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하고 공경하는 근본으로 삼존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계상(契想)의 원인이 어찌 사제(四諦)를 넘어서겠는가? 그런데도 진리는 그윽하고 깊으며 일은 거친 마음과는 거리가 있다. 성의(聖儀)에 물부어 씻겨 주는 것은 실로 모든 것을 제도하는 일이다. 큰 스승님은 비록 멸도하셨지만 그 형상은 아직 남아있어 마음을 지극히 하면 살아계시는 것과 같으니, 이치로 보아 마땅히 따르고 공경하여야 한다. 혹 향화를 늘 마련하여 청정한 마음이 생길 수 있게 하여도 되고, 또 항상 불상을 씻겨서 혼침한 업을 쓸어버려도 된다. 이렇게 마음을 두드린다면 드러나지 않은 이익을 스스로 거두어들이게 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권장한다면 유작(有作)의 공덕으로 아울러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복을 구하는 사람은 뜻을 여기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서쪽 나라의 모든 절에서는 존의(尊儀)를 씻기는 일은 늘 사시(巳時)에 하게 된다. 이때 일을 감독하는 사람이 곧 건치(健稚)를 울린다일을 감독하는 사람을 범어로 갈마타나(羯磨陀那)라 한다. 타나는 내려준다는 뜻이고, 갈마는 일이란 뜻이다. 내용은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내려준다는 뜻이다. 예전에 이것을 유나(維那)라 한 것은 잘못이다. 유나의 유(維)는 중국의 음이고 그 뜻은 강유(綱維)를 말한 것이며, 나(那)는 범어의 발음으로 갈마다나란 말에서 갈마타를 생략한 것이다. 절 마당에는 보개(寶蓋)를 치고 불전 옆에 향병을 나열하며 금ㆍ은ㆍ동ㆍ돌로 만든 불상을 취하여 동ㆍ금ㆍ나무ㆍ돌의 반석에 안치한다. 안에서는 여러 기녀(妓女)들이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마향(磨香)을 바르고 향수로 관욕시키고전단향(栴檀香)ㆍ침수향(沈水香) 등을 취하여 초석 위에서 물로 갈아 흙이 되게 하고 이것을 사용하여 불상의 몸에 바르고 비로소 물을 붓는다 깨끗한 흰 주단으로 문질러 닦는다. 그런 다음에 불전 안에 안치하고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한다. 이것이 곧 절의 대중들의 의식이며 갈마타나가 그것을 맡아 한다. 승방마다 그 안에서는 나름대로 존의를 목욕시키며 날마다 모두가 마음을 가늠하여 빠지는 날이 없게 한다.
다만 이곳에서는 초목의 꽃을 갖고 와서 모두 봉헌하니 겨울 여름을 논할 것 없이 항상 꽃향기가 자욱하고 저자의 곳곳에는 꽃을 파는 사람도 많다. 동하(東夏)의 경우에는 연꽃과 석죽(石竹)은 여름과 가을에 여기저기를 물들이고, 금형화(金荊花)와 복사꽃ㆍ살구꽃은 봄날에 만개하며, 목근화(木槿花)와 석류(石榴)는 계절에 따라 바꾸어 가며 피고 주홍빛 앵두꽃과 흰 능금나무 꽃은 시절 따라 꽃망울을 터뜨리니, 동산에 피는 촉규화[蜀葵] 등과 산장(山莊)에 피는 향기로운 풀 등을 반드시 갖고 와서 벌려 놓아야 하며 멀리서 수원(樹園)을 가리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겨울 볕이 들면 잠깐 동안 혹 꽃이 부족한 일이 있으니 이때는 여러 가지 비단을 잘라 좋은 향을 모아서 존상 앞에 설치하니 이는 실로 아름다운 일이다. 동상(銅像)에 이르러서는 작고 큰 것을 물을 것 없이 반드시 가는 재나 벽돌가루로 문질러 닦아서 광명이 나게 하고, 맑은 물을 부어서 투명하고 빛나기가 거울같이 하여야 한다. 큰 불상은 보름날과 그믐날에 모든 대중이 함께 하고 작은 불상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늘 씻겨야 한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비록 적더라도 복덕의 이익은 매우 많다. 불상을 목욕시키는 물은 두 손가락으로 정수리 위에서 퉁기는데 이것을 길상(吉祥)의 물이라 하기 때문에 커다란 복을 구하기를 바란다. 불전에 봉헌하고 남은 꽃은 들어서 향기를 맡아서는 안 된다. 물과 꽃을 버려 함부로 밟아서는 안 되며 깨끗한 곳에 이를 기울여 놓아야 한다. 어찌 흰머리로 죽을 때까지 한번도 존상을 닦아 목욕시키지 않고 붉은 꽃이 들에 두루 피어도 본래 스스로 그것을 봉헌할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끝내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생략한 채 게으르게 되어 멀리서 못과 정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쉬고, 고된 것이 두려워 할 일에 게을러져서 법당을 열고 보경(普敬)하는 일도 그만둔다면 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를 이어주는 관계가 끊어지는 일로 마침내 공경을 이룰 말미가 없게 만드는 일이다. 흙으로 탑을 만들고 또는 니상(泥像)의 본을 떠서 혹 비단이나 종이에 인쇄하여 곳에 따라 공양드린다. 혹 흙을 쌓고 모으고 벽돌로 둘러쌓으면 곧 불탑이 이루어진다. 혹 빈 들판에 놓아 두어 그것이 자연스럽게 흩어지도록 내버려두기도 한다. 서방의 스님과 속인들은 이것을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 없다. 또한 대체로 부처님의 형상과 탑을 만들 때 금ㆍ은ㆍ동ㆍ철ㆍ진흙[泥]ㆍ옻나무[漆]ㆍ벽돌로 만들고 혹 모래와 눈을 모아 만들기도 하는데, 이것을 만들 때 그 안에 두 종류의 사리를 안치한다. 하나는 대사(大師) 몸의 뼈이고, 두 번째는 연기법(緣起法)의 게송이다.
그 게송을 말한다.
모든 법 인연에서 일어나니 부처님 이 인연 말씀하셨네. 그 법도 인연으로 다한다고 이렇게 큰 스님 말씀하셨네.
이 두 가지를 안치하면 복이 크고 많아진다. 이로 말미암아 경전 가운데서는 널리 비유를 하면서 그 이익이 불가사의함을 찬탄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상 만들기를 귀리[穬麥]처럼 작게 만들고, 탑 만들기를 작은 대추처럼 만들어 그 위에 윤상(輪相)을 설치하되, 장대는 가는 바늘처럼 한다고 하더라도 그 남다른 인연은 7해(海)와 비슷하여 다함이 없게 되고, 그 뛰어난 과보는 사생(四生)에 두루하여 다함이 없을 것이다. 이 일에 대한 소상한 내용은 다른 경전에 갖추어져 있으니, 여러 법사들께서는 때로 이에 힘쓰기를 바란다. 존용을 씻고 공경하는 일은 세세생생에 부처님을 만날 업을 짓는 일이며, 꽃과 향을 마련해 놓는 것은 대대로 부락(富樂)의 인연이 된다. 스스로 업을 지어 다른 사람에게 무량한 복을 얻게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일찍이 어떤 곳에서 보니 4월 8일에 혹 스님이나 혹은 속인이 길 가에 불상을 갖고 나와 편의에 따라 물을 부어 씻으면서도 문질러 닦을 줄을 몰랐는데, 이는 바람에 나부끼고 햇볕에 쪼일 뿐이지 그 의식에 일치한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32. 찬영지례(讚詠之禮)
중국 땅에서 예전부터 전해져 오는데 오직 예불이란 명칭만 알고 있을 뿐 많은 사람이 부처님을 칭념하고 공덕을 찬양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이름을 들으면 다만 그 이름만 들었을 뿐 지혜의 높고 낮은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찬탄하는 일은 자세히 그 덕을 말하는 것이기에 공덕의 넓고 깊은 것을 체득하게 된다. 곧 서방의 경우에는 탑에 절하거나 보통 예경(禮敬)할 경우에도 늘 해질녘이나 혹 황혼 무렵에 대중들이 절문을 나서서 탑을 세 바퀴 돌고 향화를 갖추어 나란히 쭈그리고 앉는다. 그 가운데 소리에 능한 사람을 시켜 애달프면서도 단아한 소리를 내게 하여 명철하고 웅장하며 낭랑하게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한다. 그리하여 혹 10수의 게송을 외우기도 하고 또 혹 20수의 게송을 외우기도 하면서 차례로 다시 절 안으로 들어가 늘 모이는 곳에 이르면 자리를 정하여 앉기를 마친다. 한 경사(經師)에게 사자좌(師子座)에 오르게 하여 약간의 경을 독송하게 한다. 그 사자좌는 윗자리 스님의 머리 위에 있으며, 성량과 음의 높낮이도 적당한 정도를 헤아려 높거나 크지 않게 하고 독송하는 경은 흔히 삼계(三啓)로 외운다. 이것은 곧 존자 마명(馬鳴)1)이 모아놓은 것으로 처음에는 10수 가량 되는 게송에서 경전의 뜻을 취하여서 삼존(三尊)을 찬탄하였고 다음 정경(正經)을 진술하였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친히 설법하신 경이다. 독송이 끝나면 다시 10여 수의 게송을 말하고 회향(廻向)ㆍ발원(發願)을 논한다. 