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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3일 수요일

법계연기_co-relation-of-dharma-realm



【법계연기
[한문]法界緣起
[영어]the co-relation of dharma-realm】

● From 고려대장경연구소 불교사전
법계연기

법계연기[한문]法界緣起[영어]the co-relation of dharma-realm
현상 세계가 그대로 진실의 세계,
즉 진여(眞如)가 되는 이치.
여러 경전과 논서들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연기의 존재 방식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

삼라만상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하나에 일체를 갖추고 일체가 곧 하나가 되는 무애(無礙)의 연기.
주로 화엄경에 묘사된 연기의 세계를 일컫는다./ 제법(諸法)이 자재의 상태로 서로 의지하면서 한없이 교류하고 융합하여 생겨나고 있음을 가리킨다.
화엄경에 나오는 유명한 유심게(唯心偈)는 "삼계는 허망으로서 다만 이 일심(一心)이 만들어 낸 것이며,
12연분(緣分)은 모두 마음에 의한다."
라고 설한다.
법계연기설은 이로부터 전개된다.

즉 그러한 유심의관점에서 보면 시간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도 한 순간과 구별되지 않으며,
오랜 시간의 세계가 한 순간에 담겨 있다.
따라서 "처음 마음을 일으킬 때 곧바로 정각을 성취한다."
고 하는 일념성불(一念成佛)이 성립한다.
이렇게 무시간적 입장에서 관찰하므로 세계으 존재 방식인 연기는 서로 동화하고 드나들며(相卽相入),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重重無盡)성격을 지닌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걸림이 없으므로 이것을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한다.
법계란 이 사사무애의 세계를 가리키며 이러한 세계의 존재 방식이 법계연기이다.
즉 세계의 모든 것이 마음이라는 법계를 바탕으로 하여 저마다 개체로서 존재하면서 서로를 내포하여 통하고,
하나와 일체가 중중무진으로 일치해 가는 동시에 전개함을 말한다.
법계연기는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一卽多 多卽一)라는 등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연기는 정연기(淨緣起)와 염연기(染緣起)로 크게 양분된다.
진여가 유력해서 무명(無明)이 무력하게 될 때는 정연기를 이루고,
진여가 무력해서 무명이 유력하게 될 때는 염연기를이룬다.
전자는 깨달음의 세계이고,
후자는 미혹의 세계이다.

[동]무진연기(無盡緣起) ,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 ,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 , 일승연기(一乘緣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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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운허 동국역경원 불교사전
법계연기

[한문]法界緣起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ㆍ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도 한다.
법계 곧 우주만유를 일대연기(一大緣起)로 보는 학설.
법계의 사물이 천차만별이나,
피차가 서로 인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하나도 단독으로 존재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만유를 모두 동일한 수평선 위에 두고 볼 때에는 중생ㆍ불,
번뇌ㆍ보리,
생사ㆍ열반과 같이 대립하여 생각하던 것도 실제는 모두 동등한 것.
그리하여 번뇌가 곧 보리,
생사가 곧 열반이어서 만유는 원융무애한 것이다.
그래서 화엄종에서는 일즉일체(一卽一切)ㆍ일체즉일(一切卽一)이라 말하며,
혹은 한 사물(事物)은 상식으로 보는 단독한 하나가 아니요,
그대로 전 우주라는 뜻에서 한 사물을 연기의 법으로 삼고,
이것이 우주 성립의 체(體)며,
힘인 동시에 그 사물은 전 우주로 말미암아 성립된 것이라 함.
이와 같이 우주의 만물은 각기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緣由)하여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관계이므로 또 이것을 법계무진연기라고도 한다.
이 사상을 설명하는 것이 6상원융(相圓融)과 10현연기(玄緣起)의 교의(敎義)이다.
이 사상은 연기론의 극치로서 뢰야연기(賴耶緣起)ㆍ진여연기(眞如緣起)등과 같이 우주연기의 주체를 어떤 한 사물에나 어떤 이체(理體)에 국한하지 않고,
낱낱 만유의 당상(當相)에서 말하는 것이 특징.



● From 대만불광사전
법계연기
【法界緣起】 p3371-中≫
爲華嚴敎義之緣起觀.
屬四法界中事事無礙法界之內容.
又作
法界無盡緣起․十十無盡緣起․十玄緣起․無盡緣起․一乘緣起.
華嚴宗主張,
千差萬別之現象界,
其法性(梵 dharmatā)具有實體,
亦卽緣起之諸法悉爲實體,
現象之外無有實體,
實體之外無有現象,
此卽法界(梵 dharma-dhātu)之實相.
法界之形成,
係以一法而成一切法,
以一切法而起一法,
是故一關係著宇宙之一切(一卽一切),
一切亦含攝於一之中(一切卽一).
如是法界之一與一切互爲主從,
相入相卽,
圓融無礙而重重無盡,
稱爲法界緣起.
 法界緣起可分爲染․淨二方面來說明.
染法緣起,
係說明迷界之緣起,
乃眞如無力而無明(迷)有力之狀況;淨法緣起,
則說明悟界之緣起,
卽眞如有力而無明無力之狀況.
華嚴敎義中,
更進一步詳細發揮法界緣起者,
另有所謂三性一際․因門六義․六相圓融․四種法界等要旨.
此外,
針對眞理之本體而論說緣起者,
卽天台宗之一念三千論;與之相對,
針對各個現象而論說相卽相入者,
卽爲華嚴宗之法界緣起論,
此乃繼承小乘佛敎之業感緣起論․權大乘之阿賴耶識緣起論等,
所完成的實大乘之緣起論.
[華嚴五敎章卷四․華嚴一乘十玄門․華嚴經搜玄記卷三下․華嚴經探玄記卷一․卷四․卷十三](參閱「法界」3367․「緣起論」6129 )



● From 陳義孝佛學常見辭彙
법계연기
【法界緣起】四種緣起之一.
見四種緣起條.
→2636



● From 丁福保 - 佛學大辭典 : Ding Fubao's Dictionary of Buddhist Studies
法界緣起

【術語】 四種緣起之一。
見緣起條。

【參見:
緣起】





● From Soothill-Hodous Dictionary of Chinese Buddhist Terms (DDBC version)
法界緣起
The dharmadhātu (धर्मधातु) as the environmental cause of all phenomena,
everything being dependent on everything else,
therefore one is in all and all in one.



