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거래품 ②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가는 자는 곧 머무르지 않고 【釋】하나의 동일하게 생한 법 중에 서로 어긋나는 작업이 섞이어 자성이 없다.
【論】가지 않는 자도 머무르지 않는다. 【釋】가는 법이 정지하는 것을 머무른다고 이름한다.
지금 가지 않는 자는 가는 법에 자성이 없어 응당 정지하지 않는다. 만약 혹시 본래부터 머무르는 법이 있어 얻을 수 있다고 하여도, 또한 머무르는 법에는 두 가지가 화합하지 않는다.
만약 두 가지의 화합이 있다면, 지금 응당 여실하게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한다. 【論】가는 자와 가지 않는 자를 여의고 어떻게 세 번째의 머무름이 있겠는가. 【釋】가는 자와 가지 않는 자 이 둘은 머무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의미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가는 자가 만약 마땅히 머무른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는가. 가는 법을 여읨으로써 가는 자는 얻을 수 없다. 【釋】총체적으로 머무르는 법을 부정한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지금 가는 때의 모든 분별을 그치라. 【釋】만약 그 가는 때에 머루르지 않는 것은 그렇다고 하고, 그 이미 간 자가 응당 머무르겠는가? 이것도 또한 그렇지 않다. 이미 간 자는 별도로 가는 법이 없어서 가는 법이 이미 무너졌으므로 머무르지 않는다. 이 중에는 이미 간 자가 머무르는 일이 있지 않다. 지금 이 머무르는 법을 이와 같이 부정하며, 나머지 모든 과실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모든 현행과 정지의 법도 모두 가는 일의 설명과 동일하다.
【釋】이렇게 설명한 바와 같이 나머지 법도 모두 동일하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지금 가는 때에 가는 법은 생기지 않는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지금 가는 때에 가는 법이 처음으로 출발하는 것은,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지금 가는 때에 가는 법은 부정된다. 머무르는 법도 또한 그러하여, 이미 머무른 것과 아직 머무르지 않은 것과 지금 머무르는 때에 머무르는 법은 생기지 않는다.
이미 머무른 것과 아직 머무르지 않은 것과 지금 머무르는 때에 머무르는 법이 처음으로 발생하는 것은, 이미 머무른 것과 아직 머무르지 않은 것과 지금 머무르는 때에 머무르는 법은 부정된다.
이 중에서 법의 자상 등을 만약 부정하면, 곧 과실을 이루지 않는다. 이 중에 있는 가는 자와 가는 법의 두 가지를 승의제 중에서 참다운 성품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이치답게 응당 알아야 한다. 모든 물체의 동일한 성품이나 다른 성품은 모두가 법의 성품이다. 이 중에서 만약 생하는 바가 있다면, 모두 객진(客塵)1)니 일이요, 세속에서 행해지고 세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나, 다른 성품이 없다.
그러므로 가는 자와 가는 법의 둘은 다른 성품이 없음을 마땅히 생각하여 간택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바람이 움직여 이동하니 곧 가는 자가 있고, 몸 등이 움직여 출발하여 어떤 방향과 장소로 가는 모습이 있어 이것을 이에 감이라고 하지만, 가는 자와 가는 법의 두 성품은 별다르지 않다. 자신의 부류[自類]2) 중에 다르게 설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 이러한 일을 부정해야 한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가는 법이 곧 가는 자라면 이런 일은 곧 옳지 않다. 이것은 또 어찌하여 그러한가? 게송에서 말한다.
【論】만약 가는 법이 곧 가는 자라고 한다면, 만드는 자와 만드는 업은 곧 동일한 성품으로 성립할 것이다.
【釋】비록 만드는 자[作者]와 만드는 업[作業]의 두 가지 모습이 있으나, 그 만드는 자와 만드는 업은 서로 다른 성품이 없다. 그 만드는 자와 만드는 업의 자상이 그쳤기 때문이다. 혹은 한 가지 성품으로 화합할 수 있다. 곧 체(體)와 용(用)의 모습이 있어서, 세속에서 이루어지고 세속에서 성품이 있어, 그것은 참으로 이루어진 바가 아니나, 세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결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한 가지 성품도 아니다. 이 중에 만약 부정하는 바가 있다면, 도리어 과실을 이루어 생하는 법이 현저히 드러난다. 만약 그런 견해를 부정하면, 곧 과보의 체가 없으며, 또한 어떤 방향과 처소로 가거나 움직여 출발하는 등의 모습도 없다. 또 다음에 비바사인(毘婆沙人)3) 및 베야가라나인(吠夜迦羅拏人)4)은 말하기를, 가는 자와 가는 법은 별다름이 있으므로 그것은 말하자면 가는 자가 능히 가고 물체가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물체는 가는 자로 말미암기 때문에 얻는 바가 있다고 설한다. 만들어지는 것도 이와 같으며, 능히 만드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고 한다.
