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치지(治地) 보살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차수(叉手)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기이하고도 특별하나이다. 이제 유수(濡首)보살이 얻은 것과 최승(最勝)이 논한 형상이 없는 법과 도(道)에 언교가 없는 것을 들었사온데 아직 일찍이 듣지 못했던 바요 아직 일찍이 보지 못했던 바이옵니다. 곧 부처님 종자[佛種]를 잇고 끊이지 않게 했으며 또 불사(佛事)의 불가사의한 법을 행한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치지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너의 말과 같으니라. 억백천 겁으로부터 공을 쌓고 덕을 포개며 불사를 일으키고 드러내었으나 일찍이 닳아 없어진 일이 없었으며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면서 법은 이에 유포된 것이니라.” 이때에 유수가 나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고서야 법이 비로소 유포한다면 모든 법에는 어떤 모양[相貌]이 있어 유포한다고 하시옵니까?” 대답하셨다. “없느니라.” 또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래께서 출현하시면 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멸도를 취하게 하시옵니다. 이제 듣건대 여래께서는 중생에 한계를 정하려 하시온데 중생에 한계를 정하신다면 곧 멸도가 없게 되나이다.” 부처님께서 유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말하는 중생이 없다는 것이 중생이 있다는 말로 들리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있는 중생으로 하여금 중생이 없다고 하려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여래로 하여금 생기거나 소멸하거나 소굴이 있게 하려 하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만일 여래로 하여금 소굴이 없게 하려 한다면 어떻게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여 모두 멸도하게 하겠느냐?” 유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제 저는 4구(句)의 분별로 설명된 모든 법의 총지를 다 얻어 그 본성품[本性]을 찾아보면 생기는 것도 없고 소멸하는 것도 없으며 생사도 보지 않고 또 열반도 없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 때문에 한이 없는 중생이 멸도를 취해야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유수에게 말씀하셨다. “다하고 다함이 없는 데서 법계는 본래부터 청정하고 이치를 깨달아 알기 때문에 집착이 없다고 일컬으며, 문자를 앎으로써 뜻도 없고 생각도 없고 또한 식의 집착[識着]도 없거늘 어찌 식의 생각[識想]으로 말미암아 모든 지혜를 분별하겠느냐? 중생이 청정한 줄 깨달아 알면 사람의 본성품은 다할 수 없는 것이니, 나는 이제 너에게 이치를 분별해 주겠노라.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서 잘 생각할지니라. 보살의 대승은 불가사의하나니, 이는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니라.” 유수가 가르침을 받잡고 즐거이 듣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유수에게 말씀하셨다. “형상이 없는 식[無形之識]과 깨달아 앎이 없는 식[無覺知識]과 생각과 기억이 없는 식[無想念識]과 꿈ㆍ 요술ㆍ허깨비의 식[夢幻化識], 그것으로써도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고 섭수하게 되며 혹은 어떤 부처님 국토에서는 문자로써 교화하되 문자는 성품이 공(空)하고 고요한 것인 줄 아느니라.
여기서 상방(上方)으로 7만 6억 아승기의 국토를 지나서 거기에 부처님 국토가 있는데 이름은 안적(安寂)이며, 부처님 명호는 묘식(妙識) 여래ㆍ지진ㆍ등정각ㆍ명행성위ㆍ선서이시며 10호를 완전히 갖추셨느니라. 그 국토의 중생은 모든 근(根)이 두루 갖추어지고 본원(本願)을 익히기 좋아하여 누실(漏失)한 바가 없으며 중생이 교화를 받을 적에는 잠을 자게 되어야 깨칠 수 있느니라. 오직 여래만은 고요한 정의(定意)에 들어가서 중생의 근기를 따라 방편을 나타내어 잠을 주무신 것같이 할 뿐이니 가령 설법을 하시려 하면 곧 스스로 오른 겨드랑을 땅에 대고 다리를 서로 포개시는데 중생들이 그것을 보고는 모두가 여래를 본받아 오른 겨드랑을 땅에 대고 다리를 서로 포개면서 모두 다 잠을 자느니라.
이때에 그 부처님은 잠을 자는 가운데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신식(神識)으로 설법하시게 되는데 혹 보시를 말씀하여 세 가지 생각[想]을 제거시키기도 하고, 혹 지계를 연설하여 덕향(德香)이 멀리 퍼지게 하기도 하며, 혹 인욕을 말씀하여 뜻을 항복받아 일어나지 않게 하기도 하고, 혹 정진을 연설하여 게으름을 제거시키기도 하며, 선정을 연설하여 식(識)이 내닫지 않게 하고, 지혜를 널리 펴서 어리석음을 닫아 막기도 하며, 선권(善權)을 수행하여 종류에 따라 집착이 없고, 네 가지 법문(法門)을 궁구하고 드날리되 걸림이 없기도 하시나니 식의 높고 낮음에 따라 그 교법을 연설하고 대소(大小)를 따라 연설하여 정법을 가르쳐 주시느니라.
때에 그 여래는 다시 4비상(非常)의 지혜와 고(苦)ㆍ공(空)ㆍ비신(非身)ㆍ무아(無我)의 법을 연설함으로써 점차로 그들을 위하여 37도품(道品)의 가르침인 4의지ㆍ4의단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의ㆍ8현성도를 연설하며, 정의(定意)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충분히 드날리느니라.
그때에 꿈속에서 교화를 받는 식(識)이 도의 자취를 이루려면 곧 그 꿈속에서 식이 도를 받아 이루어야 하며, 빈래(頻來)와 불환(不還)과 무착(無着)의 도(道)에 이르기까지 역시 그와 같이 하며, 각기 부처님의 취증(取證)에서도 역시 또 꿈에서 식이 들판에 있으면서 스승 없이 스스로 깨치고 잠을 자는 가운데서 몸이 황금빛이 되고 온갖 상호가 스스로 장엄되며 발우가 허공을 날고 18변(變)을 짓느니라. 또 꿈속에서 몸 위로는 불을 뿜고 몸 아래로는 물을 내며 허공에서 앉고 눕되 걸림이 없으며, 무위(無爲) 열반의 경지에 들고자 하면 역시 꿈속에서 결가부좌하여 무여열반에서 반열반하기 때문에 몸은 돌과 같아 깨달아 아는 바가 없게 되고 중생들은 도로 깨어난 뒤에 저마다 언설이 없이 곧 꿈에서 식의 집착[識着]으로 사리를 취하여 사유(耶維: 闍維)하게 되느니라. 보살의 수결(受決)과 이에 성불하기까지 모두가 꿈속에서 수왕(樹王) 아래 앉고 땅은 황금빛이 되며 악마를 항복받고 한량없는 복이 갖추어지며 몸에는 32상(相)과 80종호(種好)가 있고 자마금(紫磨金) 빛의 광명이 멀리 비추느니라. 꿈속이 이와 같으면 깨어서도 곧 몸은 황금빛이요 온갖 상호가 완전히 갖추어지며, 신족 변화도 걸리는 바가 없고 언교나 음향이나 왕래가 없으며, 제도하는 바가 있으려 하면 모두 다 꿈속에서 바깥의 형상을 빌리지도 않고 제도하는 바가 있느니라.
유수야, 알아야 하느니라. 중생의 근원은 깨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동일하지 않으나 모든 부처님의 권화(權化)와 그 지혜는 방소가 없느니라. 혹 어떤 부처님 국토에 지대(地大)가 이루어지면 지계(地界)의 중생들이 헤아릴 수 없고 여래는 그것에 들어가서 그들을 교화하여 모두 중생으로 하여금 무여열반의 경계에서 반열반하게 하며, 혹 어떤 부처님 국토에 수대(水大)가 이루어지면 수계(水界)의 중생들은 헤아릴 수 없고 여래는 그 곳에 들어가서 그들을 교화하여 모두 중생으로 하여금 무여열반의 경계에서 반열반하게 하느니라. 혹 어떤 부처님 국토에 화대(火大)가 이루어지면 화계(火界)의 중생들이 헤아릴 수 없고 여래는 그 곳에 들어가서 그들을 교화하여 모두 중생으로 하여금 무여열반의 경계에서 반열반하게 하며, 혹 어떤 부처님 국토에 풍대(風大)가 이루어지면 풍계(風界)의 중생들이 헤아릴 수 없고 여래는 그 곳에 들어가서 그들을 교화하여 모두 중생으로 하여금 무여열반의 경계에서 반열반하게 하느니라. 혹 어떤 부처님 국토에 공대(空大)가 이루어지면 공계(空界)의 중생들이 헤아릴 수 없고 여래는 그 곳에 들어가서 그들을 교화하여 모두 중생으로 하여금 무여열반의 경계에서 반열반하게 하며, 혹 어떤 부처님 국토에 식대(識大)가 이루어지나니 이른바 안적(安寂) 불국토의 묘식(妙識)여래는 식신(識神)이 통달하여 꿈속에서 가르침을 받아 멸도를 취하게 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유수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북방(北方)으로 70억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부처님 국토를 지나가면 거기에 부처님 국토가 있나니 이름은 심요(深要)이고, 부처님 명호는 범혜(梵慧) 여래ㆍ지진ㆍ등정각으로서 10호를 완전히 갖추셨으며, 그 나라의 중생들은 모두가 서원을 세워서 그 국토에 나는데 모두 동일한 이름이어서 접식(接識)이라 하느니라.
유수야, 알아야 하느니라. 그 국토의 중생은 모두 다 신통이 있고 마음으로 생각하면 그 형상이 따라오되 걸림이 없느니라. 이른바 접식이란 큰 서원을 세워서 모든 신식(神識)이 나는 문[生門]에 나아가 포태의 형상을 받아야 할 때는 반드시 신족으로써 허공을 왕래하고 신식에 접(接)하여 머물러야 하며, 변화로 멸도하지만 4대를 받지 않나니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발타화(颰陀和) 등의 여덟 보살이 그들이니라.
여기서 동남방(東南方)으로 140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국토를 지나가 부처님 국토가 있으니 이름은 범음(梵音)이요, 부처님의 명호는 태진(胎眞) 여래ㆍ지진ㆍ등정각으로서 10호를 완전히 갖추셨으며, 그 국토의 중생은 여섯 가지 신통이 맑게 사무쳤고 동일한 색상(色相)인데 이들은 서원으로 말미암아 그 국토에 난 것이니라. 이른바 태진(胎眞)이란 큰 서원의 마음을 일으켜 모든 신식이 어머니의 태(胎) 안에 있을 적에 신족으로써 태에 들어가 교화하기를 원하면 그 어머니로 하여금 나[我]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곧 태 안에서 무위(無爲)에 건너가 열반에 이르나니,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보적동진(寶寂童眞)과 치지(治地) 보살이 그들이니라.
여래의 권화(權化)는 신통변화가 견줄 데 없어 억백천의 부처님 국토를 손바닥 안에 다 안전하게 두었다가 다시 본래 있던 데로 돌아가게 해도 깨달아 아는 이는 없나니, 허공 법계는 불가사의하느니라.
유수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행해야 할 자취이니 이는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니라.
▸ 미세한 식[微識]을 분별하여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저마다 제도될 수 있게 하고, 혹 텅 비어 없고[虛無] 공하여 없는[空無] 법과 내가 없고[無我] 남도 없으며[無人] 오래 사는 것도 없고[無壽] 목숨도 없다[無命]는 것과 생기거나 소멸하지도 않는 법[不起滅法]을 연설하느니라.◂
유수야, 만일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크게 서원하는 마음을 일으켜 시방 세계의 벽지불과 아라한이 그 안에 가득 차게 하고서 저마다 도(道)를 이루어 마음이 퇴전(退轉)하지 않게 한다면 그 복이 과연 많겠느냐?”