● From BUDDHDIC
法界緣起
ホッカイエンギ
dependent co-arising


● From the dharma-realm



화엄교학(華嚴敎學)은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여 현수대사 법장(法藏: 643-712)이 대성한 화엄종의 교학이다.
천태지자대사 지의(智顗: 538-597)가 대성한 천태교학(天台敎學)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대표적인 교학 중 하나를 이룬다.
화엄교학은 심원하고 광대한 불교의 세계관을 확립하였는데,
주요 교의로는 법계연기(法界緣起) · 십현문(十玄門) · 육상원융(六相圓融)이 있다.[1]
불교의 근본적인 진리인 연기설(緣起說)의 입장에 서서 현상과 차별(差別)의 현실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파한 것이 화엄의 세계관이다.[2]
특히,
법계연기 중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는 연기론의 극치로서 화엄교학의 특징을 이루는데,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 또는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라고도 불린다.[1][3]
오교십종(五敎十宗)은 두순(杜順: 557-640)에 의해 기초가 놓인 것을 법장이 완성한 화엄종의 교판이다.[4]
성립 역사:

《화엄경(華嚴經)》이 처음 중국에서 한역된 것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395~429)에 의해서이다.[1]
그 후 《화엄경(華嚴經)》의 연구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나,
화엄의 교학은 이들 경전 연구자들보다는 수나라(隋)에서 당나라(唐) 초기에 걸쳐 활약한 선관(禪觀)의 실수자(實修者)인 두순(杜順)에서 비롯되어,
지엄(智儼)을 거쳐 현수대사 법장(贅首大師法藏)에 의해 대성되었다.[1]
법장의 저서인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 ·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 등에 의해 화엄 교학이 확립되었다.[1]
특징 및 성격:

화엄교학은,
천태교학이 실천으로서의 지관(止觀)을 중시한 데 비해,
심원하고 광대한 불교의 세계관("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을 이론적으로 확립하였다는 특징이 있다.[1]
천태교학에서는 구체적인 실천으로서의 관법(觀法)을 중시했던 반면 화엄교학에서는 이론면에 편중하였기 때문에 화엄교학에 기반한 화엄종은 살아 있는 종교로서의 생명력이 약간 부족했다.[1]
법계연기:

중중무진의 법계연기(重重無盡의 法界緣起)는 화엄교학의 특징이다.[1]
중중무진의 법계연기에 의하면 이 현상세계(現象世界)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 · Virocana Buddha · 대일여래)이 현신(顯身)한 것으로,
따라서 법계(Dharmadhatu)라고 한다.[2]
그리고 법계는 한 티끌(一微塵) 속에 세계 전체가 반영되어 있으며,
일순간 속에 영원이 포함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2]
즉 하나를 들면 거기에 전우주가 관계되고,
일체(만물 전체)가 개개의 사물 속에 포함되며,
서로 주종(主從)이 되어 무한히 관계되고 융합되며 서로 작용을 주고 받는다.[2]
즉,
일즉일체(一卽一切) · 일체즉일(一切卽一)의 관계에 있다고 한다.[2]
화엄교학에서는 법계를 아래와 같은 사법계(事法界) · 이법계(理法界) ·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4종으로 나누었는데,[1][2]
이를 사법계(四法界) 또는 사법계관(四法界觀)이라 한다.
사법계(事法界): 현실의 미혹의 세계이다.
우주는 차별이 있는 현상 세계라는 세계관이다.
이법계(理法界): 진실에 대한 깨달음의 세계이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진리가 현현(顯現)된 것이라는 세계관이다.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이상으로서의 깨달음의 세계가 현실의 미혹의 세계와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즉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현실즉이상(現實卽理想)의 세계이다.
모든 현상과 진리는 일체불이(一體不二)의 관계에 있다는 세계관이다.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 현실의 각 존재가 서로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緣起關係)에 있는 세계이다.
현상계는 서로 교류하여,
1개와 여러 개가 한없이 관계하고 있다는 세계관이다.
사법계(四法界) 중 특히 제4의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는 화엄교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반적으로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 또는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라고도 불린다.[1][3]
사사무애법계관(事事無礙法界觀)에 따르면,
일체의 존재는 타(他) 존재와 상즉상입(相卽相入)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一)를 들면 그 밖의 모든 것은 그 속에 수용되며,
하나를 주(主)로 하면 그 밖의 것은 반(伴)이 되어 일체의 것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고,
차별의 세계 자체가 부처의 목숨이 된다.[1]
화엄교학은,
사사무애법계관(事事無礙法界觀)을 통해,
우리들이 현재 살고 있는 생사의 세계야말로 부처의 주처(住處)이며,
연기(緣起)하는 일체의 것이 변화하고 생멸(生滅)하는 무상(無常) 속에 부처 자체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절대적 현실긍정관(現實肯定觀)을 세웠다.[1]
이와 같은 법계연기설은 십현문(十玄門)과 6상원융(六相圓融) 등의 교설로 강설되며 화엄교학의 중심을 이루었다.[1]
십현문:

십현문(十玄門) 또는 십현연기무애법문의(十玄緣起無礙法門義)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연기설을 강설하는 데 사용되는 교의로,[1]
사사무애법계의 특징을 10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십은 만수(滿數),
현은 심현(深玄),
문은 사사무애(事社無礙)의 법문이란 뜻이다.
십현문의 하나의 문에 깨달아 들어서면,
열가지 모두를 깨닫게 되는 관계에 있다.
지엄(智儼)이 세운 것을 구(舊) 10현 또는 고십현이라 하고,
현수법장(賢首法藏)이 『오교장(五敎章)』에서 이것을 계승하고,
『탐현기』 제1권에 표시한 것을 신(新) 10현이라 한다.
현재의 십현문은 신십현을 말한다.
십현문의 한가지 문에만 들어서면,
불교 최고의 깨달음 경지인 사사무애 경지를 완전히 이룬 것이 된다.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십현문의 총설(總說)이며 나머지 9문은 별설(別設)이라고 한다.
불설수능엄삼매경에 즉시에 우주의 모든 부처님의 신통력을 모두 갖춘다고 나온다.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
고십현의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이다.
명상 속에서,
아무리 좁은 구멍도 출입이 자유롭고,
별보다 큰 의자에 앉는 것도 자유롭다.
유마경에 큰 의자에 앉는 신통력이 나온다.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명상 속에서,
부처는 우주의 모든 다른 부처님을 포함해서,
그 어떤 중생의 모습으로도 변신할 수 있다.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
고십현의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이다.
명상 속에서,
부처는 허공의 몸으로 바꿀 수 있으며,
이럴 경우 다른 부처님도 모든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허공의 몸이 된 그 부처님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 누구도 찾을 수가 없기에,
그 누구도 위해를 가할 수도 없어서,
매우 편안하게 그 자리에 존재한다.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
명상 속에서,
수미산을 겨자씨에 넣고,
삼천대천세계를 한 티끌 속에 넣어도,
현상태를 파괴하지 않고 각각 그 분수를 지켜 서로 수용하고 서로 안립(安立)한다.
유마경,
열반경에 부처는 명상 속에서 수미산을 겨자씨에 넣을 수 있다고 나온다.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
인다라망이 모두 보배로 이루어진 것과 같으니,
보배의 밝게 사무침으로 인하여 영상이 서로 나타난다.
하나의 구슬 속에 나타나면,
나머지 영상도 다 하나를 따라 그러하면서 더 이상의 오고 감이 없다.
이제 서남쪽을 향하여서 한 알의 구슬을 취하여 시험하면,
이 하나의 구슬이 일체 구슬의 영상을 단박에 나타낼 수 있다.
하나의 구슬이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하나도 마찬가지다.[5]
"하나의 털구멍에서 아승기의 모든 부처가 세상에 출현함을 봄으로써 법에 들어가는 무진장을 얻는다"는 경지이다.[6]
탁사현법생해문(托事顯法生解門)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명상 속에서,
한점 티끌 속에 과거,
현재,
미래 3세(三世)의 모든 부처님 세계(佛刹)를 넣을 수 있다.
현재의 한 사건에 과거 현재 미래의 전부가 비추어 나타난다는 관법(觀法)이다.
열반경에 무량겁의 시간을 일초로 줄일 수 있고,
일초의 시간을 무량겁으로 늘일 수 있다고 나온다.
수천억년의 명상 수행을 일초만에 끝낼 수 있다.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
고십현의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이다.
육상원융:

