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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4일 수요일

불기2565-03-24_대지도론-k0549-033




『대지도론』
K0549
T1509

제3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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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있는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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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대지도론』 ♣0549-033♧





제3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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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별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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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별논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大智度論釋初品中到彼岸義第五十
K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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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33권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50. 초품 중 도피안(到彼岸)의 뜻을 풀이함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유위(有爲)ㆍ무위(無爲)의 법의 저 언덕[彼岸]에 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저 언덕[彼岸]이라 함은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을 다하여 그 끝에 이르는 것이다.
어떻게 저 언덕을 큰 지혜로써 모두 알고 모두 다 하느냐 하면,
유위의 법에서는 전체의 모양[總相]과 각각의 모양[別相] 갖가지를 모두 이해하는 것이고,
무위의 법 안에서는 수다원(須陀洹)에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유위와 무위의 법의 모습의 의미는 먼저 설명한 것과 같다.







【經】 보살마하살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법의 여(如)와 모든 법의 법상(法相)과 무생제(無生際)70)를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위에서 이미 여(如)를 설명했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설명하는가?
【답】 위에서 곧장 모든 법의 여만을 설명했고,
이제는 3세가 모두 여임을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는 간략하게 설명했고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며,
위에서는 하나[一]임을 설명했고 여기서는 셋[三]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법상은 곧 그것이 법성(法性)이며 무생제는 곧 그것이 실제(實際)이다.
과거법의 여(如)는 곧 그것이 과거의 법상(法相)이며 미래와 현재도 역시 그와 같다.
또 과거법의 여(如)는 곧 그것이 미래와 현재의 법의 여이며,
현재법의 여는 곧 그것이 과거와 미래의 법의 여이며,
미래법의 여는 곧 그것이 과거ㆍ현재의 법의 여다.
그것은 왜냐하면,
여의 모양은 동일한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먼저 설명했듯이 두 가지의 여가 있다.
첫째는 세간의 여[世間如]요,
둘째는 출세간의 여[出世間如]다.
이 세간의 여로써 하면 3세가 저마다 다르지만 이 출세간의 여로써 하면 3세가 동일한 것이 된다.
또 법상(法相)이란 모든 법의 업(業)과 모든 법이 짓는 힘[力]과 인연과 과보를 이름하니,
마치 불은 더운 모양이고 물은 축축한 모양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모든 법안에서 인연과 과보를 분별하면 저마다 각각의 모양이 있게 된다.
마치 시처비처력(是處非處力) 중에서의 설명과 같나니,
이것을 세간의 법상이라 한다.
만일 이 모든 법상을 추구하면서 찾고 궁구한다면 생함이 없는 법[無生法] 안에 들어가게 된다.
다시는 이보다 더 지나는 것이 없나니,
이것을 무생제(無生際)라 한다.




