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적경론』
K0552
T1523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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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적경론』 ♣0552-003♧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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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대보적경론 제3권
문함(文函) 제2권을 풀이한다.
보리류지 한역
이병욱 번역
하혜정 개역
아(我)를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인무아(人無我)를 풀이할 수 있는가?
한 모습의 깨달음[一相覺]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깨닫는 일이 있기 때문에 항상 하지 않은 관찰과 지식을 말한다.
또한 저 세 종류의 일 중에서 범부는 생긴 것을 헤아리고 집착해서 항상 된 것을 보지 못하고,
범부가 헤아리는 것에서 다른 모습을 자연히 보기 때문이다.
5음 등이 무상하다는 일은 어떠한가?
법공(法空)을 풀이하는 것이니,
또한 한 모습의 깨닫지 못한 모습[一相不覺]을 보여 나타내기 때문이고,
무상(無常)이 아닌 관찰을 말하기 때문에 이 중에 깨닫지 못한 일이 있는 것을 안다.
또한 저 일 중에서 무상의 취(趣)가 있는 까닭에 안과 밖과 두 중간에서 범부가 헤아리고 집착해서 가설(假說)의 모습과 근본과 성품을 알지 못한다.
무상을 이해한 사람이 만약 헤아리고 집착하고 말할 수 없는 일 중에 제멋대로 안주한다면 어떻게 법무아를 풀이하여 말하겠는가?
한 모습의 깨달음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깨달음과 깨달음의 일이 있기 때문에 또한 저 일 중에서 깨달은 것으로 성스러운 지혜의 경계를 본다.
그것은 스스로 안에서 증득하여 알 뿐이고 다른 사람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에는 여섯 가지 모습이 있으니,
범부가 헤아리고 집착하는 것과 같고 가견(假見)과 가설(假說)의 성품과는 비슷하지 않다.
무엇이 여섯 종류인가?
‘색이 아닌 것’은 스스로 측량하고 지시하고 배척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볼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얻을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머물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은 색의 근(根)의 경계를 넘어서기 때문이고,
저 처(處)와 색 등의 근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모습이 없다’는 것은 생각의 성품과 모습을 벗어났기 때문이고,
‘무기(無記)’라고 한 것은 의식의 경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며 ‘집착이 없다’는 것은 번뇌의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유변(有邊)을 제멋대로 헤아리고 집착하는 것을 풀이한 것인가?
두 종류의 뛰어난 모습이 있는 것을 바르게 말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고,
저 근본과 성품과 모습을 바르게 말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어떤 것이 뛰어난 성품과 모습을 바르게 말하는 것인가?
저 상상(上上)에 여덟 종류가 있으니 알아야 한다.
또한 저 일 중에서 항상 하다는 것에 바로 집착하고 무상하다는 것에 바로 집착한다.
항상 하다는 것에 바로 집착하는 것에 의지하므로 아취(我取)에 바로 집착하는 것이 있고,
무상하다는 집착에 의지해서 무아에 집착하는 것이 있고 무아취(無我取)를 집착하는 것에 의지하는 까닭에 실다운 마음을 취하는 큰 집착이 있고,
아집(我執)이 있는 것에 의지하므로 실다운 마음을 취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저 의지할 것에 집착한다는 것과,
또한 저것을 구하고 다시 구한다는 것은 집착에 의지하고 집착하는 것에 의지해서 함께 수순한다.
실답지 않은 마음을 취하는 것에 의지해서 잡고 취하는 것이 착하지 못한 것들이 되고,
잡고 취하고 내지 물듦을 취하고 모습을 잡는 것에 다섯 종류의 장애와 번뇌가 있다.
즉 물드는 법 중에 전도의 근심과 비방의 근심과 일어남의 근심과 거칠고 악한 근심과 무상한 근심이다.
실다운 마음을 잡고 취하는 것에 의지해서 저것은 깨끗한 법 중에서 착한 것 등을 대치하여 안치시키고 내지 깨끗이 안치할 것을 얻는다.
이것이 여덟 종류의 모든 뛰어난 안치를 이루는 것이다.
이 모든 여덟 가지 뛰어난 안치에 대해 보살은 깨달아 생각하여 수순하지 못하고 잡고 집착하지 못하는 까닭이고,
수순할 것을 말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권하지 못하는 까닭이며,
수순할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진실로 잡아 안치한다’고 한 것은 이 여덟 가지 뛰어나게 안치하는 일을 위에서 밝히는 중에 범부는 생각에 묶여 가용(假用)의 성품을 잡아 안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안치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비방하는 변(邊)을 풀이하는가?
또한 한 모습이기 때문이고,
비방하는 일이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방하는 일이 있다’고 한 것은 예컨대 저 사람이 삿된 법을 믿어 모든 때에 무아를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법의 모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이 비방하는 변에 제멋대로 집착하는 것을 간략히 말하는 것이다.
여섯 종류의 모습을 벗어나서 중도의 의미를 분명히 말한다.
어떻게 모든 법을 증득하는 일을 풀이하는가?
예컨대 경에서 “가섭아,
밝음[明]과 밝음 없음[無明]은 다른 것이 아니고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이 아는 것을 중도의 진실하고 바른 관찰이라 한다.
‘내지 늙음과 죽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둘이 아니고 구분되는 것 등도 아니다.
세 가지의 모습으로 법을 증득하는 일을 풀이하여 말한다.
또한 그가 본래 세 가지 일 중에 말한다.
네 번째 인연의 일 중에 장애가 있으면 다스리는 것이 있다.
유위와 무위에 머물러 성품과 모습이 얻을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내 보이고 뛰어난 일을 얻을 수 없다고 나타내 보이는 까닭에 저것을 익히고 나서 여실한 지혜를 증득한다.
여기에서 ‘성품과 모습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예컨대 범부가 헤아리고 집착하는 밝음과 밝음 없음의 성품과 모습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뛰어난 일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저 범부가 제멋대로 헤아리고 집착하는 모든 성품과 모습이 생하고 없어지며 모이는 것에서 이 두 가지 모습을 보지 못하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지혜를 증득한다’고 한 것은 말한 저 지혜와 의지할 생각의 모습에 의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고,
행을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고,
안의 지혜로 법무아를 알아 증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살의 증득한 법을 풀이하는가?
원을 일으키는 것을 돌려서 큰 보리에 향하는 까닭이고,
또한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만약 공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모든 법을 공하게 한다면’이라고 말한 이와 같은 일곱 가지 구절에서 “보살은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공(空)이기 때문에 모든 법을 공하게 하지 않고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의미는 이와 같다.
원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법에 원이 없게 하고,
모습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법에 모습이 없게 한다.
현전에서 업의 생류(生流)와 염(念)의 생류를 일으켜 회복하지 않고 모든 행에 성품이 없으니,
열반으로 세간의 흐름을 없애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와 같이 행하고서 아직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고통스런 마음의 일을 풀이하여 성립시키는가?
또한 한 모습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법에 성품이 있고 성품이 없다’고 말한 이와 같은 일곱 구절은 ‘모든 원수와 장애 등의 법을 아직 없애지 않고 여실히 관찰하여 증득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여실히 증득한다’고 말한 것은 또한 저 장애 등의 법은 그 근본과 성품과 행이 법무아(法無我)이므로 물들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은 것을 본다는 것이다.
어째서 네 종류의 모습을 뛰어나게 풀이하는가?
뛰어난 모습을 보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고,
또한 저것은 모습을 멀리 떠나고 뛰어난 것을 벗어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고,
선정을 잃어 혼란한 것이 뛰어난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뛰어난 것을 본다’는 말은 경에서 말한,
“가섭아,
인(人)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그리고 중제(中際)도 공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이라 말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미는 무슨 까닭인가?
‘중생의 공에 머문다’고 한 것은 법의 공을 보지 않고 법 자체가 공하고 미래의 열반 중에서 아만심을 끊는 것을 짓고,
취한 것을 잘 관찰하며,
내지 행으로 무아의 지혜를 취할 수 있으며,
가명(假名)의 성품을 떠난 공에 포섭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3시를 잘 관찰하지 못하므로 바르게 진여의 지혜의 불꽃을 관찰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공과 가(假)를 망령되이 법을 취하는 교만이라고 부르는 까닭에 ‘공에 의지하고 법무아인 진실한 공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것은 근본을 없애지 않고 중생공을 취한 것과 생하는 법을 취한 것이 있기 때문에 모습에서 물러나 잃는다고 말한다.
이 법 중에서 보살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보살의 행을 분명하고 뛰어나게 말하여 법무아를 보인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공에 의지해야 하며 끝내는 불법 중에서 물러나 잃게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중에서 이렇게 멀리 벗어나고 뛰어난 것을 가지고 있어 중생의 무아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아견(我見)에서 출발하여 이로부터 범부의 가장 최하 가운데에 더욱 다시 최하인 두 종류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고통을 면하지 못한 것이고,
둘째 행고(行苦)이니 바로 이것이 두 가지 모습이기 때문이다.
