며 세상 밖의 현묘한 이치는 오래전부터 나의 분수에 맞는 일이 아니니 지역 간의 갈등을 절제하는 일에는 하나도 취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비록 스스로 근신하려고 하여도 투박하고 곧은 성품이 사람들의 마음에 거슬리니 바라건대 그 법도를 따지지 말기를 바랍니다.
셋째,
적으나마 법의 등불을 전하여 법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는데 만약 자신이 계율의 본보기가 된다면 응당 행동을 무겁게 해야 하는데 행동을 무겁게 한다면 법의 등불을 전하는 일을 못하게 됩니다.
만약 행동을 가볍게 한다면 비난을 초래하게 되는데 그 비난을 피하여 몸을 편안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전하며 목숨을 바치는 것이 낫습니다.
바라건대 저의 법을 위한 일을 허락하시고 가볍게 움직여도 싫어하지 말아주십시오.
넷째,
30여 년을 물과 돌 사이에서 살면서 저의 성품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왕의 길은 이미 하나로 통일되었고 불법도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 평범하고 용렬한 사람에게 중책을 잘못 주어 이러한 은혜를 입으니 안으로는 고목의 힘을 다하여 삼가 외적인 보호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언덕과 골짜기에 살 마음이 생기면 바라건대 내 마음에 따라 먹고 마시며 남은 목숨을 마치게 해 주십시오.
이 네 가지 마음을 허락하시면 우아한 뜻에 따라 그곳에 가겠습니다.”
진나라 왕은 깨끗한 계율을 바라던 참이라 그의 소원들을 허락하였다.
이런 연고로 몸소 계율을 받기를 청하는 글을 지었다.
“제자는 본래 선을 쌓은 덕을 이어받아 황제의 가문에 태어나게 되었는데 가정의 교육을 받아 일찍부터 어른들 앞에 잰걸음으로 나갔으며 유언으로 남긴 가르침들에 일찍 물들어 복리가 모여들고 묘한 기틀을 깨달을 무렵 좁은 길에서 헤매는 것이 부끄러워 대승에서 한가롭게 지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화성(化城)에서 멈추는 것을 비웃고 열반의 언덕으로 건너갈 것을 서원하였습니다.
개사(開士)의 모든 행위는 착한 계율을 받는 것을 선차로 삼으니 보살십수계(菩薩十受戒)를 전적으로 지키는 것이 최상입니다.
비유하면 궁실을 세울 때 먼저 기초를 닦듯이 먼저 허공에 서까래만 세우면 종래 집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공자ㆍ노자ㆍ석가의 교리는 모두 거푸집에서 주조하는 과정에 밑받침되었는데 본받을 계율이 없다면 누가 장차 우러르겠습니까?
참으로 어진 분을 화상으로 삼고 받든다면 문수보살이 남몰래 승려가 되어 반드시 인간세상에 스승으로 나타나 성인의 법을 전수하실 것입니다.
또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가면서 감응하여 통하게 되며 살타파륜(薩陀波崙)보살은 담무갈(曇無竭)에게 골수를 바치고 선재(善財)동자는 법계에서 자신의 몸을 잊은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경전에 있는 명문장이며 모두 억측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믿고 때에 맞게 인도를 받는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선사는 불법의 용상(龍象)이어서 계주(戒珠)는 원만하고 깨끗하며 정수(定水)는 깊고 투명합니다.
그래서 고요한 곳에서 지혜가 일어나고 막힘없는 말재주를 지녔으며 중생들을 앞세우고 자기를 뒤에 놓는 겸손으로 도풍을 이루어 명성이 멀리까지 퍼지고 대중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는 이런 까닭에 정성을 멀리에 쏟아 배를 타고 가서 영접해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늘 염려되는 것은 인연의 차이로 온갖 어려운 일을 만나는 것이었는데 스승께서 이미 도착하시니 마음이 놓이고 안개 속을 헤치는데 이르러 곧 번뇌를 없애버렸습니다.
이제 개황(開皇) 11년(599) 11월 23일에 양주(楊州)의 총관하는 사원이 있는 성에서 천승회(千僧會)를 마련하겠으니 삼가 보살계를 내려주십시오.
이번 계의 이름은 효(孝)이며 다른 이름은 제지(制止)라고도 합니다.
방편지(方便智)로 제도하면 종지에 귀의하여 극진히 받들겠으니 큰 장엄을 지어 여래의 자비와 동등하게 모든 부처님의 사랑을 두루 펴서 모든 중생들을 외아들처럼 평등하게 대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지의는 내전에서 몸소 계율과 향을 전하고 율의법(律儀法)을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대왕을 제도하기 위해 멀리에서 강물을 건너와 종사가 되었으니 이름과 사실이 서로 부합되는데 그 의(義)는 가벼운 약속이 아닙니다.
지금 법명을 총지(總持)라고 해도 좋으니 이것으로 서로 겸하는 도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러자 왕은 그의 가르침을 받들면서 말하였다.
“대사는 선의 지혜가 안에서부터 무르익어 지금 법의 은택으로 인도하니 곧 이름을 지자 대사(智者大師)라고 받들겠습니다.”
이때로부터 지의는 황제의 전적인 스승이 되어 이끌고 권유하여 날마다 그윽하고 현묘한 경지로 나가도록 하였다.
이때 얻은 보시 물건은 60여 가지나 되었는데 이것을 단번에 공경할 사람[敬田]들과 보양 받을 사람[悲田]들에게 보시하여 복덕이 더욱 커지고 집과 나라가 더욱 번창하도록 기원하고 나서 그전에 살던 숲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왕은 머물러 있으라고 굳이 청하였다.
그러자 지의가 말하였다.
“그전에 약속한 것이 분명한데 일은 두 번 다시 어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옷을 털고 일어나니 왕은 감히 재차 부르지 못하고 합장하고는 성심껏 전송하였다.
성문에 이르렀을 때 지의는 돌아보며 말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도에 힘쓰면 정사와는 간격이 생기게 됩니다.
다행히 부처님의 교화를 받아 불법을 넓히고 보호할 일이 마음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왕은 예의를 차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고 눈물을 머금고 돌아갔다.
지의는 곧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다시 광산(匡山)으로 가서 제자들을 모집하고 도를 행하였는데,
아름다운 징조에 자주 감응하였고 아주 먼 변방의 승려들이 그 소문을 듣고 줄지어 찾아왔다.
그는 다시 저궁(渚宮)의 고향 땅으로 가서 자기가 태어난 땅의 은혜에 보답하니 도인들과 속인들은 학수고대하였고 늙은이나 어린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따랐으며 계율을 주는 장소와 강당에는 사람들의 수효가 만 명에 이르렀다.
마침내 당양현(當陽縣) 옥천산(玉泉山)에 정사를 세웠는데 황제의 칙명으로 사원의 현판이 내려와 ‘일음정사(一音精舍)’라고 하였다.
그 땅은 예로부터 황량하고 험악하여 귀신과 짐승,
뱀 등이 포악한 짓을 하였는데 사원이 세워진 후로는 그 우환거리가 없어져 좋아졌다.
그해 봄에는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모두 신이 노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의가 샘터에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서 경을 읽으니 곧 감응이 일어나 구름이 있고 비가 쏟아졌다.
그래서 허망한 소리들은 저절로 없어졌다.
총관(總管) 의양공(宜陽公) 왕적(王積)이 산에 올라가 예배하는데 몸이 떨리고 땀이 나면서 불안해졌다.
그가 밖에 나와서 말하기를 “여러 해를 전장에서 보내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어도 용기를 내었는데 오늘처럼 무섭고 두려워본 적은 아직까지 없었다”고 하였다.
그해에 진왕은 몸소 편지를 써 보내며 돌아오도록 요청하였다.
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제자는 다행히 분에 넘치게 그대를 스승으로 삼아 한량없는 겁 동안 내려오며 쌓인 것이 깨달음에 의지하자 몸과 마음의 작용이 없어졌습니다.
이전에 받은 가르침으로 몸은 비록 얼뜨고[疏漏] 거칠기는 하지만 마음으로는 계율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의 선정에 든 마음과 선정을 닦는 행위는 모두 산란하지 않고 고요한 경지로 돌아갔습니다.
