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고(苦)는 무자성(無自性)이며 대치(對治)되는 것은 공(空)이다, 굳어진 집착을 부정하기 위하여 이 품을 짓는다.
외도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모든 음(陰)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고(苦)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고는 없으리니, 두 번째 머리가 없는 것과 같다. 오음이 곧 고라는 것은 마치 경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고집(古集) 역시 세간의 견처(見處)이고 또한 그것은 존재하네. 이러한 뜻인 까닭에 제일의제 중에 모든 음(陰)이 존재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고(苦)에 관한 허망분별은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고(苦)는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다느니[自作] 다른 것에 의해 만들어진다느니[他作] 자타(自他)로 인해 만들어진다느니[共作] 무인(無因)으로 만들어진다느니[無因作]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 옳지 않네.
【釋】제일의제에서 여러 가지로 무량하게 이치대로 관찰하면 그것은 모두 옳지 못하다. 무엇을 관찰하는가? 고는 자기를 원인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고(苦)가 만약 스스로 만들어진다면 연(緣)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네.
【釋】스스로 만들어지므로 인연(因緣)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苦)가 연(緣)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이러한 주장이 없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시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이른바 연(緣)으로부터 생기한다는 것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현재의 음(陰)을 원인으로 해서 미래의 음이 생기할 수 있네.
【釋】제일의제에서는 모든 음의 상속(相續)을 조달(調達)이라 이름하며, 조달의 작용이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연기(緣起)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한 존재가 현재의 음을 원인으로 하여 나중의 음(陰)을 끌어당겨 생기(生起)하는 것과 같다.
주장은 바로 이와 같다. 다시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신(身) 등의 모든 근(根)과 각(覺)과 취(聚)는 비록 다르지만 아(我)에는 차이가 없다.
하나[一]가 편주(遍住)하여, 또한 이 ‘작업을 짓는자[作者]’는 고(苦)를 짓기 때문에 곧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만약 ‘모든 작용들은 찰나찰나 생멸하여 무상(無常)하다’고 말한다면 이 말에는 오류가 있다. 어떤 오류가 있는가?
마음의 찰나와 함께 발생하는 고는 곧 이 괴로운 찰나의 마음의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른 것이 작업한 결과를 자신이 받는다’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그대의 의도가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자신의 주장과도 어긋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그대가 ‘장부(丈夫)가 곧 작업을 짓는 자[作者]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주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허공과 같다. 상주로써 증험하였으니, 장부가 곧 ‘작업을 짓는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장부가 곧 ‘작업을 짓는 자[作者]’라면 법의 자체(自體)를 파괴하게 된다. 설정한 주장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그대가 결정코 ‘아(我)가 이 고(苦)를 만든다’고 말한다면 연(緣)으로 생기하지 않는다는 이와 같은 오류가 있다.
이 뜻은 무엇인가? 아법(我法) 가운데 고를 이름하여 아(我)라고 말한다.
주장의 뜻은 이러하다. 다시 만약 ‘장부가 작업(作業)하는 것이 곧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다른 인연(因緣)을 의지하지 않는 게 아니며 함께 작용한 후 나중에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무량한 원인과 함께 아(我)가 고(苦)를 짓기 때문이다.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마치 저 마른 풀과 소똥 등이 불을 일으키는 연(緣)이 되는 것처럼, 주장의 뜻도 바로 그러하다.
다시 조달의 고(苦)는 조달의 아(我)가 작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苦)로부터 연유하기 때문이니, 마치 야야달다(耶若達多)의 고와 같다.
그대가 앞에서 ‘만약 찰나에 모든 작용 등에 개별적인 작용이 없다면, 그 업과 만들어진 것은 바로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지금 그대에게 답하겠다.
제일의제 중에서는 고를 말할 수 없으므로 나에게는 과실이 없다. 세제에서는 비슷한 상속(相續)의 인과(因果)는 다르지 않다. 세간 사람들이 모두 보고 다음과 같이 ‘저곳의 등불이 이곳으로 온다. 이 암라(菴羅)나무는 내가 심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또한 그와 같다.
나중 순간의 상(相)에 저 앞의 사(思)가 상속하여 인과가 다르지 않으며, 앞의 상사(相思)가 이 찰나의 사(思)가 쌓은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은 업이 소멸할 경우 나중 순간의 원인이 된다.
마치 등불처럼 앞의 순간이 나중 순간의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이 전전상속(展轉相續)하여 마침내 결과를 얻는 데 이른바. 그러므로 작용 없이[不作] 결과를 얻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이미 작용하여 실멸(失滅)한 것도 아니다.
만약 그대의 뜻이 ‘모든 작용의 찰나에 앞에서 쌓은 업을 나중에 결과로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상속처럼’이라 말하는 것이라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니,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곳곳[處處]에서 연기하는 법(法)은 곧 연(緣)이 아니고, 또한 연과 다르지도 않으니 상주(常住)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네.
【釋】나의 주장은 이와 같다. 그대가 “다르기 때문에”라고 이유를 든다면 이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의 마음의 찰나로부터 전래된 업(業)이 아직 대치(對治)되지 않고 상속하여 결과를 이루니 공능(功能)의 수승함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자광색(紫鑛色)의 즙을 마다롱가(摩多弄伽)나무 종자(種子)에 흡수시켜 그것을 심으면 훗날 꽃 중에 자광색이 있는 것처럼, 세제와 어긋나지 않는다.
다시 장부(丈夫)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말하였다. “한편으로 업(業)을 짓고 한편으로는 결과를 받는다. 위와 같은 오류는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앞의 ‘한편’이란 말은 작용하지 않고 결과를 얻는 것이고, 뒤의 ‘한편’이란 말은 이미 작용이 실괴(失壞)한 것이다. 작용의 경계[邊]에서는 영원히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이러한 오류가 존재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아(我)는 하나이므로 과실이 없다. 어떻게 하나임을 알 수 있는가? 하나라는 수(數)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아가 하나라는 수와 상응한다는 이와 같은 뜻은 없다. 왜냐하면 유(有)를 말미암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하나라는 수와 같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고(苦)는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앞의 음(陰)이 나중의 음과 다르고 나중의 순간의 음이 앞 순간의 음과 다르다면 이 음은 저 음으로부터 발생하므로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고[他作苦]’라고 말할 수 있네.
【釋】만약 사람이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고(苦)를 얻는다면 법의 실체(實體)는 성립하지 않는다. 설정한 주장에 오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옳지 못하다. 어째서 옳지 못한가?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조달의 나중의 음(陰)은 앞의 음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조달의 음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나중의 자기 음의 실체와 같다. 또한 고체(苦體)의 상속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주장 명제와 비유가 앞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시 집착이 있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사람이 조성한 업(業)의 결과를 자신이 받는다고 말하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모든 상태의 차별은 다 사람이 짓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진 고(苦)’라 말하거나,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고’라고 말하는 두 학파가 세운 그러한 오류는 나에게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단지 이러한 말만을 했지만, 이 또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사람 스스로 고(苦)를 짓는다면 고 떠나 별개의 사람이 없네. 어떤 것이 그 사람이 말하는 사람 스스로 짓는 고인가?
【釋】무엇이 고(苦)인가? 이른바 오음(五陰)의 상(相)이다. 저 고음(苦陰)을 떠나서 따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사람이 고(苦)를 짓는다는 것이다.
다시 그대가 집착하여 사람과 오음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하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단지 오음에 대하여 조달이라는 이름을 시설한 것일 뿐 사람은 가히 얻을 수 없다. 연기(緣起)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병 등과 같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사람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이 이미 성립하지 않으므로 ‘고(苦)를 짓는 자’도 없다. 다시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고가 만들어진다면 그 주장도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다른 사람이 고를 지어 이 사람에게 준다면 고를 떠나 어떻게 다른 것이 존재하여 다른 것으로부터 고가 만들어진다고 말하는가?
【釋】고를 떠나 사람은 없다.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별체(別體)가 존재함을 이해시키려 하지만 증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고를 짓는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앞서 이미 증험을 하여 여러 가지 이해 못하는 부분들을 밝혀 주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스스로 짓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다른 것으로 인해 짓는 것이 존재하는가? 만약 다른 사람이 고를 만든다면 저것은 도리어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自作]’이네.
【釋】스스로 고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다른 것으로 인해 고가 만들어지는 것임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이 말은 옳지 못하다. 마치 별개의 상속과 같다. 결정된 업을 받는 것이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진다면[他作] 이와 같은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어디에 다른 것으로 인해 짓는 것이 존재하는가?”라고 설한 말뜻은 이와 같다. 그대가 ‘상태[位]에는 차별이 있으나 사람에게는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허망 된 말이다. 이 뜻으로 인하여 만약 스스로 고가 만들어진다거나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진다는 주장은 다 옳지 못하다. 다시 다른 니건자(尼犍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은 스스로 고를 짓기 때문에 고는 바로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고(苦)는 곧 사람이 아니므로, 이를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스스로 만들어지고 다른 것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두 주장이 모두 성립한다.” 용수(龍樹)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스스로 고(苦)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옳지 못하네.
【釋】사람은 고를 만들지 못한다. 이 뜻은 이와 같다. 괴로움은 자체가 없고 사람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고의 실체가 곧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고(苦)는 다시 고를 만들지 못하네.
【釋】앞의 게송에서 “고가 만약 스스로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연(緣)으로부터 일어나지 못하네”라고 설한 것처럼, 이 두 구절은 저기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말의 뜻은 이와 같다. 또한 만약 고(苦)가 다시 고를 만든다면 곧 결과가 다시 결과를 만드는 것이 된다.
또한 고가 스스로 생기한다면 인연(因緣)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세간 사람들이 알 수 없다. 그대는 앞에서 “고가 곧 사람은 아니며,
이 사람이 고를 만드는 것을 이름하여 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他作]이다”라고 말하였으나,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다른 것이 고를 만든다면
【釋】외도의 의도는 사람으로서 다른 것[他]을 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실체가 없어 고를 만들 수 없다. 어째서 만들지 못하는가? 공(空)하기 때문이다. 공이란 곧 사물이 없는 것[無物]이니, 어찌 생기(生起)함이 일어나겠는가? 생기 없이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주장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다른 것이 없는데 무엇이 고를 만드는가?
