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사지론』
K0570
T1579
제6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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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0570-067♧
제6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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瑜伽師地論卷第六十七 積
K0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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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67권
미륵보살 지음
현장 한역
2. 섭결택분
9) 수소성혜지(修所成慧地)
이와 같이,
이미 사소성혜지(思所成慧地)의 결택을 설명하였으므로,
수소성혜지(修所成慧地)의 결택을 나는 이제 설명하겠다.
요약하여 열여섯 가지의 닦음[十六種修]이 있는 줄 알지니,
⑴성문승과 상응한 뜻 지음의 닦음[聲聞乘相應作意修]과
⑴성문승과 상응한 뜻 지음의 닦음[聲聞乘相應作意修]과
⑵대승과 상응한 뜻 지음의 닦음[大乘相應作意修]과
⑶영상의 닦음[影像修]과
⑷일의 맨 끝의 닦음[事邊際修]과
⑸할 일을 이루어 마침의 닦음[所作成辨修]과
⑹얻음의 닦음[得修]과
⑺익힘의 닦음[習修]과
⑻제거함의 닦음[除去修]과
⑼다스림의 닦음[對治修]과
⑽적은 부분의 닦음[少分修]과
⑾두루 통행함의 닦음[遍行修]과
⑿움직여옮음의 닦음[動轉修]과
⒀가행이 있음의 닦음[有加行修]과
⒁이미 이루어 마침에 닦음[已成辨修]과
⒂닦아서 이루는 바가 아닌 법의 닦음[非修所成法修]과
⒃닦아서 이루는 바 법의 닦음[修所成法修]이다.
무엇을 성문승과 상응한 뜻 지음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어떠한 사람이
⑴이는 성문으로서
성문의 법 성품에 머무르며,
⑵혹은
아직 정성이생(正性離生)1)에 증득하여 들지 못했거나
혹은 이미 정성이생에 증득하여 들었으며,
⑶다른 이의 이익되는 일은 살피지 않고
자기의 이익되는 일만을 자세히 살피며,
⑷안립체(安立諦)의 뜻 지음 문[作意門]으로 말미암아
안에서 진여(眞如)를 살피고
한량이 있고 분별이 있는 법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으며,
⑸탐애(貪愛)를 다하기 위하여
싫증 내어 여의고 해탈하려 하는 행상(行相)으로 말미암아
닦아 익히고 뜻을 짓나니★★,
이것을 성문승과 상응한 뜻지음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대승과 상응한 뜻 지음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어떠한 사람이
⑴이는 보살로서 보살의 법 성품에 머무르며,
⑵혹은 아직 정성이생에 증득하여 들지 못하였거나 혹은 이미 정성이생에 증득하여 들었으며,
⑶자기도 살필뿐더러 다른 이의 이익되는 일도 자세히 살피며,
⑷안립체와 비안립체(非安立諦)와의 뜻 지음 문으로 말미암아 안에서 진여를 살피고 한량 없고 분별이 없는 법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으며,
⑸크게 가엾이 여김[大悲]의 뛰어난 힘 때문에 자기와
⑵혹은 아직 정성이생에 증득하여 들지 못하였거나 혹은 이미 정성이생에 증득하여 들었으며,
⑶자기도 살필뿐더러 다른 이의 이익되는 일도 자세히 살피며,
⑷안립체와 비안립체(非安立諦)와의 뜻 지음 문으로 말미암아 안에서 진여를 살피고 한량 없고 분별이 없는 법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으며,
⑸크게 가엾이 여김[大悲]의 뛰어난 힘 때문에 자기와
남에게 있는 바의 탐애를 다하기 위하여 유정들을 거두어 주는 모든 이익되는 일의 방편의 행상으로 말미암는 것과
위없는 발자취에 향하여 나아가는 인연의 행상으로 말미암아서 닦아 익히고 뜻을 짓나나,
이것을 대승과 상응한 뜻 지음의 닦음이라 한다.
이것을 대승과 상응한 뜻 지음의 닦음이라 한다.
ᖰ 무엇을 영상의 닦음[影像修]이라 하느냐 하면,
혹은 분별이 있는 비파샤나아품[毘鉢舍那品]에서
사마아디[三摩地]의 행하는 바
영상(影像)으로 알 바 일[所知事]의 동분(同分)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은 분별이 없는 샤마타품[奢摩他品]에서
사마아디의 행하는 바
영상으로 알 바 일의 동분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기 때문에
있는 바의 닦음들을
영상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일의 맨 끝★★[事邊際]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과거와 미래와 현재와
안팎과 거칠고 가늘음과
하열하고 훌륭함과
가깝고 멀음 따위의 법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거나,
혹은 진여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나니,
이와 같이 혹은 있는 바를 다함의 성품[盡所有性] 때문에,
혹은 있는 바 그대로의 성품[如所有性] 때문에 있게 되는 닦음들을
혹은 있는 바 그대로의 성품[如所有性] 때문에 있게 되는 닦음들을
일의 맨 끝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할 일을 이루어 마침★★[所作成辨]]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이미 근본 정려(根本靜慮)거나
혹은 모든 사마아파티[等至]거나
혹은 세간의 선정에 증득하여 드는 온갖 닦음을
할 일을 이루어 마침의 닦음이라 한다.ᖱ
무엇을 얻음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어떠한 사람이 첫째 정려[初靜慮]에 의하여 혹은 무상함의 생각[無常想]을 닦고,
내지 죽음의 생각[死想]을 닦으며,
거기서 있는 바 그 밖의 앞에 나타나 있지 않은 생각으로서 혹은 제 자리[自地]에 속하였거나,
아랫 자리[下地]에 속한 것과 그의 이끄는 바 모든 그 밖의 공덕으로서 혹은 이는 세가이거나 혹은 벗어난 세간의 것이거나 간에 모두 그것을 닦아서 청정함과 장차 남[當生]을 더욱 왕성하게 하고 거기에서 자재함을 획득하여 성취하나니,
이것을 얻음의 닦음이라 한다.
어떠한 사람이 첫째 정려[初靜慮]에 의하여 혹은 무상함의 생각[無常想]을 닦고,
내지 죽음의 생각[死想]을 닦으며,
거기서 있는 바 그 밖의 앞에 나타나 있지 않은 생각으로서 혹은 제 자리[自地]에 속하였거나,
아랫 자리[下地]에 속한 것과 그의 이끄는 바 모든 그 밖의 공덕으로서 혹은 이는 세가이거나 혹은 벗어난 세간의 것이거나 간에 모두 그것을 닦아서 청정함과 장차 남[當生]을 더욱 왕성하게 하고 거기에서 자재함을 획득하여 성취하나니,
이것을 얻음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익힘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바로 저 여러 가지 무상함 따위의 모든 착한 생각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거나 혹은 착한 법에 대하여 익히고 닦음으로 말미암아서 모두가 실제로 닦고 익히나니,
이것을 익힘의 닦음이라 한다.
어떤 사람이 바로 저 여러 가지 무상함 따위의 모든 착한 생각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거나 혹은 착한 법에 대하여 익히고 닦음으로 말미암아서 모두가 실제로 닦고 익히나니,
이것을 익힘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제거함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사마아디[三摩地]로 행하는 바 영상(影像)의 모든 모양의 뜻 지음으로 말미암아서,
마치 문설주로 문설주를 빼내는 것처럼,
방편으로 제거하여 버려서 제 성품의 모든 모양을 버림과 같으며,
또 어떤 사람이 그 가는 문설주를 써서 굵은 문설주를 빼버리는 것처럼,
이와 같이 수행하는 이는 가뿐한 몸으로써 거칠고 무거운 몸을 제거하나니,
그 나머지 것은 앞의 설명과 같다.
이것을 제거함의 닦음이라 한다.
어떤 사람이 사마아디[三摩地]로 행하는 바 영상(影像)의 모든 모양의 뜻 지음으로 말미암아서,
마치 문설주로 문설주를 빼내는 것처럼,
방편으로 제거하여 버려서 제 성품의 모든 모양을 버림과 같으며,
또 어떤 사람이 그 가는 문설주를 써서 굵은 문설주를 빼버리는 것처럼,
이와 같이 수행하는 이는 가뿐한 몸으로써 거칠고 무거운 몸을 제거하나니,
그 나머지 것은 앞의 설명과 같다.
이것을 제거함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다스림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염환의 다스림[厭患對治],
혹은 단의 다스림[斷對治],
혹은 지의 다스림[持對治],
혹은 원분의 다스림[遠分對治]에 대하여
염환의 다스림[厭患對治],
혹은 단의 다스림[斷對治],
혹은 지의 다스림[持對治],
혹은 원분의 다스림[遠分對治]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는 온갖 닦음을 다스림의 닦음이라 한다.
이 안에서 염환의 다스림이라 함은,
온갖 세간의 착한도[善道]이니,
모든 한량없음[無量]과 그 밖에 수행하는 이로서
온갖 세간의 착한도[善道]이니,
모든 한량없음[無量]과 그 밖에 수행하는 이로서
유희 신통(遊戱神通)하는 것과의 이끄는 바 뜻 지음만은 제외한다.
단의 다스림이라 함은,
진여를 반연하여 경계로 삼아서 하는 뜻 지음이며,
진여를 반연하여 경계로 삼아서 하는 뜻 지음이며,
지의 다스림이라 함은
이 후에 얻는 세간과 벗어난 세간의 도[世出世道]와
해탈의 도이며,
원분의 다스림이라 함은
번뇌가 끊어진 뒤에 다스림의 도를 더 많이 닦아 익히거나
혹은 보다 윗 자리[上地]의 도를 닦고 익히는 것이다.
다시 차별이 있나니,
들음[聞]과 생각함[思]과 닦음[修]의 도를 염환의 다스림이라 하고,
벗어난 세간의 도를 단의 다스림이라 하며,
이 결과인 전의(戰依)를 지의 다스림이라 하고,
세간의 닦는 도를 원분의 다스림이라 한다.
들음[聞]과 생각함[思]과 닦음[修]의 도를 염환의 다스림이라 하고,
벗어난 세간의 도를 단의 다스림이라 하며,
이 결과인 전의(戰依)를 지의 다스림이라 하고,
세간의 닦는 도를 원분의 다스림이라 한다.
무엇을 적은 부분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무상하다는 생각[無常想] ★★따위의 어느 하나의 착한 법에 대하여
무상하다는 생각[無常想] ★★따위의 어느 하나의 착한 법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는 온갖 닦음을 적은 부분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두루 통행함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모든 법의 한 맛[一味]의 진여에 대하여
모든 법의 한 맛[一味]의 진여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는 온갖 닦음을 두루 통행함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움직여 옳음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모양 없음[無相]으로 닦고 방편(方便)으로 닦는 때에
모양 없음[無相]으로 닦고 방편(方便)으로 닦는 때에
때때로 모양 있음[有相]으로 틈츰이 닦음을 움직여 옮음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가행이 있음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바로 저 방편으로 닦는 때에 가행 있음의 모양[有加行相]으로 틈틈이 닦기 때문에
바로 저 방편으로 닦는 때에 가행 있음의 모양[有加行相]으로 틈틈이 닦기 때문에
가행이 있음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이루어 마침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혹은 성문승이거나 혹은 독각승이거나 혹은 또 대승으로서
이미 온갖 전의(轉依)를 얻는 것과
온갖 모든 법의 자재함을 얻는 것의
여기에 있는 바의 닦음을
이루어 마침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닦아서 이루는 바가 아닌 법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부정지(不定地)의 모든 보시와 계율 등의 온갖 착한 법의 닦음을
부정지(不定地)의 모든 보시와 계율 등의 온갖 착한 법의 닦음을
닦아서 이루는 바가 아닌 법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닦아서 이루는 바 법이라 하느냐 하면,
정지(定地)의 모든 착한 법의 닦음을 닦아서 이루는 바 법이라 한다.
정지(定地)의 모든 착한 법의 닦음을 닦아서 이루는 바 법이라 한다.
이 지(地) 안에 대한 그 밖의 결택하는 글은,
다시는 더 나타내지 아니한다.
10) 성문지(聲聞地)①
이와 같이,
이와 같이,
이미 수소성혜지(修所成慧地)의 결택을 설명하였으므로
성문지의 결택을 나는 이제 설명하겠다.
본지분(本地分) 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종성 없음[無種姓]에 머무는 푸드갈라는
종성 없음[無種姓]에 머무는 푸드갈라는
바로 필경(畢竟)에
열반의 법이 없다[無般涅槃法]고 한다.
이 안에서,
혹은 마음에 의심이 생긴다.
어찌하여 필경에 열반의 법이 없다고 하는가.
그것을 가르쳐 말하리라.
혹은 마음에 의심이 생긴다.
어찌하여 필경에 열반의 법이 없다고 하는가.
그것을 가르쳐 말하리라.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든 유정들의 가지가지의 계성(界性)과
모든 유정들의 가지가지의 계성(界性)과
한량없는 계성과
하열한 계성과
훌륭한 계성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약 있다고 말하면
필경에 열반의 법이 없는 푸드갈라가 있을 수 없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약 없다고 말하면
경전에서 모든 유정들에게는 가지가지의 계성,
내지 훌륭한 계성이 있다고 말씀한 것이
내지 훌륭한 계성이 있다고 말씀한 것이
도리에 맞지 않다.
그와 같이 가르친다면,
다시 힐난할 말이 있다.
다시 힐난할 말이 있다.
유정들에게 비록 가지가지의 계성,
내지 훌륭한 계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내지 훌륭한 계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감관 없는 유정[無根有情]이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은 열반의 법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지 아니한가.
혹은 감관이 없는 유정이 있다 함을 인정해야 하는가.
그것을 힐책하여야겠다.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든 감관 없는 것은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든 감관 없는 것은
바로 유정인 것인가.
유정이 아닌 것인가.
유정이 아닌 것인가.
만약 유정이라면
바깥의 감관 없는 물건도 이는 유정이어야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아니하며,
만약 유정이 아니라면,
‘어찌 감관 없는 유정이 있다 함을 인정하지 않는가’라고 하는 말이
‘어찌 감관 없는 유정이 있다 함을 인정하지 않는가’라고 하는 말이
도리에 맞지 않다.
