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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8일 수요일

불기2564-10-28_속고승전-K1075-007


『속고승전』
K1075
T2060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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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속고승전』 ♣1075-007♧





제7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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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續高僧傳卷第七 左
K1075

속고승전 제7권

대당 석도선 지음
이창섭 번역


2. 의해편 ③ [正紀 10人, 附見 4人]

1) 진(陳)나라 양도(楊都) 선무사(宣武寺) 석홍언전(釋洪偃傳)
2) 진나라 양도 흥황사(興皇寺) 석법랑전(釋法朗傳)
3) 진나라 양도 대선중사(大禪衆寺) 석혜용전(釋慧勇傳)
4) 진나라 양도 대팽성사(大彭城寺) 석보경전(釋寶瓊傳)명해(明解)
5) 진나라 양도 백마사(白馬寺) 석경소전(釋警韶傳)
6) 진나라 종산(鐘山) 기사사(耆闍寺) 석안름전(釋安廩傳)
7) 진나라 섭산(攝山) 서하사(栖霞寺) 석혜포전(釋慧布傳)승전(僧詮), 현변 (玄辯)
8) 주(周)나라 위빈(渭賓) 사문 석망명전(釋亡名傳)승곤(僧琨)
9) 위(魏)나라 업하(鄴下) 사문 석도총전(釋道寵傳)
10) 제(齊)나라 팽성(彭城) 사문 석혜숭전(釋慧嵩傳)



1) 진(陳)나라 양도(楊都) 선무사(宣武寺) 석홍언전(釋洪偃傳)


홍언의 속성은 사씨(謝氏)이며 회계현(會稽縣) 산음(山陰) 사람이다. 
할아버지 사무(謝茂)는 공손하고 온화하여 신중하게 처신하였고 세속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버지 사장(謝藏)은 경서와 역사에 박식하여 문장을 잘 지었는데, 
양나라(梁)때 형양(衡陽)의 왕이 그 소문을 듣고 인재라고 인정하여 데려다가 벗으로 삼았다.
홍언은 풍채가 뛰어났으며 젊은 나이에 일찍이 도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낮에는 경론을 읽고 밤에는 시서(詩書)를 읊으면서,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관이 있다고 하여도 한 번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다 하여 고향 마을에서 칭송되었다.
자라나면서 수도에 가서 법문을 듣고 두루 수론(數論)에 대한 강의를 듣다가 후에 용광사(龍光寺)의 혜작(慧綽) 법사를 만나 곧 마음을 맡기고 학업을 배웠는데, 
혜작 법사가 특별히 친근하게 대해주면서 뛰어난 인재로 여겼다. 
그리하여 함께 배우는 동료들이 그를 다시 보게 되었고, 
더욱 서로 추대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2~3년 사이에 곧 그 깊고도 심오한 이치를 다 깨닫고 마침내 강연(講筵)을 열어 대중을 모아 『성실론(成實論)』을 명백하게 드러내 보였다.
그는 행실이 바르고 여유롭고 우아하였고, 
말하는 억양이 순조로웠으며 후배들이나 선배들이 의심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환하게 알고 있었다. 
그 소문이 널리 퍼지자 경을 옆에 끼고 책 보따리를 등에 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허망한 곳을 해매다가 진실한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법륜(法輪)을 믿고 받아 지니고, 
모든 경부(經部)를 모두 지녀 전에 없던 용기를 얻게 되니 그가 분석하는 해석에 의지하였다.
그의 오랜 희망은 한량없이 넓었으나 옛 문장에만 머물러 있게 되자 홍언은 생각을 구름 속 하늘 끝에 두고 한 번도 다른 스님들과 만난 일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선배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지만 그는 생각을 돌리지 않았다. 
이때부터 찾아와 배우는 사람들과 틈이 생겨 그의 법문을 듣는 사람도 드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뜻을 버리고 한적한 승방에서 그 도를 높이 다스렸다. 
간혹 서적을 찾아 역사를 더듬었으며 널리 구하고 많이 보니, 
가을의 물이나 봄의 누대와 같이 맑은 문장이 멀리 속세를 벗어나고 웅장한 생각은 구름같이 비껴가면서 꽃다운 문장이 비단처럼 찬란하였다.
또한 그는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에 능하여 칭송을 받았다. 
그리하여 당시 속세에서 섬세하기는 지엽(芝葉)보다 더 곱고 아름답기는 은구(銀鉤)의 극치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모습과 의학(義學), 
시와 글씨를 합쳐서 4절(絶)이라고 불렀으며, 
당시의 영걸(英傑)들이 모두 추대하고 칭찬하였다.
양나라 태종(太宗) 황제가 황태자로 있을 때 그의 준수함을 사랑하여 그를 환속(還俗)시켜 학자가 되게 하려고 하였으나 홍언이 자기의 뜻을 고집하여 되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태자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마침내 양나라의 무제(武帝)가 중운전(重雲殿)에서 강론의 자리를 마련하고 덕망 있는 스님들을 초청하여 법에 대한 강의를 구하였는데, 
홍언은 오랜 장로의 나이가 못 되어 좌석의 차례가 훨씬 뒤에 배치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소리높이 말하며 높은 경지의 이론으로 정밀한 이치가 신의 경지에 들어갔기에 황제가 오래도록 탄복하여 크게 칭찬하자 그를 주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홍언은 모습과 행동거지가 태연자약하였고 정신을 지킴이 처음과 같았기에 모두가 그의 고상하고 깨끗한 행실에 탄복하였다. 
다음 황제가 그를 이끌고 후당(後堂)에 나아가서 더욱더 그를 예의 있게 대하였다.
그후 호족이 나라를 침범하여 싸움과 기아(飢餓)가 계속되자 그는 진운산(縉雲山)에 피신하여 산천을 돌아보면서 살았는데, 
호족이 산에 사는 스님도 쫓아버렸기에 마침내 재[嶺]을 넘어 난을 피하여 떠돌이 생활로 남쪽 땅을 유량하면서 마음이 편안한 날이 없었다.
양나라의 장사왕(長沙王) 소소(蕭韶)가 영주(郢州) 땅을 지배하였는데, 
스님의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내서 찾아오려 하였으나 갑자기 저궁(渚宮)이 함락(陷落)되어 나라가 뒤집혀지고 상류(上流)가 막히고 어지러워서 곧 그곳을 떠나 동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어 마음도 스스로 고요해지고 산천을 돌아볼 여유도 있게 되어 마침내 지팡이를 짚고 유람길에 올라 운문정사(雲門精舍)와 같은 곳 등 아름다운 산수를 두루 돌아보았다. 
그는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오군(吳郡)의 승평정(昇平亭)에 올라 이렇게 시를 지었다.

쓸쓸히 해는 저무는데
청명한 하늘 바라보니 고요하구나.
나그네 잠시 지팡이 짚고
높은 곳에 올라 객정(客情)을 씻어내네.
강과 들에는 옛 자취 그대로인데
마을 옛 터엔 간혹 이름이 바뀌었네.
간밤의 연기 첫새벽에 떠돌고
아침해는 맑게 개인 하늘 비치네.

홀로 노닐며 따라온 벗 없고
천천히 걸어도 만나는 이 적어라.
알았노라, 
내가 의탁할 곳 아니거니
완상하는 마음과 그 어찌 어울릴쏘냐.

그리하여 마침내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서 암봉(巖峰)에 몸을 의탁하고 그곳에서 생을 마칠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절을 수리하고 대중을 모아 업을 닦았다.
그후 진(陳)나라 무제(武帝)가 나라를 평정하고 천명(天命)을 바꾸어 새로운 나라를 건립하자 수도의 옛 승단(僧團)에서 여러 번 초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산속의 대중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나는 고생고생하며 알뜰히 학문을 쌓기를 50여 년이나 하였는데, 
난리를 만나 떠돌아다니면서 미처 설법을 베풀 만한 겨를이 없었다. 
지금 기회가 왔는데도 이것을 이루지 않는다면 어떻게 법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천가(天嘉) 연간 초기에 수도로 가서 선무사(宣武寺)에서 강론을 하니 학도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숙연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설법을 좋아하여 피로하지는 않았지만 그윽한 마음은 항상 맺혀져 있어 강론에 틈이 생길 때마다 종산(鐘山)의 개선사(開善寺)와 정림사(定林寺)로 가서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좌선(坐禪)하곤 하였다. 
또 때로는 붓을 들고 시를 짓기도 하였는데 그때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지팡이 짚고 높은 산 걸어가려고
걷어 올리고 사립문을 나서니
성긴 담쟁이덩굴 더욱더 빽빽해지고
그윽한 길 다시금 꼬불꼬불해지네.

높다란 나무엔 가지 그림자 가늘고
한낮의 산속엔 새소리 드문데
돌이끼에 때로는 나막신 미끄러지고
벌레그물이 옷자락에 달라붙누나.

시냇가엔 영지버섯 환히 빛나고
바위 위엔 흰 구름 서리었건만
적송자(赤松子:신선)는 노을을 헤치며 떠났고
상생(常生:신선)은 쓸쓸히 돌아오지 않누나.
궁벽한 골짜기라 오가는 사람 없는데
계수나무에 이끌려 홀로 못 잊어하네.

때마침 제나라의 사신이 화친(和親)을 통고하러 와서 배와 수레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때 최자무(崔子武) 등이 외교수완이 가장 능하였는데 그 사신을 만나 접대하는 일을 논의하였으나 적합하게 추천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세조(世祖) 문황제(文皇帝)는 홍언 스님이 내외의 학문에 박식하고 민첩하여 사신과 대항하여 말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하면서 황제의 명으로 접대하는 일을 총괄하여 손님에 대한 예의를 도맡아 보게 하였다.
그는 일을 주도함에 온아(溫雅)하였고 용모와 행동거지는 반듯하고 법도가 있었다. 
황제의 큰 뜻을 자세히 말해주고 황제의 덕을 칭송하여 빛내어 주며 재치 있는 말과 변론으로 진문(眞文)으로 윤색하고 사신을 인도하면서 자비심을 베풀었다. 
최자무 등은 미리 황제의 명을 받아 북쪽 변방에서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 일로 황제는 감탄하고 칭찬하여 후한 혜택을 일반 법도보다 갑절이나 내려주었고 모두가 그에게 공을 돌아가게 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해에 예전에 앓았던 병이 재발하여 법문을 듣는 사람도 다시 드물어졌다.
그는 작은 방에 머무르면서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허용하였으며, 
가슴속에 품은 뜻을 버릴 수 없어 비연(斐然:아름다운 모습)한 정을 지니고 마침내 수십 권의 『성실론소(成實論疏)』를 저술하여 정밀한 논리를 분석하였으니 그 구상이 몹시 깊었다.
그러나 병이 점차 위급해지면서 그가 계획한 일을 더 진척시키지 못하고 천가(天嘉) 5년(564) 9월 21일에 임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과 기운은 어둡지 않아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였다.
“중생들은 탐내는 마음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고 어두워지는 것이다. 
자기의 것에 대하여 탐욕을 내면 털 한 가닥이 떨어지는 것도 아깝고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면 영원히 싫어하거나 만족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게 된다. 
심지어 몸이 죽은 후에도 그 묘지를 높게 쌓고 그의 혼백을 담는 관을 겹으로 만들게 하며 반드시 구천(九泉)으로 내려가서도 다시 사방으로 이웃을 맺으려고 할 것이니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그러나 황보밀(皇甫謐)과 양왕손(楊王孫)은 나의 뜻을 조금 아는 사람이다.
비록 모여서 무덤 속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아직도 처음 제도하려는 마음을 알지 못한다. 
지금 내가 눈을 감은 뒤에 이 고깃덩이와 같은 천한 몸을 하늘에 나는 새와 숲속을 달리는 짐승 등 모든 중생들에게 보시하여라. 
만약 나의 전생의 몸에 빚진 것이 있다면 이것으로 그 빚을 갚겠다. 
그리고 갚을 빚이 없다면 나를 시주 집안에 태어나게 할 것이다. 
이 미미한 마음도 역시 보리(菩提)를 지향하는 것이니, 
이 마음을 함께 지니지 않는 중생은 없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 합장하고 선무사(宣武寺)에서 입적하였는데, 
향년 61세였다.
스님이 입적하자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측은해하고 슬프게 여겼다. 
그리고 그달 22일에 종산(種山) 개선사(開善寺)의 동쪽 언덕에서 시타장(尸陀葬:
숲에 시신을 버리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홍언은 처음 속세를 떠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오직 학문에만 힘쓰면서 검박하고 절도 있게 살아가고 누더기 옷을 입고 화려하고 넓은 세계의 일을 바라지 않았으며, 
감정을 인연으로 하여 흥언을 건드릴 때마다 그 감정을 서술하였는데 문체가 맑고 깨끗해서 뒤를 이를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가 묶어서 저술한 글[篇章]은 손실 따라 흩어져 없어졌다가 후세 사람들이 그것들을 수집하여 20여 권으로 만들었는데, 
전란(戰亂)을 만나 없어지고 잃어버렸으나 아직도 여덟 축(軸)이 남아 있던 것을 진(陳)나라 태건(太建) 연간에 학사(學士) 하준(何儁)이 이를 나라에 올리자, 
나라에서 그것을 비각(秘閣)에 보관하였다.