이 절차의 단계는 세 가지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삼계(三啓)라 말하는 것이다. 경이 끝날 때는 대중들은 모두 소바사다(蘇婆師多)라 말한다. 소(蘇)는 묘하다는 뜻이고, 바사다(婆師多)는 말이란 뜻이다. 내용은 경을 찬탄하고자 이것이 미묘한 말씀이라 한 것이다. 혹 때에 따라서는 사바도(娑婆度)라고도 하는데, 뜻은 거룩하다[善哉]는 말을 지목한 것이다. 그리하여 경사(經師)가 막 자리에서 내려오면 상좌 스님이 먼저 일어나 사자좌에 절한다. 공경을 닦는 일을 끝내면 다음에는 성승(聖僧)의 자리에 예배드리고 다시 본래 있던 곳에 자리잡는다. 다음은 두 번째 상좌 스님이 높은 자리의 스님이 앞 스님의 한 일에 준하여 두 곳에 예배드린 다음 상좌 스님에게 예배드리고 비로소 자기 위치에 자리잡고 앉는다. 세 번째 상좌 스님도 앞의 스님에 준하여 그렇게 하며 그 뒤 대중의 말석에 자리한 스님에게까지 이르러 끝낸다 만약 그 대중의 집단이 커서 15인을 넘을 경우 나머지 스님들은 모두 일시에 대중을 바라보고 일어서서 예배드리고 사정에 따라 그곳을 떠난다. 이것이 곧 동인도[東聖方]의 탐마입저국(耽摩立底國) 승도들의 모범 법식이었다. 나란타사(那爛陀寺)와 같은 사찰에 이르러서는 사람과 대중이 매우 번화하여 승도의 수효가 3천 명을 넘어서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모두 모이기가 어렵다. 이 절에는 8원(院)이 있고 승방이 3백 개가 있어 거처하는 곳에서 수시로 예배드리고 독송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절의 법에는 창(唱)에 능한 도사(導師) 한 사람으로 하여금 포시(晡時)2)에 이르러 늘 돌아다니며 예찬하게 하였으며 정인(淨人)과 동자들이 여러 가지의 향과 꽃을 지니고 앞을 인도하여 갔다. 원(院)마다 모두 지나가고 전(殿)마다 모두 예배드리며 때로는 높은 소리로 찬탄하면서 3송(頌)ㆍ5송을 외어 그 메아리가 두루 퍼지게 하고 해가 질 때가 되어야 비로소 모두 다 하였다고 말하게 된다. 이 창도하는 스님은 항상 절집에서 특별한 요리를 공양받게 되고 또한 향대(香臺)와 마주하게 되면 홀로 앉아서 마음 속으로 찬탄하고 혹 범우(梵宇)에 여러 사람이 모이게 되면 대중들은 꿇어 엎드리고 높이 천양(闡揚)한 후에 열 손가락을 땅에 대고 머리를 조아리며 세 번 절한다. 이것이 곧 서방에서 이어 온 바탕이 된 예경 의식이다. 그리고 늙고 병든 무리는 뒷자리[小座]에 자리잡는 대로 맡겨둔다. 찬불하는 사람은 예전에도 이미 있었으나 다만 이를 행하는 방법이 조금 달라 범문(梵文)과 같지 않다. 또한 가령 예불할 때에 이르면 부처님의 상호(相好)를 찬탄하여 말할 경우 곧 곧은 소리[直聲]로 길게 찬탄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경우 혹 10수의 게송을 외우기도 하고 혹 20수의 게송을 외우기도 한다. 이것이 그곳의 법이다. 또한 여래 등의 범패(梵唄)는 원래 이것이 찬불인데 자못 음운이 조금 길어 뜻을 나타내기가 어렵다. 혹 재(齋)에 인연하여 고요한 밤 대중들의 마음이 쓸쓸하고 구슬플 때 능숙한 어떤 사람을 시켜 150수나 4백 수의 게송으로 찬탄하게 하고 아울러 다른 특별한 찬탄을 할 수 있다면 이는 아름다움을 이루게 되는 일이다. 그런데 서쪽 나라에서 예경하는 것은 크게 찬탄하는 말을 전하는 것이라 다만 재주있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공경하는 존상 앞에서 칭설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또한 존자 마지리제타(摩咥哩制吒)3)는 곧 서방 세계의 굉재(宏才)로서 뭇 영준한 사람 가운데서도 빼어난 큰 덕을 지닌 사람으로서 그가 전하여 말하였다. “예전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어떤 인연으로 친히 대중들을 거느리시고 인간세계를 유행하셨는데, 그때 한 마리의 꾀꼬리가 부처님의 상호(相好)를 보고 그 근엄함이 금산(金山)과 같기에 곧 숲 속에서 온화하고 고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부처님을 찬영하는 소리와 같았다. 이에 부처님께서 곧 여러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새가 나를 보고 기뻐하여 저도 모르게 슬피 울었다. 이 복된 인연 때문에 내가 죽은 이후 사람의 몸을 얻어 이름을 마질리제탁이라 하게 될 것이며 널리 칭탄하면서 나의 실덕(實德)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마지리(摩咥里)란 어머니란 뜻이며, 제타(制吒)는 아이란 뜻이다. 그 사람은 처음에는 외도에 귀의해 출가하여 대자재천(大自在天)을 섬기었다. 그를 존경하였기 때문에 갖추어 그를 찬미하여 노래하였다. 후에 이름을 기억하신 것을 보고 마음을 바꾸어 부처님을 받들고 옷을 물들이고 속가에서 벗어나 널리 찬탄을 일으키면서 지나간 날의 잘못을 후회하고 앞으로는 훌륭한 궤적을 따르기로 하였다. 스스로 큰 스승이신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고 다만 남아있는 불상만을 만나게 된 것을 슬퍼하여 마침내 왕성한 붓을 뽑아들고 우러러 수기(授記)에 부응하고자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였다. 처음에는 4백 수의 찬양 게송을 지었고 다음에 150수의 찬양 게송을 지어 총체적으로 육도바라밀(六度波羅蜜)을 말하여 부처님 세존께서 지니신 수승한 덕[勝德]을 밝혔다. 이 게송은 글과 감정이 아름답고 고와서 하늘세계의 꽃봉오리와 함께 꽃다움을 말할 수 있고, 이치가 맑고 높아 땅의 산봉우리와 더불어 가파로움을 다툰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서방에서 찬양의 게송을 짓는 사람이면 모두 이것을 본받아 익히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무착(無著)보살4)ㆍ세친(世親)보살5)도 그의 발꿈치를 우러러 보았다. 그런 까닭에 오천축국 땅에서 처음 출가하거나 또는 이미 5계ㆍ10계를 외우게 된 사람이라면 반드시 먼저 이 두 개의 찬양 구를 외우게 하여 대승ㆍ소승을 물을 것 없이 모두가 다같이 이에 따랐다. 여기에는 여섯 가지의 뜻이 있다. 첫 번째는 부처님의 공덕의 심원함을 알 수 있고, 두 번째는 글을 짓는 순서를 체득하게 되며, 세 번째는 설근(舌根)을 청정하게 하고, 네 번째는 가슴에 갈무리한 것이 개통되고, 다섯 번째는 대중 속에 처해도 미혹되지 않게 되고 여섯 번째는 오래 살고 병이 없어진다. 이 게송을 외우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경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도 이 아름다운 게송이 아직 동하(東夏)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이 게송에 해석을 다는 사람도 많다. 또한 이 게송에 창화(唱和)를 한 사람도 한둘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다. 진나(陳那)보살6)은 스스로 화운(和韻)이라 하여 게송의 첫구절마다 각기 한 구절을 더하여 이를 잡찬(雜讚)이라 이름하였는데 그의 게송은 3백 수가 있다. 또 녹야원(鹿野苑)의 이름난 스님인 석가제바(釋迦提婆)도 진나보살의 게송 앞에 각기 한 수의 게송을 더하여 이를 유잡찬(糅雜讚)이라 이름지었는데 모두 450수가 있다. 다만 이런 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게송을 모범으로 삼고 있다. 또한 용수보살은 시(詩)로써 글을 대신하여 이를 소힐리리거(蘇頡里離佉)라 이름지었는데 이 말을 번역하면 밀우서(密友書)란 뜻이다. 이 글을 옛 시주인 남방 대국의 임금에게 보내었다. 그의 호는 사다바한나(娑多婆漢那)이고 이름은 시인득가(市寅得迦)이다. 이 글은 문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정성스럽게 위로하고 가르치며 중도(中途)를 목표로 하여 친함이 혈육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의 지취(旨趣)는 참으로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먼저 삼존을 공경하고 믿게 하였고 부모를 효도로 봉양하며 계율을 지켜 악을 버리고 사람을 가려서 사귀게 하였다. 모든 재물과 색에 있어서 부정관(不淨觀)을 닦으며 집과 방을 검교(檢校)하고 바르게 무상(無常)을 생각하게 하였다. 널리 아귀ㆍ방생(傍生)을 말하고 크게 인간계 및 천상계와 지옥을 말하며 머리 위에 불이 타고 있어도 털고 제거할 여가가 없음을 말해 주어 연기(緣起)에 마음을 돌려 오로지 해탈을 구하라 하였다. 