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심밀경』
K0154
T0676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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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심밀경』 ♣0154-003♧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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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별논의]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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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개별논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解深密經卷第三
K0154
○ [pt op tr]
해심밀경 제3권
대당 현장 한역
김달진 번역
6. 분별유가품(分別瑜伽品)
그때 자씨(慈氏)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머물러
대승의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수행합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보살은 법을 거짓으로 세움[法假安立]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원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의지를 삼고 머무름을 삼아서 대승에서 사마타와 비발사나를 닦는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네 가지 소연경사(所緣境事)가 있으니,
첫째는 유분별 영상소연분별경사(有分別影像所緣分別境事)요,
둘째는 무분별 영상소연경사(無分別影像所緣境事)요,
셋째는 사변제 소연경사(事邊際所緣境事)요,
넷째는 소작성판 소연경사(所作成辦所緣境事)입니다.
이 네 가지 가운데 몇 가지가 사마타의 소연경사이며,
몇 가지가 비발사나의 소연경사이며,
몇 가지가 모두에게 소연경사입니까?”
“선남자여,
한 가지가 사마타의 소연경사이니,
이른바 무분별영상(無分別影像)이다.
한 가지가 비발사나의 소연경사이니,
이른바 유분별영상(有分別影像)이다.
두 가지는 모두의 소연경사이니,
이른바 사변제(事邊際)와 소작성판(所作成辨)이다.”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사마타와 비발사나의 네 가지 소연경사에 의지해 어떻게 사마타를 구하며 비발사나에 능통합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내가 모든 보살들을 위해 말한 거짓으로 세운 법과 같으니,
이른바 계경(契經)ㆍ응송(應誦)ㆍ기별(記別)ㆍ풍송(諷誦)ㆍ자설(自說)ㆍ인연(因緣)ㆍ비유(譬喩)ㆍ본사(本事)ㆍ본생(本生)ㆍ방광(方廣)ㆍ희법(希法)ㆍ논의(論議)이다.
보살은 이것들을 잘 듣고 잘 받아 말을 잘 통하고 뜻을 잘 생각하며 소견을 잘 통달하니,
이렇게 잘 생각하는 법과 같이 홀로 비고 고요한 곳에 앉아 뜻을 지어 생각한다.
다시 이렇게 생각하는 마음에 대하여 안의 마음으로 상속하며,
뜻을 지어 생각한다.
이렇게 바른 수행에 많이 머무르기 때문에 몸의 가벼움[輕安]을 일으키니 이것이 ‘사마타’이다.
이러한 보살은 능히 사마타를 구한다.
그는 몸과 마음에서 얻은 가벼움으로 의지할 대상을 삼는 까닭에 곧 잘 생각하는 법과 같은 안의 삼마지(三摩地)로 행하는 영상(影像)에 대하여 관찰하고,
수승하게 깨치고,
마음의 모습[心相]을 버린다.
곧 이러한 삼마지의 영상에서 안 뜻 가운데 능히 바르게 생각하여 선택하고,
가장 극진히 생각하여 가리고,
두루 찾아 생각하고,
두루 살펴 생각하는 인(忍)이나 혹은 즐거움이나 소견이나 관찰을 바로 ‘비발사나’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보살은 비발사나에 능통한다.”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보살이 마음을 반연하여 경계를 삼고 안으로 생각하는 마음이긴 하지만,
나아가 몸과 마음의 가벼움을 얻지 못했다면 그때의 작의(作意)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선남자여,
사마타의 작의가 아니다.
이는 사마타에 수순하는 승해와 상응하는 작의이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이 나아가 아직 몸과 마음의 가벼움을 얻지 못했고,
생각하는 바와 같이 있는 모든 법의 안의 삼마지로 소연인 영상에 대하여 뜻을 짓고 사유한다면 이런 작의는 무엇이라 합니까?”
“선남자여,
비발사나의 작의가 아니다.
이는 비발사나에 수순하는 승해와 상응하는 작의이다.”
“세존이시여,
사마타의 도와 비발사나의 도는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합니까,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합니까?”
“선남자여,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에 차이가 없는가?
비발사나의 소연경계에 마음으로써 소연을 삼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차이가 없지 않은가?
유분별영상은 소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 “세존이시여,
모든 비발사나와 삼마지가 행하는 대상인 영상(影像)은
이 마음과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합니까,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합니까?”
“선남자여,
차이가 없다고 말해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저 영상은 오직 식(識)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내가 말한 식의 소연은 오직 식으로부터 나타난 경계이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그 행하는 대상인 영상이 이 마음과 차이가 없다면
어떻게 이 마음이 도리어 이 마음을 볼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이 가운데는 조그마한 법을 볼 수 있는 조그마한 법도 없다.
이 마음이 이렇게 생길 때에 곧 이러한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선남자여,
마치 잘 닦여진 청정한 거울의 표면에 의지해 본질로써 반연을 삼고 도리어 본질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이제 영상을 보았다’고 말하며,
또는 ‘본질을 떠나서 따로 영상이 있어서 나타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아서 마음이 생길 때에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는 삼마지의 대상인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유정이 자성에 머물러 마음의 대상인 영상으로 색(色) 등을 반연한다면,
그것은 이 마음과 또한 차이가 없습니까?”
“선남자여,
또한 차이가 없다.
그러나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잘못된 깨달음에 의지해 모든 영상이 오직 식뿐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고 잘못된 알음알이를 짓는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보살이 한결같이 비발사나를 닦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선남자여,
작의를 상속하고 심상(心相)을 생각할 경우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보살이 한결같이 사마타를 닦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선남자여,
작의를 상속하며 무간심(無間心)을 생각할 경우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보살이 사마타와 비발사나를 합쳐 함께 굴린다고 말씀하십니까?”
“선남자여,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바르게 생각할 경우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심상(心相)입니까?”
“선남자여,
이른바 삼마지의 대상인 유분별영상(有分別影像)과 비발사나의 소연(所緣)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무간심(無間心)입니까?”
“선남자여,
이른바 저 영상을 반연하는 마음과 사마타의 소연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심일경성(心一境性)입니까?”
“선남자여,
이른바 삼마지의 대상인 영상이 오직 식임을 통달하거나 혹은 이렇게 통달하고 다시 진여의 성품을 생각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비발사나는 몇 가지나 있습니까?”
“선남자여,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상비발사나(有相毘鉢舍那)요,
둘째는 심구비발사나(尋求毘鉢舍那)요,
셋째는 사찰비발사나(伺察毘鉢舍那)이다.
무엇이 유상비발사나인가?
이른바 순전히 삼마지의 대상인 유분별영상만 생각하는 비발사나이다.
무엇이 심구비발사나인가?
이른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두루 여러 가지로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일체 법 가운데서 잘 알기 위해 뜻을 지어 생각하는 비발사나이다.
무엇이 심구비발사나인가?
이른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두루 여러 가지로 이미 잘 깨친 일체 법 가운데서 극진한 해탈[極解脫]을 얻기 위해 뜻을 지어 생각하는 비발사나이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순전히 삼마지의 대상인 유분별영상만 생각하는 비발사나이다.
무엇이 심구비발사나인가?
이른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두루 여러 가지로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일체 법 가운데서 잘 알기 위해 뜻을 지어 생각하는 비발사나이다.
무엇이 심구비발사나인가?
이른바 지혜를 말미암는 까닭에 두루 여러 가지로 이미 잘 깨친 일체 법 가운데서 극진한 해탈[極解脫]을 얻기 위해 뜻을 지어 생각하는 비발사나이다.”
“세존이시여,
사마타는 모두 몇 가지나 있습니까?”
“선남자여,
저 무간심(無間心)을 따르는 까닭에 마땅히 알라,
이 가운데 또한 세 가지가 있다.
또 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처음의 정려(靜慮)부터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
“선남자여,
저 무간심(無間心)을 따르는 까닭에 마땅히 알라,
이 가운데 또한 세 가지가 있다.
또 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처음의 정려(靜慮)부터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
각각 하나의 사마타가 있는 까닭이다.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4무량(無量) 가운데 각각 하나의 사마타가 있는 까닭이다.”
이른바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4무량(無量) 가운데 각각 하나의 사마타가 있는 까닭이다.”
“세존이시여,
법에 의지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다시 법에 의지하지 않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법에 의지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다시 법에 의지하지 않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법에 의지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이며,
무엇이 법에 의지하지 않는 사마타ㆍ비발사나입니까?”
무엇이 법에 의지하지 않는 사마타ㆍ비발사나입니까?”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이전에 배우고 생각한 법상(法相)에 따라 그 뜻에서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얻는다면,
그것을 법에 의지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라고 한다.
만일 모든 보살이 이전에 배우고 생각한 법상(法相)에 따라 그 뜻에서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얻는다면,
그것을 법에 의지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라고 한다.
만일 모든 보살이 배우고 생각한 법상을 기다리지 않고 그저 다른 훈계와 가르침만 믿고 그 뜻에서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얻는다면,
이른바 푸르게 굳어가는 모습[靑瘀]을 관찰하고 나아가 고름으로 문드러지는 모습[膿爛]을 관찰하며,
혹은 일체 행은 모두가 무상함과 모든 행은 괴로움과 일체 법은 아(我)가 없음과 열반은 끝끝내 고요함을 관찰한다면,
이러한 무리의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법에 의지하지 않는 사마타ㆍ비발사나라고 한다.
법에 의지하여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얻는 까닭에 나는
이른바 푸르게 굳어가는 모습[靑瘀]을 관찰하고 나아가 고름으로 문드러지는 모습[膿爛]을 관찰하며,
혹은 일체 행은 모두가 무상함과 모든 행은 괴로움과 일체 법은 아(我)가 없음과 열반은 끝끝내 고요함을 관찰한다면,
이러한 무리의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법에 의지하지 않는 사마타ㆍ비발사나라고 한다.
법에 의지하여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얻는 까닭에 나는
법을 따라 행하는 보살[隨法行菩薩]이라고 시설하니,
이들은 영리한 성품이다.
이들은 영리한 성품이다.
법에 의지하지 않고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얻는 까닭에 나는
믿음을 따라 수행하는 보살[隨信行菩薩]이라고 시설하니,
이들은 둔한 성품이다.”
이들은 둔한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별법(別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총법(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입니까?”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들이 각각 다른 계경(契經) 따위의 법을 반연하여 받은 것과 같은 생각한 것과 같은 법에서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수행한다면 이를 별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라 한다.
별법(別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총법(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입니까?”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들이 각각 다른 계경(契經) 따위의 법을 반연하여 받은 것과 같은 생각한 것과 같은 법에서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수행한다면 이를 별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라 한다.
