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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2일 월요일

불기2567-05-21_정원신정석교목록-k1401-029





『정원신정석교목록』
K1401
T2157

제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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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정원신정석교목록』 ♣1401-029♧





제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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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별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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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별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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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신정석교목록』 ♣1401-029♧






◎◎[개별논의] ❋본문




●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 논의

(1) 부처님의 설법의 특징과 불설 논의의 배경 사정

① 근본 불교 경전 및 대승불교 경전 등이 다양한 형태로 제시된다.
예를 들어 수학책은 초등, 중등, 고등, 대학교재별로 그 형식과 내용이 다르다.
각 경전의 내용과 형식이 다른 것도 이와 사정이 같다.
각 경전에서 표면상 모순되는 듯한 교설들이 부처님에 의해 제시되는 사정이 있다.
우선 수행자의 상태가 제각각 다르다.
당시 제자는 전혀 학문 바탕이 없는 노예출신부터 학식을 상당히 갖춘 학자나 왕족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수행자는 일단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그리고 끝내 생사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다시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 안에 들어가 임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무량한 복덕과 지혜 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그리고, 무량한 방편지혜를 얻어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함에 이르러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설법은 이런 각 수행자 단계에 맞추어 가르침을 달리해 설하게 된다.

② 중생제도를 위해 부처님이 행하는 방편(불사)의 형태는 본래 무량하다.
그래서 경전의 내용과 형식이 대단히 다양한 형태로 제시된다.


(2) 불설 비불설 논의의 연혁

① 불설 비불설 논의는 석존 재세시(在世時)부터도 제기될 수 있다.
아함경전에는 석존 재세시 제자 또는 이교도가 이런 질문을 제기한 내용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어떤 제자가 ‘아라한은 죽은 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석존이 정말 설했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석존은 이런 내용을 설한 적이 없다고 밝히는 부분이 나온다.
그외 보시의 공덕에 관한 내용이 불설인가를 묻는 내용도 나온다.
(『잡아함경』 (T2 p.26a) "我聞瞿曇說言 唯應施我...")
이들은 석존 재세시에 행해진 불설 비불설 논의라고 할 수 있다.

② 한편, 석존 재세시는 이런 문제가 제기돼도 석존에 의해 분명한 판단이 이뤄질 수 있다.
그러나 석존 열반 후는 해결이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이후 개인의 사견(邪見)이 혼입되어 부처님 가르침 내용이 훼손될 우려가 있게 된다.
그런데 석존 재세시부터 이런 우려가 있었다.
이런 취지를 밝히는 부분은 『중집경』 및 『집이문족론』에서도 볼 수 있다.
『집이문족론』의 첫 부분에 사리자가 석존 멸도 후 서로 다툼이 없도록 교리를 미리 결집 논술하는 취지가 나타나 있다.

③ 석존 열반 후 대가섭도 이런 우려 때문에 경전 결집을 단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 결집은 오늘날 불설논의와 관련해 다음 문제가 있다.
우선 이 결집이 오늘날 경전의 어떤 범위 어떤 내용에 해당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한편 모든 제자가 이 결집에 동의한 것은 아닌 것으로 전한다.
예를 들어 십대제자인 부루나(富樓那)는 늦게 5백 비구와 돌아와 결집내용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자신은 석존의 별도 뜻에 따르겠다고 한 것으로 남전에서 전한다.
따라서 경전 결집 주체가 다른 경전들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이런 사실만으로 불설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사정에 따라 경전상의 여시아문이란 표현도 반드시 '아난'만을 특정한다고 여길 필요는 없다.

『증일아함경』 서품에도 이런 사정이 제시된다.
즉 다음과 같다.
...
“또 여러 법이 있어 마땅히 나누어야 하나니
세존께서 하신 말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보살은 뜻을 내어 대승(大乘)으로 나아가니
여래께서 이 갖가지를 분별해 말씀하셨다.
...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게 가장 근본적인 내용을 결집하는 사정을 밝히고 있다.

④ 불교의 전파과정에서도 불설논의를 예상할 수 있다.
불교 경전이 전해질 때 경전 일체가 일시에 모두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불교를 전하는 입장에서는 처음 많은 경전 가운데 어떤 경전부터 전할 것인가를 고려하게 된다.
그런 사정으로 처음에는 가장 기본적이고 간결한 형태의 경전부터 전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후 점차 다양한 경전들이 전해지게 된다.
이런 경우 수용입장에서는 순서를 달리해 들어오는 많은 경전 사이에서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많다.
한편 각 경전 사이에 서로 형식과 내용에 차이가 있고 상호 표현상 모순도 발견된다.
이런 경우 이 모두가 석존에 의한 설법인가 또 그러면 이를 어떤 체계로 이해해야 하는가 등에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중국의 경우에서는 이런 사정으로 각 종파에 의해 경전들의 우열 판단[교상판석敎相判釋]이 행해진다.
그러나 이는 위경판단문제라기 보다는 요의경과 불요의경의 구분에 초점이 있다.
한편 스리랑카의 경우 방대한 대승불교 경전이 전해졌지만, 왕이 배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⑤ 한편 번역시는 각국 언어의 각 단어의 함의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Sandhīnirmocanasūtra 라는 범어경전은 중국에서 각기 다른 제목으로 번역된다.
즉, 『해심밀경』(解深密經)ㆍ『심밀해탈경』(深密解脫經)』ㆍ『해절경』(解節經)ㆍ『상속해탈지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智波羅蜜了義經) 등이다.
이는 범어 단어의 함의(含意)와 완전히 일치하는 한자어가 없기에 발생하는 문제다.
이런 사정들을 포함해 번역과정에서는 불가피하게 내용 불일치나 오류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이 경전의 비불설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⑥ 한편, 중국은 후한대부터 원(元)대까지 1000 년간 수많은 경전이 골고루 수입됐다.
그리고 《대당내전록》《개원석교록》등과 같은 경전목록 정리서에서 위경판단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이 자체적으로 명확히 불설 비불설 판단을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다만 중국에서는 당시 소 대승을 막론하고 경전 출현배경, 내용 문제 등을 기초로 위경을 판단했다.
그리고 그 준거로 어린 비구니가 송출해낸 내용인 점 또는 편의상 요약한 사실 등이 위경판단 근거로 들어지고 있다.
그 외는 위경 명칭만 주로 나열돼, 실제 내용이 어떠했는지 살피기는 곤란하다.