부지런히 3혜(慧)7)를 수행하고 성도(聖道)의 8지(支)8)를 밝히며 4제(諦)9)를 배워 원응(圓凝) 두 가지를 얻는 경지를 증득하게 하였고, 관자재(觀自在)보살이 원친(怨親)을 가리지 않는 것과 같이 되고, 아미타불이 항상 정토에 거처하는 것과 같이 되게 하였다. 이것은 곧 중생들을 교화하는 지혜이며 그 요체는 이에 더할 것이 없다. 오천축국에서 처음 불교를 배우는 무리들은 모두 먼저 이 서찬(書讚)을 외우며 마음으로 귀의하여 계앙(繫仰)하는 무리들도 종신토록 연미(硏味)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는 마치 중국의 스님들이 관음유교(觀音遺敎)를 외우고, 속인의 무리들이 천자문과 효경(孝經)을 읽는 것과 같아서 공경하고 완미하여 이것을 모범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 없다. 예를 들면 사득가마라(社得迦摩羅)라 하는 것도 이 부류와 같은 글이다사득가(社得迦)라는 말은 본생(本生)이란 뜻이고, 마라(摩羅)는 꿰뚫는다는 뜻이다. 보살의 예전 생(生)에서 행하기 어려운 일을 모아서 한 곳에 모아둔 것이다. 이 책을 만약 번역한다면 10여 축(軸)은 될 것이다. 부처의 본생(本生)의 일을 취해서 시를 지어 찬탄하였다. 풍속에 순응하여 곱고 아름다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뻐하고 사랑하게 하여 군생(群生)을 거두어들이게 한 글이다. 당시 계일왕(戒日王)10)은 극히 문필을 사랑하여 마침내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여러분들이여, 오직 좋은 시찬(詩讚)만 있거든 내일 아침에 모두 갖고 와서 나에게 보여다오.” 그리하여 모두 모은 것이 5백 협(夾)의 시찬이었는데 이것을 펼쳐보니 많은 것이 사득가마라였기에 비로소 찬송을 읊은 시 가운데서는 이것이 아름다움의 극치임을 알게 되었다. 남해의 여러 섬에는 10여 개의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스님과 속인을 물을 것 없이 모두가 앞에서 말한 시찬과 같은 시를 읊고 있다. 그런데도 이것이 중국에서는 한 번도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다. 또한 계일왕은 승운(乘雲)보살이 몸으로 용을 대신한 일을 취하여 이것을 모아 노래를 만들었다. 현악기와 관악기를 함께 연주하여 사람들에게 악곡을 만들게 하여 즐기고 춤추게 하여 시속에 유포시켰다. 또한 동인도의 월관대사(月官大士)는 비수안달라(毘輸安呾囉)태자의 노래를 지어 사인(詞人)들이 이에 맞춰 춤추고 읊조려 오천축국에 두루 퍼졌다. 예전에 소달나(蘇達拏)11)태자라 한 것이 이것이다. 또한 존자 마명(馬鳴)도 역시 가사(歌詞)와 『장엄론(莊嚴論)』을 지었고 아울러 불본행시(佛本行詩)를 지었는데, 이는 대본(大本)으로서 만약 번역한다면 10여 권의 책이 될 것이다. 그 내용은 부처님께서 처음 왕궁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사라쌍수에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의 일대 불법을 모두 모아 시로 만든 것인데, 오천축과 남해에서 이를 풍송(諷誦)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뜻이 분명하고 글자 수가 적으면서 담고 있는 내용은 많아 독자들로 하여금 마음이 흐뭇하여 고단함을 잊게 한다. 또한 성인의 가르침을 모아 지님으로써 복덕과 이익이 생길 수 있게 하였다. 그 150수의 시찬과 용수보살의 책은 모두 따로 기록하여 갖고 돌아왔으니 찬송 읊기를 즐기는 사람은 수시로 마땅히 외우고 익혀야 할 것이다.
33. 존경괴식(尊敬乖式)
무릇 예경(禮敬)하는 의식은 교의에 분명한 규칙이 있으니 스스로 6시(時)에 생각을 채찍질하고 4체(體)를 부지런히 발돋음하여 한 승방에 단정하게 자리잡고 걸식을 업으로 삼으며 두타행(頭陀行)을 하여 지족(知足)의 도를 닦아야 한다. 단지 3의(衣)만을 입고 가득히 채우거나 쌓아두지 않으며 무생(無生)의 세계에 생각이 이르면 번뇌는 완전히 없어진다. 어찌 승단의 의식과 달리하여 따로 궤식(軌式)을 행할 수 있겠는가? 출가한 사람의 옷을 걸치고도 그 무리와 달리하여 저자거리나 집 안에서 여러 속인 무리에게 절하는 것은 율교를 찾아 점검해 보면 완전히 이러한 일을 금지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절해야 할 대상에 두 종류가 있다. 이른바 삼보와 자기보다 법랍이 높은 비구가 그것이다”라고 하셨다. 또한 존상을 갖고 와서 큰길 가운데서 성스러운 모습을 먼지로 더럽히면서 그것으로 재물과 이익을 구하는 사람도 있고, 혹 몸을 갈고리로 매달고 눈 등을 찌르며 마디를 끊고 살갗을 뚫으면서 거짓 속임수로 좋은 마음에 기탁한다 하지만 본심은 불로장생을 희구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와 같은 모습은 서쪽 나라에는 전연 없다. 여러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인도하나니 다시는 이런 일을 행하지 말라.
34. 서방학법(西方學法)
무릇 큰 성인의 한 소리는 삼천세계를 꿰뚫어 모든 것을 거두어들이셨다. 혹 다섯 갈래의 기연을 따라 칠구(七九)를 밝히시어 널리 중생을 구제하시었다칠구(七九)라 하는 것은 성명(聲明) 가운데 7이 9로 바뀌는 예를 말한 것으로 아래에서 간략히 밝힐 내용과 같다. 때로는 의언(意言)으로 법을 갈무리하여 천제(天帝)가 무설(無說)의 경을 이해하기도 하였다. 혹은 또 말에 의해 궁극의 이치를 이야기하면 지나(支那)에서도 본성(本聲)의 글자를 깨닫게 되었다. 인연에 투합하여 지혜가 일어나 각기 빈 마음과 일치하게 하였고, 오직 뜻만을 취하여 번거로운 것을 제거하니 모두가 원적(圓寂)12)에 합치되었다. 승의제(勝義諦)13)의 진리에 이르러서는 표현과 말을 완전히 벗어났으나 문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복속제(覆俗諦)라 하는 것은 예전에는 세속제(世俗諦)라 하였으나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생각건대 이는 세속의 일이 다른 진리를 덮는 것을 말한 것 같다. 물질은 본래 병(甁)이 아닌데도 함부로 병이라 풀이하고, 소리에는 노래하는 가락이 없는데 함부로 노래하는 마음을 만든다. 또한 식(識)의 상(相)이 생길 때 몸은 분별함이 없는데도 무명(無明)에 가려져서 함부로 여러 가지 형상이 일어난다. 자기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경계는 외부에 있다고 하면서 뱀이라 하고 새끼줄이라고 잘못 아니, 바른 지혜는 이에 물 밑에 가라앉아 숨겨지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진실이 덮이는 것을 복속이라 하게 되었다. 이는 곧 복(覆)이 속(俗)인 것에 근거하여 복속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며 혹 다만 진제(眞諦)ㆍ복제(覆諦)라고만 말하여도 된다. 그렇다면 예전부터 번역한 사람들은 범어의 규범을 이야기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요즘 경을 전하는 사람들도 다만 처음 7(七)만을 말하고 있다. 이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무익하니 논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나는 범문(梵文)을 총체적으로 익혀 번역에 중복되는 수고를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 제목과 절(節)ㆍ단(段)으로써 간략히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서술하고자 한다그런데 골륜국(骨崙國)과 속리국(速利國)에서는 아직도 모두 범어의 경전을 읽을 수 있는데 어찌 하물며 천부(天府)인 신주(神州: 중국)에서 그 본래의 설법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서방에서는 찬탄하여 이르기를, “문수사리보살이 현재 중국의 병주(幷州)에 계셔서 사람들에게 모두 복이 있다”라고 하고 있다. 이치로 보아 마땅히 흠모하고 찬탄할 만한 일이다. 그에 관한 글은 이미 상세히 나타나 있으므로 여기서는 번거롭게 기록하지 않는다. 무릇 성명(聲明)이라 하는 것은 범어로는 섭타필타(攝拖苾駄)라 하는데 섭타는 소리라는 뜻이고, 필타는 밝힌다[明]는 뜻이다. 이는 곧 오명론(五明論) 가운데 일명(一明)이다. 오천축국의 속서를 총체적으로 비하갈라나(毘何羯喇拏)라 하며 크게 나누면 다섯 가지가 있어 중국의 오경(五經)과 같다예전에 비가라논(毘伽羅論)이라 한 것은 와전된 것이다. 첫째는 창학실담장(創學悉談章)인데 또 다른 이름으로는 실지라솔도(悉地羅窣覩)라고 한다. 