유수가 대답하였다. “매우 많고 매우 많겠나이다. 천중천(天中天)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어떤 보살이 형상이 없는 법으로써 식을 위하여 연설하거나 혹 무상ㆍ고ㆍ공ㆍ비신(非身)과 공ㆍ무상ㆍ무원을 연설하거나 낱낱이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고 지니고 다닐 수 없음을 분별하면 이야말로 식을 교화한[化識] 것으로 그 복은 한량없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유위의 4대는 차가월라(遮迦越羅)가 겪고 지낼 바이거니와 무위의 4대는 영원히 고요하여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께서 연설한 법이며 이런 방편으로써 미세한 식은 적막하고 법성은 가르침이 없어 헤아릴 수 없느니라. 유위는 모양[相]이 있거니와 무위는 모양이 없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유위를 여의지도 않고 무위를 여의지도 않으며, 또한 다시 이것을 익히고 이것을 버린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니 형상이 없는 가르침에는 이런 가르침도 없느니라. 이것은 바로 범부의 법이요 이것은 바로 현성의 법이며, 이것은 바로 학의 법[學法]이요 이것은 바로 무학의 법[無學法]이며, 이것은 바로 성문의 법이요 이것은 바로 연각의 법이며, 이것은 바로 보살의 법이요 이것은 바로 부처님의 법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유수에게 말씀하셨다. “여래가 강설한 바 식(識)을 위한 설법에는 모든 법을 보지도 못하고 또한 법이라는 생각[法想]도 없으며 텅 비고 공하여 형상도 없고 또한 볼 수도 없거니와 어리석고 미혹된 범부가 여러 가지 채색으로써 허공에다 천ㆍ용ㆍ귀신과 팔부(八部)의 형상을 그리고자 한다면 이 사람이 하려는 일은 과연 할 수 있는 것이냐?”
유수가 대답하였다. “매우 하기 어렵고 매우 하기 어렵나이다. 천중천이시여, 일찍이 없었던 일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네가 말한 바와 같으니라. 모든 법은 작용[數]이 없고 여래가 교화하는 바도 역시 작용이 없으며, 모든 법은 형상이 없는지라 곧 둘이 없느니라. 유수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형상이 없는 법에 처소가 있겠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유수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알아야 하느니라. 부처님 법은 수효도 없고 말도 없고 가르침도 없어서 모두 다 있는 바가 없느니라.” 그때에 유수가 나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까 듣자오니 세존께서는 모든 법은 모양도 없고 또한 형질도 없다고 하시면서도 여래는 만물을 크게 가엾이 여기면서 살펴 주지 않으심이 없사온데 어찌하여 다시 ‘중생을 깨우쳐 교화하면서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합니까? 이 법은 유루요 이 법은 무루이며 이 법은 현재요 이 법은 과거이며 미래이다’라고 말씀하나이까?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이것은 세간을 제도하는 법이요 이것은 세간을 제도하는 법이 아니며, 집착이 있는 것이요 집착이 없는 것이며, 명칭이 있는 것이요 명칭이 없는 것이며, 수효가 있는 것이요 수효가 없는 것이며, 이것은 생사의 법이요 이것은 열반이다’라고 하시옵니까?
어찌하여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모양이 없고 또한 형질이 없다’라고 말씀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유수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네가 묻는 바와 같으니라. 삼승의 모든 법과 삼세와 6도와 세간의 생사를 제도하는 것과 유위ㆍ무위와 유위도 없고 무위도 없는 것과 집착이 있는 것, 집착이 없는 것과 명칭이 있는 것, 명칭이 없는 것과 수효가 있는 것, 수효가 없는 것과 유루와 무루와 37품과 공ㆍ무상ㆍ무원과 유위의 법으로부터 이에 무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것은 세속의 수[俗數]요 제일의(第一義)는 아니니라. 형상이 없는 법[無形法]이란 형용도 없고 음향도 없어서 볼 수도 없으며,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ㆍ지혜ㆍ선권(善權)도 모두 이것은 세속의 일이요 제일의는 아니며 멸하여 다한 열반만은 영원히 고요하고 쾌락이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유수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마땅히 그의 본성품을 찾아 다시 연설해야 하는 데에도 보응이 있느냐? 8난이란 음성을 제거하여 음향이 없다고 말하는 데도 보응이 있느냐? 중생을 빠짐없이 다하고 그 근원을 미루어 찾는데도 보응이 있느냐? 경전을 좇고 따르면서 결사(結使)를 제거하는 데에도 보응이 있느냐? 바로 여래께는 삼세에 염착하지 않고 바른 법으로 교화하되 일찍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는 데에도 보응이 있느냐? 바로 모든 법으로 하여금 보응의 결과가 있게 할 적에도 다시 다할 수 있느냐? 심식(心識)이 두루 돌아다니며 들고 나고 하되 막힘이 없을 적에도 다시 다할 수 있느냐? 혹 권혜(權慧)를 이행하되 애욕(愛欲)을 좇고 따를 적에도 다시 다할 수 있느냐? 위의와 예절을 따르면서 범하지 않을 적에도 다시 다할 수 있느냐? 삼승의 교화로 모두 충만하게 할 적에도 다시 다할 수 있느냐? 법의 근본을 사유하면서 총지를 버리지 않을 적에도 다시 다할 수 있느냐? 모든 법의 장구(章句)가 청정한 줄 환히 알고 미묘한 법의 장구가 분명한 줄 깊이 알며 4의지(意止)와 모든 부처님의 정의(定意)를 관할 적에도 다시 다할 수 있느냐? 의단(意斷)을 분별하되 버리거나 여읜 일이 없고 법을 끝없이 연설하면서 어렵게 여의지 않을 적에도 다시 다할 수 있느냐? 신족이 걸림이 없어서 산이나 하천이나 석벽(石壁)을 통달하되 막힘이 없을 적에도 다시 다할 수 있느냐? 5근(根)을 낱낱이 분별하면 성전(聖典)이 아니고 이것은 외도인가? 막고 무너뜨릴 수 있으면 다시 다할 수 있느냐? 여래의 거룩한 힘[神力]으로 말과 바른 법을 자세히 살피면서 의심이나 옳다 그르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7각의(覺意)의 꽃으로써 스스로 영락(瓔珞)하고 대중에 처해 있을 때는 겁내거나 나약하지 않으며, 37현성의 도[賢聖之道]를 논설하여 영원히 외도의 삿됨을 여읠 적에도 다시 다할 수 있느냐? 역순으로 정수삼매를 강설하고, 혹 또 명(名)ㆍ신(身)ㆍ구(句)의 뜻을 분별할 적에도 다시 다할 수 있느냐? 고(苦)ㆍ습(習)ㆍ진(盡)ㆍ도(道)와 지극한 도의 인봉[至道印封]과 32상이 서로서로 과보를 받을 적에도 다시 다할 수 있느냐?”
유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형상이 없는 가르침이라 다할 수 없사오며 모든 유위의 법은 모두 이것은 손모(損耗)되고 줄거니와 무위의 열반은 다할 수 없나이다.”
그때에 최승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열반[泥洹], 열반, 하시는데 어떤 것이 열반이옵니까?”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이른바 열반이란 쉰다[息]는 것이니라.” 또 여쭈었다. “어떤 것을 쉰다고 하나이까?”
대답하셨다. “함이 없고[無爲] 한적하고 고요한[閑靜] 것이니라.” 또 여쭈었다. “어떤 것을 함이 없다 하오며 어떤 것을 한적하고 고요하다 하나이까?” 대답하셨다. “생각이 소멸하면[想滅] 한적하고 고요한 것이요 식이 정지하면[識停] 함이 없는 것이니라.”
또 여쭈었다. “공(空)한 것이 아니옵니까?” 대답하셨다. “공한 것이 아니나 공한 것이니라.”
또 여쭈었다. “공한 것이 아니나 공하거늘 어떻게 식이 정지하나이까?”
대답하셨다. “공한 것이 아니나 공한 것이니라.”
그때에 최승보살은 갑절 더 의심을 내고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아까는 두 가지 일[事]을 물었사온데 그렇게 대답을 똑같이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그만두어라, 족성자야. 여래의 대답에서 공(空)의 성품이 똑같다고 말하지 말라. 다만 족성자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니라. 나는 이제 너에게 공이 아닌 공[非空空]의 뜻과 식(識)이 맑고 고요한 것을 묻겠으니 너의 변재에 따라 낱낱이 대답하여라.
족성자야, 어떤 것이 공이 아닌[非空] 뜻이냐?”
아뢰었다. “모든 법에는 작용[數]이 없고 작용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족성자야.”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어떻게 식(識)이 정지하고 맑고 고요하냐?”
최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모두 다 일어나지 않는[不起] 데로 돌아가되 일어남이 있지 않는 것도 아니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족성자야.”
그때에 최승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온몸을 땅에 던져 발에 대고 예배하고는 잠깐 동안 물러났다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스스로 자세히 살피건대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에 지나침이 있사옵니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미치지 못함[不及]을 가엾이 여기시고 용서하시어 알기 쉽게 연설하셔서 영원히 어리석음과 미혹함을 제거하여 주소서.”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법에는 약간의 것도 없나니 오직 그 근본만을 이해할 뿐이니라. 향산(香山)에 가지 하나가 만 길[萬尋]이 되는 나무가 있는데 거꾸로 구부러져서 땅으로 들어가야 열매가 비로소 익게 되는 것이 있느니라. 열매란 마땅히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나 반대로 땅으로 들어가 있으니, 너의 지금 소견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나는 너에게 공(空)을 물었는데 이에 유(有)로써 대답하고 있으니, 그 과일나무와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내가 너를 위하여 낱낱이 분별하리니 잘 생각해야 하느니라.” 대답하였다. “그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라[非] 하면 공도 아니니라. 모든 법은 다 아니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니, 아니라 하면 모든 법의 이름이니라. 이름이 있으면 곧 공이 아닌 것이니 아닌 것을 알면 공한 데로 돌아가기 때문에 공이 아니라[非空]고 하느니라. 이른바 식(識)이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라. 어찌하여 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냐? 세간에 물들지 않으면 이것은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공에 있되 맑고 고요하면 이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느니라. 식은 이것을 버리고 저것에 나아가는지라 이것은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 생사의 언덕에 쭈그리고 앉아 중생을 돌보면서 가엾이 여기니 이것은 없는 것도 아니라[非無]고 하느니라. 변화로 된 몸[化身]으로써 시방 세계에 가득 채우되 변화와 교화[化化]는 공하고 고요한지라 이것은 있지 않은 것이라 하며, 하나의 식[一識]이 감화(感化)되고 변화로 모두 설법하나니 이것은 바로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느니라. 여래는 정(定)에 들어가서 몸과 마음이 고요하여 억천 나술(那術)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수(數)의 겁을 지나면서도 일어나고 없어졌다는 생각[起滅想]이 없는지라 이것은 바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다시 정으로부터 일어나 중생을 접하고 제도하여 무위(無爲)에 이르게 하는지라 이것은 바로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느니라. 어떠하느냐? 최승아,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낱낱이 있는 것이 아닌 것과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분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진공(眞空)이요 열반의 뜻이겠느냐?”
최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공(空)하고 진실[實]한 것이라 공한 열반이요 진실한 열반이옵니다.”
▸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그만두어라. 족성자야, 이것은 공도 아니요 또한 열반도 아니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모두가 세속으로 말미암아 임시로 붙인 이름이요 권도로 속인[權詐] 문자로써 서로 전(傳)해진 것이니,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느니라.
법성의 경계는 모두 단서가 없고 이름의 법조차 없거늘 어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겠느냐? 높거나 낮은 것을 덜어 버리면 옳다 그르다는 마음이 없으며, 욕심과 성내는 마음이 없고 무명(無明)을 알면서 무명의 마음이 없으면 5개(蓋)의 모든 속박이 하나[一]임을 분명히 알게 되고 또한 하나인 것도 보지 않나니, 이것을 바로 공이라 하고 이것을 바로 열반이라 하느니라.”◂
그때에 최승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훌륭하시고 훌륭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공한 성품의 법과 열반의 경계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함을 말씀하셨사온데 실로 짝할 이가 없사옵니다.” 이 법을 연설하실 때에 6만의 비구는 본래의 원이던 성문(聲聞)에서 뜻을 대승으로 돌려 모두 불퇴전을 얻었고, 11나술(那術)의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이 다 믿음을 다한 행[盡信行]을 얻었으며, 다시 다른 지방의 8십천 보살은 모두 다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다.