2) 진나라 양도 흥황사(興皇寺) 석법랑전(釋法朗傳)

법랑의 속성은 주씨(周氏)이며 서주(徐州) 패군(沛郡)의 패현 사람이다. 
할아버지 봉숙(奉叔)은 제나라 급사(給使) 황문시랑(皇門侍郞)과 청주(靑州) 자사를 역임하였으며, 
아버지인 신귀(神歸)는 양나라의 원외랑(員外郞), 
산기상시(散騎常侍)와 패군(沛郡) 태수를 역임한 사람이다.
법랑이 어머니의 태안에 임신될 때, 
그의 어머니 유씨(劉氏)는 꿈에서 신인(神人)이 누전(樓殿)을 타고 와서 품속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꿈속에서 말하기를 “몸은 허공과 같다”고 하였는데 꿈에서 깨어나니 꿈에서 말한 것과 같이 몸이 가볍고 빈 것 같았다. 
그리하여 오신채와 잡다한 맛을 지닌 음식은 이로 인하여 모조리 먹지 않았다.
태어나서 이를 갈 나이가 되자, 
보통 아이보다 뛰어났으며 효도와 공경심을 순후하게 갖추었고 지조가 곧바르게 섰다. 
그의 집안은 여섯 개의 군(郡)에 번창한 집안으로서 기세는 세 곳의 변방을 덮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군사훈련을 익혔으며 일찍이 행진(行陣:陣을 치는 병법)을 배웠다. 
그는 검소하게 자신을 다스려 총애나 모욕으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가절도사(假節度使) 영원장군(寧遠將軍) 서자언(徐子彦)의 북벌(北伐)이 시작되자, 
대문에 긴 날창을 설치하고 앉아서 큰 나무 아래서 쉬면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병(兵)이란 흉기이고 몸이란 고통의 원인이다. 
욕망의 바다와 사악한 숲속에서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21세 때 양(梁)나라 대통(大通) 2년(528) 2월 2일에 청주(淸州)에서 출가하였다.
그는 양도(楊都)에 가서 배우다가 대명사(大明寺)의 보지(寶誌) 선사를 찾아가서 모든 선법(禪法)을 이어받았으며, 
아울러 이 절의 단 율사(彖律師)가 진행하는 계율의 본문강의를 듣고, 
남간사(南澗寺)의 선(仙) 스님으로부터 『성실론(成實論)』 강의를 들었으며, 
죽간사(竹澗寺)의 정(靖) 스님으로부터 『아비담론(阿毘曇論)』 강의를 들었다.
당시 그의 명성은 수도를 뒤흔들고 가르침을 받는 대중들에게 신처럼 높이 평가되었으며, 
입과 귀를 가진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눈으로 보기 위하여 서로 다투며 달려오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영취산(靈鷲山)의 미묘한 법을 입으로 제창하는 사람들은 무리를 이루었으나 그것을 넓혀 나갈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용수(龍樹)보살의 도풍은 종사(宗師)가 끊어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예전의 전기에 기록되었다.
섭산(攝山)의 법랑 스님이 그 심오한 진리를 해석하고 미세한 종지를 헤아리자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가상하게 여겼다. 
사람의 시대는 한번 가면 영원토록 돌아오지 않지만 도법을 이어받은 사람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 산의 지관사(止觀寺) 승전(僧詮) 법사는 『지도론(智度論)』ㆍ『중론(中論)』ㆍ『백론(百論)』ㆍ『십이문론(十二門論)』과 『화엄경』ㆍ『대품경(大品經)』 등을 받아 소화하였다. 
이에 장부(藏部)를 두루 합쳐서 그윽하고 미세한 뜻을 탐구하여 정밀하고 새롭게 내용을 밝혔고, 
글월에는 빛나는 관(冠)을 머금고 있었으며,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면서 몸과 마음을 두텁게 하는 것을 일삼았으니 이 스승의 공은 갑절이나 이룩되었다는 것이 여기에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영정(永定) 2년 11월에 황제의 명을 받들고 수도에 들어가 흥황사(興皇寺)에 머무르면서 그곳을 다스리며 강론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화엄경』과 『대품경』과 네 논장(論藏)의 글과 뜻에 대하여 선대들이 밝히지 못한 이치와 후진이 줄여서 생략한 내용을 법랑이 모두 지적하여 근원과 종지를 밝혔다. 
그로 하여 그의 유능한 언변은 기운이 우뚝하고 화창하게 맑고 화목하여 쉽게 깨달을 수 있었으며, 
항상 대중이 천여 명에 달하여 복덕과 지혜가 더욱 넓게 퍼졌다. 
그로 하여 법문을 듣는 스님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땀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고, 
법의(法衣) 천 벌이 쌓였다가 흩어지면서 항상 끊이지 않고 모여들었다. 
그는 한번 법좌에 오를 때마다 한 벌의 옷을 갈아입고 앞에서 말한 경론을 밝히기를 스무 차례씩이나 되풀이하였는데, 
25년 동안 끊어지지 않고 그의 풍조가 번성하였다. 
그 사이에 사부대중을 일으켜 세웠는데 두 궁중의 법륜(法輪)이 당시 비길 데 없을 정도로 화려하였다.
그후 태건(太建) 13년(581) 9월 25일 신축(辛丑)일 한밤중에 절에서 입적하였는데, 
향년 75세였다. 
그리하여 곧 그 달 28일에 강승현(江乘縣) 나락리(羅落里) 섭산(攝山)의 서쪽 영마루에 안장하였다.

승전(僧詮)

처음에 섭산의 승전이 법랑 스님에게 배우면서 심오한 뜻을 밝힌 것은 오직 『중관(中觀)』에만 있었다. 
처음부터 마음을 모아서 이치를 분석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깨끗한 말과 합치될 수 있으며 깊숙한 숲속에 자취를 감추어 선(禪)의 진미를 맛볼 수 있었겠는가.
훗날 네 스님들이 그를 찾아가서 3업(業)의 도움을 받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설법하지 않겠다고 서약하였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자 마침내 설법을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승전 스님이 명하며 말하였다.
“이 법은 정밀하고 미묘하여 아는 사람만이 행할 수 있다. 
이 법을 승방 밖으로 나가서 제멋대로 펼쳐 보이는 일이 없게 하라. 
그렇기 때문에 경에서 이르기를 ‘아견(我見)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 경을 설법하지 말라’고 하였다. 
법을 아주 즐기는 사람은 많은 설법을 하지 않는다. 
자못 약으로 말미암아 병이 있게 되기 때문이니, 
이로써 부질없이 행동하여서는 안 된다.”
법랑(法朗) 등 네 분의 스님은 그 뜻을 받들어 감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승전이 입적하자 네 명의 스님들은 강론을 열어 각기 위용을 독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신통한 지략을 타고 났다. 
혜용(慧勇) 스님은 선중사(禪衆寺)에 머무르고, 
현변(玄辯) 스님은 장간사(長干寺)에 머무르고, 
법랑 스님은 흥황사(興皇寺)에 주석하였으며, 
승포(僧布) 스님은 섭령사(攝領寺)에 머물러 있었는데, 
복문(福門)이 크고 높았으며 지혜의 소리가 먼 곳까지 이르렀으나 모두 법랑 스님보다는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

현변(玄辯)

그러나 현변 스님은 행위가 뛰어나고 맑았으며 선정(禪定)과 지혜의 두 가지에서 명성을 날렸다. 
그리하여 그가 강론하고 제창한 것이 모든 선중사(禪衆寺)에 남아 있는데, 
이것도 역시 승전(僧詮)의 두터운 격려의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치에 대한 견해에서 때때로 법랑과 의견이 어긋났기 때문에 흥황사의 좌중들은 중관의 가식적인 학문이라고 비난하여 배척하게 되었다.
승포(僧布)와 혜용(慧勇)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기록에 나타나 있다.
예전에 양나라 천감(天監) 10년 6월 7일에 신승(神僧)과 보지(寶誌)가 흥황사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이 절에는 곧 푸른 옷을 입은 개사(開士)가 있어 널리 대승을 흥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법랑 스님이 이 절에 와서 배울 때 처음으로 푸른색의 가사를 입게 되었으며, 
그가 첫째가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마침내 그 예언과 부합하게 되었다.
또한 남맥 거사(南陌居士) 두법찬(杜法粲)이라는 사람은 나이가 80세가 넘은 고령인데 자못 귀의하는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예전에 절 안에 깃발과 꽃과 하늘의 기악이 전당을 가득히 메우고, 
도인과 속인들로 된 불법을 배우는 대중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법랑이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재(齋)와 강론을 시작하였으니 이것 또한 꿈과 크게 부합되는 일이다.
또 태건 12년 5월 7일에 법랑 스님의 밑에서 일보는 정인(淨人)이 해재(解齋)를 알리는 새벽종을 치는 시간을 잊은 적이 있었다. 
법랑 스님이 밤에 종각(鐘閣)문을 두드리며 이것을 재촉하자 큰 종이 저절로 울려 한참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상서로운 일은 일찍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이것은 그 하나의 실례에 지나지 않는다.
황태자가 장춘전(長春殿)에서 의학(義學)하는 스님들을 모아 직접 옥병(玉柄)을 흔들며 법랑이 세운 이론을 말하자, 
모든 스님들이 그 표현과 내용을 빌려 말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영예로운 칭송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오직 불교의 종장(宗匠)에 그치는 일이겠는가. 
이것은 또한 하늘세상과 인간세계의 본보기로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가 얻은 보시는 경전과 불상을 만드는 데 충당하거나 절과 탑[寺塔]을 수리 보수하거나 불우하고 곤궁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썼다. 
그렇기 때문에 승방 안에서 기르는 거위ㆍ오리ㆍ닭ㆍ개를 비롯한 짐승들은 그 종류가 매우 많았다. 
그는 가는 길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가져다가 길렀는데 처음에 법랑이 쉴 때에는 소리 없이 조용히 있다가 그가 거닐면서 산보할 때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이것도 역시 마음의 감응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시중영군(侍中領軍) 여릉왕(慮陵王)은 명성이 높고 권세 있는 사람으로서 법랑에게서 계율을 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황제에게 보고하여 그의 빛나는 공적을 이어가게 하려고 그를 위해 명송(銘頌)을 지었으며, 
그의 묘지문(墓誌文)은 태자첨사(太子詹事)인 제양(濟陽)의 강총(江摠)이 지었다. 
그러기에 진왕(陳王) 숙보(叔寶)는 당시 태자로 있으면서 스님을 위하여 송(頌)을 편찬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넓은 언덕 저 멀리에 꽃다운 향기 그윽한데 군자와 철인(哲人)의 꽃향기 이어받아서 주홍빛 깃발 세우자, 
푸른 가사 입은 개사(開士)들이 옷자락을 끌며 법을 묶어 계율로 정하고 담비에 귀걸이 채워서 호족을 제압하니 그 공덕 군사(軍師)에 으뜸간다. 
하지만 그 업적은 세상을 벗어난 것 아니라네. 
그 소리와 모습에 절을 하고 이 나루터를 넘었으니 나루터는 그 어떤 곳인가. 
번뇌의 그물을 벗어나 끊는 곳이거니 인욕의 옷을 입고 일찍이 기별을 받아 대승의 누각을 밤에 통과하여서 이 고통의 바다에 배 띄우고 이 애욕의 강물을 마르게 하였노라. 
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에게 불법을 널리 드러나게 맡기겠는가. 
그 법의 구름 널리 중생을 덮어주고 지혜의 태양은 빛을 펼치네.
이미 노 젓는 일 도맡았으니 스스로 금성탕지(金城湯池)열었노라. 
꿈은 고동치는 설법과 같고 감응은 새벽서리 종소리처럼 기이하였네. 
기연을 알고 운명을 알아 그와 같이 병이 나타나니 일찍이 마음은 불도에 두었건만 해탈을 이룩하기 어려웠네.
교화의 인연이 다하니 마침내 언덕 구덩이에 집을 지었는데, 
지혜의 횃불은 꺼지고 무너진 바위는 저 멀리 아득한데 텅 빈 산봉우리 흔들흔들 먼 들판에 떨어지네. 
시위만 남은 달빛 어둡고 안개 자욱한 소나무 깊도다.
향(香) 꺼진 궁벽한 언덕 깃발만 옛 숲에 가로놓이고, 
절절한 피리소리 맑은데 저 멀리 북소리 울리고 들에는 연기가 사방에서 모여드니, 
외로운 새 홀로 울고 바람도 처량한데 범패(梵唄)소리 끊어지고 흐름은 급해지며 추위가 닥쳐오네. 
영혼이 가는 정토세계는 천고의 세월 속에 가라앉아도 이 넓은 묘소에 이 업적 새겨 난사(蘭社:향기 높은 모임)에 그 공적 전해가리라.”

