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사지론』
K0570
T1579
제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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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057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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瑜伽師地論卷第四十二 因
K0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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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42권
미륵보살 지음
현장 한역
본지분중(本地分中) 보살지(菩薩地) 제 15 초지유가처(初持瑜伽處) 계품(戒品) 제 10의 3
무엇을 보살의 ‘행하기 어려움의 계[難行戒]’라고 하는가?
이 계에는 요약하여 세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모든 보살로서
현재에 큰 재산과 큰 족성(族姓)의 자재하고 으뜸감을 구족하였으면서도,
이와 같은 큰 재산과 큰 족성의 자재하고 으뜸감을 버려 버리고,
보살의 청정한 계율의(戒律儀)를 수지(受持)하는 이것을,
보살로서 첫째의 행하기 어려움의 계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로서의 청정한 계율을 받은 뒤에
만약 위급한 재난과 내지 생명을 잃게 되는 일을 만난다 하여도
받은 바의 계율에 대해서는 오히려 조금이라도 결함됨이 없게 하거늘,
하물며 완전히 범함이겠는가.
이것이 보살로서 둘째의 행하기 어려움의 계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로서 이와 같고 이와 같이 두루하게 온갖 가고 머무르고 하는 데서
작의(作意)하되,
한결 같이 정념(正念)에 머무르며,
언제나 방일함이 없고 생명을 마치기에 이르기까지
받은 바 계율에 대해서는 그르치고 잃음이 없으면서 오히려 가벼운 것도 범하지 않거늘,
하물며 중한 것을 범함이겠는가.
이것이 보살로서 셋째의 행하기 어려움의 계이라 한다.
무엇을 보살의 ‘일체문의 계[一切門戒]’라고 하는가?
이 계에는 요약하여 네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바르게 받는 계[正受戒]요,
둘째는 본성계(本性戒)요,
세째는 익히는 계[串習戒]요,
넷째는 방편과 상응하는 계[方便相應戒]이다.
‘바르게 받는 계’라고 함은,
모든 보살로서 먼저 받은 바
세 가지인 보살의 청정한 계율의를 받는 것이니,
율의계[律儀戒]와
선법을 거두는 계[攝善法戒]와
유정을 이롭게 하는 계[饒益有情戒]가 그것이다.
‘본성계’라고 함은,
모든 보살로서 종성위(種姓位)에 머물면
본성이 인자하고 어질어 상속하는 가운데에
신(身)ㆍ어(語)의 두 가지 업을 한결같이 청정하게 굴리는 것이다.
‘익히 익히는 계’라고 함은,
모든 보살로서 옛날의 다른 세상 안에서
먼저의 말한 바와 같은 세 가지 청정한 계를 일찍이 익히 수습했는지라,
전생 원인의 힘[宿因力]에 머무르고 지님[住持]으로 말미암아
현재 세상의 온갖 악법(惡法)에 대해서는 현행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모든 악법에 대해서는 마음 속 깊이 싫증내어 여의며,
선행(善行)을 닦기 좋아하여
선행에 대해서는 깊은 마음으로 흠모하는 것이다.
‘방편과 상응하는 계’라고 함은,
모든 보살로서 4섭사(攝事)에 의하여
모든 유정들에게
신(身)ㆍ어(語)의 선업(善業)을 한결같이 상속하여 굴리는 것이다.
무엇을 보살의 ‘선사의 계[善士戒]’라고 하는가?
이 계에는 요약하여 다섯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모든 보살은 스스로가 시라(尸羅)를 갖추고,
다른 이에게 권하여 계를 받게 하며,
계의 공덕을 찬탄하고,
법을 같이하는 이를 보면 마음 속 깊이 환희하며,
설령 훼범함이 있다손치더라도 여법하게 뉘우쳐 제거하는 것이다.
무엇을 보살의 ‘일체종의 계[一切種戒]’라고 하는가?
이 계에는 요약하여 말한다면
여섯 가지와 일곱 가지를 한데 묶어서 열 세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여섯 가지’라고 말한 것의
첫째는 회향의 계[廻向戒]이니,
큰 보리[大菩提]에 회향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넓은 계[廣博戒]이니,
온갖 배워야할 학처(學處)를 널리 섭수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죄 없이 환희하는 것의 계[無罪歡喜處戒]이니,
탐욕을 즐기는 것[欲樂]과
스스로 고행하는 것[自苦]에 탐착(耽著)하는 2변(邊)의 행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넷째는 항상함의 계[恒常戒]이니,
비록 수명을 다한다손 치더라도 역시 배워야 할 학처[所學處]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견고함의 계[堅固戒]이니,
온갖 이양(利養)이거나 공경이거나 다른 이론[異論]이거나,
근본 번뇌 및 수번뇌(隨煩惱) 조차도 누를 수 없기 때문이며,
빼앗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시라 장엄구와 상응하는 계[尸羅莊嚴具相應戒]이니,
온갖 계의 장엄을 구족하기 때문이다.
시라의 장엄은 성문지(聖聞地)에서와 같은 그런 상(相)인 줄 알아야만 한다.
‘일곱 가지’라 말한 것의
첫째는 그쳐 쉼의 계[止息戒]1)이니,
온갖 살생(殺生) 따위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둘째는 더욱 지음의 계율[轉作戒]2)이니,
온갖 선(善)을 섭수하기 때문이며,
유정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막아 지킴의 계[防護戒]3)이니,
그쳐 쉼과 더욱 지음의 계를 따라 보호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대사상의 이숙계[大士相異熟戒]4)요,
다섯째는 증상심의 이숙계[增上心異熟戒]5)요,
여섯째는 사랑할 만한 취의 이숙계[可愛趣異熟戒]6)요,
일곱째는 유정을 이롭게 함의 이숙계[利有情異熟戒]7)이다.
무엇이 보살의 ‘구함에 따르는 계[隊求戒]’라고 하는가?
이 계에는 요약하여 여덟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모든 보살은,
스스로 자세하게 사유하기를,
‘나는 그가 나에게
목숨을 끊음[斷命; 殺生]과
주지 않는 것을 취함[不與取; 偸盜]과
더러운 음욕의 삿된 행[穢欲; 邪婬]과
거짓말[妄語]과
이간질하는 말[離間; 離間語]과
추악한 말[麤惡; 麤語]과
비단말[綺語]과
손ㆍ흙덩이ㆍ몽둥이 따위의 여러 사랑스럽지 못한 접촉을 현행하여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면 하고 희구하거니와,
이것을 희구한 뒤에 다른 이가 만약 상반되게 현행한다면,
’나의 희구함은 따라주지 않을뿐더러
나의 뜻이 즐겁지도 않으리라.
내가 희구하는 것처럼 다른 이도 역시 이와 같아서,
나는 그가 목숨 끊음에서부터 나쁜 접촉에 이르기까지의 것을
현행하여 가해를 끼치기 말았으면 하고
그가 이것을 희구한 뒤에
내가 만약 상반되게 현행한다면,
그의 희구함은 따라주지 않을뿐더러
그의 뜻은 기쁘지 않으리라.
나의 짓는 바가 만약 다른 이로 하여금 구한 바가 따라주지도 아니하고,
뜻을 기쁘게 하는 것도 아니면
어째서 현행하게 될 것인가’하고,
보살은 이와 같이 자세히 사유한 뒤에는
생명에 어려움을 겪는 인연에서라도
역시 다른 이에게 여덟 가지 구하는 바가 따르지도 않게 하고,
뜻을 기뻐하지 않게 하는 일은 현행하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은 여덟 가지를 말하여 보살의 ‘구함에 따른 계’라고 한다.
무엇을 보살의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안락함의 계[此世他世樂戒]’라고 하는가?
이 계에는 요약하여 아홉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모든 보살은 모든 유정들을 위하여 막아야 할 데서는 바르게 막아 못하게 하고,
열어야 할 데서는 바르게 열어서 허락하며,
이 모든 유정을 섭수해야 할 이라면 바르게 섭수하고,
조복하여야 할 이라면 바르게 조복하는 것이니,
보살은 이 가운데서 신ㆍ어의 두 가지 업을 언제나 청정하게 굴린다.
이것이 곧 네 가지의 청정한 계라고 한다.
다시,
그 나머지의 보시와 인욕과 정진과 정려와 반야바라밀다와 함께 행하는 청정한 계가 바로 다섯 가지이므로,
통틀어 말하면 아홉 가지 청정한 계가 된다.
이와 같은 보살로서 지니는 바 청정한 계는
자기와 다른 이로 하여금 현법에서나 후법에서나 모두가 안락함을 얻게 하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말하여 보살의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안락함의 ’라고 한다.
