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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1일 일요일

불기2565-02-21_사리불아비담론-k0969-016

『사리불아비담론』
K0969
T1548

제16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사리불아비담론』 ♣0969-016♧





제16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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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舍利弗阿毘曇論卷第十六
K0969


사리불아비담론 제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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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불아비담론 제16권


담마야사
담마굴다 등 한역


10) 도품 ②

다시 무심무사정(無尋無伺定)이란
비구가 심(尋)과 사(伺)를 멸하고
안으로 깨끗한 한 마음이 되어 심도 없고 사도 없으며
정(定)에서 생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의 행을 성취한 것이다.
따라서 이 비구에게는 안의 깨끗함ㆍ기쁨ㆍ즐거움ㆍ한 마음이 있다.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으니,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는다.
곧 안의 깨끗함과 기쁨과 즐거움과 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2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심도 있고 사도 있고 기쁨도 있는 공미정(共味定)을 얻는다.
이 비구는 심과 사는 거칠고,
무심무사정은 적정하고 뛰어나다고 관찰한다.
이처럼 비구가 심과 사는 거칠다고 관찰한 뒤에는 심과 사가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안의 깨끗함ㆍ기쁨ㆍ즐거움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안의 깨끗함ㆍ기쁨ㆍ즐거움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2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비구가 수행하고 가르침을 받고 법상을 갖추고 방편을 갖추고 마음을 오로지 기울이고 사유하고 촉달하여 심과 사와 기쁨을 지닌 공미정을 얻는다.
이처럼 비구가 수행하고,
나아가 촉달하고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배운다.
닦고 배운 뒤에 마음이 적정함을 향하고,
적정함을 존중하며 높이고 적정함으로 기운다.
적정함으로 기운 뒤에는 심과 사가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안의 깨끗함ㆍ기쁨ㆍ즐거움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안의 깨끗함ㆍ기쁨ㆍ즐거움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2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심과 사는 없고 기쁨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 비구는,
기쁨이란 거칠고 기쁨의 마음에는 오히려 슬픔이 있으니 기쁨 없는 즐거움이 적정하고 뛰어나다고 관찰한다.
이처럼 비구가 기쁨이란 거칠다고 관찰한 뒤에 기쁨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안의 깨끗함ㆍ기쁨 없는 즐거움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런데 초선에 들어서 얻은 사(捨)의 마음은 제3선의 정에 들어서 얻은 사의 마음에 미치지 못한다.
이 정에 들면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안의 깨끗함ㆍ기쁨 없는 즐거움ㆍ한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선들의 사이에 있는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이것은 제2선과 제3선의 사이에서 제2선으로부터 제3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비구가 심과 사는 없고 기쁨 없는 즐거움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 비구는,
기쁨 없는 즐거움이란 거칠고 기쁨 없는 즐거움의 마음은 오히려 조작된 것이니,
불고불락의 사(捨)가 적정하고 뛰어나다고 관찰한다.
이처럼 비구가 기쁨 없는 즐거움도 거칠다고 관찰한 뒤에는 기쁨 없는 즐거움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안의 깨끗함ㆍ불고불락의 사(捨)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이러한 정에 들면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는다.
곧 안의 깨끗함ㆍ불고불락의 사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선도 아니고 선들의 사이도 아닌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비구가 수행하고 가르침을 받고 법상을 갖추고 방편을 갖추고 마음을 오로지 기울이고 사유하고 촉달하여 심과 사는 없지만 기쁨 없는 즐거움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처럼 비구가 수행하고,
나아가 촉달하고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배운다.
많이 닦고 배우면 마음이 적정함을 향한다.
마음이 적정함을 향한 뒤에 적정함을 존중하며 높인다.
적정함을 존중하고 높인 뒤에 적정함으로 기운다.
적정함으로 기운 뒤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안의 깨끗함ㆍ불고불락의 사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이러한 정에 들면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안의 깨끗함ㆍ불고불락의 사ㆍ한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선도 아니고 선들의 사이도 아닌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기쁨을 떠나 사(捨)를 행하고 염과 정지(正智)를 갖추어 몸으로 즐거움을 느끼며,
여러 성인이 ‘사와 염을 갖추어 즐겁게 행한다’라고 요해한 것과 같은 제3선의 행을 성취한다.
따라서 이 비구에게는 공미정(共味定)의 사(捨)와 염과 정지와 기쁨 없는 즐거움과 한 마음이 있다.
그리고 이 정에 들면 다섯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공미(共味)1)의 사ㆍ염ㆍ정지ㆍ기쁨 없는 즐거움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3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비구가 수행하고 가르침을 받고 법상을 갖추고 방편을 갖추고 마음을 오로지 기울이고 사유하고 촉달하여 심과 사는 없지만 기쁨을 갖춘 즐거움이 있는 공미정을 얻는다.
이처럼 비구가 수행하고,
나아가 촉달하고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배우고,
또한 많이 닦고 배운 뒤에는 마음이 적정함을 향하고 적정함을 존중하며 높이고 적정함으로 기운다.
그리고 적정함으로 기운 뒤에는 기쁨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공미의 사ㆍ염ㆍ정지ㆍ기쁨 없는 즐거움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에 들면 다섯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는다.
곧 공미의 사ㆍ염ㆍ정지ㆍ기쁨 없는 즐거움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3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심도 없고 사도 없지만 기쁨 없는 즐거움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 비구는,
기쁨 없는 즐거움은 거칠고 기쁨 없는 즐거움의 마음은 오히려 조작된 것이니,
불고불락의 사(捨)가 적정하고 뛰어나다고 관찰한다.
이처럼 비구가 기쁨 없는 즐거움을 거칠다고 관찰한 뒤에는 기쁨 없는 즐거움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뒤에 사(捨)와 염과 정지와 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을 멸하여도 제4선에 든 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불고불락의 사ㆍ염ㆍ정지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선들 사이에 있는 무심무사정이라고 하니,
제3선에서 제4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비구가 수행하고 가르침을 받고 법상을 갖추고 방편을 갖추고 마음을 오로지 기울이고 사유하고 촉달하여 심(尋)과 사(伺)는 없지만 기쁨 없는 즐거움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 비구는 수행하고,
나아가 촉달하고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배우고,
많이 닦고 배운 뒤에 마음이 적정함을 향하고 적정함을 존중하며 높이고 적정함으로 기운다.
적정함으로 기운 뒤에는 기쁨 없는 즐거움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뒤에 불고불락의 사ㆍ염ㆍ정지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을 멸하여도 제4선에 든 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불고불락의 사ㆍ염ㆍ정지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선들의 사이에 있는 무심무사정이라고 하니,
제3선과 제4선의 사이에서 제3선으로부터 제4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비구가 괴로움을 끊고 즐거움을 끊고
이미 멸한 우(憂)와 희(喜)와 불고불락의 사와 염을 갖추어 청정한 제4선의 행을 성취한다.
이러한 비구에게는 기쁨을 갖춘 불고불락의 사와 염과 청정함과 한 마음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불고불락의 사와 염과 청정함과 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4선의 무심수사정이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심도 없고 사도 없지만 기쁨 없는 즐거움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 비구는,
기쁨 없는 즐거움은 거칠고 기쁨 없는 즐거움의 마음은 오히려 조작된 것이니,
불고불락의 사가 적정하고 뛰어나다고 관찰한다.
이처럼 비구가 기쁨 없는 즐거움을 거칠다고 관찰한 뒤에는 기쁨 없는 즐거움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다.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된 까닭에 불고불락의 사(捨)ㆍ염ㆍ청정함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이러한 정에 든 사람은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불고불락의 사ㆍ염ㆍ청정함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4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비구가 수행하고 가르침을 받고 법상을 갖추고 방편을 갖추고
마음을 오로지 기울이고 사유하고 촉달하여
심과 사는 없지만 기쁨 없는 즐거움을 갖춘 공미정을 얻는다.
이처럼 비구가 수행하고,
나아가 촉달하고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배운다.
많이 닦고 배운 뒤에 마음은 적정함을 향하고 적정함을 존중하여 높이고 적정함으로 기운다.
그리고 적정함으로 기운 뒤에는 기쁨 없는 즐거움이 고요해지고 바로 고요해지고 멸하고 없어지고 제거되어 불고불락의 사ㆍ염ㆍ청정함ㆍ한 마음이 있게 된다.
이러한 정에 들면 네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불고불락의 사ㆍ염ㆍ청정함ㆍ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제4선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모든 색상(色想)을 떠나고 성냄의 상을 멸하고 그 외 여러 가지 상도 사유하지 않아,
허공은 끝이 없다고 하는 공무변처(空無邊處)의 행을 성취한다.
이러한 비구에게는 공무변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정에 든 자는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공무변처의 상(想)과 불고불락의 사(捨)와 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공무변처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모든 공무변처의 상을 떠나 식별은 끝이 없다고 하는 식무변처의 행을 성취한다.
이러한 비구에게는 식무변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정에 들면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식무변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식무변처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모든 식무변처의 상을 떠나 무소유처의 행을 성취한다.
이러한 비구에게는 무소유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정에 들면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무소유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무소유처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다시 비구가 모든 무소유처를 떠나 비상비비상처의 행을 성취한다.
이러한 비구에게는 비상비비상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정에 들면 세 요소를 얻고 바로 얻고 연에 의해 얻으니,
곧 비상비비상처의 상과 불고불락의 사와 한 마음이다.
이를 이름하여 비상비비상처의 무심무사정이라고 한다.






무엇을 공정(空定)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모든 법 또는 일부의 법에 대해
공(空)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니,
그 공(空)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이름하여 공정이라고 한다.





다시 공정에는 여섯 가지의 공이 있다.
내공(內空)ㆍ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공공(空空)ㆍ대공(大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이다.
무엇을 내공(內空)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모든 안[內]의 법 또는 일부의 안의 법에 대해 공(空)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는 것이니,
그 공(空)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고 항상 공이고 변함없이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내공이라고 한다.


무엇을 외공(外空)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모든 밖의 법 또는 일부의 밖의 법에 대해 공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는 것이니,
그 공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외공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내외공(內外空)인가.
비구가 모든 안과 밖의 법 또는 일부의 안과 밖의 법에 대해 공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는 것이니,
그 공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내외공이라고 한다.

무엇을 공공(空空)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공정(空定)의 행을 성취한다.
이 비구가 공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는 것이니,
그 공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고 항상 공이고 변함없이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공공이라고 한다.

무엇을 대공(大空)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모든 법에 대해 공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는 것이니,
그 공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대공이라고 한다.

