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무릇 범부ㆍ성인의 도(道)는 동일한 법신(法身)이라 그것과 이것이 모두 없어지고 중생과 내가 다 함께 끊어지면 마음 안에서도 얻을 것이 없고 몸 밖에서도 다른 것이 없거늘, 어떻게 하여 응화(應化)의 몸을 일으켜서 교화에 편의한 중생을 거두는 것인가.◂
【답】다만 중생을 위해서일 뿐이다. 자기나 다른 이나 마음일 뿐인 줄 모르고 멋대로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고 내기 때문이니, 만일 스스로 진공(眞空)임을 통달했다면 모든 부처님들께서도 끝내 세상에 출현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보살 역시 공부함도 없었으리라.
" style="display: no■ne;">
▸ 【문】고덕(古德)이 물었다. “만일 자기와 다른 이 모두가 자기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요 마음을 여의면 실로 ≺나≻[我]나 남[人]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부처님 또한 중생이 있음을 보시거늘 어찌 아직 허망한 마음이 다하지 못해서라 할 것인가.◂
【답】“모든 부처님께서 중생이 있음을 보시나 " style="display: no■ne;">이것은 모두 인연으로 생기는 환유(幻有)인데, 그것을 모르고서 실로 ≺나≻가 있다고 여긴다.
" style="display: no■ne;">그런 까닭에 업을 지어 과보를 받으면서 억울하게 윤회를 하고 있는 것이니, 이것은 실로 ≺나≻가 없는데도 모든 부처님의 자비를 느끼기★★ 때문이다.
" style="display: no■ne;">만일 실로 ≺나≻가 있어 이것이 허망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모든 부처님들께서 무엇 때문에 망녕되이 중생을 구제하시겠는가. ≺나≻가 참으로 있다 한다면 구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구제하시게 되는 것은 " style="display: no■ne;">결정코 ≺나≻가 없음을 아심에서인데, 망녕되이 있다고 헤아리고 있구나”고 했다.
" style="display: no■ne;">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 style="display: no■ne;">중생은 부처의 과위[佛果]를 여의지 않았는데, 미혹되어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있다.
" style="display: no■ne;">
" style="display: no■ne;">화엄경(華嚴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부처 몸은 변화가 아니며 또한 다시 변화가 아닌 것도 아니니 변화가 없는 법 가운데서 변화가 있는 형상을 보이시네.
옛 해석에서 이르되, “이는 곧 참된 몸에 의지해서 변화된 몸을 일으키나니, 진실과 변화에는 각각 두 가지씩의 이치가 있다.
" style="display: no■ne;">먼저, 진실 안에서의 두 가지란, 첫째는 변하지 않는다[不變]는 이치다. 비록 변화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잔잔하므로 " style="display: no■ne;">부처의 몸은 변화한 것이 아니다.
둘째는 인연을 따른다[隨緣]는 이치이니, 제 성품을 지키지 않고 나타내되 역시 또 변화가 아닌 것도 아니다.
변화 중에서의 두 가지란, 첫째는 본체가 없어서 곧 ≺공≻하다[無體卽空]는 뜻이니, 잡아 반연하여도 성품이 없으므로 변화가 없는 법 가운데서 한다. 둘째는 인연을 좇는 환상의 존재[從緣幻有]라는 뜻이니, 변화가 있는 형상을 보이신다.
인연을 따르는 것과 환상의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과 본체가 ≺공≻하다는 것과는 다르지 않나니, 이 때문에 변화를 나타냄이 어지럽지만 일찍이 고요하지 않은 적이 없다. 참 성품은 잔잔하지만 일찍이 변화하지 않은 적이 없다. 만일 이 도리를 통달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도 오히려 제도하지 못하겠거늘 어찌 남을 교화할 수 있겠는가.
또 무연의 자[無緣慈]는 자석이 쇠붙이를 빨아들이는 것과 같거늘 어찌★★ 주체[能]와 객체[化]의 변화로 구분하겠으며, 동체의 비[同體悲]는 허공과 같거늘 누가 자기와 다른 이의 몸으로 보겠는가.
그러므로 선덕(先德)이 이르되, “근원을 궁구하면 둘이 엇지마는 자취를 잡으면 가닥이 많나니, 만일 근본에 의거하여 근원을 찾으면 천 가지 길이라도 다른 바퀴자국이 없다.
그것은 마치 3강(江)의 물이 넓고 크지만 그 근원은 다 민산(岷山)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그 근원을 궁구하면 둘이 없되 만일 자취를 잡을 때에 가닥이 많다면 끝에 의거하여 근본을 찾아가는 것이니, 가닥이 많은 이것이 그 자취[迹]에 응(應)하는 것인 줄 모를 뿐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광명각품(光明覺品)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뜻과 같다.
하나의 몸이 한량없는 몸이 되고 한량없는 몸이 다시 한몸 되나니 모든 세간을 분명히 알면 형체를 나타내되 온갖 것에 두루한다.
이 몸은 어디서 온 데도 없고 또한 쌓이거나 모인 데도 없건만 중생들이 이러쿵저러쿵 분별하기 때문에 부처의 갖가지 몸을 보게 되네.
이것은 하나의 법신(法身)일 뿐인데, 이치로 나누면 둘ㆍ셋ㆍ넷ㆍ다섯의 몸이 되고 열의 몸도 된다. 다섯 가지의 몸임을 설명함과 같은 것은, 예공(叡公)이 유마소(維摩疏)에 이르되, “이른바 법성생신(法性生身)은 또한 공덕법신(功德法身)ㆍ변화법신(變化法身)ㆍ실상법신(實相法身)ㆍ허공법신(虛空法身)이라고도 하나,
그를 자세히 말해 본다면 하나의 법신일 뿐이다. 왜냐 하면, 그 생김[生]에서 말한다면 근본이 되는 법성이므로 법성생신이라 하지만, 그 원인을 추구한다면 이것은 공덕으로 이루어지는 바라 공덕법신이라 하고, 그 응(應)함에서 보면 감(感)마다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으므로 이것은 변화법신이며, 그 큰 것에서 말하면 허공 전체를 다스리는 것이므로 허공법신아라 하고, 묘함에서 말하면 모양도 없고 함[爲]도 없기 때문에 실상법신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인 체성은 동요하지 않되 그 이름은 인연따라 구분되는 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되 “같은 때에 처소를 달리하므로 결코 이것은 여러 개의 몸이로되 그러나 이는 하나의 몸 전체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여럿은 아니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달이 한 세계 안의 백 개의 강물에 똑같이 나타나므로 그것은 모두 하나이면서 곧 여럿인 것과 같다. 또 두루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요 하나의 달이기 때문에 여럿도 아니니, 마치 지당보살(智幢菩薩)이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비유하면 마치 깨끗한 만월(滿月)이 온갖 물에 널리 나타날 적에 그림자는 비록 한량없다 하더라도 본래 달은 일찍이 둘이 없는 것과 같네.