무엇을 보살의 ‘청정의 계[淸淨戒]’라고 하는가?
이 계에는 요약하여 열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처음에 잘 받음의 계[初善受戒]이니,
사문의 3보리(菩提)8)만을 위해서요,
생명을 위해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나치게 침잠하지 않는 계[不太沈戒]이니,
어기어 범한 때에는 작고 엷은 것이라도 멀리 여의면서 뉘우침과 부끄러움을 내기 때문이며,
또 지나치게 들떠있지 않는 계[不太學戒]이니,
그릇된 것[非處]을 멀리 여의면서 뉘우침과 부끄러움을 내기 때문이다.
셋째는 해태를 여읨의 계[離懈怠戒]이니,
잠을 자는 즐거움과 기대는 즐거움과 눕는 즐거움에 대해 탐착하지 않기 때문이며,
밤낮으로 여러 선품(善品)을 부지런히 닦기 때문이다.
넷째는 모든 방일을 여읨에 포함되는 바의 계[離諸放逸所攝受戒]이니,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다섯 가지 방일하지 않는 것을 수습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바른 서원의 계[正願戒]이니,
이양과 공경의 탐냄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천(天)에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고 스스로 시기를 기다리면서 범행(梵行)을 닦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궤칙의 구족에 섭수되는 바의 계[軌則具足所攝受戒]이니,
모든 위의(威儀)의 짓는 바와 뭇 일과 선품의 가행[加行]과,
아름답고 착하고 원망하고 여법한 신ㆍ어에 대하여 바르게 현행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청정한 생활의 구족에 섭수되는 바의 계[淨命具足所攝受戒]이니,
속임수 따위의 온갖 삿된 생활과 과실(過失)의 법을 여의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2변을 여의는 계[離二邊戒]이니,
탐욕을 즐기는 것과 스스로 고행하는 2변(邊)의 법을 수용함을 멀리 여의게 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영원히 벗어남의 계율[永出離戒]이니,
온갖 외도의 견해를 멀리여의기 때문이다.
열째는 먼저 받은 것에 대한 손실이 없는 계[於先所受無損失戒]이니,
먼저 받은 바의 보살의 청정한 계에 대하여 결함이 없기 때문이요,
파괴함이 없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열 가지가 바로 보살의 ‘청정의 계’라 한다.
이와 같은 보살의 큰 시라장[大尸羅藏]은,
장차 오는 세상의 큰 보리의 과[大菩提果]를 일으킨다.
말하자면,
이에 의하기 때문에 보살의 청정한 계의 바라밀다가 원만하게 된 뒤에는
현재에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고,
내지 아직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하지 못했더라도
이 한량없는 보살계장(菩薩戒藏)에 의하여 바르게 부지런히 수습하여 언제나 다섯 가지의 수승한 이익을 얻게 된다.
첫째는 언제나 시방의 모든 부처님에게서 보호와 생각하심을 받음이요,
둘째는 장차 목숨을 버리려 할 때에는 큰 기쁨에 머무름이요,
셋째는 몸이 무너진 이후에 태어나는 곳마다
언제나 청정한 계와 똑같거나 보다 더 뛰어난 모든 보살들과
그와 동분(同分)이 되며,
그와 법을 같이 하는 벗이 되며,
선지식이 된다.
넷째는 한량없는 큰 공덕장[大功德藏]을 성취하여
청정한 계의 바라밀다를 원만히 할 수 있음이요,
다섯째는 현법과 후법에서 언제나 자성(自性)의 청정한 계를 성취할 수 있고
계는 그의 성품이 된다.
이와 같이,
위에서 말한 바의 온갖 자성의 계[自性戒] 등의 아홉 가지 시라 같은 것은 세 가지 청정한 계에 포함되는 줄 알아야만 하리니,
이른바 율의계와 선법을 거두는 계와 유정을 이롭게 하는 계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보살의 청정한 계를 요약하여 말하자면,
보살로서 세 가지의 지을 바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율의계는 그의 마음을 안주하게 하고,
선법을 거두는 계는 스스로가 불법(佛法)을 성숙하게 하고,
유정을 이롭게하는 계는 유정들을 성숙하게 한다.
이와 같이 통털어서 일체 보살로서 지어야 할 바의 일을 거두니,
이른바 현법락(現法樂)에 머무르며,
그의 마음이 머무르며,
몸과 마음에 게으름이 없으며,
불법을 성숙시키며,
유정들을 성숙되게 하려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은 이렇게 보살의 청정한 계만이 있으며,
이렇게 청정한 계의 수승한 이익만이 있고,
이렇게 청정한 계의 소작(所作)만이 있으니,
이것을 제외하고서 보다 지나가거나 보다 더하는 것은 없다.
과거의 보살은 큰 보리를 구한 뒤에는 이 안에서 배웠으며,
미래의 보살은 큰 보리를 구하고서 장차 이 안에서 배울 것이며,
두루 시방의 그지없고 가없는 모든 세계 안에 있는 현재의 보살들은 큰 보리를 구하고서 이제 이 안에서 배운다.
본지분중(本地分中) 보살지(菩薩地) 제 15 초지유가처(初持瑜伽處) 인품(忍品) 제 11
무엇을 보살의 ‘인욕바라밀다[忍波羅蜜多]’라고 하는가?1)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리라.
자성과 일체와 어려움과
일체문과 선사와
일체종과 구함에 따름과
두 세상에서 안락함과 청정이니,
이와 같은 아홉 가지 상을
바로 요약하여 인욕을 말함이라 한다.
自性一切難 一切門善士
一切種遂求 二世樂淸淨
如是九種相 是名略說忍
아홉 가지 상(相)의 인욕을 말하여 보살의 인욕바라밀다라고 하니,
첫째는 자성의 인욕[自性忍]이요,
둘째는 일체의 인욕[一切忍]이요,
셋째는 행하기 어려움의 인욕[難行忍]이요,
넷째는 일체문의 인욕[一切門忍 ]이요,
다섯째는 선사의 인욕[善士忍]이요,
여섯째는 일체종의 인욕[一切種忍]이요,
일곱째는 구함에 따른 인욕[遂求忍]이요,
여덟째는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안락함의 인욕[此世他世樂忍]이요,
아홉째는 청정의 인욕[淸淨忍]이다.
무엇을 보살의 ‘자성의 인욕[自性忍]’이라고 하는가?
모든 보살이,
혹은 사택하는 힘[思擇力]을 의지할 바로 삼거나,
혹은 자성의 원한과 해침[怨害]을 견뎌 참음으로 말미암아 두루 온갖 것에 대하여 모두를 능히 견뎌 참고,
널리 온갖 것에 대하여 모두를 능히 견뎌 참으며,
물듦이 없는 마음으로 순수하게 가엾이 여김으로 말미암아 능히 견뎌 참음이 있으니,
이것이 곧 보살의 인욕의 자성을 간략하게 말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보살의 ‘일체의 인욕[一切忍]’이라고 하는가?
이 인욕에는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하리니,
첫째는 재가품품에 의한 인욕[依在家品忍]이요,
둘째는 출가품에 의한 인욕[出家品忍]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이 두 가지 품의 인욕에 의하여 각각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다른 이의 원한과 해침을 견디어내는 인욕[耐他怨害忍]이요,
둘째는 뭇 고통을 편안히 받는 인욕[安受衆苦忍]이요,
셋째는 법을 사유하고 승해하는 인욕[法思勝解忍]이다.
무엇을 보살의 ‘다른 이의 원한과 해침을 견디어내는 인욕’이라고 하는가?
모든 보살은 날카롭고 끊임없이 오랜 세월 동안에 다른 이의 원한과 해침에서 생기는 바 뭇 고통이 바로 눈앞에 있을 때에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은 바로 나의 자업(自業)의 과실일 따름이다.
나는 전생에 스스로가 갖가지의 청정하지 못한 업을 지었기 때문에 이제 이와 같은 갖가지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다.
나는 이제 이 의리(義利)가 없는 괴로움에 대하여 만약 인욕하지 아니한다면 다시 장차 오는 세상의 큰 괴로움의 원인이 되리라.
내가 만약 이 큰 괴로움의 인법(因法)에 대하여 따르면서 굴린다면,
자기에 대해 스스로가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짓게 되고,
자기에 대해 스스로가 결박을 생기게 하며 자기에 대해 스스로가 원한과 해침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다른 이 때문이 아니다.