⑦ 한편 위경 판단은 각국의 대장경 제작과정에서도 요구된다.
대장경 제작시 대장경에 포함할 경전을 선별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례로 고려대장경 제작시 이런 목적으로 판본대조와 교정을 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⑨ 한편 근세 일본에서는 대승경전 전반이 비불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처음 도미나가(富永仲基, 1715-46)는 《出定後語》에서 이른바 가상설(加上說)을 주장한다.
이는 ‘경전은 시간을 두고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대승경전은 불멸 후 500년경부터 만들어졌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이 대승 비불설 논의의 시발점을 이루었다.
그 이후 일본에서는 腹部天游의 《赤裸裸》 平田篤胤의 《出定笑語》 村上專精의 《佛敎統一論》등의 논쟁이 이어졌다.
상세내용은 다음 참조; 水野弘元, 《經典その成立と展開》(東京; 佼成出版社, 1980) 이미령 역, 《경전의 성립과 전개》 (서울: 시공사, 1996) pp.34-45.


(3)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 논의

1) 대승 비불설이 제기되는 기본사정
① 본래 불설 비불설 논의는 대승 경전에 한정하지 않고 경전 전반에 대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근본 경전은 불설이라는 전제하에 특히 대승경전에 대한 비불설 논의가 있다.
불교 경전은 부처님 가르침 성격에 따라 그 내용이나 표현 방식 등에 본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어떤 이가 기본 경전인 <아함경> 뿐 아니라 <대승경전> 내용까지 함께 잘 이해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아함경> 등은 기본 단계의 내용이라고 본다.
그리고 <대승경전>은 좀 더 수준이 높은 단계의 경전으로 <요의경了義經>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이가 기본 경전인 <아함경>만 쉽게 이해되어 이를 부처님 설법으로 받아들였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이와 다른 내용과 형식의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으로 잘못 이해하게 된다.
특히 대승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쉽게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기본 경전 내용과 표현상 모순된 내용도 많이 제시된다.
이런 사정으로, 특히 대승 경전에 대해 이들이 과연 진정한 부처님 설법인가가 의문으로 많이 제기될 수 있다.

2) ‘불설(佛說)’ 문제의 성격
부처님의 가르침인가 아닌가의 논의에는 다음 성격의 논의가 포함된다.
우선 어떤 내용이 역사상 석존이 직접 설한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경전의 형식적 진정성]
이 경우 부처님 관념에는 넓게 석존 외 법신불, 보신불 등도 포함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특정 경전이 이런 넓은 의미에서의 부처님이 설한 것인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설법의 주체인 佛의 개념확장]
한편 그런 가르침이 부처의 옳은 깨달음의 내용인가 문제도 함께 제기될 수 있다. [내용의 진리성]
그리고 불설 문제는 이런 주제를 모두 포함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기초적으로 역사적 입장의 불설문제가 먼저 잘 해결되어야 한다.

3) 경전의 역사적 형식적 진정성 판단의 한계성
역사적 형식적 진정성을 살필 경우는 다음 사실을 먼저 확정해야 한다.
① 설법의 주체인 석존의 정체
② 석존이 일정한 내용을 그렇게 설했는가 여부의 사실 확정

③ 과거 시간대로 돌아가 석존정체와 설법 사실 유무를 실증할 방안은 본래 한계가 있다.
한편, 이들 사실을 문헌학적으로 고증할 역사적 유물이나 자료도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그렇다 아니다 어느 쪽으로도 단정할 수 없다.
즉, 대승 경전 뿐만 아니라, 기본 경전의 경우도 문헌학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확정할 근거는 모두 명확하지 않다.
반대로 각 경전이 부처님이 설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할 문헌학적 반대 근거 또한 명확하지 않다.
그런 가운데 경전의 불설 비불설 문제를 살피면 자칫 경전 전체에 불필요한 편견을 갖게 할 우려도 있다.