또 경의 게송에서 말했다.
여래의 청정하고 미묘한 법신은 3계(界)에서 짝할 이가 없나니 출세간(出世間)의 언어로 말해 본다면 그 성품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기 때문이다.
의지할 곳 없어도 가지 않음이 없고 이르지 않는 곳 없어도 가지 아니함은 공중에 꿈에서 본 것을 그리는 것 같나니 부처의 본체는 이렇게 관하여야 한다.
진신(眞身)도 아니고 응신(應身)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기 때문에 진신이요 응신이요 하나요 많다는 등을 지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광명각품[光明覺品]의 게송에 이르되, “부처 몸은 생김 없어 희론(戱論)을 넘어섰고 이것은 온(蘊)ㆍ처(處)의 차별된 법이 아니다”고 했나니, 그러므로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또 이르되, “이것은 모두 자기와 다른 이의 모양으로 짓는 몸이요, 주체와 객체가 같이 이루는 변화다”라고 했다. 자기와 다른 이의 모양으로 짓는다[自他相作]고 함은, 마치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되, “이 보살이 중생들의 마음에 좋아함을 따라, 자기의 몸으로 국토의 몸이 되고 중생의 몸ㆍ업보의 몸ㆍ성문의 몸ㆍ연각의 몸ㆍ보살의 몸ㆍ여래의 봄이 되며, 법신ㆍ지신(智身)ㆍ허공신 등으로도 되나니, 이것이 바로 자기 몸으로 남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또 중생들의 마음에 좋아함을 따라서 중생의 몸으로 자기의 몸이 되기도 하나니, 곧 다른 이가 자기로 되는 것이다“고 했음과 같다. 주체와 객체가 같이 이룬다[能所共成]는 것은 만일 변화의 객체가 되는 근기가 없다면 변화의 주체가 되는 자취가 없을 것이요, 또 만일 응(應)하는 몸의 객체가 없다면 역시 감(感)하는 일의 주체도 없으리니, 자기와 남 주체와 객체는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어서 연기(緣起)가 서로 말미암으면서 이런 비밀한 뜻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연기가 서로 말미암는다[緣起相由]는 것은, 모두 자기 마음을 인연으로 삼는 것이니, 끝내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마음과 더불어 인연이 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고덕(古德)이 이르되, “10방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다 나의 본사(本師)요 해인(海印)이 단번에 나타난 것이다. 도한 법화(法華)에서 분신(分身)에는 많은 정토(淨土)와 여래가 계시지만, 어찌 자기의 정토를 지적하지 않으면서 아미타(阿彌陁)의 묘희토(妙喜土)에 따로따로 가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가”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현수(賢首)와 아미타불 등은 모두가 본사이시니, 다시 무엇이 괴이하겠는가. 현수란 곧 수량품(壽量品) 중에 “백만 아승기 세계를 지나 최후로 훌륭한 연화 세계(蓮華世界)에 계신 여래”를 말씀한다. 경 중의 게송에서 이르되, “혹은 연화승묘세계[蓮花勝妙刹]를 보기도 하리니 현수 여래는 그 안에 계신다”고 했다. 만일 이것이 본사(本師)를 찬탄한 것이 아니라면, 다른 여래가 다른 국토에 계시는 것을 설명한 것일 터인데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또 총지교(總持敎)와 같은 교 안에서는 역시 37존(尊) 모두 비로자나(毘盧遮那) 한 부처님이 시현(示現)한 것이라고 설명하나니, 비로자나 여래는 마음 속에서 자수용신(自受用身)을 증득하여 다섯 가지의 지혜[五智]를 이루셨다. 네 가지 지혜로부터 네 분의 여래를 유출(流出)하셨으니, 대원경지(大圓鏡智)로는 동방의 아촉(阿閦)여래를 유출하셨고, 평등성지(平等性智)로는 남방의 보생(寶生) 여래를 유출하셨으며, 묘관찰지(妙觀察智)로는 서방의 무량수(無量壽)여래를 유출하셨고, 성소작지(成小作智)로는 북방의 불공성취(不空成就)여래를 유출하셨다. 법계의 청정한 지혜는 곧 저절로 비로자나 여래에 해당한다. 【문】만일 이런 이치에 의지한다면 어찌 평등하다는 뜻과 어긋난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대로가 ≺나≻[我]라고 말한다면 평등한 뜻에 의지하되 곧 나의 몸이 아니라 하거늘, 어찌하여 모두가 본사라고 말하겠는가. 【답】평등이라는 말은 바로 하나라는 이치이다. 유식(唯識)에서는 오히려 ‘모든 중생 가운데는 많은 부처님들께 속함이 있다“고 설명되나, 여러 부처님이 함께 교화를 하여 한 부처님이라고 여기고 있다. 만일 한 부처님에 속한다면 부처님께서 나타내어 보이시되 여러 몸으로 하는 것이니, 10방의 여래도 모두 그렇다. 이제 바야흐로 한 부처님이 여러 몸으로 나타날 수 있으므로 이에 의지해서 본사를 찬탄할 뿐이다. 마치 화엄경(華嚴經) 불사의해탈경계품(不思議解脫境界品)의 게송에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부처의 지혜는 통달하여 개끗하며 걸림없고 찰나에 3세(世)의 법 널리 아나니 모두가 심식(心識)과 인연으로 나타나며 생멸하고 무상하여 제 성품 없네.