또,
자기 몸이거나 다른 이 몸에 있는 바 모든 행은 모두가 다 본성의 괴로움[性苦]으로써 바탕[體]이 되었다.
그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의 몸 안의 본성의 괴로움 바탕 위에 다시 그 괴로움을 더하게 하거니와 나는 이미 알았거늘,
어찌하여 그 본성의 괴로움 바탕 위에 거듭하여 그 괴로움을 더하게 하겠는가.
또,
모든 성문의 대부분이 자신의 의리의 행만을 닦으면서도 오히려 자기와 다른 이의 뭇 고통이 생길 적에 인욕하지 못함[不忍]을 일으키지 않거늘,
하물며 나는 이제 바로 다른 이의 의리의 행을 부지런히 닦는다고 하면서 인욕하지 않음을 일으키겠는가’라고 한다.
보살은 이와 같이 바르게 사택하고 나서는 다섯 가지 상(想)을 부지런히 닦아서,
원수거나 친한 이거나,
그 중간이거나,
못난 이거나 평등한 이거나,
보다 뛰어난 이들로서,
즐거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덕을 갖추고 과실을 갖춘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온갖 원한과 해침의 고통을 능히 참는다.
무엇을 ‘다섯 가지 상(想)’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전생에는 친하고 사이가 좋았다는 상[宿生親善想]이요,
둘째는 법만을 수순한다는 상[唯法隨順想]이요,
셋째는 무상하다는 상[無常想]이요,
넷째는 고통이라는 상[苦想]이요,
다섯째는 섭수한다는 상[攝受想]이다.
어떻게 보살로서 원한과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에 대하여,
전생에는 친하고 사이가 좋았다는 상(想)을 수습하는가?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하니,
‘오랜 세상을 지나는 전생 동안에 일찍이 나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고,
형제자매였고,
친교사(親敎師)였고,
궤범사(軌範師)였고,
어른이었고,
존경할 만한 이가 되지 않았던 이라고는 단 한 중생도 없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이치대로 바르게 사유하는 까닭에,
원한과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원망함과 밉다는 생각을 버리고,
친하고 사이가 좋았다는 생각에 머무르게 되면,
친하고 사이가 좋았었다는 생각에 머무르게 되며,
친하고 사이가 좋았었다는 생각에 의존하는지라 모든 원한과 해침에 대하여 모두 견디고 참을 수 있다.
어떻게 보살로서 원한과 해침이 있는 유정들에 대하여 법만을 수순한다는 상(想)을 수습하는가?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하니,
뭇 인연에 의탁하여 법(法)만을 행하고 이 안에는 도무지 아(我)라거나 유정(有情)이라거나 목숨 있는 이[命者]라거나,
사는 이[生者]라거나 하여,
바로 그것에 욕하고 성내고 때리고 희롱하고 꾸짖는다고 하거나,
혹은 이는 욕할 바요,
성낼 바요,
때릴 바요,
희롱할 바요,
꾸짖을 바라고 하는 것이 없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이치대로 바르게 사유하는 까닭에 원한과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유정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법뿐이라는 생각에 머무르게 되며,
법뿐이라는 생각에 의존하는지라,
모든 원한과 해침에 대하여 모두 견디고 참을 수 있다.
어떻게 보살로서 원한과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에 대하여 무상하다는 상(想)을 닦는가?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하니,
‘모든 존재[有]의 유정은 태어나거나 자라나거나 간에 온갖 것은 무상한 것이어서,
모두가 이는 죽음의 법[死法]이다.
극히 원수를 갚는 이가 그의 목숨을 끊는다 하여도,
이 모든 유정의 목숨은 염념(念念)으로 끊어진 것이거늘,
지혜로운 이라면 무엇 때문에 다시 이러한 태어나고 죽는 성품이며,
무상한 법을 끊으려 하겠는가.
모든 유정의 위가 되는 그 지혜 있는 이라면 오히려 물들거나 흐림이 있는 마음조차 일으키지 않거늘,
하물며 손과 흙덩이와 몽둥이로써 가해를 끼치겠는가,
하물며 모든 것으로 그 목숨을 영영 끊음이겠는가’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이치대로 바르게 사유하는 까닭에,
항상 견고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다는 생각에 안주하게 되며,
무상하다는 생각에 의존하는지라,
모든 원한과 해침에 대하여 모두 견디고 참을 수 있다.
어떻게 보살로서 원한과 해침이 있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고통이라는 상(想)을 수습하는가?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
여러 유정으로서 크게 흥성하는 이 조차 오히려 세 가지 괴로움에 언제나 쫓기게 되니,
‘행고(行苦)와 괴고(壞苦)와 고고(苦苦)가 그것이다.
하물며,
여러 유정으로서 쇠망함에 머무른 이이겠는가’라고 이와 같이 관찰한 뒤에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나는 이제 이 고통에 늘 쫓기는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부지런히 방편으로 뭇 고통을 떠나게 해야겠고,
그에게는 거듭하여 고통을 끼치지 않아야겠구나’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이치대로 바르게 사유하기 때문에,
즐겁다는 생각이 끊어 없어지고 고통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게 되며,
이 고통이라는 생각에 의존하는지라,
모든 원한과 해침에 대하여 모두 견디고 참을 수 있다.
어떻게 보살로서 원한과 해침이 있는 여러 유정들에 대하여 섭수한다는 상(想)을 수습하는가?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하니,
‘나는 일체 유정의 무리를 위하여 보리 마음을 내어서 일체 유정의 무리를 거두어 주며,
모두를 친한 권속으로 삼겠으며,
나는 그들을 위하여 모든 의리(義利)를 지어야겠다.
나는 이제 본래가 유정들에게 의리를 지으려 하였다가 그들의 원한과 해침을 인욕할 수 없음을 당하여,
도리어 의리가 아닌 것을 짓지 않아야 되리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이치대로 바르게 사유하는 까닭에,
원한과 해침이 있는 유정들에 대하여 다른 이라는 생각이 없어지고 섭수하겠다는 생각에 머무르게 되며,
섭수하겠다는 생각에 의존하는지라,
모든 원한과 해침에 대하여 모두 견디고 참을 수 있다.
무엇을 인욕[忍]이라고 하는가?
스스로가 분을 발끈 냄이 없고,
다른 이에게 원한을 갚지 아니하며,
또한 수면(隨眠)이 흘러 쏟아져서 언제나 상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인욕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살로서 다른 이의 원한과 해침을 견디어내는 인욕이라고 한다.
무엇을 보살의 ‘뭇 고통을 편안히 받는 인욕[安受衆苦忍]’이라고 하는가?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하니,
‘나는 옛날부터 오면서 욕행(欲行)에 의하여 굴렀는지라 언제나 모든 욕심을 구하였고,
고의로 사택하여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위하여 갖가지 괴로운 성품의 모든 욕심을 추구하였으며,
추구할 때에는 한량없고 날카로운 큰 고통을 참고 받았으니,
이른바 갖가지의 이익을 좇았고 농사를 지었으며,
벼슬을 사는 따위의 일이다.
이와 같이 무의(無義)의 고통을 추구할 때에 나로 하여금 가지가지 큰 고통을 모두 받게 하였으니,
모두가 지혜가 없이 사택한 과실 때문이다.
나는 이제 안락함을 이끄는 가장 수승한 선품(善品)을 구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사택하여 백천 구지(俱胝)의 큰 고통을 참고 받아야 하겠거늘,
하물며 소소한 고통조차 참고 받지 않겠는가’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이치대로 바르게 사유하는 까닭에 보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모든 온갖 일의 고통을 참고 받는다.
무엇을 말하여 ‘온갖 일의 고통[一切事苦]’이라고 하는가?
이 고통에는 요약하여 여덟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의지처의 괴로움[依止處苦]이요,
둘째는 세간의 법처의 괴로움[世法處苦]이요,
셋째는 위의처의 괴로움[威儀處苦]이요,
넷째는 법을 섭수하는 것의 괴로움[攝法處苦]이요,
다섯째는 걸행처의 괴로움[乞行處苦]이요,
여섯째는 근구처의 괴로움[勤劬處苦]이요,
일곱째는 이타처의 괴로움[利他處苦]이요,
여덟째는 소작처의 괴로움[所作處苦]이다.
의지처의 괴로움[依止處苦]이라고 하는 것의 의지[依]는 4의(依)2)를 말한다.
이것에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선설(善說)의 법과 비나야(毘奈耶) 중에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필추로서의 분(分)을 이루니,
의복ㆍ음식ㆍ침구ㆍ병에 대한 의약과 몸을 돕는 집물(什物)이다.
