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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31일 수요일

불기2565-03-31_비바사론-k0971-001





『비바사론』
K0971
T1547

제1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비바사론』 ♣0971-001♧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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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별논의]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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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별논의]


『비바사론』 ♣0971-001♧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鞞婆沙論卷第一
K0971

○ [pt op tr]





비바사론(鞞婆沙論) 제1권

시타반니(尸陀槃尼) 지음
승가발징(僧伽跋澄) 한역





애락(愛樂)ㆍ각의(覺意)의 잎과
청정한 계율의 묘한 가지
비할 데 없는 서른두 가지의
기이한 모습과 화엄의 몸

가장 지혜로운 감로 열매와
견고한 정진근,
성스러운 진리를 구족한 나무이신
여래께 저는 머리 조아려 예배합니다.

잘 결택하여 말씀하심은 비길 데 없으며
도를 증식시키는 무위의 성이며
공덕의 선인에게 목숨 바쳐 귀의하니
탐애와 근심을 제거하고

생로병사를 여의어 안락하고
길이 욕애가 없게 하소서.
위대한 선인께서 펴신 법에
제가 지금 머리 조아려 예배하오니

오묘한 계율은 높이 드러나 있어
우뚝한 산처럼 움직이지 않네.
청정한 지혜의 법으로
해탈하신 위대한 모니여,

선(禪) 등의 총림의 나무와
신족의 돌[石] 가이없네.
큰 설산에 성인의 무리가 있으니,
제가 이제 머리 조아려 예배합니다.

이렇게 머리 조아려 예배하니,
세간에서는 비길 데 없다고 일컫네.
위대한 스승의 널리 펴신 가르침을
제가 이제 받들어 수지하고,

제가 정각의 말을 하니,
위없는 즐거움이 더욱 불어나네.
성스러운 무리들이 듣고자 하여
오롯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듣도다.





1. 설아비담팔건도(說阿毘曇八犍度)

잡결사지행사대근정견[가전연자가 선잡건도총서를 짓고 말하였다]


【문】누가 이 경을 지었는가?
【답】부처님이다.

【문】어째서인가?
【답】매우 깊은 지혜와 미묘한 법성(法性)과 모든 지혜의 경계[界]이니 
누가 이러한 경계를 소유하였겠는가? 다름 아닌 오직 부처님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지었는가?
【답】존자 사리불(舍利弗)이 물으니,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오백 비구가 물으니,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라고 하였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천인(天人)이 물으니,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라고 하였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화신(化神)이 물으니,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라고 하였다.


【문】어째서인가?

【답】이 법은 마땅히 여실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설해져야 하는데,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세존께서 단정하고 매우 오묘한 모습으로 변화하셨으니,
높이 공경받고 기쁘게 할 만하였다.
수염과 머리털을 깎고 승가리(僧伽梨)를 입고,
두 손을 합장하고서 물으니,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이는 저 인연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문】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존자 가전연(迦旃延)이 이 경을 지었다고 말하였는가?
【답】저 존자가 외우고 익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여 가르쳐 주어 널리 베풀었다.
이 외우고 익히며 널리 베풀어 준 것을 ‘지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혹은 저 존자 가전연이 이 경을 지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문】누군가 ‘저 매우 깊은 지혜와 미묘한 법성(法性)과 모든 지혜의 경계와 같은 것을 소유하는가?
오직 부처님만이 소유하셨다’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그가 지을 수 있겠는가?



【답】저 존자가 본래 배움이 예리하여 서원하기를,
“오천 분의 부처님에게서 아비담을 닦아,
내가 내세에 삼야삼불(三耶三佛)에게서 아비담의 문장을 시설하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미묘한 지혜로써 보고 나서,
이 경을 지었다.




【문】만약 그렇다면 부처님과 아비담(阿毘曇)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답】저 부처님은 곳곳의 장소와 곳곳의 성에서 도를 말씀하셔서 여러 가지로 교화하였다.


저 존자 가전연자는 
과거의 불법 가운데 
서원과 지혜와 관찰로써 한결같이 간략하게 건도품(犍度品)을 지어 
몇몇 장문(章門)을 세웠으니,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서로 비슷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잡건도(雜犍度)를 세웠다.

결을 말하여 결건도(結犍度)를 세웠고,
지를 말하여 지건도(智犍度)를 세웠고,
행을 말하여 행건도(行犍度)를 세웠고,
사대를 말하여 사대건도(四大犍度)를 세웠고,
근을 말하여 근건도(根犍度)를 세웠고,
정을 말하여 정건도(定犍度)를 세웠고,
견을 말하여 견건도(見犍度)를 세웠으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모든 법의 구절과 같았다.


저 존자 담마다라(曇摩多羅)는 
과거의 불법 가운데 서원과 지혜와 관찰로써 한결같이 대략 말하였으니,
무상게(無常偈)를 말하여 무상품(無常品)을 세우고,
나아가 범지를 말하여 범지품(梵志品)을 세운 것과 같다.
이것은 저 부처님이 곳곳의 장소와 곳곳의 성(城)에서 도를 말씀하셔서 여러 가지로 교화하신 것과 같다. 

(이처럼)★★
저 존자 가전연자는 
과거 불법 가운데 
서원과 지혜와 관찰로써 한결같이 간략하게 건도품을 지어 몇몇 장문을 세웠으니,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서로 비슷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잡건도(雜犍度)를 세웠으며,
견을 말하여 견건도를 세웠다.
다시 모든 불세존이 세상에 나오셔서 삼장(三藏)을 말씀하셨으니,
계경과 율과 아비담이다.


【문】계경과 율과 아비담은 어떻게 다른가?
어떤 사람은 차등이 없다고 말하니, 무슨 까닭인가?


【답】하나의 지혜의 바다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차등이 없으며,
큰 자비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차등이 없으며,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차등이 없으며,
동일한 해탈문에 들어가기 때문에 다름이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차등이 있으니,
계경은 여러 가지를 말하였고,
율은 계를 말하였고,
아비담은 모양을 말하였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계경은 힘에 의지하고,
율은 큰 자비에 의지하고,
아비담은 두려움 없음에 의지한다”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계경은 증상의(增上意)를 말하였고 율은 증상계(增上戒)를 말하였고,
아비담은 증상혜(增上慧)를 말하였다”고 하였다.

【문】만약 그렇다면,
계경도 증상계와 증상혜를 말하였으며,
율도 증상의와 증상혜를 말하였으며,
아비담도 증상의와 증상계를 말한 것이 되는데,
여기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만일 계경(契經)에서 증상계를 말하였다면 율(律)임을 알아야 하고,
증상혜를 말하였다면 아비담(阿毘曇)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율에서 증상의를 말하였다면 계경임을 알아야 하고,
증상혜를 말하였다면 아비담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아비담에서 증상의를 말하였다면 계경임을 알아야 하고,
증상계를 말하였다면 율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계경과 율과 아비담의 차이점이다.


【문】무엇 때문에 경을 지은 사람이 이 경을 세웠는가?
【답】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려고 한 것이니,
부지런한 사람ㆍ듣는 사람ㆍ
받아들이는 사람ㆍ지니는 사람ㆍ
생각하는 사람ㆍ헤아리는 사람ㆍ관찰하는 사람은 
한량없이 맺은 악행이 잠간 동안에 없어진다.

혹은 다시 이것에 의지하여 법성을 헤아리게 하려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려고 
어두운 곳에 불을 밝혀 눈 있는 자로 하여금 색(色)을 보게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저 경을 지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려고 이 경을 세웠으니,
뜻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것에 의하여 법성을 헤아릴 것이다.






【문】불세존께서도 또한 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려고 
《십이부경(十二部經)》의 계경과 율과 아비담을 말씀하셨는데 
무엇 때문인가?


【답】가령 어떤 중생이 인(因)의 힘은 있으나 
타력(他力)을 반연하지 않고서 깨우쳐 이해한다면 
이와 같은 중생은 차등을 알지 못한다.

만일 타력을 반연하여 깨우쳐 이해한다면 
이와 같은 중생은 차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이 가운데 
우발라(優鉢羅)와 발두마(鉢頭摩)와 구모두(拘牟頭)와 분타리(分陀利)와 같다.