불설 비불설 논의는 본래 어느 쪽도 그 주장을 직접 실증(實證)할 수 없다.
근세 불교학계는 실증적(實證的) 방법에 많이 의존한다.
그러나 오늘날 인도는 역사 기록 자체가 희박하다.
한편 경전내용 및 그 진위는 본래 역사 기록에 친한 사실도 아니다.
또 고대의 경전이 검증가능한 유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인도의 일반 사료와 유물에 의존해 역사학 방법으로 불설문제를 실증하는 것은 한계 밖이다.

실제 석존이 무엇을 설했는가 여부에 대한 역사적 진위 판단은 불가능하다.
한편 경전의 각 전승 번역 유포 단계를 시간을 거슬러 일일히 확인할 수도 없다.
경전에는 6성취[六成就]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보고자와 청문자간의 사자상승관계와 상호 신뢰성에 의존해 전승된다.
그러나 그 보고자 및 청문자 사이에 지역 및 시간대가 벌어져 상호 신뢰성이 결여된 경우에는 이 역시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경우 불설문제는 경전 내용을 불설로 믿을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단순히 귀결된다.

어떤 경전이 불설임을 실증하려면 우선 ‘역사상’ 석존의 명확한 정체 및 그가 설한 ‘모든’ 내용을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경전이 비불설임을 실증하려면 특정 경전이 위 내용에 포함되지도 않음을 반대로 입증해야 한다.
이런 사정으로 어떤 경전이 불설임을 적극적으로 실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또 한편 반대로 전해진 어떤 경전이 비불설임을 실증함에도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근세에 주장된 대승비불설론은 명백한 실증근거 없이 경전이 불설이 아니라고 배척한다.
또 한편 기본 경전은 불설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들 주장은 모두 그 실증적 근거가 없는 것은 사정이 같다.
그런 가운데 대승경전을 비불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 주장이 객관적 실증적 판단인 것처럼 주장하여 경전에 대한 불신과 편견을 확산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기존 불교 신앙의 기초를 붕괴시키게 하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비판의 여지가 많다.


4) 불교 가르침의 특성과 경전의 형식적 진정성 판단의 한계성

경전의 형식적 진정성 판단에는 『금강반야바라밀경』 및 『입능가경』에서 제시하는 다음 문제가 포함된다.
여기서는 설법 주체와 설법 내용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파악하면 곤란함을 제시한다.
이는 설령 현재 순간에 부처님이 설법하는 상황에서도 설법 주체와 내용의 확정이 곤란함을 나타낸다.
더욱이 이런 문제를 과거에 소급하여 판단하는 것이 곤란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① 부처의 정체 확인 문제
망상에 바탕해 현실에서 상을 취해 부처의 정체를 파악하려한다면 이는 삿된 일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수보리야, 만일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轉輪聖王)도 여래라고 하리라.”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알기로는 32상으로는 여래를 보지 못하겠습니다....
겉모양에서 부처를 찾거나/ 목소리로써 부처를 구한다면 /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지라 / 끝끝내 여래를 보지 못하리.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금강반야바라밀경>
이는 설법 주체로서 부처님의 본 실상과 정체를 일반적인 형태처럼 망집에 바탕해 판단하면 곤란함을 제시한다.

② 설법 내용의 정체 확인 문제
한편 『금강반야바라밀경』과 『입능가경』에서 설법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이 있다’ 한다면, 이는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는 나의 말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
부처님은 한 자(字)도 말하지 아니했으며, 부처님의 말씀은 말씀이 아니다’ < 『입능가경』 4. 불심품佛心品>
...
이렇게 제시하는 사정은 자신내증법(自身內證法)과 본주법(本住法)의 사정 때문이다.
우선 경전의 가르침은 망상분별을 떠나게 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본 바탕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뜻한다.
그런데 본 바탕 실상 자체는 본래 언설 분별을 떠난다. (離言語分別相離二種字...)
부처님의 설법은 단지 현실에서 이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취하는 방편일 뿐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말이나 언설 문자로 여기며 가리키는 부분에는 본래 그런 언설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실재로는 일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不說一字)

한편,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지 아니 하거나 간에 법성(法性), 법계(法界), 법의 머묾(法住), 법의 모습(法相),
법의 증득함(法證)이 상주(常住)한다.
그래서 이는 마치 옛성(城)을 찾아가는 옛 길과 같다고 제시한다.
이런 사정으로 설법 내용의 본 정체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임을 제시한다.



5)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에 대한 비판

근세 불교학계가 경전 성립시기 판단에 이용하는 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
㉠ 경전을 수입한 중국 등의 기록
㉡ 경전에 나오는 역사사실
㉢ 경전에 인용된 타 경전
㉣ 경전 교리내용 특징
㉤ 불교 및 외도 논서의 인용내용 등이 주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불설판단에 직접 실증적 가치가 없는 간접자료에 불과하다.
때문에 근세 불교학계는 경전과 논서 만을 자료로 닫혀진 추론을 한다.
그리고 경전간의 형식적 단순성, 체계성, 사상의 상호 차이를 비교하여 성립순서나 연대를 막연히 추리한다.
이들은 경전성립에 대한 실증적 근거가 아니다.
또 그 추론방식도 적절하지 않다.
대승 경전 비불설의 주장근거를 나열해 살펴보기로 한다.