【釋】이 다른 것이라는 뜻도 없다. 말뜻은 이와 같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스스로 만들어진다느니,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진다느니 하는 주장 모두 옳지 못하다. 자타(自他) 모두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자기 원인과 다른 것 두 가지로 고를 만들므로 오류가 없다”라는 주장을 부정하기 위하여 용수보살께서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하나하나의 작용이 성립한다면, 자타 두 가지의 작용이 고를 만든다고 말할 수 있네.
【釋】하나하나 작용이 성립하지 못함은 앞에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고(苦)는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도,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자타 두 가지가 고를 만든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며, 또한 무인(無因)도 아니다. 왜냐하면 무인이라는 집착은 무기품(無起品)에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이것에 대하여 게송에서 말하였다.
자타(自他) 두 가지가 (고(苦)를) 만들지 못하는데 무인(無因)에 어떻게 고가 존재하겠는가?
【釋】이 품은 앞에서부터 고를 부정하였다. 만약 무인(無因)이라면 또한 고는 없다. 무인에 고가 존재한다는 이러한 뜻은 없다. 제일의제 중에 고는 성립할 수 없다. 말뜻은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저 고에 실체가 없음을 여러 차례 관찰하였고, 외도가 이 품의 첫머리에서 ‘모든 음(陰)은 존재한다. 고이기 때문에’라고 이유를 들어 말하였으나, 제일의제 중에 이 집착은 성립하지 않는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홀로 고(苦)를 관하여도 네 가지 주장이 성립 못할 뿐만 아니라 외계[外]에 존재하는 모든 법에도 네 가지 종류가 또한 다 없네.
【釋】앞에서 말한 이치대로 저 외계[外]의 색(色) 등을 관찰하여도 이 뜻은 없다. 어째서 색은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원인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또한 연(緣)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니, 마치 싹의 자체(自體)를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라 이름하여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他作]’이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어째서 옳지 못한가?
모든 대(大)를 색(色)에 대해 다른 것[他]이라 이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계[他]이기 때문이니, 마치 색의 자체와 같다. 또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색은 자체가 없다.
다른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또한 (자타가) 함께 만드는 것도 아니다. 하나하나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무인(無因)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무인에 관한 집착은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소리 등도 마땅히 똑같이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품의 첫머리에서 ‘고(苦)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말한 것에 과실이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지금 이 품에는 ‘고는 곧 공(空)하다’는 주장을 나타내 보이려 하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립 할 수 있다. 마치 『반야바라밀경』 중에 “부처님께서 극용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색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이와 같이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만약 색ㆍ 수ㆍ상ㆍ행ㆍ식이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라면, 이것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또한 『범천왕소문경(梵天王所問經)』에서 “무엇을 성제(聖諦)라 하는가? 고(苦), 혹은 집(集), 혹은 멸(滅), 혹은 도(道)를 성제라 이름하지 않는다.
고(苦) 등이 생기하지 않음을 성제라고 이름하니,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 다시 부처님께서 성문승(聲聞乘)에게 설하셨으니,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말하였다. ‘부처님이시여, 고(苦)는 자기 원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자타(自他) 모두로부터 만들어 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무인(無因)으로 인해 만들어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
이와 같이 여러 경전 중에서 자세히 설해지고 있다. 「관고품(觀苦品)」의 해석을 마친다.
13. 관행품(觀行品)
다시 모든 행(行)의 여러 차별이 다 무자성(無自性)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이 품을 짓는다. 여기서 외도가 경(經)을 인용하여 주장을 세운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 허망한 겁탈법(劫奪法)을 말씀하셨네.
【釋】어떻게 모든 행(行) 등의 법이 허망함을 알 수 있는가? 모든 행 등은 자체(自體)가 없기 때문이다. 범부를 속이기 위하여 삿된 지혜로써 분별하여 가히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허망하다. 또한 저 제일의제(第一義諦)의 경계에 대한 생각 등은 망실(妄失)의 원인이 되므로 이것은 곧 허망한 법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여러 경(經)에서 모든 비구들에게 이와 같이 설하셨다는 것이다. ‘저 허망한 겁탈법’이란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을 말한다. ‘최상의 진실’이란 이른바 열반진실법[涅槃眞法]을 말한다. 이와 같이 모든 행(行)은 곧 겁탈법이며, 멸괴(滅壞)의 법이다. 성문법에서도 이와 같이 말하셨고, 대승경전 중에서도 이 말씀을 하셨다. 모든 유위법은 다 허망하고, 모든 무위법(無爲法)은 다 허망하지 않다는 이 두 가지 성스런 가르침[阿含]은 모든 행(行)이 곧 허망법(虛妄法)임을 밝힌 것이다. 이 주장은 성립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 중에 내(內)의 모든 법은 공하다. 왜냐하면 겁탈법(劫奪法)이기 때문이니, 마치 환화(幻化)의 사람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주장과 이유에 차별이 없기 때문에 그대가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이 공(空)하다고 말한 것도 존재하지 않고, 겁탈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장이 성립하지 못한다. 과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일 허망하여 탈법(奪法)이 없다면 무엇을 겁탈(劫奪)이라고 말하는가?
【釋】그대는 주장과 이유가 모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 마침내 어떤 사물이 가히 겁탈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허망과 겁탈이라는 두 말은 없다[無]는 뜻이 아니다. 무슨 뜻으로 경계를 분별하는가? 저 자체(自體)가 공하다는 것이 곧 허망의 뜻이다.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유하면 빛의 그림자와 같다. 이것이 겁탈의 뜻이다. 이유와 주장 두 가지가 같지 않으므로 나의 주장에 이유가 빠졌다는 과실은 없다. 두 가지 오류가 없기 때문에 의도하는 주장은 성립한다. 다시 겁탈이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번뇌장(煩惱障)을 제거하고 마침내 지혜장(智慧障)의 뿌리를 남김없이 영원히 없애 이러한 말을 하신 것이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이를 설하신 것은 공의 뜻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네.
【釋】겁탈이란 말은 공(空)과 별개의 실체[體]가 없다는 것이다. 저곳에 연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저곳에 불이 있다는 말과 같다. 외도가 말하였다. “‘허망이란 말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말하자면 여래께서 모든 법은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허망이라 말씀하셨는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법(法)이 변이(變異)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모든 법에는 자체(自體)가 없네.
【釋】이 게송은 무슨 뜻을 주장하는 것인가? 이른바 모든 법이 변이함을 보기 때문에 모든 법은 무체(無體)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실체가 없다는 것인가? 상주(常住)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허망이라는 말을 하신 도리는 이와 같다. 또한 게송에서 말하였다.
유체(有體)는 무체(無體)가 아니네.
【釋】어찌하여 유(有)라고 이름하는가?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도리에 의하면 모든 법은 실체가 없다고 하지만, 이는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이네.
【釋】모든 법에는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주장은 이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법이 변이하는가?
【釋】이 실체는 변이하고 있다는 것을 현견(現見) 할 수 있기 때문에, 변이의 법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은 실체로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실체가 변이(變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실체가 없다면 곧 변이도 없으리니, 마치 석녀(石女)의 아이와 같다. 실체가 있어 변이하기 때문에 내입(內入) 등이라 말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일의제 중에 법에는 자체가 존재한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법에 자체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변이(變異)가 존재하는가?
【釋】법에 자체가 존재하여 변이한다는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체는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저 실체가 변이함을 현견(現見)한다. 그러므로 저 변이하는 실체와 무자체(無自體)는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대가 제시한 이유는 자신의 주장과 서로 상반된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허망법’이라는 뜻은 이른바 여실(女實)하지 않다는 것이다. ‘법이 무자체임을 현견한다’는 것은 무아(無我)의 뜻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체란 곧 아(我)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법의 변이를 본다’는 것은 모든 법의 전변멸괴(轉變滅壞)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망이라는 말은 무아라는 말과 서로 떨어질 수 없다. ‘허망’이란 말은 곧 무아를 말하는 것이며, 공(空)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도(聖道)가 아직 일어나지 않아 아견(我見)의 산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 내외(內外)의 모든 법에 아(我)와 아소(我所)의 빛의 그림자가 현현(顯現)한다. 성도가 일어날 때 모든 법에 아 및 아소를 다시 분별하지 않는다. 만약 모든 법이 무자체라고 말한다면 외도가 아에 대해 집착한 것처럼,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주장이 성립한다면 곧 내가 이루려는 바를 이룬다. 이와 같은 이유로 무아(無我)는 성립하지만, 공(空) 및 무자체(無自體)는 성립하지 않는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들이 법에 실체가 없다고 분별하는 것은 말하자면 마치 토끼의 뿔에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두려움이 발생한다. 비유하면 어린이가 밤에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며 정신을 잃고 공포에 또는 것과 같다. 그대 또한 이와 같다. 마치 그대가 말한 것처럼 외도가 아(我)에 집착하여 이 무아(無我)를 설정한 것은 내가 의도하는 것은 성립시킨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지금 진리를 잘 들으시오. 만약 이 허망이라는 말로써 무아(無我) 및 외도가 집착하는 아(我)가 또한 무자체(無自體)임이 성립시켜 이렇게 이해하면, 이와 같이 내가 지금 법공(法空)으로써 이유를 들어 그대에게 개시(開示)하는 것 또한 사람이 무아라는 주장이 성립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무아[人無我]라는 것은 저 법공과 서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因]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해(信解)하게 한다. 주장 명제가 ‘소리는 무상하다’와 같은 것은 어떻게 이유를 댈 수 있는가? 그것은 작용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작용하기 때문에’라고 말한다면 고(苦)와 공(空)과 무아(無我) 또한 성립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허망한 법이 성립한다면 그 자체가 없어 바로 ‘사람이 곧 무아라는 주장’을 성립시킨다. 서로 상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가 말한 것처럼 ‘허망이라는 뜻은 모든 법의 자체가 머물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라고 한 주장에 이제 답하겠다. 만약 법에 가히 집착할 수 있다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저 실체에는 변이(變異)가 없으며 나머지 또한 변이가 없네. 마치 젊음에 늙음이 작용하지 못하고 늙음 또한 젊음에 작용하지 못함과 같네.