만일 모든 보살들이 일체 계경 등의 법을 반연하여 뭉뚱그려
한 덩이, 한 더미, 한 갈피, 한 무더기로 삼고,
뜻을 지어 이렇게 생각한다
뜻을 지어 이렇게 생각한다
.
‘이 일체 법은 진여를 수순하고 진여로 향하며 진여로 들어간다.
보리를 수순하고 열반을 수순하고 전의(轉依)를 수순하며,
또한 그것들로 향하고 그것들로 들어간다.
이 일체 법은 무량ㆍ무수한 선법을 일으킨다.’
‘이 일체 법은 진여를 수순하고 진여로 향하며 진여로 들어간다.
보리를 수순하고 열반을 수순하고 전의(轉依)를 수순하며,
또한 그것들로 향하고 그것들로 들어간다.
이 일체 법은 무량ㆍ무수한 선법을 일으킨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는 것을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라 한다.”
“세존이시여,
소총법(小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또 대총법(大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또 무량총법(無量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소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이며,
무엇이 대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이며,
무엇이 무량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입니까?”
“선남자여,
만일 각각 다른 계경(契經)과 나아가 논의(論議)를 반연하여 한 덩이로 삼고 뜻을 지어 생각하면,
마땅히 알라.
이는 소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이다.
만일 나아가 받고 생각한 계경 따위의 법을 반연하여 한 덩이로 삼고 뜻을 지어 생각하되 각각 다르게 반연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는 대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라 한다.
만일 무량한 여래의 가르침과 무량한 법구(法句)의 문자와 무량한 등등의 지혜로 비추는 것을 반연하여 한 덩이로 삼고 뜻을 지어 생각하며,
나아가 받고 생각한 것을 반연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를 무량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라 한다.”
소총법(小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또 대총법(大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시고,
또 무량총법(無量總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소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이며,
무엇이 대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이며,
무엇이 무량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입니까?”
“선남자여,
만일 각각 다른 계경(契經)과 나아가 논의(論議)를 반연하여 한 덩이로 삼고 뜻을 지어 생각하면,
마땅히 알라.
이는 소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이다.
만일 나아가 받고 생각한 계경 따위의 법을 반연하여 한 덩이로 삼고 뜻을 지어 생각하되 각각 다르게 반연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는 대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라 한다.
만일 무량한 여래의 가르침과 무량한 법구(法句)의 문자와 무량한 등등의 지혜로 비추는 것을 반연하여 한 덩이로 삼고 뜻을 지어 생각하며,
나아가 받고 생각한 것을 반연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를 무량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라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보살이 총법을 반연하여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얻었다고 합니까?”
어떤 경우에 보살이 총법을 반연하여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얻었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다섯 가지 반연을 말미암을 경우에 얻었다고 한다.
첫째는 사유할 때에 찰나 찰나에 일체 추중번뇌의 의지하는 대상을 녹이는 것이요,
둘째는 갖가지 망상을 여의고 즐거운 법락을 얻는 것이요,
셋째는 시방의 차별 없는 모습과 무량한 법의 광명을 아는 것이요,
넷째는 해야 할 일을 원만히 이루어 청정한 무분별상(無分別相)이 항상 나타나는 것이요,
다섯째는 법신을 원만히 이루어 점점 더욱 훌륭하고 묘한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섯 가지 반연을 말미암을 경우에 얻었다고 한다.
첫째는 사유할 때에 찰나 찰나에 일체 추중번뇌의 의지하는 대상을 녹이는 것이요,
둘째는 갖가지 망상을 여의고 즐거운 법락을 얻는 것이요,
셋째는 시방의 차별 없는 모습과 무량한 법의 광명을 아는 것이요,
넷째는 해야 할 일을 원만히 이루어 청정한 무분별상(無分別相)이 항상 나타나는 것이요,
다섯째는 법신을 원만히 이루어 점점 더욱 훌륭하고 묘한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는 어디서부터를 통달이라 하오며,
이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는 어디서부터를 통달이라 하오며,
어디서부터를 얻는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처음의 극희지(極喜地)부터를 통달이라 하며,
제3 발광지(發光地)부터를 얻는다고 한다.
처음의 극희지(極喜地)부터를 통달이라 하며,
제3 발광지(發光地)부터를 얻는다고 한다.
선남자여,
처음으로 업을 닦는 보살도 또한 이 가운데서 따라 배우고 뜻을 지으니,
비록 칭찬할 것은 못되나 응당 게을리 하여 폐하지 말라.”
처음으로 업을 닦는 보살도 또한 이 가운데서 따라 배우고 뜻을 지으니,
비록 칭찬할 것은 못되나 응당 게을리 하여 폐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에서 어떤 것을 유심유사삼마지(有尋有伺三摩地)라 하며,
어떤 것을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라 합니까?”
이 사마타ㆍ비발사나에서 어떤 것을 유심유사삼마지(有尋有伺三摩地)라 하며,
어떤 것을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라 합니까?”
“선남자여,
취하여 찾고 살피는 법상(法相)에 대하여 만일 거칠고 드러나게 받아들이는 관찰이 있다면,
이런 모든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유심유사삼마지(有尋有伺三摩地)라고 한다.
취하여 찾고 살피는 법상(法相)에 대하여 만일 거칠고 드러나게 받아들이는 관찰이 있다면,
이런 모든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유심유사삼마지(有尋有伺三摩地)라고 한다.
만일 저 모습에 대하여 비록 거칠고 드러나게 받아들이는 관찰은 없을지라도 미세한 광명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관찰이 있다면,
이런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무심유사삼마지(無尋有伺三摩地)라고 한다.
만약 저러한 일체 법상에 대하여 도무지 작의(作意)와 받아들임과 관찰이 없다면,
이런 모든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라고 한다.
또 선남자여,
만일 찾고 구함이 있는 사마타ㆍ비발사나면 이를 유심유사삼마지(有尋有伺三摩地)라 하며,
만일 살핌이 있는 사마타ㆍ비발사나면 이를 무심유사삼마지(無尋有伺三摩地)라 하며,
만일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면 이를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라고 한다.”
만일 찾고 구함이 있는 사마타ㆍ비발사나면 이를 유심유사삼마지(有尋有伺三摩地)라 하며,
만일 살핌이 있는 사마타ㆍ비발사나면 이를 무심유사삼마지(無尋有伺三摩地)라 하며,
만일 총법을 반연하는 사마타ㆍ비발사나면 이를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라고 한다.”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지상(止相)이며,
무엇이 거상(擧相)이며,
무엇이 사상(捨相)입니까?”
“세존이시여,
무엇이 지상(止相)이며,
무엇이 거상(擧相)이며,
무엇이 사상(捨相)입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마음이 들뜨거나 혹은 들뜰까 두려워할 때,
모든 싫어하는 법의 작의(作意)와 무간심(無間心)의 작의를 지상(止相)이라 한다.
“선남자여,
마음이 들뜨거나 혹은 들뜰까 두려워할 때,
모든 싫어하는 법의 작의(作意)와 무간심(無間心)의 작의를 지상(止相)이라 한다.
마음이 가라앉거나 가라앉을까 두려워할 때,
모든 즐거운 법의 작의와 그의 심상(心相)의 작의를 거상(擧相)이라 한다.
모든 즐거운 법의 작의와 그의 심상(心相)의 작의를 거상(擧相)이라 한다.
만일 한결같이 그치는 길에서나 한결같이 관찰하는 길에서나 혹은 함께 움직이는 길에서 두 가지 수번뇌(隨煩惱)에 물들었을 때,
모든 공용 없는 작의와 마음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가운데 있는 작의를 사상(捨相)이라 한다.”
모든 공용 없는 작의와 마음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가운데 있는 작의를 사상(捨相)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는 모든 보살은 법(法)을 알고 뜻[義]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법을 아는 것이며,
무엇이 뜻을 아는 것입니까?”
“선남자여,
저 모든 보살이 다섯 가지 모습에 의지해 법을 아니,
첫째는 명(名)을 알고,
둘째는 구(句)을 알고,
셋째는 문(文)을 알고,
넷째는 별(別)을 알고,
다섯째는 총(總)을 안다.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는 모든 보살은 법(法)을 알고 뜻[義]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법을 아는 것이며,
무엇이 뜻을 아는 것입니까?”
“선남자여,
저 모든 보살이 다섯 가지 모습에 의지해 법을 아니,
첫째는 명(名)을 알고,
둘째는 구(句)을 알고,
셋째는 문(文)을 알고,
넷째는 별(別)을 알고,
다섯째는 총(總)을 안다.
무엇이 명(名)인가?
이른바 일체 염정법(染淨法) 가운데 세워진 자성에 대해 생각으로써 거짓 시설한 것이다.
무엇이 구(句)인가?
이른바 저 이름 따위의 모임 가운데서 능히 모든 염ㆍ정의 뜻을 말함에 따라 의지하고 건립한 것이다.
무엇이 문(文)인가?
이른바 저 두 가지가 의지하는 문자이다.
무엇이 그것에 대하여 각각 다르게 아는 것인가?
이른바 각각 다른 소연을 말미암아 뜻을 짓는 것이다.
무엇이 그것에 대해 총합하여 아는 것인가?
이른바 총합한 소연을 말미암아 뜻을 짓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총합하고 간략히 하여 하나로 하는 것을 법을 안다고 하며,
이것을 보살이 법을 아는 것이라 한다.
선남자여,
저 보살들은 열 가지 모습에 의지해 뜻[義]을 안다.
첫째는 진소유성(盡所有性)을 알고,
둘째는 여소유성(如所有性)을 알고,
셋째는 능취(能取)의 뜻을 알고,
넷째는 소취(所取)의 뜻을 알고,
다섯째는 건립(建立)의 뜻을 알고,
여섯째는 수용(受用)의 뜻을 알고,
일곱째는 전도(顚倒)의 뜻을 알고,
여덟째는 무도(無倒)의 뜻을 알고,
아홉째는 잡염(雜染)의 뜻을 알고,
열째는 청정(淸淨)의 뜻을 안다.
선남자여,
진소유성(盡所有性)이란 모든 잡염(雜染)과 청정한 법 가운데 있는 일체 품류의 한계[邊際]이니,
이를 이 가운데의 진소유성이라 한다.
5온(蘊)과 6내처(內處)와 6외처(外處),
이것을 일체라 한다.
여소유성(如所有性)이란,
이른바 일체 염ㆍ정의 법 가운데 있는 진여이니,
이를 여소유성이라 한다.
여기에 또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전진여(流轉眞如)니 이른바 일체 행의 앞도 없고 뒤도 없는 성품이요,
둘째는 상진여(相眞如)니 이른바 일체 법의 보특가라(補特伽羅) 무아(無我)의 성품과 법무아의 성품이요,
셋째는 요별진여(了別眞如)이니 이른바 일체 행은 오직 식의 성품이요,
넷째는 안립진여(安立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고성제(苦聖諦)요,
다섯째는 사행진여(邪行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집성제(集聖諦)요,
여섯째는 청정진여(淸淨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멸성제(滅聖諦)요,
일곱째는 정행진여(正行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도성제(道聖諦)이다.