【문】 마치 법상에서와 같이 3세가 있다고 분별할 수 있으면 무생제는 미래의 법인데 어떻게 과거와 현재가 있겠는가?
마치 아비담(阿毘曇)의 설명과 같아서 생하는 법[生法]이면 과거와 현재이고,
이것이 생함이 없는 법이라면 미래 및 무위의 법이다.
그런데 어떻게 과거와 현재에 생김이 없는 것[無生]을 있게 하려 하는가?”
【답】 마치 먼저 갖가지로 생기는 법을 설파(說破)한 것과 같다.
온갖 법이 모두가 생겨남이 없거늘 어찌 미래에만이 무생이겠는가.
마치 어느 때[一時]의 뜻 가운데서 이미 3세를 설파한 것과 같나니,
3세는 한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 없는[無相] 것이다.
이와 같다 하면 생김이 없는 모양[無生相]이다.
또 생김이 없는 것을 열반이라 하나니,
열반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열반이라 함은 맨 뒤의 마지막[末後究竟]이어서 다시는 더 생기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온갖 법이 곧 열반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온갖 법은 모두가 무생제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 앞에 있고자 하거나,
모든 부처님을 곁에서 모시고자 하거나,
모든 부처님의 안의 권속[內眷屬]이 되고자 하거나,
큰 권속[大卷屬]을 얻고자 하거나,
보살의 권속을 얻고자 하거나,
청정한 과보를 받는 큰 보시[淨報大施]를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만일 보살이 아직 번뇌가 다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번뇌가 다한 성인 앞에 있을 수 있겠는가?
【답】 보살은 처음 뜻을 일으켰을 때 벌써 온갖 중생의 앞에 있는 것인데 하물며 오랜 겁 동안 수행을 쌓은 이겠는가.
이 보살의 공덕과 지혜는 크기 때문에 세상마다 항상 크게 성문과 벽지불을 이익되게 하고,
중생들은 보살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숭앙하고 공경 존중하며 축생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존중하게 된다.
마치 보살이 옛날 사슴으로 있을 때 그 빛깔은 금과 같았고 그 뿔은 7보(寶)로 되었으며 5백의 사슴이 따르면서 존중하고 섬긴 것과 같다.
만일 인간 가운데 있을 때 좋은 세상에는 전륜성왕이 되고 나쁜 세상에는 항상 위대한 왕이 되어서 부처님 법을 수호 유지하고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만일 출가하여 부처님 법을 만나면 세간을 위하여 크게 제도하는 스승[大度師]이 되어서 부처님의 법을 일으켜 떨치고,
만일 부처님의 법이 없다면 외도(外道)의 큰 스승이 되어서 4무량(無量)을 행한다.
나한과 벽지불은 비록 번뇌는 없다 하더라도 이익되게 하는 일이 적음은 마치 한 되[升]의 소[酥]가 비록 정세(精細)한다 하더라도 큰 바닷물만큼의 타락[酪]보다는 못한 것과 같다.
보살은 비록 번뇌를 지닌 지혜일지라도 그 성숙되게 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한량이 없다.
또 나한과 벽지불은 4사(事)의 공양과 도를 돕는[助道] 제구[具]를 거의 모두 보살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
마치 『수릉엄경(首楞嚴經)』에서 “문수사리(文殊師利)는 72억 번을 벽지불이 되어서 벽지불의 사람을 교화하며 그들로 하여금 도를 이루게 하였다”고 말씀한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 앞에 있게 된다.
모든 부처님을 곁에서 모시고 섬기는 이[給侍]가 되고 싶다 함은,
마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아직 출가하지 않으셨을 때 차닉(車匿)71)이 모시고 섬겼으며,
우타야(優陀耶)가 같이 놀아 주고 구비야(瞿毘耶)ㆍ야수타(耶輸陀) 등과 모든 채녀(婇女)들이 안의 권속[內眷屬]이었다.
그리고 출가하여 6년 동안 고행을 할 때는 다섯 사람이 모시고 섬겼고 도를 얻을 때에는 미희라타(彌喜羅陀)72)ㆍ수나찰다라(須那刹多羅)ㆍ아난(阿難)ㆍ밀적역사(密跡力士) 등이 있었나니,
이들을 안의 권속이라 한다.
큰 권속[大眷屬]이라 함은,
사리불(舍利佛)ㆍ목건련(目揵連)ㆍ마하가섭(摩訶迦葉)ㆍ수보리(須菩提)ㆍ가전연(迦栴延)ㆍ부루나(富樓那)ㆍ아니로두(阿泥盧豆) 등의 성인들과 미륵(彌勒)ㆍ문수사리(文殊師利)ㆍ발타바라(颰陀婆羅)의 모든 아비발치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 등을 바로 큰 권속이라 한다.
또 부처님에게는 두 가지의 몸이 있나니,
첫째는 법성생신(法性生身)73)이고,
둘째는 세간을 따르는 몸이시다.
세간 몸에서의 권속은 먼저의 설명에서와 같다.
법성생신에게는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일생보처 보살들이 있으면서 모시고 섬겼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치 『불가사의해탈경(不可思議解脫經)』에서 “부처님이 태어나려 할 때에는 8만 4천의 일생보처 보살이 그 앞을 인도하고 보살은 그 뒤를 따라 출생하셨으니,
마치 검은 구름이 달을 싼 것과 같았다”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법화경(法華經)』에서 “땅에서 솟아나온 보살들이 모두 이는 안의 권속이요 큰 권속이다”고 한 것과 같다.
보살 권속(菩薩眷屬)이라 함은 어떤 부처님은 순전히 보살을 권속으로 삼고 어떤 부처님은 순전히 성문을 권속으로 삼으며 어떤 부처님은 보살과 성문들을 같이 권속으로 삼는다.
이 때문에 “보살들만의 권속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권속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상ㆍ중ㆍ하이다.
하(下)라 함은 순전히 성문들의 권속이고,
중(中)이라 함은 성문과 보살이 섞인 권속이며,
상(上)이라 함은 보살들만의 권속이다.
청정한 과보를 받는 큰 보시[淨報大施]라 함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보살은 복덕을 많이 쌓았으나 미처 번뇌를 제거하지 못하면,
남의 신시(信施)를 받되 아직 청정한 과보가 될 수는 없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모든 법은 모두가 공하여 얻을 수가 없는데,
하물며 모든 번뇌[結使]이겠느냐”고 하신다.
보살은 법성(法性) 안에 들기 때문에 진제(眞際)를 증득하지 않나니,
이 때문에 청정한 과보를 받는 보시의 복이다.
또 보살은 공덕이 광대하여 발심한 이후부터 낱낱 중생을 대신하여 온갖 고통을 받으려 하고 온갖 공덕을 온갖 중생에게 주려고 하면서 그런 뒤에야 스스로 부처님의 도를 구해야 되지만,
그 일만은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부처님이 되신 뒤에 온갖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또 보살이 뜻하는 원[志願]은 아승기(阿僧祇)에 구애받지 않고 마치 세간과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ㆍ허공(虛空) 등과 같이 오래도록 머무르고,
보살의 마음은 세간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역시 그와 같이 오래 머무르면서 한이 없나니,
이런 사람이 청정한 과보를 받는 보시의 복일 수가 없으면 그 누가 청정함을 다하겠는가.
마치 부모가 비록 번뇌[結使]와 모든 악(惡)이 있다 하더라도 한 세대(一世) 동안은 자식들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그들의 공양을 받고 자식들로 하여금 큰 복을 얻게 한다.
그러니 하물며 보살은 모든 결사가 없고 끝없는 세상 동안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데도 청정함을 다하지[淨畢] 않겠는가.
또 보살은 다만 가엾이 여기는 마음만 있고 반야(般若)가 없어도 오히려 이익되게 하는데 하물며 반야바라밀을 행함이겠는가.
【문】 만일 보살에게 번뇌[結使]가 없다면 어떻게 세간에 태어나게 되는가?
【답】 먼저 이미 대답했다.
보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법성생신(法性生身)을 얻은지라 곳곳마다 변화하면서 중생을 제도하고 세계를 장엄하나니,
이런 공덕의 인연 때문에 비록 아직 부처는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청정한 과보를 받는 보시의 복이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간탐하는 마음[慳心]ㆍ파계(破戒)하는 마음ㆍ성내는 마음ㆍ게으른 마음ㆍ산란한 마음ㆍ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려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이 여섯 가지 마음은 삿되기 때문에 능히 6바라밀을 가리고 막는다.
마치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 만약 간탐하는 마음이 있으면 보시가 청정하지 않게 되나니,
이른바 좋은 물건을 보시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설령 좋은 물건을 베풀어 준다 해도 많이 주지 못하고,
설령 바깥 물건을 베풀어 준다 해도 안의 물건은 주지 못하며,
설령 안의 물건을 베풀어 준다 해도 모조리 주지 못하나니,
모두가 간탐하는 마음 때문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온갖 법은 나가 없고 내 것이 없고 모든 법은 모두가 공하여 마치 꿈과도 같고 허깨비 같은 줄 알므로,
몸의 머리와 눈과 골수를 보시하는 것이 마치 풀과 나무와 같이 한다.
이 보살은 비록 아직 도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항상 이 간탐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모든 그 밖의 사람은 욕망을 여의고 도를 얻기 때문에 파계(破戒)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에 파계하는 일을 보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계란 온갖 모든 착한 공덕이 머무르는 곳이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땅은 온갖 만물이 의지하는 곳이 되는 것과 같다.
파계하면 오히려 그 밖의 도(道)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겠는가.
이 때문에 파계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며,
다시 생각하기를 “보살의 법이란 중생을 안락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파계하면 온갖 중생을 괴롭히고 어지럽히게 된다”고 하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파계하려는 마음조차도 내지 않는데 하물며 파계하는 일이겠는가.
소승(小乘)과 모든 범부조차도 오히려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보살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내는 이겠는가.
몸은 고통의 그릇[苦器]인지라 스스로 괴로움을 받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죄를 범한 사람이 스스로 형벌의 죽임을 초래함은 스스로가 지어서 스스로가 받는 것이니 남을 원망하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다.
다만 자기의 마음을 수호하면서 악(惡)이 일어나지 않게 할 뿐이니,
마치 사람이 모진 바람과 비와 추위며 더위를 만난다 해도 역시 성내는 바가 없는 것과 같다.
다시 생각하기를 “보살이 부처되기를 구함은 대비(大悲)로써 근본을 삼는다.
만일 성을 품는다면 뜻하는 원을 상실하게 된다.
성을 내는 사람은 세간의 즐거움조차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도(道)의 즐거움이겠는가.
성을 내는 사람은 스스로도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데,
어찌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으랴”고 한다.
게으른 사람은 세간의 뛰어난 일조차도 오히려 이루지 못하는데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나무를 비비어 불을 일으키려 하면서 자주자주 쉬게 되면 불을 얻을 기약조차 없는 것과 같다.
산란한 마음은 마치 바람 속에 켜져 있는 등불이 비록 광명은 있다 하더라도 물건을 잘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산란한 마음속에 있는 지혜도 역시 그와 같으니,
지혜는 바로 온갖 착한 법의 근본이다.
만일 이 지혜를 성취하고자 하면 먼저 마음을 다스린 다음에야 이룰 수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몹시 취한 사람은 자기의 이익이나 다른 이의 이익이나 곱고 추한 일들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산란한 마음도 역시 이와 같나니,
세간의 좋은 일조차도 오히려 잘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출세간(出世間)의 법이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온갖 성취하고 실패하는 일에도 모두 미치지 못하는데 하물며 미묘하고 깊은 이치이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눈이 없는 사람은 혹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혹은 길이 아닌 데로 들어가기도 하듯이,
지혜 없는 사람 역시 그와 같아서 지혜로운 눈이 없기 때문에 삿된 법을 받아 집착하고 바른 소견을 받지 못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세간의 비근한 일조차도 이루지 못하는데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겠는가.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힘 때문에 이 여섯 가지 폐단을 능히 막고 6바라밀을 청정하게 하나니,
이 때문에 “만일 여섯 가지의 폐단을 일으키지 않으려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보시(布施)의 복처(福處)와 지계(持戒)의 복처와 수정(修定)의 복처와 권도(勸導)의 복처에 서게 하려 하거나 중생으로 하여금 재물의 복[財福]과 법의 복[法福]의 처소에 서게 하려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어떤 것을 복처(福處)라 하는가?
【답】 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하기를 “복이라 함은 착한 유루(有漏)의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이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가 그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착한 유루법의 인연의 과보로 이 불은몰무기의 복을 얻기 때문이다”고 한다.
이 과보를 역시 복이라 하는데,
마치 세간 사람이 큰 일을 이루고 성취하는 일이 많은 이를 바로 복덕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복은 요약하여 세 가지로 말하나니,
보시(布施)와 지계(持戒)와 수정(修定)이다.
어떤 것이 보시인가?
곧 어떤 사람이 의복ㆍ침구ㆍ음식이나 꽃ㆍ향ㆍ영락 등을 남에게 주는 것이니,
이것을 보시라 한다.
【문】 음식 등의 물건이 바로 보시인데 다시 보시라는 것이 있는가?
【답】 음식 등의 물건이 곧 보시는 아니다.
그 음식 등의 물건을 남에게 줄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법을 버림[捨]이라 하는데,
인색한 마음과는 서로 반대되니,
이것을 보시 복덕이라 한다.
이것은 유루(有漏)이기도 하고 무루(無漏)이기도 하다.
항상 이것은 착한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과 마음과 상응한 수심행(隨心行)과 함께 마음이 생기며,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으면서 능히 반연[緣]을 짓는다.
업(業)과 상응한 수업(隨業)ㆍ행업(行業)과 함께 생기고 먼저 지은 업의 과보로 얻는 것은 아니며,
행수(行修)ㆍ혜증(慧證) · 신증(身證)이면서 범부의 사람도 얻고 또한 성인도 얻는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버림[捨]의 법과 상응한 사(思)를 바로 보시의 복덕이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업(業)은 과보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思)는 바로 업이다.
몸과 입은 업이라 하지 않으며,
사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이 보시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청정한[淨] 것이고,
둘째는 청정하지 않은[不淨] 것이다.
청정하지 않은 것이라 함은 그냥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혹은 재물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에 주기도 하고,
혹은 질책을 싫어하기 때문에 주기도 하며,
혹은 쓸 데 없기 때문에 주기도 하고,
혹은 친밀히 사랑하기 때문에 주기도 하며,
혹은 보시를 함으로써 세력의 도움이 많으므로 그 세력을 구하기 위하여 주기도 한다.
혹은 아주 급한 일 때문에 주기도 하고,
혹은 좋은 명예를 구하기 위하여 주기도 한다.
혹은 훌륭한 이와 이름을 같이하기 위하여 주기도 하고,
혹은 질투 때문에 주기도 하며,
혹은 “소인(小人)과 비천한 이조차도 베풀거늘 나는 귀한 이요 대인(大人)이면서 어떻게 베풀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그 교만 때문에 주기도 한다.
혹은 복덕을 빌기 위하여 베풀기도 하고,
혹은 길(吉)한 일을 구하면서 흉(兇)한 일을 제거하기 위하여 베풀기도 하며,
혹은 한 패거리에 들어가기 위하여 베풀기도 하고,
혹은 한결같지 않은 마음으로 공경하지 않고 받는 이를 업신여기면서 베풀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은 이 세상의 일을 위하여 보시하는 것으로 청정함과는 어긋남을 일컬어 청정하지 않다고 한다.
청정한 보시[淨施]라 함은,
마치 경 가운데에서 설명하듯이 마음을 다스리는 까닭에 보시하고,
뜻을 장엄하는 까닭에 보시하며,
으뜸가는 이익을 얻기 위하여 보시하고,
청정한 마음을 내고 잘 분별하면서 열반을 돕기 위하여 보시하는 것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새로 핀 꽃이 아직 시들지 않았으면 빛깔도 좋고 또한 향기로운 것처럼,
청정한 마음의 보시도 역시 그와 같다.
마치 설명하기를 “모든 하늘이 청정하지 않은 마음으로 보시하면 궁전의 광명이 박(薄)하고 적지만,
만일 청정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궁전의 광명이 더욱 광대하다”고 한 것과 같다.
이 보시의 업은 비록 과거 세상의 것이라 하더라도 천만의 세상까지 이르면서 상실하지 않나니,
마치 어음[券]의 언약과 같다.