또 다음에 승론자(勝論者)5)는 말하기를, 이와 같이 능히 물체 중에 성품이 존재하므로 가는 자가 있으며, 그 가는 법을 사용하여 움직여 출발하고 어떤 방향과 처소 등으로 가는 모습이 있다.
이것은 이와 같이 설하며, 나머지도 모두 또한 그러하다고 한다.
해석자는 말한다. 그렇지 않다. 가는 법이 만약 그러하다면, 만드는 자의 공능(功能)6)이물체 중에서 차별이 있는가, 차별이 없는가?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만약 차별이 있다면, 여러 다른 역능(力能)7)이 혹시 다시 다른 가지런한 등의 역능이 있어서 하나의 능작(能作) 중에서 만약 체성을 이룬다면, 이것은 곧 만드는 자의 역능이지 소작(所作) 등의 공능이 아니다. 이것이 만약 소작 등의 역능이라면, 곧 만드는 자의 공능이 아니다. 이 중에 어떻게 여실히 결정되겠는가. 혹시 자상의 차별을 말하면, 이것은 곧 도리어 부정(不定)을 이룬다. 만약 혹시 자상에 차별이 없다고 말하면, 곧 모든 경우에 응당 차별성이 없을 것이다. 지금 물체로서 이와 같이 증상(增上)에 의지하면, 불[火]은 흙[地] 등의 작업을 만들 수 없다. 또한 그 작업의 작용을 만드는 자가 없지 않아 역능이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체는 이와 같이 짓는 자의 공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설명의 의미는 성립된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모든 물체의 이와 같은 능작과 이와 같은 소작 및 이와 같은 증상의 작용 중에서 만드는 자는 곧 화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공능의 차별이 아니고, 또한 자체의 차별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만약 물체에 차별이 없다면, 공능은 이루어질 수 있다.
이와 같이 또한 모든 역능도 서로 차별이 없고 동일하여 다른 성품이 없음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물체가 만약 동일한 성품이라도 이 중에는 또한 여러 법으로 이루어진 바가 없으며, 만약 물체가 다른 성품이라도 이 중에는 또한 여러 법으로 이루어진 바가 없다. 어떻게 두 가지의 공능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혹시 얻은 바를 여의면, 그것은 이와 같이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훌륭한 공능으로 법을 연(緣)하는 차별이다. 만드는 자와 물체의 연(緣)에 차별이 있다면, 이것을 수승하게 차별하여 길이 기름[勝上差別長養]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만드는 자의 역능이 화합하지 않는다. 만약 혹시 상태를 차별하면, 이와 같이 만드는 자를 분별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말하여 만드는 자라고 이름한다. 만약 인과(因果)가 변할 때는 그 능작과 소작의 성품의 상태는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물체의 차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혹시 그것에 성품이 있다고 시설한다면, 이것은 화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는 자라고 이름한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가는 법이 가는 자와 다르다는 이 일도 또한 옮지 않다. 【釋】만약 가는 법을 여의고서 그 가는 자는 결정되지 않는다. 만약 가는 법을 여의고 결정되지 않은 때에 다시 별다른 가는 자가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분별된 바이다. 만약 가는 자와 가는 법의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면, 곧 가는 자와 가는 법의 둘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가는 법이 있으므로 곧 가는 자가 있고, 가는 자가 있으므로 곧 가는 법이 있으니, 인(因)과 과(果)의 둘이 서로 여의지 않는 성품과 같다. 이렇게 말하는 의미는 성립된다. 만약 원인과 결과가 같이 생긴다면, 곧 자성을 얻을 수 없다. 종자에서 싹이 생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가는 법이 있으므로 곧 가는 자가 있고, 가는 자가 있으므로 곧 가는 법이 있다. 만약 동일한 성품으로 이루어져 있든, 만약 다른 성품으로 이루어져 있든, 가는 자와 가는 법의 둘은 모두 있지 않다.