나라를 걸머지고 변방을 다스리는 신하이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한 제가 어떻게 네 가지 인연을 없애고 삼매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번갯빛과 같은 순간에 번뇌를 끊어버리는 사람들도 많고 혜해탈(慧解脫)을 이룬 사람도 적지 않으니 당일로 지덕(智德)과 단덕(斷德)을 가슴에 지녀 유교에 앞장서고 영원히 법의 흐름을 타며 이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데 바닥에 살면서 개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은 엄하고 존귀한데 마음을 내려줄 수 있겠습니까?
전세의 근기가 얕은데도 싹이 틀 수 있겠습니까?
보살이 때에 맞게 여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서전(書傳)에 쓰여 있기를 ‘민생(民生)은 세 종류가 있는데 이들을 하나와 같이 섬겨야 한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불교경전[釋典]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스승을 따르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이 정성스러운 말들은 평소에 간곡한 마음을 들여 만든 것입니다.
이 일이 성취되는 것이 중요한 것만큼 부디 사양하는 말은 말아주십시오.”
이때 지의는 이렇게 회답하였다.
“분에 넘치게 임금께서는 저를 스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용렬하고 나약한 자신을 돌이켜보면 시대가 허용하는 사람이 못 됩니다.
하물며 이렇듯 융성하게 명하시니 더욱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헛되이 애쓰신다면 반드시 높은 기대에 어긋날 것입니다.”
왕이 다시 청하였다.
“학문은 스승을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며 일은 사람들의 논의를 헤아려야 합니다.
지금껏 법계를 구하다가 이제야 마음을 안착할 곳을 찾았습니다.
우러러 생각하면 오랫동안 가꾼 선의 뿌리는 한 생(生)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학문으로 시작되었지만 성인의 경계를 만나서야 남악 대사께서 설법이 제일이라고 예언하였으니 둘러보아도 이를 넘어설 사람은 없습니다.
조(照) 선사가 와서 이 일을 자세히 말해 주어서야 비로소 마음이 기뻐 작은 정성이나마 다하기로 하였습니다.
지자 대사께서 이전에 진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에서 명확하게 시험하였습니다.
와관사(瓦官寺)의 큰 모임 때 온갖 논의가 분분하게 일어나자 영(榮)스님이 억지로 입을 벌리다가 먼저 콧대가 꺾였고 두 분의 경(瓊) 스님이 그 뒤를 이었으나 다 물러나게 되었으며 인(忍) 스님은 찬탄하면서 세상에 드문 일이라고 제창하였습니다.
제자가 처음 우러르며 초청하였을 때 직접 무외단(無畏壇)에 올라서 어려운 문제를 물 흐름처럼 해석한 것을 직접 듣고 보았으며 사람들은 모두 우러러보게 되었습니다.
또 이전에 형초(荆楚) 일대에서는 귀의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선(禪)이 아니면 지혜가 아니라고 한 것은 부처님께서 이미 증명하신 것입니다.
이 부처님의 말씀을 지자 대사께서 융합하였으니 그 지위가 매우 높은 것입니다.
비유하면 모든 물줄기가 큰 바다로 모여들듯이 이 포괄적으로 하는 논의야말로 비로소 부처님의 뜻을 얻을 것입니다.
오직 바라건대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고 아직 제도 받지 못한 것을 제도 받게 해 주십시오.
스승의 좋은 설교는 다함이 없고 법의 보시는 참으로 끝이 없습니다.”
마침내 지의는 거듭되는 초청에 의하여 다시 수도로 갔다.
왕은 그곳에서 『유마경소』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하동(河東) 류고언(柳顧言)과 동해(東海) 서의(徐儀)는 다 업적을 쌓은 재사들로서 그 문의(文義)를 받들어 보장(寶藏)에 이 책을 함봉하고 왕은 직접 그것을 받아 지녔다.
그후 소비(蕭妃)가 질병으로 고생하였는데 의원도 치료할 수 없게 되자 왕은 개봉부(開封府) 류고언 등을 보내서 편지로 질병을 고쳐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지의는 다시 승려들을 거느리고 7일 재계를 설치하고 금광명경참회[金光明懺]를 진행하였다.
6일째 되는 날 저녁 갑자기 이상한 새 한 마리가 제단에 날아들어 대굴대굴 구르며 죽었다가 잠시 후에 살아나서 날아가는 것이었다.
또한 돼지의 신음소리가 들리자 대중이 동시에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때 지의가 말하였다.
“이런 모습이 나타난 것은 왕비의 병이 나을 징조이다.
새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다 죽었던 왕비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고 돼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는 것은 재계의 복이 서로 이어진 것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날이 되자 과연 왕비는 병이 나았다.
왕은 크게 기뻐서 축하하였다.
지의는 때를 만나면 조정에 들어갔으나 천태산으로 되돌아가 직접 선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전에 하던 참회를 진행하였고 뒤이어 서원하며 말하였다.
“만약 제가 삼보(三寶)에 이익이 된다면 저의 여생을 한정하여 주시고 그것이 부질없는 생이라면 빨리 죽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후 오래지 않아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 땅에서 생을 마칠 것이다.
그래서 늘 산에 돌아오자고 하였다.
지금 죽음의 예고를 받았으니 형세로 보아 명이 다할 것 같다.
내가 죽은 후에 서남쪽 봉우리 위에 안치하되 시신 주위에 돌을 쌓고 소나무를 심어 구덩이를 메우며 흰색의 탑을 세워 보는 사람마다 마음을 내도록 할 것이다.”
또 말하였다.
“장사꾼들은 돈을 보내왔고 의원은 약을 남겨두었는데,
내 비록 불민한 사람이지만 그들은 미친 사람들로서 슬픈 일이다.”
그리고 『관심론(觀心論)』을 말로 전해 주고 간략하여 소(疏)를 만들었을 뿐 문장을 윤색하지 않았다.
학사 지월(智越)에게는 석성사(石城寺)에 가서 그곳을 청소하여 그곳의 부처님 앞에서 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하게 하였다.
그리고 침상을 동쪽 벽에 마련하고 얼굴은 서쪽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하며 아미타불과 파야관음(波若觀音)을 부르게 하였다.
또한 많은 향을 보내서 태우도록 하고 세 가지 옷과 발우,
지팡이를 찾아서 몸 가까이에 두게 하며 나머지 도구들은 둘로 나누어 하나는 미륵불을 받들고 또 하나는 갈마에 쓰이도록 하라고 하였다.
약을 드리려고 오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약이 병을 고칠 수는 있지만 남은 목숨을 연장시킬 수야 있겠는가.
병이 몸과 합치되지 않는데 약이 어떻게 고칠 수 있으며 나이가 마음과 합치되지 않는데 약이 어떻게 연장시킬 수 있겠는가.”
지희(智晞)가 갔을 때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다시 무엇을 듣겠는가.
『관심론』 안에서 무엇을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떠들썩하게 의원과 약을 보내오면 다른 사람에게 누만 끼치고 어지럽게만 할 뿐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재계 때 음식을 올려놓으려고 하면 이렇게 대답하였다.
“꼭 그림자를 밟아야만 재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능히 보이는 것이 없고 인연되는 것이 없으면 이것이 진정한 재계이다.
내 살아서 독이 담긴 그릇에 시달리기 보다는 죽어서 돌아가 쉬는 것이 낫다.
세상의 모습은 다 이와 같으니 매우 찬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는 또한 제가 지은 『정명소(淨名疏)』와 무소뿔로 만든 여의주,
연꽃 향로를 내놓고 진왕(晋王)에게 보내는 이별의 유서를 7장 남겼는데 문장은 매우 해박하고 종합적이었고 문채는 아주 뛰어났다.
그는 대법(大法)을 부탁하였는데 마지막에는 직접 이러한 주석을 달았다.
“여의주와 향로는 대왕이 주신 것인데 다시 이것을 우러르며 이별하는 데에 씁니다.
부디 영원히 덕망의 향기를 베풀고 마음먹은 것을 오래도록 보존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곧 『법화경』의 제목을 소리높이 읽게 하고 게송을 인용하여 말했다.
“법문은 부모와 같아 지혜와 이해가 여기에 의해서 생기게 된다.
본문과 적문[本迹]은 아주 크고 미묘하여 추측하기 어렵다.
도끼질을 거두고 거문고 줄을 끊는 날이 바로 오늘일 것이다.”
또한 그는 『무량수경』을 다 듣고 나서 이것을 찬양하였다.
“마흔두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는 장엄한 정토(淨土)의 연꽃 못과 보리수가 있는 곳에 가기 쉬워도 그런 사람은 없구나.”