보살은 여기에서 만약 거칠고 헤졌거나,
아주 적거나 망설이거나,
업신여기는 등의 불경함[不敬]을 당하여도 걱정 근심하지 않는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정진(精進)을 게을리 하거나 그만 두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을 보살의 ‘의지처의 괴로움을 참고 받는다’고 한다.
세간의 법처의 괴로움[世法處苦]이라고 함은,
세간의 법에는 요약하여 아홉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쇠함[衰]함이요,
둘째는 헐어짐[毁]이요,
셋째는 헐뜯음[譏]이요,
넷째는 괴로움[苦]이요,
여섯째는 무너지는 법의 무너짐[壞法壞]이요,
일곱째는 늙는 법의 늙음[老法老]이요,
여덟째는 병든 법의 병듦[病法病]이요,
아홉째는 죽는 법의 죽음[死法死]이다.
이와 같은 세간의 법을 온통 또는 따로따로 만나게 되어 눈앞에 나타나면 뭇 고통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세간의 법처의 괴로움이라고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은 뭇 고통에 접촉하게 될 때에는 사택하고서 참고 받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정진을 게을리 하거나 그만 두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것을 보살의 ‘세간의 법처의 괴로움을 참고 받는다’고 한다.
위의처의 괴로움[威儀處苦]이라고 함은,
이는 바로 가고,
머무르고,
앉고,
눕는 네 가지 위의인 줄 알아야만 한다.
보살은 이 가운데에 가거나 앉거나 간에,
밤과 낮 언제나 모든 장애되는 법으로부터 그 마음을 닦고 청정히 하여 끝끝내 때가 아니면,
평상이거나 풀 깔개이거나 잎 깔개에 옆구리를 대지 아니한다.
보살은 이 고달픔에서 생기게 되는 괴로움에 대하여 모두 참고 받나니,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정진을 게을리 하거나 그만 두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것을 보살의 ‘위의처의 괴로움을 참고 받는다’고 한다.
법을 섭수하는 것의 괴로움[攝法處苦]이라고 함은,
법을 섭수하는 데에는 요약하여 일곱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3보를 공양하고 섬r;l는 것[供事三寶]이요,
둘째는 존장을 공양하고 섬기는 것[供事尊長]이요,
셋째는 정법을 물어 받는 것 [諮受正法]이요,
넷째는 이미 물어 받은 뒤에는 널리 다른 이를 위하여 해설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큰 음성으로써 읊고 찬탄하고 외우는 것이요,
여섯째는 공한처에 홀로 있으면서 전도 없이 사유하고 칭량하고 관찰하는 것이요,
일곱째는 유가작의(瑜伽作意)에 포함되는 지관(止觀)을 수습하는 것이다.
보살은 이 일곱 가지의 법을 거두는 것에 대하여 용맹스럽게 애쓰는 데서 생기게 되는 뭇 고통을 모두 참고 받으니,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정진을 게을리 하거나 그만두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것을 보살의 ‘법을 섭수하는 것의 괴로움을 참고 받는다’고 한다.
걸행처의 괴로움[乞行處苦]이라고 함은 이 괴로움에는 요약하여 일곱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스스로가 맹세하여 형상을 헐어뜨리는 것이니,
수염과 머리칼 따위를 깎고서 세속의 모든 좋은 모습을 버리기 때문이다.
둘째는 스스로가 맹세하여 빛깔을 헐어뜨리는 것이니,
고쳐 변해진 괴색의 옷[壞色衣]을 받아 지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나아가고 머무르고 말을 하고 행위하는 모두를 마음대로 하는 것이니,
세간에 놀러 다니지 아니하며,
온갖 가고,
머무르고 하는 것을 스스로가 다투어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다른 이에 의존하여 살아 나가는 것이니,
상업과 농업 따위의 세간 사업을 버리고 다른 이로부터 얻은 바로써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목숨이 다하기까지 다른 이로부터 의복 따위를 구하게 되는 것이니,
얻게 된 바가 여법하지 아니한 값진 재물이거나 오랫동안 저축되어 있는 것은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목숨이 다하기까지 인간으로서의 모든 욕심을 막고 그치는 것이니,
범행이 아닌 것과 음욕의 법을 여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목숨이 다하기까지 인간으로서의 기쁜 놀이를 막고 그치는 것이니,
노래와 춤,
웃음과 희롱,
광대 따위를 구경하거나 듣는 것을 버리고 여의기 때문이며,
자기 친우의 같은 또래와 웃고 희롱하고 기뻐하고 데리고 다니는 따위를 여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종류들의 구걸하는 행에서 있게 되는 어려움으로 인하여 생기는 바 뭇 고통을 보살은 모두 다 참고 받으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정진을 게을리 하거나 그만두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것을 보살의 ‘걸행처의 괴로움을 참고 받는다’고 한다.
근구처의 괴로움[勤劬處苦]이라고 함은,
모든 보살은 선품을 부지런히 닦는 애써 수고함의 인연으로 갖가지 몸과 마음의 고달픔과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모두 참고 받으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정진을 게을리 하거나 그만 두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것을 보살의 ‘근구처의 괴로움을 참고 받는다’고 한다.
이타처의 괴로움이타처의 괴로움[利他處苦]이라 함은,
모든 보살로서 열 한 가지 유정을 이롭게 하는 업을 닦는 것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만 하겠거니와 그로 말미암아서 생기는 바 갖가지의 근심과 고통을 보살은 모두 다 참고 받으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정진을 게을리 하거나 그만 두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것을 보살의 ‘이타처의 괴로움을 참고 받는다’고 한다.
소작처의 괴로움[所作處苦]이라고 함은,
모든 보살로서 혹은 출가자라면 옷과 발우를 영위하는 등의 일이 있고,
혹은 재가자라면 전도 없이 장사함과 농사 지음과 벼슬 살이 하는 따위의 일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갖가지의 고생이 일어나지만 보살은 모두를 다 참고 받으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정진을 게을리 하거나 그만 두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것을 보살의 ‘소작처의 괴로움을 참고 받는다’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은,
비록 뭇 고통에 접촉한다손 치더라도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에 있어서 아직 바르게 닦지 못했다면 바르게 부지런히 닦으며,
이미 바르게 부지런히 닦았다면 물러남이 없이 언제나 부지런히 수습하여서,
변하여 달라지는 뜻이 없고 여러 가지에 물듦의 마음이 없으니,
이것을 보살의 ‘뭇 고통을 편안히 받는 인욕’이라고 한다.
무엇을 보살의 ‘법을 사유하고 승해하는 인욕’이라고 하는가?
모든 보살이 일체법(一切法)에 대하여 바르게 사택하고서,
잘 관찰하는 뛰어난 각혜(覺慧)에 의하기 때문에 여덟 가지에 대해서 승해를 일으켜 승해처(勝解處)에 잘 안주하는 것이다.
무엇을 ‘여덟 가지 승해를 일으키는 것[勝解處]’라고 하는가?
첫째는 3보의 공덕처[三寶功德處]요,
둘째는 진실의처[眞實義處]요,
셋째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대신력처[諸佛菩薩大神力處]요,
넷째는 인처(因處)요,
다섯째는 과처(果處)요,
여섯째는 응득의처(應得義處)요,
일곱째는 스스로 그 의에 대하여 얻는 방편처[自於彼義得方便處]요,
여덟째는 온갖 알 바와 행하여야 할 바의 곳[一切所知所應行處]이다.
또,
이 승해를 두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그 여러 곳에서 잘 안립할 수 있으니,
첫째는 오랜 동안에 익히 익혔기 때문이요,
둘째는 착하고 깨끗한 지혜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의 ‘법을 사유하고 승해하는 인욕’이라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은 이 두 가지 품[二品]의 온갖 인욕에 의하는 까닭에,
널리 행하기 어려운 인욕 등의 모든 상(相)의 차별이 열어지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보살의 ‘행하기 어려움의 인욕[難行忍]’이라고 하는가?
이 인욕에는 요약하여 세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모든 보살은 약하고 하열한 모든 유정들에게 그가 짓는 바의 이익되지 않는 일을 인욕하는 것이니,
이것이 첫째의 행하기 어려움의 인욕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이 높고 귀한 지위에 있으면서 자신의 부하들의 이익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 참고 받아 내는 것[堪能忍受]이니,
이것을 둘째의 행하기 어려움의 인욕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은 그 종성(種姓)이 비천한 유정들이 지은 바 으뜸가는 이익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 참고 받아내는 것이니,
이것을 셋째의 행하기 어려움의 인욕이라고 한다.