승의제에서 이러한 설명은 성립된다.
어찌하여 있지 않은가? 이 의미에 대한 글은 많으나 번거로움을 염려하여 잠시 그치고, 이 중에서 부정하여 다시 인용하여 증명하지 않는다. 부정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표시한다. 이렇게 설명한 바와 같이 나머지 경우도 응당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후에 또 마땅히 부정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민가? 만약 가는 법으로 인하여 가는 자를 안다면, 그 이와 같이 감은 어떻게 두 가지에 그 별다름이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화합하겠는가?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감으로 인하여 가는 자를 아는 데에는 이 감을 사용할 수 없다. 【釋】이러한 의미를 짓지 말라. 여기에 응당 질문이 있다. 무수한 의미들이 생각으로부터 나오며, 모두 이 생각이 변한 것이다. 지금 어째서 이러한 의미를 짓지 말라고 하는가?
그러므로 게송에서 대답한다. 【論】먼저 가는 법이 있지 않으므로 가는 자의 감이 없다. 【釋】그 이와 같이 가는 자가 만드는 것에 있어서 어떻게 조금이라도 가는 법이 있겠는가. 이와 같음으로 말미암아 세간에서 보이는 것은, 어떠한 법이 먼저부터 이미 생하여 가는 바가 있으며, 어떠한 법이 나중에 생할 때 가는 바가 있겠는가.
또 다음에 게승에서 말한다. 【論】감으로 인하여 가는 자를 아는 데에는 다른 감[去]을 사용할 수 없다. 하나의 가는 자 중에 두 가지의 감이 있지 않기 때문이라. 【釋】무엇이 두 가지의 감인가. 첫째는 감으로 인하여 가는 자를 알기 때문이요, 둘째는 만약 가는 자가 있으면 다시 가는 법을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부정된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만약 가는 법이 실제로 있다면 가는 자는 세 가지의 감을 사용하지 않는다. 가는 법이 실제로 있지 않다면 가는 자는 세 가지의 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가는 법이 있거나 있지 않거나 가는 자는 세 가지의 감을 사용하지 않는다. 【釋】만약 혹시 실제로 있거나 실제로 있지 않거나, 이 중에 가는 자는 가는 법에 세 가지의 감을 사용하지 않는다. 만약 가는 법이 실제로 있다면, 곧 가는 자와 가는 법이 화합한다. 만약 실제로 있지 않다면, 곧 가는 자는 가는 법을 여의게 된다. 만약 또한 실제로 있고 또한 없다면, 두 가지가 함께 자성이 없다. 혹시 실제로 있을 수 있으니 가는 자가 있기 때문이요, 실제로 있지 않으니 가는 자가 있지 않기 때문이요, 또한 있고 또한 있지 않으니 그 둘에 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는 자는 세 가지의 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러한 의미를 짓지 말라. 만약 그 가는 자가 실제로 있고 가는 법이 실제로 있다면, 곧 소작(所作)은 있지 않고 능작(龍作)은 화합하지 않아, 실제로 있지 않음으로써 만드는 바가 없다. 실제로 있지 않다면, 가기 위하여 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있고 또한 있지 않다면, 역시 만드는 바가 없다. 그것은 자성이 없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는 자는 세 가지의 감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와 같이 가는 자는 스스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전부 만드는 바가 없다면, 그것은 모두 자성이 없다. 만약 가는 법을 말한다면, 여기에서 모두 수순하여 설명한 것이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그러므로 감과 가는 자와 가는 곳이 모두 없다.
【釋】이러한 설명은 승의제에서 성취된다.
이와 다르게 능작(能作)ㆍ소작(所作)과 작법(作法)이 있다고 말한다면, 여기에서 부정하라.
이 중에서 혹시 가는 작용을 말한다면, 이치대로 응당 생각하라.
그러므로 마땅히 이 중에서 말하는 만드는 자와 만드는 업과 만드는 법의 모든 분별은 모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를 입증하여 성취하기 위해서 이 품이 생긴 것이다.
3. 관육근품(觀六根品)
앞의 품에서 일체의 만드는 자와 만드는 업과 만드는 법을 부정하였다.
