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집』
K1080
T2102
제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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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집』 ♣1080-011♧
제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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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105_161708_nik_CT28 순천 조계산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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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弘明集卷第十一
K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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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집 제11권
30. 하령상지1)답송문황제2)찬양불교사何令尙之答宋文皇帝讚 揚佛敎事
원가元嘉 12년(435) 5월 5일 유사有司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단양윤丹陽尹인 소모지蕭謨之가 글을 올려 말하였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지도 이미 4대를 거쳐
탑사나 불상을 모신 곳이 천으로 헤아려지니,
나아가서는 혹 마음을 의지할 만한 곳이 되고,
물러나서는 혹 승니를 초청하여 권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지엽의 일을 중요시하여 정성을 지극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게다가 다투어 사치함을 매우 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오래된 집이 퇴락하여도 일찍이 수리한 적도 없이 각각 새롭게 짓고는 서로가 자랑으로 삼고 있습니다.
최상급의 토지나 아름다운 집도 여기에 거의 다 사용하여 없어졌으며,
목재ㆍ대나무ㆍ구리ㆍ비단의 소모도 그칠 줄을 모르니,
알맞은 정도를 어기고 규정을 넘는 것은 마땅히 제재를 가해야 합니다.
방어책을 세우지 않으면 유폐類弊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지금부터 이후로 동상을 주조하려는 사람은
모두 정부로 가서 스스로 신청을 하고,
탑사塔寺나 정사精舍를 지으려는 사람은 모두 우선 해당 지역의 군 태수에게 가서 일의 본말本末을 자세히 통보하고,
군은 일에 따라 본 주州에 차례대로 말하여 반드시 허가를 기다린 후에 착공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멋대로 동상을 주조하거나 사사寺舍를 짓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불승용조서율不承用詔書律에 따라 그 죄를 논하고 동택재와銅宅材瓦를 몰수해야 합니다.’”
이 상주는 재가되었다.
그때에 사문 혜림慧琳3)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짓으로 승가에 들어가 불법을 비방하여 「백흑론白黑論」을 지었다.
형양衡陽 태수太守 하승천何承天은 혜림과 친하게 지내어 항상 서로를 추켜세웠고,
「달성론達性論」을 지었다.
두 사람 모두가 한쪽에만 얽매여서 불교를 비방하고 있었다.
영가永嘉 태수太守 안연지顔延之,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 종병宗炳은 불법을 믿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논을 점검하여 반박한 것이 각각 1만여 언이었다.
혜림 등은 처음에는 논쟁을 주고받고 하였으나 논지가 막히게 되자 멈추고 말았다.
종병은 「명불론明佛論」을 지어 그 종지宗旨를 널리 알렸다.
황제는 이것을 칭찬하시고 시중인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불경을 읽지 않았으며,
요즈음은 여가도 없어 3세 인과를 아직 분별하여 생각을 충분히 밝히지는 못한다.
그러나 다시 감히 이견을 말하지 않는 것은
바로 훌륭한 선배나 그대들과 같은 오늘날의 준수한 이들이 모두 받들어 믿고 있기 때문이다.
범태范泰나 사령운謝靈運은 언제나
‘육경의 전문典文은 원래 세속을 구하여 다스리기 위한 데 있는 것이다.
반드시 정신[性靈]의 참된 오묘함을 구하려 한다면
어찌 불경을 지침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안연지가 「달성론」을 논파하고 종병이 「백흑론」을 힐책한 것은,
불법의 넓고 깊음을 밝힌 것이고,
더욱이 명리名理를 위한 것이니,
인심을 개도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하겠다.
만약에 온 나라가 모두 이렇게 교화된다면 나는 앉아서 태평을 이룰 것인데 다시 무슨 일삼을 것이 있겠는가?
요사이 소모지蕭謨之가 규제를 청하였지만 아직 통과시키지는 않았다.
곧 보고서 경에게 내용의 가감을 맡긴다.
반드시 법식으로써 부음浮淫을 막는 것이 있고,
널리 권장해도 해됨이 없는 것이라면,
그때는 마땅히 법령으로 기록할 것이다.”
내가 대답했다.
“도와 거리가 먼 이들은 대부분 불법을 믿지 않습니다.
신은 평범하고 우매하지만 그래도 어리석은 대로 대답하겠으나
부족하고 천박하므로 큰 가르침을 더럽힐까 두렵습니다.
지금 다시 포폄의 일을 지워 주셨으나 제가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전대前代의 모든 현인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명조明詔를 어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중조中朝로부터 이전은 또한 모두 알기가 어렵습니다.
강남에 도래하고부터는 왕도王導ㆍ주의周顗 등은 가장 으뜸가는 재상들이며,
왕몽王濛ㆍ사상謝尙은 인류의 모범이 됩니다.
극초郄超ㆍ왕탄지王坦之ㆍ왕공王恭ㆍ왕밀王謐 등은 혹은 절륜絶倫이라 불렸고,
혹은 독보獨步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숭고한 기개와 굳은 정절 또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곽문郭文ㆍ사부謝敷ㆍ대규戴逵 등은 모두 마음을 천인天人의 경계에 두고 몸을 구름과 노을 사이로 올려놓고 있습니다.
죽은 고조부 형제[何充과 何準]는 청아한 식견으로써 세상의 궤범이 되었습니다.
왕원림王元琳 형제는 뛰어난 재지才智로써 조정에서 가장 으뜸이었습니다.
그 외에 범왕范汪ㆍ손작孫綽ㆍ장현張玄ㆍ은기殷覬 등 대략 수십 인은 모두 당시의 준걸 아닌 이가 없습니다.
또 종병의 「명불론」에 열거되어 있는 사문들인 백원帛遠ㆍ담무참曇無讖ㆍ우도수于道邃는 그 하배下輩입니다.
그와 대비되는 이는 유원규庾元規입니다.
우도수 이전의 축법호竺法護ㆍ우법란于法蘭이라고 하는 제공諸公은 모두 미덕을 갖춘 군자[黃中]이며,
예측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요즈음의 도속에 대하여 대략 말씀드려도 이러한데,
만일 자세히 이하夷夏의 예를 들고,
그리고 한위漢魏에 이른다면,
기이한 재주와 뛰어난 덕을 갖춘 인물들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예를 보면 어찌 헛되이 성령性靈을 구하여 쉽게 육친을 버리고 허황하고 거짓된 말에 빠져 미혹되어서 스스로 징험이 없는 교화에 빠져 버리는 일이 있겠습니까?
폐하의 생각은 조화의 작용을 꿰뚫고,
사려는 현상을 넘어선 세계에까지 미치고 있어 깊은 이치를 찾아내어 멀리까지 이르니,
얕은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臣들로부터 이하까지 만일 삼가 이 예를 미루어 나아간다면,
금세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다”4)고 한 것이 어찌 헛된 말이겠습니까?
혜원慧遠 법사는 예전에 “부처님의 교화가 미칠 수 없는 곳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도는 진실로 교敎로부터 근원하는 것입니다.
세속을 구제하는 것도 또한 중요한 일이 됩니다.
세주世主께서 만일 어긋나고 거짓된 일을 끊어 내고 틀림없고 진실된 일을 권장할 수 있다면,
불교는 황제의 정치와 함께 행하여져 유(幽:불교)와 현(顯:정치)이 서로 협력하여
함께 서민을 돈독하게 할 것입니다.
어찌 주의 성왕成王ㆍ강왕康王5)이나 한의 문제文帝ㆍ경제景帝6)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주周나 한漢의 시초에 또 이 불교의 교화가 겸하여 행해졌다면 칭송이 일고 형벌이 완화되는 것도 훨씬 더 빨라졌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말은 진리에 맞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백 가家의 향鄕에서 열 명이 5계를 지키면 열 명이 온순하고 공손하여집니다.
천 가의 읍에서 백 명이 10선善을 닦으면 백 명이 화목하고 인정 많게 됩니다.
이 교화를 전하여 천하에 두루 미치면 편호編戶가 천만千萬이면 어진 이가 백만 명이 됩니다.
이것은 5계와 10선을 모두 갖춘 사람을 예로 들어 말한 것뿐입니다.
만일 일계일선一戒一善을 지키는 사람을 모두 헤아려 수를 센다면
아마도 열 명 중에 두세 명은 될 것입니다.
일선一善을 잘 행하면 일악一惡이 이미 없어지며,
일악一惡이 이미 없어지면 일형一刑이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일형一刑이 집에서 그치게 되면 만형萬刑이 나라에서 그치게 되는 것이니,
4백의 옥獄을 사용하지 않고 비워 둔다는 것이 어찌 어렵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송雅頌7)의 소리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히 더욱더 빨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앉아서 태평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치상으로 말한다면 이상과 같고,
사실로 징험徵驗한다면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 사서史書에서는
‘서역의 습속習俗은 모두 불법을 숭배하고 공경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국의 백성이 수만이고 소국은 수백 명이어도 끝내 서로 겸병兼幷하지 않았습니다.
서역의 제국이 중국에 복속하고 나서 습속이 상당히 나쁘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주 순박하고 유약해서 살육을 행하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또 오호五胡가 중국을 치고 난 이래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원통하게 횡사해 죽은 이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설혹 살아 남은 사람들은 반드시 불교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불도징이 업鄴에 들어가고 나서 석호石虎의 살육은 반감하였고,
승지澠池의 보탑이 빛을 발하여 부건符健의 추거椎鋸가 멈추었습니다.
저거몽손沮渠蒙遜은 은의恩義를 배반하여 자애를 베풀지 못하고 그 잔악함은 여우나 호랑이와 같았지만,
만년에는 불법에 감화를 받고 드디어는 선인善人이 되었습니다.
법체法逮 도인道人은 만인의 힘을 갖추어 하위河渭 지방에서 거의 난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결사決死의 각오로 사師의 위난危難에 맞섰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고 불법을 공경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묘한 도가 교화를 돕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벼락에 맞는 것은 여름 장마 때는 항상 있는 일입니다.
그러한데도 전展 씨의 묘8)가 벼락에 진동했던 것을 『좌전』에서는 은닉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걸ㆍ주의 때에 원통하게 죄로 죽은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주의 선왕宣王9)ㆍ진晉의 경왕景王10)만이 형벌의 남용으로 인해 재앙을 받았던 것입니다.
보응報應의 도리로 살펴보아도 이미 부합되지 않는 것이 있고,
다시 고금의 예로 징험하여 보면 점점 의혹이 늘어납니다.
그러나 경서經書나 사서史書에는 이것을 기재하여 권선징악의 교훈을 드러내며,
만에 하나의 영상이라도 오히려 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만약 불교를 말의 의미를 따져 밝히면 그러할 만하고 믿을 만한 이치가 있지만,
사실을 살펴보면 이치에 어긋나고 그릇된 허물이 어찌 없겠습니까?
또한 관세음보살께서 내리신 바의 가까운 증험과 아울러 즉시 몸을 세상에 나타내시는 것은 뭇 사람의 시선으로 다 함께 보는 바입니다.
기도하고 구하는 집에는 기원한 그 일이 이어져 일어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권선징악이 되고 큰 효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유교와 해를 같이하여 담론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무리는 경솔하게 불교에 대해 극도로 비방하여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고
하찮은 것에 생명을 바치며 작은 일에 얽혀 큰 것을 잃고 있습니다.
승니가 후손을 끊어 버리는 것을 미워하고,
상탑像塔에다 주자朱紫를 많이 사용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덮어 주고 실어 주는 천자의 은혜를 받으면서
일상적인 일로 여겨 말하지 않고,
역인役人이 제사의 일을 고되게 여겨 때로 비방하고 소홀히 하는 것이나 같은 일입니다.
혜림이나 하승천何昇天도 아마 역시 그러한 부류일 것입니다.
소모지蕭謨之의 계제啓制는 신 역시 전부 다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도속을 해치고 해하는 데에 가장 심한 것은 계행이 없는 승니에게 있어서이지만
외견상으로는 구별하기 어려우니 경솔히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금동과 토목이 비록 소비되는 것이 아주 많다 하더라도
거기에 부업이 존재하기 때문에 또 단번에 멈추게 하기는 힘듭니다.
저는 근래 짐작해 생각하였지만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어 편치 못했었는데,
오늘 친히 천자의 말씀을 받들어 진실로 평온을 얻었습니다.”
이때 이부랑吏部郞 양현보羊玄保가 자리에 있다가 나가서
“이 의론은 천인天人의 경계이니,
어찌 신臣이 간여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모르기는 해도 진秦ㆍ초楚가 강병强兵의 술책을 논하고,
손자孫子ㆍ오자吳子가 탄병呑倂의 계책을 다할 적에도 아마 이러한 데에서 취함이 없었겠습니까?”라고 말씀드리자,
제帝는 “이것은 전국戰國의 수단은 아니지만 참으로 경의 말대로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상지가 “은일隱逸을 예찬하면 전사戰死가 게을러지고,
인덕을 귀하게 여기면 병사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더욱이 만일 손오孫吳로써 뜻을 삼아 구차하게 침략을 주로 한다면 또한 요순의 도에도 취할 것이 없으니,
어찌 다만 불교뿐이겠습니까?”라고 말하자,
황제는 기뻐하며,
“석문釋門에 경이 있는 것은 또한 공자에게 계로季路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악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31.
고명이법사답이교주묘난불불견형사병이서高明二法 師答李交州淼難佛不見形事幷二書
1) 이묘李淼의 논란
도道는 청허淸虛하고,
4대大11)의 이치는 항상 하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많은 경계를 신묘하게 뛰어넘는 불교의 법문이 있으니,
만일 말한 것처럼 부처님의 공능(선교방편의 기량)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고 한량없는 중생을 도탈度脫시키는 것을 가르침으로 한다면,
어째서 부처님께서 진실한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시지 않고
단지 공설空說만 하고 실증이 없는 것입니까?