“가섭아,
차라리 중생이란 견해를 일으켜 수미산과 같이 쌓는다 해도 공이란 견해로 증상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섭아,
모든 견해에서 공으로 인해 해탈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공이란 견해를 일으키면 저 사람은 다스릴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문장은 저 뜻을 분명히 보여준다.
‘차라리 아견(我見)을 일으켜 수미산과 같이 쌓는다’고 한 것은 아견은 대치할 수 있고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공이란 견해로 증상만을 일으키지 말라’고 한 것은 법무아를 보지 못하므로 증상만을 일으킨다는 것이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아(我)가 공하므로 모든 행이 공이라고 보고,
망상으로 집착한 성품이 공하다는 것도 공하니,
저것은 얻을 수 없다.
근본이 공하고 제멋대로 집착한 분별의 성품도 공하니,
제멋대로 전도된 곳에 안치하기 때문이고,
제멋대로 집착하는 견해를 안치하기 때문에 공이라는 견해를 이룬다.
만약 공이란 견해를 일으킨다면 저 사람은 대치함을 줄 수 없으므로 간직할 수 없으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간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태어나는 등의 모든 고통을 면할 수 없고,
모든 때에 번뇌의 뜨거움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행을 즐길 수 없으니,
비유하면 병든 사람을 치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두 종류의 집착과 취하는 것을 없애므로 전자를 위해서 두 종류의 모습을 말한다.
비유하면 병든 사람에게 어진 의사가 약을 주는 것과 같다.
‘내지 만약 공이란 견해를 일으키면 나는 저 사람을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한 것,
이것은 나타내 보이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비유하면 병든 사람이 바르게 숨을 가지지 못해서 모든 근심을 움직이게 하니,
병의 원인을 움직이는 것에 수순하고,
병의 원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의 앞과 뒤에 수순하여 두 종류의 고통스런 느낌[受]을 받는 것과 같다.
인무아(人無我)의 견해를 없애지 않으면 아견(我見)과 같고 생공(生空)과 법무아에 집착해서 벗어나지 않으니,
스스로 번뇌의 병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앞과 뒤에 두 종류의 멸(滅)을 취하므로 멸이라 한다.
보살은 이와 같지 않다.
여기에서 ‘멸이 매우 뛰어나다’고 한 것은 예컨대 경에서 비유하기를 “이와 같은 사람은 허공의 이와 같은 것 등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마치 사람이 허공 가운데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분별하여 제멋대로 집착하고 헤아려 물건을 만들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저 사람이 이미 이와 같은 말을 하고서 이 허공을 제거한다”고 하였다.
이 허공을 제거하고 이와 같은 등의 인무아 중에 머물고 법무아에 머물지 않으며,
아만 때문에 두려움을 내고 허공의 처소인 말할 수 없는 일 중에서 허공을 제멋대로 집착하고,
제멋대로 안치하고 집착한다.
안치하고 집착하므로 색이 평등하고 그러므로 색이 평등하다는 생각으로 저 끊는 일을 구한다.
보살은 그렇지 않다.
이 중에서 이 마음이 혼란한 것은 뛰어난 일이 있기 때문이니,
말하기를 “가섭아,
비유하면 화가가 스스로 공포스러운 것을 그리듯이 야차와 귀신의 모습도 이와 같은 것들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행을 잃어 어지러운 자는 인무아에 머물기 때문에 실제로 경계가 있다고 스스로 분별하고 생각한다.
따라서 저 사람이 생각 등으로 전도되었기 때문에 전도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다.
어떤 두 종류의 비유로 풀이하여 말하는가?
첫째는 요술쟁이의 비유이고,
둘째는 두 나무가 서로 마찰하는 비유이다.
첫째 비유는 취하는 자를 관하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인무아의 지혜로 모든 행을 취할 뿐이나 저 사람은 법무아의 지혜로 관찰하니,
이 법무아의 지혜를 이름하여 취하는 주관[能取]과 관찰[觀]이라 말한다.
그러나 저 사람은 인무아의 지혜와 법무아의 지혜를 인(因)으로 삼으니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비유이다.
만약 요술쟁이와 요술로 만든 사람을 인(因)으로 삼으면,
비유하건대 요술로 만든 사람이 요술쟁이를 먹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행한다’고 한 것은 법무아의 지혜와 중생무아의 지혜로써 가명(假名)이 성품을 벗어나므로 공(空)이고,
저 분별을 벗어나므로 고요하고,
모습을 버릴 수 있으므로 견고한 것이 없으니,
공하여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견고하게 관찰하지 않는 것은 먹는 것과 같다.
둘째 비유는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마치 두 가지 실다운 것을 증득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모든 관찰을 여실히 증득하고 저 취하는 주관과 취하는 대상을 고요히 생각하여 염(念)하는 인(因)을 버리지 않는다.
저 안의 지혜를 영원히 얻어 결정된 지혜가 생긴다.
여기에서 ‘취할 대상을 관찰한다’고 한 것은 중생무아의 지혜로 관찰하는 것이고,
‘취하는 주관’이라 한 것은 법무아의 지혜를 행한다는 것이다.
저 두 가지는 위와 아래의 나무 같이 서로 수순하기 때문이다.
‘고요히 생각한다’고 한 것은 고요한 것이 인(因)이므로 안에서 증득한 지혜로 결정된 지혜를 내는 것이니 이것을 진실한 증득이라 한다.
이 두 나무의 비유는 인(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인 것이다.
비유하면 두 나무의 마찰로 말미암아 불이 생기고,
생긴 다음에 또한 저 두 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인무아와 법무아의 지혜로 행의 인(因)을 삼는다.
이 법무아의 지혜를 낳고서 안의 지혜를 인연하여 반드시 지혜를 낳는다.
저 사람은 지혜를 행하여 모든 망념으로 성품을 헤아리고 집착한다.
저 사람은 이것을 여실히 관찰하여 번뇌를 불태울 수 있다.
어떻게 두루 공에 이른다고 말하는가?
또한 한 모습의 의미이기 때문이고 또한 저 법무아의 지혜 중에 여실히 보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비유하면 등불에 불을 붙이면 모든 어두움이 다 저절로 없어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것은 해석하여 말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여기에서 여실하게 보는 까닭이고 지혜 없는 것 등으로 가명(假名)의 성품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공’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고,
‘고요함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 공을 이와 같이 풀이하는가?
첫째는 업이 없어지고 번뇌가 없어지니 이것은 대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가섭아,
비유하면 집 안의 실(室)이나 방(房)이나 옥(屋) 중에서 천 년을 지내 온 그 어둠과 같으니,
모든 번뇌의 업[結業]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비유로 말한 것이니,
여기에서는 멸(滅)을 분명히 보인다.
‘잃는 것에 이른다’고 한 것은 찾아보면 생긴 지혜의 광명에 의해 시작 없는 모든 업과 번뇌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빨리 모든 번뇌를 없앨 수 있다면 무슨 까닭에 보살은 오래도록 세간에서 행하는가?
두 가지 비유는 뛰어난 과를 얻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가섭아,
비유하면 종자가 허공에 있으면 모든 잡된 세간법도 불법을 자라게 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더러운 것이라도 좋은 밭에서는 종자를 자라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유는 이 일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보살은 열반의 마음을 향하기 때문에 중생을 버리지 않고 불법을 얻기 위한 까닭에 세간을 취하기를 원한다.
모든 선근을 이미 회향하고 원을 일으키므로 긴 밤에 행을 행한다.
이 중에서 열반은 무위이니,
비유하면 허공과 같다.
저것은 의지하는 까닭에 모든 불법을 자라게 하지 못한다.
세간은 번뇌의 더러운 밭과 같다.
보살의 큰 자비도 번뇌의 더러운 땅에서 저 땅을 간직하는 것과 같으므로 보살의 불법을 자라게 할 수 있다.
【문】어떻게 하열한 유위법에 의지하는 가운데 보살의 위없는 불법을 자라게 할 수 있습니까?
【답】연꽃으로 비유해서 분명히 풀이하였다.
“가섭아,
비유하면 낮고 축축한 진흙이라야 연꽃이 생긴다”고 하였으니,
보살도 그렇다.
생사의 진흙탕이라는 사정(邪定)13)의 중생 속에서 보살이라야 불법을 낸다.
【문】만약 이와 같다면 모든 성문은 보살 중에서 이러한 열두 종류의 뛰어난 일이 없을 것이다.
열두 종류는 무엇인가?