【釋】이 두 비유는 숫자의 순서처럼 상사(相似)하고 상대(相對)한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법(法)이 자체(自體)에 머물면서 변이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체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젊음과 늙음과 같다. 만약 전찰나(前刹那)와 다른 모습[異相]에 늙음이 머무는 것을 이름하여 변이(變異)라고 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습은 이미 가버렸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늙음과 젊음과 같다. 외도가 “마치 우유가 자체를 버리지 않고 전변하여 낙(酪)이 되는 것과 같다. 이 뜻으로 인하여 이유[因]는 부정인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지금 그대에게 묻겠다. 무엇이 낙(酪)인가? 저들은 우유가 그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유가 곧 낙으로서 자체를 버리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분별하여 낙이라 이름하는가? 결정되어 있다고 분별하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이 실체가 곧 다르다면 우유는 마땅히 낙(酪)이어야 하네.
【釋】우유는 색깔과 맛과 역용(力用)과 이익 등을 버리지 않으므로 우유는 낙이 되지 못한다. ‘다른 것[異]’도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우유와 다른 어떤 사물이 존재하여 능히 저 낙을 발생시키는가?
【釋】낙이 생기할 수 없으므로 그 밖의 실체에도 또한 변이가 없다. 그대가 부정인이라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어떤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나도 또한 ‘우유는 낙을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낙의 상(相)은 우유와 서로 다르다. 그러나 화합의 자재력(自在力) 때문에 우유는 낙을 발생시킨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하는 화합의 자재력이란 이 우유가 자체(自體)를 버리고 능히 낙을 발생시킨다는 것인가? 자체를 버리지 않고 낙을 발생시킨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만약 자체를 버린다면 우유가 낙을 발생시킨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자체를 버리지 않는다면 이는 곧 (주장과) 서로 어긋난다. 무엇이 어찌하여 어긋나는가? 만약 이것이 우유라면 어떻게 낙이라 이름 할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이 낙이라면 어떻게 우유라 말하는가? 세간에서 모두 이와 같이 이해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유는 낙을 발생시키지 못하고 단지 변하여 낙이 된다’고 말하면, 이와 같은 주장은 또한 앞에서와 같이 부정된다. 그와 같이 관찰하면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이 다르다는 것은 모두 성립하지 못한다. 그대가 ‘모든 법(法)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말한 것으로써 이유를 든다면, 이 이유는 성립하지 못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은 공(空)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과 상위(相違)한 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마치 전도(顚倒)된 지혜와 전도되지 않은 지혜와 같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상위한 법이 없으리니,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불공(不空)과 다르기 때문에 공법(空法)이 존재한다. 이러한 뜻으로 앞에서 ‘모든 법은 공하지 않다’고 이유를 댄 것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제일의제 중에 음(陰) 등이 존재한다면 존재하는 사물을 제거하여 공법(公法)에다 세우는 것이므로, 제일의제 중에 어떤 법도 공(空) 아님이 없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어떤 법도 공하지 않다면 이것을 관찰하므로 공이 존재하네. 어떤 법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면 어디에서 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釋】공(空)과 불공(不空)이란 세제의 법체(法體)에 의지한다. 이와 같이 분별하는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마치 집에 사람이 머물면 집이 비지 않았다고 말하고, 사람이 머물지 않으면 집이 비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제 제일의제 중에 어떤 법도 공하지 않음이 없은데 어디서 공법(空法)을 얻겠는가? 그대가 앞에서 상위(相違)한 법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분별하여 이유를 댄 것은, 이유가 성립하지 못한다. 단지 집착을 부정하기 위해 공하다고 가설한 것일 뿐이다. 다시 십칠지론자(十七地論者)가 말하였다. “분별된 것처럼, 자체가 없기 때문에 분별의 실체도 공하다. 이 모든 법이 공함은 진실로 존재한다. 어찌하여 진실인가? ‘작업을 짓는 자[作者]’를 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이러한 견해를 공(空)에 집착하는 견해라고 말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내가 공에 집착한다고 말하는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일체의 법에는 실체가 없으므로 공하며, 공도 실법(實法)이 아니다. 그러므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앞의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어떤 법도 공(空)하지 않다’면, 곧 분별지(分別智)의 경계인가? 무분별지(無分別智)의 경계인가? 만약 어떤 사물이 곧 공하다면 이것을 공지(空智)의 경계라고 이름한다. 그래서 이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물도 공(空)하지 않음이 없다’면 이것은 이른바 모든 법은 다 공하다고 이름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게송에 이르길 ‘어디에서 공함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다시 ‘어떤 법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불공(不空)의 견해란 허공의[空火]이 타는 것이다. 공이라 분별하는 것 또한 타기 때문이다. 이 까닭으로 게송에서 ‘어디에서 공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시 둘[二]을 행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분별을 짓는다. ‘마치 환(幻)으로 화작(化作)된 말 따위처럼 실체(體)가 없기 때문에 공하다. 실제의 말 등과 같은 것은 실체가 존재하여 공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깨달음의 차별일 뿐이다. 무이(無二)의 행을 하는 자가 무분별로써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제일의제의 경계가 진실하여 일체법을 관(觀)하는 것이다. 마치 허공과 같아, 하나의 모습[一相]이나 모습이 없는 것[無相]으로 보아도 보이는 것[所見]이 없다. 게송에 이르길 ‘어떤 법도 공하지 않음이 없는데 어디서 공함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러한 뜻인 까닭에 그대의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외도가 말하였다. “제멋대로 성립하지 않는다. 하고 서로 어긋난다고 하면서, 그대는 모든 순간에 항상 공의 관점에서 부정한다. 내 뜻도 그러하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내가 하고자 하는 주장이 이루어진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공지(空智)가 생기하므로 모든 법은 공하지 않다. 법체(法體) 스스로 공하여 지혜로 공을 요별 할 수 있기 때문이니, 마치 등불을 비춰 병(甁)이 없음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 병에는 실체가 없어 가히 존재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까닭으로 그대의 말은 잘못 사량(思量) 한 것이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는 공하다고 말하여 다른 사람에게 오류를 짓게 한다. 그러나 공에 의지하여 공에 작용이 없음을 보고, 또한 공이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대들이 하려는 주장은 무너지며, 또한 자신의 주장과 어긋난다. 어찌하여 자신과 어긋난다는 것인가? 『범천왕소문경(梵天王所問經)』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공(空)을 이해한 자라면 모두 법성(法性)을 보네.
또 『능가경(楞伽經)』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화합(和合)을 떠난다면 이와 같은 실체는 존재하지 않네. 그러므로 공(空)은 생기(生起)하지 않으니, 나는 무자성(無自性)이라 말하네.
이처럼 그대는 아함(阿含)에 위배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중에서 ‘나의 법문(法門)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이해한다면 옳은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어찌 법이 아닌 것임에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듣지 못하였는가? 또한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密經)』 중에 ‘색이 공함을 관(觀)하지 않고 색이 공하지 않음도 관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과 간다. 이것은 공견(空見)도 또한 집착이므로 반드시 부정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또한 작용이 공하지 않다고 분별한다면 이 역시 버려야 한다. 이 두 집착은 큰 과오이기 때문이다. 공을 버리지 않는다면 오류가 존재한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견해들의 오류는 마음을 어지럽힌다. 부처님께서는 아직 고(苦)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고의 종자(種子)를 끊고자 하므로 제일(第一)의 자비를 일으키신다. 마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여래께서 공법(空法)을 말씀하심은 모든 견해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네.
【釋】견해[見]란 이른바 신견(身見) 등을 말한다. 공(空)이란 이른바 내입(內入) 등과 대치(對治)되는 공(空) 등을 말한다. 만약 중생의 선근(善根)이 아직 미숙하여 무생(無生)의 깊은 법인(法忍)을 얻지 못하면 정도(正道)를 이해하지 못한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모든 존재를 공이라고 보는 자
【釋】무엇을 ‘공이라고 보는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공에 집착하여 ‘공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에 집착하는 것은 어떤 과실(過失)이 있는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그것은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하네.
【釋】부처님께서는 저 공견(空見)을 가진 중생을 치료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뜻은 무엇인가? 마치 약을 복용하면 모든 병에 작용하지만 또한 차도가 없으면 오히려 중병을 얻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공법(空法)을 설한 것은 모든 악견(惡見)을 버리기 위함인데, 만약 도리어 공에 집착하면 이를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공(空)을 버리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수레가 진흙 속에 빠져 차를 꺼내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길 “무소유(無所有)이므로 줄 테니, 나를 위하여 수레를 꺼내 주시오”라 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수레를 꺼낸 후에 그 수레 주인에게 무소유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가 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지혜로운 사람의 가벼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공에 집착하여 공이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까닭에 이유는 성립하지 못하며, 그대에게 오류가 있다. 그대가 말한 이유 명제는 성립하지 못하므로 나의 자인(自因)은 앞에서와 같은 과실(過失)이 없다. 또한 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작용이 존재하는가? 모든 행(行)은 공하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신해(信解)시키려는 것이다. 이 품의 뜻은 이와 같다. 이러한 까닭에 (나의 주장은) 성립할 수 있다. 마치 『반야바라밀경』 중에 “부처님께서 극용맹(極勇猛)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저 모든 법은 전도(顚倒)로부터 일어나 실체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며, 허망하여 여실(如實)하지 않다. 극용맹보살이여, 만약 어떤 사람이 한 법[一法]이라도 행한다면 이는 전도된 행이며, 여실한 행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한 『범천왕소문경』에서 “세간의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진리에 집착한다. 이 법은 실체[實]가 아니며 또한 허망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여러 경전 중에 자세히 말해지고 있다. 「관행품(觀行品)」의 해석을 마친다.