무엇을 ‘일체문의 인욕[一切門忍]’이라고 하는가?
이 인욕에는 요약하여 네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하리니,
모든 보살은 친한 이가 짓는 바의 이익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
원수가 짓는 바의 이익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
그 중간 가는 이가 짓는 바의 이익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 모두 견뎌 참으며,
그리고 저 세 가지의 못남[劣]과 평등함[等]과 수승한 품류[勝品]의 이익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 모두 능히 참고 받는 것이다.
무엇을 보살의 ‘선사의 인욕[善士忍]’이라고 하는가?
이 인욕에는 요약하여 다섯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모든 보살은 먼저,
그 인욕에 있어서 여러 수승한 이익을 보니,
이른바 능히 견뎌 참는 보특가라는 장차 오는 세상에 많은 원수와 적이 없고,
많이 어기거나,
여의는 일이 없고,
많은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죽으려 할 때에 후회함이 없고,
몸이 무너진 뒤에는 으레 선취(善趣)인 천의 세계[天世] 안에 태어나서 다 수승한 이익을 본 뒤에는 스스로가 능히 견뎌 참는 것이요,
다른 이에게 권하여 인욕을 행하게 하는 것이요,
인욕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이요,
능히 인욕을 행하는 보특가라를 보고서 위로하고 경하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보살의 ‘일체종의 인욕[一切種忍]’이라고 하는가?
이 인욕에는 여섯 가지와 일곱 가지가 있어서 통틀어 열 세 가지인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여섯 가지’라고 하는가?
모든 보살은,
인욕하지 않음[不忍]의 사랑스럽지 않는 이숙(異熟)을 훤히 알고서 두려워함으로 말미암아 부지런히 인욕을 수행하는 것이요,
모든 유정들에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고,
친애하는 마음이 있어서,
친하며 사이가 좋음으로 말미암아 부지런히 인욕을 수행하는 것이요,
그 무상정등보리에 대하여 날카롭게 하려 하고,
인욕바라밀다를 원만하게 되게 하기 위하여,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부지런히 인욕을 수행하는 것이요,
세존께서,
‘대저,
출가한 이는 인욕(忍辱)의 힘을 갖출 것이며,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출가하면 구족계를 받고서 인욕하지 않음을 행해서는 안 되느니라’고 하셨으니,
법을 받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인욕을 수행하는 것이다.
종성을 구족하고서 먼저 인욕을 익히 익히며,
지금 현재에 자성에 안주하였기 때문에 능히 인욕을 닦는 것이요,
일체법을 알고서 유정을 멀리 여의고,
모든 법의 희론(戲論)이 없는 성품만을 보며 자세하게 법을 살피기 때문에 능히 인욕을 수행하는 것이다.
무엇을 ‘일곱 가지’라고 하는가?
온갖 이익되지 않는 것을 인욕하며,
온갖 것으로부터 인욕하며,
일체처(一切處)에서 인욕하니,
가려진 곳[屛處]이거나 대중의 앞에서나 간에 모두 능히 인욕을 닦는 것이다.
일체시(一切時)에도 인욕하니,
낮의 초분(初分)이거나 낮의 중분(中分)이거나 후분(後分)이거나,
밤이거나,
낮이거나,
과거ㆍ미래ㆍ현재거나,
병들었거나 병들지 않았거나,
눕거나 일어나거나 간에,
언제나 능히 인욕을 닦는 것이다.
몸으로 인욕을 행하는 것이니,
매로 때리지 않기 때문이며,
말로 인욕을 행하는 것이니,
온갖 사랑스럽지 않은 말을 내지 않기 때문이요,
뜻으로 인욕을 행하는 것이니,
분을 내지 않기 때문이며,
더럽고 흐린 악작(惡作)의 의요(意樂)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살의 ‘구함에 따른 인욕[遂求忍]’이라고 하는가?
이 인욕에는 여덟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모든 보살이 괴로움이 있어서 와서 구하는 이들이 나쁘게 핍박하여도 능히 인욕하는 것이요,
극히 흉포하고 으뜸가는 악업(惡業)을 짓는 유정들에 대해서는 법의 대비(大悲)에 의하여 괴롭히지 않고 인욕하는 것이요,
출가한 이로서 계율을 범한 이들에 대해서는 법의 대비에 의하여 괴롭히지 않고 인욕하는 것이다.
다시,
다섯 가지의 심한 고생[勤苦]을 견디어내는 인욕이 있다.
고통 있는 유정들의 뭇 고통을 없애려는 온갖 심한 고생을 견디어내는 것이요.
또,
법을 구하는 심한 고생을 견디어내는 것이요.
또,
법과 수법행(隨法行)에 있는 바 심한 고생을 견디어내는 것이요.
또,
곧 그 법을 널리 다른 이에게 해설하는 데에 있는 바의 심한 고생을 견디어내는 것이요.
또,
모든 유정의 하는 바와 짓는 바에 대하여,
주가 되는 것[正]과 조반(助伴)에 있는 바의 심한 고생을 견디어내는 것이다.
위와 같은 여덟 가지를 ‘구함에 따른 인욕’이라고 한다.
어떤 유정으로서 괴롭힘이 있는 이에게는 인욕 때문에 떠나가며,
어떤 유정으로서 이것을 구하는 이에게는 인욕 때문에 주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이를 말하여 ‘구함에 따른 인욕’이라고 한다.
무엇을 보살의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안락함의 인욕[此世他世樂忍]’이라고 하는가?
이 인욕에는 아홉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모든 보살이 방일하지 않음에 머물면서,
모든 선법(善法)에 대하여 모두 능히 견디고 참는 것[堪忍]이요.
모든 추위와 더위에 대하여 모두 능히 견디고 참는 것이요,
모든 배고픔과 목마름에 대하여 모두 능히 견디고 참는 것이요,
모기와 등에가 쏘는 데 대하여 모두 능히 견디고 참는 것이요,
모든 바람 부는 날에 대하여 모두 능히 견디고 참는 것이요,
뱀과 전갈이 무는 데 대하여 모두 능히 견디고 참는 것이다.
여러 가지 고생하는 데서 생기는 바,
가지가지의 몸과 마음의 고달픔에서 오는 근심과 괴로움에 대하여 모두 능히 견디고 참는 것이요,
태어나고 죽음과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따위의 괴로움에 떨어진 유정들에 대하여 바로 그 앞에서 가엾이 여기면서 인욕을 수행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보살은 인욕을 수행하기 때문에,
자기 몸으로 하여금 현법(現法) 안에서 안락하게 머무를 수 있으며,
온갖 악불선법(惡不善法)에게 업신여기거나,
뒤섞이지 아니하며,
뒷 세상의 안락한 인연을 이끌게 되며,
역시 다른 이로 하여금 갖가지로 현법과 후법에게 안락하게 함의 정행(正行)을 수행하게 하므로,
이것을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안락함의 인욕’이라고 한다.
무엇을 보살의 ‘청정의 인욕[淸淨忍]’이라고 하는가?
이 인욕에는 요약하여 열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모든 보살이 다른 이가 짓는 바의 이익되지 않은 일로 인하여 괴롭힘과 어김을 만난다 하여도,
끝내 앙갚음하지 않는 것이요,
또한 의분(意憤)을 내지 않는 것이요,
또한 원망하거나 혐오하는 의요(意樂)를 상속시켜서 항상 그 앞에 나타내려 함이 없는 것이요,
이롭게 하려 하는 것이 앞과 뒤가 다름이 없는 것이요,
한 번 이익되게 한 뒤에는 버리고서 이익되지 않게 함이 없는 것이요,
원한이 있는 이에게는 스스로 가서 사과하는 것이요,
끝내 다른 이로 하여금 고달픔과 싫증을 내게 한 뒤에 용서를 받게 하지 아니하며,
고달픔과 싫증을 낼까 두려워서 바로 사과하면 곧 받는 것이요,
견디고 참지 못하는데 있어서는 으뜸가고 날카롭게 부끄러워함[慚愧]을 일으키는 것이요,
견디고 참음에 의하여 큰 스승에게서 으뜸가고 날카로운 사랑과 공경을 성취하는 것이요,
모든 유정들을 괴롭히지 않음에 의하는 까닭에,
모든 유정들에 대하여 날카롭게 가엾이 여김과 좋아함을 성취하는 것이다.
온갖 인욕하지 아니함과 조반의 법을 모두 다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욕계(欲界)의 욕심[欲]을 여의니,
이 열 가지 상(相)으로 말미암아 보살의 수행하는 바 인욕이 청정무구(淸淨無垢)인 줄 알아야만 하리라.