이것은 소학(小學)을 나타내어 일컫는 것으로 모두가 길상(吉祥)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본래는 49자(字)가 있는데 이것이 함께 서로 승전(乘轉)하여 18장(章)을 이루어 모두 1만 여의 글자가 있으며 합하면 3백여 수의 게송이 된다. 무릇 한 게송을 말할 때 그 안에는 4구(句)가 있으며 1구는 여덟 글자로 모두 32언(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밖에 다시 소송(小頌)ㆍ대송(大頌)이 있으나 갖추어 다 말할 수는 없다. 이 책은 여섯 살 난 동자가 이것을 배워 6일이면 곧 이를 마치게 된다. 이것은 서로 전해진 것으로 이는 대자재천(大自在天)14)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는 소달라(蘇呾囉)라 하는데 이것이 곧 모든 성명(聲明)의 근본 경전이다. 번역하면 약전(略詮)이란 뜻으로 내용을 밝힌다는 뜻이다. 이 속에는 1천 수의 게송이 있으며 이는 예전의 박학(博學)한 선비인 바니니(波尼儞)가 지은 책이다. 이는 대자재천(大自在天)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얼굴에 세 눈[三目]이 나타났다고 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바야흐로 이를 믿었다. 이 책은 여덟살 된 동자가 여덟 달 안에 다 암송할 수 있다. 세 번째는 타도장(駄覩章)이라 하는데 1천 수의 게송이 있으며 오로지 글자의 근원을 밝힌 책으로 그 공부는 위에서 말한 경과 같다. 네 번째는 삼기라장(三棄攞章)이라 하는데 이는 황경(荒梗)하다는 뜻이다. 내용을 풀이하면 농사꾼이 처음으로 밭두렁을 개간하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마땅히 삼황장(三荒章)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장은 안슬타타도(頞瑟吒駄覩)라 이름하며 1천 수의 게송이 있고, 두 번째 장은 문도(文荼)라 이름하며 1천 수의 게송이 있다. 세 번째 장은 오나지(鄔拏地)라 이름하며 1천 수의 게송이 있다. 타도(駄覩)라 하는 것은 뜻을 일곱 가지 사례[七例]로 밝힌 것으로 10나성(羅聲)으로 깨우쳐 주고 18개의 음운(音韻)으로 말하는 것이다. 일곱 가지 사례라 하는 것은 모든 소리 위에는 모두 이것이 있다. 그 하나하나의 소리마다 그 가운데서 3절(節)를 나눈다. 즉 일언(一言)ㆍ이언(二言)ㆍ다언(多言)으로 모두 21언을 이룬다. 예를 들면 가령 남자를 부를 때 한 사람일 경우에는 보로쇄(補嚕灑)라 부르고, 두 사람일 경우에는 보로초(補嚕▼(竹/稍))라 부르며, 세 사람일 경우에는 보로사(補嚕沙)라 한다. 이 가운데 소리에 호흡의 무겁고 가벼운 구별이 있다. 일곱 가지 사례 외에 다시 호소성(呼召聲: 사람을 부르는 소리)이 있어서 곧 8례(例)를 이루게 된다. 첫 구절이 이미 셋으로 구분되었으니 나머지도 모두 이에 준해야 하는데, 번거로울까 두려워 여기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것을 소반다성(蘇槃多聲)이라 이름한다모두 스물네 가지의 소리가 있다. 다음 10나성(羅聲)이라 하는 것은 열 종류의 라(羅)자가 있어서 한 소리를 나타낼 때 곧 삼세의 차이를 밝힌다. 18운(韻)이라 하는 것은 상ㆍ중ㆍ하, 존(尊)ㆍ비(卑), 피(彼)ㆍ차(此)의 구별을 밝혀 열여덟 가지 같지 않은 음운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정안차성(丁岸哆聲)이라 부른다. 문도(文荼)라 하는 것은 글자의 체(體)를 합성한 것으로 잠시 예를 들면 나무의 한 목(目)을 범어로 필력차(苾力叉)라 하는데, 문득 20여 구의 경문을 인용하여 함께 서로 섞어야 비로소 한 가지 일의 이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나지(鄔拏地)라 하는 것도 대체로 이 예와 같으나 상세하고 간략한 것이 같지 않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이 삼황장(三荒章)은 열 살 난 동자가 2년을 부지런히 배워야 비로소 그 내용을 해득하게 된다. 다섯 번째는 필률저소달라(苾栗底蘇呾羅)라 하는데 이는 곧 앞의 소달라의 해석서이다. 상고시대에 지은 해석은 그 종류가 참으로 많다. 그 가운데 묘한 것으로 1만 8천의 게송이 있다. 이 책은 그 경본을 연역하고 여러 가지 뜻을 소상히 담론하여 우주의 법칙을 다하고 천인(天人)의 궤칙(軌則)을 궁구한 책으로 열다섯 살의 동자가 5년을 공부해야 비로소 해득하게 된다. 신주(神州)의 사람으로 만약 서방 세계에 가서 학문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꼭 이것을 알아야만 비로소 나머지 다른 학문을 익힐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공연히 스스로 힘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여러 책들은 모두 암송하여야 한다. 이것은 상근기를 지닌 사람을 기준한 것으로 중근기나 하근기를 지닌 사람의 경우는 내용으로써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익히자면 밤낮으로 부지런히 발돋음하여 편안하게 잠잘 여가가 없나니, 공자가 책을 매는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진 것과 같이 하여야 하고, 세정(歲精)이 백 번 두루 읽었던 일과 같이 하여야 한다. 소털은 천(千)으로 헤아리지만 기린(麒麟)의 뿔은 오직 하나뿐이다. 공덕을 비교하면 중국의 가장 훌륭한 경전과 비슷하다. 이 책은 학사인 사야질저(闍耶昳底)가 지은 책이다. 그 사람의 기량은 넓고 깊으며 그의 문채는 수려하게 펼쳐져 한 번 듣게 되면 곧 이해하였으니 어찌 두 번 이야기하는 수고를 빌렸겠는가? 삼존을 공경하고 존중하여 많은 복업을 지었는데 그가 죽은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이다. 이 해석서를 익히고 나서 비로소 서(書)와 표(表)를 모으고 시편을 제작하고 『인명론(因明論)』에 생각을 이루고 『구사론(俱舍論)』에 경건하게 정성을 쏟으며 이문론(理門論)을 찾아보고 비량론(比量論)을 훌륭하게 이루어 본생(本生)을 꿰뚫어 익히면 청명한 재능이 빼어나게 함양되게 된다. 그런 다음에 함장(函丈)이 6년 동안 경전을 전수하는 과정을 거쳐서 많은 사람이 나란타사(那爛陀寺)중천축국(中天竺國)이다에 남아 있는 것이다. 혹 발랍비국(跋臘毘國)서천국(西天國)이다에 사는 사람도 있다. 이 두 곳은 사정이 중국의 금마(金馬)ㆍ석거(石渠)ㆍ용문(龍門)ㆍ궐리(闕里)와 같아서 영준하고 훌륭한 스님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시시비비를 헤아려 생각하곤 한다. 만약 현명하여 거룩하다고 찬탄되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영준하다고 일컬어지고 비로소 스스로 자신의 칼날을 헤아려 보고 왕정(王庭)에 칼을 던지든지 나라에 계책을 올려 재능을 보여 주어 등용되기를 희망하게 된다. 그리하여 담론하는 곳에 앉아서는 자리를 이중으로 하여 기이함을 나타내고, 비판하는 장소에 오르게 되면 다른 사람의 혀를 묶은 채 부끄럽게 만들어버린다. 그리하여 그 메아리는 5산(山)을 진동하고 그 명성은 4역(域)에 흐르게 된다. 그런 다음에 봉읍(封邑)을 받고 영예로운 지위에 책봉되어 높은 문에 흰 색으로 씌어진 자신의 이름을 상 받은 이후에 다른 업을 닦게 되는 것이다. 이밖에 또 필률저소달라의석(苾栗底蘇呾羅議釋)이 있는데 이를 주니(朱儞)라 부른다. 여기에는 2만 4천의 게송이 있는데, 이는 학사인 발전사라(鉢顚社攞)가 지은 책이다. 이 책은 곧 앞에서 말한 경전을 거듭 밝히면서 살갗을 쪼개서 이치를 분석하고 소상하게 밝힌 후에 해석하여 털 끝 가시와 같이 작은 것도 모두 나누어 분석하였다. 경에 밝은 사람도 이것을 배우자면 3년이 걸려야 비로소 마치게 되며 그 공부는 중국의 춘추(春秋)ㆍ주역(周易)과 비슷하다. 또 벌치가리론(伐致呵利論)이 있는데 이는 앞의 주니의 뜻을 해석한 것이며 대학사인 벌치가리(伐致呵利)가 지었다. 여기에는 2만 5천 수의 게송이 있다. 이 책에는 크게 인사(人事)ㆍ성명(聲明)의 핵심이 될 일을 이야기하고 있고, 널리 여러 가문의 흥하고 망한 이유를 서술하였으며, 깊이 유식(唯識)15)을 밝히고 훌륭하게 인유(因唯)를 논하고 있다. 이 학사의 영향을 오천축국에 메아리져 떨쳤고 덕이 8극(極)에 흘렀다. 그는 철저히 삼보를 믿고 진리로서 2공(空)16)을 생각하여 승법(勝法)을 희구하여 출가하였다가 속세가 그리우면 곧 환속하니 이렇게 왕복한 횟수가 일곱 번에 달하였다. 스스로 깊이 인과(因果)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이와 같이 부지런히 집착할 수 있겠는가? 그는 스스로 한탄한 시에 말하였다.
