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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4일 금요일

불기2565-06-04_반야등론석-k0578-008








『반야등론석』
K0578
T1566

제8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반야등론석』 ♣0578-008♧





제8권







♥아래는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페이지 내용 업데이트 관련 안내]

❋본문
◎[개별논의]

○ [pt op tr]






○ 2020_0907_161314_can_ct5 양산 통도사

○ 2020_0904_092932_nik_bw24 여주 신륵사



❋❋본문 ◎[개별논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般若燈論釋卷第八
K0578

○ [pt op tr]






『반야등론석』 ♣0578-008♧






◎◎[개별논의] ❋본문



● 고통의 생사현실에서 고통이 발생한 적이 없다는 이상한 논의

『반야등론석』에 다음 내용이 제시된다.
...

▸ 다시 부처님께서 성문승(聲聞乘)에게 설하셨으니,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말하였다.
‘부처님이시여,
고(苦)는 자기 원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자타(自他) 모두로부터 만들어 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무인(無因)으로 인해 만들어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




...

이를 받아들이면 고통이란 발생한 적이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생사현실에 고통이 있다.
현재 글을 적는 본인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불편하다.
그래서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 위 내용에 의하면 고통은 발생한 적이 없다고 해야 한다.
이상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부분이 불교 경전이나 논서 부분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래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야 망집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논의는 과거 『회쟁론』을 살피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내용을
대강 살폈다. 현재 각 부분이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밀려 있다.
다만 정리는 안 되어 있지만, 필요한 기초 내용은 살폈다.

여기서는 왜 현실에 고통을 느끼는 이들이 많은데도
고가 없다고 하는가를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


현실에 본래 고통은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다양하게 겪는다.
그리고 이것이 수행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제시해보자.
해결할 생사고통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각 중생은
그 상태에서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명료하게 반복해 겪는다.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자신이 겪는 생사고통이 실답게 현실에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증상을 겪는 주체가 특별한 한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대다수다.
즉 수많은 중생이 일정한 시기와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에
엇비슷한 생사고통을 반복해 겪는다.
본래 한 단면 한 단면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런 상태로 현실에 각 주체가 임한다.
또 그런 사정으로 그런 생사고통이 실답게 있는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문제삼을 생사고통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는 입장이 드물다.


그리고 이 두 차이가 크다.
한 쪽은 생사현실을 니르바나 자체로 여기고 임한다. [생사즉 => 열반]

그런데 일반적 입장에서는 이와 반대로 임한다.
본래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본래 니르바나다.
그런데 그런 니르바나를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로 실답게 여기고 임한다. [열반즉 => 생사]
이 차이가 서로 극단적이다.


경전과 논서에서는 위 앞 부분을 원칙적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일반인 입장과는 극단적으로 정반대다.
그래서 일반인 입장에서는 위 내용을 도무지 쉽게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어렵게 이해해도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위 내용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임하게 되기 쉽다.


즉 본래 생사현실이 공하고 차별이 없음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자신이 아무렇게 함부로 임해도 된다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또는 아무것도 안해도 무방하다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를 악취공견이라고 칭한다.
하필이면 생사현실이 차별이 없음에도 하필 매 경우마다 지옥에 처해 임하는 수행자가 된다.
자신도 고통을 겪는다. 그 상대도 고통을 겪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른 중생도 제도하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다른 중생도 고통을 더 심하게 받게 한다.
이것이 차별없는 공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이런 문제가 『중관론』 안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그래서 『중관론』이나 『반야등론석』을 통해 그 내용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수행시 나아갈 방향도 다시 잘 이해해야 한다.


생사현실에 본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이 사실을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도 생사현실에서는 특수한 배경 사정[망집]으로 인해
각 중생이 없는 생사고통을 매 순간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겪는다.
또 그런 사정으로 위 사정을 잘 이해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사실 위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필요없다.
이해하던 못한던 겪을 생사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위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즉 본래 겪어야 할 생사고통이 없다. => 그런데 어리석음에 바탕해 겪고 있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스스로 자각해 깨달아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위 두 내용이 서로 극단적으로 반대된다.
그래서 처음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




우선 생사현실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본래 겪어야 할 생사고통이 없다. => 그런데 어리석음에 바탕해 겪고 있다.