모든 만들어진 것은 행상(行相)8)이 서로 어긋난 것이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봄[見]과 소리 들[聞] 및 냄새 맡음[嗅]과 맛봄[嘗)과 감촉[觸]과 앎[知] 등이 육근(六根)이다.
이 봄 등의 육근은 능히 모든 경계를 취한다고 말한다.
【釋】이 논서에서 말하는 이와 같은 봄[見] 등의 육근은 모든 경계를 상대한다. 소위 눈[眼]은 색(色)을 보고, 내지 뜻[意]은 법(法)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두 세속의 도리요, 증상으로 지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서로 어긋남이 없다.
만약 승의제라면, 색이나 눈 등의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는 자성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또 어찌하여 그러한가?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이 눈은 곧 스스로 자기 자체를 볼 수 없다.
【釋】만약 눈이 자성을 볼 수 있다면, 그 눈은 마땅히 앞에서처럼 스스로 자기 자체를 볼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의 자성은 스스로 볼 수 없다. 불의 더운 성품과 같이 특이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스스로 자기 자체를 볼 수 없어, 이 중에서 또한 자성을 볼 수 없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만약 스스로 볼 수 없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볼 수 있으리.
【釋】자성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귀[耳] 등과 같다. 또한 능히 자성을 보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저 눈이 만약 능히 자성을 취하여 색의 경계 중에서 보는 바가 있다면, 이러한 주장이 도리어 성립하여 눈이 볼 수 있을 것이다. 비유하면 땔감[薪]과 불[火]이 변이한 것을 이름하여 타는 것[燒]이라 하고, 불 자체가 타는 것이 아님과 같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불의 비유는 곧 눈이 보는 법을 성립시킬 수 없다.
【釋】어찌하여 그러한가? 만약 저 더운 성품이 불타게 할 수 있다면, 저 덥지 않은 성품은 어째서 그렇게 할 수 없는가?
그러므로 만약 저 땔감이 없으면 이 ★★불도 있지 않다. 더운 성품은 응당 스스로 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지금 가는 때에 앞에서 이미 이 일에 대답하였다. 【釋】앞에서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지금 가는 감이 없다는 것 가운데 이미 이 일을 말한 것처럼, 지금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 이미 탄 것과 아직 타지 않은 것과 지금 타는 때에 탐[燒]이 없고, 이미 본 것과 아직 보지 않은 것과 지금 보는 때에 봄[見]이 없다. 그러므로 이미 탄 것도 없고 아직 타지 않은 것도 없으나 타는 바를 여의지 않고, 이미 본 것도 없고 아직 보지 않은 것도 없으나 보는 바를 여의지 않는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차례대로 수순하여 마땅히 부정한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봄이 만약 아직 보지 않을 때에는 곧 본다고 이름하지 않는다.
【釋】만약 혹시 있다면 항상함이다. 병(甁)이나 옷[衣] 등과 같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만약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을 말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화합하겠는가.
【釋】화합하지 않으므로 그 법을 본다는 것도 또 다시 부정한다. 혹시 능견과 소견의 두 법이 화합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능견과 소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두 법은 화합하지 않는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나의 보는 법 중에 그 보이는 것[所見]은 화합할 수 없어, 별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능견이 있다면 곧 소견이 없지 않고, 만약 소견이 있다면 곧 능견이 마땅히 성립할 것이다. 또 만약 결정적으로 그 보는 법이 있다면 곧 그 능견도 또 다시 마땅히 성립하고, 능견이 만약 성립하면 소견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능견도 또한 보지 않으니 보는 법은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釋】만약 혹시 눈[眼]을 여의고 따로 보는 모습이 있다면, 소견을 말할 수 있고 혹은 능견을 말할 수 있으나, 능견 및 소견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소견(所見)도 또한 보지 않으니 보는 법은 성품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釋】이 중에서 만약 혹시 모든 연(緣)이 그치면, 또한 능견과 소견을 얻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소전 중에는 능견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만드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곧 봄이 있어서 소견이라 이름한다. 이 중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능견 중에서는 봄을 얻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중에서 만약 모든 차별법의 자체적 성품을 볼 수 있다면, 전부 부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이 능견과 소견이 있어서 보는 법이 일어난다면, 곧 만드는 자와 만드는 업과 만드는 법이 화합함이 없지 않을 것이며, 보는 것과 보는 법도 또한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또 어찌하여 그러한가?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봄을 여의거나 봄을 여의지 않거나 보는 자는 얻을 수 없다. 【釋】보는 법이 일어나 화합하지 않으므로, 두 번째 보는 법도 본래 성품이 없어서 또한 결정적으로 일어남이 없다. 그 보는 법은 보이는 것의 성품을 여의고는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며, 혹은 소견과 능견의 둘이 모두 없기 때문이다.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論】보는 자가 없으므로 어떻게 소견이 있겠는가. 【釋】능견과 소견의 성품은 작용이 서로 어긋나서, 만약 화합하는 성품을 여의면 곧 보는 자가 없다. 만약 보는 자가 없으면, 곧 소견의 성품은 화합할 수 없다. 이 중에 능견과 소견은 결정적으로 보는 것이 없으니, 어떻게 능견과 소견을 말할 수 있겠는가. 보는 것은 성품을 여의었으며, 보는 것은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약 모든 행(行)은 공하고, 모든 법은 자아[我]가 없으며, 이러한 도리가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바와 같은 것은 곧 별다른 능견과 소견이 없다.”라고 한다면, 그는 곧 그 참다운 과보를 얻을 수 없으니, 어떻게 식(識) 등의 네 가지 법이 일어나겠는가. 그러므로 게송에서 그런 견해를 부정하여 말한다.
