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전유경』
K0698
T0094
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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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불설전유경』 ♣0698-001♧
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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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0698
불설전유경(佛說箭喩經)
역자 미상
김석군 번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세존[婆伽婆]께서 사위성(舍衛城)의 기수(衹樹)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 존자 마라구마라(摩羅鳩摩羅)는 조용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세존께서는 삿된 견해를 버리고 삿된 견해를 제거하라 하시고서,
≺세상[世間]은 영원[常]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은 끝[邊]이 있다,
세상은 끝이 없다,
명(命: 정신)이 몸[身]이다,
명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
이와 같은 명은 마침[終]이 있다,
명은 마침이 없다,
명은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명은 마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시지 아니하시니,
나는 알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으며 즐겁지도 않다.
세존께서 만약 ≺세상은 영원하다≻고 한결같이 말씀해 주신다면
나는 따라서 범행(梵行)을 닦겠지만,
만일 세존께서 ≺세상은 영원하다≻고 한결같이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비난한 후에 떠나갈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은 끝이 있다,
세상은 끝이 없다,
명이 몸이다,
명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
이와 같은 명은 마침이 있다,
명은 마침이 없다,
명은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명은 마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에 대해
만약 세존께서 ≺나의 말이 진리이고 나머지는 어리석은 것이다≻고 한결같이 말씀해 주신다면
나는 범행을 닦겠지만,
만약 세존께서 ≺나의 말이 진리이고 나머지는 어리석은 것이다≻고 한결같이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묻고 난 뒤에 떠나 돌아갈 것이다.’
이에 존자 마라구마라는 해가 저물녘에 일어나 세존의 처소에 갔다.
도착하고 나서 세존의 발에 예를 올리고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존자 마라구마라는 물러나 한쪽에 앉고 나서 세존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조용한 곳에 있으면서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삿된 견해를 버리고 삿된 견해를 제거하라 하시고서,
≺세상은 영원하다……명은 마침이 없다≻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시지 않으시니,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며 나는 잘 알 수도 없고 즐거울 수도 없다.
만일 세존께서 ≺세상은 영원하다≻는 것을 잘 아신다면
세존께서는 그것을 말씀해주셔야만 하며,
세존께서 만일 ≺세상은 영원하다≻는 것을 잘 아시지 못한다면
다만 솔직하게 ≺나는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셔야 한다.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명은 마침이 없다≻에 대해
만약 세존께서 ≺나의 말이 진리이고 나머지는 어리석은 것이다≻고 잘 아신다면
세존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셔야 한다.
만약 세존께서 ≺나의 말이 진리이고 나머지는 어리석다≻는 것을 아시지 못한다면
솔직하게 ≺나는 이것을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셔야 한다.’”
“마라구마라여,
내가 예전에 그대에게
‘내가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해 주겠으니 그대는 곧 나를 따라 범행을 닦아라’고 말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다……명은 마침이 없다≻에 대해 ‘
만약 내가 ≺나의 말이 진리이고 나머지는 어리석다≻고 말해 주겠으니
그대는 나를 따라 범행을 닦아라’고 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마라구마라여,
그대는 예전에 나에게 ‘만약 세존께서
≺세상은 영원하다≻고 한결같이 말씀해 주신다면,
저는 따라 범행을 닦겠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명은 마침이 없다≻에 대해 ‘
만약 세존께서 ≺나의 말이 진리이고 나머지는 어리석은 것이다≻고 말씀해 주신다면
저는 따라 범행을 닦겠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마라구마라여,
이것을 나는 본래 그대에게 말하지 않았고,
그대도 본래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근거도 없는데 비난하는구나.”
이에 존자 마라구마라는 직접 세존께 꾸지람을 듣고 조용히 말이 없었고
몸과 얼굴에 땀이 흘렀으며 얼굴을 돌리고 말없이 있었다.
그때 세존께서 마라구마라를 직접 꾸짖고 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
나는 세존을 따라 범행을 닦지 않고
반드시 세존으로 하여금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씀하시게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알지도 못하고 중간에 목숨을 마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명은 마침이 없다≻에 대해 ‘
나는 세존을 따라 범행을 닦지 않고
반드시 세존으로 하여금 ≺나의 말이 진리이고 나머지는 어리석은 것이다≻고 말씀하시게 하겠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알지도 못하고 중간에 목숨을 마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몸에 독화살을 맞았는데,
그의 친속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편안하게 하고 이익되게 하려고
독화살을 제거해줄 사람을 찾고 있는 것과 같다.
이에 그 사람은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나는 화살을 제거하지 않고
반드시 활을 쏜 그 사람의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지,
키는 큰지 작은지 중간인지,
피부는 검은지 흰지,
찰리 출신인지 바라문 출신인지 거사 출신인지 장인 출신인지,
동쪽에 있는지 남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 북쪽에 있는지,
누가 화살로써 나를 맞추었는지 알아야겠다.
나는 이 독화살을 제거하지 않고
반드시 그 활은 살라(薩羅)나무로 만들었는지,
다라(多羅)나무로 만들었는지,
시라앙굴리(翅羅鴦掘梨)나무로 만들었는지 알아야겠다.
나는 이 독화살을 제거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 힘줄은 소의 힘줄ㆍ염소의 힘줄ㆍ검은 소의 힘줄 중 무엇으로 그 활을 감았는지 알아야겠다.
나는 이 독화살을 제거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 활의 손잡이[弝]는 흰 뼈로 만들었는지,
검은 옷나무[黑漆]로 만들었는지,
붉은 옷나무[赤漆]로 만들었는지 알아야겠다.
나는 이 독화살을 제거하지 아니하고
나는 반드시 그 활줄은 소의 힘줄로 만들었는지,
염소의 힘줄로 만들었는지,
검은 소의 힘줄로 만들었는지 알아야겠다.
나는 이 독화살을 제거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 화살은 사라(舍羅)나무로 만들었는지
대[竹]나무로 만들었는지
라아리(羅蛾梨)나무로 만들었는지 알아야겠다.
나는 이 독화살을 제거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화살을 감은 힘줄은 소의 힘줄인지,
염소의 힘줄인지,
검은 소의 힘줄인지 알아야겠다.
나는 이 독화살을 제거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화살의 털과 깃은 공작의 것인지,
두루미의 것인지,
독수리의 것인지 아니면 그 날개를 가지고 깃을 만들었는지 알아야겠다.
나는 이 독화살을 제거하지 아니하고 그 화살촉은 바차(婆蹉)인지,
바라(婆羅)인지 나라(那羅)인지 가라비(伽羅鞞)인지 알아야겠다.
나는 이 독화살을 제거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 쇠장이[鐵師]는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지,
모습은 키가 큰지 작은지 중간인지,
피부는 검은지 흰지,
그리고 그 사람은 동쪽에 있는지 남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 북쪽에 있는지 알아야겠다.’라고 하면,
그 사람 역시 알 수도 없고 중간에 곧 목숨을 마칠 것이다.
이와 같이 만약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나는 저 세존을 따라서 범행을 닦지 않고
반드시 세존으로 하여금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씀하시게 하겠다.’고 하면,
저 어리석은 사람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중간에 목숨을 마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은 끝이 없다……명은 마침이 없다≻에 대해
만약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나는 저 세존을 따라서 범행을 닦지 아니하고
반드시 세존으로 하여금
≺나의 말이 진리이고 나머지는 어리석은 것이다≻고 말씀하시게 하겠다.’라고 하면,
저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알지도 못하고 중간에 목숨을 마치게 될 것이다.