이 상태에서 우선 다음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지 않도록 되도록 미리 예방해야 한다.
아니면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생사고통을 바로바로 벗어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즉 본래 상태는 생사고통 자체를 얻을 수 없다.
이런 본 상태와 마찬가지로 생사현실에서도 생사 고통에서 바로바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예 생사 현실의 묶임에서 벗어난 상태도 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그런 상태에서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생사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로 여여하게 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자신이 생사현실이 꿈과 같음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자.
그리고 다시 생사현실 안에서도 그런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생사현실에서도 그처럼 여여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꿈에서 매번 고통을 겪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꿈을 깨고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리고 침대가 놓인 현실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꿈을 꾸는 그 상황에서도 이 사정을 잘 이해하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꿈을 깬 상태나 꿈을 꾸는 상태나 별 차이가 없게 된다.


그런데 다음과 같다고 하자.
꿈을 깬 상태에서는 이 사정을 이해한다.
그러나 잠을 자면서 꿈을 꿀 때는 이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서 꿈꿀 때마다 악몽을 꾸면서 고통을 받는다고 하자.
그러면 문제가 된다.


그래서 꿈을 꾸는 상황에서 꿈 밖의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이 현실 밖의 본 바탕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생사현실 밖에 머무르나, 생사현실 안에 머무르나 별 차이가 없다.
적어도 그런 깨달음을 갖는 주체 입장에서만은 그렇다.
그래서 그 주체 입장에서는 어느 경우나 무방할 수 있다.


그래서 일단 생사 묶임에서 벗어나 머무르게 되면 아라한의 상태가 되었다고 칭하게 된다. [회신멸지]
그런데 그렇게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벗어나 생사현실 밖에 머문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이제 생사현실에 그대로 남아 고통을 받는 중생의 제도가 곤란해진다.


그래서 중생을 위해서는 그 수행자가 자비심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다시 들어가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수행자는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 다음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야 한다.
이 경우 생사현실 안에서 본 바탕이 공함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꿈의 상황과 같다.
즉 꿈을 꾸면서 그 꿈이침대가 놓인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상태로 꿈을 꾼다고 하자.
이런 상태처럼 현실에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생사현실에 임해서도 생사현실 즉 니르바나의 상태로 여여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 (생사 즉 열반)
그리고 다시 그런 바탕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 안에서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자량을 구족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 자량을 구족해야 비로소 다른 중생을 원만하게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현실에서 여러 생사고통이 문제된다.


각 주체는 출생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낯선 상황으로 대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같이 고통이다.
처음 태어난 아이가 자주 우는 사정도 그것이다.
대하는 상황 하나하나가 뜻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노병사 과정 하나하나가 다 문제된다.
늙어가면 각 기관이 퇴화한다.
다리 무릎도 아프다.
눈도 잘 안 보인다.
힘도 없어진다. 등등이다.


그러다가 질병을 겪게 된다.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이런 질병이나 사고를 만나 한 생을 마치게 된다.
이 과정을 각 주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겪게 된다.


그 외 여러가지 고통이 나열된다.
원증회고
애별리고
구부득고
오음성고 등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각 주체가 원하는 바대로 성취되지 않는다.
이것이 삶의 문제다.
그 때마다 고통을 겪게 된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양한 삶의 문제가 있다.


과거에는 신분지위가 낮아 다른 이에게 묶여 살아가는 상태가 있었다.
노예와 같은 상태다.
현대에도 자신의 뜻과 달리 억지로 무언가를 행할 수 밖에 상태에 놓인다.
그러면 실질적인 노예와 같다.
그러다가 범죄를 행하면 아예 감옥에 갇히게 된다.
또 가난의 고통이 있다.
그리고 질병의 고통이 문제된다.
이러한 것들이 현실에서 문제된다.


만일 어떤 이가 자신부터 그런 상태에 처하면
다른 이를 제도하기 힘들게 된다.


자신부터 노예 상태로 또는 죄인으로 갇혀 지내고
자신부터 가난하고 전염성이 강한 병에 걸려 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현실에서 그 자신부터 구호를 받는 것이 급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다른 이를 구호하고 제도하기 곤란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부터가 생사현실에서 겪는 기본적 고통이기도 하다.


결국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할 때는 스스로 이 문제부터 잘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중생제도를 원만하게 행할 수 있다.



>>>


한편 현실에서 각 주체는 생사의 개별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즉 각 주체가 망집에 바탕해 일으키는 무량한 소원들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 해결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임하면 무량한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도 대부분 현실에 이렇게 임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우선 이런 중생에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개별적인 문제를 잘 해결하면서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


그런 가운데 반야등론석에서 제시하는 내용들의 이해가 문제된다.
현실에 고통이 없다는 내용도 그런 부분이다.