【문】 이 보시의 복은 어떻게 더욱 자라나는가?
【답】 때맞추어 보시하기 때문에 복이 더욱 자라게 된다.
마치 경 가운데에서 설명하듯이,
굶주릴 때에 보시하면 복이 더욱더 많아지게 되며,
혹은 먼 데를 가고 올 때나 광야나 험한 길을 지나고 있을 때에 보시하거나,
혹은 항상 보시하면서 끊어지지 않거나 때로는 늘 보시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보시한다면,
그 복이 더욱더 광대하다.
6념(念) 중의 염사(念捨)에서의 설명과 같으니,
만일 크게 보시하면 그 때문에 복을 얻음이 많고,
또는 좋은 사람에게 보시하거나,
부처님께 보시하거나,
보시하는 이[施者]나 받는 이[受者]가 청정하기 때문에 결정된 마음으로 보시하거나,
또는 자기의 힘으로 재산을 모아서 보시하거나,
가지고 있는 많고 적음에 따라 모조리 보시하거나,
또는 번갈아 물건을 보시하거나,
동산과 밭과 심부름꾼 등으로 보시한다.
이와 같은 보시는 오직 보살만이 깊은 마음으로 행할 수 있다.
마치 위라마(韋羅摩)74)보살이 12년 동안 보시하고 나자 장엄하게 꾸민 젖소와 7보로 된 발우와 채녀(婇女)가 각각 8만 4천이나 있게 되었고 모든 그 밖의 물건과 음식 등속은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었던 것과 같다.
또 수제예나(須帝隸拏)75)보살은 좋고 훌륭한 흰 코끼리를 원수에게 보시하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있으면서 사랑하던 두 아들을 12명의 추한 바라문에게 보시했으며,
다시 아내와 눈을 변화한 바라문에게 보시하자,
그때 땅은 크게 진동하고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요란하였으며 공중에서 꽃비가 내려왔다.
또 살바달다왕(薩婆達多王)은 스스로 그의 몸을 묶어서 바라문에게 보시하고,
시비왕(尸毘王)은 한 마리의 비둘기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비둘기 고기에 대신한 것과 같으며,
또한 보살은 일찍이 토끼의 몸이었을 때 자신의 살을 구어서 선인(仙人)에게 보시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들은 『보살본생경(菩薩本生經)』 가운데에서 설해지는 바이다.
또한 성문(聲聞)의 사람의 보시도 있다.
수미타(須彌陀) 비구니 같은 이는 두 동학(同學)과 함께 가나가모니부처님[迦那伽牟尼佛]을 위하여 정사(精舍)를 지어 드려 수없는 천만의 세상 동안 전륜성왕과 천왕(天王)의 복을 누렸다.
시(施) 바라문 같은 이는 한 병의 타락[酪]을 가져다가 스님들에게 보시하고는 세상마다 즐거움을 받았고,
지금은 아라한이 되어서 모든 즐거움을 누리는 이 가운데서는 가장 으뜸이다.
또 말리부인(末利夫人)은 수보리에게 공양한 까닭에 금생에 과보를 얻어 파사니왕(波斯尼王)의 왕후가 되었으며,
시바(尸婆) 같은 이는 가전연(迦栴延)에게 공양한 까닭에 금생에 과보를 얻어 전타바주타왕(栴陀波周陀王)의 왕후가 되었었다.
또 울가타(鬱伽陀) 거사(居士)는 사리불 등의 5백 아라한에게 공양한 까닭에 바로 그날 과보를 얻었다.
즉 5백의 장사꾼들이 그 남은 밥을 얻어먹고 저마다 구슬과 영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갑자기 큰 부자가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졸가타(卒伽陀)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베풀어서 금생에 과보를 얻은 예이다.
그러므로 보시를 논의하자면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줄 알아야 하리라.
지계(持戒)의 복처(福處)라 함은 부처님께서 5계(戒)를 말씀한 바로 그것이다.