3) 진나라 양도 대선중사(大禪衆寺) 석혜용전(釋慧勇傳)
혜용의 속성은 환씨(桓氏)이며 그 조상은 초국(譙國) 용항(龍亢) 사람이다.
할아버지 법식(法式)은 상서(尙書)였는데, 
외부의 병란(兵亂) 때 전당령(錢唐令)이 되었다. 
이로 하여 호구산(虎丘山)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후에 오군(吳郡) 오현(吳縣)의 동쪽 환리(桓里)에서 살았다.
아버지인 헌(獻)은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장씨(張氏)가 어느 날 밤 꿈에 불탑(佛塔)에 올라가 두 개의 금보살을 얻는 꿈을 꾸었는데 이윽고 두 명의 사내아이를 얻었다. 
두 아들은 모두 어릴 때 출가하였는데, 
큰 아이는 혜총(慧聰)이고, 
혜용은 둘째 아들이다.
처음 양도에 나와 영요사(靈曜寺)의 도칙(道則) 법사에게 의지하여 그를 화상(和上)으로 모셨다.
뜻을 가다듬어 선(禪)과 독송(讀誦)을 익히면서 몸을 다스리는 데서 나물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방편에 따라 수업하면서 한 가지에만 전념하지 않았으니, 
어찌 이것이 바로 판금(版金)이 보배로 이루어져야 비로소 선루(銑鏤:황금 중에서 가장 빛나는 금)의 밑천이 될 수 있고, 
선옥(瑄玉:여섯 치 이상의 큰 옥)에 아름다움을 갖추자면 반드시 깎고 다듬는 과정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격언은 참으로 타당한 말이다.
구족계를 받을 나이에 이르자 정중사(靜衆寺)의 봉(峰) 율사에게서 『십송률(十誦律)』을 배웠다.
당시 용광사(龍光寺)의 승작(僧綽)과 건원사(建元寺)의 법총(法寵)은 모두 도가 이 고을에서 뛰어난 사람들이며 그 명성이 높아서 인도에도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곧 그들의 곁에서 배우면서 『성실론(成實論)』의 종지를 이어받았으며, 
그것을 마음에 새겨서 갈고 닦으면서 침식을 잊고 피로를 몰랐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생각하고 깊은 물속에 가라앉는 듯 사색에 몰두하였더니 막힌 것이 무너져 내렸으며, 
더욱더 추위와 더위를 겪어내면서 널리 익혀 큰 뜻을 이룩하였다.
그리하여 나이 30세에 이르러 문득 법륜(法輪)을 굴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멀리에서 학도들이 찾아와서 강원을 성대하게 열게 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수도로 올라가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 강원에서는 오로지 『성실론』만 강의하기를 거의 열 차례나 반복하게 하였는데, 
갑자기 양나라가 기울어져서 전복되자 민심이 수없이 뒤끓게 되었고, 
사람들은 속세에서 도망칠 생각을 하였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그 장소를 알지 못하였다.
이때 아직도 섭산(攝山)에서는 승전(僧詮) 스님이 곧바로 1승(乘)에로 나아가서 산사(山寺)의 세계를 오가면서 기연에 따라 깨달음에로 이끌어주고 있었는데 혜용 스님은 그를 따를 소원을 품고 있었다.
어느 날 보은사(報恩寺)로 갔는데 절 앞에서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섭산에서 왔는데 대지팡이[竹如意]를 주겠소.”
그리고 나서 그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면서 혜용에게 말하였다.
“곧 아마도 뜻대로 될 것이오.”
그리고는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또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는 사이에 옻칠한 함에 3론(論) 한 부를 담아 방 앞 창문 위에 놓아둔 사람이 있었는데,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알 수 없었다.
이 아름답고 상서로운 일에 기뻐 감당하기 어려운 용기를 얻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마을에서 옷을 털고 일어나 산속에 뜻을 두고 아득히 보이지 않는 세계에 정신을 기약하였다. 
이것은 풍류를 좋아하는 무리가 되기를 기약한 것이 아니라 공(空)의 이치를 닦고 지혜를 익히려고 한 것이며, 
이것은 총림(叢林)의 원대한 풍조를 따르려고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곧 지관사(止觀寺)에 머물며 아침저녁으로 정성을 다하여 꿋꿋이 도를 닦게 되었다.
승전(僧詮)은 나이가 많고 적은 것을 잊고 의리는 스승과 벗을 겸한 사이로서 서로 화목하게 대하였으며 이에 서로 조화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빙람(氷藍)이 도움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뜻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때부터 말로써 문장구절을 보이지 않는 현미한 이치까지를 모두 뽑아내서 그 경에 대한 해석을 모두 다 남김없이 하였다. 
이에 대법이 전하여지게 된 것은 혜용에 의한 것이었다.
천가(天嘉) 5년(564)에 세조(世祖) 문황제(文皇帝)가 그를 초청하여 태극전(太極殿)에서 강론하도록 하였는데, 
모든 제후(諸侯)가 모여들고 7부대중이 모두 모여들었으며, 
우러러 경모하는 무리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려고 꼬리를 물고 찾아왔으며, 
유람하고 쉬는 무리들이 그림자처럼 붙어서 무리를 이루었다. 
그는 이때부터 명성이 매우 자자해졌다.
그는 대선중사(大禪衆寺)에 18년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그가 강당을 짓자 문인과 청중들이 이것을 공사하여 며칠 되지 않아서 완성하였다. 
이 강당의 이름을 반야당이라고 지었는데, 
처마 끝은 날아갈듯 높은 산마루에 접하고 규모와 배치는 넓고 높았다.
그는 지덕(至德) 원년(583) 5월 28일에 병에 걸려 날이 밝자마자 입적하였는데 향년 69세였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에도 정신과 모습이 변하지 않았으며, 
하룻밤이 지나도 머리가 따뜻하여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6월 6일에 이르러 섭산(攝山)의 서쪽 영마루에 안장하였다.
그는 시종일관하게 『화엄경』ㆍ『열반경』ㆍ『방등경』ㆍ『대집경』ㆍ『대품경』을 각각 스무 차례씩 강의하였고, 
『지도론(智度論)』ㆍ『중론(中論)』ㆍ『백론(百論)』ㆍ『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의 논장을 각각 35차례씩 강의하였으며, 
그밖에도 『법화경』ㆍ『사익경(思益經)』 등 몇 가지 경을 강의하였는데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일찍 부모의 사랑을 여의고 젊은 나이에 곧바르게 고행을 하면서 글재주와 언변이 당시에 높이 평가되었는데, 
죽음에 이르러 손발을 펴보니 검어지지도 찌그러지지도 않았다. 
참으로 상교(象敎)의 대들보이며 정밀한 교의(敎義)의 숲이었다. 
이에 제자들이 뒤따라 제자의 예의를 지켜 돌에 글을 새긴 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은 시중(侍中) 상서령(尙書令)인 제양(濟陽)의 강총(江總)이 지었다.