이는 다음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감각기관을 통해 감각내용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좋고 나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이에 대해 일정한 분별 판단을 행한다.


고통이란 이런 과정에서 겪는 내용이다.


어떤 이가 감각하는 내용을 ● 이라고 표시해보자.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느끼는 느낌을 ! 이라고 표시해보자.
그리고 이에 대해 분별하는 관념을 □ 이라고 표시해보자.


그러면 그 관계는 다음과 같다.
● => ! => □




어떤 이가 목마를 때 물을 마시면서 시원함을 느낀다고 하자.
그리고 상쾌함을 느낀다고 하자.
이 가운데 무엇이 감각이고 무엇이 느낌인가부터 잘 구분해야 한다.
자신이 목마를 때 물을 마시면 좋음을 느낀다.
그런데 만일 익사 상태에서 갓 벗어난 상태에서 물을 대하면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일단 물에 대해 감각을 하는 바탕에서 느끼게 된다.
그래서 느낌과 감각을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느낌은 감각은 아니다.
감각을 바탕으로 일으켜 얻는 내용이다.


여하튼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일정한 분별 판단을 한다고 하자.
그것은 또 감각과 다르다.


예를 들어 눈으로 물을 바라 본다고 하자. 이것은 감각이다.
눈을 통해 얻는 감각내용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분별한 내용은 눈을 감고서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구분해야 한다.
이것을 혼동하면 반야등론석이나 중관론에 논의를 살피기 힘들다.


한편 이들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이다.
즉 자신이 관계헤서 얻는 내용이다.


자신이 눈을 통해 세상 모습을 바라본다고 하자.
앞에 나무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이 상태에서 눈을 감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이 상태에서 다음 질문을 제기해보자.
이제 안 보인다.
그러니 자신이 보지 못하면 직전에 본 나무는 사라져 없게 된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보지 못해도 자신과 관계없이 여전이 무언가가 실재하고 있다고 할 것인가.
이런 것이 문제된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본 바탕 실재의 논의다.


이들 논의가 다 중관론 즉 반야등론석 논의와 관련된다.
그래서 먼저 이들을 잘 구분해야 한다.


실재는 자신과 관계없이 본래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이 무언가의 문제다.
그래서 이처럼 문제되는 본바탕 실재를 # 로 표시해보자.


그래서 존재성이 문제되는 각 내용을 크게
본 바탕 실재# - 한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 ● - ( 느낌! ) - 분별내용 ■ 으로 나열할 수 있다.




생사고통도 이와 관련된다.


중관론에서 제시하는 결론은 다음에 초점이 있다.


어떤 이가 위와 같은 과정으로 현실에서
일정한 감각(●)을 얻는 가운데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분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른다.
그런 상황에서 약간 쓰라린 감각을 느낀다.
그리고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정서적으로도 상당히 걱정되고 불안을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종합해 고통이라고 분별하게 된다.
이런 일련과정이 있다.




이것은 다음 문제다.
앞에서 존재성이 문제되는 각 내용을 크게
본 바탕 실재# - 한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 ● - ( 느낌! ) - 분별내용 ■ 으로 나열했다.


그리고 고통이 있다고 분별하게 되었다고 하자.


이 때 그렇게 분별한 내용은 관념내용 ■ 이다.
그런데 그 관념내용 ■ 은 느낌! 에서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감각내용 ● 에서도 얻을 수 없다.
더욱이 본 바탕 실재 #에서도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관념영역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키게 된 것 뿐이다.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를 다시 정리해보자.
한 주체는 현실에서 일정한 감각 내용 ● 과 느낌 ! 분별 내용 ■ 을 얻는다.
그래서 이들 각 내용은 얻는 내용이다.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중관론에서도 이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내용을 얻는다.
그렇지만 이들 내용은 그런 관계로 각 영역에서 얻는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본 바탕 실재 # 에서는 그 사정이 더욱 그렇다.


그처럼 다른 영역에서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렇게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각 영역에서 그처럼 얻는 것 뿐이다.
=>
그래서 그 관계가 마치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다.
그래서 실답지 않은 내용이다.
=>
따라서 이에 대해 집착을 갖고 임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곤란하다.


이런 내용을 이해시키려는 취지다.