지금 확실히 서방정토의 근원에 대하여 당신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대화상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저의 마음을 받아 주시어
아낌없이 신묘한 말씀을 해 주시기를 삼가 바라옵니다.
제자 이묘 합장.
2) 도고道高의 답
석 도고는 질문을 받들어 말씀드립니다.
지고至高한 성인[佛]의 몸을 드러내고 감추는 자취에 대한 물음을 받았습니다.
논리의 의미는 광대하고 심원하며,
말의 의의意義는 세련돼 있고 명백합니다.
삼가 되풀이하여 읽고 훌륭한 말씀을 더욱 존경하고 있습니다.
사군使君12)의 담장은 높고 높아서 문을 찾아내기가 처음부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관견管見으로 망상罔象과 같이 현주玄珠를 찾아보겠습니다.13)
여래께서 중생에게 응현하시는 데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신佛身을 나타내는 경우로서 광명을 비추고 대지를 진동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정법이 존재하는 경우로서 부처님께서 세상에 살아 계신 것과 같습니다.
셋째는 상像에 의한 교화로서 의형궤범儀形儀範을 방불케 하는 것입니다.
의형궤범을 방불케 하는 것에 의해서
현재 사람들의 심정에 응현應現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정이 모습[像]에 의하여 감동하는 것이니,
누가 부처님의 당체當體의 모습을 보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유마경』에
“그때 부처님께서는 법상法相을 잘 깨닫고 중생의 근기를 안다”14)고 설해져 있습니다.
또 시두말성翅頭末城에서 실현되어 있는 미륵보살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의 세 차례의 법회15)에서는,
사람들의 심정이 부처님께서 몸을 나타내실 것을 눈으로 보고 감동하는 것이니,
누가 부처님께서 몸을 숨기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법화경』에 “그때 나[佛]와 중승衆僧이 함께 영취산에 나타난다”16)고 설해져 있습니다.
미륵보살의 하생下生에 나타나는 상거蠰佉 전륜왕17)의 궁전은
그 높게 솟아 있는 모습을 기약할 수 있는데,
어찌 서방의 근원을 볼 수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세간의 의심을 품은 사람들은 흔히 경전의 말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보이지 않는 것에 자신을 맡기는 감정을 업신여기니,
모두 보이지 않는 것으로써 막혀 걸려 있는 것입니다.
삼황三皇ㆍ오제五帝,
삼대三代ㆍ오패五覇,
주공周公ㆍ공자孔子가 『시경詩經』을 산정刪定하고 예제禮制를 정했다는 것은
모두 사적에서 전해져 들은 것이지,
누가 그것을 눈으로 보았습니까?
또 석존이 녹야원에서 법고法鼓를 쳐서 울렸다는 것이나
공자가 노나라 추읍鄒邑에서 덕음德音을 선양한 것도
모두 귀나 눈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써 놓은 문자에 따라 그 일을 믿는 것뿐입니다.
만약에 저의 일을 믿지 않는다면
타방의 불교를 의심하는 것도 근심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이의 일은 인정하고 있으면서
어째서 오직 불교의 일에만 막혀 걸려 있는 것입니까?
사군使君의 훌륭한 생각은 깊고도 멀어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를 통찰洞察하시고서 여래의 수량壽量은 다함이 없다는 가르침을 찾기를 원하시니,
지금 세상에서 가깝게는 정광定光여래께서 유동儒童보살에게 석존이 될 것을 예언하신 사적18)을 취하고,
조금 멀리는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의 대집회19)를 추량推量하여 주신다면 그에 의해 뭇 사람의 깊이 막혀 있던 것을 풀어 주는 것이 마치 꽉 뒤덮여 있는 구름을 헤치고 태양이 나타나게 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빈도貧道는 말도 천박하고 사구辭句도 졸렬하여 말로는 심중心中을 펼칠 수 없습니다.
만나뵙는 날에 마땅히 논란論難의 말씀을 올리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3) 이묘의 편지
이묘는 합장드립니다.
곧바로 훌륭한 논論을 읽어 보았습니다.
조리가 정연하고 말씀은 더욱 아름다워 흔연히 알게 된 것이 진실로 많았습니다.
말씀하신 중생의 감통感通과 여래의 교화는 시대를 달리하고
상법과 정법은 풍속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과
외전外典을 원용援用하여 내전內典에 반영反映시키고 문헌을 통하여 진실을 증명하신 것이 있습니다.
삼가 보내오신 취지는 모범이 되어 비난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는 방법은 반드시 눈으로 보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의심을 일으키니,
의심은 깨달음의 근본이 아닙니다.
만약 문자가 존재하는 곳에서 시대를 달리하여도 똑같이 이해된다면
만세萬歲의 후대에 성인이 나기를 기다려 스승으로 삼는 일은 없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성교聲敎와 궤적軌迹 모두에 의지하여
말과 형상으로 서로 구제하는 데 이르게 된다면,
대의大義는 이미 어그러지고 유묵儒墨이 다투어 일어나게 되니,
어찌 다만 바른 믿음을 밝게 하지 못하는 것뿐이겠습니까?
장차 또한 비방과 오해가 더욱 쌓일 것이니,
부처님의 시현示現과 인기(印記:認可證明)에 의하여 증거를 취하여
자신을 확고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대한 성인이신 부처님께서는 걸림 없는 지혜를 가지셨으므로
청하지 않더라도 자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밝게 빛나는 광명을 아껴 한 길 여섯 자의 몸을 숨기시며,
열반에 드신 후에 많은 이를 절망하게 하여
미륵의 세 번의 법회에 앞서서 죄를 일으키게 하는 것일까요?
짚으로 엮어 만든 개20)를 헛되이 세워 놓은들 어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의상儀像을 부질없이 세워 놓은들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제五帝와 삼왕三王,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은 다만 현세現世에 해당될 뿐이고,
내생의 일은 그대로 두고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취의 숨김과 나타남,
교화의 쇠퇴함과 흥성함,
방편과 진실을 변론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래의 궤업軌業은 멀리 두루 3세를 관통貫通하고 있고,
자비는 널리 윤택하여서 현세만으로 한계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많은 미혹한 사람들이 깨달음을 구하고 있지만
입멸入滅을 가지고 궁극窮極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화육化育과 제도濟度는 단지 전적典籍에 있는 것이 아니며,
불사佛事는 영겁에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른바 불사佛事란 그 어디에 있는 것인지 묻습니다.
만일 말씀하신 대로라면 믿는 것은 불교이면서 증거로 삼는 것은 유교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인이 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고 있으며,
공자의 도와 석가의 도는 각각 서로 다르니,
사실 그대로 말하자면 모순 아님이 없으니 서로 증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침묵하고 그만둘 수 없어 잠시 생각나는 바를 다시 언설에 의탁하였으니,
다시 상세히 연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훌륭한 해답을 뵙게 되기를 기다립니다.
4) 도고의 답
석 도고가 말씀드립니다.
거듭 심오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내용이 아름답고 논지論旨가 심원하여 몇 번씩이나 읽어 보고 생각하고서
드디어 깊은 뜻에 감복하였습니다.
본래 아는 것과 지극한 이치는 범용한 사람들로서는 추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미묘한 말과 심오한 사구辭句는 비천한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무례한 줄을 알면서도 평범한 천견淺見 그대로 대략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해 보겠습니다.
온갖 선행이 모두 가르침이 되니 그 방도는 하나만이 아닙니다.
산림이나 수택藪澤에서 선정에 드는 이도 있고,
성읍城邑 옆에서 덕행을 닦는 이도 있고,
혹 몸을 구부려 손가락을 튀기는 이도 있고,
혹 송사頌詞를 노래하며 시가를 읊조리는 이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귀나 눈으로 함께 알 수 있는 것이고,
실천하는 이 또한 한량이 없습니다.
이것은 곧 깨달음을 얻는 나루[津:동기]는
보이지 않는 것[佛]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말미암는다는 의미입니다.
어찌 반드시 눈으로 보는 것을 인하여서만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어찌 보이지 않는 것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반드시 의심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의심도 역시 깨달음의 본입니다.
그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심을 하면 이해를 구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깨달으면 도道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이 근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유묵儒墨이 다투어 일어나고 구류九流 제가諸家의 시비가 있다 해도
그것은 횃불이 그치지 않고 계속 타고 있다 해서 일월이 환하게 비추지 않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21)
어찌하여 부처님의 시현示現에 대해 급급해 하며 동일한 데로 귀착함에 대해 초조해 하십니까?
지금은 정법 시대와 같지 않은 말세여서 증거가 없으나
증험하여 진실을 밝히면 틀림이 없는 것인데,
대성께서 밝고 환한 광명을 아낀다 하여
세상의 의심하는 사람들은 거만해져서 부처님께서 응현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길이 꿈의 세계를 헤매면서
이리저리 깊이 잠겨 들어 생사의 바다에 빠져 헤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선유先儒ㆍ선철先哲이 대략 옛날에 이미 말하고 있고,
길에 다른 궤적이 있는 것도 아니니,
전술傳述하기만 하고 창작創作하지는 않겠습니다.22)
일신一身을 버리고 성심으로 귀의한다면 반드시 부처님의 현묘한 몸이 느껴질 것입니다.
느낌이 있으면 확실히 볼 수 있지만 느낌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 본 사람이 보지 못한 사람에게 말하여도
보지 못한 사람은 반드시 봤다고 하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
성인이 어찌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할 수 있으며,
중생들이 어찌 항상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설법의 소리를 듣고 그 가르침의 훌륭함을 칭송하니,
그때 짚으로 엮은 개들을 부질없이 늘어놓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의 형상을 눈으로 보고 몸을 구부려 절을 하니,
그때의 영묘한 의상儀像을 어찌 헛되이 세웠다 할 수 있겠습니까?
주공과 공자는 퇴폐한 풍속風俗을 구제할 충분한 힘이 없는데,
어느 겨를에 사람들에게 내세의 일까지 보일 수 있겠습니까?
만일 공자나 주공이 노끈을 매어서 의사를 전달하여 다스렸다23)고 하는
상고 시대에 태어났었다면,
당연히 그들은 3세를 밝히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불사佛事는 그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고 물으셨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합장하는 것,
그 어느 것도 불사가 아님이 없으나 다만 깊이 깨닫게 하는 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길은 달라도 귀착歸着하는 곳은 같은 것입니다.
지난번 편지에 저것(유교)의 일을 믿고 이것(불교)의 일은 의심한다고 말한 것은,
다만 세인世人이 부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면 바로 부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공과 공자의 모습도 볼 수 없다는 의미를 취하여 표준으로 삼았던 것뿐입니다.
이 일은 팔짱을 끼고 그냥 두어도 자연히 귀결될 것인데,
어째서 이것을 모순된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사군使君이 태어날 때부터의 지혜는 거짓이 아니고,
본바탕의 기운은 자연 그대로입니다.
매우 귀중한 지위에 있으면서 빼어나게 훌륭한[穎脫]24)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학문의 세계를 유랑하고 책의 세계를 거닐면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어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내고 계십니다.
덕음德音을 말씀하시면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빈도의 학문은 조잡하고 천박하여 편지를 잘 쓰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울 뿐입니다.
조략한 내용을 답하여 훌륭한 문장을 더럽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송구스러움과 부끄러움만이 더하여 땀이 비 오듯 흐릅니다.
삼가 올립니다.
5) 이묘의 편지
이묘는 합장드립니다.
당신은 훌륭한 논변으로 깨달음을 얻는 나루는 의심하는 것으로부터 얻어지며,
보이지 않는 것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 넉넉하다면 보는 것을 취할 필요가 없으며,
몸을 굽히거나 찬탄하여 송사誦詞를 노래하거나 하는 일들이 모두 불도佛道에 도달하는 데 충분하다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편지를 되풀이하여 읽어 보고 더욱 깊은 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상법像法에는 정법과 달리하여 깨달음을 구한다고 말한 논리는 조잡합니다.
통발[筌]25)을 빌려 종지宗旨를 이해한다면 부처님의 모습이 시현示現함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이야말로 진실로 주공과 공자가 후세에 교훈을 남겨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이며,
가르침을 남겨 준칙準則이 되고 있는 것이니,
세간의 전적典籍에서 구하여도 충분한 것입니다.
광명光明을 놓고 대지를 진동시킨 일을 부질없이 무엇 때문에 하셨습니까?
만약 바른 믿음이 엎드리고 우러러보아 예경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불사佛事가 모습이나 소리에 모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면 그때 대각(大覺:
부처님)께서 말미암는 것은 미묘한 색신色身이며,
깨달음을 구하려면 그 시초에 기인하여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반드시 유가儒家와 묵가墨家에서 일으킬 논쟁 때문에 의심을 하게 될 것이고,
배우는 이들도 앞으로 증거가 없음을 말미암아 스스로 후회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밝음을 아낀다는 것은
삼황三皇이나 오제五帝에게 있어서는 탓할 것이 없으나
도덕道德에 모습을 숨기는 것은 부처님의 10호號에 허물이 될 것입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또 말씀하신 주공이나 공자도 퇴폐한 말세를 구제하는 데 힘쓰느라 내세의 일에는 여가가 없고,
만약에 결승結繩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당연히 3세를 밝혔을 것이라는 말도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7경經에서 진술한 바의 뜻은 미래도 겸하고 있고,
불전佛典에 폭넓게 게재되어 있는 일은 다만 인연과보因緣果報뿐입니다.
따라서 『주역』에서는,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넉넉한 경사가 있고,
악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많은 재앙이 있다”고 하였고,
경전에서
“나도 없고,
업을 짓는 이도 없고,
과보를 받는 이도 없지만,
선악의 업은 또한 없지 않다”26)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다면 인연의 가르침(불교)은 항상 완만하고,
미래의 일도 또한 겸하고 있는 가르침(유교)은 매우 큰 것이 되는데,
어째서 이쪽에만 힘을 쓰고 있고,
다른 쪽은 빠뜨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보내오신 변론은 훌륭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쳇바퀴 돌듯 순환하고 있는 설일 뿐입니다.