그는 또한 향탕을 찾아 입을 씻은 다음 10여시(如是),
4불생(不生:不自生ㆍ不他生ㆍ不共生ㆍ不無因生),
10법계(法界),
3관(觀),
4교(敎),
4무량(無量),
6도(度:6바라밀) 등을 설교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의 위계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너희들은 선의 뿌리를 심는 데는 게으르면서 다른 사람의 공덕에 대하여 묻는데 이것은 소경이 구멍 난 곳을 묻고 절름발이가 길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거느리지 못할지언정 자신의 여섯 가지 기관을 깨끗하게 하였고 남을 위하여 자신을 바쳤지만 겨우 5품(品)의 자리에 있을 뿐이다.
나의 모든 스승들과 벗들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따라 모두 와서 나를 맞이하고 있다.
파라제목차(波羅提木叉)는 너희들이 종사로 받들어야 하고 네 종류의 삼매는 너희들을 밝게 인도할 것이다.”
그는 다시 유나(維那)에게 명하였다.
“사람이 생을 마치려는 때 종이나 경쇠 소리를 들으면 바른 생각을 더하게 된다.
그리고 오래도록 있으면서 기가 다하기를 기약해야지 어떻게 몸이 식은 다음에 경쇠소리를 울려야만 되겠는가.
세간에서 통곡하고 상복을 입는 것 등은 다 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가 모두 침묵하라.
내 이제 떠나려고 한다.”
말을 마치고 선정에 든 것처럼 단정히 앉아서 천태산의 큰 석상 앞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7세였고 그 해는 개황(開皇) 17년 11월 22일이었다.
그가 생을 마친 후에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거두었다.
인수(仁壽) 말년이 되기 전에 갑자기 석장을 흔들고 옷을 입고 나타났는데 마치 평소와 같았다.
7년이 지난 후에 나타나서 산사(山寺)로 다시 내려온 것이었다.
한번은 불롱사(佛壟寺)에 돌아가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닦아온 옛 업들을 생각해 보면 각자가 모두 편안한가?”
제자들은 일어나서 보고 슬픔과 존경심을 가지고 물어보고 말하였는데 오래도록 있다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지의는 신령을 용상(龍象)에 내리고 정신을 강한(江漢)에서 자라게 하며 선행을 닦는 것으로 자기의 생명을 의탁하였으며 그 덕망을 밑천으로 세상을 교화하였다.
몸은 7척이 넘었고 눈은 특이한 광채를 띠었으며 불문을 통틀어 깨달았고 행위는 승위(僧位)를 개척하였으며 산속과 세간에 오가면서도 세속의 번뇌에 물들지 않았고 누차 오묘하고 상서로운 징조에 감응하였으니 그는 추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 황제가 변방에 있을 때 편지를 보내서 산에 들어가 그를 영접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살림도구들을 뿌려 놓고 사원의 구역을 표시한 다음 전당(殿堂)과 부엌 등을 그림으로 그려 놓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작은 인연으로 맺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분명 황태자가 나를 위해 사원을 지어 줄 것이니 이 그림대로 지어야 한다.
너희들도 보아라.”
그후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는데 이 내용은 별전(別傳)에 나와 있다.
또 그가 바닷가에서 살고 있을 때 그곳 백성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고 있었다.
4백여 리에 걸쳐 고기 그물이 이어져 있었으며 강과 계곡에는 60여 개소에 고기잡이 통발이 있었다.
지의는 이것을 측은하게 여기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니 피차가 서로 해롭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죄 될 행위를 버리도록 설복하고 복 될 인연을 맺도록 교화하니 여기서 얻은 돈과 비단이 산처럼 쌓였다.
그는 이것으로 바다의 한 모퉁이를 사서 살아 있는 물고기를 놓아 주는 못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사문 혜발(慧拨)을 보내서 임금에게 표문을 올려 알리도록 하니 진나라의 선제(宣帝)는 칙명을 내려 이 못에서 고기잡이를 못하도록 엄히 금지시켰다.
나라에서는 비석을 세우기 위해 국자좨주(國子祭酒) 서효극(徐孝克)을 불러서 문장을 짓도록 하고 그것을 바닷가에 세웠는데 그 문구들은 매우 슬프고 쓰려서 읽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렸다.
당시 그는 불롱사로 돌아가 평상시대로 선정을 닦고 있었는데 문득 참새 떼들이 하늘을 메우도록 날아대며 서로 경축하고 산사에서 3일간이나 울다가 흩어졌다.
지의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물고기들이 와서 나에게 은혜를 갚는 것이다.”
정관(貞觀) 년대에 이르러 지금까지 이것을 어긴 일이 없었으며 칙명을 내려 금지시키는 것도 진나라 때와 같이 하고 있다.
이 자비로운 구제의 광대함과 어진 혜택은 누구도 따를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또한 그가 산에 있을 때 버섯이 있었는데 나무만 건드리면 버섯이 모두 드리워졌다.
따면 딸수록 그만큼 돋아나 승려들의 일상적인 반찬으로 하였는데 지의가 다른 곳에 가자 버섯도 돋아나지 않았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참으로 도의 감응인 것이다.
그는 『법화소(法華疏)』ㆍ『지관문(止觀門)』ㆍ『수선법(修禪法)』 등을 각각 수십 권씩 저술하였다.
또 『정명소(淨名疏)』의 「불도품(佛道品)」에 이르기까지 37권을 저술하였는데 모두가 그가 말한 내용 그대로 문장을 이룬 것으로서 시자[侍人]가 간략하고 추려서 쓴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글자도 보태지 않았다.
이외에도 사건에 따라 책을 만들어 유포시킨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 모두는 그윽한 종지가 트이고 사무쳐 생각을 끌어 올려 하늘을 개통한 것이다.
수양제는 이것들을 모두 받들면서 하늘이 내린 것처럼 중히 여겼고 제왕이 되자 곧 이것들을 인각(麟閣)에 건사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의 명성과 광휘는 우주에 차고 넘쳤고 그의 인품은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의 마른 해골이 특이하게도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다.
돌문 안에 안장하고 금 자물쇠를 잠갔는데,
이렇게 한 근거는 모두 특별한 칙명과 관련된 것이었다.
해마다 제삿날이면 황제는 반드시 조회를 거두고 미리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산에 가서 제상을 차리고 공양하도록 하였다.
상서령(尙書令) 양소(楊素)는 성품과 도량이 넓고 큰 사람인데 어떤 일이든지 직접 보고서야 믿었다.
그는 자기의 생각대로 “어떻게 마른 뼈가 특이하게 앉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과 같겠는가”라고 말하였는데,
황제의 칙명으로 열쇠를 주어 직접 찾아가 보게 하였다.
그것이 이전에 말한 것과 같은 것을 보고서야 그것을 믿고 돌아왔다.
지의는 동서에 모범을 보였고 만 리까지를 교화하였으며 직접 지은 큰 사원만 해도 35곳이나 되었고 직접 교화한 승려들이 4천여 명에 달하였으며 필사한 경전이 열다섯 창고나 되었고,
금단(金檀)에 그린 화상이 10만 구가량 되었으며,
50여 고을의 도인들이나 속인들이 보살계를 받았다.
그러한 기록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의 행위를 전한 학사들은 32명이나 되고 그 밑에서 선정을 닦은 학사들은 강한(江漢)에 흩어져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사문 관정(灌頂)은 여러 해 동안 그를 모시고 받들었는데 그의 아름다운 행위를 엮은 글이 20여 장에 달한다.
또한 종남산 용전사(龍田寺)의 사문 법림(法琳)도 일찍 그의 종문에 참가하여 계법(戒法)을 전수 받았는데 지의의 덕망이 멀리 퍼지고 훌륭한 제자들이 수림을 이루자 그의 행장과 전기를 만들어 세상에 널리 유포시켰다.
수나라 양제는 말년에 강도(江都)를 순행하다가 꿈에 지자 대사를 만났다.
지자 대사는 꿈에서 자기가 남긴 부탁을 언급하였는데 황제는 이 감응으로 직접 비문을 지었다.
그 문장은 지극히 크고 아름다웠으나 미처 돌에 새기기 전에 난리를 만나 잃어버리게 되었다.
4) 수나라 수도 청선사(淸禪寺) 석담숭전(釋曇崇傳)
담숭은 성이 맹씨(孟氏)이며 함양(咸陽) 사람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정견(正見)을 알았고 어려서부터 불법을 이해하고 신봉하였다.