그런데 현실에서 대부분 이처럼 임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이 분별한 내용이 각 영역에 그처럼 실재한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각 내용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된다.
이처럼 잘못된 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매 상황에서 일정한 업을 도저히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여기면서 행하게 된다.
즉 망집에 묶여 업을 행해 나가게 된다.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다른 영역을 휘젖게 된다.
그러면 또 그런 바탕에서 결국 생사고통으로 여기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끔 된다.
그리고 이후 이런 상태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는 상태에 게속 묶이게 된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예방하려면 원인단계에서 미리 원인을 제거해 예방해야 한다.
이것이 쉽고 편하다.


벼랑에서 떨어져 고통을 당한다고 하자.
그 상태에서 그 고통을 벗어나려면 대단히 힘들다.
그러나 벼랑에 떨어지기 전에 벼랑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중단하면 훨씬 쉽다.
또 그렇게 걸어가게 만든 망집을 제거하면 더 쉽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현실의 정체에 대한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 망집은 이것만 놓고 보면 별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정체를 잘못 본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망집을 방치하면 이에 바탕해 업을 행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예방단계로 이를 제거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중관론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생사현실의 본 정체를 잘 파악하려면
본 바탕 실재의 내용을 잘 파악해야 한다.


이는 꿈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과 성격이 같다.
꿈을 꾸는 순간은 꿈을 대단히 생생하게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만 의존하면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꿈의 정체를 파악하려면 꿈내용만 대하면 곤란하다.
꿈의 정체를 올바로 판단하려면 꿈 밖의 침대가 놓인 현실을 함께 놓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꿈이 실답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 감각을 생생하게 얻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분별은 동시에 명료하게 행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을 동시에 얻기에 이 둘을 접착시켜 잘못 이해한다.
그런 가운데 이들 내용만 가지고 판단하면 이들이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래서 본 바탕 실재를 함깨 놓고 이 정체를 잘 관하는 것이 요구된다.


현실에서 고통을 문제삼는다.
그런데 본 바탕 실재는 그런 고통을 얻을 수 없다.
이런 사정을 함께 이해해야 현실의 정체를 올바로 파악하게 된다.


실재를 잘 파악하는 것은 실재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본 바탕 실재만 붙잡고 살피면
현실이 이렇든 저렇든 다 무방하다고도 할 수 있다.
본 바탕 실재에서는 고통을 얻을 수도 없다.
그런 사정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한 적도 없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냥 방치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않다.


사정이 그런데도 현실에서 고통을 겪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려면 먼저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정체를 잘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 것이다.


그래서 실재를 잘 파악하는 것은 실재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본 바탕에서는 그런 고통을 얻지 못한다는 사정을 파악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꿈의 사정과 같다.
꿈꾸는 상황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침대가 놓인 현실사정을 잘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런 사정과 마찬가지다.


- 현실에서 문제삼는 고통이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런 취지다.




매번 중관론 내용을 살필 때마다 이런 내용을 반복하게 된다.
과거에도 수없이 반복했다.
그런데 내용을 살피려면 또 반복하게 된다.
본 내용 이해를 위해서는 이런 기본적 이해가 먼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앞의 내용을 밝히는 방식을 살펴보자.
( 이에 대한 기본적으로 원칙적인 방식도 과거에 살폈다.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


여기서는 반야등론석에서 제시하는 방식만 살핀다.
이는 원칙적 방식에 대해 보조적으로 가정적 항변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본 바탕 실재# - 한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 ● - ( 느낌! ) - 분별내용 ■
관계를 놓고 보자.


현실에서 일정한 분별을 일으키면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 있다고 잘못 여긴다.


예를 들어 눈을 떠서 일정한 모습을 본다고 하자.
영희가 있다고 분별한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그에게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일정한 영역을 손으로 가리키게 된다.
그렇게 가리킨 부분이 먼저 문제된다.
그렇게 가리킨 그 부분의 본 정체가 무언가 하면 감각현실이다.
그리고 그 마음안 내용이다.


그런데 그 부분은 감각현실이다.
관념분별이 아니다.


감각현실은 관념내용이 아니다.
관념내용도 감각현실이 아니다.
다만 그런 감각현실을 대해 그런 분별을 일으킨 것 뿐이다.
그래서 그 감각현실 부분에는 그가 생각하는 내용은 얻을 수 없다.


이것을 혼동하면 안 된다.


본 바탕 실재와 관념내용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또 본 바탕 실재와 감각현실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매 경우 이를 대부분 혼동한다.


그래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각 주체가 손으로 일정한 감각현실 부분을 가리키게 되는 것이다.


그는 그가 손으로 가리킨 그 부분이 자신이 생각한 영희라고 여긴다.
또 그 부분에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고도 여긴다.
여기서는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본 바탕 실재는 더더욱 사정이 그러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는 원칙적 방안은 문제되는 각 영역을 놓고 대조해 보면 된다.