바라옵건대 다시 새로운 설을 가려내어서 다른 논점을 말하여 고금의 미혹함을 씻고,
이로(夷路:평평한 길)를 더욱 평탄하게 하고,
쌓여 있는 장애를 크게 소통시켜 주십시오.
아무쪼록 대화상께서 저의 티끌같이 작은 바람을 받아들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자 이묘 삼가 올립니다.
6) 이묘에게 보낸 법명法明의 편지
석법명이 말씀드립니다.
여기에 훌륭한 논변을 받고 삼가 읽는 데에 며칠을 보냈습니다.
이 논변은,
향기가 골짜기에 피어난 난蘭과도 같고,
맑기는 훈풍薰風과도 같습니다.
빈도貧道의 기량器量은 서릿발같이 날카롭게 번득이는 영재가 못 되며,
그 솜씨 또한 포생庖生27)과 같이 뛰어나지도 못합니다.
걸핏하면 도리를 어겨 벗어나 단지 수많은 의문들에 걸려 넘어질 뿐입니다.
진실로 말은 어눌하고 논지는 막혀 있기 때문에 극심한 비판이 별처럼 늘어 세워져 있습니다.
어리석은 저는,
중생이 어렴풋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자신을 맡기는 것과 시현한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
몸을 굽히고 노래하고 찬탄하거나 영묘하게 변화하여 나타나는 부처님께 감동하는 것은,
모두 도道로 나아가는 나루[津]와 다리[梁]이며,
청정한 데로 올라가는 경사스러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자신을 맡기는 것과 눈으로 모습을 보는 것은 다 존재하며,
의혹과 증험도 양쪽 모두 존립하는 것입니다.
어찌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물리쳐 끊어 버리고,
신이한 모습을 단번에 흘려 버리며,
도道를 주공ㆍ공자와 같다 하고,
규범을 세훈(世訓:
유교)과 같다 하며,
빛을 비추고 땅을 진동시키는 일을 한갓 공언空言이라 여길 수 있겠습니까?
법신法身은 응적凝寂하고 묘색妙色은 담연湛然하기 때문에 모습을 숨기고 나타냄이 시류에 순응하므로 세상에 나가 도를 행함과 물러나서 숨는 일을 추측할 수 없습니다.
나타날 때에는 진여眞如를 타고 오며,
숨을 때에는 훌륭하게 가는[善逝]28)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 그대로 그 의미를 구해 본다면,
어찌 부처님의 10호에 맞지 않는다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숨어 있을 때라도 남아 있는 빛으로 비추는 것으로도 말세의 세상을 비추기에 충분합니다.
신자信者들이 어찌 반딧불 빛 때문에 의혹을 더할 것이며,
바로 다음날 아침 해를 대하여서 어깨를 나란히 하여 흑백을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탑塔ㆍ상像ㆍ경經ㆍ서書가 세계에 가득 차 있는데,
배우는 사람들이 어찌 증거가 없다고 하여 스스로 후회하겠습니까?
또한 인용한 7경經에는 그 의미가 미래를 겸하고 있어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넉넉한 경사가 있고,
악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많은 재앙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찰나찰나 새롭게 생멸하고 팔을 서로 걸고 교대로 생겼다가 소멸하지만 선악의 업은 과보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3세에 대해 확실하게 밝혀 준 것이며,
7경經에서는 더욱더 분명합니다.
문헌을 증거로 하여 사실을 확인하면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앞의 논論에서 “오제五帝와 삼왕三王,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은 다만 현세에 해당될 뿐이고,
내생의 일은 그냥 두고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취의 숨김과 나타남,
교화의 쇠퇴와 흥성함,
방편과 진실을 변론하는 일이 없었습니다”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모순된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느 쪽의 해석을 따라야 마땅하겠습니까?
인仁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는다29)고 하니,
심원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앞의 소疎에서 지극한 성인이 때로는 숨고 때로는 나타나는 것을 대략 서술했지만,
그 논거도 아직 분명하지 않으며,
설명은 더욱 확실치 않습니다.
삼가 좀더 자세히 구명하여 함께 최상의 도를 넓힐까 합니다.
뭇 중생들은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3유有의 세계 안에서 길고 긴 잠을 자고 있고,
중생의 식識은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의 6진塵 속에서 깊이 헤매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은밀히 변이變移하여 지옥ㆍ아귀ㆍ축생 등의 세계에서 서로 해치고 잡아먹는 주체가 되고,
차례차례 계속 이어가며 회전하는 바퀴가 됩니다.
몸은 손님을 맞이하는 집에 해당되고,
정신은 지나가다 잠깐 쉬어 가는 손님에 해당됩니다.
3악도惡道를 왕래하면서 고통을 맛보고,
8난難을 거치면서 신맛과 매운맛을 봅니다.
흔쾌한 즐거움은 잠깐의 오락일 뿐이며,
근심과 두려움은 영겁을 갑니다.
이 한 몸이 죽어 괴멸되면 다시 다른 몸을 받는 것입니다.
세간의 지혜로 총명하여 모든 서적을 배에 가득 차도록 읽어 백가百家의 문을 환히 깨달아 알고,
구류九流의 모든 가르침을 통달하였으며,
사死와 생生은 명命에 달려 있고 부富와 귀貴는 하늘에 달려 있다30)는 것을 알며,
귀신조차도 마음대로 요구할 수가 없고,
성인聖人과 철인哲人들도 참가하여 관여할 수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또한 그릇된 견해에 따라 마음을 흐리게 하고 분명하지 않은 말에 의하여 바른 사려思慮를 어지럽히며,
무당이나 정령精靈에 마음을 의존하고 부적이나 주문에 정성을 바치고 사견邪見에 집착하면서도 정도正道를 기대하고,
허위를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진실을 기대하며,
두 마음에 이리저리 방황하며 두 갈래 길에서 주저하고 있으니,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고 대지大地를 진동시키는 것을 어찌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현묘한 전적[佛典]이 넓게 세상에 유포되고 통발(방편)을 벌여 놓아 중생의 근기根機에 대비對備하고,
근기가 움직이면 반드시 감통感通할 것이고,
감통한 후에 부처님의 영묘한 변화가 응應하는 것입니다.
뜻을 현묘한 경지에 깃들어 살게 하고,
생각을 유원幽遠한 경지에 내려놓고,
일생이 아침이슬과 같다는 것을 더욱 명확하게 밝히고,
3세世가 허무하지 않다는 것을 알며,
청정하고 진실한 대도大道에서는 고삐를 놓아두고,
혼탁하고 거짓된 길에서는 고삐를 당겨 멈추며,
덕德의 풀을 심고 사견邪見의 풀을 뽑아 버려 덕의 풀을 무성하게 자라게 하고,
복福을 심고 정도正道의 물을 뿌려 주어 사방으로 가지가 뻗치게 하며,
굳게 절개를 지키는 데 촌음寸陰을 다투어 시간을 아끼고 노력하고,
자신을 청결하게 하는 데 세월이 흘러감을 저녁노을이 지는 것과 다투어 힘쓰고,
정성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품고 느껴서 드디어 통한다면,
어찌 몸소 빛나는 빛을 비추고,
그 부처님의 영묘하게 변현變現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귀나 눈으로 자명하게 알 수 있는 일이나 혹은 꿈을 통해 본 곳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는 꿈으로 인因하여 성인을 느꼈고,
불법은 이로 인하여 전래되었습니다.
제왕帝王은 정성을 기울여서 그 덕에 귀의하였고,
영웅호걸은 옷깃을 여미고 교화에 따랐으며,
사문沙門은 왕공王公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고,
승니는 천자에 대하여 몸을 똑바로 하고 예경을 하지 않았습니다.
불교 이외의 아흔여섯 종류의 이교도에서 어느 것이 그와 같이 존중받았겠습니까?
송宋의 무황제武皇帝가 막 제위에 올랐을 즈음에 꿈에 한 도인이 발우를 들고 와서 걸식을 하면서 황제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전세前世에 유위불維衛佛에게 한 발우의 밥을 보시하였기 때문에 그 자리를 얻은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는 사자를 보내어 엄공嚴公에게 그것이 거짓인가 사실인가를 물었습니다.
엄공은 즉시 『칠불경七佛經』을 보내어 바치고 대답하였습니다.31)
오주吳主 손권孫權은 처음에는 불법에는 영험이 없다고 의심하여 금지시키고 폐지해야 한다고 하다가 드디어 사리를 얻었습니다.
그 광명은 궁중을 비추고 금이나 철로도 깰 수가 없었으며,
쇠붙이를 녹이는 풀무로도 녹일 수 없었습니다.
현재 국도國都에 있는 건초사建初寺가 그때에 세워진 것입니다.
오군吳郡에서는 석불石佛이 바닷물에 떠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도사道士나 무사巫師 및 따르는 사람의 다수가 부장符章을 갖고 큰 북을 치면서 춤을 추었지만 조금도 움직이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흑의黑衣의 승려 5, 6인, 주朱씨와 장張씨의 사람 여럿이 가까이 가서 공손히 맞이하자
그것이 떠서 들어왔으며,
마침내 모두 들어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현재 오군吳郡의 북사北寺에 있는 석불상입니다.
순박한 정성이 미치면 감응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주씨와 장씨가 대대로 부처님을 받들어 온 것은 이러한 영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곽문거郭文擧는 삼보를 공경하고 받들었고,
바른 신심이 굳고 확실하였습니다.
손으로 호랑이의 목에 박힌 뼈를 꺼내어 준 적이 있고,
생명의 안전함과 위험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난蘭 법사32)는 맹수들의 등에 쌓여 있는 눈을 털어 준 일이 있습니다.
호공護公33)은 마른 샘을 감응시켜 물이 넘쳐 흐르도록 한 일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훌륭한 행을 한 사람으로서 중인을 뛰어넘으며,
이들 모두의 고매高邁한 행行은 많은 사람보다 훌륭하며,
청정한 마음은 세속에서 뛰어나 모두 이적異迹이 있고,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이적들을 모두 기록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습니다.
빈도는 젊을 때부터 게을리 하다가 백발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루하고 견문은 적지만 나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드러내었습니다.
솔직하고 꾸밈이 없는 말이라 반드시 채택할 만한 것이 없으니,
참으로 온당하지 못한 점이 있을까 염려되는 바입니다.
삼가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삼가 올립니다.
이하 “형주荊州의 종거사宗居士가 「명불론」을 지었다.
백익伯益은 『산해경山海經』에 ‘천독(天毒:
인도)이라는 나라는…….’ 진나라 때에는 강남에서 융성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 책 제2권 「명불론明佛論」에 있는 내용이므로 생략한다.
32.
문선왕서여중승공치규석의혹文宣王書與中丞孔稚珪釋疑 惑[답서 첨부]
1) 문선왕 소자량蕭子良34)의 편지
당신의 편지를 낱낱이 살펴보았습니다.
언제나 근거 없는 말이 올바른 도를 막고 격렬함이 순화純化를 해치고 있음을 근심한 지도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맹자는 “군왕께서는 소지小智를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군왕께서는 소용小勇을 좋아해서도 안 됩니다.
소용小勇과 소지小智가 정도를 지나치면 환화患禍를 낳게 되니,
따라야 할 바는 바로 마땅히 인의를 근본으로 삼는 것입니다”3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불교[釋訓]를 닦은 것으로 인하여 비로소 이러한 맹자의 행行이 나오게 된 근원을 보았습니다.
맹세코 이행履行할 것을 염원하여 비천한 사람이나 고귀한 사람이나 모두가 그 미덕을 같이하기를 바랍니다.
또 『유마경』의 비유[解脫之喩]를 들면,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으며,
작은 것에 큰 것이 들어 있다[不得不小失存其大至於形外之間]”36)고 합니다.
모습 밖의 세간[形外之間]에 이르러서는 저절로 언급할 것도 없습니다.
세속을 뛰어넘는 불교[眞]도 세속의 가르침인 유교[俗]도 그 극치는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을 취取하는 이들이 아직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멋대로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하는 시비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선업善業을 쌓아 신실信實한 세계에 깃들여 산다”고 말하였는데,
그렇다면 말과 행동이 어긋나게 됩니다.
어떻게 부모를 모시는데 한쪽에서는 험담하고,
한쪽에서는 공경하는 것을 대효大孝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진 사람의 품행品行은 잔인하게 해치는 것으로 그 미덕을 더하지 않으며,
청렴한 사람의 지조는 탐하여 훔치는 것에 의지해서 그 덕을 이루지 않습니다.
이와 같다면 3귀歸와 5계戒를 어찌 한 생각이라도 버릴 수 있겠으며,
10선계善戒와 8정도正道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그 근본을 가볍게 여기고서 그 지말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뿌리가 이미 기울어진 뒤에 지엽枝葉이 이를 따른다”37)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두 길이 떨어져 다른데 어찌 서로 따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얄팍한 이야기로 보일 뿐입니다.
당신은 경經과 율律의 불전에서 말한 것을 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뜻을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유불儒佛의 공통 통로를 매몰시키려 합니까?
원래 선비란 세속을 여의고서 가르침을 베풀지 않는 법이니,
세속에 근거한 가르침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 불법佛法이란 헛되이 거짓됨만 이루어 다시 의혹을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소멸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원인에 대하여 말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손윗사람을 잘 섬기는 이가 마을과 고을을 합쳐서 결국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이제 그 많지 않은 것을 가르침의 탓으로 돌려 경서經書나 사서史書,
잠계箴誡를 모두 분서焚書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불교[內敎]에 대해 의심하여 망설이고 있지만 또한 이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훌륭한 법(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은 본래 예경을 그 마음에 내세워 과시하지 않고,
삼가 우러러 따르는 사람은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타인을 잊어버리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자기의 사욕私欲을 이기는 것에 애쓰는 사람은 바로 당신들뿐입니다.