4) 진나라 양도 대팽성사(大彭城寺) 석보경전(釋寶瓊傳)
보경의 속성은 서씨(徐氏)이다. 
본래는 동완(東莞) 사람인데 피난하여 거읍(莒邑)을 떠났다가 후에 비릉(毘陵)의 곡아현(曲阿縣)에서 살았다. 
할아버지 서옹(徐邕)은 제나라에서 우군(右軍)벼슬을 하였으며, 
아버지 승달(僧達)은 양나라 때 임천왕(臨川王)의 자문역을 할 만큼 모두가 인격이 높은 인재들로서 유교를 숭상하고 따랐다.
보경은 마음이 깨끗하여 산수(山水)에 정이 많아 일찍부터 자연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키가 7척 5촌이나 되었으며 등에서 어깨뼈에 걸쳐 용의 무늬가 있고 입에는 서른아홉 개의 이빨을 갖추어 남다른 모습이 기이하고 우뚝하였다. 
그런 까닭에 매우 뛰어난 풍채에 위엄 있는 모습을 깊이 간직할 수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비단옷을 천박하게 생각하고 무명옷을 좋아하였으며, 
젊은 나이에 속세를 벗어나 사문 법통(法通)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법통은 처음 그를 만나보고 감탄하며 불도를 수행하는 데 적합한 인물이라고 깊이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절의 잡일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나이가 15세가 넘자 광택사(光宅寺)의 운(雲) 법사에게서 의학(義學)을 이어받으려고 하였는데, 
다만 운 법사는 경장(經藏)을 시원시원하게 강론하여 명성이 실로 높았고 그가 하는 말이 세차서 물이 용솟음쳐 오르듯이 걸림이 없었으나 마음대로 달려갈 뿐이어서 내심 그의 문장이 풍부한 것이 의심스러웠다. 
아울러 제창하는 목소리가 매우 높아 해괴하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자리를 옮겨 남간사(南澗寺)의 선(仙) 법사의 법문을 듣고 정밀하게 수론(數論)을 연구하였고, 
표현과 해석을 투철하게 비추고 진리의 법을 환하게 깨우쳤다.
선 법사는 어느 날 보경 스님의 사기(私記)를 보고 두번 세번 감탄하여 칭찬하고, 
훗날 높은 자리에 앉아서 두루 이것을 베껴 쓰도록 권고하였다. 
이때부터 문도들이 이 소(疏)를 전해가며 베껴 쓰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구족계를 받을 나이에 능히 스승의 말을 그대로 외워 말할 수 있었고, 
그후 5년이 지나지 않아 곧 법주(法主)로 되었으며, 
이어 선(仙) 법사와 함께 항주(杭州)와 형주(衡州)에서 교화를 폈다.
양나라 고조(高祖)는 3교(敎)의 묘지(妙旨)에 소통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그는 명성이 높고 덕망을 지닌 스님들을 선발하여 도를 넓혀 나가게 하려고 하였는데, 
보령의 높은 의학(義學)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황제가 명을 내려 수광전(壽光殿)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그의 말은 무성한 숲보다 깊이를 헤아리기가 힘들었고 구름같이 높이 솟은 누각을 가볍게 보게 되었으나 곧 그곳에서 물러나서 고향에 있는 건안사(建安寺)로 되돌아갔다.
상황(上黃)의 제후(諸侯)와 소엽(簫曄)이 영토를 나누어 함께 다스릴 때 보경을 늘 깊이 존경하여 그 정분이 스승과 벗의 관계를 겸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이 서로 다투며 이렇게 소란하게 떠들었다.
“건안의 가람(伽藍)에 흰 용이 나타났다.”
그래서 서로 밀치며 달려가서 절을 찾아가 보니 오직 보경 스님이 강론하는 모습만 보았다. 
이에 식견이 있는 선비가 스님을 지목하여 흰 용 보경 그님이라고 평하였다.
보경 스님은 평소 간자(簡子) 주홍정(周弘正)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는데, 
그가 자주 탄식하며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무릇 세상에 드문 재능을 갖추고도 수도에서 중생들을 교화하여 인도하지 않고 뗏목을 타고 동쪽나라로 건너가려는 한탄을 하고 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한숨을 짓게 한다.”
그리고 학도들을 위하여 다시 수도로 돌아가서 『성실론』을 제목으로 하며 도를 밝혀줄 것을 요청하였다.
승정 혜령(慧令)은 상대하기가 매우 어려운 스님인데 보경 스님이 곧 천천히 불자를 흔들며 조용히 그를 상대하자 혜령 스님은 혜원(慧遠) 스님이 옛적에 책망한 말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부질없이 바삐 서축(舒縮)을 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그러자 보경 스님이 대답하였다.
“업을 지을 생각을 하지 않고 어떻게 정밀하고 견고한 공부를 할 수 있겠소.”
행동거지가 한가롭고 음성이 청아함에 손님과 주인이 서로 기뻐하면서 더욱더 칭찬하였다.
양나라의 고조(高祖)가 말년에 이르러 오직 몸에 배어들도록 수행에 힘쓰자 신하들이 바람에 풀잎이 쓰러지듯이 이것을 따랐으며, 
정다운 말로 세속을 부채질하니 벼슬아치나 선비ㆍ학자들은 기어코 문장과 의학(義學)을 아울러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번 강론을 열어 『유마경』과 『열반경』을 가르치자 도가 아랫자리를 덮고 은혜가 윗자리에 날아올랐다.
활짝 얼굴의 주름살을 펴고 웃으니 나이든 사람의 건강을 이롭게 하고 나무같이 견고한 혀와 날카로운 어금니에서 나오는 말은 줄지어선 대중의 입을 막아 노을 따라 안개가 퍼지듯 하였다. 
또한 화려한 옥패물을 차고 가죽옷을 입고 푸른 띠를 두르고 붉은 도포자락을 끄는 높은 벼슬아치의 수레와 말이 절로 향하는 네거리에 넘쳤으며, 
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법좌에 가득하였다. 
이와 같이 중생을 감응시키는 일이 성대하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리하여 백성을 돌보는 중책에 이른 사람과 효도와 공경으로 이루어진 문장과 필력이 풍부한 사람이 모두 책을 손에 잡고 의문되는 점을 물어보며 그의 뜻을 가슴에 새기고 학업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손하게 세간의 일을 그만두고 나물밥을 먹으면서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영준하고 빛나는 재능을 지닌 후배들이 아버지를 따라 함께 스님의 강의를 들었다.
보경은 특히 경전의 현묘한 진리에 깊은 견해가 있었기에 마침내 『열반경』을 강의하게 되었는데, 
전수받은 물병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여기에서 증명되었다.
그러나 곧 미처 도에 들어가지 못하고 갑자기 죽음에 이르렀는데, 
숨을 거둔 후에도 이틀 밤이 지나도록 정수리가 따뜻하고 세 손가락이 굽혀졌으며 다시 여러 천신(天神)들과 더불어 그가 살던 집에 날아 내려와 아버지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이 평소에 살아 있을 때와 같았으며 출가한 사람을 칭찬하고 법의 이익을 칭송하다가 갑자기 따라온 천신들을 거느리고 허공을 타고 사라졌는데 그때 남긴 향기가 하루가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남다른 사람으로서 몸소 학중(學衆)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참으로 그의 본문(本門)의 깊이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후 양나라가 망하고 진(陳)나라가 왕업(王業)을 세우게 되자 진나라의 무제(武帝)는 법을 존중하고 특별히 좋아하면서 자주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자주 옥첩(玉牒)을 열고 신하들과 어울려 이야기하고 웃는 특전을 베풀었으며 이름난 이론가를 찾아가 의논하였다.
그런데 영정(永定) 3년 중운전(重雲殿)의 누각에서 『대품경(大品經)』을 널리 강의하고 있을 때 꿈에 붉은 옷을 입은 신인(神人)이 나타나 절을 하고 이렇게 청하였다.
“반야(般若)에 어려운 곳이 많으니 빨리 강의하기를 바랍니다.”
그후에도 자주 나타나 더욱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7월 10일에 이르러 마침내 스님들에게 알려주었다.
“어젯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경의 나머지 한 권을 강의해 달라고 재촉하였다.”
그리고는 오전에 이 경을 가져다가 강의를 마치고 궁전을 나서는데 우레 소리가 울리고 우박이 쏟아지더니 돌아와 절에 이르자마자 소낙비가 문득 그치고 진동하던 우레 소리가 일시에 사라졌다. 
이 어찌 뛰어난 사람의 설법을 저 지하에서도 공경하고 존중하는 표현이 아니겠는가.
진나라 고조(高祖)가 세상을 떠나니 비로소 전에 알려준 예언의 뜻을 알게 되었다.
다음 문제(文帝)가 황제의 자리를 잇게 되자 남다른 예의가 더욱 깊어져서 울연한 황제의 말씀이 내려져 보경 스님을 수도의 대승정(大僧正)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그가 간절하게 사양하였으나 황제의 예의는 더욱 융숭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정을 돌아보고 나서 이 자리를 맡아 중생들이 가슴에 지니고 모범으로 삼게 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이 소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금릉(金陵)은 조정과 종묘(宗廟)가 근거지로 삼는 도읍지여서 사찰이 숲의 나무처럼 많고, 
의학(義學)을 강론하는 자리가 저자처럼 성한 곳이며, 
오부대중과 육군(六群) 비구들은 과실(果實)과 묘목(苗木)이 뒤섞여 있는 듯 잡다하여 오직 물과 우유를 조합할 줄만 알 뿐 음식의 간을 맞추듯이 임금을 보좌하여 나라를 화합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큰 코끼리가 진흙탕 속에 빠진 것과 같은 경우가 많았고, 
끝내 새 때문에 나무가 말라죽게 되는 일이 생겼다. 
이에 보경 스님은 청정(淸淨)으로 이것을 다스리고, 
무위(無爲)로 이것을 몰아 금해야 할 계율을 만드는 일을 번잡하게 하지 않고, 
벌을 내릴 때마다 반성하고 삼가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스님들과 비구들이 그를 우러러보고 스스로 조심하였으며, 
도인과 속인들이 이것을 칭송하며 더욱 공경하였다.
칠부대중은 날마다 그 법을 쓰면서도 그 덕을 알지 못하였으며, 
사방의 먼 나라에서는 그 풍조를 흠모하면서도 부족하게 생각하였다. 
따라서 법의 자리를 오랫동안 맡아보고 있었으나 결함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여러 번 표문을 올려 물러나려고 하였으나 다시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보경만이 그 자리를 맡게 된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양나라 때 스님이 이 자리에 임명되면서부터 빛나는 위의(威儀)가 몸에 배어들어 호위하고 보좌하는 예의가 왕공(王公) 다음가는 대우를 하였으며, 
복장과 패물은 정(鄭)나라와 초(楚)나라의 사치한 것을 베풀어 주었다. 
그런 까닭에 모든 불법의 흐름이 절로 통하는 네거리를 비추게 하고, 
관리와 졸개들이 법당과 회랑을 시끄럽게 하였다. 
그러나 보경 스님이 이 자리에 앉은 이래로 전날의 관습을 완전히 없애고 직접 사찰을 경영하고 오직 자비의 길을 따랐으며, 
괴색(壞色) 승복을 입고 몸은 벼슬자리에 있어도 없는 것과 같았다. 
그러자 조정과 민간에서 그의 진실하고 검소한 생활을 가상하게 여기게 되었고, 
동료가 그의 법을 따라 행하는 것을 아름답게 생각하였으며, 
해동(海東)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스님의 도상(圖像)을 그려서 변방으로 돌아가서 받들고 절을 하며 멀리에서 공경을 표시하였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아름다운 영예(令譽)를 날리지 않으면 누가 다른 지방 사람을 움직이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현명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지덕(至德) 2년 2월 23일에 처음으로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건초사(建初寺)에 당시 보경 법사와 짝을 이룬 스님이 있었는데, 
젊어서는 함께 배웠고 명성과 덕망이 나란히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날 저녁에 이 스님에게 신인(神人)이 문득 와서 이렇게 알려주었다.
“팽성사(彭城寺)의 승정(僧正)이 지금 먼저 세상을 떠난다. 
나는 꿈에 상천(上天)에서 기별이 있어 강의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3월 20일이 되자 바른 생각[正念]을 하다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무덤을 덮고 비석을 세워 비명(碑銘)과 묘지(墓誌)를 새기는 번거로운 일은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때 그의 나이는 81세였다.
황제는 명을 내려 위문을 하였고 상례(喪禮)에 필요한 물건은 필요한 대로 공급하게 하였으며, 
이어 천자가 거동할 때 호위하는 행렬처럼 화려하게 장례를 치르게 하였는데, 
이것은 만고에 드문 일이었다. 
그리하여 4월 5일에 종산(種山)의 남쪽 이름난 스님들의 옛 묘소들이 있는 곳에 묻혔다. 
그때 거리를 메운 인파가 흐느끼며 애처롭게 통곡하며 달려왔고, 
도인과 속인 할 것 없이 놀라서 탄식하였고 산천도 빛을 잃었다.
처음 보경 스님이 수도에 들어가 곧 법석(法席)에 참석하였을 때 아무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기에 승방(僧房)에 거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곧 승정(僧正)인 혜초(慧超)에게 남간사(南澗寺)에 머무르게 하여 달라고 청하였지만 혜초는 이 요구를 듣고도 허락하지 않다가 그를 만나보고 나서는 놀라서 말하였다.
“이 젊고 준수한 스님이 곧 나이 자리를 잇게 될 것이며 법문을 의탁할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승방이 없다고 걱정하겠는가.”
그리고는 곧 사강(寺綱)에게 명하자 흔연히 처리하게 하였다.
그후 효선제(孝宣帝)가 초청하여 강론을 하게 되자 태자가 늘 영접하였다. 
여러 번 신인(神人)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은 몹시 키가 크고 장대하였으며 가만히 와서 호위하였다. 
말년에 대장군 장조달(章照達)을 위하여 강론할 때도 신인과 통하여 감응한 것 역시 그러하였는데, 
이것 역시 보통상식으로 추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터운 덕망으로 많은 사람을 포용하여 겸손하고 검소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그가 나아가는 곳에는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없었고 말과 행동에 차별이 없었으며, 
욕망을 이겨내고 건장하여 쉬지 않고 부지런히 도를 강론하여 내용을 명백하게 밝히니 그 명성이 먼 곳까지 빛났다.
간혹 강한 논쟁자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명적(命的:숙명적인 標的)을 만나기도 하였으나 상선(象扇:僧正의 큰 부채)로 지휘한 일은 거의 없었고, 
물 뿌리고 나면 얼음 녹듯 의문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참으로 수많은 문도가 있었으나 모두 그에게 복종하면서 그의 뜻을 어기는 사람이 없었다.
말년에 이르러 스님들의 희망은 더욱 무거워졌으나 거처하는 모습은 더욱 가벼워졌으며 휘장이나 병풍을 설치하지 않고 장식하는 용구도 두지 않았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그를 만나보려는 도인과 속인들이 서로 어깨를 마주치면서 찾아왔지만 곧 다른 곳으로 가서 이 영화로운 공양을 피하였으니, 
이것은 인간세계와 뒤섞여 살았지만 고요하고 한적한 생활을 하였으며, 
직책에 매여 있으면서도 일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성인의 지극한 진리가 개사(開士)의 현미한 말을 달이 지고 삼성(參星)이 찬란한 밤에 청명하게 외우며 제멋대로 하지 않고, 
촛불이 타오르고 향이 자욱한 곳에서 예참(禮懺)으로 밤을 지새웠다. 
자취를 남기는 일에는 게으르고 마음을 닦는 일에는 부지런하였으며, 
외모는 화목하고 내심은 감추었다. 
불법을 선양하는 여가에 한가한 틈이 있게 되면 아울러 도교(道敎)와 유교(儒敎)의 이치도 캐서 늘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역사책을 끝까지 캐어들고, 
벌레 먹은 원고(原稿)에 쓰인 예서(隷書)를 끝까지 연구하여 사물에 몸을 담아 심오한 이치를 사로잡고 함께 자성(自性)의 신령스러운 경지에 들어가게 하여 모두를 흡족하게 하였다. 
이것은 또한 큰 계책을 굽히지 않으면서 작은 도리를 버리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성실론(成實論)』을 아흔한 차례 강론하였고, 
『현의(玄義)』 20권을 지었으며, 
경문에 대한 강의를 스무 차례 하였고, 
경문의 해설서 16권을 썼으며, 
『열반경』의 강의를 서른 차례 하였고, 
해설서 17권을 지었으며, 
『대품경』의 강의를 다섯 차례 하였고, 
해설서 13권을 지었다. 
그밖에도 『대승의(大乘義)』 10권과 『법화경』과 『유마경』 등에 관한 경문의 해설서가 있으나 일부러 이것을 갖추어 기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런 책들이 고을마다에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광(普光), 
명해(明解)
보경의 형의 후손인 보광이 보경의 기풍과 교훈을 이어받아 뜻과 행동이 곧바르고 정확하여 평소에 보경을 그리워하며 뒤따라 이은 지 오래되었다. 
그가 자기와 함께 배운 도장(道莊), 
명해와 더불어 금릉(金陵)의 옛터에 비석을 세웠으며, 
비문은 혜일도량(慧日道場)의 석법륜(釋法輪)이 지었다.
도장은 입실(入室)제자로서 명성을 날린 스님인데 다른 전기에 나타나 있다.
명해는 법당에 올라가 설법을 하여 명예를 날렸는데 강도(江都)의 왕이 되어 그곳을 통치하면서 수나라 말기까지 생존했으나 그의 안위(安危)에 대해서는 추측할 길이 없다.

