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달마대비바사론』
K0952
T1545
제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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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0952-044♧
제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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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第四十四 造
K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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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44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김석군 개역
8) 사납식 ③
【論】마치 계경에서
“만일 욕심(欲尋)과 에심(恚尋)과 해심(害尋)을 일으키면
혹은 자기 자신을 해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이를 해치기도 하며
혹은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기도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다음처럼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직 삼보리(三菩提)를 증득하지 못했을 적에
혹은 욕심ㆍ에심ㆍ해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출리심(出離尋)ㆍ무에심(無恚尋)ㆍ무해심(無害尋)을 일으켰었다.
비록 욕심ㆍ에심ㆍ해심을 일으켰다 해도
방일하지 않으면서 ≺만일 욕심ㆍ에심ㆍ해심을 일으키면 혹은 자기 자신을 해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이를 해치기도 하며,
혹은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기도 한다≻라고 생각하였다.’”
계경에서는 비록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해도 그 뜻을 분별하시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지금 말해야 되므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어떻게 욕심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인가?
▸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탐의 전[貪纏]을 일으킨 까닭에
몸이 피로하고 마음이 피로하며
몸이 타고 마음이 타며
몸이 뜨겁고 마음이 뜨거우며
몸이 그을리고 마음이 그을리는 것과 같다.
또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장차 오랜 세월 동안에
사랑스런 것이 아니고[非愛] 좋은 것이 아니고[非樂] 기쁜 것이 아니고[非喜] 즐거운 것이 아닌[非悅]
모든 이숙과(異熟果)를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몸이 피로하다[身勞] 하는 등은 욕심의 등류과(等流果)를 나타내는 것이니 탐(貪)ㆍ진(瞋)ㆍ치(癡) 등은 몰아쳐 부리는 것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피로하게 하는 것이 마치 훨훨 타는 불과 같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태우고 뜨겁게 하며 그을리게 하는 것이다.
장차 오랜 세월 동안에 받는다는 등은 욕심의 이숙과를 나타내는 것이니 장차 악취(惡趣) 등의 사랑스런 것이 아닌 과[非愛果]를 받기 때문이다.
【論】어떻게 욕심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탐의 전(纏)을 일으킨 까닭에 남의 아내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남편이 그것을 보고서 마음에 성을 내고[瞋] 분을 내고[忿] 한을 맺고[結恨] 근심하며 괴로워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이다.
【문】남의 아내를 자세히 살펴본다 함은
역시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것은 오직 다른 이만을 해친다고 말하는가?
【답】자세히 살펴보기만 하는 허물은 가벼운 것이요
그의 남편에게도 아직은 실제로 욕(辱)이나 해는 끼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다.
【論】어떻게 욕심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탐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남의 아내를 겁탈하면
그의 남편이 안 뒤에는 그의 아내에게나 그 사람에 대하여 때리고 포박하며
목숨을 빼앗거나 혹은 재보(財寶)를 빼앗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이다.
【문】그의 남편이 다른 이를 해치면 역시 고통의 과보를 받을 것이므로 세 사람이 다 해가 된다고 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자기와 남의 두 군데라고만 말하는가?
【답】그 사람은 현세(現世)에서는 죄벌도 받지 않고 도리어 남들의 칭찬을 받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며 또 남편도 다른 이에 해당되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이라 한다.
【論】어떻게 에심(恚尋)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진의 전[瞋纏]을 일으킨 까닭에
몸이 피로하고 마음이 피로하며 몸이 타고 마음이 타며 몸이 뜨겁고 마음이 뜨거우며 몸이 그을리고 마음이 그을리는 것과 같다.
또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장차 오랜 세월 동안에
사랑스런 것이 아니고[非愛],
좋은 것이 아니고[非樂],
기쁜 것이 아니고[非喜],
즐거운 것이 아닌[非悅] 모든 이숙과(異熟果)를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과[二果]는 앞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論】어떻게 에심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진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따른 이의 목숨을 끊고 해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이다.
【문】다른 이의 목숨을 끊는 이도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둘 다 같이 해친다고 해야 되는데 무엇 때문에 다른 이만을 해친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도둑의 목숨 등을 끊으면 현재에 책망이나 벌도 없고 오히려 칭찬을 받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論】어떻게 에심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진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다른 이의 목숨을 끊고 해치며 또한 다시 다른 이에게 그의 목숨도 끊어짐을 당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문】해치는 이를 살해하는 것도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세 사람을 해친다고 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두 사람만 해친다고 말하는가?
【답】다른 이를 살해하는 이를 죽이는 것은 세상이 다 같이 칭찬하게 되고 현재에 죄고를 받는 것도 없기 말하지 않는다.
또 그도 다른 이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論】어떻게 해심(害尋)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해의 전[害纏]을 일으킨 까닭에 몸이 피로하고 마음이 피로하며 몸이 타고 마음이 타며 몸이 뜨겁고 마음이 뜨거우며 몸이 그을리고 마음이 그을리는 것과 같다.
또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장차 오랜 세월 동안에 사랑스런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 아니고,
기쁜 것이 아니고,
즐거운 것이 아닌 이숙과를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여기서의 두 가지 과[二果]는 앞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論】어떻게 해심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해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다른 이를 때리며 포박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이다.
【문】다른 이를 때리고 포박하는 이도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과 남을 다 함께 해친다고 해야 되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다른 이만을 해친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나쁜 사람을 때리고 포박하는 것은 세상이 다 함께 칭찬하고 현재에 고통도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論】어떻게 해심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인가?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해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다른 이를 때리고 포박하며 또한 다른 이에게 맞고 포박을 당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이다.
여기서의 문답은 앞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문】이 세 가지 악심[三惡尋]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욕심(欲尋)은 욕계 5부(部)의 6식신(識身)과 함께하는 탐(貪)과 상응하는 심(尋)으로써 자성을 삼고 에심(恚尋)도 5부의 6식신과 함께하는 진(瞋)과 상응하는 심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해심(害尋)은 어떤 사람이 “곧 진(瞋)의 일부와 상응하는 심을 자성으로 삼으니 해치는 것은 곧 성내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만일 그렇다면 에심과 해심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진(瞋)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의 목숨을 끊으려 하는 것이요,
둘째는 중생을 때리고 포박하려는 것이다.
앞의 것을 에(恚)라 하고 뒤의 것을 해(害)라고 한다.
또 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마땅히 성을 내어야 할 데에 내는 것이요,
둘째는 성을 내지 않아야 할 데에 내는 것이다.
앞의 것을 에라 하고 뒤의 것을 해라고 한다.
그 두 가지와 상응하는 심(尋)을 에심ㆍ해심이라 하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
어떤 이는 “해심은 무명(無明)의 일부와 상응하는 심을 자성으로 삼는 것이니 해는 곧 무명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시설론(施設論)』에서는 “어떤 인연 때문에 어리석음[癡]이 더하는가?
해계(害界)ㆍ해상(害想)ㆍ해심(害尋)을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아서이다”라고 말한다.
【評】“따로 심소(心所)가 있으면서 해(害)라 하는 것이요,
진에도 아니고 무명도 아니고 수면도 아니다.
자성(自性)은 진에로 이끈 것이요 진에의 등류(等流)이며 진에에 따라 뒤에 일어나는 것이므로 번뇌의 때[煩惱垢]라고 한다.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며 의식(意識)과 상응하며 이것과 상응하는 심은 해심의 자성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 세 가지는 착하지 않기 때문에 악심(惡尋)이라고 한다.
또 세 가지 선심(善尋)이 있다.
첫째는 출리심(出離尋)이요,
둘째는 무에심(無恚尋)이며,
셋째는 무해심(無害尋)이다.
【문】이 세 가지 선심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모두 온갖 착한 마음과 상응하는 심(尋)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세 가지 악심은 하나하나 따로 일어나고 자성도 각각 다르며 온갖 착하지 않은 마음과 함께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 세 가지 선심은 따로 자성도 없고 모두 온갖 착한 마음과 상응한다.