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공한 성품[空性]을 알고 열 가지 일[事]의 행이 있으면 멸도에 이르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 모든 부처님 세존은 항시 법계에 머무르면서 도지(道智)를 버리지 않고, 둘째 모든 부처님 세존은 온갖 것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대비를 버리지 않으며, 셋째 행한 바가 서원과 같고 그 중간에 어긋남이 없으며, 넷째 모든 중생을 제도하되 모든 근(根)이 순숙(純淑)하며, 다섯째 모든 부처님 세존은 모든 법은 공하여 아무 것도 없다고 관하여 알며, 여섯째 모든 부처님 세존은 지혜로 3독 등의 부분은 역시 있는 바가 없다고 분별하며, 일곱째 모든 부처님 세존은 모든 법계에 더함과 덜함을 일으키지 않고, 여덟째 마음을 내어 배움을 일으키되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아홉째 여법(如法)한 성품을 알고 본제(本際)를 버리지 않고, 열째 모든 부처님 세존은 모든 도법(道法)은 한 모양[一相]이요 모양이 없음[無相]을 행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족성자야, 보살마하살이 공한 법성을 아는 것으로 이 열 가지 법을 닦으면 열반에 이르게 되느니라. 또 보살마하살은 여섯 가지 신통을 수행하여 공한 법계에 이르는 열 가지 일의 행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 과거를 다 관하되 지혜의 광명[慧明]을 잃지 않고, 둘째 미래를 다 관하되 지혜의 광명을 잃지 않으며, 셋째 현재를 다 관하되 지혜의 광명을 잃지 않고, 넷째 5취(趣)의 중생을 관하여 모두 그 근원을 관하여 지혜의 광명을 잃지 않으며, 다섯째 온갖 세간의 나는 것[生者]과 멸하는 것[滅者]을 관하여 지혜의 광명을 잃지 않고, 여섯째 온갖 중생의 유(有)로부터 생기고 유로부터 멸하는 것을 관하여 지혜의 광명을 잃지 않으며, 일곱째 온갖 중생이 무(無)로부터 생기고 무로부터 멸하는 것을 관하여 지혜의 광명을 잃지 않고, 여덟째 도의 마음[道心]이 견고하여 중생을 버리지 않아 지혜의 광명을 잃지 않으며, 아홉째 이것은 제도할 수 있다, 이것은 제도할 수 없다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야 지혜의 광명을 잃지 않고, 열째 법계의 근문(根門)은 이지러지지 않음을 이해해야 지혜의 광명을 잃지 않는 것이니라. 족성자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여섯 가지 신통을 닦아서 공한 법계에 이르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공한 법계에 이르려면 마땅히 열 가지 지혜[慧]를 닦아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 모든 중생의 여러 가지 마음과 여러 가지 행을 관하여 모두 다 아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지혜이니라. 둘째 모든 중생의 여러가지 마음과 여러 가지 과보[報]를 다 알며, 셋째 고요하여 말이 없는 것이 마치 무백 태자(務魄太子)와 같고 중생들이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를 다 알며, 넷째 모든 중생들의 다른 마음[異心]과 다른 행[異行]을 알아 부처님의 지혜로써 그들을 가르쳐 주며, 다섯째 오랜 옛적부터 법성을 닦되 연심(衍心)을 버리지 않고, 여섯째 중생을 안온하게 살도록 하고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데 머물게 하며, 일곱째 부처님의 거룩한 지혜로써 5취(趣)의 마음ㆍ뜻ㆍ식의 생각을 다 알고, 여덟째 말로 설명할 일이 있을 때는 대승을 버리지 않으며, 아홉째 부처님의 심식(心識)을 얻어 정의(定意)가 어지럽지 않고, 열째 제도하는 마음이 한량없으며 해탈에 처하지 않고 또한 다시 중생이 제도되는 것도 보지 않는 것이니라. 족성자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공한 법계에 이르는 데 닦는 열 가지 지혜이니라.”
27. 보살증품(菩薩證品)
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여섯 가지 신통을 타고 시방의 수없는 부처님 국토에 가서 모든 부처님 세존을 받들어 섬기며 공양올리고 한 부처님 국토로부터 한 부처님 국토에 이르러 중생들을 교화하되 겁내거나 나약하지 않으며, 부처님의 공훈과 덕행과 업을 찬탄하며 널리 시방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음향을 듣게 하느니라. 최승아, 행하는 바는 제도하지 않는 것이 없나니, 혹 신족으로써 혹 교계(敎誡)로써 하여 복전이 청정하고 3악취(惡趣)가 없으며, 영원히 삿된 부류를 버리고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를 가엾이 여기며, 이미 모든 도량(度量)을 초월하여 부처님의 도량[佛量]에 머무르고 사람들을 위하여 행복되게 하고 무위(無爲)에 편안히 있게 하나니, 백천 겁 동안 범행(梵行)을 청정하게 닦는다 하여도 5탁(濁)에서 한 번 행하는 인자한 마음[慈心]만은 못하느니라. 인자한 마음이란 그 복은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것인데도 세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세 가지 나쁜 업[三惡業]을 행하고 있나니, 몸의 세 가지[身三]와 입의 네 가지[口四]와 뜻의 세 가지[意三]인 그 법의 근본은 마땅히 3악도를 향해야 하고 당연히 그 과보를 받아야 되거니와 가령 모두 뜻을 한 군데로 쓰면서 이 경전을 읊고 외우면 현재의 법 가운데서 그 고통의 근원을 다하게 되느니라. 혹 어떤 보살이 생사에 염증을 내다가 이 경전을 만나 끝내 물러나지 않으면 다시는 생을 받아 어머니의 태 안에 있지 않게 되고 신식(神識)이 밝디밝아서 일찍이 착오되는 일이 없느니라. 대저 속박에서 풀리고 모든 결사(結使)를 청정하게 하려면 마땅히 부처님 법을 보호하고 지혜의 광명을 일으켜 드러내야 하느니라. 설령 다른 지방에서 백천만 겁 동안 바른 법을 받들어 행하고 그의 뜻을 널리 편다 하여도 이 국토에서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한 게송을 읊고 기억하고 그 의취를 분별한 것보다는 못하나니, 이것이 가장 으뜸가고 훌륭한 것이니라.
나는 묘락(妙樂)한 안명(安明) 부처님의 국토를 보았고 또한 영적(永寂)한 무량(無量) 부처님의 국토도 보았는데, 거기에는 근심 걱정이나 번뇌의 재난도 없고 또한 다시 복짓는 일도 하지 않느니라. 만일 여기에서 모든 결박(結縛)을 다하게 되면 곧 기특함이 그 나라에 난 것보다 더 수승하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5탁(濁)의 세간에는 온갖 고뇌가 만단(萬端)이요, 억천만 겁이 지난 때라야 부처님이 계시게 되며 중생들은 악행을 하고 성현은 뵙기가 어려우니라. 혹은 변두리 땅의 8불한처(不閑處)에 나기도 하고 혹은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에 있어 바른 법을 듣지 못하기도 하며 설령 부처님이 계신다 하여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나 능히 그 가운데서 부처님 법을 일으켜 드러내면 이것은 바로 기특한 일로써 비교할 데가 없느니라. 내가 지금 비록 삼계의 지존(至尊)이 되었으나 오히려 원(願)과 행(行)과 복(福)을 만족해 하지 않고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로 그 고통의 근원을 뽑나니, 고치기 어려운 중생들은 사(邪)에 물들어 온 지가 오래라, 갑자기 바른 가르침을 듣는다 해도 갑절 더 의심을 품을 뿐이니라.
오늘의 여래 요집(要集)을 만난 보살 대사들은 헤아릴 수 없이 법을 듣는다 해도 만족해 함이 없음은 마치 바다가 온갖 물의 흐름을 다 삼켜 버리듯 하므로 마땅히 그들을 위해서는 바르고 참된 부처님 도를 연설해야 되느니라. 제석ㆍ범왕ㆍ사천왕과 천ㆍ용ㆍ귀신ㆍ아수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ㆍ인비인 등이며 악마와 악마 하늘[魔天]들이 시방에서 구름처럼 모여 와서 이제 법을 얻어듣고 환히 크게 깨치는 것은 모두가 전세(前世)에 지은 복업의 소치이니라. 설령 내가 백천만 겁 동안 한 구(句)의 깊고 묘한 뜻을 널리 편다 하여도 이 지혜 법의 근본은 다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최승아, 보살 대사는 고행이 수없다 하여도 어렵게 여기지 않으며 설령 삼천대천세계가 동시에 겁소(劫燒) 때문에 타서 불이 범천(梵天)까지 이르렀을 적에 범부 중생으로서 아직 도적(道迹)을 밟지 못한 이가 이 바른 경전을 다른 부처님 국토에 있으면서 듣고는 자기 몸을 던지며 그 화재(火災)에 들어간다 하여도 안온하게 제도될 것이요 손상되지 않을 것이니라. 어느 때에 삼천대천세계에 불이 꺼지고 큰 홍수가 나서 그 물이 범천까지 이르면 다시 그 몸을 스스로 던져 수재(水災)에 들어간다 하여도 안온하게 제도되고 끝내 빠져 죽지 않을 것이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어느 때에 삼천대천세계에 물이 바짝 마르고 바람이 크게 불어 이에 범천까지 이르면 다시 스스로 그 몸을 던져 그 풍재(風災)에 들어간다 하여도 안온하게 제도되고 나부껴 떠돌지 않게 되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모든 부처님께서 위신력으로 옹호하시기 때문이니라. 만일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이 경전을 지니어 읊고 외우는 이면 현재의 세상에서 복을 얻고 고뇌를 만나지도 않으며 만일 업(業)에 나아가 범행(梵行)을 청정하게 닦으면 곧 현재의 세상에서 무위의 증득[無爲證]을 받게 되나니, 바로 지금 이자리의 신통 지닌 대사(大士)와 억백천 해(姟) 나술(那術)의 중생들은 이 경전을 널리 닦아야 이에 과증(果證)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이제 은근히 경전을 알기 쉽게 연설하노니 듣는 이는 제도되어서 악취(惡趣)에 이르지 않고 앞의 지조(志操)에 따라 알맞게 지혜를 알 것이니라. 불승(佛乘)을 향한 이는 뜻이 광대하고 끝이 없어 항상 중생을 가엾이 여기면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이에 부처님을 이루기까지 끝내 줄어들지 않을 것이요, 연각(緣覺)으로 향한 이면 끝까지 그 원한 바의 인연(因緣)으로 도(道)를 이루어 발우를 허공에 날리며 변화가 자유자재할 것이며, 성문(聲聞)을 원하는 이는 스승에게 묻고 받아 걸리는 바가 없고 모든 결박(結縛)을 끊으면서 번뇌를 다하며 도를 이룰 것이니라. 또 중생들은 마음과 뜻이 나아가는 바를 관찰하며, 혹 어떤 이가 뜻을 일으켜 도적(道迹)을 이루어야 될 적에 보살은 권혜(權慧)로써 다른 도에 나가도록 권유하며 점차로 인도하여 곧 아라한을 이룰 것이요,
혹 어떤 중생은 빈래(頻來)의 도를 이루어 다시 권혜로써 차례로 지도하여 곧 아라한이 되게 하며, 혹 어떤 중생은 불환(不還)을 이루어 다시 권혜로써 깨우쳐 교화하고 진취하게 하여 아라한을 이루게 하느니라. 혹 어떤 중생이 차례를 뛰어넘어 3도(道)를 이루지 못하면 보살은 권혜로써 배우는 이의 작은 절개[小節]와 진실하지 않음을 곧 유도하고 진취하게 하여 수다원을 이루도록 하고, 혹 어떤 중생은 이미 2도(道)를 이루고 다시 권혜로써 그 사람을 가까이 끌어들여 사다함을 이루게 하며, 혹 어떤 중생이 차례를 초월하여 취증(取證)하고 응진(應眞)을 받은 이면 보살은 권혜로써 그 사람이 이미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을 얻은 것을 관찰하고 다시 진취하도록 권유하여 연각의 도를 이루게 하느니라.” 그때에 여래께서 4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중생들이 있는 약간의 부처님 국토는 동일하지 않거니와 이를테면 연각이 되어 여래에게 국토[刹土]가 없다 하겠느냐? 그렇게는 관하지 말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전륜성왕은 10선(善)이 이미 갖추어진지라 차츰차츰 계승하여도 왕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니, 연각으로써 스스로 깨친 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부처님 법이 사라지고 다하여 혹은 한 겁(劫)이 지나고 백천 겁이 되기까지도 연각인 응진(應眞)이 불사를 행하였으면 부처님과 부처님이 서로 계승하게 된 것이라 모든 불사는 마침내 줄어들지 않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항상 권혜로써 중생을 깨우치고 인도하되 복이 서로 잇게 하여야 하며 중생을 돕고 인도하여 삼세의 우환을 여의고 영원히 고요한 데에 편안히 처하게 하여야 하느니라.” 그때에 최승보살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매우 기이하고 매우 특별하옵니다. 이것은 바로 이승이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원컨대 도(道)를 이루게 하신 증험을 듣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듣고 싶어하면 이제 너를 위하여 연설하겠노라.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 잘 생각하여라. 나는 옛날 도를 구한 것이 헤아릴 수 없었나니 처음 뜻을 일으켜서부터 공덕을 지어 지금 부처를 이루기까지 그 중간에 버린 몸[遺形]이 널리 퍼진 것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나의 옛날 증험은 큰 서원을 세우고 그 어떤 중생이라도 도근(道根)을 향하여 나아가게 했으며, 혹 다시 몸을 던져 3존(尊)에게 귀명하면 반드시 신통으로써 증험을 나타내어 그 사람에게 알려 주었으니 비단 내 몸만이 전생에 이런 원(願)이 있었던 것이 아니요 모든 부처님 세존의 서원은 모두가 동일하였느니라. 만일 중생에게 4향(向)과 4과(果)가 있으면 나도 역시 보고는 그 진실한 바를 밝혔고, 설령 그 앞 사람이 연각을 성취했으면 나도 또한 인연을 증험하여 스스로 깨달았으며, 만일 어떤 중생이 수왕(樹王) 아래 앉아 있으면 트인 방소의 50유순(兪旬) 안의 그 중간에는 악마나 악마 하늘들이 그의 끝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내가 증험한 바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族姓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아, 나는 오늘과 같이 몸을 나타내어 증험을 받고 널리 중생을 제도하지만 나[吾我]를 보지도 않고 심식(心識)이 환히 밝아 향할 바를 분별하며 불사를 시행할 것이요, 억백천의 수없는 부처님 국토를 두루 돌아다니고 왔다갔다하여 도(道)를 궁구하고 다한 이를 찾아서 항시 그 앞에 있되 경계의 진실함을 증명하느니라. 나는 옛날 무외불(無畏佛)의 세계에 노닐 때 거기의 대사(大士)들은 헤아릴 수 없었느니라. 혹 어떤 이는 뜻이 소승의 아라한[羅漢]을 향한 이도 있었고, 혹 어떤 이는 중도에 멈추어서 연각의 자리에 있기도 하였으며, 혹 어떤 이는 초월하여 뜻을 부처님 도에 둔 이도 있었느니라. 때에 나는 오로지 마음을 한 곳으로 써서 정삼매(定三昧)에 들어가 널리 중생들을 위하여 감히 증험을 삼았었느니라.
