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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3일 토요일

불기2565-02-13_십팔공론-k0580-001


『십팔공론』
K0580
T1616

십팔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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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십팔공론』 ♣0580-001♧





십팔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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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空論
K0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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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공론(十八空論)
용수보살(龍樹菩薩) 지음


진제(眞諦) 한역




【문】‘공(空)’이 분별이 없다면 어떻게 열여덟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까?



【답】사람과 법의 두 가지가 다 ‘나’ 없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이것이 일체 법의 공통된 모양이다. 



이제 모든 법을 요약하여
그 종류의 같지 않은 것을 열여덟 가지로 전개하겠다. 

열여덟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 안의 공한 것이고, 
둘째 바깥의 공한 것이고, 
셋째 안팎의 다 공한 것이고, 
넷째 원소[大]의 공한 것이고, 
다섯째 ‘공’도 역시 공한 것이고, 


여섯째 진실의 공한 것이고, 
일곱째 함이 있음의 공한 것이고, 
여덟째 함이 없음의 공한 것이고, 
아홉째 필경의 공한 것이고, 
열째 앞뒤가 없는 공한 것이고, 


열한째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 공한 것이고, 
열두째 불성의 공한 것이고, 
열셋째 제 모양의 공한 것이고, 
열넷째 일체 법의 공한 것이고, 
열다섯째 없다는 법의 공한 것이고, 


열여섯째 있다는 법의 공한 것이고, 
열일곱째 없다는 법과 있다는 법의 공한 것이고, 
열여덟째 얻을 수 없는 자리의 공한 것이다. 




이 열여덟 가지를 합하여 열여섯 가지로 만든 것은 
무릇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열여섯 가지를 성립시킴이니, 
하나는 본체이고, 
다른 하나는 작용이다.












첫째의 이른바 안의 공한 것이란, 
한편 받아들임의 공한 것이라고도 하나니, 
범부와 이승(二乘)들이 여섯 가지 느낌[六入]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여섯 대경[大塵]의 과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섯 감관[六根]만이 있어선 집착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히노니,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그 받아들임도 공한 것이라고 말하는 바이다






다음 둘째의 바깥의 공한 것이란, 
역시 받아들일 것의 공함이라고도 하나니, 
여섯 가지 바깥의 느낌을 여읜다면, 
어떤 법을 받아들일 것이 없을지라. 


모든 중생으로서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것이 
다만 이 여섯 가지 대경뿐이거늘 
안으로 이미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고 
바깥으로 역시 받아들일 법이 없을진대, 
이것이 곧 사람과 법의 함께 공한 것이니, 
식[識]뿐이요, 
경계가 없기 때문에 바깥의 공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경계가 없기 때문에 역시 식이 없음은 곧 안의 공한 것이고, 
여섯 가지 느낌에 식이 없음은 곧 사람이 없는 것이다. 
감관도 대경도 없음은 곧 법이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아도 공하고 바깥도 공하다는 두 이치가 서로 성립되는 것이다.






다음 셋째의 안팎의 공함이란, 
몸의 공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몸은 네 가지 원소[四大]가 안팎의 의지함이 되나니, 
안의 의지란, 
곧 여섯 감관[六根]에서 
다섯 감관의 다 청정한 빛과 뜻의 감관[意根]이 
모두 이 몸을 의지하기 때문에 이것을 안의 의지라 한다. 
바깥의 의지란, 
곧 바깥의 여섯 대경[大塵]이 그것이니, 
자기 몸의 네 가지 원소에서 
다섯 감관의 청정한 빛을 제외한 그 나머지 빛ㆍ냄새 등이 
다 바깥 여섯 대경에 속하여 다섯 감관을 거둬 지니기 때문에 
이를 바깥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몸을 떠난 바깥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이 몸이 능히 감관과 대경을 지니기 때문에 
의지하는 자체라 하고, 
감관과 대경을 의지하는 대상이라 하지만, 
이 감관이나 또는 감관 아닌 것들이 죄다 공하기 때문에 
이를 안팎의 공함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다음 넷째의 원소의 공함이란, 
몸의 의지하는 곳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그릇누리[器世界]로서 시방 한량없고 그지없음이 죄다 공하기 때문에 이를 원소의 공함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다음 다섯째의 ‘공’도 공함이란, 
능히 진실을 비추는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앞의 네 가지 공함을 모아서 
그 경계를 따라 이름을 지어 부르기를 공한 지혜라고 하나니, 
이 공한 지혜가 역시 공하기 때문에 
‘공’도≺공≻함이라고 내세운 것이다.






다음 여섯째의 진실의 공함이란, 
진실한 경계의 공함을 말하는 것이니, 
수행하는 자로서 안팎이 다 공하여 사람도 없고 법도 없음을 볼 적에 
이 경계가 진실하여 진실이란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지만, 
분별하는 성품으로선 그 성품을 얻을 수 없으므로 이를 분별하는 성품이라 하고, 
성품의 공한 그것이 바로 진실의 공함이다. 
이것이 여섯 가지 ‘공’에 대한 변론으로서 그 ‘공’의 체(體)가 스스로 차례를 이룩했으니, 
첫째는 받아들이는 자체의 공한 것이고, 
둘째는 받아들일 대상의 공한 것이고, 
셋째는 자기 몸의 공한 것이고, 
넷째는 몸의 머무는 처소가 공한 것이고, 
다섯째는 비추는 자체의 공한 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네 가지는 다 관찰할 대경의 공한 것이고, 
다섯째는 관찰하는 지혜 자체의 공한 것이고, 
여섯째는 분별한 경계 모양이 공한 것이다. 


또 앞의 네 가지를 알 것이고, 
다섯째는 아는 것이고, 
여섯째는 알 것의 모양이니, 
다섯째 지혜의 공한 것이 앞의 네 가지 대경을 대치하기 때문에
네 가지 대경이 바로 공함이다. 
여섯째 진실의 공한 것이 다섯째의 지혜를 대치하기 때문에 이 지혜가 공함을 이룩하는 것이다. 


만약에 다섯째 지혜의 공한 것이
앞의 네 가지 경계를 대치함이 없다면, 
이는 곧 사람이 있고 법이 있어서 분별하는 성품이리니, 
이 지혜가 앞 경계의 사람도 없고 법도 없음을 봄으로 말미암아
곧 앞의 경계를 대치하는 것이다. 


만약에 여섯째 대경이 공함으로 다섯째의 지혜를 대치함이 없다면, 
이 지혜는 다만 진실을 이해할 뿐이어서 도로 분별하는 성품을 이룩하리니, 
이 때문에 여섯째 그 진실의 공함을 말하여 대치하는 지혜라고 이르는 것이다.


둘째, 공한 것이 열두 가지가 있음을 밝혔으니, 
첫째 행(行)의 공한 것이고, 
둘째 행이 아닌 공한 것이다. 




보살이 이 두 공함을 배우는 것은 
두 가지 선한 법을 얻기 위해서이니, 
이를테면 선한 도(道)가 그 하나이고, 
선한 과(果)가 그 둘이다. 




도는 바로 서른일곱 가지의 도품이고, 
선한 과는 바로 보리(菩提)의 모든 도가 
사람도 법도 없고 진실함도 아니고 허망함도 아님을 밝힌 것이니, 
이 네 가지를 여읜 마음을 이르되 선한 인(因)이라 하고, 
이 선한 인을 얻기 위하기 때문에 보살이 행의 공함을 배워 관하는 것이다. 




행이 아닌 공함이란, 
이른바 두 가지 선한 과(果)이니, 
곧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과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이 그것이다. 


만약에 남음이 있는 그대로 쌓임[集]을 제거했다면 
이 과는 세 가지 뒤바뀜[四顚倒]을 여의기는 했으나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 아닐 것이다. 


만약에 남음이 없이 괴로움을 소멸했다면 
이는 곧 상ㆍ낙ㆍ아ㆍ정일 것이리니 
이것이 일곱째와 여덟째의 두 공함이라 바로 청정함이니, 
보살이 스스로 도달하여 처음은 도를 얻는 것이요, 
그 뒤의 하나는 과를 얻는 것이다.



셋째, 
필경의 공함이란, 
항상 남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보살이 ‘공’을 닦되 
필경 남을 항상 이익되게 하려고 그 중생들이 다할 때까지 
항상 교화하기를 맹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이 집착이 있다면, 
이제 이 마음을 관하되 이 마음으로 하여금 결정코 필경이란 마음을 버려야만 
자연히 이익이 된다. 
바야흐로 진실한 지혜로서 필경의 공함이라고 할 것이다. 


만약에 필경의 마음을 내어서 이익되는 일을 한다면 
일이 되지 않고 이익하지도 않고 또 자연스럽지도 않으리니, 
항상 이익되게는 하되 공하지 않는 그것이 필경의 마음이라 
이 지혜를 아홉째의 필경 공한 것이라 한다.





넷째, 
앞뒤가 없는 공함이란, 
처음이 없는 ‘공’이라고도 하나니, 
필경의 공함을 이룩해 남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앞도, 
뒤도 아니고 처음도 끝도 없는 것이다.
보살이 만약에 그것이 바로 ‘공’인 줄을 알지 못한다면, 
지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서 생사를 버릴 것이고, 
이미 생사의 공한 것임을 본다면 앞과 뒤를 분별하지 않을 것이다. 
또는 처음과 끝에 있어서도 그 처음과 끝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단점에나 장점에나 마음이 근심하고 기뻐함이 없을 것이다. 
장점에 근심하지 않고 단점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아도 이미 근심과 기쁨을 떠난다면, 
능히 생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생사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필경의 이익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열째 처음이 없는 ‘공’을 관하는 것이다.


다섯째,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 ‘공’이란, 
보살이 이 선정을 수학(修學)함으로써 
그 공덕의 선근(善根)이 다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일체 부처님은 남음이 없는 열반 가운데에서도 
역시공덕의 선근 문(門)을 버리지 않으신지라 유전 있는 과보가 이미 다 끝났지만 
공덕의 선근만은 본래 만물을 교화하려 하기 때문에 항상 이런 작용이 있는 것이다. 