① 우선 경전간의 형식적 단순성, 체계성, 내용의 상호 차이에 의존해 성립순서나 연대를 추리하기도 한다.
그리고 경전은 단순한 형태와 사상에서 점점 복잡한 형태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가상설]
그러나 경전의 역사적 전개 가능성은 복잡<->단순 쌍방향이 다 가능하다.
또한 처음 석존 당대부터 이 두 형태가 혼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오늘날 하나의 강의를 다수인이 듣는다고 하자. 이런 경우 각인의 필기 내용과 방식을 비교하면 다 다르다.
그런데 이중 어느 한 형태만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한편 설법 대상이 다른 경우 내용과 체계에서 본래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수학을 전공한 대학교수가 초, 중,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생을 상대로 수학 교재를 편찬한다.
그리고 강의를 한다. 이런 경우 그 형식과 내용이 매 경우 달라진다.
그리고 이는 오히려 당연한 현상이다.
부처님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중생을 대상으로 설법한다.
그래서 각 경전의 형식과 내용이 서로 다른 모습을 갖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② 경전의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전개에는 수백년의 시간 간격과 순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승경전은 비불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선험적으로 정립가능한 법칙은 아니다.
아래에서 볼 경우, 초등학생이 졸업후 대학교수 수준의 논문을 쓰기까지는 각 개인별로 다르다.
그래서 수백년 수천년의 기간을 예상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높은 단계에서 보면, 대학교수가 어린이, 청년, 성인, 전문인에게 각기 수준에 맞춰 달리 내용을 제시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
이는 한 생애 내에도 다양한 형태의 변형이 모두 가능하다.

③ 형식이 상이하기에 대승경전이 비불설이라는 주장.
어떤 이가 처음 특정 경전에 대해 다양한 경로[맹목적, 합리적 분별, 신앙적경험 등]로 깊은 믿음을 갖기도 한다.
그후 그 경전과 유사한 경전에는 동일한 믿음을 갖고 그외는 회의적인 경우가 있다.
그가 신뢰를 다른 곳에 옮기는 근거는 경전들간의 공통성이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경전주체가 동일하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경 가능성을 인정하면, 오히려 위경이 진경에 더 유사하리라고 추정해야 한다.

④ 대승 비불설 주장은 대승 경전을 부처가 아닌 일반인이 저술해낸 위경으로 본다.
이처럼 대승 경전을 위경으로 본다고 하면 다음 모순이 발생한다.
우선 위경이 모방해 위작해 내려는 기본 경전 내용보다 수준이 더 높다.
북방 불교권에서는 대승경전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본취지를 보다 명확히 드러낸 경전으로 평가된다 .
그래서 이를 높이 숭앙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불교학자들도 이에 동의한다.
그런데 이들 대승 경전이 위경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하자.
그런 경우 이런 대승 경전 제작자는 그 수준이 기본 경전을 설법한 부처님보다 한층 더 높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그런 경우라면 그런 이가 굳이 기본 경전의 부처님을 가탁해 서술할 필요가 없다.
이는 마치 부처님이 그 이전의 6사외도를 가탁해 경전을 설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대승경전이 위작된 것이라고 하자.
그런 경우는, 훨씬 수준 높은 이가 굳이 수준이 낮은 주체를 가탁해 위작을 행했다는 엉터리 주장이 된다.

한편, 일정 시기에 따로 기본 경전만이 부처님의 진경으로 승인받아 존재했다고 하자.
그리고 대승 경전은 이런 부처님 경전을 후대에 모방 위조해 만들어진 위경이라고 하자.
그런 경우 <위조지폐의 역설>에 이에 해당한다.
위조 지폐는 기존 지폐와 형태와 내용이 거의 유사해야 그 효용을 발휘하게 된다.
경전도 사정이 같다.
경전을 위작하는 경우 그 내용 형식이 진경과 구분이 어려워야 그 취지가 달성된다.
그러나 대승경전의 형태나 내용은 누가 보아도 기본경전과 뚜렷히 구분된다.
그래서 대승 경전 위작자는 이처럼 누가 보아도 위작임을 쉽게 파악할 형태로 위작해 유통시키려 했다는 것이 된다.
한편 그처럼 뚜렷이 차이나는 형태로 위작된 경우는 기존 승단에 의해 쉽게 위경임이 파악되어, 받아들여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대승경전은 기본 경전과 대단히 차이나는 형태임에도 오랜 기간 승단에 의해 사자(師資) 전승되어 왔다.
그래서 대승 경전이 기본 경전을 모방해 위작되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또 그런 사정으로 오히려 이들이 위조된 경전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각 경전의 형태와 내용 차이는 수행자의 단계적 수준에 맞춰 각 설법이 제시되는 사정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⑤ 경전 암송전승의 상황에서 대승경전은 암송에 부적절한 방대한 분량이기에 비불설이라는 주장이 있다.
우선 문헌학자들은 경전이 수백년간 암송 구전에만 의존해 전승되었으리라고 막연히 추정한다.
그런데 이런 암송 구전 전승의 추정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기간 동안에는 경전 불설논의에 대한 객관적 근거나 자료 증거를 찾을 방법이 본래 없다고 할 것이다.
물론 승단 구성원은 수행필요상 경전 암송이 강조되었다. [지법사持法師, 지율사持律師],
그러나 정확을 요하는 경전 보전과 전승 자체을 수백년간 오직 암송에 의존했다는 추정은 무리가 있다.
또한 오늘날 방대한 경전 분량을 생각하면, 암송에 의한 전승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런 경우 암송하기 힘든 방대한 분량은 후대에 창작해 기록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근본불교 부파의 율장에는 부처님 당시에도 경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경전 종이가 낡아 글씨가 지워졌는데
필추들이 의심스러워 감히 닦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닦아 내고 다시 새로 쓰도록 하여라.”
....
佛經磨滅苾芻生疑不敢揩拭
佛言應拭故者更可新書
< 『근본설일체유부니타나』 목득가(目得迦) 제8권 제4 자섭송(第四 子攝頌) >
따라서 오늘날까지 경전 형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남아 있지 않더라도, 석존 당대부터 경전이 존재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오늘날 한 연설가의 1년 간 생각 및 주장을 다 기록하면 그 분량도 상당하게 된다.
반대로 40 여년간 계속된 부처님 설법이 아함경전만의 반복이라면, 오히려 적절하지 않다.