또 보살마하살아, 만일 어떤 이가 이미 수다원을 향하여 수다원을 얻었고 사다함을 향하여 사다함을 얻었으며 아나함을 향하여 아나함을 얻었고 아라한을 향하여 아라한을 얻었으면 나는 언제나 그 중간에서 과보를 이룬 것을 증험하면서 일찍이 법성의 근본을 잃지 않았었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삼천대천세계에 가 노니는데 믿음이 있거나 믿음이 없거나 받음이 있거나 받음이 없거나, 혹 어떤 중생은 믿음을 다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다시 법을 받든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혹 어떤 중생은 8해(解)의 동진행(童眞行)을 닦는 이가 있으면 나는 항상 그들에게로 가서 증험을 나타내어 그들로 하여금 도를 얻게 하였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신식(身識)이 청정한지라 더럽힐 수 있는 이가 없나니, 모든 중생으로서 삿된 업[邪業]을 품고 있는 이면 나는 역시 가서 이것은 사술(邪術)이라 오래도록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증험하였으며, 혹 또 땅이나 물이나 불이나 바람에 제사하면 나는 역시 그들에게로 가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알게 했으며, 또 여러 사도[郡邪]들이 범천(梵天)에 가서 나기를 외치면 다시 그들에게 가서 복이 다하면 본래 있는 데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권유하였느니라. 혹 어떤 이가 무색천(無色天)에 가 나서 한 겁 동안 수명을 누리고 마음을 언제나 오직 하나에만 쓰고 중도에 끊어짐이 없고자 하면 나는 때에 정(定)에 들어가 바르게 아는 정의[正識定意]로써 다시 그에게 ‘색(色)은 색이 있지도 않고 색은 스스로 있지도 않으며, 나의 색[我色]과 그 색[彼色]은 그것과 나는 형상이 없으며, 색에는 곧 색이 없거늘 어찌 나[我]가 있겠는가? 식(識)은 나의 식[我識]이 아니거늘 어찌 내가 있겠는가? 통(痛)ㆍ상(想)ㆍ행(行)의 법도 역시 그와 같다’라고 연설하느니라.” 그때에 최승보살이 나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훌륭하시고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증험을 나타내는 법의 가르침은 불가사의하여 이것은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는 미칠 바가 아닙니다.” 이때에 최승은 거듭하여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까 부처님 말씀을 받았사오나 무엇을 ‘색이 없다[無色]’ 하오며, 무엇을 무색이 된다 하십니까?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가엾이 여기셔서 알기 쉽게 연설하시어 영원히 중생들로 하여금 의심을 품지 않게 하소서.”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장하다. 족성자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무색정(無色定)을 설명하겠노라. 이른바 무색(無色)이라 함은 색(色)이 있지 않는 것이니라. 4대로 만든 물질[色]이 곧 색인데 거기에는 이런 물질이 없으므로 이에 무색이라 하느니라.
색에는 다섯 가지가 있어야 비로소 4대가 이루어지고 오직 형색(形色)이 없을 뿐이기 때문에 무색이라고 말하느니라. 통의 색[痛色]과 상의 색[想色]과 행의 색[行色]과 식의 색[識色]은 바로 범부가 지닌 5통(通)으로서는 볼 바가 아니며 오직 여래 아유안(阿維顔)보살만이 비로소 그 색을 볼 뿐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불퇴전 보살은 권방편을 가지고 적정(寂靜)정의삼매정수에 들어가 유상무상천(有想無想天) 위로 가서 거기의 미세한 식[微識]을 위하여 미묘한 법인 공ㆍ무상ㆍ무원과 6신(身)으로 법을 받되 생기거나 소멸이 없는 행을 연설하며, 점차로 그들을 위하여 나는 법[生法]과 늙는 법[老法]과 병든 법[病法]과 죽는 법[死法]을 연설하느니라. 이른바 난다[生]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태, 즉 생장(生藏) 아래 숙장(熟藏) 위에 있다가 4대가 이미 갖추어지면 곧 떠나야 하나니 전생에 선행이 있으면 마치 목욕하는 못[浴池]에서 노닐고 후원(後園)에서 구경하는 것과도 같거니와 전생에 악행을 쌓은 이면 마치 험한 골짜기를 오르고 가시나무 위에 누운 것과 같으니라.
또 식신(識身)이 나아갈 바와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은 오래도록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을 연설하여 그 가운데서 식신을 구제하여 깨칠 수 있게 하며,
오직 아란가란(阿蘭迦蘭)과 이와 같은 무리만 헤아릴 수 없이 많으므로 억천 나술(那術)의 모든 부처님이 그들 앞에 계시면서 각각 특수하고 매우 깊은 법을 나타내나 본식(本識)이 어리석고 미혹하여 마치 그릇이 뚫어져서 새는 것 같은지라 정법(正法)과 도품(道品)의 가르침을 받지도 못하고 1겁 또는 감(減) 1겁 동안 불에 타듯 바짝 말라 있으며, 이와 같이 억백천 나술 수의 겁 동안 불에 타듯 말라 있느니라. 혹 한 겁에 한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거나, 혹 한 겁에 두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거나, 혹은 한 겁 동안에 백천의 부처님, 억백천의 부처님이 출현하게 되셔야 이와 같은 무리들은 그러한 뒤에야 비로소 바른 가르침을 받느니라. 또 늙어 쇠모(衰耗)하는 법을 연설하느니라. 이른바 늙는다[老]고 하는 것은 모든 감관이 성숙하여져서 살갗이 축 늘어지고 얼굴이 쭈그러져 슬퍼하고 근심하고 신음하면서 4대를 싫어하게 되며, 다시는 한창 젊은 때의 영화로운 마음도 없게 되나니 이 법은 쇠모하여 오래 보존할 수 없느니라. 또 4대의 들쑥날쑥하는 지ㆍ수ㆍ화ㆍ풍을 연설하나니, 지가 수의 성품보다 뛰어나거나 수가 화의 성품보다 뛰어나거나 화가 풍의 성품보다 뛰어나거나 하여 서로서로 늘거나 줄거나 하면 곧 질병이 생기며, 혹 상처가 생기고 만 가지 병이 핍박하며 피고름이 흘러 넘쳐 볼 수조차 없느니라. 다음에는 무상(無常)하여 변하고 바뀌는 것을 연설하나니 마치 물 위의 거품이 한 번 생겼다가 한 번 사라지며 생기는 것도 저절로 생기고 사라지는 것도 저절로 사라지는 것과 같으며 생겨도 저절로 생기지 않고 사라져도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 무상의 신식[無想神識]은 곧 거기에서 그의 나아가는 바에 따라 저마다 과증(果證)을 얻고 무여열반의 경계에서 반열반하느니라.” 최승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아까 들었사온데 여래께서는 4대는 들쑥날쑥하여 신식이 사는 데서 지(地)가 불어나고 수(水)가 줄어들면 곧 질병이 생기고 수가 불어나고 화(火)가 줄어들면 곧 질병이 생기며, 화가 불어나고 풍(風)이 줄어들면 곧 질병이 생긴다고 하였나이다. 또 다시 들었사온데 부처님께서는 ‘풍이 불어나면 화가 줄어들고 화가 불어나면 수가 줄어들며 수가 불어나면 지가 줄어든다는 것과 식(識)은 4대가 아니요 4대는 식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나이다. 이제는 부처님께서 ‘한 대[一大]가 불어나면 세 대[三大]가 병이 나고 세 대가 불어나면 한 대가 병이 나며 4대가 완전히 갖추어지면 신식이 편안하게 되거니와 쇠퇴는 4대로 말미암아서요 식으로 생기는 바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사옵니다. 어찌하여 세존이시여, 병은 4대를 말미암아서거늘 식에서 생기게 되나이까?”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식은 4대가 아니요 4대도 식이 아니로되 식이 4대를 여의지 않고 4대도 식을 여의지 않느니라. 이 때문에 한 대[一大]가 불어나면 모든 대(大)에 병이 생기고 모든 대가 불어나면 한 대에 병이 생기는 것이니 식이 쇠퇴하여 줄어듦을 따르느니라.” 또 여쭈었다. “4대에 병이 나면 신식에도 병이 생깁니까?”
대답하셨다. “식(識)은 대(大)를 말미암아 병이 생기고 대는 식을 말미암아 병이 생기느니라.”
또 여쭈었다. “식은 4대를 말미암아 비로소 작용하는 것입니다. 몸을 버리고 형상을 받으면 4대는 저마다 돌아가버리는데 그 근본되는 신식이 어찌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여래 앞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구나. 나는 너를 위하여 낱낱이 분별하겠노라.
▸ 식은 형상이 없어서 볼 수도 없고 식이라지만 식이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대(大)로 인하여 식이 되는지라 4대가 모두 불어나면 곧 식에도 병이 있게 되나니 병은 4대가 아니요 식을 말미암아 생기니 온갖 병이 더하고 덜하는 것은 모두가 식을 말미암아 생기느니라.
처음 뜻을 일으켜서부터 이에 부처님을 이루기까지 신식에 때[垢]가 없으면 4대를 말미암지 않느니라.”◂
28. 해혜품(解慧品)
그때에 최승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보살마하살이 뜻을 지님이 견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사오며, 어떻게 하면 보살이 뜻을 지님이 참되고 성실하여 끝내 허망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보살은 한결같이 부처님 도를 향하고 이승에 나아가지 않게 되오며, 어떻게 하면 보살은 위의를 지니고 예절을 잃지 않나이까? 어떻게 하면 보살은 뜻으로 지켜 선정을 닦아 정수(正受)를 버리지 않으며 어떻게 하면 보살은 모든 부처님 법에 머물러 물러나지 않으며 어떻게 하면 보살은 교화에 머물러 가르쳐 주어 부처님 종자[佛種]를 끊지 않게 되옵니까?”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여래 앞에서 그런 뜻을 묻는구나.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알기 쉽게 분별하겠다. 잘 생각하여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즐거이 듣고자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법을 수행하면 의지(意志)가 견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 법인가? 첫째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김이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듯이 하고, 둘째 부지런히 정진을 더하여 게으르지 않으며, 셋째 모든 중생을 제도하되 요술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며, 넷째 모든 부처님의 협장(篋藏)을 궁구하고 연마하지 않음이 없나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이 네 가지 법을 수행하고 나아가 부처님 도를 이루되 일찍이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이니라.