육상설(六相說)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연기설을 강설하는 데 사용되는 교의로,
모든 존재는 총상(總相) · 별상(別相) · 동상(同相) · 이상(異相) · 성상(成相) · 괴상(壞相)의 여섯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1]
육상원융(六相圓融)은 모든 존재가 여섯 가지 모습,
즉 육상(六相)을 갖추고 있는데,
모든 존재 전체와 각 부분이 서로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으며 또한 각 부분과 각 부분도 서로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다는 교의이다.
같이 보기:

법장
두순
의상
화엄종
오교십종
천태종
천태교학
각주:



● From various_buddhist
法界緣起
(術語)四種緣起之一。
【參見: 緣起】
[Dfb]
四種緣起之一。
見四種緣起條。

[ChenYi]



● From ChinEng-Buddhist
法界緣起
The dharmadhātu as the environmental cause of all phenomena,
everything being dependent on everything else,
therefore one is in all and all in one.
[Soothill]



● From Bulkwang
法界緣起
為華嚴教義之緣起觀。
屬四法界中事事無礙法界之內容。
又作
法界無盡緣起、
十十無盡緣起、
十玄緣起、
無盡緣起、
一乘緣起。
華嚴宗主張,
千差萬別之現象界,
其法性(梵 dharmatā)具有實體,
亦即緣起之諸法悉為實體,
現象之外無有實體,
實體之外無有現象,
此即法界(梵 dharma-dhātu)之實相。
法界之形成,
係以一法而成一切法,
以一切法而起一法,
是故一關係著宇宙之一切(一即一切),
一切亦含攝於一之中(一切即一)。
如是法界之一與一切互為主從,
相入相即,
圓融無礙而重重無盡,
稱為法界緣起。

 法界緣起可分為染、
淨二方面來說明。
染法緣起,
係說明迷界之緣起,
乃真如無力而無明(迷)有力之狀況;淨法緣起,
則說明悟界之緣起,
即真如有力而無明無力之狀況。
華嚴教義中,
更進一步詳細發揮法界緣起者,
另有所謂三性一際、
因門六義、
六相圓融、
四種法界等要旨。
此外,
針對真理之本體而論說緣起者,
即天台宗之一念三千論;與之相對,
針對各個現象而論說相即相入者,
即為華嚴宗之法界緣起論,
此乃繼承小乘佛教之業感緣起論、
權大乘之阿賴耶識緣起論等,
所完成的實大乘之緣起論。

〔華嚴五教章卷四、
華嚴一乘十玄門、
華嚴經搜玄記卷三下、
華嚴經探玄記卷一、
卷四、
卷十三〕(參閱「法界」3367、
「緣起論」6129 )#p3371


④-3371■불광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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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계연기' 관련 기타 참고 사전 통합 검색
다음백과 https://100.daum.net/search/entry?q=법계연기
네이버백과 https://terms.naver.com/search.nhn?query=법계연기
한국위키 https://ko.wikipedia.org/wiki/법계연기
네이버한자 https://hanja.naver.com/search?query=법계연기
네이버지식 https://kin.naver.com/search/list.nhn?query=법계연기
네이버사전 https://endic.naver.com/search.nhn?sLn=kr&isOnlyViewEE=N&query=법계연기

위키영문 https://en.wikipedia.org/wiki/
구글 https://www.google.co.kr/?gws_rd=ssl#newwindow=1&q=법계연기
네이버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법계연기
다음 https://search.daum.net/search?w=tot&q=법계연기


--- 이하 단어 직접 입력 검색 ---
운허 동국역경원 불교사전 https://abc.dongguk.edu/ebti/c3/sub1.jsp
실용한-영 불교용어사전 http://dic.tvbuddha.org/
불광대사전(佛光大辭典) https://www.fgs.org.tw/fgs_book/fgs_drser.aspx
산스크리트어사전 https://www.sanskrit-lexicon.uni-koeln.de/monier/
 티벳어사전 https://nitartha.pythonanywhere.com/index


● [pt op tr] 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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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사전 링크 및 불교 사전 출처 종합 안내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blog-post_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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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논의] ❋추가참조



☞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법계연기관 육상원용 등의 근거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관은 현실 안에서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의 관계로 현상과 현상의 관계를 본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의 존재 방식이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시한다. 
세계의 모든 것이 마음이라는 법계를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저마다 개체로서 존재하며 서로를 내포하여 통한다. 
현상계 만유의 낱낱 사물이 서로 장애되지 않는다. 
현상계는 서로 교류하여, 하나와 나머지 일체와 한없이 관계하고 있다.
일체의 존재는 타(他) 존재와 상즉상입(相卽相入) 관계에 있다. 
하나(一)를 들면 그 밖의 모든 것은 그 속에 수용된다. 
하나를 주(主)로 하면 그 밖의 것은 반(伴)이 되어 일체의 것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법계연기는 제법이 서로서로 거듭되는 연관 관계 속에 서로 의존하며 존재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즉 제법이 상즉상입하여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관계에 있음을 제시한다.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상융(相融)한다. 
현실의 각 존재가 서로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緣起關係)에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현실의 차별상 안에서 바위와 물은 다르다. 
또 여래와 범부나 무정물은 서로 다르다. 
이런 바위나 물, 여래 범부가 상즉 상입하는 현상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현실에서 보는 빛 가운데는 멀리 우주에서 온 빛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현실에 우주 만유가 상즉상입한다고 보게 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나머지 우주는 또 한편 모두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모든 현상에서 그런 관계성을 찾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바위가 여래가 되어 설법을 하는 사례도 드물다. 
또는 범부가 바위 속으로 들고 나고 하는 현상도 드물다. 
현실 각각은 서로 장애가 되거나 멀리 떨어져 있다. 
또 일정한 경우에만 서로 관계하고 일정한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현실의 각 차별상 일체가 모두 일즉일체 상즉상입 관계라고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현상 일체 서로간에 사사무애 관계 및 법계연기 관계를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제시되는 근거는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 제법의 실재 측면의 공통성 
제법의 진여 실재는 모두 차별없이 공하다. 
그리고 제법은 이런 진여실재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제법과 진여는 마치 종이의 앞뒷면처럼 맞닿아 즉해 있다. 

그런데 제법 하나하나가 이와 같다. 
그래서 제법은 이런 공통성을 갖는다고 여기게 된다. 
따라서 제법은 이런 진여실재를 매개하여 서로 상즉 상입한다고 여기게 된다. 