14. 관합품(觀合品)
다시 지금 공(空)과 대치되는 모든 존재의 화합법[合法]이 다 무자성(無自性)임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이 품을 짓는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대는 일체 법의 자성(自性)이 모두 공(空)하다고 말하는데, 이와 같은 말은 바른 도리에 어긋난다. 무엇이 도리인가? 부처님께서 ‘근(根)ㆍ진(塵)ㆍ식(識)의 세 가지가 화합(和合)한 것을 촉(觸)이라 이름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뜻으로 인하여 그대는 앞에서 말한 것과 서로 상반된다. 마치 내가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것으로써 원인을 삼아 이를 화합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부처님께서는 이 원인을 화합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을 것이니, 비유하면 거북이의 털을 원인으로 하여 의복이 만들어진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삼결(三結)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화합이라 한다. 내가 제시한 이유는 바른 도리에 부합하므로 모든 법의 자체(自體)가 없는 것이 아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비록 이런 말을 하지만 주장이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봄ㆍ보는 대상ㆍ보는 자 이 셋은 각각 다른 것이네. 둘 둘씩 서로 마주보아도, 모두 다 화합하지 않네.
【釋】봄과 보는 대상과 보는 자를 둘 둘씩 마주보아도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또한 모두가 화합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와 탐욕에 물들게 하는 법을 마땅히 알아야 하네. 그 밖의 번뇌와 그 밖의 입(入)에서도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와 탐욕에 물들게 하는 법은 모두 화합하지 않네. 【釋】‘탐욕’은 이른바 욕심의 모습[相]이다. ‘번뇌’란 이른바 중생의 상속(相續)을 탐욕으로 물들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탐욕[染] 등을 번뇌라고 말한다. ‘그 밖의’란 이른바 성냄 등을 말한다. 이것도 세 가지가 있다. 이른바 성냄ㆍ성내는 자ㆍ성내는 대상 등을 말한다. ‘그 밖의 입(入)’이란, 눈[眼]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고, 여기서 ‘그 밖’이라는 말은 이른바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을 말한다. 무엇 때문에 입(入)이라 이름 하는가? 이른바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이 생기하는 장소[處門]이므로 입(入)이라 이름한다. 이 역시 세 가지가 있다. 이른바 들음ㆍ듣는 대상ㆍ듣는 자 내지 앎ㆍ아는 대상ㆍ아는 자이다. 탐욕 등의 번뇌와 그 밖의 입(入)으로써 둘 둘씩 마주보아도 다시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또한 전부가 화합하지도 못한다. 마치 보는 대상에 화합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금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하여 의심이 없게 하려고, 게송에서 말하였다.
다른 것[異]이 다른 것과 화합하면 다름이 있을 수 없네. 모든 보는 대상 등의 다름의 상(相)은 다 화합하지 못하네.
【釋】보는 대상 등은 이른바 봄ㆍ보는 대상ㆍ보는 자이다. 이와 같이 탐욕ㆍ탐욕에 물든 자ㆍ탐욕의 대상은 모두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보는 자는 보는 대상 및 봄과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물에 차이가 없다면 끝내 서로 화합하지 못하니, 비유하면 자체(自體)와 같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다른 것[異]과 다른 것이 화합한다고 말할 경우 여기서 탐욕 등의 상속(相續)이 만약 다른 곳에 존재해도 곧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다른 장소 및 다른 상속의 끊임없이 전변[轉變]하기 때문에 화합(和合)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유가 성립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보는 대상 등이 먼저 다른 장소에 존재하다가 후에 한 장소에 있는 것을 이름하여 화합[合]이라 한다면 이 이유는 성립하지 못하고 또한 증험이 없기 때문에 그대의 말은 옳지 않다. 그것은 이와 같기 때문에 게송에서 말하였다.”
오직 보는 대상 등 뿐만 아니라 다른 상(相)도 얻을 수 없네. 또한 나머지 일체법이 다름[異]도 얻을 수 없네.
【釋】앞에서 말한 도리처럼 저 들음ㆍ듣는 대상ㆍ듣는 자 및 성냄ㆍ성내는 대상ㆍ성내는 자 등에는 모두 화합의 뜻이 없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대는 아(我) 및 보는 눈 등에 차이가 없다고 말했는데, 이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이유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말하였다.”
다름[異]은 다른 것을 연(緣)으로 하네.
【釋】다른 것에 의존하므로 ‘다름’이라 이름한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다른 것을 떠나 다름은 존재하지 않네.
【釋】종자[種]을 연(緣)으로 하여 생기한 것은, 이 종자(種子)에 의존[待]하므로 싹을 이름하여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연(緣)으로부터 생기(生起)한다면 이것은 저 연과 다르지 않네.
【釋】제일의제에서는 보는 대상과 눈에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차별의 언어에 관(觀)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보는 대상의 자체와 같다. 만약 법ㅌ이 연(緣)으로부터 생기한다면 저 연과는 다르지 않다. 만약 다르다면 종자가 없는 다른 곳으로부터 싹이 돋아나야 할 것이다. 마치 불이 다른 실체를 관하지 못해도 자성(自性)이 뜨거운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보는 자는 보는 대상을 관하지 못한다. 듣는 자는 듣는 대상을 관하지 못한다. 탐욕에 물든 자는 탐욕 등을 관하지 못한다. 마치 불이 차가움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가 곧 뜨거운 것처럼 이 다름[異]은 성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제 중에 이 주장이 없기 때문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보는 자와 눈 등의 다름[異]은 반드시 서로 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소와 말과 같다. 여기서 경계(境界)가 현현하는 것을 이름하여 식(識)의 모습이라 한다. 이것은 곧 보는 자이다. 이 보는 자가 가진 행취(行聚)와 안식(眼識)이 의지하는 청정한 색(色)으로써 대상[境]을 삼는 이것을 눈이라 한다. 형색(形色) 및 현색(顯色)을 이름하여 보는 대상이라 한다. 내가 말한 것처럼 이유에 작용력이 있기 때문에, 보는 자와 눈 등에 다름[異]이 (있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말은 옳지 못하다. 제일의제 중에 소와 말의 두 실체[體]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어떤 사람이 ‘상(想)에는 차별이 있으며, 결과와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보는 자와 눈 등이 다르다는 주장이 성립한다’고 말한다면, 도리어 앞에서 한 대답과 같다.” 다시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다름[異]의 법체(法體)가 있어 사물과 더불어 화합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그대가 다름의 법체가 있어 사물과 화합한다고 하려면 또한 두 번째 사물에 자연히 다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름을 세워 다른 체[別體]가 존재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증험을 하겠다. 다른 법과 사물이 화합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총체적으로 다르기[總別] 때문이니, 비유하면 색(色)의 실체[體]와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서 다름은 언어[說]와 각지(覺智)를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각지와 언어를 차별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색의 실체와 같다. 다시 이 다름은 다른 것 중에 존재하는가? 다르지 않은 것 중에 존재하는가? 이것에 어떤 오류가 있는가? 만약 다른 것 중에 존재한다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다른 것 중에 다름이 존재하지 않네.
【釋】만약 저 다름[異]의 법(法)에 이 다름이 이미 먼저 존재한다면, 이 다름은 저 다름에 대하여 곧 무의미하다. 차별의 법은 공하기 때문이다. 비세사 사람의 다름에 관한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만약 다르지 않는 것 중에 존재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다르지 않은 것 중에도 없네.
【釋】이것은 말하자면 ‘자체(自體)로서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저 말한 것처럼 이유가 논파되므로 차별의 법은 성립하지 못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같음[一]과 다름[異]은 곧 두 개의 극단이다. 그대는 지금 다름을 부정하지만, 다름의 법은 곧 없다. 이 다름이 만약 없다면 다르지 않음을 수용해야 한다. 그대는 자신의 주장과 상반되는 오류를 얻게 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다름의 법이 없는 것을 이미 다른 이에게 이해시켰다. 다르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다름의 법이 없는 까닭에 다르지 않은 법도 없네.
【釋】다른 것을 관(觀)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 이미 다른 것을 부정했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도 없다. 무엇을 부정하는가? 지금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의 차이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차별적인 언어로서 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보는 대상의 자체와 같다. 이와 같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결과이기 때문이며 원인이기 때문이고 지혜의 경계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이유를 여기서 자세히 말하겠다. 저것이 이와 같이 같음[一]과 다름[異] 모두를 부정한다. 같음 등이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같음의 법[一法]은 화합하지 못하고 다름의 법[異法]도 화합하지 못하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와 같이 탐욕과 탐욕에 물든 사람이 화합하여 존재한다. 왜냐하면 화합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니, 마치 물과 우유와 같다. 다시 제일의제 중에 탐욕에 물든 사람의 화합이 조재한다. 왜냐하면 차별적인 말로서 관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먹는 자와 먹음이 서로 화합하는 것과 같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현재 화합하는 것도 이미 화합한 것도 화합하는 자도 모두 없네.
【釋】앞에서 말한 것처럼 방편으로서 다른[異法]이 서로 화합한다는 이와 같은 주장은 없다. 저 외도가 이 품(品)의 첫머리에서 이유를 든 것이 이미 오류임을 지적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화합이 무자체(無自體)임을 이해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이품의 주장은 성립한다. 마치 『반야바라밀경』 중에 “부처님께서 극용맹(極勇猛)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색은 화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은 화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 만약 색(色)에서부터 식(識)에 이르기까지가 화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면 이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이러한 여러 경전 중에 자세히 설해지고 있다. 「관합품(觀合品)」의 해석을 마친다.
▸ 다시 부처님께서 성문승(聲聞乘)에게 설하셨으니,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말하였다. ‘부처님이시여, 고(苦)는 자기 원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다른 것으로 인해 만들어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자타(自他) 모두로부터 만들어 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비구가 말하였다. ‘무인(無因)으로 인해 만들어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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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받아들이면 고통이란 발생한 적이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생사현실에 고통이 있다. 현재 글을 적는 본인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불편하다. 그래서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 위 내용에 의하면 고통은 발생한 적이 없다고 해야 한다.
