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역경도기』
K1059
T2151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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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역경도기』 ♣1059-002♧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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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古今譯經圖紀卷第二 吹
K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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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역경도기』 ♣1059-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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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_0525_174802_can.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iovanni-Battista-Piranesi-plan-of-the-existing-factories-in-the-villa-adriana-with-a-dedication-to-st-m-stanislaus-4.jpg!HD ○ 2018_0419_141705_nik.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alau_Capitol_Complex,_Judiciary_Building ♥Carn (Fowler) ,Mayo ,Ireland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Yves Duteil - La Rouille ♥단상♥피해를 주는 루팡과 이익을 주는 복팡의 차이 오래전부터 인명론이나 논리추론이 갖는 문제를 살폈다. 이들 인명론은 가장 기본 바탕부터 엉터리다. 그 사정은 서양 논리학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이들이 옳은 내용처럼 여겨지게 한다. 그래서 이 두 사정을 살펴야 한다. 즉 왜 이들 내용이 엉터리인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 다음 그럼에도 이들 내용이 왜 그럴 듯하게 여겨지는가를 다시 살펴야 한다. 그런데 또 사정이 그렇다면 어떻게 올바른 진리를 깨달을 것인가를 다시 또 살펴야 한다. 이들은 인식론과 논리학분야가 모두 관련된다. 골치가 아프게 되기 쉬운 분야다. 이들 내용은 용어풀이 인명 부분에서 처음 살피려고 했다. 그런데 관계된 페이지가 용량이 가득찼다. ꊱ인명 그런데 생각해보면 일일단상에 조금씩 적어서 모으는 것도 한 방안이라고 본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씩 살펴갈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 살폈던 문제는 중복을 피해 생략한다. 약간 비약이 있더라도 그냥 한 항목을 불쑥 꺼내 살피는 방식으로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을 키워드를 통해 링크로 나중에 체계적으로 배열하면 되리라 생각한다. 그런 가운데 처음 문제삼아 보는 것은 현량 상위과다. ○ 현량상위과가 갖는 오류성 고인명에 사종 9과(似宗九過)라고 하는 것이 있다. 어떤 내용의 참거짓을 추론식을 세워 추론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내세우고 하자는 내용을 종(宗)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고인명에서는 내세운 내용부터 자체적으로 잘못을 갖는다고 보는 9가지 경우를 든다. (=似宗사종) 그리고 이런 사종구과에 해당하면 이하 추론내용을 살피지 않고도 바로 그런 주장이 잘못임을 바로 논파해 밝힐 수 있다고 제시한다. 거기에서 현량상위과(現量相違過)나 비량상위과라는 것이 있다. 우선 현량상위과를 살펴보자. 이는 현실의 직각적(直覺的) 지식(知識) <곧 현량(現量)>에 상위(相違)하는 사실올 종(宗)으로 하여 세우는 과실(過失)이다. 그 예를 들어 「뱀에는 발이 있다」라고 하는 종(宗)을 세우는 것 같은 경우라고 제시한다. 먼저 이것이 어떤 문제를 갖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이를 위해 현량(現量pratyakṣa-pramāṇa)이 무엇인가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 그런데 간단히 말하면, 어떤 내용을 (추론이나 비판과정없이) 곧바로 얻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현량이 무엇인가라는 내용에서부터 각 논자마다 오류가 가득하다. 그런데 이것을 지금 일일히 다 살필 수는 없다. 그런데 현량에는 통상 4 가지 종류를 든다. 감관지, 의식(manovijnana), 자증지, 요가수행자의 직각 이런 내용들을 나열한다. 예를 들어 눈을 뜨면 어떤 모습을 본다. 귀로 어떤 소리를 듣는다. 이처럼 감각현실을 얻는 경우가 그 하나다. 이 경우는 감각지다. 그리고 그런 감각현실 내용을 대할 때 어떤 부분이 책상이거나 영희라고 곧바로 분별한다. 이 경우는 그 성격이 관념내용을 바로 일으켜 얻는 경우를 뜻한다. 그외에도 선정 수행시 얻는 내용을 들기도 한다. 참고로 선정 수행시 얻는 내용은 감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 가운데 정중의식으로 분류되는 내용이다. 또 자증지를 들기도 한다. 자신이 무언가를 느끼거나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경우 그 자신이 그처럼 느끼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다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지금 이러이러한 느낌을 얻고 있는 중이다라고 생각할 때와 같다. 이 가운데 의식(manovijñaāa)의 개념이 명료하지 않다. 우선 처음에 현량을 다음처럼 정의하는 입장이 있다. 현량은 개념을 떠나서 착란이 없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경우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감각내용을 대하고 어떤 관념을 곧바로 일으켜 얻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눈을 뜨니 앞에 무언가 보인다. 그것이 바위나 나무 또는 영희라고 곧바로 여긴다고 하자. 