● 만법이 모두 다 함께 마음내용이라는 공통성
경전에서 "3계는 허망으로서 다만 이 일심(一心)이 만들어 낸 것이다. 12연분(緣分)은 모두 마음에 의한다."라고 설한다. 
따라서 제법 일체는 마음이 얻어내는 마음 내용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그래서 현실내 차별된 각 내용은 마음을 매개로 서로 상즉 상입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 제법의 분별내용은 공통적으로 관념이라는 공통성 
현실의 제법은 모두 마음안 내용이다. 
그런 가운데 이들 제법은 모두 관념을 통해 분별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논의는 모두 관념 영역안에서 행하게 된다. 
이 경우 일정한 감각현실 A에 대해 다양한 관념을 일으킨다. 
그런 경우 이런 다양한 관념은 모두 현상 A와 관련된다는 공통성을 갖는다.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연기설과 관련해 6상설(六相說)이 사용되기도 한다. 
현실에서 하나의 현상에 대해 총상ㆍ별상ㆍ동상ㆍ이상ㆍ성상ㆍ괴상의 관념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각 관념은 일정한 감각현실에 대한 내용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기초로 이들 각 관념이 서로 원만하게 융화되는 관계라고 생각하게 된다. 

● 연기관계의 공통성 
현실의 어떤 한 내용은 오직 하나의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인연을 벌려 세울 때 인연, 소연연, 증상연, 등무간연을 나열한다. 
이 가운데 증상연에는 여력증상연(與力增上緣)과 부장증상연(不障增上緣)의 2종이 있다. 
즉 다른 것이 생겨 나는 데 힘을 주어 돕는 것이 여력증상연(與力增上緣)이다. 
다른 것이 생겨 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부장증상연(不障增上緣)이다. 
예를 들면 곡식에게 적당한 온도와 비를 주는 것은 여력증상연, 폭풍이 불지 않는 등은 부장증상연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상호간에 연기관계가 있다고 보는 범위는 대단히 넓게 된다. 
그런 가운데 현상제법 일체는 모두 어느 하나와 연기관계로 포함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 사사무애법계관 법계연기관의 비판 

○ 사사무애 법계관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넘어서 색즉시색(色卽是色)를 주장한 내용이 된다. 
현실에서는 개별 현상 A와 B가 차별되고 구별된다. 
그런데 이런 A와 B의 관계를 A즉시B (A卽是B)로까지 관하는 입장이다. 

이런 주장이 제시된 근거로 우선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색즉시공(色卽是空)에서 즉(卽)의 의미를 현상A=空, 현상B=空의 관계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들의 동일성을 근거로 현상A=현상B 로 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현상A즉空>, <현상B즉空> 을 통해 <현상A즉현상B>로 까지 나아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다음같이 비판될 여지가 있다. 

현실 제법은 각 주체 마음의 관계해 얻어내는 내용이다. 
반면 진여 실재는 그러한 관계를 떠나 본래 그대로 있다고 할 본바탕의 내용이다. 
현실과 진여 실재는 이처럼 서로 구별된다. 

한편 생사현실은 그 실재의 측면을 관하면 그 실상이 차별없이 공하다. 
본 바탕 진여 실재는 어떤 참된 진짜의 고정적 실체가 없다. [무아 무자성]
그런 가운데 한 주체는 마음이 화합해 얻어낸 내용만을 얻게 된다. 
그러나 진여 실재는 마음과의 관계를 떠나 본래 있다고 할 내용이다. 
따라서 한 주체는 이런 실재 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진여 실재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어 일체 분별과 언설을 떠난다. 
그래서 방편상 어떤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란 표현을 빌려 이를 나타내는 것뿐이다. 

그런데 생사현실은 실재 진여와 떨어져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불리不離]  
실재는 생사현실의 본 바탕이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과 실재는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 맞닿아 있다. 
그래서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즉(卽)은 진여와 현실 영역이 서로 맞닿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은 <생사현실이 곧 실재 진여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즉, 현실의 현상적 측면과 실재적 측면이 <완전히 동일한 하나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편,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도 이들이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없음>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시 <완전히 동일한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공중무색 무수상행식(空中無色無受想行識)이란 구절에서도 그 사정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일체가 차별없이 공함>을 바탕으로 먼저 현상A=空, 현상B=空의 관계를 세울 수는 없다. 

또한 공함은 어떤 특정한 값을 갖는 성품이나 내용이 아니다. 
공함이란, 있음과 없음, 같고 다름 등의 모든 2분법상의 분별을 모두 떠난다. 
그리고 진여의 공함은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떤 <완전히 동일한 하나의 내용>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현실의 a의 본바탕도 공하다. b도 공하다. 
그러나 이는 실재측면 안에서 a의 본바탕과 b의 본바탕이 서로 동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공함은 실재의 측면안에서 실재 진여가 완전히 동일한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공함은 같고 떠남을 모두 떠난다. 
그래서 <동일하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일체의 진여가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실재 진여안에서도 <空=空> 역시도 세울 수 없다. 
공(空)함 역시 공하다 .

처음 현상과 실재의 관계에서 현상A=空, 현상B=空의 관계를 세울 수 없음을 보았다. 
그리고 실재의 측면안에서 다시 空=空의 관계도 역시 세울 수 없음을 보았다. 
따라서 <일체의 진여가 동일함>을 바탕으로 현상A=空=空=현상B  및 현상A=현상B의 치환관계를 세울 수도 없다. 
따라서 실재의 공함을 바탕으로 각 현상들간의 상호 관계를 A=B 형태로 이해하기 곤란하다. 

상즉 상입이란 현실 안에서 A와 B가 서로 맞닿아 있거나 서로 들고 남을 말한다. 
그러나 진여의 공함이 현상 A와 B가 그런 관계가 되도록 하는 어떤 원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각 현상은 실재 진여를 바탕으로 하여 마음이 관계해 얻게 된다. 
그래서 현상간의 관계는 마음의 사정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 한편 3계(界)는 오직 식(識)뿐이라고 안립한다. 그리고 식 안에 외부대상이 없음을 나타낸다. [유식무경]
이는 한 주체가 얻는 일체 내용은 본질적으로 마음이 얻어낸 내용임을 나타낸다. 
또한 이들 마음내용 안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이 들어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는 마음 내용이 오로지 마음만으로 단독해 내용을 얻어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마음 내용이 마음 밖 진여 실재와  젼혀 무관함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이는 마음 밖 실재 진여 영역에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현실 일체는 마음내용이다. 
현실 일체는 마음안 내용이라는 점에서 공통한다. 
그러나 현실내용이 마음만으로 자유자재하게 각 내용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마음에 이들 각 내용을 서로 맞닿게 하거나, 서로 들고 나게 하는 원리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마음내용은 진여 실재에 바탕한다. 
특히 현실 내용 가운데 감각현실은 의타기상으로서 다른 것과 의존해 나타난다. 
그런 가운데 감각현실은 다수 주체가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일정한 관계로 일정한 내용을 반복해 대하게 된다. 
이들 내용은 서로 떨어져 있고 장애된다. 그리고 일정한 관계에서만 일정한 결과를 얻어내는 관계성을 보인다. 
예를 들어 종이에 불을 대면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 바위나 물이나 금과 같은 나머지 일체가 이로 인해 나타나게 되지 않는다. 
만약 오직 식뿐이고 마음 내용은 마음 밖 진여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하자. 
그리고 마음 밖에 외부 실재 대상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네 가지 사실[四事:相續ㆍ處ㆍ時ㆍ用]이 어떤 사정으로 그처럼 나타나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유식이십론』)