5) 진나라 양도 백마사(白馬寺) 석경소전(釋警韶傳)
경소의 속성은 안씨(顔氏)이며 회계현(會稽縣) 상우(上虞) 사람이다.
8세에 입도(入道)하여 숙부인 승광(僧廣)을 섬기며 스승으로 삼았는데, 
승광은 계율을 지키는 행실이 곧바르고 엄숙하여 당시 스님들의 영수(領袖)자리에 있었다.
처음 경소는 도시로 돌아다니면서 강론을 듣고서 곧 밝은 논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이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가 구족계를 받고 기름그릇을 받쳐 들고 있는 것과 같이 불법을 보호하고 받들고 믿었다.
당시 도림(道林)이라는 사문이 있었는데, 
그는 경소에게 고향에 머물러 있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그의 꿈에서 경소의 혓바닥이 넓고 긴 것을 보고 그것을 잘라내려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나서 깊이 생각하면서 경소가 이곳에 머무르기를 바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잃고 추락시키는 일이 된다고 여기고 이미 전에 간청한 일을 후회하고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곧 도시로 나갈 것을 권유하면서 그곳에서 크게 교법에 대한 교화를 넓혀 교법의 등불을 전하는 일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권고하였는데, 
그것은 곧 장엄사(莊嚴寺)의 승민(僧旻) 스님이 남긴 유서를 잇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용광사(龍光寺)의 승작(僧綽)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이것은 바로 개선사의 보경(寶瓊)의 법맥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또한 그는 3장을 탐구하고 익혀서 여러 대가의 학설을 널리 종합하여 나이 23세 때 『대품경』을 강의하였는데, 
법의 맛을 본 당시의 청중들이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길에 넘쳤다.
그후 건원사(建元寺)와 진릉사(晉陵寺) 등의 절로 돌아가 경론을 해설하였는데 그의 해석은 다른 종파를 능가하였다.
이어 경소는 나이가 40세가 되면 강설하는 일에 나갈 것을 바랐지만 함께 배우는 동료들은 서로 돌아보며 비길 데 없이 흠모하고 숭상하였다.
나이 39세가 되어 건원사의 강주(講主)가 되었는데, 
예전의 강주가 임종에 이르러 유언을 남기면서 법을 전하게 하였다. 
경소는 그의 불같은 유언을 숭엄하게 따라서 곧 강주자리에 앉아 설법을 하자 강의를 받는 사람들이 이전의 스승보다 훌륭하다고 평하였다.
양나라의 간문제(簡文帝)는 소릉(邵陵)과 악양(岳陽) 등지에서 크게 서로 흠모하고 존중하여 귀의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그후 나라에 위급한 재난이 생긴 후부터 세상이 바뀌고 인정이 야박해지자 마침내 예장(豫章) 땅으로 가서 장차 도(道)에 힘써 통달하려고 하였다. 
이때 예주(豫州)의 황사공(黃司空) 등을 만났는데 이들과는 평소에 정이 들어 우러러보던 사이였으므로 그들은 경소에게 계사(戒師)로 되어달라고 요청하였다.
때마침 다른 나라 삼장인 진제(眞諦) 법사를 만났는데 그는 대승과 소승을 모두 해박하게 풀이하고 행으로 자타(自他)를 포섭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한번 만나자 곧 함께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 진제는 이렇게 찬탄하였다.
“내가 돌아다닌 나라는 많으나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은 매우 드물었다.”
그리하여 그는 곧 예주의 도읍지에 머물면서 『신금광명경(新金光明經)』과 『유식론(唯識論)』, 
『열반경』 가운데서 백구(百句)와 장해탈(長解脫), 
14음(音) 등을 번역하였다. 
그는 아침에 전수받으면 저녁에 전해주고 밤에 들은 것은 새벽이면 설명하였는데, 
세간의 속담에 병속에 담은 물을 다시 쏟아낸다고 하듯이 하나를 듣고 열을 아는 사람이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양나라의 낙양왕(樂陽王)이 형주에서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편지를 보내서 멀리 마중 나왔으며, 
초(楚)나라의 수도에서 불법을 널리 퍼뜨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경소는 보답하는 처지의 책임이 무겁다는 것을 생각하고 부탁을 거절하였다.
진(陳)나라의 무제(武帝)가 천하를 평정하고 문황제(文皇帝)가 왕업을 이어받게 되었는데 이 두 황제는 모두 정도(正道)를 숭상하고 넓혀나가는 황제로서 명을 내려 수도로 돌아오도록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계율의 범절을 우러러보며 넉넉한 예의가 더욱 융숭하였다.
천가(天嘉) 4년에는 회계(會稽)의 혜조(慧藻)ㆍ동태(同泰)ㆍ도륜(道倫) 등 2백여 명의 스님들이 연명으로 경소에게 오래도록 백마사(白馬寺)에서 강론하여줄 것을 요청하자 10여 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불법을 널리 퍼뜨리고 교화하였다.
그는 나이가 60세에 이르자 곧 혜조(慧藻)에게 강의를 이어가게 하고 자신은 와관사(瓦官寺)로 가서 잠시 동안 좌선(坐禪)에 몰두하였는데 그의 법문은 깊고 오묘하였다.
당시 사문 지의(智顗)는 선정과 지혜가 참으로 뛰어나서 사람의 마음으로 헤아릴 바가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경소의 강론이 정밀하고 날카로움을 찬탄하고 모든 일이 이미 전에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앞서 배운 사람들과 함께 다시 강론해줄 것을 자주 요청하였다. 
이 요청을 오래 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병으로 이것을 사양하였다.
또한 신안전하(新安殿下) 황사공(黃司空) 등이 스님들과 함께 세 번씩이나 강론을 요청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힘들게 강론하게 되었다.
또한 왕부(王府)에서 『유마경』을 간단히 설법하기도 하였고, 
용광사(龍光寺)안에서 『성실론(成實論)』을 널리 해설하기도 하였는데, 
역시 여러 해 동안 배움의 자리를 이룩하기도 하면서 몸이 노쇠하여도 강론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후 산속으로 돌아갈 뜻을 가지고 깊숙한 암혈(巖穴)에 들어가서 스스로 마음 편하게 10여 년을 살다가 지덕(至德) 1년 10월 11일 한낮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땅에 대고 누웠는데, 
그 정신과 사유(思惟)는 투명하고 맑았다. 
그리하여 개선사(開善寺)에서 입적하였는데 나이는 76세였다.
그달 16일에 종산(鐘山)인 독룡산(獨龍山)에 안장하였다.
그 동안 그가 강의한 것은 『성실론』이 50여 차례이며, 
『열반경』이 30여 차례이고, 
『대품경』이 40여 차례이며, 
『신금광명경(新金光明經)』이 30여 차례였다. 
그밖에 『유마경』ㆍ『천왕경』ㆍ『인왕경』 등도 여러 차례 강의하였으나 번잡하고 어지러워서 기록하여 널리 서술하지 않는다.

6) 진나라 종산(鐘山) 기사사(耆闍寺) 석안름전(釋安廩傳)
안름의 속성은 진씨(秦氏)이며 진(晉)나라 때 중서령(中書令)의 벼슬에 오른 안정(安靖)의 7대손이다. 
강북(江北)의 이성현(利成縣)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참으로 묘한 생각을 하여 현문(玄門)에 몸을 담그고 마음이 느긋하여 적조(寂照)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이에 『입신서(入神書)』 한 수와 『통력(洞曆)』 세 권을 간파하였다. 
그의 청오(靑烏)와 같은 도리에 대하여 그 꽃 같은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안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홀로 깨닫고 무리를 지어 놀지 않았다.
13세 때 한쪽 부모의 상을 당하자, 
그의 효도는 멀고 가까운 고을에 알려졌다. 
그는 물도 먹지 않아서 뼈만 남았기에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옛말에 “아들을 아는 것은 아버지이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곧 경전의 가르침으로 그를 거두어들여서 학업에서 마침내 많은 것을 통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품이 노자와 장자의 학문을 좋아하였고, 
일찍이 경서와 역사에 통달하였으며, 
또한 술법을 잘 알았고 아울러 손자와 오자의 병법과 술수도 해득하였다. 
그런 까닭에 재주와 기예에 뛰어나서 문무의 도가 밝게 전파되었다.
이어 그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숨어 있는 것을 물어 오두막집의 옥을 감춘 구멍을 찾았으며, 
가슴을 비워 기연이 일어나니 몸으로 진제(眞諦)와 가제(假諦)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25세 때 아버지에게서 허락을 얻어 출가하게 되자 곧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서 도를 찾아다녔다. 
그리하여 북쪽 위(魏)나라에 이르러 사주(司州) 광융사(光融寺)의 용(容) 법사가 있는 곳에서 경론을 캐고 익혔다. 
용 법사는 계율을 가르치는 데서 엄격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재능을 엄숙히 이룩한 사람이었다.
안름은 또한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광(光) 법사로부터 『십지론(十地論)』의 강의도 들었는데 한번 들으면 받아들여 이해하고 말에 앞서는 뜻을 완전히 터득하였으며, 
표현과 상징을 깊이 음미하고 그 가운데 내포된 뜻도 다 해득하였다. 
또한 선법도 이어받아 현묘한 법문을 모조리 탐구하였다. 
이에 수업을 청하는 대중이 여러 번 널리 이익되게 하여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는 위나라에서 12년을 머무르는 동안에 『사분율(四分律)』의 강의를 근 20여 차례나 하였고, 
대승의 경전도 서로 관련지어 강의할 수 있었다.
양나라 태청(泰淸) 원년에 비로소 팽패(彭沛)를 떠나니 문인들이 옹호하고 따랐으며 다시 양도(楊都)에 돌아왔다. 
그러자 무제(武帝)가 공경하고 공양하여 황제의 명으로 천안사에 머무르면서 『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여 큰 규모의 강령(綱領)을 우뚝 세우고 신묘한 취지의 기회를 마련하게 하였다.
그후 양나라 정권이 무너지자 법륜(法輪)도 멈추게 되었다. 
그후 진나라가 건국되자 영정(永定) 원년(557) 봄에 황제의 초청으로 내전(內殿)에 들어가니 황제는 손수 향불을 전하고 그의 발에 머리를 대고 공경심을 다하여 절을 하고 계범(戒範)을 이어받았다. 
그리하여 나라의 명으로 기사사(耆闍寺)에 머무르면서 끊임없이 강의를 해주도록 하자, 
오래전에 품었던 마음과 일치되었기에 마침내 흔연히 그곳에 오랫동안 거처하기로 하였다.
그후 세조(世祖) 문황제(文皇帝)가 또 초청하여 소덕전(昭德殿)에 들어가 『대집경(大集經)』의 강의를 열게 되었는데, 
막힘없이 잘 설법하니 강의를 거듭하였지만 아무도 나서서 견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후 효선제(孝宣帝)도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또 화림원(華林園) 안에서 제자의 예의를 갖추고 도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도를 밝히고 교화하는 일이 고단하여 이 때문에 병이 들었다가 지덕(至德) 원년 1월에 승방에서 입적하였는데, 
황제는 마음속으로 측은하고 슬픔에 잠겨 많은 부조를 보냈으며, 
곧 그 달에 개선사의 서쪽 산에 안장하였으니, 
나이는 77세였다. 
이에 문인들은 그들이 그대로 내버려지게 되는 것을 가슴 아파하였고, 
선비와 서민들은 그들이 귀의할 곳을 잃게 되었다.