7세에 출가하여 법다운 말을 널리 외우고 끊임없이 부지런히 정신을 집중하였으며 그후에는 돌아다니면서 강의에 참가하였는데 웅변에서는 그를 앞설 사람이 없었다.
그는 지혜의 등불을 완전히 갖추려면 근본적으로 생각을 집중하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야 하고 깨달음을 이룩하려면 반드시 정상(定想)을 견고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개(開) 선사를 따르면서 그에게 의지하였다.
구족계를 받게 되자 뜻이 더욱 깨끗하고 높아졌으며 마침내 『승기율(僧祇律)』을 10여 차례 배우고 그것에 의거하여 강의하니 듣는 사람들이 3백 명에 달하였고 수도 주변의 계율은 이것을 근본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말로 설법하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먼저 수행하던 관행을 숭상하면서 이마와 코끝에 생각을 집중하고 산간의 나무 밑을 거처로 삼았다.
이윽고 속에서는 열이 나고 겉에서는 살색이 죽어 몸은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은 식은 재와 같았으나 특히 6행(行:6바라밀)에 정통하고 5문(門)을 으뜸으로 통달하였다.
이리하여 개 선사까지도 대중이 모인 곳에서 그를 제일이라고 칭찬하였고 마침내 함께 배우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공경하면서 무상사(無上士)라고 불렀다.
그후 스승이 죽으면서 담숭이 후배 제자들을 거느리도록 하라고 유언하였다.
이때 5부의 대중 2백여 명이 담숭에게 의지하여 선정을 닦아 익히니 명성이 농서(隴西)의 변방지대까지 퍼지고 교화는 관동과 황하 지방[關河]을 원만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길을 묻고 소문을 쫓아 찾아오는 사람들이 천릿길에 이어졌으며 문을 메우고 방에 가득하게 되었다.
그는 앉아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처음에는 부정관(不淨觀)을 닦게 하고 마지막에는 인공관(人空觀)을 배우게 하였으며 저 사람은 자비를 생각하게 하고 이 사람은 바른 법을 넓혀 나가게 하였다.
주(周)나라 무제(武帝)가 특별히 그를 공경하고 받들었는데 마침내 칙명을 내려 말하였다.
“담숭 선사는 덕행에 흠이 없고 정진하여 깨닫는 것이 뛰어나며 그에게 소속된 학도들 가운데서 계율을 범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이것은 마땅히 덕의(德義)를 존중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중 속에서 뛰어나고 모습이 깨끗해졌을 것이니 이 사람은 우리나라의 삼장으로 삼을 만하다.”
그해에 척호사(陟岵寺)의 주지로 임명되어 칙명에 따라 가르치고 인도하니 비구와 비구니들 속에 질서가 잡히고 그의 이름이 널리 퍼졌다.
그는 매번 승단의 직무에 발이 묶여 돌아다니는 것을 승인받지 못하다가 다른 인연을 빌려서야 마침내 자유롭게 되었다.
주나라 말엽에 불법이 폐지되자 곧 당시의 풍속을 따르면서 겉으로는 왕의 위엄에 순종하고 안으로는 도의 근본을 지켰다.
또한 그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등의 관직을 주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비록 액운 속에 빠져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일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
대상(大象) 년대 초기에 수나라가 시작되면서 법의 횃불이 다시 타오르게 되자 곧 120명의 승려들 속에 참여하였고 칙명을 받아 흥선사(興善寺)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뒤이어 다시 특별히 지시가 내려 사원의 소임을 맡아 보게 되었다.
그는 거듭 사양하였으나 나라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도는 승려들 속에서 으뜸이 되었으며 왕과 공경대부들에게 계를 주는 데서 모범이 되었다.
이전에 불법이 무너졌을 때 남몰래 불법이 빨리 융성하기를 소원하여 삼가 한 개의 사원을 지어 말법시대를 빛내려고 하였다.
그 사연을 나라에 보고하니 황제는 곧 9개의 사원을 세워 담숭의 소원에 부합되게 하였으며 모두 나라에서 공급하도록 하다가 문제(文帝) 때에 종결되었다.
고당공(高唐公)은 평소에 행문(行門)을 받고 특별히 믿고 귀의하였는데 마침내 집을 분할하여 사원으로 만들고 대중을 끌어 들여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칙명을 내려 고요한 마음으로 귀의하게 하니 이 사원에서 좌선하는 사람들은 명예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현판을 내려 보내 청선사(淸禪寺)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청명문(淸明門) 안에 있는 사원이 바로 그것이다.
수나라의 진왕(晋王)은 선정을 흠모하고 공경한 나머지 위신을 낮추어 사원의 시주가 되었다.
그는 전후하여 70여 채의 집과 물방아와 맷돌 6조를 보내 오랫동안 기업(基業)을 충족시키도록 하였는데,
그 물건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천자에게 지난날에 불법을 받든 명성은 지금도 친히 행위를 바로 잡고 있다.
개황(開皇) 년대 초기에 칙명을 내려 비단 1만 4천 필과 베 5천 단(端),
솜 1천 둔(屯),
무늬가 있는 비단 2백 필,
명주 20장(張),
다섯 가지 색깔의 좋은 쌀을 총 1천 섬이나 보냈으며,
황후도 명령을 내려 돈 50관,
털옷 50벌,
머리 깎는 칼 50개를 보냈다.
이것은 담숭의 복이 현세의 소원에 감응되어 후세의 희망으로 흐르게 된 것이었다.
담숭은 한 구의 부도를 세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였는데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6알의 사리를 보내 탑에 넣도록 함으로써 불법을 넓히는 행위에 함께 참가하였다.
당시는 불교가 처음으로 열렸으므로 도상(圖像)이 전혀 없었는데 담숭이 이 탑을 세우자 황제는 매우 마음에 들어 칙명을 내려 장공인 두숭(杜崇)을 보내 그 일을 완성하도록 하였다.
이 일에 쓴 비용이 돈 3천여 관과 벽돌 80만 장을 헤아리게 되자 황제는 이 일에 드는 비용이 모자랄까 두려워서 다시 자신이 입던 옷과 황후가 입던 옷을 모두 1천3백 벌을 보내 그 일을 돕고 함께 기뻐하였다.
개황 11년에 진왕이 양월(楊越:南京ㆍ浙江省) 일대를 다스리게 되자 노반(露盤)과 여러 가지 장식들을 만들었는데 14년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그것은 총 높이가 11급(級)으로서 허공에 높이 솟아 빛났으며 수도에서 최고라고 일컬었다.
그후에도 보시가 계속 들어와 온갖 공양거리가 많이 쌓였다.
진왕은 다시 불당과 승원을 짓고 5행(行)을 닦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보냈으며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일도 모두 승려들에게 맡겨 감독하면서 도와주고 완성하도록 하였다.
담숭은 칙명에 의하여 다시 조정의 일을 알게 되면서 오고가는 데 에 막힘이 없었으나 궁궐의 금문(禁門)을 밟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였으므로 논의할 것이 있으면 석장을 짚고 밖으로 나갔다.
이때 그는 대내(大內)에 거처하면서 깨끗한 행위에 대하여 말해 주었는데,
문제는 예의 있게 대접하면서 자칭 사아(師兒)라고 하였고 헌후(獻后)도 대덕을 맞아들이면서 사녀(師女)라고 칭하였다.
그가 본사에 있을 때에는 칙령을 내려 물건을 싣고 가서 안부를 묻고는 하였는데 새벽에 도착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얻을 외부의 이익은 모두 가람에 보시하였고 자신을 위해 가진 것은 옷과 발우뿐이었다.
개황 14년 10월 30일 사원의 승방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80세였다.
황제는 슬프고 애통한 심정으로 칙령을 내려 장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장례에 필요한 것은 담당 관청에서 공급하게 하였다.
도인들과 속인들 제자 5천여 명이 그의 시신을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의 오른쪽으로 내갔는데 그를 위하여 백탑(白塔)을 세우고 명문을 새긴 것이 지금도 남아 있다.
처음 담숭이 생을 마치기 7일 전에 사원 안의 깃발대가 까닭 없이 저절로 꺾였고 문 밖의 우물이 갑자기 말라 버렸는데 대중들은 그 까닭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믐날 밤에 이르러 담숭이 유언하기를 “나는 갈 곳이 있으니 이제 부탁해야겠다”고 하였으며,
곧 옷과 물건들을 삼보에 보시하였다.