현실에서 다수가 일정한 관계로 반복해 내용을 얻는다. 
이런 현실은 각 주체의 마음 밖 진여에서 그 사정을 찾아야 한다. 
마음 밖 진여 실재에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다수가 진여실재에 바탕해 엇비슷한 감관으로 내용을 얻는다. 
따라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현실 내용이 실재에도 그처럼 있어서 실답다고 하는 의미는 아니다. 
각 주체는 진여실재의 내용을 직접 얻지는 못한다. 
즉, 외부 실재 대상과 실재의 주관을 직접 얻지는 못한다. 
따라서 진여를 현실내용과 일치하거나 비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를 공하다고 표현하게 된다. 
이런 사정으로 현실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즉, 현실내용은 침대에서 꾸는 바다꿈과 성격이 같다. 
본 바탕 진여실재는 얻지 못한다. 
그러나 각 주체는 현실에서 마음에 얻어진 내용을 얻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 내용이 마음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만으로 현실 내용 서로가 장애가 없이 무조건 상즉상입하는 관계가 된다고 할 수는 없다. 
마음 내용을 얻는데 진여 실재가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 한편 A 라는 하나의 현실 내용을 놓고 6상의 상호 관계로 관념분별할 수 있다. 
현실에서 하나의 현상을 대해 총상ㆍ별상ㆍ동상ㆍ이상ㆍ성상ㆍ괴상의 관념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각 관념들은 모두 현상 A와 관련해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이들 각 관념들은 그런 측면에서 서로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는 관계라고 이해하게 된다

- 감각현실 영역에서의 내용 부존재 

각 영역의 내용은 진여실상-감각현실-관념의 순서로 발생한다. 
그리고 관념분별은 후발적으로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관념내용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진여실상이나 감각현실에 그런 내용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김각현실을 대해 관념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들 관념은 관념적 측면에서의 문제다. 
우선 <실재 진여의 측면>에서 그런 내용이나 관계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A 라는 <감각현실 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이나 관계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각현실은 관념이 아니다. 
관념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무상해탈삼매 내용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참고 ▣- 무상삼매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k0650-t0099-001-01.html#133

이들 관념들은 현상 A를 매개로 일으킨다. 
이런 경우 관념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곧바로 감각현실 영역에 그에 상응한 감각현실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A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A란 사람은 각 입장에 따라 수많은 다른 관념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A는 현실에 영희라고 불릴 수 있다. 
그리고 A는 어떤 이에게는 부인도 될 수 있다. 
또 어떤 이에게는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 
또 딸도 될 수 있다. 
또 동생도 될 수 있다. 
또 선생님이 될 수도 있다. 
또 학생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한 A 에 대해 다양한 관념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그 A를 각 부분으로 나누어 관하면 수많은 관념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손, 발, 얼굴, 뼈, 세포 등등과 같은 수많은 관념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A에 대해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각 관념들일 뿐이다. 
이 경우 그렇게 일으킨 각 관념에 따라, A가 그 때마다 수없이 달리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 각 관념은 감각현실 영역의 일정 부분을 가리킨다. 
그러나 감각현실 영역에 그런 관념내용들은 들어 있지 않다. 
감각현실은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A 부분에 대한 6상의 상호 관계도 이와 사정이 같다. 
우선 A 부분 그 전체를 묶어 하나의 관념을 일으켜 얻을 수 있다. 
또 A의 각 부분별로 관념을 일으켜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체를 묶어 집이라고 분별한다. 
그런데 한 부분만 떼어 기둥이라고 분별한다. 
그렇다고 각 관념에 따라 현실에 A가 그처럼 나뉘거나 묶이는 것이 아니다. 
나뉘고 묶는 것은 관념영역에서 관념일 뿐이다. 
또 그런 관념에 따라 감각현실 영역에 각 내용이 A, b, c ... 등으로 수없이 달리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총상이란 관념이 가리키는 A가 있다. 
그리고 그 일부에 별상의 관념 b, c 등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고 원래 있던 A와 별도로 구성 부분이 따로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 관념영역에서의 관계
한편, '관념영역'에서 분별한 각 관념사이의 관계성도 사정이 같다. 
이런 경우 관념들 사이에서도 융합이나 상즉상입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현실의 하나의 A는 어머니이면서 선생님이라고 분별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경우 어머니라는 관념 자체가 선생님이라는 관념과 서로 직접 융합하는 것은 아니다. 
즉, 어머니란 관념이 선생님이란 관념 영역에서 서로 맞닿아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어머니란 관념이 선생님이란 관념에 들고 나고 하는 것도 아니다. 
관념영역에서 어머니와 선생님은 여전히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별개 관념이다. 

다만 이 경우 각 관념이 다 함께 A와 관련해 일으킨 내용이라는 공통성을 갖게 되는 것 뿐이다. 
즉, 각 관념이 가리키게 되는 감각현실 부분이 같이 관련되는 것뿐이다. 
그런 사정으로 각 관념들을 그처럼 관계지어 분별하게 된다. 
즉 이들 관념적 내용들이 이로 인해 서로 원만하게 융화된 관계라고 묶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 감각현실 영역에서의 관계 
감각현실에 대해 관념을 일으킨다. 
성품과 모습에 대한 분별 내용이다. 
그리고 감각현실과 관련해 이들 관념들이 서로 일정한 관계성을 갖는 것으로 분별된다. 
예를 들어 전체부분에 대해 일으키는 모습과 성품에 대한 분별이 있다. 
이는 부분이 갖는 모습과 성품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일정한 감각현실에 대해 일으킨다. 
그래서 이들 각기 다른 모습과 성품이 서로 관계성을 갖는 것으로 분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이로 인해 '감각현실 영역에' 그런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A가 있는 감각현실 영역에 서로 관계맺을 그런 관념내용부터가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관념으로 분별한 <관계>도 또한 마찬가지라고 해야 한다. 

-- 본바탕 진여에서의 관계 
더욱이 본 바탕 진여 실재에서 그런 <관계>를 얻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6상 원융의 의미를 이런 내용들로 혼동하면 곤란하다. 

○ 한편 현상에서 특별한 a와 b 사이에서는 차유고피유의 연기관계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사사무애관은 현실 일체 상호간 상즉 상입의 연기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들 일체가 결국 서로 간에 모두 이런 연기관계가 있음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런 경우 연기관념이 지나치게 확장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종이에 불이 붙어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 
사과씨가 땅과 물에 의존해 사과나무로 자란다. 
이런 경우 이들 요소를 빼고 넣고 함에 따라 그 차이를 현실에서 보게 된다. 
그래서 또 이들은 연기관계에 있다고 하게 된다. 