【문】만일 그렇다면 이 세 가지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자성에는 차별이 없어도 뜻에는 차이가 있으니 세 가지 악심의 가까운 대치[近對治]이기 때문이다.
모든 선심은 욕심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출리심이라 하고 에심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무에심이라 하며 해심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무해심이라 한다.
계경에서 “내가 아직 삼보리를 증득하지 못했을 때에 비록 욕심ㆍ에심ㆍ해심을 일으켰다 해도 방일(放逸)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보살이 그때에 만일 방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오히려 이 세 가지 악심을 일으킨 것인가?
【답】세우 존자는 “보살은 비록 이 세 가지 악심을 일으켰다 해도 선(善)을 힘써 닦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비록 악심을 일으켰다 해도 속히 그것이 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알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비록 일으켰다 해도 이내 싫어하여 버리고 뱉어버렸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잠깐 동안 일으켰다 하여도 곧 그것의 대치(對治)를 닦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일으킨 뒤에는 곧 인(因)을 끊고 의지[依]를 결(缺)하면서 경계의 허물을 분명하게 알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세 가지 인연 때문에 번뇌가 앞에 나타나는 것이니 첫째는 인(因)의 힘으로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경계(境界)의 힘이며,
셋째는 가행(加行)의 힘이다.
보살은 이 세 가지 나쁜 심[不善尋]을 일으켰으면서도 다만 인의 힘만을 말미암고 다른 두 가지를 조복하는 것이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보살은 비록 일으켰다 하더라도 빨리 조복하여 제거하는 것이 마치 한 방울의 물을 뜨거운 쇠[鐵] 위에 떨어뜨린 것과 같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일으킨 뒤에는 속히 버리는 것이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했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보살은 어느 곳에서 세 가지 악심을 일으킨 것인가?
【답】협 존자는 “인(因)의 힘을 말미암아 처소마다 일으키는 것이므로 수고로이 일으키는 곳이 정해진 것이라고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소경이 넘어지고 어리석은 이가 헷갈리는 것과 같아서 이르는 곳마다 모두 그러하거늘 어찌 처소가 정해져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보살은 전륜왕(轉輪王)의 지위를 버리고 성(城)을 넘어 출가하여 위없는 깨달음[無上覺]을 구하실 때에 스승과 벗을 찾아 왕사성(王舍城)에 이르렀다.
아침나절에 성에 들어가 걸식하였는데 백천의 중생들이 에워싸고 우러러보며 예배하고 찬탄하면서 마음에 만족할 줄 몰랐다.
보살은 그들에 대하여 처음에는 욕심(欲尋)을 일으켰으나 대중들이 에워싸서 걸식에 방해가 되어 굶주림의 불에 시달렸으므로 다시 에심(恚尋)을 일으킨 것이며 진심(瞋心)이 잠깐 그치면서 해심(害尋)이 다시 일어났으므로 잠깐 만에 깨닫고 살피면서 중한 참괴(慚愧)의 마음을 내었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보살이 겁비라성(劫比羅城)을 버리고 고요한 숲에 의지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실 때에 부왕은 즉시 석씨 종족 다섯 사람을 보내면서 따라다니며 모시게 했었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이는 낙행(樂行)이라야 청정함[淨]을 얻는다고 집착하다가 처음에 보살이 고행(苦行)을 닦는 것을 보고 그때에 곧 버리고 떠났으며 다시 어떤 이는 고행이라야 청정함을 얻는다고 집착하다가 뒤에 보살이 고행을 버리는 것을 보고 그 때에도 역시 하직하고 떠났었다.
이때에 난타(難陀)와 난타발라(難陀跋羅)라는 두 범지 여인[梵志女]이 우유죽을 바쳐 올릴 때에 시자(侍者)가 없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머물러 시중을 들다가 여인의 부드러운 손으로 보살을 어루만졌다.
보살은 거기서 욕심(欲尋)을 일으켜 ‘먼저 나의 좌우(左右)가 나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어찌 여인이 나를 가까이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드디어 좌우에 대하여 에심(恚尋)을 일으켰으며 진심이 점차로 그치면서 해심(害尋)이 다시 일어나자 곧 스스로 깨달으면서 크게 참괴를 내었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보살이 아직 출가하지 않으셨을 때에 부왕 정반(淨飯)은 그를 위하여 5백의 옥녀(玉女)들에게 장가들어 비빈(妃嬪)을 삼게 하고서 보살을 즐기도록 하며 출가하지 못하게 했었으나 보살은 그것을 버리고 출가하였으므로 여러 왕(王)들은 사신을 보내어 딸을 찾아서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정반왕이 말하였다.
‘나의 아들이 출가하여 마음이 몹시 괴롭소이다.
그 비빈들을 보는 때만이라도 마음을 위로하고 있는데 지금은 그들을 놓아주어 나라에 돌려보낼 수는 없소.’
여러 왕들은 그 말을 듣고 저마다 분해하고 성을 내면서 다 함께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정벌하였으므로 부왕은 근심하고 두려워해서 사신을 보내어 보살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너 때문에 이런 원수들을 맞이하고 있다.’어떤 이는 천신(天神)이 와서 보살에게 말해 주었다고도 말한다.
보살은 이 말을 듣고서 부왕에 대하여 먼저 욕심을 일으켰고 5백의 왕들에게는 에심을 일으켰으며 그 다음에는 그 군사들에게 해심을 일으켰으나 잠깐 만에 깨닫고 살피면서 깊이 참괴를 내었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보살이 출가하여 고행을 닦을 때에 옛날에 받았던 5욕(欲)의 즐거운 일들을 기억하면서 욕심을 일으켰고 뒤에 천수(天授)가 자기 궁실(宮室)을 문란하게 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에심을 일으켰으며 거기에 관계한 이들에 대하여 다시 해심을 일으켰으나 잠깐 만에 깨닫고 크게 참괴를 내었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6년 동안 고행을 닦을 때에 악마가 따라다니며 헤살을 부리면서 때로는 사랑할 만한 색상(色像)을 나투어 보였으므로 보살은 그것에 대하여 욕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두려워할 만한 색상을 나투어 보였으므로 보살은 그것에 대하여 에심을 일으키기도 하며 때로는 업신여기면서 조롱하는 색상을 나투어 보였으므로 보살은 그것에 대하여 해심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잠깐 만에 뉘우치고 깊이 참괴를 일으켰었다”라고 말한다.
묘음 존자는 “보살은 먼저 욕계의 문(聞)ㆍ사(思)로 인해 생긴 두 가지 지혜로써 모든 번뇌를 조복하였고 이 지혜를 사랑한 까닭에 욕심을 일으켰으나 잠깐 만에 ‘이것은 번뇌이어서 악만을 더한다’라고 깨달아 알았으며 이 때문에 에심을 일으켰고 점차로 다시 그치고 엷어지면서 해심을 일으켰으나 그 뒤에 깨달아 알면서 깊이 참괴를 내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보살이 옛날 보리수 아래 있을 때에 초저녁에 악마의 딸이 와서 아양을 부리며 어지럽혔었다.
그때에 보살은 잠시 동안 욕심을 일으켰었고 한밤중에 악마 군사들이 모두 와서 보살을 핍박하고 괴롭혔으므로 그것에 대하여 잠시 동안 에심을 일으켰으며 점차로 다시 그치고 엷어지면서 다시 해심을 일으켰으나 잠깐 만에 깨닫고 살피면서 곧 자정(慈定)에 들어가 악마의 병사들을 꺾어 물리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보살은 이 세 가지 악심[三惡尋]을 일으킨 뒤에 곧 스스로 ‘이것은 자기 자신을 해치고 다른 이를 해치며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어떻게 보살이 일으킨 욕심ㆍ에심ㆍ해심이 세 군데를 해친다[三害]고 하는 것인가?