≺세상은 영원하다≻는 이러한 삿된 견해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나를 따라 범행을 행할 것이고,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명은 마침이 없다≻는 이러한 삿된 견해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나를 따라 범행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영원하다≻는 이러한 삿된 견해가 있다 해서
나를 따라 범행을 행해서는 안 되며,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명은 마침이 없다≻는 이러한 삿된 견해가 있다 해서
나를 따라 범행을 행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영원하다≻는 이러한 삿된 견해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나를 따라 범행을 행할 것이고,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명은 마침이 없다≻는 이러한 삿된 견해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나를 따라서 범행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영원하다≻는 이러한 삿된 견해가 없다 해서
나를 따라 범행을 행해서는 안 되며,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명은 마침이 없다≻는 이러한 삿된 견해가 없다 해서
나를 따라 범행을 행해서는 안 된다.
≺ 영원하다≻고 하여도
남[生]이 있고 늙음[老]이 있고 병듦[病]이 있고 죽음[死]이 있고
근심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즐겁지 않음이 있으니,
이와 같은 이것이 큰 괴로움의 덩어리[苦陰]가 생기는 원인이다.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명은 마침이 없다≻고 하여도
남이 있고 늙음이 있고……큰 괴로움의 덩어리가 생기는 원인이다.
≺세상은 영원하다≻는 것은 말하지 않고,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명은 마침이 없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의(義)가 아니며
또한 법(法)이 아니며
범행이 아니며
신통(神通)을 성취하지 못하며
평등한 도[等道]에 이르지 못하며
열반(涅槃)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다.
무엇이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 것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라고 내가 한결같이 말하며,
괴로움의 쌓임[苦習]과
괴로움의 사라짐[苦盡]과
머무는 곳[住處:道諦]을 한결같이 말한다.
어찌하여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가?
이것은 의(義)이며
법(法)이며
신통을 성취할 수 있으며
범행을 행함이며
평등한 도[等道]에 이름이며 열반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결같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버려야만 하고,
내가 말한 것은 잘 지니어야만 한다.”◂
이것은 의(義)가 아니며
또한 법(法)이 아니며
범행이 아니며
신통(神通)을 성취하지 못하며
평등한 도[等道]에 이르지 못하며
열반(涅槃)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다.
무엇이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 것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라고 내가 한결같이 말하며,
괴로움의 쌓임[苦習]과
괴로움의 사라짐[苦盡]과
머무는 곳[住處:道諦]을 한결같이 말한다.
어찌하여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가?
이것은 의(義)이며
법(法)이며
신통을 성취할 수 있으며
범행을 행함이며
평등한 도[等道]에 이름이며 열반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결같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버려야만 하고,
내가 말한 것은 잘 지니어야만 한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저 여러 비구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기뻐하며 좋아하였다.
○ [pt op tr]
[#M_▶더보기|◀접기|
● [pt op tr] fr
_M#]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reille Mathieu - Liebe Stirbt Nie.lrc
● 침묵 무기에 대한 해석
전유경은 내용이 짧다.
그런데 대단히 유명하다.
부처님이 질문을 받고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유와 배경에 대해 해석입장이 다양하게 많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옳은 답은 무엇인가에 대해 또 이와 관련해 입장이 다양하다.
이것이 독화살의 비유로 널리 전한다.
경전내용만 놓고 부처님이 답을 안한 이유를 생각하면 다음이다.
독화살은 무엇을 재료로 만들었는가.
이것이 궁금할 수 있다.
그러나 독화살을 맞은 이는 이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보다는
우선 치료가 급하다.
궁금증 해소하는 데 치중하면, 정작 치료가 늦어지고 독화살로 고통받게 된다.
이런 취지로 답을 안 하셨던 것으로 제시된다.
어떤 문제가 제기되는데 그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무기라고 표현한다.
무기는 또 다른 경우에는 선악 구분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불교계에서는 유마힐 거사의 무기도 비슷하게 유명하다.
불이법이 무언가 불이법에 해당한 것이 무언가 이렇게 질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에 대해 답하지 않고 침묵한다.
경전에서는 문수보살님이 이어서 이런 침묵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다.
만일 문수보살님이 그런 설명을 붙여주지 않았다면 대단히 답답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본래 이 문제는 언설을 떠난 상태를 묻는 질문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불이법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상태만이 그 문제의 정답에 해당한다고 오해하면
오히려 더 답답해진다.
그런 언설을 떠난 그 상태는 사실은 생사현실안의 온갖 것을 다 허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처란 무엇인가.
본 바탕은 다 차별없이 공하다.
그리고 다 언설을 떠난다.
그런 사정 때문에 허공도 부처라고 관할 수 있다.
이렇게 문수보살님이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허공을 부처라고 관하면서 대하지는 않는다.
허공은 가르침을 설해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허공이나 부처님이나 모두 차별없이 공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이유에서 허공을 부처라고 관해야 한다면,
바위도 부처고 소, 돼지, 말, 강도까지도 다 부처라고 해도 될 듯하다.
그래서 과연 그런 주장을 하는 이는 소, 돼지를 부처님으로 여기고
매 순간 따라 다니고 본받으려 노력하는가는 의문이다.
이 사정은 종이와 같다.
종이를 놓고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그 종이위에 답을 적으려 한다고 하자.
무엇을 적어도 그렇게 적은 내용이 종이자체는 되지 않는다.
그래도 답을 적어줘야 한다.
그런데 종이에 무엇을 적어도 또 그 글이 종이를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정과 비슷하다.
그런 가운데 종이에 한 아이가 엉뚱하게 그림을 그리고 엉뚱한 이야기를 적었다고 하자.
그래도 다른 답과 성격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런 엉터리 그림이나 글도 종이를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종이는 나무를 재료로 해서 그 위에 글이나 그림을 적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종이에 대한 사전적 풀이를 적은 것과 성격이 같다고 하기도 곤란하다.
이 비유를 놓고 문제가 갖는 성격을 파악할 필요도 있다.
차를 한잔 마시고 그 차맛을 기술해보라.
여기에 엉뚱한 답을 하는 경우가 있다.
차란 구름이다. 이런 식이다.
그런데 아무리 차에 대한 백과사전적 풀이를 기술해도 그것이 차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어떤 것의 참된 정체를 문제삼는 상황도 사정이 이와 비슷하다.
무엇인가를 놓고 '그것은 A 인가'라고 질문했다고 하자.
가능한 답으로
그것은 A 다.
그것은 A가 아니다.
그것은 A이기도 하고 A가 아니기도 하다.
그것은 A인 것도 아니고 A가 아닌 것도 아니다.
이렇게 경우수를 나열하면 이 가운데 답이 하나 있을 것처럼 여겨진다.
이것을 4구 분별이라고 한다.
이다 아니다로만 나눠 생각하는 2 분법 체계보다는 그래도 조금 낫다.
저 옷은 흰색인가 아닌가 이렇게 물었다고 하자.
그런데 옷을 보자, 노란 바탕에 흰 점과 검은 점이 땡땡이 형태로 전체 곳곳에 그려져 있는 옷이라고 하자.