새벽에 이르러 그의 이상한 모습을 깨닫고 앞으로 나가 살펴보고 나서야 비로소 숨이 끊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병이 없이 생을 마쳤으며 형색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이 사실을 나라에 알리니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5) 수나라 혜일내도량(慧日內道場) 석혜월전(釋慧越傳)
혜월은 영남(嶺南) 사람이다.
그는 나부산(羅浮山)에 머무르면서 대중을 모으고 선정을 업으로 삼았는데 남월(南越)에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천성적으로 평등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자비로 창생들을 구제하였으며 깊고 험한 곳에서 살았으나 범이나 표범이 침범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짐승들이 그의 앞으로 모여 왔던 적이 있었는데 그가 설법하니 마침내 범이 그의 무릎에 대가리를 올려놓았다.
혜월은 곧 범의 대가리를 쓰다듬어 주었는데 전혀 두려워하는 표정이 없었다.
대중들이 모두 그 광경을 보고 보통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오령(五嶺)에서 교화를 하였으나 명성은 삼초(三楚)까지 퍼져나갔다.
수나라 양제(焬帝)는 변방에 있을 때 뛰어난 승려들을 찾아 선발하였는데 개황 말년에 사인(舍人) 왕연수(王延壽)를 보내 혜월을 불러 추가로 진왕부(晋王府)의 혜일도량(慧日道場)에 들어가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왕연수를 따라 수도로 가서 머무르면서 널리 교화하게 되었다.
말년에 양주(楊州)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병에 걸려 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배 위에 두었는데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밤에는 불꽃이 나와 정수리로 들어갔다가 다시 정수리에서 나와 발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는데 밤이 지새도록 끊어지지 않았다.
도인들과 속인들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였고 왕은 칙명을 내려 본산(本山)에 돌아가 장사를 지내게 함으로써 정성과 공경을 표시하였다.
석혜실(釋慧實)
혜실은 속성이 허씨(許氏)이며 영천(穎川) 사람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출가하였는데 뜻이 굳고 깊고 높았으며 이름난 산들을 두루 돌아다녔다.
양나라 말엽에 천태산(天台山)으로 발길을 돌려 그곳에서 선정의 행위를 종합적으로 익혔는데,
그가 방에 들어가면 문을 폐쇄하였고 방에서 나오면 곧 방이 텅 비었는데 옷과 발우는 몸에 붙어 다니고 오직 평상과 깔개만이 남아 있었으니 실로 가볍고 깨끗한 대장부였다.
진나라가 시작되자 석장을 짚고 용반사(龍盤寺)로 가서 50여 년 동안 인간세상과 자취를 끊었다.
그는 두타행을 귀하게 여기고 숭상하였고 항상 조용히 살았으며 젊어서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았고 비록 몸이 쇠약해지고 나이가 많았으나 깨끗하고 절개 있는 뜻은 늙을수록 더욱 굳어졌다.
인수 4년 8월 23일 장주(蔣州) 이도사(履道寺)의 승방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96세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북령(北嶺)에 버리도록 하였다가 그후에 뼈를 거두어 산의 남쪽에 묻었으며 3층짜리 벽돌 탑을 세우고 나아가서 그의 공덕을 기록하였다.
7) 수나라 문성군(文成郡) 마두산(馬頭山) 석승선전(釋僧善傳)승습(僧 襲),
승집(僧集)
승선은 성이 석씨(席氏)이며 강군(絳郡) 정평(正平)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정업(定業)을 따르면서 급군(汲郡)의 총림인 낙천사(落泉寺)의 방공(方公)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는데 각기 동류들을 모아 바위굴에 의지하여 도를 수행하였다.
그가 백록산(白鹿山)ㆍ태행산(太行山)ㆍ포독산(抱犢山)ㆍ임려산(林慮山) 등을 끊임없이 오고가면서 사방에 이름을 떨치니 귀의하고 높이 받드는 사람이 많았다.
승습(僧襲)
그의 제자 승습은 분수(汾水) 지방의 외진 곳에 있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 승선을 초청하여 널리 교화하려고 하였다.
승선은 비록 여러 번 초청을 받았지만 산에 있는 대중들의 평소의 업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면서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승습이 말하였다.
“지금까지 30여 차례 초청하였으나 백성들의 심정은 그친 적이 없습니다.
발뒤꿈치가 닳아 없어질지언정 마음속에 맹세한 것은 버리기 어렵습니다.”
승선은 마침내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가 마두산(馬頭山)에 머무르면서 선정의 도를 크게 행하니 포주(蒲州)ㆍ우주(虞州)ㆍ진군(晋郡)ㆍ강군(絳郡)에서 보따리를 지고 서로 떠들며 모여드는 대중이 아주 많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4부로 나누었는데,
동서의 두 총림은 배반(杯盤)과 대황(大黃) 등의 선원이 바로 그곳이다.
모두 떨어져 있는 방과 별실들을 가지고 있어 숲과 바위 밑에 별처럼 퍼져 있었고 좌선하면서 지시를 하여 11체입(切入)을 표준으로 삼으니 5백 명의 제자와 권속들이 엄숙하고 조용해졌다.
인수 연간에 그의 도는 더욱 융성하였는데 병이 위독하여 죽게 되자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배 안에 냉이 맺히는 병을 만난 것은 어린 시절에 산에서 살면서 업을 닦을 때 식량이 떨어지면 마을로 구하러 가지 않고 작은 돌을 먹으면서 하루 식량을 보충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으니 내가 죽은 후 창자를 갈라보면 과연 내가 말한 것과 같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부탁하였다.
“각자는 부지런히 업을 닦으면서 속인들을 교화하느라고 수고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들의 바른 임무를 망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 시신을 불태워 다른 중생들의 목숨을 손상시키지 말고 단지 속에 넣어 묻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대업 초년 3월 11일 살아 있을 때처럼 가부좌를 틀고 대황암(大黃巖)에서 생을 마쳤다.
도인들과 속인들이 그의 유언대로 장사를 지냈다.
승습(僧襲)은 본래 강주(絳州)에 머무르면서 마음을 선정에 두고 승선의 뜻을 이어받아 익혔으며 그의 교화를 훼손시키지 않았다.
말년에는 진주(晋州) 보엄사(寶嚴寺)에 머무르면서 승단의 직세(直歲)를 맡아 논밭을 돌보았는데 물과 땅의 벌레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그 참혹한 광경에 견디지 못하여 공직의 명예를 버리고 이전의 업을 따르고 숭상하였다.
승선이 생을 마치던 날 그는 다른 곳에 가고 없었다.
그래서 그때 있던 사람을 찾아가 사연을 들으려고 하였는데 그들도 모두 죽은 뒤였다.
마침내 여러 가지 공양거리들을 가지고 산으로 가서 모임을 마련하고 선배의 자취를 추억하며 비통해하였다.
그는 스승의 묘지를 돌보고 받들려고 하였으나 방도가 없었으며 그 유해를 찾아보아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때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폭발 소리가 숲과 골짜기에 울려 퍼졌는데 땅이 갈라지면서 단지가 밖으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단지를 열어보니 해골은 흰 눈과 같았고 오직 혀만이 남아 있었는데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붉고 선명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해골과 혀 두 가지를 가져다가 탑을 세웠다.
승습은 정관 15년 정월 9일 산사(山舍)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그는 임종의 시각에도 정신과 생각이 편안하였고 염불을 외우면서 생을 마쳤다.
승집(僧集)
당시 진주(晋州)의 서쪽 소유산(小楡山)에 승집이라는 사문이 있었는데 산 속에서 굳은 절개를 지키면서 제자들을 모아 선정의 업을 닦았다.
그는 뱀과 쥐를 길들여 데리고 다녔는데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들은 항상 좌우에 붙어 다니면서 쫓아도 떠나지 않다가도 속인들이 찾아오면 곧 스스로 숨어버렸다.
8) 수나라 상주(相州) 업하(鄴下) 석현경전(釋玄景傳)현각(玄覺)
현경은 성이 석씨(石氏)이며 창주(滄州) 사람이다.
그는 18세에 수재로 뽑혀 업도(鄴都)에 가서 화왕(和王)의 성사(省事)가 되었다.
그는 글을 한 번 읽으면 곧 그 뜻을 따져보았고 다시 그 글을 인용할 때에는 한 번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5년이 지나자 더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그는 뒤늦게 화(和) 선사에게서 『대품경(大品經)』과 『유마경(維摩經)』을 들었는데 현경은 마지막에 왔으므로 문 옆에 서서 들었다.