【답】비록 해치는 작용이 없다고 해도 그 모양[相]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니 악심은 반드시 세 군데를 해치는 모양이 있기 때문이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기를 이롭게[自利] 하는 일이 멀어지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他利] 하는 일이 멀어지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둘 다 이롭게[俱利] 하는 일이 멀어지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기를 이롭게 하는 일이 파괴되기 때문에 자기를 해친다고 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일이 파괴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둘 다 이롭게 하는 일이 파괴되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기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 그쳐 쉬기 때문에 자기를 해친다고 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 그쳐 쉬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둘 다 이롭게 하는 마음이 그쳐 쉬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自相續)에 대하여 과를 취하고[取果] 과를 주기[與果]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모든 시주(施主)로 하여금 비록 4사(事)를 베풀게 한다 하더라도 큰 과보가 없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에 대하여 자성의 우치[自性愚]와 소연의 우치[所緣愚]를 내기 때문에 자기를 해친다고 하고 다른 시주로 하여금 보시를 하게 하여도 큰 과보가 없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을 물들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타상속(他相續)을 물들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으로 하여금 성현의 즐거움을 여의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또한 다른 이로 하여금 여의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세우 존자는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으로 하여금 이계과(離繫果)를 멀리하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교화 받을 이로 하여금 이계과를 멀리하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는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으로 하여금 뛰어난 공덕을 멀리 하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교화 받을 이로 하여금 뛰어난 공덕을 멀리하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일체지(一切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로 하여금 빨리 증득할 수 없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교화 받을 이로 하여금 빨리 이익을 얻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몸과 마음이 뜨겁고 괴롭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교화할 이의 이익을 잃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 존자는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몸과 마음이 쾌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천신(天神)이 책망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나는 처음 성불(成佛)하여 두 가지 심[二尋]을 많이 일으켰으니 안온심(安穩尋)과 원리심(遠離尋)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문】이 두 가지 심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안온심은 출리심으로써 자성을 삼고 원리심은 무에(無恚尋)ㆍ무해심(無害尋)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욕심(欲尋)을 대치(對治)하고 원리심은 에심(恚尋)ㆍ해심(害尋)을 대치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무탐(無貪)의 선근과 상응하고 원리심은 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선근과 상응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탐(貪)과 상응하는 심(尋)을 대치하고 원리심은 진(瞋)ㆍ치(癡)와 상응하는 심을 대치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자(慈)ㆍ비(悲)와 상응하고 원리심은 희(喜)ㆍ사(捨)와 상응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고지(苦智)ㆍ집지(集智)와 상응하고 원리심은 멸지(滅智)ㆍ도지(道智)와 상응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공(空)과 고(苦)ㆍ집(集)의 무원(無願) 삼마지(三摩地)2)와 함께하고 원리심은 무상(無相)과 도(道)의 무원 삼마지와 함께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묘음 존자는 “유전(流轉)의 허물을 보는 마음과 상응하는 심(尋)을 안온심이라 하고,
환멸(還滅)의 공덕을 보는 마음과 상응하는 심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환멸의 공덕을 보는 것과 상응하는 심을 안온심이라 하고,
유전의 허물을 보는 것과 상응하는 심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끝없이 이익되게 하는 뜻[意]과 상응하는 심을 안온심이라 하고,
끝없이 안락하게 하는 뜻과 상응하는 심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끝없이 안락하게 하는 뜻과 상응하는 심을 안온심이라 하고,
끝없이 이익되게 하는 뜻과 상응하는 심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우 존자는 “그지없는 연민(憐愍)의 의요(意樂)로 일으키는 것을 안온심이라 하고,
그지없는 조선(調善)의 의요로 일으키는 것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무엇 때문에 처음 성불하신 뒤에 이 두 가지 심(尋)을 일으키셨는가?
【답】이 두 가지 심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앞에 나타나는 행(行)이고 청정한 도[淨道]이기 때문이다.
또 옛날 궁중에 계실 때 받았던 욕락(欲樂)을 대치하기 위하여 처음 성불하신 뒤에 원리심을 많이 일으키신 것이고 고행을 닦을 때 이익 없던 고통을 대치하기 위하여 처음 성불하신 뒤에 안온심을 일으키신 것이다.
또 처음 성불하신 뒤에 자신의 덕[自德]을 경하하기 위하여 안온심을 많이 일으키셨고 다른 이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원리심을 많이 일으키신 것이다.
【論】지혜[智]가 많은가,
경계[境]가 많은가?3)……(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없는 것[無]을 반연하는 지혜가 있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는 “만일 요술로 된 일[幻事]이나 건달바성[建達縛城]이나 횃불을 돌려 생기는 불바퀴[旋火輪]나 녹애(鹿愛:아지랑이) 등을 반연한다면 그 지혜는 모두가 없는 경계[無境]를 반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면서 온갖 지혜는 모두가 있는 경계[有境]를 반연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혜가 경계를 반연하지 않은 것이 있고 경계가 지혜의 연(緣)이 아닌 것도 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면서 온갖 지혜는 모두가 경계를 반연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온갖 경계는 모두가 지혜의 소연(所緣)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외도(外道)는 뒤바뀜[顚倒]이 있기 때문에 경계와 지혜는 서로 틀리다는 것을 드러내며 내도(內道)는 뒤바뀜이 없기 때문에 경계와 지혜가 서로 수순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 어떤 이는 “지혜가 많고 경계는 그렇지 않으니 하나의 경계[一境] 위에는 많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경계가 많고 지혜는 많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지혜가 많은가 경계가 많은가?
【답】경계가 많으며 지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지혜도 경계이기 때문이다.
지혜4)는 오직 1계(界)ㆍ1처(處)와 1온(蘊)의 일부분에 속하지만 경계는 18계ㆍ12처ㆍ5온에 속한다.
어떤 이는 “지혜가 많고 경계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하하품(下下品)의 한 찰나의 수(受)는 욕계의 10지(智)로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아홉 가지의 부동분계(不同分界)의 변행수면(遍行隨眠)과 상응하는 품류의 지혜와 선(善)의 세속지(世俗智)이다.
마치 욕계의 10지로 아는 것처럼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비상비비상처는 16지(智)로 아는 것이니 열한 가지의 변행수면과 상응하는 지혜와 수도에 끊을 탐(貪)ㆍ만(慢)ㆍ무명(無明)과 상응하는 지혜와 무부무기와 선의 세속지이다.
이처럼 통틀어 96의 지혜에 무루지(無漏智)를 합하면 97의 지혜가 있어 그 하나의 수(受)를 아는 것이니 그 밖의 다른 수와 그 밖의 다른 법에서도 이런 도리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지혜는 많고 경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評】그의 그런 설명은 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지혜의 상응법(相應法)ㆍ구유법(俱有法) 등과 지혜의 자성은 모두가 경계이기 때문이다.
설령 지혜가 경계가 아니라 해도 그 경계는 오히려 많은데 하물며 지혜도 경계이거늘 경계가 많지 않겠는가?
【문】만일 지혜도 경계라면 지혜와 경계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능히 아는 것[能知]은 지혜이고,
알 대상[所知]은 경계이다.
또 지혜는 오직 비색(非色)ㆍ무견(無見)ㆍ무대(無對)ㆍ유위(有爲)ㆍ상응(相應)ㆍ유소의(有所依)ㆍ유소연(有所緣)ㆍ유행상(有行相)이지만 경계는 색(色)과 비색ㆍ유견(有見)과 무견ㆍ유대(有對)와 무대ㆍ유위와 무위(無爲)ㆍ상응과 불상응(不相應)ㆍ유소의와 무소의(無所依)ㆍ유소연과 무소연(無所緣)ㆍ유행상과 무행상(無行相)에 다 통한다.
또 지는 오직 3세(世)와 세 가지 진리[三諦]에 포섭될 뿐이지만 경계는 3세와 비세(非世)에 다 통하고 네 가지 진리[四諦]에 포섭된다.
이런 것 등을 경계와 지혜의 차별이라 한다.