이런 경우는 무엇이라고 답해야 하는가.
흰색이거나 흰색 아니다로만 답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다시 귀로 듣는 소리는 흰색인가 아닌가라고 물었다고 하자.
그러면 무엇이라고 답해야 하는가.
그런데 더 엄밀히 보면, 위 4 구 분별도 부족해 보인다.
예를 들어 도깨비는 하얀가 하얗지 않은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무엇이라고 답해야 하는가.
또는 열수 없는 상자 속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그 상자에 든 물건은 하얀가 하얗지 않은가를 묻는다고 하자.
무엇이라고 답히애 하는가.
그런데 엄격한 진리 판단과정에서는 이런 내용들이 다 문제가 된다.
또 판단 기준도 제각각 다르다.
어떤 것에 대해 각 감각으로 어떤 감각을 얻는가의 측면에서 물을 수도 있다.
또는 분별을 통해 어떤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가를 물을 수도 있다.
또는 각 주체의 주관을 떠나 본래 있는 상태 그대로의 내용은 무엇인가를 물을 수도 있다.
또는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게 하는 뼈대에 해당하면서,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것이 있는가.
또 그것은 무엇인가의 측면에서 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잘못하면 수많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상황에서
각 장님에게 코끼리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하는 상태에 처할 수 있다.
왜 사과는 눈으로 보면 이런 모습이다.
그런데 손으로 만지면 이런 촉감인가.
서로 왜 이렇게 엉뚱한가.
눈으로 본 색상은 왜 촉감에서는 얻어지지 않는가.
이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그리고 이 가운데 무엇이 진짜 사과인가.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손가락으로 일정 부분을 가리켜 저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무언가 답은 해야 할 듯하다.
한번 지적 호기심이나 궁금증이 발생하면
이 답을 얻어내기 전까지 대단히 마음이 불편해진다.
지적 호기심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 답이고 옳은 것인지 궁금해서 죽겠다.
이런 증상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면서 고통받다가 죽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우선 중요한 것
우선 급한 것을 먼저 해결하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답을 안해주는 배경사정에 대해서 또 다른 다양한 해석이 있다.
이것도 참조해야 한다.
그런데 경우가 이와 달라서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이제 이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해결할 필요는 있다.
독화살의 재료를 아는 것이 급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런데 독화살의 재료가 무언가도 문제되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는 또 그에 대한 답을 잘 파악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경전 전반을 살피다보면
비슷한 주제에 대해 또 자세하게 내용을 제시하는 사례도 많이 대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궁금해진다.
왜 어떤 경우는 상대의 질문에 그렇다 아니다라고 분명히 결정적으로 답해주시는가. [ 일향기 ]
또 왜 이 경우는 질문에 대해 자세히 더 분별해 설해주시는가. [분별기]
또 왜 어떤 경우는 질문에 답을 안하시고 거꾸로 질문을 하시는가. [반문기]
왜 이 경우는 답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하시는가. [사치기]
또 왜 어떤 경우는 심지어 묻지도 않는데 자세히 설하시기도 하는가. [무문자설]
또 어떤 경우는 답을 하지는 않더라도 그 내용을 행위나 태도나 직접 보여주시기도 하는가.
또 어떤 경우는 표현은 하나인데 각 주체마다 제각각 달리 이해하도록 설하시는가. [부정(불특정)설]
또 어떤 경우는 아주 특수한 상대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는가. [비밀설]
또 어떤 경우는 일반 세속적 입장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설하시는가. [점]
또 어떤 경우는 본 실상에 관한 내용을 승의제적인 측면에서 깊은 진리를 직접적으로 깨치도록 설하시는가. [돈]
이런 식으로 의문을 다양하게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의 티끌 수는 얼마나 되는가에 대해
불가설이라고 답을 한다고 하자.
불가설은 수의 단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수를 100000... 이런 식으로 10 진법으로 나타낸다고 하자.
이 경우 자리수를 나타내는 0 의 숫자가 7 곱하기 2의 119 승이 되는 수의 단위를 불가설이라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티끌 수가 그런 숫자 정도로 많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불가설은 그 한자어가 '본래 설할 수 없다'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열반이나 올바른 수행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물을 때
꽃을 하나 들어 보여줄 수도 있다.
이 경우 어떤 이는 이것을 보고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무슨 의미인가 하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라니도 사정이 비슷하다.
어떤 이는 다라니를 대하고 범어 사전을 펼쳐서 그런 의미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라니는 본래 뜻이 없다. [진언]
그런데도 생사현실에서 해당 주제와 필요한 내용을 다 그 안에 포함해 지닐 수도 있다. [총지]
그러면서 문제되는 내용에 기능을 발휘하는 효용을 갖는다. [주문]
이런 각 경우가 서로 다 사정이 다르다.
설법을 듣는 이의 상태나 수준이 제각각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각각 수준에 맞춰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을 설하시기도 한다.
그래서 세속에서 갓 수행을 시작한 이들을 상대로 세속적인 입장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초 내용을 설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이들이 깊은 실상을 관하고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도록 수행자들이 다 함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함께 설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이미 보리심을 일으키고 깊은 실상을 관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자만 별도로 알아들을 내용을 설하시기도 한다.
또 때로는 이런 구별이나 대립을 떠나 일체를 관통하고 아울러 가장 깊고 원만한 진리를 설하시기도 한다.
그래서 각 경우가 조금씩 사정이 다르다.
이 사정을 이해하려면 대학교수가 유치원, 초,중,고, 대학, 대학원생을 상대로 일정한
내용을 가르치려는 경우를 놓고 생각하면 쉽다.
초중고생이 이해할 만한 정도로 가르치는 기초적인 강의 내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초중고생을 포함해 대학원생까지도 다 함께 들을만한 강의 내용도 있다.
그런데 오직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만 전문적으로 이해할만한 전문적 강의내용도 있다.
그런데 이런 초중고 대학의 구분을 떠나고, 가장 원만하다고 할 강의 내용도 있다.
그리고 아예 강의 청취 자체가 곤란한 젖먹이나 유치원생을 상대로 할 별도의 내용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위급시는 그냥 이 번호로 전화만 해라, 또는 이 응급버튼만 눌러라
또는 이 분 이름만 잘 외우고 필요할 때 불러라.
그러면 그때마다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주고 도와주겠다.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또는 이런 방식으로 아예 문제를 직접 붙들고 스스로 집중해서 연구해 직접 해결해라.
또는 그냥 믿고 제시된 내용을 받아들여 외우고 듣고 외운대로 열심히 행하기만 해라. 그러면 된다.
예를 들어 그냥 자신을 믿고 이런 생각만 늘 하고 이 말만 열심히 외어라, 그리고 이런 자세만 취하고 이런 행동만 이렇게 해라.
이렇게 방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각 사정을 놓고 각 가르침의 특성을 파악할 필요도 있다.
부처님 옆에서 시봉하면서 이런 여러 상황을 대했던 아난 존자도
이런 경우에 대해 같은 의문을 가졌던 것으로 경전에 나온다.
그래서 부처님께 질문을 했다.
왜 이번 경우는 답을 해주시지 않습니까.
전에는 다른 이가 와서 같은 질문을 했는데
그 당시는 자세하게 답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질문을 아난 존자가 했다.