한 세계 안에서 정각(正覺)을 이루면 온갖 세계 안에서도 역시 그러하나니 온갖 것이 하나에 들고 하나도 그러하여 중생의 마음 따라 나타내어 보이네.
대승천발대교왕경(大乘千鉢大敎王經)에 이르되, “이와 같은 모든 부처님들의 교화와 방편과 법과 지혜는 모두 나의 한 마음 속에 모여 있나니, 금강보리성성삼마지(金剛菩提聖性三摩地)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에 이르되, ‘마치 해와 달에 분별이 없는 것과 같다. 또한 물과 거울에도 분별이 없으며 광명 역시 분별이 없나니, 세 가지가 화합하면 그림자가 생기게 됨과 같나니라. 이러한 법은 여여(如如)하므로 여여한 지혜[如如智] 또한 분별이 없음은 원(願)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중생에게 느낌[感]이 있으면 응화신(應化身)을 나타내되 마치 해와 달에 그림자가 화합하여 나타남과 같다. 여래란 간 적도 없고 온 적도 없으므로, 이르되 ‘뭇 근기에 응하여 가되 가지 아니하고 항상 적멸(寂滅)로 돌아오되 오지 아니한다’고 했다. 왜냐 하면, 체성에 의지하여 작용을 일으키므로 이것은 간 것이요 체성의 작용에 상즉하는 것이므로 가지 않은 것이다. 근기에 응하여 눈앞에서 합하므로 이것은 온 것이요 응하되 체성을 여의지 않은 것이 마치 달 그림자와 같기 때문에 오지 않은 것이다. 또 가서 응하여 합하기 때문에 이것은 간 것이요 응하되 응하는 모양이 없기 때문에 가지도 않은 것이다. 항상 적멸로 돌아와 합하므로 이것은 온 것이요 적멸은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오지도 않은 것이니, 그러므로 온갖 법은 모두가 오고 감이 없다“고 했다. 마치 경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온갖 법은 오는 것이 없나니 그러므로 생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생김이 없는 법 가운데서 자비를 일으켜 교화한다.
그런 까닭에, 대장부론(大丈夫論)에서 이르되, “보살은 생가하기를 ‘모든 중생이 나를 위해 바르고 엄격한 업(業)을 지을 수 있으므로, 한 중생이라도 바르고 엄격하지 않은 뜻을 짓지 않게 하리라’고 하며, 보살은 이런 생각을 하나니, ‘남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모양을 구하면서도 도무지 그 모양은 얻을 수 없고 모두가 자기와 같다’”고 했다. 또 이르되,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의 자비를 마치 허공과 같게 하리라. 온갖 산과 강물과 나무며 나는 새ㆍ달리는 짐승들이 허공을 의지하여 살고 있듯이 모든 중생들이 언제나 나의 자비 안에 들게 하리라’고 한다”고 했다. 이야말로, 동체의 대비[同體大悲]인데 어느 중생인들 제도되지 않겠으며, 평등한 대혜[平等大慧]를 일으키거늘 어느 도(道)인들 이루지 않겠는가. 마치 화엄론(華嚴論)에 이르되, “그지없는 공덕장으로 회향한다[無盡功德藏廻向]는 것은 이 지위에서는 선(禪)과 지혜가 명합하고 지혜와 자비가 계합됨을 밝히는 것으로서 그지없는 허공을 하나의 도량(道場)으로 삼고 그지없는 중생의 무명(無明)의 행상(行相)을 불사(佛事)로 삼는 것이므로, 몸은 항상 그지없는 모든 부처님들을 받들어 섬기면서 법계에 두루하고 그지없는 중생을 교화하여 모두 부처의 몸이 되게 하나니, 겉과 속이 서로가 없어지고 처음과 마지막이 모두 다하며 모든 법을 두루 알되 무심(無心)을 무너뜨리지 아니한다”고 함과 같다. 무진공덕장품(無盡功德藏品)에 말씀한 “한 털구멍에서 아승기의 여러 부처님들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어 법의 무진장(無盡藏)에 들어감을 본다”고 함은, 심성(心性)은 본래 크고 작은 속박이 다하여 없고 몸은 지혜의 그림자가 되며 국토 또한 그렇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지혜가 깨끗하면 그림자도 밝아져서 크고 작음이 서로 어울려 돌아감은 마치 인다라망(因陁羅網)과 같다는 비유가 그것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부처의 지혜 힘으로 온갖 법을 관(觀)하면 모두가 하나의 법에 들어간다”는 것은, 만가지 경계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모두 한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마음이 없어지면 경계도 소멸되어 온갖 경계가 모두 공허해짐은 마치 깨끗한 물 속의 뭇 그림자와 같아서 물이 없어지면 그림자도 소멸된다는 것이니, 이것은 있음[有]이 파괴되면 없음[無]이 성립된다는 데서 본 설명이다. 또 경계를 지혜의 생김에서 볼 때 지혜가 공허하면 경계도 환상[幻]이여서 여러 모양이 서로 어울려 들어가되, 하나의 공허[虛]를 여의지 않으므로 환상은 공허와 다르지 않고 공허는 환상과 다르지 않아서 환상과 공허는 둘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다 다르다 함이 온통 공허한 것이니, 이것은 지혜는 환상과 공허가 자재하여 걸림이 없다는 문(門)에서 본 설명이다. 이 모두는 법을 빌려서 견주며 설명하는 것인데 사실대로 알 바[所知]는 생각하는 것을 없애야만 지혜와 계합되고 그 지혜와 계합된 이라야 비로소 작용할 수 있다. 언제나 진리이므로 마음과 경계에 미혹되지 아니하며, 큰 원력(願力)으로 지혜를 따라 환상처럼 생기는 중생 수(數)만큼의 몸이 마치 응(應)하면서 거두어 교화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지없는 공덕장(功德藏)이라고 한다. 또 이르되, “법운지(法雲地)보살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힘을 따라 광대하고 미세하게 자기와 다른 이가 서로 어울려 들게 된다. 하나와 여럿, 크고 작음이 서로 엇갈려서 신통한 덕의 작용이 자재하나니, 모두 자기의 마음에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모든 중생의 작용과 경계는 모두 자기의 마음이 붙잡는 업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나니, 사람ㆍ하늘ㆍ지옥ㆍ축생ㆍ아귀와 선악 등의 과보는 한결같이 마음에 의하여 짓게 된다”고 했다. 