이 가운데 처음의 자성의 인욕으로부터 맨 나중의 청정의 인욕에 이르기까지가,
이와 같이 넓고 한량없는 큰 보리과[大菩提果]를 내게 하는 것이며,
인욕을 의지로 삼는 이 모든 보살은 인욕바라밀다를 원만하게 되고,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하게 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본지분중(本地分中) 보살지(菩薩地) 제 15 초지유가처(初持瑜伽處) 정진품(精進品) 제 12
무엇을 보살의 ‘정진바라밀다(精進波羅蜜多)’라고 하는가?1)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리라.
자성과 일체와 어려움과
일체문과 선사와
일체종과 구함에 따름과
두 세상에서 안락함과 청정이니,
이와 같은 아홉 가지 상을
정진을 간략하게 말함이라 한다.
自性一切難 一切門善士
一切種遂求 二世樂淸淨
如是九種相 名略說精進
아홉 가지 상(相)의 정진을 보살의 정진바라밀다라고 하니,
첫째는 자성의 정진[自性精進]이요,
둘째는 일체의 정진[一切精進]이요,
셋째는 행하기 어려움의 정진[難行精進]이요,
넷째는 일체문의 정진[一切門精進]이요,
다섯째는 선사의 정진[善士精進]이요,
여섯째는 일체종의 정진[一切種精進]이요,
일곱째는 구함에 따른 정진[遂求精進]이요,
여덟째는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안락함의 정진[此世他世樂精進]이요,
아홉째는 청정의 정진[淸淨精進]이다.
무엇을 보살의 ‘자성의 정진[自性精進]’이라고 하는가?
모든 보살은 그 마음이 용맹스러워서 한량없는 선법(善法)을 감당해 내고 섭수할 수 있으며,
일체 유정들을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며,
왕성하고 끊임없이 전도(顚倒)가 없으니,
이것으로 일으키는 바 신(身)ㆍ어(語과)ㆍ의(意)의 움직임이야말로,
이것이 보살의 행할 바 정진의 자성이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하리라.
무엇을 ‘일체의 정진[一切精進]’이라고 하는가?
이 정진에는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재가품에 의한 정진[在家品精進]이요,
둘째는 출가품에 의한 정진[出家品精進]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이 두 가지 품의 정진에 의하여 저마다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갑옷 입음의 정진[擐甲精進]이요,
둘째는 선법을 섭수하는 정진[攝善法精進]이요,
셋째는 유정을 이롭게 하는 정진[饒益有精進]이다.
무엇을 보살의 ‘갑옷 입음의 정진[擐甲精進]’이라고 하는가?
모든 보살은 가행의 정진[加行精進]을 내기에 앞서,
그의 마음을 용맹하고 굳세게 하여 먼저 맹세의 갑옷을 입는다.
만약 ‘내가 한 유정의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라면,
1천대겁(千大劫)과 맞먹는 하루 밤 동안을 나락가(那落伽)에서 산다 하더라도 다른 세상에서 있지 않으리라’ 내지 보살은 그러한 많은 때를 겪으면서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여야겠거니와 설령 백천 구지(俱胝)의 갑절 수의 때와 겁을 지나서야 비로소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한다 하여도,
‘나는 용맹하고 굳셀 것이며,
또한 기가 꺾여 물러나지도 않으리라’고 한다.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하는 데에 나아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아간 뒤에는 부지런하고 용맹스럽게 하여 게으름이 없을 것이거늘,
하물며 겪을 바의 때가 짧고 괴로움이 엷은 것이겠는가.
이것을 보살의 ‘갑옷 입음의 정진’이라고 한다.
만약 어떤 보살이,
이와 같은 상(相)의 보살로서 지닐 바 갑옷 입음의 정진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승해(勝解)를 일으키고 조금이라도 청정한 믿음을 내면,
이러한 보살도 오히려 이미 한량없는 용맹을 길러서 큰 보리의 성품을 더 힘써 정진한 것이거늘,
하물며 보살로서 이와 같은 갑옷 입음의 정진을 성취함이겠는가.
이와 같은 보살은 보리를 구하고 유정을 이롭게 하는 데서 조그마한 행하기 어려운 일에 겁을 내어,
짓기 어려운 마음을 내는 일이 없다.
무엇을 보살의 ‘선법을 섭수하는 정진[攝善法精進]’이라고 하는가?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보시와 계율과 인욕과 정진과 정려와 지혜 의 바라밀다의 가행(加行)을 능히 하고,
보시와 계율과 인욕과 정진과 정려와 지혜의 바라밀다를 능히 성취하니,
여기에는 다시 일곱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움직임 없는 정진[無動精進]이니,
온갖 분별(分別)과 갖가지 분별과,
근본 번뇌와 조그마한 번뇌와 온갖 이론(異論)이며,
온갖 괴로운 접촉에 기울거나 움직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견고한 정진[堅固精進]이니,
이는 은중하게 가행[殷重加行]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한량없는 정진[無量精進]이니,
현재에 온갖 명처(明處)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방편과 상응하는 정진[方便相應精進]이니,
얻어야 할 이치[義]가 전도 없는 도에 수순하면서 행하여지기 때문이며,
평등하게 통달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전도 없는 정진[無倒精進]이니,
의리(義利)를 이끄는 얻어야 할 이치를 증득하려 하기 위하여 소원을 이끄는 바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항상하는 정진[恒常精進]이니,
이는 끊임없이 가행[無間加行]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아만을 여의는 정진[離慢精進]이니,
부지런히 정진함으로 말미암아 높은 체함[高擧]을 여의기 때문이다.
이 일곱 가지의 선법을 섭수하는 정진으로 말미암아 가행을 부지런히 하기 때문에,
모든 보살로 하여금 빨리 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고,
빨리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하게 한다.
이 정진으로 말미암아서야 바로 닦아 증득할 수 있고 보리를 이룩할 수 있으므로,
온갖 선법의 가장 수승한 인연이요,
다른 것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여래는 가지가지 문(門)으로써 정진이야말로,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할 수 있다 함을 칭찬하셨다.
무엇을 보살의 ‘유정을 이롭게 하는 정진[饒益有精進]’이라고 하는가?
이 정진에는 열 한가지 있거니와,
계품(戒品)에서 해설한 것과 같다.
거기서는 시라(尸羅)를 말하였고,
여기서는 정진을 말한 것이니,
이것이 거기서와 여기서의 차별이 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보살의 ‘행하기 어려움의 정진[難行精進]’이라고 하는가?
이 정진에는 요약하여 세 가지가 있다.
만약 모든 보살로서 끊임없이 모든 의복이라는 생각이거나,
음식이라는 생각이거나,
침구라는 생각이거나,
자기 몸이라는 생각 따위를 멀리 여의고,
모든 선법(善法)에 대하여 끊임없이 수습(修習)하며,
게으르거나 그만 두는 일이 없다면,
이것을 첫째의 행하기 어려움의 정진이라고 한다.
만약,
모든 보살로서 이와 같이 정진하여 중동분(衆同分)을 다하고,
언제나 게으르거나 그만 두는 일이 없다면,
이것을 둘째의 행하기 어려움의 정진이라고 한다.
만약 모든 보살로서 평등하게 통달하고 공덕(功德)과 상응하며,
늘어지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으며,
전도 없이 의리를 이끌어서 정진이 성취된다면,
이것을 셋째의 행하기 어려움의 정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의 행하기 어려운 정진의 힘은 바로 이는 유정을 연하는 자비(慈悲)와 반야(般若)에 능히 포함되는 원인[能攝之因]인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보살의 ‘일체문의 정진[一切門精進]’이라고 하는가?
이 정진에는 요약하여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염법을 여의는 정진[離染法精進]이요,
둘째는 백법을 이끄는 정진[引白法精進]이요,
셋째는 업을 청정하게 제거하는 정진[淨除業精進]이요,
넷째는 지혜를 더욱 자라게 하는 정진[增長智精進]이다.
‘염법을 여의는 정진’이라고 함은,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온갖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면 생겨나지 않게 하고,
이미 생겨난 것이면 끊어 없애는 것이다.
‘백법을 이끄는 정진’이라고 함은,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온갖 선법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면 생겨나게 하고,
이미 생겨난 것이면 머무르게 하여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고,
더욱 길러서 광대(廣大)하게 하는 것이다.
‘업을 청정하게 제거하는 정진’이라고 함은,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3업(業)으로 하여금 모두 다 청정하게 하며,
미묘하고 선(善)한 신(身)ㆍ어(語몸)ㆍ의(意)의 업을 잘 섭수하는 것이다.