무엇을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고 일컫는가.
제일이란 말하자면 열반이다.
비구가 열반에 대해 공을 사유하고 공을 알고 공을 요해하고 공을 느끼는 것이니,
그 공(空)은 어떤 의미인가.
자아가 공이므로 나의 것도 역시 공이고 항상 공이고 변함없이 공이다.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관찰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제일의공이라고 한다.

무엇을 무상정(無相定)이라고 일컫는가.
공정을 제외한 나머지 정 중에서 성스러운 열반을 경계로 삼는 것이니,
이를 무상정이라고 한다.

다시 무상정이란,
행(行)은 상(相)이고 열반은 무상(無相)이다.
행에는 세 가지 상이 있다.
생기[生]와 머묾[住]과 소멸[滅]이다.
열반은 세 가지 상이 없으니,
불생(不生)ㆍ부주(不住)ㆍ불멸이다.
이처럼 행은 상이 있고,
열반은 상이 없다.
열반은 곧 적멸함이고 집이고 구원이고 등불이고 의지처이고 끝나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고 귀착점이고 그을림과 뜨거움이 없는 것이고 근심과 고뇌가 없는 것이고,
근심ㆍ슬픔ㆍ괴로움ㆍ고뇌 및 나머지 여러 행이 없는 것이다.
이 열반을 사유하여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니,
이를 이름하여 무상정이라고 한다.

무엇을 무원정(無願定)이라고 일컫는가.
공정을 제외한 나머지 정으로서 성스러우며 유위인 것을 경계로 삼는 것이니,
이를 무원정이라고 한다.
다시 무원정이란,
원(願)에 두 종류가 있으니 갈애의 집착과 견해의 집착이다.
비구가 행(行)이란 괴로움ㆍ근심ㆍ종기ㆍ화살ㆍ맛의 집착ㆍ의지의 연ㆍ부서지는 법ㆍ정해지지 않은 것ㆍ충족되지 않는 것ㆍ부서질 것ㆍ뭇 괴로움이라고 사유하여 공(空)이며 무아임은 사유하지 않고도 정을 얻고 마음이 머물고 바로 머무르니,
비구는 갈애를 단절하고 견해를 단절한다.
이 정은 능히 갈애와 견해를 단절하니,
이를 이름하여 무원정이라고 한다.

무엇을 사념처(四念處)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안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며 수행하되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를 갖추어 욕망과 세상에 대한 근심을 조복한다.
또한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며 수행하되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를 갖추어 욕망과 세상에 대한 근심을 조복한다.
또한 안과 밖의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며 수행하되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를 갖추어 욕망과 세상에 대한 근심을 조복한다.
느낌[受]과 마음과 법에 대해서도 그와 같다.
이를 이름하여 사념처라고 한다.


무엇을 사정단(四正斷)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서 아직 생하지 않은 것을 생하지 않게 하려고 의욕을 일으키고 스스로 노력하고 열심히 정진하고 마음을 섭수하여 바로 단절한다.
악한 법으로서 이미 생긴 것은 단절하려고 의욕을 일으키고 스스로 노력하고 열심히 정ㅎ진하고 마음을 섭수하여 바로 단절한다.
선한 법으로서 아직 생하지 않은 것은 생하게 하려고 의욕을 일으키고 스스로 노력하고 열심히 정진하고 마음을 섭수하여 바로 단절한다.
선한 법으로서 이미 생긴 것은 머물게 하고 갖추어지게 하고 닦고 잊지 않게 하고 확대하고 증장(增長)시키려고 의욕을 일으키고 스스로 노력하고 열심히 정진하고 마음을 섭수하여 바로 단절한다.
이를 이름하여 사정단이라고 한다.


무엇을 사신족(四神足)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의욕의 정에 의해 단절의 수행을 성취하는 신족을 닦는다.
그리고 정진의 정ㆍ마음의 정ㆍ염(念)의 정과 혜(慧)의 정에 의해 단절의 수행을 성취하는 신족을 닦는다.
이를 이름하여 사신족이라고 한다.
사선(死禪)은 선품(善品)2)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무엇을 사무량(四無量)이라고 일컫는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이다.


무엇을 자(慈)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낀다.


그런데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힌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에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그 중생이 이미 나를 괴롭혔는데 중생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나는 응당 법으로써 앙갚음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힌 것은 아니나 지금 괴롭히고 있는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그 중생이 과거에 나를 괴롭힌 것은 아니나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 중생이 지금 나를 괴롭힌다고 해도
이것은 나의 숙업(宿業)의 과보로서 내가 능히 차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힌다고 하여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스스로의 손실이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와 같이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지만 미래에 괴롭히려고 의욕하는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그 중생이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지만 미래에 나를 괴롭히려고 한다.
그 중생이 미래에 괴롭히려고 한다 해도,
혹은 실행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인연이 모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히려고 한다 해도 내가 만일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스스로의 손실이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고 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도 않고,
또한 과거에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던 자를 괴롭히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괴롭히는 경우3),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그 중생은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도 않지만,
과거에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자를 괴롭혔다.
그런데 그 중생이 과거에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자를 괴롭혔다고 해도 나는 응당 그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그 중생을 괴롭히면 나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자기를 괴롭혀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스스로의 손실이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과거에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던 사람을 괴롭히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그 중생은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도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도 않고 과거에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사람을 괴롭히지도 않았지만,
지금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
그런데 그 중생이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힌다고 해도 이것은 숙업의 과보로써 내가 능히 남의 숙업을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만일 내가 중생을 괴롭히면 나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도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있지만 미래에 괴롭히려 하는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그 중생이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지만,
미래에 괴롭히려 한다.
그 중생이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미래에 괴롭히려고 한다 해도,
혹은 실행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인연이 모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만일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스스로의 손실이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고 있지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도 않고,
또한 과거에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던 자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지만,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지 않는 자를 과거에 이익되게 한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그 중생은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고 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중생이 과거에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자를 이익되게 했다.
그 중생이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자를 과거에 이익되게 했다고 해도 나는 응당 그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그 중생을 괴롭히면 나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혀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스스로의 손실이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과거에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던 사람을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과거에 자신이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던 자를 이익되게 하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이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이익되게 하는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곧 ‘그 중생은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과거에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사람을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과거에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던 자를 이익되게 하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은 사람을 이익되게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중생이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이익되게 한다고 해도 이것은 숙업의 과보로서 내가 능히 남의 숙업의 과보를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만일 내가 중생을 괴롭히면 나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 않았고 자신이 사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자를 과거에 이익되게 하지 않았고 지금도 이익되게 하지 않지만 미래에 이익되게 하려 한다.
이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이 중생은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으며,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으며,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자를 과거에 이익되게 하지 않았고 지금도 이익되게 하지 않지만,
미래에 이익되게 하려 한다.
이처럼 내가 사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자를 미래에 이익되게 하려고 하는데,
이 중생이 내가 사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자를 미래에 이익되게 하려고 하여도,
혹은 실천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인연이 모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멸하여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으며,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고 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으며,
자신이 사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자를 과거에 이익되게 하지 않았고 지금도 이익되게 하지 않고 미래에 이익되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구와 인연이 없어 문득 제멋대로 그 중생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이 비구는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
그러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곧 ‘이 중생은 과거에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자를 과거에 괴롭히지 않았고 지금도 괴롭히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히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자를 과거에도 이익되게 하지 않고 지금도 이익되게 하지 않고 미래에도 이익되게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와 인연이 없어 문득 제멋대로 그 중생에게 화를 내었다.
나는 그 중생에 대해 마음에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힌다고 하여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스스로의 손실이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와 같이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그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이와 같이 비구가 동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하고,
남쪽ㆍ서쪽ㆍ북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고 즐거움을 알고 즐거움을 지향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고 의욕한다.
그리고 비구는 친근한 마음으로 두루 한 방향을 지향하며 다니고 제2ㆍ제3ㆍ제4,
그리고 각 방향의 사이와 위아래 등 모든 곳에 대해 친근한 마음을 확대하고 존중하고 높이고 일치시키고 한량없게 하고 원망함이 없게 하고 분노함이 없게 하며,
두루 여러 세간을 지향하며 다닌다.
이를 이름하여 자(慈)라고 한다.