서로 교만함을 버리고 오만함을 없애며,
정욕을 조절하고 탐욕을 억제하여 예양禮讓을 닦고 겸손을 배우며,
인의仁義를 받들고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며,
널리 보시하기를 힘쓰고 두루 사랑함을 넓히며,
영특하고 어진 이를 찬탄하고 준수하고 뛰어난 이를 뽑아 올리니,
또한 귀신에게 무슨 부끄러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부지런히 채찍질하여 힘써야 진실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다 따라할 수는 없다 해도 또한 생각에 두고 그것을 잊지 않습니다.
지금 아직 야광夜光의 구슬이 던져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칼자루를 만지며 일어서고 있으니,
38) 도덕에 가까이 있고자 하나 어찌 부끄러운 일이 많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직 이 사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믿어서 마음에 기약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 마음에 있어서는 그렇지는 않고 항상 미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사도司徒의 관청은 원래 5교敎39)를 권장하여 참으로 함께 이러한 아름다운 행을 돈독하게 하여 아랫사람들을 이끌어서 속이고,
아첨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도司徒의 문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새롭게 하고,
진실되지 못하고 방탕한 사람들도 사도司徒의 뜰을 밟는 것만으로도 행실을 바꾸게 하여 저 마음을 쉬는 객사[息心之館]와 같게 하고,
무욕의 누각[無慾之臺]과 같게 하니,
또한 훌륭한 일이 아닙니까?
첫째로는 천자(天子:武帝)의 천하에 두루 미치는 자애를 우러러 따르고,
둘째로는 황태자(문혜 태자)가 자애를 베푼 선행을 공경하여 받드는 것입니다.
조석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참으로 이 마음에 이룸이 없을까 걱정하는 것뿐입니다.
세간의 종잡을 수 없이 많은 말들은 스스로 많은 말거리를 즐겨 만들면서 그 말들을 만들어 내는 이들은 선善을 바라기 때문에 말한다고 하니,
아직까지 교화를 해치는 것의 중대함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속임수를 충효忠孝라 하고,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것을 인의仁義라 하며,
거짓된 행실을 예양禮讓이라 하고,
굽은 것을 가장하여 곧고 반듯하다 할지라도,
공자의 말처럼 비록 하루만이라도 자기의 사욕을 이긴다면
천하가 모두 인仁으로 돌아간다 하니,
하물며 10일이나 반 달 남짓 하면 바라는 것 이상이 될 것입니다.
평소 제가 마음을 열어 말씀드렸다면 틀림없이 이처럼 잘못된 것이 많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이와 같이 번거로움이 많지 않았을 것이므로 저의 부족하고 천박함을 깊이 슬퍼합니다.
당신은 참으로 마땅히 그 어긋남을 충고하고 통달하지 못한 것을 개발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불교가 효孝의 근본을 상하게 한다고 하며,
의의 기초를 해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개탄하는 것만이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제가 말한 일이 폐기할 만한 것이라면 기꺼이 다른 좋은 말을 듣겠습니다.
또 당신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지계持戒를 권장하지 않고 선을 아래부터 자발적으로 행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반드시 이렇게 하여 교화를 넓힌다면,
요임금[放勛]은 사흉四凶이 고쳐지는 것을 기다린 후에야 훌륭한 인격[聖]이 열렸으며,
우虞ㆍ순舜 임금도 상균商均이 어질어지는 것을 기다린 후에 덕이 밝아졌을 것이니,
이와 같이 하여서 미덕을 이루는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이러한 의견은 마땅히 널리 꺾이는 바가 있는 것이니,
곧 마땅히 요堯의 집 입구의 흙 계단이 삼단밖에 안 되었다는 검약함을 힐난하고,
이궁離宮의 화려함을 가상히 여겨야 하고,
우禹가 띠로 지붕을 이은 누추함을 깎아내리고40) 아방궁의 부귀를 숭상해야 하며,
한漢의 급암汲黯41)의 청정한 정치를 한 바른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축타祝陁의 아첨을 명예롭다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 밖의 절의節義나 정신貞信,
겸공謙恭의 덕은 모두 마땅히 길을 바꿔 반대로 해야 할 것이니,
다시 무슨 닦아야 할 행行이 있겠습니까?
말을 들으면 반드시 그 사람의 행을 살피고,
그 행을 보고서 반드시 이치에 맞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만약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행실이 벗어나지 않았다면 다른 길로 나가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또 길은 달라도 돌아가는 곳은 같다는 말도 있으니,
반드시 한편으로만 꽉 막혀 일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사이 또 당신의 의견과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저의 말을 이 편지에 전했으니,
마음이 오로지 한결같지 못한 사람은 마음에 의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므로 국군國君께서 그들에게 널리 알리십시오.
간략하게 제 생각을 말하였습니다만 확실하게 보여 드린 것이 없고,
더욱이 편지로는 번거롭게 되기가 쉬워서 끝내 충분히 뜻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당신을 뵙고 따로 다시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같지 않은 것은 마치 그 용모가 각각인 것과 같으니,
어찌 그 모습을 하나같이 하고,
더욱이 그 지혜를 같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육체[有待]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보면 그것만으로 마음[情靈]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그 뜻을 얻기만 하면 말로써 다할 필요도 없지만은 일단 의견이 등지게 되면 어찌 의론으로 상대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당신을 만났을 때 말로는 아주 자세히 나눴으면서도 그와 같이 일치점에 이르지 못한 것도 진실로 두 사람의 견해가 이미 달랐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그 방식의 차이를 다시 넓히지 않고 유지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 할 수 있으며,
헛되이 시비를 다투어 마음대로 비방하는 의론을 일으킬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마음을 쉬어 신실信實한 세계에 들어가는 일은 지난날의 현인에게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저는 선善을 본받음으로써 즐거움을 삼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교만함을 꺾고 타인을 대하려고 합니다.
만일 당신의 덕이 옛 현인보다 우월하고,
성스러움이 선인先人보다 나으며,
지혜가 많은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지위가 사람의 존귀함에서 극치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면,
저절로 허망한 세상의 밖에서 자적自適하여 당신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교화하고,
당신의 신념을 고상하게 하고,
구함이 없이 스스로 만족하여 물러나 선현先賢을 본받으려 하여도,
아마 당신보다 현격히 뛰어난 사람은 없을 것인데,
헛되이 두 길(불교와 유교)을 걸치고 있어 뛰어난 법(불교)과 달리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도와 거리가 먼 이라고 믿었다면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나뵙고 싶은 생각이 적지 않기 때문에 다시 뵐 것을 마음에 기약할 뿐입니다.
가까운 시일에 만나 따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 보잘것없는 『석체釋滯』 두 권을 지었습니다.
어디에선가 벌써 보셨을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지금 보내드리니 보십시오.
만약 벌써 보셨다면 되돌려 보내시어 당신의 눈을 수고롭게 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만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한 번 두루 유념해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본래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단지 나의 의문이나 막혀 있는 것을 풀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것을 보면 틀림없이 손뼉을 치며 기뻐하리라 생각됩니다.
소자량蕭子良이 소疏를 올립니다.
2) 공치규서孔稚珪書와 답
공치규의 편지
치규稚珪가 말씀드립니다.
저는 일찍부터 공公께서 이끌어 주시는 인덕人德을 받들어 섬기고,
큰 자비로 널리 인도引導하시는 깊은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공公의 은덕과 장려에 이끌려 천명天命으로부터 부여받은 나의 성품性品을 반드시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저의 마음속을 들어내어 보이겠다는 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집안은 대대로 도교를 받들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비워 고요하게 하는 것[冲靜]으로써 마음을 다스리고,
꾸밈없고 겸손하게 하는 것[素退]으로써 행行을 이루었으며,
행적行迹은 온갖 선용善用이 모여 있는 심연深淵을 밟으며,
마음은 지극한 순리順理가 깃들여 있는 집에 살고자 기약해 왔습니다.
저도 선조의 모범을 우러러 받들어 털끝만한 번뇌도 스스로 끊어 버려 근본 마음이 향하는 곳을 아직 잃지 않고 있습니다.
대각(大覺:
佛)의 밝은 가르침과 반야의 바른 근원은 제가 평소부터 숭상해 온 바이며,
처음부터 어기지 않았습니다.
항상 지극한 이치를 추구해 나가면 그 이치의 끝 간 곳에서는 결국 하나로 돌아갑니다.
그것을 지극한 근본에 둔다 해도 근본의 극치에서는 둘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우러러 공公의 교화를 접하고 있습니다.
저를 정승正乘으로 인도하시고 통계通戒로 이끄시어 저로 하여금 6체滯를 단박에 벗어 버리고,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의 5정情을 비로소 밝게 하도록 해 주셨으니,
마음을 돌려 정례頂禮하고,
합장하여 받들어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삼가 공손히 귀의하여 일찍부터 항상 청정하게 신앙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율律이든 가벼운 조條든 평소부터 이미 절반은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 의발(衣鉢:
불교)로 바꾸지 않고 황로(黃老:
도교)를 마음에 두고 있는 이유는,
실은 일문一門의 가업家業이 근본을 두고 있는 곳이라 차마 하루라도 그것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대대로 이어온 근원이 있어 하루아침에 뉘우쳐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불교와 도교가 본이 대체로 같기 때문에 마음을 돌려 불교로 향하는 것을 감히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은 단지 선업先業을 칭송하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집안 대대로의 뜻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어찌 방광(方廣:
대승)의 가르침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1승의 교설을 간절히 마음에 새겨 두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공公에 의지하여 예를 같게 하고 덕을 이끌며,
더하여 반드시 공의 청정한 믿음을 봉송해야 함은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공公께서 『정주자淨住子』의 서문을 지으신 데에 이르러서는 만 문門이 심오한 진리를 밝히고 있고,
억 품品이 현지玄旨를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말은 비록 반대의 뜻을 표현하기를 원했으나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취해 버렸고,
게다가 공의 훌륭하신 지도력의 오묘함이 일단 이와 같은 곳까지 이른 것을 미처 예측하지 못하였습니다.
넓음과 간결함이 서로 뒤섞여서 밝은 빛을 비추어 내고 있어 그만두려고 해도 오히려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등지려고 해도 무엇으로써 따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저는 진실로 영민하지 못하였지만 지금부터는 이러한 말씀을 따라 전념하겠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마음은 단지 일문一門의 규범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며,
인정상 불교와 도교에 대해 감히 구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새삼스럽게 집안일을 살펴보니,
예부터 일찍이 불교와 도교가 서로 같은 뜻임을 알았습니다.
제가 전에 이 일을 장융張融에게 가르쳤는데,
장융은 『통원론通源論』을 쓰고 자신의 이름을 소자少子라 하였습니다.
그 소자가 밝힌 것은 도교와 불교를 회통시킨 것이었습니다.
장융의 이러한 깨달음은 저의 가문家門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저의 가문의 견해가 이미 그러한데 저에게 다시 무슨 걸릴 것이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망설이며 자취에 집착하였으나 지금은 마음에 둘 다 겸하여 공경하여 한쪽에서는 헛되이 황로를 버리지도 않고 다른 한쪽에서는 정각(正覺:
불교)에 귀의하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크게 깨닫는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으며 저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은 모두 공公으로부터일 것입니다.
참으로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편지를 드립니다.
다시 제가 도교가 불교와 다른 점을 연구해 보니,
단지 극점極點을 논함에 있어 미진未盡한 데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도가의 구극究極에 대하여 논한다면 그 궁극이 되는 것이 제천諸天에 있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것이 삼계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멸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정밀함과 거칢,
심원함과 천박함의 차이로서 이 점만을 놓고 본다면 도가는 불교에 비해 수치스러워할 만한 점이 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잘 살펴보면 도가의 가르침은 방편을 세운 것이니,
그것은 마치 공자가 외전外典에서 구극究極은 오직 하늘과 땅뿐이라고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볼 수 있는 경계가 천지의 이의二儀뿐인 데에 기인한 것입니다.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마음을 연유하여 만물을 취하여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바에 따라서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는 지점에 직면해서는 도교도 불교도 다 함께 현묘한 존재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한 탁약槖籥42)도,
유마가 말한 무아無我43)도 그 덕은 천지의 덕에 합치하는 것입니다.
또 역가易家에서 태극太極을 말하고 있는 것44)은 사람이 하늘을 숭상하는 것에 기인하여 다시 극묘極妙한 것을 숭상하도록 하는 것이 구극에 도달하는 지점地點이 있다면 그 깊이는 하늘보다 더할 것입니다.
노자는 또 말하기를,
“일물一物이 있어 혼연混然히 성립하여 천지가 열리기 이전에 생겼다”45)고 하였으니,
벌써 도道가 하늘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하늘로써 도道를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불가佛家의 아라한阿羅漢이 궁극인 제4과第四果를 지시하는 것이지만 『승만경』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유여지도有餘地道임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도가에서 천극天極을 숭배하는 것은 불가佛家에 아라한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단지 아라한에서 머물지 않고,
도교에서도 하늘에서 그치지는 않습니다.
도교에서 도라고 하는 것이 결정코 불도와 근원이 통한다는 것을 비로소 확신합니다.
지금 제 마음이 귀의하는 곳은 바로 공公이 귀의하는 곳과 같은 방향입니다.
도가에서 선善을 지켜 나가라는 것은 본래 불가와 같은 것일 뿐입니다.
양 교[二敎]가 동일한 경우에는 저는 진실로 도교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도교가 다르다면 유순하게 공公의 대승大乘에 따를 것입니다.
부디 오늘날에는 다시 양 교의 같고 다름을 자리매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겸허히 하여 삼가 저의 진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아무쪼록 제가 아직 바꾸지 않은 점을 잘 받아들여 주시고 제가 태어나서부터 도교를 믿어 왔던 점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 스스로도 지금까지의 일을 반성토록 하겠습니다.
조심스럽고 두렵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11월 29일 주민州民 어사중승御史中丞 공치규가 아룁니다.