그러자 부처님이 그 사정을 다시 말씀해주신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이다.
그 사정이 상대 따라 다르다.
지금 이 질문을 하는 저 상대는 상태가 다르다.
이 경우는 무슨 답을 해주어도 독이 된다.
그런 상태다.
한마디로 망집이 너무 견고하고 완강한 상태다.
그래서 언설로 어떤 유형으로 답을 해주어도
모두 독으로 만들어 취하게 된다.
그나마 부작용이 덜한 것은 침묵이다.
이런 경우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부처님은 다음 말씀을 하신다.
부처님이 수많은 경전을 설하셔서 대단히 말씀을 하신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의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간 사람들이 설법을 많이 했다고 여기는 것은 그가 갖는 망집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설법이 기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런 망집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일종의 강을 건너는 땟목과 같은 기능을 해준다.
그렇기에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설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 자체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이나 말하는 행위 자체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부처님은 일체 하나의 말씀도 하지 않았다라고 다시 설하시는 것이다.
잘못 생각하면 '하나의 말씀도 하지 않았다는' 그 말씀 자체 만은 그래도 하지 않았는가라고 또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일체는 결국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데 도움되기에 그렇게 제시한 것 뿐이다.
이런 내용이다.
그래서 이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어'떤 경우는 무상하다, 생사현실은 고통이다. 무아다, 공하다. 본래 생사현실은 열반이고 열반은 적정하다.
이런 내용만은 옳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그 사정이 위 내용을 놓고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다시 잘 확인해야 한다.
그런 법인설 마저도 그런 바탕에서 그런 사정에서 제시된 것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종합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차를 한잔 마시고 그 차맛이 어떤가에 대해 언설로 답해야 하는 상황을 놓고 이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종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종이 위에 글자로 적어야 하는 상황을 놓고 잘 살필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무상하다, 고통이다, 무아다, 열반은 적정하다. 공하다 등의 내용과 달리
생사현실은 영원하다, 즐겁다, 참된 진짜인 아가 있다, 열반은 없다, 공하지 않다 등등으로
엉뚱하게 답하는 경우도 문제다.
종이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데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낙서를 하고 가는 아이가
매 경우 옳은 답을 제시해주는 부처님이라고 하기도 곤란하다.
이 경우 그런 엉터리 그림이나 이야기도 그 종이를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차별은 본래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 정체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허공이 수행자에게 도움을 준다면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돼지나 소 말도 사정이 비슷하다.
진리를 스스로 잘 관하는 경우에는 삼라만상이 다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어줄 수 있다.
그러나 큰 도움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도란 알고 보면 바위다.
이런 가르침과 성격이 비슷하다.
이런 가르침이 수행자에게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보기도 힘들다.
부처님은 하나의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방대한 대장경은 남아 있다.
그 대장경안에 담긴 가르침이 갖는 성격을 그래서 잘 이해해야 한다.
어차피 세상의 온갖 것들은 하나같이 차별없이 공하다.
이런 점에서는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 뗏목의 기능을 하는 것이 있다.
반대로 사견과 망집을 증폭시키는 것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생사고통을 증폭해 받게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사견과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고통을 제거하는 것도 있다.
그래서 생사현실안에서는 이들을 잘 구분해야 한다.
이런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어떤 말씀을 하신 경우보다
어떤 경우에 적절한 말씀을 하실 법한데 그러나 하시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더 많은 논란을 일으키게 한다.
왜 하시지 않은가.
그것을 잘 이해해야 또 부처님 설법을 전체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다.
때로는 부처님이 그 사정을 다음처럼 말씀하시기도 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산의 분량이라고 하자.
그런데 부처님이 말씀하신 분량은 그 가운데 손에 쥔 흙 정도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그 분량에 한해 말씀하신 것은 사정이 있다.
그것이 각 생명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는데 필요하고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만 그에 필요한 말씀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종합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Georges Brassens - Supplique Pour Etre Enterre La Plage De Sete.lrc
경전을 살피면 마라구마라 내지 만동자가 질문한 내용에 대해
다른 경전에서는 자세히 분별해 설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불설전유경에서는 그에 대해 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 내용도 어렵다.
▸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의(義)가 아니며
또한 법(法)이 아니며
범행이 아니며
신통(神通)을 성취하지 못하며
평등한 도[等道]에 이르지 못하며
열반(涅槃)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다 ◂
.이것은 의(義)가 아니며
또한 법(法)이 아니며
범행이 아니며
신통(神通)을 성취하지 못하며
평등한 도[等道]에 이르지 못하며
열반(涅槃)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다 ◂
『불설전유경』
이렇게 제시된다.
그런데 부처님이 설하시지 않은 사정 부분을 자세히 살피려면 먼저 맵핑절차가 필요하다.
자신이 거리를 거닐면서 위치를 살핀다고 하자.
그런데 지도에서는 이상한 기호로 이를 표시한다.
지도에서 산을 ▲ 로 표시했다고 하자. 주유소는 # 기호로 표시되었다고 하자.
이것이 자신이 거리를 거닐면서 대하는 산이고 주요소를 나타낸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경전에서 설하신 부처님 설법도 사정이 비슷하다.
그래서 부처님의 표현과 자신이 평소 이해하는 내용이 되도록 서로 일치해야 한다.
그래서 먼저 다음을 해결해야 한다.
무엇이 법인가.
무엇이 의인가.
무엇이 범행인가.
무엇이 신통인가.
무엇이 등도인가.
무엇이 열반인가.
이것부터가 어렵다.
그런데 여하튼 마라구마라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 사정은
간단히 다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 질문과 관련된 내용은 당장 생사고통을 벗어나는데 도움되지 않는다.
이런 내용이다.
대승 경전 곳곳에는 일정한 내용은 초학자에게 설하지 말라는
주의문이 함께 곁들어진다.
그것은 사정이 있다.
상대의 수준과 정도에 맞지 않는 내용을 설하면
그 내용 자체는 옳더라도 일정한 부작용이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주의문이 함께 붙게 된다.
그런데 현실의 경전이나 인터넷 사정은 조금 다르다.
오늘날 누구나 경전을 자유롭게 선택해 열함할 수 있다.
그래서 정도에 맞지 않는 경전도 선택해서 열람할 수 있다.
또 인터넷 상에서는 일일히 수준을 파악하고 상대에 맞춰 내용을 제시하기 힘들다.
그런데 경전에는 어느 정도 일정한 예방 장치가 되어 있다.
어떤 경전은 수준이 맞지 않으면 1 페이지를 읽어도 전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부처님의 경전이 갖는 특성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예방 조치가 취해져 있다.
각 경전의 차이가 커서 큰 문제가 발생할 것 같지만, 그래서 잘 발생하지 않는다.
수준이 맞지 않으면 무상으로 제공해서 아무리 보라고 권유해도 보지 않는다.
보더라도 곧바로 덮게 된다.
졸립기만 하고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 문제는 마라구마라의 상황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주제였기에 설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경전을 살피면 이와 관련된 주제에 대한 내용이 많이 제시된다.
부처님이 이런 주제에 대해 전혀 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주제를 놓고 살펴야 할 적절한 상황이면
또 살펴야 한다.
대승경전을 놓고 살핀다고 하자.
예를 들어 화엄경을 펼쳐 살핀다고 하자.