보살은 다시 네 가지 법을 수행하여 곧 정(定)에 들어가고 현성의 잠잠함[賢聖黙然]을 얻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중생이나 중생이란 생각[衆生想]은 없는 줄 이해하고, 둘째 모든 세간을 관하되 좋아할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셋째 대승을 찬탄하고 칭찬하되 영원히 두 가지 도[道]를 여의고, 넷째 모든 고락(苦樂)에 대하여 우러러 바라는 바가 없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계율[戒]이요, 둘째 들음[聞]이며, 셋째 보시[施]요, 넷째 벗어남[出要]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부처님의 도에 이르기까지 의심이 없고 위의를 잃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이익이 없고, 둘째 손해가 없으며, 셋째 비방함이 없고, 넷째 칭찬함이 없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선근을 더욱 늘리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중생을 가르쳐서 믿음의 자리[信地]에 머무르게 하고, 둘째 사람들에게 베풀되 그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셋째 법을 말하되 법이라는 생각이 없으며, 넷째 보살의 명호는 헤아리거나 기억할 수조차 없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이 수행할 것은 1지(地)에서 10지에 이르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선근을 일으켜 드러내는 것이요, 둘째 어리석음을 제거하여 삿된 부류에 처하지 않으며, 셋째 선권(善權)으로 알맞게 교화하여 인도하되 견줄 데가 없는 것이요, 넷째 마음가짐이 용맹스러워 정진이 날로 더해지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선권방편으로 부처님 도에 이르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더욱 권유하여 삿된 부류에서 바른 도에 편안히 처하게 하고, 둘째 아직 깨치지 못한 이들을 교화하여 선취(善趣)로 향하게 하며, 셋째 설법에는 둘이 없되 받는 이는 높고 낮음이 있고, 넷째 부처님의 거룩한 지혜로써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제도하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위의가 성취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3유(有)에 물들지 않고 그것이 고(苦)임을 알며, 둘째 나와 그 사람의 고락(苦樂)은 다 함께 나눈다고 여기며, 셋째 항상 인욕을 행하여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넷째 위에 있을 때는 오만함이 없고 아래에 있을 때는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도의 마음[道心]을 버리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부처님을 염하는[念佛] 것은 공덕의 근본이고 둘째 중생을 편안히 처하게 하여 도의 마음이 견고하며, 셋째 선지식을 친근하여 사견(邪見)에 물들지 않고, 넷째 위로 대승에 이르러 허망한 소견[妄見]을 닦지 않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한적한 데에 있기 좋아하여 심란하고 시끄러운 데에 처하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소승을 향한 이는 대승에 이르게 하고, 둘째 연각(緣覺)을 이루어야 할 이는 정진하여 부처님 도를 이루게 하며, 셋째 법을 듣되 싫증을 내지 않고 도의 마음이 끊어지지 않으며, 넷째 들은 바대로 법에 인색함이 없는 것이니라.
또 보살이 행해야 할 네 가지 법이 있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불기법인(不起法忍)으로 모두 다 생멸이 없는 줄 아는 것이요, 둘째 무진법인(無盡法忍)으로 역시 양(量)에 지나침이 없는 것이며, 셋째 인연법인(因緣法忍)으로 연각의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요, 넷째 무주법인(無住法忍)으로 중생을 모두 알고 마음에 의착(猗着)이 없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어서 결사(結使)를 제거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오로지 한곳으로 마음을 쓰면서 오로(惡露)를 사유하고, 둘째 과거의 것은 영원히 소멸시키고 다시는 새로 짓지 않으며, 셋째 모든 법이 아주 분명하여 어두움에 처하지 않고, 넷째 마음은 백천(百千) 삼매에 유희하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4부 대중에 노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항상 스스로 법을 위하되 나[吾我]를 헤아리지 않는 것이요, 둘째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되 마음이 허망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 모든 선의 근본[善本]에서 한층 더 그의 덕(德)을 불리는 것이요, 넷째 소승을 버리고 여의도록 대도(大道)로써 인도하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법시(法施)와 재시(財施)로 무위(無爲)에 이르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받되 잘못되지 않는 것이요, 둘째 다른 이의 마음을 좇지 않는 것이며, 셋째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요, 넷째 뜻에 물러남이 없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보시하여도 보답을 생각하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저와 나[彼我]에는 형상이 없고 다 공(空)인 줄 분명히 아는 것이요, 둘째 행(行)은 바르고 참되게 위없는 도를 닦아야 하는 것이며, 셋째 내가 없음[無我]을 보고 치(癡)를 말미암아 애(愛)가 생김을 아는 것이요, 넷째 도의 성품[道性]은 가장 자리[際]가 없고 행은 진제(眞際)에 합치하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사람을 제도하되 한량없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은 생기거나 소멸하는 것이 없는 줄 아는 것이요, 둘째 자비를 행하여 널리 구제하되 성내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며, 셋째 모든 법을 불태워 버리는 것이요, 넷째 비록 5탁에 있으나 도의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도의 근본[道根]을 이루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항상 보시하는 것으로서 으뜸을 삼는 것이요, 둘째 다른 사람에게 정진하기를 권하되 간탐(慳貪)을 제거하는 것이며, 셋째 행(行)은 곧 공(空)에 합치하고 법에는 나[吾我]가 없는 것이요, 넷째 매우 깊은 법에 대하여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선정(禪定)에서 이지러지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중생에는 수(數)가 있다거나 수가 없다는 것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요, 둘째 부처님 국토에는 청정함이 있다거나 청정함이 없다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며, 셋째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가 세계에 두루 차게 하는 것이요, 넷째 부처님의 지혜가 두루 갖추어져서 본래 서원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부처님의 도량에 노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먼저 말하고는 뒤에 웃어도 사람들의 뜻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요, 둘째 말한 법대로 행하되 의당 바르고 참된 것이며, 세째 도(道)나 도가 없는 것을 알고 또한 소굴도 없는 것이요, 넷째 희망[望]이 있고 희망이 없는 것은 다 공(空)으로 돌아간 줄 아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행은 공에 합치되어야 하고 모든 부처님의 법에서 위없는 도를 닦는 것이라 하느니라.” 이 사사(四四)의 법을 연설하실 때에 2만 2천의 하늘 사람과 세간 사람들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일으켰고, 다시 1만 2천의 사람이 곧 그 자리에서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체득하였으며, 다시 수없는 시방의 천자(天子)들이 꽃을 뿌리고 공양올린 것이 무릎까지 찼다.
29. 삼독품(三毒品)
그때에 유수동진(濡首童眞)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지금 여래께서 말씀하신 네 법문의 지혜를 들었사온대 매우 깊고 미묘하여 근(根)을 세우고 힘[力]을 얻었나이다. 보살이 행하는 것은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이제 여래께 여쭙겠나이다. 미래와 중간과 초선(初禪)에서 사유하는 오로(惡露)의 부정관(不淨觀)은 자기 몸의 부정(不淨)한 것을 관하나이까? 다른 사람 몸의 부정한 것을 관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유수동진에게 말씀하셨다. “혹 어떤 보살이 아직 보살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으면 곧 자기 몸에서 오로의 부정한 것을 관하여 근을 세우고 힘을 얻는 것이며, 혹은 자기 몸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며, 다시 권혜(權慧)로써 몸의 더러운 악취와 피고름이 흘러넘치는 것을 나타내고 그 가운데서 수없는 중생을 깨우치고, 청정하다는 마음을 버리고 여의어 모두가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느니라. 또 유수야, 혹 어떤 보살은 미래지(未來地)에 있어 위로 중간을 닦되 아직 초선에 밝지 못한 이도 있고, 또 어떤 보살은 이미 미래를 여의고 중간에 머물러 있되 다시 권혜(權慧)로써 위로 초선을 닦으며, 혹 어떤 보살은 이미 미래와 중간의 정지(淨地)를 지나고 차례로 다시 초선을 닦아 익혀 5행(行)의 근본을 생각하고 지니되 드디어 다시 위로 2선(禪)의 법에 미치느니라. 혹 어떤 보살은 위의 4선(禪)과 미래와 중간을 버리고 초선과 제2선을 차례로 우러러 닦되 3선(禪)의 근본으로 기쁨과 평안을 스스로 지키느니라. 또 어떤 보살은 이미 3선을 여의고 다시 4행(行)을 버리며 제4선을 닦고, 다시 4선에서 오로의 부정관을 사유하느니라. 다시 어떤 보살은 7정(定)을 경유하지 않고 곧장 멸진정의(滅盡定意)를 체득하기도 하느니라. 혹 어떤 보살은 이미 영적삼매(永寂三昧)에 들어가서 세계에는 중생ㆍ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이 없고 생하는 것과 멸하는 것은 모두 있는 바가 없다고 두루 관하기도 하느니라. 혹 어떤 보살은 1지주(地住)에 있어 보살의 지위를 받고 3독의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분별하며, 권혜로써 알맞게 교화하되 중생의 마음에는 무명의 마음[無明心]이 있고 무명의 마음이 없다는 것과 애욕의 마음[愛欲心]이 있고 애욕의 마음이 없다는 것과 성냄의 마음[瞋恚心]이 있고 성냄의 마음이 없다는 것을 관하여 보살은 다 아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모든 법을 두루 관하여 생기는 것도 보지 않고 소멸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다시 모든 법에 마지막[畢竟]을 보지도 않고 마지막이 되지 않은 것도 보지 않나니 이와 같이 하면 모든 물음[問]에서 청정할 것이니라. 또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모든 속박과 집착[縛着]을 관하되 그 가운데에서 청정하기를 구하므로 마땅히 물어야 할 데서는 물어야 하느니라. 이 법은 영원히 고요하고 안온하여 변하거나 바뀜이 없는 법이라 생사가 청정하여 더럽거나 흐린 것을 보지 않나니 이것을 말하여 보살마하살의 남이 없는 이론[無生之論]이라 하고, 생사를 건너가도 건너감[度]이 있는 것을 보지 않나니 이것을 말하여 남이 없는 이론이라 하며, 열반은 형상이 없고 고요하고 함이 없나니 이것을 말하여 남이 없는 이론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만일 최승으로 하여금 모든 속박과 집착에서 모두 공(空)에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하면 생사에서 취증(取證)이 있는 것도 보지 않고 출생(出生)하고 기멸(起滅)하는 곳도 보지 않으며 또한 벗어나는[出] 것도 보지 않고 또한 열반도 보지 않나니, 이것을 말하여 보살의 남이 없는 이론이라 하느니라. 또 최승아, 인연이 모이거나 흩어지는 오로(惡露)는 깨끗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을 말하여 보살의 남이 없는 이론이라 하며, 친근하여 증득을 이루어 과(果)에서 물러나지 않고 번뇌를 끊는 지혜[斷智]가 걸림이 없으며 모두 생기지 않는[不生] 것을 아나니 이것을 말하여 보살의 남이 없는 이론이라 하느니라. 또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인연으로 합하여 흩어지는 것과 증득하여 물러나지 않는 것과 번뇌를 끊는 지혜가 걸림이 없는 것으로 영원히 3유를 여의나니, 이것을 말하여 보살의 남이 없는 이론이라 하느니라. 이에 모든 법의 선근이 끊어지지 않고 선(善)과 불선(不善)을 알며 이것이 세간의 법이요 이것이 세간을 제도하는 법이며, 이것이 장애되는 법이요 이것이 장애되지 않는 법이며, 이것이 유위의 법이요 이것이 무위의 법이며, 이것이 유루의 법이요 이것이 무루의 법이라 하나니, 이것을 말하여 보살마하살의 남이 없는 이론이라 하느니라. 또 최승아, 부처님의 상[佛像]은 형상이 없음을 사유하여 분별하고 또한 다시 법성의 여러 가지를 분별하며, 성중(聖衆)의 공덕은 헤아리기 어렵다고 사유하며, 차례로 중생은 하나가 아니라고 사유하고, 다시 세계는 동일하지도 않고 마음이 향하여 나아가는 바는 다 궁구하기 어렵다고 분별해야 하나니, 이것을 말하여 보살의 남이 없는 이론이라 하느니라. 또 최승아, 모든 법은 다 청정하며 모든 법은 다 청정하지 않나니, 이것을 말하여 보살의 남이 없는 이론이라 하느니라.” 최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찌하여 모든 법이 다 청정한 것이 바로 남이 없는 이론이며, 모든 법이 다 청정하지 않은 것이 바로 남이 없는 이론입니까?”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에는 식(識)이 없고 또한 행의 과보[行報]도 없으며, 모든 식이 있다는 생각은 법과 상응하나니 이것을 말하여 청정하다거나 청정함이 없다고 하느니라. 모든 법은 여러 가지 모양이요, 혹 모든 법은 아직 염지(念持)를 여의지 않은 것도 있나니, 곧 방편을 구하여 그 덕(德)을 더욱 늘리고 이미 그 덕이 늘어나면 모든 선(善)이 널리 갖추어지며 모든 선이 이미 갖추어지면 곧 들숨ㆍ날숨[出入息]을 세고 숨을 세는[數息] 것이 이미 안정되면[定] 이것이 바로 청정한 것과 청정하지 않은 것이니라.” 최승이 또 여쭈었다. “어떻게 모든 법이 안정하고[定] 안정하지 않은[不定] 것을 관찰하나이까?” 대답하셨다. “스스로 경계에서 영원히 떠나 욕심이 없으면 억만의 법에서 안정하고 안정하지 않은 뜻을 다 아느니라.” 또 여쭈었다. “안정하다고 함은 청정한 것이 아니고 청정함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거니와 안정하지 않다고 함은 청정한 것이 아니니, 곧 안정하고 안정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십니까?” 대답하셨다. “조금이라도 밝은[明] 것이 있으면 안정하고 안정하지 않은 뜻을 능히 이해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영원히 떠나되 욕심이 없고 억만의 법에서 안정하고 안정하지 않은 것을 아나이까? 안정하다 함은 이것은 바로 도(道)요 안정하지 않다 함은 도가 아니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너의 말과 같으니라. 만일 어떤 족성자나 족성녀가 모든 법의 경계에서 이미 안정하였고 지금 안정하며 아직 안정하지 못한 것을 알지 못하면 곧 모든 법에서 이미 해탈한 것과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마치 『향락경(香樂經)』에서 말한 바 ‘모든 법이 이미 안정하여 들으면서도 의심하지 않으면 곧 능히 위로 나아가면서 물러나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니, 들은 바 법 그대로 즐거이 익히면서 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바로 안정하고 안정하지 않은 뜻이라 하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이 안정하고 안정하지 않은 데에 의심을 내면 곧 한 지[一地]로부터 한 지에 이를 수 없으며, 차례로 건지(乾地)를 뛰어넘지 못하면 생사를 여의고 열반의 법에 머무르지도 못하나니,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 세존은 생사의 근본을 궁구하지도 않고 열반에 이르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항상 생사를 초월하여 열반에 편안히 계신다는 것을 연설하지 않았느냐?” 대답하였다. “그러하나이다.”