이상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부분이 불교 경전이나 논서 부분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래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야 망집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논의는 과거 『회쟁론』을 살피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내용을 대강 살폈다. 현재 각 부분이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밀려 있다. 다만 정리는 안 되어 있지만, 필요한 기초 내용은 살폈다.
여기서는 왜 현실에 고통을 느끼는 이들이 많은데도 고가 없다고 하는가를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
현실에 본래 고통은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다양하게 겪는다. 그리고 이것이 수행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제시해보자. 해결할 생사고통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각 중생은 그 상태에서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명료하게 반복해 겪는다.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자신이 겪는 생사고통이 실답게 현실에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증상을 겪는 주체가 특별한 한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대다수다. 즉 수많은 중생이 일정한 시기와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에 엇비슷한 생사고통을 반복해 겪는다. 본래 한 단면 한 단면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런 상태로 현실에 각 주체가 임한다. 또 그런 사정으로 그런 생사고통이 실답게 있는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문제삼을 생사고통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는 입장이 드물다.
그리고 이 두 차이가 크다. 한 쪽은 생사현실을 니르바나 자체로 여기고 임한다. [생사즉 => 열반]
그런데 일반적 입장에서는 이와 반대로 임한다. 본래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본래 니르바나다. 그런데 그런 니르바나를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로 실답게 여기고 임한다. [열반즉 => 생사] 이 차이가 서로 극단적이다.
경전과 논서에서는 위 앞 부분을 원칙적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일반인 입장과는 극단적으로 정반대다. 그래서 일반인 입장에서는 위 내용을 도무지 쉽게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어렵게 이해해도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위 내용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임하게 되기 쉽다.
즉 본래 생사현실이 공하고 차별이 없음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자신이 아무렇게 함부로 임해도 된다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또는 아무것도 안해도 무방하다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를 악취공견이라고 칭한다. 하필이면 생사현실이 차별이 없음에도 하필 매 경우마다 지옥에 처해 임하는 수행자가 된다. 자신도 고통을 겪는다. 그 상대도 고통을 겪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른 중생도 제도하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다른 중생도 고통을 더 심하게 받게 한다. 이것이 차별없는 공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이런 문제가 『중관론』 안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그래서 『중관론』이나 『반야등론석』을 통해 그 내용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수행시 나아갈 방향도 다시 잘 이해해야 한다.
생사현실에 본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이 사실을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도 생사현실에서는 특수한 배경 사정[망집]으로 인해 각 중생이 없는 생사고통을 매 순간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겪는다. 또 그런 사정으로 위 사정을 잘 이해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사실 위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필요없다. 이해하던 못한던 겪을 생사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위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즉 본래 겪어야 할 생사고통이 없다. => 그런데 어리석음에 바탕해 겪고 있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스스로 자각해 깨달아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위 두 내용이 서로 극단적으로 반대된다. 그래서 처음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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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생사현실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본래 겪어야 할 생사고통이 없다. => 그런데 어리석음에 바탕해 겪고 있다.
이 상태에서 우선 다음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지 않도록 되도록 미리 예방해야 한다. 아니면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생사고통을 바로바로 벗어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즉 본래 상태는 생사고통 자체를 얻을 수 없다. 이런 본 상태와 마찬가지로 생사현실에서도 생사 고통에서 바로바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예 생사 현실의 묶임에서 벗어난 상태도 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그런 상태에서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생사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로 여여하게 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자신이 생사현실이 꿈과 같음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자. 그리고 다시 생사현실 안에서도 그런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생사현실에서도 그처럼 여여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꿈에서 매번 고통을 겪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꿈을 깨고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리고 침대가 놓인 현실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꿈을 꾸는 그 상황에서도 이 사정을 잘 이해하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꿈을 깬 상태나 꿈을 꾸는 상태나 별 차이가 없게 된다.
그런데 다음과 같다고 하자. 꿈을 깬 상태에서는 이 사정을 이해한다. 그러나 잠을 자면서 꿈을 꿀 때는 이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서 꿈꿀 때마다 악몽을 꾸면서 고통을 받는다고 하자. 그러면 문제가 된다.
그래서 꿈을 꾸는 상황에서 꿈 밖의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이 현실 밖의 본 바탕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생사현실 밖에 머무르나, 생사현실 안에 머무르나 별 차이가 없다. 적어도 그런 깨달음을 갖는 주체 입장에서만은 그렇다. 그래서 그 주체 입장에서는 어느 경우나 무방할 수 있다.
그래서 일단 생사 묶임에서 벗어나 머무르게 되면 아라한의 상태가 되었다고 칭하게 된다. [회신멸지] 그런데 그렇게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벗어나 생사현실 밖에 머문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이제 생사현실에 그대로 남아 고통을 받는 중생의 제도가 곤란해진다.
그래서 중생을 위해서는 그 수행자가 자비심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다시 들어가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수행자는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 다음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야 한다. 이 경우 생사현실 안에서 본 바탕이 공함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꿈의 상황과 같다. 즉 꿈을 꾸면서 그 꿈이침대가 놓인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상태로 꿈을 꾼다고 하자. 이런 상태처럼 현실에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생사현실에 임해서도 생사현실 즉 니르바나의 상태로 여여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 (생사 즉 열반) 그리고 다시 그런 바탕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 안에서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자량을 구족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 자량을 구족해야 비로소 다른 중생을 원만하게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현실에서 여러 생사고통이 문제된다.
각 주체는 출생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낯선 상황으로 대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같이 고통이다. 처음 태어난 아이가 자주 우는 사정도 그것이다. 대하는 상황 하나하나가 뜻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노병사 과정 하나하나가 다 문제된다. 늙어가면 각 기관이 퇴화한다. 다리 무릎도 아프다. 눈도 잘 안 보인다. 힘도 없어진다. 등등이다.
그러다가 질병을 겪게 된다.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이런 질병이나 사고를 만나 한 생을 마치게 된다. 이 과정을 각 주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겪게 된다.
그 외 여러가지 고통이 나열된다. 원증회고 애별리고 구부득고 오음성고 등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각 주체가 원하는 바대로 성취되지 않는다. 이것이 삶의 문제다. 그 때마다 고통을 겪게 된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양한 삶의 문제가 있다.
과거에는 신분지위가 낮아 다른 이에게 묶여 살아가는 상태가 있었다. 노예와 같은 상태다. 현대에도 자신의 뜻과 달리 억지로 무언가를 행할 수 밖에 상태에 놓인다. 그러면 실질적인 노예와 같다. 그러다가 범죄를 행하면 아예 감옥에 갇히게 된다. 또 가난의 고통이 있다. 그리고 질병의 고통이 문제된다. 이러한 것들이 현실에서 문제된다.
만일 어떤 이가 자신부터 그런 상태에 처하면 다른 이를 제도하기 힘들게 된다.
자신부터 노예 상태로 또는 죄인으로 갇혀 지내고 자신부터 가난하고 전염성이 강한 병에 걸려 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현실에서 그 자신부터 구호를 받는 것이 급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다른 이를 구호하고 제도하기 곤란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부터가 생사현실에서 겪는 기본적 고통이기도 하다.
결국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할 때는 스스로 이 문제부터 잘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중생제도를 원만하게 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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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현실에서 각 주체는 생사의 개별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즉 각 주체가 망집에 바탕해 일으키는 무량한 소원들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 해결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임하면 무량한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도 대부분 현실에 이렇게 임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우선 이런 중생에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개별적인 문제를 잘 해결하면서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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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운데 반야등론석에서 제시하는 내용들의 이해가 문제된다. 현실에 고통이 없다는 내용도 그런 부분이다.
이는 다음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감각기관을 통해 감각내용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좋고 나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이에 대해 일정한 분별 판단을 행한다.
고통이란 이런 과정에서 겪는 내용이다.
어떤 이가 감각하는 내용을 ● 이라고 표시해보자.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느끼는 느낌을 ! 이라고 표시해보자. 그리고 이에 대해 분별하는 관념을 □ 이라고 표시해보자.
그러면 그 관계는 다음과 같다. ● => ! => □
어떤 이가 목마를 때 물을 마시면서 시원함을 느낀다고 하자. 그리고 상쾌함을 느낀다고 하자. 이 가운데 무엇이 감각이고 무엇이 느낌인가부터 잘 구분해야 한다. 자신이 목마를 때 물을 마시면 좋음을 느낀다. 그런데 만일 익사 상태에서 갓 벗어난 상태에서 물을 대하면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일단 물에 대해 감각을 하는 바탕에서 느끼게 된다. 그래서 느낌과 감각을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느낌은 감각은 아니다. 감각을 바탕으로 일으켜 얻는 내용이다.
여하튼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일정한 분별 판단을 한다고 하자. 그것은 또 감각과 다르다.
예를 들어 눈으로 물을 바라 본다고 하자. 이것은 감각이다. 눈을 통해 얻는 감각내용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분별한 내용은 눈을 감고서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구분해야 한다. 이것을 혼동하면 반야등론석이나 중관론에 논의를 살피기 힘들다.
한편 이들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이다. 즉 자신이 관계헤서 얻는 내용이다.
자신이 눈을 통해 세상 모습을 바라본다고 하자. 앞에 나무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이 상태에서 눈을 감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이 상태에서 다음 질문을 제기해보자. 이제 안 보인다. 그러니 자신이 보지 못하면 직전에 본 나무는 사라져 없게 된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보지 못해도 자신과 관계없이 여전이 무언가가 실재하고 있다고 할 것인가. 이런 것이 문제된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본 바탕 실재의 논의다.
이들 논의가 다 중관론 즉 반야등론석 논의와 관련된다. 그래서 먼저 이들을 잘 구분해야 한다.
실재는 자신과 관계없이 본래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이 무언가의 문제다. 그래서 이처럼 문제되는 본바탕 실재를 # 로 표시해보자.
그래서 존재성이 문제되는 각 내용을 크게 본 바탕 실재# - 한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 ● - ( 느낌! ) - 분별내용 ■ 으로 나열할 수 있다.