7) 진나라 섭산(攝山) 서하사(栖霞寺) 석혜포전(釋慧布傳)
혜포의 속성은 혁씨(郝氏)이며 광릉(廣陵)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원대한 지조를 가슴에 품고 성품과 도량이 넓고 단단하였다. 
15세 때 강양(江陽)에 거주하였는데 장군의 가문 출신으로서 그때 호족과의 전쟁이 있게 되자 이렇게 소원하였다.
“5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장수가 되면 호족이 침범한 요새를 말끔히 평정하겠다. 
내가 어찌 그 일을 해내지 못하겠는가.”
그러자 사람들은 그의 말을 장하게 여겼다.
16세 때 형의 상을 당하자 세상이 덧없다는 것을 깨닫고 속세의 그물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친척과 가족들은 그에게 무인(武人)의 지략이 있다는 것을 알고 모두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21세에서야 비로소 본래의 소원을 이루게 되어 머리를 깎고 곧 양도(楊都)로 들어가서 건초사(建初寺)에서 보경(寶瓊) 법사로부터 『성실론(成實論)』을 배웠다. 
그리하여 가상(假相)과 실상(實相)의 참뜻에 통달하고 여러 사람의 논의의 귀착점이 되었다. 
그러나 혜포는 이렇게 이치를 이룩하고도 아직 자기의 소원을 이룩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섭산 지관사(止觀寺)의 승전(僧詮) 법사가 대승의 세계에서는 바다와 산악 같은 존재로 그 명성과 명예가 널리 알려졌다는 말을 듣고, 
곧 그곳으로 가서 그로부터 3론(論)의 강의를 들었다. 
이때 수백 명의 학도들이 같은 시기에 멀리서 초(楚)나라를 바라보았으나 맑고 현묘한 진리를 환히 통달하고 논(論)의 참뜻을 아는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그와 견주어 숭상받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은 그를 ‘뜻을 이룩한[得意] 혜포’라고 불렀고, 
혹 어떤 사람들은 ‘심오한 이치를 생각하는 혜포’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승전의 해설은 이해하기 힘들어서 그것을 들으면 알 것 같다가도 받아들여 깨달으려고 하면 오히려 혼미해지기 때문에 급기야 말에 의거하여 받아들이면서도 문제가 생기면 생략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논의를 하는 사이에 손님의 질문이 있을 경우에는 매번 혜포가 오기를 기다려 그가 대답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승전의 문하에 네 사람의 벗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4구(句)에 밝은 혜랑(慧朗) 스님, 
이해력 있는 언변을 가진 승변(僧辯) 스님, 
문장력에 능한 혜용(慧勇) 스님, 
참뜻을 이룩한 혜포 스님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혜포는 ‘득의(得意)’라고 일컬어졌으므로 그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후 『대품경(大品經)』의 『선달장(善達章)』에서 대승의 경지를 깨닫고 해득하여 번뇌를 조복시켜 마음을 수습하여 계율을 받들어 위엄 있는 거동에 흠집이 없게 하였다. 
항상 좌선(坐禪)을 즐기고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계를 멀리 떠나 강론과 설법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불법을 보호하는 것을 자기의 업으로 삼았다.
말년에 이르러 북쪽 업군(鄴郡)에서 돌아다니면서 지금껏 듣지 못한 세계와 교섭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혜가(慧可) 선사와 잠시 통성명을 하고 그와 말을 하면서 뜻을 깨달았다. 
이때 혜가가 말하였다.
“법사가 말한 것은 아집(我執)을 허물고 편견을 제거하는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 놓고 여러 자리에서 두루 종령(宗領) 자리에 있는 스님을 만나보고, 
또 두루 글의 내용을 열람하여 모두 가슴속에 간직해 두었으며, 
또한 장소(章疏) 여섯 발우를 사경하여 등에 지고 강남으로 돌아가 그것을 모두 혜랑(慧朗) 스님에게 보내어 그로 하여금 강의하게 하였다. 
그런데 빠진 것이 있어서 다시 제나라로 가서 그 부분을 사경하고 돌아와 혜랑 스님에게 보냈으며, 
자신은 아무것도 비축한 것이 없이 오직 옷과 발우만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오로지 염혜(念慧)만을 수행하고 홀로 송림(松林)에 머무르면서 세상 밖에서 쓸쓸하게 살았으나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흔연히 그를 사모하였다.
어느 날 혜사(慧思) 선사를 찾아가 불교의 큰 이치를 논하였는데, 
밤낮으로 논의하느라 밥 먹는 시간, 
쉬는 시간이 된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의 이치는 더욱 치밀해지고 말의 기세는 그칠 줄 모르니, 
혜사 선사는 철여의(鐵如意:鐵杖)장으로 책상을 치면서 말하기를 “만리 땅이 텅 비어 있다. 
이런 지혜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으며, 
좌중에 있던 천여 명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감탄하고 기뻐하였다.
또 그는 막(邈) 선사와 더불어 논의하였는데, 
막 선사는 곧 혜명(慧命) 스님의 스승이었다. 
그 논의가 오래 계속되어 사흘 동안 끊어지지 않게 되자 막 선사가 드디어 이것을 중지시켰으며, 
그가 지혜와 깨달음이 높이 드러났는데도 자신을 낮추고 절도 있게 행동하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찬탄하였다.
양(梁)나라의 태청(太淸) 연간 말기에 제후 경(景)이 난을 일으켜 몇 해째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혜포는 사흘 동안이나 굶다가 나흘째가 되어 어떤 사람이 음식과 천[布]을 보내왔으나 음식 속에 약간의 돼지고기가 섞여 있는 것을 보고는 밥그릇을 엎어버렸다. 
비록 뱃속은 불이 타는 듯하였으나 먹지 않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에 이 곤액을 만나고도 그릇되고 분수에 넘치는 짓은 행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은 각기병을 앓을 때 의원(醫員)이 부추를 복용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항상 이 죄를 말하곤 하였다. 
혹 어떤 사람들이 서방정토에 태어나는 즐거움을 말하게 되면 그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서방정토에 태어나는 것은 나의 소원이 아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일이다. 
어떻게 연꽃 속에서 10겁 동안 즐거움만 받고 살겠는가. 
차라리 3악도(惡道)에서 고통을 당하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만 못하다.”
그는 진(陳)나라의 지덕(至德) 연간에 공(恭) 선사를 맞아들여 섭산(攝山)에 서하사(栖霞寺)를 세우고 대중을 결집하고 청정하게 단련시켜 강남 땅에서 추대 받는 대상이 되었다.
그의 명성과 공덕은 멀리에까지 알려졌고 논(論)의 참뜻을 넘겨주었으며, 
때로는 막힌 곳을 여니 이론과 생각이 그윽하고 미묘하였다.
그는 스님들의 스승이 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아랫자리를 차지하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손수 옷을 꿰매고 씻으면서 하루 종일 쉴 짬이 없었다. 
그는 건추(揵搥)가 울리자마자 이미 대중의 윗자리에 자리잡고 나무처럼 단정히 앉아 있었기에 보는 사람들이 늠름하게 여기였다.
명성과 소문이 멀리에까지 빛나서 만나보려는 사람들이 저자처럼 모여들었으며, 
진(陳)나라의 황제와 여러 왕들이 모두 그에게서 계율을 받고 부처님처럼 그를 받들었다.
말년에는 나이가 많아서 대중이 함께 하는 식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황제의 명으로 우유를 공급하였으나 혜포는 그것을 되돌려 대중에게 들여보냈으며, 
홀로 삼가하고 섭생하였으니 그는 진실한 고승이었다.
나이가 70세가 되자 대중과 이별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 혜포의 목숨은 아직도 3~5년은 더 남아 있다. 
다만 늙어서 고단하여 도를 행할 수 없으니 세상에 머무른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항상 소원은 삼보(三寶)가 없는 그늘진 곳에 태어나 그들을 위하여 불사(佛事)를 하고 가는 것이었다. 
여러 분은 다행히 각기 잘 지내니 부디 그것에 힘쓰기를 원한다.”
그리고는 드디어 곡식을 입에 대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아서 목숨이 거의 끊어지려 하기에 황제의 명으로 의원을 보내서 돌보게 하였지만 팔을 움츠리고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 심황후(沈皇后)가 향과 편지를 전하려고 하였지만 이것도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종 때 영결하면서 이렇게 유언하였다.
“오래 산다고 기쁜 것이 아니다. 
늙어서 죽어도 근심은 없다. 
태어나도 태어난 곳이 없고 죽어도 죽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모든 학사와 문도, 
대중들은 모두 공(恭) 선사에게 맡기니 나는 아무 걱정이 없다.”
그리고는 진(陳)나라의 정명(禎明) 원년(587) 11월 23일 서하사에서 입적하였다.
그가 입적한 후에 손의 세 손가락을 굽히고 있었는데, 
이것을 펴놓아도 다시 굽혀져서 마침내 숲속에 이를 때까지 한 달 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다.
또 세상을 마치기 전에 대지가 연이어 흔들리다가 7일 만에 잠잠해졌으며, 
시신을 숲으로 옮기자 산과 땅이 또 흔들렸다. 
그러자 태사공(太史公)이 상주하여 말하였다.
“득도한 사람 가운데 별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당시 이것이 맞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는 처음에 세상을 떠나려 할 때에 대중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어젯밤 두 분의 보살이 마중을 왔다. 
한분은 생신(生身) 보살이고, 
또 한분은 법신(法身) 보살이었는데, 
나는 이미 그들에게 함께 가기를 허락하였다. 
또한 여러 하늘신들이 마중을 왔는데 나는 다시 어떤 세계에도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간(侃) 선사의 방문으로 광명이 비쳐들었는데, 
간 선사가 광명이 성대하게 비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문밖에 나가보니, 
두 사람이 혜포 스님의 방을 향해 서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성인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튿날 아침에 혜포 스님에게 가서 말하니 혜포 스님의 말과 부합되었으며, 
이때 혜포 스님은 이 말을 하고 나서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또 신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깃발과 꽃이 절에 가득하고 광명이 불꽃처럼 치솟는 것을 바라보고도 그 까닭을 몰랐는데 산에 들어가서 그것을 보니 바로 혜포 스님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8) 주(周)나라 위빈(渭賓) 사문 석망명전(釋亡名傳)
망명의 속성은 종씨(宗氏)이며 남군(南郡) 사람이다. 
본 이름은 궐태(闕殆)라고 하며 대대로 벼슬한 가문으로서 명망 있는 집안으로 일컬어졌다. 
그는 젊은 나이에 세속을 벗어나 숨어 살면서 영영 처자와의 인연을 끊고는 초야에 묻혀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조리며 생각 내키는 대로 곳곳을 유람하였는데 그가 기대고 의지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종문을 이을 사람으로 아름답게 평가되고 비추어졌다.
나이가 들면서 재주가 풍부하여 고향사람들이 천거하여 양나라 원제(元帝)를 섬기니 두터운 예의와 대접을 받았으며, 
그가 지은 새 글이 있으면 황제가 칭찬하며 글에 대한 감상을 말하였으나 그는 공손하고 삼가하며 자비롭고 공경하며 겸손과 고요함을 마음의 지표로 삼았다.
황제는 늘 어연(御筵)에서 조용히 넉넉하고 남다른 질문을 하였다.
양나라가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자 남몰래 현문(玄門)에 뜻을 두고 멀리 문(汶)과 촉(蜀)에 몸을 의탁하여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처음 태(兌) 선사에게 몸을 두었는데, 
태 선사 역시 선정과 지혜가 투명하게 밝고 명성이 관(關)과 업(鄴)에 자자하였다.
이에 망명 스님은 곧 3업(業)을 그에게 의지하고 4위의[四儀]에 의거하여 공경하고 우러러보면서 마음을 순수하게 아로새기는 일은 좌선과 독송의 힘을 빌리고 일어나는 생각은 글로 지어 나타내었다. 
미리 이곳에 온 학도들에게 게을리 하지 않고 도를 물었다.