【문】 어떤 것이 살생죄[殺罪]의 모양인가?
【답】 그가 중생인 줄 알면서 고의로 목숨을 빼앗으면 살생의 죄가 된다.
살생을 하고도 고의가 아닌 것도 아니면서 안온하고 유쾌한 마음이 되면 살생의 죄가 되며,
산란하거나 미친 마음이 아니면서 목숨을 빼앗으면 살생의 죄가 되고,
상처를 낸 것은 아니나 죽게 되면 살생의 죄가 된다.
아직 죽지 않은 것이 아닌 신업(身業)은 바로 살생의 죄이고,
입으로 지시하고 몸으로 지은 것이 아니어도 그것은 살생의 죄이다.
비단 마음으로 내는 것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죄를 그치고 짓지 않는 것이 바로 첫 번째의 계선(戒善)의 모양이다.
혹은 어떤 사람은 이것을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라고 말하기도 한다.
혹은 욕계에 매이기도[欲界繁] 하고 매이지 않기도 하며,
이것은 마음도 아니고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도 아니며,
마음과 상응한 것도 아니고 마음을 따라 행해지는 것도 아니며,
혹은 마음과 함께 생기기도 하고 마음과 함께 생기지 않기도 한다.
업(業)과 상응한 것도 아니며,
업행을 따라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혹은 업과 함께 생기기도 하고 혹은 업과 함께 생기지 않기도 한다.
먼저 지은 업의 과보도 아니고 득수(得修)ㆍ행수(行修)ㆍ신증(身證)ㆍ혜증(慧證)이며,
혹 사유(思惟)에서 끊어지기도 하고 혹은 끊어지지 않기도 하며,
욕계의 욕망을 여읠 때에 끊어지게 되고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음을 아나니,
이것을 불살생(不殺生)의 계상(戒相)이라고 한다.
그 밖의 계율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치를 따라 모든 계율을 분별하고 찬탄하며 논의하니,
마치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다.
수정(修定)의 복처(福處)라 함은,
비록 경전 가운데서는 “인자함[慈]을 닦는 것이 바로 수정의 복이다”고 하였지만 또한 “유루의 선정[有漏禪定]은 능히 과보를 낸다”고 설명한 것도 통틀어 수정의 복이라 부른다.
욕계에는 성을 냄도 많고 산란한 일도 많기 때문에 먼저 인자한 마음[慈心]을 말하면서 수정의 복을 얻는다고 한다.
인자한 방편은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기를 원하고 나중에는 실로 즐거움을 받는 것을 보나니,
이 마음과 상응하는 법을 일컬어 인자한 법[慈法]이라 한다.
이 법은 혹 색계(色界)에 매이기도 하고 혹은 매이지 않기도 하나니,
이것이 진실한 자(慈)이다.
이 방편의 자는 욕계에 매인 것이며,
항상 마음의 행을 따르고 마음을 따라 생기며,
형상도 없고 대(對)할 수는 없다.
능연(能緣)의 법이면서 업(業)은 아니되 업과 상응하면서 업행을 따르며,
업과 함께 생겨난다.
먼저 지은 업의 과보도 아니고,
득수(得修)ㆍ행수(行修)ㆍ신증(身證)ㆍ혜증(慧證)이며,
혹은 사유(思惟)에서 끊어지기도 하고 혹은 끊어지지 않기도 하며 색계(色界)의 욕망을 여읠 때에 끊어지게 된다.
유각유관(有覺有觀)과 또한 무각유관(無覺有觀)과 또한 무각무관(無覺無觀)임을 알 수 있다.
혹은 기쁨[喜]이 있기도 하고 기쁨이 없기도 하며,
혹은 숨[息]이 있기도 하고 숨이 없기도 하다.
또한 범부와 성인의 즐거운 느낌[樂受]과 상응하기도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과 상응하기도 하며,
먼저 득해(得解)의 모양을 반연하고 뒤에는 실의(實義)를 반연한다.
근본사선(根本四禪) 중에서 역시 4선을 초과하고 4선에 의지하여 얻게 되는 이는 견고하면서 힘이 있다.
자(慈)는 마땅히 친밀한 사랑[親愛]이라고 말해야 하리니,
원한도 없고 다툼도 없기 때문에 친밀한 사랑이라 한다.
한량없는 중생을 반연하기 때문에 한량없다[無量]고 하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서 욕망을 여의기 때문에 범행(梵行)이라 한다.
자심(慈心)에 관한 그 밖의 논의는 4무량(無量)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문】 수정의 복 가운데서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자의 마음만을 말씀하시고 그 밖의 것은 말씀하지 않는가?
【답】 4무량 중에서 자의 마음은 능히 큰 복덕을 내거니와,
비(悲)의 마음은 근심하고 걱정하기 때문에 복덕을 버리며,
희(喜)의 마음은 스스로 공덕을 생각하기 때문에 복덕이 깊지 않으며,
사(捨)의 마음은 놓아 버리기 때문에 복덕이 역시 적다.
또 부처님께서는 자(慈)의 마음에 다섯 가지의 이익이 있음을 말씀하셨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 이익인가?
곧 첫째는 칼이 상하지 못하게 하고,
둘째는 독이 해치지 못하며,
셋째는 불이 태우지 못하고,
넷째는 물이 빠뜨리지 못하며,
다섯째는 온갖 성을 내고 악하고 해치는 중생들도 보면 모두가 환희한다.
비(悲)의 마음 등 세 가지 일은 그렇지가 못하니,
이 때문에 수정의 복은 자(慈)라고 말씀한 것이고,
그 밖의 나머지는 그것에 붙따르며 모든 과보를 내는 유루의 선정[有漏定]이다.
권도(勸導)의 복처(福處)라 함은 만일 어떤 비구가 좌선(坐禪)도 하지 못하고 경전도 독송하지 못하면,
교화하고 권하여 이끌어 복덕을 닦고 세우게 한다.
혹 어떤 비구는 좌선도 하고 경전을 독송할 수 있으나,
비구들의 옷과 음식이 모자라는 것을 보고는 힘껏 끌어 들이는 등 역시 권도를 행한다.
나아가 모든 보살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복덕의 인연으로 그들을 권화하며,
또한 출가한 사람이 만일 재물을 구하게 되면 계율을 잃게 되므로 이 때문에 권하고 이끌어 인연을 짓게 한다.
재복(財福)이라 함은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ㆍ금ㆍ은ㆍ수레ㆍ말ㆍ밭 및 집 등이다.
【문】 위에서는 보시의 복처라고 말하고 여기서는 재복이라 말하는데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보시라 함은 온갖 보시,
곧 재물의 보시[財施]와 법의 보시[法施]와 세속의 보시[俗施]와 도의 보시[道施]를 통틀어 포섭한다.
여기에서는 법의 보시와 재물의 보시를 분별해 보겠다.
법의 보시라 함은,
마치 부처님께서 큰 자비로 최초로 법륜(法輪)을 굴리어 한량없는 중생이 도를 얻게 된 것과 같다.
뒤에는 사리불이 부처님을 따라 법륜을 굴렸으며,
그 밖의 모든 성인들은 비록 법륜을 굴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역시 중생을 위해 설법으로 도를 얻게 했으니 역시 법의 보시라 한다.
또 변길(遍吉)보살과 관세음(觀世音)ㆍ득대세(得大勢)ㆍ문수사리(文殊師利)ㆍ미륵(彌勒) 보살 등이 있는데,
두 가지의 신통력인 과보(果報)의 신통과 수득(修得)의 신통 안에 머물러서,
복덕과 방편의 힘과 광명과 신족(神足) 등의 갖가지 인연으로 중생을 개화하고 제도함도 역시 법의 보시라 한다.
모든 벽지불이 허공을 날아오르면서 하나의 게송을 설해 중생을 인도하며 선근을 심게 함도 역시 법의 보시라 하며,
또 부처님의 제자로서 아직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한 이가 좌선을 하고 경전을 독송하면서 모든 법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고 제자를 교화하는 것도 모두 법의 보시라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를 법보시의 모양이라 하나니,
이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중생을 여섯 가지 보시의 복처에 세우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다섯 가지 눈[五眼]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의 눈인가?
곧 육안(肉眼)과 천안(天眼)과 혜안(慧眼)과 법안(法眼)과 불안(佛眼)이다.
육안은 가까운 데는 보지만 먼 데는 보지 못하고,
앞은 보지만 뒤는 보지 못하며,
바깥은 보지만 안은 보지 못하며 낮은 보지만 밤은 보지 못하며,
위는 보지만 아래는 보지 못하나니,
이러한 장애 때문에 천안(天眼)을 구하게 된다.
이 천안을 얻게 되면 멀거나 가까운 데를 모두 보며 앞뒤와 안팎과 밤낮과 위아래가 모두 장애가 없다.
이 천안은 화합하여 인연으로 생겨난 임시로 일컬어지는[假名] 물건들은 보지만,
이른바 공하고 모양이 없고 조작이 없고 남이 없고 멸함이 없는 실상(實相)은 보지 못한다.
앞에서와 같이 중간과 뒤도 역시 그러하니,
이 실상을 보기 위해 혜안(慧眼)을 구하는 것이다.
혜안을 얻으면 중생을 보지 않고,
동일하거나 다르다는 특징이 모두 소멸된다.
모든 집착을 버리고 여의어 온갖 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지혜 스스로가 안에서 소멸하나니,
이것을 혜안이라 한다.
다만 혜안은 중생을 제도할 수 없을 뿐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분별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법안이 생긴다.
법안(法眼)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법을 행해 이러한 도(道)를 얻게 하겠노라며 온갖 중생의 저마다의 방편문을 알아서 도의 증과(證果)를 얻게 한다.
법안은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의 도를 두루 알지는 못하나니,
이 때문에 불안(佛眼)을 구하는 것이다.
불안은 일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덮어 가려서 비록 은밀하다 하더라도 보아 알지 못함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극히 멀지만 부처님에게는 지극히 가깝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둡지만 부처님에게는 환히 밝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의심이 되지만 부처님에게는 결정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미세하지만 부처님에게는 굵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심히 깊지만 부처님에게는 아주 얕다.
이 불안은 일마다 듣지 못함이 없고 일마다 보지 못함이 없다.
일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일마다 어렵다고 여김이 없으며,
생각할 바도 없지만 온갖 법 안에서 불안은 항상 비춘다.
후품(後品)의 오안(五眼)의 이치 가운데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經】 보살마하살이 천안(天眼)으로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 안의 모든 부처님을 뵙고자 하거나,
천이(天耳)로써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듣고자 하거나,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천안의 법으로 보는 바는 삼천대천세계를 초월하지 못한다.
이제는 반야바라밀의 힘 때문에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나라 안에 모든 부처님을 뵙는 것이니,
그것은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안에는 가까운 데도 없고 먼 데도 없으며 거리끼는 데가 없기 때문이다.
【문】 마치 『반주경(般舟經)』76)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반주삼매(般舟三昧)의 힘 때문에 비록 천안은 아직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시방에 현재 계신 모든 부처님을 뵐 수 있다” 했는데,
여기에서 이 보살이 천안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뵙는다는 것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이 천안은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이다.
반주삼매는 욕망을 여읜 사람이나 욕망을 여의지 못한 사람이거나 간에 다 같이 얻지만,
천안은 다만 욕망을 여읜 사람만이 얻는다.
반주삼매는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항상 닦고 항상 익히기 때문에 보지만,