무엇을 비(悲)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지 않고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즐거움을 지향하지 않고 즐거움을 느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구가,
중생이 괴로워하고 괴로움을 받는 것을 본다.
또한 부모ㆍ형제ㆍ자매ㆍ처자ㆍ친족ㆍ권속ㆍ친구ㆍ대신,
또는 지옥 중생ㆍ아귀,
또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 또는 가난하고 천한 귀신의 괴로움을 본다.
그리하여 그 중생을 연민하고 슬픔의 마음을 일으킨다.
그런데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힌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그 중생이 과거에 나를 괴롭혔는데 중생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나는 응당 그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그 중생을 연민하고 슬픔의 마음을 일으킨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나아가 인연이 없어 제멋대로 분노하니,
이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비구가 동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중생에 대해 연민하여 슬픔의 마음을 일으키고,
남쪽ㆍ서쪽ㆍ북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중생에 대해 연민하여 슬픔의 마음을 일으킨다.
그리고 비구는 슬픔의 마음으로 두루 한 방향을 지향하며 다니고 제2ㆍ제3ㆍ제4,
그리고 각 방향의 사이와 위아래 등 모든 곳에 대해 슬픔의 마음을 확대하고 존중하고 높이고 일치시키고 한량없게 하고 원망함이 없게 하고 분노함이 없게 하며,
두루 여러 세간을 지향하며 다닌다.
이를 이름하여 비(悲)라고 한다.
무엇을 희(喜)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지 않고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즐거움을 지향하지 않고 즐거움을 느끼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비구가 중생에 대해 연민하지도 않고 슬픔의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그런데 비구가,
중생이 즐거워하고 즐거움을 받는 것을 본다.
또한 부모ㆍ형제ㆍ자매ㆍ처자ㆍ친족ㆍ권속ㆍ친구ㆍ대신,
또는 여러 천신과 여러 천신의 아들 또는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의 즐거움을 본다.
그리하여 중생에게서 희열을 얻으니,
욕염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힌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그 중생이 과거에 나를 괴롭혔는데 중생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나는 응당 그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중생에게서 희열을 얻으니,
욕염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나아가 인연이 없어 제멋대로 분노하니,
이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비구가 동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중생에 대해 희열을 얻으니 욕염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며,
남쪽ㆍ서쪽ㆍ북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중생에 대해 희열하는 마음을 얻으니 욕염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비구는 기쁨의 마음으로 두루 한 방향을 지향하며 다니고 제2ㆍ제3ㆍ제4,
그리고 각 방향의 사이와 위아래 등 모든 곳에 대해 기쁨의 마음을 확대하고 존중하고 높이고 일치시키고 한량없게 하고 원망함이 없게 하고 분노함이 없게 하며 두루 여러 세간을 지향하며 다닌다.
이를 이름하여 희(喜)라고 한다.
무엇을 사(捨)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지 않고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즐거움을 지향하지 않고 즐거움을 느끼려 하지 않는다.
아울러 연민하는 마음을 얻지 않고 슬픔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희열을 얻지 않고 욕염의 생각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 비구는 단지 중생을 연으로 한 까닭에 사(捨)를 얻는다.
사람이 두터운 숲 속에 들어가도,
이것은 발다(鉢多)나무이고 저것은 니거타(尼居陀)나무이고,
또는 비리차(毘梨叉)나무ㆍ우두피라(優頭披羅)나무ㆍ가지(家枝)나무ㆍ가비야(加毘耶)나무,
또는 비야라(毘耶羅)나무ㆍ가니가라(家尼柯羅)나무ㆍ미타(彌陀)나무ㆍ이타가(伊陀伽)나무라고 분별하지 않고,
단지 두터운 숲만을 보니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도 중생의 즐거움을 사유하지 않고 즐거움을 지향하지 않고 즐거움을 느끼려고 하지 않는다.
아울러 연민의 마음을 얻지 않고 슬픔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희열을 얻지 않고 욕염의 생각에 의지하지 않는다.
단지 중생을 연으로 한 까닭에 사(捨)를 얻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힌 경우,
이 비구가 그 중생에 대해 마음으로 장애가 있고 청정하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고 지향하지 못한다면,
이 비구는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그 중생이 과거에 나를 괴롭혔는데 중생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나는 응당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그 중생을 괴롭히면 스스로에게 손실이 된다.
남이 나를 괴롭혔다 해도 내가 되돌려 앙갚음을 하면 나의 손실은 더욱 심해진다.’ 그 비구는 이렇게 사유한 뒤에 그 중생에 대해 참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단지 중생을 연으로 한 까닭에 사를 얻을 뿐이다.
또한 어떤 중생이 과거에 비구를 괴롭히지 않았고,
나아가 인연이 없어서 제멋대로 분노하니,
이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비구가 동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단지 중생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사(捨)를 얻고,
남쪽ㆍ서쪽ㆍ북쪽의 중생에 대해 괴롭히려는 마음을 멸하고 단지 중생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사를 얻는다.
그리고 비구는 평정함의 마음으로 두루 한 방향을 지향하며 다니고 제2ㆍ제3ㆍ제4,
그리고 각 방향의 사이와 위아래 등 모든 곳에 대해서도 단지 평정함의 마음을 확대하고 존중하고 높이고 일치시키고 한량없게 하고 원망함이 없게 하고 분노함이 없게 하며 두루 여러 세간을 지향하며 다닌다.
이를 이름하여 사(捨)라고 한다.
이들을 이름하여 사무량이라고 한다.
무엇을 사무색정(四無色定)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모든 색상을 떠나고 성냄의 상을 멸하고 그 외 여러 상(想)을 사유하지 않아 허공은 끝이 없다고 하는 공무변처의 행을 성취한다.
또한 모든 공무변처를 떠나 식무변처의 행을 성취한다.
또한 모든 식무변처를 떠나 무소유처의 행을 성취한다.
또한 모든 무소유처를 떠나 비상비비상처의 행을 성취한다.
이를 이름하여 사무색정이라고 한다.
무엇을 사향도(四向道)이라고 일컫는가.
괴로운 길을 향하며 어렵게 수행하는 것,
괴로운 길을 향하며 빠르게 수행하는 것,
즐거운 길을 향하며 어렵게 수행하는 것,
즐거운 길을 향하며 빠르게 수행하는 것 등이다.
무엇을 괴로운 길을 향하며 어렵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성품에 탐욕이 많고 성품에 성냄이 많고 성품에 어리석음이 많다.
이 비구는 도를 행하매 욕염을 막아야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고,
어리석음을 막아야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낀다.


이 비구는 성스러운 오근(五根)이 무딘 수행자이니,
다섯이란 무엇인가.
곧 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이다.
이 비구는 오근이 무딘 수행자이므로 더디게 무간정(無間定)을 증득하고 여러 누(漏)를 다하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괴로운 길을 향하며 어렵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괴로운 길을 향하며 빠르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성품에 탐욕염(欲染)이 많고 성품에 성냄이 많고 성품에 어리석음이 많다.
이 비구는 도(道)를 행하매 욕염(欲染)을 막아야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고,
성냄을 막아야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고,
어리석음을 막아야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낀다.


이 비구는 성스러운 수행인 오근(五根)이 예리한 수행자이니,
다섯이란 무엇인가.
곧 신근(信根)ㆍ정진근ㆍ염근ㆍ정근ㆍ혜근이다.
이 비구는 오근이 예리한 수행자이므로 빠르게 무간정(無間定)을 증득하고 여러 누(漏)를 다하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괴로운 길을 향하며 빠르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즐거운 길을 향하며 어렵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성품에 욕염(欲染)이 적고 성품에 성냄이 적고 성품에 어리석음이 적다.
이 비구는 도를 행하매 욕염이 적은 것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성냄이 적은 것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어리석음이 적은 것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 비구는 성스러운 오근(五根)이 무딘 수행자이니,
다섯이란 무엇인가,
곧 신근(信根)ㆍ정진근ㆍ염근ㆍ정근ㆍ혜근이다.
이 비구는 오근에 무딘 수행자이므로 더디게 무간정(無間定)을 증득하고 여러 누(漏)를 다하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즐거운 길을 향하며 어렵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즐거운 길을 향하며 빠르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성품에 탐욕이 적고 성품에 성냄이 적고 성품에 어리석음이 적다.
이 비구는 도(道)를 행하매 욕염이 적은 것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성냄이 적은 것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어리석음이 적은 것을 연으로 하는 까닭에 자주 근심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 비구는 성스러운 오근(五根)이 가장 예리한 수행자이니,
다섯이란 무엇인가.
곧 신근(信根)ㆍ정진근ㆍ염근ㆍ정근ㆍ혜근이다.
이 비구는 오근이 예리한 수행자이므로 빠르게 무간정(無間定)을 증득하고 여러 누(漏)를 다하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즐거운 길을 향하며 빠르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사수정(四修定)이라고 일컫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사수정과 같다.
넷이란 무엇인가.
곧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현세에 즐거운 행을 얻게 하는 수정(修定),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지견(知見)을 얻게 하는 수정,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지혜의 분별을 얻게 하는 수정,
그리고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누진(漏盡)을 얻게 하는 수정 등이다.
무엇을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현세에 즐거운 행을 얻게 하는 수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애욕과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을 떠나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의 행을 성취한다.
또한 심(尋)과 사(伺)를 멸하고
안으로 깨끗한 한 마음으로 심도 없고 사도 없으며 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의 행을 성취한다.
또한 기쁨을 떠나고 사(捨)를 행하고 염과 정지를 갖추고 몸을 즐거움을 느끼며,
여러 성인이 ‘사와 염을 갖추어 즐겁게 행한다’라고 요해하는 바와 같은 제3선의 행을 성취한다.
또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끊고 이미 우(憂)와 희(喜)가 멸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사와 염을 갖추어 청정한 제4선의 행을 성취한다.
이와 같은 수정(修定)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현세에 즐거운 행을 얻는다.
다시 무엇을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지견을 얻게 하는 수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밝음의 생각을 잘 취하고 낮의 생각을 잘 간직하여,
이 비구는 낮에 밝음의 생각을 닦듯이 밤에도 그러하며 밤에 밝음의 생각을 닦듯이 낮에도 그러하면,
마음이 개오(開悟)되어 마음에 가리고 덮는 것이 없어지며,
마음이 닦여져 밝음만이 있다.
이러한 정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지견을 얻는다.
다시 무엇을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지혜의 분별을 얻게 하는 수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수(受)의 생기를 알고 수의 머묾을 알고 수의 소멸을 알고,
상(想)의 생기를 알고 상의 머묾을 알고 상의 소멸을 알고,
사유의 생기를 알고 사유의 머묾을 알고 사유의 소멸을 아는 것이다.
이 정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지혜의 분별을 얻는다.
다시 무엇을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누진을 얻게 하는 수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오취온의 생기와 소멸을 아는 것이니,
색을 알고 색의 집기를 알고 색의 소멸을 알고,
수ㆍ상ㆍ행ㆍ식을 알고,
식의 집기를 알고 식의 소멸을 아는 것이다.
이 정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누진을 얻는다.
파라연경(波羅延經)에서 “모든 애욕의 생각을 단절하고 근심과 고뇌를 소멸하고 수면과 차단함과 흥분과 후회를 버리고 사(捨)와 염(念)의 청정함으로 사유를 소멸하고 사유를 알고 해탈하여 무명을 단절한다”라고 질문한 바와 같다.
그리고 이들을 이름하여 사수정이라고 한다.



무엇을 사단(四斷)이라고 일컫는가.
계단(戒斷)ㆍ미호단(微護斷)ㆍ수단(修斷)ㆍ지연단(知緣斷) 등이다.

무엇을 계단(戒斷)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눈으로 색을 보되 모습을 취하지 않고 분별하되 안근을 발기(發起)시키지 않고,
항상 스스로 섭수하여 행하고 욕망과 세간의 근심과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에 의지하는 것을 금한다.
이처럼 안근을 근신하고 보호하여 안근의 계율을 얻는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으로 법을 알되 모습을 취하지 않고 분별하되 의근을 일으키지 않고,
항상 스스로 섭수하여 행하고 욕망과 세간의 근심과 악하고 선하지 않은 법에 의지하는 것을 금한다.
이처럼 의근을 근신하고 보호하여 의근의 계율을 얻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계단(戒斷)이라고 한다.

무엇을 미호단(微護斷)이라고 일컫는가. ★★
何謂微護斷
如比丘取善相生微護若骨節若腫胞若胮脹若靑若赤黑若爛壞離散如是觀善相生微護是名微護斷


무엇을 수단(修斷)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염각지(念覺支)를 닦아 탐욕을 떠남에 의지하고 더럽지 않음에 의지하고 갈애의 소멸에 의지하며,
택법각지ㆍ정진각지ㆍ희각지ㆍ경안각지ㆍ정각지 및 사각지(捨覺支)를 닦아 탐욕을 떠남에 의지하고
더럽지 않음에 의지하고 갈애의 소멸에 의지하는 것이다.