【論】지혜[智]가 많은가,
식(識)이 많은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식과 지혜의 두 가지 법은 차츰차츰 상응하는 것이니 인(忍)이 곧 지혜이기 때문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시키고 온갖 지혜는 식과 상응하나 온갖 식은 지혜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무루의 인[無漏忍]은 지혜의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은 어떤 이는 “지혜는 무루일 뿐이요 식은 유루일 뿐이니 서로가 상응하지 않는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고 식과 지혜는 다 같이 두 가지에 다 통하며 상응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지혜가 곧 식이나 분위(分位)가 차별되기 때문에 지혜와 식은 상응한다는 뜻이 없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고 식과 지혜는 체(體)와 용(用)이 각각 다르므로 상응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지혜가 많은가 식이 많은가?
【답】식이 많으며 지혜는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모든 지혜는 모두 식과 상응하지만 모든 식은 모두가 지혜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고 인(忍)과 상응한 식은 지혜와는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모든 무루의 인은 무엇 때문에 지혜가 아닌가?
【답】보아야 할 대상인 경계에 대하여 아직은 거듭 관(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끝없는 옛날부터 4성제(聖諦)에 대하여 아직 무루의 진실한 지혜로써 보지 못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본다 하더라도 아직 거듭 관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지혜라 하지 않는 것이니 반드시 같은 종류의 지혜가 경계에 대하여 거듭 관해야 비로소 지혜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한 유정(有情)도 온갖 법에 대하여 끝없는 옛날부터 유루의 지혜로써는 자주자주 그것을 관하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에 유루의 지혜는 모두가 지혜에 포섭된다.
또 인(忍)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미루어 헤아리며 인가(忍可)하면서도 아직 마치지는 못했기 때문에 지혜에 포섭된 것이 아니다.
또 인은 끊을 대상인 의심[疑]과 함께하게 되기 때문에 지혜에 포섭된 것이 아니다.
설령 함께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의 종류이다.
유루의 무간도(無間道)는 진실한 대치(對治)가 아니기 때문에 비록 의심과 함께하게 된다 하더라도 지혜이나 무루의 인은 지혜에 포섭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식이 많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식5)은 7계(界)ㆍ1처(處)ㆍ1온(蘊)에 속하지만 지혜는 오직 1계ㆍ1처와 1온의 일부분에 속할 뿐이니 이 때문에 지혜가 적다.
【論】유루의 행[有漏行]이 많은가,
무루의 행[無漏行]이 많은가?6)……(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이치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부처님의 생신(生身)은 무루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대중부(大衆部)에서와 같다.
그들은 “경에서 여래께서 세간에 살아 계시고 세간에 오래 계실 때에 다니시거나 머무르시거나 세간의 법으로는 더럽히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말미암아 여래의 생신도 무루인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면서 부처님의 생신은 반드시 유루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만일 부처님의 생신이 무루라면 부처님의 몸에 대하여 무비(無比) 여인7)은 사랑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하고,
지만(指鬘)은 성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하며,
오사(傲士)는 만(慢)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하고,
오로빈라(隖盧頻螺)는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할 것인데 이미 반연하여 사랑ㆍ진심ㆍ만심ㆍ우치를 일으켰기 때문에 부처님의 생신은 반드시 무루가 아니다.
【문】만일 그렇다면 그 부(部)에서 인용한 계경의 뜻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답】그것은 법신(法身)에 의거하여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경에서 “여래께서 세간에 살아 계시고 세간에 오래 계신다”고 말한 것은 생신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다니시거나 머무르시거나 간에 세간의 법으로는 더럽히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법신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므로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또 수순하지 않는 것에 의거하여 “더럽히지 못한다[不染]”고 말한 것이다.
세간의 8법(法)8)은 세간에 수순하고 모든 유정들도 그것을 순수하기 때문에 더럽힌다[染汚]고 말하지만 세간의 8법은 여래에게 수순하지만 부처님은 그것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에 더럽히지 못한다고 한다.
또 여래의 생신은 비록 유루라 하더라도 8법을 초월하기 때문에 더럽히지 못한다고 한다.
【문】이(利) 등 8법은 여래에게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초월한다 하는가?
이(利)는 용장자(勇長者)를 가엾이 여기신 까닭에 하루 동안에 그에게 3억이나 되는 살림과 옷을 받으신 것이요,
쇠(衰)는 저 대바라문촌(大婆羅門村)에 들어가 걸식하셨으나 얻지 못하고 빈 바리로 돌아오신 것이며,
훼(毁)는 전차바라문녀(戰遮婆羅門女)와 손타리(孫陀利)가 부처님을 비방하는 소리가 열여섯 큰 나라에 두루 퍼진 것이요,
예(譽)는 여래께서 탄생하실 때의 소리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사무치고 성불하실 때의 소리는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이르렀으며 법륜(法輪)을 굴릴 때의 소리는 범세(梵世)까지 이른 것이다.
칭(稱)은 발라타사(跋羅墮闍) 범지가 5백의 게송으로써 앞에 나타나 부처님을 찬탄하고,
논력 외도(論力外道)와 오파리(塢波離) 등의 모든 대논사(大論師)가 백천의 게송으로써 우러러보면서 부처님을 찬탄하며,
구수(具壽) 아난이 합장하고 부처님의 모든 희유한 법을 찬탄하고,
사리자 존자는 공경하면서 부처님의 모든 위없는 법을 찬탄한 이와 같은 온갖 것이다.
기(譏)는 발라사타 범지가 먼저 5백의 게송으로 앞에 나타나 부처님께 욕설을 한 것이며,
고(苦)는 여래께서 때로는 등이 아프시고 조약돌이나 독가시에 발가락을 상하는 등의 것이요,
낙(樂)은 여래께서의 가뿐하신 쾌락과 생사하는 동안에 가장 뛰어나게 느낀 즐거움도 있으셨거늘 어찌하여 세존은 세간의 8법을 초월하셨다고 하는가?
【답】여래께서는 비록 이(利) 등 네 가지 법을 만난다 해도 높은 기쁨이나 사랑을 내지 않으시며 여래께서는 비록 쇠(衰) 등 네 가지 법을 만난다 하더라도 낮은 근심이나 성을 내시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초월하기 때문에 더럽히지 못한다”고 일컫는 것이요 무루라 하여 더럽히지 않는다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다.
마치 묘고산(妙高山)이 금륜(金輪) 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팔방에서 맹렬한 바람이 불어와도 기울이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도 그러하여 청정한 시라(尸羅)에 머물러 계시므로 세간의 8법으로는 기울이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다른 종(宗)의 달리하는 집착을 차단하면서 바른 이치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유루의 행[有漏行]이 많은가,
무루의 행[無漏行]이 많은가?
【답】유루의 행이 많으며 무루의 행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유루의 행은 10처(處)와 2처의 일부분에 속하지만 무루의 행은 오직 2처의 일부분에만 속하기 때문이다.9)
어떤 이는 “무루의 행이 많고 유루의 행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욕계계(欲界繫)의 하하품(下下品)에 속한 한 찰나 동안의 색(色)은 반드시 네 가지 무루의 지혜의 연(緣)이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첫째는 고법지인(苦法知忍)이요,
둘째는 고법지(苦法智)이며,
셋째는 집법지인(集法智忍)이요,
넷째는 집법지(集法智)이다.
그 밖의 다른 색과 그 밖의 다른 법도 이런 이치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또 이 밖에도 모든 무루의 법이 있기 때문에 무루의 행이 결정코 많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유루의 행이 많다.
왜냐하면 하나의 무루행은 네 가지 유루의 연이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첫째는 사견(邪見)이요,
둘째는 의(疑)요,
셋째는 무명(無明)이요,
넷째는 선(善)의 세속지(世俗智)이다.
그 밖의 무루의 행도 이런 이치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또 이 밖에도 모든 유루의 법이 있기 때문에 유루의 행은 결정코 많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評】“유루ㆍ무루의 행은 비록 모두가 그지없다 해도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우선 처(處)가 속한 곳을 기준으로 하여 유루가 많고 무루의 행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또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모든 법의 다소를 묻지 않았다 하더라도 뜻에서 보아서는 마땅히 있어야 한다.
【문】유위의 법이 많은가,
무위의 법이 많은가?
【답】유위의 법이 많고 무위의 법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유위의 법은 11처(處)와 1처의 일부분에 속하지만 무위의 법은 오직 1처의 일부분에만 속하기 때문이다.