그와 같이 힐책한다면,
다시 힐난할 말이 있다.
마치 크흐트리야[刹帝利]가 된 뒤에
다시 힐난할 말이 있다.
마치 크흐트리야[刹帝利]가 된 뒤에
때로는 다시 브라흐마나[婆羅門]거나 바이샤[吠舍]거나 슈우드라[戌陀羅]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슈우드라가 된 뒤에 ★★때로는 크샤트리야까지 되기도 한다.
또,
나라카[那落迦]가 된 뒤에 ★★때로는 하늘[天]이 되기도 하고,
이와 같이 하여,
내지 슈우드라가 된 뒤에 ★★때로는 크샤트리야까지 되기도 한다.
또,
나라카[那落迦]가 된 뒤에 ★★때로는 하늘[天]이 되기도 하고,
내지 하늘이 된 뒤에 ★★때로는 다시 나라카까지 되기도 하는 것이 그러한 것처럼,
무엇 때문에 열반의 법이 없는 것이 된 뒤에 ★★때로는 다시 열반의 법이 있는 것이 되지 아니한가.
그것을 힐책하여야겠다.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든 크샤트리야로부터 슈우드라에 이르기까지 나라카로부터 모든 하늘에 이르기까지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든 크샤트리야로부터 슈우드라에 이르기까지 나라카로부터 모든 하늘에 이르기까지
온갖 계[一切界]가 있는 것인가,
유독 하나의 계[一界]만이 있는 것인가.
유독 하나의 계[一界]만이 있는 것인가.
만약 온갖 계가 있다고 하면 비유가 비슷하지 않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약 유독 하나의 계만이 있다고 하면 먼저는 바로 크샤트리야였다가 어느 때에는 슈우드라까지 되기도 하고,
먼저는 바로 나라카였다가 어느 때에는 하늘까지 되었다고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 유독 하나의 계만이 있다고 하면 먼저는 바로 크샤트리야였다가 어느 때에는 슈우드라까지 되기도 하고,
먼저는 바로 나라카였다가 어느 때에는 하늘까지 되었다고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그와 같이 힐책하면,
다시 힐난할 말이 있다.
마치,
크샤트리야 등이 온갖 계를 갖추는 그것이 그러한 것처럼,
열반의 법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에 열반의 법의 계[般涅槃界]가 있지 아니한가.
그것을 힐책하여야겠다.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든 열반의 법이 없는 계(界)와 모든 열반의 법이 있는 계의 이 두 가지 계는 서로서로가 어기는 것인가,
서로가 어기지 않은 것인가.
만약 서로가 어긴다고 하면,
‘열반의 법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에 열반의 법의 계가 있지 아니한가.’라고 하는 말이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약 서로가 어기지 않는다 하면 곧 이 푸드갈라는 바로 열반의 법이 없으면서 역시 이는 열반의 법이 있다고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그와 같이 힐책한다면,
다시 힐난할 말이 있다.
현실에서 보건대,
한 땅의 방소에 어느 때에는 금(金)의 종성이 없다가 혹 어느 대에는 금의 종성이 있기도 하며,
어느 때에는 마니[末尼]거나 진주(眞珠)거나 유리(瑠璃) 등의 종성이 없다가 혹 어느 때에는 그의 종성이 있기도 하며,
어느 때에는 소금의 종성이 없다가 혹 어느 때에는 그의 종성이 있기도 하며,
어느 때에는 갖가지 모양[相]과 계(界)의 종성이 없다가 혹 어느 때에는 그의 종성이 있기도 함이 그러한 것처럼,
먼저는 이 열반의 법이 없는 종성이 무엇 때문에 어느 때에는 열반의 법이 있는 종성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한가.
그것을 힐책하여야겠다.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저 땅의 방소에 먼저는 이 종성이 없다가 뒤에는 이 종성이 있으며,
혹은 먼저는 이 종성이 있다가 뒤에는 이 종성이 없기도 한다 함이 그러한 것처럼,
먼저는 성문의 정한 종성[定種姓]이 있다가 뒤에는 이 종성이 없고,
내지 먼저는 대승의 정한 종성이 있다가 뒤에는 이 종성이 없다고 하거나,
혹은 먼저는 정한 종성이 없다가 뒤에는 정한 종성이 있다고 하는가.
만약 그렇다고 말하면 순해탈분(順解脫分)의 착한 뿌리[善根]는 텅 비어서 결과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며,
또 만약 그렇다면 정한 종성을 세움이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대가 말한 ‘열반의 법이 없는 이는 먼저 종성 없음에 머무르고 나서 뒤에는 종성 있음에 머무는 것이,
마치 땅의 방소에서 같다.’고 하므로,
열반의 법이 있는 이는 먼저는 종성 있음에 머무르고 나서 그 뒤에는 종성 없음에 머무는 것은 마치 땅의 방소에서와 같으리니,
도리에 맞지 않다.
다시 힐난할 말이 있다.
마치,
크샤트리야 등이 온갖 계를 갖추는 그것이 그러한 것처럼,
열반의 법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에 열반의 법의 계[般涅槃界]가 있지 아니한가.
그것을 힐책하여야겠다.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든 열반의 법이 없는 계(界)와 모든 열반의 법이 있는 계의 이 두 가지 계는 서로서로가 어기는 것인가,
서로가 어기지 않은 것인가.
만약 서로가 어긴다고 하면,
‘열반의 법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에 열반의 법의 계가 있지 아니한가.’라고 하는 말이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약 서로가 어기지 않는다 하면 곧 이 푸드갈라는 바로 열반의 법이 없으면서 역시 이는 열반의 법이 있다고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그와 같이 힐책한다면,
다시 힐난할 말이 있다.
현실에서 보건대,
한 땅의 방소에 어느 때에는 금(金)의 종성이 없다가 혹 어느 대에는 금의 종성이 있기도 하며,
어느 때에는 마니[末尼]거나 진주(眞珠)거나 유리(瑠璃) 등의 종성이 없다가 혹 어느 때에는 그의 종성이 있기도 하며,
어느 때에는 소금의 종성이 없다가 혹 어느 때에는 그의 종성이 있기도 하며,
어느 때에는 갖가지 모양[相]과 계(界)의 종성이 없다가 혹 어느 때에는 그의 종성이 있기도 함이 그러한 것처럼,
먼저는 이 열반의 법이 없는 종성이 무엇 때문에 어느 때에는 열반의 법이 있는 종성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한가.
그것을 힐책하여야겠다.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저 땅의 방소에 먼저는 이 종성이 없다가 뒤에는 이 종성이 있으며,
혹은 먼저는 이 종성이 있다가 뒤에는 이 종성이 없기도 한다 함이 그러한 것처럼,
먼저는 성문의 정한 종성[定種姓]이 있다가 뒤에는 이 종성이 없고,
내지 먼저는 대승의 정한 종성이 있다가 뒤에는 이 종성이 없다고 하거나,
혹은 먼저는 정한 종성이 없다가 뒤에는 정한 종성이 있다고 하는가.
만약 그렇다고 말하면 순해탈분(順解脫分)의 착한 뿌리[善根]는 텅 비어서 결과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며,
또 만약 그렇다면 정한 종성을 세움이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대가 말한 ‘열반의 법이 없는 이는 먼저 종성 없음에 머무르고 나서 뒤에는 종성 있음에 머무는 것이,
마치 땅의 방소에서 같다.’고 하므로,
열반의 법이 있는 이는 먼저는 종성 있음에 머무르고 나서 그 뒤에는 종성 없음에 머무는 것은 마치 땅의 방소에서와 같으리니,
도리에 맞지 않다.
또, 그것을 힐책하여야겠다.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열반의 법이 없는 하열한 계(界)를 지닌 이는 이와 같은 하열한 계 안에 편안히 머무르다가 바로 이생[此生]에서 바꾸어 열반의 법을 이루는 것인가,
후생(後生)에서 이루는가.
만약 바로 이생에서라고 하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佛ㆍ法ㆍ僧]를 만난 뒤에 현재 법 안에서 순해탈분의 착한 뿌리를 일으키는 것인가.
만약 일으킨다고 하면 저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를 만난 뒤에 현재 법 안에서 순해탈분의 착한 뿌리를 일으킬 수 있는데 열반의 법이 없다고 함이 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약 그렇지 못한다고 하면 그는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를 만난 뒤에 현재 법 안에서 순해탈분의 착한 뿌리를 일으킬 수 없는데 열반의 법을 바꾸어 이른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아니하다.
만약 수생에야 비로소 열반의 법을 이룬다고 하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먼저 착한 뿌리를 쌓고 모았기 때문에 후생 안에서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를 만나서 순해탈분의 착한 뿌리를 일으키는 것인가.
먼저 착한 뿌리를 쌓고 모으지 않은 것인가.
만약 먼저 착한 뿌리를 쌓고 모은다고 하면 그는 곧 이생 안에서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를 만나서 착한 뿌리를 일으키게 되거늘 후생 안에서야 비로소 열반의 법을 이룬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 그 원인 같은 것은 텅 비어서 결과가 없어야 한다.
만약 먼저 착한 뿌리를 쌓고 모으지 않는다고 하면 이는 바로 앞뒤가 서로 비슷해서 다 같이 아직은 착한 부리를 쌓아 모으지 못하였거늘 후생 안에서야 비로소 열반의 법을 이루는 것이요,
곧 이생 안에서 그렇지 못한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그대의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열반의 법이 없는 하열한 계(界)를 지닌 이는 이와 같은 하열한 계 안에 편안히 머무르다가 바로 이생[此生]에서 바꾸어 열반의 법을 이루는 것인가,
후생(後生)에서 이루는가.
만약 바로 이생에서라고 하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佛ㆍ法ㆍ僧]를 만난 뒤에 현재 법 안에서 순해탈분의 착한 뿌리를 일으키는 것인가.
만약 일으킨다고 하면 저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를 만난 뒤에 현재 법 안에서 순해탈분의 착한 뿌리를 일으킬 수 있는데 열반의 법이 없다고 함이 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약 그렇지 못한다고 하면 그는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를 만난 뒤에 현재 법 안에서 순해탈분의 착한 뿌리를 일으킬 수 없는데 열반의 법을 바꾸어 이른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아니하다.
만약 수생에야 비로소 열반의 법을 이룬다고 하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먼저 착한 뿌리를 쌓고 모았기 때문에 후생 안에서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를 만나서 순해탈분의 착한 뿌리를 일으키는 것인가.
먼저 착한 뿌리를 쌓고 모으지 않은 것인가.
만약 먼저 착한 뿌리를 쌓고 모은다고 하면 그는 곧 이생 안에서 부처님ㆍ가르침ㆍ상가를 만나서 착한 뿌리를 일으키게 되거늘 후생 안에서야 비로소 열반의 법을 이룬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 그 원인 같은 것은 텅 비어서 결과가 없어야 한다.
만약 먼저 착한 뿌리를 쌓고 모으지 않는다고 하면 이는 바로 앞뒤가 서로 비슷해서 다 같이 아직은 착한 부리를 쌓아 모으지 못하였거늘 후생 안에서야 비로소 열반의 법을 이루는 것이요,
곧 이생 안에서 그렇지 못한다 함이 도리에 맞지 않다.
다시 다음에,
요약하여 열 가지의 성문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냐 하면,
⑴맑고 깨끗한 계의 성문[淸淨界聲聞]이요,
⑵이미 인연을 만난 성문[己遇緣聲聞]이요,
⑶섞여 물듦의 세계에 태어난 성문[離染界生聲聞]이요,
⑷맑고 깨끗한 세계에 태어난 성문[淸淨界生聲聞]이요,
⑸말법 때에 태어난 성문[末法時生聲聞]이요,
⑹어질고 착한 때에 태어난 성문[賢善時生聲聞]이요,
⑺아직 눈을 얻지 못한 성문[未得眼聲聞]이요,
⑻이미 눈을 얻은 성문[己得眼聲聞]이요,
⑼맑고 깨끗한 눈의 성문[淸淨眼聲聞]이요,
⑽극히 맑고 깨끗한 눈의 성문[極淸淨眼聲聞]이다.
요약하여 열 가지의 성문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냐 하면,
⑴맑고 깨끗한 계의 성문[淸淨界聲聞]이요,
⑵이미 인연을 만난 성문[己遇緣聲聞]이요,
⑶섞여 물듦의 세계에 태어난 성문[離染界生聲聞]이요,
⑷맑고 깨끗한 세계에 태어난 성문[淸淨界生聲聞]이요,
⑸말법 때에 태어난 성문[末法時生聲聞]이요,
⑹어질고 착한 때에 태어난 성문[賢善時生聲聞]이요,
⑺아직 눈을 얻지 못한 성문[未得眼聲聞]이요,
⑻이미 눈을 얻은 성문[己得眼聲聞]이요,
⑼맑고 깨끗한 눈의 성문[淸淨眼聲聞]이요,
⑽극히 맑고 깨끗한 눈의 성문[極淸淨眼聲聞]이다.
⑴만약 성문의 종성(種性)에 편안히 머무름이 있으면,
이가 첫 번째의 성문이다.
⑵이미 법(法)에 든 이이니,
이를 두 번째라 한다.
⑶만약 성문이 태어난 세계의 그 안에 많은 고통들을 만나게 됨이 있으면,
다섯 가지 흐림[五濁]일 것이니,
이른바 목숨 흐림[壽濁]에서 유정 흐림[有情濁]가지이다.
이를 섞여 물듦의 세계에 태어난 성문이라 한다.
⑷위와 서로 반대의 것은,
바로 맑고 깨끗한 세계에 태어난 성문인 줄 알 것이다.
이가 첫 번째의 성문이다.
⑵이미 법(法)에 든 이이니,
이를 두 번째라 한다.
⑶만약 성문이 태어난 세계의 그 안에 많은 고통들을 만나게 됨이 있으면,
다섯 가지 흐림[五濁]일 것이니,
이른바 목숨 흐림[壽濁]에서 유정 흐림[有情濁]가지이다.
이를 섞여 물듦의 세계에 태어난 성문이라 한다.