즉 어떤 두 내용이 연기관계에 있다고 제시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차유고피유>의 관계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즉 다음과 같은 관계성이다. 

...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

현실에서 a가 b 간에 이런 관계성이 파악되면, 원인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하게 된다. 
이는 현실에서 a와 b가 다른 것들과는 차이나는 관계성을 가짐을 나타낸다. 
즉, 이는 일정한 상태에서 a가 없으면 b가 없다. 
그러나 a가 있으면 b가 있다. 
이런 일정한 관계성이 a와 b 사이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증상연에서도 부장증상연(不障增上緣)의 경우에서도 최소한 요구되는 내용이다. 
즉, 어떤 요소 a가 방해하거나 않거나 할 경우, 이에 따라 b가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까지 연기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예를 들어 종이에 불이 붙어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 
이런 경우 이로 인해 금이나 물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또 반대로 물과 금으로 연기와 재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현상 일체가 모두 상즉상입의 연기관계에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각 현상간에 연기관계에 있는 것과 아닌 것의 실질적 구별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단순히 선후 관계에 있거나 동시관계에 있는 모든 현실 사상들을 다 연기관계로 묶게 된다. 
예를 들어 까마귀가 날 때 비가 온다. 
그런 경우도 이 두 내용은 서로 법계의 연기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런 주장은 수행 현실에서 무리가 있는 주장이 된다. 

이런 경우 다시 다음 문제점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 어떤 심한 악행이나 사고가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에 대한 원인과 책임을 엉뚱한 것에 묻게 된다. 
예를 들어 한라산에서 산불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원인을 아프리카의 모래에서 찾는 경우와 같다. 

한편 수행방안도 마찬가지다. 
또 수행자가 성불하기 위해 수행을 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수행 방안을 연기관계에 바탕해 찾아야 한다. 
이런 경우 법계연기관에 바탕하면 엉뚱한 것에서 방안을 찾게 된다. 
예를 들어 성불을 하기 위해 모래알을 집어 강물에 하나씩 떨어뜨린다. 
코에 기름을 바르고 못에 앉아 지낸다. 또는 강에서 목욕을 한다. 
이처럼 온갖 계금취견을 취해도 법계연기관에 입각하면 무방하다고 해야 한다. 



○ 생사 즉 열반관과의 구분 

생사현실 상호간을 일즉일체 일체즉일, 상즉상입 등으로 관한다고 하자. 
이는 어떻게 보면 <생사 즉 열반>관을 취하는 입장과 비슷해보인다. 
그러나 그 차이가 크다. 
따라서 이를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 

-- 생사 즉 열반의 입장 

먼저 <생사 즉 열반>관의 입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존재에는 생사현실의 측면과 진여 실재의 측면이 있다. 

생사현실에서는 망집번뇌-업-고의 관계가 있다. 
생사현실에서 망집번뇌를 일으키고 업을 행해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진여 실재의 측면은 이와 다르다. 
진여실재 측면은 차별없이 공하다. 
그리고 본 바탕 진여 실재에서는 생멸과 생사고통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진여 실재의 측면은 본래 니르바나다.
본바탕에서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차별을 얻지 못하다.

이는 생사현실 안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못 얻거나 마찬가지다.
진여의 측면에서는 이런 차별을 세울 수 없다.
본바탕은 여전히 차별 없이 니르바나 상태다.
그래서 본바탕 측면에서는 생사고통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본바탕 측면에서는 그런 생사고통을 해결하라고 요구한 적도 없다.

그런데 생사현실의 본 바탕은 진여 실재의 측면이다. 
그리고 생사현실은 이런 본 바탕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이 생사현실 안의 생사고통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다. 
즉 생사고통의 본 바탕이 공하고 진여다. 
그것만으로 생사현실 안의 생사고통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런 사정만으로 생사현실 안의 생사고통을 방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사현실에서는 진여실재를 바탕으로 하여 마음이 관계하여 감각현실과 관념을 일으켜 얻게 된다. 
본바탕은 생사고통을 본래 얻지 못한다. 
본래는 니르바나이다.
그러함에도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
그래서 생사윤회 고통을 받아나간다.
이런 경우 생사현실은 문제다.
본 바탕이 공한 진여 실재임에도 생사현실은 이와 달리 문제가 된다. 

이런 경우는 <생사 즉 열반>과는 반대관계가 된다. 
본래 니르바나인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열반 즉 생사>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 경우의 생사현실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것이 생사현실에서 해결할 문제가 된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제거하고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생사현실의 본 바탕인 진여에서는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음을 관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취해 생사현실 안에서도 니르바나 상태처럼 여여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생사 즉 열반>관을 취하게 된다. 
그 과정에 다음의 경우들을 생각할 수 있다. 

1 생사현실에서 망상분별을 떠난다. 
그래서  차별상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래서 망집번뇌-업-고의 관계를 떠나게 된다. 
그런데 생사나 생멸은 오직 망집 안에서만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그런 생사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이론상 생사현실 즉 열반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2 한편, 현실은 곧 공한 실재에 즉해 맞닿아 있다. 
그리고 공한 실재는 곧 현실에 즉해 맞닿아 있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진여실상의 측면을 취해 임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생사현실의 차별상을 취하지 않고 망집을 떠나 임하게 된다. 

3 한편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갖는 생멸, 고통 등의 여러 관념도 실답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론상 생사현실이 곧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이해한다. 

4 현실 내용 가운데 감각현실은 본 바탕 실재의 내용이 아님을 이해한다. 
또한 관념에 감각현실과 같은 구체적 자상이 없음을 관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한다. 

이런 내용들을 통해 이론상 생사현실에 생사고통이 살답지 않음을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생사현실 안에서 극한 고통을 평안히 임할 수 있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이론적 내용을 현실에서 실증해 무생법인을 증득한 상태가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도 니르바나 상태와 마찬가지로 여여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태 역시 생사현실 안에서의 차별이다. 
즉 생사현실 안에서 깨달음을 얻어 이루게 되는 상태다.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이와 반대의 경우라고 하자. 
그러면 이와는 반대가 된다 .
즉 본래 니르바나인 상태다. 
그럼에도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이런 깨달음의 상태가 중요하다. 

-- 사사무애법계, 법계연기관 입장과의 차이 

사사무애법계의 입장이나 법계연기관이 <생사 즉 열반>의 입장과 같은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현실에서 <생사 즉 열반관>을 취한다고 하자. 
그래서 진여 실재의 측면을 취해 현실에서 부처나 범부를 차별없이 관한다고 하자. 
즉,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떠난다. 그래서 자신이 분별한 내용이 감각현실이나 실재에서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한다. 
또는 진여 실재의 측면으로 현실을 대한다. 
또는 현실의 차별상을 실다운 내용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집착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 이는 소극적으로 <생사현실에서 차별이 있다고 보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적극적으로 <현상들이 즉한다거나, 상즉상입한다고 봄>은 아니다. 
따라서 차이가 있다. 