⑥ 대승경전은 아난이 송출해 결집내용이 아니기에 비불설이라는 주장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반드시 아난만이 결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아난이 결집한 내용이 아니면 반드시 비불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율장은 우바리가 결집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제 1 결집은 당시 십대제자들로부터도 완전한 승인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
부루나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고 남전에는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시아문의 구절에서 아는 반드시 아난만을 특정한 표현은 아니다.
석존의 가르침을 들은 이는 누구나 여시아문(如是我聞) 형태로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고 볼 것이다.

⑦ 스리랑카 등 남방불교에 대승불교 경전들이 전해지지 않았기에 불설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오늘날 남 북방 불교 경전에 차이가 있다.
이런 경우 남북방에 전해진 공통부분은 불설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보게 된다.
그렇지만, 차이가 나는 경우 어느 한쪽만이 불설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남방 불교권에 특정 경전이 없다는 사실로 인도에서 해당 경전의 존재를 배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방으로 경전이 전래될 당시 인도 본토에는 대승불교 경전이 있었다.
그리고 스리랑카에도 처음 방대한 대승불교 경전이 전해졌었다.
스리랑카 Vohārika Tissa 왕(269-291)때 대승계인 Vetullavāda[방광파方廣派]가 아바야기리寺에 들어갔다.
그러나 왕에 의해 좇겨났다는 기사가 보인다.
( 平川彰, 《インド佛敎史》上 (春秋社, 1987) 이호근 역 《인도불교의 역사》상 (서울: 민족사, 1989) p.152.
따라서 대승경전이 당시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스리랑카에서 대승불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것 뿐이다.
남방이지만, 인도네시아 보로부드르(Borobudur) 불탑(佛塔)에는 대승 화엄경 내용들이 조각되어 있다 .
따라서 이런 사실은 이런 주장을 배척하게 한다.
그리고 이런 사정으로 대승 경전이 후대에 창작된 위경이라고 볼 수 없다.
오늘날 각지의 불교형태와 경전은 이런 과정을 거쳐 남겨진 것이다.

⑧ 교리 내용이 서로 모순되거나 차이가 있다.
대승 경전이 기본 경전과 그 내용이 크게 차이나기에 비불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대승경전에서 기본 경전과 표현상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제시되기에 비불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 경전과 대승 경전은 전체적으로 서로 수미일관 관통되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판단된다.
우선 근본 경전에 속하는 『잡아함경』 등에서 대승 중심사상인 공(空) 무아(無我)의 표현 등이 제시된다.
한편 대승경전의 수준은 높다.
그런데 이런 대승경전 내용이 충분히 이해되려면 그 전제로 먼저 기본 경전 내용이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 요구된다.
이런 사정으로 근본 경전과 대승경전은 상호 조화적 관계가 있다.
『증일아함경』 1. 서품(序品) 첫부분에 보살의 가르침과 근본 가르침의 이런 관계에 대해 제시된다.
...
아난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였네.
‘어리석은 사람들은 보살행(菩薩行)을 믿지 않으리니
오직 믿음으로 해탈(解脫)한 아라한이라야 하리
그들이라야 믿고서 주저함이 없으리.
...