【評】“무위의 법이 많고 유위의 법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유루의 법에 그 만큼의 체(體)가 있음에 따라 택멸무위(擇滅無爲)의 수량도 그러하며 무루의 도(道)에 그 만큼의 체가 있음에 따라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의 수량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 이 밖에도 유루법의 체의 양(量)이 많고 적음에 따라 모든 비택멸과 허공무위(虛空無爲)가 있기 때문에 무위의 법이 많고 유위의 법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앞의 문[前門]에 준하면서 우선 처(處)에 의거하여 말하기 때문에 무위는 그 수(數)가 적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論】어떤 것이 행이 원만하다[行圓滿] 하는가?10)……(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시라(尸羅)가 원만하고 등지(等持)가 원만하며 반야(般若)가 원만하고 행(行)이 원만하며 수호[護]가 원만하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는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어떤 것이 행이나 수호가 원만한 것인가에 대한 뜻은 분별하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이제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어떤 것이 행이 원만하다 하는가?
【답】무학(無學)의 몸의 율의[身律儀]와 말의 율의[語律儀]와 생활이 청정한 것[命淸淨]이다.
【문】학(學)과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에게도 율의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무학만을 말하는가?
【답】나은 것[勝]에 의거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법에 있어서나 보특가라에 있어서나 간에 모두가 무학이 더 뛰어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율의가 있고 불률의(不律儀)에 손상되거나 파괴된 것이 아니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학 등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
무학의 신업(身業)을 몸의 율의라 하고,
무학의 어업(語業)을 말의 율의라 하며,
무학의 신업ㆍ어업을 통틀어서 생활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니 곧 정업(正業)과 정어(正語)와 정명(正命)이다.
계경에서는 계(戒)를 혹은 시라(尸羅)라 하기도 하고,
혹은 행(行)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발[足]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상자[篋]라 하기도 한다.
시라라는 말은 맑고 시원하다[淸凉]는 뜻이니 악(惡)은 몸과 마음을 뜨겁게 하고 괴롭게 하지만 계는 편안하게 하고 쾌적하게 하기 때문에 맑고 시원하다고 한다.
또 악은 악취의 뜨거운 고뇌를 불러오지만 계는 선취(善趣)를 불러오기 때문에 맑고 시원하다고 한다.
또 시라라 함은 편안히 잠잔다[安眠]는 뜻이니 계율을 지닌[持戒] 이는 안온한 잠을 자면서 언제나 좋은 꿈을 꾸기 때문에 시라라고 한다.
또 시라라 함은 자주자주 익힌다[數習]는 뜻이니 언제나 착한 법을 익히기 때문에 시라라고 한다.
또 시라라 함은 정을 얻는다[得定]는 뜻이니 계율을 지닌 이는 정을 얻기 쉽기 때문에 시라라 한다.
또 시라라 함은 돌계단[隧蹬:石段]이라는 뜻이니 마치 게송[伽陀]의 말씀과 같다.
부처님 법의 못[池]은 맑고 시원하며
시라는 그 돌계단이 되므로
성현이 목욕해도 몸이 젖지 않으며
저 언덕[彼岸]의 공덕에 이르게 된다.
또 시라라 함은 장엄하는 기구[嚴具]라는 뜻이니 장엄하는 기구는 유년(幼年)에게는 좋지만 장년(壯年)이나 노년(老年)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 있고,
장엄하는 기구는 장년에게는 좋지만 유년과 노년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 있으며,
장엄하는 기구는 노년에게는 좋지만 유년과 장년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 있지만 시라가 몸을 장엄하는 것은 세 때[三時]에 언제나 좋은 것이니 마치 게송의 말씀과 같다.
시라는 몸을 장엄하는 기구이어서
유년ㆍ장년ㆍ노년에게 다 함께 마땅하며
믿음[信]에 머무는 지혜[慧]를 진보(珍寶)로 여기니
그 복을 훔칠 수 있는 이는 없다.
또 시라라 함은 밝은 거울[明鏡]이라는 뜻이니 마치 거울이 맑고 깨끗하면 형상이 그 속에 나타나는 것처럼 시라에 머무르면 무아(無我)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 시라라 함은 섬돌[階陛]이라는 뜻이니 마치 무멸(無滅) 존자가 “나는 시라의 섬돌을 밟고 위없는 지혜의 전각에 오른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시라라 함은 증상(增上)의 뜻이니 부처님께서 삼천대천세계에서 위세(威勢)가 있는 것은 모두가 사라의 힘 때문이다.
옛날 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에 무겁구(無怯懼)라는 이름을 가진 한 독룡(毒龍)이 있었는데 품성이 포악하여 많은 해독을 끼쳤다.
거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비하라(毘訶羅)11)가 있었다.
자주 그 용이 괴롭혔으므로 절에 있는 5백 대아라한들이 다 같이 의논을 하고서 정(定)에 들어가 그 용을 쫓아버리려고 하여 그들의 신력(神力)을 다했지만 쫓아내지 못했었다.
마침 어떤 아라한이 외방(外方)에서부터 왔으므로 먼저 있던 그 스님들은 그에게 위의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때에 그 외방에서 온 이는 용이 살고 있는 데로 가서 손가락을 튀기면서 “현면(賢面)아, 멀리 떠나가거라”고 하자 용은 그 소리를 듣고 이내 멀리 떠나가 버렸다.
아라한들은 괴이하게 여기면서 물었다.
“당신은 그 용을 쫓아버렸는데 그것은 어느 정(定)의 힘이었습니까?”
그는 대중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정에 들지도 않았고 신통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라를 지킨 까닭에 이런 힘이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가벼운 죄를 지키는 것이 마치 중금(重禁)을 방호하듯 하기 때문에
악한 용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시라는 증상의 뜻이 있다.
또 시라라 함은 머리[頭首]라는 뜻이니
마치 머리가 있는 이는 곧 빛깔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냄새를 맡고 맛을 보며 접촉을 깨닫고 법을 아는 것처럼 시라가 있는 이는 곧 4성제(聖諦)의 빛깔을 보고 전에 없던
명신(名身) 등의 소리를 들으며
37각분(覺分)의 꽃향기를 맡고 출가하여
멀리 여의는 삼보리(三菩提)의 적정(寂靜)한 맛을 맛보며 정려(靜慮)ㆍ해탈(解脫)ㆍ등지(等持)ㆍ등지(等至)의 접촉을 깨닫고 온(蘊)ㆍ처(處)ㆍ계(界)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법을 알기 때문에 시라는 머리라는 뜻이다.
계경에서 “계(戒)를 행(行)이라 한다”고 한 것은 모든 세간에서 계를 행이라 하기 때문이니 모든 세간에서는 계를 지닌 이[持戒者]를 보면 “그는 행이 있다”고 말하고 파계(破戒)한 이를 보면 “그는 행이 없다”고 말한다.
또 청정한 계를 지니는 것은 뭇 행[衆行]의 근본이어서 열반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행이라 한다.
계경에서 “계를 발[足]이라 한다”고 한 것은 선취(善趣)에 나아가고 열반에 이르기 때문이다.
마치 발이 있는 이는 험악한 데를 피하면서 안온한 데에 이르는 것처럼 청정한 계를 소유한 이는 악취를 초월하고 천상이나 인간에 나기도 하며 혹은 생사를 초월하여 열반의 언덕에 이르기 때문에 발이라 한다.
계경에서 “계를 상자[篋]라 한다”고 한 것은 온갖 공덕의 법을 맡아 지니기 때문이다.
계를 지닌 이는 공덕을 맡아 지니어 물러나거나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마치 상자가 보물을 지니는 것과 같다.
묘음 존자는 “계를 파괴하지 않는 것[不壞]이라 한다.
왜냐하면 발이 파괴되지 않으면 자유자재로 안온한 데로 가는 것처럼 청정한 계를 갖춘 이도 그와 같이 열반에 이르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무학의 몸과 말의 청정한 계를 행이 원만하다[行圓滿]고 하는 것은 행 가운데서 극치[極]이기 때문이다.