여래께선 비록 열반에 드시어도 
중생들의 기연(機緣)을 따라 응신(應身)ㆍ화신(化身)의 두 몸을 나타내 중생들을 이끌어 
이익되게 하기 위해 곧 다시 마음과 뜻을 일으키시나니, 
이 때문에 중생이 다하지 않으므로 응신ㆍ화신의 작용도 다하지 않음이다. 




이 때문에 비록 남음이 없는 열반에 드시어도 
공덕의 선근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승(二乘)들이 열반에 든다면 다시는 마음을 일으킴이 없나니, 
자비(慈悲)가 희박하여 중생들을 교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비록 남음이 없는 열반에 드시어도 다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모든 불ㆍ보살의 법신ㆍ응신ㆍ화신 세 가지 몸이 만물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무궁하기 때문이다. 






여래의 법신은 곧 일체 유전없는 법의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른바 열반에 들어도 공덕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열반 가운데에 오히려 법신이 있다고 안 것은 작용이 끝내 본체이기 때문이다. 


이미 응신ㆍ화신의 작용이 다하지 않는 것을 보는지라. 
이 때문에 이 몸의 본체가 항상 스스로 담연(湛然)하여 
길이길이 변천하거나 
파괴되지 않는 줄을 안다.






비바사(毘婆沙) 스님들이 말씀하기를, 
“열반은 제 모양이 없지만, 
없다고 말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능히 일의 작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약 열반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지혜를 성취할 수 없고, 
지혜를 성취하지 않는다면 번뇌가 없어지지 않는다. 


열반이 이미 도를 낼 수 있고 
도가 의혹을 없앨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열반의 본래 일인 만큼
이미 그 일이 있는 것을 본다면
응당 그 체(體)가 있는 줄을 알지라. 



이 때문에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여래의 법신이 열반 가운데에 있는 것도 곧 이러한 이치다. 




분별을 제기하기 위해 열반이 공덕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분별하는 성품이겠지만, 
진실한 이치 가운데엔 이런 분별이 없나니, 
이 때문에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 ‘공’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말로써 설명하자니 열반은 공덕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사실 열반 가운데엔 버리지 않는다는 그 뜻도 없나니, 
이 때문에 버리지 않는 ‘공’이란, 
곧 생사를 버리지 않는 뜻을 이룩하는 것이다. 




앞은 생사를 버리지 않은 채 필경 남을 이익되게 하는 그것이 
저 이승(二乘)으로서 아주 이익되게 하지 못하는 것과의 다른 점을 밝히고, 
이제 비록 생사에 있거나 열반에 있거나 모두가 
다 만물을 교화하는 것임을 밝힘은 이 뜻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니, 
앞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무릇 세 가지 있는 이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곧 열한째의 버리지 않는 ‘공’이고, 
또는 산멸(散滅)하지 않는 ‘공’이라고 한다.




여섯째 성품의 공한 것과, 
일곱째 모양의 공한 것과, 
여덟째 일체 법의 공한 이 세 가지 공한 것이 
다 스스로가 이익되고 남을 이익되게 하는 원인을 밝힌 것이다.








【문】‘공’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답】청정한 불성이 바로 공한지라. 
이 때문에 성품의 공한 것이라 한다.
【문】어째서 성품의 공한 것이라 합니까?




【답】불성이란 곧 모든 법의 제 성품이다. 
왜냐하면 자연히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 성품에 두 가지 뜻이 있을 뿐이니, 
하나는 처음이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인이 그것이다. 




마치 처음이 없는 생사 가운데 마음이 있거나 마음이 없는 두 가지 법이 
자연 원인이 없는 것과 같음이니, 
만약에 마음이 원인이 있다면 이 원인이 본래 있는 것이어서 처음이 있다 해야 하겠다. 




만약에 본래 원인이 있었다면 이 원인은 곧 자연이겠고, 
이미 자연이라면 응당 마음도 자연인 것임을 인정해야 하겠다. 


옛적에 원인이 있지 않았다면 응당 중생도 없어야 하겠는데, 
때가 있고 원인이 있어서 바야흐로 중생이 있다면 
이는 마치 흙이나 돌 따위와 같겠다. 




만약에 원인과 때가 있으므로 해서 중생을 이룩해야 한다면 
이 때문에 자연의 한 부분은 마음 있는 것이 되고, 
한 부분은 마음 없는 것이 되는 줄을 알지니, 
그러므로 마치 처음이 없는 생사 가운데 마음이 있거나 마음이 업는 두 가지 법이 자연 원인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본성도 그와 같아서 자연 원인이 없나니, 
허망한 것도 오히려 자연의 이치가 있거늘 
어찌 하물며 진실한 것으로서 자연하지 않겠는가. 




처음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불성이 원인이 되는지라. 
그러므로 여섯 가지 느낌[六入]에 해탈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고, 




만약에 불성이 없다면 해탈의 결과를 성취할 수 없으리니, 
마치 깨끗한 구슬이 흐린 물을 맑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불성도 처음이 없기 때문에 생사가 처음이 없는 것이다. 




같고 다른 ‘공’과 청정하고 청정하지 않는 ‘공’이 앞서 설한 바 그대로이다.




그리고 이 ‘공’의 성품은 다섯 가지 과실을 여의기 위해 다섯 가지 공덕을 나타내나니, 
사람과 법이 곧 분별하는 성품이고 
사람과 법을 따라 분별을 내는 것이 곧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다. 




분별하는 성품에 나아가 법을 찾아도 얻을 수 없고 
남을 의지하는 성품에 나아가 분별할 사람과 법을 찾아도 얻을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진실한 성품이니, 
진실이란 체(體)가 없는 것이라, 
체가 없기 때문에 모양이 없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나는 것이 없고, 
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없고 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적정(寂靜)하나니, 
적정한 그것이 바로 제 성품의 열반인 것이다.






이제 성품의 공한 것이 다섯 가지 과실을 제거하나니, 
비열한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 그 첫째이다. 
불성을 얻을 수 있고, 
얻으면 한량없는 공덕이 있는 줄을 믿지 않음으로써 
보리심(菩提心)을 낼 수가 없는가 하면, 
이 보리심을 내지 않기에 항상 비열함을 지키는지라, 






불성이 그로 하여금 보리심을 내게 하기 때문에 
능히 비열한 마음을 제거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체 하는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 그 둘째이니, 
만약에 어떤 사람이 불성의 평등함을 알지 못하고서 
‘나는 불성이 있고 나는 이미 발심했는데 다른 사람은 불성도 업고 발심할 수도 없다’고 하여, 
훌륭한 체하는 교만을 부릴지라도 
그가 만약 이 평등한 이치를 체득한다면, 
나와 남이 없고 교만한 마음이 곧 없어지리니, 
이 때문에 능히 훌륭한 체하는 마음을 제거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허망에 집착하여 진실을 버리는 것이 그 셋째이니, 
허망 그것이 바로 생사의 과실이라
마치 어떤 사람이 와서 구타하고 모욕하고 비방하는 것과 같음이니, 
이러한 일은 첫째 본래 있던 것이 아니고, 
둘째는 마음으로 만든 것과 다만 허망으로 일으킨 것이어서 자연이 아니니, 
곧 허망이다. 



만약에 진실한 도리를 체득하지 않고서
이것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허망에 집착하여 다 진실을 버리기 마련이니, 
이 때문에 삼독(三毒) 가시 따위의 번뇌를 내는 것이다. 



만약에 생사가 허망하여 실제 있는 것이 아닌 줄을 안다면
구타하는 이와 모욕당하는 이를 보지 않고
중생들의 과실을 보지도 않고 번뇌를 내지도 않아 곧 허망을 버리며
다만 중생들은 다 불성이 있고 공덕이 원만한 것으로 볼 뿐이어서
곧 진실을 취할 수 있으리니, 
이로 말미암아 자비심을 내어 보살을 성취하는 것이다. 



나[我]’라는 소견을 제거하는 것이 그 넷째이니, 
모든 법을 본래 제 성품이 진실한 것이어서 있거나 없거나 둘다 평등한지라, 
어떤 사람이 이렇게 안다면 곧 ‘나’라는 소견으로 모양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릴 것이다.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 그 다섯째이니,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깊고 깊은 바른 법을 믿어 받게 한다면, 
그 바른 법의 모양 있고 모양 없음을 깨달아 불성을 체득할 수 있고, 
모양 없는 바른 법을 믿어 받는다면 대승(大乘)을 비방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이 성품의 공한 것이 능히 다섯 가지 공덕을 발휘할 수 있음을 밝히겠다. 



첫째 비열한 마음을 제거함으로써 바른 노력[正根]을 내고, 
둘째 훌륭한 체하는 교만을 제거함으로써 평등한 마음을 내고, 
셋째허망을 제거함으로써 자비를 내고, 
넷째 ‘나’라는 소견을 제거함으로써 지혜를 내고, 
다섯째 두려움을 제거함으로써 바른 법을 받으므로
이 때문에 성품의 공함이 불성의 이치를 나타낸다고 한다. 


다섯 가지 공덕이 있으므로 해서 다섯 가지 과실을 여의나니, 
성품을 다스려 청정함을 얻게 하는 그것이 바로 스스로를 이익되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열두째 성품의 공한 불성이 바로 그 공한 것이라 한다.






일곱째 제 모양의 공함이란, 
서른두 가지 큰 모습과 여든 가지 작은 모습을 얻기 위해서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형상 있는 것으로서 이른바 네 가지 원소[四大]와 다섯 가지 대경[五塵]이고, 
둘째는 형상 없는 것으로서 이른바 일체 네 가지 쌓임[四陰]인 마음의 법이다. 
그리고 화신(化身)은 생사도 아니고 열반도 아니니, 
왜냐하면 생사는 허망하고 뒤바뀐 것이어서 괴로움과 쌓임의 두 진리에 지나지 않지만, 
화신은 그렇지 않는지라, 

법에 의지한 응신(應身)이어서 본체가 있으니 뒤바뀐 것이 아니고, 
또 능히 중생들의 뒤바뀜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생사도 아니고 열반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처음과 끝이 있기 때문이니, 
생사가 아닌 만큼 생사의 허망한 모양이 없고, 
열반이 아닌 만큼 열반의 진실한 모양도 없는지라, 
이 때문에 모양의 공 한 것이라 한다. 