염(染) 때문에 문득 속가로 돌아왔고 탐욕 벗어나려고 다시 승복 입었네. 어찌하여 두 가지 일이 갓난아기처럼 나를 희롱하는가?
이 사람은 곧 호법(護法)논사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는 늘 절 안에 있을 때는 속가로 돌아갈 마음이 있었고 번뇌로 힘들어 하며 확고하게 마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곧 학생들을 시켜 가마를 절 밖으로 향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였다. “무릇 이 복된 땅[福地]은 본래 계행(戒行)이 있는 사람들이 살 곳으로 견준 것인데 나는 이미 안에 사심(邪心)이 있으니 이는 곧 정교를 이지러지게 하는 일이라 시방(十方)의 승지(僧地)에 발붙일 만한 곳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는 청신도가 되어 흰 옷을 입고 바야흐로 절에 들어가서 정법을 선양하였다. 그가 교화를 버린 이래 이미 40년이 되었다. 다음으로 『박가론(薄迦論)』이 있는데, 여기에는 7백 수의 게송이 있고 7천 자의 해석이 있다. 이 책도 역시 벌치가리가 지은 책으로 성인의 가르침의 양(量)과 비량(比量)의 뜻을 서술하고 있다. 다음으로 필나(蓽拏)가 있는데, 여기에는 3천 수의 게송이 있고 1만 4천 자의 해석이 있다. 게송은 벌치가리가 지은 것이며 해석은 호법(護法)논사가 지은 글이다. 이 책은 하늘과 땅의 깊숙한 비밀을 다하고 인간사회의 진리의 정화(精華)를 다한 책이라 말할 수 있다. 만약 사람들의 학문이 이 경지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성명(聲明)을 잘 해득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중국의 구경백가(九經百家)와 비슷한 책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책들을 스님이나 속인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배우게 된다. 만약 그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다문(多聞)’이란 칭호를 얻지 못하게 된다. 만약 출가한 사람이라면 두루 율(律)을 배우고 자세히 경(經)과 논장(論藏)을 찾아 외도의 이론을 꺾어야 하나니, 마치 중국에서 천하의 패권(霸權)을 놓고 다투는 일과 같다. 좌우에서 힐난하는 내용을 아는 것은 끓는 가마솥의 넘치는 물을 해소하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그 메아리가 남섬부주(南贍部洲) 안에 흐르게 하여 인간계와 천상계의 위에서 공경을 받고 부처님을 도와 교화를 드높이며 널리 중생을 인도하게 된다. 이는 세상에 빛나고 우뚝 솟아나게 태어난 사람으로 그것이 한 사람이건 두 사람이건 비유를 취한다면 일월과 같고 상황을 표시한다면 용상(龍象)에 비유된다. 이런 사람은 멀리는 용맹(龍猛: 龍樹)ㆍ제바(提婆)ㆍ마명(馬鳴)과 같고 중세(中世)에서는 세친(世親)ㆍ무착(無著)ㆍ승현(僧賢)ㆍ청변(淸辯) 등의 스님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가깝게는 진나(陳那)ㆍ호법(護法)ㆍ법칭(法稱)ㆍ계현(戒賢) 및 사자월(師子月)ㆍ안혜(安慧)ㆍ덕혜(德慧)ㆍ혜호(慧護)ㆍ덕광(德光)ㆍ승광(勝光) 등의 스님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대사들은 앞에서 말한 내외의 많은 공덕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고 각기 모두가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아는 스님들이라 참으로 더불어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으며 속류(俗類) 외도 가운데서는 이런 부류는 얻기 어렵다자세한 것은 서방십덕전(西方十德傳)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 가운데서 법칭(法稱)은 거듭 인명(因明)을 밝혔고 덕광(德光)은 다시 율장을 홍법하였으며 덕혜(德慧)는 선정[定門]에서의 명상을 실천하였다. 혜호(慧護)는 널리 옳고 그름을 가려내니 바야흐로 경해(鯨海)에서 이름난 보배가 광채를 나타내고 높고 험준한 향봉(香峯)에서 뛰어난 약재가 기묘함을 보여 준다는 것을 증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불법이 머금고 있는 넓고 큰 진리는 무엇인들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메아리에 응해서 책을 빨리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어찌 열네 개의 발을 번거롭게 여길 필요가 있겠는가? 백 번을 두루 읽는 수고를 할 필요 없이 두 권의 책을 한 번 듣고 곧 받아들인 것이다어떤 외도가 6백 수의 게송을 지어 호법(護法)논사를 찾아와 따졌는데 호법논사는 대중을 상대로 한 번 듣고 글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였다. 또한 오천축의 땅에서는 모두가 바라문족(婆羅門族)을 귀하고 뛰어난 가문으로 삼고 있어 어떤 좌석이 마련되어도 모두 다른 3성(姓)과는 함께 가지 않으며 자기 족속 밖의 잡류(雜類)들과는 짐짓 멀리한다. 그들이 존중하는 전고(典誥)에 사벽타서(四薜陀書)란 책이 있어 10만 수 가량의 게송이 실려 있다. 벽타(薜陀)란 말은 명해(明解)란 뜻이며, 전에 이것을 위타(圍陀)라 한 것은 와전된 것이다. 모두가 이것을 입으로 서로 전수하고 있으며 종이나 나뭇잎에 이를 써서 전하지는 않는다. 매번 총명한 바라문족이 이 10만의 게송을 외우는데, 즉 서방의 경우에는 서로 이어가며 총명을 배우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두 번, 세 번 살펴서 지혜가 생기게 하고, 두 번째는 자모(字母)에 정신을 안착시키면 열흘, 한 달 사이에 생각이 샘물처럼 솟아나니 한 번 듣게 되면 곧 내용을 이해하여 두 번 이야기하는 수고를 빌리는 일이 없다. 이는 내가 직접 눈으로 그런 사람을 보았기 때문에 물론 거짓이 아니다. 동인도에 한 대사(大士)가 있어 이름을 일월관(日月官)이라 하였는데 이는 큰 재웅(才雄)을 지닌 보살(菩薩)이었다. 나 의정(義淨)이 인도에 이르렀을 때 그 사람은 아직도 생존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독경(毒境)과 독약(毒藥)은 해가 됨에 어느 것이 더 무겁습니까?”라고 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독약과 독경과의 거리는 실로 멉니다. 독약은 먹어야 비로소 해를 끼치지만 독경은 생각만 하여도 문득 불타오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등란(騰蘭)17)은 동락(東洛)에 꽃다움을 떨쳤고 진제(眞諦)18)는 뛰어난 메아리를 남명(南溟) 땅에 몰았으며 대덕인 구마라습(鳩摩羅什)19)은 다른 나라 땅에서 덕장(德匠)을 이룩하였고 법사인 현장(玄奘)20)은 자기 나라에서 스승의 공덕을 깊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금의 여러 스님들이 나란히 불일(佛日)을 빛나게 전하며 유(有)와 공(空)을 가지런히 이룩하였다. 즉 삼장을 익힘으로써 그것을 스승으로 삼고 정혜(定慧)21)를 아울러 닦아 칠각지(七覺支)22)를 가리켜 장인(匠人)으로 삼았는데, 그것이 서방에 현존하는 곳으로는 저라도사(羝羅荼寺)에 지월(智月)법사23)가 있고 나란타사(那爛陀寺)에는 보사자(寶師子)대덕이 있다. 또 동방에는 곧 지바갈라밀달라(地婆羯羅蜜呾囉)가 있고 남예(南裔)에는 달타계다계사(呾他揭多揭娑)가 있고 남해의 불서국(佛逝國)에는 석가계율저(釋迦鷄栗底)가 있다지금 현재는 불서국에 있으며 오천축을 지나오면서 널리 배웠다. 