【論】어떤 것이 수호가 원만하다[護圓滿] 하는가?
【답】무학의 근의 율의[根律儀]이다.12)
여기에서 근(根)은 수호할 것[所護]인 줄 알아야 한다.
염혜(念慧)의 힘으로 말미암아 눈[眼] 등의 감관[根]을 수호하여 경계에 대하여 모든 허물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은 마치 갈고리로 코끼리를 제어하여 멋대로 달아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무학의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를 원만한 수호라고 하니 마치 게송의 말씀과 같다.
세간의 모든 폭류(瀑流)를
바른 기억[正念]은 막고 수호하며
만일 마침내 끊어지게 하면
그 공(功)은 바르게 아는 것[正知]일세.
【문】근의 율의와 근의 불률의[根不律儀]는 저마다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근의 율의는 정념과 정지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실념(失念)과 부정지(不正知)로써 자성을 삼는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경이 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니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天]이 비구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지금 스스로 창루(瘡漏)를 열지 않으셔야 합니다.’
비구가 대답하였다.
‘나는 그것을 덮을 것입니다.’
하늘이 다시 말하였다.
‘창루가 작은 것이 아닌데 무엇으로 덮을 수 있겠습니까?’
비구가 대답하였다.
‘나는 정념과 정지로써 덮을 것입니다.’
하늘이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그것이 참으로 덮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근의 율의인 줄 알 수 있다.
덮는다[覆]는 것과 수호한다[護]는 것이 율의이니 뜻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근의 불률의는 앞의 것을 뒤집어서 세웠기 때문에 이것은 잊어버리는 것[失念]과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不正知]이다.
【문】만일 정념과 정지가 근의 율의라면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염(念)과 혜(慧)가 원만하기 때문에 근의 율의가 원만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찌 자성(自性)이 원만하기 때문에 자성이 원만하다고 말하겠는가?
【답】염혜(念慧)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원인의 성품[因性]이요,
둘째는 결과의 성품[果性]이다.
원인의 성품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결과의 성품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득의 선[生得善]이요,
둘째는 가행의 선[加行善]이다.
생득의 선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가행의 선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정의 선[不定善]이요,
둘째는 정의 선[定善]이다.
부정의 선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정의 선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간의 선[世間善]이요,
둘째는 출세간의 선[出世間善]이다.
세간의 선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출세간의 선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학(學)이요,
둘째는 무학(無學)이다.
학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무학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둔근의 종성[鈍根種性]이요,
둘째는 이근의 종성[利根種性]이다.
둔근의 종성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이근의 종성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그러므로 계경과는 서로 어긋나거나 해가 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방일(放逸)하지 않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방일하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근의 율의는 6항주법(恒住法)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이 대치할 것의 모든 번뇌의 업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혹은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6근(根)에 대하여 이미 끊고[已斷] 이미 두루 아는[已遍知] 법이 성취하지 않은 성품[不成就性]과 그것의 대치하는 도[對治道]의 성취한 성품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6근에 대하여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하는 법이 성취하는 성품과 그것의 대치하는 도의 성취하지 않은 성품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6근에 대하여 이미 끊고 이미 두루 아는 때에 있게 되는 묘행(妙行)의 선근이 나고 자라서 광대해지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6근에 대하여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할 때에 있게 되는 악행(惡行)의 선근이 나고 자라서 광대해지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온갖 착한 법[善法]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온갖 더러운 법[染汚法]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온갖 착한 법과 선(善)에 수순하는 무부무기(無覆無記)의 법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온갖 더러운 법과 염(染)에 수순하는 무부무기의 법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옛날 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에 길상윤(吉祥胤)이라는 비하라(毘訶羅)가 있었다.
거기에는 두 분의 아라한이 머물고 있었는데 모두 3명(明)을 증득하고 8해탈(解脫)을 갖추며 무애해(無礙解)를 얻었다.
그들은 설법하는 법사였고 친형제였으며 아버지 이름은 난제(難提)였고 바라문의 종성이었다.
그들은 다 같이 “근의 율의와 근의 불률의는 모두 무부무기의 불상응행온(不相應行蘊)의 율의와 불률의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문】만일 이것이 다 같이 무부무기의 심불상응행온에 속한다면 이 두 가지 자성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염오(染汚)에 수순하는 것을 불률의라 하고 청정(淸淨)에 수순하는 것을 율의라 한다.
이것이 바로 차별이다.
【評】이 모든 설명 가운데서는 맨 처음의 설명이 옳다고 하겠으니 경에서 염혜(念慧)는 근을 수호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 곧 이 염혜를 어떤 자리에서는 또한 단율의(斷律儀)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그 자리[位]의 차별에 따라 여러 가지를 세우는 것이다.
우선 유루(有漏)의 단율의를 말한다면
욕계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을 대상인 법은
미지지(未至地)로써 욕계를 여의는 유루의 9무간도(無間道) 안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고,
만일 초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이면 제2 정려의 근분지(近分地)로써 초정려를 여의는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며,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비상비비상처의 근분지로써 무소유처를 여의는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된다.
만일 무루(無漏)의 단율의를 말한다면 욕계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미지지로써 욕계를 여의는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고,
만일 초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이면 미지(未至)와 정려중간(靜慮中間)과 초정려에 의하여 초정려를 여의는 3지(地)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된다.
제2 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3지와 제2 정려로써 제2 정려를 여의는 4지(地)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고,
제3 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4지와 제3 정려로써 제3 정려를 여의는 5지(地)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며,
제4 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과 무색계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5지와 제4 정려로써 제4 정려 등을 여의는 6지(地)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된다.
공무변처(空無邊處)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의 법은 앞의 6지와 공무변처로써 공무변처를 여의는 7지(地) 무루의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고,
식무변처(識無邊處)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7지와 식무변처로써 식무변처를 여의는 8지(地) 무루의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며,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8지와 무소유처로써 2지(地)를 여의는 9지(地) 무루의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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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에서는 갖가지 심(尋)을 설명하고 있다.
3악심(惡尋)으로는 욕심ㆍ에심ㆍ해심을 들고 3선심(善尋)으로는 출리심(出離尋)ㆍ무에심(無恚尋)ㆍ무해심(無害尋)을 든다.
이 문단에서는 이 모든 심의 상(相)과 자성(自性)을 밝히며 겸하여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보살이었을 적에 3악심을 일으켰고 어떻게 하여 그것을 정복했는가?
그리고 성도(成道) 초에 일으킨 안온심(安隱尋)과 원리심(遠離心)이란 어떤 것인가를 논구한다.
2)
고ㆍ집의 무원 삼마지라 함은 고와 집에도 원하는 것이 없는 삼매(三昧)를 말하며 도의 무원 삼마지라 함은 도(道)도 마치 배나 뗏목과 같아서 결국에는 버려야 할 것이므로 여기에도 집착하지 않는 삼매를 말한다.
3)
지(智)는 인식 판단하는 작용이요,
경(境)은 그 대상이며,
식(識)은 지를 유지하는 주인이다.
여기서는 첫째로 지와 경에 있어서 그 범위는 어느 것이 더 넓은가를 논하고,
둘째로 지와 식에 관해서도 동일한 문제를 논구하려 한다.
갖가지 의론이 있지만 결론은 지보다 경이 더 넓고 지보다 식이 더 넓다고 하는 데에 있다.
4)
지(智)는 혜(慧)의 심소(心所)이므로 18계에서 보면 법계(法界)요,
12처에서 보면 법처(法處)이며,
5온에서 보면 행온(行蘊)의 일부분이다.
5)
식은 18계에서는 6식(識)과 의근(意根)의 7계요 12처에서는 의처(意處)이며 5온에서는 식온(識蘊)이다.
지는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법계(法界)와 법처(法處)와 행온(行蘊)의 일부분이다.
6)
온갖 법을 분류하여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으로 하며 다시 이 유위법은 유루의 행과 무루의 행으로 분류하게 된다.
여기서는 위의 분류를 예상하면서 첫째는 유루와 무루의 두 행 중에서 그 어느 것이 더 많은가를 논하고,
둘째는 유위와 무위의 법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많은가를 논하는 문단이다.