즉 본 바탕 실재가 감각현실 인가.
감각현실이 본 바탕 실재인가 이것을 놓고 살피면 된다.


또 감각현실이 관념내용인가.
관념내용이 감각현실인가
이것을 직접 놓고 살피면 된다.


이것이 반야 경전에서 제시하는 원칙적 방식이다.


그런데 중관론에서는 보조적으로 가정적 항변 방식을 사용한다.


위 방식으로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려면 중관론처럼 보조적으로 상대주장을 논파시키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가정적]
그러면 이러이러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니 어떻할 것인가. [항변]
이런 문제를 지적해 상대 주장을 논파시키려는 취지다.


이런 취지를 위해 두 방식이 사용된다.


귀류논증 형태 또는
자립 논증 형태가 그것이다.




이 두 방식은 외관상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 두 방식의 본 취지는 마찬가지다.
여하튼 상대에 눈높이를 맞추고
상대의 주장이 잘못임을 상대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제시하려는 취지다.
그 방식으로 귀류논증 형태와 자립논증 형태가 방편상 사용되는 것 뿐이다.
이 주장 자체를 중관논사가 직접 세우려는 취지가 아니다.


그래서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하다.


그런데 중관논사가 이런 논파과정에서 무언가를 대신 확립하려고 한다고 하자.


만일 그렇다고 하자.
그렇다면 중관논사 자신부터 문제가 된다.
중관논사 입장은 무언가를 확정해 확립해 제시할 수 없음을 제시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자립논증 형식이나 귀류논증을 하는 각 경우를 그런 취지로 이해하면 다 문제가 된다.
그런데 중관논사 입장은 그런 취지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취지 자체가 중관논 자체에도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중관논사는 어떤 내용을 확립해 제시하려는 입장 자체가 아니다.
단지 상대가 그런 주장을 하면 상대 입장에서 그런 문제가 발생함을 밝혀주려는 입장일 뿐이다.
이것을 귀류논증 형식이나 자립논증식 형태로 상대입장에 서서 대신 제시해주는 것 뿐이다.
즉 가정적 항변의 취지일 뿐이다.


즉 상대가 일정한 주장을 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입장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가정적 )
그러면 상대입장에서는 그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곤란하다. ( 항변 )

이런 사정을 제시해주는 것 뿐이다.


이 관계를 s-m m-p ∴ (따라서 ) s-p 형태로 보여주려는 입장을 자립논증 형식이라고 한다.
반대로 상대가 주장한 s-p 형태를 전제로 놓으면 일정한 모순적인 결론이 도출됨을 제시해서
상대주장을 논파하는 방식을 귀류논증 형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두 방식의 본 취지는 다 마찬가지다.

물론 외관상 자립논증식은 비판자가 이런 형태로 무언가를 확립하는 외관을 조금 더 띈다.
그러나 그것은 귀류논증식도 마찬가지다.


귀류논증식을 취할 때도 같은 문제가 있게 된다.
즉, 일정한 상대 주장을 받아들이면 일정한 잘못된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관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 관계도 외관상으로는 그 성격이 자립논증식과 엇비슷하다.
그런데 중관논사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런 관계 자체를 확립해 제시하는 취지는 아니다.
다만 상대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문제가 된다'는 사정을 밝혀 주려는 취지일 뿐이다.


즉, 중관논사들의 입장은 본래 그렇지 않다.
다만 상대 입장과 눈높이를 맞추어서 상대 주장을 받아들이면 그런 문제가 있게 됨을 보여주는 것 뿐이다.
그리고 중관논사가 무언가를 확립해 제시하려는 취지가 아닌 것은 둘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두 입장의 외관만 붙잡고 그 본 취지나 입장이 서로 다른 것처럼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하다.







여하튼 그 세부방식은 다양하다.


여기서는 관고품의 내용만 살피기로 하자.
어떻게 상대 주장이 잘못임을 밝힐 수 있는가.




( => 너무 길어졌다.

간단히 제시하기로 한다. )


그 핵심 근거는
현실에서 고통이
연(緣)으로부터 생기한다는 점이다.

상대는 고통이 본 바탕에 실재한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어떻게 상대 주장이 잘못임을 밝힐 수 있는가.


이런 경우 고통은 현실에서 연(緣)으로부터 생기한다
그런 사정을 이해한다면 위 주장이 잘못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취지다.