마땅히 알라.
이 가운데 유전진여와 안립진여와 사행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일체 유정은 평등하고 평등하다.
상진여와 요별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일체 법이 평등하고 평등하다.
청정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일체 성문의 보리와 독각의 보리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평등하고 평등하다.
정행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바른 법을 듣고 총합한 경계를 반연하는 훌륭한 사마타ㆍ비발사나에 포섭되는 지혜가 평등하고 평등하다.
능취(能取)의 뜻이란,
이른바 안의 다섯 가지 색처(色處)와 혹은 심(心)ㆍ의(意)ㆍ식(識)과 그리고 모든 심법(心法)이다.
소취(所取)의 뜻이란,
이른바 밖의 6처(處)이다.
또 능취의 뜻이 또한 소취의 뜻이기도 한다.
건립(建立)의 뜻이란,
이른바 기세계(器世界)이다.
그 안에 일체 유정세계를 건립할 수 있으니 이른바 한 마을,
혹은 백 마을,
혹은 천 마을,
혹은 백천 마을,
혹은 하나의 땅덩이의 바닷가에 이르는 것,
이것이 백,
이것이 천,
혹은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섬부주,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4대주(大洲),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이것이 구지(拘胝),
이것이 백 구지,
이것이 천 구지,
이것이 백천 구지,
혹은 이것이 무수(無數),
이것이 백 무수,
이것이 천 무수,
이것이 백천 무수,
혹은 삼천대천세계 무수ㆍ백천ㆍ미진의 수량이 시방으로 무량ㆍ무수한 모든 기세계이다.
수용(受用)의 뜻이란,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유정들이 수용하기 위해 재물[資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도(顚倒)의 뜻이란,
이른바 그 능취 등의 뜻에 대하여 무상함을 영원한 것으로 헤아리는 생각의 전도ㆍ마음의 전도ㆍ견해의 전도와 괴로운 것을 계교하여 즐겁다 하며,
부정한 것을 계교하여 맑다 하며,
무아(無我)를 계교하여 아(我)라고 하는 생각의 전도ㆍ마음의 전도ㆍ견해의 전도이다.
무도(無倒)의 뜻이란 위의 것과 달라서 능히 그들을 물리치는 것이니 그 형상을 알아야 한다.
잡염(雜染)의 뜻이란,
이른바 삼계의 세 가지 잡염이니,
첫째는 번뇌잡염(煩惱雜染)이요,
둘째는 업잡염(業雜染)이요,
셋째는 생잡염(生雜染)이다.
청정(淸淨)의 뜻이란,
이른바 이 같은 세 가지 잡염에 있는 얽매임을 벗어나는 보리분법(菩提分法)이다.
선남자여,
이들 열 가지는,
마땅히 알라.
널리 일체의 뜻을 포섭한다.
또 선남자여,
그 보살이 다섯 가지 뜻을 아는 까닭에 뜻을 안다고 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변지의 일[遍知事]이요,
둘째는 변지의 뜻[遍知義]이요,
셋째는 변지의 원인[遍知因]이요,
넷째는 변지의 결과[遍知果]요,
다섯째는 이들에 대하여 깨달음[覺了]이다.
선남자여,
이 변지의 일이란,
마땅히 알라.
이는 곧 일체 알아야 할 것들이다.
이른바 모든 온(蘊)과 모든 내처(內處)와 모든 외처(外處) 등 이러한 일체를 말한다.
변지의 뜻이란,
나아가 존재하는 품류의 차별로서 응당 알아야 할 경계이다.
이른바 세속(世俗)인 까닭이며,
혹은 승의(勝義)인 까닭이며,
혹은 공덕(功德)인 까닭이며,
혹은 과실(過失)인 까닭이며,
혹은 인연인 까닭이며,
혹은 세상인 까닭이며,
혹은 나고 혹은 머무르고 혹은 무너지는 모양인 까닭이며,
혹은 질병 따위와 같은 까닭이며,
혹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 따위인 까닭이며,
혹은 진여(眞如)ㆍ실제(實際)ㆍ법계(法界) 따위인 까닭이며,
혹은 넓고 간략한 까닭이며,
혹은 한결같은 기별(記別)인 까닭이며,
혹은 분별하는 기별인 까닭이며,
혹은 반문하는 기별인 까닭이며,
혹은 두는 기별인 까닭이며,
혹은 숨고 비밀한 까닭이며,
혹은 드러난 까닭이니,
이러한 따위를 마땅히 알라.
이런 일체를 변지의 뜻이라 한다.
변지의 원인[遍知因]이란,
마땅히 알라.
이는 곧 능히 앞의 두 가지를 취하는 보리분법이다.
이른바 염주(念住)와 정단(正斷) 따위이다.
변지의 결과[遍知果]를 얻는다 함은 이른바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영원히 끊어진 비나야(毘奈耶)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일체가 영원히 끊긴 모든 사문(沙門)의 과보와 그리고 내가 말한 성문여래의 공(共)ㆍ불공(不共) 세간(世間)ㆍ출세간(出世間)에 있는 공덕이다.
이들에 대한 증득,
이들에 대한 깨달음이란,
이른바 이 깨달음을 짓는 법[作證法] 가운데서 모든 해탈의 지혜로써 널리 남에게 말하여 드날리고 열어 보이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러한 다섯 가지 뜻은,
마땅히 알라.
널리 일체의 뜻을 포섭한다.
또 선남자여,
그 보살들이 네 가지 뜻을 아는 까닭에 뜻을 안다고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심집수(心執受)의 뜻이요,
둘째는 영납(領納)의 뜻이요,
셋째는 요별(了別)의 뜻이요,
넷째는 잡염청정(雜染淸淨)의 뜻이다.
선남자여,
이러한 네 가지의 뜻은 널리 일체 뜻을 포섭한다.
선남자여,
저 모든 보살은 세 가지 뜻을 아는 까닭에 뜻을 안다고 말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문(文)의 뜻이요,
둘째는 의(義)의 뜻이요,
셋째는 계(界)의 뜻이다.
선남자여,
문(文)의 뜻이란 이른바 이름의 몸[名身] 따위이다.
의(義)의 뜻이란 마땅히 알라.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실의 모습이요,
둘째는 두루 아는 모습이요,
셋째는 영원히 끊는 모습이요,
넷째는 깨달음을 짓는 모습이요,
다섯째는 닦고 익히는 모습이요,
여섯째는 저 진실의 모습 따위 품류가 차별된 모습이요,
일곱째는 의지하는 대상과 의지하는 주체가 서로에게 속하는 모습이요,
여덟째는 두루 아는 모습 따위를 장애하는 법의 모습이요,
아홉째는 그 수순하는 법의 모습이요,
열째는 두루 알지 못하는 따위와 두루 아는 따위의 허물과 공덕이 되는 모습이다.
계(界)의 뜻이란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기세계(器世界)요,
둘째는 유정의 세계요,
셋째는 법계요,
넷째는 조복의 세계요,
다섯째는 조복하는 방편의 세계이다.
선남자여,
이 다섯 가지 뜻은,
마땅히 알라.
일체 뜻을 두루 포섭한다.”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들어서 이루는 지혜[聞所成慧]로 그 뜻을 깨달으며,
생각하여 이루는 지혜[思所成慧]로 그 뜻을 깨달으며,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아서 이루는 지혜[修所成慧]로 그 뜻을 깨닫는다 하시니,
이는 어떻게 다릅니까?”
“선남자여,
들어서 이루는 지혜는 문자에 의지해 다만 그 말대로만 할 뿐이지,
아직 그 의취(意趣)를 능통하지는 못하며,
아직 현전하지는 못하며,
해탈에 수순하나 아직 해탈을 이루는 뜻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생각하여 이루는 지혜 역시 문자에 의지하나 꼭 말대로만 하지는 않고 그 의취를 능통한다.
그러나 아직 현전하지는 못하며,
해탈에 수순하나 아직 해탈을 이루는 뜻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모든 보살의 닦아서 이룬 지혜는 문자에 의지하기도 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않기도 하며,
말씀대로 하기도 하고 말씀대로 하지 않기도 하며,
의취(意趣)에 능통하고,
알아야 할 일의 동분(同分) 삼마지 의 대상인 영상이 현전하며,
해탈에 아주 잘 수순하며,
이미 해탈을 성취하는 뜻을 받아들이게 된다.
선남자여,
이것을 세 가지 뜻을 아는 차별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는 모든 보살이 법을 알고 뜻을 알되 무엇이 지혜[智]이며,
무엇이 소견[見]입니까?”
“선남자여,
내가 무량한 문으로 지혜와 소견 두 가지 차별을 말하였으니,
이제 그대에게 간략히 그 모습을 말하리라.
총법(總法)을 반연하여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아서 얻는 묘한 지혜는 지혜라 하고,
별법(別法)을 반연하여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아서 생긴 지혜는 소견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는 모든 보살은 어떤 작의(作意)에 의지해 어떻게 모든 모습을 제거합니까?”
“선남자여,
진여의 작의에 의지해 모든 법의 모습과 뜻의 모습을 제거한다.
그 이름[名]과 이름의 자상(自相)에 대하여 얻은 바가 없을 때에는 또한 그것이 의지하는 모습도 관찰하지 않으니 이렇게 제거한다.
이름에서와 같이 구절[句]에서도 문자[文]에서도 일체 뜻[義]에서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나아가 계(界)와 계의 자성에서도 얻은 모습을 관찰하지 않으니,
이렇게 제거한다.”
“세존이시여,
깨달아야 할 모든 진여의 뜻과 모습에서 이 진여의 모습도 버릴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깨달아야 할 진여의 뜻 가운데는 도무지 모습이 없으며 또한 얻을 것도 없거늘,
무엇을 버리겠느냐.
선남자여,
진여의 뜻을 깨달을 때 일체 법과 뜻의 모습을 항복받는다고 나는 말한다.
이 깨달음은 다른 이가 항복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흐린 물그릇의 비유와 맑지 못한 거울의 비유와 못 물을 휘젓는 비유에서 그런 것에는 자기의 얼굴 그림자를 비추어 관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관찰할 수 있다면 그건 앞과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마음을 잘 닦지 못하면 존재하는 진여를 여실하게 관찰할 수 없으며,
마음을 잘 닦으면 관찰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관찰하는 어떤 마음을 말씀하신 것이며,
어떤 진여에 의지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선남자여,
이는 세 가지의 능히 관찰하는 마음을 말하니,
이른바 듣고서 이루는 관찰하는 마음과 생각하여 이루는 관찰하는 마음과 닦아서 이루는 관찰하는 마음이다.