때마침 주나라가 경계를 침범하자 소보(少保) 촉국공(蜀國公) 우문준(宇文儁)이 이것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그 곳에 가서 현명한 인재[賢才]를 사랑하고 그 덕과 소양을 존중하여 남달리 예절 있게 공양하였는데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졌다.
후에 제왕(齊王)이 뒤를 이어 공경심이 날로 더해졌으며 임기가 끝나자 옹주(雍州)로 돌아가면서 마침내 공을 억지로 데리고 돌아와 황제를 만나니 황제는 크게 위로해주면서 하주(夏州)의 삼장법사로 처신하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망명의 글이 볼 만하다고 하여 원래 현문(玄門)의 스님이 아닌데도 덕을 숨기고 세상에서 숨어살던 그를 불러 발탁하려고 그의 인품을 헤아려보니 나라를 경영할 도량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모두가 논의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위용과 은총을 그에게 더해주자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정을 특별히 하여 그의 마음을 돌려보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름은 자못 뛰어나게 울려퍼졌으나 한 번도 절개를 바꾼 일이 없었다.
천화(天和) 2년 5월에는 대승상(大承相)인 우문호(宇文護)가 편지를 보내서 이렇게 말하였다.
“늘 생각하고 흠모하였으나 아직 쌓인 마음을 펴지 못하였습니다. 
옥체가 편안하고 걱정이 없으십니까? 
무릇 부처님께서 세상에 머무르신 뜻은 중생들을 바로잡고 구제하는데 있었으며, 
생사의 윤회에서 홀로 선한 일을 숭상하는 것을 앞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법사는 이미 도가 생이지지(生而知之)에 버금가고 재주는 칠보시(七步詩:曹植)보다 높으니, 
어찌 헛되게 검은 물을 들인 옷만을 입고 현세에서 빠져나가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오직 탁 트인 심령(心靈)의 묘리에 3업(業)이 함께 모여들게 되면 바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지 않게 되고, 
도인과 속인의 차별을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편협한 고집을 풀고 우리 시대의 조정을 찬양한다면 비단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함께 뽑아들 뿐 아니라, 
또한 상대와 내가 하나로 꿰뚫어지게 될 것이기에 사람을 보내서 알리는 것이니 아름다운 생각으로 회답해주시기를 염원합니다.”
그러자 망명이 회답하였다.
“알려주신 말씀을 받아 깊이 가슴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추위와 더위는 지역마다 다르고 괴로움과 즐거움은 마음에 따라 다르니 평범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잠시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빈도(貧道)는 타고난 바탕이 추하고 더러워 항상 병의 고뇌를 안고 있으며 등을 굽힘으로 인하여 공손함을 이루었습니다. 
오직 도를 닦는 데만 힘쓸 뿐 한 번도 세간에서 살지 않았으며, 
52년 동안에 속가의 인연을 버린 지 15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벌을 받을 만한 죄도 없었고, 
심부름을 할 만한 능력도 없었으며, 
모든 사람이 이 나라에 귀의하여 모두가 수도에 머물러 있었지만 병든 한 스님만은 홀로 황량한 땅에 떠돌고 있습니다. 
백번 깊이 생각하고 아홉 번 다시 생각해도 이 일만을 아직 깨우치지 못하고 있습니다.……(이하 글이 많아서 다 기재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또한 여섯 가지 불가능한 조건과 열 가지 탄식할 일들을 열거하면서 사실에 근거하여 서술하였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실에 꿰어 놓은 것처럼 일관되어 있었지만 내용은 생략한다.
그리고 결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문(沙門)이 계율을 지키면 마음과 입이 서로 호응합니다. 
내가 열거한 여섯 가지 조건에서 만약 한 가지라도 거짓이 있다면, 
살아 있으면 푸른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고 죽으면 무쇠집게로 나의 혀를 뽑고 펄펄 끓는 구리물을 입안에 부을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의 빛을 우러러 받들며 내 나이 60이 되도록 어두운 방안에서도 내 마음을 속인 일이 없는데, 
하물며 밝은 세계에서 속이겠습니까. 
또한 고향과 나라가 함께 멸망하고 일가친척들이 모두 쇠망하였는데 빈도는 어떤 사람이기에 홀로 오래 동안 견딜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산속에 자취를 거두어들이고 마음을 속세의 밖으로 거두어들여서 남은 목숨을 지탱하고 길러서 지혜로운 업을 두텁게 닦을 수 있다면 이것이 나의 본래의 뜻입니다. 
그리고 정사(精舍)에 몸을 의탁하고 왕성(王城)에서 걸식(乞食)하면서 힘에 맡겨 도를 행하고 인연에 따라 중생을 교화한다면 이것은 두 번째 나의 소원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홀로 깊은 산속에 거처할 것인데, 
어떻게 허물어져가는 몸이 오래 동안 염부제주(閻浮提洲)의 땅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우문호(宇文護)는 이 편지를 받고 그를 승단에서 발탁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곧 편지를 보내어 그가 절로 돌아가는 것을 환영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법사가 지니고 있는 마음은 매우 견고하여 세상 밖에 노닐며 현문이 옥구슬로 운(運)을 열었으니 굴하지 않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절개를 지니게 되었으며 푸른 넋이 그 시대를 얻었으니, 
어찌 산속에 숨어살려는 아름다운 뜻을 버리겠습니까. 
지금 가시는 곳에 배웅할 사람을 보냅니다.”
그리하여 그의 명성은 함양(咸陽)에 사무쳐서 귀한 손님들이 그를 받들어 만나려 오고 융숭한 예의와 후한 공양이 평상시의 한도를 더욱 넘어서게 되었다. 
이로써 넓은 흐름과 숨어 있는 빛은 굴복시키기 어렵다고 일컬었고, 
맹세코 현문(玄門)에 사는 후배들을 맡아보겠다고 하면서 문득 한가롭게 해방되어 속박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곧 『보인명(寶人銘)』을 저술하였는데 거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15세 때 글 짓는 일을 숭상하였고 30세가 되면서 세력과 지위를 존중하였다. 
그런데 수도가 망하고 어지러워지면서 벼슬아치들이 몰락하고 학식 있는 인재들이 거의 다 영락되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한탄하고 탄식하였다. 
‘무릇 하늘을 되돌리고 해를 넘어뜨리는 힘을 가진 사람도 하루아침에 시들어버리고 태상의 반석같이 굳은 기반도 홀연히 불타 없어지니 정녕코 세상의 모습이란 덧없는 것이고 인생이란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유하면 아침이슬과 같으니 그것이 머무른다고 한들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겠는가. 
대장부라면 살아서는 악마를 항복시키고 죽어서는 법을 길러야 하거늘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할 바에는 선(禪)을 닦아 뜻을 기르고 경을 읽어 자신을 즐겁게 해야 할 것이니 부귀나 명예는 부질없이 사람만 힘들게 할 뿐이다.’
그리고 곧 벼슬을 버리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누더기승복을 입고 석장(錫杖)을 짚고 강론을 듣고 불도의 이치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나라가 아직 평화롭지 못하고 몸을 의지할 땅이 없어서 스스로 자신을 질곡보다도 싫어하면서 고통의 근본을 끊으려고 생각하였으나 그 방도를 알지 못하였다.
대승(大乘)의 경에 이르기를 ‘설법대로 행하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는데, 
비단 입으로 말하는 가르침뿐만이 아니다.
또한 소승(小乘)의 게송에 이르기를 ‘능히 행하면서 말하면 바른 일이지만 행하지 않으면 무엇을 말하겠는가. 
말만 앞서고 행할 수 없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부를수 없다’고 하였다.
심지어 안회(顔回:공자의 제자)는 학문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이전에 있었던 잘못을 고쳤고 자로(子路:공자의 제자)는 아직 도를 닦지 않았을 때 뒷소리를 들을까 봐 두려워하였다. 
학업이 고단하면 지혜가 어지러워지고 정신을 사역하면 목숨을 손상하여 도를 위하는 일이 날로 줄어들게 되는데 많이 알아서 무엇에 쓰겠는가. 
몸은 마른 나무와 같이 되고 생각은 불꺼진 재와 같이 되어 이 근심과 속박을 내려놓고 이로써 텅 비고 고요한 경지를 찾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학문을 끊는데 필요한 마음에 새겨둘 『식심찬(息心贊)』이라는 글을 짓고 주묘(周廟:周公의 廟堂)의 옛일을 본받았다. 
그 잠명(箴銘)은 이러하였다.
“법계(法界)에는 마음대로 되는 보물과 같은 사람이 있어서 아홉 번 그 몸을 봉하였다. 
그 가슴에 새기기를 예전에는 마음을 거두어들인 사람이었다. 
경계하라, 
경계하라. 
많은 생각이 없어야 하고 많은 식견이 없어야 한다. 
많이 알면 일이 많으니 생각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생각이 많으면 실수가 많으므로 하나를 지키는 것보다 못하다. 
생각이 많으면 뜻이 흩어지고 아는 것이 많으면 마음이 산란해진다. 
마음이 산란하면 고뇌가 생기고 뜻이 흩어지면 도에 방해가 된다. 
무슨 손상되는 것이 있느냐고 말하지 말라. 
그 괴로움은 멀고도 길다. 
무엇이 두려우냐고 말하지 말라. 
그 화는 가마의 끓는 물과 같다. 
한 방울의 물을 멈추지 못하면 사면의 바다가 곧 물로 가득해지며 실오리 같은 먼지를 털지 못하면 5악(岳)이 곧 이룩될 것이다. 
끝을 막는 방법은 근본을 막는 데 있으니 비록 작은 것이라도 가볍게 보지 말고 너의 일곱 구멍을 막고 너의 6정(情)을 닫으라. 
색(色)을 보지 말고 소리를 듣지 말라. 
색을 보는 사람은 눈먼 소경이 되고 소리를 듣는 사람은 귀머거리가 된다. 
한 줄의 글, 
한 가지의 재능은 공중에 날아다니는 작은 곤충과 같은 것이고, 
한 가지의 기술과 한 가지의 능력은 태양 아래의 외로운 등불과 같은 것이다. 
영특하고 현명한 사람에게는 재능과 기예란 어리석은 폐단이 된다. 
그는 순박한 자성을 버리고, 
화려하고 음탕한 곳에 빠져 인식이란 이름의 말이 날뛰기 쉽고 마음이란 이름의 원숭이를 제압하기 어렵게 되어 정신이 육체의 하인이 되면 몸은 반드시 손상되어 죽어버린다. 
사경(邪逕)에 끝까지 미혹되면 도의 길은 영원한 진흙탕이 될 것이니 재능을 귀하게 여기지 말라. 
재능을 귀히 여기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한다. 
서툰 것을 더럽게 여기고 솜씨 있는 것을 부러워하면 그 덕은 넓어지지 않는다. 
이름만 두텁고 행동이 얇으면 그 높은 것은 속히 무너진다. 
높은 자리에서 저속한 책을 펴면 그 쓰임새가 영원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속으로 교만과 남을 해칠 생각을 품게 되고 밖으로 원망과 증오심을 품게 된다. 
입으로 이야기하거나 손으로 써서 사람들을 맞이하여 자랑하는 것도 또한 매우 누추한 일이다. 
범부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성인은 허물로 삼았다. 
감탄과 기쁨은 순간이고 슬픔과 근심은 영원하다.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발자취를 두려워하면서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그림자와 발자취는 더 심하게 생기지만 나무그늘에 단정하게 앉아 있으면 그림자는 가라앉고 발자취는 사라진다. 
태어나는 것을 싫어하고 늙어가는 것을 근심하면 생각하는데 따라서 태어나고 늙는 일이 따라오게 된다. 
마음속 생각이 만약 없어진다면 생사(生死)의 번뇌는 영원히 단절되어 죽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으며 모습도 없고 이름도 없어 하나의 도(道)가 공허하고 적멸하여 만물이 나란히 평등해지는데, 
무엇이 뛰어나고 무엇이 용렬하며 무엇이 무겁고 무엇이 가볍겠는가. 
그리고 무엇이 천하고 무엇이 귀하며 무엇이 영예롭고 무엇이 욕된 것이겠는가.
투명한 하늘을 보면 다른 청정한 것이 부끄럽고 밝은 태양 아래에서는 다른 밝은 것이 부끄럽다. 
저 높은 산마루처럼 편안하고 저 금성탕지(金城湯池)처럼 견고하니 공경하게 이 글을 현인과 철인에게 남기면서 이 도가 곧바르고 이롭게 되기를 바란다.”
그는 또한 『지도론(至道論)』ㆍ『순덕론(淳德論)』ㆍ『견집론(遣執論)』ㆍ『거시비론(去是非論)』ㆍ『영유론(影喩論)』ㆍ『수공론(修空論)』ㆍ『불살론(不殺論)』 등을 저술하였는데, 
이 논들은 맑고 소박한 맛이 있고, 
말은 항상 선(善)을 권고하였으며, 
본질만 남기고 허구적인 것은 제거하여 사치하게 꾸며대는 일이 없었다. 
그의 문집(文集) 10권이 있어 세간에서 대단히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그는 어디에서 생을 마쳤는지 알지 못한다.