연못 가운데 반드시 우발라와 내지 분타리 꽃이 있으나,
만일 아직 해가 빛을 방출하지 않아서 비추어 주지 않을 때면 꽃이 맺지 못하고,
피지 못하고, 향기를 내지 않는다.
만일 해가 빛을 방출하여 비추어 줄 때면 꽃이 맺고 피고 향기를 낸다.


이와 같이 중생이 인(因)의 힘은 있으나 
타력을 반연하지 않고서 깨우쳐 이해하면 
이런 중생은 차등을 알지 못하고,
만일 타력을 반연하여 깨우쳐 이해하면 
이런 중생은 차등이 있음을 안다.

‘맺음’은 믿음이고,
‘뜀’은 근(根)ㆍ력(力)ㆍ각(覺)ㆍ도(道)이고,
‘향기를 냄’은 계(戒)이다.
이것은 저 게송에서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은밀하게 덮인 집의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비록 색은 있으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같네.

이와 같이 어떤
지혜 없는 사람은
법의 선악을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니,

밝음이 있고 색이 있어야
법의 선악을
눈으로 볼 수 있고
들어서 알 수도 있으며

법을 듣고 알 수 있고,
악을 듣고 행하지 않으며,
듣고서 옳지 않은 것을 제거하고,
듣고서 멸에 이를 수 있네.



이와 같은 것을 다른 계경[잡아함에 나옴]에서는 
“어질고 성스러운 제자가 일심으로 법을 듣고서 
이때 다섯 가지 번뇌를 없애고 칠각의(七覺意)를 원만히 닦았다”라고 말하였으며,


이와 같은 것을 다른 계경[증일에 나옴]에서는
“하나의 인과 두 연(緣)이 등견(等見)에서 나오니,
다른 것으로부터 안의 정사유(正思惟)를 듣는다”라고 말하였고,

이와 같은 것을 다른 계경[증일의 사법설]에서는
“네 가지 법이 있어서 사람을 이익되게 하니,
무엇을 네 가지 법이라고 하는가?
선지식을 가까이 하는 것과 
선법을 듣고 안으로 바르게 사유하는 것과 
차법(次法)과 
향법(向法)이다”라고 하였다.


불세존께서 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려고《십이부경》을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가 이 경을 지은 것은 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려고 이 경을 세운 것이다.

혹은 세 가지 일 때문이니, 
지혜를 불어나게 하는 것과 뜻을 펴는 것과 인(人)의 헤아림을 여의는 것이다.
‘지혜를 불어나게 한다’는 것은 안팎의 법을 다 외워도 지혜를 불어나게 할 수 없으니,
아비담과 같다.


‘뜻을 편다’는 것은 중생의 뜻이 수면(睡眠)과 알지 못함에 있으니,
무엇이 기계일체변사(己界一切遍使)며,
무엇이 비기계일체변사며,
무엇이 기지일체변사(己地一切遍使)며,
무엇이 비기지일체변사며,
무엇이 기계연(己界緣)이며,
무엇이 비기계연이며,
무엇이 기지연(己地緣)이며,
무엇이 비기지연이며,
무엇이 유루연이며,
무엇이 무루연이며,
무엇이 유위연이며,
무엇이 무위연인가?
무엇을 ‘포섭한다’고 하며,
무엇을 ‘상응한다’고 하며,
무엇을 ‘성취한다’고 하며,
무엇을 ‘성취하지 않는다’고 하며,
무엇을 ‘인’이라고 하며,
무엇을 ‘연’이라고 하는가,

만일 이 뜻이 바뀌어 
그것으로 말미암아 헤아리지 않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듣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재한 몸을 보아 증득할 수 있으니,
어떤 힘을 말미암는가 하면,
오직 아비담이다.


‘인(人)의 헤아림을 여읜다’는 것은 
이러한 아비담의 앞뒤 구절을 외우는 것이니,
어째서인가?
이러한 4구(句)는 인을 헤아림을 말하지 않고,
모든 것 가운데 무아행(無我行)과 비중생(非衆生)과 비명(非命)과 비장양(非長養)과 비사공정취(非士空淨聚)를 말한다.


세 가지 일인 
‘지혜가 불어남’,
‘뜻을 폄’, 
‘인의 헤아림을 여읨’ 때문에 이 경을 지은 것인데 
혹은 무명(無明)을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마치 연등이 어둠을 제거하고 밝음을 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비담의 연등(燃燈)이 무명을 제거하여 지혜의 밝음을 내니,
이것이 무명의 어둠을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흑은 무아(無我)의 형상을 보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거울을 잘 갈아 다스려 놓아 그 형상을 자세히 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비담의 거울도 
잘 알아차려 무아의 형상을 자세히 보니,
이것이 무아의 형상을 보는 것이 된다.
혹은 삶과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배에 의지하여 많은 중생들이 편안히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비담의 배에 의지하여 
무수한 중생들이 편안히 삶과 죽음의 강을 건너니,
이것이 삶과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것이 된다.
혹은 계경(契經)을 보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사람이 손으로 등을 잡고 
이러저러한 물체를 보고서 미혹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 아비담을 잡고서 
이러저러한 계경에 대해서 미혹되지 않으니,
이것이 계경을 보게 하려고 이 경을 세운 것이 된다.





【문】무엇이 아비담의 성질인가?
【답】무루의 혜(慧)와 근(根)이다.
저 동등한 성품을 포섭하기 때문이며,
1계(界)ㆍ1입(入)ㆍ1음(陰)과 소소입(少所入)과 방편과 상응과 공유(共有)를 포섭하기 때문이며,
3계와 2입과 5음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3계는 의계와 법계(法界)와 의식계(意識界)이고,
2입은 의입과 법입이고,
5음은 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음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아비담 무루혜근(無漏慧根)이라고 해야 하는데,
이 경을 무엇 때문에 아비담이라고 했는가?
【답】이 아비담을 갖추었으므로 아비담이라고 하니,
다른 것을 갖추었으면 갖춘 것으로써 이름을 삼는 것과 같다.
즐거움을 갖추었으면 즐거움[樂]으로써 이름을 삼으니,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그는 음식을 모으는 것을 즐겨하고,
즐겨 옷을 지니고
즐겨 걸으며
산의 토굴 사이에 의지한다.

더러움[垢]을 갖추면 더러움으로써 이름을 삼으니,
저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자는 범행을 더럽히고
여자는 세간에 속박된다.
고행(苦行)과 범행(梵行)으로
이를 씻으려 하되 물이 없다.


부림[使]을 갖추었으면 부림을 이름으로 삼으니,
계경에서 “비구가 색에 부림을 당하여 색에 애착한다.
만일 비구가 부림을 당하면 저것이 곧 애착이 되고,

만일 애착하면 애착은 이미 마구니[魔]에게 결박된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잡아함에 나옴].

탐욕[欲]을 갖추었으면 탐욕을 이름으로 삼으니,
저 계경에서 “오욕의 공덕은 세간의 애욕[愛]과 즐거움[樂]의 망념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위와 같음].
구(鉤)를 갖추었으면 구를 이름으로 삼으니,
계경에서 “오욕의 공덕은 여러 마구니의 갈고리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위와 같음].
박(縛)을 갖추었으면 박을 이름으로 삼으니,
계경에서 “비구가 색을 받아들이면 마구니에게 결박이 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구니를 여윌 수 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위와 같음].


행(行)을 갖추었으면 행을 이름으로 삼으니,
계경에서 “이 여섯 가지 미세한 것이 본행의 과보에 미끌어져 들어간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위와 같음].
과보[報]를 갖춘 것은 과보를 이름으로 삼으니,
계경에서 “모든 현인이 그가 한 번 베푼 과보로 일곱 번 청상에 태어나 천왕이 되고,
일곱 번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왕이 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중아함에 나옴].
이와 같이 아비담을 갖춘 것도 아비담을 이름으로 삼는데,
다만 아비담의 성품은 무루의 지혜와 근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이 귀신이 긴 밤에 아첨함이 없고,
거짓 없이 곧바로 묻는 일을 시설한 것은 다 알고자 하기 때문에 번거롭게 할 뜻이 없는 것이다.