또 알아내는 진여에 의지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법과 뜻을 아는 보살은 모든 모습[相]을 버리기 위해 부지런히 가행(加行)을 닦습니다.
몇 가지 모습이 버리기 어려우며,
누가 이것을 버릴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열 가지 모습이 있으며,
공(空)으로써 능히 제거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법과 뜻을 깨치는 까닭에 갖가지 문자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일체 법공(法空)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둘째는 안립진여(安立眞如)를 깨닫는 까닭에 나고 멸하고 머무르고 달라지는 성품이 상속하여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있으니,
이는 모습의 공과 앞뒤 없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셋째는 능취(能取)의 뜻을 깨닫는 까닭에 몸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모습과 아만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안의 공과 얻은 바 없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넷째는 소취(所取)의 뜻을 아는 까닭에 재물을 돌아보고 아끼는 모습이 있으니 이는 외공(外空)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다섯째는 수용(受用)의 뜻인 남녀의 받들어 섬김과 필요한 도구[資具]가 상응함을 깨닫는 까닭에 안으로 안락한 모습과 밖으로 밝고 묘한 모습이 있으니,
이는 안과 밖의 공과 본성의 공을 말미암아 제거한다.
여섯째는 건립(建立)의 뜻을 아는 까닭에 무량한 모습이 있으니,
이는 큰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일곱째는 무색(無色)을 아는 까닭에 안으로 고요한 해탈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함이 있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여덟째는 상진여(相眞如)의 뜻을 아는 까닭에 보특가라 무아의 모습과 법무아(法無我)의 모습과 혹은 유식의 모습과 승의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필경의 공과 성품 없는 공과 성품 없는 자성의 공과 승의의 공을 말미암아 능히 바르게 제거한다.
아홉째는 청정진여(淸淨眞如)의 뜻을 아는 까닭에 함이 없는 모습과 변함없는 모습이 있으니,
이는 함이 없는 공과 변역(變易) 없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바르게 제거한다.
열째는 그 모습을 다스리는 공의 성품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는 까닭에 공의 성품과 모습이 있으니,
이는 공한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열 가지 모습을 제거할 때 어떤 것을 버리며,
어떤 모습에서 해탈을 얻습니까?”
“선남자여,
삼마지의 대상인 영상의 모습을 제거해 버리고,
잡되고 물든 속박의 모습으로부터 해탈을 얻고는 그것 또한 버린다.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수승함에 나아가서 이러한 공으로 이러한 모습을 다스림을 말하였지만 그 하나하나가 일체 모습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비유컨대 무명(無明)이 나아가 노(老)ㆍ사(死) 따위의 모든 잡염법(雜染法)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승함에 나아가서 행(行)을 낸다고만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모든 행이 가장 가까운 연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의 도리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세존이시여,
이 가운데 어떤 공이 총공(總空)의 성품과 모습입니까?
모든 보살이 이것을 알면 잃어버림이 없이 공의 성품과 모습에서 증상만(增上慢)을 벗어날 것입니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대가 지금 여래에게 이와 같이 깊은 뜻을 물어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공의 성품과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구나.
무슨 까닭인가?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공의 성품과 모습을 잃어버린다면 이는 곧 일체 대승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그대에게 총공(總空)의 성품과 모습을 말하리라.
선남자여,
의타기상(依他起相)과 원성실상(圓成實相) 가운데서는 일체 품류의 잡염과 청정,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 필경에 그 성품을 멀리 벗어난다.
또 그 가운데서는 도무지 얻을 것이 없다.
이것을 대승 총공(總空)의 성품과 모습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몇 가지 수승한 삼마지를 포섭할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무량한 성문과 보살과 여래에게 무량한 종류의 훌륭한 삼마지가 있으니,
마땅히 알라.
일체가 모두 이에 포섭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무엇으로 인(因)을 삼습니까?”
“선남자여,
청정한 시라(尸羅)와 청정하게 듣고 생각하여 이룩한 바른 소견으로써 그 인을 삼는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무엇으로 과(果)를 삼습니까?”
“선남자여,
훌륭한 청정계(淸淨戒)와 훌륭한 청정심(淸淨心)과 훌륭한 청정혜(淸淨慧)로써 과를 삼는다.
또 선남자여,
일체 성문과 여래가 가진 세간ㆍ출세간의 일체 선법은,
마땅히 알라.
모두가 사마타ㆍ비발사나로 얻은 과이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어떤 업을 짓습니까?”
“선남자여,
두 가지 속박에서 해탈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이른바 상박(相縛)과 추중박(麤重縛)이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얽매임[繫] 가운데 몇 가지가 사마타의 장애이고,
몇 가지가 비발사나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모두의 장애입니까?”
“선남자여,
몸과 재물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것은 사마타의 장애요,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을 뜻대로 얻지 못하는 것은 비발사나의 장애이다.
모습을 좋아하는 것,
뒤섞여 지내는 것,
적은 것을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은,
마땅히 알라.
모두의 장애이다.
첫 번째 때문에 닦아 나아가지 못하며,
두 번째 때문에 닦은 가행이 구경에 이르지 못한다.”
“세존이시여,
5개(蓋) 가운데 몇 가지가 사마타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비발사나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모두의 장애입니까?”
“선남자여,
도거(掉擧)와 악작(惡行)은 사마타의 장애요,
혼침(惛沈)과 수면(睡眠)과 의(疑)는 비발사나의 장애요,
탐욕[瞋]과 성냄[恚]은 모두의 장애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사마타도(奢摩他道)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나아가 가지고 있던 혼침과 수면을 바르게 잘 제거하면 이럴 경우 사마타도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비발사나도(毘鉢舍那道)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나아가 가지고 있던 도거와 악작을 바르게 잘 제거하면 이럴 경우 비발사나도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은 사마타ㆍ비발사나가 나타났을 때 몇 가지 마음이 산동업(散動業)이라고 알아야 합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작의의 흔들림[作意散動]이요,
둘째는 바깥 마음의 흔들림[外心散動]이요,
셋째는 안 마음의 흔들림[內心散動]이요,
넷째는 모습의 흔들림[相散動]이요,
다섯째는 거칠고 무거운 흔들림[麤重散動]이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대승에 상응하는 작의을 버리고 성문ㆍ독각과 상응하는 모든 작의 가운데 떨어져 있으면,
마땅히 알라.
이는 작의의 흔들림이다.
만일 바깥의 다섯 가지 묘한 욕심의 모든 잡되고 어지러운 모습과 그에 따른 찾고 생각하는 수번뇌 가운데서,
또는 바깥으로 소연 경계 가운데서,
마음이 풀려 산만해진다면,
마땅히 알라.
이는 바깥 마음의 흔들림이다.
만일 혼침(惛沈)이나 수면(睡眠) 때문에,
혹은 가라앉음[沈沒] 때문에,
혹은 사마발지에 애착하기 때문에,
혹은 어느 하나의 삼마발지에서 모든 수번뇌로 더럽혀진 까닭에,
마땅히 알라.
이는 안 마음의 흔들림이다.
만일 바깥의 모습에 의지해 안의 등지(等持)가 행하는 대상인 모든 모습에 대하여 뜻을 지어 생각하는 것을 모습의 흔들림이라 한다.
만일 안의 작의를 반연하여 일어나게 되는 모든 수(受)가 거칠고 무거운 몸[麤重身]을 말미암아 아(我)를 계교하고 거만을 일으키면,
마땅히 알라.
이는 거칠고 무거운 흔들림이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처음의 보살 지위로부터 여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장애를 물리칩니까?”
“선남자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초지(初地)에서 나쁜 세계의 번뇌잡염(煩惱雜染)ㆍ업잡염(業雜染)ㆍ생잡염(生雜染)의 장애를 물리치고,
제2지에서는 미세한 잘못이 현행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3지에서는 욕심과 탐심의 장애를 물리치고,
제4지에서는 선정에 대한 애착[定愛]과 법에 대한 애착[法愛]의 장애를 물리치고,
제5지에서는 생사와 열반을 한결같이 등지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6지에서는 모습이 많이 현행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7지에서는 미세한 모습이 현행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8지에서는 모습이 없는 공용(無相)과 모습이 있어 자재(自在)를 얻지 못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9지에서는 일체 종류의 공교한 말에 자재를 얻지 못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10지에서는 원만한 법신을 증득하지 못하는 장애를 물리친다.
선남자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여래의 지위에서 극히 미세하고 가장 미세한 번뇌장(煩惱障)을 물리친다.
능히 이러한 장애를 영원히 없애기 때문에 마침내 집착 없고 장애 없는 일체 지견(智見)을 증득하고,
해야 할 바를 원만히 이루는 소연에 의지해 가장 청정한 법신을 건립한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이 사마타ㆍ비발사나에 의지해 부지런히 수행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합니까?”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얻고,
일곱 가지 진여에 의지해 듣고 생각한 법 가운데서 훌륭한 선정의 마음[定心]을 말미암아 잘 살펴 결정하고 잘 생각하고 잘 세우며,
진여의 성품 안에서 안으로 빠르게 생각한다면,
그는 진여에 대해 빠르게 생각함으로써 마음이 일체 미세한 현행들도 버릴 수 있는데 하물며 거친 모습이리오.
선남자여,
미세한 모습이란,
이른바 마음이 집착하여 받는 모습[心執受相]과 받아들이는 모습[領納相]과 알아내는 모습[了別相]과 물들거나 청정한 모습[雜染淸淨相]이다.
혹은 안의 모습[內相]과 밖의 모습[外相]과 안팎의 모습[內外相]이다.
혹은 ‘나는 수행을 해 일체 유정을 이롭게 하리라’고 하는 모습과 바른 지혜의 모습[正智相]과 진여의 모습[眞如相]과 고ㆍ집ㆍ멸ㆍ도의 모습[苦集滅道相]과 유위의 모습[有爲相]과 무위의 모습[無爲相]과 영원한 모습[有常相]과 무상한 모습[無常相]과 괴로움에 변하고 달라지는 성품이 있는 모습[苦有變異性相]과 괴로움에 변하고 달라지는 성품이 없는 모습[苦無變異性相]과 유위의 이상의 모습[有爲異相相]과 유위의 동상의 모습[有爲同相相]과 일체를 일체라고 알아 일체가 있게 되는 모습[知一切是一切已有一切相]과 보특가라 무아의 모습[補特伽羅無我相]과 혹은 법무아의 모습[法無我相]이다.
그것들이 나타나도 마음이 능히 버린다.
그들은 이미 많이 이러한 수행에 머문 까닭에 때때로 일체 얽매임과 덮임과 산란과 요동에서 마음을 잘 닦는다.