천안은 신통을 닦아서 얻는 것으로 형상 있는 경계의 4대(大)로 만들어진 물질의 눈이 4변에 두루 밝은 모양을 얻는다.
이것이 다르다.
천안의 공력이 쉬운 것은 마치 해가 나오면 물질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과 같으며,
삼매의 공력이 어려운 것은 마치 밤에 등불을 켰을 때 물질을 보는 것이 쉽지 않은 것과 같다.
천이(天耳)도 역시 그와 같다.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문】 마치 상지[上地]의 둔한 근기로는 하지(下地)의 영리한 근기를 지닌 이의 마음을 알지 못하듯이 보살은 당연히 한 부처님의 마음조차도 알지 못해야 하거늘 하물며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겠는가?
【답】 부처님의 신력으로써 보살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다.
마치 경의 말씀과 같이 “온갖 중생으로서 부처님의 마음을 아는 이는 없지만 만일 부처님의 신력으로써 알게 하면 심지어 곤충까지도 역시 잘 알게 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신력으로써 보살로 하여금 부처님의 마음을 알게 한다.
또 반야바라밀은 장애가 없는 모양이어서 굵거나 미세하거나 깊거나 얕거나 어리석은 이거나 성인이거나 간에 전혀 차별이 없다.
모든 부처님의 마음의 여(如)와 보살의 마음의 여는 동일한 여이어서 다름이 없나니,
보살은 이 여를 따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또 있기 드물고 어려운 일이어서 알지 못해야 하는데도 아나니,
이 때문에 “이것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말씀하신 법을 듣고 들은 뒤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잊지 않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한 분의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도 오히려 지니기 어려운데 하물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잊지 않으려 하는가?
【답】 보살은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77)의 힘 때문에 받아 견고하게 기억할 수 있고,
이 다라니의 힘 때문에 잊지 않는다.
또 여기서는 반야바라밀의 힘으로 필경 청정하여 집착함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바다가 뭇 흐름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니,
보살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에게서 듣게 된 법에 대해 반야바라밀의 그릇이 큰 까닭에 그 한량없는 법을 받아들여 지니면서 잊지 않게 된다.
또 이 반야바라밀은 비유할 수 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나니,
겁(劫)이 불에 타 다하고 나면 큰 비로 가득 차는데,
이 비는 허공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 없듯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설법의 비는 부처님의 입에서 나오는데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없다.
이 때문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51. 초품 중 모든 부처님 세계를 보다[見一切佛世界]의 뜻을 풀이함 ①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보고,
나아가 현재 시방의 부처님의 세계를 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만일 시방의 부처님을 뵈었다면 벌써 세계는 본 것인데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세계를 보고자한다”고 말씀하는가?
【답】 보살은 아직 깊은 선정에 들어가지 못한지라 만일 시방세계의 산과 강물과 초목을 보면 마음이 곧 산란해진다.
때문에 다만 모든 부처님만을 관찰하는 것이니,
마치 염불(念佛)의 가운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수행하는 이는 다만,
모든 부처님만을 관찰하고 토지와 산하 초목은 관찰하지 않지만 선정의 힘을 얻고 나면 뜻대로 널리 관찰한다.
또 모든 청정한 부처님 나라는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나라를 보고자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또 한 부처님께는 한량없는 백천 가지의 세계가 있음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장엄 청정한 데도 있고 장엄 청정하지 않는 데도 있으며 같이 뒤섞인 데도 있다.
필경 청정한 세계도 있지만,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힘으로 비로소 볼 수 있게 된다.
마치 천자(天子)가 정사를 듣는 정전(正殿)은 바깥 사람이 볼 수 있지만,
내전(內殿)의 깊은 궁전은 볼 수 있는 이가 없는 것과 같다.
【문】 시방의 현재 세계는 볼 수 있겠지만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어떻게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답】 보살에게는 과거와 미래를 보는 삼매(三昧)가 있다.
이 삼매에 들어가면 과거와 미래의 일을 보되,
마치 꿈속에서 보는 듯하다.
또 보살에게는 불멸제삼매(不滅際三昧)78)가 있나니,
이 삼매에 들어가면 모든 부처님으로서 멸도(滅度)한 이가 있음을 보지 못한다.
【문】 이 두 가지의 법은 눈이 아닌데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답】 이것은 바로 지혜이며 임시로 이름을 붙여서 눈이라 한다.
마치 전법륜(轉法輪) 중의 4제(諦)에서 안지명각(眼智明覺)을 얻는 것과 같다.?
또 보살은 시방의 현재 있는 부처님 세계를 보고서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세계도 역시 그러한 줄 틀림없이 안다.
그것은 왜냐하면,
온갖 부처님들의 공덕은 같기 때문이다.
이 일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또 이 반야바라밀 안에서는 마치 현재와 같이 과거와 미래도 평등하여 다름이 없으니,
하나의 여(如)요 하나의 법성(法性)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힐난하지 말아야 한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2부경(部經)인 수다라(修多羅)ㆍ기야(祇夜)ㆍ수기경(受記經)ㆍ가타(伽陀)ㆍ우타나(優陀那)ㆍ인연경(因緣經)ㆍ아파타나(阿波陀那)ㆍ여시어경(如是語經)ㆍ본생경(本生經)ㆍ광경(廣經)ㆍ미증유경(未曾有經)ㆍ논의경(論議經)을 듣고,
또한 모든 성문들이 들었거나 듣지 않은 것을 모두 다 외우고 받아 지니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먼저 “모두 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듣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말씀하신 법이라 함은 곧 이 12부경이다.
모든 경 가운데서 직설(直說)된 것을 수다라(修多羅)라 하는데,
이른바 4아함(阿含)과 모든 마하연경(摩訶衍經)과 그리고 이백오십계경(二百五十戒經)이다.
3장(藏)에서 나오는 그 외에도 역시 경들이 있나니,
모두를 수다라라 한다.
모든 경전 안에서의 게송[偈]을 기야(祇夜)라 한다.
중생은 아홉 갈래[九道] 안에서 기별(記別)을 받나니,
이른바 3승(乘)의 도와 6도[六趣道]이다.
“이 사람은 그만큼의 아승기겁을 지나면 부처님이 되리라”고 하거나 또는 “그만큼의 세월을 지나면 부처님이 되리라”고 기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문의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나 뒷세상에 도를 얻는다고 수기하고 벽지불에게는 다만 뒷세상에 도를 얻을 것이라고 수기하며,
그 밖의 6도(道)에 대해서도 역시 모두 뒷세상에 과보를 받는다고 수기하신다.
모든 부처님 법에서 중생에게 수기를 하려 하시면,
먼저 모두 빙그레 미소 지으시면서[微笑] 한량없는 광명을 네 개의 어금니[牙]에서 내시나니,
이른바 청색ㆍ황색ㆍ적색ㆍ백색ㆍ옥색[縹色] 및 자색(紫色) 등이다.
위의 두 어금니에서 내시는 광명은 3악도(惡道)를 비추며,
그 광명에서 한량없는 법을 펴면서 온갖 지어진 법의 무상함과 온갖 법에 나 없음과 안온한 열반을 설한다.
중생으로서 이 광명을 만나고 설법을 듣는 이면 몸과 마음이 안락해지고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며,
이 인연을 따라 모두가 고통을 마치게 된다.
아래의 두 어금니에서 내시는 광명은 위로는 인간ㆍ천상과 유정선(有頂禪)79)까지 비추고,
귀머거리와 벙어리와 미치광이의 병을 모두 낫게 한다.
6욕천(欲天)과 사람과 아수라로서 5욕락(欲樂)을 받는 이들은 부처님의 광명을 만나고,
설법하는 음성을 들으면 모두가 욕락에 싫증을 내면서 몸과 마음이 안온하게 된다.
그리고 색계(色界)의 모든 하늘은 선정의 즐거움을 받을 때에 이 부처님의 광명을 만나고 설법하는 음성을 들으면 역시 싫증을 내면서 부처님께로 오게 된다.
이 모든 광명은 다시 시방에 이르러 6도(道)를 두루 비추면서 불사(佛事)를 지은 뒤에는 도로 돌아와서 부처님 몸을 일곱 바퀴 돈다.
만일 지옥에 수기하게 되면 그 광명이 발바닥으로 들어가고,
만일 축생에 수기하게 되면 그 광명은 발뒤꿈치로 들어가며,
만일 아귀에 수기하게 되면 그 광명은 넓적다리로 들어간다.
만일 인도(人道)에 수기하게 되면 그 광명은 배꼽으로 들어가고,
만일 천도(天道)에 수기하게 되면 그 광명은 가슴으로 들어가며,
만일 성문에게 수기하게 되면 그 광명은 입으로 들어가고,
만일 벽지불에게 수기하게 되면 그 광명은 눈썹 사이로 들어가며,
만일 부처님이 될 것을 수기하게 되면 그 광명은 정수리로 들어간다.
만일 수기하려 하면 먼저 이런 특징을 나타내고 그런 뒤에야 아난(阿難) 등의 모든 제자들이 질문을 하게 된다.
온갖 게송을 기야(祇夜)라 한다.
여섯 글귀ㆍ세 글귀ㆍ다섯 글귀 등 그 글귀의 많고 적음은 정해 있지 않는데도 역시 기야라 하며 또한 가타(伽陀)라고도 한다.
우타나(優陀那)란 유법(有法)이라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말씀을 하셔야 함에도 질문하는 이가 없으면,
부처님은 대략 질문의 실마리를 열어 주신다.
마치 부처님께서 사바제(舍婆提)에 계시면서 비사가당(毘舍佉堂)80) 위의 그늘진 곳을 거니실 때 스스로 우타나를 말씀하셨나니,
이른바 “나가 없고 내 것도 없는 이 일이야말로 장하도다”고 하신 것과 같다.
그때 한 비구가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어떻게 나가 없고 내 것도 없는 이 일이 장하옵니까?”고 하자,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시되 “범부의 사람은 아직 무루의 도[無漏道]를 얻지 못한 채 뒤바뀌어 마음이 가려졌기 때문에 나 없고 내 것도 없는 것에 몹시 놀라고 두려워한다.
하지만 만일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로서 좋은 법을 들은 이면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고 뒤바뀜이 없기 때문에 다시는 더 짓지 않느니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등은 잡아함(雜阿含) 중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또 마치 반야바라밀품(般若波羅蜜品) 중에서 천자(天子)들이 수보리가 한 말을 칭찬하면서 “장하고 장하나이다.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있기 어려운 일입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한 것과 같나니,
이것을 우타나라고 한다.
또 마치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제자들이 중요한 게송을 추려 모아 모든 무상한 게송 등은 무상품(無常品)으로 하고 바라문의 게송 등은 바라문품(婆羅門品)으로 지었나니,