만약에 보살이 능히 이 모양의 공함을 닦는다면, 
서른두 가지 큰 모습과 여든 가지 낱낱 모습으로 하여금
곧 화신의 모양을 닦아서 청정함을 얻을 수 있으리니, 
이 때문에 열셋째 모양의 공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덟째 일체법의 공함이란, 
이른 바 일체 여래의 법이 항하사(恒河沙)처럼
한량없어서 열 가지 힘과 두려움이 없는 그러한 등등의 법이 서로 떠나거나
서로 떠나지 않는 공한 것임을 밝힘이다. 

만약 법신(法身)으로써 응신(應身)을 바란다면
떠나고 떠나지 않는 것이 있거니와, 
응신만으로선 결정코 법신을 떠나지 아니하니, 
왜냐하면 한결같이 법신을 근본으로 삼고, 
응신을 끝으로 삼기 때문이다. 
끝은 근본을 떠나지 않지만 근본은 끝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문】법신이 만약 응신을 떠나지 않는다면 어떤 잘못이 있습니까?
【답】만약에 그렇다면 한 사람이 부처가 됨에 따라 일체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하겠는데, 
일체 사람이 같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신이 바로 응신은 아니라는 뜻이 있는 줄 알 것이다. 
그러나 법신도 응신을 떠나지는 아니하나니, 
왜냐하면 법신은 차별이 없어서 항상 세 세상[三世]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와 같이 떠남과 떠나지 않는 도리로 수행한다면 이것이 곧 응신의 과(果)를 얻는다. 
다만 응신ㆍ화신의 두 몸이 다 능히 만물을 이익되게 하되 화신은 바로 종자를 심는 것이 되고, 
응신은 그 종자를 성숙시키는 것이 되어서 이 일체 법의 공한 것으로 하여금 청정한 일체 불법이 되게 할 뿐이다.
그리고 일체 불법이 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떠남도 없고 떠나지 않음도 없는 것이니, 
치우치게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잡는 자체도, 
잡을 대상도 없는 것이니, 
그 경계와 지혜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열넷째 일체법의 공함을 변론함이다. 


여기에 이르러 무릇 세 가지 공한 것이 있어서 스스로가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그 원인을 밝히어 설명했다.
열다섯째 있다는 법의 공함과 열여섯째 없다는 법의 공한 이 두 가지≺공≻함이 다 앞의 열네 가지 공한 바탕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있다는 법의 공함이란 사람과 법의 두 가지가 다 없다는 것이니, 
증익(增益)에 대한 비방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며, 
없다는 법의 공함이란, 
사람도 없고 법도 없는 이 도리가 진실히 있다고 하는 중생들의 허망한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도리마저 업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없다는 법의 공함이다. 
이는 손감(損減)에 대한 비방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증익을 떠나고 손감을 떠난다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지라, 
이 때문에 공의 바탕이라고 이르는 것이며, 
이 때문에 이 두 가지 공함이 도로 앞의 열네 가지의 공함에 다 섭수되는 것이다.
다음 열일곱째의 이른바 있다는 법과 없다는 법의 공함이란, 
이 하나의 공함이 모든 ‘공’이란, 
‘공’의 모양을 다 벗어난 것이다. 
이른바 있다는 법과 없다는 법의 공함이란, 
이 ‘공’의 바탕과 모양을 밝힘이다. 
결정코 없다는 법은 곧 결정코 없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한편 사람도, 
법도 없는 그 도리가 있기 때문에 결정코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리 있는 그것마저 없기 때문에 이야말로 ‘공’의 바탕이고 ‘공’의 모양이라, 
바탕은 이치의 증익과 손감이 없음을 밝힘이고, 
모양은 그 바탕의 결정을 밝힘이다. 
결정코 이것은 있고 결정코 이것은 없다거나, 
이것은 진실히 있고 이것은 진실히 없다거나, 
진실히 사람도 없고 법도 없지만, 
진실히 이 도리가 있다고 하는 이러한 논리로 열여섯 가지 공한 것을 밝힌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공한 것이 앞의 여섯 가지 공한 바탕에 섭수되고, 
또 열네 가지 공한 것이 되기도 한다. 
뒤의 네 가지 공한 것은 앞의 모든 바탕과 모양을 도로 변론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뒤의 공한 것은 모두가 앞의 열네 가지에 섭수되고, 
이 때문에 열네 가지와 열여섯 가지와 열여덟 가지의 그 광대하고 간략함의 같지 않는 것이 있다.

다음 열여덟째 ‘공’을 벗어난 과(果)란, 
이른바 얻을 수 없는 ‘공’이 곧 그것이니, 
이 과의 얻기 어려움을 밝힘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의 이치는 아주 없는 ‘단(斷)’도 아니고 언제나 있는 ‘상(常)’도 아니면서 곧 큰 ‘상’이다. 
‘상’의 이치를 이미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단’의 이치도 얻을 수 없고 결정된 모양을 얻을 것이 업기 때문에 얻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왜냐하면, 
이 ‘공’의 이치는 ‘고(苦)’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면서 이것이 큰 ‘낙’이다. 
‘나[我]’와 ‘나’없음이 아니면서 이것이 큰 ‘나’이고 ‘정(靜)’도 아니고 ‘정’아닌 것도 아니면서 이것이 큰 ‘정’이기 때문이다. 
이 ‘공’이 여덟 가지 ‘공’의 일과 공용에 섭수되어서 사람도 없고 법도 없는 것이 바로 ‘공’의 바탕인 줄을 보기 때문에 일과 공용에 따라 같지 않고 떠나거나 합함에 따라 다름을 이룩하나니, 
앞서 변론한 바와 같이 맨 처음의 여덟 가지 ‘공’은 ‘공’의 바탕을 밝히었고, 
다음의 열 가지 ‘공’은 ‘공’의 작용을 밝히었는데, 
이 작용 가운데 뒤의 두 ‘공’은 열네 가지 ‘공’에 섭수된다. 
열일곱째인 하나의 ‘공’은 여섯 가지 ‘공’의 바탕에 섭수되고, 
열여덟째인 하나의 ‘공’은 여덟 가지 ‘공’의 작용에 섭수되는지라. 
이 때문에 열여덟 가지가 열여섯 가지로 되기도 하고, 
열여섯 가지가 도로 열네 가지로 되기도 하여, 
혹은 먼저가 광대하고 뒤가 간략하거나, 
혹은 먼저가 간략하고 뒤가 광대하여서 그 이치와 일이 같지 않고 바탕과 모양이 차별이 나게 되었으니, 
떠나고 합함에 따라 그 이치가 이러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넷째 ‘공’의 도리를 분별한 것이 세 가지 있으니, 
청정한 것과 청정하지 않는 것이 그 하나이다. 
만약에 ‘공’이 결정코 청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일체 중생은 해탈할 수 없으리니, 
왜냐하면 결코 청정하지 않는 것이어서 청정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반드시 청정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도를 닦아도 소용이 없으리니, 
왜냐하면 아직 해탈하여 번뇌 없는 도를 얻기 이전에 ‘공’의 바탕이 이미 자연히 청정하기 때문에 번뇌가 지혜를 장애할 수 없을 것이고, 
또 번뇌를 제거한다 하더라도 공력(功力)을 의지하지 않고서 일체 중생들이 저절로 해탈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보는 바 그대로 공력을 떠나서는 중생들이 해탈할 수 없으니 만큼 이 ‘공’은 결코 청정한 것이 아닌 줄을 알고, 
다시 공용으로 말미암아 해탈하게 되니 만큼 이 ‘공’이 결코 청정하지 않는 것은 아닌 줄을 알지라. 
이것을 이르되 청정하면서 청정하지 않고 청정하지 않으면서 청정한 도리라고 한다. 
또 해석하건대 만약에 ‘공’의 이치가 결코 청정하지 않는 것이라면 일체 공력은 다 과보가 없으니, 
왜냐하면 ‘공’의 경계 제 성품이 청정하지 않는 것이어서 비록 도를 낸다 하더라도 그 속됨을 제거할 수 없고 도가 곧 소용이 없게 되므로 이런 이치가 없기 때문에 이 ‘공’은 청정하지 않은 성품이 아니 줄을 알 것이다.


【문】만약에 그렇다면 이미 제 성품의 청정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역시 제 성품의 청정한 것도 없어야 하겠다. 
늘 어떻게 법계(法界)를
청정한 것이 아니라거나 청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분별하여 판정할 수 있습니까?


【답】아마라식(阿摩羅識)이 바로 제 성품의 청정한 마음이로되
다만 객(客)ㆍ진(塵) 번뇌에 더럽힘이 되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다고 말할 뿐이니, 
객ㆍ진을 다 끊기 위해 청정하다고 세우는 것이다.


【문】무엇 때문에 반드시 청정하다거나
결코 청정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고서, 
혹은 청정하고 혹은 청정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답】법계가 다섯 가지 느낌[五入]과 선정(禪定) 등의 그 뜻과 다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청정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눈[眼] 등 모든 감관을 비록 번뇌에 덮였으나
그 번뇌에 더럽힘이 되지 않으며, 
또 이는 청정한 것이 아니고, 
또 제 성품의 청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법계라면 비록 번뇌에 덮이더라도
그 번뇌에 더럽힘이 되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또 이야말로 제 성품을 청정한 것이다. 
이 제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알라. 
법계가 다섯 가지 느낌과는 바탕이 다른 것이다.