생사고통도 이와 관련된다.
중관론에서 제시하는 결론은 다음에 초점이 있다.
어떤 이가 위와 같은 과정으로 현실에서 일정한 감각(●)을 얻는 가운데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분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른다. 그런 상황에서 약간 쓰라린 감각을 느낀다. 그리고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정서적으로도 상당히 걱정되고 불안을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종합해 고통이라고 분별하게 된다. 이런 일련과정이 있다.
이것은 다음 문제다. 앞에서 존재성이 문제되는 각 내용을 크게 본 바탕 실재# - 한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 ● - ( 느낌! ) - 분별내용 ■ 으로 나열했다.
그리고 고통이 있다고 분별하게 되었다고 하자.
이 때 그렇게 분별한 내용은 관념내용 ■ 이다. 그런데 그 관념내용 ■ 은 느낌! 에서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감각내용 ● 에서도 얻을 수 없다. 더욱이 본 바탕 실재 #에서도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관념영역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키게 된 것 뿐이다.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를 다시 정리해보자. 한 주체는 현실에서 일정한 감각 내용 ● 과 느낌 ! 분별 내용 ■ 을 얻는다. 그래서 이들 각 내용은 얻는 내용이다.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중관론에서도 이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내용을 얻는다. 그렇지만 이들 내용은 그런 관계로 각 영역에서 얻는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본 바탕 실재 # 에서는 그 사정이 더욱 그렇다.
그처럼 다른 영역에서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렇게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각 영역에서 그처럼 얻는 것 뿐이다. => 그래서 그 관계가 마치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다. 그래서 실답지 않은 내용이다. => 따라서 이에 대해 집착을 갖고 임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곤란하다.
이런 내용을 이해시키려는 취지다.
그런데 현실에서 대부분 이처럼 임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이 분별한 내용이 각 영역에 그처럼 실재한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각 내용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된다. 이처럼 잘못된 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매 상황에서 일정한 업을 도저히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여기면서 행하게 된다. 즉 망집에 묶여 업을 행해 나가게 된다.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다른 영역을 휘젖게 된다. 그러면 또 그런 바탕에서 결국 생사고통으로 여기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끔 된다. 그리고 이후 이런 상태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는 상태에 게속 묶이게 된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예방하려면 원인단계에서 미리 원인을 제거해 예방해야 한다. 이것이 쉽고 편하다.
벼랑에서 떨어져 고통을 당한다고 하자. 그 상태에서 그 고통을 벗어나려면 대단히 힘들다. 그러나 벼랑에 떨어지기 전에 벼랑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중단하면 훨씬 쉽다. 또 그렇게 걸어가게 만든 망집을 제거하면 더 쉽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현실의 정체에 대한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 망집은 이것만 놓고 보면 별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정체를 잘못 본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망집을 방치하면 이에 바탕해 업을 행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예방단계로 이를 제거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중관론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생사현실의 본 정체를 잘 파악하려면 본 바탕 실재의 내용을 잘 파악해야 한다.
이는 꿈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과 성격이 같다. 꿈을 꾸는 순간은 꿈을 대단히 생생하게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만 의존하면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꿈의 정체를 파악하려면 꿈내용만 대하면 곤란하다. 꿈의 정체를 올바로 판단하려면 꿈 밖의 침대가 놓인 현실을 함께 놓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꿈이 실답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 감각을 생생하게 얻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분별은 동시에 명료하게 행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을 동시에 얻기에 이 둘을 접착시켜 잘못 이해한다. 그런 가운데 이들 내용만 가지고 판단하면 이들이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래서 본 바탕 실재를 함깨 놓고 이 정체를 잘 관하는 것이 요구된다.
현실에서 고통을 문제삼는다. 그런데 본 바탕 실재는 그런 고통을 얻을 수 없다. 이런 사정을 함께 이해해야 현실의 정체를 올바로 파악하게 된다.
실재를 잘 파악하는 것은 실재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본 바탕 실재만 붙잡고 살피면 현실이 이렇든 저렇든 다 무방하다고도 할 수 있다. 본 바탕 실재에서는 고통을 얻을 수도 없다. 그런 사정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한 적도 없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냥 방치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않다.
사정이 그런데도 현실에서 고통을 겪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려면 먼저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정체를 잘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 것이다.
그래서 실재를 잘 파악하는 것은 실재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본 바탕에서는 그런 고통을 얻지 못한다는 사정을 파악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꿈의 사정과 같다. 꿈꾸는 상황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침대가 놓인 현실사정을 잘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런 사정과 마찬가지다.
- 현실에서 문제삼는 고통이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런 취지다.
매번 중관론 내용을 살필 때마다 이런 내용을 반복하게 된다. 과거에도 수없이 반복했다. 그런데 내용을 살피려면 또 반복하게 된다. 본 내용 이해를 위해서는 이런 기본적 이해가 먼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앞의 내용을 밝히는 방식을 살펴보자. ( 이에 대한 기본적으로 원칙적인 방식도 과거에 살폈다.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
여기서는 반야등론석에서 제시하는 방식만 살핀다. 이는 원칙적 방식에 대해 보조적으로 가정적 항변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본 바탕 실재# - 한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 ● - ( 느낌! ) - 분별내용 ■ 관계를 놓고 보자.
현실에서 일정한 분별을 일으키면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 있다고 잘못 여긴다.
예를 들어 눈을 떠서 일정한 모습을 본다고 하자. 영희가 있다고 분별한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그에게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일정한 영역을 손으로 가리키게 된다. 그렇게 가리킨 부분이 먼저 문제된다. 그렇게 가리킨 그 부분의 본 정체가 무언가 하면 감각현실이다. 그리고 그 마음안 내용이다.
그런데 그 부분은 감각현실이다. 관념분별이 아니다.
감각현실은 관념내용이 아니다. 관념내용도 감각현실이 아니다. 다만 그런 감각현실을 대해 그런 분별을 일으킨 것 뿐이다. 그래서 그 감각현실 부분에는 그가 생각하는 내용은 얻을 수 없다.
이것을 혼동하면 안 된다.
본 바탕 실재와 관념내용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또 본 바탕 실재와 감각현실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매 경우 이를 대부분 혼동한다.
그래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각 주체가 손으로 일정한 감각현실 부분을 가리키게 되는 것이다.
그는 그가 손으로 가리킨 그 부분이 자신이 생각한 영희라고 여긴다. 또 그 부분에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고도 여긴다. 여기서는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본 바탕 실재는 더더욱 사정이 그러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는 원칙적 방안은 문제되는 각 영역을 놓고 대조해 보면 된다.
즉 본 바탕 실재가 감각현실 인가. 감각현실이 본 바탕 실재인가 이것을 놓고 살피면 된다.
또 감각현실이 관념내용인가. 관념내용이 감각현실인가 이것을 직접 놓고 살피면 된다.
이것이 반야 경전에서 제시하는 원칙적 방식이다.
그런데 중관론에서는 보조적으로 가정적 항변 방식을 사용한다.
위 방식으로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려면 중관론처럼 보조적으로 상대주장을 논파시키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가정적] 그러면 이러이러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니 어떻할 것인가. [항변] 이런 문제를 지적해 상대 주장을 논파시키려는 취지다.
이런 취지를 위해 두 방식이 사용된다.
귀류논증 형태 또는 자립 논증 형태가 그것이다.
이 두 방식은 외관상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 두 방식의 본 취지는 마찬가지다. 여하튼 상대에 눈높이를 맞추고 상대의 주장이 잘못임을 상대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제시하려는 취지다. 그 방식으로 귀류논증 형태와 자립논증 형태가 방편상 사용되는 것 뿐이다. 이 주장 자체를 중관논사가 직접 세우려는 취지가 아니다.
그래서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하다.
그런데 중관논사가 이런 논파과정에서 무언가를 대신 확립하려고 한다고 하자.
만일 그렇다고 하자. 그렇다면 중관논사 자신부터 문제가 된다. 중관논사 입장은 무언가를 확정해 확립해 제시할 수 없음을 제시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자립논증 형식이나 귀류논증을 하는 각 경우를 그런 취지로 이해하면 다 문제가 된다. 그런데 중관논사 입장은 그런 취지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취지 자체가 중관논 자체에도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중관논사는 어떤 내용을 확립해 제시하려는 입장 자체가 아니다. 단지 상대가 그런 주장을 하면 상대 입장에서 그런 문제가 발생함을 밝혀주려는 입장일 뿐이다. 이것을 귀류논증 형식이나 자립논증식 형태로 상대입장에 서서 대신 제시해주는 것 뿐이다. 즉 가정적 항변의 취지일 뿐이다.
즉 상대가 일정한 주장을 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입장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가정적 ) 그러면 상대입장에서는 그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곤란하다. ( 항변 )
이런 사정을 제시해주는 것 뿐이다.
이 관계를 s-m m-p ∴ (따라서 ) s-p 형태로 보여주려는 입장을 자립논증 형식이라고 한다. 반대로 상대가 주장한 s-p 형태를 전제로 놓으면 일정한 모순적인 결론이 도출됨을 제시해서 상대주장을 논파하는 방식을 귀류논증 형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두 방식의 본 취지는 다 마찬가지다.
물론 외관상 자립논증식은 비판자가 이런 형태로 무언가를 확립하는 외관을 조금 더 띈다. 그러나 그것은 귀류논증식도 마찬가지다.
귀류논증식을 취할 때도 같은 문제가 있게 된다. 즉, 일정한 상대 주장을 받아들이면 일정한 잘못된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관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 관계도 외관상으로는 그 성격이 자립논증식과 엇비슷하다. 그런데 중관논사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런 관계 자체를 확립해 제시하는 취지는 아니다. 다만 상대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문제가 된다'는 사정을 밝혀 주려는 취지일 뿐이다.
즉, 중관논사들의 입장은 본래 그렇지 않다. 다만 상대 입장과 눈높이를 맞추어서 상대 주장을 받아들이면 그런 문제가 있게 됨을 보여주는 것 뿐이다. 그리고 중관논사가 무언가를 확립해 제시하려는 취지가 아닌 것은 둘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두 입장의 외관만 붙잡고 그 본 취지나 입장이 서로 다른 것처럼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하다.