이것도 역시 우타나라 한다.
그리고 모아 놓은 여러 묘한 일들도 모두 우타나라 하나니,
이와 같은 등을 우타나경(優陀那經)의 모양이라 한다.
니타나(尼陀那)라 함은 모든 부처님 법이 본래 일어난 인연(因緣)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무슨 인연 때문에 이런 일을 말씀하셨다”거나,
수다라(修多羅) 중에서 “어떤 사람이 물었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이 일을 말씀하셨다”거나,
비니(毘尼) 중에서는 “어떤 사람이 이런 일을 범하였기 때문에 이 계를 제정하셨다”고 하는 것 등이니,
온갖 부처님의 말씀이 일어난 인연의 일을 모두 니타나라 한다.
아파타나(阿波陀那)라 함은 세간의 모양과 비슷한 부드럽고 얕은 말이다.
마치 『중아함(中阿含)』 중의 장아파타나경(長阿波陀那經)과 『장아함(長阿含)』 중의 대아파타나(大阿波陀那)와 비니(毘尼) 중의 억이아파타나(億耳阿波陀那)와 이십억아파나해(二十億阿波陀那解)와 이백오십계경(二百五十戒經) 중의 욕아파타나(欲阿波陀那)의 일부와 보살아파타나(菩薩阿波陀那)의 일부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아파타나가 있다.
여시어경(如是語經)이라 함은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끝맺는 구절[結句]로서 “내가 먼저 말하기로 한 것을 이제 다 말하여 마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3장(藏)과 마하연(摩訶衍) 이외에 다시 경이 있어 일목다가(一目多迦)81)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다가(目多迦)82)라 한다”고 한다.
목다가라는 이름은 3장과 마하연에서 나온다.
이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마치 부처님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정반왕(淨飯王)이 억지로 출가시키어 부처님의 제자가 된 이들을 부처님께서는 그 중에서 도를 얻을 수 있는 5백 인을 선택하여 사바제(舍婆提)로 데리고 오셨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한지라 만일 고향을 가까이하면 파계(破戒)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바제로 데리고 와서는 사리불과 목건련 등으로 하여금 그들을 교화하게 했는데,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정신을 외곬으로 쓰게 하면서 잠을 재우지 않았으니,
이렇게 부지런히 닦고 정진한 까닭에 도를 얻게 되었다.
도를 얻고 나자 부처님은 도로 본국으로 데리고 오셨는데,
온갖 부처님들의 법에서는 본국으로 돌아올 때는 크게 모여든 모든 하늘들과 함께 가비라바(迦毘羅婆) 선인숲(仙人林) 가운데 머무시도록 되어 있었다.
이 숲은 가비라바성(迦毘羅婆城)에서 50리(里) 떨어진 곳이었고,
바로 모든 석씨(釋氏)들이 재미있게 노닐던 동산이었다.
이 석씨 비구들은 사바제에 있을 때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정신을 외곬으로 쓰면서 잠을 자지 않았기 때문에 밤이 몹시 긴 것으로 여겨졌고,
숲에서 와서는 성으로 들어가 걸식을 하면서 길이 멀고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셨다.
마침 또 사자 한 마리가 와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는 한쪽에 머물렀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세 가지의 인연 때문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겐 밤은 길고
지친 나그네에겐 길이 멀듯이
어리석어 생사(生死)가 긴 것은
바른 법을 알지 못해서이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들이 아직 출가하기 전에는 그 마음이 방일하여 잠을 많이 잤기에 밤이 긴 것을 몰랐으나 이제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오로지 정진하면서 도를 구하느라 잠을 줄인 까닭에 밤이 몹시 긴 것을 깨달았으리라.
이 가비라바 숲도 너희들이 본래 수레를 타고 와서 재미있게 놀던 곳이라 먼 데인 줄 몰랐지만 지금은 가사(袈裟)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걸어다니므로 몹시 지친 까닭에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자는 비바시불(鞞婆尸佛) 때에는 바라문의 스승으로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설법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로 왔었는데 그때 대중들이 법을 듣느라 함께 말해주는 이가 없자 곧 나쁜 생각을 내어 욕설을 하면서 ‘이 까까머리 무리는 짐승들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좋은 사람도 구별하지 못하고 말할 줄도 모른다’고 한 것이다.
이 나쁜 구업(口業) 때문에 비바시불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91겁 동안을 항상 축생 안에 떨어져 있었다.
이 사람은 그때에 즉시 도를 얻어야 했는데도 어리석었던 까닭에 스스로 생사에 오랫동안 있었다.
이제는 부처의 처소에 와서 마음이 청정한 까닭에 마땅히 해탈하게 되리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경들을 일컬어 출인연(出因緣)이라 한다.
어느 곳에서 나왔느냐 하면,
3장과 마하연 중에서 나왔기 때문에 출(出)이라 한다.
무엇을 인연이라 하느냐 하면,
이 세 가지 일의 근본을 인연(因緣)이라 하는 것이다.
본생경(本生經)이라 함은,
옛날 보살이 일찍이 사자였을 때 숲 속에 있으면서 한 마리의 원숭이와 함께 친하게 지냈다.
원숭이는 두 마리의 새끼를 그 사자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마침 독수리가 배가 고파서 먹이를 찾고 다니다가 사자가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고 원숭이 새끼를 채어가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사자는 잠에서 깨어나 원숭이 새끼들을 찾았으나 없었는데,
독수리가 채어가서 나무 위에 있는 것을 보고는 독수리에게 말하기를 “나는 원숭이 새끼 두 마리를 맡고 있으면서 잘못 보호하여 네가 채어가도록 만들었다.
나는 신의를 저버리게 되었으니,
돌려주면 좋겠다.
나는 길짐승 가운데서 왕이요 너는 날짐승 안에서 임금이어서 귀함과 세력이 동등한 처지이니,
돌려주어야 한다”고 하자,
독수리는 말하기를 “너는 때를 모르는구나.
나는 지금 몹시 배가 고파 있는데 무슨 같고 다름을 논하겠느냐”고 했다.
사자는 그가 돌려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자기의 날카로운 발톱으로 자신의 겨드랑이의 살을 뜯어내어서 그 원숭이의 새끼들과 바꾸었다.
또 과거의 세상에 백성들 거의 모두가 황백위(黃白痿)의 열병에 걸렸으므로 보살은 그때 적어(赤魚)의 몸이 되어서 스스로 그 병든 사람들에게 살을 보시하여 그 질병들을 낫게 하였다.
또 옛날 보살은 한 새의 몸이 되어서 숲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한 사람이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곳은 사람이 다니는 곳이 아니었고 그 사람은 수신(水神)의 덫에 걸려들었다.
수신의 덫에 걸려들면 꽉 달라붙어서 풀리지 않는 법이었으므로 이 새는 그 풀리는 법을 알았는지라 향산(香山) 속으로 가서 하나의 약풀을 뜯어 와서 그 덧 위에다 놓자,
그 노끈이 이내 문드러지면서 그 사람은 풀려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본생(本生)에는 구제한 일들이 많이 있나니,
이것을 본생경이라 한다.
광경(廣經)이라 함은 마하연(摩訶衍)을 이름하나니,
이른바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과 『육바라밀경(六波羅蜜經)』과 『화수경(華手經)』과 『법화경(法華經)』과 『불본기인연경(佛本起因緣經)』과 『운경(雲經)』과 『법운경(法雲經)』과 『대운경(大雲經)』 등등 이러한 한량없는 아승기의 모든 경전이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위하여 말씀하신 경이다.
비불략경(毘佛略經)[진나라 말로는 미증유경(未曾有經)이다.]은 마치 부처님께서 갖가지의 신력을 나타내면 중생들이 보고 전에 없던 일[未曾有]이라고 괴상하게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른바 부처님께서 탄생할 때 몸으로 큰 광명을 놓아 삼천대천의 세계와 어두운 곳을 비추셨고 다시 시방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신 것이다.
이때 부처님의 어머님 앞에는 청정한 좋은 못이 있어서 보살을 목욕시키셨는데 범왕(梵王)은 일산을 받쳐 들고 제석(帝釋)은 몸을 씻었으며 두 마리의 용(龍)은 물을 토해냈다.
또 태어났을 때에는 붙드는 이도 없이 일곱 걸음을 걸어가셨고 그 발자국마다 연꽃이 솟아나 발을 바쳤으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는 바로 온갖 중생들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을 제도할 이다”고 하셨다.
땅은 크게 진동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으며 나무는 음성을 내고 하늘의 음악이 울렸으니,
이러한 등등의 한량없는 희유한 일들을 말씀하신 것을 바로 미증유경이라 한다.
논의경(論議經)이라 함은 모든 질문한 이에게 대답하면서 그 까닭을 해석하는 것이다.
또 다시 모든 이치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니,
마치 부처님께서 4제(諦)를 말씀할 때와 같다.
“어떤 것이 4제입니까?” 하면,
“이른바 4성제(聖諦)이니라”고 하며,
“어떤 것이 4성제입니까?” 하면,
“이른바 괴로움[苦]ㆍ쌓임[集]ㆍ사라짐[滅]ㆍ도(道)의 거룩한 진리이니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논의(論議)라 한다.
“어떤 것이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苦聖諦]입니까” 하면 “이른바 나는 괴로움[生苦] 등의 여덟 가지 괴로움이니라”고 하며,
“어떤 것이 나는 괴로움입니까” 하면 “이른바 모든 중생들이 저마다 나는 곳에서 받게 되는 괴로움이니라”고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문답에서 그 뜻을 자세히 해석하는 것을 바로 우바제사(優波提舍)라 한다.
마치 마하연 중에서는 부처님께서 6바라밀을 말씀하시면서 “어떤 것이 6바라밀입니까” 하면 “이른바 단(檀)바라밀에서부터 반야(般若)바라밀까지니라”고 하며,
“어떤 것이 단바라밀입니까” 하면 “단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두루 갖추어진[具足] 것이요 둘째는 두루 갖추어지지 않은[不具足] 것이니라”고 하며,
“어떤 것이 두루 갖추어진 것입니까” 하면 “반야바라밀과 화합하면서 나아가 10주(住)의 보살이 얻은 바를 바로 두루 갖추어졌다 하느니라.
두루 갖추어지지 않았다 함은 처음 보살의 마음을 내어서 아직 무생인(無生忍)을 얻지 못하고 갖추어지지 않았다 하나니,
또한 선(禪)바라밀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반야바라밀이 두루 갖추어진 이면 방편의 힘[方便力]이 있지만 아직 두루 갖추어지지 못한 이면 방편의 힘이 없느니라”고 한 것과 같다.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논의경과 마하가전연(摩訶迦栴延)이 해석한 바의 수다라(修多羅) 내지 상법(像法) 동안에 범부가 법대로 해설한 것도 역시 우바제사라 한다.
성문이 듣지 못한 바라 함은,
부처님께서 유독 보살만을 위하여 설법하셨는지라 모든 성문으로서는 들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은 신통력으로써 몸을 수없이 변화하여 시방의 1승(乘) 세계에 두루 가셔서 설법하게 되시며,
또 부처님은 욕계의 하늘[欲天]과 색계의 하늘[色天]들을 위하여 설법하실 때에는 모든 제자들이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듣지 못하게 된다.