이로부터는 일곱 진여에서 일곱 가지로 각각 차별되는,
스스로 안으로 증득하는 통달의 지혜[通達智]가 생기게 되니 이를 견도(見道)라 한다.
이를 얻는 까닭에 보살의 바른 성품에 들어가 중생을 벗어나고 여래의 집에 태어나 초지(初地)를 증득하며,
또 이 지위의 훌륭한 덕을 수용한다.
그는 이미 지난 세상에서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얻은 까닭에 이미 두 가지 소연(所緣)을 얻으니,
이른바 유분별영상소연(有分別影像所緣)과 무분별영상소연(無分別影像所緣)이다.
그는 이제 견도를 얻은 까닭에 다시 사변제소연(事邊際所緣)을 증득하고 다시 다음의 일체 지위에서 수도(修道)로 닦아 나아간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소연에서 뜻을 짓고 사유하니,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그의 작은 말뚝으로 큰 말뚝을 뽑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보살은 이 말뚝으로 말뚝을 뽑는 방편에 의지해 안의 모습[內相]을 버리는 까닭에 일체 잡되고 물든 부분에 수순하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
모습을 버리는 까닭에 추중(麤重) 또한 버린다.
일체 모습과 추중을 영원히 버렸으므로 점차 그 다음 다음의 지위에서도 금을 연마하는 기술과 같이 그 마음을 단련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며,
또 해야 할 바를 원만히 이루는 소연을 얻는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보살이 안의 지관(止觀)을 바르게 수행하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
“선남자여,
보살이 만일 6처(處)를 안다면 곧 보살의 광대한 위덕을 이끌어 낼 것이니,
마음의 생김을 잘 알고,
둘째 마음의 머무름을 잘 알고,
셋째 마음의 벗어남을 잘 알고,
넷째는 마음의 늘어남을 잘 알고,
다섯째는 마음의 줄어듦을 잘 알고,
여섯째는 방편을 잘 알 것이다.
마음의 생김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16행의 마음이 일어나는 차별을 여실히 알면 이를 마음의 생김을 잘 아는 것이라 한다.
16행의 마음이 일어나는 차별이란,
첫째 지각할 수 없고 굳게 머무는 그릇과 같은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아타나식(阿陀那識)이다.
둘째는 갖가지 행상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단번에 일체 색 따위의 경계를 취하는 분별의식(分別意識),
단번에 안과 밖으로 경계를 취하는 각수(覺受),
단번에 한 생각 순식간 잠깐 사이에 현전의 많은 선정에 들어 많은 불토를 보고 많은 여래를 뵙는 분별의식이다.
셋째는 작은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욕계의 식이다.
넷째는 큰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색계의 식이다.
다섯째는 무량한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공(空)ㆍ식(識)ㆍ무변처(無邊處)의 식이다.
여섯째는 미세한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이른바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식이다.
일곱째는 변제(邊際)의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이른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식이다.
여덟째는 모습 없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세상을 벗어나는 식과 적멸을 반연하는 식이다.
아홉째는 괴로움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지옥의 식이다.
열째는 잡수(雜受)와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욕계에 행하는 식이다.
열한째는 기쁨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초정려(初靜慮)와 제2 정려(靜慮)의 식이다.
열두째는 즐거움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제3 정려의 식이다.
열셋째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제4의 정려에서 비상비비상처까지의 식이다.
열넷째는 더러움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번뇌와 수번뇌에 상응하는 식이다.
열다섯째는 착함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믿음 따위와 상응하는 식이다.
열여섯째는 무기(無記)와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저들과 함께 상응하지 않는 식이다.
마음의 머무름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요별진여(了別眞如)를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마음의 벗어남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상박(相搏)과 추중박(麤重縛) 이 두 가지 결박에서 벗어났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이것은 그 마음을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했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마음의 늘어남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박과 추중박을 다스리는 마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그것이 자라나고 그것이 쌓일 때에 또한 자랄 수 있고 또한 쌓일 수 있으니,
이것을 늘어남을 잘 아는 것이라 한다.
마음의 줄어짐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다스릴 대상인 모습과 추중에 물든 마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니,
그것이 쇠퇴할 때와 그것이 물러날 때에 이것도 또한 쇠퇴하고 이것도 또한 줄어드는 것을 아는 것이다.
방편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해탈(解脫)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의 닦고 버림을 여실하게 잘 아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보살은 모든 보살의 광대한 위덕을 이미 이끌어냈거나 미래에 이끌어낼 것이며 현재에 이끌어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무여열반(無餘涅槃)에서는 일체 수(受)가 남김없이 영원히 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수들이 여기에서 영원히 없어집니까?”
“선남자여,
대략 말하건대 두 가지 수(受)가 남김없이 멸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무언가에 의지한 추중수(麤重受)요,
둘째는 그 결과인 경계수(境界受)이다.
무언가에 의지한 추중수에는,
마땅히 알라.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색(有色)에 의지한 수요,
둘째는 무색(無色)에 의지한 수요,
셋째는 결과가 이미 원만히 이루어졌다고 하는 추중수요,
넷째는 결과가 아직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추중수이다.
결과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는 추중수란 이른바 현재의 수요,
결과가 아직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수란 이른바 미래의 원인인 수이다.
그 결과인 경계수에도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의지하여 지니는 수요,
둘째는 살림살이[資具]의 수요,
셋째는 수용의 수요,
넷째는 아끼는 수이다.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에서는 결과가 아직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수는 모두 이미 없어지고,
그를 다스리는 명촉(明觸)에서 생긴 수를 받아들여 함께하거나 또는 그 결과가 이미 원만히 이루어졌다는 수가 있게 된다.
또 두 가지 수가 이미 없어지고 오직 현전에 명촉에서 생긴 수만 받아들이기도 한다.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의 세계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 때는 그것 또한 영원히 없어진다.
그러므로 무여열반의 세계에서는 일체 수가 남김없이 멸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다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대가 이제 원만하고 가장 청정하고 미묘한 유가도(瑜伽道)에 의지해 여래에게 묻는구나.
그대는 이미 유가에서 확실히 가장 좋은 방편을 얻었도다.
나는 이미 그대를 위해 원만하고 가장 청정하고 미묘한 유가도를 말하였다.
일체 과거와 미래의 정등각(正等覺)께서 이미 말씀하시고 앞으로 하실 말씀 역시 모두 이와 같으니라.
모든 선남자 혹은 선여인들도 모두 이에 의지해 용맹정진하며 바르게 닦고 배워야 할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밝히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을 거짓으로 세운 유가 가운데
방일한다면 큰 뜻을 잃으리라.
이 법과 그리고 유가에 의지해
바르게 수행하면 대각을 얻으리라.
얻을 것 있다 하고 벗어나길 구하며
이런 소견을 법을 얻은 것이라 한다면
자씨여,
그 사람은 유가와는 거리가 머니
비유컨대 땅덩이와 허공 같으니라.
중생에게 이익 주되 견고하면서도 하는 바 없으니
깨달은 뒤에도 부지런히 닦아 유정들에게 이익 주네.
지혜로운 자 겁의 한량 다하도록 이렇게 하니
곧 번뇌를 벗어난 가장 높은 즐거움 얻으리라.
어떤 사람 욕심으로 법을 설하면
그 사람은 욕심을 버렸다지만 도리어 취하는 것
어리석은 사람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법의 보배 얻고도
도리어 떠다니며 거지 노릇 하는구나.
다투고 떠드는 잡된 희론의 집착
마땅히 버리고 높은 정진 일으켜라.
모든 하늘 그리고 세간을 건지려면
이러한 유가를 그대여 배우라.
그때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해심밀(解深密) 법문에서 이 가르침을 무엇이라 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것을 유가요의(瑜伽了義) 교법이라 하니,
그대는 마땅히 이렇게 받들어 지녀라.”
이 유가의 교법을 말씀하셨을 때 그 큰 모임에 있던 60만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고,
30만 성문이 티끌을 멀리 벗어나 모든 법에 법안이 맑아졌으며,
15만 성문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해 심해탈(心解脫)을 얻었으며,
7만 5천 보살이 광대한 유가의 작의(作意)를 얻었다.
● [pt op tr] fr
이른바 일체 염정법(染淨法) 가운데 세워진 자성에 대해 생각으로써 거짓 시설한 것이다.
무엇이 구(句)인가?
이른바 저 이름 따위의 모임 가운데서 능히 모든 염ㆍ정의 뜻을 말함에 따라 의지하고 건립한 것이다.
무엇이 문(文)인가?
이른바 저 두 가지가 의지하는 문자이다.
무엇이 그것에 대하여 각각 다르게 아는 것인가?
이른바 각각 다른 소연을 말미암아 뜻을 짓는 것이다.
무엇이 그것에 대해 총합하여 아는 것인가?
이른바 총합한 소연을 말미암아 뜻을 짓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총합하고 간략히 하여 하나로 하는 것을 법을 안다고 하며,
이것을 보살이 법을 아는 것이라 한다.
선남자여,
저 보살들은 열 가지 모습에 의지해 뜻[義]을 안다.
첫째는 진소유성(盡所有性)을 알고,
둘째는 여소유성(如所有性)을 알고,
셋째는 능취(能取)의 뜻을 알고,
넷째는 소취(所取)의 뜻을 알고,
다섯째는 건립(建立)의 뜻을 알고,
여섯째는 수용(受用)의 뜻을 알고,
일곱째는 전도(顚倒)의 뜻을 알고,
여덟째는 무도(無倒)의 뜻을 알고,
아홉째는 잡염(雜染)의 뜻을 알고,
열째는 청정(淸淨)의 뜻을 안다.
선남자여,
진소유성(盡所有性)이란 모든 잡염(雜染)과 청정한 법 가운데 있는 일체 품류의 한계[邊際]이니,
이를 이 가운데의 진소유성이라 한다.
5온(蘊)과 6내처(內處)와 6외처(外處),
이것을 일체라 한다.
여소유성(如所有性)이란,
이른바 일체 염ㆍ정의 법 가운데 있는 진여이니,
이를 여소유성이라 한다.
여기에 또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전진여(流轉眞如)니 이른바 일체 행의 앞도 없고 뒤도 없는 성품이요,
둘째는 상진여(相眞如)니 이른바 일체 법의 보특가라(補特伽羅) 무아(無我)의 성품과 법무아의 성품이요,
셋째는 요별진여(了別眞如)이니 이른바 일체 행은 오직 식의 성품이요,
넷째는 안립진여(安立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고성제(苦聖諦)요,
다섯째는 사행진여(邪行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집성제(集聖諦)요,
여섯째는 청정진여(淸淨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멸성제(滅聖諦)요,
일곱째는 정행진여(正行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도성제(道聖諦)이다.
마땅히 알라.
이 가운데 유전진여와 안립진여와 사행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일체 유정은 평등하고 평등하다.