【論】보이는 것과 보는 것이 없으므로 식 등의 네 가지 법[四法]9) 없다.
【釋】설명한 이치대로 이 능견과 소견이 모두 성취되지 못하여, 그 과보로 생기하는 식(識)ㆍ촉(觸)ㆍ수(受)ㆍ애(愛)의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이 어떻게 화합하겠는가. 만약 결정적으로 식 등의 네 가지 법이 있다면 곧 그 과보로 취할 법이 생기겠으나, 실제로는 없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다. 또 게송에서 부정하여 말한다. 【論】네 가지 취[四取]10) 등의 여러 연(緣)이 어떻게 마땅히 있을 수 있겠는가. 【釋】말하자면 식(識) 등과 취(取), 취를 연하여 생하는 유(有), 유를 연하여 생하는 생(生), 생을 연하여 생하는 노사(老死)의 여러 법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며,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 품의 처음에서 다른 사람이 건립한 들음[聞]과 소리[聲] 등의 모든 주장을 모두 부정한다. 이 중에 보는 자는 모두 만드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한다. 【論】소리 들음[聞]과 냄새 맡음[嗅]과 맛봄[味]과 감촉[觸]과 앎[知]의 이와 같은 모든 근(根)들은 전부 위의 눈이 보는 법 중의 설명과 동일하다. 【釋】이 중에서 응당 알 것이다. 눈이 본다는 설명처럼 능문(能聞)과 소문(所聞) 등도 그와 같다. 비유하면 능견(能見)과 같이 들음 등도 그와 같음을 마땅히 자세히 설명해야 할 것이나, 이에 잠시 그친다. 이미 일체가 화합하지 않는 것을 부정하여 대치하였으므로 이 설명은 성취된다. 이 중에서 능견과 소견, 보는 법에 있어서 모든 분별하는 물체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지금 이 품에서 전부 그와 같은 의미임을 증명하여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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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연적인 것, 또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외부에서 발생한 번뇌를 뜻한다. 2) 불교 내의 다른 중관학파나 다른 종파에 속한사람. 3) 상세하게 분석하여 해석한다는 말인 vibhāṣā의 사람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곧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의미한다. 4) 인도 학파에서 말하는 성명론(聲明論)인 vyākaraṇa의 사람, 곧 문법론자(文法論者)를 뜻한다. 5) 인도 철학 중의 하나인 바이셰시카(vaiśeṣika) 학파의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 6) 결과를 생하게 하는 잠재력 또는 그 작용. 7) 재능ㆍ능력. 8) 분별하는 마음이 대상을 구별하여 인식하는 작용. 9) 식(識)ㆍ촉(觸)ㆍ수(受)ㆍ애(愛)의 네 가지를 가리킨다. 10) 취(取)는 외계의 대상을 집착하는 번뇌. 네 가지 취는 ① 욕취(欲取): 대상에 집착하는 애욕 ② 견취(見取): 오온(五蘊)에 대하여 아견(我見)ㆍ변견(邊見) 등의 허망한 견해를 생하는 것 ③ 계금취(戒禁取): 잘못된 계(戒)를 지키는 것 ④ 아어취(我語取): 아견(我見)과 아만(我慢)에 집착하는 것이다.