그는 깊이 비추어 보는 데서 뛰어났으므로 장차 화 선사에게 귀의하여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화 선사는 선정에 명망이 높아 물어보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혜(慧) 법사에게 의지하여 대승의 은밀하고 심오한 극치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미 마음이 만족해지자 출가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는 27세에 처자들과 이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장(臨幛) 이남은 내가 돌아다니던 곳으로서 열반의 경지라고 하지만 임장 이북은 생사가 있는 곳으로서 너희들이 오고가는 곳이다.
나는 맹세컨대 성인이 되지 못하면 다시는 이곳에 건너오지 않겠다.”
그는 다시 화 선사에게 의지하여 머리를 깎고 바른 법을 받았다.
현경은 새벽부터 밤까지 생각하고 가려내면서 미묘한 이치를 모두 이해하였다.
그후 주(周)나라가 불법을 폐지하자 숲속으로 피하여 다시 선도(禪道)로 몸과 마음을 서로 통하게 하였다.
개황 연대 초기에는 인연에 따라 강의하고 인도하였는데 의식 때에는 화려한 것과 검소한 것을 모두 마련하면서 매사에 마음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아침과 저녁의 법회에서 반드시 향탕(香湯)을 땅에 뿌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를 들고 인도하였으며 앞에는 경전을 들게 하고 뒤에는 현경이 따랐는데 애초에 한 번도 그만둔 적이 없었으며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고 깨끗한 것을 보호하는 것을 계율의 조목처럼 공경하였다.
그는 항상 경전을 읽을 때 5줄을 넘기지 않고 외웠으며 끝내자마자 다른 경전을 펼치면 그것도 앞에서와 같이 하였다.
이 때문에 그가 법의 북을 칠 때마다 걸핏하면 1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공양하고 보시하였는데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런 까닭에 현경의 방에는 누런색ㆍ자주색ㆍ검은색의 웃옷과 아래옷이 각각 1백여 벌씩 있었는데,
한 때에 한 번씩 갈아입고서는 착한 마음이 생기도록 하기 위하여 한 번 입었던 옷은 곧 승단에 보시하였다.
그의 감응으로 나타나는 이익은 이와 같이 많았다.
그후 병으로 3일 동안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시자 현각에게 말하였다.
“나는 미륵불을 만나려고 하는데 어찌 야마천(夜摩天)의 주인이 되겠는가.”
또 말하였다.
“손님들이 아주 많으니 일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그 사연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범부의 생각으로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조금 전에 하늘세상의 사람들이 마중 나왔을 뿐이다.”
그후 이상한 향기가 집안에 가득 차 대중들이 모두 향기를 맡았다.
현경이 또 말하였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려고 한다.
앞으로 태어나는 세상에서 좋은 스승이 되기를 원한다.”
마침내 머무르던 곳에서 생을 마쳤으니 그때는 대업 2년 6월이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항상 자신의 유해를 물속에 넣어달라고 소원하였으므로 그가 생을 마친 후에 생전의 뜻을 따라 자맥하(紫陌河)의 깊고 맑은 물속에 수장(水葬)하였다.
3일 후에 가보니 장사를 지낸 곳이 도리어 모래무덤이 되었는데 매우 높아서 물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도인들과 속인들이 그 아름답고 상서로운 현상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현각(玄覺)
현각(玄覺)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자애로워서 선사의 지혜를 본받아 배웠다.
후에 수도에 머무르면서 장엄사(莊嚴寺)에 소속되었는데 순전히 대승만 강의하였으며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에 대하여 특별히 그 뜻을 얻었다.
이리하여 그는 수도에서 부귀영화를 누렸고 당대의 앞장에서 명예를 떨쳤다.
9) 수나라 조군(趙郡) 장홍산(障洪山) 석지순전(釋智舜傳)지찬(智賛)
지순은 속성이 맹씨(孟氏)이며 조주(趙州) 대륙(大陸) 사람이다.
그는 젊어서 서생이 되어 고전들을 널리 통달하였고 글씨를 잘 쓰고 말을 잘하였으며 시골의 향교(鄕校)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는 20세가 넘어 세속이 싫어져 출가하여 운문사(雲門寺)의 조공(稠公)을 섬기면서 백록산(白鹿山)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10년 동안 항상 깊은 곳에 숨어사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시끄럽고 복잡한 일을 하지 않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혼미해지면 곧 신령스러운 신이 나타나 깨우쳐 주었는데,
혹 몸이나 옷을 흔들기도 하고 혹 소리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한 키가 한 길 남짓한 흰옷을 입은 신이 나타나 사원 주위를 돌면서 깨우치고는 하였는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사문 담순(曇詢)과 함께 선정을 닦으면서 4년을 보냈다.
그후 북쪽 찬황(賛皇)의 허정산(許亭山)으로 돌아다니며 그곳에 의지하여 업을 닦으니 명성과 공적이 먼 곳에까지 퍼졌다.
그는 도 닦는 것을 공양하여 도우려는 자가 있으면 곧 임시방편으로 피하였으므로 마침내 12년이 지나도록 물건들을 공급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어느 날 사냥꾼이 꿩을 쫓으니 지순의 방으로 날아들어 왔던 적이 있었는데 지순이 꿩을 놓아주기를 간절히 권고하였으나 사냥꾼은 끝내 달가워하지 않았다.
마침내 사냥꾼이 꿩을 가지고 가려고 하자 지순은 이것을 참지 못하여 자기의 귀를 잘라 사냥꾼에게 주었다.
사냥꾼은 지순의 간절한 충고에 감동되어 곧 활을 버리고 매를 풀어버렸으며 지순에게 도를 배울 것을 청하고 점차 경전의 뜻을 배웠다.
그리고 몇 개 마을의 사냥꾼들을 깨우쳐 그들이 사냥의 업을 버리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곧 어진 마음으로 구제한 정성의 결과였다.
그후 도관(道觀)에 전심하여 익히면서 세속의 인연에는 힘쓰지 않았으며 허망한 마음이 갑자기 일어나 참을 수 없게 되면 곧 허벅다리를 찔러 피를 흘리거나 돌을 안고 탑 주위를 돌면서 잠시라도 생각을 방일하게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허벅다리의 찔린 곳은 비단을 펴놓은 것과 같이 허물자리가 남아 있었으니 그의 뛰어난 지조는 참으로 같은 무리들 속에서 비길 만한 자가 없었다.
그는 산에 거처한 지 여러 해가 흘러 머리를 깎아줄 사람이 없으면 곧 불로 머리칼을 태웠으며 옷이 해지고 식량이 떨어지고 여러 번 추위와 더위를 겪었으며 햇빛으로 시간을 헤아리고 공부한 내용을 분별하였으며 잠시라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천성적으로 탐욕이 적어 손에 재물을 잡지 않았고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을 볼 때마다 눈물이 얼굴에서 줄줄 흘렀는데 혹 옷을 벗어 주기도 하고 혹 자기의 밥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안으로는 환히 꿰뚫고 밖으로는 널리 교화하였으므로 공경스러운 그의 모습을 보고 친한 사람들 중에서 10명이 출가하여 모두 지순에게 의지하여 수행하였다.
그들은 마음을 익히고 인식작용을 조절하면서 지순의 발걸음을 따르며 도풍을 떨쳤다.
그후 나이가 들고 병이 침습하여 기력이 다하였으나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염불을 외우도록 하고 생각을 서방의 정토세계에 두고서 마침내 노환으로 생을 마쳤다.
그는 마지막에 기력이 쇠약해지고 병이 갑자기 심해졌으나 15일 동안 처음과 같이 염불에 힘쓰다가 원씨현(元氏縣)의 굴령선방(屈嶺禪坊)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2세였으니 곧 인수 4년 정월 20일이었다.
처음에는 생을 마친 산 옆에 묻었는데 그후 방자현(房子縣)의 경계인 장홍산(嶂洪山)의 백성들이 평소에 지순의 도를 존중하였으므로 밤에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훔쳐다가 바위굴에 묻어 놓았다.
사람들이 쫓아가서 찾으려고 하였으나 모두 그 장소를 숨겼으며 3년이 지난 후에 관을 열고 시신을 불태워 절벽 위에 백탑을 세웠다.
지순은 출가해서부터 정성을 다하여 정진에 힘썼다.