이와 같은 10지(地)보살은 지음이 없는[無作] 법신의 큰 지혜의 힘으로 마음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10방에 한꺼번에 자재하지 않음이 없어서 모두 다 알고 보게 된다. 넓은 광명의 지혜[普光明智]로 본체를 삼되 지혜의 본체는 의지함이 없으면서 성품에 일치하고 법계에 두루하여 허공의 부피와 같으므로 10방 세계에 두루 가득 찬다. 성품이 없는 지혜[無性智]는 생각대로 크게 작용하며 잊어버리지 않는 지혜[不老失智]는 생각대로 모두 이룬다. 총과 별을 갖춘 지혜[具總別智] 전체와 별개ㆍ같음과 다름ㆍ성립과 파괴 등을 다 함께 만든다. 넓고 좁고 크고 작음이 자재한 지혜[廣狹大小自在智]는 변화와 신통이 걸림이 없다. 모든 중생과 몸을 같이 하는 지혜[與一切衆生同體智]는 모든 중생들의 경계를 능히 변화시켜 순수하게 정토(淨土)의 세계를 만들며, 자기와 남이 둘이 없는 지혜[自他無二智]는 하나의 몸이면서 여럿의 몸이 되고 여럿의 몸이면서 하나의 몸이 되기도 한다. 법신의 크고 작음이 없어 분량을 여읜 지혜[法身無大小離量之智]는 털구멍에 부처의 세계를 널리 수용할 수가 있고, 허공과 같이 끝이 없고 방소가 없는 지혜[等虛空無邊無方之智]는 한 생각 동안에 생(生)을 나타내어 10방에 가득히 차면서도 오감이 없으며, 메아리와 같은 지혜[如響智]는 메아리가 응대(應對)하여 나타냄이 똑같듯이 중생에게 응대하며 나타난다. 이 두루 갖추고 원만한 복덕의 지혜[具足圓滿福德智]는 항상 묘한 세계에 살며, 언제나 모든 중생과 더불어 살고 있으나 만일 성인의 가피[加持]한 힘이 아니면 중생은 보지 못한다. 【문】또 “어떻게 하면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심을 보게 되는가.” 【답】“마땅히 자기의 몸을 보되, 몸도 없고 마음도 없으며, 나옴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안도 없고 바깥도 없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으며, 생각함도 없고 구함도 없으며, 세간과 출세간에서 도무지 머무는 데가 없으며, 심소(心所)의 법도 없고 심심(心心)의 법도 없으며, 마음의 법은 의지함이 없고 성품은 처음과 끝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하여 의지하거나 머무름이 없는 지혜[無依住智]로 이러한 법을 말하되 중생을 교화해서 모두가 깨쳐 들게 해야 한다. 이것을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심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한다”고 했다. 마치 광명각품(光明覺品) 문수사리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읊은 것과 같다.
세간과 출세간에서 보되 온갖 것에 초월하면서 법을 잘 알 수 있으면 장차 커다란 빛남을 이루게 되리라. 만일 온갖 지혜[一切智]에서 회향(廻向)하는 마음을 내어 마음이 낼 바가 없음을 본다면 장차는 커다란 명칭(名稱)을 얻게 되리.
중생이란 나지도 않으면서 무너짐도 없는 것이니 만일 이렇게 안다면 장차는 위없는 도[無上道] 이루게 되리라.
도 대승대집경(大乘大集經)에 이르되, “부처님이 현호(賢護)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아직 불이 생기기도 전에, 어느 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오늘 먼저 이 불을 꺼버렸다≻고 한다 하자. 현호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이 하는 이 말이 진실한 것이냐.’ 현호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현호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은 본래부터 끝내 얻을 것이 없거늘, 어떻게 지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온갖 모든 법을 증득하여 알았다. 나는 온갖 모든 법을 분명하게 통달하였다. 나는 온갖 모든 법을 깨쳐 알았다. 나는 모든 중생을 생사 가운데서 제도 해탈시켰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른 말이 아니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법계에는 본래 모든 법이 없고 또한 중생도 없거늘, 어떻게 제도한다고 말하겠느냐. 다만 세속 이치[世諦] 안의 인연으로 제도할 뿐이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마음 밖에는 법이 없거늘 무엇을 얻겠는가. 부처의 몸은 함이 없고[無爲] 다만 인연 따라 나타날 뿐이니라. 마치 조론(肇論)에 이르되, “방광(放光)에서 이르기를 ”부처는 마치 허공과 같아서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으며 인연에 응하면서 나타내는 것이므로 따로이 방소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성인이 천하에 계신다 해도 고요히 비어 있어서 붙잡을 것도 없고 다툴 것도 없으며, 인도하면서도 앞서지 않고 느끼면서도 뒤에 응(應)함은 마치 깊은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밝은 거울의 형상과 같아서 그를 대(對)하면서도 그가 온 까닭을 알지 못하고 그를 따르면서도 그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나니, 어슴푸레하게 있다가 어슴푸레하게 없어지며 움직일수록 고요하고 숨길수록 드러나며 그윽한 데서 나왔다가 어둔데로 들어가며 변화하여 일정함이 없음은 바로 그를 두고 한 말이다. 인연과 응(應)함에서 지어지되, 자취를 드러내면 생김이 되고 자취를 없애면 소멸함이 되지만, 생김은 남음이 있다고 하고 소멸은 남음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있다ㆍ없다 하는 말은 본래부터 이름이 없거니와 이름이 없는 도(道)이거늘 어찌하여 이름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모진[方]데 있으면 모지고 둥근[圓]데 머물면 둥글며 하늘에 있으면 하늘이고 사람에 있으면 사람이다. 