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보』
K1047
T2040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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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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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석가보』 ♣1047-004♧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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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별논의]
○ [pt op tr]
○ 2020_1114_142820_nik_Ar12 삼각산 도선사
❋❋본문 ♥ ◎[개별논의]
●
석가보 제4권
석승우 지음
송성수 번역
27. 석가쌍수반열반기(釋迦雙樹般涅槃記)[**『대반열반경』에서 나온 것임**]
●
부처님께서
구시나성(拘尸那城)의 역사(力士)들이 사는 곳을 흐르는 아이라발제하(阿夷羅跋提河) 물가의
사라쌍수(娑羅雙樹) 사이에서
큰 비구 80억 백천 명과 함께 앞뒤로 둘러싸여서
2월 15일 열반하려 하셨을 때
부처님의 신력으로 큰 음성을 내시어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
그 부류의 음성에 따라 널리 중생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여래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는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
마치 라후라(羅睺羅)를 대하는 것 같았다.
그들을 위하여
귀의할 대상이 되어 준 대각(大覺) 세존께서는
장차 열반하시려고 한다.
온갖 중생 가운데
만일 의심나는 것이 있는 사람은
이제 모두 다 물으라.
최후의 질문이 될 것이니라.”
●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이들 가운데
4신족(神足)을 많이 닦아 익숙하게 행하면서
언제나 염(念)하며 잊지 않고
마음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1겁 또는 그 이상을 죽지 않을 수 있느니라.
●
지금부터 세 달 뒤에
본래 태어났던 곳인
구시나갈(拘尸那竭) 사라원(娑羅園)의 쌍수(雙樹) 사이에서
멸도를 취할 것이니라.’
●
‘무릇 세간의 땅이 진동하는 데에는
여덟 가지 인연이 있느니라.
●
여래가 무여열반계(無餘涅槃界)에 들어가려고
반열반하실 때에 땅이 크게 진동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여덟 번째이니라.’
●
그때 사방의 무변신보살과 그 권속들이 앉아 있는 장소는
혹은 송곳 끝이나 바늘 끝과 같았으며,
10방의 작은 티끌 수와 같이 많은 세계의 모든 큰 보살들도
모두 다 와서 모였으나
오직 존자 마하가섭(摩訶迦葉)과 아난 두 사람만이 모이지 않았다.
●
그때 순타가 멥쌀로 지은 밥은
마가타국(摩伽陁國)에서의 여덟 섬[斛]의 분량이었으나
부처님의 신력으로 모두 다 온갖 대회(大會)를 충족시켰다.
●
만일 어떤 이가 이와 같이
삼보(三寶)가 언제나 있다는 것을
관하여 환히 알지 못한다면
그는 바로 전타라(旃陁羅)이니라.
만일 세 가지의 법이 언제나 머무른다는 것과
진실한 법의 인연을
능히 아는 이가 있으면
괴로움을 여의고
편안하게 되리라.
●
그때 부처님께서는
가섭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중생들은
대승방등(大乘方等)의 비밀스러운 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는 진실로 질환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
여래는 또한 끝내 반드시 열반에 들지는 않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언제나 머무르면서
변하거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니라.”
●
28. 석가팔국분사리기(釋迦八國分舍利記)[**두 권짜리 『니원경(泥洹經)』에서 나온 것임**]
●
그러자 향성 바라문은
여러 사람들을 알아듣게 타일렀다.
“여러 어진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戒)를 받으셨고 입으로는 법의 말씀을 외우면서
언제나 온갖 중생을 안락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부처님의 사리를 서로 다투면서
함께 죽이고 해치려고 하십니까?
여래께서 형체를 남겨 널리 이익을 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사리는 지금 여기에 있으니
단지 나누어 주시면 됩니다.”
●
그때에 여래의 사리로 여덟 개의 탑을 세웠고,
아홉 번째는 병탑(甁塔)이 있으며,
열 번째는 탄탑(炭塔)이요,
열한 번째는 살아 계실 때의 발탑(髮塔)이 있다.
●
29. 석가천상용궁사리보탑기(釋迦天上龍宮舍利寶塔記)[**『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에서 나온 것임**]
●
한 몫은 모든 하늘들에게 주고
한 몫은 용왕에게 주었으며
한 몫은 여덟 왕에게 주었다.