이 두 내용의 관계를 잘 이해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이 두 내용의 관계가 왜 그렇게 되는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연기관계는 곧 그 내용이 공함을 밝히는 근거가 됨은 확립되어 있다.
그래서 위 내용만 제시해도 충분하다.
그런데 일반적 입장에서는 이 자체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결론이 전제에서 너무 비약되었다고 여기기 쉽다.


즉 무언가가 연으로부터 생겨난다는 내용이
그 내용들이 실재하지 않음을 밝히는 근거가 되는가부터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수학문제와 같다.


어떤 이가 직각 삼각형에서 밑변과 높이가 각기 3 와 4 임을 제시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빗변은 5 라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해한 입장에서는 이 내용을 쉽게 이해한다.
즉 앞 내용에서 뒷 내용이 도출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피타고라스 정리를 먼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앞 내용에서 뒷 내용이 왜 도출되게 되는가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전제에서 결론으로 너무 근거없이 비약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중관론 문제도 마찬가지다.






다시 한번 문제를 살펴보자
현실에서 감각내용● 과 느낌 ! 분별내용■ 을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었다.
그 관계를 다음처럼 놓았다.
본 바탕 실재# - 한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 ● - ( 느낌! ) - 분별내용 ■


이 때
분별 내용 ■ 이 실재 # 영역에도 그대로 있는가가 논의의 초점이다.


그런데 문제삼는 내용 ■ 이 연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고 하자.
그러면 이를 근거로 그 ■ 은 본 바탕 실재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님도 밝힌 것이 된다.
이런 내용이 이 부분의 핵심이다.


그것은 사실은 간단하다.
본 바탕 실재 #에 있다고 하는 내용은 그런 성격을 갖는다면 처음부터 # 실재 내용이 안 된다.
그런 사정 때문이다.
지금 문제삼는 것은 실재#다.
그런데 실재#는 그런 셩격의 존재를 찾은 것이 처음부터 아니다.
즉 자신과 관계없이 본 바탕에서 그대로 자체적으로 있다고 할 내용으로서 실재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내용이 다른 것과 의존해야만 얻어지는 관계에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만으로 실재#가 아님도 밝힌 것이 된다.
이런 취지다.


C 가 얻어지는 연기관계(인과)를 다음처럼 식으로 나타낸다고 하자.
a + b => C


그러면 이 식 자체가 다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이 식은 우선 현실에서 a + b => C 의 관계를 반복해 경험한다는 의미도 갖는다.
그래서 위 식을 확립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 식은 동시에 다음도 확립시키게 된다.


즉 C 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 무상
C 는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가져다 준다. => 고
C 는 참된 실체적 존재가 아니다. => 무아, 무자성
C 는 (a + b) 의 관계를 통해 얻는다.
이처럼 C 가 그런 관계를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은
우선 C 는 원인 부분 (a + b) 영역에서도 얻지 못함을 위 식이 자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그런 관계자체를 떠난 실재영역에서는 역시 그런 C 를 얻지 못함도 함께 나타내는 것이다.
=>
따라서 그런 관계를 떠나서 문제삼는 본 바탕 실재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 죽 공하다. )
따라서 본 배경 영역 부분에서 문제되는 C 는 얻을 수 없다. [ 불가득 공, ]
그래서 그 영역은 본래 그런 문제를 얻지 못하는 상태다. => 열반 적정


위 식 자체가 이들 내용을 모두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연기 즉 공의 관계가 확립되어 있다.
그래서 위 관계부터 잘 이해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A 라는 관념이 다른 관념과 상대적인 관계로 성립된다고 하자.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사정만으로 그것은 본 바탕 실재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이 확립된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자식, 앞과 뒤, 이런 내용들이 사정이 마찬가지다.
즉 위 관계와 마찬가지다.
문제삼는 A는 그와 상대되는 다른 관념에 의존한다.
이 사정은 곧 그런 관념과의 상대적 관계를 떠난다면,
얻을 수 없음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정만 밝히면 상대 주장이 논파된 것이다.


그래서 중관론에서 짧게 제시한 내용들은 모두 그런 취지다.
그래서 이를 대할 때 논의의 비약이 있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즉 근거 없이 결론으로 뛰어 매번 넘어간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위 사정을 밝히면 그것으로 상대 주장은 깨진 것이다.
상대는 그런 관계없이도 본 바탕 실재에 본래부터 그런 내용이 실재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그래서 상대 주장이 논파된 것이다.
이런 의미다.
그래서 그 배경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vqgt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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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맹목적인 보시 지상주의의 위험성

보시는 좋음을 베푸는 행위다.
그리고 수행에서 가장 기초가 된다.