무릇 능히 하늘이 될 수 있고 능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어찌 하늘과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바리요, 과연 하늘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능히 하늘이 될 수 있고 능히 사람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밝은 거울에는 형상이 없되 만 가지 형상을 나타낼 수 있고 성인은 마음이 없되 만 사람의 마음에 응할 수 있나니, 숨기되 빛을 감추지 아니하고 드러내되 자취를 나타내지 않는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논(論)에 이르되, “성인은 고요함과 두려워함에 조짐이 없고 숨김과 드러냄에 근원을 같이하나니, 있어도 있는 것이 되지 않고 없어져도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생김과 생기지 아니함이 없으므로 비록 생긴다 하더라도 생기지 아니하며, 나타남과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으므로 비록 나타난다 하더라도 나타나지 아니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고 했다. 【문】여래의 법신은 곧 참된 심성이요 여래의 보신(報身)은 참된 심성에 의지하여 일어나지만, 만일 여래의 화신(化身)이라면 도리어 심성이 있는 것인가. 【답】만일 본체에서 본다면 역시 여의지 아니하거나 현상[事]에서 본다면 곧 분리된다. 마치 심밀경[沈密經]에 이르되, “만수실리(曼殊室利)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화신에는 마음이 있다고 말해야 하옵니까. 마음이 없다고 해야 하옵니까.’ 부처님께서 만수실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는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없다면 스스로가 마음에 의지하기 때문이요, 있다면 다른 이의 마음에 의지하기 때문이니라’고 함과 같다”고 했다. 【문】경에 이르되, “보살은 온갖 나쁜 갈래의 문[惡趣門]을 잠근다”고 했지만, 대체로 모든 중생들은 자기 마음을 따라 지은 업으로 저마다 고통의 과보를 받고 있다. 그런 까닭에 경의 게송에서 말했다.
가령 백천겁을 지난다 해도 지었던 업은 없어지지 않다가 인연으로 서로 만나게 될 때에 과보도 스스로가 되받는다.
이런데, 어떻게 보살이라 하여 온갖 나쁜 갈래의 문을 잠글 수가 있겠는가. 【답】자기 마음에서만 본다면 언제나 6식(識)의 문을 열어 놓고 있거늘, 어찌 일찍이 잠시라도 닫는 일이 있겠는가. 밤낮 온갖 착하지 않은 일을 헤아리고 견주고 반연하고 생각하면서 두루 모든 경계에서 생각생각마다 항상 생사하는 지옥을 만들고 있다. 경에 이르되, “쌓고 일으키는[集起] 마음의 생각을 지옥이라 한다”고 했다. 만일 자기 심식(心識)의 성품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관할 수 있다면 이것은 곧 착한 갈래의 문[善趣門]을 여는 것이지만, 만일 마음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는 곧 나쁜 갈래의 문을 닫는 것이다. 만일 자재한 지혜를 얻어 앞에 나타나면 곧 현재의 몸으로 다섯 갈래[五道]에 태어나서 지옥과 아귀와 축생 등의 세계로 들어가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선문(禪門)에서는 생각 없음[無念]으로 종(宗)을 삼고 이를 요긴한 학문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 이르되, “생각이 없음을 부지런히 생각하면 불법은 얻기 어렵지 않으리라”고 했다. 어찌하여 얻기 어렵지 않다고 하느냐 하면, 생각이 없기 때문에 온갖 경계가 생기지 않고 그 곳에서 바로 해탈되나니 만일 생각을 일으킴이 있다면 유독 나쁜 갈래의 문을 열 뿐만이 아니고 25유(有)가 일시에 모두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온갖 바탕[萬質]은 모두 생각으로부터 달라지게 되고 12의 무리가 이리저리 천 갈래로 차별됨은 다 생각을 좇으면서 생기게 되며 8만의 문도 다투어 일어나게 된다. 마치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한 것과 같다.
눈이 만일 잠을 자지 않는다면 모든 꿈은 저절로 제거될 것이요 마음이 만일 달라지지 않는다면 온갖 법은 다 한결같아진다.
모든 법은 체성이 없고 자기 마음으로부터 생기며 마음이 만일 생기지 않는다면 바깥 경계는 언제나 고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되, “만법은 본래 한가하거늘, 사람들이 스스로 시끄럽게 한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조론(肇論)에 이르되, “그러므로 성인은 참 마음에 의지하여 실천하고 따르므로 걸리는 것마다 통하지 아니함이 없고, 한 기운을 살피면서 관찰하고 교화하기 때문에 만나는 것마다 순종하며 거스르지 아니한다. 걸리는 것마다 통하지 아니함이 없으므로 뒤섞인 것을 순수하게 할 수 있고, 만나는 것마다 순종하며 거스르지 않으므로 물건에 접촉할 때마다 한결같다. 이는 곧 온갖 형상이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스스로 다를 수가 없고 스스로 다를 수가 없으므로 형상이 참된 형상이 아닌 줄 알며, 형상이 참된 형상이 아니라면 비록 형상이라 하더라도 형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물건과 내가 근원이 같고 옳고 그름이 하나의 기운이라. 은밀하고 그윽하게 숨어서 거의가 사람들 마음으로 다할 바가 아니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한 마음에 의지하면서 실행한다면 어디를 간들 진여가 아니겠으며, 한 기운을 받아서 교화하고 행한다면 어느 중생인들 순종하지 않겠는가. 마치 장자(莊子)가 이르기를, “하늘과 땅은 한 기운이면서 온갖 것으로 능히 변화한다”고 함과 같다. 