이것도 법다운 일이니,
내가 차라리 매우 길은 아비담을 그에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중아함에 나옴].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은 아비담’이라고 말하는가?
【답】바로 무루의 혜와 근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범마바라문(梵摩婆羅門)은 긴 밤에 아첨함이 없고,
거짓 없이 곧바로 묻는 일을 시설한 것은 다 알고자 하기 때문에 
번거롭게 할 뜻이 없는 것이다.
이것도 또한 법다운 일이니,
내가 차라리 매우 길은 아비담을 그에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위와 같음].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은 아비담’이라고 말하는가?
【답】곧 무루의 혜(慧)와 근(根)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이학(異學) 수발(須跋)은 아첨함이 없고,
거짓 없이 곧바로 묻는 일을 시설한 것은 다 알고자 하기 때문에 
번거롭게 할 뜻이 없는 것이다.
이것도 또한 법다운 일이니,
내가 차라리 매우 깊은 아비담을 그에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잡아함에 나옴].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은 아비담’이라고 말하는가?
【답】곧 무루의 혜와 근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아난아,
연기(緣起)는 매우 깊고,
명(明) 또한 매우 깊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중아함에 나옴].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음’이라고 말하는가?
【답】이 가운데 인(因)과 연(緣)이 매우 깊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이 곳은 매우 깊으니,
이처럼 경의 연기 이것 또한 매우 깊다.
이른바 모든 생사를 버리고 여의어서 애착이 다하고 욕심이 없어진 멸진의 열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잡아함에 나옴].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음’이라고 말하는가?
【답】이 가운데 인과 연이니,
인과 연으로 버리고 여읜 것을 ‘매우 깊음’이라고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계경에서 
“모든 법은 매우 깊기 때문에 보기 어려우며,
보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깊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잡아함에 나옴].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음’이라고 말하는가?
【답】이 가운데 모든 법이 매우 깊음을 말하였으니,
이는 부처님이 계경에서 
“무슨 까닭에 너희 어리석은 사람들은 눈이 멀어 볼 수 없는가?
매우 깊은 아비담을 논하겠노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중아함에 나옴].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은 아비담’이라고 말하는가?
【답】뜻이 생기는 것이니,

이는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선니(先尼)야,
나의 법은 매우 깊어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
살펴 행하지 않으면 너는 저 법을 찾을 수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마치 네가 긴 밤에 달리 보고,
달리 참으며,
달리 바라고,
달리 즐거워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잡아함에 나옴].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음’이라고 말하는가?
【답】이 가운데 공삼매(空三昧)가 매우 깊다고 말하였다 

공무아(空無我)인데 저 이학은 아가 있다고 헤아려서,
저것이 다만 아비담의 성품인 무루의 혜와 근임을 살펴 알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모든 세간에서 닦는 혜가 깨끗하지 못하다.
안반념(安般念)과 의지(意止)와 난(暖)과 정(頂)과 인(忍)과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의 모든 것이 아비담으로 이름을 얻게 되니,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사(思)와 혜의 작용으로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끊고 어리석음의 종자와 연이어 일어나는 어리석음을 없애 
법 가운데에서 전도되지 않고 행하게 된다.
이것 또한 모든 것이 아비담으로 이름을 얻는다.
그로 말미암아서 모든 중생이 얻은 과보로 선혜(善慧)를 듣고 
그가 이 12부경에 대해서 듣고 수지하고 사유하고 헤아려 
이 모든 아비담을 관찰하여 이름을 얻는다.
비록 이러함이 있으나 단지 아비담의 성품은 무루의 혜와 근 뿐이다.



【문】아비담에는 어떤 문구의 뜻이 있는가?
【답】존자 바수밀(婆須蜜)은 

“이것은 구경지(究竟智)며,
이것은 단지(斷智)며,
이것은 제일의지(第一義智)며,
이것은 무기지(無欺智)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말하였다.


거듭 말하기를,
“어떤 법보다도 위에 있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
유학(有學)의 자상ㆍ공상 같은 것은 그가 그 힘을 다하더라도 이길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어떤 법보다도 위에 있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존자 담마다라(曇摩多羅)는 말하기를,
“모든 존귀하신 분의 염오나 청정이나 속박되거나 풀려나거나 생사윤회하거나 벗어나는 것을 법이라고 한다.
이를 따르기 때문에 명신(名身)과 구신(句身)과 미신(味身)과 차제(次第)와 엄치(嚴治)와 안처(安處)와 조작(造作)을 아비담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존자 구사(瞿沙)는 말하기를,
“육도[諸趣]에서 해탈하여 지혜를 구할 때에도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
이른바 이것은 고와 고의 원인이며,
이것은 도와 도의 과보이니,
이것이 도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애도(無礙道)며,
해탈도며,
증익도(增益道)니,
이것은 이 과보를 향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육도에서 해탈하여 지혜를 구할 때에도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을 
아비담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담무덕(曇無德)이 말하기를,
“이 법은 비할 것이 없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문】여기에는 어떤 비할 바 없는 것이 있는가?
【답】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지혜가 세간의 묘함이 되어
지극한 곳에 나아갈 수 있다.
능히 등정지(等正智)를 써서
생노병사가 없어지네.

또 지혜는 모든 법보다 뛰어나니,
“오묘하고 성스러운 불제자가 지혜의 칼로 모든 결박된 번뇌[使]를 끊고,
괴로움의 올가미를 거듭 쳐서 끊고 거듭 쳐서 손상시킨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잡아함에 나옴].
이 때문에 “이 법은 비할 것이 없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비바사바제(鞞婆闍婆提)가 말하기를,
“이 법은 밝아서 비출 수 있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세간에는 밝기가 지혜와 같은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으며[위와 같음],
또 “모든 밝음이 있는 것에서 지혜의 밝음이 제일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위와 같음].
그러므로 “이 법은 밝아서 비출 수 있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사제(舍提)는 말하기를,
“없애지 못한 것을 없앨 수 있으며,
간택하지 못한 것을 간택할 수 있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문】어떤 것을 없애는가?
【답】번뇌와 괴로움이다.
【문】어떤 것을 간택하는가?
【답】계와 입과 음과 연기다.
그러므로 ‘없애지 못한 것을 없앨 수 있고,
간택하지 못한 것을 간택할 수 있으니.
이를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비유 자는 말하기를,
“법과 차법(次法)이 향하는 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문】무엇을 법과 차법이라고 하는가?
【답】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열반은 제일의법이니,
저것 다음에 다시 어떤 법이 있는가?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방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법과 차법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존자 바발금(婆跋芩)은 말하기를,
“증상의 사(事)와 증상의 전(轉)이기 때문이니,
이를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최상장(最上長)과 증상장(增上長),
최상만(最上慢)과 증상만(增上慢)’이라고 말한 것과 같으니,
이 또한 이와 같다[아비담의 서문을 마치다].







【문】3결(結),
3불선근(不善根),
3유루(有漏),
4류(流),
4액(軛),
4수(受),
4박(縛),
5개(蓋),
5결(結),
5하결(下結),
5상결(上結),
5견(見),
6신애(身愛),
7사(使),
9결(結),
98사(使)가 있다.
이 모든 부처님의 계경에서는 5결과 98사를 제외시켰다.
5결을 제외시키고 나서 마땅히 5상결을 세우니,
무슨 까닭인가?


【답】저것은 부처님의 계경에서 제외한 98사니,
이미 세운 바가 없다.

【문】무슨 까닭인가?