이들은 모두 앞의 현인(賢人)과 비교해도 빼어난 사람들로 지난날의 철인의 발자취를 뒤쫓아서 인명론을 깨달아 곧 진나(陳那)와 견주려고 하였고, 유가종(瑜伽宗)24)을 음미하여 실로 마음을 무착(無著)과 같이 비웠다. 공(空)을 이야기하면 교묘히 용맹(龍猛)과 부합되었고 유(有)를 논하면 묘하게 승현(僧賢)에 일체를 이루었다. 이 여러 법사들은 나 의정(義淨)과 모두 책상을 마주하고 친숙하게 지냈다. 나는 그들의 심오한 말들을 받아먹었는데, 듣지 못했던 것을 새로 알게 된 것이 반가웠고 일찍이 얻어 예전에 해득한 것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게 되니, 등불을 전하는 한 가닥 바람을 생각하면서 실로 아침에 도를 듣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온갖 의문에서 먼지를 말끔히 없애니 저녁에 죽더라도 기꺼이 따르리라. 영취산에서 남은 구슬을 줍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때로 그 진실을 얻게 되면 용하(龍河)에서 흩어진 보석을 골라내고 자못 그 묘한 것을 만나게 되면 우러러 삼보의 먼 은혜를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제의 은택을 멀리에서 입어 마침내 발꿈치를 돌려 동쪽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남해에서 돛을 달아 탐마입저국(耽摩立底國)을 지나 실리불서국(室利佛誓國)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에 머문 지 이미 4년이 지났으나 아직 이곳에서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5. 장발유무(長髮有無)
장발로 구족계를 받는 일은 오천축국에서는 없는 일이며, 율장에도 그런 글은 나타나 있지 않다. 과거의 일을 두루 돌아보아도 원래 이런 일은 없었다. 다만 형상만이 속인과 같아도 죄에서 보호받기는 어렵다. 이미 계율을 지킬 수 없는데 받은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반드시 청정한 마음이 있어야 하며 모름지기 머리를 깎고 옷에 물들이고 생각을 깨끗이 하여 해탈할 마음을 품고 있어야만 5계ㆍ10계를 받들어도 훼손시키지 않고, 원만히 구족된 마음으로 율장을 준수하게 된다. 유가(瑜伽) 배우기를 마치게 되면 무착(無著)의 팔지(八支)첫 번째 『이십유식론(二十唯識論), 두 번째 『삼십유식론(三十唯識論)』, 세 번째 『섭대승론(攝大乘論)』, 네 번째 『대법론(對法論)』, 다섯 번째 『변중변론(辯中邊論)』, 여섯 번째 『연기론(緣起論)』, 일곱 번째 『대장엄론(大莊嚴論)』, 여덟 번째 『성업론(成業論)』이다. 이 가운데는 비록 세친(世親)보살이 지은 책이 있지만 그 공은 무착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를 몸으로 다하게 된다. 인명론(因明論)의 공부에 몸붙여 진나(陳那)의 8논(論)을 거울같이 투철하게 비추어 보고첫 번째 『관삼세론(觀三世論)』, 두 번째 『관총상론(觀總相論)』, 세 번째 『관경론(觀境論)』, 네 번째 『인문론(因門論)』, 다섯번째 『사인문론(似因門論)』, 여섯 번째 『이문론(理門論)』, 일곱 번째 『취사시설론(取事施設論)』, 여덟 번째 『집량론(集量論)』이다 아비달마(阿毘達磨)25)를 익히면 두루 6족(足)26)을 엿보게 되고 아급마경(阿笈摩經)을 배우면 마침내 4부(部)를 모두 탐구하게 된다. 그런 다음에 사(邪)를 항복받고 외도를 굴복시켜 바른 진리를 확고하게 부양하고 널리 뭇 중생들을 교화하며 널리 인도하여 피로를 잊게 한다. 2공(空)에 명상을 집중하여 투명하게 8정도(八正道)를 가슴에 품고 공경하는 자세로 4선(禪)을 닦고 거룩하게 7편(篇)을 수호한다. 이것으로 죽음을 보낸다면 이것이 최상의 공덕이 된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비록 가족들과 함께 집에 거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私室)에 물들지 않고 단연히 온 몸으로 번뇌에서 벗어나기를 희구하며 구걸해 오는 대로 공상(公上)에 공양드리고 거친 옷을 입으며 단지 부끄러운 곳만을 가린다. 8계(八戒)첫 번째 불살생(不殺生), 두 번째 불투도(不偸盜), 세 번째 불음일(不婬佚), 네 번째 불망어(不妄語), 다섯 번째 불음주(不飮酒), 여섯 번째 부작락관화도향(不作樂冠花塗香), 일곱 번째 부좌고광대상(不坐高廣大床), 여덟 번째 불비시식(不非時食)을 지키고 간직하면서 형체가 다할 나이까지 마음을 가늠하여 삼존에 귀의하고 공경한다. 열반을 기약하면서 생각을 펴나간다. 이것이 그 다음가는 좋은 일이다. 반드시 그가 현재 울타리 속에 거처하면서 처와 자식을 양육하고 있더라도 공손한 마음으로 윗사람을 공경하고 자애로운 품으로 아랫사람을 염려하며 오계를 받아 간직하고 항상 4재(齋)흑월(黑月) 8일이나 14일 혹은 15일과 백월(白月) 8일이나 15일에는 반드시 8계(戒)를 받아야만 비로소 성수(聖修)라 칭하게 된다. 만약 앞의 7계는 없이 오직 여덟 번째의 계만 지킨다면 복인(福因)을 얻는 것이 적을 것이다. 그 뜻은 나머지 일곱 가지 계율도 지켜야 하며 비단 굶주린 배만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를 짓고 충직하며 동정심이 그 사람에게 남아 있어 자기가 할 일에 부지런히 할 수 있고 죄 없는 일을 행하여 관수(官輸)를 받든다면 이것도 역시 아름다운 일이다여기서 죄가 없다는 것은 교역(交易)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중생을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서쪽 나라의 당시 풍속은 장사꾼을 귀하게 여기고 농부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그들이 밭 갈고 샘 파면서 중생의 목숨이 많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양잠(養蠶)과 도살을 상당한 괴로움의 원인으로 삼았다. 1년마다 그 가운데서 손해를 보는 것이 거억(巨億)에 달하였으나 이를 행한 지가 나름대로 오래되어 이것을 잘못이라 하지 않았고 미래의 생(生) 가운데서 무극한 고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업을 하지 않는 것을 무죄라 하였다. 그러나 속인의 무리는 시끄럽게 몰려다니며 3귀의(歸依)27)도 모르고 수명이 다할 때까지 허둥대고 있으니 어떻게 한 계율이라도 지닐 수 있겠으며, 열반이 적멸임을 알지 못하니 어찌 생사가 윤회라는 것을 깨닫겠는가? 눌러앉아 죄업만 짓게 되니 이것이 가장 하등한 인간들이다.
36. 망재승현(亡財僧現)
무릇 죽은 비구의 물건을 나누어 갖고자 하는 경우는 율에 자세한 글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대의 필요에 대비해서 다만 간략하게 해설해 나가겠다. 먼저 죽은 사람의 부채(負債)와 맡겨서 건네줄 사람의 유무와 간병한 사람의 유무를 물어 보고 법에 근거해서 상의하되 이치에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 그밖에 남은 물건은 이 일에 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올타남(嗢拕南: 섭송)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토지와 집과 가게와 이부자리 구리, 무쇠 및 모든 가죽제품 체도(剃刀) 등과 병과 옷 여러 장대와 온갖 가축들
음식과 여러 가지 약 걸상과 자리와 문권(文券) 삼보ㆍ금은 등은 만들어진 것과 만들어지지 못한 것이 다르다.
이와 같은 모든 물건은 나눌 수 있는 것과 나눌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때에 따라 응해서 간별(簡別)해 알아야 한다. 이것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일이다.