【답】닦고 익힘으로써 모든 잡스러운 선근을 나타내는 뛰어난 일[勝事]과,
지혜의 행을 닦는 뛰어난 일과,
해탈의 과(果)에 포섭된 모든 무생지(無生智)의 해탈에 함께 도달하는 뛰어난 일과,
모든 마군의 원수 등을 항복시키는 뛰어난 일과,
무학(無學)의 뛰어난 일과,
아라한의 뛰어난 일과,
응당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의미 때문에 대중이 높다고 말하는 뛰어난 일과,
사쌍팔인(四雙八人)14)에 의지하므로 여러 설법하는 자가 높다고 밝히는 뛰어난 일과,
현재법에서 열반을 얻어 법을 설하는 까닭에 중생 가운데 높고 뛰어남을 밝히는 일과,
그리고 나아가 중생과 아홉 가지 중생의 처(處)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적멸을 얻는 뛰어난 일과,
마음에서 자재함을 얻는 뛰어난 일과,
힐난해서 중생을 조복시키는 뛰어난 일입니다.
의문을 막기 위한 까닭에 모든 비유를 말하니 알아야 한다.
처음의 뛰어난 것에 대한 의문을 막기 위한 까닭에 큰 바다와 생소(生酥)의 두 가지 비유를 말하였으니,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이 비슷한 법을 수용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의문을 막는 보살의 지혜에 두 가지가 있으니,
자기[自]와 다른 이[他]이다.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의 몸에서 장애를 대치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의문을 보호하는 것에 두 가지 장부(丈夫)인 사람의 비유가 있으니,
상부인(上夫人)이 해탈에 처하는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은 모든 성문승과 성문의 원(願)에 처하는 것과 같다.
노비나 하인에게 처한다는 것은 중생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고,
왕에 처하는 것이란 모든 대승의 원(願)이니,
모든 원수를 막고 보호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전륜왕의 비유는 여래의 진정한 자식에게 준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무학의 뛰어난 일을 막아 보호하는 것은 두 번째 전륜왕의 비유이니,
부처님의 종자를 끊지 않기 때문이다.
아라한의 뛰어난 일을 막아 보호하는 것은 응당 공양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니,
세 번째 전륜왕의 비유를 말하여 살바야(薩婆若)의 인(因)을 가르친 때문이다.
대중이 높다고 말하는 뛰어난 일을 막아 보호하는 것은 비유리(毗琉璃)의 비유로서 처음 보리심을 거두어 얻은 것이다.
설법자가 높다고 밝히는 뛰어난 일을 막고 보호하기 위하여 약수왕(藥樹王)15)의 비유를 말하니,
중생에게 번뇌의 병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중생의 위[上]임을 밝히는 뛰어난 일을 막아 보호하는 것의 비유는 달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니 이와 같이 모든 중생에게 지혜의 광명을 지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적멸을 얻는 뛰어난 일을 막아 보호하는 것은 달의 첫 비유이니 공덕과 지혜의 인(因)을 모아서 보리를 얻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자재를 얻는 뛰어난 일을 막고 보호하는 것은 유리구슬로 비유하였으니,
보살이 살바야의 과를 얻기 때문이다.
힐난해서 중생을 조복시키는 뛰어난 일을 막아 보호하는 것은 비유리 구슬을 수선하는 것으로 비유하였으니,
마음이 자재하다는 뛰어남과 이양(利養) 등의 모든 성문의 공덕이란 것은 보살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모든 비유를 간략히 말하였다.
보살은 성문 중에서 뛰어난 공덕을 보이기 때문에 이로부터는 모든 공덕을 널리 말하겠다.
몇 종류의 성문이 있으며 성문의 계율 중에 보살계에는 어떤 뛰어난 일이 있는가?
네 종류의 성문이 있고,
다시 열세 종류의 모습이 있어서 모든 성문의 계율 중에 보살계가 뛰어난 일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네 종류의 성문이 있다’고 한 것은 응(應)성문과 아만(我慢)성문과 보리의 원(願)을 지은 성문과 반드시 멸하는 성품[定滅性]의 성문이다.
이 중에서 응성문은 예컨대 중생을 건지기 위한 까닭에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교화하는 것이니,
이것을 응성문이라 한다.
아만성문은 중생 무아의 지혜만 있고 삿된 법무아에 대해서는 아만으로 집착된 지혜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을 아만성문이라 한다.
보리의 원을 지은 성문은 예컨대 본래부터 연민의 마음이 적으면서 여래를 가까이 하고 여래의 가르침을 익혔기 때문에 위에 있는 묘한 불법 중에 몸과 마음의 믿음으로 공덕의 모습을 짓고 훈습하여 이룬 성문이다.
비록 저 사람이 무루의 계율 중에 이르러 머물렀다 하더라도 모든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해서 모든 방편을 권하여 말씀하셨으니,
저 사람은 이 인(因)으로 큰 보리를 닦아 얻게 된다.
비록 이와 같이 보리를 닦지만 그 다음의 행 중에서 이 사람이 근기가 둔하고 깨끗한 것을 즐겨하기 때문에 처음 발심한 보살과 같이 불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그러므로 보리원의 성문이라 말한다.
결정코 멸하는 성품의 성문은 예컨대 본래부터 연민하는 마음이 적고 그 성품이 엷기 때문이고,
한결같이 중생을 등지고 세간의 고통스런 마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열반에만 머물고 향하기 때문에 큰 보리 닦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성문이다.
비유하면 두 왕자가 있는데 형상과 모습은 다른 점이 없고 똑같이 왕의 모든 즐거움을 받았지만 이 중에서 한 왕자는 왕법과 기예[技藝] 등의 일에 잘 통달하였으나,
두 번째 왕자는 그렇지 않은 것과 같다.
이 두 왕자의 기술과 예술이 뛰어나기 때문에 즐거운 곳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무루의 계율 중에 머무는 것과 멸하는 성품의 성문을 알아야 한다.
저 사람에게는 다시 몸에 뛰어난 일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백법(白法)을 익히는 곳과 지혜가 모이는 곳과 비슷한 곳과 성품의 곳과 집에서 간직하는 곳과 행하는 곳과 신령스러운 곳과 수행의 곳과 복전의 곳과 위로 뛰어난 곳과 인과의 곳과 의지해서 생기는 곳을 알아야 한다.
비유하면 허공에 종자를 두어도 자랄 수 있다고 한 것은 옳지 않은 것과 같다.
더러운 것이라도 좋은 밭에 두면 종자가 자랄 수 있지만,
높은 땅에서는 연꽃이 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등의 비유는 반드시 멸하는 성품의 성문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보살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는 뛰어난 일을 말하는 것이다.
반드시 멸하는 성품의 성문은 더러운 땅과 같아서 모든 잡된 행이 잡된 진흙에서 번뇌에 물든다.
또한 모든 중생을 헤아리는 일을 등지고 한결같이 열반계를 향하기 때문에,
마치 뜨겁게 타오르는 땅에 처하는 것과 같다.
깨끗한 중생계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마음에 머물며,
도리어 보살에게 열반을 향하는 마음과 깨끗한 중생에 머무는 것을 묻는다.
그러나 마음은 번뇌 있는 중생을 건지는 것을 버리지 않는 까닭에 잡되고 물든 세간을 취하고 중생을 거두어 취한다.
비록 모든 백법을 모으는 곳을 번갈아 평등하게 비유하여 뛰어난 일을 짓는 것을 나타내 보이지만,
성문은 가지고 있는 백법이 적고 자기만을 이롭게 한다.
그러나 보살의 법은 헤아릴 수 없어 모든 중생을 이익 되게 하고 늘어나게 하는 것이 자식에게 하듯이 하니,
비유하면 아버지가 생수와 연유로 모든 아들을 자라게 하는 것과 같다.
보살도 그러하여 자기의 선근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마치 생수나 연유와 같고,
새로 배우는 보살을 기르고 늘리는 것은 자기 자식을 기르는 것과 같다.
허공은 오직 평등하게 지혜가 모이는 뛰어난 일을 나타내 보이지만 성문은 무루의 지혜 때문에 자신의 공적함만을 본다.
모든 번뇌 중에서 보살은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지혜를 함께 증득하고 시방의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여 원을 일으키고 위없는 보리를 행하기 때문이다.
최대부인(最大夫人)과 노비의 비유는 비슷하면서도 뛰어난 곳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문이 뛰어난 해탈을 생각하여 최대부인인 어머니의 처소가 좁고 열등하고 작다는 생각을 하였으니,
마치 아버지가 빈궁해서 마음은 증장하지만 불자(佛子)를 이루지 못하는 것과 같다.
모든 보살이 하열한 범부 중생의 성품을 버리고 노비와 어머니의 처소를 생각하여,
위를 생각하는 마음이 마치 관정대왕(灌頂大王)을 성취하는 것과 같으므로 불자라고 말한다.