【답】존자 담무다라는 
“아비담을 네 아함(阿鋡)의 계경 등에서 다하여 그 가운데서 관찰하였으니,
부처님의 계경에서 그것을 버린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계경이 아니니,
이러므로 마땅히 버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 5결은 장에서 버려서는 안 되니,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부처님의 계경인 증일아함의 5법 중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다.
저 경을 지은 자가 원(願)과 지(智)와 관(觀)을 이미 이 아비담의 장에 세웠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량부(無量部)가 오래 전에 없어졌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증일아함에서는 1법으로부터 백법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1법으로부터 10법에 이른다.
이 1법도 대부분 없어져서 남아 있지 않으니,
10법도 이와 같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존자 사나바(舍那婆)아라한은 기바(耆婆)의 논사다.
그가 반열반(般涅槃)한 곧 그 날에 칠십천생경(七十千生經)을 잃어버렸으니,
아비담 중에 십천경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로부터 이후로 불법이 다시 행하여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 무량부가 오래 전에 없어져 버렸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계경에서 말한 5결(結)은《증일아함》의 5법 중에서는 오래 전에 없어졌으므로 저 경을 지은 자가 서원과 지혜와 관한을 이 아비담의 장에 세운 것이다.




【문】98사(使)는 부처님의 계경이 아닌데,
어째서 이 장에서는 버리지 않는가?



【답】이 모든 것은 계경의 뜻이고,
계경에서 모은 것이고,
계경의 말이다.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7사(使)와 분별계(分別界)와 분별종(分別種)과 분별행(分別行)을 포함하여 곧 91사가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두 부처님의 계경이 아니니,
모두 장 가운데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문】5결은 부처님의 계경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이 장에서는 버리지 않았는가?


【답】저 경을 지은 자의 의도일 뿐이다.
이는 마치 내가 따로 일체변결을 말하고,
따로 비일체변결(非一切遍結)을 말하고,
따로 일체변과 비일체변을 말한 것과 같다.
그가 일체변결을 따로 말한 것은 3결과 같고,
비일체변을 따로 말한 것은 5결과 같고,
일체변과 비일체변을 따로 말한 것은 9결과 같다.
이러므로 저 경을 지은 자의 의도일 뿐이니,
3결에서 98사에 이른다.



【문】무엇 때문에 장을 지었는가?
【답】문을 세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장이 없이 문을 세울 수 없으니,
손으로써 허공을 장엄할 수 없다.


【문】어느 곳이 장엄할 만한가?
【답】장엄할 만한 곳을 장엄하니,
이와 같이 장이 없이 문을 세울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장(章)이 없이 공허한 논의를 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오래 머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음(陰)ㆍ품수(品數)를 잘 짓고,
장을 잘 지으며,
문(門)을 잘 세운다.
백천 가운데 하나를 잘 지니는 것도 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
어찌 모아 놓은 것을 산만하게 풀어 흐트려 놓는 자 중에 누구인들 지닐 수 있겠는가?
이것을 오래 머물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스스로 혼란한 지견이 나타남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경을 지음에 혼란한 지견이 있었다면 저 경도 혼란될 것이니,
이로써 알 수 있다.
저 경을 지은 자가 혼란한 지견이 없이 이 경을 지어 착하고 바른 것을 혼란시킴이 없으니,
이것을 스스로 혼란한 지견이 나타남이 없기 때문에 장을 지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무엇 때문에 부처님의 계경에서 장을 지음을 세웠는가?
【답】부처님 계경의 무량한 뜻을 나다내려고 한 것이니,
이 외부(外部)는 뜻이 적거나 뜻이 없다.
뜻이 적은 것은 라마나(羅摩那)의 십이천(十二千) 장과 이(二) 구절의 뜻을 외우니,
라마나파 장자 사타저파라미(私陁去波羅彌)를 다시 데리고 온 것이다.
뜻이 없는 것은 한 여자 때문에 18해(姟)의 중생을 죽였으니,
철성(鐵城)에 가득한 풀과 같다.
외부는 이와 같이 뜻이 적거나 뜻이 없다.



【문】부처님의 계경은 어떠한가?
【답】한없는 뜻이 있으며,
끝없는 맛이 있다.
이는 마치 큰 바다가 한없이 매우 깊으며 매우 넓고 같이 없는 것과 같으니,
부처님의 계경도 이와 같다.
한없는 뜻과 끝없는 맛이라는 것은 존자 사리불(舍利弗)이 “이와 같이 백천 나술수(百千那術數)로 백천 경을 지어도 저 지혜를 다하여 머물 수 없으나,
부처님의 계경의 이 구의 뜻으로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데 이른다”라고 한 것에 비교되니,
이를 일러 ‘부처님 계경의 무량한 뜻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물음을 용인하니 계경을 나타낸다고 답한 것이다.
이 외부는 물음을 용인하지 않고 답 또한 용인하지 않는데,
이는 마치 원숭이가 지는 것을 용인하지 않고,
거듭 치는 것을 음인하지 않으니,
절구공이로 쳐서 곧 해산시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이 외부는 물음을 용인하지 않고 답 또한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묻는 일은 이미 절구공이로 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문】부처님의 계경은 어떠한가?
【답】바라나의(波羅奈衣)를 성취하는 것과 같다.


절구공이로 치는 것을 용인하고 거듭 치는 것도 용인하니,
치고 거듭 쳐서 물건이 유연해진다.
부처님의 계경도 이와 같아서 묻는 것도 용인하고 답하는 것도 용인하며,
물음과 같고 답과 같다.
계색(戒色)이 더욱 좋아지고,
공덕이 유연해지니,
이러므로 물음과 답을 용인하여 부처님의 계경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의 계경은 오묘함을 열어 보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계경을 말씀하셨다.
다음의 이 세 가지 일은 덮으면 오묘하고 열면 오묘하지 않다.
무엇이 셋인가?
무명과 바라문의 말과 여자이다.
세 가지 일은 열면 오모하고 덮으면 오묘하지 않다.
무엇이 셋인가?
밝은 때와 달과 부처님이다[잡아함에 나옴].
이것을 부처님 계경은 오묘함을 열어 보이는 것이라고 하니,
그러므로 부처님의 계경에서 장을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무엇 때문에 먼저 장을 짓고 뒤에 문을 세웠는가?
【답】땅을 다스리는 법이기 때문이니,
사람이 나무를 심고자 할 때 먼저 그 땅을 다스린 다음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저 경을 지은 사람도 이와 같으니,
땅을 다스리는 법은 먼저 장을 짓는 것에 해당하고,
나무를 심는 법은 뒤에 문을 세우는 것에 해당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기초의 법 때문이니,
사람이 집을 지을 때 그 사람이 먼저 기초를 만든 다음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저 경을 지은 사람도 이와 같으니,
기초의 법은 먼저 장을 지은 것에 해당하고,
집을 세우는 법은 뒤에 문을 세운 것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무를 본뜨는 법이기 때문이니,
조각가와 조각의 제자가 먼저 본을 다스린 다음에 마디를 세우는 것과 같다.
저 경을 지은 것도 이와 같으니,
나무에 본을 뜨는 것은 먼저 장을 지음에 해당하고,
마디를 만드는 법은 뒤에 문을 세우는 것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림 그리는 법이기 때문이니,
화가와 화가의 제자가 먼저 본뜬 다음에 색칠을 하는 것과 같다.
저 경을 지은 자도 이와 같으니,
본뜨는 법은 먼저 장을 짓는 것에 해당하고,
색칠을 하는 것은 뒤에 문을 세우는 것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가발을 만드는 법이기 때문이니,
저 가발 만드는 사람과 그 제자가 먼저 실을 꼰 다음에 여러 가지 술을 맺는 것과 같다.
저 경을 지은 자도 이와 같으니,
실을 꼬는 것은 먼저 장을 짓는 것에 해당하고,
가발을 맺는 것은 뒤에 문을 세우는 것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존귀한 법을 나타내는 불세존도 다시 그러하니,
분별법을 말씀하신 것은 세존께서 먼저 말씀하신 것이고,
비구인에게 6계취(界聚)와 6경(更)과 4처[첫째는 진제처(眞諦處)고,
둘째는 시처(施處)고,
셋째는 혜처(慧處)고,
넷째는 식처(識處)이다]와 18의행(意行)이 있은 다음에 분별하였으니,
이것이 비구의 6계와 6경과 4처와 18의행이다.
저 경을 지은 자도 이와 같으니,
법을 말한 것은 먼저 장을 지은 것에 해당하고,
법을 분별한 것은 뒤에 문을 세운 것에 해당한다.
이것이 존귀한 법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함을 나타내는 법이기 때문이니,
저 수행하는 이가 먼저 사대로써 색을 만들어 장을 지은 다음에 저 색이 미세하게 깨뜨려지는 것과 같다.
저 경을 지은 자도 이와 같으니,
4대(大)로 색을 만드는 법은 먼저 장을 지음에 해당하고,
색을 깨뜨리는 것은 뒤에 문을 세우는 것에 해당한다.
이것은 수행을 나타내는 법을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논의를 나타내는 법이기 때문이니,
이 논의의 법은 먼저 묻고 뒤에 답하였다.
이것은 논의를 나타내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 경을 지은 자가 먼저 장을 짓고 뒤에 문을 세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무엇 때문에 저 경을 지은 자가 먼저 3결을 세우고,
나아가 뒤에 98사를 세웠는가?