이 경우 깨달음의 의미도 차이가 크다. 
<생사 즉 열반>관은 다음을 의미한다. 
생사현실에서 감각현실 및 관념 등의 내용을 얻는다. 
그러나 진여 실상의 측면에서 이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여 실상은 공함을 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에서 이런 사정을 깨닫지 못한 상태와 깨달은 상태를 구분한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생사 즉 열반>관을 취해 수행해나감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사사무애 법계연기관은 <진여 측면에서 차별을 얻을 수 없음>을 관함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견해로 나아간다. 
우선 생사현실의 <차별상들이 그처럼 장애가 없는 상태로 있다> 
그런 가운데 이들이 <서로 상즉 상입하는 관계에 있다>고 이해하는 입장이 된다.
그리고 일체가 그 상태 그대로 여래의 상태에 상즉상입하는 상태라고 이해한다. 
따라서 생사현실에 대한 이해의 내용이 다르다. 

<차별을 떠남>은 <같고 다름을 모두 떠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차별을 떠남>을 <동일함>으로 잘못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 즉 열반>관이나 <사사무애관>이 서로 마찬가지 내용을 제시한다고 오해하기 쉽다. 


수행자는 <생사 즉 열반>관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해나간다. 
이를 통해 법신을 증득하고 성불하게 된다. 
그래서 여래는 기본적으로 생사현실에서 <생사 즉 열반>을 관하고 여여하게 머무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실재 진여 측면에서는' 그런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런 여래의 상태는 생사현실의 측면에서 차별상이 된다. 
이는 진여의 측면과 생사현실의 측면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생사현실에서 부처는 깨달음을 얻은 상태다. 
그리고 범부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망집번뇌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깨달음을 얻는 의미가 크다. 
물론 깨닫거나, 깨닫지 않거나,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역시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생사현실의 측면에서는 깨달음을 얻는가에 따라 차별이 크다. 
즉, 생사현실 안에서 <생사 즉 열반>관을 취해 임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두 입장이 차이가 크다. 

현실은 생사고통을 겪는 문제상황이다. 
일반적으로 망집에 바탕해 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망집을 제거하고 <진여 실재의 측면에서> 생사현실을 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생사현실을 그대로 니르바나라고 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생사 즉 열반>관은 현실 안에서 망집을 제거함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현실을 <진여 실재의 측면에서> 대함이 전제된다. 
또 현실에서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집착을 떠나는 자세>가 전제된다. 
그리고 그런 이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생사현실 안의 생사고통을 평안히 참음>이 전제된다. 

그런데 이것을 지나치게 확장해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전제없이,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생사현실>까지도 그대로 니르바나라고 잘못 이해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생사 즉 열반>관을 잘못 이해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 있다. 

- 그런 경우 망집에 바탕한 생사현실 그대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고 머물기 쉽다.
- 한편 생사현실은 망집에 바탕해 전개된다. 그래서 문제 상태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서 오로지 좋은 부분만 취해, 낙관적으로 안주하려 하기 쉽다.
- 수행을 행한다. 그런데 수행중 극심한 생사고통에 처한다. 그런 경우 처음의 망상분별과 집착의 상태로 다시 물러나기 쉽다. 그리고 그런 상태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기려 하기 쉽다. 
- 생사 즉 니르바나다. 그래서 이에 바탕해 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에 처해서도 평안히 참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일체 생사고통에 오로지 평안히 참는 것만을 수행으로 잘못 여긴다. 그래서 오히려 극단적으로 고행수행으로 일관하려 하기 쉽다.
- 생사현실에서 오직 니르바나의 측면만 취한다. 그래서 없음에 지나치게 치우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소극적 자세로만 임하려 하기 쉽다.
- 개인적으로 망상분별 집착을 떠난다. 그러나 생사현실이 니르바나다. 따라서 다른 생명이 고통을 받아도 무방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를 방치하고 현실을 외면하기 쉽다.
- 망집을 떠난다. 그런 이상 생사현실에서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막행막식하기 쉽다. (악취공견)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k0650-t0099-001-01.html#492


이들은 <생사 즉 열반>의 의미를 잘못 이해해 현실에 임하는 경우들이다. 

즉, 생사현실을 <진여 실재의 측면에서 관하면> 니르바나라고 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지나치게 확장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생사현실>을 포함해 생사현실 일체가 
<생사현실의 측면에서 관할 때에도> 그 상태 그대로 니르바나인 것으로 잘못 이해하게 되기 쉽다. 
그렇게 <생사 즉 열반>의 의미를 이처럼 잘못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현실에서 위와 같은 잘못된 입장을 취하게 되기 쉽다. 

그런데 사사무애관이나 법계연기관은 이런 부작용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게 된다. 

현실에서 가장 최상이며, 바람직한 상태를 여래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사무애관에서는 현실 안에서 제법 일체가 다 이런 여래의 상태에 즉한다고 제시한다. 
또 법계연기관에서는 이런 상태로 현실 일체가 중중무진 상즉상입의 관계가 있다고 제시한다. 
이 경우 과연 생사현실이 <생사현실의 측면에서> 과연 그런 관계가 있는가가 이론적으로 문제된다.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미 앞에서 살폈다. 

그런데 여하튼 사사무애관에 바탕해 현실에 임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일체가 여래와 상즉상입하는 상태라고 이해하게 된다. 
이 경우 먼저 현실 일체를 여래를 중심으로 상즉한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무리한 동일화로 범부나 초목까지 여래와 동일시하기 쉽다. 
일체즉일의 관계이기에 예를 들어 바위도 곧 여래다.  이렇게 여긴다고 하자. 
그런 경우 바위를 대하며 여래를 대하듯 대하게 된다. 

한편, 생사현실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고 하자. 
그래서 마치 망집을 일으킨 상태다. 
그렇다해도 현실에서 일체가 여래의 상태와 상즉 상입한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런 상태도 여래 상태처럼 문제가 없는 상태인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이런 입장에서 문제가 있는 현실 상태를 긍정하고 그대로 방치하는 문제점을 갖는다. 

또 반대로 범부나 초목을 중심으로 일체를 상즉시킨다고 하자. 
그러면 거꾸로 문제가 없는 여래의 상태를 범부처럼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문제점도 갖게 된다. 
그래서 수행목표 상태를 잘못 이해하게 되기 쉽다. 

<생사 즉 열반>관을 취할 경우 극심한 생사고통의 상황에서 차별을 떠나 평안하게 임할 필요가 있다. 
이런 안인 수행은 중생제도를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사사무애관을 취해 생사현실에서 일체를 여래 상태와 즉한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을 견디는 것도 안인 수행을 위한 한 방편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두 입장은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방향 측면에서는 방향을 달리하게 된다. 
수행자는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수행자부터 복덕자량과 보리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또한 중생들도 역시 다시 그런 상태로 이끌어야 한다. 
이를 위해 수행자가 <생사 즉 열반>관을 취해 현실에서 겪는 수행과정의 어려움을 평안하게 임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안인 수행이 요구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사사무애법계관>을 취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현실의 이런 방향성을 잃게 되기 쉽다. 
생사현실 일체가 최상의 여래의 상태와 상즉상입한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망집에 바탕한 생사현실을 그대로 긍정하는 방향을 취하게 된다. 
그래서 그 뱡향성에 차이가 크다. 