그러면 또 그런 관련 주제도 수없이 제시된다.
그래서 경우 따라 다르다.
본인은 가능한 이 주제를 살피고 싶다.
그런데 처음 의문이 생긴다.
본래 마라구마라의 질문은 14 무기설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경전 내용을 살펴보면 10 종류의 질문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질문 형식 일부에 4구분별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같은 형식을 적용하면 16 무기나 20 무기가 되어야 할 듯하다.
그래서 10 이라고 하던 4 라고 하던 어느 경우나 조금 이상하다.
다른 경전 예를 들어 『잡아함경』이나 『중아함경』 등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제시된다.
이를 참조하멵 14 무기의 내용은 다음이다.
세간은 항상한가.
세간은 끝이 있는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명과 신은 같은가?
이런 주제다.
위 세 질문은 4 구분별 형태로 제시된다.
세간은 항상한가? - 무상한가?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한가?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는가?
세간은 끝이 있는가? 없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가? 하지도 않고 하지 않지도 않은가?
이런 형태로 된다.
그런데 명과 신만 2 구로 되어 있다.
명과 신은 같은가. 다른가.
그런데 4 구분별이 여기에도 가능할 수 있다.
명과 신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가.
그런데 이 부분만 2 구로 되어서 이상하다.
14 무기와 비슷한 내용으로 62 견도 제시된다.
이것도 잘못된 사견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경우도 대부분 4 구분별형테로 제시된다.
그래서 이론상 4* 16 =64 견이 되어야 할 듯하다.
그런데 62 견으로 정리되어 제시된다.
그래서 조금 이상하다.
그러나 큰 관계는 없다.
결국 14 무기의 주제는
시간과 공간, 수행목표가 성취된 상태의 성격이나, 자신(자아)의 성격에 대한 질문내용이다.
그래서 이 주제를 잘 살피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우선 이 논의가 적절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망집에 바탕해서 행하는 상태가 심하고 그 망집이 쉽게 제거될 수 없는 상황인 경우다.
일반적인 대부분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망집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그 내용을 이해해도
현실적으로 이를 적용해 임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
수행자가 처음 보리심을 일으켜 무생법인을 증득해 현실에 임하게 되는 기간은
상상을 초월한다.
겁을 단위로 제시되기도 한다.
수행을 해도 그렇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우 이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현실에서 일정한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는 것이 망집이고 신견이다.
현실에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리고 현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
그래서 그런 분별로 현실에서 상을 취하고 임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아무리 이해해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런 내용을 잘 이해해도 그런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을 하려면 우선 밥은 먹어야 한다.
그래야 이후 수행이 가능하다.
그런데 밥을 먹는 단계에서부터 이 적용이 곤란하다.
그래서 생사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근본적 방안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상태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제시하면 부작용만 발생한다.
현실 온갖 것이 차별없이 공하다.
부처나 바위나 허공이나 다 본 바탕은 차별이 없다.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내용들을 원칙적 내용으로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대하면 우선 내용을 잘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설령 내용을 이해해도 그 내용이 제시된 취지를 잘못 오해해 현실에 잘못 적용하게 된다.
즉, 사정이 그러니까 이후로는 아무렇게 행해도 다 무방하다고 제시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런 부작용이 현실 수행과정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래서 오히려 내용을 대하지 못한 경우보다 더 극심한 생사고통에 묶이게도 된다.
악취공견의 폐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한편, 초학자에게는 함부로 제시하지 말라고 덧붙이는 사정이 있다.
그 사정은 생사고통을 제거하는데 당장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위 내용으로 생사고통을 제거하려면
먼저 위 내용을 철저히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현실에서 잘 적용하고 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다음 문제다.
아무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체포한다.
그리고 이유도 없이 사지를 하나하나 절단해간다.
신체를 켜켜히 톱으로도 썰고 불로도 태운다.
이 상황에 이런 현실을 포함해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
이 상황에 그런 고통을 받는 자신은 실로 자신이 아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 그런 현상의 생멸이나 생사를 본래 얻을 수 없다.
이 내용을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상을 취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 묶여 있는 부분은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고문하는 상대도 역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야 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누구인가라고 뮬으면
평소 일반적으로행하듯, 묶여 있는 자신이나 자신의 팔다리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안 된다.
이것이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망집에 바탕해 일으키는 망집 현상이다.
그런데 왜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안되는가부터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아무리 이해해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고통을 겪지 않기 힘들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이론상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그렇게 상을 취하고 임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현실에서 그런 극한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조차도
평안히 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안인을 성취해야 한다.
그런 경우 어느 상황에서도 종전의 망집 상태로 물러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이해한 내용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해 스스로 인가하고 증득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금강경에서도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문제는 현실에서 이런 상황에 처해서 상을 취하지 않고
평안히 임할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일체개공과 불생불멸 불상부단 등을 이해했다고 해서
곧 무생법인을 증득했다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 만큼 어렵다.
문수보살님이나 지장보살님 등등의 대력보살도 처음 수행을 시작한 이후
이런 상태를 증득한 것이 곧바로 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처음 초학자에게 이런 내용을 곧바로 제시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신견 망집을 그대로 전제한 바탕에서
우선 당장 3 악도에 처해 고통받게 되지 않을 방안을 먼저 제시하게 된다.
그 내용을 이해하고 일단 실천하면 우선 3 악도에 처하지는 않게 된다.
그런 이후 점차 계 정 혜를 닦아서 점차 나아가야 한다.
그런 사정이 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놓인 경우에는
위와 같은 내용이 우선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령 이론적으로 내용을 잘 이해해도 마찬가지다.
그가 고문대에 묶여 고문을 받는 순간부터 전혀 효용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잘못된 이해로 인해 받지 않을 고통을 오히려 사서 받는 경우가 더 많게 된다.
일반적으로 그 내용이 위 상황에서 어떤 해결책을 주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임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실험해보면 알 수 있다.
색즉시공을 10 번 외치고 손톱을 펜치로 잡아 뽑는다.
괜찮은가.
이런 실험이다.
원칙적으로는 그 내용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런 경우가 거의 드물다.
그 차이만큼 조절을 잘 해야 한다.
한편 이런 생사고통을 예방하는 기본 수행은
그 이후로도 대단히 중요하다.
설령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불퇴전위에 이르러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런 수행자가 상대하고 제도할 중생은 그런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수행자가 중생을 제도하려면 결국 중생이 망집을 일으켜 처한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야 한다.
그 생사현실 안에서 그런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중생이 스스로 그런 사정을 깨닫고 벗어나오는 것이 무량겁에 걸쳐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려면
수행자는 역시 생사현실에서 일정한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자신부터 생사고통에 먼저 묶이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중생제도도 곤란하다.
결국 가장 기초적인 수행방안은 어느 경우나 공통된다.
그래서 이런 여러 사정으로 이 기본 수행을 먼저 잘 성취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내용은
사실은 처음 이런 예방적 수행과정을 행하는 과정에서 잘 적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망집상태에서는
생사고통에 묶이게 하는 업을 열심히 행하게끔 된다.
망집때문에 그것이 자신에게 좋음을 준다고 여기면서 행하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그것을 벗어나게 하는 수행은 대단히 힘들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당장 자신에게 심한 피해나 고통을 준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이 부분에 일체개공을 적용해야 한다.