또 물으셨다. “세존이 모든 법에서 ‘이것이 바로 생사요, 이것이 바로 열반이다’라고 연설한 것을 들었느냐?”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족성자야, 모든 부처님 세존은 ‘생사는 하열한 것’이라고도 설명하지 않고 ‘열반은 뛰어난 것’이라고도 설명하지 않았느니라. 다만 족성자를 위해서일 뿐이니 생사와 열반이라고 말하면 곧 두 가지 식[識]이 있어 생사를 여의거나 열반의 언덕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공(空)에서 왕래하며 중생과 중생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열반과 열반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느니라. 왜냐하면 돌아다니며 생사에 처해 있는 것을 보지 않고 열반에서도 멸도를 얻는 것이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때에 최승보살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팔을 드러내고 무릎 꿇고 차수(叉手)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시고 훌륭하시옵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중생과 열반의 모양이 없다’고 하셨사오니 법설(法說)이나 의설(義說)이 바로 적연(寂然)한 데에 상응하여 생사와 열반을 보지 않사옵니다.” 그때에 자리에 있던 2, 700비구들은 유루(有漏)의 마음에서 해탈하여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다. 왜냐하면 생사를 분명하게 알면 생사가 없고 열반을 분명하게 알면 열반이 없으며, 또한 다시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고 또한 열반은 영원히 고요하다고도 말하지 않으며, 공한 성품[空性]의 법을 알면 생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열반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때에 자리 위에 있던 7백의 비구들이 은밀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과 발우를 거두어 가지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떠나가며 저마다 머리를 숙이고는 서로 두런거렸다.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고통을 겪으며 밤낮으로 힘쓰며 범행(梵行)을 닦는단 말이냐?” 혹 어떤 이는 말하기를 “열반이 있되 열반에는 멸도를 취하는 것이 없다”라고 하였고, 또한 “도(道)조차 있지 않거든 하물며 도를 이루는 이가 있겠느냐?”라고도 하였다.
30. 문니원품(問泥洹品)
그때에 최승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중생이 모든 법으로 하여금 나오게 하려 한다면 곧 도(道)와 등정각을 이루는 것조차 없거든 하물며 열반에서 도를 이루려는 것이옵니까? 이것은 옳지 못합니다. 열반은 성씨도 없고 또한 이름도 없거늘 어떻게 공(空) 가운데서 공을 구하겠나이까? 열반에는 하나조차 없거든 하물며 모든 법의 수효를 구하려고 하는 것이오리까? 세존이시여, 이 7백의 비구들은 여래에게서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의(法衣)를 입고 손에는 발우[應器]를 가지고 범행을 청정하게 닦았사온데 방편으로 물러나 범부의 자리에 있으면서 열반의 보금자리와 처소를 구하려 합니다. 마치 참기름이 제(醍)ㆍ호(醐)ㆍ낙(酪)ㆍ소(酥)에 두루 번지면 소가 곧 엉기게 되는 것처럼 생사와 열반도 역시 그와 같아서 궁극의 열반에 이른다 해도 모든 법의 모양은 없고, 열반의 큰 도[大道]에도 역시 끝이나 밑이 없는 것인데도 여러 미혹된 사람들은 헷갈려 온 지가 오래인지라 도리어 ‘열반에는 나고 없어지고 집착하고 끊는 것이 있다’고 하나이다. 오직 수행이 있는 사람으로서 정견(正見)을 지니고 행하는 이만이 모든 법에서 일어남이 있고 소멸함이 있는 것을 보지도 않고 모든 법에서 받는 것이 있고 버리는 것이 있다고도 보지 않사옵니다.” 그때에 최승보살은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7백의 비구들은 곧 법의 가르침을 듣고는 저마다 버리고 흩어져 갔사온데 장차 또 얼마의 세월을 지내야 제도되고 해탈하여 영원히 생사를 버리고 사견에 있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을 알고 싶느냐?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의심을 없애 주겠느니라.” 대답하였다. “그러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恒沙劫]을 지내야 한 부처님이 출현하시는데 이와 같이 하여 72억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수를 지내도 오히려 제도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억천만 겁이 되어야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시니 부처님을 만나기도 매우 어렵고 경(經)을 얻어 듣기도 어렵기 때문이니라. 오늘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은 대중 가운데 있어 도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연설하되 생멸과 열반이 없다는 법을 말하고 있는데 그 정법 가운데서 삿된 소견의 마음을 내었으니 태어나는 곳마다 항시 삿된 소견에 있고 바른 도에 있지 못하느니라. 마치 장부가 용맹스럽고 힘이 세며 견줄 데 없는 재주를 익숙하게 단련하지 않음이 없어서 6예(藝)를 빠짐없이 갖추고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성수(星宿)ㆍ재괴(災怪)를 모두 다 환히 통달하였으나 이 역사(力士)는 항시 허공을 무서워하여 몰래 스스로 꾀를 내어 사방으로 도망쳐서 허공이 없는 지경에 가 보려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항시 허공을 보게 된 것과 같으니라. 이 여러 비구들도 역시 그와 같아서 설령 백천만 겁을 지나며 공(空) 가운데서 열반이란 이름을 붙이려 해도 이 일은 그렇게 되지 않느니라. 이르는 처소마다 공의 성품을 알지 못하면 도(道)를 원하고 구하여도 마침내 이루게 될 수 없느니라. 마치 또 어떤 사람이 허공을 구하려 하면 그가 있는 곳마다 허공은 항시 눈앞에 있는 것과 같으며, 또한 이 허공이나 저 허공에는 약간의 모양이 있다고도 연설하지 않고 허공에서 오고 가고 하되 이룩한 바가 있다고도 보지 않으면 그제야 비로소 열반의 요의(要義)를 알 것이니라. 그 여러 비구들은 전세(前世)에 삿된 일을 익혔는지라 지금까지도 깨치지 못하여 열반의 무위대도(無爲大道)를 구하려 하나 오히려 그 이름과 성조차 알지 못하거늘 어찌 열반의 도를 분별할 수 있겠느냐? 종일토록 돌아다니며 멸도를 구해도 그 공(功)만 헛되고 얻게 되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열반은 임시로 붙인 이름이라 마치 요술과 같고 허깨비와 같아서 공하여 아무것도 없으며, 거짓 붙인 이름이라 텅 비어 있고 임시로 부른 이름이라 거짓이기 때문이니 어리석은 사람이나 전(傳)하는 바요 현성의 법과 율에서 칭찬할 바는 아니니라.” 그때에 다시 행이 선[立行] 비구 7백여 명은 곧 그 자리에서 모든 티끌과 때[塵垢]가 다하여 법안(法眼)이 청정하게 되고, 3달(達)과 6통(通)에 막힌 바가 없어져서 ‘부처님은 나심[生]도 없고 또한 일어나거나 없어지지도 않으며, 과거의 모든 법으로써 열반을 구하지도 않고 수없는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께서 과거에 말씀하신 교계(敎誡)와 지혜와 변재도 모두 약간의 것도 없으며, 범부로부터 일어나 이에 무학(無學)에 이르기까지 연설하는 도의 가르침에도 어기는 것이 없고, 중생이 생사에 유랑(流浪)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열반에 일어나고 없어짐이 있다는 것도 보지 않는다’고 함을 분명히 알았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다 공하여 허공과 같고 모든 부처님께서 나오시는 소굴조차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자리에서 6백의 우바새와 3백의 우바이가 모두 믿음을 다한 행을 얻었으며, 수없는 하늘과 세간 사람들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었다. 그때에 장로(長老) 사리불(舍利弗)이 5백의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 여러 사람은 저마다 통혜(通慧)를 얻으셨는데 필경 본원(本願)으로 그리 되셨습니까?” 모든 비구들이 말하였다. “존자 사리불이여, 옛날의 소원을 오늘에야 이루게 되었으며 할 일을 다 마쳤으므로 다시는 유(有)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질문한 것의 뜻을 잘 알았습니까?” 모든 비구들이 말하였다. “모든 결박(結縛)을 다한지라 다시는 유(有)에 물들지 않고 생사를 좋아하지 않으며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열반 무위(無爲)는 행(行)이 공한 성품에 합치하고 결박 없이 다하거니와 또한 그 다하는 것도 보지 못하나니 이것을 바로 열반이라 합니다.” 그때에 사리불은 그 비구들을 칭찬하였다. “장하고 장하십니다. 참으로 공한 성품의 매우 깊은 뜻을 이해하셨구료. 이제는 얼마의 어진 이들이 있어 복지(福地)에 머무르겠습니까?” 모든 비구들이 말하였다. “존자 사리불이여, 곧 이것이 복전으로 여래께서 칭찬하신 것이며 불사(佛事)를 시행하는 데도 일찍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습니다. 저희들 여러 사람은 16분(分)에서 그 하나도 아직 얻지 못하였습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그대들 5백 사람은 피차(彼此) 모두가 다 해탈한 보살들이며 또한 바로 복전이십니다.” 모든 비구들이 말하였다. “여래의 성스러운 지혜는 성품이 스스로 청정하며 모든 법계에서 물들거나 집착함이 없습니다.” 이때에 최승보살이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간에는 얼마의 어진 이가 있어 반드시 시주의 은혜[施恩]를 갚겠나이까?”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의 법에 집착하지 않으면 시주의 은혜를 능히 갚느니라.” 다시 아뢰었다. “다시 얼마의 어진 이가 보시에서 청정할 수 있겠나이까?” 대답하셨다.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비로소 청정하다 하느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느 것이 바로 보시의 복전입니까?” 대답하셨다. “부처님의 도법(道法)을 잊어버려야 이에 복전이라 하느니라.” 다시 아뢰었다. “다시 얼마의 어진 이가 있으면서 중생류에 대하여 선지식이 되어서 선악(善惡)을 지시하여 주나이까?” 대답하셨다. “온갖 중생의 무리를 버리지 않는 이를 바로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다시 아뢰었다. “세간에는 얼마의 어진 이가 있어야 부처님의 은혜를 능히 갚겠나이까?” 대답하셨다. “네 가지 무외(無畏)를 얻어 부처님 종자[佛種]를 끊지 않는 것이니라.” 다시 아뢰었다. “세간에는 얼마의 어진 이가 있어야 여래께 능히 공양을 올리겠나이까?” 대답하셨다. “억만 겁(劫)의 행, 그 가운데서 미혹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공양이니라.” 다시 아뢰었다. “세간에는 얼마의 어진 이가 있어야 불장(佛藏)을 능히 보호하겠나이까?” 대답하셨다. “그 몸과 목숨이 다하기까지 부처님 계율을 깨뜨리지 않는 이들이니라.” 다시 아뢰었다. “다시 얼마의 어진 이가 있어야 공경을 능히 일으키겠나이까?” 대답하셨다. “모든 감관[根]을 수호하고 6정(情)을 능히 닫는 이들이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떤 것을 세간에서 가장 값진 보배라 하나이까?” 대답하셨다. “7보를 성취한 것이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떤 것이 만족할 줄 아는 행이옵니까?” 대답하셨다. “제일의 위없는 지혜[第一無上慧]를 닦는 것이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떤 것이 세간에서 욕심이 적은[少欲] 것이옵니까?” 대답하셨다. “세간을 원하고 구하지 않는 것이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떻게 세간을 알면서 집착이 없는 것이옵니까?” 대답하셨다. “모든 결박(結縛)을 끊고 다시는 5개(蓋)가 없는 것이니라.” 다시 아뢰었다. “세간에서 무엇이 쾌락이며 다시는 온갖 괴로움이 없는 것이옵니까?” 대답하셨다. “매인 바가 없으면 본디 즐겁다 하느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떻게 하면 매인 바가 없게 되나이까?” 