승곤(僧琨)
그의 제자에 승곤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는 성격이 침착하고 음률의 가락을 잘 다루었으며, 
수(隋)나라에서 20년 동안 오부대중을 위하여 독경의 법주(法主)가 되었다.
그는 많은 서적들을 찾아서 묶고 현인과 성인들의 책을 수집하여 여러 가지 논(論)들을 뽑아서 한부의 책으로 만들고 논장(論場)이라고 불렀는데, 
모두 30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을 한번 펼쳐보면 백가(百家)의 주장을 모두 볼 수 있으므로 이것도 역시 신학(新學)의 종장(宗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후에 곡지(曲池)에 정각사(靜覺寺)를 지어놓고 늘 물가에 가서 대나무를 비추어보며 사물을 체화(體化)하여 시를 짓곤 하였는데 많은 시집이 있다고 한다.


9) 위(魏)나라 업하(鄴下) 사문 석도총전(釋道寵傳)
도총의 속성은 장씨(張氏)이며 속세의 이름은 빈(賓)이다. 
고제(高齊)와 원위(元魏, 
483~501) 무렵에 나라의 학자로서 큰 선비인 안생(安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온 나라에서 귀중히 여기는 인물이었다.
당시 이범(李範)과 장빈(張賓)은 안생과 자리를 나란히 하였고 재능이 손꼽혀 그에게 귀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후 두 사람은 안생의 밑에서 그의 다음가는 높은 자리에 함께 임명되었으며, 
나이가 30세가 되면서 천여 명의 문도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가 조주(趙州) 원씨현(元氏縣)의 언각사(偃覺寺) 옆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곧 지금의 응각사(應覺寺)라고 이르는 곳이다. 
그가 이 절에서 물을 찾자 사미가 물을 가져다주면서 6진(塵)을 얼마나 갖추어야 이 물을 마실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는 평소에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면서 어리둥절해서 대답을 못하니 사미가 곧 물을 얼굴에 뿌렸다.
장빈은 크게 부끄러워하면서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물로 나를 욕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곧 불법이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나는 이제 마음을 이 도에 의탁하겠으니 제각기 흩어져라.”
그리고 나서 곧 그 날로 출가하였다.
절의 법도는 불도에 들어온 지 3년이 되어야만 시험을 거쳐 구족계를 받게 되는데, 
장빈은 총명하고 매우 박식하다고 하여 평상시의 제도에 구애되지 않고 그날로 구족계를 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산(西山)에 들어가 경전을 널리 탐구하였는데, 
정신작용이 매우 뛰어나서 뒤늦게야 그것을 알게 된 데 대하여 개탄하였다.
위나라의 선무제(宣武帝)가 불법을 숭상할 때 천축(天竺)의 범승(梵僧)인 보리류지(菩提留支)는 처음으로 『십지론(十地論)』을 번역하면서 자극전(紫極殿)에 있었고, 
륵나마제(勒那摩提)는 태극전(太極殿)에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각각 호위하는 군사가 있어서 그들과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이 번역한 것을 교정하면서 혹시 잘못된 것이 있을 것 같아서 이 일을 영평(永平) 원년(508)에 시작하여 4년 만에 비로소 끝냈는데 그것을 교감하고 대조해보니 보리류지는 “둘이 아니며 다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였으며, 
륵나는 “반드시 둘이 아니고 다하지 않는다면 한 글자로 이(異)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찬미하면서 성인의 마음을 받드는 것처럼 하였다.
도총은 이 질문을 받고 곧 보리류지에게 가서 심오한 궁극의 경지를 물으니, 
곧 겨울 석 달 동안 『십지론』을 가르쳐주었는데, 
듣는 것마다 주소[疏]를 써내고 곧 그곳에 몸담아 배움터를 개설하니 그의 명성이 높아지고 널리 퍼져서 업하에서 영예롭게 추대되었다.
당시 조정의 재상들 가운데서 문장의 대가들인 위수(魏收)ㆍ형자재(邢子才)ㆍ양휴지(楊休之) 등은 지난날에 도총의 문하를 거친 사람들로서 벼슬과 학문이 도총에 의하여 이룩되었는데, 
스스로 세속의 그물 속에 남아서 몸과 명성을 의탁하지 못하고 있다가 서로 도총을 따라와서 법문을 들었지만 모두 그를 알지 못하였다.
도총은 말없이 그들을 알아보고 곧 이렇게 말하였다.
“공을 비롯한 현자들은 나라의 영예로운 사람들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일찍이 학업을 받은 유래가 있습니까?”
그들이 모두 말하였다.
“본래 장씨(張氏)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는 속세를 싫어하여 출가하였습니다.”
도총이 말하였다.
“스승과 제자의 사이는 유래가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그러자 그들이 말하였다.
“우리들의 죄가 매우 심합니다. 
처음에 음성을 들으니 참으로 지난날의 옛 스승과 같았는데, 
용모와 거동이 완전히 달라져서 이렇게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3대(大:體大ㆍ相大ㆍ用大)가 한마음이 되어 경쇠를 울리니 슬픔과 기쁨이 서로 엇갈렸다. 
그리하여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자 그 덕으로 보아 시대적인 운명을 초월하고 의리로 보아 융숭하게 표창해야 할 일이라고 하여 날마다 황금을 석 냥씩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하사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학사들의 종장(宗匠)으로 되었고 도를 전해줄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도 천여 명에 달하였다. 
그 가운데서 높은 경지에 이룬 사람들은 승휴(僧休)ㆍ법계(法繼)ㆍ탄례(誕禮)ㆍ뇌의(牢宜)ㆍ유과(儒果) 등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처음에 륵나 삼장은 세 사람을 가르쳐주었는데, 
방(房)과 정(定)이라는 두 사람에게는 그 심법(心法)을 전수하였고, 
혜광(慧光) 한 사람에게만 특별히 법과 율(律)을 가르쳐주었으며, 
보리류지 삼장은 오직 도총만을 가르쳤다.”
그런데 도총은 도북(道北)에서 뇌의 등 네 사람을 가르쳐주고, 
혜광은 도남(道南)에서 빙(馮)과 범(範) 등 열 사람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므로 낙양성 아래에 남과 북의 두 길이 생기게 되었으며, 
두 가지 설이 나타나게 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4종(宗)과 5종도 이로 인하여 일어난 것인데 지금은 없어졌기 때문에 번거롭게 설명하지 않는다.

10) 제(齊)나라 팽성(彭城) 사문 석혜숭전(釋慧嵩傳)
혜숭의 속성과 족보는 자세히 알 수 없으며 고창국(高昌國) 사람이다.
그 나라는 본래 저거량왕(沮渠凉王)이 난리를 피하여 옮겨간 곳이기 때문에 그 종족들은 모두 중국의 글과 법도에 정통하고 있었다.
혜숭은 젊어서 출가하였는데 총명하고 민첩하여 책을 펼치면 즉시에 곧 그 내용을 환히 꿰뚫었으며, 
남몰래 불도에 대한 수양을 쌓았고 『잡심론(雜心論)』을 더욱 좋아하여 당시 그 나라에서 존중받는 사람이 되었다.
혜숭의 형은 박사(博士)로 되어 왕족들이 그를 추대하고 숭상하며 선비들의 존중을 받았지만 불도의 교리를 흠모하지 않았으므로 혜숭이 사물을 훌륭하게 비추어보는 것을 보고는 속세로 돌아오도록 권고하면서 유가의 이치를 가르치자 혜숭이 말하였다.
“케케묵은 선비의 협소한 지혜는 귀의하여 칭송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것은 진실로 등겨 찌꺼기와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겠는데 그밖에 또 무엇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후에도 형은 자주 혜숭의 길을 가로막고 장애를 주다가 마침내 역림(易林)의 비밀을 혜숭에게 물었다.
혜숭은 애초에 속세의 경전은 읽지 앉았지만 책을 잡고 그 내용을 분석하는데 예전에 들었던 것보다 뛰어나게 해석하였다. 
형은 비록 그를 남다르게 여겼지만 불법의 넓은 뜻은 조금도 믿지 않았다. 
혜숭이 『아비담(阿毘曇)』에 있는 한 수의 게송을 변화시켜서 그것을 해석하게 하자 두 달 동안이나 딱 막혀 있다가 어지럽게 함부로 풀이한 끝에 마침내 그에 대한 해석이 있었으나 그 말은 완전히 이치와 내용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혜숭이 형의 말을 모두 부정하고 나서 곧 그를 위하여 한번 그 내용을 깨우쳐주자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곧 불법을 크게 숭상하고 믿게 되어 심오한 법문을 널리 통달하였으며, 
곧 마음껏 그 법문에서 즐겁게 배우게 되었다.
그때는 원위(元魏:北魏) 말기에 속하는 시기여서 경에 대한 가르침이 크게 베풀어졌다. 
고창(高昌)의 왕이 불문(佛門)이 다시 열리게 하려고 곧 혜숭의 형제를 북위에 바쳤기 때문에 그들은 사신을 따라 조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고씨(高氏)가 재상으로 있었는데 그는 그들의 재능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당시 지유(智遊)라는 논사가 세간에서 영걸이라고 불렸는데, 
혜숭은 곧 그에게서 『아비담론(阿毘曇論)』과 『성실론(成實論)』에 대한 강의를 듣고 그 글뜻을 이해하고 기록해두어서 다시 사람들에게 믿음과 존중을 받았지만 그의 위계(位階)가 사미(沙彌)로 되어 있었으므로 다시 명성과 지략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후 구족계를 받은 후에야 곧 으뜸가는 자리에 올라 경의 가르침을 펼쳐 보이고 분석하면서 바로 기연(機緣)을 만나서 칼날같이 날카로운 논적들이 그에게 귀의하고 절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학문이 이룩되고 명망이 멀리에까지 퍼지자 본국에서는 그에게 돌아오도록 초청하였다. 
그러자 혜숭이 말하였다.
“나의 해박한 학식은 의리로 보아 변방의 누추한 나라에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업성과 낙양으로 되돌아와서 불도를 넓혀가는 종장으로 되었다.
그후 본국에서는 또 거듭 불렀지만 혜숭의 고집은 여전하였다. 
그러자 고창국에서는 곧 그의 3족(族)을 멸살시켰다.
혜숭은 그 소식을 듣고 권속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경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삼계(三界)는 덧없는 것이고 모든 생존은 즐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더구나 세 갈래 세상의 여덟 가지 고통[三途八苦]은 본래부터 겪어온 일인데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그후 고제(高齊:北齊)가 천보(天保) 연간에 변혁을 일으켜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데 황제는 명예와 명망을 지닌 사람들을 거느리며 선제(宣帝)에게 존중을 받게 되었다.
혜숭은 지혜와 학문으로 명예를 떨쳤고 자주 법의 이치를 넓힌 것으로 하여 마침내 서주(徐州)로 자리를 옮기고 그곳에서 오래 동안 승통(僧統)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팽성(彭城)의 패주(沛州)에 거처하면서 큰 계획[圖謀]을 천명하였고 강남과 하남(河南) 땅이 거의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이것은 곧 수(隋)나라 초기의 지념 논사(志念論師)가 조사로 받들고 법을 이어간 유래가 된 것이다.
그는 천보 연간에 서주에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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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ed--속고승전_K1075_T2060.txt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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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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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4-10-28_속고승전_007
 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의 자체. 정심(定心) 또는 의신(依身). 색계ㆍ무색계의 중생은 욕계의 중생이 바깥 대상물에 대하여 번뇌를 일으키듯이, 내계(內界)의 정심(定心)에 애착하므로 유탐(有貪)이라 함. 외도들은 이 경계를 해탈 경계라고 생각함에 대하여, 이것은 생사하는 경계인 줄을 알게 하기 위하여 특히 유탐(有貪)이라 이름.

답 후보
● 유(有)
유가종(瑜伽宗)
유루(有漏)
유루지(有漏智)
유마(維摩)

유법(有法)
유분별(有分別)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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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bud] Buddhism in Norway
[san-chn] aparikalpita 離妄想
[san-eng] prajahāti $ 범어 gives up
[pali-chn] saccānulomika-ñāṇa 隨諦相應智
[pal-eng] ju.nhapakkha $ 팔리어 m.the bright half of the month.
[Eng-Ch-Eng] 大樂金剛薩埵修行成就儀軌 The Dale jingangsaduo xiuxing chengjiu yigui (Ritual Procedure for the Successful Cultivation of the Vajrasattva of Great Bliss). 1 fasc. (T 1119.20.509), trans. Amoghavajra 不空. See the study in Astley (1990).
[Muller-jpn-Eng] 沙多婆漢那 シャタバカンナ (person) Sātavāhana
[Glossary_of_Buddhism-Eng] HORIZONTAL TRANSCENDENCE☞
See: Horizontal Escape.

[fra-eng] défenseur $ 불어 advocate, lawyer


■ 다라니퀴즈

자비주 68 번째는?
성관자재보살 명호 86 번째는?




68
만약 정성스럽게 마음을 쓰며
몸으로는 재계(齋戒)를 지녀
일체 중생을 위해서
전생부터 지금까지 지어온 업을
정성껏 참회하며
또한 자신이 무량겁이래 지은
악업과 무거운 죄를
참회하고
빨리빨리 이 다라니를 외우되
소리소리마다 끊어지지 아니하면
네 가지 성문과(聲聞果)를
이 생에서 곧 중득함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그 중에
날카로운 근기와 지혜가 있어
방편(方便)을 관(觀)하는 자는
십지과위(十地果位)를
어렵지 않게 증득하거늘
하물며 세상의 조그마한 복이겠는가.
구하고 원하는 바에
얻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이것은 다 이 관세음보살의 대비원력이
깊고 중한 까닭이며,
또 이 다라니의 위신력이 광대(廣大)한 까닭이니라.
● 파마갈실다야 波摩羯悉哆夜<六十八> pad ma ka s ta ya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86
가리 다니시자야
訖哩<二合>哆你室左<二合>野<八十六>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 삼매_게송퀴즈


■ 오늘의 게송
[302일째]
념념어제소행처 $ 044▲泥羅婆泥羅婆為 一 ● 訶理婆, ○□□□□,調,所,所,於

□□□□□□□, 調伏眾生不可說。
所有神變不可說, 所有示現不可說,
□□□□□□□, 조복중생불가설。
소유신변불가설, 소유시현불가설,

찰나찰나 다니는 여러 곳에서
중생을 조복함도 말할 수 없고
갖고 있는 신통 변화 말할 수 없고
보이어 나타냄도 말할 수 없어

045□

[303째]
어중시겁불가설 $ 045▲訶理婆訶理婆為 一 ● 一動, ○□□□□,於,菩,諸,一

□□□□□□□, 於中差別不可說,
菩薩悉能分別說, 諸明算者莫能辨。
□□□□□□□, 어중차별불가설,
보살실능분별설, 제명산자막능변。

그 가운데 겁과 시간 말할 수 없고
그 가운데 차별도 말 못할 것을
보살이 분별하여 다 말하지만
산수에 능한 이도 분별 못하네.





●K1060_T2152.txt★ ∴≪A속고금역경도기≫_≪K1060≫_≪T2152≫
●K1075_T2060.txt★ ∴≪A속고승전≫_≪K1075≫_≪T2060≫
●K1061_T2150.txt★ ∴≪A속대당내전록≫_≪K1061≫_≪T2150≫

법수_암기방안


44 네째발가락 the fourth toe
45 발등 instep / top (side) of the foot
68 요골 ~ 노뼈
86 대퇴골 [ =넙다리뼈 ]~가리 다니시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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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고승전_K1075_T2060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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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승전』 ♣1075-007♧
[관련키워드]
제7권

■ 본 페이지 ID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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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ed--속고승전_K1075_T2060.txt ☞제7권
sfd8--불교단상_2564_10.txt ☞◆vkfm1700
불기256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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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back--불기2564-10-28_속고승전_K1075_T2060-ti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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