처음 전륜왕의 비유는 성품이 처하는 뛰어난 일을 나타내 보였으니,
비유하면 전륜성왕의 아들이 모든 힘을 이루고 세력을 성취하고 지극한 위세를 성취하지만 전륜왕의 모습이 없으므로 전륜성왕이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성문도 그러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고 모든 힘을 성취하는 것이 교묘하여 세력을 성취하지만 마음을 버리지 않는 까닭에 지극한 위세를 성취했어도 불성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함께 옹호하고 거두어 취하지 않는다.
보살은 두 번째 전륜왕의 비유로 집을 간직하는 뛰어난 일을 나타내 보인다.
비록 성문은 다 이르렀기 때문에 미래에 부처님의 집을 지킬 수 없지만 처음 발심한 보살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전륜왕의 비유는 행이 뛰어난 곳을 나타내 보인다.
비록 성문은 다 이를 수 있지만 모든 하늘의 성인이 새로 행하는 보살에게 하듯이 공경하고 찬탄하지는 않는다.
비유리 보배 구슬의 비유는 신령스런 힘의 뛰어난 일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성문은 다 이르렀고 보살은 초지(初地)에서 출발하지만 지혜의 신령한 힘 때문에 모든 성문과 연각을 물러나게 한다.
설산의 약수왕(藥樹王)의 비유는 수행의 뛰어난 일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비록 성문은 지혜를 성취하여 번뇌의 병을 없앨 수 있지만,
지혜의 약으로 중생의 번뇌 병을 없애는 것을 도리어 보살에게 물으니,
그 이유를 보살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을 항상 행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별의 비유는 복전의 뛰어난 일을 나타내 보였다.
비록 모두 다 도달한 성문이라 할지라도 지혜의 빛으로 중생을 비추지 않기 때문에 복전이 되어 모든 하늘과 인간을 제도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예컨대 번뇌를 없애지 않은 보살이라 할지라도 모든 하늘과 인간에게 복전이 된다.
달에서 처음 달[初月]의 비유는 뛰어난 것을 나타내 보인 것 중에 뛰어난 일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모든 때의 성문 중에서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항상 뛰어나고 저 뛰어난 사람 중에서 모든 보살은 또 더욱 뛰어나니 그 이유는 저 뛰어난 사람도 보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에게 두 종류의 모습이 있는 까닭에 더욱 뛰어난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저 사람도 중생을 교화하고 불법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보리와 과를 얻는 것이 있고 교화할 중생을 따라서 해탈을 얻게 함이 있다.
비유하면 진영에서 그림자로 기이한 모습을 만들면 사람의 마음이 두려워서 먹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것도 이와 같은 줄을 알아야 한다.
비유하면 모든 하늘과 인간의 모든 세간이 유리구슬을 잘 간직하는 것과 같으니,
이 비유는 인과의 뛰어난 일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비록 성문이 깨끗한 법의 뛰어난 인(因)을 한결같이 닦고 모으고 다시 헤아릴 수 없는 선지식을 만나고 가까이 하지만 큰 보리의 과를 얻을 수 없어 도리어 질문하는 까닭이다.
모든 보살에게 말하는 것은 큰 보리의 과를 얻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비유리 보배를 수선하는 것과 같다.
이 비유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뛰어난 일을 나타내 보인다.
모든 성문은 보살에 의지하는 까닭에 세간에 출현하는 것이지,
보살이 성문에 의지해서 세간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악에 머물고 간직하는 의미를 없애기 위해서이다.
존자 마하가섭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섭아,
만약 어떤 나라에 낙타가 울음을 울면서 흑두(黑頭)를 들어 밝음을 우러러본다면,
저 나라에는 근심과 두려움 등의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가섭아,
보살은 언제나 중생을 구하고 보호하고 이익 되게 해야 하는데 어찌 점차로 말하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는 저 과(果)의 이익을 얻는 뛰어난 일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앞에서 ‘잡되고 물든 번뇌의 진흙에서 보살의 불법을 자라게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렇다면 저 몸에서 자라지 않는 것은 또한 모든 보살이 저 몸 중에서 돕게 하는 것이 아닐 텐데,
어찌하여 저 몸에서 보살을 늘어나게 하겠는가?
중생을 위한 까닭에 모든 행을 닦고 이러한 말씀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만약 저것을 늘린다면 또한 자기 몸과 도를 늘릴 것이다.
경에서 ‘보살은 언제나 이와 같은 것들을 구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사방의 모든 세계에 이르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모든 보살이 중생을 이롭게 하기를 원하는 일은 진실로 필경에 마쳤다’고 한 것은 좋은 의사가 몸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그만둔 것이고,
내지 외도가 번뇌를 다스리는 것을 벗어난 것이니,
이것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 가명(假名)을 다스리는 것이고 전도된 것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보살’이라고 한 것은 좋은 의사를 비유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중생은 병든 사람과 같고,
모든 병든 사람은 탐욕 등과 같고,
약은 부정관(不淨觀) 등과 같다.
예컨대 세 종류의 모습이 있는 까닭에 4대(大)가 움직여서 모든 병이 생기는 것이니,
모든 악을 쌓기 때문이거나,
먹지 말아야 하는데 먹기 때문이거나,
모든 병을 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세 종류는 악한 마음으로 말미암는 까닭에 마음의 병이 생긴다.
혹 모든 탐욕 등의 악을 쌓기 때문이고,
긴 밤중에 모든 탐욕 등을 익히기 때문이고,
혹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을 보아 행하고 다시 현재에 보는 등의 모든 일을 행하기 때문이고,
혹 전도의 일을 행하는 것을 버리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처음 번뇌의 병을 부정관 등으로 대치해야 하니,
알아야 한다.
부정관으로 모든 탐욕을 다스리고,
자비한 마음으로 성냄을 다스리고,
네 가지 인연관(因緣觀)으로 어리석음을 다스린다.
이와 같은 말들은 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공 등을 다스리라고 말하는데,
네 종류의 중생을 의지해서 말한다.
첫째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고,
둘째는 삼마발제에 즐겨 집착하는 것이며,
셋째는 모든 생기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고,
넷째는 해탈의 경지가 아닌 것에서 해탈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모든 견해에 집착하는 중생에 의지하므로 “모든 견해를 오직 공만이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공이라는 견해를 일으킨다면 이와 같은 말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삼마발제에 즐겨 집착하므로 모습 없음을 말하니,
모든 유(有)와 무(無)에서 모든 생각으로 분별하는 모습 중에는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유와 무를 보여 나타내고,
보여서 삼매에 즐겨 집착하게 한다.
모든 생기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므로 원 없음을 말하고,
모든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 등을 없애므로 원 없음을 말한다.
해탈의 경지가 아닌 것에서 해탈의 모습을 짓는 것에 의지해서 네 가지 전도를 말하고,
모든 전도를 없애기 위한 까닭에 네 가지 전도를 말한다.
항상하다는 등을 보는 까닭에 해탈의 경지가 아닌 것에서 해탈의 모습을 말한다.
전도를 익히는 것을 버리기 때문이고,
있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네 가지 전도를 다스리는 것을 자세하게 그리고 간략하게 말하니,
알아야 한다.
범부에는 다시 여섯 종류가 있다.
몸에 집착하는 것에 의지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 사람을 다스리기 위하여 여러 염처(念處)를 말하였다.
번뇌로 정신이 흐트러지는 사람이 있으니 저 사람을 다스리기 위하여 4정근(正勤)을 말하였다.
아만에 뒤섞여 묶인 사람이 있으니 저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 모든 여의족(如意足)을 말하였다.
모든 착함을 닦는 것을 벗어나는 사람이 있기에 저 사람을 다스리기 위하여 모든 근(根)과 역(力)을 말한다.
모든 진리를 통달하지 못한 사람이 있기에 저 사람을 다스리기 위하여 모든 각도분(覺道分)을 말한다.
길하고 흉한 것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으니 그 사람을 다스리기 위하여 모든 도분(道分)을 말한다.
어찌하여 몸을 관찰하는 것에 수순하지 못하고 몸이라는 견해나 아(我)라는 견해에 떨어지는가?
분별하지 못하면 법을 믿지 않는 것 등을 잘 다스림을 등지게 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저것을 대치하므로 모든 근과 역(力)을 말한다.
“가섭아,
모든 염부제 안의 모든 의사와 의사의 제자 중에 기바(耆婆) 의사가 제일이다.
가섭아,
가령 삼천대천세계 안에 있는 모든 중생인 저들은 모두 기바 의사와 같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기바가 모든 중생과 비슷하다고 하여 모든 논(論)의 의방(醫方)인 다문(多聞)이 그 교묘함이 뛰어난 것을 나타내 보인 까닭이고,
견해를 구별하여 취하는 것과 가르침이라는 견해와 의심과 후회 등이 있으면 다스리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 중에서는 방편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므로 ‘모든 견해 등이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예컨대 존자 천타(闡陀)16)가 말하기를 “모든 대덕이여,
나는 이와 같이 생각한다.