규가 말씀드립니다.
편지를 받고 자세히 생각하여 보니,
참으로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이치에는 본래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이것저것을 취사하여 논쟁을 일으킨다고 하신 점은 저도 항상 개탄하고 있던 바입니다.
다만 비로소 도를 통한 이에게 있어서는 마땅한 일이겠지만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사람은 아직 그렇게까지 되지 못합니다.
당신이라면 널리 여러 경전을 찾아 읽었기 때문에 이러한 행적에 빠질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찾아뵙고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3) 소공의 답장
당신의 편지는 매우 훌륭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널리 보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33. 도항도표이법사답위진주요략46)권파도서道恒道標二法 師答僞秦主姚略勸罷道書[요주서姚主書 첨부]
1) 요주서姚主書와 항恒ㆍ표標 두 공公
경卿들은 도를 좋아하고 한적함을 몸소 체득하여 법문에 귀의하였으니,
그 청렴결백한 지조는 진실로 칭찬할 만하다.
다만 내가 천하에 군림하여 다스리는 데 있어 반드시 인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제 은둔하고 있는 선비를 산림으로부터 불러내며 파묻힌 인물을 푸줏간 속에서 찾아내기를 바라고 있다.
더구나 경卿들이 두루 독실히 활동하는 모습은 오래전부터 내가 알고 있던 바이다.
모두 각각 시대를 떠맡아 처리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더욱이 홀로 자신을 잘 다스리는 경지를 감추고 있다.
이것은 아마 내가 현인賢人을 구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과 경들이 불교를 크게 홍포하려고 하는 깊은 뜻의 발현일 것이다.
옛사람이 “나라에 명마가 있으면서 타지 않고 이제 막 당황해 하면서 다시 찾아다닌다”47)고 한 말이 있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일 것이다.
지금 상서령尙書令 요현姚顯에게 조칙을 내려 경들의 2승乘의 복심福心을 취해 오고,
경들의 청명淸名한 신통력을 쓴다면 시대를 돕는 일 또한 어찌 크지 않겠는가?
진실로 마음에 불도의 의미를 보존하고 있다면 어찌 흑백(黑白:
재가ㆍ출가)에 얽매일 것이 있겠는가?
이 마음을 잘 알아서 ‘절조를 지킨다’고 하는 말로써 사양하지 말기를 바란다.
2) 진주秦主에게 답함
지난 달 28일에 조칙詔勅을 받았습니다.
상서령尙書令에게 칙령을 내려 도항ㆍ도표 등의 법복을 강제로 벗기라 하셨다는 명을 받고,
너무나 슬프고 두려워 마음이 어지럽고 위를 올려다봐도,
아래를 내려다봐도 부끄럽고 당혹하여 몸 둘 곳이 없습니다.
항恒 등은 진실로 재질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불법에 귀의한 지는 아직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음에 늘 간직해 보존하고 있음이 이미 지중하고 또 불법을 늘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외람되게도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고 과분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깨우쳐 주고 격려해 주신 말씀과 이치는 자세하고 극진하였지만 다만 마음을 편안히 할 곳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법복을 입고 신명身命을 다하리라 서원하였고,
더욱이 어릴 때부터 불법만을 배웠으므로 세간의 일을 익힐 여가가 없었습니다.
그저 특별히 훌륭하게 여겨 등용하신다 하더라도 끝내 별다른 공적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빼어나게 유능하다는 명성은 있어도 시대를 도울 유용함이 없어 털끝만한 도움도 되지 못하여 장차 산과 같은 손실이 생길 것이니,
폐하를 위하여 취하지 않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후한의 광무제光武帝조차도 엄릉嚴陵48)의 은일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버려 두었으며,
위문제魏文帝는 관녕管寧49)의 절조節操를 온전히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지존至尊의 높은 뜻을 누르고 필부匹夫들의 작은 뜻을 이루게 한 것이니,
많은 백성들을 자재自在하게 묵인해 주어 자신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도록 해 주셨던 것입니다.
더구나 폐하께서는 도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겸하여 삼보를 넓히시며,
천하의 불교학자[義學之士]들을 도성에 모아서 신이新異한 경전을 멀고 가까운 곳에 따라 유포하셨습니다.
불법의 흥륭은 여기에서부터 성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비로소 크나큰 교화를 천양하시고 광명을 도와 밝은 빛을 일으켜 비추어 기원정사의 유향遺鄕을 이어 영취산의 여풍餘風을 일으키고 천 년의 모범을 세워 후세의 중생을 위한 나루길을 놓으시면서 항恒 등만은 어찌하여 유독 이 태평한 시대에 우리의 뜻과 바람을 펼 수 없게 하십니까?
부디 우리들의 마음을 밝게 살피시어 특별히 광대하고 통달한 처리를 내려 주시고 아울러 밝은 조칙을 내리시어 우리들의 작은 뜻을 이루게 허락하여 주시면 구천에 가서도 은혜를 잊지 않고 영원히 덕을 기릴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림을 견딜 수 없어 삼가 상주의 말씀을 올립니다.
3) 항과 표 두 공에게 내린 조칙
상주上奏한 것을 보고 뜻을 잘 알았다.
지금 그대들이 뜻을 굽혀야 하는 이유는 시대가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본마음을 미루어 이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여 넓은 도량으로 잘 처리하라.
나의 취지趣旨는 경들이 평소부터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므로 다시 번거롭게 말하지 않겠다.
곧 이 시대의 명을 받들어 이어서 보살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힘쓰면 될 것이다.
4) 두 번째 진주秦主에게 답함
도항 등은 얼마 전 심중心中을 말씀드려 폐하의 밝은 식견에 깨닫게 해 드리는 것이 있기를 바랐습니다만 거듭 내리신 조칙을 받고도 용서를 얻지 못했습니다.
받들어 읽고 보니 슬프고 당혹하여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폐하의 인덕은 천지와 같이 넓어 백성들로 하여금 각자의 본성을 기뻐하도록 해 주십니다.
항 등은 어려서부터 불법의 교화를 익혀 어리석은 마음의 바람은 맹세코 하찮은 목숨을 법복과 더불어 함께 다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분한 은혜를 내려 주시고 급기야 저희들의 부족한 것도 잊으시고 보살의 자타를 겸하게 제도하는 도를 넓히라고 말씀하시나 지력志力에 한계가 있어 실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못 됩니다.
단지 여생을 자신을 구제하는 데 힘쓰기를 바랄 뿐 아니라,
또한 어리석은 마음에 늘 간직해 두고 있는 바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사사로이 생각할 뿐입니다.
제발 오직 한 길을 가려는 성심誠心을 너그럽게 봐 주시고 치우쳐 고집하는 허물을 꾸짖지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로운 성지聖旨를 특별히 내리시어 작은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거듭 조칙을 지연시켜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저희들의 지극한 충정을 견딜 수 없어 삼가 거듭 상주하여 말씀을 올립니다.
5) 항과 표 두 공에게 내린 조칙
거듭하여 상주를 받고 낱낱이 자세하게 모두 잘 헤아렸다.
사정은 앞의 조칙에서 자세히 말한 그대로이니,
오로지 마땅히 마음을 열어서 시대의 명에 따르고 다시 빈번히 거듭하여 번거롭게 함이 없게 하라.
6) 다시 진주秦主에게 답함
도항 등의 어리석은 뜻으로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앞의 상표上表에서 상세하게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의 정성이 작아서 폐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깨닫게 해 드릴 수 없었습니다.
거듭 되돌아온 조칙만을 받았고,
자비로운 관용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위를 올려봐도 아래를 내려다봐도 슬프고 두려워 다시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폐하의 본연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고 사람을 받아들여 백성을 기르는 데 끝이 없습니다.
부디 천지와 같은 은혜를 베푸시어 저희들의 작은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마음에 지키고자 하는 진실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죄 없기를 바라는 것이니,
신하의 신분으로서 조칙을 어겼다는 책망을 받더라도 달게 받아 원망함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귀를 더럽혀 드리고 나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한없는 심정을 견딜 수 없어 삼가 상주하여 말씀 올립니다.
34. 승략50)승천51)구마기바52)삼법사답요주서정항표주僧䂮 僧遷鳩摩耆婆三法師答姚主書停恒標奏[요주서姚主書 첨부]
1) 요주姚主가 구마기바鳩摩耆婆에게 주는 편지
헤어진 지 벌써 수십 일,
돌이키니 그리운 생각이 듭니다.
점점 따뜻해지고 있는 요즘 어떠하십니까?
소로小虜가 멀리서 일을 벌여 놓고서 다시 처리한 것이 없어 단지 마음만 어지러울 뿐입니다.
온갖 일들이 많아져 재사才士를 등용하여 그것을 처리하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일전에 도항 등에게 조칙을 내려 아라한의 옷을 벗어 버리고 보살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만 생각에 망설이고 내켜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는 어디에나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법사께서 그들에게 권장해 나오도록 해 주십시오.
만약에 구도求道의 마음을 버리도록 하려 했다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을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승천僧遷 어른께도 저의 뜻을 전하여 주십시오.
헤어진 후 어떻게 지내십니까?
약통(䂮統:
승략)도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일을 낱낱이 편지로 쓸 수 없습니다.
도항 등이 또한 여러 어른들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 되더라도 그들이 보살행에 이르도록 권해 주십시오.
2) 요주姚主가 승천僧遷 등에게 주는 편지
소疎에서 언급한 것을 살펴보고 낱낱이 상세하게 모두 잘 헤아렸습니다.
짐은 자신만을 선善하게 하는 미덕은 자타를 겸하여 구제하는 공덕만 못하고,
자신만을 지키는 절개는 중생을 구제하는 큰일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자릉子陵은 광무제光武帝에게 굽히지 않았고,
엄군평嚴君平53)은 촉사蜀肆에서 스스로를 높였으며,
주당周黨54)은 한조漢朝의 녹을 사양했고,
두미杜微55)는 제갈공명에게 귀머거리라 말했지만,
이들은 모두 치우치게 절조를 숭상했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어찌 침묵하거나 말을 하거나 하는 요처를 통달하여 높고 훌륭한 뜻을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천하가 아직 다스려지지 않아 백성들은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짐은 덕망은 적지만 오직 그 피폐에 맞서서 여러 인재를 얻어서 함께 훌륭한 정치를 구가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법사들은 비록 불법 문중에 마음을 숨기고는 있으나 또한 동시에 세상을 도와서 가르침을 펴려고 하고 있습니다.
비록 중생들을 이끌어 시세時勢를 교화하고 사람들을 격려하여 정치를 하게 할 수는 없다 하여도 멀리는 세상을 사양하고 은둔한 허유許由를 찬미하고,
가깝게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은거한 사부謝敷56)를 존경하고 있으니,
만일 구하九河가 넘쳐 흘러 사람들이 모두 물고기가 되어 버린다면 법사들이 비록 세상을 돕고 가르침을 펼치려 하여도 또한 어디에다 베풀 수 있겠습니까?
또 도항 등이 불법의 가르침에 귀의한 지 오랜 날이 지났으나 그 재능은 세상의 일을 이루는 데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굽히게 하여 그들의 뜻을 빼앗아 나의 어두운 정치를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만일 선한 행에는 행복의 과보와 같은 명백한 효험이 있고 부처님께서 허황된 말을 하지 않으셨다면 세상을 위급한 병에서 구제하는 공적이나 시대를 구제하여 정치를 안정시키는 공훈은 아마도 복이 여기에 있을 것이며,
저쪽에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가르치고 깨우쳐 시대의 소망에 부응하도록 해 주십시오.
3) 도항道恒ㆍ도표道標의 승僧 파척罷斥에 대해 승략僧䂮ㆍ승천僧遷ㆍ구마기바鳩摩耆婆 등이 중지해 줄 것을 요구하는 상서
들으니,
태상太上은 도로써 백성들을 길러 백성들은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고,
그 다음은 덕 있는 사람에 의하여 천하가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의 현명한 임금은 성품을 거스르면 다스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고,
백성들에게 맡기면 따르게 하기 쉽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임금은 허유許由를 기산箕山에서 은둔하도록 놓아두었고,
능(陵:
文侯)은 간목刊木이 위국魏國에서 세상을 사양하도록 해 주었고,
한漢 고조高祖는 사호四皓57)를 종남산終南山에 은둔하도록 놓아두었고,
숙도(叔度:
黃憲)는 포륜蒱輪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진晉의 대규戴逵58)는 섬현剡縣에서 갈포褐布를 둘렀고,
사부謝敷는 약야산若耶山에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은둔했던 것입니다.
대개 현자의 성품에 맞게 하는 것으로써 현자를 얻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현명한 군주가 있고,
아래로는 위대韋帶를 두른 사람이 있어 은둔해 사는 사람들의 풍토는 오늘날에까지 교훈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도표와 도항 등은 덕이 원만하게 통달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한 길을 가려는 그 본분만은 절조節條를 지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현묘한 가르침을 익히고 불도를 받들어 믿어 오직 한 길을 가려는 그들의 성심誠心은 멍석을 말듯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므로 뜻을 굳게 지킬 것입니다.59) 현묘한 경전을 부연하여 깊고 미묘한 것을 연구하는 데 이르러서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끌어 깨닫게 하여 교화를 돕는 공덕이 충분하니,
중생들로 하여금 죄와 복을 알게 한다면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부처님께서 허황된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면 표標 등은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있어서의 유마維摩의 가르침과 같은 넓힘이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듣자 하니,
오래전에 외람되게도 과분한 조칙을 내려 법복을 벗으라 하였다 하니,
긴 꼬리깃털을 가진 물총새를 겨울의 마른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고,
연꽃을 두터운 얼음 밑에서 비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폐하의 인애仁愛가 장대長大하고 화락和樂하여 세상에 드문 은혜를 관대하게 베푸신 것입니다만,
약䂮 등은 항상 잊지 못하고 은밀히 품고 있는 어리석은 마음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폐하는 도덕의 그물을 펼쳐서 천하를 잡아매고 아홉 개의 덕의 그물을 넓혀서 사해四海를 낚으시려고 현묘한 바람을 천 년의 앞에까지 크게 일으키고,
인의仁義를 만세萬世의 후대까지 펼쳐 넓히셨습니다.