【문】 모든 6통(通) 아라한은 설령 부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비록 그 자리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천이(天耳)와 천안(天眼)으로써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며 만일 숙명통(宿命通)으로써 하면 과거의 일을 아울러 알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듣지 못한다 하는가?
【답】 모든 성문들의 신통력으로써는 미치지 못할 바라 이 때문에 듣지 못한다.
또 부처님께서 모든 큰 보살들을 위하여 『불가사의해탈경(不可思議解脫經)』을 말씀할 때는 사리불과 목련이 부처님의 좌우에 있었으면서도 그 말씀을 들을 수 없었나니,
이들은 대승의 행법(行法)을 들을 수 있는 인연을 심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좌선(坐禪)하는 사람이 일체처정(一切處定) 안에 들어가면 온갖 것을 모두 물이 되게 할 수도 있고 모두 불이 되게 할 수 있는데도 그 밖의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마치 『불가사의해탈경』 가운데서 자세히 설명된 것과 같다.
모조리 받아 지니고자[受持] 한다 함은,
듣고서 받들어 행하면 받는다[受] 하고 오래오래 상실하지 않으면 지닌다[持]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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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범어로는 anutpādakoṭi.
곧 ‘태어남이 없는 경계’를 말한다.
71)
범어로는 Chaṇḍaka.
원래 석가족의 노예의 자식으로,
석존께서 성도 후 최초로 고향을 방문했을 때 귀의했다.
72)
범어로는 Meghiya.
73)
범어로는 dharmadhātujakāya.
74)
범어로는 Velāma.
75)
범어로는 Sudinna.
76)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Pratyutpanna-buddhasaṃmukhā vasthitasamādhi- sūtra)』을 말한다.
77)
범어로는 śruta-dharadhāraṇī.
78)
범어로는 anirodhakoṭi-samādhi.
79)
유정천(有頂天)을 말한다.
80)
범어로는 Viśākhāprāsāda.
81)
범어 Ityuktaka의 음역어.
82)
범어 Ityuktaka의 음역어.