‘지혜를 더욱 자라게 하는 정진’이라고 함은,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들음과 사유함과 닦음의 지혜[聞思修慧]를 잘 모으고 잘 불리는 것이다.
무엇을 보살의 ‘선사의 정진[善士精進]’이라고 하는가?
이 정진에는 요약하여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버릴 바가 없는 정진[無所棄捨精進]이니,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일체의 가행하려는 욕구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물러나거나 줄어듦이 없는 정진[無退減精進]이니,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먼저 받은 바 그대로를 똑같이 하거나,
보다 더하게 부지런히 정진하며 그에 따라 기르기 때문이다.
셋째는 하열함이 없는 정진[無下劣精進]이니,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용맹하고 왕성하게 오랜 동안 끊임없이 정근(精勤)하고 책려(策勵)하여서,
마음에 겁냄이 없고 기가 꺾여 물러남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전도 없는 정진[無顚倒精進]이니,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의리(義利)를 이끄는 선교방편을 거두어 지니는 바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부지런히 용맹하게 가행하는 정진[勤勇加行精進]이니,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무상정등보리에 빨리 나아가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살의 ‘일체종의 정진[一切種精進]’이라고 하는가?
이 정진에는 여섯 가지와 일곱 가지를 한데 묶어서 열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을 보살의 ‘여섯 가지의 정진’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끊임없는 정진[無間精進]이니,
언제나 가행을 닦기 때문이다.
둘째는 은중의 정진[段重精進]이니,
두루 갖추어서 가행을 닦기 때문이다.
셋째는 등류의 정진[等流精進]이니,
먼저의 인력(因力)에 지탱되기 때문이다.
넷째는 가행의 정진[加行精進]이니,
자주자주 갖가지의 선품(善品)을 사택(思擇)하고서 바르게 가행을 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움직임이 없는 정진[無動精進]이니,
온갖 괴로운 접촉으로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바뀌어서 다른 성분(性分)으로 이룩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기뻐하고 만족함이 없는 정진[無喜足精進]이니,
조그맣고 하열하고 차별된 깨달음[證] 안에서 기뻐하거나 만족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여섯 가지인 온갖 종류의 정진을 성취하여 부지런하게 정진하기 때문에,
세력이 있게,
부지런함이 있게,
용맹함이 있게,
견고함이 있게 모든 선법(善法)에 대하여 그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다.
무엇을 보살의 ‘일곱 가지의 정진’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의욕과 함께 행하는 정진[與欲俱行精進]이니,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자주 무상정등보리에 대하여 날카롭게 욕망하고 원하여 따르면서 기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평등과 상응하는 정진[平等相應精進]이니,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어느 하나의 근본 번뇌거나 수번뇌(隨煩惱)로 하여금 마음을 물들이지 아니하고 또한 마음을 얽매이지 않게 하여서 이 정진으로 말미암아 보살로 하여금 모든 선법에 대하여 평등하게 익히며,
머무르게 한다.
셋째는 승진정진(勝進精進)이니,
모든 보살은 어느 하나의 근본 번뇌거나 수번뇌가 마음을 물들이고 마음을 얽매이게 되면,
이와 같은 모든 번뇌를 끊게 하기 위하여 정진함이 용맹스럽기가 마치 머리에 불타는 것을 끄는 것과 같이 한다.
넷째는 부지런히 구하는 정진[勤求精進]이니,
모든 보살은 용맹스럽게 온갖 명처(明處)를 부지런히 구하되,
싫증내거나 게으름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닦고 배우는 정진[修學精進]이니,
모든 보살은 배워야 할 법에 대하여 알맞은 대로 마땅한 대로 널리 온갖 법과 수법행(隨法行)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정진[利他精進]이니,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열 한 가지 상(相)에 대하여 그 상을 알아야만 한다.
일곱째는 잘 수호하는 정진[善護精進]이니,
모든 보살의 지니는 바 정진은 바르게 가행을 일으키고 스스로가 잘 막고 잘 지키며,
만약 범한 바가 있으면 여법(如法)하게 뉘우치며 없앤다.
이와 같은 보살의 열 세 가지 정진을 ‘일체종의 정진’이라고 한다.
보살의 지니는 바 구함에 따른 정진[遂求精進]과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안락함의 정진[此世他世樂精進]은 인욕[忍]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만 하리니,
그의 서로 다름은 거기서는 견뎌 참음[堪忍]을 해설하였고,
여기서는 보살로서 정진의 용맹함과 굳셈을 해설하는 것이다.
무엇을 보살의 ‘청정의 정진[淸淨精進]’이라고 하는가?
이 정진에는 요약하여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상의 알맞은 정진[相稱精進]이요,
둘째는 익히 익히는 정진[串習精進]이요,
셋째는 늘어짐이 없는 정진[無緩精進]이요,
넷째는 잘 섭수하는 정진[善攝精進]이요,
다섯째는 때에 알맞게 수습하는 정진[應時修習精進]이요,
여섯째는 뭇 상을 통달하는 정진[通達衆相精進]이요,
일곱째는 물러나거나 약하지 않는 정진[不退弱精進]이요,
여덟째는 멍에를 버리지 않는 정진[不捨軛精進]이요,
아홉째는 평등한 정진[平等精進]이요,
열째는 큰 보리에 회향하는 정진[廻向大菩提精進]이다.
만약 모든 보살이 혹은 저 여러 수번뇌 때문에 극히 핍박을 당하면서,
여러 수번뇌가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갖가지의 알맞은 대치(對治)로 수습한다.
이를테면 모든 탐욕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부정(不淨;不淨觀)을 수습하며,
모든 성냄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자민(慈愍; 慈愍觀)을 수습하며,
모든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연성연기(緣性緣起; 緣性緣起觀)를 관찰하는 것을 수습하며,
모든 심사(尋思)를 대치하기 위해서는 식념(息念; 數息觀)을 수습하며,
모든 교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계차별(界差別; 界差別觀)을 닦는 것이니,
이와 같은 종류를 바로 보살의 ‘상의 알맞은 정진’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이,
시업(始業)2)과 초업(初業)3)에서 지니는 바,
정진으로서 마음을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교수(敎授)하고 교계(敎誡)하는 것을 성취할 뿐만 아니라,
역시 익히는 가행과 쌓고 익히는 가행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을 보살의 ‘익히 익히는 정진’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이 익히 익히는 가행과 쌓고 익히는 가행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교수하고 교계하되,
그러나 이 시업과 초업의 보살로서는 이 가행에 대하여 가행을 늘어지게 하지도 않고 끊임없이 가행[無間加行]하며,
은중하게 가행[殷重加行]하는 것니,
이것을 보살의 ‘늘어짐이 없는 정진’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이,
스승과 존장으로부터 혹은 스스로가 많이 들은 힘을 지녔기 때문에 전도 없이 취하고,
그의 마음을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더 힘써 정진하니,
이것을 보살의 ‘잘 섭수하는 정진’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이,
전도 없이 취한 뒤에는 그쳐야 할 때에는 바르게 그침[止]을 닦고,
들어야 할 때에는 그의 마음을 잘 책려하며,
버려야 할 때에는 바르게 버림[捨]을 닦는 것이니,
이것을 보살의 ‘때에 알맞게 수습하는 것과 상응하는 정진’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이 그 갖가지의 지(止)ㆍ거(學)ㆍ 사(捨)의 상(相)과,
들어가고[入] 머무르고[住] 나오는[出] 상(相)을 잘 훤히 알고서 잊어버림이 없으며,
잘 통달하고 끊임없이 닦고 지으며,
은중하게 닦고 지으니,
이것을 보살의 ‘뭇 상을 통달하는 것과 상응하는 정진’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이,
갖가지의 가장 지극하고 광대하고,
가장 지극하고 매우 깊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헤아릴 수 없는 보살의 정진을 해설함을 듣고서,
스스로를 업신여기지도 아니하고 마음에 겁내지도 아니하며,
온갖 조그맣고 하열하고 차별된 깨달음의 안에서 기뻐하거나 만족함을 내어서 더 나아갈 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보살의 ‘물러나거나 약하지 않은 정진’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이,
시시 때때로 감관의 문[根門]을 면밀히 지키고 음식의 양을 알며,
초저녁[初夜]과 새벽[後夜]에는 언제나 부지런히 각오의 유가[覺寤瑜伽]를 수습하며,
정지(正知)에 머무르고,
이와 같은 종류들의 등지(等持)의 자량에서 잘 거두어 굴리어 곧 그 안에서 왕성하게 수습하며,
전도 없는 의리를 이끌어 거두는데서 언제나 부지런히 공용(功用)을 더하니,
이것을 보살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 정진’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이 더 힘써 정진하되 늘어지지도 않고,
급하게 하지도 아니하여,
평등하게 두 가지를 다 운전(運轉)하며,
널리 온갖 지어야 할 일 가운데서 역시 평등하고 은중하게 닦고 지으니,
이것을 보살의 ‘평등한 정진’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이,
온갖 정진으로 행하고 짓는 바가 있다면,
모두가 무상정등보리에 회향하기 위해서 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것을 보살의 ‘큰 보리에 회향하는 정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맨 처음의 자성의 정진[自性精進]으로부터 맨 나중의 청정의 정진[淸淨精進]에 이르기까지의 모두가 보살의 큰 보리과를 얻는다.