【답】앞에서 이미 아비담을 말하고 모습을 말하였으니,
마땅히 아비담의 모습을 구해야지 차제를 찾아서는 안 되고,
계경에서 마땅히 차제를 구해야 된다.
무엇 때문인가?
이 꿈의 차제는 이 품을 말한 것이고,
율은 처음과 끝을 말하였으니,
마땅히 처음과 끝을 구해야 한다.
이 뜻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겼는가?
다만 아비담의 보습을 말한 것에서는 아비담의 모습을 구해야 하고,
차제를 구해서는 안 된다.
다시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다.
저 경을 지은 자가 먼저 3결을 세우고 나아가 뒤에 내지 98사를 세웠으나,
다만 아비담이 흐트러진 것이 많아 어지러이 모아 놓은 것이니,
누가 차제를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아비담에서 모습을 말하였으면 모습을 구해야 되지 차제를 구해서는 안 되니,
앞뒤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존자 바사(婆奢)가 말하기를,
“모든 의심나는 법은 어긋나지 않으니,
만약 먼저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을 세우고 사람은 뒤에 98사를 세우면 저것에도 마땅히 이러한 의심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의심나는 법은 어긋나지 않으며,
앞뒤가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저 경을 지은 자의 의도일 뿐이다.
이는 마치 내가 먼저 3결을 세우고 나아가 뒤에 98사를 세운 것과 같으니,
이러한 까닭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증익의 법이기 때문에 먼저 세 가지를 나타내고,
뒤에 4ㆍ5ㆍ6ㆍ7ㆍ98사를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증익의 법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차례로 네 사문의 과보를 세우기 때문이다.
3결이 영원히 없어지면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세우게 되니,
그러므로 그가 앞에서 세 가지 불선근을 세운 것이다.
나머지가 다 없어지면 사다함과(斯陀含果)를 세우고,
영원히 없어지면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세우니,
이러므로 여기에서 차제로 세운 것이다.
저 세 가지 유루(有漏)가 영원히 없어지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세우니,
이러므로 그가 뒤에 모든 유(流)ㆍ액(扼)ㆍ수(受) 내지 98사를 세운 것이다.
이 모든 자세한 설명에는 누루(漏漏)가 있고 차등[差降]이 있고,
누증(漏增)이 있다.
이 세 가지 유루를 유ㆍ액ㆍ수 내지 98사라고 한다.
이러므로 차제로 네 사문의 과보를 세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차제로 결수(結樹)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 결수는 먼저 세 가지를 나타내고,
뒤에 4ㆍ5ㆍ6ㆍ7ㆍ9ㆍ98사를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저 경을 지은 자가 먼저 3결을 세우고,
뒤에 98사를 세웠다”라고 하였다.
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







1) 삼결처(三結處)

3결(結)은 신견(身見)과 계도(戒盜)와 의(疑)다.


【문】3결에는 어떤 성질이 있는가?
【답】신견은 삼계에 한 가지씩 있으므로 세 가지다.
계도는 삼계에 두 가지씩 있으므로 여섯 가지다.
의는 삼계에 네 가지씩 있으므로 열두 가지다.


이 스물한 가지가 3결의 성질이며,
이 3결의 성질은 이미 여러 모양의 몸에 있는 자연스런 것이다.
성품을 말하였으니,
행을 말하겠다.


【문】어째서 결이라고 말하였으며,
결의 뜻은 무엇인가?

【답】‘묶는다’는 뜻이 ‘결’의 뜻이며,
‘고통에 매어 있다’는 뜻이 ‘결’의 뜻이며,
‘잡다한 독’의 뜻이 ‘결’의 뜻이다.
‘묶는다는 뜻이 결의 뜻’이라는 것은 ‘묶는다’는 것이 ‘결’이며,
‘결’이 ‘묶는다’는 것이다.



【문】어떻게 아는가?
【답】계경에 있다.
저 계경에서 
“존자 사리불이 존자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현자 구치라여,
눈이 색(色)에 매어 있습니까,
색이 눈에 매어 있습니까?’
‘존자 사리불이여,
눈이 색에 매인 것이 아니며,
색이 눈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뜻[意]과 법(法)에 이르기까지도 뜻이 법에 매인 것이 아니며,
법이 뜻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가운데 음란함이나 욕애(欲愛) 같은 것이 
저기에 매인 것입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비유하자면 
두 마리 소가 있는데 하나는 검고 하나는 흰 소로서,
하나는 멍에에 
하나는 가슴걸이에 매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만일 이와 같이 말한다면,
검은 소가 흰 소를 매고 있고 
흰 소가 검은 소를 매고 있는 것입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저것은 똑같이 말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현자 구치라여.’
‘어째서 그렇습니까?’
‘현자 구치라여,
검은 소가 흰 소를 매고 있는 것이 아니며,
흰 소가 검은 소를 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멍에와 가슴걸이에 매여 있는 것이 그가 매이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눈이 색에 매인 것이 아니며,
색이 눈에 매인 것이 아니며,
뜻이 법에 이르러서도 뜻이 법에 매인 것이 아니며,
법이 뜻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가운데 음란함과 욕애 같은 것이 
저것을 얽매고 있는 것입니다’[잡아함에 나옴]”라고 하였다.



ᖰ 이것을 ‘묶는다’는 것이 ‘결’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통에 매여 있다는 뜻이 결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욕계의 겉은 욕계의 중생이 욕계 중의 고통에 매인 것이고,
색계의 결은 색계의 중생이 색계 중의 고통에 매인 것이고,
무색계의 결은 무색계의 중생이 무색계 중의 고통에 매인 것이다.
모든 욕계의 결은 저것이 매여 있는 모양이니,
고통 가운데 매여 즐거움이 아닌 것이다. ᖱ 


모든 색ㆍ무색계의 결은 저것이 매여 있는 모양이니,
고통 가운데 매여 즐거움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고통에 매여 있다는 뜻이 결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잡다한 독의 뜻이 결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매우 오묘한 생처(生處)와 세속의 정수(正受)는 해탈과 같아서 
모든 것에 들어가고 저 성스러운 곳에 들어가는 것을 제거하고 
번뇌의 잡다한 독을 맺음을 제거하는 것이니,
이는 마치 매우 오묘한 음식에 들어 있는 잡다한 독과 같아서,
지혜로운 자는 잡다한 독을 제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매우 묘한 생처와 세속의 정수에서 
저 성인이 번뇌의 잡다한 독을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이 ‘매여 있다’의 뜻이 ‘묶여 있다’의 뜻이며,
‘고통에 매인다’의 뜻이 ‘견’의 뜻이며,
‘잡다한 독’의 뜻이 ‘켠’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계경에서 “3결이 없어지면 수다원(須陀洹)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문】아비담에서는 여든여덟 가지의 견도에서 끊는 번뇌[見所斷]가 없어지면 수다원이라고 하였으니 화지(華池)의 비유와 같고,
계경에서는 한량없는 괴로움이 없어지면 수다원이라고 하였는데[잡아함에 나옴],
어째서 3결이 없어지면 수다원이라고 하는가?