이런 경우 어떤 추론을 행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입장에서는 이는 마치 현량에서 제외되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어떤 논자가 현량의 개념을 처음부터 그렇게 정의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위와 같은 경우를 다시 어느 항목에 분류해 넣어야 한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눈을 떠 일정 부분을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어떤 추론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그것들은 바위나, 영희, 안경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즉, 그런 내용을 대하면 그런 부분이 바위나 영희 안경이라고 곧바로 분별한다. 그런데 그런 사정으로 이것을 현량이라고 할 것인가는 별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위 경우는 비량에도 속하지 않는다. 종-인-유-합-결 이런 식으로 추론을 행해 얻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일으킨 관념내용은 현량 비량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부분을 빠뜨리면 인식론이나 논리학 전체에 큰 흠결이 생긴다. 눈을 뜨면 어떤 모습을 본다고 하자. 이 경우 그렇게 본 모습은 무엇인가. 이런 것이 현량과 가장 밀접한 논의대상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그것이 바위다 아니다를 따진다고 하자. 그러면 이 논의에서 과연 감각현실 자체를 가지고 논의하는가부터 곰곰히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 그런데 관념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어떤 감각현실이 옳고 그름을 과연 문제삼을 수 있는가. 이것부터 천천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벌써 골치가 아파올 수 있다. 우선 각 논자의 입장이 너무 다양하다. 어떤 한 논자의 입장만을 바탕해 논의하면 혼동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 어떤 논사가 어떠한 주장을 했는가 안 했는가를 일일히 살피면서 노력을 기울이기도 힘들다. 그래서 각기 문제되는 내용을 나열해 살피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리고 현량에 관련되어 여러 논사가 행하는 엉터리 주장은 별도로 살피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이런 현량과 어긋난 주장을 제시하면, 그것만으로 곧바로 잘못이 된다는 회괴망칙한 주장만 살피기로 하자. 우선 이 문제를 다음처럼 살펴보자. 누군가 안경을 찾고 있다고 하자. 또는 영희를 거리에서 찾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철수에게 물을 수 있다. 내 안경은 어디 있는가. 또 영희는 어디 있는가. 이렇게 물었다고 하자. 이 질문의 성격은 마찬가지다. 안경이나 영희에 초점이 있지 않다. 그런데 철수가 손으로 앞 부분을 가리킨다. 저것이 안경이다. 그런데 병수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하자. 저것은 안경이 아니다. 저것은 물병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그래서 논의가 시작된다. 한 사람은 저것은 안경이다. 이렇게 주장한다고 하자. 망집 상태에서 일반적으로 수많은 잘못된 판단을 행한다. 그런데 철수와 병수의 각기 달리 주장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 무엇이 현량에 어긋나고 어긋나지 않은 것인가를 놓고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만일 현량상위과를 인정한다고 하자. 그러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 주장이 대립될 경우 이 가운데 하나는 현량상위과에 해당하는 주장으로 폐기해야만 할 것이다. 한편 같은 사정으로 경전에서 제시하는 대부분 명제는 현량상위과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경전 대부분 내용을 현량상위과에 해당한다고 폐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부분은 자신이 아니다라고 제시하려 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자신이 책상에 앉아 있다고 하자. 그런데 책부분을 가리키면서 그것이 자신인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당연히 아니라고 답한다. 그러면 자신은 어디 있는가를 묻는다고 하자. 이 때 자신은 일정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손이나 발 부분이 포함된 일정 부분을 평소 자신이라고 여긴다. 현실에서 눈을 뜨면 일정한 모습을 얻는다. 이제 그런 부분을 취해서 자신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대부분 이처럼 상식적으로 잘못 임한다. 그리고 이것이 망집이다. 즉 엉터리 잘못된 분별이다. 그래서 그런 판단이 잘못임을 제시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런 입장이 잘못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 가운데 현량을 무엇으로 여기는가에 따라서, 이런 주장이 곧 현량상위라고 여기게 된다. 이미 앞에서 의식((manovijñaāa)의 개념이 무엇인가와 관련해 살폈다. 그런데 눈을 떠 얻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영희나 자신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이런 관념판단은 일반적으로 어떤 추론을 거친 것은 아니다. 눈을 떠 대하면 곧바로 그렇게 분별한다. 그래서 인명론에서 말하는 비량으로 넣을 내용은 아니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판단이 잘못임을 밝히려 한다고 하자. 그리고 불교 경전의 대부분 내용은 여기에 초점이 있다. 즉 그런 분별이 잘못된 망상분별임을 밝히려고 한다. 그런데 인명론에서 앞과 같이 바로 일으킨 관념을 현량이라고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처음부터 이런 주장은 잘못이라고 배척하게 된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곧바로 일으키는 관념분별(현량)과 어긋난 주장이라는 이유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봐야 한다. 이런 경우에 그런 현량과 어긋나지 않은 주장은 과연 어디 있는가라고 다시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여기에서 다시 현량의 정체가 문제된다. 이제 만일 현량을 감각현실로만 한정한다고 하자. 