노자(老子)는 이르기를, “하늘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맑게 개고 땅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편안하며 정신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신령하고 만물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생긴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의 참 마음으로써 온갖 경계를 관찰하면 만나는 것마다 순종하여 거스르지 아니하며 접촉하는 물건마다 하나에 명합된다”고 했다. 이러므로 모든 법은 체성이 없고 거짓된 모양을 반연하여 의지하므로 틀리고 다름이 있는 것 같지마는 스스로 다를 수 없는 줄 알 것이다. 왜냐 하면, 길면서도 긴 모양이 없고 또한 스스로가 ‘나는 길다’고 말하지도 아니한다. 짧으면서도 짧은 모양이 없고 또한 ‘나는 짧다’고 말하지도 않나니, 모두가 이는 생각 따라 헤아리고 분별하면서 제나름으로 집착하는 뜻에서 내는 것이므로, 만물이 본래 공허한 것인 줄 알면 곧 형상이면서도 형상이 없으리라. 【문】위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중생은 자기 마음으로 업을 지어 스스로 고통의 과보를 받게 되거늘, 또 어찌해서 모든 중생의 고통을 대신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고덕(古德)이 해석한 것을 보면 고통을 대신하는 것에는 일곱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가엾이 여기는 의요(意樂)를 일으키는 것이니, 아직 모든 일에 꼭 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둘째는 모든 고행(苦行)을 닦으면서 중생에게 증상연(增上緣)이 되어 주어 곧 고통을 대신한 것이라 한다. 셋째는 번뇌를 두어 생을 받게[留惑潤生] 하여 괴로움이 있는 몸을 받아서는 중생을 위해 설법하여 악(惡)을 짓지 않게 하면 원인이 없어지고 결과가 상실되므로 곧 고통을 대신한 것이라 한다. 넷째는 만일 중생이 무간업(無間業)을 지어서 장차 큰 고통을 받게 될 때, 두려움 없는[無畏] 방편으로 반드시 목숨을 끊고서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져서 그로 하여금 고통을 벗어나게 하여야 한다. 다섯째는 처음 발심하고서부터 항상 나쁜 갈래에 있거나, 흉년이 든 세상에서는 큰 고기의 몸이 되기도 하므로 곧 대신한 것이라고 한다. 여섯째는 큰 원력과 고통은 모두 같은 참 성품이므로 이제는 참 성품에 즉(卽)한 큰 서원으로 참 성품에 합치한 고통에까지 은밀하게 이른다. 일곱째는 법계를 몸으로 삼는다면 자기와 남은 다름이 없으므로 중생이 고통을 받는 것이 곧 보살이라는 것이다. 첫째번은 의요일 뿐이요, 다음의 두 가지는 인연이며 그 다음의 두 가지는 실로 대신하는 것이요, 마지막의 두 가지는 이관(理觀)이다. 그러나, 요약하면 인연이 있어야 비로소 대신할 수 있을 뿐이다. 환원관(還原觀)에 이르되, “중생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 덕(德)이란 보살이 모든 법을 수행하되 자기 몸을 위하지 않고 다만 중생들을 널리 이익되게 하려 하면서 원수나 친한 이를 평등하게 여기고 널리 악을 끊고 만행(萬行)을 닦으면서 빨리 보리를 증득하도록 한다”고 했다. 또 이 보살이 본래 보살도(菩薩道)를 행할 때는 대비(大悲)와 대원(大願)의 몸으로 바탕을 삼고 세 가지 나쁜 갈래[三惡趣]에서 온갖 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고 반드시 즐거움을 얻게 하면서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마음에 물러남이 없으며, 중생들에게는 털끝만큼이라도 은혜를 돌려받겠다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경의 게송에 말했다.
광대한 자비 구름 온갖 것에 두루하여 한량없이 버린 몸은 세계 티끌만큼이며 옛날 겁(劫)의 바다에서 모든 행을 닦아 이 세계로 하여금 모든 때[垢] 없게 했네.
이러므로, 중생이 허망한 고집으로 생각생각마다 옮겨 흐르는 것을 ‘고통’이라고 하여 보살의 가르침으로 5온(蘊)이 공적(空寂)하고 제 성품이 본래 ≺공≻한 줄을 알게 되므로 ‘고통을 여읜다’고 한다. 【문】중생이 그지없으므로 고통받는 업도 그지없거늘, 어떻게 보살이 대신 받을 수 있는가. 【답】보살이 중생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대자비와 방편의 힘 때문이다. 다만 중생의 허망한 집착 때문에 업 자체가 허망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분명히 모르면 고통에서 벗어날 턱이 없으므로, 보살은 가르침으로 지(止)와 관(觀)의 양 문을 수행하되 마음 속에 잠시도 잃지 않게 하면 원인이 없어지고 결과가 상실되어 고통이 생길 까닭이 없게 되고 다만 세 가지 갈래[三塗]에 들지 않게 할 뿐이므로 “중생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3계(界)에서 나고 죽고 하는 고통이란 것은 모두 중생들이 망녕되이 받고 있는 것이니, 감관[根]과 대경[塵]에는 성품이 없고 근본과 끝이 언제나 ≺공≻임을 분명히 모르고서 필경에는 없는 가운데서 마지막에는 있다고 고집한다. 이러한 탐내고 취함으로 인하여 업을 짓고는 생(生)을 받아 한량없는 겁 동안 윤회하는 고통을 받고 있되 무명이 가리움[罩]을 살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있다. 보살은 이에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드리우고 이 뒤바뀜을 불쌍히 여겨 성품이 ≺공≻하다는 법의 약을 말하나 망정(妄情)이 지니는 병의 뿌리를 자르면 고통이란 생김이 없음을 통달하여 악업을 짓지 않는다. 모든 느낌이 서로서로 일으키는 것을 알아서 미혹의 원인을 능히 깨뜨리게 되나니, 망녕되이 받는다는 고통이 이미 ≺공≻한지라 다스리게 되는 약도 저절로 끊어진다. 그런 까닭에, 선덕(先德)이 말했다.
괴로움이 바로 즐거움이요 즐거움 이것이 괴로움이니 이것을 수행하면 문호(門戶)가 끊어지며 괴로움 또한 없고 즐거움도 없어 본래의 제 성품엔 새끼[繩索]가 없네.