대답하셨다. “5음과 18본지(本持)가 공하고 고요하여 함이 없는[無爲] 줄 아는 것이니라.” 다시 아뢰었다. “누구에게 이런 어려움[難]이 있나이까?” 대답하셨다. “밖으로는 6진(塵)을 버리고 안으로는 6정(情)을 버릴지니라.” 다시 아뢰었다. “누가 이 언덕을 건너서 저 언덕[彼岸]에 이르게 되나이까?” 대답하셨다. “근(根)을 세우고 힘[力]을 얻으며 도(道)를 이루는 이이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떻게 하면 보살은 보시할 마음이 끊어지지 않나이까?” 대답하셨다. “세 가지 생각[三想]을 녹여 없애고 진로(塵勞)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떻게 하면 계율을 지니되 깨뜨리지 않나이까?” 대답하셨다. “도의 마음[道心]이 견고하여 큰 서원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라.” “어떻게 하면 인욕을 행하며 적수[對]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나이까?” 대답하셨다. “마음이 공하고 고요한 줄 알고 성냄의 근본[恚本]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정진을 닦는 것이옵니까?” 대답하셨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에 단서(端緖)가 없느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떻게 하면 선정으로 뜻이 훼손되지 않나이까?” 대답하셨다. “마음이 안정되고 영원히 고요하면 바깥 티끌[外塵]을 받지 않느니라.” “어떻게 지혜의 업[慧業]으로 모든 법을 널리 설명하며 펴나이까?” 대답하셨다. “의취(義趣)를 분별하여 도의 마음을 버리지 않느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떻게 보살은 인자한 마음[慈心]을 수행하여 도의 근본[道根]을 버리지 않나이까?” 대답하셨다. “중생을 버리지 않고 제도할 이가 있는 것을 보느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떻게 보살은 가엾이 여기는 마음[悲心]을 수행하나이까?” 대답하셨다. “모든 법을 사유하여 물러나지 않느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떻게 하면 보살은 기쁘게 하는 뜻[喜意]이 끊어지지 않고 멸도에 이를 수 있나이까?” 대답하셨다. “나라는 생각[我想]을 일으켜 내가 있다고 헤아리지 않느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떻게 하면 보살은 보호하는 마음[護心]이 끊어지지 않나이까?” 대답하셨다. “도의 근본을 수호하여 마지막에 부처님을 이루기까지 그 중간에는 딴 생각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떻게 보살은 신근(信根)을 세우나이까?” 대답하셨다. “외도의 법[外法]을 초월하여 사악(邪惡)과 함께하지 않느니라.” 다시 아뢰었다. “어떻게 하면 공한 줄 알고 망설임이 없나이까?” 대답하셨다. “도(道)와 도가 아닌 것과 도에는 근원이 없는 줄 알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마땅히 행해야 할 업(業)이니라.”
31. 사범당품(四梵堂品)
그때에 유수동진(濡首童眞)이 마음속으로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몸과 입과 뜻으로 범행(梵行)을 청정하게 닦고 사방의 국경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중생을 제도하며 한 부처님 국토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 국토에 이르러 일찍이 중생을 버리거나 여읜 일이 없을까? 어떻게 보살은 나아가 부처님의 업[佛業]을 이루고 보살이 행할 정(定)을 잃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였다. 부처님께서 그의 뜻을 아시고 곧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너의 생각과 같으니라. 보살행의 근본은 그 종류가 동일하지 않나니,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그 뜻을 알기 쉽게 연설하리라.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서 잘 생각할지니라.” 대답하였다. “그러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유수에게 말씀하셨다. “몸의 행[身行]이 청정하여 온갖 악(惡)을 짓지 않고, 입의 행[口行]이 지성스러워 법의 성품[法性]을 잃지 않으며, 마음은 정의(定意)를 생각하여 두려움에 동요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통혜(通慧)의 근본이니라. 중생을 인자하게 생각하여도 애욕에 집착하지 않고, 항시 부정(不淨)한 오로의 관[惡露觀]을 닦아 그 마음을 지킴이 견고하며, 어리석은 어둔 데에 처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통혜의 근본이니라. 대중에 있되 들[野]과 같이 여기나 위의를 잃지 않고, 나아가고 그치고 가고 오고 함에 의용(儀容)이 정돈되어 아직 일찍이 여래의 금계를 어긴 일이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통혜의 근본이니라. 모든 부처님의 법에서 다 해탈하고 욕심이 없고 함이 없고 불가사의하며 성중(聖衆)은 닦아 익히되 영원히 삼승이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통혜의 근본이니라. 탐욕에서 해탈하면 형상이 없음을 깨달아 알며, 성냄에서 해탈하고 어리석음과 게으른 데서도 역시 그러하며 9차제(次第)를 닦아 선각(禪覺)에 동요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통혜의 근본이니라. 욕계에 집착하여 전륜성왕을 구하지도 않고, 색계에 처하여 복을 이루기를 희망하지 않으며, 다시 무색계의 도(道)도 사유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통혜의 근본이니라. 다시 공무(空無)와 무원(無願)과 무상(無相)에서 유루(有漏)의 행을 다하지 않음이 없고 모든 법은 마치 요술과 같고 허깨비와 같은 줄 분명히 아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통혜의 근본이니라. 혹 어떤 중생은 끝내 뜻을 잃지 않고 주(住)로부터 주에 이르러 사랑과 미움[愛憎]의 뜻이 평등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통혜의 근본이니라. 과거 모든 법의 근본을 어기지 않고 미래ㆍ현재에서도 역시 그와 같으며 물들 데서도 물들지 않고 물들거나 집착함을 보지도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통혜의 근본이니라.”
32. 범천청품(梵天請品)
그때에 최승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몸의 행이 청정하여 악업을 짓지 않고, 언교를 연설하되 끝내 허망하지 않으며, 마음의 생각이 청정하여 도근(道根)을 초월하셨나이다.
세존께서는 지금 논하신 바 4가지 평등한 범당[四等梵堂]인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로써 중생을 제도하되 한 사람이라도 제도되지 않으면 끝내 잊거나 버리지 않으시어 자(慈)로써는 탐욕을 버리고 부정(不淨)으로써는 깨끗하다[淨]고 함을 버리며 모양[相]에는 형상이 없음을 관하게 하시오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통혜의 근본이옵니다. 모든 법의 근본에서 다 해탈을 얻고 세 가지 법의 보배[法寶]에서 모두 해탈하게 되며 유위ㆍ무위와 유루ㆍ무루가 바로 보살의 통혜의 근본이옵니다. 이미 욕심이 없는 것인 줄 알고 그것이 생기지 않을 줄 알며, 성냄에도 근본이 없어서 모두 공인 줄 아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통혜의 근본이옵니다. 자비를 행하되 끊어지지 않게 하고 욕계ㆍ색계ㆍ무색계를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4선(禪)에서도 생각[想]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통혜의 근본이옵니다. 보살마하살은 항시 공ㆍ무상ㆍ무원에 들고 또한 모든 법의 모양을 구하지 않으며, 혹 어떤 보살은 ‘가령 제가 성불하면 나라 안의 중생에게는 삼승의 도라는 이름조차 없으며, 그리고 저는 오늘 지극한 정성으로 서원하건대 부처가 되어 등정각을 이루면 중생을 널리 교화하되 싫증냄이 없겠나이다’라고 큰 서원을 세우나이다.” 그때에 8천의 천인(天人)들은 신지(信地)에 섰고 마왕(魔王)과 그 수종들은 곧 본래 있던 데로 돌아갔다.
33. 범천촉루품(梵天囑累品)
부처님께서 무외범천(無畏梵天)과 모든 대중과 모든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수없는 아승기겁으로부터 공덕을 쌓아서 스스로 성불하기에 이르도록 세간의 여덟 가지 법(法)의 누(累)에 물들지 않았느니라.
온갖 중생인 기고 날고 꿈틀거리는 형상 있는 무리들은 5음에 물들고 집착하여 버리지 않고 있나니, 그러므로 현성(賢聖)들은 여덟 가지 법에 물들지 않고, 5음과 18본지는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는 줄 알며, 세간의 여덟 가지 일[事]인 이(利)ㆍ쇠(衰)ㆍ훼(毁)ㆍ예(譽)와 칭(稱)ㆍ기(譏)ㆍ고(苦)ㆍ낙(樂)을 여읠지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경전을 읊고 외고 받아 지니면 악마나 악마 하늘[魔天]이 무너뜨릴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께서 위신력으로 보호하시기 때문이니라. 만일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등정각을 구한다면 모두 경전으로 말미암아 과증(果證)을 취하게 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의 겁(劫)으로부터 백천 겁에 이르도록 그 안에 가득 찬 중생들과 모두 함께 이 경전을 찬탄한다 하여도 오히려 다할 수 없나니, 왜냐하면 이 경의 이름이 『무진지장경(無盡之藏經)』이기 때문이니라. 이 경은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며, 또 일명 『최승보살소문경(最勝菩薩所問經)』이라 하기도 하느니라. 나는 이제 이 경을 부촉(付囑)하면서 한 글자도 빠진 자가 없게 하고 미신(味身)ㆍ구신(句身)이 모두 완전히 갖추어지게 하느니라. 마치 내가 오늘날 부처의 도를 이루고서 32가지 상호[相]와 80가지 모습[好]을 갖추고 있으며, 몸은 황금빛이요 원광(圓光)은 7척(尺)인데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것과 같으니라.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 도를 구하여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 공양한다 하여도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이 경전을 외운 것보다는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은 모두 이 경전을 말미암아 부처님의 도를 이루기 때문이며,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도 모두 이 경전으로 말미암아 성취되기 때문이니라.” 그때에 무외범천이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을 구하여 이 경전을 읊고 외며 생각을 거두어 잊지 않으면 저희들은 이 선남자ㆍ선여인을 옹호하여 백 유순(由旬) 안에서는 악마나 악마 하늘이 그 짬[便]을 얻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너의 말과 같으니라.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은 모두가 이 경전을 독송하여 반드시 견고하기에 이르렀고 끝내 물러나지 않으셨느니라. 만일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4의지(意止)ㆍ4의단(意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의(覺意)ㆍ8현성도(賢聖道)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닦아 익히는 데도 모두가 이 경전을 말미암아 성취하게 되며, 세간에는 곧 4성(性)인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있게 되는 것이니라.” 그때에 유수동진과 최승보살과 존자 사리불과 천ㆍ용ㆍ귀신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 등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예배하고 떠나갔다.
● 감각현실이 자신이 이해한 내용이 아니면 무엇인가? 현실에서 눈을 뜨면 세상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 각 부분을 묶고 나누면서 분별을 행한다.
저 부분은 자동차다. 저 부분은 나무다.