그런데 일체 분별 판단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관념이나 이런 감각현실과 일치하는 내용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감각현실에 대해 행하는 일체의 분별 판단은 다 현량상위과에 해당한다고 해야 한다. 한편,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바로 일으키게 되는 분별을 현량(현량 가운데 의식)에 넣는다고 하자. 예를 들어 눈을 떠 보니 앞에 있는 것이 바위임을 곧바로 알겠다는 경우와 같다. 그런 경우는 또 그렇게 일으키는 일체의 분별은 다 현량이므로 다 옳다고 해야 할 듯 하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대부분 어떤 감각현실을 대하면 곧바로 수많은 분별을 다 일으킨다. 그런 측면에서는 이들이 다 그런 의미의 현량에 해당한다고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눈을 떠 보는 꽃모습을 대해 그것은 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시인은 그런 내용을 대해서 시집간 누님이 떠오른다고 할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그런 내용을 대해서 나비가 바로 생각날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만유인력이 생각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감각현실을 대해 그런 관념을 바로 일으켜 얻게 된 방식 자체는 같다. 그런데 이 가운데 어떤 것은 현량상위라고 하고 어떤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인가. 그래서 문제된다. 그런데 여하튼 이 상황에서 눈을 떠 얻게 된 감각현실은 감각현실이다. 그리고 감각현실은 관념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관념 일체는 결국 그 감각현실에 대해서 어긋난 내용들이라고 해야 한다. 결국 이들 관념은 어느 것이나 그런 감각현실에 대한 옳은 내용이 아니다. 그것을 의식인 현량이라고 하던 아니던 사정이 마찬가지다. 한편, 이제 일체의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오로지 감각현실만 문제삼는다고 하자. 즉 감각현실을 오로지 감각현실로서만 문제삼으려 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눈을 뜨면 어떤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눈을 감으면 그 내용이 사라진다. 이런 감각내용만 오로지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경우는 또 논의할 수 없다. 물론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을 옳다 그르다 하기 힘들다. 내용을 얻은 것 뿐이다. 비유하면 학생이 시험문제에 어떤 답을 적었다고 하자. 답을 적어 넣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옳다 그르다 할 것인가는 별개 문제다. 감관으로 얻는 내용도 사정이 같다. 어떤 이가 안경을 벗고 사물을 본다고 하자. 밤에 전등빛이 뿌옇게 보일 수 있다. 노란 색안경을 쓰고 본다고 하자. 노란 빛으로 보일 수도 있다. 또 멀리 떨어져서 본다고 하자. 손가락보다도 작게 보일 수도 있다. 가깝게 다가서서 본다고 하자. 사과만하게 보일 수도 있다. 이렇게 각 경우마다 각기 다른 내용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다 얻었다. 그런데 이 각각의 내용을 무엇을 기준으로 옳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자신이 얻어낸 감각현실을 심지어 자신의 감관이 대한 대상이라고까지 혼동한다. 그래서 그런 감각현실을 하나 놓고 그것은 대상이면서 동시에 한 주체가 얻어낸 감각내용이라고 지위를 혼동한다. 그런 가운데 그런 사정 때문에 그것은 대상과 일치한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감각내용은 옳다고 잘못 여기기도 한다. 이런 오류는 별도로 『관소연연론』에서 살피고 있는 중이다. ★★★ 참고 => 이는 다음 페이지에 모아 시간나는대로 정리해가는 중이다. 일단 다음처럼 링크를 걸어두기로 한다. 『관소연연론』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2562-05-07-k0628-001.html ★★★ 그런데 이 상황에서 만일 감각현실 그 자체만 놓고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자신 뿐아니라, 타인과도 일체 논의를 할 수 없게 된다. 감각현실은 다른 이에게 직접 전할 수 없다. 자신의 경우에서도 다음 순간까지 보존할 수도 없다. 이런 사정 때문에 어떤 순간에 얻은 어떤 감각현실을 논의하고 싶다고 해도 할 수 없다. 다음 순간까지 그것이 보존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매 순간 순간 그런 내용을 그처럼 얻었다. 이 정도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이제 다시 그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을 붙잡고 그것이 바위다 아니다를 따진다고 하자. 그것은 벌써 감각현실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여기서 바위다 아니다라는 판단 자체가 이미 감각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만일 문제삼는다면 그런 부분은 당연히 바위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런 감각현실은 역시 그런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경우는 여기에서부터 혼동을 일으킨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망집 상태를 바탕으로 위와 같은 주장들이 처음 제시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엉터리다. 그리고 사종 9과로 나열되는 다른 내용들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에 해당되는 각 주장은 사실은 다 함께 참 거짓을 열심히 살펴야 할 내용들이다. 단지 그런 사항에 해당한다고 폐기할 내용이 아니다. 불교 경전에서는 대부분 일반적으로 당연이 옳다고 여기는 내용들을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바람이 불어, 종이 소리가 난다. 깃발이 흔들린다고 하자. . 그래서 무엇때문에 깃발이 흔들리는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일반인은 다음처럼 생각한다. 그것은 바람때문이다. => (승가난제) => 깃발이 흔들린 것이 아니다. 