이 묘한 깨침으로 한 동아리의 문에 들어가면, 마침내는 인공(人空)ㆍ법공(法空)을 모두 얻게 되어 마음과 경계에 속박을 받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해탈하여 영원히 고통의 근원에서 벗어나거늘, 어찌 고통을 대신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경에 이르되, “설법이 바로 큰 신통 변화[大神變]라 곧 범부를 성인이 되게 하고 재화를 변화시켜 상서[變禍爲祥]가 되게 하나니, 지옥의 볼 바퀴 안에서도 정토(淨土)의 연대(蓮臺) 위에 즐기게 하거늘, 어찌 신통 변화가 아니겠는가”고 했다. 【문】온갖 경계는 마음으로 인한 분별이니, 만일 분별이 있으면 곧 무명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되, “마음에 분별이 없으면 온갖 법이 바르고, 마음에 분별이 있으면 온갖 법이 삿되다”고 했나니,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이미 무명을 끊은지라 마음이란 모양조차 없거늘 어떻게 진리와 세속의 차별된 경계를 아는 이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하는가. 【답】법에는 자체가 없기 때문에 곧 분별하나 분별함이 없는 것이요, 자체에는 반연함에 장애되지 않기 때문에 분별함이 없는 것이 바로 분별이다. 마치 기신론(起信論)에 말한 “자체가 환히 비추기 때문에 각(覺)이라고 한다”고 한 것을, 어떤 사람이 심행(心行)을 널리 나타내는 것인가“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자체가 환히 나타냄은 마치 구슬에 빛이 있으므로 스스로가 구슬의 몸을 비추는 것과 같다“고 함과 같나니, 구슬의 몸은 마음에다 비유하고 빛은 지혜에다 비유한다. 마음의 체성이 곧 모든 법의 성품이니, 모든 법을 비출 때에 이것이 저절로 비추어질 따름이다. 그러므로 논(論)에서 설명한 글이 아주 분명해진다. 그러나 논(論)에서 물었다. “‘허공이 그지없기 때문에 세계가 그지없고 세계가 그지없기 때문에 중생이 그지없고 중생이 그지없기 때문에 심행의 차별 또한 그지없나니, 이와 같은 경계는 분제(分劑)할 수도 없고 알기도 어려우며 이해하기도 어렵다. 만일 무명이 끊어지고 생각이 없게 된다면, 어떻게 알 수가 있어서 일체종지라고 하는 것인가.’ ‘온갖 경계는 본래가 하나의 나음이라 생각을 여의게 되는데도 중생은 망녕되이 경계를 보기 때문에 마음에 분제가 있다. 망녕되이 생각을 일으키면 법의 성품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결코 알 수가 없지만, 모든 부처님 여래는 보는 것과 생각을 여읜지라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다.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요 모든 법의 성품이므로 용과 한량없는 방편이 있어서 모든 중생들이 얻어야 하고 알아야 할 바에 따라 갖가지 법의 이치로써 깨우쳐 보이는 것이니, 그러므로 일체종지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고 했다. 해석에 이르되,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에 곧 이것이 모든 법의 성품이다.부처의 마음은 생각을 여읜 그 자체가 한 마음의 근원이다. 망상(妄想)을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의 진실이라고 하며, 자체는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에 모든 법의 성품이 된다. 이는 곧 부처의 마음이 모든 허망한 법 자체가 되는 것이라 온갖 허망한 법 모두는 부처의 한 마음의 모양이다. 그 모양이 자체에 나타나고 그 자체는 그 모양을 비추는 것이니, 이렇게 분명히 알면 힐난할 것이 무엇 있겠느냐”고 했나니, 그러므로 자체가 온갖 허망한 법을 환히 비추는 것이요, 이것을 말하여 “볼 바가 없기 때문에 보지 않는 바가 없다”고 하는 까닭이다. 초(鈔)에 이르되, “안에서 참 이치의 식(識)에 미혹되어 바깥으로 대경[塵]을 보게 되기 때문에 현량(現量)과 같은 경계에서 갖가지의 앎[知]을 따를 수가 없나니, 마치 사람이 눈을 움직이면 하늘과 땅이 다 기울고 흔들리기 때문에 사실대로 알 수가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마음 바다의 파도가 자면 삼라만상이 가지런히 비치고, 맑은 못에 물결이 일면 모든 경계가 다 흐려진다.
경전마다 반복해서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만나게 된다. 특히 불교경전은 분량도 많고 내용도 어렵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생사현실에 고통이란 부분이 들어 있다.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 생노병사를 겪고 원하는 바를 뜻대로 성취하지 못해 고통을 겪는다. 이것을 해결하면 생노병사를 겪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무량한 복덕과 지혜 수명을 얻게 된다. 그런 가운데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른다.
그런 경우 먼저 이를 믿어 받아들이고 제시된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온갖 중생이 부처와 본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현실에서는 다르다. 그리고 차이가 크다. 본래 얻을 수 없는 생사고통을 매 생 매 순간 겪고 만들어 나간다. 이런 상태를 이즉이라고 표현한다.
이 상태에서 탈피하려면 기본적으로 타이틀이라도 만들어 자신이 음미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자신 나름대로 장차 자신이 성취할 부처의 상태를 마음에 그려 놓고 명칭이라도 일단 만들어서 그런 상태로 세상과 자신을 대한다. 자신이 부처라면 이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런 것을 늘 념두에 두고 임한다.
그렇게 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당장 현실에서는 그 차이가 아주 미미하다.
그런데 그렇게 죽 임해서 나아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향하는 상태가 크게 다르다.
경전에서 일반적으로 부처님은 가장 표준적이고 일반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이것이 어느 경우나 수행자가 행할 표준이다.
구체적 경우가 어떠하든 그 원칙만 지키고 임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보리심을 일으키고 중생을 제도할 사홍서원을 마음에 만들어 갖는다. 그리고 좋음(+)을 중생에게 아낌없이 베푼다. [보시] 나쁨(-)을 함부로 다른 중생에게 가하지 않는다. [정계] 자신이 좋음(+)을 침해받고 나쁨(-)을 받을 때 상을 취하지 않고 평안히 임한다. 그리고 상대를 포용해 용서한다. 미움과 원망을 갖지 않는다. 분노를 일으켜 그 상대를 보복하고 해하려 하지 않는다. [안인] 그리고 꾸준히, 없는 악은 만들지 않고 있는 악은 키우지 않는다. 없는 선은 새로 만들고 있는 선은 키워 나간다. [ 정진]
이런 것이 수행의 가장 기초다. 모든 경우에 위 원칙만 지키고 행하면 된다.