【문】어째서 결정코 청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합니까?
【답】선정을 더불어 다른 것이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 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법계를 결정코 번뇌가 있다고 말한다면
곧 제 성품이 청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법계가 비록 번뇌에 덮임이 될지라도
제 성품은 청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결코 청정하지 않다거나 결코 청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그것이 
바로 법계의 도리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그대로 진리[如如]의 결코 청정함을 말하지 않고서
그냥 청정하고 청정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중생들로 하여금 도를 닦게 하기 위해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을 설한 것이니, 
곧 그대로의 진리가 다섯 가지 감관과 다름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로의 진리와 다섯 가지 감관이 같이 번뇌에 덮이더라도 
그 번뇌에 더럽힘이 되지 않음은 다 청정한 것이로되, 
그러나 그 청정한 이치가 다른 것이 있다. 


왜냐하면 다섯 가지 감관의 자체가 번뇌를 여의는 것은 번뇌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다섯 가지 감관이 다만 청정하기만 하고 청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대로의 진리는 번뇌를 여의지 않고서 바로 번뇌의 제 성품이니, 
이 때문에 청정하면서도 다시 청정하지 않는 이치가 있는 줄을 알라. 


또 그대로의 진리와 선정도 같이 번뇌에 덮이어선 
다 청정하지 않는 이치가 있긴 하되, 
그 청정하지 않는 이치가 같지 않은지라, 


만약 선정의 경우라면 번뇌에 덮이면서 다시 더럽히게 되어 
한결같이 제 성품을 잃어버리고 온 전체가 번뇌를 이룩함과 동시에 
또 선하지 않는 것을 이룩한다. 




그러나 만약 그대로의 진리라면 비록 번뇌를 다시 여의지 않아 
청정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제 성품을 잃지 않고, 
도한 번뇌와 선하지 않는 것을 이룩하지 아니하나니, 
이 때문에 곧 청정하지 않으면서도 다시 청정한 이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세 글귀로 나눠 말할 수 있으니, 
첫째 다섯 가지 감관이 번뇌를 여의는 것은 번뇌에 더럽힘이 되지 않으므로 
다만 청정할 뿐이어서 청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둘째 선정이 번뇌를 이룩함은 그 번뇌에 더럽히게 됨으로 다만 청정하지 않을 뿐이고 
다시 청정한 것이 있지 않다. 


셋째 그대로의 진리는 다섯 가지 감관과 다르기 때문에 
번뇌에 더럽히지 않는 그것이 곧 청정하고 
번뇌를 여의지 않는 그것이 곧 청정하지 않음이라, 
이 때문에 청정하면서도 다시 청정하지 않는 이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 그대로의 진리는 선정과도 다르기 때문에 번뇌를 여의지 아니하나니, 
이 때문에 청정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제 성품을 잃지 않으며 
번뇌와 선하지 않음을 이룩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이 때문에 곧 청정하지 않으면서도 다시 청정한 이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도리를 밝힘이 그 둘이다. 
사람도 없고 법도 없으니 만큼 이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실히 사람도 없고 법도 없는 그 도리가 있으니 만큼 이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진실히 있기도 하고 진실히 없기도 하다고 말함이다. 
이것이 바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도리를 밟힘이다.
다음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도리를 밝힘이 그 셋이다. 




모든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이란, 
청정한 것은 곧 아주 없는 ‘단(斷)’을 여의고 
언제나 있는 ‘상(常)’을 여읨이니, 
‘상’의 이치가 ‘나[我]’와 다르기 때문에 같지 않다고 말한다. 
‘나’의 몸이 ‘상’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고 말함이니, 
이것이 그대로의 진리에 그 세 가지 덕을 갖추었음을 밝힌 것이다.




이 열여섯 가지 ‘공’을 네 가지 과(科)로 만들어 간추리겠으니, 
맨 처음에 있는 여섯 가지 ‘공’은 그 ‘공’의 제 모양을 변론한 것이고, 
그 다음에 있는 여덟 가지 ‘공’은 ‘공’의 일과 작용을 변론한 것이다. 
셋째 있는 두 가지 ‘공’은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을 변론한 것이고, 
넷째는 이 열여섯 가지 ‘공’의 이치가 네 가지 과실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을 밝힘이다. 




네 가지 과실을 제거함이란, 
희론(戱論)을 제거하는 것이 그 첫째이고,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 그 둘째이고, 
게으름을 제거하는 것이 그 셋째이고, 
의혹을 제거하는 것이 그 넷째이다.




첫째의 희론을 제거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세간의 중생들이 안팎의 법 가운데 한량없는 희론을 일으키니, 
이른바 ‘나’가 있다거나 ‘나’가 없다는 등 다 사람과 도(道)의 결과에 의지하는 이러한 것들이 곧 희론이라, 
만약에 도와 또는 도의 결과까지도 죄다 공한 것으로 본다면 능히 이러한 희론을 제거하리니, 
만일 안이 공하고, 
바깥이 공하고, 
안팎이 다 공하고 원소[大]가 공한 이 같은 네 가지 공한 것이 세간의 사람과 법인 두 가지 ‘나’의 희론을 제거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공’도 역시 공하고 제일의 이치 진실도 공한 이 같은 두 가지 공한 것이 세간을 뛰어난 인과(因果)의 경계와 지혜 등 모든 희론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의 두려움을 제거함이란, 
중생으로서 사람이 다 공함이라고 들으면, 
곧 두려움을 내어 도 닦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여래께서 그들을 위해 이 공의 일과 공용이 있음을 설하시나니, 
왜냐하면 능히 이 여덟 가지 공의 일과 공용을 닦는 사람은 곧 그 도와 도의 결과를 얻을 수 있고, 
또한 세 가지 몸의 일체 공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의 게으름을 제거함이란, 
만약에 결코 청정한 것으로 관한다면 도를 닥을 필요가 없고, 
결코 청정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아주 소멸할 수 없음으로써 도를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생사에 처하여 끝내 해탈할 수 없으리니, 
이 때문에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을 변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혹이 있을 적엔 청정하지 않고, 
의혹을 제거한 뒤엔 곧 청정하기 때문에 반드시 도 닦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넷째의 의혹을 제거함이란, 
만약에 의혹된 자의 마음으로 이미 그대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없는 것이라고 함을 듣는다면, 
곧 망설이게 되어서 결단할 수 없으리니, 
이를테면, 
둥치를 보고 사람이라고 하거나 사람을 불러 둥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러한 자를 위해 분별하사 
사람과 법의 두 가지 ‘나’가 결코 없는 것임을 밝히시는가 하면, 
사람도 없고 법도 없는 도리가 결정코 있기 때문에 
공한 것임과 또는 있고 없는 두 가지 이치가 있는 것임을 밝히심이니, 
이러한 도리가 능히 의혹된 마음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유식(唯識)의 진실함을 밝히겠으니, 
일체 법은 청정한 식(識)이 있을 뿐이어서 
의심하는 것이 없고 의심할 것도 없는 것이다. 
넓은 해석은 『유식론(唯識論)』에 있는 그대로이고, 
다만 유식의 뜻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방편의 유식이다. 




이를테면 먼저 아리야식(阿梨耶識)만이 있고, 
다른 경계가 없음을 관하여서 현전에 경계와 지혜의 두 가지≺공≻함을 얻어 허망한 식을 제거해 이미 다하는 것이다. 
이것을 방편의 유식이라고 하며, 
다른 하나는 바르게 관하는 유식이니, 
이를테면, 
생사에 허덕이는 허망한 식의 마음과 그 밖의 경계를 일체 다 깨끗이 하고 다만 아마라식(阿摩羅識)의 청정한 마음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넷째로 의지하는 곳의 진실함은 이른바 괴로움의 의지하는 진리가 그것이다. 
다섯째로 삿된 행의 진실함은 이른바 쌓임의 진리가 그것이고, 
여섯째로 청정의 진실함은 곧 사라짐의 진리가 그것이다. 
일곱째로 바른 행의 진실함은 곧 도의 진리가 그것이다. 




네 가지 진리에 각각 세 가지가 있으니, 
이는 이미 별도로 해석한 그대로이다.
『해절경(解節經)』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일곱 가지 진여(眞如)를 밝혔으니, 


첫째 나는 진여이고, 
둘째 모양의 진여이고, 
셋째 의식의 진여이고, 
넷째 의지하는 진여이고, 
다섯째 삿된 행의 진여이고, 
여섯째 청정한 진여이고, 
일곱째 바른 행의 진여이다. 




첫째의 나는 진여란, 
이를테면 함이 있는 모든 법은 죄다 진여가 없는 것이고, 
둘째의 모양의 진여란, 
이를테면 사람과 법인 이 두 가지가 다 ‘나’가 없는 것이고, 
셋째의 의식의 진여란, 
이를테면 일체 함이 있음은, 
다만 의식이 있을 뿐인 것이고, 
넷째의 의지하는 진여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를 설한 것 그대로이다. 
다섯째의 삿된 행의 진여란, 
이른바 쌓임의 진리를 설한 것 그대로이고, 
여섯째의 청정한 진여란, 
이른바 사라짐의 진리를 설한 것 그대로이다. 
일곱째의 바른 행의 진여란, 
이른바 도의진리를 설한 것 그대로이다. 
이 일곱 가지 진여가 곧 제1의 이치인 진리이고, 




제1의 이치인 자리가 곧 진실한 성품에 섭수된 것이라 이것을 일곱 가지진여라 하고, 
이것이 바로 앞서 밝힌 일곱 가지 진실이니, 
구족한 것은 삼무성론(三無性論) 가운데 널리 해석한 그대로이다.