네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그리고 망식이 흔들린 것이고, 본래 마음은 그런 것도 없다. 이런 입장이다. 지구가 도는가 태양이 도는가가 한 때 문제된 적이 있다. 과거에는 태양이 돈다고 했다. 그 뒤에는 지구가 돈다고 했다. 그런데 다시 그 뒤에는 태양이나 지구가 함께 돈다고 했다. 경전의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여기에 무언가가 돈다는 현상은 얻을 수 없다. 돈 것은 네 마음이다. 이렇게 제시한다. 당신이 달이라고 보는 것은 가짜 달이다. 태양이라고 보는 것도 가짜다. 돗수가 들어간 안경을 쓰고 벗고 해보자. 이 순간마다 크기나 모습이 달라진다. 그 상황에서 크기나 모습이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인 어떤 달이나 태양 등이 따로 있지 않다. 그런데 자신이 안경 하나 쓰고 벗는다고 해서 크기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 진짜 달이고 태양인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해본다고 하자.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평소 자신으로 여기며 취하는 내용이 있다. 그런 것은 자신이 아니다. 이것을 먼저 깨닫게 하고자 여러 내용을 제시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제시하면 처음부터 바로 상식과 어긋난다고 하여 논의삼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사종9과의 입장이다. 어려움이 많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Barbara - Mes Theatres.lrc Barbara - Mes Theatres 일단 앞에서 처음 제시한 문제만 간단히 답해 보기로 하자. 왜 논리 추론이 엉터리인가는 이미 앞에서 살폈다. 감각현실은 관념이 아니다. 관념도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감각현실을 대상으로 행하는 일체의 관념분별이나 추론은 엉터리다. 한편 관념영역에서만 닫혀 추론할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의 논리는 희론이다. 감각현실과 떨어져 논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왜 그런 추론이 옳은 것처럼 여기게 되는가. 그 주된 이유는 각 주체가 망집을 일으켜 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사정은 대부분 주체가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동시에 관념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내용을 겹쳐서 대하기 때문이다. 수정구슬에 노란빛, 빨간빛, 파란빛이 비추일 때 이를 금이나 루비 사파이어와 같은 보석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또 비닐 두장에 각기 세모와 원을 그려놓고 겹쳐 놓으면 가운데가 세모인 도넛츠가 비닐에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데 거기에 그런 내용은 없다. 그렇지만,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되는 현상이 각 주체에게 일어난다. 본래 생사현실에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생멸을 하는 대상이나 생사를 하는 주체도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각 주체는 현실에 생멸하는 무언가가 있고 또 주체가 그런 생사를 겪는다고 여기고 임하게끔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겪어 나간다.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그 원인단계에서 그 근본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의 올바른 정체를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에 대한 진리를 올바로 얻는가. 우선 위와 같이 잘못된 바탕에서 판단을 행하는 가운데 이를 통해 오히려 그것이 잘못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세속에서 행하는 분별을 통해 얻는 세속제를 바탕으로 거꾸로 승의제(제일의제)를 얻어내야 한다. 그래서 문제삼는 것들의 정체는 끝내 그런 방식으로 얻을 수 없음을 이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비유하면 꿈에서 꾼 내용은 침대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꿈에서 지닌 자나 저울로는 결코 침대의 크기나 베개의 무게를 잴 수 없는 것과 같다. 또 커피맛을 보고 아무리 백과사전을 100 권분량으로 그 커피에 대해 기술해도 그것이 커피맛이 되지 않는다는 사정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생사현실 안에서 감각현실에 대해 행하는 분별도 그 사정이 그렇다. 그런데 본 바탕인 실재에 대한 논의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오히려 위와 같은 사정으로 현실의 본 정체에 대해 잘못된 엉터리 판단을 하게 하는 망식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수행의 처음은 이 부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한 업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에 바탕해 행해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일단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 회신멸지 그런데 중생제도를 목표로 할 때는 오히려 다시 이런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위와 같이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그런 입장에서 복덕과 지혜로 여기는 자량을 쌓아야 한다. 그래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이중적인 입장이 된다. 해탈문과 생멸문을 경계에 두고 들락날락하는 상황이 된다. 그렇게 해야 중생을 해탈문으로 이끌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생멸문을 통해 생사현실에 들어와 임해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임하면 그 측면에서는 또 일반 중생처럼 또 비슷한 상황이 된다. 그래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또 그 상황에서 일정한 분별을 또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눈병이 들어 허공의 꽃이 보이게 되는 상황으로 비유한다. 