여하튼 그 세부방식은 다양하다.
여기서는 관고품의 내용만 살피기로 하자. 어떻게 상대 주장이 잘못임을 밝힐 수 있는가.
( => 너무 길어졌다.
간단히 제시하기로 한다. )
그 핵심 근거는 현실에서 고통이 연(緣)으로부터 생기한다는 점이다.
상대는 고통이 본 바탕에 실재한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어떻게 상대 주장이 잘못임을 밝힐 수 있는가.
이런 경우 고통은 현실에서 연(緣)으로부터 생기한다 그런 사정을 이해한다면 위 주장이 잘못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취지다.
이 두 내용의 관계를 잘 이해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이 두 내용의 관계가 왜 그렇게 되는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연기관계는 곧 그 내용이 공함을 밝히는 근거가 됨은 확립되어 있다. 그래서 위 내용만 제시해도 충분하다. 그런데 일반적 입장에서는 이 자체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결론이 전제에서 너무 비약되었다고 여기기 쉽다.
즉 무언가가 연으로부터 생겨난다는 내용이 그 내용들이 실재하지 않음을 밝히는 근거가 되는가부터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수학문제와 같다.
어떤 이가 직각 삼각형에서 밑변과 높이가 각기 3 와 4 임을 제시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빗변은 5 라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해한 입장에서는 이 내용을 쉽게 이해한다. 즉 앞 내용에서 뒷 내용이 도출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피타고라스 정리를 먼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앞 내용에서 뒷 내용이 왜 도출되게 되는가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전제에서 결론으로 너무 근거없이 비약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중관론 문제도 마찬가지다.
다시 한번 문제를 살펴보자 현실에서 감각내용● 과 느낌 ! 분별내용■ 을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었다. 그 관계를 다음처럼 놓았다. 본 바탕 실재# - 한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 ● - ( 느낌! ) - 분별내용 ■
이 때 분별 내용 ■ 이 실재 # 영역에도 그대로 있는가가 논의의 초점이다.
그런데 문제삼는 내용 ■ 이 연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고 하자. 그러면 이를 근거로 그 ■ 은 본 바탕 실재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님도 밝힌 것이 된다. 이런 내용이 이 부분의 핵심이다.
그것은 사실은 간단하다. 본 바탕 실재 #에 있다고 하는 내용은 그런 성격을 갖는다면 처음부터 # 실재 내용이 안 된다. 그런 사정 때문이다. 지금 문제삼는 것은 실재#다. 그런데 실재#는 그런 셩격의 존재를 찾은 것이 처음부터 아니다. 즉 자신과 관계없이 본 바탕에서 그대로 자체적으로 있다고 할 내용으로서 실재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내용이 다른 것과 의존해야만 얻어지는 관계에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만으로 실재#가 아님도 밝힌 것이 된다. 이런 취지다.
C 가 얻어지는 연기관계(인과)를 다음처럼 식으로 나타낸다고 하자. a + b => C
그러면 이 식 자체가 다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이 식은 우선 현실에서 a + b => C 의 관계를 반복해 경험한다는 의미도 갖는다. 그래서 위 식을 확립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 식은 동시에 다음도 확립시키게 된다.
즉 C 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 무상 C 는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가져다 준다. => 고 C 는 참된 실체적 존재가 아니다. => 무아, 무자성 C 는 (a + b) 의 관계를 통해 얻는다. 이처럼 C 가 그런 관계를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은 우선 C 는 원인 부분 (a + b) 영역에서도 얻지 못함을 위 식이 자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그런 관계자체를 떠난 실재영역에서는 역시 그런 C 를 얻지 못함도 함께 나타내는 것이다. => 따라서 그런 관계를 떠나서 문제삼는 본 바탕 실재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 죽 공하다. ) 따라서 본 배경 영역 부분에서 문제되는 C 는 얻을 수 없다. [ 불가득 공, ] 그래서 그 영역은 본래 그런 문제를 얻지 못하는 상태다. => 열반 적정
위 식 자체가 이들 내용을 모두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연기 즉 공의 관계가 확립되어 있다. 그래서 위 관계부터 잘 이해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A 라는 관념이 다른 관념과 상대적인 관계로 성립된다고 하자.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사정만으로 그것은 본 바탕 실재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이 확립된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자식, 앞과 뒤, 이런 내용들이 사정이 마찬가지다. 즉 위 관계와 마찬가지다. 문제삼는 A는 그와 상대되는 다른 관념에 의존한다. 이 사정은 곧 그런 관념과의 상대적 관계를 떠난다면, 얻을 수 없음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정만 밝히면 상대 주장이 논파된 것이다.
그래서 중관론에서 짧게 제시한 내용들은 모두 그런 취지다. 그래서 이를 대할 때 논의의 비약이 있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즉 근거 없이 결론으로 뛰어 매번 넘어간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위 사정을 밝히면 그것으로 상대 주장은 깨진 것이다. 상대는 그런 관계없이도 본 바탕 실재에 본래부터 그런 내용이 실재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그래서 상대 주장이 논파된 것이다. 이런 의미다. 그래서 그 배경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vqgt5144
◈Lab value 불기2565/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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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ustave-dore-spectrum-appearance-of-banquo
Artist: gustave-dore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e_Doré Title : spectrum-appearance-of-banquo Info
수행은 결국 자신과 다른 중생이 다 함께 고통을 벋어나고 무량한 좋음을 얻게 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래서 각 경전에서 보시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또 그 가운데 재물보다는 법의 보시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보시를 잘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이 보시를 강조하다보면 자칫 이 보시가 맹목적이고 지상절대적인 것인 것인양 오해를 불러 일으킬 여지도 있다.
보시를 행할 때는 다음과 같은 여러 문제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우선 보시를 행할 때 이를 받는 이만 세상에 유일한 것은 아니다. 좋음을 받기를 원하는 다수 주체가 있다. 그래서 이들 각 주체간의 관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 가운데 자신이 어떤 좋음을 베풀 때 이로 인해 다른 주체가 나쁨을 받게 된다고 하자.
또 그것을 받는 주체가 지금은 좋음을 얻지만, 이로 인해 나중에 나쁨을 받게 된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좋음을 베풀었다고 하기 곤란하다.
예를 들어 칼이나 독을 베풀어 그로 인해 상대가 나중에 다른 이를 해치고 또 그 자신도 나중에 해침을 당하거나 나쁜 결과를 얻는다고 하자.
지금 당장은 그 상대는 좋음을 얻어 좋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이는 그로 인해 피해를 받기에 곤란하다. 또 그로 인해 그 상대도 나중에 나쁨을 받아 곤란하다. 이런 경우까지 좋음을 베푸는 행위로 권장하기 곤란하다.
경전에서도 독이나 칼을 베푸는 행위는 오히려 좋지 않다고 제시된다.
적국이 자국만 갖고 있고 자국을 지킬 수 있는 어떤 좋은 물자를 요구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까지 상대가 원하니 이를 베푼다고 하자. 그러면 이로 인해 국내의 대신들과 백성이 모두 싫어한다. 이 경우에도 적국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는 좋음을 베푼 행위다. 그러나 국내의 대신이나 백성 측에 초점을 맞추면 그 반대의 의미를 갖는 행위가 된다.
아내와 아들딸을 베푸는 사례가 나오기도 한다. 이런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를 받는 입장에 초점을 맞추면 좋음을 베푼 행위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데 종으로 묶여 팔려다니는 아내나 아들딸의 입장을 놓고 보면 그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한편 이를 받는 상대가 그로 인해 길게 좋음을 얻게 되는가의 문제는 또 이와 다르다. 그러나 만일 이로 인해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곤란하다. 그에 해당하는 대표가 독과 칼을 베푸는 행위다. 결국 이 사례에서 이런 보시를 받은 상대는 끝내 조달이 되어 장구하게 지옥에 갇히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 경우는 오히려 상대에게 길고 긴 고통을 준 결과가 된다.
따라서 단순히 보시를 맹목적으로 지상절대주의로 행할 때는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무언가 좋음을 베풀 때는 그것이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모든 생명이 제한없고 차별없이 좋음을 얻고 그것도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좋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하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모든 측면이 좋은 상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좋음의 구극에는 각 주체가 보리(깨달음)을 얻어 번뇌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얻어 또 다른 중생을 그처럼 이끄는 상태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어떤 행위가 이 가운데 어떤 일부를 충족하더라도 다른 부분이 그렇지 못하면 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한편, 무언가 하나의 좋음을 베풀 때는 이로 인해 상대가 보리를 얻게 한다는 상위 가치와 목적이 전제된다. 즉 상대가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 어떤 좋음을 베푸는 행위가 이바지하기에 이로 인해 좋음을 베푸는 행위가 가치를 갖는다.
보시란, 보리를 깨닫게 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수단적 가치를 갖는다.
단순히 한 측면의 좋음과 구극적인 깨달음 보리나 중생제도 사이에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자. 이 경우 보리와 중생제도를 우선해야 한다.
당장 한 측면에서 단순한 좋음을 얻지만, 이로 인해 구극적인 좋음인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좋음이 아니다.
반대로 구극적인 좋음인 깨달음을 얻지만, 지금은 당장 좋음을 얻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차라리 낫다고 해야 한다.
쉬는 동안 태자 수단나가 나오는 경전을 읽었다. 태자 수단나는 보시를 위해 국고와 자신의 사재를 다 소비한다. 그런 태자의 성향을 이용하여 적국이 코끼리를 요청한다. 이 코끼리는 그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코끼리를 보시받는 적국은 좋아한다. 그러나 그 나라의 왕과 대신 백성이 모두 대단히 이를 싫어한다. 그런데도 태자는 적국에게 코끼리를 보시하여 쫒김을 당한다. 한편 숲에 쫒긴 수단나 태자는 나중에는 자신의 부인과 아들딸까지 바라문에게 보시한다. 그런데 그 바라문은 나중에 제바달다가 된다. 그리고 제바달다는 끝내 장구하게 지옥에 갇히는 상태가 된다.