한편 어느 입장이나, 범부가 성불할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
이는 본 바탕이 무자성 공함에 바탕한다. 
즉 여래나 범부가 처음부터 고정불변된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 성불할 가능성을 누구나 갖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성불을 위해 수행에 임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올바른 인과에 바탕해 깨달음을 얻는 방향으로 수행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즉, 깨달음을 얻게 하는 연기관계에 있는 내용을 수행방안으로 취해야 한다. 

그러나 사사무애관을 취해 본래 범부가 그대로 여래와 상즉하는 상태라고 여긴다고 하자. 
또한 일체가 여래와 법계연기의 관계에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수행방안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기 쉽다. 

이런 경우 다시 다음 문제점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 어떤 심한 악행이나 사고가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에 대한 원인과 책임을 엉뚱한 것에 묻게 된다. 
예를 들어 한라산에서 산불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원인을 아프리카의 모래에서 찾는 경우와 같다. 

한편 수행방안도 마찬가지다. 
또 수행자가 성불하기 위해 수행을 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수행 방안을 연기관계에 바탕해 찾아야 한다. 
이런 경우 법계연기관에 바탕하면 엉뚱한 것에서 방안을 찾게 된다. 
예를 들어 성불을 하기 위해 모래알을 집어 강물에 하나씩 떨어뜨린다. 
코에 기름을 바르고 못에 앉아 지낸다. 또는 강에서 목욕을 한다. 
이처럼 온갖 계금취견을 취해도 법계연기관에 입각하면 무방하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주장은 수행 현실에서 무리가 있는 주장이 된다. 

결국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겪는다고 하자. 
이는 생사현실 안의 문제상황이다. 
이러한 상태를 모두 여래의 상태와 상즉상입한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래서 이런 상태를 긍정하고 방임하거나 그 상태에 머물려 한다고 하자. 
이는 올바른 수행이 아니다. 

물론 이런 상태도 본 바탕 진여의 측면에서는 차별없이 공하다. 
그러나 그런 사정으로 생사현실의 생사고통이 문제가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생사현실 안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깨달음이 중요하다. 
그 깨달음은 생사현실의 차별상에도 불구하고 본 바탕 진여 측면에서는 차별없이 공함을 이해함에 있다. 
그리고 이런 수행을 통해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은 연기에 바탕하여 나타남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어 중생을 제도해 나가야 한다. 
또 그런 수행을 위해 생사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생사 즉 열반>관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이른 경우는 무생법인을 증득한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끝내 법신을 증득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그리고 이런 상태들은 하나같이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생사현실안의 차별상이 된다. 
 
그리고 사사무애법계관과 <생사 즉 열반>관은 이런 수행 방향과 자세의 측면에서 차이가 크다. 



참고 ▣- 무상삼매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k0650-t0099-001-01.html#133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k0650-t0099-001-01.html#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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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uxq5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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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Petra, desert near Petra, Jord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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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견여래(普見如來)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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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本時)
본유(本有)

부단중(不但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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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 乡于已弋廴 ■ 향우이익인 15 ( 시골 향 )( 어조사 우 / 어조사 어 )( 이미 이 )( 주살 익 )( 길게 걸을 인 )
002▲ 一丶凵犭冂 ■ 일주감견경 2 ( 하나 일 )( 점 주 )( 입 벌릴 감 )( 개사슴록변 견 / 개견( -犬) 부수( 部首)의 이체자( 異體字). )( 멀 경 ) 재춘법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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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bud] Jhāna
[san-chn] icchā-paripūraka 滿願
[san-eng] spṛhā $ 범어 aspiration
[pali-chn] Cetiya-giri 支帝耶山, 象山
[pal-eng]
[Eng-Ch-Eng] inexpressible 不可說
[Muller-jpn-Eng] 金剛上味陀羅尼經 コンゴウジョウミダラニキョウ (title) Dhāraṇī of the Adamantine Essence
[Glossary_of_Buddhism-Eng] TUSHUN☞
See: Avatamsaka Sutra.

[fra-eng] éternuâmes $ 불어 sneezed


■ 암산퀴즈


912* 675
130962 / 438


■ 다라니퀴즈

구족수화길상광명대기명주총지 2 번째는?
자비주 15 번째는?
성관자재보살 명호 3 번째는?




02 그들로 하여금 모두가 부처님에 대한 기억을 증장하게 하며,
참포, 讖蒱<二>
ksam bhu,
지장
『대승대집지장십륜경』
♣0057-001♧


15
이로부터 다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 계시는 곳과
무량한 법회 가운데서도
거듭 이 다라니를
친히 얻어 들어 받아 가지고
다시 무량하게 뛸듯이 환희하였고,
문득 무수억겁토록
미세한 생사를 초월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저는 항상 이 주문을 지송(持誦)하되
일찍이 조금도 폐하거나 잊어버리지 아니했으며
이 주문을 가진 힘으로써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부처님 앞에 연꽃에
화생(化生)하고
태(胎)에 드는 몸을 받지 않았습니다.
● 아예염 阿逝孕<十五> a je yaṃ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3
하리 다바 라
賀哩<二合>哆婆<引>囉<三>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 삼매_게송퀴즈


■ 오늘의 게송
[327일째]
수행어시불가설 $ 069▲薜羅薜羅為 一 ● 諦羅, ○□□□□,其,有,一,持

□□□□□□□, 其心過去不可說,
有求皆施不可說, 一切悉施不可說,
□□□□□□□, 기심과거불가설,
유구개시불가설, 일체실시불가설,

보시를 행하는 일 말할 수 없고
그 마음 지나간 일 말할 수 없고
찾는 대로 보시함을 말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보시함도 말할 수 없고


[328째]
지계청정불가설 $ 070■ ■持 成起一智修 菩修彼彼無
070▲ 諦羅諦羅為 一 ● 偈羅, ○□□□□,心,讚,愛,成

□□□□□□□, 心意清淨不可說,
讚歎諸佛不可說, 愛樂正法不可說,
□□□□□□□, 심의청정불가설,
찬탄제불불가설, 애요정법불가설,

계행이 청정함을 말할 수 없고
마음이 깨끗함을 말할 수 없고
부처님 찬탄함을 말할 수 없고
바른 법 좋아함을 말할 수 없고





●K1483_T0550.txt★ ∴≪A금색동자인연경≫_≪K1483≫_≪T0550≫
●K0370_T0162.txt★ ∴≪A금색왕경≫_≪K0370≫_≪T0162≫
●K1032_T2137.txt★ ∴≪A금칠십론≫_≪K1032≫_≪T2137≫

법수_암기방안


69 요골동맥-손-맥박(脈搏)재는곳
70 장지
2 염통 【심장】
15 어깨 (shoulder)


3 밥통 【위】

615600
299

○ 2018_0722_164710_can_ct18


○ 2019_1004_135835_nik_Ab27


○ 2019_1004_144159_nik_BW17


○ 2019_1004_163403_can_Ab27


○ 2019_1004_152024_nik_BW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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