‘색은 무상하고,
다시 내가 사마타를 행하는 것도 공하여 분별이 없다.
애착을 없애고 욕심을 벗어나고 욕심을 없애니 열반에 이르러 마음은 안정되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고 머물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다.
나의 뜻을 회전하면 싫어하고 게으른 마음을 낸다.
그러나 무엇이 나의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말하고서 저 사람은 그때 지혜의 마음으로 열반을 생각했으나 나의 몸이란 견해가 없어지지 않으므로 ‘나는 미래에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열반 중에서 마음이 물러나 고뇌가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나와 나의 것인가?
이것만이 행이라고 이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
저것이 없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러나 이때 세간의 도를 행하는 것을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한다.
아직 선정에 들어가지 못한 마음을 거두고자 하므로 의심과 후회를 짓는 것에 묶인다.
의심과 후회의 인(因)을 흩으려 하므로 가르치는 사람을 제거한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와 모든 보살은 모든 독한 근심이 없어 큰 힘이 있다.
그러므로 의심과 후회에 힘이 없는 것을 보아서 깨달아 알 수 있으니 이것은 뜻으로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외울 수 없고 제대로 말할 수 없으며 말로는 할 수 없다.
이 조도행(助道行)을 구하고 나서 출세간의 행을 구하고 유여(有餘) 중에서 마음을 구하니,
그런 다음에 유여(有餘)하다.
중생의 무아에 의지하는 데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알아야 한다.
법무아에 의지해서 한 가지 인연으로 지혜에 들어가는 것 등이 있다.
본래의 지혜와 믿음의 지혜가 다만 마음인 것을 믿고자 함으로 말미암아 이 중에서 연각이 없다는 것과 무아를 충고하고 끊는다.
인연의 습기 중에서 구하고 찾아서 인무아를 증득하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안과 밖의 입(入)과 저 식처(識處)를 염하는 것에 의지하는 중에 망상으로 제멋대로 성품을 생각하므로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색 등의 모습이 없는 것을 성취하여 성품을 보기 때문에 법무아를 증득하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그러나 성품을 성취하므로 마음을 짓는 일에 보호함이 있고,
바르게 취하지 않는다.
말하기를 “가섭아,
마음은 모든 부처님도 보지 못하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자연이 아닌 까닭에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법의 근본에 머무는 것을 나타내 보이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고,
세 때에 보는 까닭에 이와 같이 제멋대로 생각하고 분별하는 성품이 없는 것을 앞에서 말하였다.
제멋대로 생각하는 모습으로 다른 것의 성품과 모습을 말하는 것이고,
또한 다른 것을 의지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까닭에 저것은 무엇으로 성품을 삼는가라고 말할 뿐이다.
이 중에서 심(心)과 심수법(心數法)을 밝힌다.
만약 뜻으로 다만 모습인 것에 떨어지면 이것이 어떻게 세간이 허깨비 같은 생사를 이루는 것을 풀이하여 성립시키겠는가?
오직 한 마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마치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이처럼 싫어져서 떠나는 행에서 마음은 무슨 까닭에 해탈을 얻지 못하는가?
성취하는 것은 바람과 같다고 풀이한다.
여기에서 ‘멀리에 이른다’고 한 것은 모든 일 중에서 저것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은 알기 어렵다.
해탈을 얻는 일이 등불의 불꽃과 같다는 말을 어떻게 풀이하는가?
무명을 연(緣)하는 힘 때문에 행이 있으며,
그것이 다하면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만약 마음의 번뇌하는 힘 때문에 물들게 되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진여에 수순한다.
저 번뇌가 깨끗하지 않으므로 각(覺)의 해탈을 보지 못하지만 이 근심을 막고 보호하는 까닭에 허공과 같은 것을 나타내 보이니 모든 근심을 막고 보호하는 까닭이다.
허공과 같이 분별이 없기 때문에 우레나 번개와 같이 생각 생각에 없어지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탐욕 등의 모든 것 중에 머물지 않으므로 무상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모습 때문에 다른 모습의 근심을 짓는 것을 막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비록 깨끗한 마음이 있더라도 생각 생각에 없어지므로 원숭이 같다고 표현하였는데,
저것은 여러 경계를 바라고 구하지 않으므로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탐욕 등에 수순하여 각각을 항복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흩어짐이 있는 것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모든 것이 평등하지 못한가?
함께 생기는[共生] 것을 화가의 일과 같이 풀이하여 성립시킨다.
무슨 까닭에 모든 때가 아닌가?
이와 같은 업 등을 짓는 것으로 머물지 않는 것[不住]을 풀이하여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으로 현재의 업에 물러나는가?
혹 본래의 기(氣)의 힘을 나타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
이것은 왕과 같은 일을 풀이하여 성립시킨다.
모든 업으로 닦는 힘이 최상인 것은 저 사람이 마음을 훈습하였기 때문이니 증상(增上)을 얻어서 분명히 말하는 것을 성립시킨다.
만약 왕과 같다면 무슨 까닭에 자기가 모든 고통을 내는가?
원수 같은 것을 풀이하여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자기가 원수 같은가?
빨리 집을 모으는 일 같은 것을 풀이하여 성립시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몸 등을 나타내 보이는 데 네 가지 전도가 있으나,
평등한 행에 수순하므로 근심을 막고 보호한다.
이와 같은 것이 있다면 무슨 까닭에 즐거운 곳에서 생(生)을 취하는 일을 생기게 하는가?
원수 같은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고,
세 가지 고통이 있기 때문이고,
저곳에서 또한 고통을 낳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고통스럽다면 무슨 까닭으로 고통에 맞서 다스리는 것을 취하지 않는가?
사람의 힘을 빼앗는 야차나 귀신과 같은 것이 삼매에 즐겨 집착하는 것을 막고 보호하기 때문이다.
순서대로라면 또 무슨 까닭에 맞서 다스리는 중에 즐거움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는가?
도적이 하는 일을 막지 못하는 것처럼,
저 조도행의 선근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고통 중에 공덕을 지어 즐거운 마음으로 즐겨 머문다면 이와 같은 것이 어떤 근심이 되겠는가?
예컨대 세력 있음과 세력 없음과,
미워하고 애착하는 일을 갖추었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어리석고 미치기 때문이고,
색 등에 집착하기 때문이고,
나방이 등불에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을 풀이하여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음의 모습을 구해도 얻을 수 없으니,
만약 얻을 수 없다면 볼 수 없으니 이와 같은 성스러운 성품의 무리는 몸으로 업을 짓지 않고 입과 뜻으로 짓지 않으며 저 성품 중에 상ㆍ중ㆍ하의 차별도 없게 된다”고 하였다.
‘마음의 모습을 구하지만 얻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무슨 점차(漸次)가 있겠는가?
다른 것의 성품과 모습을 행하는 것을 나타내 보일 뿐이다.
예컨대 저 다른 것의 성품과 모습을 구하기에 다시 제멋대로인 망령된 생각을 구하게 된다.
성품을 성취하기를 구할 때에 저것이 나타나 보인다.
그런데 저 제멋대로 망상하고 분별하는 성품은 마음의 이치에서 구해도 얻을 수 없으니,
그러므로 성품과 모습을 얻을 수 없다.
저 또한 이로써 얻을 수 없으니 성품과 모습을 성취한 마음을 드러내면 그것은 무위이다.
이는 나중에 말하겠다.
저 3세에 생기는 일이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 것과 같지 않은 것을 보이니 그때의 마음은 3세에 생기는 것과는 같지 않고 이와 같이 저것은 생기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3세를 넘어서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이다.
저것은 3세를 넘지 않는 일이란 것은 일어난 다음에 다시 마음을 생기게 하는 까닭이다.
만약 3세를 넘어선다면 저것도 또한 제멋대로 집착하고 취하는 것을 막아 보호하는 것이 있다고 이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방명(傍名)으로 있으면서도 없는 것을 나타내 보이니,
망상의 염은 다른 생각의 성품과 같기 때문이다.
성품을 성취하는 일은 분명히 말했으므로 있는 것이며,
그것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몸의 인(因)을 관찰하기 때문에 그것이 없다는 말이다.
성품이란 지옥 등에서도 성품의 인은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없는 것이다.
취(趣)는 생기는 인을 짓기 때문에 없다.
멸(滅)은 이미 없어졌기 때문에 그것은 없다.
이(離)는 없어진 까닭이고 불리(不離)는 아직 없어지지 않은 까닭이니,
그것은 행이 없다.
업은 5음을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무위인 것이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까닭에 이 모든 것을 저 무위라고 말한다.
지금 분별하여 풀이하고 안치하려 한다.
‘이 모든 성스러운 성품의 근본’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생각 때문에 저 성스러운 경지를 얻는다는 말이다.
모든 성인은 이 때문에 드러난다.
그러나 저 성품은 유여(有餘)와 무여열반(無餘涅槃)에 의해 드러나고,
그리고 보살의 열반에 의해서 드러난다.