【문】어떻게 이 일곱 가지가 다 제1의 이치인 진리이고, 
곧 진실한 성품에 섭수된 것인 줄을 아십니까?
【답】두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이 일곱 가지가 다 가장 수승하고 가장 지극한 것인 줄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이것이 곧 두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가장 수승함이란, 
바로 그대로의 진리가 제1의 이치인 진리이고, 
이 제1의 이치인 진리가 곧 이치대로의 지혜[如理智]에 비춰지기 때문에 가장 수승하다고 이르는 것이다. 
가장 지극함이란, 
바로 이 일체 지혜의 경계가 곧 세속의 진리이고 이 세속의 진리가 수량대로의 지혜[如量智]에 비춰지므로 이치대로의 지혜는 곧 분별이 없는 지혜이고 수량대로의 지혜는 곧 분별이 없는 뒤의 지혜이다. 
또 그대로의 진리는 곧 일체 갖가지의 지혜이고, 
수량대로의 지혜는 곧 일체의 지혜이므로 오직 이 하나의 지혜가 진리를 통함으로써 곧 세속을 통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이것이 바로≺공≻의 이치이고 진실한 이치이므로 이를 이름하여 이치대로의 지혜, 
또는 일체 갖가지의 지혜라 하는 것이다. 
만약 세속의 이치라면 이 이치를 이름하여 수량대로의 지혜, 
또는 일체 그대로 지혜라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른바 가장 수승하고 가장 지극한 이 두 지혜의 경계는 곧 이치대로의 지혜와 수량대로의 지혜만으로 알 바다.




다시 별도의 뜻이 있으니, 
이 일곱 가지 진여는 바로 진실한 성품에 섭수한 것인 줄을 알지라. 
왜냐하면 일체 진실한 법이 다 같고 다른 등 허망한 생각을 여의는 것을 밝히었으니, 
이를테면 하나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어서 네 가지 비방[四謗]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 일곱 가지 진여는 모든 모양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고, 
모든 모양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니, 
모든 모양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고 모든 모양과 다르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다르고 다르지 않거나 다른 것이 아니고 다르지 않는 것이 아님을 다 말할 수 없는지라, 
이 일곱 가지 진여는 모든 모양 가운데에서 그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그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또 있거나 없거나, 있는 것이 아니거나 없는 것이 아님을 다 말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비방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다시 별도로 있는 것인 줄을 믿어야 할 것이 있으니,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청정한 경계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마음으로 이 법을 인연하여 마음이 청정하다면, 
이 때문에 이 일곱 가지 진여가 다 항상 머물러 
언제나 그 성품이 다르지 않으므로 이것이 청정한 경계인 줄 알라. 


이 때문에 진실히 선한 성품은 이 진리로 말미암아 항상 선한 것인 줄을 알지며, 
이 때문에 이것이 바로 즐거움의 진리인 줄을 알지니, 
왜냐하면 항상하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고, 
선하기 때문에 청정한 것이다. 




이러한 일곱 가지 진여가 곧 일체 법의 체성(體性)이고 
이것이 체성이기 때문에 ≺나[我]≻라고 말하나니, 
곧 이것이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네 가지 덕이다.




또 해석하건대, 
왜 이 일곱 가지를 진여라 하는가 하면, 
제1의 이치인 진리의 진실한 성품이란, 
그 모두가 한 맛이기 때문이다.




첫째의 나는 진여란, 
이를테면 인과(因果)의 체(體)는 같으면서 명자(名字)가 다름이 있을 뿐이다. 


어째서 같다고 하는가 하면, 
다 같이 남을 의지하기 때문에 인(因)이 있고 이미 
남을 의지하기 때문에 과(果)도 역시 남을 의지하나니, 
이 인과의 체가 곧 다섯 가지 쌓임[五陰]이다. 


다섯 가지 쌓임이 선도, 악도 없는 것을 이르되 과(果)라 하고, 
다섯 가지 쌓임이 선과 악의 구별이 있는 것을 이르되 인(因)이라 하며, 
그 나는 것을 이르되, 인이라 하고, 
그 날 것을 이르되 과라 하며, 
역시 앞의 것에 대해 과라 하기도 하고, 
뒤의 것에 대해 인이라 하기도 하나니, 
이 때문에 똑같은 다섯 가지 쌓임이면서 
인의 이름이 있고 과의 이름이 있을 뿐, 
그 체는 실상 다름이 있지 않는 것인 줄 알라. 




동일한 체이면서 명자가 다름이 있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 인이나 이 과가 이미 다 남을 의지한다면 
이는 제 성품이 없는 것이고 
제 성품이 없기 때문에 그 체가 진실하지 않는지라, 
이 때문에 한 맛이라 함이니, 
곧 동일하게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나는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한 맛이란, 
이 나는 진여가 이미 남의 성품을 의지한다면 이는 진실히 나는 것이 없는지라, 
이 때문에 나는 진여 그것이 바로 나는 성품이 없어≺공≻한 것이고, 
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곧 동일한 맛이다. 




셋째 이것이 남의 성품을 의지한다면, 
반드시 분별하는 성품이 있으리니, 
분별하는 성품이 이미 모양 없는 성품이고, 
모양 없는 성품이 곧 모양 없는 진여이고, 
모양 그대로의 진여가 곧 한 맛이다. 
이 때문에 이 세 가지 뜻으로써 나는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의 모양의 진여란, 
법의 공통된 모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사람과 법의 두 가지 ‘나’없는 것이 곧 두 가지 공한 이치이므로 이를 일체 법의 공통된 모양이라고 함이니, 
일체 법의 공통된 모양이 곧 이른바 모양의 진여인 것이다.




셋째의 의식의 진여란, 
만약 의식만이 있고 경계가 없다면 그 경계가 이룩되지 않기 때문에 의식도 역시 이룩되지 아니하나니, 
이는 인연하는 것과 인연할 것이 다 같이 얻을 수 없는 그 성품인지라, 
이 때문에 의식이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네째의 의지하는 진여란, 
이른바 괴로움이 그것이니, 
다섯 가지 쌓임이 그 체(體)가 되는지라, 
이 다섯 가지 쌓임이 곧 중생들의 의지하는 곳이어서 여기에 의탁하여 
≺나≻라든가, 
사람이라든가, 
중생이라든가, 
수자(譯者)라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의지라 한다. 




괴로움의 진리에 네 가지 모양이 있으니 
이를테면 괴로움과 덧 없음과 ≺공≻학과 ≺나≻없음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이치가 모두 뒤바뀜이 없으므로 다 진실이라 하나니 이것이 바로 의지하는 진여이며, 
둘째는 이 아래 네 가지 모양이 모두가〈공)하여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다 진실이라 하나니 역시 의지하는 진여인 것이다.






다섯째 삿된 행의 진여란 
이른바 쌓임의 진리[集諦]가 그것이니 쌓임이 두 가지 이치가 있기 때문에 진여라고 일컫는 것이다. 




첫째 뒤바뀜이 없는 진여이니 이를테면 능히 내는 이치로서 이 이치의 진실한 것이 곧 쌓임의 진여이고, 
둘째 내는 것이나 낼 것이 다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를 삿된 행의 진여라고 하는 것이다.








여섯째 청정한 진여란, 
이른바 사라짐의 진리[滅諦]가 또한 두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 뒤바뀜이 없는 진여이니 네 가지 덕이 다 뒤바뀜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진여라 한다. 
둘째 사라짐의 진리는 생사와 더불어 차별이 없이 모두가 그대로 진리이니, 
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청정한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곱째 바른 행의 진여란, 
이른바 도의 진리[道諦]가 그것이다. 
도는 곧 지혜이니, 
지혜는 무명(無明)을 더불어 그 체성이 서로 어긋나고 도는 곧 뒤바뀜이 없어 진여가 그 도와 같다. 
또 번뇌의 체가 같기 때문에 두 가지가 공하여 다 아무것도 없는지라, 
이 때문에 한 맛의 그대로이기 때문에 바른 행의 진여라 함이니, 
진여라거나, 
그대로의 진여라거나, 
또는 진실이라거나 다 바른 행의 진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열 가지 수승한 지혜의 진실이란, 
열 가지 수승한 지혜가 있음으로써 열 가지 ‘아견(我見)’을 제거할 수 있나니, 


첫째 하나라는 고집이고, 
둘째 인(因)이라는 고집이고, 
셋째 느낌이라는 고집이고, 
넷째 지음이라는 고집이고, 
다섯째 자재(自在)라는 고집이고, 
여섯째 증상(增上)이라는 고집이고, 
일곱째 항상하다는 고집이고, 
여덟째 청정하다거나 청정하지 않다는 고집이고, 
아홉째 수행이라는 고집이고, 
열째 계박(繫縛)이라거나 해탈이라는 고집이다.






첫째의 하나라는 고집이란, 
이를테면 모든 법을 한데 모아서 통틀어 하나의 이름을 성립시킴이니, 
이는 곧 아주 없다는 단견(斷見)에 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칠입론(七立論)의 게송에 설한 바 그대로 마치 언덕이 무너지면 다시 본래대로 환원할 수 없고 또한 무덤 속의 시체는 두 번 오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니, 
감관과 경계만을 중성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성인의 말씀대로라면, 
공중의 새 발자취를 볼 수 있겠느냐고 하신 말씀이 곧 그것일 것이다. 
이것은 세입(世入)의 외도들이 하나라는 고집을 나타내는 것은 이러한 것이니, 
그들의 이른바 몸이 곧 ‘나’인 만큼 몸이 사라지면 ‘나’도 없어진다는 그것이 바로 단견에 떨어지는 것이라 이 고집을 깨뜨리기 위해 다섯 가지 쌓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수승한 지혜가 비록 세 가지 뜻이 있지만 많이 합쳐 모음과, 
또한 그것과 다름을 분별하는 것을 말하나니, 
세 세상[三世]의 물질과 마음을 모두 쌓임이라 하기 때문에 많이 합쳐 모으는 것이라 한다. 




세 세상 물질과 마음의 합쳐 모으는 것이라 하고 물질 덩어리가 느낌과 드리고, 
느낌 덩어리가 또 생각 따위와 다르기 때문에 그 다름을 분별함이라 하나니, 
이것을 다섯 가지 쌓임이라 한다. 