★★
이를 이름하여 수단(修斷)이라고 한다.

무엇을 지연단(知緣斷)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나무 밑이나 노지에서 사유하기를,
‘선하지 않고 악한 신행(身行)의 과보는 현세가 아니면 내세에라고 있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비구는 악한 신행은 참고 단절하며 선한 신행을 닦는다.
그리고 선하지 않고 악한 구행(口行)의 과보는 현세가 아니면 내세에라도 있다고 사유하여,
이 비구는 악한 구행을 참고 단절하며 선한 구행을 닦는다.
그리고 선하지 않고 악한 의행(意行)의 과보는 현세가 아니면 내세에라도 있다고 사유하여,
이 비구는 악한 의행을 참고 단절하며 선한 의행을 닦는다.
이를 이름하여 지연단(知緣斷)이라고 한다.

계단ㆍ미호단ㆍ지연단ㆍ수단은
그 자성(自性)을 여래라고 말한다.
비구가 이 법을 수행하면
모든 괴로움의 끝을 다한다.
이를 이름하여 사단(四斷)의 앎이라고 한다.




무엇을 오근(五根)이라고 일컫는가.
신근ㆍ정진근ㆍ염근ㆍ정근ㆍ혜근이니,
이를 이름하여 오근이라고 한다.
오력(五力)도 역시 그와 같다.





무엇을 오해탈처(五解脫處)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앎으로 적정행을 실천하면,
마음이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은 해탈을 얻고 여러 누(漏)로서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은 누의 다함을 얻고 아직 무상의 안온함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안온함을 얻는 것이다.
무엇을 다섯이라고 일컫는가.
세존께서 비구를 위해 법을 말씀하시고,
또는 스승이 말하고 또는 지혜롭고 청정한 범행자(梵行者)가 말한 것이니 여래의 말씀 또는 스승 및 지혜롭고 청정한 범행자의 말에 수순하여 듣고 그런 뒤에 법을 느끼고 뜻을 느낀다.
법을 느끼고 뜻을 느낀 뒤에 희열이 생한다.
희열한 뒤에 기쁨이 생한다.
기뻐한 뒤에 몸의 편안함을 얻는다.
몸이 편안해진 뒤에 즐거움을 느낀다.
즐거움을 느낀 뒤에 마음이 정에 든다.
마음이 정에 든 뒤에 여실히 알고 본다.
이와 같이 비구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로 적정행을 실천하면,
마음으로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은 해탈을 얻고 여러 누로서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은 다함을 얻고 아직 무상의 안온함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안온함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첫 번째 해탈처라고 한다.
다시 비구에게 세존도 없고 스승도 없고 지혜롭고 청정한 범행자가 말해 주는 때도 없어서 이전에 들었던 법 그대로 널리 새기고 외우고 의미에 통달한다.
비구가 이전에 들었던 법 그대로 널리 새기고 외우고 의미에 통달하여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다.
이와 같이 비구가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 뒤에 희열이 생한다.
희열한 뒤에 기쁨이 생한다.
기뻐한 뒤에 몸의 편안함을 얻는다.
몸이 편안해진 뒤에 즐거움을 느낀다.
즐거움을 느낀 뒤에 마음이 정에 든다.
마음이 정에 든 뒤에 여실히 알고 본다.
비구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로 적정행을 실천하면,
마음으로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은 해탈을 얻고 여러 누로서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은 다함을 얻고 아직 무상의 안온함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안온함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제2의 해탈처라고 한다.
다시 비구에게 세존도 없고 스승도 없고 지혜롭고 청정한 범행자가 말해 주는 때도 없다.
그리고 이전에 들었던 법을 널리 새기고 외우고 의미를 통달하는 그러한 때도 아니다.
이 비구는 이전에 들었던 법의 의미를 통달하여 널리 남을 위해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이 비구가 이전에 들었던 법에 따라 의미를 통달하여 널리 남을 위해 말하면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다.
이와 같이 비구가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 뒤에 희열이 생한다.
희열한 뒤에 기쁨이 생한다.
기뻐한 뒤에 몸의 편안함을 얻는다.
몸이 편안해진 뒤에 즐거움을 느낀다.
즐거움을 느낀 뒤에 마음이 정에 든다.
마음이 정에 든 뒤에 여실히 알고 본다.
비구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로 적정행을 실천하면,
마음으로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은 해탈을 얻고 여러 누(漏)로서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은 다함을 얻고 아직 무상의 안온함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안온함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제3의 해탈처라고 한다.
다시 비구에게 세존도 없고 스승도 없고 지혜롭고 청정한 범행자가 말해 주는 때도 없다.
그리고 이전에 들었던 법을 널리 새기고 외우고 의미를 통달하는 그러한 때도 아니다.
그리도 이전에 들었던 법의 의미에 통달하여 널리 남을 위해 분별하는 그러한 때도 아니다.
이 비구는 이전에 들었던 법의 의미에 통달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해야 한다.
이와 같이 이 비구가 이전에 들었던 법에 따라 의미를 통달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하면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다.
이와 같이 비구가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 뒤에 희열이 생한다.
희열한 뒤에 기쁨이 생한다.
기뻐한 뒤에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다.
몸이 편안해진 뒤에 즐거움을 느낀다.
즐거움을 느낀 뒤에 마음이 정에 든다.
마음이 정에 든 뒤에 여실히 알고 본다.
비구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로 적정행을 실천하면,
마음으로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은 해탈을 얻고 여러 누(漏)로서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은 다함을 얻고 아직 무상의 안온함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안온함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제4의 해탈처라고 한다.
다시 비구에게 세존도 없고 스승도 없고 지혜롭고 청정한 범행자가 말해 주는 때도 없다.
그리고 이전에 들었던 법을 널리 새기고 외우고 의미에 통달하는 그러한 때도 아니다.
그리고 이전에 들었던 법의 의미에 통달하여 널리 남을 위해 분별하는 그러한 때도 아니다.
그리고 이전에 들었던 법의 의미에 통달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하는 그러한 때도 아니다.
이 비구는 정(定)의 모습을 잘 취하고 잘 사유하여 잘 해탈해야 한다.
비구가 정의 모습을 잘 취하고 잘 사유하여 잘 해탈한 뒤에는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다.
이와 같이 비구가 법을 느끼고 의미를 느낀 뒤에 희열이 생한다.
희열한 뒤에 기쁨이 생한다.
기뻐한 뒤에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다.
몸이 편안해진 뒤에 즐거움을 느낀다.
즐거움을 느낀 뒤에 마음이 정에 든다.
마음이 정에 든 뒤에 여실히 알고 본다.
비구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기억하고 바른 지혜로 적정행을 실천하면,
마음으로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은 해탈을 얻고 여러 누(漏)로서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은 다함을 얻고 아직 무상의 안온함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안온함을 얻는다.
이를 이름하여 제5의 해탈처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을 이름하여 오해탈처라고 한다.
오출리계(五出離界)는 계품(界品)4)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어떤 것이 오관정(五觀定)인가.
정신경(正信經)에서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다시 더 뛰어난 것이 없는 법이 있으니,
세존께서 설법하신대로 정에 들어 관찰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정에 들어 관찰함이 있으니,
어떤 사문ㆍ바라문이 열심히 정진하고 용맹스럽게 바로 사유하고 많이 익히며 행하고 마음으로 법에 입각해 사유하여 정에 들고 정에 든 뒤에 몸을 관찰하되 정수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또는 발에서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겉피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부정하다고 관찰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를 이름하여 첫 번째의 정에 들어 관찰함[入定觀]이라고 한다.
“다시 어떤 사문ㆍ바라문이 열심히 정진하고 용맹스럽게 바로 사유하고 많이 익히며 행하고 마음으로 법에 입각해 사유하여 정에 들고 정에 든 뒤에 피부ㆍ피ㆍ살점 등을 관찰하지 않고 단지 사람의 뼈를 관찰합니다.
곧 이 몸 안에는 뼈ㆍ치아ㆍ손발톱 등이 있다고 관찰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를 이름하여 두 번째의 정에 들어 관찰함이라고 한다.
“다시 어떤 사문ㆍ바라문이 열심히 정진하고 용맹스럽게 바로 사유하고 많이 익히며 행하고 마음으로 법에 입각해 사유하여 정에 들고 정에 든 뒤에 피부ㆍ피ㆍ살점ㆍ뼈 등을 관찰하지 않고 단지 사람의 식(識)을 관찰합니다.
곧 이 식은 이 세상에서 머물고 저 세상에서 머무니,
이 식은 아직 단절되지 않았고 두 세상을 떠나지도 않는다고 관찰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를 이름하여 세 번째의 정에 들어 관찰함이라고 한다.
“다시 어떤 사문ㆍ바라문이 열심히 정진하고 용맹스럽게 바로 사유하고 많이 익히며 행하고 마음으로 법에 입각해 사유하여 정에 들고 정에 든 뒤에 피부ㆍ피ㆍ살점ㆍ뼈 등을 관찰하지 않고 다시 사람의 식을 관찰합니다.
곧 이 식은 이 세상에 머물지 않고 저 세상에서 머무니,5) 이 식은 이 세상을 끊고 떠나나 아직 저 세상은 끊고 떠나지 못했다고 관찰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를 이름하여 네 번째의 정에 들어 관찰함이라고 한다.
“다시 어떤 사문ㆍ바라문이 열심히 정진하고 용맹스럽게 바로 사유하고 많이 익히며 행하고 마음으로 법에 입각해 사유하여 정에 들고 정에 든 뒤에 안의 피ㆍ살점ㆍ피부ㆍ뼈 등을 관찰하지 않고 다시 사람의 식을 관찰합니다.
곧 이 식은 이 세상에 머물지 않고 저 세상에 머물지 않으니,
이 식은 두 세상을 잘 끊고 떠났다고 관찰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를 이름하여 다섯 번째의 정에 들어 관찰함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더 뛰어난 것이 없는 입정(入定)의 관찰에 의해 세존께서는 잘 아시니 더 뛰어난 자가 없는 분이시며,
또한 세존께서는 잘 통달하셨으니 능히 더 지나칠 자가 없는 분이십니다.
저의 뜻으로 아는 바에 따르면,
어떤 사문ㆍ바라문도 능히 세존께서 아시는 바를 능가한다라고 일컬어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라고 하면,
이들을 이름하여 다섯 번째의 정에 들어 관찰함이라고 한다.