수행은 결국 자신과 다른 중생이 다 함께
고통을 벋어나고 무량한 좋음을 얻게 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래서 각 경전에서 보시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또 그 가운데 재물보다는 법의 보시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보시를 잘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이 보시를 강조하다보면
자칫 이 보시가 맹목적이고 지상절대적인 것인 것인양
오해를 불러 일으킬 여지도 있다.

보시를 행할 때는 다음과 같은 여러 문제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우선 보시를 행할 때
이를 받는 이만 세상에 유일한 것은 아니다.
좋음을 받기를 원하는 다수 주체가 있다.
그래서 이들 각 주체간의 관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 가운데 자신이 어떤 좋음을 베풀 때 이로 인해
다른 주체가 나쁨을 받게 된다고 하자.

또 그것을 받는 주체가 지금은 좋음을 얻지만, 이로 인해
나중에 나쁨을 받게 된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좋음을 베풀었다고 하기 곤란하다.

예를 들어 칼이나 독을 베풀어
그로 인해 상대가 나중에 다른 이를 해치고
또 그 자신도 나중에 해침을 당하거나 나쁜 결과를 얻는다고 하자.

지금 당장은 그 상대는 좋음을 얻어 좋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이는 그로 인해 피해를 받기에 곤란하다.
또 그로 인해 그 상대도 나중에 나쁨을 받아 곤란하다.
이런 경우까지 좋음을 베푸는 행위로 권장하기 곤란하다.

경전에서도 독이나 칼을 베푸는 행위는 오히려 좋지 않다고 제시된다.

적국이 자국만 갖고 있고 자국을 지킬 수 있는 어떤 좋은 물자를 요구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까지 상대가 원하니 이를 베푼다고 하자.
그러면 이로 인해 국내의 대신들과 백성이 모두 싫어한다.
이 경우에도 적국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는 좋음을 베푼 행위다.
그러나 국내의 대신이나 백성 측에 초점을 맞추면 그 반대의 의미를 갖는 행위가 된다.

아내와 아들딸을 베푸는 사례가 나오기도 한다.
이런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를 받는 입장에 초점을 맞추면 좋음을 베푼 행위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데 종으로 묶여 팔려다니는 아내나 아들딸의 입장을 놓고 보면 그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한편 이를 받는 상대가 그로 인해 길게 좋음을 얻게 되는가의 문제는 또 이와 다르다.
그러나 만일 이로 인해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곤란하다.
그에 해당하는 대표가 독과 칼을 베푸는 행위다.
결국 이 사례에서 이런 보시를 받은 상대는 끝내 조달이 되어 장구하게 지옥에 갇히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 경우는 오히려 상대에게 길고 긴 고통을 준 결과가 된다.

따라서 단순히 보시를 맹목적으로 지상절대주의로 행할 때는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무언가 좋음을 베풀 때는
그것이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모든 생명이 제한없고 차별없이 좋음을 얻고
그것도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좋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하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모든 측면이 좋은 상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좋음의 구극에는
각 주체가 보리(깨달음)을 얻어 번뇌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얻어
또 다른 중생을 그처럼 이끄는 상태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어떤 행위가 이 가운데 어떤 일부를 충족하더라도
다른 부분이 그렇지 못하면 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한편, 무언가 하나의 좋음을 베풀 때는
이로 인해 상대가 보리를 얻게 한다는 상위 가치와 목적이 전제된다.
즉 상대가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
어떤 좋음을 베푸는 행위가 이바지하기에
이로 인해 좋음을 베푸는 행위가 가치를 갖는다.

보시란, 보리를 깨닫게 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수단적 가치를 갖는다.

단순히 한 측면의 좋음과 구극적인 깨달음 보리나 중생제도 사이에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자.
이 경우 보리와 중생제도를 우선해야 한다.

당장 한 측면에서 단순한 좋음을 얻지만,
이로 인해 구극적인 좋음인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좋음이 아니다.

반대로 구극적인 좋음인 깨달음을 얻지만, 지금은 당장 좋음을 얻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차라리 낫다고 해야 한다.