이 중에서 유여열반에 의지하므로 “계를 지키는 것도 없고,
계를 깨뜨리는 것도 없다”고 말한다.
계를 잘 배웠기 때문에 유여의 멸(滅)을 행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유여를 행하지도 유여를 없애지도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심(心)도 없고 심수법(心數法)도 없다’고 한 것은 물듦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업은 다시 번뇌가 업을 말미암는 까닭이다.
‘또한 업보가 없다’고 한 것은 무여열반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한다”고 말하였다.
‘만약 고통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면’이라고 말한 것은 성인의 성품[聖性]이니 앞에서 저것은 업이 없다고 말한 것과 같다.
경전의 세 번째 구절은 저 업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다.
네 번째 구절은 중생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의 열반에 의지하므로 ‘이 성품의 평등하기가 허공과 같고,
그리하여 이 성품은 진실하고 깨끗하니 원래부터 필경에 깨끗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 성품이 평등하기가 허공과 같다’고 한 것은 자기의 이익과 다른 사람의 이익을 동등하게 행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니,
이 성품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
‘모든 법이 평등한 맛이다’고 한 것은 모든 깨끗한 보살 중에는 저것과 다른 점이 없음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니,
모든 보리분법(菩提分法) 중에 달리 뛰어난 것이 없는 까닭이다.
‘이 성품은 고요히 멀리 떠나 몸과 마음이 고요하다’고 한 것은 저 근본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 까닭이다.
‘이 성품은 열반을 수순하고 향한다’고 한 것은 다른 몸 중에서 저 몸의 업이 뛰어난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성품은 고요하여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멀리 떠났다’고 한 것은 비록 함께 해탈하였지만 습(習)을 멸한 것에 뛰어난 점이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성품은 무아이니 아와 아소(我所)를 벗어났다’고 한 것은 깨끗한 세계의 영원히 멸한 선정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성품은 헛되거나 참된 악이 없고 평등한 성품에서 생겨났다’고 한 것은 저 행 중에서는 세간에서건 열반에서건 잃음과 얻음도 없고 분별도 내지 않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그 이유는 평등하기 때문이고 참다운 뜻이기 때문이다.
열반은 실하면서도 허(虛)한 의미이므로,
세간은 실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성품은 진실한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라고 한 것은 저 비방을 벗어났으며 외도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성품은 다할 수 없으며 필경에 생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비록 무여열반을 얻었지만 중생의 이익 짓는 것을 끊지 않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성품이 필경에 생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저것은 번뇌업에서 생기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그 이유는 뛰어나고 자재한 힘이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성품은 모든 진여에 항상 머문다’는 말에서 ‘항상’이라는 것은 세간과 열반에 머무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저것은 그렇지 않으므로 저 성품은 안락하고 청정하며 무아 등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성품이 진실하고 깨끗해서 원래부터 필경에 깨끗하다’고 한 것은 그러한 불꽃의 장애를 깨끗이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과 출세간을 다스리는 차별이 가지는 큰 의미와 일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순서대로 하는 것과 순서를 뛰어넘는 것을 풀이한 것이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가섭아,
보살은 네 방향에 이르도록 중생을 이롭게 해야 한다”고 한 것은 세간과 출세간의 지혜 등으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네 방향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어떤 것이 네 방향인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까닭에,
세계에서 나머지 다른 세계로 이르고,
신령한 힘 때문에 한 세계에서 나머지 다른 세계에 이르며,
중간에는 예컨대 나라에서 나머지 다른 나라로 이르기 때문이고,
또한 저 세계에서 와서 태어나기 때문이고,
저 사람이 곳곳에서 태어남을 취하기 때문에 중생 있는 것에 따르는 것이다.
‘저 보살이 교화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저것을 위해서 깨끗이 하기 때문이고,
‘진실하고 필경의 다스림을 행한다’고 한 것은 보살이 번뇌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은 번뇌로 인해 크게 전도되고 미치게 되나 보살이 번뇌를 다스리므로 위없는 큰 의사를 이룰 수 있고 세 종류의 청정한 계행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기바(耆婆) 등의 모든 위대한 의사가 아닌 사람도 모든 견해를 대치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심과 후회를 다스려 제거한다”는 말에서 혹 다시 ‘다스림이 크다’고 한 것은 진실한 다스림이기 때문에 다스림이 크다고 말한다.
‘크다’는 것은 진실로 이러한 의미가 아닌 것이니 그런 다음에 진실로 필경에 다스리는 것이다.
출세간 도(道)의 행으로 번뇌[煩惱使]를 없애므로 이것이 이루어진다.
이 중간에서 세간의 지혜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거친 것이고,
둘째는 중간의 것이다.
거친 것은 번뇌를 없애는 다스림이고,
중간의 것은 복종시키는 다스림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탐욕이 많은 자는 부정관(不淨觀)으로 다스려서,
모든 전도된 것을 없애기에 이른다.
네 가지 전도가 있으나 이와 같이 없앤다.
거친 번뇌는 4념처 내지 8정도로 다스리고,
중간의 것은 복종시켜 다스린다.
이 중에서 거친 번뇌는 경계 중에서 탐욕 등의 행으로 나타나므로 전환하여 중간의 것을 이루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행(行)은 세간 지혜의 자기 경계의 모습으로,
물드는 등의 번뇌를 막고,
탐욕을 누르고 나서는 성품과 행동을 깨끗하게 한다.
여기에서 ‘성품과 행동’이라고 했는데 이 중에서 성품과 행동에도 차별이 있다.
재가의 사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의 행이 많고,
출가한 사람은 대개 견해에 의지한다.
그에 의지하므로 바르지 않은 염(念)과 성품의 염에 의지한다.
성품의 염을 분별하면 광대하지만,
간략히 하면 네 가지 전도이다.
해탈의 경지가 아닌데 해탈이라는 생각을 내어서 그 교만에 집착하는 것이다
.
이 중에서 탐욕 등은 부정(不淨)한 것을 관찰하여 다스려 깨끗하게 만들고,
성내는 것은 자비관(慈悲觀)으로 대치하며,
어리석음은 인연관(因緣觀)으로 대치한다.
모든 견해는 공으로 대치하고,
바르지 못한 생각에 포함되는 분별과 성품이 뛰어나다는 분별 중에서 모습 없는 것으로 대치하며,
다시 바라고 원하는 것은 원 없음으로 대치한다.
‘해탈의 경지가 아닌데 해탈이라는 생각을 낸다’고 한 것은 전도를 대치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이곳은 항상 하는데도 이 중에 번뇌가 있는 것과 같다.
무엇이 거친 번뇌를 막는 것인가?
스스로 대치하는 것에 의지하는 것이다.
물드는 경계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은 일에 의지해서 현재의 경계 중에서 탐욕 등을 행하는 병폐가 있다.
모으는 것은 행(行)의 의미인데 저것을 없애므로 염처(念處) 등의 모든 보리분법을 닦는다.
염처법을 닦지만 바른 염(念)에 묶이기 때문이고,
아직 염에 묶이지 않은 염하는 마음을 묶이게 하므로 수행한다.
이 염이 마음에서 일어나지만 아(我)라고 말하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
염처를 닦아서 모든 염 중에서 마음을 묶으며,
이미 수행하고 바르게 부지런히 하여 여의족(如意足)을 취하여 머문다.
취하여 머무르므로 몸과 마음은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따른다.
안의 지혜로 관찰하므로 중간의 번뇌를 누르고,
무루의 지혜가 있는 데에서 도를 행하므로 출세간의 법으로 대치하고 멸하여 욕망 등을 없게 한다.
욕망 등에 의지해서 대치하므로,
근(根)과 역(力)으로 견해를 짓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인연이 있는 데에서 어리석음을 모으지만 사람에게는 아(我)라는 어리석음이 없으니,
보리분법으로 누르기 때문이다.
바르지 않은 도와 바른 도를 행하는 중에 반드시 이룬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이 이곳의 모습이다.
거친 번뇌와 중간의 번뇌를 바로 막고 눌러 대치한다.
사(事)의 지혜는 세계의 지혜라고 말하는데,
어떤 것이 출세간의 지혜인가?
이와 같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번뇌에 물드는 곳을 누르고,
모든 미세한 번뇌를 누르는 것을 말한다.
다스리는 사(事)의 지혜라는 그것은 어떤 것인가?
저 누르고 대치하는 것 중에서 교묘한 세 가지 곳이 있다.
말하자면 지혜를 인연한 교묘한 인연이다.
아(我)도 없고,
중생도 없고,
명(命)도 없고,
양육도 없고,
부가라법(富伽羅法)도 없는 중에서 믿음과 지혜를 내는 것이다.