우주 밖에서도 그 순일한 인덕을 느껴 너그럽게 하고,
구주九州 안에도 현묘한 나루를 놓아 마음대로 거닐게 하여 필부에게는 도랑과 골짜기에 버려져 굶어 죽는 원한이 없고,
과부에게는 직물을 멈추어야만 하는 탄식이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교화를 베풀어 주신 까닭이며,
온 나라의 사람들이 우러러 의지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생각하면 도항과 도표가 비록 변변치 못한 작은 인물이라 하여도 자기의 생각을 지킨다는 점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그러나 진실로 폐하의 통치 안에 있는 이들로서 폐하의 도로써 교화시킨 한 신하일 뿐입니다.
옛날 패孛는 12년 간이나 정치를 도왔지만 법의를 벗어 버리고 모습을 세간의 규정에 따랐다고 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진실로 시세에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가사를 입고도 또한 널리 세간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데,
어째서 법의를 벗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승과 속은 그 적성適性을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소보巢父와 허유許由는 절개를 굳게 지켜 요堯와 허유許由가 함께 숭상되었고,
사호四皓라고 하여 천시하지 않아 상하가 함께 이름을 가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고금의 한결같은 법도이며,
백대百代의 하나 같은 풍습입니다.
또 덕德이 관중管仲 정도가 아니라면 당부堂阜의 촌락에다 훌륭한 수레를 대어 두기에 부족했을 것이며,
지혜가 제갈공명 정도가 아니었다면 어찌 유비가 기꺼이 세 번씩이나 초가집을 찾아갔겠습니까?
원컨대 폐하께서는 지금까지의 은혜를 내려놓으시고 도항 등의 작은 뜻을 따라 주시어 윗사람은 과분한 은혜를 내리지 않고,
아랫사람은 그 본분을 잊지 않도록 해 주신다면 요[皇唐]의 교화가 여기에서 재현되고,
허유와 같은 빈객賓客을 오늘날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약䂮 등은 부족하고 평범하여 우직愚直한 말씀을 올리고 나서 돌이켜 보니,
폐하의 위광威光에 저촉될까 대단히 두렵습니다.
승략僧䂮 등이 말씀 올립니다.
35. 여산혜원법사답환현권파도서廬山慧遠法師答桓玄勸罷道 書[환현서桓玄書 첨부]60)
1) 환현서桓玄書
지극한 도는 아득히 멀어서 불교의 이법理法은 유현幽玄하고 심원深遠하다.
어찌 세간의 평범한 사람들이 배워서 구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원래 사문들은 육친六親의 따뜻한 정을 버리고 그 육체를 상하게 하며 맛있는 것을 먹지 않고 갈포褐布를 입고 끈으로 띠를 두르고 산에 살며 돌을 베개 삼아 영구히 세속의 의무를 버리고 백대百代의 긴 세월에 한 번이라도 법열 속에서 부처님의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에 방불髣髴하는 시간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간의 도사(사문)들은 외형으로는 세간 사람들의 몸가짐을 헐어 없애고 있으나 마음속은 명리名利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속인俗人보다 더하다.
그들이 도道니 속俗이니 하고 말하는 것의 정도는 『장자』에서 말한 조趙의 수도인 한단邯鄲에서 걸음걸이를 배우려고 하다가 예전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리고 기어서 고향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61)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옛날의 성인도 “아직 삶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62)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 일생 동안을 먼저 살아 보지도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고 확실치도 않은 저승의 행복을 구하려 하는 것은 모두 좁은 소견所見이며,
또 큰 변화의 이법을 체득하지 못한 것이다.
도道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정신이 들어 돌아올 줄 안다면 바른 도로부터 떨어진 거리도 멀지 않을 것이니,
거듭거듭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천지의 운행은 사람을 멈추어 두지 않아서 어느덧 늙어 버릴 것이니,
다시 되돌릴 수 있겠는가?
부족하나마 지당한 말을 보내니,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2) 원遠 법사 답
대도大道는 아득히 깊어서 그 이법理法은 유현幽玄하고 심원深遠하다는 말씀은,
높은 뜻을 머금고 있어 실로 말씀대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빈도는 출가한 방외方外의 빈객賓客으로서 비록 아직 옛 현인의 덕을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오직 한 길을 가려는 뜻을 취하여 세속의 복식服飾을 치워 버리고 명리를 버리고 실질을 구하고 있습니다.
만일 유명幽冥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이법理法을 궁구窮究하는 것에 있어서는 진실로 속인보다 뒤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충분하지 못한 것 같지만 마음속은 쇠붙이라도 끊을 만큼 굳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이 사문을 무익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외형만을 보고 그 속에 있는 도리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라 하겠습니다.
당신은,
사문을 노끈을 띠로 두르고 돌을 베개로 한다고 말하지만 노끈을 띠로 두르고 돌을 베개로 하는 것은 단순한 은둔자일 뿐이어서 그들은 타인의 눈만을 장식하고 실질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며, 좁은 소견을 가진 사람들로서 부러워할 바가 못 됩니다.
그들은 비록 또한 산림에서 근본 바탕을 기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수목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도는 마음속에 있는데 그들은 몸을 단련하는 것63)으로써 참다운 도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서럽게 목 놓아 울었던 것도 사람들이 옥과 돌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했기 때문입니다.64) 옛날에 그 이름으로만 들었던 변화卞和를 지금 눈앞에서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주莊周는 “사람이 이 천지 사이에 살아 있는 것은 마치 준마駿馬가 벽의 틈새를 언뜻 지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65)라고 하여 인생의 허무함을 슬퍼하고 개탄했던 것이니,
이 말로써 생각해 봐도 누가 늙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장래를 위하여 자량(資量:선근)을 쌓는 일을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당신은 또 한단에서 걸음걸이를 배우던 이가 새로운 걸음걸이는 효능效能이 없고 본래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렸기 때문에 한단에 있던 사람으로 하여금 기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는 것과 또 참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백대百代 안에 한 번의 법열 속에서 부처님의 모습을 보는 시간이 있기를 바란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어찌 함께 뒤섞어 논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빈도貧道는 이미 세속의 일을 떠났지만 이 몸을 임시로 세속에다 두고 있는 것은 이 세속에 있어서 아직 부처님의 교화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교화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군주의 은혜를 입고 오만한 태도를 취하더라도 마음에 의혹이나 번뇌가 생기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한 세대의 영화도 번개와 같이 잠깐입니다.
모이면 흩어지는 것인데 무슨 탐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식견이 얕은 무리들은 이러한 도리에 미혹되어 있는 것이니,
노자가 말한 “근기가 낮은 이는 도道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66)는 것이라 할 만합니다.
이야말로 참으로 도에 미혹하여 올바른 도에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빈도는 몸이 남들보다 뛰어난 것도 아니고 재주가 세상에 응할 만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천한 몸을 훼손시켜 가사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이치理致는 아직 마음을 현화玄化와 명합冥合하게 할 수 없습니다만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은 길이 보존하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본마음을 버리고 당신의 말씀에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빈도는 나이가 들어 시간과 더불어 쇠약해지고 병환이 아직 다 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극진한 병문안을 받고 고마움과 기쁨이 오가고 있습니다.
단월檀越께서는 신심이 깊어서 크나큰 불법을 기탁할 만한 분인데 어찌 조금이라도 불법의 근본을 훼손시키는 일을 하셨습니까?
아마도 저 파순波旬이 저의 뜻을 시험하고 어지럽히려고 하는 말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사가 졸렬하고 학식도 빈약하지만 힘써 높으신 명命에 답했습니다.
뜻에 거슬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36. 승암법사사청주자사유선명거기수재서僧巖法師辭靑州 刺史劉善明擧其秀才書[유선명劉善明의 답 첨부]
빈도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일찍이 세속의 일을 멀리하여 마음을 불교에다 두고 뜻은 공자의 가르침에 등을 돌리고 살아왔습니다.
비록 깨달음의 도량과는 아직 그대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진실로 공자의 가르침과는 아득히 멉니다.
바야흐로 장차 이 몸을 주린 짐승에게 맡기고 9겁劫의 공덕을 넘어서고 몸을 찢어서 새를 먹여 기르고,
67) 마음을 구름을 부려 타는 마부에 두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날개를 밭 가운데 드리워 족적을 농반籠樊으로 돌리고,
진흙 구덩이에서 쾌적함을 버리고 묘당廟堂의 번거로움을 지니겠습니까?
더욱이 저 관리는 기량에 따르고,
벼슬은 반드시 재능에 따르는 것입니다.
외람되이 분에 넘치는 천거를 받고 끝까지 그 영화를 보존할 수 있는 일은 아직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명령을 삼가 돌려보내니 과분한 은혜를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일로써 또다시 편지를 받고 조공曹公이 거듭 탄식한 것이나 왕주王舟가 두 번 부끄럽게 여겼던 것과 같은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보수補秀의 부르심은 제가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석승암釋僧巖이 삼가 올립니다.
1) 답승암도인答僧巖道人
『장자』에는 젊어서 고향을 잃고 돌아갈 길을 잃었다68)는 미혹이 설해져 있고,
불전佛典에는 궁자窮子가 아버지 곁에 돌아갈 줄 몰랐다69)는 어리석음이 설해져 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을 때마다 깊이 개탄합니다.
경건하게 머리털과 피부를 삼가하여 후세의 역사에 이름을 드날리며 우러러 선조의 이름을 드러나게 하는 것도 중대한 일이며,
굽어 가문의 이름을 넓히는 것도 위대한 일입니다.
멀리 성언聖言을 찾아보면 이러한 가르침이 가장 잘 되어 있으나 가까이 몸에서 취해 보면 실로 감정이나 도리로나 미혹되어 있습니다.
구담瞿曇도 이것을 보신다면 마땅히 마음에 거슬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더구나 당신의 변재辯才는 아주 미세한 것까지도 논파하고,
지식은 고금을 통찰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관면冠冕을 찢어도 의심하지 않고 근본을 뽑아 버려도 깨닫지 못한다면 저승의 사람들도 놀라고 원근에 있는 사람들도 놀랄 것입니다.
옛날 여상呂尙은 80세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으나 낚시에 뜻을 둔 것은 시절을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70) 당신은 아직 침륜沈淪하는 곳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니,
당신다운 미덕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저는 과분하게도 고향에 임관되었기 때문에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 천자에게 보내어 반드시 훌륭한 재능을 다하게 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통하지 알았던 것을 통하게 하고,
아직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이를 굽히게 하려는 것입니다.
편지에 쓰인 여러 가지 일과 같은 것은 참다운 말과 어긋나 있습니다.
진실로 허황된 말을 했다면 어찌 제가 기대하는 바이겠습니까?
옛날 왕상王祥71)은 진실로 임기臨沂에서 땔나무를 베다가 60세가 되어 비로소 주州의 명에 응하였으며,
공손홍公孫弘72)은 바닷가에서 돼지를 치고 있다가 백발이 되어 비로소 향거鄕擧에 응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지위가 재상에까지 이를 수 있어 하루아침에 천지를 변화시켰으니,
그 도는 당대에 널리 펼쳐졌고,
그 명성은 만 년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공경하여 진심을 말씀드리는 것이니,
생각을 다시 한 번 헤아려 주십시오.
유군이 답변을 드립니다.
2) 승암 중답重答
과분한 답신을 받아 보고 훌륭한 취지를 이해했습니다.
장자를 증거로 하고 불전을 인용한 당신의 이론적인 근거는 명백합니다.
단지 저는 장자나 불전의 뜻에 따르고 심정을 말하려고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비록 높은 뜻은 형상으로 그려내지고 미묘한 말은 마음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저의 어리석은 생각에 고수하고 있는 것도 혹 알아주실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타인을 알아주는 것은 철哲이라 하며,
자신을 살피는 것은 명明이라 하는데,
자기의 분한分限을 잊고 벼슬을 탐하는 것은 참으로 편치 않은 처신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위직威直은 명命에 응하였으나 마침내 명예를 훼손하는 부끄러움만 얻었고,
준조遵祖는 그 재능이 등용되었지만 결국에는 양곡揚鵠의 수치만을 불러들였습니다.
만일 제가 분수를 잊고 그들을 본받고자 하여 왕상王祥이나 여상呂尙의 뒤를 쫓는다면 아마도 잉어가 아가미를 위로 솟구쳐 용문龍門에 오르려다가 이마만 다치고 떨어지게 되는 것과 같은 일이 거의 대부분일 것입니다.
도둑질한 물건을 훔치면 도둑과 죄가 같고,
사람을 천거할 때에 재능이 없는 사람을 천거하면 천거한 사람과 천거된 사람이 다 함께 천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니 삼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또 예禮라고 하지만 옥백玉帛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듯73) 효孝라 하지만 어찌 피부만을 보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살을 베었어도 전대前代에 비방하는 이가 없고,
단발을 하였어도 선대先代에 받아들여진 이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손을 잘라서 몸을 온전히 가진다면 보존하는 것이 큰 것이 되니,
어찌 괴이한 일이라 하겠습니까?
부디 이 어리석은 고집을 관대하게 대해서 비천한 생각을 이루도록 하여 주십시오.
석승암이 삼가 올립니다.
3) 석승암정釋僧巖呈
거듭 보내 온 편지를 받고 비로소 깊은 뜻을 알았습니다.
당신의 확실한 깨우침이야말로 마음이 통해서 서로 바라보고 웃을 수 있는 친구라고 할 만합니다.