무엇을 오기해탈법(五起解脫法)이라고 일컫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다섯 가지 법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해탈을 얻으니,
무엇을 다섯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몸이 부정하다는 생각을 관찰하고,
식물(食物)이 부정하다는 생각을 관찰하고,
모든 행(行)은 무상하다는 생각을 관찰하고,
세간은 즐겁지 못하다는 생각을 관찰하고,
몸의 죽음에 관한 생각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법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능히 해탈을 얻으니,
이를 오기해탈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육념(六念)인가.
염불로부터 염천(念天)에 이르기까지이다.


무엇을 염불이라고 일컫는가.
부처님을 경계로 삼아 선함을 기억하여 순응하고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염불이라고 한다.


무엇을 염법(念法)이라고 일컫는가.
법을 경계로 삼아 선함을 기억하여 순응하고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염법이라고 한다.


무엇을 염승(念僧)이라고 일컫는가.
승가를 경계로 삼아 선함을 기억하여 순응하고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염승이라고 한다.

무엇을 염계(念戒)라고 일컫는가.
계율은 말하자면 몸과 말의 계율이다.
이 계율을 경계로 삼아 선함을 기억하여 순응하고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염계라고 한다.


무엇을 염시(念施)라고 일컫는가.
보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재물의 보시와 법의 보시이다.
이 보시를 경계로 삼아 선함을 기억하여 순응하고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염시라고 한다.


무엇을 염천(念天)이라고 일컫는가.
물질의 음식을 초월한 화생(化生)의 천신이 있으니,
이 천신은 숙업(宿業)을 관찰하지 않고 숙업을 분별하지 않는다.
이러한 천신을 경계로 삼아 선함을 기억하여 순응하고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
이를 염천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을 이름하여 육념이라고 한다.
육공(六空)은 공정(空定)에서 설명한 바6)와 같고 육출리계(六出離界)는 계품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무엇을 육명분법(六明分法)이라고 일컫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여섯 가지 법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明)을 일으키고 명에 포섭됨을 얻고 명을 널리 확대시키게 된다.
무엇을 여섯이라고 일컫는가.
무상함의 생각ㆍ무상하므로 괴롭다는 생각ㆍ괴로우므로 무아라는 생각ㆍ식물(食物)은 부정하다는 생각ㆍ모든 세간은 즐겁지 않다는 생각ㆍ죽음의 생각 등이다.
무엇을 무상하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나무 밑 또는 노지에서 곧 ‘색은 무상하고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하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취온의 무상함을 관찰하여 행한다.
이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유위법에는 세 가지 모습이 있나니,
생기와 머묾과 소멸이다.” 이와 같이 비구가 생기와 머묾과 소멸을 사유하여 마음을 조복하고 닦고 부드럽게 한다.
그리고 부드럽게 한 뒤에 색의 무상함과 수ㆍ상ㆍ행ㆍ식의 무상함을 사유하고 행하는 사람에게 생각과 기억의 생각이 있으니,
이를 무상함의 생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을 일으키고 명을 얻고 명에 포섭됨을 얻고 능히 명을 확대시키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무상하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한다.
무엇을 무상하므로 괴롭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나무 밑 또는 노지에 있으면서 ‘색은 무상하고 무상하므로 이것은 괴로움이다.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하고 무상하므로 이것은 괴로움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취온에서 괴로움을 관찰하여 행하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색이 생기하고 머물면 곧 괴로움이 생기하니,
병이 있게 되고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또한 수ㆍ상ㆍ행ㆍ식이 생기하고 머물면 곧 괴로움이 생기하니,
병이 있게 되고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다시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세 가지 괴로움이 있나니,
행고(行苦)와 고고(苦苦)와 변역고(變易苦)이다.”


무엇을 행고라고 일컫는가.
오취온의 행(行)은 자성에 있어 괴로움의 형상이고,
괴로움의 자기 모습으로서의 괴로움이다.
이를 이름하여 행고라고 한다.


무엇을 고고(苦苦)라고 일컫는가.
오취온의 행은 자성에 있어 괴로움이니,
괴로움이 생기고 바로 생기고 일어나고 바로 일어나고 나타나고 바로 나타나고 성취하고 구족한 뒤에 여러 가지 병을 일으킨다.
곧 열을 원인으로 병이 생기고,
또는 담과 가슴을 원인으로,
또는 바람을 원인으로 또는 지나친 힘을 원인으로 또는 타인의 고뇌를 원인으로 또는 시절의 변화를 원인으로 또는 여러 대종의 어긋남을 원인으로,
음식의 소화 안 됨을 원인으로,
숙업의 과보를 원인으로,
여러 대종의 부조화를 원인으로 병이 생긴다.
그리고 눈병,
귀ㆍ코ㆍ혀ㆍ몸의 병이 생기고 두통과 얼굴의 통증과 입ㆍ치아ㆍ목의 통증과 가슴의 통증이 느껴지는 병이 생기고,
사신병(蛇身病)과 호흡이 곤란한 병과 기침병과 구토병이 생기고,
교병(絞病)과 몸에 열나고 배가 아픈 병이 생기고,
버짐의 막ㆍ옴ㆍ종기ㆍ미풍(微風)의 병ㆍ침음(侵婬)ㆍ종기ㆍ악창ㆍ구더기가 스는 병ㆍ백라(白癩)ㆍ간고(乾枯)ㆍ전광병이 생기고,
치질과 대하적종(㿃下赤腫)과 벌레 먹는 병이 생기니,
벼룩ㆍ이ㆍ모기ㆍ등에ㆍ개미 등이 있다.
그리고 이 몸으로부터 ‘한 털구멍에 이르기까지 벌레가 없는 곳이 없다.
실로 사람의 악창과 종기 위에 다시 독한 종기가 생기는 것처럼 오취온의 행이 성품에 있어 괴로움인 것도 그와 같다.
이처럼 괴로움이 생기고 바로 생기고 일어나고 바로 일어나고 나타나고 바로 나타나고 구족되고 성취되니,
여러 가지 병이 생긴다.
곧 열을 원인으로 병이 생기고,
나아가 한 털구멍에 이르기까지 벌레가 없는 곳이 없으니,
이를 고고(苦苦)라고 한다.
무엇을 변역고(變易苦)라고 일컫는가.
오취온의 행은 구르고 변하고 쇠퇴하고 부서지고,
썩고 다하고 멸하고 끝나고 없어지고 떨어져 소멸한다.
이를 이름하여 변역고라고 한다.
이처럼 비구가 저 행고와 고고와 변역고에 있어 마음을 조복하고 닦고 부드럽게 한다.
부드럽게 한 뒤에 색의 괴로움을 사유하고 수ㆍ상ㆍ행ㆍ식의 괴로움을 사유한다.
이러한 수행인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이 있으니,
이를 무상하므로 괴롭다는 생각이라고 하며,
이 생각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明)이 생하고 명을 얻고 명에 포함됨을 얻고 능히 명을 확대시키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무상하므로 괴롭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한다.
무엇을 괴로우므로 무아다라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나무 밑 또는 노지에 있으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곧 ‘색은 무상하고 무상하므로 괴로움이고,
괴로우므로 무아이다.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하고,
무상하므로 괴로움이고,
괴로우므로 무아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오취온의 무아임을 관찰하여 행하나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색은 무아이다.
색이 자아라면 색은 응당 괴로움과 근심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색은 응당 ‘이렇게 되어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라는 뜻의 자재함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색은 자아가 아닌 까닭에 색은 괴로움과 근심을 받고 ‘이렇게 되어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라는 뜻의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또한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아이다.
수ㆍ상ㆍ행ㆍ식이 자아라면 식은 응당 괴로움과 근심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식은 응당 ‘이렇게 되어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라는 뜻의 자재함을 얻어야 한다.” 비구는 이와 같이 마음을 조복하고 닦고 부드럽게 한다.
부드럽게 한 뒤에 ‘색은 무아이고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아이다’라고 사유한다.
이러한 수행인에게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이 있으니,
이를 무아의 생각이라고 하며,
이것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을 일의고 명을 얻고 명에 포섭됨을 얻고 능히 명을 확대시키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괴로우므로 무아다라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한다.
무엇을 식물(食物)은 부정하다라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가.



식물이란 어떤 것인가.
식물에 네 종류가 있다.
말하자면 물질식[摶食]과 촉식(觸食)과 사식(思食)가 식식(識食)이다.
이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중생에게는 네 종류의 식물이 있다.
이 식물을 먹고 능히 중생은 머물고,
능히 온을 화합시키고,
능히 이익되는 바를 있게 한다.
넷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물질식이고,
둘째는 촉식이고,
셋째는 사식이고,
넷째는 식식이다.


무엇을 물질식[摶食]이라고 일컫는가.
물질식에 두 종류가 있으니,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이다.
무엇을 거친 것이라고 일컫는가.
천신의 깨끗한 음식과 천신의 향기로 된 음식을 제외하고,
또한 의복과 목욕과 몸을 조절하는 음식을 제외한 나머지의 물질식이니,
이를 거친 물질식이라고 한다.
무엇을 미세한 물질식이라고 일컫는가.
천신의 깨끗한 음식과 천신의 향기로 된 음식과 또한 의복과 목욕과 몸을 조절하는 음식이니,
이를 미세한 물질식이라고 한다.
다시 거친 물질식이란 천신의 향기로 된 음식을 제외하고 의복과 목욕과 몸을 조절하는 음식을 제외한 나머지 물질식이니,
이를 거친 물질식이라고 한다.
다시 미세한 물질식이란 천신의 향기로 된 음식과 의복과 목욕과 몸을 조절하는 음식이니,
이를 미세한 물질식이라고 한다.



무엇을 촉식(觸食)이라고 일컫는가.
육촉,
곧 안촉ㆍ이촉ㆍ비촉ㆍ설촉ㆍ신촉ㆍ의촉이니,
이를 촉식이라고 한다.