다만 그런 허공의 꽃이 참된 꽃이 아님을 이해하고 그 상황에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허공의 꽃이 참된 꽃이라고 여기지 않고 대하게 된다. 그러면 집착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그러면 망집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행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매순간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수행을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 처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인 입장에서 매 순간 이렇게 행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 매순간 각 주체가 자신과 세상에 대해 망집에 바탕해 집착해 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매 상황에서 그런 업을 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업을 행해나가면 또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위와 같은 사정을 잘 관하고 임하면 그렇지 않게 된다. 그리고 수행시 어려움을 겪을 상황에서도 평안히 임할 수 있게 된다. 또 과거에 쌓은 업장으로 설령 극심한 생사고통에 처해도 역시 평안히 잘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는 좀 더 힘들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안인을 성취하는 기본 바탕이 위와 같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또 무생법인을 증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떤 생사고통에 처해도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위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그가 대하는 생사현실 일체가 곧 극락과 같은 상태가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 즉 니르바나의 상태로 여여하게 생사현실에 임할 수 있게 된다. 비유하면 꿈 안에서 그내용들이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꿈을 꾸게 되는 상황과 같다. 예를 들어 꿈에서 절벽에 매달려 떨어지거나 바다에 빠지거나 불에 태워져도 꿈안에서 그런 내용이 꿈인 것을 안다면 평안하게 임할 수 있다. 즉 꿈을 깬 현실의 침대에는 그런 절벽이나 바다 불 자체가 얻을 수 없음을 꿈안에서 이해하고 임한다면 그렇다. 현실도 이와 사정이 같다. 감각현실이나 본 바탕 실재에 그가 분별하는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먼저 본 바탕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또 잘 이해해야 한다. [공해탈문] 또한 그가 대하는 감각현실에서도 사정이 그러함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상을 취하고 임하는 자세를 기본적으로 벗어나야 한다. [무상해탈문] 그리고 그처럼 망집에 바탕해 소원을 일으키고 추구하던 일체를 중단해야 한다. [무원무작해탈문] 그래야 생사현실에서도 위와 같이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 들어와 임할 때는 생사현실 일체가 공함을 이해하고 공한 법의 자리에 앉듯, 임해야 한다. 그리고 무상해탈로 성취한 안인을 갑옷으로 걸치고 임해야 한다. 그리고 자비심을 바탕으로 무원무작해탈로 제거한 소원과는 반대방향으로 임해야 한다. 그래서 온 생명을 차별없고 제한없이 제도해 최상의 상태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서원을 추구하며 임해야 한다. 그런 상태로 임해야 생사현실에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도 잘 성취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생사현실 안에서 중생을 제도하는데 필요한 자량들이다. 생사현실에서 이들을 잘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매 상황에서 각 주체가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해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느라 바쁘다. 그래서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한다. 각 주체는 좋음을 열심히 추구하며 바삐 행한다. 그러나 이런 사정으로 정작 오히려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잘 깨닫고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로 여기는 내용도 무량하게 잘 성취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선법을 성취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본 논의가 갖는 효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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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실상(諸法實相)의 이치를 알고 어기지 않는 마음. 지(止)와 관(觀)이 균등하게 일어나서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서로 도와서 행함으로 얻는 마음.
답 후보
● 유연심(柔軟心)
유인(誘引)
유전진여(流轉眞如)
유폭류(有暴流)
육계취(六界聚)
육근청정(六根淸淨)
육대체대(六大體大)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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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004_160313_can_bw5
™善現智福 키워드 연결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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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 고금역경도기_K1059_T2151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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