부파 대표논서인 『대비바사론』권 17에는 대승수행법인 6바라밀이 성불원인으로 큰 논란없이 소개한다.
그리고 소승 경론에서는 대승에 대한 거론이 없을 뿐 특별히 대승사상과 경전을 비불설로 배척하지 않는다.
다만 성문 교리에 주된 초점을 맞춰 논하는 것 뿐이다.
『구사론』은 한편 유부 및 경량부설을 대표하는 논서다.
이런 『구사론』에서도 이 사정은 마찬가지다.
먼저 부처가 역사적 석존 하나만으로서 유일무이하다고 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과거의 7불 외에도 다수의 세계에 다수의 부처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리고 수행자가 부처가 되기 위해 3무수겁 동안 닦아야 할 수행방안으로 6바라밀다를 소개한다. <『아비달마구사론』 제12권 3. 분별세품 ⑤>
또한 보살의 수행방안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과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세계에 다른 부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리고 이런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수많은 보살 및, 성문 그리고 독각을 구분해 인정한다.
< 아비달마구사론 『아비달마구사론』 제29권 8. 분별정품 ②** >
따라서 아함경과 같은 기본 경전외에 보살도에 대한 경전과 논서 등이 따로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편, 대승경전에는 근본경전 내용이 요약된 체계로 나타나고 대승사상의 자세한 내용이 부가된다.
예를 들어, 『대반야바라밀다경』과 같은 대승경전은 기본[소승]경전에서 서술된 기본 내용을 요약해 반복한다.
또 대승 경론도 기본적 가르침을 홀로 생사에서 벗어나는 수행으로 저열함을 비판하지만, 비불설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각 경전이 각 수준과 단계별로 각기 다른 내용이 제시되고 다뤄진다.
그리고 이런 근본 경전과 대승 경전 등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각 경전이 서로 표현이나 내용 체계 차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⑨ 대승경전은 하늘에서의 설법 및 또 하늘 중생이나 보살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현실성을 결여하는 내용이 많다. 그래서 대승경전이 비불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현실경험상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만 불설로 받아들이려는 입장이 된다.
그러나 이는 망집에 바탕한 일반적 입장으로 불교 가르침을 재단하는 입장이 된다.
이처럼 일반 경험법칙만을 의존해 추리할 경우는 역사사실 추리에서부터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진 화산폭발이나 여러 사건 사고 등은 현실에서 대단히 드물게 발생하는 일들이다.
그런 경우 이런 일이 과거에 없었다고 추리하는 것이 오히려 더 설득력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험사실만을 바탕으로 추리할 경우는 오히려 사실과 뒤바뀐 역사추리를 행하게 된다.

한편 일찍이 없었던 신이한 일은 단지 경전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스리랑카 중국을 비롯한 각지에 기존 전통종교가 있었다.
이에 불교가 전파되는 경로에서 다양한 기적이나 신이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도 역시 이들은 사실이 아닌 내용을 과장해 기록한 것이라고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각 지역의 왕가나 일반인들이 갑자기 외래 종교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출가를 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이런 신이가 없었다고 가정하면, 그렇게 된 배경 사정을 오히려 설명하기 쉽지 않다.
이는 석존 당대에서도 사정이 비슷하다.
석존이 처음 가르침을 베푸는 과정에서 신통을 나타내 외도나 친척을 설복시키는 내용이 많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기본 경전에도 역시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대승 경전 내용도 이와 사정이 같다.
관찰능력과 경험에 따라 진리의 폭은 달라진다.
일반적 상식적 경험은 망집에 바탕하여 좁은 범위에서 행해진다.
진리를 일반적 상식 경험에 한정할 수는 없다.
한편 3계6도(三界六道)의 존재나 6신통 및 윤회 등은 현실 경험 초월적인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기본 경전을 비롯해 불교 경전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만일 이들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대승 경전의 내용은 이와 특별히 모순되지 않는다.
한편 보살은 특수 생명체가 아니다.
3계6도내에서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표로 수행하는 이를 지칭하는 명칭일 뿐이다.

⑩ 아함경엔 대승 언급이 없으나 대승경전에는 소승 비판이 나온다. 그런 사정으로 대승이 후에 위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 관계성은 오늘날 초ㆍ중ㆍ고ㆍ대학의 교과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표면상 동떨어진 각 교과는 서로 공통점이 적다.
초ㆍ중ㆍ고 교재에 대학교재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한편 초등학교 과정에서 중ㆍ고ㆍ대학교에서 배울 내용을 미리 과도하게 언급하면 오히려 곤란하다.
그러면 교육과정에서 오히려 장애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고급교재에는 초급 이론을 바탕하면서도 기초내용에 대한 비판이나 수정이 나타난다.
고급과정에서는 그런 내용이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각 단계 내용은 차이가 난다.
그리고 그런 각 단계는 전체과정을 성취함에 있어서 모두 중요하다.
그리고 이들은 전체적으로 교육 목적에 함께 기여한다.

그런데 이런 일반 지식체계보다 석존의 가르침은 월등히 높다.
반면 당시 제자들은 오늘날보다 더 다양한 층이었다.
따라서 석존의 설법이 전체적으로 이런 구조하에서 행해졌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실제 경전들 상호간에 이런 유기적 관계성을 찾을 수 있다.

⑪ 대승경전에서 불설임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오므로 오히려 비불설이라는 주장도 있다.
불교신자는 세속 생활을 행하다 불교 경전을 처음 대하게 된다.
이는 석존 당시나 오늘날이나 같다.
그런데 일반인 입장에서는 오늘날에도 기본 경전 내용부터 이해가 쉽지 않다.
더욱이 대승경전 내용은 한층 그 이해에 어려움이 있다.
이런 사정으로 대승경전을 처음 대하는 경우, 대부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 배척하기 쉽다.
그리고 이는 석존 당시나 이후 어느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대승경전에서는 이런 사정으로 해당경전이 부처님의 요의경임을 강조하는 사정이 있다.
따라서 이런 내용으로 대승경전이 비불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⑫ 경전이 대논사 용수 저서에 보이지 않기에 비불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많은 경전을 인용한 논사들의 저서에 경전명이 보이면 이 논서 이전에 해당경전이 존재했음을 추정하게 된다.
그러나 특정 논서에 경전명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외 경전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도리는 없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오늘날도 어떤 이가 많은 자료를 참조하여 기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때 어떤 이가 참조해 인용하지 않은 자료는 도서관에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와 사정이 마찬가지다.

