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과정에서 반복되는 수행에 질려하는 경우가 많다. 정려 수행을 위해 자세를 잡고 앉아 선정에 들다보면 20 분만 되어도 발이 저리고, 허리가 구부러지고 졸립게 된다. 그래서 계속 참고 정려 수행을 3시간 4 시간 계속 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다른 연구도 마찬가지다.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조금만 같은 자세로 있으면 그 상태로 깁스가 되어 뼈와 살이 굳는 느낌을 받는다. 나이가 들어 노화현상과 함께 순환이 잘 안 되기에 생기는 현상이다. 나이가 들면 각 신체부분이 낡아 교체해가게 되고 점차 아톰 비슷한 형태로 되어가게 되기도 쉽다.
그럴수록 수행력이 떨어진다. 매번 경전 내용을 보아도 아는 듯 모르는 듯 모호한 상태로 넘어가게 되기 쉽다.
그에 반해 리비도는 살아가는 이상 전 생애를 거쳐 지침이 없이 반복해나게 된다. 리비도는 아마 이드와 다른 프로 이드 박사가 내세운 이론과 관련된다.
불교이론을 빌리면 구생기 신견과 구생기 변견, 그리고 이에 바탕한 탐,만,진,만, 의 번뇌와 관련된다. 태어나 살아가는 한 끊어내기 힘든 번뇌가 된다. 여기서 <구생기>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7.8 식을 바탕으로 생성되는 번뇌로서 오늘날말로 하면 선천적으로 구비된 번뇌를 의미한다.
구체적 내용은 생명인 이상 거의 모든 생명이 구비하고 있는 활동으로 먹고, 싸고, 놀고 (무언가)하고, 쉬고, 자는 활동과 관련된다. 사람으로서 이런 활동을 조금 멋있게 맛있게 하려는 욕구를 갖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활동은 사실은 미미한 벌레나 축생도 기본적으로 어떤 특별한 학습 없이도 생래적으로 행해 나가는 활동이다. 여름철 파리나 모기라고 해서 이런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는 수행자나 파리나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이런 활동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파리보다 나은 존재라고 내세울 도리는 없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비교해보면 오히려 미미한 벌레들이 이 부분에서는 훨씬 더 기능이 뛰어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수행력이 높아도 또 살아 가는 한 이런 활동 자체를 완전히 끊어낼 방안은 ㅇ없다. 세존인 부처님이나, 예수님, 마화멧트 등 다른 종교의 교주를 놓고 보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성인과 범부의 차이는 이런 부분에 있는 것은 아님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리비도와 보살도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된다.
만일 수행을 마치 리비도에 바탕한 본능적 행위처럼 꾸준히 반복하면서 잘 해나간다면 가장 바람직한 수행자세가 될 것이다. 그런데 각 행위의 성격이 다르다. 그래서 각 부분에 문제가 있다. 바람직하지만, 막상 그 수행 자체는 힘들고, 재미도 없다 . 따분하게 느껴진다. 질린다. 이런 고통을 호소하게 된다.
반면 본능에 충실한 리비도는 그런 증세는 없어도, 반대로 가치가 낮다. 너무 집착해 도를 넘쳐 행하면 천박하다는 평가까지 받게 된다.
그런데 만일 이 양측면의 장점을 다 결합한다면 또 좋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장점을 다 결합하는 방안이 수행방편상 필요하다.