⑷위와 서로 반대의 것은,
바로 맑고 깨끗한 세계에 태어난 성문인 줄 알 것이다.
⑸말법 때에 태어난 성문들의 모양은 어떻게 알아야 되느냐 하면,
모든 성문으로서 장차 오는 세상에 법이 소멸하는 때에 태어나서 대부분이 이끗과 공경을 사랑하여 소중히 여기면서 미묘한 법은 어기며,
모든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과 바르지 않은 법을 다 같이 더욱 왕성하게 하고 간탐과 질투 등의 모든 따르는 번뇌[隨煩惱]에게 그 마음이 얽히고 흔들려서 처소에 대한 간탐ㆍ집에 대한 간탐ㆍ이익에 대한 간탐ㆍ공경에 대한 간탐ㆍ명예에 대한 간탐ㆍ법에 대한 간탐을 두루 갖추지 아니함이 없으며,
아첨과 속임이 항상 그의 앞에 나타나 있으며,
내지 살아가기 위하여 출가(出家)를 구하는 것이요 열반을 위해서가 아니며,
들떠서 동요함이 많고 뽐내고 경솔하고 입이 억세고 허풍을 잘 떨고 게으르고 잊어버리면서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해 있지 아니하며,
헷갈려 어지러움이 많고 근성(根性)은 암둔하고 하열하여 모든 번뇌가 많으며,
번뇌의 현행은 끊임이 없고 근심과 괴로움이 비록 많으나 싫증을 내지 아니하며,
많은 대중의 모임을 좋아하고 아련야(阿練若)의 맨 끝 침구를 버리고서 대중 안으로 들어오며,
마을 옆을 가까이 하고 온갖 친구에 기쁨을 내며,
이와 같아서 내지,
익살을 즐기고 시끄러운 대중을 좋아하고 난잡함을 즐기며,
스스로가 뽐내어 제멋대로 하면서 몸의 계율2)과 마음과 지혜[戒心慧]를 잘 닦지 못한다.
부처님ㆍ세존이 말씀한 바는 매우 깊어서 ≺공≻과 상응하며 연성(緣性)과 연기(緣起)와 연생(緣生)에 따르는 온갖 경전에 대하여는 다 같이 버리고서,
세간에서 총명한 이가 지은 바 풍송(諷誦)에 대하여는 말을 구미고 문장을 다듬어 세전(世典)에 따르면서 공경하고 받아 지니어 깊이 기쁨을 내며,
바른 법에 비슷한 것과 바른 법 아닌 것 안에서는 망령되이 법이라는 생각을 내면서 바른 법안에서는 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내며,
또 그것을 좋아하고 드러내고 널리 펴고 열어 보이면서 바른 법과 비나야(毗奈耶)를 비방하며,
바른 법과 비나야를 말한 푸드갈라에 대하여는 원수라는 생각을 내면서 쉬이라[尸羅]를 많이 범하고 모든 나쁜 법을 익힌다.
속은 실로 부패하였으면서도 바깥으로는 어질고 착한 척하며,
내지 실은 맑은 행[梵行]이 아닌데도 스스로가 많은 행이라 일컫고,
남음 없거나 남음이 있는 두 편[無餘有餘二篇]의 중한 죄조차 오히려 일부러 일으켜서 헐고 범하거든 하물며 중간과 경한 것이겠는가.
범한 뒤에는 많이가 법대로 들추어내는 것은 진실한 의요(意樂)에서가 아니며,
짐짓 모든 친한 벗의 집과 음식을 보시하는 집과는 교호(交好)를 맺으려 하여,
모든 집에 있는 이가 하는 일과 할 바로서 옳지 않는 것을 이끄는 많은 사업 안에서 좋아하여 영위하며,
집에 있는 속인들에게 친애와 존중과 공경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많이 내면서도 법을 같이하며 맑은 행을 닦는 이에게는 거의가 기뻐하거나 편안히 머무르지 아니한다.
속임수로 모양 따위를 나타내어 삿된 생활[邪命]의 법을 일으키고 점차로 서로가 모량하는 마음을 일으키어 갖가지 싸움과 쟁송을 하기 좋아하며,
대체로 가산과 살림 도구를 축적하기 좋아하고 거짓으로 법식(法式) 둠으로써 훌륭한 것을 삼으며,
제도할 바 사람을 출가시키어 계를 받게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물듦이 있는 마음[有染心]으로써 공양과 섬김에 충당하기 위함이면서도 말하기를,
‘나는 이제 다만 가엾이 여김의 인연만으로 그를 제도하여 출가시키며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한다’라고 한다.
기르는 바 함께 살거나 가까이 사는 제자로서 어제나 공양하고 모시면서 마음대로 움직여 주는 이면 그가 비록 완만(緩慢)하더라도 깊이 사랑하고 기뻐하면서 거두어 주면서도 그 밖에 그렇지 아니한 이면 비록 완만하지 않더라도 역시 사랑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고 거두어 주지도 아니하며,
만약 비구로서 여러 친족이 많아서 널리 이끗과 옷 등의 물건을 불러옴을 보면 문득 존중하고 공경하고 공양하면서도 만약 비구로서 친족이 없음을 보면 비록 욕심이 적음[少欲] 등의 공덕을 갖추었다곤 치더라도 오히려 업신여기면서 식용(食用)과 상기카[僧祗] 및 특별한 인물로 뽑아 쓰지 아니하다.
도무지 뉘우치거나 부끄러워함이 없고 계율 범한 이를 거두기 좋아하며,
붕당 맺기를 즐기고 뉘우치는 심정은 아주 미열하거나 혹은 너무나 지나친다.
무릇 들어서 받는 바는 모두가 명성과 영예와 찬송을 위해서거나 혹은 또 많이가 이끗과 공경을 위한 것이어서 도무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조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모든 섞여 물듦의 법을 모두 다 성취한다.
법말(法末)의 때라 함은,
이른바 큰 스승께서 열반하신 뒤에 성인의 가르침이 없어진 때이니,
그 때에 이러한 성문 제자들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거개가 나쁜 갈래에 떨어져서 나라카에 가서 난다.
⑹만약 위와 서로 반대되는 물들지 않는 법[不染汚法]을 성취함이 있으면,
이를 어질고 착한 때에 태어난 성문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여래가 처음 세상에 출현하실 때에는 아직 군살이 생기지 못하였을 때거나,
큰 스승이 그 앞에 계실 때거나 혹은 어떤 무리는 열반하신 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의 대부분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도리어 착한 갈래를 얻어서 천상의 즐거운 세계 안에 가서 난다.
⑺만약 모든 범부로서의 성문이면,
아직 눈을 얻지 못하였다고 하다.
⑻예류(預流)와 일래(一來) 및 불환(不還) 등을 이미 문을 얻었다고 하다.
⑼혜해탈(慧解脫)의 아라한을 맑고 깨끗한 눈이라 한다.
⑽만약 삼명(三明)을 갖춘 구분해탈(俱分解脫)을 한 이면,
극히 맑고 깨끗한 눈이라 한다.
다시 다음에,
어떤 성문으로서 비록 알맞는 대로 용맹스럽게 정진한다 하더라도 현재 법에서 남보다 훌륭하게 뛰어난 법을 증득할 수 없거나,
혹은 어떤 성문으로서 현재 법 안에서 힘이 있어서 남보다 훌륭하게 뛰어난 법을 증득하였어도 사문의 결과[沙門果]의 증득은 방일함 때문에 증득하지 못하기도 한다.
다시 다음에,
월유경(月喩經)3) 안의 구계(具戒)와 구덕(具德)과 유화(柔和)와 선법(善法)이라는 모든 글귀의 차별을 풀이하겠다.
성문 중에는 요약하여 네 가지의 깨끗하고 미묘한 법이 있어서 모든 유정의 볼 수 있는 이로 하여금 몸과 말과 뜻으로 말미암아 한량 없는 복을 나게 한다.
무엇이 네 가지냐 하면,
구족 쉬이라[具足尸羅]4)에 머물러서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지키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경에서와 같다.
이것을 첫째의 법이라 한다.
다시 욕심이 적고 기뻐하여 만족히 여김[少欲喜足]과,
내지 모든 샘[漏]이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고 찬미하는 것이니,
이것이 둘째의 법이다.
다시 부드럽고 온화[柔和]하여 함께 삼게 되기가 쉽고 지혜 있는 맑은 행을 같이하는 이를 괴롭히지 아니할뿐더러 모든 비구로 하여금 같은 처소임을 기쁘게 하며,
또 네 가지 증정[四種證淨]을 갖추 성취하는 것이니,
이것이 셋째의 법이다.
또,
이익에 즐겨 빠지지 않고 공경에 집착하지 아니하며,
다른 이를 가엾이 여기고 자기의 선행을 감추면서 자기의 악행을 들어내며,
비록 또 실로 갖가지의 공덕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있음을 알게 하려 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나는 이러한 공덕을 성취하였다’ 함을 알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넷째의 법이다.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성문으로서 다른 이의 집에 가려고 하면,
먼저 세 가지의 따르는 번뇌[隨煩惱]를 끊어 없앤 연후에야 가야 한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첫째는 친우의 집을 맺는 따르는 번뇌요,
둘째는 집에 대한 간탐[家慳]의 따르는 번뇌요,
셋째는 물듦이 있는 마음으로써 법 보시[法施]를 행하는 따르는 번뇌이다.
이 안에서,
모든 성문으로서 장차 오는 세상에 법이 소멸하는 때에 태어나서 대부분이 이끗과 공경을 사랑하여 소중히 여기면서 미묘한 법은 어기며,
모든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과 바르지 않은 법을 다 같이 더욱 왕성하게 하고 간탐과 질투 등의 모든 따르는 번뇌[隨煩惱]에게 그 마음이 얽히고 흔들려서 처소에 대한 간탐ㆍ집에 대한 간탐ㆍ이익에 대한 간탐ㆍ공경에 대한 간탐ㆍ명예에 대한 간탐ㆍ법에 대한 간탐을 두루 갖추지 아니함이 없으며,
아첨과 속임이 항상 그의 앞에 나타나 있으며,
내지 살아가기 위하여 출가(出家)를 구하는 것이요 열반을 위해서가 아니며,
들떠서 동요함이 많고 뽐내고 경솔하고 입이 억세고 허풍을 잘 떨고 게으르고 잊어버리면서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해 있지 아니하며,
헷갈려 어지러움이 많고 근성(根性)은 암둔하고 하열하여 모든 번뇌가 많으며,
번뇌의 현행은 끊임이 없고 근심과 괴로움이 비록 많으나 싫증을 내지 아니하며,
많은 대중의 모임을 좋아하고 아련야(阿練若)의 맨 끝 침구를 버리고서 대중 안으로 들어오며,
마을 옆을 가까이 하고 온갖 친구에 기쁨을 내며,
이와 같아서 내지,
익살을 즐기고 시끄러운 대중을 좋아하고 난잡함을 즐기며,
스스로가 뽐내어 제멋대로 하면서 몸의 계율2)과 마음과 지혜[戒心慧]를 잘 닦지 못한다.
부처님ㆍ세존이 말씀한 바는 매우 깊어서 ≺공≻과 상응하며 연성(緣性)과 연기(緣起)와 연생(緣生)에 따르는 온갖 경전에 대하여는 다 같이 버리고서,
세간에서 총명한 이가 지은 바 풍송(諷誦)에 대하여는 말을 구미고 문장을 다듬어 세전(世典)에 따르면서 공경하고 받아 지니어 깊이 기쁨을 내며,
바른 법에 비슷한 것과 바른 법 아닌 것 안에서는 망령되이 법이라는 생각을 내면서 바른 법안에서는 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내며,
또 그것을 좋아하고 드러내고 널리 펴고 열어 보이면서 바른 법과 비나야(毗奈耶)를 비방하며,
바른 법과 비나야를 말한 푸드갈라에 대하여는 원수라는 생각을 내면서 쉬이라[尸羅]를 많이 범하고 모든 나쁜 법을 익힌다.
속은 실로 부패하였으면서도 바깥으로는 어질고 착한 척하며,
내지 실은 맑은 행[梵行]이 아닌데도 스스로가 많은 행이라 일컫고,
남음 없거나 남음이 있는 두 편[無餘有餘二篇]의 중한 죄조차 오히려 일부러 일으켜서 헐고 범하거든 하물며 중간과 경한 것이겠는가.
범한 뒤에는 많이가 법대로 들추어내는 것은 진실한 의요(意樂)에서가 아니며,
짐짓 모든 친한 벗의 집과 음식을 보시하는 집과는 교호(交好)를 맺으려 하여,
모든 집에 있는 이가 하는 일과 할 바로서 옳지 않는 것을 이끄는 많은 사업 안에서 좋아하여 영위하며,
집에 있는 속인들에게 친애와 존중과 공경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많이 내면서도 법을 같이하며 맑은 행을 닦는 이에게는 거의가 기뻐하거나 편안히 머무르지 아니한다.
속임수로 모양 따위를 나타내어 삿된 생활[邪命]의 법을 일으키고 점차로 서로가 모량하는 마음을 일으키어 갖가지 싸움과 쟁송을 하기 좋아하며,
대체로 가산과 살림 도구를 축적하기 좋아하고 거짓으로 법식(法式) 둠으로써 훌륭한 것을 삼으며,
제도할 바 사람을 출가시키어 계를 받게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물듦이 있는 마음[有染心]으로써 공양과 섬김에 충당하기 위함이면서도 말하기를,
‘나는 이제 다만 가엾이 여김의 인연만으로 그를 제도하여 출가시키며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한다’라고 한다.
기르는 바 함께 살거나 가까이 사는 제자로서 어제나 공양하고 모시면서 마음대로 움직여 주는 이면 그가 비록 완만(緩慢)하더라도 깊이 사랑하고 기뻐하면서 거두어 주면서도 그 밖에 그렇지 아니한 이면 비록 완만하지 않더라도 역시 사랑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고 거두어 주지도 아니하며,
만약 비구로서 여러 친족이 많아서 널리 이끗과 옷 등의 물건을 불러옴을 보면 문득 존중하고 공경하고 공양하면서도 만약 비구로서 친족이 없음을 보면 비록 욕심이 적음[少欲] 등의 공덕을 갖추었다곤 치더라도 오히려 업신여기면서 식용(食用)과 상기카[僧祗] 및 특별한 인물로 뽑아 쓰지 아니하다.