알고보면 중관론이 가장 쉬운 내용이기도 하다. 어려운 부분은 오히려 다음이다. 본래 감이 없고 머뭄이 없다. 그런데도 왜 생사현실에서는 대부분 감이 있고 머묾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되는가이다. 그 사정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더 복잡하고 어렵다.
무언가를 얻을 수 없음은 얻을 수 없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 내용만 잘 파악하면 오히려 쉽다. 단지 표현을 놓고 잘못 오해만 하지 않으면 된다.
이미 이들 내용을 살폈다. 반복하면 중복이 된다. 이들은 간단히 다음을 의미한다.
실재 # - 감각현실 ○ - 관념분별 ■
현실에서는 본 바탕 실재#를 바탕으로 감각현실 ○ 을 얻게 된다. 그 다음 다시 이를 바탕으로 일정한 관념분별 ■ 을 일으킨다. 이런 경우 자신이 분별한 내용 ■ 이 다른 영역에도 그대로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현실에서 분별한 내용 ■ 은 실재# 영역에 얻을 수 없다. 이런 뜻이다.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꿈에서 어떤 이가 수영을 해서 바다를 건넜다고 하자. 1 분에 1 M씩 수영해서 100 m 를 수영해 건너갔다고 하자. 이런 경우 그는 꿈 속에서 다음처럼 여기기 쉽다. 꿈 밖 침대가 놓인 현실에도 이런 바다가 있다. 그리고 자신이 수영한 속도나 수영함 등이 그처럼 그대로 있다. 그래서 그렇게 꿈을 꾸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 여기기 쉽다. 그러나 꿈 밖의 침대가 놓인 현실에는 꿈에서 꾼 내용 일체를 다 얻을 수 없다. 이런 사정을 꿈 안 내용을 가지고 알아내야 한다고 하자.
그런데 지금 논의도 그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는 본 바탕 실재#를 바탕으로 감각현실 ○ 을 얻게 된다. 그 다음 다시 이를 바탕으로 일정한 관념분별 ■ 을 일으킨다. 이런 경우 자신이 분별한 내용 ■ 이 다른 영역에도 그대로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런데 현실 안의 내용만으로 본 바탕 실재# 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아내야 한다.
물론 분별한 내용 ■ 은 감각현실 ○ 에서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논의 초점은 이들이 실재 영역에 그대로 있는가이다. 또 진짜라고 할 참된 실체로써 있는가이다.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중관론은 이런 내용에 대해 보충적으로 가정적 항변 방식으로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깨뜨린다. 『대승중관석론』에서는 이를 위해 마치 주장(상대주장과 모순되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처럼 제시한다. 그러나, 그 취지는 귀류논증식의 방식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떻게 상대의 주장을 깨뜨리는가를 살펴야 한다.
처음에 이렇게 제시한다. 눈이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것이 문제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눈이 스스로를 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왜 이것이 문제인가.
현재 눈이 무언가를 보는가 안 보는가를 따진다. 그런데 이는 현실에서의 문제를 놓고 살피는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이 본 바탕에도 있다고 할 것인가 이런 것을 놓고 문제삼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봄이 본 바탕에도 있다고 하려면 여기에 어떤 특성이 있어야 하는가를 먼저 이해해 한다.
눈이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내용도 그래서 이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눈이 자신을 보면 어떤가. => 이 경우는 다음을 의미한다. => 눈이 자신이나 자신이 아니거나 관계없이 본다. 그렇다면 어떤 것과 관계없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보는 내용 들이 본 바탕에도 실재한다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이런 뜻이다.
다른 논파 내용들도 마찬가지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중복 서술을 피해 회쟁론 부분에서 함께 정리해 살피기로 한다. ★★★
요즘 가끔 쉴 때마다 과학교재를 본다. 힘의 방향 무게 운동 거리 속도 이런 내용을 대한다. 어릴 때도 과학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더 어렵다. 보다보니 알짜힘이란 용어가 보인다. 합력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알짜가 어떤 외국어인 것으로 생각했다. 알파 형제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숙왕화님이 과학을 나보다는 조금 잘 안다. 그래서 알짜가 무엇을 나타내는 말인지 물어보았다. 이는 합력을 쉽게 표현한 순한글말이라고 한다. 여기서 알짜는 알짜배기. 이런 때 쓰는 알짜라고 한다.