이는 맹목적인 보시가 불러 일으키는 위험을 나타낸다.
어떤 한 쪽에게 어떤 한 시점에 어떤 한 측면에서 좋은 것을 베풀 수 있다. 그런데 그 행위가 동시에 다른 쪽에게는 심한 고통을 주는 경우가 있다.
한편 위와 같은 경우 다른 측면에서는 다른 나쁨을 많이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상대에게서조차 장구하게 볼 때 장구한 고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좀 더 고려를 해야 한다. 그런 경우까지 보시를 무조건 행하면 이는 잘못이라고 해야 한다. 이는 맹목적인 보시 지상주의가 불러 일으키는 위험이다.
이런 경우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쪽이 있다. 그런데 왜 그쪽은 무시하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쪽에는 좋음을 베풀지 않고 나쁨을 주려 하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한편 그 상대에게 나중에 나쁨을 주게 하려 하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왜 오래오래 좋음을 주지 않고 잠시 일시적인 좋음만 주려하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한편 어떤 보시가 의미를 가지려면 그로 인해 상대가 보리를 깨닫고 좋은 상태로 바뀌어야 한다. 즉 중생제도를 위한 수단 방편의 가치를 갖는다. 수단은 그것을 통해 성취하는 목적에 의해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런데 보시를 하는 행위로 인해 다른 대다수가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왕이나 대신이나 백성이 함께 이를 기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따라 행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심지어 자신을 해치고 죽이려 하거나 내몰아 내려는 뜻을 갖게 한다. 그렇게 만든다면 오히려 문제다.
한편, 보시를 받는 상대도 문제다. 상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입장이다. 상대를 함부로 무시하는 이가 다른 이에게 다른 이의 자녀나 부인을 종으로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그 요구를 들어주어서 그가 좋게 변화되는 것도 아니라고 하자. 그런 경우는 더욱 문제다.
숙왕화님이 일정보다 앞서 돌아왔다. 그래서 치료 결과가 좋아서인가 하고 알아보니 오히려 그 반대다. 결과가 예상보다 나빠서 일단 돌아온 것이다.
1 차례 큰 수술을 마치고 몇 주만에 나타난 숙왕화님은 얼굴이 완전히 바뀌었다. 얼굴이 완전히 달리 바뀌었다. 살도 빠지고 핼쓱해져서 나타났다. 그런데 수술을 마쳤지만, 결과가 좋지 않고 이전보다 더 상태가 나쁘다고 한다. 또 시간을 두고 한 2 차례 수술을 더 해야 한다고 한다. 별달리 위로의 말을 전하기 힘들다.
그래서 현실은 본래 꿈과 같음을 말해 주었다. 꿈이 때로는 원하는 좋은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꿈을 계속 꾸어야 한다고 하자. 그러면 꿈이 꿈인 줄 알고 이왕이면 그 꿈 내용이 좋은 형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여하튼 숙왕화님은 의외로 담담하다. 지금까지 지켜보면 숙왕화님은 이론으로만 수행을 하는 본인보다 모든 측면이 나아 보인다.
요즘 페이지를 작성하면서 랜덤으로 뽑힌 노래를 들어 보게 된다. 그러면 연이어 같은 맥락의 내용을 듣게 된다. 현실은 꿈과 같다. 그러나 그 꿈의 내용이 고통스럽게 되는 사정이 있다. 각 주체가 망집에 바탕해서 업을 행해나가기 때문이다.
■ 영-중-일-범-팔-불어 관련-퀴즈 [wiki-bud]Anicca [san-chn]
śarān...pañca 五箭 [san-eng]
mada $ 범어 Intoxication [pali-chn]
asura 阿素洛 [pal-eng]
vimocana $ 팔리어 nt.release from; discharging; letting loose. [Eng-Ch-Eng]
九識 The ninth consciousness, which was added to the eight consciousnesses posited by the school of Consciousness-only. Schools such as Huayan 華嚴 and Tiantai 天台 posited this as an undefiled immaculate (amala) consciousness. [Muller-jpn-Eng]
力士 リキシ demigod [Glossary_of_Buddhism-Eng]
EMPTINESS☞ Syn: Sunyata; Void. See also: Existence / Emptiness; Nagarjuna; Subhuti; True Emptiness / Wonderful Existence. Chin/ Kung; Jpn /Ku; Vn / Không. “A fundamental Buddhist concept, variously translated as non-substantiality, emptiness, void, latency, relativity, etc. The concept that entities have no fixed or independent nature. This idea is closely linked to that of dependent origination (Skt /pratitya-samutpada), which states that because phenomena arise and continue to exist only by virtue of their relationship with other phenomena, they have no fixed substance and have as their true nature emptiness. The concept thus teaches that nothing exists independently. Its practical implications lie in the rejection of attachments to transient phenomena and to the egocentricity of one who envisions himself as being absolute and independent of all other existences. It is an especially important concept in Mahayana Buddhism. On the basis of sutras known as the Wisdom sutras, the concept of emptiness was systematized by Nagarjuna, who explains it as the Middle Way, which here means neither existence nor non-existence. Broadly speaking, the concept of emptiness or non-substantiality can be divided into two: non-substantiality of persons and non-substantiality of the dharmas (objects, things, etc.). Non-substantiality of persons means that a living entity, being no more than a temporary union of the five components, cannot be said to have an absolute self, while non-substantiality of the dharmas means that, because the dharmas or elements of existence arise through dependent origination, they have no unchanging self-nature. The Tripitaka Teaching [Theravada] progressively analyzed entities or constructs such as the self into their constituent elements or dharmas, until they could be defined neither as existence nor non-existence; this is the analytical view of non-substantiality. On the other hand, the Connecting Teaching [early Mahayana] says that because all things arise through dependent origination, their existence is in itself non-substantial. The Perfect Teaching (q.v.) reveals that non-substantiality is inseparably united with the truths of temporary existence and the Middle Way, explaining that each of the three truths possesses all three within itself.”
As stated in the Heart Sutra: “O Sariputra, form does not differ from the Void, and the Void does not differ from Form. Form is the Void, and Void is Form: the same is true for feelings, conceptions, impulses and consciousness.” Sutra Translation: 45 True emptiness is contrasted with “hollow emptiness,” or “stubborn emptiness,” which is one-sided and leads to nihilism (the belief that nothing exists after death). Thus, we have the Mahayana expression, “True Emptiness, Wonderful Existence” – True Emptiness is not empty!
On the subject of existence and emptiness, an ancient Zen Master has said: “If we refer to existence, then / Everything from the smallest mote of dust exists; / If we refer to emptiness, / This whole, wide world and everything in it are empty.”
See also the related comment below: D. T. Suzuki quotes the Zen Patriarch Fa Yen as follows: “The sutras preached by the Buddha during his lifetime are said to amount to five thousand and forty-eight fascicles; they include the doctrine of emptiness and the doctrine of being (existence); there are teachings of immediate realization and of gradual development. Is it not an affirmation? “But, according to [Zen Master Yung Chia in his Song of Enlightenment], ‘there are no sentient beings, there are no Buddhas; sages as numerous as the sands of the Ganges are but so many bubbles in the sea; sages and worthies of the past are like flashes of lightning.’ Is this not a negation? “O you, my disciples, if you say there is, you go against Yung Chia; if you say there is not, you contradict our old master Buddha. If he were with us, then how would he pass through the dilemma? … If you confess your ignorance, I will let you see into the secret. When I say there is not, this does not necessarily mean a negation; when I say there is, this also does not signify an affirmation. Turn eastward and look at the Western Land, face the south and the North Star is pointed out there!”
“This is a recurring quandary for people who are interested in Buddhist doctrine: If there is no ‘I’, no ‘mine’, and all dharmas are utterly empty, how can the law of karma prevail? The answer is: it is precisely because everything is empty and there is no self or ‘I’, that everything can exist and the principle of karma can prevail. If things were truly existent, i.e., with a definite, enduring substance or entity, then no change or flow would be possible. Because nothing has self-nature (svabhava), everything is possible. The Buddhist way of thinking is unique in this aspect. To understand this point more clearly, the reader is referred to the Madhyamika and Prajnaparamita literature.”
Notes: I. The Buddha taught countless schools or Dharma methods. Among these methods, Zen, T’ien T’ai, etc. lead to Buddhahood through the Door of Emptiness, while Pure Land and the Avatamsaka School enter through the Door of Existence. (The Avatamsaka Sutra being encyclopedic and expressing the totality of Buddhism, also contains the Dharma of Emptiness of the Zen school.) Editor: na II. Unlike certain other schools of Buddhism (Zen, Tantric, for example), Pure Land does not stress the role of gurus, roshi or mentors. Rather, the emphasis is on recitation of the Buddha’s name and the sutras as well as direct contact and communion with Buddha Amitabha – Buddha Amitabha being understood as an expression of emptiness or ultimate wisdom: “Kumarajiva [the famous translator of sutras from Indic languages to Chinese] interpreted Amida Buddha as an expression of sunyata [emptiness] and recommended Buddha Recitation as a means of realizing sunyata or ultimate wisdom, prajna.” (M. Saso & D. Chappell) For further details, see also “Existence/Emptiness.”
77 선남자야 이 다라니의 위신력은 불가사의하여 찬탄하되 다할 수 없나니라. 만약 과거 아득한 옛날부터 널리 선근(善根)을 심어 놓지 않았으면 이 주문의 이름도 듣지 못하는데 어찌 볼 수 있겠느냐. 너희들 대중과 하늘 사람과 용과 신들은 내가 이렇게 찬탄하니 모두 따라 기뻐할 지니라. 만약 이 주문을 비방하는 자는 곧 저 99억 항하사의 모든 부처님을 비방함이 되나니라. ● 새바라야 爍皤囉耶<七十七> ś va ra ya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47 구 마라라례다아 다라 俱<引>摩羅羅隸哆誐<引>怛囉<二合四十七>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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