당신의 식견은 많은 가르침을 두루 살필 만하고 지혜는 도리의 깊은 밑바닥까지 모두 꿰뚫을 수 있을 만하여서 매번 감응의 근원을 살펴 돌을 가려내듯 언설言說을 끝까지 찾아내니,
어찌 일찍이 구절구절마다 표적을 척파하여 의종義宗을 두루 통찰하지 못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진실로 자신의 빛을 낮춘다면 어진 이를 대우하기 위해 자리를 비껴 앉는다는 뜻과 어긋나게 되고,
뒤집힌 수레의 뒤를 쫓아 자기의 수레가 부서져도 후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고 이것을 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나라를 떠난 지 3년이 되면 가족과 닮은 사람만 보아도 즐거워하는 법입니다.74) 고향을 떠나 떠돈 지 오랜 세월이 흐르면 어찌 마음이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제 부디 출가라고 하는 무거운 짐을 벗어 버려 세속에 편히 앉고 여로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형제의 그리움을 만나게 되고 친족과의 교류를 돈독하게 하여 가문이 모두 크게 기뻐하고 참으로 즐겁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 문명 세상에서 주공과 소공召公이 정치에 협력하여 현자를 생각하고 도를 찬양하느라 해가 져도 저녁 끼니를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당신의 재능으로써 당신의 덕을 넓히고 옥띠를 두르고 조정에 소리가 울리게 하고 비단옷을 입고 덕을 멀리까지 떨치면 세간에서 계획하는 일에 공훈을 세우고 사후까지도 명성을 드날리게 될 것입니다.
머리를 깎음으로써 받는 치욕이나 홀로 살아야 되는 고통 따위와 어찌 때를 같이하여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은 서로 굳게 맹세하여 오랫동안 깊은 뜻을 단련할 것을 다짐해 왔습니다.
만일 전금展禽과 같은 어진 이를 추전하지 않고 숨겨 두면 아마도 저는 장문중臧文仲의 불충과 같은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75) 그러므로 애써서 이 일을 마음에 새겨 거듭 편지를 드립니다.
몸은 만년이 되고 때는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뒤늦은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노력하여 주십시오.
유군劉君이 답변 드립니다.
4) 승암 중서重書
전일의 일은 한담으로 여겼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차례에 걸쳐 과분한 뜻과 훌륭한 말씀이 담긴 편지를 받고 애써 일깨워 주려는 후덕한 마음이 참으로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삼가 읽기를 끝내기 전부터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변변하지 못한 저의 뜻에 대해서는 구구하게 이미 앞의 편지에서도 썼으며,
또 제가 젊었을 때조차도 남들보다 뒤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늙었으니,
어찌 쓸모 있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노령에 이른 사람이 지휘하여 일을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창령蒼靈의 특별한 도움으로부터 수인首人의 공을 빌려 영웅이 흥기하는 것을 도와서 왕통을 바꾸려는 임금을 보좌하는 일일 것입니다.
지금 동묘東畝의 농부나 서원西園의 야인野人을 거느리고서 그 그림자를 전대前代의 광영 옆에 놓고,
그 자취를 옛날 사람들의 대열에 끼게 하려는 것은 아둔한 말의 다리에 매질을 하여 화류驊騮76)와 같게 하고,
들꿩을 잡아다가 백조나 봉황과 쌍벽을 이루게 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들이 같은 무리가 아닌 것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옛날 자태子泰는 유우(劉虞:
曹操)의 명에 복종하여 공손찬公孫瓚에게 절개를 지켰고,
예양豫讓은 자기를 깊이 알아주는 이를 위하여 보복을 하고77) 목숨을 잃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과분한 칭찬과 덕은 두 현자와 같게 하신 것이지만 다만 한스럽게도 나이는 이미 엄자산崦嵫山보다 더 많고,
수명은 큰 물진 물가의 강물보다 급히 흘러가 있습니다.
재를 삼키거나 창을 거꾸로 하는 것과 같은 일 등은 제가 바라는 바와 거리가 멉니다.
편지를 쓰는 데 이르러 측은하고 슬퍼 분별없이 말씀드렸습니다.
제발 과분한 은혜를 거두어 주시고 다시 답장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석승암이 올립니다.
5) 번복석승암정飜覆釋僧巖呈
당신이 천지에 대해 말하면 깊은 마음은 거울과 같고,
붓을 들고 서한書翰을 쓰면 지혜의 활동은 심오합니다.
그러나 어려서 도리의 근원을 잃고 헤매다가 백발이 되었으니,
당신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항상 탄식하였습니다.
당신은 비록 마음은 구름 위에 있다고 하지만 몸은 지하에 있어 이미 황작黃雀과 더불어 무리를 짓고 있으니,
아마도 봉황의 아름다움은 잃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활과 비단을 갖추어 부르는 의례에 따라 다시 주종의 사이가 되는 천거에 응하도록 하려 했던 것입니다.
편지를 세 번이나 받고 저도 두 번 답하였습니다.
진실로 자신을 낮추어 노령을 핑계로 한사코 사양하였어도 당신의 덕은 참으로 형통하며 대길할 것입니다.
또 뜻을 굽힐 수 없다면 바로 마땅히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나무를 택하여 오동나무에 앉고 대나무 열매를 먹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비천한 명령과 가벼운 소명召命에 어찌 내려올 필요가 있겠습니까?
삼가 청풍淸風을 헤아려 숭상하는 바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본래부터 의도하는 것이 이미 어긋나 있었으니,
다만 역시 슬플 뿐입니다.
유군이 답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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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상지의 사적은 『송서宋書』 66,
『남사南史』 30에 나온다.
이 글을 쓸 무렵의 벼슬은 시중侍中ㆍ태자중서太子中庶였고,
후에 단양윤丹陽尹ㆍ상서령尙書令 등을 역임하였다.
혜엄慧巖ㆍ혜관慧觀ㆍ담무성曇無成ㆍ혜정慧靜ㆍ법원法瑗ㆍ지도志道 등과 교섭이 있었다.
2)
유송劉宋의 문제는 무제의 셋째 아들이고,
재위는 30년에 이른다.
강남의 불교는 이때 크게 번영하였다.
3)
진군秦郡 진현秦縣 사람으로 성은 유劉씨이며,
야성사冶城寺에 머물렀다.
도연道淵의 제자라고 한다.
제경諸經ㆍ노장老莊에 통하였고,
문집 10권이 있다.
송宋의 문제에게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4)
『논어』 「위령공衛靈公」.
5)
주나라의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의 뒤를 이어서 정치가 잘된 시대 40여 년을 말한다.
6)
한의 고조高祖ㆍ혜제惠帝의 뒤를 이어 문제文帝ㆍ경제景帝 부자가 훌륭한 군주로 칭송되었다.
7)
아雅는 정악正樂의 노래,
송頌은 주로 선조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이다.
8)
『춘추』 「희공僖公」 15년.
전展씨에게 다른 사람이 모르는 악업이 있는데,
신이 경계하여 그 선조 백이伯夷의 사당을 진동하게 했다고 한다.
9)
신하인 대부 두백杜伯을 무고하게 죽였다.
10)
『좌전』 「성공成公」 10년 5월조 참조.
11)
『노자』 25장에 도道ㆍ천天ㆍ지地ㆍ왕王,
이 네 가지가 큼을 말하고 있다.
12)
주州의 장관長官인 자사刺使와 군群의 장관인 태수에 대한 존칭이다.
이묘李淼는 교주交州의 자사刺使였다.
13)
『장자』 「천지天地」.
황제가 적수赤水 북쪽에서 유람하고 곤륜산에 올랐다가 현주玄珠를 잃어버리자,
지知ㆍ이주離朱ㆍ끽후喫詬를 보내어 찾게 했으나 결국은 무심한 경지의 망상罔象이 찾았다는 내용이다.
지知ㆍ명明ㆍ변辯 등의 재능은 부정되고,
무심無心의 경지를 예찬한 것이다.
14)
『유마힐소설경』 「불국품」.
15)
『미륵하생성불경』에서 시두말성은 화씨성華氏城에 있는 아육왕과 관계가 있는 정사의 이름인데,
이곳에서 용화삼회의 설법이 행하여졌다고 한다.
16)
『법화경』 5 「여래수량품」.
17)
미륵이 하생할 때의 이상적인 왕.
18)
『태자서응본기경』 상권.
19)
『법화경』 「화성유품」에 대통지승여래大通智勝如來께서 시방의 제범천과 열여섯 왕자의 청을 받아 십이행법륜十二行法輪을 세 번 굴리셨다고 한다.
20)
『노자』 제5장.
제사 때의 장식물로 쓰는 것으로서 쓰고 나면 버려지는 것이다.
21)
『장자』 「소요유逍遙遊」.
22)
『논어』 「술이述而」.
23)
『주역』 「계사」 하.
24)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이 죄다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는 뜻으로 재기才氣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25)
『장자』 「외물外物」.
26)
『유마경』 「불국품」.
27)
『장자』 「양생주」.
28)
선서善逝는 여래십호如來十號 중의 하나로서 범어 sugata의 한역이다.
29)
『논어』 「위령공衛靈公」.
30)
『논어』 「안연顔淵」.
31)
유위불維衛佛은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제일불第一佛이며,
엄공嚴公은 『고승전高僧傳』 7권에 전기傳記가 있는 혜엄慧巖으로 보인다.
32)
『양고승전』 4권 「우법란전于法蘭傳」.
33)
『양고승전』 1권 「축법호전」.
34)
자는 운영雲英이고,
호는 정주자淨住子이다.
남제南齊 무왕(440~493)의 둘째 아들이다.
35)
『맹자』에 이와 동일한 구절은 없다.
다만 「양혜왕梁惠王」 상에 소용小勇을 언급한 것이 있을 뿐이다.
36)
『유마경』에는 이 구절은 없고,
다만 「견아촉불국품見阿閦佛國品」에 ‘일체무득무실一切無得無失’이 있어 이에 의거해 본문의 ‘소小’와 ‘실失’을 바꾸어 ‘부득불실不得不失’로 해석하였다.
또 ‘소존기대小存其大’는 「부사의품不思議品」의 ‘수미산이 겨자씨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았다.
37)
『좌전』 「민공閔公」 원년.
38)
『사기』 83권 「추양전鄒陽傳」.
39)
부의父義ㆍ모자母慈ㆍ형우兄友ㆍ제공弟共ㆍ자효子孝 또는 부자유친父子有親ㆍ군신유의君臣有義ㆍ부부유별夫婦有別ㆍ장유유서長幼有序ㆍ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한다.
40)
『사기』 130권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참조.
‘띠로 지붕을 이은 누추함[茅茨之陋]’은 『사기』 3권 「하본기夏本紀」에 나온다.
우禹의 모자茅茨에 대한 것은 여기에 없다.
41)
무제武帝를 섬겼다.
42)
『노자』 5장 참조.
43)
『유마경』 「문질품問疾品」.
44)
『주역』 「계사繫辭」 상.
45)
『노자』 25장.
46)
『진서晉書』 117권 「요흥재기姚興載記」,
자字는 자략子略이고,
장萇의 장자長子
47)
『초사楚辭』 「구변九辯」.
48)
자는 자릉子陵이며,
광무제와 동학同學이다.
광무제가 왕위에 즉위한 뒤 불러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서 농사를 지었다.
49)
위나라 문제文帝 때 독행獨行의 군자로서 거론되었으나 고사하여 받지 않았다.
그 덕행은 짝할 이가 없다고 칭송되었다.
50)
『고승전』 6권,
성은 부씨傅氏로 장안대사長安大寺에 들어가 홍각弘覺의 제자가 된다.
후에 나집에게 사사하였고,
요흥姚興 밑에서 국내승정國內僧正이 되었고,
사문통沙門統의 직분에 있었기 때문에 약통䂮統이라 불리게 되었다.
51)
구마라집에게 사사하고 후에 열중悅衆이 되고 후급厚給이 있었다고 「승략전僧䂮傳」에 전한다.
52)
구마라기바鳩摩羅耆婆의 준말로 구마라집鳩摩羅什을 말한다.
53)
촉나라 사람으로 성도成都에서 점치는 것을 업으로 하였으며,
양웅揚雄이 이것을 배웠다.
90여 세에 죽었다.
54)
태원太原 사람으로 건무建武 연간에 부름을 받고 의랑議郞이 되었으나 병으로 직책을 떠나 처자를 거느리고 승지澠池에서 살았다.
후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녹을 받지 않았다.
55)
유비가 촉을 평정했을 때 항상 귀머거리라 하고,
문을 닫고 출사하지 않았다.
56)
자는 경서慶緖.
회계會稽 사람으로 성품이 청정하고 욕심이 적은 사람이었으며,
태평산太平山에 들어가 10여 년에 이른다.
그 후 어머니가 늙었으므로 남약야산南若耶山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57)
진말秦末의 동원공東園公ㆍ각리선생角理先生ㆍ기전리綺田里ㆍ하황공夏黃公의 네 노인을 말하며,
상산사호商山四皓라고 한다.
58)
자字는 안도安道.
무릉왕희武陵王晞가 그가 거문고를 잘 연주한다는 것을 듣고 사람을 보냈으나 “재안도載安道는 왕문王門의 영인伶人답지 않다”고 하고,
거문고를 부수고,
후에 섬현剡縣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고사故事.
59)
『시경』 「패풍邶風」.
60)
환현(369~403)은 원흥元興 원년(402) 정월에 사마원현司馬元顯을 치기 위하여 강릉江陵을 출발하고 고숙姑孰에 이르렀고,
그 해 3월에는 건강建康에 들어가 정권을 장악하고 태위太尉가 되어 찬탈의 야망을 실현하였다.
혜원에게 환속을 권한 것은 정치 고문으로서 그의 명망을 이용하기 위해서라 생각된다.
환현은 다음해 12월 제위를 찬탈했다가 궐기한 의병들에게 패하여 참수당했다.
그때 그는 36세였고,
혜원은 71세였다.
61)
『장자』 「추수秋水」.
62)
『논어』 「선진先進」.