【답】이것은 세존께서 달리 말씀이 계셨으니 
말을 생략하여 그 말을 행하도록 하게 하려는 것이며,
세존께서 교화하려고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 때문이며,
권속 때문이며,
근기 때문이며,
교화 때문이니,
저 교화받는 자를 위하여 이러한 일을 분별하여 말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불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 교화하기 위한 것이니,
의사의 치료가 병든 사람을 위하는 것과 같다.
의사는 병든 자를 위하여 병의 근원을 자세히 알아서 병에 따라 약을 투여하는데,
병의 차도 없음을 염려하여 줄이지도 않고 그 공의 덜음을 염려하여 불리지도 않으니,
중도에 처하여 병을 차도있게 한다.
불세존께서 말씀하신 것도 다 교화하려는 것이니,
저 세존께서 교화받는 자를 위하여 몸을 알고 번뇌를 알고 나서 도(道)의 약을 투여하신다.


번뇌의 병이 없어지지 않음을 염려하여 
줄여서 설하지도 않고 그 공의 덜음을 염려하여 불려서 설하지도 않으니,
중도에 처하여 말씀하신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끌어 교화에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고,
일을 쉽게 행하게 하려는 것이고,
손수 도와주려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중에 마땅히 발기자(跋耆子)의 비유를 말하겠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발기자라고 하는 비구가 있는데,
세존의 사문이 되었다.


세존께서 점차로 250계(戒)를 시설하셨는데 
그가 듣고서 싫어하여 세존께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250계를 시설하셔서 보름마다 점차로 족성자(族姓子)로 하여금 배우게 하시지만 저는 이러한 계를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거칠지 않은 말로 권하는 것을 좋게 여기시어,
‘선하고 선하구나.
발기자여,
너 발기자는 삼계를 행할 수 있으니,
증상계(增上戒)와 증상의(增上意)와 증상혜(增上慧)를 행하겠느냐,
행하지 못하겠느냐?’라고 하셨다.
그가 듣고서 곧 기뻐 뛰며 ‘내가 이 삼계를 잘 행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제가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선서시여,
제가 마땅히 열심히 행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고서,
그가 삼계를 배울 때에 점차로 모든 계의 바다[戒海]를 배웠다.



만일 세존께서 이와 같이 교화하시려고 
‘여든여덟 가지 견도에서 끊어지는 번뇌가 수다원이 되며,
한량없는 괴로움이 없어지면 수다원이 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가 듣고서 싫어하여,
‘누가 이 여든여덟 가지의 괴로움의 산을 깨뜨릴 수 있으며,
누가 이 여든여덟 가지의 괴로움의 나무뿌리를 뽐을 수 있으며,
누가 이 여든여덟 가지의 괴로움의 강물을 건널 수 있으며,
누가 이 여든여덟 가지의 괴로움의 바다를 마르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계경에서 3결이 없어지면 수다원이 된다는 말을 
저 교화를 받는 자가 듣고서 곧 ‘내가 이 3결을 잘 끊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그가 3결을 굽을 때에 모든 견소단의 결이 점점 없어질 것이다.


이것이 ‘이끌어 교화에 나아가게 하며,
일을 쉽게 행하게 하며,
손수 도와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발기자의 비유를 말하였다[율에 나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겁고 과다한 고통이다”라고 하였다.



【문】신견(身見)에 어떤 큰 근심이 있는가?
【답】신견은 62견의 근원이고,
견은 결의 근원이고,
결은 행의 근원이고,
행은 과보의 근원이니,
모든 세간은 과보에 의지한다.
과보에 의지하고 나서 생사 가운데에서 선법에 나아가기도 하고,
불선법에 나아가기도 하고,
무기법에 나아가기도 한다.


【문】계도(戒盜)에 어떤 큰 근심이 있는가?
【답】계도 가운데에서 모든 고의 행위를 낸다.


【문】의(疑)에 어떤 큰 근심이 있는가?
【답】과거가 되기 때문에 의심하여 머뭇거리며,
미래가 되기 때문에 의심하여 머뭇거리며,
현재가 되기 때문에 의심하여 머뭇거리며,


안에서 의심하여 머뭇거린다.
이것은 어떤 것이며,
이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이 중생이 어떤 곳으로부터 와서 어떤 곳에 이르며,
무엇을 원인으로 삼고 무엇을 소유하는가?
이것을 큰 근심과 무겁고 큰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공덕(功德)의 적[怨家]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무엇이 공덕인가?
【답】수다원과다.
【문】그는 어째서 적을 가까이하여 친하지 않는가?

【답】3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다원과를 증득할 때 장애를 만들어 문에 들어가게 하지 않고,
문을 지키는 사람처럼 머물러 있는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3해탈문(解脫門)과 서로 어긋나니,
저 신견은 공정(空定)과 서로 어긋나며,
계도(戒盜)는 무원과 서로 어긋나며,
의(疑)는 무상(無相)과 서로 어긋난다.
이것을 삼해탈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하여 남김없으나 아라한에 이르더라도 또한 비슷한 신견이 있어서 괴로움을 얻으니,
아직 알아서 영구히 다한 것은 아니다.
그가 이미 다하고 이미 알았으나,
아라한에 이르더라도 역시 비슷한 것이 있다.
이는 저 아라한이 ‘이것은 나의 의발(衣鉢)이며,
이것은 나의 제자인 사미며,
이것은 나의 집이며,
이것은 나의 나라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아(我)가 있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도는 도를 얻었으나 아직 알아서 영구히 다한 것은 아니다.
그가 이미 다하고 이미 알았으나,
아라한에 이르더라도 역시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이는 저 아라한이 걸식을 행하고 분소의(糞掃衣)를 입고 
길거리에 알아 사문의 열두 가지 청정한 행을 받는 것과 같다.
청정한 행과 마찬가지로 의심은 도를 얻었으나,
아직 알아서 영구히 다한 것은 아니다.

그가 이미 다하고 이미 알았으나,
아라한에 이르더라도 역시 비슷한 것이 있다.
저 아라한이 두 길을 보고서 의심하여 ‘이것은 옳은 길인가,
그른 길인가’라고 하며,
두 옷을 보고 의심하여 ‘이것이 나의 옷인가,
나의 옷이 아닌가’라고 하며,
멀리서 보고서 의심하여 ‘이것은 여자인가 남자인가’라고 한다.
아라한이 이정(理定)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지 말라.
수다원이 다하였는데,
하물며 아라한이겠는가?
이 때문에 3결이 없어진 것이 수다원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현문(現門)과 현략(現略)과 현도(現度)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 혹은 한 가지,
두 가지,
네 가지가 있다.
저 신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한 가지를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두 가지를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비록 나머지 다른 두 결로서 얻을 만한 두 가지가 없으나,
저 계도의 두 가지와 그와 상응하는 법임을 알아야 한다.
의는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네 가지를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혹은 기계일체변과 비기계일체변이 있다.
신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기계일체변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계도와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비기계일체변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문】무엇 때문에 첫째로 기계일체변(己界一切遍)과 
둘째로 비기계일체변(非己界一切遍)을 말하였는가?


【답】저 비기계일체변의 결에 유루연(有漏緣)과 혹은 무루연(無漏緣)이 있다.
저 신견과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유루연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무루연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기계일체변과 비기계일체변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기지일체변(己地一切遍)과 비기지일체변,
기계연(己界緣)과 비기계연,
기지연(己地緣)과 비기지연도 다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 흑은 유루연과 무루연이 있다.
저 신견과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유루연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무루연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문】무엇 때문에 두 번째로 유루연과 첫 번째로 무루연을 말하였는가?
【문】유루연의 결에는 혹은 기계일체변과 비기계일체변이 있다.
저 신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기계일체변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계와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비기계일체변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유루연ㆍ무루연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다툼과 다툼이 없음,
세간과 출세간,
머무름과 머무르지 않음,
의욕과 불의욕도 모두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혹은 유위연(有爲緣)과 무위연(無爲緣)이 있다.