艹 ■( 초두머리 초 )
033▲ 支辶尺天艹 ■ 지착척천초 33 (( 지탱할 지 )( 쉬엄쉬엄 갈 착 )( 자 척 )( 하늘 천 ) 초두머리 초 )
046▲ 申失央业永 ■ 신실앙업영 46 ( 거듭 신/ 아홉째 지지 신 )( 잃을 실 / 놓을 일 )( 가운데 앙 / 선명한 모양 영 )( 업 업 / 일, 직업 업 )(길 영/ 읊을 영 )
재춘법한자
■ 영-중-일-범-팔-불어 관련-퀴즈 [wiki-bud]S [san-chn]
evaṃ kṛtvā 如是 [san-eng]
śiṣṭatva $ 범어 wisdom [pali-chn]
kusuma 拘蘇摩 [pal-eng]
rattikkhaya $ 팔리어 m.the vane of the night. [Eng-Ch-Eng]
三車 "Three carts." A metaphor of the Lotus Sutra 法華經, from the story of the 'burning house,' which is as follows: Some chi^dren are playing in a house, unaware that it is on fire. Their father induces them to come out by telling them that there are three carts outside, a goat-drawn cart, a deer-drawn cart and an oxcart. When they come out, all there really is, is a great white oxcart. These three carts are metaphors for the /sra^vaka 聲聞 vehicle, the pratyekabuddha 緣覺 vehicle, and the bodhisattva vehicle. This story is told in order to explain that although there are "lesser vehicle" and "greater vehicle" in Buddhist teachings, in the final analysis, they are all methods aimed at the same enlightenment. The 'burning house' represents the deluded world of human beings. The chi^dren are the practitioners of the three vehicles. The goat cart represents the /sra^vaka vehicle, the deer cart represents the pratyekabuddha vehicle, and the ox cart represents the bodhisattva vehicle. When the chi^dren have been induced to come out of the house, the large identical white ox carts are prepared outside the gate to give to each chi^d. These are metaphors for the great compassion of the Buddha as he discards his expedient means and returns the practitioners to the true single Buddha vehicle. Students of the Lotus Sutra in China were divided into two main groups: one that considered the expedient ox cart and the (fourth) great white ox cart to be the same (therefore positing three vehicles). These were mainly the Faxiang 法相 and Sanlun 三論 schools. The other group, the "four vehicle thinkers" (Hua-yen 華嚴, T'ien-t'ai) 天台 maintained that the expedient ox cart and the great white ox cart are different. That is, the three vehicle thinkers consider the bodhisattva vehicle and the Buddha vehicle to be the same, while the four vehicle thinkers considered them to be different. [Muller-jpn-Eng]
靈鷲山 リョウジュセン (place) Vulture Peak [Glossary_of_Buddhism-Eng]
PRIMAL BUDDHA☞ See: Vairocana Buddha.
46 좋은 말씀은 흐린 4대(大)를 능히 맑힙니다. 미례례, 弭隸隸<四十六> mile miri (이하~) 마음의 보호를 성취케 하시고, 온갖 눈병(惡相)으로부터 보호하소서
『대승대집지장십륜경』
♣0057-001♧