상진여와 요별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일체 법이 평등하고 평등하다.
청정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일체 성문의 보리와 독각의 보리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평등하고 평등하다.
정행진여를 말미암는 까닭에 바른 법을 듣고 총합한 경계를 반연하는 훌륭한 사마타ㆍ비발사나에 포섭되는 지혜가 평등하고 평등하다.
능취(能取)의 뜻이란,
이른바 안의 다섯 가지 색처(色處)와 혹은 심(心)ㆍ의(意)ㆍ식(識)과 그리고 모든 심법(心法)이다.
소취(所取)의 뜻이란,
이른바 밖의 6처(處)이다.
또 능취의 뜻이 또한 소취의 뜻이기도 한다.
건립(建立)의 뜻이란,
이른바 기세계(器世界)이다.
그 안에 일체 유정세계를 건립할 수 있으니 이른바 한 마을,
혹은 백 마을,
혹은 천 마을,
혹은 백천 마을,
혹은 하나의 땅덩이의 바닷가에 이르는 것,
이것이 백,
이것이 천,
혹은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섬부주,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4대주(大洲),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이것이 백,
이것이 천,
또는 이것이 백천,
혹은 이것이 구지(拘胝),
이것이 백 구지,
이것이 천 구지,
이것이 백천 구지,
혹은 이것이 무수(無數),
이것이 백 무수,
이것이 천 무수,
이것이 백천 무수,
혹은 삼천대천세계 무수ㆍ백천ㆍ미진의 수량이 시방으로 무량ㆍ무수한 모든 기세계이다.
수용(受用)의 뜻이란,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유정들이 수용하기 위해 재물[資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도(顚倒)의 뜻이란,
이른바 그 능취 등의 뜻에 대하여 무상함을 영원한 것으로 헤아리는 생각의 전도ㆍ마음의 전도ㆍ견해의 전도와 괴로운 것을 계교하여 즐겁다 하며,
부정한 것을 계교하여 맑다 하며,
무아(無我)를 계교하여 아(我)라고 하는 생각의 전도ㆍ마음의 전도ㆍ견해의 전도이다.
무도(無倒)의 뜻이란 위의 것과 달라서 능히 그들을 물리치는 것이니 그 형상을 알아야 한다.
잡염(雜染)의 뜻이란,
이른바 삼계의 세 가지 잡염이니,
첫째는 번뇌잡염(煩惱雜染)이요,
둘째는 업잡염(業雜染)이요,
셋째는 생잡염(生雜染)이다.
청정(淸淨)의 뜻이란,
이른바 이 같은 세 가지 잡염에 있는 얽매임을 벗어나는 보리분법(菩提分法)이다.
선남자여,
이들 열 가지는,
마땅히 알라.
널리 일체의 뜻을 포섭한다.
또 선남자여,
그 보살이 다섯 가지 뜻을 아는 까닭에 뜻을 안다고 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변지의 일[遍知事]이요,
둘째는 변지의 뜻[遍知義]이요,
셋째는 변지의 원인[遍知因]이요,
넷째는 변지의 결과[遍知果]요,
다섯째는 이들에 대하여 깨달음[覺了]이다.
선남자여,
이 변지의 일이란,
마땅히 알라.
이는 곧 일체 알아야 할 것들이다.
이른바 모든 온(蘊)과 모든 내처(內處)와 모든 외처(外處) 등 이러한 일체를 말한다.
변지의 뜻이란,
나아가 존재하는 품류의 차별로서 응당 알아야 할 경계이다.
이른바 세속(世俗)인 까닭이며,
혹은 승의(勝義)인 까닭이며,
혹은 공덕(功德)인 까닭이며,
혹은 과실(過失)인 까닭이며,
혹은 인연인 까닭이며,
혹은 세상인 까닭이며,
혹은 나고 혹은 머무르고 혹은 무너지는 모양인 까닭이며,
혹은 질병 따위와 같은 까닭이며,
혹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 따위인 까닭이며,
혹은 진여(眞如)ㆍ실제(實際)ㆍ법계(法界) 따위인 까닭이며,
혹은 넓고 간략한 까닭이며,
혹은 한결같은 기별(記別)인 까닭이며,
혹은 분별하는 기별인 까닭이며,
혹은 반문하는 기별인 까닭이며,
혹은 두는 기별인 까닭이며,
혹은 숨고 비밀한 까닭이며,
혹은 드러난 까닭이니,
이러한 따위를 마땅히 알라.
이런 일체를 변지의 뜻이라 한다.
변지의 원인[遍知因]이란,
마땅히 알라.
이는 곧 능히 앞의 두 가지를 취하는 보리분법이다.
이른바 염주(念住)와 정단(正斷) 따위이다.
변지의 결과[遍知果]를 얻는다 함은 이른바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영원히 끊어진 비나야(毘奈耶)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일체가 영원히 끊긴 모든 사문(沙門)의 과보와 그리고 내가 말한 성문여래의 공(共)ㆍ불공(不共) 세간(世間)ㆍ출세간(出世間)에 있는 공덕이다.
이들에 대한 증득,
이들에 대한 깨달음이란,
이른바 이 깨달음을 짓는 법[作證法] 가운데서 모든 해탈의 지혜로써 널리 남에게 말하여 드날리고 열어 보이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러한 다섯 가지 뜻은,
마땅히 알라.
널리 일체의 뜻을 포섭한다.
또 선남자여,
그 보살들이 네 가지 뜻을 아는 까닭에 뜻을 안다고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심집수(心執受)의 뜻이요,
둘째는 영납(領納)의 뜻이요,
셋째는 요별(了別)의 뜻이요,
넷째는 잡염청정(雜染淸淨)의 뜻이다.
선남자여,
이러한 네 가지의 뜻은 널리 일체 뜻을 포섭한다.
선남자여,
저 모든 보살은 세 가지 뜻을 아는 까닭에 뜻을 안다고 말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문(文)의 뜻이요,
둘째는 의(義)의 뜻이요,
셋째는 계(界)의 뜻이다.
선남자여,
문(文)의 뜻이란 이른바 이름의 몸[名身] 따위이다.
의(義)의 뜻이란 마땅히 알라.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실의 모습이요,
둘째는 두루 아는 모습이요,
셋째는 영원히 끊는 모습이요,
넷째는 깨달음을 짓는 모습이요,
다섯째는 닦고 익히는 모습이요,
여섯째는 저 진실의 모습 따위 품류가 차별된 모습이요,
일곱째는 의지하는 대상과 의지하는 주체가 서로에게 속하는 모습이요,
여덟째는 두루 아는 모습 따위를 장애하는 법의 모습이요,
아홉째는 그 수순하는 법의 모습이요,
열째는 두루 알지 못하는 따위와 두루 아는 따위의 허물과 공덕이 되는 모습이다.
계(界)의 뜻이란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기세계(器世界)요,
둘째는 유정의 세계요,
셋째는 법계요,
넷째는 조복의 세계요,
다섯째는 조복하는 방편의 세계이다.
선남자여,
이 다섯 가지 뜻은,
마땅히 알라.
일체 뜻을 두루 포섭한다.”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들어서 이루는 지혜[聞所成慧]로 그 뜻을 깨달으며,
생각하여 이루는 지혜[思所成慧]로 그 뜻을 깨달으며,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아서 이루는 지혜[修所成慧]로 그 뜻을 깨닫는다 하시니,
이는 어떻게 다릅니까?”
“선남자여,
들어서 이루는 지혜는 문자에 의지해 다만 그 말대로만 할 뿐이지,
아직 그 의취(意趣)를 능통하지는 못하며,
아직 현전하지는 못하며,
해탈에 수순하나 아직 해탈을 이루는 뜻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생각하여 이루는 지혜 역시 문자에 의지하나 꼭 말대로만 하지는 않고 그 의취를 능통한다.
그러나 아직 현전하지는 못하며,
해탈에 수순하나 아직 해탈을 이루는 뜻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모든 보살의 닦아서 이룬 지혜는 문자에 의지하기도 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않기도 하며,
말씀대로 하기도 하고 말씀대로 하지 않기도 하며,
의취(意趣)에 능통하고,
알아야 할 일의 동분(同分) 삼마지 의 대상인 영상이 현전하며,
해탈에 아주 잘 수순하며,
이미 해탈을 성취하는 뜻을 받아들이게 된다.
선남자여,
이것을 세 가지 뜻을 아는 차별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는 모든 보살이 법을 알고 뜻을 알되 무엇이 지혜[智]이며,
무엇이 소견[見]입니까?”
“선남자여,
내가 무량한 문으로 지혜와 소견 두 가지 차별을 말하였으니,
이제 그대에게 간략히 그 모습을 말하리라.
총법(總法)을 반연하여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아서 얻는 묘한 지혜는 지혜라 하고,
별법(別法)을 반연하여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아서 생긴 지혜는 소견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는 모든 보살은 어떤 작의(作意)에 의지해 어떻게 모든 모습을 제거합니까?”
“선남자여,
진여의 작의에 의지해 모든 법의 모습과 뜻의 모습을 제거한다.
그 이름[名]과 이름의 자상(自相)에 대하여 얻은 바가 없을 때에는 또한 그것이 의지하는 모습도 관찰하지 않으니 이렇게 제거한다.
이름에서와 같이 구절[句]에서도 문자[文]에서도 일체 뜻[義]에서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나아가 계(界)와 계의 자성에서도 얻은 모습을 관찰하지 않으니,
이렇게 제거한다.”
“세존이시여,
깨달아야 할 모든 진여의 뜻과 모습에서 이 진여의 모습도 버릴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깨달아야 할 진여의 뜻 가운데는 도무지 모습이 없으며 또한 얻을 것도 없거늘,
무엇을 버리겠느냐.
선남자여,
진여의 뜻을 깨달을 때 일체 법과 뜻의 모습을 항복받는다고 나는 말한다.
이 깨달음은 다른 이가 항복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흐린 물그릇의 비유와 맑지 못한 거울의 비유와 못 물을 휘젓는 비유에서 그런 것에는 자기의 얼굴 그림자를 비추어 관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관찰할 수 있다면 그건 앞과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마음을 잘 닦지 못하면 존재하는 진여를 여실하게 관찰할 수 없으며,
마음을 잘 닦으면 관찰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관찰하는 어떤 마음을 말씀하신 것이며,
어떤 진여에 의지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선남자여,
이는 세 가지의 능히 관찰하는 마음을 말하니,
이른바 듣고서 이루는 관찰하는 마음과 생각하여 이루는 관찰하는 마음과 닦아서 이루는 관찰하는 마음이다.
또 알아내는 진여에 의지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법과 뜻을 아는 보살은 모든 모습[相]을 버리기 위해 부지런히 가행(加行)을 닦습니다.