무엇을 사식(思食)이라고 일컫는가.
육사신(六思身),
곧 색사(色思)ㆍ성사(聲思)ㆍ향사ㆍ미사ㆍ촉사ㆍ법사(法思)이니 이를 육사신이라고 하고,
이를 이름하여 사식이라고 한다.
무엇을 식식(識食)이라고 일컫는가.
육식신(六識身),
곧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이니 이를 육식신이라고 하고,
이를 이름하여 식식이라고 한다.
물질식에 음식인 것과 음식 아닌 것이 있고,
촉식ㆍ사식ㆍ식식에도 음식인 것과 음식 아닌 것이 있다.
무엇을 물질식 중 음식인 것이라고 일컫는가.
물질식을 연하여 여러 감관이 증장(增長)함을 얻고 손상되거나 부서지지 않고 목숨이 줄어들지 않으면 이를 물질식 중 음식인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물질식 중 음식 아닌 것인가.
물질식을 연하여 여러 감관이 증장하지 않고 손괴되며 목숨이 줄어들면 이를 물질식 중 음식 아닌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촉식ㆍ사식ㆍ식식 중 음식인 것이라고 일컫는가.
식식을 연하여 여러 감관이 증장되고 손괴되지 않으며 목숨이 감소하지 않으면 이를 식식 중 음식인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식식 중 음식 아닌 것이라고 일컫는가.
식식을 연하여 여러 감관이 증장하지 않고 손괴되며 목숨이 감소하면 이를 식식 중 음식 아닌 것이라고 한다.
비구가 물질식을 받을 때는 자식의 살점을 먹는 것처럼 부정하다는 생각으로 관찰하고,
촉식ㆍ사식ㆍ식식도 그러해야 한다.
이때 해탈의 생각이 있게 되고 의존심을 멸하고 욕염을 떠나는 것을 사유하게 된다.
이러한 수행인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이 있으니,
이를 음식은 부정하다는 생각이라고 하고,
이 생각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이 생하고 명을 얻고 명에 포섭됨을 얻고 능히 명을 확대시키게 되니,
이를 음식은 부정하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한다.
무엇을 모든 세간을 즐겁지 않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모든 세간에 대해 싫어하여 떠나고 즐거워하지 않는다.
지옥 세간ㆍ축생 세간ㆍ아귀 세간ㆍ인간 세간ㆍ천신 세간ㆍ중생 세간,
그리고 행(行)의 세간을 싫어하여 떠나고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구는 이 세간에 대해 취착의 마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견해에 집착함을 알고,
이 비구는 끊고 떠나서 이와 같은 여러 견해를 받지 않는다.
이러한 수행인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이 있으니 이를 모든 세간은 즐겁지 않다라는 생각이라고 이름하며,
이 생각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이 생하고 명을 얻고 명에 포섭됨을 얻고 능히 명을 확대시키게 되니 이를 이름하여 모든 세간은 즐겁지 않다는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한다.
무엇을 죽음의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나무 밑 또는 노지에 있으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곧 ‘나는 죽어야 할 법으로서 나에게는 죽음의 환난이 있다.
다른 중생도 역시 죽어야 할 법으로서 죽음의 환난이 있다.
지옥ㆍ축생ㆍ아귀ㆍ천신ㆍ인간 및 모든 중생들도 생사에 오고 가니,
중생이라는 이름을 얻은 자는 모두 죽어야 할 법이고 죽음의 환난이 있다.’ 이처럼 비구는 온이 부서지고 몸이 버려지는 것을 사유하고 죽음을 기억하니,
비구가 죽음을 사유하고 죽음을 알고 죽음을 지향하고 죽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수행인의 생각 또는 기억의 생각이 있으니 이를 죽음의 생각이라고 이름하며,
이 생각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명이 생하고 명을 얻고 명에 포섭됨을 얻고 능히 명을 확대시키게 되니 이를 죽음의 생각의 명분법이라고 일컫는다.
이들을 육명분법이라고 일컫는다.



무엇을 육열인법(六悅因法)이라고 일컫는가.
비구가 희열한 뒤에 기쁨이 생하고,
기뻐한 뒤에 몸이 편안해지고,
몸이 편안해진 뒤에 즐거움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낀 뒤에 마음이 정에 들고,
마음이 정에 든 뒤에 여실히 알고 본다.
이를 이름하여 육열인법이라고 한다.



무엇을 무희(舞喜)의 육각지(六覺支)라고 일컫는가.
염각지(念覺支)로부터 사각지(捨覺支)에 이르기까지를 무희의 육각지라고 한다.
무엇을 칠각지라고 일컫는가.
염각지로부터 사각지에 이르기까지이니,
이를 칠각지라고 한다.
무엇을 칠상(七想)이라고 일컫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칠상이 있으니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큰 공덕을 얻고 감로에 도달함에 얻는다.” 무엇을 일곱이라고 일컫는가.
부정하다는 생각ㆍ음식을 싫어하는 생각ㆍ모든 세간이 즐겁지 않다는 생각ㆍ죽음의 생각ㆍ무상의 생각ㆍ무상하므로 괴로움이라는 생각ㆍ괴로우므로 무아다라는 생각 등이다.
먼저 부정하다는 생각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많이 닦고 익힌 뒤에 큰 과보를 얻고,
큰 공덕을 얻고,
감로에 도달함을 얻는다고 일컫거니와,
무엇을 연하여 이렇게 말하는가.
비구가 마음으로 부정하다는 생각을 알고 분별하여 욕심이 물러나고 가라앉고 나아가지 않으면 미래에 점점 제거되고 다하고,
‘그런 뒤에 등지고 버리고 싫어하게 되고 떠나게 되어 비로소 바로 머물게 된다.
마치 힘줄 또는 새의 날개 또는 두라(頭羅) 풀을 불 속에 던지면 그을리고 오그라들어 펴지지 않고 뒤에 문득 소진하게 되는 것과 같다.
비구도 이와 같이 마음으로 부정하다는 생각을 알고 분별하여 욕심을 물러나게 하고 가라앉게 하고 나아가게 하지 않으면 뒤에 문득 소진되고 등지고 버려지고 싫어하게 되고 떠나게 되어 비로소 바로 머물게 된다.
그런데 비구가 마음으로 부정하다는 생각을 알고 분별하여도 마음에 오히려 애욕의 생각이 흐르고 새는 일이 일어나 본래와 다를 것이 없어 마음이 등지지 않고 버려지지 않고 싫어하지 않고 떠나지 않고 바로 머물지 않는다면,
이 비구는 여실히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
곧 ‘나는 문득 부정하다는 생각을 닦지 못한 자가 되었고 나는 아직 달리 명색(名色)을 증대시키거나 이익되게 하지 못하였고 나는 아직 닦여진 과보를 얻지 못하였다’라고.
비구가 이와 같이 바른 지혜를 갖추면 이 비구는 마음으로 부정하다는 생각을 알고 분별하여 애욕의 생각이 마음에 흐르고 새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본래와 달라지게 되고 등지고 버리고 싫어하고 떠나고 바로 머물게 된다.
그리고 이때 비구는 ‘나는 이미 부정하다는생각을 닦았고 나는 명색을 증대시키고 이익되게 하였고 나는 닦여진 과보를 얻었다’라고 여실히 바로 안다.
이 비구는 바른 지혜를 갖추어 부정하다는 생각을 실행하니,
이 생각에 가까이하고 많이 닦고 익혀 큰 과보를 얻고 큰 공덕을 얻고 감로에 도달함을 얻는다.
따라서 이러한 인연으로 말한 것이다.
다시 음식이 부정하다는 생각에 친근하여 많이 닦고 익히면 큰 과보를 얻고 큰 공덕을 얻고 감로에 도달함을 얻는다.

-------------

1)
맛과 함께 하는 것.
여기서 맛이란 육체적인 즐거움이 아직 남아 있음을 은유한 것이다.
2)
제14권 참조.
3)
원문에는 ‘현재에 괴롭히는 경우’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의할 경우 ‘과거에 괴롭히는 경우’로 되어야 한다.
4)
제7권 참조.
5)
원문은 저 세상에서 머물지 않으니[不住他世]로 되어 있으나 이는 제5의 입정관(入定觀)의 내용이므로,
저 세상에 머무니[住他世]로 해석하였다.
6)
본 제16권 초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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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Gilles Vigneault - Pendant Que.lrc

◎◎[개별논의] ❋본문
● 글로 익히는 정려 이론


정려 수행은 수행자가 직접 실천해야 한다.
정려 수행과정에서 겪거나 증득해가는 내용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가 아주 특별한 차를 마셨다고 하자.
이 맛을 다른 이에게 언어표현으로 전달하려고 한다고 하자.
아무리 그 맛에 대해 표현을 해도 상대가 그 맛을 직접 얻기는 곤란하다.
그 차 맛을 느끼려면 직접 그 차를 맛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 차에 대한 언어적 설명이나 표현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만으로 자신이 그 차맛을 알게 되었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정려 수행은 욕계에서 색계 무색계로 들어가는 수행이 된다.
이 정려 수행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려면 평상시 행하는 다음내용을 검토해야 한다.

평소 눈을 뜨면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이리저리 초점을 맞추어 영희가 어디 있는가 찾아보게 된다.
그러다가 영희로 여겨지는 부분을 찾게 된다.
이제 그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영희라고 가리키게 된다.

욕계와 색계 무색계의 차이와 정려수행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려면 이 과정을 잘 살펴야 한다.

우선 앞과 같이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을 때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킨다고 하자.
이 현상을 망집현상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부분이 어떤 성격을 갖는가를 먼저 살펴보자.
그것은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눈을 뜨면 나타나고 감으면 사라진다.
그래서 그것은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이 사정을 이해하려면 옆에 자신과 비슷한 철수를 놓고 검토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철수가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다시 눈을 뜨면 앞에 바위나 꽃이 보인다고 보고한다.
철수 눈을 숫가락 등으로 가리고 열고 해도 마찬가지로 보고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그런 변화는 오직 철수에게만 일어나는 변화다.
그래서 철수가 눈을 뜰 때 보인다는 그 내용은 철수 안의 변화다.
그래서 그 내용은 철수 마음안의 내용일 뿐이다.

그런데 그 철수와 바로 옆에 서 있는 자신도 상황이 같다.
자신이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눈을 뜨면 보인다.
이 순간에 눈을 떠 보게 된 내용 전체가 다 자신 마음안 내용이다.
즉 자신이 감각과정을 통해 얻게 된 감각현실이다.

이 내용을 평소 대부분 자신의 밖에 있는 외부 세계의 내용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또 한편 이 내용을 자신의 감관이 상대하는 외부 대상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또 한편 이 내용은 자신의 마음밖에 있고, 마음과는 별개의 것으로서, 외부의 물질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또 한편 자신이 얻는 그런 내용은 영희나 철수를 비롯해 모든 생명이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인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

물리학자가 어떤 물리현상을 기술한다고 하자.
그 물리학자는 자신의 감관으로 일정한 내용을 관찰해 그처럼 보고한다.
그래서 물체의 모습이나 크기 무게 운동 변화과정을 그처럼 기술한다.
물리학자의 의식에는 자신이 관찰한 내용들이 하나같이 외부의 객관적 실재임이 당연히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물리학자가 하나의 현상을 관찰하는 과정도 앞의 경우와 사정이 같다.
그래서 그것은 그 일체가 잘못된 판단이다.