저 신견과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유위연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무위연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유위연ㆍ무위연처럼 이와 같이 

유상연(有常緣)과 무상연(無常緣)이 있으며,
유항연(有恒緣)과 무항연(無恒緣),
유주연(有住緣)과 무주연(無住緣)도 다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묵은 견성(見性)과 비견성(非見性)이 있다.
저 신견과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견성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비견성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견성ㆍ비견성처럼 이와 같이 
관찰함과 관찰하지 않음,
행함과 행하지 않음,
굳게 지님과 굳게 지니지 않음,
구함과 구하지 않음,
바뀜과 바뀌지 않음도 모두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이러므로 현문(現門)과 현략(現略)과 현도(現度)를 말한다고 한 것이며,
이 때문에 3결이 없어지면 수다원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인가,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인가?
만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라면 
마땅히 제8이 수다원일 것이다.
제8이라는 것은 믿음을 견고히 하고 법을 견고히 하여 저 도를 비로소 얻은 것이니,
믿음을 견고히 하는 도[堅信道]와 법을 견고히 하는 도[堅法道]다.

만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라면,
저것은 마땅히 곱절의 탐욕[倍欲]이 없어진 것과 애욕이 없어진 것이 수다원일 것이다.

그가 처음 얻은 과와 사다함과와 아나함과는 이러한 논의를 만들 뿐이니 설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다”라고 한다.




【문】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제8이 수다원일 것이니,
그가 처음 얻은 도는 견신도와 견법도다.
【답】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도를 처음 얻고 도에 들어가서 그가 믿음을 견고히 하고 법을 견고히 한 것이다.
비록 도를 처음 얻었지만 과(果)에 처음 들어가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도를 처음 얻은 것이 수다원이다.
만일 견도에서 끊는 결이 영구히 없어져서 인(忍)과 서로 어긋남을 이미 안다면,
이미 없어지고 이미 알아서 삿된 견해가 영구히 끊어진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인상(人想)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인상을 말하기 때문이며,
인법(人法)을 시설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도를 사유(思惟)하기 때문이며,
과보가 도를 포함하기 때문이며,
도는 아직 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만일 세 가지 일을 얻는데 처하면 아직 도를 얻은 것이 아니고,
도를 버려야 결이 다하여 일미(一味)를 얻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만일 다섯 가지 일을 얻는데 처하면 아직 도를 얻은 것이 아니다.
도를 버려야 결이 다하여 일미를 얻게 되니,
여덟 가지 지혜를 얻어 일시에 16행(行)을 닦는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얼은 것이 수다원이니,
생겨남이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다시 어떤 사람은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다”라고 하였다.




【문】만약 그렇다면 곱절로 탐욕이 없어진 것과 욕애가 없어진 것은 마땅히 수다원일 것이니,
저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은 사다함과와 아나함과일 것이다.

【답】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최초의 해탈이기 때문이며,
최초의 제도이기 때문이며,
최초의 머문 과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차제 때문이며,
함께 매여 있기 때문이며,
차제를 뛰어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4향(向)과 4주과(住果)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4쌍(雙)과 8배(輩)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나머지를 아직 얻지 못하여 더욱 수행하기 때문이다.
나머지를 아직 얻지 못하여 더욱 수행한다는 것은 세간의 도는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이 있어도 과보를 얻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차등이 없기 때문이다.
차등이 없다는 것은 역시 위의 세간의 도와 같이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이 있어도 과보를 얻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만일 과보와 도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지(地)도 무너지지 않는다.
도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한결같이 무루도로써 과보를 얻는 것이고,
지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에 의지하여 다르지 않은 것을 얻는 것이고,
아라한과라는 것은 비록 도가 무너지지 아니하여 한결같이 무루도로써 과보를 얻지만,
저 지가 무너져서 9무루지에 의지하여 얻는 것이다.
사다함과라는 짓은 비록 의지가 무너지지 아니하여 미래에 의하여 다르지 않은 것을 얻더라도,
저 도가 무너져서 세간의 무루도로써 과보를 얻는 것이다.
아나함과라는 것은 도(道)도 무너지고,
지도 무너지는 것이다.
도가 무너진다는 것은 세간의 무루도로써 과보를 얻는 것이고,
지가 무너진다는 것은 6지에 의하여 얻는 것이다.
이 수다원의 과보는 무너지지 않고,
지도 무너지지 않으니,
이 때문에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도 수다원이 아니며,
처음 과보를 얻은 것도 수다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문】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그러한가?
【답】저것은 수다원과를 말미암기 때문이며,
이 수다원은 법 때문에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약탕(藥湯)이 약 때문에 약탕이라고 하며,
소(酥) 때문에 소병(酥甁)이라고 하며,
꿀 때문에 꿀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저것은 수다원과를 말미암기 때문이며,
이 수다원은 법을 말미암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한 것이니,
약탕과 같다.
수다원이라는 것은 팔성도(八聖道)라는 물에 그가 들어가니,
이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한 것이다.



【문】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 같은 이도 성도의 물에 들어가는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지 않는가?
【답】처음 일어나 이름을 받는 것은 처음의 방편도(方便道)이니,
이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한 것이다.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은 그렇지 않다.
악법(惡法)에 떨어지지 않는 자는 끝내 삼악취(三惡趣)에 떨어지지 않는다.



【문】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 같은 이도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수다원만을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머지는 말하지 않았는가?


【답】각각 차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수다원은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차등이고,
사다함은 한 번 왕래하는 것이 차등이고,
아나함은 욕계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차등이고,
아라한은 다시 유(有)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차등이다.
이것이 “각각의 차등 때문에 수다원 하나만을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고,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은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다.



【문】범부(凡夫)도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성인이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는가?
【답】저 범부는 일정하지 않아 악법에 떨어지기도 하고 악법에 떨어지지 않기도 하지만, 
이 성인은 한결같이 악법에 떨어지지 않으니 어느 한 성인도 악법에 떨어지는 경우가 없다.
그것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니,
이 때문에 성인은 악법에 떨어지지 않으나 범부는 그렇지 않다.
정(定)이라는 것은 바른 선정에 나아가 머물기 때문에 정이라고 한 것이니,

마땅히 수다원은 반열반(般涅槃)의 변역(變易)에 정(定)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정각(正覺)에 나아간다고 한 것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각이라고 한 것이며,
저 사람이 이것에 의하여 향함이 있고,
나아감이 있고,
좋아함이 있고,
촉구함이 있으니,
이 때문에 정각의 극칠환유(極七還有)에 나아간다고 말한 것이다.


【문】이와 같은 
극십사환유(極十四還有)와 극이십팔환유(極二十八還有)는 

만일 본유의 수를 취한다면 
천상의 본유(本有) 일곱과 
인간의 본유 일곱으로 십사이며,

만일 본유와 중음(中陰)의 수를 취한다면 
천상의 본유 일곱과 중음 일곱,
인간의 본유 일곱과 중음 일곱으로 이십팔인데,
무엇 때문에 극칠환유가 수다원이라고 말하였는가?


【답】법이 마땅히 일곱 가지이므로 일곱을 넘지 않으며,
하나하나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극칠환유는 수다원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만일 천상은 본유가 일곱이고 중음이 일곱이며,
인간은 본유가 일곱이고 중음이 일곱이라면 저 모두는 일곱을 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세존께서 “극칠환유는 수다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이는 다른 계경에서 “사성제는 3전(轉) 12행(行)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는 3전ㆍ12행이 아니라 12전ㆍ48행이어야 하지만,
다만 3전ㆍ12법이기 때문에 3전ㆍ12행을 지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진리를 관찰하기 때문에 
세존께서 사성제는 3전ㆍ12행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다른 계경에서 
“비구는 일곱 군데의 장소에서 세 가지의 뜻을 잘 관찰하니,
속히 이 법 가운데 번뇌가 다하게 된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 일곱 군데라고 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35처선(處善)이 있다고 해야 하며,
또한 무량처선(無量處善)이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다만 7법이기 때문에 7관(觀)을 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음(陰)이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는 일곱 군데의 장소에서 세 가지를 잘 관찰하니,
속히 이 법 가운데에서 번뇌가 다하게 된다”라고 하셨다.


다른 계경에서 
“비구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법을 말하겠다.
두 가지의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매끄러움의 
뜻과 법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12가 되어서는 안 되고 
마땅히 62가 있어야 한다.