보살은 이 지니는 바 정진에 의하여 정진바라밀다를 원만히 하고,
무상정등보리에 있어서 빠르게 이미 증득하였고,
장차도 증득할 것이며,
지금도 증득하는 것이다.
1)
범어 ‘Nivṛtti-śīla’의 의역(意譯)이다.
2)
범어 ‘Pravṛtti-śīla’의 의역(意譯)이다.
3)
범어 ‘Ārakaṣa-śīla’의 의역(意譯)이다.
4)
범어 ‘Mahāpruṣa-lakṣaṇa-vaipākya-śīla’의 의역(意譯)이다.
5)
범어 ‘Adhicitta-vaipākya-śīla’의 의역(意譯)이다.
6)
범어 ‘Iṣṭagati-vaipākya-śīla’의 의역(意譯)이다.
7)
범어 ‘Sattvārtha-kriya-vaipākya-śīla’의 의역(意譯)이다.
8)
성문(聲聞)의 보리ㆍ독각(獨覺)의 보리ㆍ제불(諸佛)의 보리의 셋을 말한다.
1)
보살지(菩薩地)의 도(道)와 과(果)를 밝히는 열 가지 가운데 첫 번째 지님[持]의 뜻을 해석하는 데 18품(品)이 있다.
이하는 그 18품 가운데 열 한번째로 인품(忍品)을 밝히는 부분이다.
이 인품은 총 세 가지로 해석되는데,
첫째는 자성인(自性忍)ㆍ일체인(一切忍)ㆍ난행인(難行忍)ㆍ일체문인(一切門忍)ㆍ선사인(善士忍)ㆍ일체종인(一切種忍)ㆍ수구인(遂求忍)ㆍ차세타세락인(此世他世樂忍)ㆍ청정인(淸淨忍)의 아홉 가지의 인(忍)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이 아홉 가지 인의 하나 하나에 대해서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인(忍)의 공덕(功德)에 대해서 찬탄하는 것이다.
2)
행(行)의 4의(依)를 말한다.
즉 분소의(糞掃衣)ㆍ항상 걸식하는 것[常乞食]ㆍ무덤 사이나 나무 아래에 정좌하는 것[塚間樹下坐]ㆍ병연의 진기약??(病緣陳奇藥)의 넷이다.
1)
보살지(菩薩地)의 도(道)와 과(果)를 밝히는 열 가지 가운데 첫 번째 지님[持]의 뜻을 해석하는 데 18품(品)이 있다.
이하는 그 18품 가운데 열 두 번째로 정진품(精進品)을 밝히는 부분이다.
이 정진품은 총 세 가지로 해석되는데,
첫째는 자성정진(自性精進)ㆍ일체정진(一切精進)ㆍ난행정진(難行精進)ㆍ일체문정진(一切門精進)ㆍ선사정진(善士精進)ㆍ일체종정진(一切種精進)ㆍ수구정진(遂求精進)ㆍ차세타세락정진(此世他世樂精進)ㆍ청정정진(淸淨精進)의 아홉 가지를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이 아홉 가지에 대해서 하나 하나 해석하는 것이고,
셋째는 이 정진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이다.
2)
범어 ‘Ādikarmika’의 의역(意譯)으로 수행자로서 업을 시작하려는?
사람을 말한다.
**중촌원539,
4단
3)
범어 ‘tat-prathama-karmika’의 번역으로 최초의 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촌원 679,
2단
● [pt op tr] fr
_M#]
『유가사지론』
♣0570-042♧
◎◎[개별논의] ♥ ❋본문
★1★
◆veli2666
◈Lab value 불기2565/12/26 |
♥단상♥주지육림궁궐과 수행 세속에서 지향하는 바가 있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수행자의 지향점과 방향이 차이가 있다. 그래서 수행을 행하려면 처음에 이 지향점의 차이와 우열을 판단해야 한다. 세속의 입장에서 지향하는 바는 스스로 황제와 같은 상태에 이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속에서 한 주체가 얻고자 하는 바가 수없이 많이 나열된다. 건강, 시간, 장수, 쾌, 재미, 지혜, 지식, 미, 인격적 아름다움, 지위, 물질적 풍요, 명예, 인간관계, 사랑, 결혼, 권력, 자유. 사회 전반에 대한 희망, 자연 희망에 대한 희망.... 이런 형태로 수없이 많은 세속적 희망이 나열된다. 그리고 그 각 부분의 최고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래서 간단히 표현해 그런 정점에 고대의 황제와 같은 지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남자가 그런 상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면 다음과 같은 수 있다. 호화로운 궁궐에서 수많은 미녀와 함께 오욕락을 즐기고 싶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성취시키고 싶다. 이런 형태가 된다. 그런 가운데 수행자가 현실 상태를 이와 비교한다고 하자. 수행자는 대부분의 세속적 욕망을 멀리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그처럼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건져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고자 한다. 그래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고자 한다. 각 주체는 현실에서 서로 다른 이 두 방향을 놓고 선택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나은 상태인가를 먼저 잘 판단해야 한다.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12/2565-12-26-k0570-042.html#2666 sfed--유가사지론_K0570_T1579.txt ☞제42권 sfd8--불교단상_2565_12.txt ☞◆veli2666 불기2565-12-26 θ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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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종의 아견.
(1) 인아견(人我見).
범부의 몸이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5온(蘊)으로 가화합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아(我)라는 실체가 있다고 고집하는 잘못된 견해.
(2) 법아견(法我見).
신심(身心)의 요소인 5온이 공(空)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5온의 자신에 진실한 체가 있고, 용(用)이 있다고 고집하는 망견(妄見).
⇒<유사어>이아<참조어>이아(二我)ㆍ<유사어>이집<참조어>이집(二執)
답 후보
● 이아견(二我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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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삼회(二處三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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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소원은 성취되며
나고 죽음 따라
지금껏 지어온 일체 악업도
아울러 다 멸하고
삼천대천 세계의 일체제불과 보살과
범왕과 제석(帝釋)과 사천왕(四天王)과
신선(神仙)과 용왕(龍王)이
다 증명하여 알리라.
● 매다리야(미제리야) 彌帝唎耶<四十八> mai tri 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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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아바 례다먀- 마바라 바
入嚩<二合>隸哆尾野<二合引>摩鉢囉<二合>婆<三十六>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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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게송
[360일째]
청정법륜불가설 $ 102▲無盡無盡為 一 ● 出生, ○□□□□,勇,種,哀,不
□□□□□□□, 勇猛能轉不可說,
種種開演不可說, 哀愍世間不可說。
□□□□□□□, 용맹능전불가설,
종종개연불가설, 애민세간불가설。
청정한 법 바퀴를 말할 수 없고
용맹하게 굴리는 일 말할 수 없고
갖가지로 연설함을 말할 수 없고
세간을 슬피 여김 말할 수 없네.
[361째]
불가언설일체겁 $ 103▲出生出生為 一 ● 無我, ○□□□□,讚,不,不,不
□□□□□□□, 讚不可說諸功德,
不可說劫猶可盡, 不可說德不可盡。
□□□□□□□, 찬불가설제공덕,
불가설겁유가진, 불가설덕불가진。
말로 할 수 없는 여러 겁 동안
말할 수 없는 공덕 찬탄할 적에
말할 수 없는 겁은 다할지언정
말할 수 없는 덕은 다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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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_암기방안
102 heart 心臟 【심장】
103 스토막 stomach 胃 【위】
48 왕(엄지)발가락 a big[great] toe
36 가랑이 ( crotch / 사타구니, gro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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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_1126_160903_nik_ab41_s12
○ 2020_1126_160801_can_ct9_s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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