인무아(人無我)를 믿을 수 있기 때문이고,
공하여 분별이 없는 중에서 두려움을 내지 않기 때문이고,
법무아(法無我)를 믿기 때문에 마음을 구하여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모든 번뇌를 다 건넌다.
그러한 대치에서 네 종류를 가르친다.
지혜로 취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안의 마음을 관찰하여 지혜에 마음을 쓴다.
지혜 없는 것에 동상(同相)과 자상(自相)과 염상(染相)과 정상(淨相)이 있다.
이 중에 세 종류의 생각이 있는데,
동상(同想)의 뜻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사람이 이와 같은 마음을 구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즐거워할 만한 마음이고,
물들만 한 마음이며,
부끄러워할 만한 마음인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처소에 있기 때문이니,
과거는 다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며,
현재는 생각 생각에 머무름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과거와 미래에 인연해서 이루어지는 마음은 모두 각관(覺觀)이 없고,
현재는 생각마다 각(覺)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탐욕 등은 자기 연에 의해 생긴 것이니,
마음이 지은 것 등이 아니다.
모든 모습은 마음의 자기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가섭아,
이 마음은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으며 중간에도 없다”고 하였다.
깨달은 까닭에 이와 같이 마음을 구하지만 얻을 수 없으니,
본래대로 가명(假名)을 말하고 성품을 말한다.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마음은 색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머무는 것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기(記)도 없고 집착도 없다.
이와 같은 것이 앞과 같은 여섯 종류의 모습이다.
진여를 알기 때문이고,
모두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을 과거에도 보지 못하고,
지금에도 보지 못하고,
미래에도 보지 못한다’고 하기 때문이고,
모든 성인이 지견으로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여러 가지 모습이기 때문에 마음에 물든 모습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순하지 않는 것을 수순하지 않기 때문이고,
행할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허깨비와 같다.
허망한 기억과 생각과 분별이 일어나 여러 가지 업으로 행하는 것이 생기고,
여러 가지 몸과 마음을 받아들이고,
모든 윤회의 도(道) 중에서 여러 가지 몸이 생기는 것을 받아들인다.
물드는 것에 수순하지 않으므로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다.
‘나고 멸하는 것이 머물지 않는다’고 한 것은 또한 저것이 생기고서 스스로 수순하여 생각마다 흐르기 때문이다.
‘마음은 바람과 같아 멀리 가더라도 잡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모든 생각 중에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나 행동에 수순하므로 마음은 등불의 불꽃과 같다는 말이다.
‘많은 인연으로 행이 있다’고 한 것은 받아들임이 윤택하여 자재하지만 행을 수순하여 물들기 때문이고,
행할 것에 따라서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니,
이것이 물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어느 곳의 행하는 마음이 번개 같은가?
혹 착한 곳을 지어서 행하기도 하고,
혹 번개같이 착한 마음을 낼 때 마음은 허공 같기도 하고,
혹 착하지 못한 것을 향하지만 그 아는 것이 객진(客塵) 번뇌17)의 물듦을 비게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고,
마음은 원숭이 같으니 한결같이 모든 경계를 탐하기 때문이고,
마음은 화가와 같으니 한결같이 모든 업의 행을 일으켜 짓기 때문이다.
“가섭아,
마음은 하나로 정해지지 않으니 여러 가지 번뇌를 좇을 수 있다”고 한 것은 혹 번뇌를 한결같이 향하는 중에 다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행하여 머물지 않고 행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친구 없이 홀로 가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저것은 본래 물듦과 탐욕이 있는 것이 아닌데 그만 두고 떠난다는 말이다.
욕심을 벗어난 다음에 다시 욕심이 있으니,
이와 같이 해석한다.
‘마음은 왕과 같다’고 한 것은 모든 법에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이고,
즐거운 법 중에서 자재한 세간의 힘을 행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원수와 같다’고 한 것은 모든 고통을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고,
자기의 즐거움을 버리고 고통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재로 된 집과 같고 고기를 낚는 기구와 같으며,
꿈과 같고 푸른 파리와 같다’고 한 것은 무아에 집착하기 때문에 스스로 고통을 낳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도된 것이 마치 원수와 같으니,
자기의 고통을 돕되 만족하거나 싫증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은 사람의 힘을 빼앗는 야차와 귀신과 같다’고 한 것은 선행 닦는 것을 버리게 하여 야차들이 틈을 찾기 때문이다.
‘마음은 원수와 같다’고 한 것은 행이 착하지 못해서 모든 허물을 찾기 때문이고,
높고 낮은 것에 해당한 것과 세력이 있고 없는 것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등을 갈라놓기 때문이다.
‘마음은 도적과 같다’고 한 것은 게으른 것에 이르기 때문이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모든 선근을 없애기 때문이다.
‘마음은 모든 색 등을 즐거워한다’고 한 것은 색 등의 경계에 즐겨 집착하기 때문이다.
영원히 감로의 세계 가운데서의 기억을 얻을 수 있고 기억한 뒤에는 편안해지는 것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세 종류의 모습 때문에 마음은 깨끗함을 얻으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얻음을 얻지 못하는 모습이기 때문이고,
유위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며,
두 가지가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성품의 모습이기 때문에 “가섭아,
이 마음을 구하지만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만약 얻을 수 없으므로 알 수 없다면 이것은 성품을 구하고 찾지만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얻을 수 없으므로 저것을 알 수 없다.
마음에 이와 같은 모습이 있다.
이 마음의 깨끗한 인(因)을 관찰하므로 다른 사유의 행이 있다.
마음의 깨끗함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으니,
이와 같이 사유하고서 얻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얻음을 얻지 못하는 모습이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행법으로 무아를 수행하고 행하고 나서 지혜[慧]를 쓰니 이것이 진여의 모습이다.
마음을 지혜로써 보고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이 진여의 모습인 것이다.
마음을 아홉 가지 모습으로 말하니,
유위 모습의 법[有爲相法]을 짝하므로 아홉 가지 무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아야 한다.
‘3세를 넘어섰다’고 한 것은 3세의 행이 아니기 때문이고,
다시 멸진정에 들어가서 그 선정에서 일어난 다음에 다시 생기게 할 수 있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저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가명(假名)의 성품은 분별하여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고,
진여의 성품은 측량하여 알 수 있지만 저것은 두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것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생기는 모습이 없기 때문이고,
‘저것은 성품이 없다’고 한 것은 생기는 성품의 인(因)의 모습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저것은 일어나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은 미래 중에 모든 생기는 것을 넘어서기 때문이고,
‘저것은 멸하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은 분단(分段)의 죽음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저것은 벗어나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염을 벗어난 염을 넘어서기 때문이고,
‘벗어날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오고 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러남이 없고 생기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은 모든 윤회의 도를 전전함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업을 행하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업의 번뇌를 넘어서기 때문이니,
만약 무위(無爲)라면 이것이 성인의 종자인 성품이다.
이 중에서 ‘성품과 모습’이라고 한 것은 무위 세계의 모습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저것을 보기 때문에 모든 성스러운 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저 현재의 법 중에 다른 것을 넘어서는 다섯 가지 일이 있다.
예컨대 성인의 성품에 대해 ‘저 사람이 계를 지키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짓는 일을 넘어서기 때문이고,
‘또한 계를 깨뜨리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짓는 것이 없는 것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행이 없다’고 한 것은 행을 하는 것을 넘어서기 때문이고,
‘행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은 행 아닌 것을 하는 것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행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행을 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기 때문이고,
미래에 일 있는 것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심(無心)인 것이다.
‘심수법(心數法)이 없다’고 한 것은 모든 다시 생기는 것을 넘어서서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일으킴이 없다’고 한 것은 저 행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업보가 없다’고 한 것은 저 태어난 집을 넘어서기 때문에 저 사람은 고통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즐거움이 없다’고 한 것은 저 의지할 대상인 세력 있음과 세력 없음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업도 없고,
업을 일으키는 행도 없다.
‘그러나 저 성품 중에 몸으로 업을 짓는 것도 아니고,
입과 마음으로 짓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고통스럽고 즐거운 모든 유기(有記)에 의지해서 움직이고 전개되기 때문이다.
‘업이 없다’고 한 것은 계를 배우는 모든 것을 넘어서기 때문이고,
‘업의 행을 일으키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은 모든 원(願)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성품 중에 몸 등으로 업을 짓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은 과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기 때문이고,
‘저 성품 중에 또한 상ㆍ중ㆍ하의 차별이 없다’고 한 것은 저 여러 가지 몸을 의지하는 것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네 시기[四時]의 아홉 가지 모습[九種相]의 차별이 있으니 그 성품과 모습을 알아야 한다.
더러울 때와 깨끗할 때와 증득할 때와 다할 때 이 성품이 평등하기가 허공과 같다’고 한 것은 더러울 때도 모든 모습에 평등하게 도달하는 것이 공과 같으니,
비유하면 허공이 두루 하는 것과 같다.