다만 이 법이기 때문에 이관(二觀)을 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입(入)이기 때문이며,
눈과 색이기 때문이며,
내지 뜻과 법이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법을 말하겠으니,
두 가지가 있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천상의 본유가 일곱이고 중음이 일곱이며,
인간의 본유가 일곱이고 중음이 일곱이지만 모두 일곱을 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취이기 때문이며,
천취(天趣)이기 때문이며,
인취(人趣)이기 때문이며,
중음이 일급이기 때문이며,
본유가 일곱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하나하나의 취이기 때문에 
세존께서 ‘극칠환유(極七還有)가 수다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무엇 때문에 수다원은 극칠환유이며,
또한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는가?


【답】바사가 말하기를,
“모든 의심은 법과 어긋나지 않으니,
혹은 증가하고 혹은 감소하는 것은 그 또한 이러한 의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의심은 법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그가 제보인(齊報因)이기 때문이다.
저 제보인과 마찬가지로 제보과(齊報果)도 마땅히 그러하다.
이러므로 그가 제보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의 힘 때문에 수다원이 7유(有)에 나고 성도의 힘 때문에 8에 이르지는 않는다.
이것은 사람이 칠보사(七步蛇)에게 물리면 그가 사대(四大)의 힘 때문에 일곱 걸음을 갈 수 있으나,
독의 힘 때문에 여덟 걸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다원도 수행 때문에 7유에 나지만 
성도의 힘 때문에 8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것은 사람이 전에 먹은 음식 때문에 목숨이 7일에까지 이르나 
음식의 힘이 다하기 때문에 8일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다원도 수행 때문에 7유에 나지만 
수행이 다하여 8에 이르지는 못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가 증상인(增上忍)에 머물 때에 욕계의 7생과 색ㆍ무색계의 하나하나의 처(處)와 하나하나의 생(生)을 없애고,
다른 모든 나고 얻는 비수연(非數緣)이 다한다.
만일 나고 얻는 비수연이 다하면,
이 생이 마침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칠생처(七生處)이기 때문이니,
생처에 난다는 것은 욕계의 여섯과 천상 및 인간이다.
마땅히 이 가운데 수다원이 나니,
이 때문에 칠생처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저 8생(生)은 공허하니 성도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수다원이 8유(有)에 이른다면,
저 진리를 보는 것은 이미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과보를 얻는 것도 이미 과보를 얻는 것이 아니고,
등행도 이미 등행(等行)이 아니고,
성인을 얻음도 이미 범부가 되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이 허물이 있게 된다.
이러므로 수다원은 8유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간 가운데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간 가운데 나타나는 일이라는 것은 7세까지를 가깝다고 하니 
만일 8세에 이르면 가깝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만일 수다원이 8유에까지 이른다고 한다면, 
항하사(恒河沙)의 불법 가운데 멀리 떨어져 
그와 가깝지 아니하여 말할 것도 없이 허물이 있게 된다.
이 때문에 수다원은 8유에 이르지 않는다.

만일 수다원이 천상의 7생과 인간의 7생을 궁극적으로 채운다면 
저 가운데에서 수다원은 차등이 있어 
일곱 번 천상에 나고,
인간에 여섯,
천상에 여섯,
인간에 다섯,
천상에 다섯,
인간에 넷,
천강에 넷,
인간에 셋,
천상에 셋,
인간에 둘,
천상에 둘,
인간에 한 번 태어난다고 말할 것이다.

다만 수다원은 천상의 일곱과 인간의 일곱을 궁극적으로 채우니,
저 가운데에서 극칠생유가 
수다원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저 일곱은 어느 곳에서 가득 차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일 몸이 수다원의 과보를 얻으면 저 몸은 일곱 가운데에서 찬다”라고 하였는데 혹은 수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수를 말하지 않기도 한다.
수를 말한다는 것은,
만일 천상에서 과보를 얻으면 인간에서 반열반(槃涅槃)하고,
인간에서 과보를 얻으면 천상에서 반열반하는 것을 말한다.
수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만일 천상에서 과보를 얻으면 천상에서 반열반하고,
인간에서 과보를 얻으면 인간에서 반열반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몸 가운데 수다원의 과보를 얻으면 저 몸은 일곱 가운데에서 헤아리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답】만일 저 몸 가운데 수다원의 과보를 얻는다면 
저★★ 몸은 중음(中陰)의 범부일 때이고,
만일 이 몸이 일곱 가운데 수라면 27이 있어야 하지 28이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시설하여 말한 것과 서로 어긋나니,
그가 말한 것은 28유다.

후유(後有)에 왕생하여 뒤에 후득신(後得身)에 의시하여 무루도를 얻어 나머지 번뇌를 다 없앤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잘못된 것이니,
저 몸은 일곱 가운데서는 헤아리지 않는다.




【문】극칠생유가 수다원이라면 6생 중에서 성도가 바로 나타나는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가?
만일 바로 나타난다면 무엇 때문에 반열반하지 않는가?
만일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저 뜻에는 마땅히 성도가 없을 것이다.
이 논을 지은 뒤 어떤 이는 바로 나타난다고 말하였다.
【문】무엇 때문에 반열반하지 않는가?



【답】저의 수행이 세간의 수행을 즐기는 힘 때문에 반열반하지 않는다.
【문】극칠생유(極七生有)의 수다원이 일곱을 마지막으로 채우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지 않았을 때 그가 흰 옷을 입고 반열반한 것은 어째서인가?



【답】그렇지 않다.
그가 반드시 출가하여 반열반한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오백 명의 벽지불(辟支不)이 선인(仙人)의 굴에 머물러 본래 다 성문(聲聞)이 되었다.
이러므로 극칠생유라고 하였다.
천상과 인간에 일곱 번 태어난다는 것은 
천상으로부터 인간에 이르고,
인간으로부터 천상에 이르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동산으로부터 인간에 이르고,
모임으로부터 모임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 또한 이와 같이 천상으로부터 인간에 이르고,
인간으로부터 천상에 이르니,
이 때문에 일곱이라고 말한 것이다.

천상과 인간에 왕생(往生)한다는 것은.
‘왕’은 중음이고,
‘생’은 본유다.
이 때문에 왕생하여 고변(苦邊)을 믿는다고 말한 것이다.


【문】고변이라는 것은 가운데라고 말해야 하는가,
밖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만일 고의 가운데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고변이 없을 것이고,
고의 밖이라고 말한다면 세간에 나타나는 일과 어떻게 통할 수 있겠는가?
마치 금으로 만든 산가지[籌]가 처음도 금이고,
가운데도 금이고,
뒤도 금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다원은 처음도 고이고,
가운데도 고이며,
뒤도 고이니,
어떻게 고변이 있겠는가?
이 논을 지은 뒤 어떤 이는 아라한의 최후음(最後陰)이 고변이라고 말하였으며,
어떤 이는 멸진하여 열반하는 것이 고변이라고 말하였다.
만일 아라한의 최후음이 고변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고변이 있는가?


【답】이와 같이 고변이 있으니,
다시 고를 받지 않고,
다시 고를 맺지 않으며,
다시 고의 인연을 깃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문】만일 멸진하여 열반하는 것이 고변이라고 한다면,
비유가 어떻게 통하겠는가?


【답】이것이 반드시 통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또한 계경(契經)이 아니며,
율(律)이 아니며,
아비담이 아니니,
세간의 비유로써 현성의 말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세간의 일이 다르고 현성의 일이 다르다. 


고변을 지은 것은,
고는 오성음(五盛陰)을 말하고,
저 변은 최변(最邊)과 후변(後邊)이다.
이러므로 고변을 짓는다고 말한 것이다.
3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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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사론』 ♣0971-001♧






◎◎[개별논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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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ㆍ논이나 그 주해서의 처음에 불ㆍ보살 등에게 귀경하는 뜻을 나타내는 글. 귀경문(歸敬文)이라고도 함.

답 후보
● 귀경서(歸敬序)
근기(根機)
근사(近事)
근책녀율의(勤策女律儀)
금강나라연신(金剛那羅延身)

금강불괴(金剛不壞)
금강야차(金剛夜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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