사전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1. 여럿 가운데 가장 중요하거나 훌륭한 물건. 2. 실속이 있거나 표본이 되는 것.
찌거기와 상대되는 말이라고 한다.
쉽게 표현한 한글을 놓고 외국어라 이해하니 오개념을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더 어렵다.
한글이 다른 말들을 만들어내는 의미소인 경우가 적다. 그래서 익숙해지기 쉽지 않다.
여하튼 과학책에는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맞다고 생각하는 내용이 대부분 기술되어 있다.
그러다가 중관론 등을 보면, 이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운동, 가고 옴, 멈춤 이런 것이 아예 없다고 한다. 그리고 눈을 통해 보는 일도 없다고 한다.
너무 이상한 이야기다.
그래서 이 두 내용 가운데 하나는 분명 엉터리라고 해야 할 듯 하다.
그런데 사실 이 두 내용은 다 맞다. 각기 다른 영역을 침범해서 무리하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둘 다 잘 사용해야 할 내용들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한 견해를 취하면 이 내용을 다른 영역까지 밀고 들어간다.
그 부분이 문제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를 서로 잘 이해해야 한다. 서로 잘 부합하게 사용해야 한다.
본 바탕의 측면은 경전 내용이 맞다.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켜 대하는 측면에서는 과학책 내용이 맞다.
이 두 내용을 합해서 대하게 되면 어떤 합력이 어떤 방향으로 나올 것인가.
결국 이 두 측면을 합하면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 된다. 즉, 불가득을 방편으로 상을 취하지 않는 가운데 집착없이 수행방안을 행하는 내용이 된다. 이것이 알짜힘의 내용이 된다.
그렇지 않고 이 두 측면을 모두 잘못 취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현실에서 전후 좌우와 거리 속도가 있다고 여긴다. 사정이 그렇다고 이들 내용이 본 바탕 실재 # 영역에도 그대로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래서 이들 내용이 꿈과는 다른 실다운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현실 내용에 하나하나 집착하고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무량겁에 걸쳐 생사현실에 묶인다. 그리고 생사현실안의 생사고통을 무량겁에 걸쳐 장구하게 받아나가게 된다.
한편 실재 #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함을 이해한다고 하자. 마치 꿈과 현실의 관계와 같다. 꿈에서 열심히 공을 굴리고 운동장에서 뛰어 다녔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내용은 침대가 놓인 현실에서는 일체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꿈 안에서 이 사정을 잘 이해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그 꿈 안에서 그런 꿈을 꾸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물론 꿈은 실답지 않다. 즉 꿈 밖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꿈은 꿈대로 그런 내용을 얻는다. 따라서 꿈 안에서 그런 실답지 않은 내용들을 놓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생각해야 한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현실은 이런 꿈과 성격이 같다. 그렇지만, 또 현실은 꿈이 아니다. 꿈과 달리 좀 더 실답게 여겨지는 성격을 갖는다. 즉 다수 주체가 일정한 시기와 공간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한 내용(작용)을 무량겁에 걸쳐 엇비슷하게 받아나가게 된다. 또 그런 성격 때문에 이런 생사현실에서 겪는 고통을 꿈처럼 단순하게 대할 수 없다.
그것이 완전히 꿈이라면, 꿈에서 겪는 문제는 그냥 꿈을 깨면 된다. 그런데 생사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런 차이만큼 생사현실에서 수행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제시한다. 이 두 측면 가운데 어느 하나도 버리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다음처럼 제시한다.
본래 중생을 하나도 얻을 수 없다. ( 본 바탕 실재에서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중생을 얻을 수 없다. )
그렇지만,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한 가운데 무량한 중생을 생사현실에서 제도해야 한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대해야 한다.
우선 처음에 제시한 불가득이란 측면을 먼저 잘 취해야 한다. 수행을 하더라도 상을 취한 가운데 집착을 갖고 수행에 임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물론 수행이 처음 제거하고자 하는 생사현실내 고통 등을 일부 제거할 수 있다. 그런데 수행 자체가 갖는 부작용은 제거하기 힘들게 된다.