도무지 뉘우치거나 부끄러워함이 없고 계율 범한 이를 거두기 좋아하며,
붕당 맺기를 즐기고 뉘우치는 심정은 아주 미열하거나 혹은 너무나 지나친다.
무릇 들어서 받는 바는 모두가 명성과 영예와 찬송을 위해서거나 혹은 또 많이가 이끗과 공경을 위한 것이어서 도무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조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모든 섞여 물듦의 법을 모두 다 성취한다.
법말(法末)의 때라 함은,
이른바 큰 스승께서 열반하신 뒤에 성인의 가르침이 없어진 때이니,
그 때에 이러한 성문 제자들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거개가 나쁜 갈래에 떨어져서 나라카에 가서 난다.
⑹만약 위와 서로 반대되는 물들지 않는 법[不染汚法]을 성취함이 있으면,
이를 어질고 착한 때에 태어난 성문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여래가 처음 세상에 출현하실 때에는 아직 군살이 생기지 못하였을 때거나,
큰 스승이 그 앞에 계실 때거나 혹은 어떤 무리는 열반하신 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의 대부분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도리어 착한 갈래를 얻어서 천상의 즐거운 세계 안에 가서 난다.
⑺만약 모든 범부로서의 성문이면,
아직 눈을 얻지 못하였다고 하다.
⑻예류(預流)와 일래(一來) 및 불환(不還) 등을 이미 문을 얻었다고 하다.
⑼혜해탈(慧解脫)의 아라한을 맑고 깨끗한 눈이라 한다.
⑽만약 삼명(三明)을 갖춘 구분해탈(俱分解脫)을 한 이면,
극히 맑고 깨끗한 눈이라 한다.
다시 다음에,
어떤 성문으로서 비록 알맞는 대로 용맹스럽게 정진한다 하더라도 현재 법에서 남보다 훌륭하게 뛰어난 법을 증득할 수 없거나,
혹은 어떤 성문으로서 현재 법 안에서 힘이 있어서 남보다 훌륭하게 뛰어난 법을 증득하였어도 사문의 결과[沙門果]의 증득은 방일함 때문에 증득하지 못하기도 한다.
다시 다음에,
월유경(月喩經)3) 안의 구계(具戒)와 구덕(具德)과 유화(柔和)와 선법(善法)이라는 모든 글귀의 차별을 풀이하겠다.
성문 중에는 요약하여 네 가지의 깨끗하고 미묘한 법이 있어서 모든 유정의 볼 수 있는 이로 하여금 몸과 말과 뜻으로 말미암아 한량 없는 복을 나게 한다.
무엇이 네 가지냐 하면,
구족 쉬이라[具足尸羅]4)에 머물러서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지키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경에서와 같다.
이것을 첫째의 법이라 한다.
다시 욕심이 적고 기뻐하여 만족히 여김[少欲喜足]과,
내지 모든 샘[漏]이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고 찬미하는 것이니,
이것이 둘째의 법이다.
다시 부드럽고 온화[柔和]하여 함께 삼게 되기가 쉽고 지혜 있는 맑은 행을 같이하는 이를 괴롭히지 아니할뿐더러 모든 비구로 하여금 같은 처소임을 기쁘게 하며,
또 네 가지 증정[四種證淨]을 갖추 성취하는 것이니,
이것이 셋째의 법이다.
또,
이익에 즐겨 빠지지 않고 공경에 집착하지 아니하며,
다른 이를 가엾이 여기고 자기의 선행을 감추면서 자기의 악행을 들어내며,
비록 또 실로 갖가지의 공덕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있음을 알게 하려 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나는 이러한 공덕을 성취하였다’ 함을 알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넷째의 법이다.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성문으로서 다른 이의 집에 가려고 하면,
먼저 세 가지의 따르는 번뇌[隨煩惱]를 끊어 없앤 연후에야 가야 한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첫째는 친우의 집을 맺는 따르는 번뇌요,
둘째는 집에 대한 간탐[家慳]의 따르는 번뇌요,
셋째는 물듦이 있는 마음으로써 법 보시[法施]를 행하는 따르는 번뇌이다.
이 안에서,
성문은 여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친우의 집을 맺는 따르는 번뇌를 끊은 뒤에야
비로소 다른 이의 집에 가야 한다.
이른바,
⑴때때로는 가되 자주는 가지 말아야 하며,
⑵사랑할 만한 일에 대하여 이치답지 않게 그 모양에 집착되어 잠시라도 탐애가 생기면
⑴때때로는 가되 자주는 가지 말아야 하며,
⑵사랑할 만한 일에 대하여 이치답지 않게 그 모양에 집착되어 잠시라도 탐애가 생기면
바로 부끄러워하며,
⑶흉포하거나 입이 억세거나 허풍을 떠는 삿된 행으로써
⑶흉포하거나 입이 억세거나 허풍을 떠는 삿된 행으로써
의복 등의 물건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⑷잘 스스로가 수호하여
그의 몸을 잘 가리워서 몸으로써 닿지 않아야 할 바면 닿지 아니하고,
또한 앉지 않아야 할 데면 앉지 아니하고,
마침내 먹지 않아야 할 바면 먹지 아니하고,
도한 마침내 마시지 않아야 할 바면 마시지 아니하고,
또 받지 않아야 할 바면 받지 아니하며,
또
마침내 먹지 않아야 할 바면 먹지 아니하고,
도한 마침내 마시지 않아야 할 바면 마시지 아니하고,
또 받지 않아야 할 바면 받지 아니하며,
또
⑸멀리 여의는 마음[遠離心]에 따르고 멀리 여의는 마음에 나아가 향하고 멀리 여의는 마음에 이웃함으로써 모든 선행을 찾고 생각하며,
⑹마치 산악(山岳)처럼 나아가기 어려운 처소인 깨끗한 믿음이 아닌 집을 깨끗이 믿게 하고,
옛부터 다니던 맑고 깨끗한 샘물처럼 깨끗이 믿는 집을 갑절 더하게 한다.
또,
여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집에 대한 간탐의 따르는 번뇌를 끊은 뒤에야 비로소 다른 이의 집에 가야 한다.
이른바,
⑴다른 이의 집에 가서 유정들의 일에 대하여는 물들지도 아니하고 집착하지도 아니하며,
유정의 일에서와 같이 ⑵이끗의 일에서도,
⑶공경의 일에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⑷또,
이익 없는 데 대하여 근심과 괴로움을 내지 아니하며,
이익 없는 데서와 같이 ⑸공경하지 않은 데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⑹또,
자기와 다른 이의 이끗 안에서는 그 마음이 평등하여 자기의 얻는 바 이끗과 공경에 대하여 스스로가 찬미하지도 않고 다른 이의 얻는 바 이끗과 공경에 대하여도 마침내 비방하지 아니한다.
또,
여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물듦이 있는 마음으로 법 보시를 행하는 따르는 번뇌를 끊은 뒤에야 비로소 다른 이의 집에 가야 한다.
이른바,
⑴다른 이들이 자기에게 깨끗이 믿을 것을 바라지 아니하며,
⑵벗어남의 법[出離法]에 대하여 사실대로 분명히 알고 또 다른 이에게 세 가지 순수하고 착한 의요[純善意樂]를 일으켜야 한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⑶즐거움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며,
⑷괴로움을 없애 버리기 때문이며,
⑸공경하고 들어서 받고 법과 법을 따라 수행하는 이가 훌륭한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⑹나는 괴로움[生苦] 따위의 괴로움에 괴로움을 받는 이는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고,
만약 이미 해탈한 이는 바로 모든 법의 미묘하고 착한 법의 성품을 반연으로 하는 수우트라[素咀纜]와 비나야와 마아트리카아[摩咀理迦]의 포섭하는 바 세속의 바른 법 안에서 받아 지니고 익고 외워서 바른 법이 오래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그 때문에 널리 펴 말한다.
처음의 따르는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난잡함이 없는 데에 머무름으로써 마지막을 삼으며,
둘째의 따르는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재물을 바르게 수용함으로써 마지막을 삼으며,
셋째의 따르는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법을 바르게 수용함으로써 마지막을 삼는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벌지가경(伐地迦經)5)을 풀이하겠다.
⑹마치 산악(山岳)처럼 나아가기 어려운 처소인 깨끗한 믿음이 아닌 집을 깨끗이 믿게 하고,
옛부터 다니던 맑고 깨끗한 샘물처럼 깨끗이 믿는 집을 갑절 더하게 한다.
또,
여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집에 대한 간탐의 따르는 번뇌를 끊은 뒤에야 비로소 다른 이의 집에 가야 한다.
이른바,
⑴다른 이의 집에 가서 유정들의 일에 대하여는 물들지도 아니하고 집착하지도 아니하며,
유정의 일에서와 같이 ⑵이끗의 일에서도,
⑶공경의 일에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⑷또,
이익 없는 데 대하여 근심과 괴로움을 내지 아니하며,
이익 없는 데서와 같이 ⑸공경하지 않은 데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⑹또,
자기와 다른 이의 이끗 안에서는 그 마음이 평등하여 자기의 얻는 바 이끗과 공경에 대하여 스스로가 찬미하지도 않고 다른 이의 얻는 바 이끗과 공경에 대하여도 마침내 비방하지 아니한다.
또,
여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물듦이 있는 마음으로 법 보시를 행하는 따르는 번뇌를 끊은 뒤에야 비로소 다른 이의 집에 가야 한다.
이른바,
⑴다른 이들이 자기에게 깨끗이 믿을 것을 바라지 아니하며,
⑵벗어남의 법[出離法]에 대하여 사실대로 분명히 알고 또 다른 이에게 세 가지 순수하고 착한 의요[純善意樂]를 일으켜야 한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⑶즐거움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며,
⑷괴로움을 없애 버리기 때문이며,
⑸공경하고 들어서 받고 법과 법을 따라 수행하는 이가 훌륭한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⑹나는 괴로움[生苦] 따위의 괴로움에 괴로움을 받는 이는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고,
만약 이미 해탈한 이는 바로 모든 법의 미묘하고 착한 법의 성품을 반연으로 하는 수우트라[素咀纜]와 비나야와 마아트리카아[摩咀理迦]의 포섭하는 바 세속의 바른 법 안에서 받아 지니고 익고 외워서 바른 법이 오래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그 때문에 널리 펴 말한다.
처음의 따르는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난잡함이 없는 데에 머무름으로써 마지막을 삼으며,
둘째의 따르는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재물을 바르게 수용함으로써 마지막을 삼으며,
셋째의 따르는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법을 바르게 수용함으로써 마지막을 삼는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벌지가경(伐地迦經)5)을 풀이하겠다.
만약 어떤 성문으로서 물듦과 깨끗함[染淨]에 대하여 방편으로 교묘히 하려 하면,
요약하여 세 가지 것을 두루하게 분명히 알아야 하다.
요약하여 세 가지 것을 두루하게 분명히 알아야 하다.
이른바,
⑴섞여 물듦[雜染]과 맑고 깨끗함[淸淨]의 의지할 바[所依] 안에서는
⑴섞여 물듦[雜染]과 맑고 깨끗함[淸淨]의 의지할 바[所依] 안에서는
섞여 물듦과 맑고 깨끗함의 의지할 바 ★★때문에,
⑵섞여 물듦의 안에서는 섞여 물듦으로 말미암아서,
⑶맑고 깨끗함 안에서는 맑고 깨끗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다.
⑵섞여 물듦의 안에서는 섞여 물듦으로 말미암아서,
⑶맑고 깨끗함 안에서는 맑고 깨끗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다.
⑴무엇을 섞여 물듦과 맑고 깨끗함의 의지할 바이냐 하면,
바로 이 몸의 빛깔 있음[有色]과 추중(麤重)이니,
자세하게 설명하면 경에서와 같다.
바로 이 몸의 빛깔 있음[有色]과 추중(麤重)이니,
자세하게 설명하면 경에서와 같다.
이것은 바로 어리석은 이가 지혜가 없는지라
무명(無明)에 나아가는 이의 섞여 물듦의 의지할 바며,
역시 이는 총명하여 큰 지혜가 있는지라
역시 이는 총명하여 큰 지혜가 있는지라
밝음에 나아가는 이의 맑고 깨끗함의 의지할 바이다.
⑵무엇을 섞여 물듦이라 하느냐 하면,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업을 조작하려 하기 위하여
먼저 머트럽게 생각하고 나서
그 뒤에 몸과 말로써 온갖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않은 업을 조작하며,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다섯 갈래[五趣]의 생사 안에서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아니함을 받아서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다섯 갈래[五趣]의 생사 안에서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아니함을 받아서
괴로움이 있거나 괴로움이 없는 자체(自體)가 나게 한다.
⑶무엇을 맑고 깨끗함이라 하느냐 하면,
두 가지 배움[二種學]은 맑고 깨끗한 품[淸淨品] 안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삼는다.
첫째의 배움이란 진여지(眞如智)로써 의지를 삼아 능히 짓는 바가 있는 것이며,
둘째의 배움이란 번뇌를 위하여 모두 매임 여읨[離繫]을 얻는 것이다.
두 가지 배움[二種學]은 맑고 깨끗한 품[淸淨品] 안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삼는다.
첫째의 배움이란 진여지(眞如智)로써 의지를 삼아 능히 짓는 바가 있는 것이며,
둘째의 배움이란 번뇌를 위하여 모두 매임 여읨[離繫]을 얻는 것이다.
다시 다음에,
바로 이 맑고 깨끗함은 요약하여 다섯 가지 인연[五因]으로 드러내 보임을 받게 된다.
무엇이 다섯 가지냐 하면,
첫째는 바르게 말씀하는 이[正語者]요,
둘째는 바르게 행하는 이[正行者]요,
셋째는 바른 행[正行]이요,
넷째는 뛰어난 마음의 배움으로 다스릴 바 따르는 번뇌의 끊어짐[增上心學所治隨煩惱斷]이요,
다섯째는 뛰어난 지혜의 배움으로 다스릴 바 따르는 번뇌의 끊어짐[增上慧學所隨煩惱斷]이다.