●
30. 석가용궁불자탑기(釋迦龍宮佛(咨*毛)塔記)[**『아육왕경(阿育王經)』에서 나온 것임**]
●
난두화용왕은
스스로 나와서
용서를 빌며 말하였다.
●
‘반열반하신 뒤 겁이 다할 때에
온갖 경(經)과 계(戒) 그리고 가사(袈裟)와 발우[應器]를
저는 모두 가져다 이 탑 안에 간직해 두었다가
미륵(彌勒)이 내려오실 적에 다시 내어 놓겠습니다.’”
●
아육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용서하며
“잘 몰라서 그러했다”고 말하였고,
이 난두화용왕은 곧 모든 용들을 시켜서
다시 아육왕의 궁전을 본래의 장소에 놓아두게 하였다.
●
『석가보』 ♣1047-004♧
◎◎[개별논의] ♥ ❋본문
석가보 제 4 권에 부처님이 열반에 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부처님의 열반의 의미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생사과정을 겪어 죽는 것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과거 글 가운데 정리 중인 부분을 뽑아 붙여 살피기로 한다. ● 과거글 정리 작업 부분 - (별도 참조 불요)
● 수행의 목표점 [ 고멸제]
- 근본적인 고의 제거방안 [자성청정열반, 유여의열반, 무여의열반, 무주처열반]
생사과정의 정체를 깊게 관한다고 하자.
그것은 처음부터 근본 무명이 그 근원이 됨을 이해하게 된다.
본래 그런 생사 생멸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생사고통도 역시 본래는 얻을 수 없다. [자성청정열반]
그러나 어떤 이가 망집을 일으켜 생사현실에 임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바탕에서 생사현실이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이 자세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어떤 이가 근본 무명 어리석음에 바탕해 임한다.
그러면 일정한 근본 정신의 구조와 기제에 바탕해 처음 일정부분을 자신으로 잘못 취한다. [구생기신견]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다시 각 정신을 분화 생성시킨다.
그런 가운데 매 생을 맞이해 임하게 된다. [ 무명-행-식-명색-6입-...12연기]
그리고 그런 정신 구조와 기제를 바탕해서 현실을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정신 표면에서 감각해 얻는 일정한 내용 가운데 일부분을 다시 자신으로 잘못 분별해 취하게 된다. [분별기신견]
그런 가운데 매순간 자신으로 여겨 취하는 내용을 죽 이어 나열한다고 하자.
그것이 생사과정에서 윤회를 겪어 나가는 과정이 된다.
또 이것이 한 생에서는 어린아이에서 노인이 되기까지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들이 된다.
즉 어린 아이 때는 그러그러한 부분을 자신으로 잘못 여겨 취해 임한다.
그리고 노인이 된 때는 또 이러이러한 부분을 자신으로 잘못 여겨 취해 임하는 것이다.
그렇게 각 순간에 자신으로 잘못 여겨 취하는 부분을 나열하면 그 주체의 한생안의 모습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과정은 이처럼 어리석음에 바탕해 일정부분을 처음 자신으로 취한 것이 근본 원인이 된다.
결국 한 주체의 생사나 생멸은 바로 이런 망집에 바탕한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근본정신의 구조와 기제가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 것이다.
- 유여의열반
생사현실에 처해 생사고통과 생사 생멸의 묶임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려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먼저 자신을 생사고통에 묶게 하는 업을 중지해야 한다.
그리고 업의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
이미 쌓아 놓은 업의 장애가 그런 생사를 받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업을 행하게 하는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
망집을 일으키면 본래 얻을 수 없는 생사, 생멸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올바른 깨달음을 통해 생사,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신견 등의 망집을 근본적으로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 신견, 변견, 사견, 견취견, 계금취견, 탐, 진, 치, 만, 의 ]
그런데 이들 번뇌는 출생 이전 단계에서부터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그 근원과 뿌리가 깊다.
그래서 신견, 변견, 탐,진,만,의 등의 근원적인 번뇌까지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번뇌를 근본적으로 완전히 끊어 제거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 고통을 벗어나고 다시 받지 않게 된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일단 생사 묶임에서 벗어난 해탈의 상태에 이른다.