즉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 바탕해 행하게끔 되는 업을 중단하는데
이 내용을 적용해야 한다.
또 반대로 그런 망집에 바탕해 도저히 행하기 힘든 수행을 열심히 즐겁게 잘 행하게 되는데
이 내용을 적용해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악취공견은 먼저 이 내용을 이해한 다음
이를 거꾸로 적용한다.
그래서 원래 자신 마음대로 하고 싶어한 이가
이 내용에 바탕해서 그렇게 해도 된다고 여기고 마구 나아가게 되기 쉽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다.
앞과 같은 수행을 오래 한 끝에 부처님이 되면
그런 계를 지키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실상이 공함을 잘 이해하게 되면
일반인이 도저히 지키기 힘들다고 보는 그런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하고 실천해가는 상태가 오히려 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점을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언뜻 생각하면 차별없이 일체가 공하다는 내용등은
사정이 그러니까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는 내용을 제시한 것처럼 잘못 여기기 쉽다.
그런 경우는 다음을 놓고 잘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팔을 다른 이가 붙잡고 톱으로 잘라도 무방한가.
그 이론이 그것을 제시하고 있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므로 무방하다.
그래서 다음을 묻게 된다,.
어차피 차별없이 일체가 공하다.
지금 아끼고 있는 것을 조금 필요한 이에게 베풀면 당장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피해를 받아도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니 무방한가.
지금 아끼고 있는 것을 집착하여 아끼고 베풀지 않고 임하다 보면
이로 인해 나중에 묶여서 손발이 톱으로 잘리워지게 된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피해를 받아도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니 무방한가.
둘다 무방하다고 하자.
그런데 이 가운데 하나만 택하면 된다고 하자.
차별없이 공함을 이해하면서 왜 하필이면 매번 뒤의 경우를 택하려 하는가.
이 질문부터 답해야 한다.
이 두 내용이 서로 생사현실에서 인과관련이 있다.
공하지만 생사현실은 그렇게 나타난다.
망집 번뇌 => 업 => 생사고통 [ 혹 - 업 - 고 ]
그 사정을 잘 이해하는 이가
왜 하필이면 매번 그런 업을 행하면서 그런 상황에 처하는가.
그것을 먼저 답해야 한다.
그것이 중생을 제도하는데 유익함을 주는 것도 아니다.
꼭 받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켜보면 그 이론처럼 그 상황에서 그 내용을 잘 적용해서
정말 평안하게 임하는 상태도 아니다.
그런데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고 하면서
왜 하필이면 생사고통을 받는 업을 매 경우 선택해 행하는가.
이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그것은 사실 그 수행자가 그 내용이 제시된 취지 자체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작 그 내용은 당장 행하기 힘든 수행을 잘 행하는 부분에는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마음대로 제멋대로 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냥 행하는데
그것을 적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론을 적용하려면 처음 수행과정에서부터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오히려 그런 내용을 수행과정에 적용하면 바람직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힘들다고 여기게 되는 그런 수행을 놓고
끊기 힘든 내용을 끊을 때 적용하고,
행하기 힘든 내용을 행할 때 적용해야 한다.
차별없이 공하므로 아낌없이 베풀어도 된다.
차별없이 공하므로 함부로 상대를 침해하지 않는다.
차별없이 공하므로 상대를 자신에게 고통을 가해도 평안히 참는다.
차별없이 공하므로 없는 악은 만들지 않고 있는 악은 키우지 않고 없는 선은 만들고 있는 선은 키우는 힘을
열심히 정진한다.
만일 그 이론으로 이렇게 임했다면 바람직하다.
그런 경우 생사고통이 그만큼 예방된다.
그런데 반대로 적용하면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하필 매경우 자신이나 중생에게 별 도움되지 않는
생사고통을 반복해 무량하게 받아나갈 뿐이다.
이러 경우는 지옥에서 공을 수행하는 상태가 된다.
이론상은 그렇다해도 관계없을 것 같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지옥에 들어가 공을 배우고 이해하고 실천해 닦으려면 잘 되지 않는다.
당장 당장 받는 고통 때문에 경황이 없고 도무지 정신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실수로 팔이 잘려져서 통증을 느끼고 조금 더 있으면 과다출혈로 사망할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반야심경을 펼치고 내용을 잘 이해하고 공부하자.
그래서 오온개공을 잘 관한 가운데 도일체고액 상태로 가자.
이렇게 제시하면 그것이 적용이 될 것인가가 문제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 이르는 것이 수행 목표점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금강경에 제시된 것처럼 인욕선인이 성취한 안인을 그렇게 성취해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과정에 위 내용이 그대로 원칙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정도와 수준이 적절하지 않은 경우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정도에 맞추어서 가려서 우선 행해야 할 것부터 잘 성취해야 함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도에 맞지 않는 상대가 엉뚱한 문제를 제기하면
침묵으로 임해야 하는 부처님의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정도에 맞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임할 때
부처님이 제시한 내용은 다음이다.
어차피 차별없이 공하다.
그리고 당신이 문제삼는 내용은 현실에 본래 얻을 수도 없다.
그런데 그처럼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다음 문제부터 먼저 보자.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데, 그런 상황에서 수행을 해서 생사고통을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데, 그런 상황에서 하필 수행하지 않고
망집에 바탕해 업을 계속 행하는 가운데 고통을 무량겁에 걸쳐 받아갈 것인가.
이 문제부터 먼저 살피자.
이렇게 제시한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쉽게 생갃해보자.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정려, 반야 등의 수행가운데
수행의 가장 기본은 보시라고 하자.
이런 경우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주지 않아서 다른 이에게 붙들려 두드려 맞을 것인가.
아니면 주고, 다른 이에게 붙들려 두드려 맞는 상태를 벗어날 것인가.
어차피 이 경우나 저 경우나 본 바탕은 차별없이 다 공하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어떤 상태를 택할 것인가.
이렇게 물은 것과 같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답하기 쉽다.
자신은 주지도 않고 다른이에게 붙잡혀 맞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붙잡힐 때까지 계속 그 자세를 고집해 나아가려 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 대해 더 심한 우스개 내용이 있다.
어느날 갑자기 강도가 집에 들어왔다고 가정하자.
그 경우 강도는 조금 더 심하게 묻는다.
맞고 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줄 것인가.
자신이 맞지도 않고 주지도 않으려 한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잘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우스개 이야기 같지만,
이런 내용이 모두 생사 현실에 골고루 담겨 있다.
사실은 즐겁게 임하여 수행하면서 고통에도 처하지 않는다.
어차피 차별없이 공하다면 이왕이면 그런 상태가 바람직하다.
그래야 다른 생명도 그런 바탕에서 잘 제도할 수 있다.
그래서 '어차피' 차별없이 일체가 공하다면
'하필'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해 하필 받지 않아도 되는 생사고통을 실답게 여기면서 받는 상태에 처하지 않고,
이왕이면 올바른 깨달음에 바탕해 보리심을 일으켜 서원을 즐겁게 추구하면서
복덕과 지헤자량을 구족한 가운데 다른 중생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상태로 임하는 것이 낫다.