모든 색과 모든 모습 중에서 진여도 그러하다.
나타나는 것이 깨끗할 때 견해가 평등하게 이르니,
이것은 더러울 때도 한 모습이다.
이 성품은 분별이 없으니 모든 법이 평등하여 한 맛이기 때문이다.
‘이 성품은 고요하여 몸과 마음의 고요함을 멀리 떠났다’고 한 것은 깨끗할 때 한 맛이고,
몸과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이다.
깨끗할 때 두 종류의 모습이 있으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모습은 고요하여 열반에 수순하고 향하기 때문이다.
‘이 성품은 청정하여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멀리 벗어났다’고 한 것은 영원히 증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반에 수순하고 청정하다.
그러므로 수순하여 다함에 이르도록 향한다.
증득에 이를 때 이것을 증득할 때의 처음 모습이라고 말한다.
‘이 성품은 평등하지 않지만 아(我)와 아소(我所)를 벗어난다’고 한 것은 몸이라는 견해를 넘어서는 것을 증득할 때 그 중에서 두 번째 모습인 까닭이다.
‘이 성품은 허(虛)하거나 실(實)한 악이 없으니 평등한 데에서 생긴다’고 한 것은 저 근본적인 악한 견해를 넘어서기 때문이니,
또한 저것이 세 번째 모습이다.
‘이 성품은 진제(眞諦)인 제일의제이다’라고 한 것은 영원히 다할 때를 말하는 것이다.
‘저 다하는 것 중에 머문다’고 한 것은 항상 하기 때문이고,
모든 즐거움을 성취하여 세 종류의 전변(轉變)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 중에 세 종류의 전변하는 일이 있으니,
첫째 나고 죽는 등의 전변이고,
둘째 전도된 곳의 전변이며,
셋째 깨끗한 데에서 물러나는 전변이다.
‘이 성품은 다함이 없고 필경에 생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나고 죽는 등의 전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하는 것을 성취할 때 그중의 처음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성품은 항상하고 즐겁고 깨끗하고 아(我)가 없다’고 한 것은 전도된 곳의 전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또한 저것은 뒤의 다하는 것 중에 이르는 것의 두 번째 모습이다.
‘이 모습은 진실하고 깨끗하여 원래부터 필경에 깨끗하다’고 한 것은 깨끗한 데에서 물러나는 전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또한 저것은 다하는 것에 이르는 것 중의 세 번째 모습이다.
그러므로 세간과 출세간의 도(道)를 행하여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가섭아,
그대는 스스로 안을 관찰하고 밖으로 달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가섭아,
도를 행하는 비구는 마음이 묶인 곳을 따라 그 풀어짐을 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가섭아,
그대는 스스로 안을 관찰해야 한다’고 한 것에서 무슨 점차(漸次)가 있겠는가?
예컨대 저 성품에서 드러낸 것으로 모든 성인을 청정하게 한다.
저 사람이 이미 나타내 보이고 지금 성인이 생긴 것 같은 것에 따른다.
저 답은 분명히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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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3) 범어 mithyātva-niyāta-rāśi,
파리어 micchātta-niyāta-rāsi의 번역이다.
일체 중생을 세 종류로 나누는데,
그 가운데 사중(邪中)에 들어갈 무리,
5무간업(無間業)을 지어서 지옥에 떨어져 반드시 사중에 처할 자를 가리킨다.
사정취(邪定聚)ㆍ사성정취(邪性定聚)ㆍ필사취(必邪聚)ㆍ사견제(邪見際)라고도 한다.
3정취(定聚) 가운데 하나이다.
14)
14) 사쌍팔배(四雙八輩)ㆍ사향사과(四向四果)를 말한다.
성문은 그 수행의 깊이에 따라 네 단계의 과위와 길이 나뉘는데,
예류향(預流向)ㆍ예류과(預流果)ㆍ일래향(一來向)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향(不還向)ㆍ불환과(不還果)ㆍ아라한향(阿羅漢向)ㆍ아라한과(阿羅漢果) 등 사대팔종(四對八種)이 그것이다.
향과 과를 합하면 4쌍이 되고 나누면 8인이 되는 것이다.
15)
15) 또는 약왕수(藥王樹)라고도 한다.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나무나 풀을 약초(藥草),
혹은 약수(藥樹)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을 약왕(藥王)이라고 한다.
병든 사람이 나무 앞에 서기만 하면 그 사람의 오장육부를 분명하게 다 볼 수 있는 나무이다.
『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 권3에 “여러 중생에게 의지가 되고,
여러 질병을 마치 약수왕처럼 고쳐준다[爲諸衆生而作依止,
治諸疾病如藥樹王]”고 하는 말이 있다.
16)
16) 차닉(車匿)ㆍ천나(闡那)ㆍ천탁가(闡鐸迦)라고도 한다.
욕작(欲作)ㆍ응작(應作)이라고 의역한다.
싯달타 태자가 출가할 때에 수종한 마부이다.
나중에 출가하여 6군(群) 비구의 하나가 되었다.
17)
17) 범어 akasmāe-kleśa.
자성청정(自性淸淨)에 상대되는 말이다.
번뇌라는 것은 본디 심성의 고유한 물건이 아니고 이치에 미혹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객(客)이라고 칭한다.
또 번뇌는 나와 남의 심성을 오염시키는 것이 마치 먼지와 티끌[塵]이 만물을 더럽히는 것과 같으므로 진(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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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4-08-06_대보적경론_003
사대(四大)라고도 함. 물질계를 구성하는 4대원소(大元素).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대종이라 함은 체(體)ㆍ상(相)ㆍ용(用)이 모두 커서 물질계를 내는 원인이 되는 뜻. (1) 지대. 굳고 단단한(堅) 것을 성(性)으로 하고, 만물을 실을 수 있고, 또 질애(質礙)하는 바탕. (2) 수대. 습윤(濕潤)을 성으로 하고, 모든 물(物)을 포용(包容)하는 바탕. (3) 화대. 난(煖)을 성으로 하고, 물(物)을 성숙시키는 바탕. (4) 풍대. 동(動)을 성으로 하고, 물(物)을 성장케 하는 바탕. 구사종(俱舍宗)에서는 보통으로 눈에 보이는 현색(顯色)ㆍ형색(形色)을 가사대(假四大)라 하고, 사대에 의하여 된 것을 신근(身根)의 소촉(所觸)으로 하여 실사대(實四大)라 하며, 성실종(成實宗)ㆍ법상종(法相宗)에서는 지금의 4대도 가법(假法)이라 함.
답 후보
● 사대종(四大種)
사마유(四馬喩)
사무색(四無色)
사무위(四無爲)
사바라이(沙波羅夷)
사불성과(四不成過)
사생(四生)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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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바하 娑婆訶<六十三> s vā hā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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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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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지보불가설 $ 090■ ■成 智具諸世彼 欣三殊諸嚴
090▲ 訶婆婆訶婆婆為 一 ● 毘婆(上)羅, ○□□□□,深,菩,善,智
□□□□□□□, 深入法界不可說,
菩薩總持不可說, 善能修學不可說,
□□□□□□□, 심입법계불가설,
보살총지불가설, 선능수학불가설,
지혜 보배 성취함을 말할 수 없고
법계에 들어감을 말할 수 없고
보살의 총지법 말할 수 없고
공부를 잘하는 일 말할 수 없고
[220째]
지자음성불가설 $ 091▲毘婆羅毘婆羅為 一 ● 那婆(上)羅, ○□□□□,音,正,開,具
□□□□□□□, 音聲清淨不可說,
正念真實不可說, 開悟眾生不可說,
□□□□□□□, 음성청정불가설,
정념진실불가설, 개오중생불가설,
지혜로운 이의 음성 말할 수 없고
음성의 청정함을 말할 수 없고
진실한 바른 생각 말할 수 없고
중생을 깨우침도 말할 수 없고
●K0022_T0310.txt★ ∴≪A대보적경≫_≪K0022≫_≪T0310≫
●K0552_T1523.txt★ ∴≪A대보적경론≫_≪K0552≫_≪T1523≫
●K0426_T0945.txt★ ∴≪A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_≪K0426≫_≪T0945≫
법수_암기방안
90 중-발가락 [ 신조어 ]
91 족- 호? 만? [ 신조어 ] -- 발바닥뒷쪽 곡면으로 들어간 부분
63 전박 (前膊) ~ 아래팔뚝
3 밥통 【위】 ~하리 다바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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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보적경론_K0552_T1523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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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적경론』 ♣055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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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 본 페이지 ID 정보
불기2564-08-06_대보적경론-K055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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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ed--대보적경론_K0552_T1523.txt ☞제3권
sfd8--불교단상_2564_08.txt ☞◆vngp9173
불기2564-08-06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8/2564-08-06-k0552-003.html
htmback--불기2564-08-06_대보적경론_K0552_T1523-ti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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