그렇다해도 일단 한 생을 출발한 이상, 생은 일정 기간 유지된다.
즉, 아직 과거의 업을 통해 받은 신체는 아직 멸하지 않고 남아 있다.
이것을 유여의열반이라고 칭한다.
- 무여의열반 [회신멸지]
처음 망집에 바탕해 일정한 부분을 취해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그런 주체의 생사나 생멸이 있다고 잘못 여긴다.
이런 경우 수행을 통해 업장을 제거한다.
그리고 망집번뇌를 제거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을 이룬다.
그리고 더 이상 망집을 일으켜 생사에 묶이지 않게 되었다고 하자.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유여의열반 상태에 이르러 머물게 된다.
그런데 이후 생을 출발한 상태에서 얻게 된 몸까지 생사과정을 통해 제거된다고 하자.
그리고 더 나아가 이후 망집을 일으키게 하는 정신구조와 기제를 제거한다고 하자.
그래서 가장 근본되는 정신만 남는 상태에 이른다고 하자.
그리고 다시 망집을 일으키지 않도록 한다.
그러면 이후 다시 그런 망집을 일으킬 근본이 제거된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후 다시 생사에 묶이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러면 이것을 무여의열반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이를 회신멸지의 상태라고도 표현한다.
평소 망집에 바탕해 현실에 각 요소(5온)나 그 생멸 생사가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러나 망집을 완전히 제거한다고 하자.
그러면 물(物)ㆍ심(心)의 속박도 사라져 없는 상태가 된다. [멸滅]
그래서 탐진치 3 독을 비롯해 온갖 번뇌의 시끄러움이 함께 사라져 없다.
그리고 본 바탕 실재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만 남아 드러나게 된다. [정靜]
그리고 3계의 온갖 근심과 고통이 사라져 얻을 수 없게 된다. [묘妙]
그리고 온갖 재액(災厄)이 사라져 여읜 상태가 된다.[리離]
그래서 본래 실재는 생사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니르바나의 상태만 드러나 남게 된다. [이계과, 택멸, 무위열반]
그래서 이런 상태가 결국 망집에 바탕한 생사의 묶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안이 된다.
그래서 이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고통이 제거된 상태로 제시되게 된다. [고멸제]
이는 비유하면, 망상에서 시작한 꿈에서 깨어나는 상태와 같다.
그리고 더 이상 앞으로는 꿈에 들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
어떤 이가 꿈을 꾸다가 깬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상태와 이를 대조해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한다.
그래서 꿈에 대해 다음처럼 이해하게 된다.
꿈 내용은 실답지 않다.
그래서 하나같이 쓸데없다.
예를 들어 꿈에서 바다에 빠졌어도 관계없다.
꿈에서 황금을 얻었어도 쓸데 없다.
그렇다고 본래 없는 황금이 생겨나는 일이 없다.
또 꿈에서 얻었던 황금을 강도에게 뺏기거나 잃어버려도 관계없다.
그렇다고 없던 황금이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 일 자체가 없다.
이렇게 이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이가 꿈만 들면 위 사실을 다 망각한다.
그리고 또 꿈에 휘둘린다고 하자.
그러면 문제다.
그런 경우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수행을 통해 얻는 유여의열반, 무여의열반 의미다.
어떤 이가 꿈속에서 노력해서 자신이 대하는 이들 내용이 꿈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직 꿈은 다 깨지 못한 상태라고 하자.
유여의 열반이란 이와 성격이 같다.
그러다가 꿈을 마저 다 깬다고 하자.
이 상태에서는 꿈 속의 것들은 모두 의미가 잃는다.
그리고 꿈에서 자신 몸이라고 잘못 여겼던 것이 엉터리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꿈속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알았다고 여긴 것도 엉터리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현실에서는 모두 쓸데없고 실답지 않음을 이해한다.
즉, 꿈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
그래서 다시는 이처럼 실답지 않은 꿈을 되풀이 꾸지 않으려 한다고 하자.
그래서 이들 내용을 모두 제거하고, 다시 발생할 근거까지 제거한다.