33 대비심을 갖춘 이(관세음보살)는 범왕을 위해 다시 재앙을 멀리 여의는 청량(淸凉)한 게송을 말씀하셨다. "넓은 들을 가거나, 산과 못을 가는 중에 호랑이나 늑대와 모든 나쁜 짐승과 뱀과 도깨비 귀신을 만나도 이 주문을 듣거나 외우면 해치지 못하며 ● 자라자라 遮囉遮囉<三十三> ca la ca la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담시는 관중(關中) 사람이다. 출가한 이래로 많은 기이한 자취를 남겼다. 진(晋)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연간(376~396) 말기에 경과 율장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으로 갔다. 교화를 베풀면서, 뚜렷하게 3승을 전수하여 계에 귀의하는 길을 세웠다. 무릇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도를 듣게 된 시초이다. 의희(義熙) 연간(405~418) 초기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왔다. 조정의 세 대신을 깨우쳐서 이끌었다. 담시의 발은 얼굴보다 더 희다. 비록 맨발로 진흙탕 물을 건너가더라도, 전혀 흙물이 발에 달라붙거나 물에 젖는 일이 없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는 모두 그를 발이 흰 스승[白足和上]이라 부른다. 당시 장안에 왕호(王胡)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삼촌이 죽은 지 몇 해 후에 홀연히 모습을 나타내 돌아왔다. 왕호를 데리고 두루 지옥을 유람하면서, 여러 가지 과보를 보여주었다. 왕호가 지옥에서 떠나 집으로 돌아올 때, 삼촌이 왕호에게 말하였다. “이미 인과를 알았을 것이니, 다만 백족화상의 암자에서 섬기고 받들어야 한다.” 왕호는 두루 많은 승려들을 찾아갔다. 오로지 담시만이 발이 얼굴보다 더 흰 것을 보았다. 이로 인하여 그를 섬겼다. 진(晋)나라 말기에 삭방의 흉노족인 혁련발발(赫連勃勃)이 발흥하였다. 관중 땅을 파괴하고 휘저어,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당시 담시도 역시 살해될 위기를 만났다. 그러나 칼로 그를 상하게 할 수 없었다. 혁련발발이 감탄하여 두루 사문들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는 이에 산속 못가에 깊이 은둔하여 두타행을 닦았다. 그 후 척발도(拓跋燾)가 다시 장안을 차지하여, 관중과 낙양에 위세를 떨쳤다. 당시 박릉후(博陵侯) 최호(崔皓)가 어려서부터 도교를 익혀서, 불교를 시기하고 질투하였다. 그가 나라의 재상이라는 벼슬자리를 잡자, 척발도가 믿고 기대었다. 이에 천사(天師) 구(寇)씨2) 와 더불어 척발도를 설득하였다. 불교는 이로움이란 없고, 백성들의 이익을 손상케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불교를 폐지하기를 권고하였다. 척발도는 그의 말에 미혹되어, 태평(太平) 7년(446)에 마침내 불교를 훼멸(毁滅)시켰다. 그리고 군병을 곳곳에 파견하여, 절집을 불태우고 약탈하였다. 통치권 안의 비구와 비구니들에게 모두 도를 그만두게 하였다. 그 가운데 도망가고 숨은 사람은 모두 군사를 내어 뒤쫓아가서 잡아오게 하였다. 잡으면 반드시 목을 자르는 참형에 처하였다. 온 경내에 다시는 사문이 없었다. 담시는 오직 그윽이 깊은 곳에서 문을 닫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러므로 군병들이 이를 수 없는 곳에 있었다.
태평 연간(440~451) 말기에 이르러, 담시는 척발도의 죽을 날이 곧 미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정월 초하루에 문득 지팡이를 짚고, 궁궐 문에 이르렀다. 담당 관리가 상주하였다. “한 도인이 있는데, 발이 얼굴보다도 더 흰 사람으로, 문으로부터 들어왔습니다.” 척발도가 영을 내렸다. 군법에 의하여, 여러 번 칼로 담시의 목을 베게 하였으나 상하지 않았다. 급히 이 사실을 척발도에게 아뢰었다. 척발도는 크게 노하여, 스스로 차던 검(劒)으로 담시의 몸을 베었다. 그러나 몸에 다른 이상이 없었다. 오직 검이 닿은 곳에, 천의 실과 같은 흔적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척발도의 궁전, 북원(北園)의 우리 속에서 호랑이를 길렀다. 척발도는 명령하여 담시를 호랑이 먹이로 주었다. 호랑이들이 모두 숨고 엎드려, 끝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시험 삼아 천사(天師: 寇謙之)를 호랑이 우리에 가까이 가게 하였다. 호랑이는 곧 표효하며 으르렁거렸다. 척발도는 비로소 부처님의 교화가 존귀하고도 높아, 황로(黃老: 道敎)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곧 담시를 초청하여 궁전에 오르게 하고,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려 절하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쳤다. 담시가 그를 위하여 설법하고, 인과를 밝게 말하였다. 그러자 척발도는 대단히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마침내 문둥병에 감염되었다. 최호와 구씨 두 사람도 차례로 몹쓸 병에 걸렸다. 척발도는 자신의 허물이 그들 두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 여겼다. 이에 두 사람의 집안을 모두 다 주살하고, 그들의 문중 족속도 다 쓸어버렸다. 나라 안에 선포하여, 다시 정교를 부흥하게 하였다. 갑자기 척발도가 죽자, 그의 손자인 척발준(拓跋濬)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비로소 크게 불법을 홍교하여 그 성대함이 지금까지 이른다. 담시는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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