이런 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분별하면 그 각 부분에 그런 모습과 성품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적어도 이해하고 현실에 임한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그것은 망집임을 강조하게 된다.
『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26. 몽중성도품(夢中成道品)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시한다.
...
▸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그만두어라. 족성자야, 이것은 공도 아니요 또한 열반도 아니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모두가 세속으로 말미암아 임시로 붙인 이름이요 권도로 속인[權詐] 문자로써 서로 전(傳)해진 것이니,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느니라.
법성의 경계는 모두 단서가 없고 이름의 법조차 없거늘 어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겠느냐? 높거나 낮은 것을 덜어 버리면 옳다 그르다는 마음이 없으며, 욕심과 성내는 마음이 없고 무명(無明)을 알면서 무명의 마음이 없으면 5개(蓋)의 모든 속박이 하나[一]임을 분명히 알게 되고 또한 하나인 것도 보지 않나니, 이것을 바로 공이라 하고 이것을 바로 열반이라 하느니라.”◂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nglish: Galerie des Glaces (Hall of Mirrors) in the Palace of Versailles, Versailles, France. Français : Galerie des Glaces du Château de Versailles, à Versailles en France.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Charles Aznavour - Pour Faire Une Jam.lrc
디젤이나 가솔린엔진에서 폭발을 일어나면 실린더가 왕복 직선운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크랭크축에 붙은 디스크와 연결되어 원운동으로 바뀌게 된다.
- 4 행정기관의 작동 - 여기서 엔진의 작동원리를 살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폭발이 일으키는 강한 직선 방향의 왕복운동이 어떤 계기로 원 운동으로 바뀌는 것을 살피고자 함이다. 그리고 원운동으로 바뀌면, 광범위하게 세계 이곳 저곳을 달려 나가거나 온갖 힘든 일을 다 척척 잘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수행과 관련시켜 생각해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각 주체마다 본능적으로 강한 충동을 갖는 욕구가 있다. 프로이드가 말하는 리비도나 이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외에도 널리 자신의 입장에서 감각적으로 당장 느껴지는 내용들 가운데 좋은 것을 추구하고 나쁜 것을 피하고자 하는 욕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충동에 따라 다니면 대단히 곤란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각 주체에게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규범적 내용이 있게 된다. 물론 그 규범은 각 지역이나 각 사회마다 다 다르다. 아랍권에서는 히잡 차돌 니캅 부르까 같은 것을 걸치고 여인들이 다녀야 하는 예와 같다.
여하튼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규범을 지켜 할 것은 잘 하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은 잘 하지 않아야 함을 요구받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것이 개인적인 주관적 욕구와 상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주관적 본능적 욕구에 맡겨 임하면 결국 사회의 힘에 의해 물리적 정신적 각종 제재를 받게끔 된다. 그러나 또 한편 사회적 규범이나 요구만 이행하다보면 개인이 강한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양 측면이 모두 문제가 있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말해 수행자는 본능적 욕구를 제거하고 수행에 임해 우선 생사를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보리심을 바탕으로 중생제도의 서원을 일으켜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복덕과 지혜 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그리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여러 수행덕목이 수행자에게 요구된다.
그러나 이렇게 사회규범이나 수행덕목이 요구되지만, 개인은 또 개인대로 본능적 충동에 강하게 지배받는다. 그래서 이것이 현실적으로 서로 따로 따로 떨어진 상태로 남기 쉽다. 그래서 사회규범이나 수행덕목은 강제에 의해 마지못해 실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사회규점이나 수행덕목을 자발적으로 의욕적으로 강하게 원만히 성취해가는 경우가 드물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각 단점을 제거하고 서로 결합시켜 양 장점만 결합시키는 방안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성격의 내용을 잘 결합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강한 본응적 충동과 추진력으로 사회규범을 잘 성취할 뿐 아니라, 생사를 벗어나는 수행도 잘 성취하고 중생제도도 잘 성취하는 상태가 요구된다.
이는 결국 수행에서 직선 운동을 원운동으로 바뀌게 하는 부분이다. 개인의 아집에 바탕한 소원추구를 보리심에 바탕한 서원의 추구로 바꾸는 방안이기도 하다.
그 계기는 결국 수행자의 크랭크축에 장착한 (x)g(y) 도함수의 값에 있다. 여기서 y= f(x)는 개인의 상황에서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주로 각 주체의 탐,진,치 3 독과 관련된다. 욕심이 생기는 것은 끝내 차지하여 성취하고자 한다. 분노가 생기면 그것을 부수고 때리고 해치고자 한다. 그런 가운데 어리석음에 바탕해 각종 소원을 일으켜 추구한다.
여하튼 각 주체는 이런 형태로 생사현실에 임해 고집해 나아간다.
이 에너지를 결합시켜 수행을 시작하는 부분과 결합시켜 주어야 한다.
그것이 z =g(y) 함수가 나타낸다.
앞의 상태로 얻어지는 결과 상태를 y 로 해서 수행에 진입하는 상태를 얻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게 되는가 즉 따로 따로 추구되는 이 활동을 어떻게 연결되게끔 하는가. 이런 것이 현실에서 문제된다.
각 주체가 y= f(x) 함수형태로 열심히 추구하고 행하는 원동력이 있다. 그것은 결국 한 주체가 생각하는 자신입장에서 당장의 좋음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 그처럼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좋음을 통해 z =g(y) 함수로 연결시키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y= f(x) 함수형태로 좋음을 추구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입장에서 좋음이 당장 잘 성취될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욕심이 생기는 부분에 달라붙는다. 또 분노를 일으키는 부분을 해치고 부순다. 그러면 통쾌하고 속이 풀릴 것 같다. 이런 형태다.
그런데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면 그로 인해 얻는 좋음이 얻어지지 않는다. 좋음을 얻더라도 아주 짧고 일 측면에만 그친다. 그리고 오히려 더 많은 나쁨만 얻게 된다.
그래서 y= f(x) 함수형태로 얻고자 하는 좋음은 z =g(y) 함수와 결합시켜서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즉 그 주체가 그런 이해를 하고 현실에 임해야 이 둘이 결합되게 된다.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차별없고 제한없이 좋다.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무한히 좋다.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모든 측면이 다 좋다. 이런 형태의 좋음과
자신의 입장에서만, 당장 지금만, 이 측면에서만 좋은 것은 서로 차이가 크다.
그런데 당장 자신에게 좋은 내용에만 집착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것은 당장 자신이 감각하고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좋고 좋은 형태는 그렇지 못하다. 즉 다른 이가 좋아하는 내용을 직접 자신이 느끼지 못한다. 역지 사지의 노력을 기울여야 간신히 추상적으로만 공감하게 된다. 이 경우에도 직접 느끼지는 못한다. 또한 나중에 얻을 좋음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 역시 추상적으로 생각될 뿐이다.
그리고 지금 선택하는 내용이 장차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또 명확히 알지 못한다. 인과를 길고 깊게 관하지 못하게 되는 사정이다.
그래서 이것을 각 주체가 무언가를 추구하는 과정에 결합시켜주어야 한다.
즉 당장 지금 느낄 수 있는 고통은 없애고 당장 지금 느낄 수 있는 좋음을 무량하게 얻고자 한다고 하자. 그렇게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넓고 길고 깊게 무량하게 얻으려면 그 방향을 변화시켜야 한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당장 지금만, 이 측면에서만 좋은 것은 당장 느낀다고 하자.
그와 같은 좋음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차별없고 제한없이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무한히 좋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모든 측면이 다 좋은 형태로 무량하게 좋음을 얻으려면
오히려 그것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뱡향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무량한 좋음을 얻게 하는 서원의 형태로 바꿔야 한다.
먼저 자신을 주어로 만든 소원은 그 주어를 바꾸어 온 생명의 형태로 바꾼다. 자신이 많은 좋음을 얻고자 한다고 하자. => 모든 생명이 많은 좋음을 얻게 하는 서원을 갖는다.
한편, 다른 이에 대해 갖는 다양한 소원이 있다고 하자. 그 다른 이를 자신으로 먼저 관한다. (역지사지)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원할 것인가부터 먼저 관한다.
그런데 남이 무언가를 자신에게 행해주기를 원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다른 이에게 먼저 자신이 행한다. 한편 무언가를 다른 이가 행하지 않기를 또 원한다고 하자. 그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상대적으로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다른 이라는 것은 다음 의미다.
자신이 나이가 '많은' 다른 이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원했다고 하자. 그 경우 자신이 먼저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다른 이를 도와주라는 의미다.
이를 통해 자신이 갖는 소원이 다른 입장에서도 좋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과연 자신이 다른 이를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가. 그런 가운데 다른 이에게 자신이 갖는 소원의 의미도 검토하게 된다.
분노가 일어나서 다른 이를 해치고자 한다고 하자.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상대가 좋아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자신이 다른이로부터 해침을 당하는 상황을 놓고 생각해야 한다. 자신이 이것을 좋아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자신이 먼저 다른 이를 해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런 각 내용은 사회적으로 규범적으로 요구되지만 잘 성취되지 않는다. 즉 이론상 이해하지만, 현실에서 각 주체가 그런 마음을 기꺼이 잘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생명이 많은 좋음을 얻게 하면 자신도 역시 많은 좋음을 얻게 됨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둘이 한 축으로 결합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경로와 계기를 통해서
직선적인 본능추구활동을 서원의 원운동으로 변화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도 그런 형태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f(x)g(y) 형태가 된다.
평소 자신이 좋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탐욕을 추구하고 분노를 폭발시켜왔다고 하자. 그렇게 좋음을 강한 에너지로 추구해왔다. 그렇게 좋음을 원하는 만큼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생명이 좋은 상태를 강하게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그런 상태가 성취됨을 이해해야 한다.
바로 그런 이해가 그런 결합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수행에 진입해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수행에서 생사를 벗어나고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활동에 강한 에너지를 갖고 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서로 떨어지면 이론 따로 현실 따로가 된다. 생각으로는 서원을 만들어 외칠 수 있다. 그러나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그리고 몸은 늘 본능적 충동 부분에 내맡기고 임하기 쉽다. 그러면 엉망이 된다.
엔진과 바퀴 축이 분리된 자동차와 상태가 같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느 경우나 두 장점의 결합이 요구된다. 그래서 원운동을 직선으로 바꾸거나 직선운동을 원운동으로 바꾸어 임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 앞 방식이 모두 적용될 수 있다.
■ 영-중-일-범-팔-불어 관련-퀴즈 [wiki-bud]Maitreya [san-chn]
vikopayitavya 壞, 起惡 [san-eng]
khādati $ 범어 (1 pp) to eat [pali-chn]
pūti-mutta-bhesajja 陳棄藥 [pal-eng]
nanda $ 팔리어 adj.rejoicing. [Eng-Ch-Eng]
四種謗 The four kinds of errors according to Wonhyo 元曉 in his commentary on the Awakening of Faith 起信論. Belief in existence; belief in non-existence; belief in both; belief in neither. [Muller-jpn-Eng]
業影 ゴウヨウ karma shadow [Glossary_of_Buddhism-Eng]
SUDATTA☞ See: Anathapindika.
65 선남자야 만약 어떤 사람이 세상의 괴로움을 싫어해서 길게 삶의 줄거움을 구하면 마땅히 조용한 곳에 있으면서 청정하게 결계(結界: 깨끗이 재계를 지키고 공부할 도량을 정하는 것)하고 옷을 주문을 외우며 입고, 또 물과 음식과 향과 약을 108 편(一百八遍)씩 주문을 외우고 먹으면 반드시 목숨이 120세 되도록 길어질 것이니라. 만약 능히 여법하게 결계하고 법대로 받아 지니면 모든 것을 다 성취하나니 그 결계법이란 혹은 칼을 가지고 주문을 21 편(遍) 외우고 땅을 그어서 경계를 삼으며 혹은 깨끗한 물을 가지고 주문을 21편 외우고 사방에 뿌려 경계를 삼으며 혹은 하얀 개자(介子)를 가지고 주문을 21편 외우고 사방 상하로 던져 경계를 삼으며 혹은 깨끗한 회(灰)를 가지고 주문을 21 편 외우고 사변(四邊)을 둘러 싸 경계를 삼으며 혹은 생각 가는 곳으로 경계를 삼으며 혹은 오색실(五色線)을 가지고 주문을 21편 외우고 사변(四邊)을 둘러 싸 경계를 삼아도 되느니라. 만일 법대로 받아 지니면, 자연히 과를 얻을 것이니라. ● 사바하 娑婆訶<六十五> s vā hā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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