그래서 다시 잠이 들고 꿈을 꾸지 않는 상태가 된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 그런 내용을 다시 겪지 않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러면 현실을 가리우던 꿈은 사라지고 현실만 대하게 된다.
무여의열반이란 이와 성격이 같다.
그래서 이를 회신멸지라고 표현한다.
다만 꿈과 무여의열반 등은 다른 점이 있다.
꿈을 깨면 그는 곧바로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을 놓고 대조하여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실재와 현실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본 바탕 실재는 어떤 주체와의 관계를 떠나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이다.
그런데 한 주체는 그 주체의 마음이 화합해 얻어낸 내용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주체가 본 바탕 실재를 직접 얻어낼 도리는 없다.
그렇기에 실재의 내용을 얻어 현실과 비교할 도리도 없다.
또 실재는 실재를 아는 일도 없다.
그래서 실재가 공하고 얻을 수 없음은 현실에서 실재를 헤아릴 때 행하는 판단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관계에 있다.
- 본래 자성청정열반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에 묶인 상태라고 하자.
이런 상태에서 처음 수행을 시작한다.
그래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열반의 상태를 얻게 된다. [택멸, 이계과, 유여의열반, 무여의열반]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이를 위해 수행을 행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런 수행이 그런 열반을 얻는 원인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그 열반이란, 본래 없다가 그런 수행으로 비로소 생겨나는 어떤 상태가 아니다.
본래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이다. [자성청정열반]
이는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꿈에서 어떤 노력을 해서 꿈을 깬다고 하자.
그러면 그 꿈 내용이 다 사라진다.
그리고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
이 때 다음처럼 착각할 수 있다.
자신이 꿈 속에서 그렇게 꿈을 깨려 노력했다.
그래서 그런 노력으로 인해 그 현실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오해할 수 있다. [이계과, 택멸]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그 현실은 본래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이다. [자성청정열반]
어떤 이가 꿈에 들거나 않거나, 본래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이다.
자성청정 열반 상태도 이와 사정이 같다.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 열반은 본래부터 그렇게 갖춰져 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이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놓인 입장에서는 우선 이런 열반을 얻어내는 것이 의미가 깊다.
그러나 그렇게 해 얻어내는 열반 상태는 없었던 상태가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어떤 이가 최면 걸린 상태와 같다.
현실에서 최면에 걸렸다가 풀려 난다고 하자.
그 때 관객이 앉아 있는 객석을 의식하게 된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런 관객들이 최면든 상태에서의 일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다만 최면이 풀리는 순간 그런 현실이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여겨지는 것 뿐이다.
이것이 자성청정 열반과 유여의 열반이나, 무여의 열반의 의미 차이다.
- 생사현실 안에서 '자성청정열반'에 대한 이해가 갖는 의미 - 생사즉 열반
본 바탕 실재는 본래 생사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본 바탕 실재에서는 그런 사정으로 생사고통을 문제삼은 적도 없다.
또 그런 사정으로 본 바탕 실재에서는 생사고통을 제거하라고 요구하는 일도 없다.
또 본 바탕에서는 이런 일을 안다는 일도 없다.
또 어떤 주체가 이런 내용을 이해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거나 겪지 않거나, 마찬가지다.
어떤 주체가 이해를 하거나 않거나, 본 바탕은 차별을 얻을 수 없다.
본 바탕은 이에 차별없이 본래 그런 니르바나 상태다. [자성청정열반]
본래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각 주체가 개별적으로 망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을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과정을 겪어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본 바탕은 이와 관계없이 니르바나 상태다.
한 주체가 생사고통을 겪거나 이를 벗어나거나, 언제나 그런 상태다.
그런데 본 바탕이 그렇다고 해서 생사현실내 생사고통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본 바탕은 자성청정열반의 상태다.
그렇다해도 망집을 일으킨 주체는 생사현실을 실답게 여기며 고통을 받는다.
따라서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이를 그대로 방치할 도리가 없다.
수행을 통해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망집을 제거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각 주체는 수행을 통해 유여의열반, 무여의열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한 주체가 망집을 제거하고 열반을 증득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없었던 열반이 새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각 주체가 얻는 그런 열반은 본래 있었던 상태다.