만약 다섯 가지 쌓임에 이 세 가지 뜻이 있는 줄을 분명히 안다면 
곧 하나라는 고집이 없을 것이다. 
이른바 세 세상이란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현재는 머물지 않는 것인데, 




일체 안팎의 모든 물질을 다 같이 쌓임이라고 하는지라, 
이 세 가지 뜻으로써 세 가지를 대치(對治)하나니, 
이를테면 첫째 무명이고, 
둘째 가정으로 설하는 무명이고, 
셋째 서로 뒤섞인 무명이 그것이다.




첫째의 무명이란, 
세입의 외도들이 이른바 
‘몸은 이 하나의 물체이고 하나의 물체는 곧 ‘나’라고 하는 것과 같으므로 
사람들이 다만 세 세상의 다섯 가지 쌓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단견에 떨어지는 것이니, 
이는 곧 쌓임을 ‘나’인 줄 계교하여 쌓임이 사라지면 ‘나’도 없어지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해 세 세상의 다섯 가지 쌓임은 하나가 아니고 많은 것임을 설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 하나라는 고집을 깨뜨린 것이다.




둘째의 가정으로 설하는 무명이란, 
저 우루카(優累佉) 따위 외도들이 
이른바 ‘몸은 다른 부분’이라고 함이 그것이다. 


이는 곧 사람과 법을 다른 것으로 보아 쌓임을 떠나서 ‘나’를 고집하기 때문에 
상견(常見)에 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과 법이 이미 다를진댄 
쌓임이 사라져도 ‘나’는 존재한다고 말함은 
그 모든 쌓임을 합쳐 모아서 가정으로 사람이 된다고 말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름뿐이요 체(體)가 없거늘 
이 가정으로 설한 것에 미혹하기 때문에 
가정으로 설하는 무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모든 합쳐 모은 것을 법이라고 가정으로 말하지만 
그 법의 체가 곧 ‘공’한 것임을 설하셨으니, 
바로 그들의 고집을 깨뜨림이다. 


이 때문에 능히 가정으로 설하는 무명을 제거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의 서로 뒤섞인 무명이란, 
일체 유부(有部)에서 고집하는 
이른바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聖道] 가운데 
바른 생각과 바른 소견이 다 같이 지혜에 섭수되는 것’이란 말과 같다. 
그 두 가지의 다름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집착을 낸 것이다. 




그러므로 경부(經部)와 대승 스님들이 설하시기를, 
“바른 생각이란 앞의 이치를 구하려 하다가 결단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뜻을 짓나니, 
뜻을 짓는 것은 바로 뜻의 업이기 때문에 이는 지혜에 섭수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바른 소견을 지혜라 하느니라”고 하셨다. 




통틀어 논하자면 
일체 알아보아서 통달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 지혜에 속하나니, 
다섯 가지 쌓임도 그러한지라. 
만약에 느낌이 생각과 다르고 생각이 지어감과 다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서 
다만 느낌과 생각을 동일한 물건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 체성(體性)을 잃었기 때문에 서로 뒤섞인 무명이라 함이니, 




서로 뒤섞인 무명이기 때문에 
바른 소견을 잃는 것이고 바른 소견을 잃는다면 해탈할 수 없는지라,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해 다섯 가지 쌓임의 체성이 같지 않음을 설하여 느낌과 생각 등의 다른 점을 분별하시어 공통되고 차별되는 두 모양을 성립하셨으니, 
차별된 모양이란, 
증명하는 소견을 내는 것이다. 
공통된 모양이란 비교하는 소견을 내는 것이다.








【문】다섯 가지 쌓임이 어떻게 근본의 진실에 섭수될 수 있습니까?
【답】물질이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 분별의 물질로서 
역시 길고 짧음과 크고 작음과 모나고 둥근 그러한 이치가 있는 것은 
다 분별의 거짓에 속함이니, 
그 별다른 체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종류의 물질로서 각각 종류가 있음은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내는 것과 같음이니, 
불이 나는 것을 원인으로 삼음은 불을 내는 분야의 종류이다. 
종류가 이미 그 비슷할진댄 
이는 곧 진실한 법의 서로 나는 것이 남을 의지하는 거짓에 속함이니, 
그 종류가 원인을 의지해 이룩되기 때문에 제 성품의 힘이 아닌 것이다. 


셋째 그대로[如如]의 물질이다. 
만약에 분별이 거짓의 이름이라면 한결같이 체가 없으리니, 
이로 법이 ‘공’한 것이다. 
만약에 남을 의지한 거짓이라면 
비록 또 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체는 진실이 아니고 남을 의지해 있으리니, 
이 역시 법이 ‘공’한 것이다. 


이 두 ‘공’의 체가 이미 진실이기 때문에 그대로의 물질이라 하고, 
또 이러한 것이 물질의 제 성품이기 때문에 이 물질을 그대로라고 지목함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로의 분야에 속하는 물질이기 때문에 그대로의 물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끝으로 뿌리에 따르는 것을 이름하여 본래 끝이라 지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진실을 이름하여 
진실의 거짓이라고 하는지라, 
거짓 체는 곧 ‘공’이기 때문에 진실이라 하고, 
거짓 ‘공’은 곧 그대로이기 때문에 진실의 모양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물질의 쌓임이 이미 세 가지 거짓이어서 거짓에 섭수되는 것인 만큼 
느낌 등 네 가지 쌓임의 이치도 저절로 다 그러하여, 
모두가 세 가지 거짓에 섭수되는 것이리니, 
괴로움을 느끼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그것이 분별의 거짓이라, 




분별의 체가 인연을 따라 ★★ 나고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것이 곧 남 ★★을 의지한 거짓이며, 
그대로를 진실의 거짓이라 하나니, 
만약에 공통된 모양과 차별된 모양을 분별한다면 
이 마음이 곧 생각인 것이다. 




만약에 괴롬과 즐거움을 받아들이되 
분별하는 집착이 없다면, 
이를 느낌이라고 할 것이다.




다음 둘째의 이른바 인(因)이라는 고집이란, 
이 고집을 끊기 위해 열여덟 경계의 수승한 지혜를 이룩한다. 




모든 외도 무리들은 다 일체 법이 ‘나’를 인하여 나게 되는 것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이를 인이라는 고집이라 한다. 




‘나’에 아홉 가지 법이 있으니, 
이를테면 알음과 즐거움과 괴로움과 탐욕과 진심과 공력(功力)과 생각과 법과 또는 법 아닌 것이다. 




‘나’가 이미 본래 있음으로써 
‘나’를 따라 법과 법 아닌 것이 생기고, 


법과 법 아닌 것이 
마음으로 하여금 ‘나’와 함께 화합하기 때문에 알음이 있다. 




알기 때문에 즐거움이 있고, 
즐겁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으며,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탐욕을 내고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진심을 낸다. 
즐거움을 얻으려고 이 때문에 괴로움을 싫어하여 공력을 닦고 
공력을 닦기 때문에 바로 생각이 있으며, 
해탈을 얻으려고 이 때문에 법과 또는 법 아닌 것을 반드시 제거하는데, 
만약 법과 법 아닌 것이 나지 않는다면 알음이 없겠고, 
알음이 없다면 이 때문에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해탈을 구하려면 네 가지 법을 닦아야 할지니, 
첫째 진실한 말이니, 
곧 계율을 지킴이고, 
둘째 보시이고, 
셋째 고행(苦行)이고, 
넷째 선정이다. 




만약에 이 네 가지 바른 법을 닦는다면 선한 도를 내게 되리니, 
선한 도는 즐거움을 얻고 즐거움은 지혜가 있다. 
지혜인 즉 법과 법 아닌 것을 싫어하고 법과 법 아닌 것을 싫어한다면 해탈할 수 있는 것이다. 




대승에서 깨뜨려 이르기를, 
“만약에 먼저 ‘나’가 있으면서 법과 법 아닌 것은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후에 어떤 인연으로 나는 것이 없으리라”고 하였으니, 
해탈도 그러한지라, 




해탈을 얻은 뒤엔 역시 어떤 인연으로 다시 법과 법 아닌 것이 나지 않으리니 
이렇다면 해탈할 때가 없을 것이다.


경계라 함은 종자라는 뜻이니, 
자기의 종류가 이른바 종자이고, 
종자는 또 동일하다는 뜻이니, 
그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만 종자로부터 열매를 나눠 퍼뜨림으로써 
드디어 열여덟 경계를 이룩할 뿐이다. 




그런데 종자에 세 가지 있으니, 
첫째는 능히 집착함이고, 
둘째는 집착할 바이고, 
셋째는 눈[眼] 등 여섯 감관을 집착함이다. 
능히 집착하는 종자는 세 종자의 종류라고 하나니, 
바로 능히 나는 것으로 
다만 인연을 따라 승부(勝負)가 다름이 있거나 나는 열매가 같지 않을 뿐이다. 




이 때문에 과거의 탐심으로 말미암아 
여섯 대경[大塵]에 업을 내고 아리야식(阿梨耶識)을 훈습하나니, 
종류가 이미 같아서 동일한 탐심이기에 종자라고 말하고, 
이 하나의 종자가 능히 여섯 감관을 다른 열매를 얻기 때문에 
인(因)을 여섯 종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감관을 능히 잡는 집착함이라고 말한 것은 
감관이 나타남은 이미 마음의 법이 아닌 만큼 사실 집착할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외도들이 
‘감관 가운데 따로 사람이 있어서 이것이 집착하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방편으로 감관을 집착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물질 등 여섯 대경은 잡을 것의 종자이니, 


자기 종자로 말미암아 나기 때문에 
또는 과거의 탐심으로 말미암아 
안의 감관이 바깥 대경을 사용하고자 하기 때문에 
탐하는 감관과 탐하는 마음이 이 물질에 나는 것을 말함이다. 








또 여섯 대경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여섯 감관이 있는가 하면 
다시 대경을 탐하는 그 탐심이 여섯 감관에서 나는 것이다.




여섯 의식은 이 잡음의 종자이라, 
탐하는 안의 감관을 따라 바깥 대경이 이 열여덟 가지 경계를 내나니, 
인(因)을 따르는 것은 경계라고 하기 때문에 경계가 곧 종자인 것이다. 