이제 경전에서 욕계, 색계 무색계로 구분하는 사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현실에서 눈을 떠서 모습을 본다. 또 손으로 촉감을 얻는다.
이런 형태로 볼 수 있거나 대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것을 색이라고 표현한다.
오늘날 표현으로는 감각현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물리학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마음안의 감각현실을 잘못 이해한다.
즉, 마음안의 감각현실을 붙잡고 이를 외부 세계나 외부물질, 외부대상,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잘못 이해한다.

즉, 하나의 내용을 놓고 각 입장 따라 표현도 달리하고, 그 성격도 달리 이해한다.

한편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상황에서 한 주체는 느낌도 얻고 생각도 하고 분별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앞과 달리 볼 수도 없고 대할 수 없다.
그래서 이를 무색이나 명이라고 표현한다.
불교에서 수,상,행,식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이다.


이제 다시 평소 눈을 뜨면서 일정한 모습을 보는 과정을 놓고 살펴보기로 한다.
역시 이 과정에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이리저리 초점을 맞추어 영희가 어디 있는가 찾아보게 된다.
그러다가 영희로 여겨지는 부분을 찾게 된다.
이제 그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영희라고 가리키게 된다.

이 부분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은 감각현실이다.
한편,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전에 영희를 찾는 과정에서도 영희라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이 내용은 관념내용이다.
이 관념내용은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다.

이제 이렇게 영희에 대한 생각을 떠올려 관념내용을 잘 붙잡아 둔다고 하자.
이 경우 이 관념내용과 손으로 가리킨 부분의 관계를 먼저 잘 살펴야 한다.

그런 감각현실 부분을 대해서 그가 그런 분별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각현실은 관념분별내용이 아니다.
또 관념분별 내용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감각현실 안에는 관념분별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관념분별 내용 안에는 감각현실이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잘 파악해야 한다.

비유로 이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연필이란 생각을 떠올리고 나서, 기차를 연상해 떠올릴 수도 있다.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연필이 기차는 아니다.
기차가 연필인 것도 아니다.
연필에 기차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기차안에 연필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사정이 그러하다.
그러함에도 기차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을 때
연필을 가리키면 곤란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대부분 이처럼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즉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감각현실 일정부분을 가리킨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망상분별 현상이다.
그런 내용은 그 부분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런 부분을 그런 내용이라고 잘못 여기고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온갖 업을 행해나간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생사현실의 상황이다.


정려 수행은 이런 망집을 떠나는 기초적 수행이다.
정려 수행에 들어가면 이런 상태를 떠나 색계에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좀더 깊게 수행하면 무색계에 진입하게 된다.

이 사정을 위 상황을 놓고 잘 검토해야 한다.

먼저 그가 눈을 떠서 손가락으로 영희를 가리키는 상황을 놓고 살펴보자.

이 상태에서 그는 일정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그가 일정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야 그런 망상분별이 진행된다.
즉 그렇게 초점을 맞춘 부분이 영희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 현상이 그처럼 초점을 맞춘 이후에 나타나게 된다.

이제 그가 초점을 그렇게 계속 맞추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초점을 움직이지 말것을 요구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 상태에서 그에게 갑자기 왼쪽 끝 부분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묻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초점을 왼쪽 끝으로 이동시켜 분별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그 부분에 무엇이 있는가를 답하기 곤란하게 된다.

이 상황을 놓고 다시 잘 검토해야 한다.
위 질문에 그는 답을 잘 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해도 그런 부분이 전혀 감각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감각되는 전체 부분에서 각 부분의 성격이 다르다.
즉 그가 초점을 맞춘 부분은 그 부분이 무엇이라는 분별을 일으켜 대응시킨다.
그러나 초점을 맞추지 않는 부분은 그런 현상이 없다.
이후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다시 그 부분에 대해 분별을 일으켜 대응시키게 된다.

이 부분을 놓고 잘 검토해야 한다.
현실에서 초점을 맞추지 않고 대하는 감각현실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분별도 일으키지 않고 있다.
그래도 감각현실은 얻어지고 있다.

이 부분이 갖는 성격이 '색' 이라고 경전에서 표현하는 부분에 해당한다.


이제 다시 다음 실험을 해보자.

눈을 뜨니 앞에 꽃과 바위가 보인다고 하자.
그런데 그 상황에서 자신은 이와는 엉뚱하게
경전에서 본 내용을 마음에서 떠올린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아미타부처님의 모습이나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을 떠올릴 수 있다
또는 극락세계의 모습을 상상으로 그리고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성격상 관념영역에서 연상해 떠올리는 생각들이다.
이제 이런 내용에 대응하는 감각현실을 찾아본다고 하자.
앞에서 꽃과 바위가 보이는 감각현실에서는 찾기 힘들 것이다.
즉 감각현실과 대응되지 않는 관념내용들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갖는 성격이 경전에서 '명' '무색'이라는 표현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서 정려 수행의 과정을 이론상 이해할 수 있다.


정려 수행은 처음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요소로 한다.
그래서 처음 들숨과 날숨을 세면서 이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후 4 념처나 일정 주제에 집중해간다.

처음 눈을 뜨고 일정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고 하자.
그리고 그에 집중한다고 하자.
이렇게 집중하는 상태를 심일경성이라고 표현한다.

이 상황에서 초점을 맞추지 않고 대하는 부분은 그대로 색계 상태와 성격이 같다.
욕계 상태에서는 초점을 맞춘 부분에 대해 일정 분별을 일으켜 대응시킨다.
그래서 초점을 맞춘 부분을 놓고 바위라거나 꽃이라고 분별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바위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초점을 맞춘 부분을 손으로 가리킨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망상분별이 남은 부분은 바로 그렇게 초점을 맞춘 그 부분만이다.

만일 집중하지 않은 상태라고 하자.
그러면 그는 대단히 산만하다.
자극이 일어나는 대로 초점을 이동시킨다.
저기는 영희가 있다 여기는 음식이 있다 저기는 책상이 있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초점을 산만하게 이동시키는 각 순간마다 망집이 산만하게 일어난다.
이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면 이런 증상이 사라진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한 이후로 관상법을 병행한다고 하자.

4 념처를 놓고 예를 들어보자.
자신의 발에 초점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의 발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욕계의 상황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욕계에서 산만하게 일으키던 망상분별만 제거된 차이가 있다.
어느 하나에 집중하면 나머지 산란한 망상분별은 부수적으로 제거된다.

그 상태에서 마음 속으로 발속의 뼈를 관한다고 하자.
일반적으로 X-RAY 투시안이 없다.
그래서 뼈를 관하고자 한다고 해서 뼈가 보일리는 없다.
그래도 발을 대하면서 발 속의 뼈를 보고자 노력한다고 하자.
이제 그의 마음에 뼈에 대한 관념이 떠올른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이 상태의 성격은 색계의 상태가 된다.

즉 욕계에서 손가락으로 영희라고 일정부분을 가리키는 망집상태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 상황에서 이렇게 상을 취하는 현상이 남아 있는 부분은 없게 된다.

초점을 맞추고 집중시킨 부분에서도 감각현실과 관념내용이 분리된 상태가 된다.
다만 색계 정려 상황에서는 초점을 맞춘다는 활동은 계속 이어진다.

이후 감각현실 일정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활동까지 제거된다고 하자.
그 상태에서 감각현실이 무엇인가를 다시 검토해본다고 하자.

처음 눈을 떠 일정 부분에 초점을 맞춘 상황을 놓고 비교해보자.
그 부분이 영희라고 여겼다고 하자.

그런데 초점을 맞추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가 처음 문제다.
감각은 되지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부분이다.

이제 눈을 떠 대하면서 하늘을 본다고 하자.
중간에 아무 것도 파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른바 허공이다.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출 때 그런 부분은 허공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를 놓고 서로의 성격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이론적 내용은 자신이 직접 정려 수행을 하면서
자신이 경험하는 마음안 상태와 상응시켜가며 이해해가야 한다.
즉 맵핑문제를 잘 검토 해야 한다.
즉 경전이나 논서에서 표현하는 내용과 자신이 마음에서 겪는 각 내용을 서로 잘 대응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이론적으로 내용을 검토한 이후에는
직접 숨을 세면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킨 다음 정려 수행을 닦아 나갈 필요가 있다.


이 정려 수행이 거두는 효과가 대단히 많다.
그래서 다양한 표현이 또 이에 대해 제시된다.
지관, 정려, 사마타, 비발사나, 사마파티, 사마히타, 삼매 등등이 이와 관련된다.

또 정려 수행을 하면 분노라는 독이 우선 제거된다.
또한 계율도 자연히 구족될 수 있다.
무언가를 하지 말라는 내용을 정려수행과 병행시키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려 수행은 색계 하늘이나 무색계 하늘에 태어나게 하는 원인행도 된다.
다만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자는 이렇게 되면 오히려 곤란하다.
그래서 방편상 그렇게 될 수 있다해도 다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이 처한 욕계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정려 수행을 정진하여 생사과정에서 이후 색계 무색계천등에 태어나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수명이 대단히 긴 하늘 중생이 된다. 겁이란 시간 단위로 그 수명을 헤아리게 된다.
그래서 그 수행자 개인으로 보면 다행일 수도 있다.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게 되는 3 악도가 문제된다.
이 3 악도는 욕계 안에만 있다.
그래서 이 3 악도를 임시적으로 벗어나는 방편도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욕계에 남은 중생제도가 곤란해진다.

어떤 이가 잠을 잔다고 하자.
이 경우 다음날이 휴일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다음날 몇시에 일어나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이 잠에 들게 된다.
그러면 다음날 아주 편하게 자고 일어날 수는 있다.
그런데 다음날이 휴일이 아니어서 어딘가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잠 들기 전에 미리 내일 일어날 시간을 확인하고 잠에 들게 된다.
그러면 다음날 그 시각 즈음에 일어나 잘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정려 수행도 사정이 같다.
색계나 무색계 정려 수행을 깊이 들면 욕계현실과 분리된다.
예를 들어 정려 수행을 깊게 들면 옆에서 천둥 벼락이 치고 소떼가 다 죽어도 관계없게 된다.
또 머리 위에 까치가 날라와 집을 짓고 살아도 관계없게 된다.
그런데 욕계내 중생을 제도할 수행자가 이런 상태가 되면 곤란하다.