⑬ 대승경전은 후대 재가법사 등의 대승 불교운동에 의해 창작된 경전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다음 가정과 같다.
오늘날 초ㆍ중ㆍ고ㆍ대학의 교재가 있다고 하자.
이 때 중학교 교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모여 연구하는 가운데 만들었다고 가정하는 것과 같다.
또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교재는 중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따로 모여 연구하는 가운데 만들어냈다고 가정하는 것과 같다.
역사적으로 일정 주장은 변증법적으로 비판, 재비판 종합의 전개과정을 나타낼 수 있다.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이후 초등학교 교재를 바탕으로 온갖 주장과 견해를 생각해 나열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하나의 주장과 관련해 온갖 견해를 주장해 나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그 연구결과가 매번 경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자.
그런 경우 일정한 주제에 관해 제시되는 수많은 외도의 견해도 그런 내용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6사외도나 62견과 같은 외도 입장도 모두 그런 내용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 이 각각마다 이들 주장이 불교 경전으로 만들어져 유통 전승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승경전은 그런 내용은 아니다.
대승경전 사이에도 각각 단계적 차이는 있다.
그러나 이들은 궁극적인 요의(了義)의 가르침에 수미일관하게 이끌어가는 내용들에 해당한다.

⑭ 대승 종파 및 논서 등의 출현 시기로 볼 때 대승경전은 후대에 성립했다.
불교내 일정한 종파가 출현하면서 그 입장을 대표하기 위해 경전이 후대에 창작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우선 종파나 논서 출현 시점 역시 경전의 성립시기처럼 역사상 명확한 것 또한 아니다.
한편, 종파나 논서 출현과 경전 성립은 동시, 선후, 후선 어느 관계로도 가능하다.
심지어 오늘날도 기존 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신 종파나 논서 출현은 가능하다.
오늘날도 새로 생기거나 없어지는 신흥 종파를 관찰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반드시 종파의 성립과 새 경전 창작이 연계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이런 입장에서는 대비사론이나 구사론 등의 부파논서에서는 오직 소승 입장만을 대변해야 한다고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 부파논서에도 대승의 보살과 그 수행에 대한 언급이 있다.
따라서 부파시대 이전에 대승경전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⑮ 경전 일부 내용에서 석존 열반 이후의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기에 후대에 창작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예를 들어 대승 경전 가운데 사리탑, 경전 전파경로, 후500세 내용 등이 제시된다.
그리고 『대반열반경』에는 ‘7백년 뒤’라는 표현등이 있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을 기초로 불멸후 4,5백년경 대승 경전이 성립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선 사리탑 등의 건설은 석존 재세 당시부터 있어왔던 내용이다.
예를 들어 부처님보다 먼저 구담미가 열반에 든다.
이 구담미의 사리를 수습하는 내용 및 5백 비구니 탑에 대한 내용이 『불설대애도반니원경』 등에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사리탑 등의 내용은 특별히 부처님 열반 후에만 서술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한편, 부처는 3명6통을 지닌 존재로 제시된다.
따라서 이들 내용은 그 표현대로 부처님의 예언 내용에 해당한다.
한편 부처는 과거 겁에 대한 기술이나, 미래 겁의 내용 및 제자의 미래 성불에 대한 수기도 행한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 경전의 성립시기를 과거나 미래로 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한편, 위작자가 당대에 이미 과거 사실을 부처의 예언내용인 것처럼 꾸며 기술해 넣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이런 내용의 기술로 해당경전이 당대에 특별히 신뢰받게 되는 효과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사정은 당대나 오늘날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위경제작일 경우 이런 내용을 일부로 넣어야 할 효용이 별로 없다.
그런데 이들 사실은 인도내 별도 역사기록으로 따로 명백하게 확인되거나 실증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경우는 예언인 듯 기술하는 내용이 역사현실에 들어맞아 예언이 맞는 것처럼 위장하는 효과라도 갖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오히려 이런 경전 내용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 뿐이다.
따라서 이런 사실로 이들 경전이 후대에 창작되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6) 현존경전 불설 판단의 기준

① 대승경전 전반이 위경 위작이라는 주장은 앞에서 본 것처럼 그 논거가 박약하다.

②그러나 명백히 조잡한 위경, 교묘한 위경, 자연스런 변화의 가능성은 모두 있다.
그래서 위작 ‘가능성’은 가장 신뢰받는 근본 경전 각 부분에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입장의 단정과 추리도 모두 한계 밖이다.
경전사 연구과정에서 제시되는 각 가설적 주장은 이를 합리적으로 확정할 역사 자료의 발견을 기대하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이를 역사학 차원에서 계속 논의할 실익은 적다.