따라서 유여의열반, 무여의열반은 각 주체의 문제일 뿐이다.
단지 망집을 일으킨 주체가 원래의 상태를 가린 망집을 제거하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생사고통을 겪는 입장에서는 이 열반이 갖는 의미가 크다.
각 주체가 생사고통을 겪거나, 열반에 이르거나 본 바탕은 차별이 없다.
자성청정열반은 본래 이런 내용을 나타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자성청정 열반이 생사고통을 겪는 주체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다음 경우다.
망집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 있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본 바탕 실재에는 그런 생사나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수행자가 현실에서 생사현실의 본 바탕이 공함을 이해한다.
그래서 본래 본 바탕이 자성청정열반의 상태임을 생사현실 안에서 이해한다고 하자.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생사현실의 본 바탕이 이러함을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현실에서 그런 깨달음과 이해가 망집을 제거하게끔 이끌어 줄 수 있다.
따라서 '생사현실 안에서' 본 바탕이 자성청정열반 상태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사현실 안에서' 어떤 이가 그 본 바탕이 자성청정열반임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가 그런 이해를 하지 않아도 본 바탕은 그렇다.
그러나 그런 이해를 하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그 주체에게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이해를 통해 수행자는 현실이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꿈과 성격이 같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론상 생사현실이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도 평안히 임할 수 있게 된다.
생사현실은 이런 본 바탕과 대조하면 꿈처럼 실답지 않다.
생사현실 안에서 본 바탕 진여의 측면을 99% 취해 여여하게 임한다고 하자.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겪는 고통도 평안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고 하자.
생사현실 일체를 마치 생사고통을 벗어난 니르바나처럼, 여여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경우는 생사현실이 곧 열반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경우는 생사현실을 굳이 제거할 필요도 없게 된다.
비록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더라도 그대로 두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의 무량한 선법을 제거하지 않게 된다.
앞에서 생사의 묶임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방안을 보았다.
그런데 이는 생사현실 안의 다른 선법까지도 함께 제거하는 문제점이 있게 된다.
생사현실안에서 고통을 겪는다고 하자.
그래서 처음 이런 생사고통의 제거를 원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는 고통만 제거하기를 원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고통과 관련없는 부분은 제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망집에 바탕해 임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그 외 나머지 부분들도 결국 고통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한편 생사현실 일체는 다 함께 망집에 바탕한 것이다.
그리고 생사현실 일체는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래서 망집에 바탕해 겪는 생사현실 일체를 완전히 제거하는 방안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 몸에 종기가 나서 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이 종기를 몸에서 제거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몸의 나머지 부분은 남겨두기를 원한다.
그런데 몸의 나머지 부분이 결국 이런 종기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관하게 된다.
그래서 종기를 없애기 위해 몸 전체를 없앤다고 하자.
그러면 처음 종기만 없애려고 했던 취지와는 달라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이들의 본 바탕이 공함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래서 본 바탕에서는 그런 생멸이나 생사고통 일체를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본래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잘 관한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생사현실 안에서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현실 안에서도 생사현실을 곧 열반으로 관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어떤 이가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임을 이해하고 꿈꾸는 상태와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꿈을 꿀 때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그런데 꿈을 깨면, 그것이 실답지 않은 꿈임을 이해한다.
그런데 다시 꿈을 꾸면 그것을 잊고 또 악몽에 시달린다고 하자.
그런데 꿈 일체는 실답지 않고 부질없다.
그래서 그는 꿈을 깬 다음 다시는 꿈에 들지 않는 것을 해결 방안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가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이라는 사정을 이해하며 꿈을 꾼다고 하자.
이 경우는 꿈인 줄 알고 꿈을 대하는 상태다.
그러면 설령 꿈을 꾸어도 큰 문제가 없다.
이는 꿈을 깬 다음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며 대하는 상태와 마찬가지가 된다.
그런 경우 꿈이 어떤 내용이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는 그냥 꿈을 꾸고 임하더라도 무방하다.