쉬는 동안 태자 수단나가 나오는 경전을 읽었다.
태자 수단나는 보시를 위해 국고와 자신의 사재를 다 소비한다.
그런 태자의 성향을 이용하여 적국이 코끼리를 요청한다.
이 코끼리는 그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코끼리를 보시받는 적국은 좋아한다.
그러나 그 나라의 왕과 대신 백성이 모두 대단히 이를 싫어한다.
그런데도 태자는 적국에게 코끼리를 보시하여 쫒김을 당한다.
한편 숲에 쫒긴 수단나 태자는 나중에는 자신의 부인과 아들딸까지 바라문에게 보시한다.
그런데 그 바라문은 나중에 제바달다가 된다.
그리고 제바달다는 끝내 장구하게 지옥에 갇히는 상태가 된다.

이는 맹목적인 보시가 불러 일으키는 위험을 나타낸다.

어떤 한 쪽에게 어떤 한 시점에 어떤 한 측면에서 좋은 것을 베풀 수 있다.
그런데 그 행위가 동시에 다른 쪽에게는 심한 고통을 주는 경우가 있다.

한편 위와 같은 경우 다른 측면에서는 다른 나쁨을 많이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상대에게서조차 장구하게 볼 때 장구한 고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좀 더 고려를 해야 한다.
그런 경우까지 보시를 무조건 행하면 이는 잘못이라고 해야 한다.
이는 맹목적인 보시 지상주의가 불러 일으키는 위험이다.


이런 경우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쪽이 있다.
그런데 왜 그쪽은 무시하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쪽에는 좋음을 베풀지 않고 나쁨을 주려 하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한편 그 상대에게 나중에 나쁨을 주게 하려 하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왜 오래오래 좋음을 주지 않고 잠시 일시적인 좋음만 주려하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한편 어떤 보시가 의미를 가지려면
그로 인해 상대가 보리를 깨닫고 좋은 상태로 바뀌어야 한다.
즉 중생제도를 위한 수단 방편의 가치를 갖는다.
수단은 그것을 통해 성취하는 목적에 의해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런데 보시를 하는 행위로 인해 다른 대다수가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왕이나 대신이나 백성이 함께 이를 기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따라 행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심지어 자신을 해치고 죽이려 하거나 내몰아 내려는 뜻을 갖게 한다.
그렇게 만든다면 오히려 문제다.

한편, 보시를 받는 상대도 문제다.
상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입장이다.
상대를 함부로 무시하는 이가 다른 이에게 다른 이의 자녀나 부인을 종으로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그 요구를 들어주어서 그가 좋게 변화되는 것도 아니라고 하자.
그런 경우는 더욱 문제다.



숙왕화님이 일정보다 앞서 돌아왔다.
그래서 치료 결과가 좋아서인가 하고 알아보니 오히려 그 반대다.
결과가 예상보다 나빠서 일단 돌아온 것이다.

1 차례 큰 수술을 마치고 몇 주만에 나타난 숙왕화님은 얼굴이 완전히 바뀌었다.
얼굴이 완전히 달리 바뀌었다. 살도 빠지고 핼쓱해져서 나타났다.
그런데 수술을 마쳤지만, 결과가 좋지 않고 이전보다 더 상태가 나쁘다고 한다.
또 시간을 두고 한 2 차례 수술을 더 해야 한다고 한다.
별달리 위로의 말을 전하기 힘들다.

그래서 현실은 본래 꿈과 같음을 말해 주었다.
꿈이 때로는 원하는 좋은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꿈을 계속 꾸어야 한다고 하자.
그러면 꿈이 꿈인 줄 알고
이왕이면 그 꿈 내용이 좋은 형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여하튼 숙왕화님은 의외로 담담하다.
지금까지 지켜보면 숙왕화님은 이론으로만 수행을 하는 본인보다 모든 측면이 나아 보인다.

요즘 페이지를 작성하면서 랜덤으로 뽑힌 노래를 들어 보게 된다.
그러면 연이어 같은 맥락의 내용을 듣게 된다.
현실은 꿈과 같다.
그러나 그 꿈의 내용이 고통스럽게 되는 사정이 있다.
각 주체가 망집에 바탕해서 업을 행해나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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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5-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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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다라(總修多羅). 12부경 가운데서 수다라부경을 말함. 이것은 총수다라 가운데서 제각금 다른 뜻으로 11을 나누어 놓고, 바로 법상(法相)을 말하되, 11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특히 총명(總名)을 취하여 별명(別名)을 삼은 것.

답 후보
● 별수다라(別修多羅)
보리수(菩提樹)
보살도(菩薩道)
보시(布施)
보장(寶藏)
보현삼매(普賢三昧)
보현행(普賢行)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2020_1017_152539_can_bw3_s12

○ 2020_0910_134213_can_BW27

○ 2020_0909_154549_can_ct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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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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