바로 이 맑고 깨끗함은 요약하여 다섯 가지 인연[五因]으로 드러내 보임을 받게 된다.
무엇이 다섯 가지냐 하면,
첫째는 바르게 말씀하는 이[正語者]요,
둘째는 바르게 행하는 이[正行者]요,
셋째는 바른 행[正行]이요,
넷째는 뛰어난 마음의 배움으로 다스릴 바 따르는 번뇌의 끊어짐[增上心學所治隨煩惱斷]이요,
다섯째는 뛰어난 지혜의 배움으로 다스릴 바 따르는 번뇌의 끊어짐[增上慧學所隨煩惱斷]이다.
이 안에서,
여래는 바로 바르게 말씀하는 이며,
근기가 성숙된 성문은 바로 바르게 행하는 이요,
또한 총명하고 슬기로운 이라 하며,
진리와 지혜[諦智]의 포섭하는 바를 바른 행이라 한다.
번뇌를 능히 끊는 이치에 의거하면 이는 위없는 다스림인 까닭에 요약하여 다섯 가지가 있는데,
뛰어난 마음의 배움으로 다스릴 바 따르는 번뇌라 한다.
여래는 바로 바르게 말씀하는 이며,
근기가 성숙된 성문은 바로 바르게 행하는 이요,
또한 총명하고 슬기로운 이라 하며,
진리와 지혜[諦智]의 포섭하는 바를 바른 행이라 한다.
번뇌를 능히 끊는 이치에 의거하면 이는 위없는 다스림인 까닭에 요약하여 다섯 가지가 있는데,
뛰어난 마음의 배움으로 다스릴 바 따르는 번뇌라 한다.
첫째는 멀리 떨어진 데에 사는 이에게 있는 바의 모든 ★★덮개[蓋]이며,
둘째는 가르쳐 주고 가르쳐 경계하는 데에서 참고 견디지 못하는 이에게 있는 바의 분내어 괴로워함[忿惱]이며,
셋째는 이끗과 공경함에 대하여 깊이 탐착하는 이에게 있는 바의 간탐과 시새움[慳嫉]이며,
넷째는 먼저 있던 바와 받았던 바 경계에 대하여 삿된 생각을 일으킴이며,
다섯째는 배울 바를 버림에 따라 탐애를 분별하는 것이다.
둘째는 가르쳐 주고 가르쳐 경계하는 데에서 참고 견디지 못하는 이에게 있는 바의 분내어 괴로워함[忿惱]이며,
셋째는 이끗과 공경함에 대하여 깊이 탐착하는 이에게 있는 바의 간탐과 시새움[慳嫉]이며,
넷째는 먼저 있던 바와 받았던 바 경계에 대하여 삿된 생각을 일으킴이며,
다섯째는 배울 바를 버림에 따라 탐애를 분별하는 것이다.
요약하여 세 가지 법이 있는데,
뛰어난 지혜로 다스릴 바 따르는 번뇌라 한다.
뛰어난 지혜로 다스릴 바 따르는 번뇌라 한다.
처음은 세속의 이치 문[世俗理門]에 대하여
법과 뜻[法義]을 알지 못한 이에게 있는 바의 무명(無明)이며,
다음은 이미 법과 뜻을 아는 모든 범부로서
모든 진리 안에서 있는 바 망설임과 의혹을 아직 끊지 못한 것이며,
맨 나중에는 이미 진리의 자취를 본 모든 배울 것 있는 이[有學]로서
수도(修道)에 포섭된 지혜로 다스릴 바 온갖 젠체함[我慢]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따르는 번뇌를 영원히 끊어 없앰으로 말미암아
가장 잘 맑고 깨끗한 뛰어난 마음 배움과 뛰어난 지혜 배움의 아라한의 과위[阿羅漢果]를 증득한 줄 알지니,
이 아라한이야말로 바로 가장 지극하게 맑고 깨끗함[最極淸淨]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이 아라한이야말로 바로 가장 지극하게 맑고 깨끗함[最極淸淨]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이 섞여 물듦과 맑고 깨끗함의 의지할 바[所依]에서
이 섞여 물듦과 맑고 깨끗함의 의지할 바[所依]에서
모든 성문들은 요약하여 세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두루하게 분명히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제 성품[自性]으로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인연(因緣)으로 말미암아서요,
셋째는 과환(過患)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첫째는 제 성품[自性]으로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인연(因緣)으로 말미암아서요,
셋째는 과환(過患)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제 성품으로 말미암아서라 함은,
이 사람 몸[人身]에 있는 바 제 성품은 세 가지 모양으로 드러내 보인다.
⑴빛깔이 있음[有色]으로 말미암아서 그 밖의 온갖 몸의 공통한 모양[共相]을 드러내며,
⑵추중(麤重)으로 말미암아서 그 저마다 따로따로 몸의 제만의 모양[自相]을 드러내며,
⑶맑고 깨끗하지 아니함[不淸淨]으로 말미암아서 하늘의 몸[天身]과 동분(同分)이 아닌 모양을 드러낸다.
이 사람 몸[人身]에 있는 바 제 성품은 세 가지 모양으로 드러내 보인다.
⑴빛깔이 있음[有色]으로 말미암아서 그 밖의 온갖 몸의 공통한 모양[共相]을 드러내며,
⑵추중(麤重)으로 말미암아서 그 저마다 따로따로 몸의 제만의 모양[自相]을 드러내며,
⑶맑고 깨끗하지 아니함[不淸淨]으로 말미암아서 하늘의 몸[天身]과 동분(同分)이 아닌 모양을 드러낸다.
인연으로 말미암아서라 함은, 요약하여 세 가지가 있다.
온갖 몸의 공통한 모양의 인연은 바로 네 가지 원소[四大種]이며,
저마다 따로따로의 제만의 모양인 사람 몸의 인연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을 태어나게 하는 인연이니,
이른바 부모의 부정(不淨)의 화합이다.
둘째는 이미 태어났으면 머무르게 하는 인연이니,
미움과 밥 따위로 키우고 기르는 바를 말한다.
저마다 따로따로의 제만의 모양인 사람 몸의 인연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을 태어나게 하는 인연이니,
이른바 부모의 부정(不淨)의 화합이다.
둘째는 이미 태어났으면 머무르게 하는 인연이니,
미움과 밥 따위로 키우고 기르는 바를 말한다.
과환으로 말미암아서라 함은,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무상한 성질[無常性]과 괴로움의 성질[苦性]이다.
만약 차운 때이면 차운 괴로움을 다스리기 위하여 덮고 가리우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다스림을 삼으며,
만약 더운 때이면 더운 괴로움을 다스리기 위하여 목욕하기를 추구함으로써 다스림을 삼으며,
길을 건너거나 일을 하여 피로함이 있는 이면 그 노고를 다스리기 위하여 안마 따위를 추구함으로써 다스림을 삼나니,
이런 종류를 괴로움의 성질이라 하는 줄 알 것이다.
무상한 성질[無常性]과 괴로움의 성질[苦性]이다.
만약 차운 때이면 차운 괴로움을 다스리기 위하여 덮고 가리우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다스림을 삼으며,
만약 더운 때이면 더운 괴로움을 다스리기 위하여 목욕하기를 추구함으로써 다스림을 삼으며,
길을 건너거나 일을 하여 피로함이 있는 이면 그 노고를 다스리기 위하여 안마 따위를 추구함으로써 다스림을 삼나니,
이런 종류를 괴로움의 성질이라 하는 줄 알 것이다.
손ㆍ흙덩이ㆍ막대기 따위에 맞아서 파괴하는 법이기 때문에,
칼에 베어서 끊어지고,
무너지는 법이기 때문에,
만약 죽어 없어지면 땅에 묻혀 지기 때문에,
혹은 불에 타기 때문에,
혹은 갖가지 축생이며 벌레들에게 먹히기 때문에,
혹은 저 모든 바람이거나 햇빛에 말려지기 때문에 모두가 이는 흩어져 무너지고 닳아 없어지는 법의 성질이니,
이런 종류가 바로 무상한 성질인 줄 알아야 한다.
칼에 베어서 끊어지고,
무너지는 법이기 때문에,
만약 죽어 없어지면 땅에 묻혀 지기 때문에,
혹은 불에 타기 때문에,
혹은 갖가지 축생이며 벌레들에게 먹히기 때문에,
혹은 저 모든 바람이거나 햇빛에 말려지기 때문에 모두가 이는 흩어져 무너지고 닳아 없어지는 법의 성질이니,
이런 종류가 바로 무상한 성질인 줄 알아야 한다.
옛날에 모였다가 이제는 어기게 됨을 떠나 흩어짐[離散]이라 하고,
흩어진 뒤에는 변하여 무너지고 맨 나중에는 온통 다하여짐을 닳아 없어짐[磨滅]이라고 한다.
다시 다음에,
생각함의 반연할 바[思所緣]로 인하여 이름[名]6)은 온갖 것을 압도하는지라 이름에서 더 지나간 것이 없다.
‘이 이름이란 한 가지 법으로 말미암아서 모두가 그에 따라 자재하게 지어간다.’고 말함과 같은 것은,
흩어진 뒤에는 변하여 무너지고 맨 나중에는 온통 다하여짐을 닳아 없어짐[磨滅]이라고 한다.
다시 다음에,
생각함의 반연할 바[思所緣]로 인하여 이름[名]6)은 온갖 것을 압도하는지라 이름에서 더 지나간 것이 없다.
‘이 이름이란 한 가지 법으로 말미암아서 모두가 그에 따라 자재하게 지어간다.’고 말함과 같은 것은,
이 말에는 어떠한 이치가 있는가.
만약 요약하여 말하면,
맑고 깨끗함이 원인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이며,
제만의 모양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이며,
섞여 물듦의 원인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이며,
맑고 깨끗함이 원인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이며,
제만의 모양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이며,
섞여 물듦의 원인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이며,
푸드갈라의 나 없음[補特伽羅無我]과 법의 나 없음[法無我]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푸드갈라의 나 없음의 네 가지 빛깔 없는 쌓임[四無色蘊]을 두루하게 분명히 알고서 온갖 제 경계 모양[自境界相]을 끊으면
이름은 온갖 것을 압도하는 것이며,
만약 법의 나 없음의 제 나름 분별성[遍計所執自性]의 세속의 말과 이름을 두루하게 분명히 알고서 온갖 저 의지할 바 모양[所依相]을 제거하면
이름은 온갖 것을 압도하는 것이다.
저 네 가지 빛깔 없는 쌓임을 지나고서 모든 나 모양의 일이란 기필고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저 세속의 말과 이름의 제 나름 분별성을 지나고서 모양의 일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두 가지를 다 같이 분명히 알지 못하면
저 세속의 말과 이름의 제 나름 분별성을 지나고서 모양의 일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두 가지를 다 같이 분명히 알지 못하면
온갖 경계 모양의 섞여 물듦의 따라 굴름[隨轉]과
온갖 경계 모양의 있는 바 섞여 물듦의 것을 일으킨다.
이 뛰어난 힘[增上力]으로 인하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에,
이 비밀한 뜻[密意]에 의하여 ★★바가바안[薄伽梵]께서는 말씀하셨다.
법의 제 성품[法自性]을 집착하기 때문에
나의 성품[我性]을 집착하여 구르며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저것을 깨달으며
깨달았기 때문에 환멸(還滅)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가 있다.
세존은 모든 성문들을 위하여 바로 번뇌를 깨끗이 함의 반연할 바 경계[淨煩惱所緣境界]를 말씀하셨나니,
괴로움의 진리[苦諦] 등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
【문】만약 진실하여 뒤바뀜이 없는 모양이 바로 진리의 모양이라면,
모든 외도의 소견과 모든 삿되게 훌륭한 알음[邪勝鮮]과 모든 삿된 이론을 진실이 아닌지라 다 같이 이는 뒤바뀜이거늘,
어찌하여 진리[諦]에 포섭되는가.
이 비밀한 뜻[密意]에 의하여 ★★바가바안[薄伽梵]께서는 말씀하셨다.
법의 제 성품[法自性]을 집착하기 때문에
나의 성품[我性]을 집착하여 구르며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저것을 깨달으며
깨달았기 때문에 환멸(還滅)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가 있다.
세존은 모든 성문들을 위하여 바로 번뇌를 깨끗이 함의 반연할 바 경계[淨煩惱所緣境界]를 말씀하셨나니,
괴로움의 진리[苦諦] 등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
【문】만약 진실하여 뒤바뀜이 없는 모양이 바로 진리의 모양이라면,
모든 외도의 소견과 모든 삿되게 훌륭한 알음[邪勝鮮]과 모든 삿된 이론을 진실이 아닌지라 다 같이 이는 뒤바뀜이거늘,
어찌하여 진리[諦]에 포섭되는가.
만약 포섭되지 않는다 하면,
그것은 장차 오는 세상의 뒤의 존재[候有]를 받지 않아야 할뿐더러
그것은 장차 오는 세상의 뒤의 존재[候有]를 받지 않아야 할뿐더러
괴로움의 원인이 아니어야 한다.
【답】비록 진실이 아니고 뒤바뀜이 아니라 하더라도
괴로움과 쌓임[苦集]의 두 가지 진리에 포섭된다고 설명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비록 모두가 바로 삿된 성질[邪性]에 포섭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비록 모두가 바로 삿된 성질[邪性]에 포섭된다손 치더라도
곧 이 삿된 성질의 모양은 바로 진실이고 모두가 뒤바뀐 것이 아니로되,
이는 괴로움의 성질이기 때문이며,
이는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는 괴로움의 성질이기 때문이며,
이는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두 가지 모양[二相]으로 말미암아서 무상함[無常]의 뜻을 나타낸다.
첫째는 대승(大乘)의 도리에 의하는 모양이며,
둘째는 성문승(聲聞乘)의 도리에 의하는 모양이니,
존재함이 아니라[非有]는 뜻과 그의 모양은 없어지고 무너진다는 뜻이다.