이 경계를 빌어 설한 것이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 짓는 것이고, 
둘째 지을 것이고, 
셋째 지음이 그것이다.




구치라(俱絺羅) 비구가 외도에 있을 적에 
‘나[我]가 이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부처님께 와서 묻는 것을 
부처님이 그를 위해 방편으로 “눈 등이 이 짓는 것이고 
그 눈 등을 잡음이 ‘나’의 짓는 것”이라고 설하셨다. 




또 하나의 쌓임[陰]을 깨뜨리기 위해 보여 주시기를, 
‘감관을 떠난 그 이외엔 따로 ≺나≻가 없는지라, 


다만 눈 등이 인연을 따라 나기에 짓는 것이라 하지만 실상 짓는 것이 없고 
여섯 ★★ 대경을 빌려서 짓는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하셨으니, 




이것이 승카(僧佉) 외도들의 내세우는 
두 가지 ‘항상한 나[常我]’라는 것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첫째 알음이 있는 ‘나’를 일컬어 ‘항상한 나’라 하지만, 
이미 항상하기 때문에 이는 짓는 것이 아니고, 
둘째 알음이 없는 ‘나’를 잡아서 곧 일체 법이라 하지만, 
알음이 있는 ‘나’가 제 성품으로써 지혜를 성취하니 만큼 이는 지을 것이 아니다. 




이 부처님께서 여섯 대경을 가정으로 설하여 지을 것이라고 하신 것은 이런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실지로 짓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대경이 또한 지을 것이 아닌 줄을 알 것이다.
또 이 때문에 지음이 이 여섯 의식인 것임을 가정으로 설하셨으니, 


첫째는 외도들의 이른바 ‘일체 일이 다 설하셨으니, 
첫째는 외도들의 이른바 일체 일이 다 ‘나’의 뜻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을 깨뜨림이니, 
이것은 증익(增益)에 대한 비방이요, 


둘째는 삿된 소견을 가진 외도들의 이른바 ‘나’가 항상하고 ‘나’가 항상하기 때문에 모든 법도 항상하고 이미 두 가지가 다 항상하기 때문에 짓는 것과 지을 것이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손감(損減)에 대한 비방이므로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게 하기 위해 여섯 대경을 가정으로 설하신 것이다. 
감관과 대경을 짓기 위해 뜻을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음이 없고, 


만약 감관과 대경을 여읜다면 의식도 없으리니, 
왜냐하면, 
의식은 반드시 감관과 대경을 의지하여 바야흐로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있지도 않고 짓지도 않은 것이니, 
바로 외도들의 이른바 짓는 것과 지을 것 등 세 가지 무명을 깨뜨리기 위해 이 세 가지 뜻을 내세움이다. 




또 종자가 능히 집착함과 집착할 바 등이 있는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열여덟 가지 경계를 내세움이다. 


만약에 열여덟 가지 경계가 네 가지 인연으로부터 나는 것을 안다면 내가 능히 내는 따위가 된다고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감관을 이르러 짓는 것이라 함은, 
그 짓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의식과 대경을 내고, 
둘째 대경을 위해 인연을 지음이 그것이다. 




대경을 이르되 지을 것이라 함은 
그 대경이 눈의 인연 짓는 것이 되고 의식의 의지할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의식을 일으키되 짓는 것이라 함은 이 의식의 일어나는 것이 곧 사업의 이치와 경계의 이치가 있어서 근본의 지실을 따르기 때문이다. 






또 눈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하는 눈이고, 
둘째는 종류의 눈이고, 
셋째는 진리의 눈이고, 
또한 행(行)과 행이 아닌 수승한 지혜의 눈이다. 




예컨대 앞서 다섯 가지 쌓임[五陰] 가운데, 
네 가지를 해석한 것과 같음이니, 
이를테면 짓는 것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 
열두 가지 인연이 인과(因果)를 내는데, 
세 가지 증감(增感)이 없음을 설한 것이 곧 그것이다. 






증감이란 
이른바 지어감[行]과 의식 등 열한 가지 갈래[十一支]의 그 인(因)을 내세움이 
평등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항상 함이 없는 법을 항상한 것으로 내세움이 
그것을 인이라고 하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승카(僧佉) 외도들이 ‘알음이 없는 나’를 내세워 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음이다. 
또 우루카(優累佉)들이 항상한 ‘나’를 내세워 인이라 하기도 하고, 
자재천(自在天)을 고집하여 항상한 것이라 하기도 한다. 




업 짓는 것을 역시 항상한 것으로 내세워 인이라 하기도 하고, 
한편 그 짓는 것의 항상함이 없는 것을 과(果)라고 하는 것과 같음이니, 
인과(因果)가 곧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그 인을 내세우는 것이 
평등한 이치가 아니고 항상함이 없는 과를 논(論)하기 위해 
스스로 무명이 있는 것을 내세워 그 인을 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의 이른 바 항상함이 있는 인이란 것이 곧 그 인의 이치를 증익하는 것이다. 
인을 손감하는 것이란, 
니건자(尼犍子) 외도들의 이른바 모든 법은 자연히 있고 아무런 인연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음이니, 
실지 있는 것을 없다고 하기 때문에 이는 그 인의 이치를 손감하는 것이다. 




과(果)를 증익하는 것이란, 
역시 승카(僧佉)들의 내세우는 이치와 같음이니, 
이른바 인 가운데 이미 과가 있다고 하는 것이 곧 그것이다. 
과가 비록 본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인으로 말미암아 그 과를 나타내기 마련이고, 
이 과가 이미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면 인을 따르지 않고도 저절로 그 과가 생겨나야 하겠거늘 이치가 실로 인연이 쌓이고 모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과가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이 집착하여 본래부터 있다고 말하는 것이 곧 그 과를 증익하는 것이다. 




과를 손감하는 것이란, 
저 ≺단견(斷見)≻에 치우친 외도들의 내세우는 이치와 같음이니, 
이른바 일체 업은 다 과에 감응되어 미래에 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실지 감응되는 것도 있고 실지 나는 것도 있거늘, 
그들이 삿된 고집으로 모두 다 없음을 내세우기 때문에 이것이 곧 그 과를 손감하는 것이다. 




일을 증익하는 것이란, 
자재천(自在天)의 고집하는 것과 같음이니, 
이른바 일체 일은 다 나의 뜻과 마음을 따라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명의 체(體)가 따로 뜻을 짓는 것이 있어서 행을 낸다거나, 
무명의 체가 따로 뜻을 짓는 것은 실지 없으면서도 행을 낸다는 것과 같음★★이다. 


또 우루카(優累佉)의 고집하는 것과 가음이니, 
이른바 법의 체도 동전(動轉)하는 사업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올리고 내리고 굽히고 펴는 등 다섯 가지 사업이 있으니, 
그 동전하는 것을 체라고 고집하는 것이다. 
체를 떠난 이외엔 실지 별다른 사업이 없거늘 
그들이 삿된 고집으로 있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이 곧 그 일을 증익하는 것이다. 




일을 손감하는 것이란, 
외도들의 고집하는 이른바 무명은 행을 낼 힘이 없으니, 
무명이 있거나 있지 않거나 자연행이 있기 때문에 그 무명은 행을 낼 힘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열두 가지 인연이 번갈아 서로 나는 이치를 깨닫는다면 
인과와 일 등 증익하고 손감하는 여섯 가지 삿된 고집을 여읠 수 있을 것이다.






대략 열두 가지 인연의 그 인과의 이치를 밝히건대 스스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항상함이 없음을 밝히고, 
둘째 동전(動轉)하는 뜻이 없음을 밝히고, 
셋째 인과의 본체와 모양을 분별한다. 






만약에 마음이 항상한 것이라면 인과가 없겠지만, 
마음은 이 항상함이 없기 때문에 인과의 이치가 성립되는 것이다. 


만약에 동전하는 뜻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인은 응당 뜻을 지니어 
과를 내고 과는 응당 뜻을 지어 
비로소 인을 따라 나는 것이 곧 자유로워야 하겠고, 
남을 의지하여 난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니, 


남을 의지하는 이치란 
인이 과를 의지하고 과가 인을 힘입어 이룩되는 것이다. 
서로가 기다리는 것은 죄다 남을 의지하는 이치이니, 
그러므로 이 가정은 실다운 성품이 없는 것이다.




만약에 서로가 같지 않다면 
인과의 이치를 잃어버리는 것이어서 
마치 콩이 보리를 내지 않는 것과 같으리니, 
인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가 내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과로 하여금 인과 같지 않고 
인으로 하여금 과와 같지 않다면, 
나쁜 짓을 한 자도 천상에 태어나고 착한 일을 한자도 지옥에 떨어지며, 


또한 생사에 유전할 자도 해탈에 감응될 수 있고 
생사의 유전이 없는 자도 다시 생사를 더해야 할지니, 
이 때문에 무상(無常)이 무상을 내는 것은 이 자연의 이치 그대로이다. 
구태여 뜻 지음이 있다고 고집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인과의 서로 같은 것을 열두 가지 인연의 부분이라 함은 
이 이치가 세 가지 번뇌를 깨뜨리기 위해서이니, 
이를테면 탐애(貪愛)의 껍질과 ≺아견(我見)≻의 살과 무명의 마음이 그것이다. 
이 열두 인연의 본체 가운데 만약 인과의 부분이라면, 
사실 그대로 싫어 여의어 탐애를 깨뜨림으로써 원 없는 해탈문[無願解脫門]을 나타낸다. 


만약 인(因)의 부분이라면, 
‘아견’을 깨뜨림으로써 그 과가 인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을 나타내고, 
‘나’가 항상 짓는 것이 아님으로써 공한 해탈문[空解脫門]을 밝힌다. 