● [pt op tr] fr







『대지도론』 ♣0549-033♧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Christophe Maé - On S'attache.lrc 
Christophe Maé - On S'attache 


◎◎[개별논의] ❋본문


● 철수가 사과를 영희에게 건넬때 철수,사과,영희를 얻을 수 없는 현실의 이해

불교 경전을 대하는 가운데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은 사실 생사의 묶임에서 해탈하는 출구부분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정작 일반 입장에서는 이 부분이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인천교적인 내용에 집중하게 된다. 
즉 우선 하늘로 올라가 세상의 고통을 벗어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불교에서는 내용을 제시는 하더라도 
수행 목표에서는 제외된다. 
수행자가 수행목표로 할 바가 아니라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필요하지만, 수준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다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과정에서 하늘을 오간다해도 색계 하늘부터가 대상이 된다. 
욕계 하늘과는 수준이 또 다르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해탈문을 들어서야 한다. 
공해탈문, 무상해탈문, 무원무작 해탈문이 그것이다. 

그래서 실상의 공함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상을 취하고 임하지 않아야 한다. 
이로 인해 안인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현실에서 이전 망집상태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위에 이르게 된다. 

한편, 망집에 바탕해 갖는 소원을 모두 남김없이 제거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소원을 추구하는 업도 행하지 않게 된다. 
그로 인해 망집에 바탕해 망상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상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결국 욕계에서 낙타나 꿀벌, 곰과 같은 상태로 남게 된다. 
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자신이 원해서 무언가를 추구한다고 하자. 
자신은 그것이 자신에게 좋음을 가져다 준다고 여기고 그렇게 행한다. 
그래서 쉼없이 분주하게 추구하며 업을 행한다. 
그런데 그것이 낙타나 꿀벌, 곰이 행하는 결과와 사정이 같다. 
욕계내에서 행한 업이 가져오는 결과가 그와 같다. 
욕계내에서 그 수확은 마파순이 거두게 된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마파순을 좋게 해주는 낙타 노릇을 한 것이 된다. 
이 사정을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낙타가 낙타를 부리는 캐러번 대상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  꿀벌이 벌통을 놓고 가는 양봉업자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 공을 굴리는 곰의 입장에서 조련사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렇게 망집에 바탕해 수행방안과 다른 업을 행하는 것을 '타승'이라고도 표현한다.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결국 계율도 당연히 어기는 것이 된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마파순이 이기는 결과가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상태를 끝내 벗어나려면 해탈문에 들어서야 한다. 
결국 현실에서 사과를 하나 놓고 그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사과를 들고 영희에게 건넨다. 
이 하나의 현실단면을 놓고 여기에 등장하는 각 내용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자신, 영희, 사과, 주는이, 받는이, 무언가를 건네는 행위, 주는 행위, 받는 행위, 
그 결과, 이런 것들의 의미와 정체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자신이 사과를 붙잡는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누구나 사과를 붙잡은 손부분을 보게 된다. 
이 상황에서 손 부분은 자신의 몸이라고 잘못 여긴다. => 신견, 아상  
그리고 그 손이 닿은 사과는 그 동작의 대상이라고 잘못 여긴다. => 동작의 외부대상, 
마찬가지로 그 사과는 자신의 눈이 대하는 외부대상이라고 잘못 여긴다. => 소연, 소연연 
그리고 그 상황에 자신이 보는 영희를 영희라고 잘못 여긴다. => 타상 

그런데 현실에서 임할 때마다 매번 위와 같이 잘못 여기게끔 된다. 
그래서 위 내용이 잘못이라고 제시하면 오히려 의아하게 여긴다. 
이것이 망집 증상이다. 
그런데 이 사정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또 설령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그렇다면 이제 그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또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 상황에서 자신, 영희, 사과라고 여기고 대한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히 제시하면 그것이 결국 수행이다. 
그런데 그 부분에서 또 그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즉 실재가 공함을 이해하고 현실에서 취할 상이 없다는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 경우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쉽다. 
사정이 그러하니까 이제 아무렇게 해도 된다고 잘못 여긴다. 
이것이 악취공견이다. 
그래서 오히려 또 상태가 나빠지게 된다. 

따라서 위 부분을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서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즉 무소득을 방편으로 해야 할 일은 잘 실천하고 하지 않아야 할일은 또 잘 하지 않아야 한다. 
결국 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을 제거한 가운데,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1★





◆vrlb4610

◈Lab value 불기256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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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ovo Prizren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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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ida - Garde-Moi La Derni8re Danse



♥단상♥주사위를 매번 원하는 숫자가 나오게 하는 방안-인과의 정복

주사위를 붙잡고 6 이 나오기를 희망하면서 책상위에 던져 보자. 
그런데 1 이 나왔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6 이 나와야 했다. 
그래야 모든 것이 뜻대로 된다고 하자. 

주사위는 주사위일 뿐이다. 
그런데 삶에서 갖는 희망의 성취문제도 사정이 이와 같다. 

그래서 위 한 내용을 놓고 그 사정을 잘 살펴야 한다. 

자신이 주사위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매번 주사위를 던지는 일을 한다고 하자. 

여기에서 처음 다음이 요구된다.
주사위를 던지고 다음에 나올 숫자를 알아맞히는 것이다. 
두번째는 자신이 희망하는 대로 매번 주사위숫자가 나오게 하는 방안이다. 

이 둘 가운데 어느 것도 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혹시나하고 계속 주사위를 던진다고 하자. 
그러면 비관적이다. 
물론 어떤 경우 몇번은 뜻처럼 숫자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뜻대로 되지 않는다. 
주사위 문제는 확률이 1/6 정도 되는 성격이다. 
현실은 더 심하다. 
그런 가운데 매번 주사위 문제 성격처럼 각 문제를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결국 그런 형태가 현실에서 임하는 삶의 모습이 된다.  
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이게 된다. 
혹시나 하고 탈출할 길을 모색하지만, 매번 중간에서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주사위 하나를 놓고 위 과정이 갖고 있는 문제성격을 잘 파악해야 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Leoparleur - Mon Koeur Ment.lrc
Leoparleur - Mon Koeur Ment 





문서정보 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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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ed--대지도론_K0549_T1509.txt ☞제33권
sfd8--불교단상_2565_03.txt ☞◆vrlb4610
불기256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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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5분(分)의 처음 본지분(本地分)에 나옴. 오식신상응지(五識身相應地)ㆍ의지(意地)ㆍ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ㆍ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ㆍ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ㆍ삼마혜다지(三摩呬多地)ㆍ비삼마혜다지(非三摩呬多地)ㆍ유심지(有心地)ㆍ무심지(無心地)ㆍ문소성지(聞所成地)ㆍ사소성지(思所成地)ㆍ수소성지(修所成地)ㆍ성문지(聲聞地)ㆍ연각지(緣覺地)ㆍ보살지(菩薩地)ㆍ유여의지(有餘依地)ㆍ무여의지(無餘依地).

답 후보
● 십칠지(十七地)
아고(阿家)
아나함(阿那含)
아누루타(阿㝹樓馱)
아리야(阿梨耶)

아바라밀(我波羅蜜)
아비지옥(阿鼻地獄)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2020_1017_150844_can_Ab15_s12
_ori_rs
○ 2016_0505_120822_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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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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