결론은 무루의 행보다 유루의 행이 더 많고 무위의 법보다 유위의 법이 더 많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유명한 불신유루설(佛身有漏說)을 언급한다.
7)
무비 여인은 부처님께 연모의 정을 일으켰고,
앙굴마라는 부처님을 해치려고 했으며,
오로빈라가섭은 부처님을 옳게 인식하지 못했고,
오사는 부처님을 경멸했다는 것이 여러 경전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가 뒤에 부처님께 귀의했지만 어쨌든 한 때나마 부처님의 몸을 반연하여 번뇌의 허물을 더하게 했다는 점에서 보면 부처님의 몸에 관하는 한 유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8)
8법이란 이(利)ㆍ쇠(衰)ㆍ훼(毁)ㆍ예(譽)ㆍ칭(稱)ㆍ기(譏)ㆍ고(苦)ㆍ락(樂)을 말한다.
9)
5근처(近處)와 5경소(境所)는 모두가 유루요,
의처(意處)와 법처(法處)의 대부분도 유루이다.
이에 반하여 무루는 성자(聖者)의 의처ㆍ법처의 일부를 점할 뿐이다.
10)
여기서는 경에 있는 다섯 가지 원만[五圓滿:戒ㆍ定ㆍ慧ㆍ行ㆍ獲의 원만] 중에서 특히 행원만에 관하여 밝히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행원만이란 아라한의 율의(律儀:戒)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행이란 나타낼[所詮] 계율의 이명(異名)에 불과하다.
이리하여 여기서는 계(戒),
즉 시라(尸羅)의 의의를 예의 속설(俗說) 자원론(資源論)에 의거하여 갖가지로 해석함으로써 시라에 포함된 내용이나 공덕을 높이 선양하려는 것이 이 문단의 주된 내용이다.
11)
비하라는 사원(寺院)이라는 뜻이다.
12)
다섯 가지 원만 중에서 특히 호원만(護圓滿)의 의의와 자성(自性)을 밝히는 문단이다.
호원만이란 5근(根)을 막고 수호하는 것이 완전하고 원만하다는 뜻이어서 본문에 있는 것과 같이 아라한의 근의 율의가 그것이다.
근의 율의의 자성에 관해서는 갖가지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으나 결국에는 그것을 정념(正念)이요 정지(正知)라고 하는 것이 바사(婆沙)에서의 정의의 설[正義說]이다.
여기서는 그 일을 논구하고 특히 정념과 정지와 그것의 반대인 실념(失念)과 부정지(不正知)를 갖가지로 나누어서 논구하며 겸하여 이 정념과 정지가 단율의(斷律儀)가 되는 경우에 나아가서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을 그 과제로 한다.
● [pt op tr] fr
『아비달마대비바사론』 ♣0952-044♧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Ridan - Ulysse.lrc
Ridan - Ulysse
◎◎[개별논의] ♥ ❋본문
● 비상식적인 인과관계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 【답】마치 어느 한 무리가 탐의 전[貪纏]을 일으킨 까닭에
몸이 피로하고 마음이 피로하며
몸이 타고 마음이 타며
몸이 뜨겁고 마음이 뜨거우며
몸이 그을리고 마음이 그을리는 것과 같다.
또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장차 오랜 세월 동안에
사랑스런 것이 아니고[非愛]
좋은 것이 아니고[非樂]
기쁜 것이 아니고[非喜]
즐거운 것이 아닌[非悅]
모든 이숙과(異熟果)를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
『아비달마대비바사론』 ♣0952-044♧
이는 일면 그럴 듯 하다.
그러나 세간에서 잘 받아들이지 않는 내용이다.
세상에서 무언가 좋은 상태가 있다고 하자.
그런 상태를 집착하고 희망해서 추구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런 상태가 성취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현실에서 그런 상태를 성취한 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는 그런 상태에 대해 욕심을 일으키고
집착하고 추구한 경우다.
그런데 경전과 논서에서는 이런 탐욕이 문제가 되는 것처럼 제시한다.
경전 내용이 옳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잘 받아들이고 실천해가면 된다.
그런데 위와 같은 현실 문제 때문에
사람은 대부분 100 년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이 언제까지 살다가 죽을 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런 가운데 매순간 위 자세로 임한다.
그래서 죽기 바로 직전까지도 위 자세를 변경시키지 않는다.
위 논서 내용이 설득력이 없게 여겨지는 것이 한 원인이다.
그래서 간단해 보이는 내용을 놓고
논사들이 자세히 설명을 덧붙여 이해시켜야 할 사정이 있다.
지금 수행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갖고 있는 욕심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이 질문은 생사현실에 임한 누구에게나 매순간 던져지는 시험문제와 같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들여다 보아야 한다.
★1★
◆vmqa6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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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chn] varṇa-saṃpanna 形色具足
[san-eng] indhana $ 범어 fuel
[pali-chn] avakāsa 光明處
[pal-eng]
[Eng-Ch-Eng] 天眼第一 Most eminent in terms of possession of the divine eye. A name given to S/a^kyamuni's disciple Aniruddha 阿那律.
[Muller-jpn-Eng] 超過 チョウカ exceed, go beyond, transcend
[Glossary_of_Buddhism-Eng] BORDERLANDS☞
See also: Longer Amitabha Sutra; Pure Land Buddhism (Summary).
“In Buddhist doctrine in general, these are places in a world system
where there is no opportunity to meet the Dharma because they are
isolated, far away from good teachers. In Sanghavarman’s translation
of the Longer Amitabha Sutra, the concept is extended to the Pure
Land, so that, as a type of world system, the Pure Land itself has its
own borderlands. In this usage, the borderlands are places in the Pure
Lands where living beings who have faltered in their faith will be reborn.”
Gomez: 286
People who have practiced during their lifetimes with devotion and
sincerity and should have earned rebirth in the Pure Land, but who,
on their deathbeds, develop feelings of doubt about such rebirth are
reborn in the borderlands.
Editor: na #1698
[fra-eng] augmentez $ 불어 incr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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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라니퀴즈
자비주 52 번째는?
성관자재보살 명호 22 번째는?
52
또 이 주문 외우고 지니는 자가
입으로 하는 말이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일체 천마(天魔)나
외도(外道)와 용과 신이 모든 귀신이 들으면
다 청정한 법음으로 듣게 되어
다 이 사람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리라.
● 사바하 娑婆訶<五十二> s vā hā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22
미아다녜볘 사
尾誐哆禰吠<二合引>灑<二十二>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 삼매_게송퀴즈
■ 오늘의 게송
[130일째]
이시 $ 001▲● 십 ○□□,白,諸,阿,世
□□,心王菩薩 白佛言:「世尊!
諸佛如來 演說 阿僧祇 無量、無邊、無等、不可數、不可稱、不可思、不可量、不可說、不可說不可說。
□□, 심왕보살 백불언:「세존!
제불여래 연설 아승기, 무량、무변、무등、불가수、불가칭、불가사、 불가량、불가설、불가설불가설。
그 때 심왕(心王)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러 부처님 여래께서는 아승기고, 한량이 없고, 그지없고, 같을 이 없고, 셀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음을
연설하시나이다.
[131째]
세존 $ 002▲● 백 ○□□,云,何,阿,佛
□□, !
云何 阿僧祇 乃至 不可說不可說耶?」
□□,!
운하,아승기 내지 불가설불가설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아승기라 하오며,
내지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다 하시나이까?”
●K0953_T1559.txt★ ∴≪A아비달마구사석론≫_≪K0953≫_≪T1559≫
●K0952_T1545.txt★ ∴≪A아비달마대비바사론≫_≪K0952≫_≪T1545≫
●K0944_T1544.txt★ ∴≪A아비달마발지론≫_≪K0944≫_≪T1544≫
법수_암기방안
1 빗장뼈[=쇄골]
2 염통 【심장】
52 눈 eye 眼 【안】
22 엄지 첫마디 [ 썸 넉클 THUMB knuckle]
308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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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fr
○ 2020_0930_135941_can_ori_rs
○ 2020_0910_112956_nik_ori_rs
™善現智福 키워드 연결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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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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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095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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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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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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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back--불기2565-05-10_아비달마대비바사론_K0952_T1545-tis.htm
● [pt op tr] fr
한 귀로 듣고
또 한 귀로 흘려 보낸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자신이 일으킨 탐욕을 추구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인다.