수행자가 이런 수행을 닦은 후 활동할 세계는 욕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계에서 자비 희사의 마음으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상대해 제도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욕계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한다.
그리고 욕계내에서 중생을 제도할 방편을 무량하게 함께 닦아야 한다.
그래서 마냥 색계와 무색계에 머무르게 되면 곤란하다.
그래서 색계에서 무색계로 진입할 단계에서는 자비희사의 4 무량심을 주제로 집중해 정려를 닦아야 한다.
그래야 그런 문제를 예방할 수 있다.

정려 수행은 오늘날 의학계에서 행하는 마취와 성격이 비슷하다.
마취 상태에서 수술을 잘 마치면 이후 깨어날 때 회복이 쉽다.
그러나 수술이 잘못 되면 깨어나기도 힘들게 된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나 마취 상태만 놓고 보면 별 차이는 없다.
욕계에서 정려 수행에 들어 색계 무색계로 진입한다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본래 욕계에서 문제삼는 내용은 일체가 망상분별이고 엉터리다.
그렇더 해도 수행자는 정려 수행을 마치고 욕계로 되돌아와야 한다.
중생제도를 위해서도 그렇다.
또 욕계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다른 수행을 위해서도 그렇다.
그런 사정으로 정려 수행도 이런 욕계사정을 미리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중간에 자비희사의 4 무량심을 닦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자는 정려 수행을 통해 그 결과까지 증득하면 곤란하다.
욕계 내 중생제도가 1겁 이후로 미뤄진다고 가정해보자.
그 만큼 욕계 내 중생이 겪어야 할 고통이 증폭되게끔 된다.
따라서 이런 사정을 미리 잘 헤아려 정려 수행에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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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pzw1263
◈Lab value 불기256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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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lematis_Asao_152456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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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matis 'Asao'
Author Andy / Andrew Fogg from near Cambridge, UK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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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ความงามยามค่ำคื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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ไทย: ความงดงามของถาปัตยกรรมที่อยู่คู่ประเทศไทย
Author Pitchayawat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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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dives ,Addu City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Description English: Equatorial Convention Center, Addu City, Maldives, where SAARC summit will be held on 2011 Date 29 October 2011 Source https://www.maldivestoday.com Author maldives today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Pierre Groscolas - Ophelie.lrc

Pierre Groscolas - Ophelie


♥단상♥갓난아이에게 할퀴면 아이보다 어른이 잘못이다.

수행은 일반 생사현실에서 행한다.
일반 생사현실은 망집에 바탕해서 진행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생사현실을 바탕으로 수행해가야 한다.

수행자 입장에서는 생사현실이란 비정상적인 병적 상태와 같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치유하고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생사현실 측면을 99% 기준으로 붙잡고 살피면 오히려 수행자가 이상하다.

그래서 어떤 측면이 보다 더 신뢰할 내용인가가 문제된다.

앞에 영희가 사과를 들고 서 있다.
이런 경우에 그 상황에 영희가 사과를 들고 서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이렇게 임하면 그는 생사현실 내에서 적어도 정상적이다.
그러나 수행 측면에서 보면 그는 망집을 일으켜 전도된 상태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다가 극심한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겪게 된다.
그런 생사고통을 직접 당장 겪게 된 상태에 처한후 이를 벗어나려면 늦다.
그리고 이를 예방하고 벗어나는 것이 수행의 목표다.

그래서 매 현실 단면마다 입장이 달라진다.
수행자가 목표로 하는 측면을 99% 를 붙잡고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앞 경우에서부터 판단을 달리 해야 한다.

수행자 입장에서는 앞 상황을 다음과 같이 관해야 한다.
이는 자신이 망상을 일으켜서 지금 영희가 사과를 들고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반의 입장과 수행자의 두 입장은 서로 엇갈린다.
그래서 이 가운데 무엇이 옳은 내용인지를 먼저 잘 판단해 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생사현실에서는 대부분 망집 상태에 처한 이를 상대하게끔 된다.
그래서 또 다시 주의를 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수행자가 취하는 기준을 일반인에게 요구하기 쉽다.

그러나 수행자가 놓인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거의 대부분 99% 가 망집 상태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이 상태를 전제로 해서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다만 그 상태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해도 수행자는 망집 상태에 놓인 일반적인 경우를 비난하면 안 된다.
그런 생사현실에서 벗어나도록 점차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현실은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의 상황과 같다.
꿈의 측면을 99% 붙잡는다고 하자.
그러면 꿈에서 본 바다나 황금이 실답게 여겨진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침대에도 그대로 있어야 할 듯 하다.
그러나 침대의 측면을 99% 붙잡는다고 하자.
그러면 꿈에서 본 바다나 황금은 실답지 않다.
단지 꿈에서만 생생하게 얻는 내용일 뿐이다.

현실 상황은 본 바탕과의 관계에서 꿈의 비유와 같다.
그러나 현실은 또 꿈은 아니다.
다만 꿈과 성격이 같을 뿐이다.
그래서 생사현실 내용은 수많은 주체가 일정 시기와 상황에서 일정 조건에 따라
무량하게 반복해 엇비슷한 내용을 생생하게 얻게 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생사현실은 꿈과 달리 대단히 실답게 여기고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한번 행한 업은 무량겁을 두고 그 과보를 받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생사현실에서 겪는 극심한 고통은 실상의 측면을 취해 이를 극복한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생생하고 명료해도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음을 관한다.
그래서 그것을 평안하게 참고 받아들여야 한다.
상을 취하지 않고 임해야 그런 안인을 성취할 수 있다.

한편 수행자는 생사현실 안에서 중생을 제도할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이는 생사현실에서 현상이 나타나는 인과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을 모두 골고루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본래 중생을 얻을 수 없는 가운데 무량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또한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이 두 내용은 이 두 측면을 모두 함께 사용한 것이다.
이 두 측면을 엇갈려 사용하면 대단히 곤란하다.
또는 이 가운데 한 측면만 취해도 곤란하다.

그러면 생사현실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거나,
아니면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선법을 구족 성취하지 못하게 된다.

생사현실에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내용도 사정이 같다.
망집에 바탕하면 그런 내용을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손상되고 없어지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내용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한 마음의 기제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제는 그와 관계없이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평소 자신이라고 여긴 부분은 그에 바탕해 자신이 매순간 걸치는 옷과 같다고 여겨야 한다.
명확히 보면 그런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는 판단은 망상분별이다.
그런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 부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는 비유하면 마치 남의 지갑이나 길가의 벽돌을 자신으로 잘못 여기는 상황과 같다.
그런 망상분별을 제거해도 그 지갑이나 벽돌은 당장 영향받지 않는다.
다만 그런 지갑이나 벽돌을 자신으로 잘못 여긴 망상분별만 제거된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행하던 업만 중단되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장차 자신으로 여기게 되는 부분도 점차 영향을 받게 된다.
생사현실에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은 그 사정이 이와 같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이 축생이나 아귀 지옥 중생의 형태로 점차 변하게 되어서도 곤란하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도 평소 자신으로 여긴 부분은 좋아져야 한다.
한마디로 3 악도를 벗어나 인간과 하늘 세계를 오가는 상태는 되어야 한다.
그래야 중생의 제도를 원만히 성취해갈 수 있다.
이것이 두 측면을 골고루 바람직한 형태로 취해 수행에 임하는 방식이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arie Laforet - Mon Village Au Fond De L'eau.lrc


다만 생사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망집에 바탕해 생활해간다.
수행자가 이들을 대할 때 그 상태를 그대로 두고 점차 망집을 벗어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문제상황에 처하게끔 된다.

우선 일반적 입장에서 수행자 입장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일반적 입장을 자꾸 비난하거나 분노로 대하면 중생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결국 중생을 제도하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중생의 망집 상태를 문제로 보더라도 과도하게 탓하면 곤란하다.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2/2565-02-21-k0969-016.html#1263
sfed--사리불아비담론_K0969_T1548.txt ☞제16권
sfd8--불교단상_2565_02.txt ☞◆vpzw1263
불기256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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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근기와 부처님의 교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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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반존자(那畔尊者)
낙바라밀(樂波羅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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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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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ler-jpn-Eng] 果地萬德 カジマントク infinite merit possessed by the Budd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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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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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주 52 번째는?
성관자재보살 명호 52 번째는?




52
또 이 주문 외우고 지니는 자가
입으로 하는 말이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일체 천마(天魔)나
외도(外道)와 용과 신이 모든 귀신이 들으면
다 청정한 법음으로 듣게 되어
다 이 사람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리라.
● 사바하 娑婆訶<五十二> s vā hā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52
바라 릉바호
鉢囉<二合>楞嚩嚩護<五十二>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 삼매_게송퀴즈


■ 오늘의 게송
[52일째]
입시겁수불가설 $ 052▲摩魯陀摩魯陀為 一 ● 懺慕陀, ○□□□□,受,於,一,如

□□□□□□□, 受時劫數不可說,
於此行列安住時, 一切諸劫無能說。
□□□□□□□, 수시겁수불가설,
어차행렬안주시, 일체제겁무능설。

들어갈 때 겁의 수효 말할 수 없고
받을 때의 겁의 수효 말할 수 없어
여기서 줄을 지어 머무를 적에
모든 겁을 누구도 말할 수 없네.



[53째]
여시섭수안주이 $ 053▲懺慕陀懺慕陀為 一 ● 瑿攞陀, ○□□□□,所,入,入,意

□□□□□□□, 所有境界不可說,
入時方便不可說, 入已所作不可說,
□□□□□□□, 소유경계불가설,
입시방편불가설, 입이소작불가설,

이렇게 받아 넣고 머무른 뒤에
갖고 있는 경계를 말할 수 없고
들어갈 때 방편도 말할 수 없고
들어가서 짓는 일도 말할 수 없어





●K0907_T1465.txt★ ∴≪A사리불문경≫_≪K0907≫_≪T1465≫
●K0969_T1548.txt★ ∴≪A사리불아비담론≫_≪K0969≫_≪T1548≫
●K0913_T1474.txt★ ∴≪A사미니계경≫_≪K0913≫_≪T1474≫

법수_암기방안


52 눈 eye 眼 【안】
53 (귀)코 nose 鼻 【비】
52 눈 eye 眼 【안】
52 눈 eye 眼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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