③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불설을 판단하게 되는 일정한 기준을 생각할 수 있다.
과거로부터 불설을 ‘간주’판단한 기준으로는 전승과정의 신뢰성,
형식적 특징도 중요하게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로는 다음 내용상 특징도 고려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내용상 무상ㆍ고ㆍ무아ㆍ무자성ㆍ공ㆍ열반적정 등의 핵심 교설[法印],
그리고 연기법ㆍ사제법ㆍ38도품ㆍ육바라밀 같은 진리와 선(善)
그리고 수행에 관한 특징적 근본교설과의 일치 모순여부가 불설판단의 중요 기준이 된다.
그러나 부처님 설법의 범위는 이에 그치지 않고 대단히 넓다.
예를 들어 세속의 일반적 선(善), 윤리, 사회, 정치,
일반인의 경험능력을 초월한 지옥 아귀 하늘[天]을 포함한 삼계육도, 윤회, 전생과 미래 내용들이 그 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불설판단은 ㉠ 그것이 석존의 설법임이 표명되고 ㉡ 그 전승이 신뢰할 만하며 ㉢ 그 내용 자체의 참이 분명한 경우
㉣ 또는 그 참을 실증하거나 추리로 판단할 수 없더라도 근본 가르침에 직접 모순되지 않으며 교리이해와 수행 방편상 이익됨이 인정되는 경우,
불설로 승인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7) 경전내용의 진리성 판단

① 불설문제는 역사자체의 관심보다는 옳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제기된다.
그런데 자칫 잘못된 불설판단은 오히려 이런 판단에 더 큰 장애를 줄 수 있다

②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는 석존이나 경전자체에 대해 올바른 믿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맹신(盲信)을 강조하는 종교는 아니다.
사실상 진리는 석존이 설하든 않든, 언제나 떳떳한 그 자체로서 진리라고 해야한다.
따라서 만일 무엇이 진정한 깨달음이고 또 이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스스로의 지혜[般若]로써 판별하는 기본 자세가 더 중요하다.

③ 경전은 진리와 완전 동일체는 아니다.
단지 깨달음을 가리켜 얻게 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勝義諦, 空, 不立文字]
진리는 내용 자체로 판단해야 한다.
어떤 내용이 진리인 것은 그 자체 내용 때문이며, 어떤 권위자가 말했기 때문은 아니다.
석존은 깊은 깨달음을 상대에 맞게 무수한 방편으로 설했다.[對機說法]
그래서 석존은 다양한 가르침을 대기(對機)설법, 무기(無記)설법, 위의(威儀)설법, 때로는 비밀법[秘密敎] 등을 사용했다.
그리고 현재 경전들은 그런 가르침이 다양한 경로로 남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 설법에 내재하는 이런 사정으로, 내용의 진리성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경전의 진리성 문제는 오늘날 실증해내기 곤란한 문제, 즉, 설한 이가 석존인가 여부에 의존할 것은 아니다.

④ 아함경전에서도 제자들이 석존을 절대적 존재로 의지하는 것을 경계시킨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훈을 남기고 있다.

...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 또한 오래지 않아 가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마땅히 자기[自]를 섬으로 삼아 자기를 의지하고, 법(法)을 섬으로 삼아 법을 의지하며,
다른 것을 섬으로 삼지 말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
< 『잡아함경』, T-99(2-177상), 638. 순다경(純陀經>
“阿難 當知如來不久亦當過去 是故阿難 當作自洲而自依 當作法洲而法依當作不異洲 不異依...”;
; “汝等當知自洲以自依 法洲以法依 不異洲 不異依..”
< 『불설장아함경』 當自熾燃 熾燃於法 勿他熾燃 當自歸依 歸依於法 勿他歸依 『불설장아함경』 제2권 2. 유행경(遊行經) 제2초(初) 『불설장아함경』 제6권 6. 전륜성왕수행경(轉輪聖王修行經) 제2)

따라서 불교 내 어느 입장이든 이를 고려하는 것은 의미가 적다.

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통해 무자성 공 평등관을 얻어 최종적으로 이런 구체적 차이에 집착함을 함께 떠나야한다.
기초 경전만이 석존의 유일무이한 설법[眞經]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적절치 않다.
잘못된 위경판단은 현실경험에만 갇혀 다양한 가르침을 부정하거나, 깊은 깨달음과 사견을 뒤바꿔 받아들일 여지도 있다.
그리고 잘못된 진경판단은 맹신으로 이끌기 쉽다.
내용이 옳다 하여도 읽는 이가 참 뜻을 못 얻으면 결국 무용하게 된다.
반대로 잘못된 내용도 올바른 판단자세로 대하면, 높은 깨달음의 계기가 된다.
불교의 깨달음이 결국 문자를 떠남을 생각하면, 이 역시 상대적 문제가 된다.
경전이 비록 위경임이 분명하더라도, 그것은 최종적인 불교의 목적과 실천에 모두 큰 장애를 일으킬 수 없다고 할 것이다.˙

⑥ 또한 경전사 연구방법으로 본래 확정 불능한 사실은 그대로 단정할 수 없음에 머무르는 것이 오히려 낫다.
이 경우 경전 각 내용을 각 단계에 맞추어 깨달음으로 바꿔 섭취할 가능성이 넓게 열린다.
그리고 불교 수행에서 중요한 점은 최종적인 깨달음이 무엇이며 그에 이르게 하는 유용한 수단이 무엇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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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xae7045

◈Lab value 불기2567/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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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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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ed--정원신정석교목록_K1401_T2157.txt ☞제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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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루(有漏)를 말함.

답 후보
● 상(相)
상부극성과(相符極成過)

상적광토(常寂光土)
상품하생(上品下生)
색광(色光)
색온(色蘊)
생공관(生空觀)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2019_1104_103439_nik_ct18 구례 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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