그래서 이제 꿈 안에서 그것이 꿈임을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꿈을 꾸면서 꿈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그가 그것이 꿈임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침대가 놓인 현실의 측면을 99% 취해 이를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꿈을 깨고 난 후 꿈을 대하는 상태와 마찬가지가 된다.
생사현실도 마찬가지다.
생사현실 안에서 본 바탕의 측면을 99% 취해 현실을 대한다고 하자.
즉 본 바탕이 본래 자성청정열반임을 이해한 가운데 현실을 대한다.
그러면 생사현실이 침대에 누어 꾸는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생사현실 안의 내용이 어떻더라도 열반과 같은 상태에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고 하자.
그래서 생사현실을 실답게 여기면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고 하자.
본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니르바나 상태다.
그럼에도 그런 니르바나 상태를 거꾸로 생사고통으로 여기는 것이 된다.
이는 '열반 즉 생사'로 생사현실을 대하는 상태다.
그리고 생사현실안의 일반적인 경우는 오히려 이런 상태다.
그래서 이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즉, 수행을 통해 '생사 즉 열반'의 상태임을 우선 이론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에서 그런 측면을 취해 생사현실을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생사현실에 임하면서도 생사고통의 묶임을 제거한 상태로 여여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생사현실에서 '본래 자성청정열반'이라는 사정을 '이해함'이 중요한 사정이다.
- 중생제도를 위한 방안 [무주처열반]
무주처열반은 수행자가 적극적으로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을 제도하는 일과 관련된다.
어떤 이가 수행을 통해 망집을 제거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을 완전히 벗어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생사현실에 남아 있는 다른 중생이 여전히 문제로 남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경우 그는 이들 중생에게 도움을 줄 수 없게 된다.
이런 경우 남은 각 주체는 각기 알아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대단히 힘들게 된다.
그런데 수행자가 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제도하려 한다고 하자.
즉, 생사현실에 묶인 이들을 도와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를 원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수행자가 생사현실을 벗어나면 곤란하다.
그래서 중생과 떨어지면 안 된다.
그러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그 수행자는 일단 중생들이 처한 생사현실에 들어가 함께 임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중생들과 입장을 같이해 현실을 대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점차 다른 중생들이 꿈을 깨어나도록 이끌어줘야 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중생들과 함께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야 한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수행에는 생사현실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의 극한 고통에 당면하게 될 경우도 많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수행자가 그것을 회피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수행자는 생사현실의 어떤 극한 고통에 당면해서도, 이를 평안히 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경우 수행자 자신부터 생사 즉 열반임을 잘 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본래 생멸이나 생사를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본래 생사현실의 본 바탕이 자성청정열반의 상태임을 이해해야 한다.
즉, 생사현실 일체의 본 바탕이 청정한 열반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꿈과 마찬가지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 임하는 것이 우선 요구된다.
그리고 이를 단지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런 이론적 이해를 현실에 적용해 임할 수 있어야 한다. [무생법인]
그래서 상을 취하지 않고 평안히 임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안인의 성취]
그리고 더 이상 망집을 일으키는 범부의 상태로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불퇴전위]
이처럼 생사현실 일체를 모두 생사고통을 벗어난 열반처럼 평안히 임할 수 있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곧 이 상태가 생사고통을 완전히 멸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꿈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꿈을 꾸는 상태와 비슷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런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나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자는 이처럼 오직 본 바탕 측면만 취해 열반에 머물려 하면 곤란하다.
중생제도를 위해서는 생사현실 내용이 중요하다.
생사현실 안의 중생들이 이들 생사현실 내용을 집착하고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다시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할 방편과 지혜를 구족해야 한다.
그래서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자도 오직 본 바탕 측면만 취하면서 생사현실을 외면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을 다 함께 적절하게 취해야 한다.
즉, 수행자는 본 바탕의 측면과 생사현실의 측면을 2 중적으로 함께 취해 적절히 임해야 한다.
우선 본 바탕의 자성청정열반의 측면을 통해 생사현실 안의 생사고통과 번뇌를 모두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행과정에서 겪는 약간의 어려움과 고통도 이를 통해 잘 극복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다시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필요한 방편을 모두 잘 구족해야 한다.