여기서 때에 따라 응한다[隨應]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토지ㆍ집ㆍ가게ㆍ와구ㆍ털담요ㆍ여러 가지 동철기(銅鐵器) 등은 모두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 가운데서 철발우와 작은 발우 및 작은 구리공기ㆍ집의 자물쇠ㆍ바늘ㆍ송곳ㆍ면도칼ㆍ작은 칼ㆍ철표(鐵杓)ㆍ화로 및 도끼ㆍ끌 등은 모두 이 여러 개의 부대에 담고, 와기(瓦器)의 경우, 즉 발우와 작은 발우,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을 구별하는 군지(君持) 및 기름을 저장하는 물건과 아울러 물을 담는 그릇 등 이런 것은 모두 마땅히 나누어야 하나, 나머지 물건은 나누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 그 가운데 목기(木器)ㆍ죽기(竹器) 및 가죽으로 된 와물(臥物)ㆍ머리 자르는 도구ㆍ노비ㆍ음식ㆍ곡식ㆍ콩ㆍ토지ㆍ집 등은 모두 사방의 승단에 넣어야 하고, 만약 옮길 수 있는 물건이라면 마땅히 여러 창고에 저장하여 사방의 승단에서 공동으로 사용하게 하여야 한다. 만약 토지와 집 마을 장원에 있는 집 같이 옮길 수 없는 것은 마땅히 사방의 승단에 소속시켜야 하며, 그래도 만약 남는 옷ㆍ이불 등이 있다면 법의나 속의를 물들였거나 물들이지 않은 것, 가죽ㆍ기름ㆍ병ㆍ신발ㆍ등속을 물을 것 없이 모두 눈앞에 보이는 곳에서 마땅히 나누어야 한다. 예전에 같은 소매 속의 물건은 나누어 갖지 아니하고 흰 옷은 다시 속인에게 넣어야 한다고 한 것은 아마도 내용으로 짐작해서 한 말인 듯하다. 큰 장대는 섬부광상(贍部光像)을 모신 곳에 깃발을 매달아 놓는 장대로 삼는 것이 좋다섬부광상이란 것은 율장 가운데 나오는 연기설과 같은 것으로 원래 세존께서 대중 속에 거처하시지 않으셨을 때, 대중에게 위엄과 엄숙함이 없어서 세존께서 급고독원(給孤獨園)의 장자28)를 시켜 세존께 청하기를, “원컨대 섬부광상을 만들어 대중의 우두머리에 안치하게 하소서”라고 하여 부처님께서 이것을 만드는 것을 허락하셨다. 작은 것은 석장(錫杖)을 만들어서 떠나는 비구에게 주는 것이 좋다석장(錫杖)이라 하는 것은 범어로는 끽기라(喫棄羅)라 하는데, 이는 곧 소리가 울린다는 뜻이다. 예전 사람이 이것을 석(錫)이라고 번역한 것은 뜻으로 주석이 소리가 울리는 것을 취한 것이다. 장(杖)ㆍ석장은 정황에 맡겨 칭한다. 내가 눈으로 증험한 바에 의하면 서방에서 지니는 석장은 머리 위에 오직 하나의 무쇠고리가 있을 뿐이며 너비는 2, 3촌(寸)이다. 거기에 자관(▼(金*字)管)을 안치하는데 길이가 4, 5지(指) 가량 된다. 그 막대기는 나무를 사용하며 굵고 가는 것은 때에 따라 정하고 높이는 어깨 높이와 같이 하여 아래에는 약 2촌(寸) 가량의 철찬(鐵纂)을 안배하고, 그 고리는 혹 둥글기도 하고 혹 기울어 굽히기도 하여서 각기 중간에서 합쳐서 큰 손가락을 넣을 만하다. 지팡이 다리 위에 혹 여섯 개나 여덟 개의 구멍을 뚫어놓는데 구리ㆍ무쇠로 만든다. 원래 이것을 제작한 뜻은 걸식할 때 소나 개를 방비하기 위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어렵게 떠받들고 받드는 데 노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한 온몸이 모두 무쇠로 되어 있고 머리에 네 개의 다리를 마련하여 지니고 다니는 데 무겁고 걸음이 지체되며 매우 차갑고 거칠거칠하니, 만드는 뜻이 아니다. 네 발 지닌 짐승들 가운데서는 만약 그것이 코끼리ㆍ말ㆍ낙타ㆍ당나귀ㆍ노새 등 사람이 타고 다니는 짐승일 경우에는 마땅히 국왕의 거처에 보내야 하나, 소나 양과 같은 것은 사방의 승단에 소속시켜야지 나누어서는 안 된다. 또한 갑옷ㆍ투구와 같은 것들도 역시 국왕의 집으로 보내야 하며, 온갖 무기 등은 두들겨서 바늘ㆍ송곳ㆍ작은 칼 및 석장두(錫杖頭)를 만들어 가서 눈앞에 나타나는 승단에 주는 것이 좋다모두에게 주지 못한다면 큰 스님에게 드린다. 그물과 같은 것들은 창문에 치는 휘장으로 사용하여야 하며 만약 상과 같이 채색된 물건, 예를 들면 노란색ㆍ주홍색ㆍ파란색ㆍ푸른색ㆍ초록색 등의 물건은 마땅히 불당에 넣어 불상에 공양할 용도에 견주어야 한다. 백토(白土)ㆍ적토(赤土) 및 하청색(下靑色)은 현전(現前)에서 나누어야 한다. 만약 술맛이 시어지려고 한다면 땅에 묻어서 식초가 되기를 기다려 승단의 스님들이 이것을 먹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현재 술이라면 마땅히 기울여서 버려야 하며, 그것을 파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부처님 말씀에, “너희들 모든 비구들이 만약 나에게 귀의하여 출가한 사람이라면 술을 가지고 가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스스로 마셔서는 안 되며, 나아가 풀 끝만큼의 한 방울의 술이라도 걸러서 입 안에 넣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다. 만약 술과 술지게미로 면(麵)을 만들거나 술국 따위를 만들어 먹는 사람은 모두 월법죄(越法罪)를 초래한다. 이는 율장에 규제가 이룩된 것이 있으니 의심할 필요는 없다영암도량(靈巖道場)에서는 늘 보리죽장[麮漿]으로 면을 만드는데 이는 술로 면을 만드는 허물을 피하기 위한 것이니, 선인들은 참으로 깊은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잡약(雜藥) 등이 있을 경우 깨끗한 창고에 안치하여 그것으로 병든 사람에게 공급하게 하여 마음대로 통용하게 한다. 여러 가지 진귀한 보배와 주옥이 있으면 둘로 나누어 한 몫은 법보의 용도에 맞게 넣고, 나머지 한 몫은 승단에 넣어서 법물은 불경을 쓰게 하는 것이 좋고 아울러 사자좌(師子座)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좋으며, 승단에 넣은 것은 현전(現前)에서 나누어야 한다. 만약 보배로 이루어진 상자와 책상 등속이 있다면 마땅히 내다 팔거나 현전에서 나누어야 하며, 나무로 이루어진 것은 사방승단[四方僧伽]29)에 넣어야 한다. 가지고 있는 경전과 장소(章疏)는 모두 나누어서는 안 되며 마땅히 경장(經藏)에 넣어 사방에서 오는 스님들이 함께 읽게 하여야 한다. 만약 일찍 이를 찾아 얻을 수 있을 경우에는 곧 이것을 나누어야 하며 만약 그렇게 할 수 없을 경우에는 문권을 마땅히 창고에 저장하였다가 뒷날 찾아 얻어 사방승의 사용에 충당하여야 한다. 또 모든 금ㆍ은 및 이루어졌거나 이룩되지 않은 기물ㆍ패치(貝齒)ㆍ여러 가지 돈과 같은 것은 모두 셋으로 나누어 한 몫은 부처님에게, 두 번째는 달마(達磨)에게, 세 번째는 승단에 배분한다. 부처님 물건으로는 마땅히 불당과 머리카락ㆍ손톱ㆍ발톱을 봉안한 탑의 파괴된 곳을 수리하여야 하고, 법물로는 불경을 베껴 쓰게 하고 사자좌(師子座)를 정리하게 하며, 대중의 물건은 현전에서 나누어야 한다. 6물(物)은 마땅히 간병인에게 주어야 하며, 그밖의 잡동사니 물건은 이에 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대율(大律)에 실린 내용과 같다.
37. 수용승물(受用僧物)
지금 서방에 있는 모든 절의 비구들의 의복은 흔히 승단의 재산에서 나온 것이 많다. 혹 전원에서 남은 것이나 혹 과일 나무에서 얻은 이익을 해마다 나누어 옷값에 충당하게 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갖고 있던 곡식조차도 보내서 승단의 재산으로 삼게 하는데 하물며 대중들의 콩과 곡식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나누어 쓸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시주가 본래 마을의 장원을 희사할 때는 원래 목적이 승단의 대중들을 제도하고 공양하려 한 것입니다. 어찌 그들에게 다만 먹을 것만 주고 벌거벗은 채 지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다시 해당되는 일을 상세히 살폈더니 모두가 공로가 있는 집안 사람들조차도 나름대로 옷을 주고 있는데 조주(曺主: 무리의 주인공)에게 옷을 주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도리로 보아서는 음식을 공급하고 남는 것을 옷에 충당한다 하여도 법에 손상되는 일은 아닙니다”라고 답하였다. 이것이 곧 서쪽 나라 대중 스님들의 대체적인 의론이다. 그러나 그들의 율전에는 때때로 이 일이 언급되거나 언급되지 않을 뿐이다. 또한 서쪽 나라의 여러 절에는 따로 옷을 공급하는 장원(莊園)을 설치하고 있다. 중국의 도량에도 나름대로 옷을 공급하는 곳이 있다. 그러나 음식을 얻는데 속인과 도인이 공통된 것은 이는 시주의 원래 마음에 근거한 일이라 비록 그 음식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이치로 보아서는 역시 허물이 아니다. 모든 이러한 승가에 보시하는 밭이나 집이나 또는 잡물과 대중승단의 의식(衣食)과 통하는 물건들은 참으로 의심하고 염려할 근심이 없는 물건들이다. 만약 무심히 무진한 장애물이 없는 생각을 하였다면 비록 승가에 보시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정은 두루 모든 중생에게 통하는 것이므로 다만 이것을 먹고 사용한 사람에게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 아울러 시주가 먼저 마음으로 기약한 일일 따름이다. 다만 중국 땅에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스님의 옷을 얻을 수는 없다. 이것 때문에 열심히 일하지만 실은 업에 방해가 되고 있다. 설사 공양에 응해서 목숨을 부지한다고 하더라도 이것도 심력(心力)을 고단하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상주하면서 음식이 있고 아울러 승복을 입을 수 있다면 곧 단정하게 팔짱끼고 앉아서 절문 밖을 나가지 않아도 될 것이며, 또한 이는 깊이 일을 덜어주는 결과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누더기 3의(衣)를 걸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걸식하고 암자는 나무에 의지하면서 정명(正命)이라 스스로 그곳에 자리잡고, 정혜(定慧)를 안에서 무르녹게 하고 계율의 길에 상(想)을 다하며 자비는 외부로 나타내서 마음을 보제(普濟)의 나루터에 내걸며 이것으로 마지막 길을 보낼 수 있다면 이는 최고의 경지이다. 그렇다면 절의 재산으로 되어 있는 물건으로는 이것을 사용하여 옷ㆍ이불ㆍ걸상ㆍ요 따위와 아울러 여러 가지 가구를 만들어 평등하게 나누어 받아쓰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귀속하지 않는다. 손바닥에 얹어놓고 사랑하며 호지(護持)하기를 자기 물건보다 더 사랑하고 큰 것이 오는 일이 있으면 작은 것은 역으로 다른 스님에게 준다. 이것은 곧 성인의 가르침이며 부처님 자신이 명백히 말씀하신 일이다. 법에 맞게 이를 사용한다면 참으로 죄와 허물이 없는 것이며, 족히 몸을 자양할 수 있고 추구하는 비용을 면할 수 있게 된다. 절집이 거부(巨富)가 되어 곡식과 보리가 창고에서 썩고 노비가 동네에 가득하고 돈과 재물을 창고에 넣어 놓았으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줄 모른채 함께 가난 속에 처해 있는 일이 어찌 용납되겠는가? 옳고 그름의 마땅함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때로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혹 절집에서 대중의 식량을 남겨놓지 않고 승단의 물건을 나누어 개인적으로 먹고 다른 재산을 가로막는 일이 있다면 시방세계의 사명(邪命)이 오직 자기 한 몸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곧 스스로 비법(非法)을 행한 것이니 고통의 과보를 미래에 누가 당하겠는가?