63)
신선술의 일종으로 호흡조정법이나 선약仙藥 등을 사용하여 육체를 불로장생不老長生케 하는 것을 말한다.
64)
『한비자韓非子』 「화씨편和氏篇」.
65)
『장자』 「지북유知北遊」.
66)
『노자』 41장.
67)
『대지도론』 4.
68)
『장자』 「제물론齊物論」.
69)
『법화경』 「신해품」.
70)
『사기』 32,
태공망太公望 여상의 고사.
71)
『진서』 33권.
72)
『한서』 28 「공손홍전」.
73)
『논어』 「양화陽貨」.
74)
『장자』 「서무귀徐無鬼」에 나오는 말.
75)
『논어』 「위령공衛靈公」.
76)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주나라 목왕穆王의 여덟 명마 가운데 하나.
77)
『사기』 「자객열전刺客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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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집』 ♣1080-011♧
Monique Leyrac - Rythmes Du Soir
◎◎[개별논의] ♥ ❋본문
●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
『홍명집』에서는 중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는 과거 인도나 중국이나 오늘날 이곳이나 그 사정이 유사하다.
일반적인 상식적 입장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배경 사정이 있다.
우선 일반적 입장에서는
현실의 한 단면을 놓고도 그 올바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이미 이전 글에서도 그런 사정을 밝혔다.
즉 자신이 눈을 떠서 사과나 꽃을 바라본다고 하자.
이 경우 그에게 사과나 꽃이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이 경우 그는 손으로 일정 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이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손으로 가리킨 그 부분이 그런 사과나 꽃이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그런 부분을 사과나 꽃이라고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 한 단면의 내용 조차 일반적으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더욱이 그런 현실 내용을 얻게 하는 본 바탕 실재의 사정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기본적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앞처럼 현실을 대한다.
이것이 현실에서 망상분별에 바탕해 상을 취해 임하는 현상이다.
그런 가운데 다시 그는 이런 바탕에서도
다시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현실을 관찰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 좋고 나쁜가에 대해서도 또 다시 잘못된 분별을 일으킨다.
더 나아가 무엇이 다수에게 오래 여러 측면에서 좋은가에 대해서도 역시 잘못 판단한다.
그래서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에 대해서도 역시 잘못 판단하다.
그리고 다시 어떤 좋은 상태를 성취해내는 방안에 대해서도 역시 잘못된 판단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자신이 좋은 상태를 얻는 방안을 잘못 취한다.
더 나아가 때로는 그런 노력 자체 제대로 행하지 못한다.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가 극심한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받아나가는 사정이 이것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이런 잘못된 망상분별을 모두 잘 제거해야 한다.
반대로 말하면 현실과 자기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이 내용은 경전을 살필 때마다 반복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이해가 역시 쉽지 않다. 그래서 일반적 입장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차이가 대단히 크다.
그래서 이런 문제는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 어느 경우나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굳이 중국에서만 이런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 조선에서도 정도전과 같은 이도 그런 사례의 하나다.
역시 같은 문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직접 확인하기 힘든 시공간대의 문제를 놓고 논의할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과거 2565 년전에 부처님이 어떤 모습으로 계셨는가.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행한다고 하자.
그리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여러 하늘이나 지옥 아귀 세계가
정말 있는가 없는가 이런 논의를 행한다고 하자.
이런 주제는 일반인 입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확인할 길이 없다.
그것이 일반인의 입장이다.
그래서 논의를 한다해도 서로간에 결론을 얻어내기 힘들다.
이는 장님과 함께 앞에 놓인 그림의 색상을 논의하는 상황과 같다.
아무리 말을 해도 장님이 그 내용을 얻어내기 힘들다.
이런 경우에는 일반적 입장에서
모두 이 순간 이 공간에서 곧바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부터
올바로 그 정체를 파악하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
앞에서 이미 이를 살폈다.
이제 반대로 문제를 제기해보자.
일정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킨다고 하자.
그리고 그 부분이 무엇인가를 묻는다고 하자.
그것은 평소 꽃이나 사과 바위라고 여기고 대한 부분일 수 있다.
또는 그것은 평소 자신의 몸이라고 여긴 부분일 수 있다.
이런 각 경우에 그 부분이 과연 그런 내용인가를 놓고 먼저 살펴야 한다.
사실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래서 기본적인 망집을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상태에서는 다음을 차선책으로 찾아야 한다.
즉, 그런 망집을 전제로
생사고통을 받지 않도록 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 경우는 일반적인 입장에서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인과를 관찰하는 잘못부터 시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힘들게 된다.
이는 비유하면,
농부가 씨를 뿌려 가을에 열매를 얻는 관계를 관하는 문제와 같다.
이 문제를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는 내용 조차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씨를 뿌리고 그 다음날 확인해본다고 하자.
그래도 여전히 열매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다음날도 마찬가지다.
그런 상태에서는 농부가 아무리 이렇게 씨를 뿌리면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는 내용을
제시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씨를 뿌려도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이 옳은 것처럼 잘못 여기게 된다.
또 이는 정작 열매가 나타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반대로 그 열매가 무엇으로 인해 나타난 것인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곧바로 소나 닭, 개, 양의 상태로 떨어진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반적인 상태는 이런 비유의 상태와 같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당장 시공간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잘못된 판단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의 해결이 사실은 시급하다.
예를 들어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가운데
무엇을 자신이라고 여기는가를 질문한다고 하자.
그러면 대부분 일정부분을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며 가리키게 된다.
그런데 자신이 현실에서 눈으로 보고 얻는 내용은 눈만 감아도 얻지 못한다.
그 상황에서는 앞 순간에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가리킨 부분이 하나도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 상황에 자신이 없어졌다고 여기는 이는 또 없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면 처음 눈을 뜬 순간에 자신이라고 여긴 내용은 잘못임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 이 두 순간에 함께 있는 내용을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가장 간단한 이런 문제도 일반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삶에서 좋은 것을 집착하고 추구해 나간다.
이런 경우는 현실에서도 우매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해 나가게 된다.
그런데 생사를 겪는 과정 전후에도 이런 문제가 있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어떤 이는 자신의 전생을 알지 못한다.
또 후생에 겪게 될 내용도 알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받아나간다.
처음 한 순간 정지된 단면에서 그 현실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매 순간 망상분별에 바탕해 집착을 일으키고 업을 행해 나가게 된다.
비유하면 마치 소나 닭, 개, 양과 같은 어리석은 잘못된 판단에 바탕해서 업을 행해나가게 된다.
이 어리석음이 일으키는 폐해가 극심하다.
그것이 한마디로 생사고통이다.
그러면 그런 상태로 무량겁 동안 생사를 겪는 과정에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그런데 생사고통을 받기 전에는 자신의 업이 자신에게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열심히 업을 행한다.
한편, 그런 결과가 나타나 이제 생사고통을 당장 당장 받는 상태에 처한다고 하자.
그러면 다시 그런 고통을 무엇 때문에 받게 된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매순간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헤매 다니게 된다.
따라서 이 생사고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기본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경우에는 일단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 실천하는 기본 자세만이라도 갖춰야 한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어리석음에 바탕해 망상분별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이것마저도 쉽지 않다.
어리석음과 망상분별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되지 않기에 부처님이 제시한 가르침을 실천할 수도 없다.
그래서 결국 생사를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받아나게 된다.
이는 생사현실에 처한 중생들의 안타까운 측면이다.
이미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반복해 살폈다.
그래도 또 매번 이 문제를 대하게 된다.
부처님의 정체를 문제삼는 경우가 현실에서 많다.
과연 그런 분이 정말 있었는가 조차도 문제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경전에서 제시되는 극락이나 아미타불이 정말 그렇게 있는가.
그리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생사윤회나 해탈 이런 내용이 옳은가도 문제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 이전에 다음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급하다.
예를 들어
당장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는 부분을 붙잡고
자신의 본 정체가 무언가부터 확인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먼 시간대를 거슬러 가 살필 문제도 아니다.
그리고 가기 힘든 먼 공간대로 가서 확인할 문제도 아니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경우는
이런 문제에서부터 대단히 엉뚱하게 잘못된 판단을 행하고 임한다.
그리고 현실 대부분의 상황이 이와 같다.
그래서 이 문제의 해결이 급하다.
그리고 이 문제가 매번 반복된다.
그래서 중복 서술을 피해 현재 다음 페이지에서 이들 문제를 정리 중이다.
아직 정리중이기애 다음처럼 임시로 링크를 붙이고 생략하기로 한다.
★★★
『관소연론』-- 현실에서 일으키는 분별이 잘못된 망상분별인 사정
★★★
Frank Alamo - Da Doo Ron Ron
◆vian1316
◈Lab value 불기2565/04/25 |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John Singer Sargent-sir-david-richmond [#M_▶더보기|◀접기| Artist: John Singer Sargent https://en.wikipedia.org/wiki/John_Singer_Sargent Title : sir-david-richmond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_M#] ○ 2020_0525_170242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ran_Palacio,_Bangkok,_Tailandia,_2013-08-22,_DD_24 [#M_▶더보기|◀접기| English: Grand Palace, Bangkok, Thailand Author Diego Delso (1974–)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_M#] ♥Trintelen ,Netherlands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상세정보=> https://buddhism007.tistory.com/4536 Serge Gainsbourg - Toi Mourir Feat. Lone Ranger In Rub A Dub International ♥단상♥ 눈의 질병 글을 작성하는 가운데 모니터가 잘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단순히 안경 돗수가 맞지 않아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안경을 새로 맞추었다. 그런데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다. 안경점에서 안경 돗수를 맞추다가 안경 돗수 교정으로 보이게 하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병원에 한번 가서 진찰을 받아보라는 말을 들었다. 안경을 바꿨는데도 일부는 잘 보인다. 그런데 여전히 일부가 잘 안 보인다. 그런 사실을 어제 알게 되었다. 걱정이 밀려 온다. 현재 숙왕화님도 병에 걸려 상태가 안 좋다. 그런데 본인 상태가 더 심하다. 나이가 들어가니 온갖 질병이 현실화되었다. 그런데 일부 사이트에서는 글도 잘 안 올려진다. 수정도 하기 힘들다. 설상 가상의 상태다. 이것을 좋게 바꾸는 방안이 있다. 설상 가상의 본 정체를 잘 관하는 것이 그 방안이다. 즉 현실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생사나 생멸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것이 모든 병의 근원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설령 그런 병을 고쳐도 생사고통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정을 올바로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설령 그 병을 고치지 못해도 온갖 문제가 해결된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제시하는 내용이다. 즉 도일체고액, 능제일체고의 상태에 기본적으로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상태를 향해 다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눈병이나 온갖 세상문제를 해결한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즐겁게 잘 해결해 나가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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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ler-jpn-Eng] 貪光 トンコウ light of greed
[Glossary_of_Buddhism-Eng] TWENTYEIGHT INDIAN PATRIARCHS☞
See also: Aryasimha; Patriarchal Zen; Zen School.
“According to the Zen sect, men who inherited and passed on
that teaching of Shakyamuni which was not expounded in words
but transmitted from mind to mind. They are (1) Mahakashyapa,
(2) Ananda, (3) Shanavasa, (4) Upagupta, (5) Dhritaka (6) Mikkaka,
【book-page-810 811】
(7) Vasumitra, (8) Buddhananda, (9) Buddhamitra, (10) Parshva,
(11) Punyayashas, (12) Ashvaghosha, (13) Kapimala, (14) Nagarjuna,
(15) Aryadeva, (16) Rahulata, (17) Samghanandi, (18) Samgayashas,
(19) Kumarata, (20) Jayata, (21) Vasubandhu, (22) Manorhita,
(23) Haklena, (24) Aryasimha, (25) Vasiasita, (26) Punyamitra,
(27) Prajnatara and (28) Bodhidharma, founder of the Chinese Ch’an
( Jpn. /Zen) school.”
Sokk: 487
For names of Chinese Patriarchs after Bodhidharma, see “Zen
School.” #0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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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여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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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된 귀신이 장애를 놓아
고통스럽고 참기 어려울 때
지성으로 대비주를 소리내 외우면
귀신은 물러나
흩어지고 편안히 낳게 되리라.
● 아라삼불라사리 阿囉嘇佛囉舍利<三十八> a rṣaṃ pra ca li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8
소미모가다 바라 아나
蘇尾目訖哆<二合>鉢囉<二合>惹拏<八二合>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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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일째]
종종수량불가설 $ 116▲無邊轉無邊轉為 一 ● 無等, ○□□□□,如,種,於,種
□□□□□□□, 如其一切悉了知;
種種形量不可說, 於此靡不皆通達。
□□□□□□□, 여기일체실료지;
종종형량불가설, 어차미불개통달。
가지가지 수효를 말 못하는데
그와 같은 모든 것 모두 다 알고
가지가지 형체도 말 못하는데
이런 것 통달하지 못함이 없네.
[115째]
성취십력불가설 $ 115▲無邊無邊為 一 ● 無邊轉, ○□□□□,覺,入,獲,種
□□□□□□□, 覺悟菩提不可說,
入淨法界不可說, 獲深智藏不可說。
□□□□□□□, 각오보리불가설,
입정법계불가설, 획심지장불가설。
열 가지 힘 이룸을 말할 수 없고
보리를 깨달음도 말할 수 없고
청정 법계 들어감을 말할 수 없고
깊은 지혜 얻는 일 말할 수 없고
●K0351_T1139.txt★ ∴≪A호명법문신주경≫_≪K0351≫_≪T1139≫
●K1080_T2102.txt★ ∴≪A홍명집≫_≪K1080≫_≪T2102≫
●K1509_Txxxx.txt★ ∴≪A화엄경삼보장원통기≫_≪K1509≫_≪Txxxx≫
법수_암기방안
116 [암핏 armpit] 겨드랑이
115 (shoulder) 어깨
38 정강이[Shin]
8 큰 창자,【대장】
248992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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