약의 사정과 같다. 처음 어떤 약은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그 약을 잘못 취하면 그 약이 새로운 부작용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래서 다시 이 부작용을 제거할 노력이 필요하다.
처음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통해 생사현실에서 갖는 망집과 업을 제거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통해 겪는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수행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수행자가 자칫 잘못 이해하면, 다음처럼 이해하기 쉽다. 생사현실의 망집은 문제다. 그런데 부처님이 제시한 수행과 수행목표만은 그렇지 않다. 이것만은 실답게 참된 내용으로 있다. 이런 식으로 오해하기 쉽다.
한편, 두번째 측면도 잘 취해서 사용해야 한다.
앞 내용만 강조한다고 하자. 그러면 다시 무의 극단에 치우치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성취할 수 있는 무량한 복덕과 지혜 그리고 무량한 선법을 수행자가 다 얻지 못하고 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겪는 중생도 제도해 내기 힘들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수행자 자신도 고통을 겪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본래 생사현실은 꿈과 같고 실답지 않다. 그런데도 매번 하필,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다음처럼 이해해야 한다. 생사현실은 꿈과 같고 실답지 않다. 그런데 그렇다고 정작 꿈은 아니다. 그것은 꿈과 성격은 같지만, 그러나 다수주체가 무량겁에 걸쳐 일정한 조건과 상황에서 반복해 겪는다. 그래서 대단히 실답게 여기게끔 된다. 또 그 만큼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그 만큼 생사현실에서 일정한 수행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생의 상태도 이와 같다. 그래서 생사현실을 벗어나도, 이런 중생을 위해 중생과 눈높이를 맞춰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정한 방편을 통해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따라서 비록 실답지 않지만, 생사현실 안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생사현실안에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다. 그런데 오직 이런 측면만 강조하면 위와 같은 노력을 모두 다 회피하고 버리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유무 양 극단에 치우치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양 측면을 함께 잘 취해서 사용해야 한다.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이들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수행과 수행목표마저도 이 사정이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런 수행을 행할 때에도 역시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또 그런 가운데 수행을 해야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생사현실에서 아무렇게 임해도 무방하다고 이해해서도 곤란하다. 그런 내용이 결국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핵심적 내용이기도 하다.
■ 영-중-일-범-팔-불어 관련-퀴즈 [wiki-bud]Chaitya Bhoomi [san-chn]
niḥsaraṇatas 出離, 離 [san-eng]
saktāḥ $ 범어 being attaced [pali-chn]
sati-balāni 念力 [pal-eng]
upabruuhesi $ 팔리어 aor. of upabruuhetiincreased; expanded. [Eng-Ch-Eng]
四無量心 Four Unlimited Mind 四無量心 The mind of Bodhisattva: 1. Kindness 2. Compassion 3. Delight 4. Renunciation\nThe 'four immeasurable minds.' The immeasurable mind of love (maitri 慈無量), compassion (karuna 悲無量), sympathetic joy (mudita 喜無量) and impartiality (upeks!a 舍無量). They are four kinds of meditation to give bliss to, and to take away the suffering of sentient beings (catva^ri-aprama^na^na). Four minds of immeasurable concern for others. [Muller-jpn-Eng]
事障 ジショウ (term) phenomenal hindrances [Glossary_of_Buddhism-Eng]
MINDMIRROR☞ The sutras commonly compare the Self-Nature to a mirror. The Mind-mirror of the Buddhas is bright, empty and still; the Mindmirror of sentient beings is dull and clouded. However, the intrinsic nature of both mirrors (brightness) is the same. If sentient beings can 【book-page-474 475】 wipe their Mind-mirror completely clean, they will return to their Self-Nature, the nature of the Buddhas – they will become Buddhas. This is the basis of gradual cultivation, as taught in most Buddhist schools. Editor /Zen: 30 #1428
75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깊은 마음으로 깨끗이 이 대비심 다라니를 받아 지니고, 이 염부제(閻浮提)에 널리 유포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여라. 이 다라니는 일체 인간 하늘, 육취(六趣) 사생(四生)에게 큰 이익이 될 것이며 또한 십지(十地)와 삼현(三賢), 귀신과 나찰에게도 큰 이익이 되나니라. ● 나모아리야 南無阿唎耶<七十五> na mo ā ry ā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15 바라 아바라마바다사 라 鉢囉<二合>惹波囉摩嚩怛娑<二合>羅<十五>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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