수행이란 결국 이것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일체 개공을 제시하는 대승 경전에는
그런 내용을 잘 이해해 상을 취하지 않는 가운데
수행을 열심히 행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차별없이 공하니까 아무렇게 임해도 된다고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므로 허공을 부처님으로 관하라고 가르치는 문수보살님
입장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그러므로 그런 내용을 먼저 잘 이해하고 수행에 정진하라는 취지다.
사정이 그러므로 그런 내용을 몰라도 되고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예 그런 가르침도 처음부터 제시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제시하는 것은 그런 취지다.
경전 전반의 사정이 그렇다.
그런데 대부분 원래부터 수행 자체를 행하기 힘들어하고
제멋대로 하고자 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런 가운데 위 내용을 접하면 그 내용을 그렇게 자신이 마음대로
적용해 임하려는 경향을 갖게 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악취공견적 입장을 취하기 쉽다.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일반적인 사정이 이러므로 또 부처님이 그 사정을 헤아려
정도에 맞는 설법이 아니면 오히려 상대에게 독이 됨을 주의를 주시는 것이다.
오늘날 대승경전을 살피면 곳곳에 그런 내용이 함께 제시된다.
법화경도 그렇고 다 사정이 비슷하다.
그런데 오늘날 일반적으로 자유롭게 경전을 뽑아 살피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잘못 내용을 접하면
우선 내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대승경전은 위경인 것 같다고 의문을 갖고 대하기 쉽다.
왜 무상 고 무아 공을 제시하다가 이 경전에서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제시하는가.
또 왜 거꾸로 상락아정을 제시하는가.
또 무상 무아라고 하면서 왜 여래장은 항상 한다고 제시하는가.
이런 식으로 온갖 의문을 일으킨다.
일단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해하게 되더라도 다시 그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
어차피 다 차별없이 공하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한가.
이렇게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현실에 임하기 쉽다.
그래서 매 경우 하필 생사고통을 심하게 겪는 문제상황에 들어간다.
처음 부처님이 그런 내용을 제시한 취지는
바로 그런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본래 실답지 않다.
본 바탕에서 그런 것을 얻을 수도 없다.
그래서 그것이 어떠한가 이런가 저런가를 놓고 분별하는 것 자체가 엉터리다.
그런데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생멸이나 생사는 본래 얻을 수도 없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받아가는 생사고통은 실답지도 않고,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중생들이 매 상황에서 그것을 실답게 여기면서 극심한 고통을 무량하게 반복해 받아 나간다.
그리고 그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게 된 것이다.
만일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부처님을 필요도 없다.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실답지 않고 옳지 않아도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다면 무방하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도에 맞지 않게 잘못 취하면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키고 독이 된다.
공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임하면 상황이 더 어렵게 된다.
병을 고치려고 약을 취하는데 그 약이 부작용을 일으키면 상황이 더 어렵고 심해진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먼저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세간은 항상한가
끝이 있는가.
여래는 사후가 어떻게 되는가 있는가 없게 되는가ㅓ.
명과 신은 같은가.
사실 문제에 답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먼저 잘 살펴야 한다.
가장 간단히 답하면
그가 대하는 현실에 본래 그가 문제삼는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있다 없다.
계속 있다 계속 없다. [상]
있다가 계속 없다. [단]
없다가 있게 된다. [생] 있다가 없어진다.[ 멸 ]
이런 논의 자체가 해당이 되지 않는다.
이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그런데 망집 상태에서는 이 문제부터 혼동을 일으킨다.
망집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가 분별하는 내용이 그가 그 분별로 가리키는 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먼저 잘못 이해한다.
그래서 그가 문제삼는 바위나 자신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그가 그런 내용이라고 여기는 것을 열심히 가리키게 된다.
그가 문제삼는 우주나 세간이 무엇인가 이것부터 거꾸로 물어보자.
그러면 그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그가 문제삼는 있다는 것은 무엇이고
생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러면 이 문제가 다 함께 해결된다.
여래는 생사현실에 본래 생멸과 생사를 본래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엉뚱하게 여래가 죽은 다음 있게 되는가 없게 되는가를 묻는 것은
그래서 질문 자체가 엉터리다.
그런데 여하튼 이 문제를 살피는 과정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
그 상대가 여전히 자신이 생각하고 분별하는 내용이
그처럼 실재로 다른 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여기고 이 문제를 대하기 때문이다.
망집이 심하고 견고하고 완강한 상태다.
우선 법이 아니다. 의가 아니다.
이 내용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법은 법이고 의는 아니다.
이렇게 우선 전제해보자.
그리고 이들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이 무언가를 놓고
자신이 평소 이해하고 대하는 내용들과 이 표현사이에 맵핑[상응일치]작업을 먼저 잘 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문제를 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기초 실험이 필요하다.
자신이 눈을 감았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눈을 떴다, 그러자 무언가 보인다.
이처럼 눈을 감았다가 뜨는 순간 보게 되는 내용은 무엇인가.
한편 그런 가운데 일정 부분은 바위나 꽃이라 잘못 여기고 대한다.
또 일정부분은 영희나 철수라고 잘못 여기고 대한다.
그리고 일정부분은 자신이나 자신의 몸이라고 잘못 여기고 대한다.
그리고 그외 나머지는 외부 세계나 외부 대상으로 잘못 여긴다.
또 이들은 마음과는 별개의 것으로 외부의 물질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철수나 영희를 포함해 자신이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잘못 여긴다.
그런데 이렇게 여기는 과정에서 그가 분별하는 내용을 그가 보는 내용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래서 이렇게 분별하는 내용들은 어느 영역에서 일으키는 어떠한 성격의 내용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생갃하는 내용이 앞 부분의 내용에 과연 그 영역에서 그처럼 얻어지는가.
그래서그 영역에 있는 내용인가부터 곰곰히 검토해야 한다.
이것이 선행되어야 이를 전제로 한 질문에 대한 검토가 이어질 수 있다.
이런 기초 내용의 검토를 생략하면 이후 논의해도 엉터리 논의만 진행된다.
그리고 망집만 증폭될 뿐이다.
처음 이 문제를 이렇게 보자.
박물관에 가서 큰 조각상을 같이 본다고 하자.
영희도 보고 철수도 보고 자신도 본다.
그런데 자신은 정면에서 보고 있다.
그리고 영희는 45 도 정도 옆면에서 이를 보고 있다.
철수는 뒤에서 보고 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본 내용이 과연 영희나 철수가 본 내용과 마찬가지인가.
그래서 그 내용이 이들 모두가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할 것인가
이런 문제부터 기본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사실은 이것은 그 주체의 마음안에 얻어진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 결과물을 얻고 난 상태에서 그는 그런 내용이 곧 그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이라고 잘못 여기고 대한다.
그런 가운데 조각물에 손을 대니 촉감을 느끼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자신이 보는 그 손은 감관이 위치한 부분이고
그 손이 닿은 대상은 또 그런 조각물 모습이라고 다시 잘못 여긴다.
이 망집 현상이 기본 문제다.
그래서 일단 한 정지단면을 놓고 이 기본 문제부터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대하는 것의 본 정체가 무언가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문제를 제기하고 검토해 가야 한다.
그 상황에서 그가 세상이라고 이해한 것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켜 보자.
그래서 그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들의 본 정체부터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것이 무상한가 끝이 있는가를 문제로 살펴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 정체를 잘 이해하면 그 문제의 검토도 쉬어진다.