이전에 그는 유명한 학자로서 자못 자신에 대한 긍지가 높았는데 홀연히 열흘 동안 임시로 부정관(不淨觀)을 닦으면서 창자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보자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고 싫어하였으며 그가 만나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더러운 것이 몸 안에 가득 차 있다고 보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조(稠) 선사를 찾아가 인지(印旨)를 갖추었으며 운문산에 대한 관청의 공급이 앞으로 어려워질 것이라고 추측하고 고요한 산속으로 가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자기의 업을 닦았다.
그는 공식적인 이름에 예속되지 않고 공식적인 사원에도 가지 않았지만 안으로부터 쌓은 공덕이 소리 없이 퍼져 멀리 황제의 궁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황 10년에는 황제의 조서가 내려왔다.
“황제는 조주(趙州) 방자현의 경계인 장흥산 남곡(南谷) 옛 선방사(禪房寺)에 있는 지순 선사에게 삼가 문안을 드립니다.
겨울 날씨가 몹시 찬데 선사의 몸은 건강합니까?
선사께서 창생들을 교화하고 인도하여 빨리 성취하도록 하니 짐은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짐은 수많은 백성들의 위에서 그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바른 법을 보호하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게을리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개봉부(開封府)의 노원수(盧元壽)를 보내 찾아갈 뜻을 말씀드리게 하고 아울러 향과 물건들을 특별히 보내드립니다.”
당시 조주 자사 양달(楊逹)은 지순이 공식적인 승적도 없고 평소에 명성도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그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다.
황제의 지시가 내려오자 비로소 그에 대하여 알게 되었으며 곧 지순의 이름을 동과사(同果寺)에 소속시킴으로써 조서의 뜻을 받들려고 하였으나 지순은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산 속에 사는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사원을 세웠는데 그곳은 세 개의 마을이 사귀는 곳이어서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염불과 선정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 정밀한 경지에 이를 수 없었으므로 오래지 않아 돌아갔다.
이것은 맹렬히 노력하는 그의 정성이 비길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는 해마다 초겨울에는 여러 인연 있는 모임에서 교화하였는데 많은 겹옷들을 마련하여 수인들을 찾아가 보시하였다.
그리고 봄과 가을에는 방등행도(方等行道)를 닦았고 다른 계절에는 깊은 산 속에서 좌선을 더하면서 흙덩어리인 듯 잠을 자지 않았다.
나이가 60세에 이르자 마음과 힘이 약해졌으나 대장경을 전독하였는데 대체로 네 번씩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왼손에는 경전을 들고 오른손에는 촛불을 잡고 열흘 밤이건 닷새 밤이건 눈을 감지 않고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고 공덕을 찬탄하였는데 외우는 것이 흐르는 물과 같았다.
그는 낮과 밤의 6시(時) 동안 예참(禮懺)으로 교화를 마쳤다.
지찬(智賛)
지찬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깨끗한 가르침을 받들었고 커서는 미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섭론(攝論)』과 『열반경(涅槃經)』이 바로 그가 종합적으로 널리 파고든 것들이다.
그는 지금 남전(藍田) 화감사(化感寺)에 머무르면서 선정과 지혜를 이어받아 익히며 그 빛나는 일을 더욱 번성하게 하고 있다.
그는 오라고 부르고 가자고 이끄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끝내 산 속에 숨어 살고 있다.
10) 수나라 구강(九江) 여산(廬山) 대림사(大林寺) 석지개전(釋智鍇傳)
지개는 속성이 하후씨(夏侯氏)이며 예장(豫章)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출가하여 양주(楊州) 흥황사(興皇寺)에 머무르면서 3론(論)에 대한 랑공(朗公)의 강의를 듣고 미묘한 글을 잘 받아들여 당대에 유명하였다.
개황 15년에 천태산(天台山)의 의공(顗公:智顗)을 만나 선법(禪法)을 닦고 익혔는데 특별히 기억력이 좋아서 의공이 그를 찬탄하고 중하게 여겼다.
말년에는 『열반경』ㆍ『법화경』ㆍ『십송률(十誦律)』을 강의하고 그것을 널리 펴면서 당시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았다.
그는 또한 다른 학문에도 밝았는데 문학ㆍ시ㆍ역사에 능하였다.
말년에 여산(廬山)에 머무르면서 대림정사(大林精舍)를 지었는데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모두 그가 종합적으로 지휘하였다.
그 일이 끝날 무렵에는 또 서림사(西林寺)를 수리하였는데 그는 두 곳을 감독하고 살펴보면서 그 일을 모두 끝냈다.
그러나 그는 대림정사를 지키는 데 뜻을 두었으므로 20여 년 동안 산을 내려오지 않고 항상 선정을 닦았다.
수나라 문제가 그를 존중하여 칙명을 내려 불렀으나 병을 구실로 가지 않았다.
그후 예장(豫章)에서 강의를 청하였으나 굳이 거절하고 가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산사(山舍)에서 생을 마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성읍에 가서 죽겠는가.”
그러나 도인들과 속인들이 경건하게 청하니 뜻에 맞지 않았지만 그곳으로 갔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침내 고을의 소재지에 있는 사원에서 생을 마쳤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를 제 명을 아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때 그의 나이는 78세였으니 곧 대업 6년 6월이었다.
몹시 무더운 날씨였지만 살아 있을 때처럼 앉아 있었으며 시신을 가지고 여산의 언덕으로 돌아왔으나 형체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혀 썩거나 냄새가 나지 않고 도리어 이상한 향기가 풍겨 도인들과 속인들이 감탄하고 의아해하였다.
마침내 석실(石室)에 안치하여 봉하였는데 지금도 처음과 같다.
11) 수나라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 석지월전(釋智越傳)파야(波若),
법언(法彦)
지월은 속성이 정씨(鄭氏)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세속을 떠나려는 뜻을 품었는데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혼인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방편으로 물리쳤다.
그는 자라면서 용맹하고 굳세었으며 깨끗하고 아름다워졌다.
당시 낙양전하(樂陽殿下)가 형주(荆州)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를 불러 매우 높은 벼슬에 임명하였다.
그것은 그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오직 마음속으로 출가할 것만을 원하자 왕은 그의 정성에 감동되어 오래전에 품고 있던 소원을 이룩하도록 하였다.
그는 머리를 깎은 후 가는 곳마다 도에 대하여 물었는데 금릉(金陵)에 이르러 곧 지자(智者) 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제자가 되어 배울 것을 청하자 지자는 선법(禪法)을 가르쳐 주었는데 지월은 곧 5문(門)을 깊이 통달하고 6묘(妙)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계율과 행이 청백하고 율의(律儀)가 순수해졌다.
또한 『법화경』을 1만 번 이상 외우니 물병에 물이 저절로 차고 넘쳤는데 이것은 독경의 힘 때문이었다.
당시 지자 대사에게는 제자들이 많았으나 그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임해(臨海)에는 노산정사(露山精舍)가 있었는데 인도의 스님이 지은 것이었다.
이곳에서 신령스럽고 기이한 일이 많이 나타났는데 지자는 그곳으로 갈 때마다 지월에게 지시하여 영향이 미치도록 하였다.
지자가 자취를 감춘 후에는 태령산(台嶺山)의 대중을 모두 부탁받아 20년 동안 묻고 의논하면서 잘 인도하여 스승의 유언을 어긴 적이 없었으니 곧 도인들과 속인들이 의지하고 사부대중들이 귀의하고 숭상하게 되었다.
그는 용모가 아름답고 우람찼으며 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자못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해마다 스승의 제삿날에는 황제의 칙명으로 천승관재(千僧官齋)를 마련하였는데 옷과 발우를 제외한 물자들을 모두 큰 보시에 충당하게 하였다.
수나라 문황제가 헌후(獻后)가 죽은 날에 재를 마련하고 명복을 빌게 하였으므로 해마다 1백 단(段)의 비단을 얻었으나 한 번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는 괄주(括州) 자사 정계백(鄭係伯)과 임해 진장(臨海鎭將) 양신귀(楊神貴)와 사우(師友)간의 의리를 중하게 여겼으므로 대우가 가볍지 않았다.
그는 대업 12년 11월 23일 병으로 자리에 누워 열흘 만에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운 채로 국청사(國淸寺)의 옛 승방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그가 임종할 때 산이 무너지고 땅이 진동하였는데 경내의 도인들과 속인들이 모두 보고 들었다.
파야(波若)
천태산에는 또한 파야라는 사문이 있었는데 고구려(高句麗) 사람이다.
그는 진나라 때 들어와서 금릉(金陵)에 머무르면서 강의를 듣고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였다.