또 이를 위해 생사현실에서 수행자부터 복덕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그래서 먼저 보시를 비롯한 계의 덕목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수행도 생사현실에서 상에 머물지 않는 가운데 집착없이 원만히 성취해야 한다.
그렇게 복덕자량이 구족해야, 이후 생사현실에서 지혜자량을 구족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에서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서 이런 2 중적 측면은 다음을 요구한다.
우선 범부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집착한 가운데 생사에 묶인 상태가 되면 곤란하다.
그래서 생사가 곧 열반임을 이해해 생사고통을 벗어난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 열반에 너무 집착하지도 않아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 일체를 싫어하며 외면하고 피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나 열반 어디에도 집착해 머물지 않아야 한다.[無住]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한다고 하자.
이 경우 우선 생사 즉 열반을 잘 관한다.
즉, 생사현실에서 그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잘 관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의 본 바탕이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는 니르바나임을 잘 관한다.
이는 꿈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꿈을 꾸는 상태와 비슷하다.
만일 오로지 이것만 강조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현실은 실답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그대로 방치하고 외면해도 무방하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 중생이 망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망집을 일으킨 정도에 비례해 생사고통을 실답게 여기며 겪어 나간다.
그래서 이것이 실답지 않다고 하여 이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그래서 단지 이런 상태에만 치우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수행자는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그런 생사현실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런 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한 노력을 행한다.
또 이를 위해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그 생사현실 안에서 중생을 이롭게 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보시를 행한다.
이 경우 상에 머물지 않고(무주상) 집착을 떠나야 한다.
그런 가운데 무량한 보시를 행해 나가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한다.
그러나 한편 본 바탕에서는 그런 중생 자체를 얻을 수 없음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집착을 떠난 가운데 중생을 제도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도록 노력한다.
그런 가운데 수행자 자신과 중생이 모두 생사의 묶임에서 떠난 열반의 상태에 이르도록 노력한다.
그래서 이를 무주처열반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k0650-t0099-001-01.html
◆vlvl9293
◈Lab value 불기2566/06/21 |
○ 2019_0405_151215_nik_ct33.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Katsushika-Hokusai-dragon-ascending-mount-fuji ○ 2018_0419_140440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venida_de_Don_João_II_Luanda_March_2013_03 ♥Mansilla de la Sierra ,Spain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상세정보=> https://buddhism007.tistory.com/5833 Mario Battaibi Accordeon - Ramona ♥단상♥ 날씨가 상당히 더워졌다. 그래서 이번에 연구원들이 시간을 내서 단체로 몰디브에 가서 모히또를 마시고 돌아왔다. 처음에 전 연구원이 함께 몰디브에 가자니 단순히 기대된다는 반응만 있었다. veronique sanson un amour qui m'irait bien 그러나 본 연구원과 함께 구글 여행사를 통해 직접 갔다 오고나니 조금 반응이 달라졌다. 꿈을 잘 그려가면 성취되기 마련이다. 