두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괴로움[苦]의 뜻을 나타내 보이나니,
존재함이 아니라는 집착의 습기(習氣)며,
추중(麤重)이라는 뜻과 세 가지 느낌[三受]이 따르는 바인 나는 괴로움[生苦] 따위 여덟 가지 괴로움 모양의 구름이라는 뜻이다.
두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공≻(空)의 뜻을 나타내 보이나니,
푸드갈라의 제 성품은 멀리 여읨의 모양[遠離相]이라는 뜻과 모든 법의 제 성품은 멀리 여읨의 모양이라는 뜻이다.
두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나 없음[無我]의 뜻을 나타낸다.
대승의 도리와 성문승의 도리로 푸드갈라의 제 성품은 나 없음의 모양이라는 뜻과 모든 법의 제 성품은 나 없음의 모양이라는 뜻이다.
다시,
두 가지 가르침이 있나니,
무상함의 가르침[無常敎]과 비롯함이 없음의 가르침[無始敎]이다.
또 두 가지의 통달함이 있나니,
무상함의 가르침[無常敎]과 비롯함이 없음의 가르침[無始敎]이다.
또 두 가지의 통달함이 있나니,
함이 있는 경계의 통달함[有爲界通達]과 함이 없는 경계의 통달함[無爲界通達]이다.
다시 다음에,
다섯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만약 무상함이라면,
이는 괴로움이다.
첫째는 섭수함[攝受]으로 말미암아서이니,
무상한 모든 행[諸行]은 모두가 추중 때문에 섭수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법의 성품[法性]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이는 나는 괴로움 따위의 괴로운 법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붙따름[隨逐]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저 세 가지 괴로움[三苦]이 항상 붙따르기 때문이다.
넷째는 원인[因]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이는 행(行)을 더욱 자라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집착함[執着]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이는 뒤바뀜의 반연할 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다섯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만약 괴로움이라면,
바로 나 없음이다.
첫째는 괴로운 모든 행을 여의면 나라 함이 있을 수 없기 대문이며,
둘째는 저 괴로운 모든 행은 뭇 인연에 의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저 괴로운 모든 행은 뭇 인연에 의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작용(作用)이 없기 때문이며,
넷째는 찰나에 남이 있어서 항상 따라 구르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차츰차츰 서로가 의지하기 때문이다.
【문】만약 괴로움의 진리에 포섭된다면,
모두가 사랑할 만하지 못하고 즐길 만하지 못하면서 이는 괴로움이며 이는 손해이며 이는 어김의 것인가.
또,
사랑할 만하지 못하고 즐길만 하지 못하면서 이는 괴로움이며 이는 손해이며 이는 어김의 것이라면,
모두가 괴로움의 진리에 포섭되는가.
【답】만약 사랑할 만하지 못하고 즐길 만하지 못하면서 이는 괴로움이요 이는 손해요 이는 어김의 것이라면,
모두가 이는 괴로움의 진리에 포섭되는 줄 알아야 한다.
혹은 이는 괴로움의 진리에 포섭되면서도 사랑할 만하지 못하는 등등이 있나니,
고고(苦苦)에 포섭되는 모든 행을 제외한 그 밖의 괴고(壞苦)와 행고(行苦)에 포섭되는 모든 행이다.
【문】부처님ㆍ세존은 여덟 가지 모양으로써 괴로움의 진리를 분별하셨나니,
이른바 나는 괴로움ㆍ늙는 괴로움 내지 한데 묶은 다섯 가지 쌓임의 괴로움[五取蘊]이다.
이 안에서,
몇 가지의 모양이 고고의 성질을 나타내었고 몇 가지의 모양이 괴고의 성질을 나타내었으며,
몇 가지의 모양이 행고의 성질을 나타내었는가.
【답】앞에서 다섯 가지가 고고의 성질을 나타내었으며 가운데의 두 가지가 괴고의 성질을 나타내었으며,
사랑한 이와 이별하는 괴로움[愛別離苦]은 이미 얻게 된 사랑한 바가 변하여 무너지기 때문이고,
구하여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은 아직 얻지 못한 사랑한 바가 변하여 무너지기 때문이다.
맨 나중의 하나로 한데 묶은 다섯 가지 쌓임의 괴로움은 행고의 성질을 나타내었다.
【문】만약 무상한 것이면 이는 괴로움인가.
또 괴로운 것이면 이는 무상함인가.
【답】모든 괴로움은 모두가 무상한 것이로되,
무상하면서도 괴로움이 아닌 것이 있나니,
도의 진리[道諦]이다.
왜 그러냐 하면,
도(道)는 괴로운 느낌[苦受] 따위에 포섭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고가 아니다.
도는 변하여 무너지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변하는 때의 괴고를 냄이 있겠는가.
도는 온갖 섞여 물듦 품[雜染品]의 추중을 해탈하기 때문이고 온갖 나기[生]의 상속함을 어기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역시 행고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문】만약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면,
모두가 ≺공≻하고 나 없음인가.
또,
≺공≻하고 나 없는 것이면,
모두가 무상하고 괴로움인가.
【답】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면 모두가 ≺공≻하고 나없음이로되,
≺공≻하고 나 없으면서도 무상하거나 괴로움이 아닌 것이 있나니,
이 안에서의 괴로움의 진리와 쌓임의 진리는 네 가지7)를 다 갖추어 있고,
도의 진리는 세 가지만 있으며,
사라짐의 진리[滅諦]는 두 가지만이 있어서 무상함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니다.
【문】만약 무상하면서 괴로운 것이면,
모두가 무상하기 때문에 이는 괴로움인가.
【답】혹은 무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제 성품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행이 괴고 때문에 괴로움이라면 그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바로 괴로운 것이요,
만약 고고 때문에 괴롭거나 행고 때문에 괴로움이라면 그것은 제 성품 때문에 이는 괴로운 것이니,
손해하고 괴롭히는 성질이기 때문이며,
괴로움을 주무르는 바이기 때문이다.
【문】만약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라면,
역시 쌓임의 진리인가.
또,
이것이 쌓임의 진리라면,
역시 괴로움의 진리인가.
【답】모든 이 쌓임의 진리는 모두가 이는 괴로움의 진리로되,
혹은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면서도 쌓임의 진리가 아니기도 하나니,
온갖 아라한으로서 맑고 깨끗함이 계속되는 동안에 있는 바의 착함[善]이거나 무기(無記)인 온갖 세간의 법,
온갖 범부 몸인 동안에 있는 바의 결과 이숙[果異熟]에 포섭한 무기의 모든 법,
온갖 현재의 사람의 작용[士用]으로 내는 바의 괴로움이거나 즐거움이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과 함께 행하여지는 무기의 모든 행은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만에 포섭되는 줄 알아야 한다.
【문】만약 뒤의 존재[後有]를 싫어하고 뒤의 존재를 등져서 세간 벗어나는 도[出世道]를 이끄는 세간의 모든 법이면,
그것이 어떠한 인연으로 쌓임의 진리에 포섭되는가.
【답】비록 그의 제 성품이 뒤의 존재를 싫어하고 등진다 하더라도 뒤의 존재의 몸과 말과 뜻[身語意]의 미묘한 행에 따르는 것이니,
이 때문에 역시 쌓임의 진리에 포섭된다.
【문】만약 온갖 뒤의 존재의 업번뇌(業煩惱)는 모양[相]으로 말미암아서 모두가 이는 쌓임의 진리에 포섭된다면 어떠한 인연으로 세존께서는 욕망[愛]만을 시설하시었는가.
【답】이 욕망은 잡음[取]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업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모든 일에 두루하기 때문이며,
이 욕망이 나는 때에는 열다섯 가지 옳음과 이익이 없는 것[無義利]을 널리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두루하다 함은,
이와 같은 욕망을 순후유의 욕망[順後有愛]이라하나니,
희탐구행의 욕망[喜貪俱行愛]과 피피희락의 욕망[彼彼喜樂愛]을 모든 일에 두루하다고 함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순후유의 욕망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뒤의 존재의 경계를 반연[緣後有境]하며,
둘째는 이것의 뒤의 존재의 원인[後有因]이다.
희탐구행의 욕망이라 함은,
이미 얻어진 뜻에 맞는 경계에서거나 혹은 바르게 수용(受用)하는 동안에서의 있는 바 서로가 여의지 않고 오래 머무는 욕망이다.
피피희락의 욕망이라 함은,
아직은 얻지 못한 구하는 바의 경계에서거나 혹은 화합하기 위하여 혹은 여의지 않기 위하여 혹은 더욱 더하기 위하여서의 모든 있는 바의 욕망이다.
【문】만약 이것이 욕망이라면,
역시 이는 순후유(順後有)이고 희탐구행(喜貪俱行)이고 피피희락(彼彼喜樂)인가.
【답】네 구절을 만들어야 한다.
혹은 이것이 욕망이면서도 순후유가 아니고 희탐구행이 아니고 피피희락이 아니기도 하나니,
위의 해탈을 바라 구하면서 증득하려 하는 것이다.
혹은 순후유요 희탐구행이요 피피희락이면서도 이는 욕망이 아니기도 하나니,
순후유와 희탐구행과 피피희락의 욕망과 그 나머지 번뇌와 상응하게 있는 바 느낌[受]과 생각[想]과 의지[思]와 무명(無明) 등이다.
바로 이 세 가지 욕망은 이는 셋째의 구절이다.
위의 그러한 것을 제외한 이것이 넷째의 귀절이다.
【문】만약 순후유의 욕망이면,
이는 희탐구행의 욕망인가.
또,
희탐구행의 욕망이면,
역시 순후유의 욕망인가.
【답】모든 희탐구행의 욕망은 역시 이는 순후유의 욕망이로되,
혹은 순후유의 욕망이면서도 희탐구행의 욕망이 아니기도 하나니,
더러움에 물듦의 근심과 함께 행하여지는 욕망[染汚憂俱行愛]이거나 혹은 따로 떨어짐의 욕망[別離愛]이거나 혹은 화합하지 않음의 욕망[不和合愛]이다.
【문】만약 순후유의 욕망이면,
역시 피피희락의 욕망인가.
또,
피피희락의 욕망이면 역시 순후유의 욕망인가.
【답】만약 피피희락의 욕망이면,
역시 이는 순후유의 욕망이로되,
혹은 순후유의 욕망이면서도 피피희락의 욕망이 아니기도 하나니,
뒤의 존재의 경계를 반연하는 욕망[緣後有境愛]과 희탁구행의 욕망이다.
【문】만약 희탐구행의 욕망이면,
이는 피피희락의 욕망인가.
또,
피피희락의 욕망이면 역시 희탐구행의 욕망인가.
【답】네 가지 구절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 얻어진 사랑할 만한 경계에서거나 혹은 바르게 수용하는 동안에서의 있는 바 욕망은 이는 첫째의 구절이며,
바로 사랑할 만한 것으로서 미래에 장차 얻음이 아직 결정되지 못한 동안에서의 있는 바 욕망은 이는 둘째의 구절이며,
바로 이것을 장차 얻음이 결정적인 동안에서의 있는 바 욕망은 이는 셋째의 구절이며,
위의 그러한 것을 제외한 이것이 넷째의 구절이다.
【문】만약 욕심 세계 매임[欲界繫]의 느낌[受]을 성취하면,
형상 세계 매임[色界繫]의 느낌도 성취하는가.
또 형상 세계 매임의 느낌을 성취하면,
욕심 세계 매임의 느낌도 성취하는가.
【답】네 가지 구절을 만들어야 한다.
혹은 욕심 세계 매임은 성취하였으되 형상 세계 매임은 그렇지 아니함이 있나니,
욕심 세계에 태어나서 아직은 형상 세계의 저 다스림[對治]을 얻지 못한 것이다.
혹은 형상 세계 매임은 성취하였으되 욕심 세계 매임은 그렇지 아니하기도 하나니,
형상 세계에 태어난 것이다.
혹은 욕심 세계의 매임도 형상 세계의 매임도 성취하기도 하나니,
욕심 세계에 태어나서 형상 세계의 저 다스림을 이미 얻은 것이다.
혹은 다 같이 성취하지 아니하기도 하나니,
무형 세계에 태어났거나 또 욕심 세계ㆍ형상 세계ㆍ무형 세계 안에 태어나서 할 일을 다 마치고 세간 벗어난 도[出世道]와 생각 끓은 신정[滅盡定]에 머무르는 것이다.
욕심 세계 매임을 형상 세계 매임과 대조시켜 네 가지 구절을 만듦이 그러한 것처럼,
욕심 세계 매임을 무형 세계 매임[無色界繫]과 대조시키고 욕심 세계 매임을 매이지 않음[不繫]과 대조시키고 형상 세계 매임을 무형 세계 매임과 대조시키고 형상 세계 매임을 매이지 않음과 대조시키고 무형 세계 매임을 매이지 않음과 대조시키는 것도 그에 알맞는 대로 모두 네 가지 구절을 만들 것이다.
【문】모든 미묘한 욕심[妙欲]은 역시 이는 근심되고 허물됨[過患過失]과 상응한 욕심인가.
또,
이 근심되고 허물됨과 사응한 욕심이면,
이는 미묘한 욕심인가.
【답】네 가지 구절로 만들어야 한다.
⑴혹은 미묘한 욕심이면서도 근심되고 허물됨과 상응한 욕심이 아닌 것이 있나니,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으로 더러움에 물듦[染汚]이 현행(現行)하지 아니 하거나 그에 대하여 공력을 짓지 아니하여도 죄 없이 안락하게 머무르면서 맑은 행[梵行]을 능히 껴잡아 들이는 것이다.
두 가지 모양[二相]으로 말미암아서 무상함[無常]의 뜻을 나타낸다.
첫째는 대승(大乘)의 도리에 의하는 모양이며,
둘째는 성문승(聲聞乘)의 도리에 의하는 모양이니,
존재함이 아니라[非有]는 뜻과 그의 모양은 없어지고 무너진다는 뜻이다.
두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괴로움[苦]의 뜻을 나타내 보이나니,
존재함이 아니라는 집착의 습기(習氣)며,
추중(麤重)이라는 뜻과 세 가지 느낌[三受]이 따르는 바인 나는 괴로움[生苦] 따위 여덟 가지 괴로움 모양의 구름이라는 뜻이다.