개황 연간에 수나라가 진나라를 병합하자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업을 배우다가 개황 16년에 천태산에 들어가 지자의 제자가 되어 선법(禪法)을 배워줄 것을 청하였다.
그는 기질이 영리하고 지혜가 으뜸이어서 곧 증험할 수 있었으므로 지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이곳과 인연이 있으니 한적한 곳에서 미묘한 행위를 갖추어야할 것이다.
지금 천태산의 최고봉은 화정봉(華頂峯)이라고 하는데 사원으로부터 60,70리 떨어진 곳이다.
그곳은 내가 이전에 두타행을 닦은 곳으로서 그 산신은 바로 대승의 근성을 가지고 있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도를 배우고 수행해나간다면 반드시 심오한 이익이 있을 것이다.
입을 것과 먹을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는 곧 스승의 뜻을 따라 개황 18년에 그 산으로 가서 새벽부터 밤까지 도를 닦으면서 자거나 눕지 않았는데 16년 동안이나 산을 벗어나지 않았다.
대업 9년 2월에 갑자기 스스로 산을 내려왔는데 처음 위에 있는 불롱상사(佛壟上寺)에 이르렀을 때였다.
정인(淨人)들은 세 명의 속인들이 옷과 발우를 지고 따라오는 것을 보았는데 잠깐 사이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래에 있는 국청사(國淸寺)에 이르자 가만히 뜻을 같이하는 친우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오래지 않아 수명이 다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일부러 산을 나와 대중들과 작별하려는 것이다.”
그는 며칠 지나지 않아 병도 없었는데 단정히 앉아 바른 생각에 잠긴 채로 국청사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그의 시신을 넣은 감실을 그가 있던 산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사원의 대문을 나와 상여를 돌려 이별을 표시하자 그의 눈이 곧 떠졌으며 산에 이르자 다시 감겨졌다.
이때 모두 찬탄하고 우러러보면서 함께 도의 마음을 일으켰다.
산 밖에서 본 신령스럽고 상서로운 현상은 이와 같은데 그 밖의 산중에서 일어난 신비하고 이상한 일들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이니 자세히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법언(法彦)
당시 천태산에는 법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속성은 장씨(張氏)이며 청하(淸河) 사람이다.
주(周)나라가 불교를 폐지할 때 난리를 피하여 진(陳)나라로 갔는데 금릉에서 지자를 만나 받들게 되었다.
태건(太建) 7년 지자를 따라 천태산으로 들어가 지자를 받들면서 업을 청하였다.
지자가 선(禪)을 가르쳐 주니 그는 그 가르침을 받고나서 승방에만 머무르지 않고 매일 산속의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오직 선정을 닦았다.
그는 30년 동안 항상 눕지 않고 앉아 있었으며 혹 선정에 들면 7일만에야 비로소 일어났다.
그는 스승에게 자신이 증험한 법의 모습을 말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말하였다.
“그대가 말한 것과 같다면 그것은 8배사관(背捨觀)에서 두 번째로 관찰한 모습일 것이다.”
또한 산신들이 자주 희롱하고 시험해보려고 하였으나 좌선하면서 기뻐하니 그의 생각을 건드리지 못하였다.
대업 7년 2월 30일 국청사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지자의 도는 아주 많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세 명만을 서술하였을 뿐이다.
--------------
1)
산 이름으로서 하진(河津)이라고도 한다.
우왕(禹王)이 홍수를 다스릴 때 험산을 개척하여 황하의 물을 통하게 하였다는 곳.
또는 그 수문(水門)을 말한다.
잉어가 이곳에 올라가면 용이 된다고 하는데 명망이 높은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2)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 나온다.
북쪽의 큰 바다에 있는 곤어(鯤魚)가 붕새로 변하여 남쪽 바다로 간다는 내용이다.
3)
본문에 무평초(武平初)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뒤의 대소산(大蘇山)에서 떠날 때보다 연대가 더 뒤이므로 당연히 무성(武成)의 오기(誤記)라고 보아야 한다.
4)
도간은 말년에 장사군공(長沙郡公)이 되어 도연명(陶淵明),
혜원(慧遠) 등과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였다.
599)
5)개황 연대는 9년 밖에 없으므로 개황 1년의 착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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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醫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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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조용한 곳에 있으면서
청정하게
결계(結界: 깨끗이 재계를 지키고 공부할 도량을 정하는 것)하고
옷을 주문을 외우며 입고,
또 물과 음식과 향과 약을
108 편(一百八遍)씩 주문을 외우고 먹으면
반드시 목숨이 120세 되도록 길어질 것이니라.
만약 능히 여법하게 결계하고
법대로 받아 지니면
모든 것을 다 성취하나니
그 결계법이란
혹은 칼을 가지고 주문을 21 편(遍) 외우고
땅을 그어서
경계를 삼으며
혹은 깨끗한 물을 가지고 주문을 21편 외우고
사방에 뿌려 경계를 삼으며
혹은 하얀 개자(介子)를 가지고 주문을 21편 외우고
사방 상하로 던져 경계를 삼으며
혹은 깨끗한 회(灰)를 가지고 주문을 21 편 외우고
사변(四邊)을 둘러 싸 경계를 삼으며
혹은 생각 가는 곳으로 경계를 삼으며
혹은 오색실(五色線)을 가지고 주문을 21편 외우고
사변(四邊)을 둘러 싸 경계를 삼아도
되느니라.
만일 법대로 받아 지니면,
자연히 과를 얻을 것이니라.
● 사바하 娑婆訶<六十五> s vā hā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65
가마라삼바바
迦摩羅三婆嚩<六十五>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 삼매_게송퀴즈
■ 오늘의 게송
[65일째]
현종종신불가설 $ 065▲鞞麼怛羅鞞麼怛羅為 一 ● 鉢羅麼怛羅, ○□□□□,詣,示,普,處
□□□□□□□, 詣諸國土不可說,
示現神通不可說, 普遍十方不可說,
□□□□□□□, 예제국토불가설,
시현신통불가설, 보편십방불가설,
여러 몸 나타냄을 말할 수 없고
여러 국토 나아감도 말할 수 없고
신통을 보이는 일 말할 수 없고
시방에 두루함을 말할 수 없고
[66째]
처처분신불가설 $ 066▲鉢羅麼怛羅鉢羅麼怛羅為 一 ● 尸婆麼怛羅, ○□□□□,親,作,種,清
□□□□□□□, 親近諸佛不可說,
作諸供具不可說, 種種無量不可說,
□□□□□□□, 친근제불불가설,
작제공구불가설, 종종무량불가설,
곳곳마다 나누는 몸 말할 수 없고
부처님 친근함을 말할 수 없고
공양거리 마련함도 말할 수 없고
가지가지 한량없음 말할 수 없고
●K1060_T2152.txt★ ∴≪A속고금역경도기≫_≪K1060≫_≪T2152≫
●K1075_T2060.txt★ ∴≪A속고승전≫_≪K1075≫_≪T2060≫
●K1061_T2150.txt★ ∴≪A속대당내전록≫_≪K1061≫_≪T2150≫
법수_암기방안
65 견상(肩 =
66 상완(上腕)
65 견상(肩 =
65 견상(肩 =
434607
903
○ 2019_1104_175123_nik_exc 지리산 피아골
○ 2019_1104_112006_can_exc_s12 구례 화엄사 구층암
○ 2019_1104_110855_can_fix 구례 화엄사
○ 2019_1104_100704_can_exc_s12 구례 화엄사
○ 2020_1114_161728_can_ori 삼각산 도선사
○ 2018_1023_132146_nik_exc 예산 덕숭산 수덕사
○ 2020_1017_151514_can_exc_s12 삼각산 화계사
○ 2020_0930_142704_can_ori_rs 화성 용주사
○ 2020_0910_182842_nik_ori_rs 월악산 신륵사
○ 2020_0909_142510_nik_ori_rs 무주 백련사
○ 2020_0909_131122_nik_ori_rs 무주 백련사
○ 2020_0908_162945_nik_ori_rs 합천 해인사
○ 2020_0905_112045_can_ori_rs 오대산 월정사
○ 2020_0904_090707_nik_ori_rs 여주 신륵사
○ 2019_1201_153939_can_exc 원주 구룡사
○ 2019_1106_155321_can_fix 화순 계당산 쌍봉사
○ 2019_1106_154152_can_fix 화순 계당산 쌍봉사
○ 2019_1106_135548_can_fix 화순 영구산 운주사
○ 2019_1105_110859_nik_exc 순천 조계산 선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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