몇 가지 모습이 버리기 어려우며,
누가 이것을 버릴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열 가지 모습이 있으며,
공(空)으로써 능히 제거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법과 뜻을 깨치는 까닭에 갖가지 문자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일체 법공(法空)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둘째는 안립진여(安立眞如)를 깨닫는 까닭에 나고 멸하고 머무르고 달라지는 성품이 상속하여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있으니,
이는 모습의 공과 앞뒤 없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셋째는 능취(能取)의 뜻을 깨닫는 까닭에 몸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모습과 아만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안의 공과 얻은 바 없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넷째는 소취(所取)의 뜻을 아는 까닭에 재물을 돌아보고 아끼는 모습이 있으니 이는 외공(外空)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다섯째는 수용(受用)의 뜻인 남녀의 받들어 섬김과 필요한 도구[資具]가 상응함을 깨닫는 까닭에 안으로 안락한 모습과 밖으로 밝고 묘한 모습이 있으니,
이는 안과 밖의 공과 본성의 공을 말미암아 제거한다.
여섯째는 건립(建立)의 뜻을 아는 까닭에 무량한 모습이 있으니,
이는 큰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일곱째는 무색(無色)을 아는 까닭에 안으로 고요한 해탈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함이 있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여덟째는 상진여(相眞如)의 뜻을 아는 까닭에 보특가라 무아의 모습과 법무아(法無我)의 모습과 혹은 유식의 모습과 승의의 모습이 있으니,
이는 필경의 공과 성품 없는 공과 성품 없는 자성의 공과 승의의 공을 말미암아 능히 바르게 제거한다.
아홉째는 청정진여(淸淨眞如)의 뜻을 아는 까닭에 함이 없는 모습과 변함없는 모습이 있으니,
이는 함이 없는 공과 변역(變易) 없는 공을 말미암아 능히 바르게 제거한다.
열째는 그 모습을 다스리는 공의 성품에 대하여 뜻을 짓고 생각하는 까닭에 공의 성품과 모습이 있으니,
이는 공한 공을 말미암아 능히 제거한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열 가지 모습을 제거할 때 어떤 것을 버리며,
어떤 모습에서 해탈을 얻습니까?”
“선남자여,
삼마지의 대상인 영상의 모습을 제거해 버리고,
잡되고 물든 속박의 모습으로부터 해탈을 얻고는 그것 또한 버린다.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수승함에 나아가서 이러한 공으로 이러한 모습을 다스림을 말하였지만 그 하나하나가 일체 모습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비유컨대 무명(無明)이 나아가 노(老)ㆍ사(死) 따위의 모든 잡염법(雜染法)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승함에 나아가서 행(行)을 낸다고만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모든 행이 가장 가까운 연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의 도리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세존이시여,
이 가운데 어떤 공이 총공(總空)의 성품과 모습입니까?
모든 보살이 이것을 알면 잃어버림이 없이 공의 성품과 모습에서 증상만(增上慢)을 벗어날 것입니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대가 지금 여래에게 이와 같이 깊은 뜻을 물어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공의 성품과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구나.
무슨 까닭인가?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공의 성품과 모습을 잃어버린다면 이는 곧 일체 대승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그대에게 총공(總空)의 성품과 모습을 말하리라.
선남자여,
의타기상(依他起相)과 원성실상(圓成實相) 가운데서는 일체 품류의 잡염과 청정,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 필경에 그 성품을 멀리 벗어난다.
또 그 가운데서는 도무지 얻을 것이 없다.
이것을 대승 총공(總空)의 성품과 모습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몇 가지 수승한 삼마지를 포섭할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무량한 성문과 보살과 여래에게 무량한 종류의 훌륭한 삼마지가 있으니,
마땅히 알라.
일체가 모두 이에 포섭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무엇으로 인(因)을 삼습니까?”
“선남자여,
청정한 시라(尸羅)와 청정하게 듣고 생각하여 이룩한 바른 소견으로써 그 인을 삼는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무엇으로 과(果)를 삼습니까?”
“선남자여,
훌륭한 청정계(淸淨戒)와 훌륭한 청정심(淸淨心)과 훌륭한 청정혜(淸淨慧)로써 과를 삼는다.
또 선남자여,
일체 성문과 여래가 가진 세간ㆍ출세간의 일체 선법은,
마땅히 알라.
모두가 사마타ㆍ비발사나로 얻은 과이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어떤 업을 짓습니까?”
“선남자여,
두 가지 속박에서 해탈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이른바 상박(相縛)과 추중박(麤重縛)이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얽매임[繫] 가운데 몇 가지가 사마타의 장애이고,
몇 가지가 비발사나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모두의 장애입니까?”
“선남자여,
몸과 재물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것은 사마타의 장애요,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을 뜻대로 얻지 못하는 것은 비발사나의 장애이다.
모습을 좋아하는 것,
뒤섞여 지내는 것,
적은 것을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은,
마땅히 알라.
모두의 장애이다.
첫 번째 때문에 닦아 나아가지 못하며,
두 번째 때문에 닦은 가행이 구경에 이르지 못한다.”
“세존이시여,
5개(蓋) 가운데 몇 가지가 사마타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비발사나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모두의 장애입니까?”
“선남자여,
도거(掉擧)와 악작(惡行)은 사마타의 장애요,
혼침(惛沈)과 수면(睡眠)과 의(疑)는 비발사나의 장애요,
탐욕[瞋]과 성냄[恚]은 모두의 장애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사마타도(奢摩他道)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나아가 가지고 있던 혼침과 수면을 바르게 잘 제거하면 이럴 경우 사마타도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경우에 비발사나도(毘鉢舍那道)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나아가 가지고 있던 도거와 악작을 바르게 잘 제거하면 이럴 경우 비발사나도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얻었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은 사마타ㆍ비발사나가 나타났을 때 몇 가지 마음이 산동업(散動業)이라고 알아야 합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작의의 흔들림[作意散動]이요,
둘째는 바깥 마음의 흔들림[外心散動]이요,
셋째는 안 마음의 흔들림[內心散動]이요,
넷째는 모습의 흔들림[相散動]이요,
다섯째는 거칠고 무거운 흔들림[麤重散動]이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대승에 상응하는 작의을 버리고 성문ㆍ독각과 상응하는 모든 작의 가운데 떨어져 있으면,
마땅히 알라.
이는 작의의 흔들림이다.
만일 바깥의 다섯 가지 묘한 욕심의 모든 잡되고 어지러운 모습과 그에 따른 찾고 생각하는 수번뇌 가운데서,
또는 바깥으로 소연 경계 가운데서,
마음이 풀려 산만해진다면,
마땅히 알라.
이는 바깥 마음의 흔들림이다.
만일 혼침(惛沈)이나 수면(睡眠) 때문에,
혹은 가라앉음[沈沒] 때문에,
혹은 사마발지에 애착하기 때문에,
혹은 어느 하나의 삼마발지에서 모든 수번뇌로 더럽혀진 까닭에,
마땅히 알라.
이는 안 마음의 흔들림이다.
만일 바깥의 모습에 의지해 안의 등지(等持)가 행하는 대상인 모든 모습에 대하여 뜻을 지어 생각하는 것을 모습의 흔들림이라 한다.
만일 안의 작의를 반연하여 일어나게 되는 모든 수(受)가 거칠고 무거운 몸[麤重身]을 말미암아 아(我)를 계교하고 거만을 일으키면,
마땅히 알라.
이는 거칠고 무거운 흔들림이다.”
“세존이시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처음의 보살 지위로부터 여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장애를 물리칩니까?”
“선남자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초지(初地)에서 나쁜 세계의 번뇌잡염(煩惱雜染)ㆍ업잡염(業雜染)ㆍ생잡염(生雜染)의 장애를 물리치고,
제2지에서는 미세한 잘못이 현행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3지에서는 욕심과 탐심의 장애를 물리치고,
제4지에서는 선정에 대한 애착[定愛]과 법에 대한 애착[法愛]의 장애를 물리치고,
제5지에서는 생사와 열반을 한결같이 등지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6지에서는 모습이 많이 현행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7지에서는 미세한 모습이 현행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8지에서는 모습이 없는 공용(無相)과 모습이 있어 자재(自在)를 얻지 못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9지에서는 일체 종류의 공교한 말에 자재를 얻지 못하는 장애를 물리치고,
제10지에서는 원만한 법신을 증득하지 못하는 장애를 물리친다.
선남자여,
이 사마타ㆍ비발사나는 여래의 지위에서 극히 미세하고 가장 미세한 번뇌장(煩惱障)을 물리친다.
능히 이러한 장애를 영원히 없애기 때문에 마침내 집착 없고 장애 없는 일체 지견(智見)을 증득하고,
해야 할 바를 원만히 이루는 소연에 의지해 가장 청정한 법신을 건립한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이 사마타ㆍ비발사나에 의지해 부지런히 수행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합니까?”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얻고,
일곱 가지 진여에 의지해 듣고 생각한 법 가운데서 훌륭한 선정의 마음[定心]을 말미암아 잘 살펴 결정하고 잘 생각하고 잘 세우며,
진여의 성품 안에서 안으로 빠르게 생각한다면,
그는 진여에 대해 빠르게 생각함으로써 마음이 일체 미세한 현행들도 버릴 수 있는데 하물며 거친 모습이리오.
선남자여,
미세한 모습이란,
이른바 마음이 집착하여 받는 모습[心執受相]과 받아들이는 모습[領納相]과 알아내는 모습[了別相]과 물들거나 청정한 모습[雜染淸淨相]이다.
혹은 안의 모습[內相]과 밖의 모습[外相]과 안팎의 모습[內外相]이다.
혹은 ‘나는 수행을 해 일체 유정을 이롭게 하리라’고 하는 모습과 바른 지혜의 모습[正智相]과 진여의 모습[眞如相]과 고ㆍ집ㆍ멸ㆍ도의 모습[苦集滅道相]과 유위의 모습[有爲相]과 무위의 모습[無爲相]과 영원한 모습[有常相]과 무상한 모습[無常相]과 괴로움에 변하고 달라지는 성품이 있는 모습[苦有變異性相]과 괴로움에 변하고 달라지는 성품이 없는 모습[苦無變異性相]과 유위의 이상의 모습[有爲異相相]과 유위의 동상의 모습[有爲同相相]과 일체를 일체라고 알아 일체가 있게 되는 모습[知一切是一切已有一切相]과 보특가라 무아의 모습[補特伽羅無我相]과 혹은 법무아의 모습[法無我相]이다.
그것들이 나타나도 마음이 능히 버린다.
그들은 이미 많이 이러한 수행에 머문 까닭에 때때로 일체 얽매임과 덮임과 산란과 요동에서 마음을 잘 닦는다.