두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공≻(空)의 뜻을 나타내 보이나니,
푸드갈라의 제 성품은 멀리 여읨의 모양[遠離相]이라는 뜻과 모든 법의 제 성품은 멀리 여읨의 모양이라는 뜻이다.
두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서 나 없음[無我]의 뜻을 나타낸다.
대승의 도리와 성문승의 도리로 푸드갈라의 제 성품은 나 없음의 모양이라는 뜻과 모든 법의 제 성품은 나 없음의 모양이라는 뜻이다.
다시,
두 가지 가르침이 있나니,
무상함의 가르침[無常敎]과 비롯함이 없음의 가르침[無始敎]이다.
또 두 가지의 통달함이 있나니,
무상함의 가르침[無常敎]과 비롯함이 없음의 가르침[無始敎]이다.
또 두 가지의 통달함이 있나니,
함이 있는 경계의 통달함[有爲界通達]과 함이 없는 경계의 통달함[無爲界通達]이다.
다시 다음에,
다섯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만약 무상함이라면,
이는 괴로움이다.
첫째는 섭수함[攝受]으로 말미암아서이니,
무상한 모든 행[諸行]은 모두가 추중 때문에 섭수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법의 성품[法性]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이는 나는 괴로움 따위의 괴로운 법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붙따름[隨逐]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저 세 가지 괴로움[三苦]이 항상 붙따르기 때문이다.
넷째는 원인[因]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이는 행(行)을 더욱 자라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집착함[執着]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이는 뒤바뀜의 반연할 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다섯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만약 괴로움이라면,
바로 나 없음이다.
첫째는 괴로운 모든 행을 여의면 나라 함이 있을 수 없기 대문이며,
둘째는 저 괴로운 모든 행은 뭇 인연에 의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저 괴로운 모든 행은 뭇 인연에 의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작용(作用)이 없기 때문이며,
넷째는 찰나에 남이 있어서 항상 따라 구르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차츰차츰 서로가 의지하기 때문이다.
【문】만약 괴로움의 진리에 포섭된다면,
모두가 사랑할 만하지 못하고 즐길 만하지 못하면서 이는 괴로움이며 이는 손해이며 이는 어김의 것인가.
또,
사랑할 만하지 못하고 즐길만 하지 못하면서 이는 괴로움이며 이는 손해이며 이는 어김의 것이라면,
모두가 괴로움의 진리에 포섭되는가.
【답】만약 사랑할 만하지 못하고 즐길 만하지 못하면서 이는 괴로움이요 이는 손해요 이는 어김의 것이라면,
모두가 이는 괴로움의 진리에 포섭되는 줄 알아야 한다.
혹은 이는 괴로움의 진리에 포섭되면서도 사랑할 만하지 못하는 등등이 있나니,
고고(苦苦)에 포섭되는 모든 행을 제외한 그 밖의 괴고(壞苦)와 행고(行苦)에 포섭되는 모든 행이다.
【문】부처님ㆍ세존은 여덟 가지 모양으로써 괴로움의 진리를 분별하셨나니,
이른바 나는 괴로움ㆍ늙는 괴로움 내지 한데 묶은 다섯 가지 쌓임의 괴로움[五取蘊]이다.
이 안에서,
몇 가지의 모양이 고고의 성질을 나타내었고 몇 가지의 모양이 괴고의 성질을 나타내었으며,
몇 가지의 모양이 행고의 성질을 나타내었는가.
【답】앞에서 다섯 가지가 고고의 성질을 나타내었으며 가운데의 두 가지가 괴고의 성질을 나타내었으며,
사랑한 이와 이별하는 괴로움[愛別離苦]은 이미 얻게 된 사랑한 바가 변하여 무너지기 때문이고,
구하여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은 아직 얻지 못한 사랑한 바가 변하여 무너지기 때문이다.
맨 나중의 하나로 한데 묶은 다섯 가지 쌓임의 괴로움은 행고의 성질을 나타내었다.
【문】만약 무상한 것이면 이는 괴로움인가.
또 괴로운 것이면 이는 무상함인가.
【답】모든 괴로움은 모두가 무상한 것이로되,
무상하면서도 괴로움이 아닌 것이 있나니,
도의 진리[道諦]이다.
왜 그러냐 하면,
도(道)는 괴로운 느낌[苦受] 따위에 포섭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고가 아니다.
도는 변하여 무너지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변하는 때의 괴고를 냄이 있겠는가.
도는 온갖 섞여 물듦 품[雜染品]의 추중을 해탈하기 때문이고 온갖 나기[生]의 상속함을 어기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역시 행고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문】만약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면,
모두가 ≺공≻하고 나 없음인가.
또,
≺공≻하고 나 없는 것이면,
모두가 무상하고 괴로움인가.
【답】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면 모두가 ≺공≻하고 나없음이로되,
≺공≻하고 나 없으면서도 무상하거나 괴로움이 아닌 것이 있나니,
이 안에서의 괴로움의 진리와 쌓임의 진리는 네 가지7)를 다 갖추어 있고,
도의 진리는 세 가지만 있으며,
사라짐의 진리[滅諦]는 두 가지만이 있어서 무상함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니다.
【문】만약 무상하면서 괴로운 것이면,
모두가 무상하기 때문에 이는 괴로움인가.
【답】혹은 무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제 성품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행이 괴고 때문에 괴로움이라면 그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바로 괴로운 것이요,
만약 고고 때문에 괴롭거나 행고 때문에 괴로움이라면 그것은 제 성품 때문에 이는 괴로운 것이니,
손해하고 괴롭히는 성질이기 때문이며,
괴로움을 주무르는 바이기 때문이다.
【문】만약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라면,
역시 쌓임의 진리인가.
또,
이것이 쌓임의 진리라면,
역시 괴로움의 진리인가.
【답】모든 이 쌓임의 진리는 모두가 이는 괴로움의 진리로되,
혹은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면서도 쌓임의 진리가 아니기도 하나니,
온갖 아라한으로서 맑고 깨끗함이 계속되는 동안에 있는 바의 착함[善]이거나 무기(無記)인 온갖 세간의 법,
온갖 범부 몸인 동안에 있는 바의 결과 이숙[果異熟]에 포섭한 무기의 모든 법,
온갖 현재의 사람의 작용[士用]으로 내는 바의 괴로움이거나 즐거움이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과 함께 행하여지는 무기의 모든 행은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만에 포섭되는 줄 알아야 한다.
【문】만약 뒤의 존재[後有]를 싫어하고 뒤의 존재를 등져서 세간 벗어나는 도[出世道]를 이끄는 세간의 모든 법이면,
그것이 어떠한 인연으로 쌓임의 진리에 포섭되는가.
【답】비록 그의 제 성품이 뒤의 존재를 싫어하고 등진다 하더라도 뒤의 존재의 몸과 말과 뜻[身語意]의 미묘한 행에 따르는 것이니,
이 때문에 역시 쌓임의 진리에 포섭된다.
【문】만약 온갖 뒤의 존재의 업번뇌(業煩惱)는 모양[相]으로 말미암아서 모두가 이는 쌓임의 진리에 포섭된다면 어떠한 인연으로 세존께서는 욕망[愛]만을 시설하시었는가.
【답】이 욕망은 잡음[取]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업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모든 일에 두루하기 때문이며,
이 욕망이 나는 때에는 열다섯 가지 옳음과 이익이 없는 것[無義利]을 널리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두루하다 함은,
이와 같은 욕망을 순후유의 욕망[順後有愛]이라하나니,
희탐구행의 욕망[喜貪俱行愛]과 피피희락의 욕망[彼彼喜樂愛]을 모든 일에 두루하다고 함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순후유의 욕망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뒤의 존재의 경계를 반연[緣後有境]하며,
둘째는 이것의 뒤의 존재의 원인[後有因]이다.
희탐구행의 욕망이라 함은,
이미 얻어진 뜻에 맞는 경계에서거나 혹은 바르게 수용(受用)하는 동안에서의 있는 바 서로가 여의지 않고 오래 머무는 욕망이다.
피피희락의 욕망이라 함은,
아직은 얻지 못한 구하는 바의 경계에서거나 혹은 화합하기 위하여 혹은 여의지 않기 위하여 혹은 더욱 더하기 위하여서의 모든 있는 바의 욕망이다.
【문】만약 이것이 욕망이라면,
역시 이는 순후유(順後有)이고 희탐구행(喜貪俱行)이고 피피희락(彼彼喜樂)인가.
【답】네 구절을 만들어야 한다.
혹은 이것이 욕망이면서도 순후유가 아니고 희탐구행이 아니고 피피희락이 아니기도 하나니,
위의 해탈을 바라 구하면서 증득하려 하는 것이다.
혹은 순후유요 희탐구행이요 피피희락이면서도 이는 욕망이 아니기도 하나니,
순후유와 희탐구행과 피피희락의 욕망과 그 나머지 번뇌와 상응하게 있는 바 느낌[受]과 생각[想]과 의지[思]와 무명(無明) 등이다.
바로 이 세 가지 욕망은 이는 셋째의 구절이다.
위의 그러한 것을 제외한 이것이 넷째의 귀절이다.
【문】만약 순후유의 욕망이면,
이는 희탐구행의 욕망인가.
또,
희탐구행의 욕망이면,
역시 순후유의 욕망인가.
【답】모든 희탐구행의 욕망은 역시 이는 순후유의 욕망이로되,
혹은 순후유의 욕망이면서도 희탐구행의 욕망이 아니기도 하나니,
더러움에 물듦의 근심과 함께 행하여지는 욕망[染汚憂俱行愛]이거나 혹은 따로 떨어짐의 욕망[別離愛]이거나 혹은 화합하지 않음의 욕망[不和合愛]이다.
【문】만약 순후유의 욕망이면,
역시 피피희락의 욕망인가.
또,
피피희락의 욕망이면 역시 순후유의 욕망인가.
【답】만약 피피희락의 욕망이면,
역시 이는 순후유의 욕망이로되,
혹은 순후유의 욕망이면서도 피피희락의 욕망이 아니기도 하나니,
뒤의 존재의 경계를 반연하는 욕망[緣後有境愛]과 희탁구행의 욕망이다.
【문】만약 희탐구행의 욕망이면,
이는 피피희락의 욕망인가.
또,
피피희락의 욕망이면 역시 희탐구행의 욕망인가.
【답】네 가지 구절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 얻어진 사랑할 만한 경계에서거나 혹은 바르게 수용하는 동안에서의 있는 바 욕망은 이는 첫째의 구절이며,
바로 사랑할 만한 것으로서 미래에 장차 얻음이 아직 결정되지 못한 동안에서의 있는 바 욕망은 이는 둘째의 구절이며,
바로 이것을 장차 얻음이 결정적인 동안에서의 있는 바 욕망은 이는 셋째의 구절이며,
위의 그러한 것을 제외한 이것이 넷째의 구절이다.
【문】만약 욕심 세계 매임[欲界繫]의 느낌[受]을 성취하면,
형상 세계 매임[色界繫]의 느낌도 성취하는가.
또 형상 세계 매임의 느낌을 성취하면,
욕심 세계 매임의 느낌도 성취하는가.
【답】네 가지 구절을 만들어야 한다.
혹은 욕심 세계 매임은 성취하였으되 형상 세계 매임은 그렇지 아니함이 있나니,
욕심 세계에 태어나서 아직은 형상 세계의 저 다스림[對治]을 얻지 못한 것이다.
혹은 형상 세계 매임은 성취하였으되 욕심 세계 매임은 그렇지 아니하기도 하나니,
형상 세계에 태어난 것이다.
혹은 욕심 세계의 매임도 형상 세계의 매임도 성취하기도 하나니,
욕심 세계에 태어나서 형상 세계의 저 다스림을 이미 얻은 것이다.
혹은 다 같이 성취하지 아니하기도 하나니,
무형 세계에 태어났거나 또 욕심 세계ㆍ형상 세계ㆍ무형 세계 안에 태어나서 할 일을 다 마치고 세간 벗어난 도[出世道]와 생각 끓은 신정[滅盡定]에 머무르는 것이다.
욕심 세계 매임을 형상 세계 매임과 대조시켜 네 가지 구절을 만듦이 그러한 것처럼,
욕심 세계 매임을 무형 세계 매임[無色界繫]과 대조시키고 욕심 세계 매임을 매이지 않음[不繫]과 대조시키고 형상 세계 매임을 무형 세계 매임과 대조시키고 형상 세계 매임을 매이지 않음과 대조시키고 무형 세계 매임을 매이지 않음과 대조시키는 것도 그에 알맞는 대로 모두 네 가지 구절을 만들 것이다.
【문】모든 미묘한 욕심[妙欲]은 역시 이는 근심되고 허물됨[過患過失]과 상응한 욕심인가.
또,
이 근심되고 허물됨과 사응한 욕심이면,
이는 미묘한 욕심인가.
【답】네 가지 구절로 만들어야 한다.
⑴혹은 미묘한 욕심이면서도 근심되고 허물됨과 상응한 욕심이 아닌 것이 있나니,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으로 더러움에 물듦[染汚]이 현행(現行)하지 아니 하거나 그에 대하여 공력을 짓지 아니하여도 죄 없이 안락하게 머무르면서 맑은 행[梵行]을 능히 껴잡아 들이는 것이다.
⑵혹은 근심되고 허물됨과 상응한 욕심이면서도 미묘한 욕심이 아니기도 하나니,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으로 한결같이 사랑할 만하지 아니하고 즐길 만하지 아니하고 기뻐할 만하지 아니하여 뜻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과 번뇌의 욕심이다.
⑶혹은 미묘한 욕심이면서 역시 이는 근심되고 허물됨과 사응한 욕심이기도 하나니,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으로 한결같이 사랑할 만하지 아니하고 즐길 만하지 아니하고 기뻐할 만하지 아니하여 뜻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과 번뇌의 욕심이다.