그래서 이런 노래도 그런 측면에서 검토해볼 수 있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을 다 보겠네...
방에서 보면 자신이 대하는 세상은 방안 뿐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런데 밖에 나가면 종로도 만나고 청량리도 만난다.
기차를 타고 정동진까지 가볼 수 있다.
그리고 바다를 보니 한업이 넓어 보인다.
그런데 그 바다도 알고보면 동해안의 일부분일 뿐이다.
남해안이나 서해안은 당연히 그 상황에서 보지 못한다.
하물며 대서양과 인도양은 더욱 더 그렇다.
이것이 문제가 아닌가.
세상이 어떻게 된 것이기데 하필 사정이 이런가.
이런 내용을 오늘 경험하고 내일도 경험한다.
그래서 세계해가 어떻게 되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생활하는 이 곳은 그런 바탕에서
어디에 위치한 것인가를 또 검토해야 한다.
쉽지 않다.
오늘날 천문학자의 도움을 받아도 상황이 마찬가지다.
주소 표기시 우리은하 태양계 지구 아시아,,
이런 식으로 위치를 표시하게 될 것이다.
지금 문제삼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문제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의 기본 내용부터 잘 검토해야 혼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천문학자가 좌표로 제시하는 별이나 해와 달의 정체를 생각해보자.
빈 통에 나무등을 놓고 불을 붙여 돌리면 돌아간다.
밤에 이것을 보면 원으로 보인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그 정체를 알고 있다.
그것은 통에 담긴 불일 뿐이다.
별을 보고 그것이 실로 별이 아님을 깨달아서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얻었다고 경전에 전한다.
오늘날 쉽게 이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눈이 좋더라도 돗수가 들어가 안경을 하나 구하자.
그리고 그 안경을 쓰고 안경테를 잡고
돌려 보자.
별이던 달이던 해던 다 돌아간다.
그 상황에서 돌아가지 않는 별과 달 해만 진짜에 가깝다.
자신이 안경 쓰고 안경태를 붙잡고 돌린다고 돌아가는 것은
진짜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제기한 질문내용을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처음에 세상을 무엇으로 여기기에 세상에 대해 여러 질문을 한 것인가
이 부분부터 잘 검토를 해야 한다.
★1★
◆vxyl1071
◈Lab value 불기2564/09/21 |
○ 2019_1004_160703_can_ct9.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John-Henry-Twachtman-the-campanile-late-afternoon [#M_▶더보기|◀접기| Artist: John-Henry-Twachtman https://en.wikipedia.org/wiki/John_Henry_Twachtman Title : the-campanile-late-afternoon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_M#] ○ 2018_0419_123946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sangbongsa_Daeungjeon11-05205 [#M_▶더보기|◀접기| https://ko.wikipedia.org/wiki/파일:Ssangbongsa_Daeungjeon11-05205.JPG Ssangbongsa 저자 steve46814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_M#] ♥뱅거 대학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京师学堂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Zaza Fournier - 16 Ans Et Demi.lrc ♥단상♥포도를 많이 먹는 아이 => 포도대장 이제 선풍기 바람을 쐬면 추위를 느끼는 상태가 되고 있다. 여전히 더위가 남아 있지만, 조금 쌀쌀하기도 하다. 과일을 선물할 때는 주의할 점이 많다. 농산물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인터넷 상에서 대강 올려진 사진과 올려진 후기 댓글 내용만 보고 주문하면 가끔 곤혹한 상태에 처할 수 있다. 자신이 기대하는 좋은 상태 과일이 배달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물건을 보낸 후 이왕 보내려면 좋은 것을 보래달라는 요구를 가끔 받기도 한다. 본인이 가까운 이들에게 그간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에서 포도를 선물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처했었다. 차라리 보내지 않았으면 그런 요구를 듣지 않았을텐데 공연히 보내가지고 비용은 비용대로 없어지고 오히려 그런 요구를 듣게 된다. 때로는 혹시 자신을 무시해서 이런 것을 보낸 것이 아닌가라고 비난까지 들을 경우도 있다. 그래서 선물을 하고 나서 오히려 전전긍긍하는 상태에 한참 처했었다. 그런데 당시 돈이 부족해 정작 본인은 그 포도를 주문해 먹지 못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난 최근에 도대체 어떤 포도가 배달되어서 그런 상태가 되었는지 궁금해서 한참 지나 다시 그곳에 포도를 주문해 받아보았다. 그런데 상태가 아주 좋다. 맛도 있다. 포장 상태도 대단히 좋다. 단순히 종이에 싸서 상자에 넣어 배달하는 수준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포도를 대단히 만족한 가운데 열심히 먹고 있다. 그런데 왜 정작 포도를 선물한 곳마다 그런 요구를 받게 되었는가를 놓고 또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농산물이 갖는 특성이기도 하다. 올해 태풍도 많이 오고 해서 농산물 피해가 많았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보았다. 논에는 벼가 쓰러져 있고 과수원에는 수많은 과일이 땅에 떨어져 있다. 이런 것을 버리지 않고 다시 복구할 수 있거나, 또는 과일이라면 잼이나, 다른 형태로 변형시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그 전체가 피해액이 된다. 포도를 먹는 가운데 다른 이들이 가끔 다른 형태로 먹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포도 하나 먹는데에도 방법이 여러가지임을 보게 된다. 그것은 포도라는 말을 하나 대할 때 떠올리는 관념에서도 사정이 같다. 포도로 먹는 과일 포도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도둑을 잡는다는 포도나 포도대장을 떠올리는 경우도 있다. 또는 포장도로를 포도라고도 표현한다. 그런데 수행자는 도를 베푼다는 뜻으로 대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의 포도를 대하면서 얻는 내용이 제각각 다르다. 수학적으로 보면 - 0 + 이런 형태로 다르다. 포도를 전체를 갈아서 즙으로 먹기도 한다. 포도가 상태가 안 좋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 때로는 알을 따서 냉동고에 얼려서 심심할 때 하나씩 꺼내 먹으면 아이스크림 먹는 것과 비슷하다. 그냥 먹는다고 해도 씨도 발라내고 껍질도 발라내며 먹는 방식이 있다. 씨는 발라내지만, 껍질은 그냥 함께 먹는 방식이 있다. 씨도 삼키고 껍질도 함께 먹는 방식이 있다. 이 세 가지를 겸해서 먹는 혼합 방식도 있다. 과일들이 재배과정에서 농약을 많이 사용하기에 씻지 않고 껍질까지 먹으면 유해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유해하면 어차피 다 유해하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포도는 재배시부터 종이에 싸서 재배하기에 조금 덜하다는 입장도 있다. 포도 표면에 하얗게 보이는 부분은 농약의 잔재가 아니고 포도의 당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포도와 수행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어떤 경우는 잣나무를 수행과 관련시키는 경우도 있다. 엉뚱하다. 서쪽에서 이곳으로 달마스님이 오신 사정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제자가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뜰앞의 잣나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런 경우와 비슷하다. 무엇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길인가? 수행이란 무엇인가? 포도다. 이런 내용이다. 위에 적은 내용에 그 내용이 다 들어 있다. 처음 상태는 별로 좋지 않다. 단어 뜻도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점차 좋아질 수도 있다. 결국 가장 가치있고 좋은 의미에서의 포도 대장이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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