이로부터는 일곱 진여에서 일곱 가지로 각각 차별되는,
스스로 안으로 증득하는 통달의 지혜[通達智]가 생기게 되니 이를 견도(見道)라 한다.
이를 얻는 까닭에 보살의 바른 성품에 들어가 중생을 벗어나고 여래의 집에 태어나 초지(初地)를 증득하며,
또 이 지위의 훌륭한 덕을 수용한다.
그는 이미 지난 세상에서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얻은 까닭에 이미 두 가지 소연(所緣)을 얻으니,
이른바 유분별영상소연(有分別影像所緣)과 무분별영상소연(無分別影像所緣)이다.
그는 이제 견도를 얻은 까닭에 다시 사변제소연(事邊際所緣)을 증득하고 다시 다음의 일체 지위에서 수도(修道)로 닦아 나아간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소연에서 뜻을 짓고 사유하니,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그의 작은 말뚝으로 큰 말뚝을 뽑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보살은 이 말뚝으로 말뚝을 뽑는 방편에 의지해 안의 모습[內相]을 버리는 까닭에 일체 잡되고 물든 부분에 수순하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
모습을 버리는 까닭에 추중(麤重) 또한 버린다.
일체 모습과 추중을 영원히 버렸으므로 점차 그 다음 다음의 지위에서도 금을 연마하는 기술과 같이 그 마음을 단련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며,
또 해야 할 바를 원만히 이루는 소연을 얻는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보살이 안의 지관(止觀)을 바르게 수행하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
“선남자여,
보살이 만일 6처(處)를 안다면 곧 보살의 광대한 위덕을 이끌어 낼 것이니,
마음의 생김을 잘 알고,
둘째 마음의 머무름을 잘 알고,
셋째 마음의 벗어남을 잘 알고,
넷째는 마음의 늘어남을 잘 알고,
다섯째는 마음의 줄어듦을 잘 알고,
여섯째는 방편을 잘 알 것이다.
마음의 생김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16행의 마음이 일어나는 차별을 여실히 알면 이를 마음의 생김을 잘 아는 것이라 한다.
16행의 마음이 일어나는 차별이란,
첫째 지각할 수 없고 굳게 머무는 그릇과 같은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아타나식(阿陀那識)이다.
둘째는 갖가지 행상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단번에 일체 색 따위의 경계를 취하는 분별의식(分別意識),
단번에 안과 밖으로 경계를 취하는 각수(覺受),
단번에 한 생각 순식간 잠깐 사이에 현전의 많은 선정에 들어 많은 불토를 보고 많은 여래를 뵙는 분별의식이다.
셋째는 작은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욕계의 식이다.
넷째는 큰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색계의 식이다.
다섯째는 무량한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공(空)ㆍ식(識)ㆍ무변처(無邊處)의 식이다.
여섯째는 미세한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이른바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식이다.
일곱째는 변제(邊際)의 모습을 소연으로 한 식이 생기는,
이른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식이다.
여덟째는 모습 없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세상을 벗어나는 식과 적멸을 반연하는 식이다.
아홉째는 괴로움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지옥의 식이다.
열째는 잡수(雜受)와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욕계에 행하는 식이다.
열한째는 기쁨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초정려(初靜慮)와 제2 정려(靜慮)의 식이다.
열두째는 즐거움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제3 정려의 식이다.
열셋째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제4의 정려에서 비상비비상처까지의 식이다.
열넷째는 더러움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번뇌와 수번뇌에 상응하는 식이다.
열다섯째는 착함과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믿음 따위와 상응하는 식이다.
열여섯째는 무기(無記)와 함께 행하는 식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저들과 함께 상응하지 않는 식이다.
마음의 머무름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요별진여(了別眞如)를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마음의 벗어남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상박(相搏)과 추중박(麤重縛) 이 두 가지 결박에서 벗어났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이것은 그 마음을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했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마음의 늘어남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박과 추중박을 다스리는 마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그것이 자라나고 그것이 쌓일 때에 또한 자랄 수 있고 또한 쌓일 수 있으니,
이것을 늘어남을 잘 아는 것이라 한다.
마음의 줄어짐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다스릴 대상인 모습과 추중에 물든 마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니,
그것이 쇠퇴할 때와 그것이 물러날 때에 이것도 또한 쇠퇴하고 이것도 또한 줄어드는 것을 아는 것이다.
방편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해탈(解脫)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의 닦고 버림을 여실하게 잘 아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보살은 모든 보살의 광대한 위덕을 이미 이끌어냈거나 미래에 이끌어낼 것이며 현재에 이끌어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무여열반(無餘涅槃)에서는 일체 수(受)가 남김없이 영원히 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수들이 여기에서 영원히 없어집니까?”
“선남자여,
대략 말하건대 두 가지 수(受)가 남김없이 멸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무언가에 의지한 추중수(麤重受)요,
둘째는 그 결과인 경계수(境界受)이다.
무언가에 의지한 추중수에는,
마땅히 알라.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색(有色)에 의지한 수요,
둘째는 무색(無色)에 의지한 수요,
셋째는 결과가 이미 원만히 이루어졌다고 하는 추중수요,
넷째는 결과가 아직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추중수이다.
결과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는 추중수란 이른바 현재의 수요,
결과가 아직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수란 이른바 미래의 원인인 수이다.
그 결과인 경계수에도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의지하여 지니는 수요,
둘째는 살림살이[資具]의 수요,
셋째는 수용의 수요,
넷째는 아끼는 수이다.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에서는 결과가 아직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수는 모두 이미 없어지고,
그를 다스리는 명촉(明觸)에서 생긴 수를 받아들여 함께하거나 또는 그 결과가 이미 원만히 이루어졌다는 수가 있게 된다.
또 두 가지 수가 이미 없어지고 오직 현전에 명촉에서 생긴 수만 받아들이기도 한다.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의 세계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 때는 그것 또한 영원히 없어진다.
그러므로 무여열반의 세계에서는 일체 수가 남김없이 멸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다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대가 이제 원만하고 가장 청정하고 미묘한 유가도(瑜伽道)에 의지해 여래에게 묻는구나.
그대는 이미 유가에서 확실히 가장 좋은 방편을 얻었도다.
나는 이미 그대를 위해 원만하고 가장 청정하고 미묘한 유가도를 말하였다.
일체 과거와 미래의 정등각(正等覺)께서 이미 말씀하시고 앞으로 하실 말씀 역시 모두 이와 같으니라.
모든 선남자 혹은 선여인들도 모두 이에 의지해 용맹정진하며 바르게 닦고 배워야 할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밝히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을 거짓으로 세운 유가 가운데
방일한다면 큰 뜻을 잃으리라.
이 법과 그리고 유가에 의지해
바르게 수행하면 대각을 얻으리라.
얻을 것 있다 하고 벗어나길 구하며
이런 소견을 법을 얻은 것이라 한다면
자씨여,
그 사람은 유가와는 거리가 머니
비유컨대 땅덩이와 허공 같으니라.
중생에게 이익 주되 견고하면서도 하는 바 없으니
깨달은 뒤에도 부지런히 닦아 유정들에게 이익 주네.
지혜로운 자 겁의 한량 다하도록 이렇게 하니
곧 번뇌를 벗어난 가장 높은 즐거움 얻으리라.
어떤 사람 욕심으로 법을 설하면
그 사람은 욕심을 버렸다지만 도리어 취하는 것
어리석은 사람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법의 보배 얻고도
도리어 떠다니며 거지 노릇 하는구나.
다투고 떠드는 잡된 희론의 집착
마땅히 버리고 높은 정진 일으켜라.
모든 하늘 그리고 세간을 건지려면
이러한 유가를 그대여 배우라.
그때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해심밀(解深密) 법문에서 이 가르침을 무엇이라 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것을 유가요의(瑜伽了義) 교법이라 하니,
그대는 마땅히 이렇게 받들어 지녀라.”
이 유가의 교법을 말씀하셨을 때 그 큰 모임에 있던 60만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고,
30만 성문이 티끌을 멀리 벗어나 모든 법에 법안이 맑아졌으며,
15만 성문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해 심해탈(心解脫)을 얻었으며,
7만 5천 보살이 광대한 유가의 작의(作意)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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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심밀경』 ♣0154-003♧
◎◎[개별논의] ♥ ❋본문
● 오직 식으로부터 나타난 경계와 질문과 답의 취지
해심밀경의 다음 구절은 유식학 분야에서 많이 인용된다.
▸ 저 영상은 오직 식(識)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내가 말한 식의 소연은 오직 식으로부터 나타난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유식무경설이 제시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이 모두 마음에 의해 자체분별해 얻어진
내용이라는 주장도 행해진다.
그러나 위 내용은 다음 질문에 대해 부처님이 하신 답이다.
따라서 잘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
▸ “세존이시여,
모든 비발사나와 삼마지가 행하는 대상인 영상(影像)은
이 마음과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합니까,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합니까?”
“선남자여,
차이가 없다고 말해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저 영상은 오직 식(識)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내가 말한 식의 소연은 오직 식으로부터 나타난 경계이기 때문이다.”◂
...
위 내용에서 비살사나와 삼마지가 행하는 대상인 영상을 문제삼고 있다.
따라서 한 주체가 눈을 감았다가 뜰 때 대하는 내용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이 문제는 다음 문제와 관련된다.
○ 유식무경에 바탕해 무에 치우친 극단적 입장의 문제
유식론 입장에서 유식무경에 바탕해 무에 치우친 극단적 입장을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즉 현실 일체는 마음 내용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으로 마음 밖 영역에는 전혀 아무 것도 없음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그럴 필요는 없다.
그리고 무엇을 얻지 못한다고 하여 아무것도 전혀 없음을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런데 마음 밖에 아무것도 없음을 내세운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일체는 오로지 자신 마음만으로 그런 내용을 얻는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마음 자체가 분열해 그런 내용을 얻는다고 하기도 한다.
또는 마음이 다른 마음내용을 대상으로 해 내부적으로 그런 내용을 얻는다고 하기도 한다.
이런 입장을 『관소연연론』을 살피는 가운데 일부분 살폈다.
다만 아직 정리가 마쳐지지는 않았다.
현재도 가끔식 살피면서 정리 보충하는 상태다.
그런데 일단 다음처럼 링크를 만들고 이후 다시 살펴나가기로 한다.
sfed--관소연연론_K0628_T1624.txt ☞소연연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2562-05-07-k0628-001.html ☞○ 유식무경에 바탕해 무에 치우친 극단적 입장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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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oj1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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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불개(不變不改)하는 뜻.
본래부터 으레 고쳐지지 않는 성질.
금성(金性)ㆍ화성(火性)ㆍ불성(佛性)과 같은 것.
답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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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승(聲聞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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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지(世俗智)
소게다(蘇揭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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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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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oj1072
◈Lab value 불기2565/0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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