⑶혹은 미묘한 욕심이면서 역시 이는 근심되고 허물됨과 사응한 욕심이기도 하나니,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으로 더러움에 물듦이 현행하지 아니할 수 없으면서도 한결같이 사랑할 만하고,
내지 뜻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내지 뜻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⑷혹은 미묘한 욕심도 아닐뿐더러 근심되고 허물됨과 상응한 욕심이 아니기도 하나니,
온갖 형상 세계ㆍ무형 세계의 번뇌와 그리고 일이다.
세존은 이 미묘한 욕심과 근심되고 허물됨과 상응한 욕심에 의하여 ‘망령되게 분별하는 탐냄은 바로 사람[士夫]의 욕심이니라.’고 하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온갖 형상 세계ㆍ무형 세계의 번뇌와 그리고 일이다.
세존은 이 미묘한 욕심과 근심되고 허물됨과 상응한 욕심에 의하여 ‘망령되게 분별하는 탐냄은 바로 사람[士夫]의 욕심이니라.’고 하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다시 다음에,
이 욕망에는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나니
이 욕망에는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나니
처음은 바로 존재함의 욕망[有愛]이요,
나중은 수용함의 욕망[受用愛]이다.
나중은 수용함의 욕망[受用愛]이다.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이미 얻었거나 아직 얻지 못한 것에서 수용하는 데의 차별 때문이며,
또 곧 이 욕망은 경계의 차별 때문이다.
이미 얻었거나 아직 얻지 못한 것에서 수용하는 데의 차별 때문이며,
또 곧 이 욕망은 경계의 차별 때문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욕심 세계 욕망[欲愛]과
욕심 세계 욕망[欲愛]과
형상 세계 욕망[色愛]과
무형 세계 욕망[無色愛]이다.
욕심 세계에 태어나서 욕심 세계의 뒤의 존재[後有]를 바라며 구하는 이가
이미 얻어진 수용한 바의 일을 기뻐하고
아직은 얻지 못한 수용할 바의 일을 기뻐하는 데에 있는 바의 욕망들을 바로 욕심 세계의 욕망이라 한다.
욕심 세계에 태어났거나
형상 세계에 나서 이미 욕심 세계의 욕심은 떠났고 형상 세계의 뒤의 존재를 바라며 구하는 이가 이미 얻어진 형상 세계의 사마아파티[等至]를 기뻐하고 아직 얻지는 못하였으되
보다 으뜸가는 사마아파티를 기뻐하는 데에 있는 바의 욕망들을
바로 형상 세계 욕망이라 하며,
형상 세계 욕망이 그러한 것처럼
무형 세계 욕망도 그의 알맞음에 따라서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곧,
이 뒤의 존재의 욕망은
이 뒤의 존재의 욕망은
항상하다는 소견[常見]과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을 의지로 삼는 까닭에
존재함의 욕망과 존재함이 없는 욕망[無有愛]을 세우나니,
이 때문에이 욕망을 모든 일에 두루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이 욕망을 모든 일에 두루한다고 한다.
어떻게 이 욕망이 나는 때에 열다섯 가지의 옳지 않음을 널리 일으키느냐 하면,
첫째는 수면(隨眠)을 견고하게 하며,
둘째는 얽음[纏]으로 말미암아서 온갖 임자 마음ㆍ딸린 마음의 법[心心所法]을 물들여 괴롭히며,
셋째는 마음의 상속함을 반연할 바 경계에서 뒤바뀌게 구르게 하며,
넷째는 잡음[取]에 포섭된 그 밖의 번뇌를 일으키며,
다섯째는 제 종류의 상속함을 벌려 세우고 상속시키며,
여섯째는 따르면서 아직 생기지 않은 나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키며,
일곱째는 따르면서 이미 생겼던 나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더욱 광대하게 하며,
여덟째는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을 장애하여 생길 수 없게 하며,
아홉째는 이미 생긴 착한 법을 장애하여 머물러서 잊지 않게 하거나 갑절 더욱 키워서 광대할 수 없게 하며,
열째는 나쁜 행을 행하게 하는 까닭에 온갖 나쁜 갈래[惡趣]의 고통을 결합하여 모으며,
열한째는 뒤의 존재를 바라며 구하는 까닭에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따위의 괴로움을 결합하여 모으며,
열두째는 유정들로 하여금 열반을 두려워하게 하며,
열셋째는 유정들로 하여금 나고 죽는 삿된 집착에서 있는 바의 공덕과 훌륭한 이익을 좋아하게 하며,
열넷째는 나고 죽음에서와 같이 경계에서도 또한 그러하며,
열다섯째는 유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목숨 해칠 것을 생각하거나 다른 이를 해칠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세한 설명은 경전에서와 같으며,
내지 느낌[受]과 욕망[愛]으로 내는 바의 마음은 모두가 근심과 괴로움이다.
첫째는 수면(隨眠)을 견고하게 하며,
둘째는 얽음[纏]으로 말미암아서 온갖 임자 마음ㆍ딸린 마음의 법[心心所法]을 물들여 괴롭히며,
셋째는 마음의 상속함을 반연할 바 경계에서 뒤바뀌게 구르게 하며,
넷째는 잡음[取]에 포섭된 그 밖의 번뇌를 일으키며,
다섯째는 제 종류의 상속함을 벌려 세우고 상속시키며,
여섯째는 따르면서 아직 생기지 않은 나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키며,
일곱째는 따르면서 이미 생겼던 나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더욱 광대하게 하며,
여덟째는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을 장애하여 생길 수 없게 하며,
아홉째는 이미 생긴 착한 법을 장애하여 머물러서 잊지 않게 하거나 갑절 더욱 키워서 광대할 수 없게 하며,
열째는 나쁜 행을 행하게 하는 까닭에 온갖 나쁜 갈래[惡趣]의 고통을 결합하여 모으며,
열한째는 뒤의 존재를 바라며 구하는 까닭에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따위의 괴로움을 결합하여 모으며,
열두째는 유정들로 하여금 열반을 두려워하게 하며,
열셋째는 유정들로 하여금 나고 죽는 삿된 집착에서 있는 바의 공덕과 훌륭한 이익을 좋아하게 하며,
열넷째는 나고 죽음에서와 같이 경계에서도 또한 그러하며,
열다섯째는 유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목숨 해칠 것을 생각하거나 다른 이를 해칠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세한 설명은 경전에서와 같으며,
내지 느낌[受]과 욕망[愛]으로 내는 바의 마음은 모두가 근심과 괴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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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성이생(正性離生):일부(一分)의 무루지(無漏智)로써 번뇌를 끊어서 얻은 것을 정성(正性)이라 하며,
이 정성으로 영원히 범부로서의 생(生)을 여의기 때문에 정성이생이라 하다.
이는 견도위(見道位)이다.
2)
계율과 마음과 지혜[戒心慧]: ★★게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을 말한다.
계율과 마음과 지혜[戒心慧]: ★★게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을 말한다.
3)
월유경(月喩經):불설 월유경(佛說月喩經). 1권,
북송(北宋)의 시호(施護)가 번역하다.
월유경(月喩經):불설 월유경(佛說月喩經). 1권,
북송(北宋)의 시호(施護)가 번역하다.
4)
구족 쉬이라[具足尸羅]:구족계(具足戒)를 말한다.
구족 쉬이라[具足尸羅]:구족계(具足戒)를 말한다.
5)
벌지가경(伐地迦經):벌지가국(伐地迦國) 사람 이름으로 경 이름을 붙였다.
벌지가경(伐地迦經):벌지가국(伐地迦國) 사람 이름으로 경 이름을 붙였다.
6)
이름[名]은 온갖 것을 압도한다:나 없음[無我]의 네 가지 쌓임[四蘊]의 이름으로써,
온갖 네 가지 쌓임의 제 경계[自境界]의 인아상(人我相)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이름[名]은 온갖 것을 압도한다:나 없음[無我]의 네 가지 쌓임[四蘊]의 이름으로써,
온갖 네 가지 쌓임의 제 경계[自境界]의 인아상(人我相)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7)
네 가지 무상함[無常]:괴로움[苦]ㆍ≺공≻함[空]ㆍ나 없음[無我]의 네 가지 행상[四行相]이다.
● [pt op tr] fr
네 가지 무상함[無常]:괴로움[苦]ㆍ≺공≻함[空]ㆍ나 없음[無我]의 네 가지 행상[四行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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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0570-067♧
◎◎[개별논의] ♥ ❋본문
● 단어뜻 알기와 맵핑문제
『유가사지론』을 읽을 때마다 단어 뜻을 이해하기 힘들다.
『유가사지론』 ♣0570-067♧
그래서 『해심밀경』과 『유가사지론』을 통해서
이전 글에서 보리류지의 활동을 살펴보았다.
60 세가 되어서 불교에 관심을 갖고 출가한다.
121 세가 되어서 인도에서 중국을 건너간다.
그리고 37 년간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한다.
156세에 입적한다.
대단한 일이다.
그래서 다음 문제를 갑자기 생각해보게 된다.
보리류지가 『유가사지론』을 들고 영국에 갔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유가사지론』을 영어로 번역하려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각 부분을 어떤 영어 표현으로 번역해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를 놓고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데 가장 먼저 그 내용을 스스로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늘 어떤 이가 경전이나 논서를 다른 외국어로 번역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한글로 된 대장경 문장을 읽어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글로 된 문장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
『유가사지론』 2. 섭결택분 9) 수소성혜지(修所成慧地) 첫부분에
영상, 사변제, 소작성판 이라는 표현들이 나온다.
ᖰ 무엇을 영상의 닦음[影像修]이라 하느냐 하면,
혹은 분별이 있는 비파샤나아품[毘鉢舍那品]에서
사마아디[三摩地]의 행하는 바
영상(影像)으로 알 바 일[所知事]의 동분(同分)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은 분별이 없는 샤마타품[奢摩他品]에서
사마아디의 행하는 바
영상으로 알 바 일의 동분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기 때문에
있는 바의 닦음들을
영상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일의 맨 끝★★[事邊際]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과거와 미래와 현재와
안팎과 거칠고 가늘음과
하열하고 훌륭함과
가깝고 멀음 따위의 법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거나,
혹은 진여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나니,
이와 같이 혹은 있는 바를 다함의 성품[盡所有性] 때문에,
혹은 있는 바 그대로의 성품[如所有性] 때문에 있게 되는 닦음들을
혹은 있는 바 그대로의 성품[如所有性] 때문에 있게 되는 닦음들을
일의 맨 끝의 닦음이라 한다.
무엇을 할 일을 이루어 마침★★[所作成辨]]의 닦음이라 하느냐 하면,
이미 근본 정려(根本靜慮)거나
혹은 모든 사마아파티[等至]거나
혹은 세간의 선정에 증득하여 드는 온갖 닦음을
할 일을 이루어 마침의 닦음이라 한다.ᖱ
『유가사지론』 ♣0570-067♧
그런데
영상을 수행한다.
사변제를 수행한다.
소작성판을 수행한다.
도대체 이런 말이 무슨 말인가.
그런데 이런 용어는 『해심밀경』에서도 보인다.
...
ᖰ 6. 분별유가품(分別瑜伽品)
分別瑜伽品第六
그때 자씨(慈氏)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머물러 대승의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수행합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보살은 법을 거짓으로 세움[法假安立]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원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의지를 삼고 머무름을 삼아서 대승에서 사마타와 비발사나를 닦는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네 가지 소연경사(所緣境事)가 있으니,
첫째는 유분별영상소연분별경사(有分別影像所緣分別境事)요,
둘째는 무분별영상소연경사(無分別影像所緣境事)요,
셋째는 사변제소연경사(事邊際所緣境事)요,
넷째는 소작성판소연경사(所作成辦所緣境事)입니다.
이 네 가지 가운데
몇 가지가 사마타의 소연경사이며,
몇 가지가 비발사나의 소연경사이며,
몇 가지가 모두에게 소연경사입니까?”
慈氏菩薩復白佛言:
“如世尊說四種所緣境事:
一者、
有分別影像所緣境事;二者、
無分別影像所緣境事;三者、
事邊際所緣境事;四者、
所作成辦所緣境事。
於此四中,
幾是奢摩他所緣境事?幾是毘鉢舍那所緣境事?幾是俱所緣境事?”
“선남자여,
한 가지가 사마타의 소연경사이니,
이른바 무분별영상(無分別影像)이다.
한 가지가 비발사나의 소연경사이니,
이른바 유분별영상(有分別影像)이다.
두 가지는 모두의 소연경사이니,
이른바 사변제(事邊際)와 소작성판(所作成辨)이다.”
佛告慈氏菩薩曰:
“善男子!一是奢摩他所緣境事,
謂無分別影像;一是毘鉢舍那所緣境事,
謂有分別影像;二是俱所緣境事,
謂事邊際、
所作成辦。
”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사마타와 비발사나의 네 가지 소연경사에 의지해 어떻게 사마타를 구하며 비발사나에 능통합니까?”
...
『해심밀경』
무분별영상, 유분별영상, 사변제, 소작성판이란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한자어를 한글로 표현한다면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하는가.
상당히 곤란하다.
한글에 그런 단어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를 풀어서 표현하면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다.
한편 위 단어들은 또 불교사전에서도 잘 찾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려움이 많다.
만일 어떤 이가 이를 다른 외국어로 번역할 경우에도 같은 문제를 만난다.
일단 내용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 표현할 영어표현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데 영어표현 가운데 이런 단어가 따로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영어에 한자어가 이미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영어는 한글 상황과 또 다르다.
그렇다고 범어를 찾아 그대로 적어주기도 곤란하다.
그래서 한층 더 어렵다.
우선 낯선 한자어가 무엇을 가리키는가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지도를 살피는 경우과 같다.
지도를 살피면서 의미를 알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지도에서 각 기호가 나타내는 내용을 잘 상응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실에서 자신이 감각하고 분별하며 임하는 현실에서 여러 활동을 한다.
그리고 수행자는 정려 수행도 닦는다.
그래서 위 내용들을 놓고 각 단어가 가리키는 내용을 잘 파악해야 한다.
★1★
◆vnii1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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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의한 힘을 가진 다라니.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반야바라밀다는 대신주니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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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신주(大神呪)
대장경판(大藏經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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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도(度)
도사(都師)
도품조적(道品調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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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류지達磨流支,대보적경大寶積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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