무명으로써 도로 무명을 나타내니 만큼 만약 모든 업의 행이 무명으로부터 나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무명의 그 어두움을 나타내는 마음이 곧 사라지리니, 
무명이 바로 네 가지 비방[四謗] 가운데 모양을 고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무명을 깨뜨림으로써 모양 없는 해탈문[無相解脫門]을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에 열두 가지 인연의 부분이 증익도 없고 손감도 없음을 체득한다면, 
곧 ‘아견’을 제거하고 지음이란, 
고집을 여의리니 이 때문에 이 열두 가지 인연의 부분으로써 
바로 이 고집을 깨뜨리는 것이다.
세 가지 근본의 섭수하는바 무명이 세 가지 이치가 있으니, 




첫째는 소원을 분별로 나타나는 바이니, 
곧 분별이 거짓이고, 
둘째는 인과의 도리가 있는 것으로서 곧 남을 의지하는 거짓이고, 
셋째는 이 두 가지가 다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서 곧 진실의 거짓이다. 
무명의 한 부분이 이미 이러하니 만큼 나머지 행(行) 따위 열한 가지는 그 예(例)가 다 그러한지라. 
다시 그것들에 대하여 해석하지 아니한다.






다섯째의 자재(自在)라고 하는 고집을 깨뜨리기 위해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을 아는 수승한 지혜[處非處勝智]를 설하겠다. 


외도들은 계교하기를, 
‘자재천은 뜻대로 착한 일을 하고서도 나쁜 갈래의 과보를 얻을 수 있는가 하면, 
나쁜 갈래에 태어나서도 착한 갈래를 부를 수 있고, 
생사에 유전하면서도 해탈을 얻을 수 있는가 하면, 
생사의 유전이 없으면서도 생사를 얻을 수 있으니, 
왜냐하면 자유로움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하는지라, 
이 고집을 깨뜨리기 위해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을 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 남을 의지해 있고 자재함이 없으니, 
자재함이 없는 그것에 세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업은 의지하는 것이 도리에 계합하고 못하는 이치이고, 
둘째는 번뇌를 의지하는 것이 도리에 계합하고 못하는 이치이고, 
셋째는 과보를 의지하는 것이 도리에 계합하고 못하는 이치이다. 


수량의(壽量義) 가운데, 
이 일곱 가지 도리에 계합하고 못하는 이치를 널리 설한 것과 같다.
이른바 업을 의지하는 것이 그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이란, 
나쁜 업을 의지하여 나쁜 갈래에 들어가는 것을 도리에 계합한 것이라 한다면, 
이는 자재로운 힘이 없이 들어가는 것이다. 




만약에 나쁜 업을 의지하여 나쁜 갈래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도리에 계합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런 이치가 없 ★★으리니, 
착한 업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번뇌를 의지함이란, 
만약에 어떤 사람이 다섯 가지 덮임[五蓋]을 버리지 못하고, 
일곱 가지 깨달음[七覺]을 닦지 못했다면, 
끝내 괴롬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고, 
번뇌를 의지함으로써 해탈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자재한 업이 없는 줄을 알 것이다. 




범부들은 번뇌를 의지하여 살생 등 나쁜 업을 짓기 때문에 
그 번뇌 없는 데를 의지하는 곳으로 삼을지니, 
이 모두가 자재한 힘이 없는 것이다. 


과보를 의지함이란, 
국토엔 두 임금이 없고, 
세상엔 두 부처님이 없으시거늘 
만약에 두 임금과 두 부처님이 한꺼번에 같이 일어난다면, 
이럴 이치가 없겠다. 


여인으로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는 그럴 이치가 없었고, 
소승인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로서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이런 이치가 없다. 




전륜성왕이나 부처님은 다 공동하지 않는 업이 있음으로 
이 업이 가장 수승하여 일체가 의지하는 인연과 과보의 힘이 되나니, 
비록 다시 뜻을 지어 하나의 곳으로 같이하려 해도 마침내 마음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인은 두 가지 업이 있으니, 
하나는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얻었고, 
다른 하나는 나쁜 업을 말미암아 
여인이 되어서 항상 남에게 예속되어 자재함을 얻지 못함이다. 
이것이 다 남을 의지한 과보이기 때문이다. 




이승(二乘)의 사람도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아서 
인(因)의 이 업을 의지하기 때문에 지금의 과(果)를 얻었지만 
이 과를 이미 얻고 나서 보살을 구하려 해도 자재한 힘이 없어 마침내 얻을 수 없나니, 
이러한 이치가 두 가지 있어 업을 의지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과를 의지하는 것이 그 둘이다. 




만약에 이 일곱 가지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을 아는 수승한 지혜를 얻는다면, 
곧 ‘아견’을 여의고 뒤에는 자재함을 얻어 모든 일을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가지 성품에 속한 근본 이치를 이미 위와 같이 해석하였으니, 
그 예와 힐난은 알 수가 있으므로 
다시 거듭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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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논의]    ❋본문



● 생사현실과 수행 
- 왜 공을 나누는가. 






★1★






◆vizg1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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宁波阿育王寺 —— 大雄宝殿
作者 Zhangzhugang
相机位置 29° 50′ 58.26″ N, 121° 44′ 20.26″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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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śīlapāramitā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이라 음역. 6바라밀의 하나. 바라밀은 도(度)ㆍ도피안(到彼岸)ㆍ사구경(事究竟)이라 번역. 고해(苦海)를 건너서 열반에 이른다는 뜻.

답 후보
● 계바라밀(戒波羅蜜)
계취견(戒取見)
고공무상무아(苦空無常無我)
고법지(苦法智)
고행림(苦行林)

공교(工巧)
공덕천(功德天)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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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eng] asat.h $ 범어 matter
[pali-chn] appamāna 無量
[pal-eng] tantissara $ 팔리어 m.string of music; sound of lute.
[Eng-Ch-Eng] hinder 留礙
[Muller-jpn-Eng] 七種自性 シチシュジショウ (term) seven kinds of self-nature
[Glossary_of_Buddhism-Eng] SARIPUTRA☞
“One of the ten major disciples of the Buddha. Born in a village
to the north of Rajagrha in Magadha, India, he became a follower
of [the famous ascetic Master] Samjaya, along with Maudgalyayana.
Each had one hundred disciples, and all of the disciples became followers of the Buddha after the conversion of their masters. Sariputra
was regarded as the most brilliant of the Buddha’s disciples. He died
while Buddha was still alive.”
Major disciple of Shakyamuni Buddha, foremost in wisdom among
His Arhat disciples. (The Bodhisattva Manjusri was foremost in wisdom among the Buddha’s Bodhisattva disciples).
Editor / Tam: 161 #0129
【book-page-660 661】

[fra-eng] initiale $ 불어 at the beginning


■ 암산퀴즈


711* 755
171072 / 528


■ 다라니퀴즈

자비주 44 번째는?
성관자재보살 명호 44 번째는?




44
이 다라니는
과거 99 억 항하사의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며,
저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것은
모든 수행자들이 육바라밀을 수행하되,
원만히 성취하지 못한 자를
속히 원만히 성치시키게 하기 위해서며,
보리심을 내지 못한 자는
속히 발심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 성문승을 수행하는 이 가운데
성문과(聲聞果)를 증득(證得)하지 못한 자는
속히 증득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삼천대천 세계 내에
모든 신선인이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 발하지 못한 자는
속히 발심하게 하고,
모든 중생 가운데
대승(大乘)의 믿음의 뿌리[信根]을 얻지 못한 자는
이 다라니의 위신력으로
대승의 씨앗에
법의 싹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이니,
나의 자비 방편력 때문에
그것들이 모두 이루어지느니라.
● 실리실리 悉唎悉唎<四十四> si ri si ri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44
아캄니다시라
阿欠抳哆尸羅<四十四>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 삼매_게송퀴즈


■ 오늘의 게송
[44일째]
념념어제소행처 $ 044▲泥羅婆泥羅婆為 一 ● 訶理婆, ○□□□□,調,所,所,於

□□□□□□□, 調伏眾生不可說。
所有神變不可說, 所有示現不可說,
□□□□□□□, 조복중생불가설。
소유신변불가설, 소유시현불가설,

찰나찰나 다니는 여러 곳에서
중생을 조복함도 말할 수 없고
갖고 있는 신통 변화 말할 수 없고
보이어 나타냄도 말할 수 없어

045□

[45째]
어중시겁불가설 $ 045▲訶理婆訶理婆為 一 ● 一動, ○□□□□,於,菩,諸,一

□□□□□□□, 於中差別不可說,
菩薩悉能分別說, 諸明算者莫能辨。
□□□□□□□, 어중차별불가설,
보살실능분별설, 제명산자막능변。

그 가운데 겁과 시간 말할 수 없고
그 가운데 차별도 말 못할 것을
보살이 분별하여 다 말하지만
산수에 능한 이도 분별 못하네.





●K0550_T1522.txt★ ∴≪A십지경론≫_≪K0550≫_≪T1522≫
●K0580_T1616.txt★ ∴≪A십팔공론≫_≪K0580≫_≪T1616≫
●K0976_T2032.txt★ ∴≪A십팔부론≫_≪K0976≫_≪T2032≫

법수_암기방안


44 네째발가락 the fourth toe
45 발등 instep / top (side) of the foot
44 네째발가락 the fourth toe
44 네째발가락 the fourth toe

536805
324 




○ 2020_1126_155845_can_ct18_s12


○ 2020_1126_153544_can_Ar12


○ 2020_1126_153451_nik_AR25


○ 2020_1126_153325_nik_Ar37_s12


○ 2020_1126_153151_nik_ar5


○ 2020_0224_111117_nik_ori


○ 2020_0224_105559_nik_BW22


○ 2020_0224_105503_nik_CT33_s12


○ 2018_1025_162843_nik_CT27


○ 2019_1004_170818_can_ct29


○ 2019_1004_170726_can_ab37


○ 2019_1004_152336_can_ab16


○ 2019_1004_143514_can_ct30


○ 2019_1004_175210_nik_ct19


○ 2019_1004_171043_nik_ct19


○ 2019_1004_154700_can_ar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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