이 경향은 그가 관 속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멈추지 않는다.
또 한 귀로 흘려 보낸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자신이 일으킨 탐욕을 추구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인다.
이 경향은 그가 관 속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멈추지 않는다.
사람은 대부분 100 년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이 언제까지 살다가 죽을 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런 가운데 매순간 위 자세로 임한다.
그래서 죽기 바로 직전까지도 위 자세를 변경시키지 않는다.
위 논서 내용이 설득력이 없게 여겨지는 것이 한 원인이다.
그래서 간단해 보이는 내용을 놓고
논사들이 자세히 설명을 덧붙여 이해시켜야 할 사정이 있다.
지금 수행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갖고 있는 욕심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이 질문은 생사현실에 임한 누구에게나 매순간 던져지는 시험문제와 같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들여다 보아야 한다.
★1★
◆vmqa6617
◈Lab value 불기2565/05/10 |
○ 2018_0419_140451_can_exc.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enoir the-path Artist: Pierre-Auguste Renoir https://en.wikipedia.org/wiki/Pierre-Auguste_Renoir Title : the-path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 2020_0606_194122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entau_Pic_du_Midi_Ossau English: Lake Gentau reflecting the Pic du Midi d'Ossau (Pyrénées-Atlantiques, France). Author Myrabella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Wat Suwannaram วัดสุวรรณาราม ,Thailand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Flag of Thailand.svg This is a photo of a monument in Thailand identified by the ID 0000154 (Thai Fine Art Department's link) Date 16 August 2015, 01:12:54 Source Own work Author กสิณธร ราชโอรส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Accordeon De L'amour - La Valse De L'amour ♥단상♥깁스이론과 인과 순환 눈이 안 좋다. 그런데 왜 눈이 안 좋아진 것인지 생각해본다. 우선, 눈이 깁스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제도 작업 중에 숙왕화님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눈이 안 좋다고 하면서 모니터를 뚫어지게 계속 바라본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그 자세로 하루 종일 계속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비록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안대를 차고 1 주일 계속 있는 상태와 마찬가지다. 다리에 깁스를 하고 1 달간 계속 있다고 하자. 그리고 깁스를 풀면 어떻게 되는가. 다리에서 부러진 뼈 등은 붙겠지만, 대신 다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한참 동안 물리치료를 다시 병행해 받아야 한다. 왜 이렇게 되는가. 그것은 현실에서 잠깐만 실험해보아도 사정을 알 수 있다. 앉은 다리로 한 시간 부동자세로 있다고 해보자. 그러다가 일어나려고 해보자. 그런 경우마저도 다리가 불편하다. 이것을 일주일 한달 계속하면 당연히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 또 깁스한 상태에서 운동을 하고 움직이기도 곤란하다. 그래서 부동자세이면서 그러나 운동을 하는 장점은 다 함께 결합시킬 방안을 찾아야 한다. 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제는 정려 수행을 하면서 계속 눈을 훈련시켰다. 처음에는 잘 안되었지만, 한참 하니 조금은 좋아짐을 느끼게 된다. 일정거리를 두고 모니터를 평소 대한다. 그런데 그 자세로 하루 종일 지낸다. 그런 자세만 조금 벗어나도 눈이 상당히 좋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시간을 내서 안과를 방문하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에 스스로 자구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위와 같은 내용이 수행 전반에서도 적용된다. 수행에 깁스자세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무량한 세계를 오가는 활동도 함께 병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여서 썩는 물이 된다. 그리고 수행한 내용은 현실에서 하나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5/2565-05-10-k0952-044.html#6617 sfed--아비달마대비바사론_K0952_T1545.txt ☞제44권 sfd8--불교단상_2565_05.txt ☞◆vmqa6617 불기2565-05-10 θ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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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ordeon De L'amour - La Valse De L'amour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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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n Clerc - Des Jours Entiers A T'aimer
Edith Piaf - Qu'il Etait Triste Cet Angl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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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bud] Therigatha
[san-chn] varṇa-saṃpanna 形色具足
[san-eng] indhana $ 범어 fuel
[pali-chn] avakāsa 光明處
[pal-eng]
[Eng-Ch-Eng] 天眼第一 Most eminent in terms of possession of the divine eye. A name given to S/a^kyamuni's disciple Aniruddha 阿那律.
[Muller-jpn-Eng] 超過 チョウカ exceed, go beyond, transcend
[Glossary_of_Buddhism-Eng] BORDERLANDS☞
See also: Longer Amitabha Sutra; Pure Land Buddhism (Summary).
“In Buddhist doctrine in general, these are places in a world system
where there is no opportunity to meet the Dharma because they are
isolated, far away from good teachers. In Sanghavarman’s translation
of the Longer Amitabha Sutra, the concept is extended to the Pure
Land, so that, as a type of world system, the Pure Land itself has its
own borderlands. In this usage, the borderlands are places in the Pure
Lands where living beings who have faltered in their faith will be reborn.”
Gomez: 286
People who have practiced during their lifetimes with devotion and
sincerity and should have earned rebirth in the Pure Land, but who,
on their deathbeds, develop feelings of doubt about such rebirth are
reborn in the borderlands.
Editor: na #1698
[fra-eng] augmentez $ 불어 incr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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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주 52 번째는?
성관자재보살 명호 22 번째는?
52
또 이 주문 외우고 지니는 자가
입으로 하는 말이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일체 천마(天魔)나
외도(外道)와 용과 신이 모든 귀신이 들으면
다 청정한 법음으로 듣게 되어
다 이 사람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리라.
● 사바하 娑婆訶<五十二> s vā hā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22
미아다녜볘 사
尾誐哆禰吠<二合引>灑<二十二>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 삼매_게송퀴즈
■ 오늘의 게송
[130일째]
이시 $ 001▲● 십 ○□□,白,諸,阿,世
□□,心王菩薩 白佛言:「世尊!
諸佛如來 演說 阿僧祇 無量、無邊、無等、不可數、不可稱、不可思、不可量、不可說、不可說不可說。
□□, 심왕보살 백불언:「세존!
제불여래 연설 아승기, 무량、무변、무등、불가수、불가칭、불가사、 불가량、불가설、불가설불가설。
그 때 심왕(心王)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러 부처님 여래께서는 아승기고, 한량이 없고, 그지없고, 같을 이 없고, 셀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음을
연설하시나이다.
[131째]
세존 $ 002▲● 백 ○□□,云,何,阿,佛
□□, !
云何 阿僧祇 乃至 不可說不可說耶?」
□□,!
운하,아승기 내지 불가설불가설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아승기라 하오며,
내지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다 하시나이까?”
●K0953_T1559.txt★ ∴≪A아비달마구사석론≫_≪K0953≫_≪T1559≫
●K0952_T1545.txt★ ∴≪A아비달마대비바사론≫_≪K0952≫_≪T1545≫
●K0944_T1544.txt★ ∴≪A아비달마발지론≫_≪K0944≫_≪T1544≫
법수_암기방안
1 빗장뼈[=쇄골]
2 염통 【심장】
52 눈 eye 眼 【안】
22 엄지 첫마디 [ 썸 넉클 THUMB knuck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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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現智福 키워드 연결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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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달마대비바사론_K0952_T1545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아비달마대비바사론』 ♣0952-044♧
[관련키워드]
제44권
■ 본 페이지 ID 정보
불기2565-05-10_아비달마대비바사론-K095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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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ed--아비달마대비바사론_K0952_T1545.txt ☞제44권
sfd8--불교단상_2565_05.txt ☞◆vmqa6617
불기256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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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back--불기2565-05-10_아비달마대비바사론_K0952_T1545-ti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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