그런데 이것을 행하는 그 당장의 순간만 놓고 보면 수행자가 부당하고 억울한 피해나 손해를 보는 것처럼 여기게 되기 쉽다. 그러나 사정이 정 반대다. 그런 사정을 넓고 길고 깊게 관하여 수행을 잘 실천하는 것이 가장 표준적인 방안이다.
그리고 이 표준적인 방안만 행하면 충분하다.
위 원칙적인 방안을 잘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머지 경전들이 또 제시되는 사정이 있다. 그렇다해도 늘 위 원칙적인 방안에 귀결된다. 즉 그런 방편을 통해서 끝내 각 수행자나 중생이 위와 같은 방안을 행하는 상태에 진입해야 한다.
그래서 그외 특수한 방편은 그렇게 하게끔 이끄는 데 동원되는 보조적 방편임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종경록』에서는 마음의 현상을 이해시키는데 주력한다. 위와 같은 사정이 어떤 배경에서 그렇게 제시되는가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취지다. 내용이 상당히 복잡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골격을 가지고 대하면 간단하다.
설령 마음을 샅샅이 이해해도 위와 같은 수행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쓸모 없다. 눈의 구조나 기능을 샅샅이 이해해도 앞의 사물을 잘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와 같다.
마음은 마음을 직접 관찰하거나 살피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논의를 살펴나가면,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수행을 실천하면서 내용을 살펴나가면 그런 내용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말과 글로써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이런 경우 스스로 정려 수행도 행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수행을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 결국 공리공론에 그치게 되기 쉽다.
○ 『종경록』 91 권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 【문】무릇 범부ㆍ성인의 도(道)는 동일한 법신(法身)이라 그것과 이것이 모두 없어지고 중생과 내가 다 함께 끊어지면 마음 안에서도 얻을 것이 없고 몸 밖에서도 다른 것이 없거늘, 어떻게 하여 응화(應化)의 몸을 일으켜서 교화에 편의한 중생을 거두는 것인가.◂
범부와 성인이 차별없이 공하다. 이런 내용이 제시된다.
알고보면 부처와 보통 사람, 그리고 돼지나 모기 곤충이 차별이 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는 그 차이가 극단적이다. 무슨 연유인가. 이런 질문과도 같다.
또 다음과 같이도 질문한다.
▸ 【문】고덕(古德)이 물었다. “만일 자기와 다른 이 모두가 자기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요 마음을 여의면 실로 ≺나≻[我]나 남[人]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부처님 또한 중생이 있음을 보시거늘 어찌 아직 허망한 마음이 다하지 못해서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다음을 의미한다.
생사현실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 이 때 또 다른 영희나 철수라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를 놓고 다시 살펴보면 하나같이 모두 자신의 마음에 나타난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나와 남이 없다고 하자. 그런데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가.
그리고 그것은 부처님도 알고보면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질문이다.
여기에 대해 여러가지 설명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먼저 주의할 것이 있다.
공한 실상에 대해 차별을 세울 수 없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말이 '완전히 동일하다거나 같다, 하나다' 이런 뜻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또 마음을 여의면 그런 내용을 못 얻는다. 이 말도 주의해야 한다.
마음을 경계로 마음안 내용과 마음 밖 실상을 구분한다. 여기서 마음은 마음에 얻어진 내용을 근거로 시설해 제시한다.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정작 그 마음의 주체는 직접 마음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그 마음을 떠나 있는 실상이 무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실상이 무엇인가 문제될 때 다음처럼 지나치게 극단으로 나아가면 곤란하다.
마음은 마음 밖 실상을 직접 얻지 못한다. => 그렇다고 마음 밖 실상에 아무 것도 전혀 없다. 이렇게 잘못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것이 공한 실상에 대해 갖는 잘못된 이해다. 공한 실상은 있다거나 없다 이 양변의 극단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을 얻지 못함은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실에서 얻는 내용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 정도로 이해하고 그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 질문들에 다 엉뚱한 대답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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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불기2565/06/15
○ 2019_1201_153934_nik_ct13_s12.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lbert-Bloch-piping-pierrot
【범】Ākāśagarbha ;또는 Gaganagañja 아가사얼파(阿迦捨蘖婆)ㆍ아아나언야(誐誐拏彦惹)라 음역. 허공잉(虛空孕)이라 번역. 보살의 이름. 이 보살은 지혜와 자비의 창고[藏]가 허공처럼 광대무변하므로 이런 이름이 있다. 밀교의 만다라에서는 태장계 허공장원의 주존(主尊). 또 석가원의 1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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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urjaya 極難勝 [san-eng]
prakāra $ 범어 variety, options [pali-chn]
ṭhāna 義理 [pal-eng]
khe.la $ 팔리어 m.saliva. [Eng-Ch-Eng]
合 (1) To unite, or combine two things (samgati, samsarga, samnikarsa). For two things to become one body (saha^). To harmonize. (2) The production of the special function of consciousness by the connection of objects, organs and self. (3) 'Contact' (觸). (4) To agree, to accord with. (5) The union of causes and conditions. (6) In hetu-vidya^ 因明, the fourth of the five-part syllogism--'application.' [Muller-jpn-Eng]
欲邪行 ヨクジャギョウ indulging in sexual misconduct [Glossary_of_Buddhism-Eng]
LAND OF ULTIMATE BLISS☞ See: Sukhavati.
10 속히 일체 바라는 원을 만족하게 되기 위함인 연고로 선설코저 하오니, 오직 원하옵건대 세존께서는 큰 자비로써 중생을 불쌍히 여기사 설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 나모실길다이맘아리야 南無悉吉埵伊蒙阿唎耶<十> na mo s kṛ ta ī mo a ry ā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