현실에서도 토큰을 주머니에 갖고 있는 연구원을 철봉에 거꾸로 3 분간만 매달면 바로 해결된다. 20 여명의 연구원이 단체로 가면 비행기요금부터 할인받게 되므로 얼마 안 든다. 다만 본 연구원처럼 평생 백수인 경우는 아무리 매달아도 한계가 있다. Michel Pelay - Paradoxal Systeme 몰디브 섬에서 권장되는 수영은 참고로 플랭크톤 영법이다. 몸은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김연경 선수 - 손흥민 선수 - 박태환 선수가 되어 활동하는 기법이다. 이는 의학전문용어로 '등척운동'이라고 한다. 줄여서 플랭크 운동이라고도 한다. 김연경 선수 집에 강도가 들어왔다. 강도가 '꼼작말고' 그대로 가만히 있어. 이렇게 하고 물건을 다 가져갔다. 김연경 선수가 강도가 나간 다음 이렇게 웃었다. XX, 꼼작말라고 해서 꼼작 못할 줄 알고, 내가 몰디브가서 배구하고 축구하고 수영까지 하고 돌와왔는데 하나도 모르고 그냥 가넹. 이렇게 말하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고 한다. 플랭크톤 운동을 할 때 처음에는 손가락 발가락 정도는 약간 움직이며 해도 된다. 다만 아무리 플랭크톤 운동이라고 해도 탁구나 배드민튼 봅슬레이 이런 격한 운동은 업무를 보지 않을 때 하는 것이 좋다. 이들은 너무 격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연구를 하는 경우 등은 주의해야 한다. 한편, 플랭크톤 운동시는 마음에 vr 영상으로 띄울 참고 영상자료가 많이 필요할 수 있다. 어디서 배구를 하는가. 어디서 축구를 하는가. 어디서 수영을 하는가. 이런 부분이 섬세하게 중요하다. TV 화면에 직접 들어가도 된다. 다만 연구시에는 잘 안 된다. 몰디브가 노래에서 누드섬이라고 하는 듯 하다. 산호초로 만들어진 섬이라 그런 것 같다. 물론 몰디브를 직접 보기 위해 적금을 털어 비행기 타고 가도 된다. 설령 적금을 털어 가더라도 플랭크톤 운동이 연구실 안에서 먼저 잘 되야 한다. 왜냐하면 비행기 안에 오래 앉아 있게 된다. 이런 가운데 피떡이 혈관에 생기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플랭크톤 운동을 쉼없이 해야 한다. 이미 이런 사고가 보도된 적이 있다. 영국 스쿠버 선수가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안에 오래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피떡이 생겨 혈관을 막아 돌연사했다. 그래서 플랭크톤 등척운동기법이 평소 생활에 중요하다. 이렇게 하면 실제 운동한 것 70% 이상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다음에 또 기회되면 피지섬에 가서 피지나 몽땅 제거하고 돌아오기로 한다. ○ 몰디브1_ct35 ○ 몰디브2_ar37 ○ 몰디브2_ct12 ○ 몰디브3_ar8 ○ 몰디브5_ct28 ○ 몰디브5_exc ○ 몰디브6_exc ○ 몰디브7_ct33 ○ 몰디브섬7_exc ○ 몰디브섬9_ar40 ○ 몰디브섬9_ct4 ○ 몰디브와모히또1_exc ○ 몰디브와모히또4_ar35 ○ 몰디브와모히또4_ct4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몰디브는 어디에 있는가? 스리랑카 주변이다. 그런데 몰디브에서는 뭘 마셔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갑자기 물어보면 생각이 안 날 수 있다. 평소 잘 외어야 한다. 하와이 와이키키는 남태평양 ~ 알로하오에 춤 팜비치는 미국 플로리다 ~ 요트를 타고 럼주 마시기 몰디브는? 답: (시험중 모른다고) 뭘 뒤져? 뭐해 또? => 몰디브 모히또 (약간 억지로 결합시켜 외우기) 그러나 이곳을 정말 직접 가보려면 아무리 싸게 잡아도 1 인당 100 만원 정도는 있어야 한다. 미리 스킨 스쿠버 훈련도 해야한다. 그외 노력과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몰디브 풍광을 아무데서나 볼 수 있다. https://goo.gl/maps/ArsBwJfWpgGrwatC7 모히또 만드는 레시피도 돌아다닌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데서나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3 달간 여름내내 모든 연구원들이 몰디브 휴양지에 있는 것처럼 지내기로 했다. 휴양지에서 쉬듯 편안한 마음으로 지낸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평소 하는 활동을 즐겁고 평안하게 해나간다. 이렇게 까지 지원해주면 본 연구원이 연구원들만 위해서 너무 많이 쓴다고 비난받을 수 있다. 그러나 팀 연구원들이기에 이번 기회에 덤까지 막 선물하기로 한다. 그래서 잠잘때마저도, 몰디브에 있는 느낌으로 '잠까지' 평안하게 자버리도록 한다. 박수!!! 그리고 선물하는 김에 하나 더 --- 스킨 스쿠버도 인터넷에서 막 즐기도록 한다. 박수!!!! 링크를 알면 바로 가능하다. https://goo.gl/maps/3G5Nkhin4k1SNyg56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2/06/2566-06-21-k1047-004.html#9293 sfed--석가보_K1047_T2040.txt ☞제4권 sfd8--불교단상_2566_06.txt ☞◆vlvl9293 불기2566-06-21 θ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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