38. 소신불합(燒身不合)
여러 출가한 대중 가운데에는 자못 외길을 걷는 초학(初學)의 무리가 있어 마음을 사납고 날카로운 곳에 둔 채, 성인의 경전을 아직 익히지 못해 선인들의 행적에서 믿음을 취하여 곧 손가락을 불사르는 것을 정근(精勤)이라 생각하고 살갗을 태우는 것을 큰 복이라 생각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하여 마음대로 행하니 그 결정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밝힌 것은 일이 통속(通俗)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몸조차 오히려 공양을 권하고 있거늘 하물며 그 밖의 여러 재물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경전에서는 다만 “만약 어떤 사람이 발심하여”라고만 말하였을 뿐 출가한 대중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있다. 생각건대 출가한 사람은 율장에 국한되어 계율 가운데 범한 것이 없어야 비로소 경전의 가르침과 통할 수 있다. 계율을 어겨도 된다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설사 향대에 풀이 무성하더라도 어찌 한 포기인들 손상시키며, 넓은 들판에서 홀로 굶주린다 하더라도 어찌 반 톨의 곡식인들 먹겠는가? 그런데도 보기를 좋아하는 중생들이 있는데 이는 속된 무리들이다. 팔을 불살라 공양드리는 것을 참으로 옳은 일이라 하고 보살이 남녀의 상징을 버릴 수 있다고 하여 마침내 비구들에게도 남녀의 상징을 버리기를 구하고, 대사(大士)가 눈을 희사하고 몸을 희사한다고 해서 곧 걸사(乞士)에게도 몸과 눈으로 보시를 행하게 하여서야 되겠는가? 선인(仙人)이 미리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어찌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 할 짓이겠느냐? 또 자력왕(慈力王)30)이 몸을 희사한 일도 승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요즘에 듣건대 소년의 무리들이 용맹하게 발심하여 몸을 불사르는 것을 정각(正覺)의 경지에 오르는 길이라 생각하고 마침내 서로 뒤를 이어 이를 익혀 가볍게 그들의 몸을 버린다고 한다. 왜냐 하면 십 겁, 백 겁이 지나도 사람의 몸은 얻기 어렵고 천 생(生), 만 생 만에 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지혜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며 칠각지(七覺支)를 듣는 일도 드물고 삼존도 만나지 못하니, 지금 이미 몸을 거룩한 도량에 의탁하고 마음을 묘법에 투입하여 겨우 한 수의 게송만 지니게 되어도 보잘것없는 몸을 버리는 것은 오히려 가벼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잠시 삶의 무상함을 생각한다면 몸을 받쳐 공양하는 것이 어찌 무거운 일이겠는가? 이치로 보아서 굳게 계품을 닦아 4은(恩)31)의 은혜를 갚고 굳게 선문(禪門)을 생각하여 3유(有)에서 몸을 뽑고 벗어나기를 바라야 한다. 그리하여 작은 허물을 크게 두려워하기를 마치 깊은 바다를 건너갈 때 부낭(浮囊)을 지키듯이 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지혜를 실천하기를 마치 엷은 얼음 위에서 준마를 채찍질해 가며 달리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착한 벗의 힘에 기대서 임종 때에도 마음이 놀라지 않고 바른 염원을 품고 발돋움하여 미래의 세계에서 미륵불을 만나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작은 과보(果報)를 바란다면 곧 8성도(聖道)를 구해야 한다. 만약 큰 인연을 배웠다면 3대아승기겁(大阿僧祇劫)의 수행을 여기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총총히 스스로 자기의 몸과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실로 아직 그런 도리를 들어보지 못하였다. 자살하는 죄는 그에 관한 일이 첫 편 다음에 나와 있으며 율장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그런 일을 하게 한 글은 보지 못하였다. 멸수(滅受)는 친히 중요한 방법을 설하셨으나 미혹됨을 끊는 것을 어찌 몸을 불태우는 것으로 말미암겠는가? 방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가로막고 허락하지 않으셨다. 못[池] 속에서도 생명을 존속시킨 일을 세존께서는 스스로 거룩하다고 칭송하셨다. 무거운 계율을 깨고 자기의 뜻을 따르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가로막고 따르지 않으셨다. 이런 일에 자신의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참으로 성인의 가르침이 아니다.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어서 보살행을 행하고 율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몸을 없애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일은 물론 여기서 말하는 테두리 밖에 있는 일일 따름이다.
39. 방인획죄(傍人獲罪)
무릇 몸을 불사르는 무리들은 각기 마음 속의 정성을 나타낸다. 혹 세 사람이나 두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기약을 맺고 여러 초학자들을 유혹하여 소상하게 죽음을 권유하면, 앞서서 죽는 사람은 스스로 투란죄(偸蘭罪)32)를 얻게 되고, 마지막에 목숨이 끝난 사람은 결국 바라이죄(波羅夷罪)33)를 부르게 된다. 금계(禁戒)를 지키려 하지 않고 계율을 파괴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다. 마음을 외길로 고수하고 한 번도 가르침을 살피지 않아 혹 옆 사람에게 권해서 죽게 하는 일이 있다면 곧 침혈(針穴)의 말씀을 범하게 되고, 만약 왜 불에 뛰어들지 아니하느냐고 말한다면 곧 절석(折石)의 허물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아, 이 일은 참으로 삼가하여야 할 일이로다. 속담에 이르기를, “살신(殺身)이 보덕(報德)만 못하고, 멸명(滅名)이 입절(立節)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던져 준 것은 보살로서 고통을 구제한 일이 되었으니, 몸을 잘라서 집비둘기를 대신한 것을 사문(沙門)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 하여, 이것을 자살과 같은 조목으로 본다면 실로 이것은 그런 정황이 아니다. 그러므로 잠시 삼장(三藏)에 기준하여 간략하게 그 가부를 말해 보기로 한다. 진퇴의 올바름은 지혜 있는 사람이면 소상하게 살피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항하(恒河) 안에서 날마다 몇 사람을 죽이고 가야산(伽耶山) 변두리에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다. 혹 굶으면서 먹지 않고 죽는 사람도 있고 혹 나무에 올라가서 투신하여 자살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러한 미혹된 길을 걷는 사람을 세존께서는 외도라 판정하셨다. 이 밖에도 스스로 자기 몸을 형벌하여 성기(性器)를 끊는 사람이 있으니 이는 율전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다. 설사 이것을 갖고 잘못이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죄가 두려워 감히 충고하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그가 이 일을 연유로 해서 목숨을 잃게 된다면 곧 일생의 대사(大事)를 그르치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도리로 인해서 이를 제지하시고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상인(上人)들은 모두 아는 일이라 스스로 이런 일은 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덕(古德)들이 서로 전한 말은 뒤에 밝히는 내용과 같다.
40. 고덕불위(古德不爲)
잠시 나 의정(義淨)의 경우를 들면 친교사(親敎師)는 선우법사(善遇法師)이시고 궤범사(軌範師)는 혜지선사(慧智禪師)이시다. 나이 일곱 살이 넘어서 다행히 그 분들을 친히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스승께서는 나란히 태산(泰山) 금여곡(金輿谷)의 성인이신 낭선사(朗禪師:僧朗)가 지은 신통사(神通寺)의 대덕이시며 속가의 인연은 덕주(德州)와 패주(貝州)의 두 고을에 있다.
두 분 대덕은 생각하시기를 ‘산중에 살면서 홀로 착한 것은 중생을 이롭게 할 길이 희박하다’라고 하시고 함께 평림(平林)을 찾아가시어 맑은 계곡을 내려다 보며 그곳을 베개 삼고 토굴사(土窟寺)에 고요히 머무시면서 선을 닦으셨다. 이곳은 곧 제주성(齊州城)의 서쪽 40리가 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계속해서 음식을 준비하여 구애됨이 없이 공양하시고 받아들인 시주의 보시는 모두 희사(喜捨)를 하시니, 사홍서원(四弘誓願)34)은 하늘과 땅과 함께 끝이 없으며 4섭법(攝法)35)으로 널리 중생을 구제하심이 먼지나 모래처럼 다함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이다. 공경히 사우(寺宇)를 수리하시어 크게 복업을 일으키셨다. 간략하게 법사의 일곱 가지 공덕을 말하겠다.
첫 번째는 법사의 박문(博聞)이다. 법사께서는 바로 삼장을 훔쳐보시고 한편으로 제자백가에 눈을 돌려 두 학문을 모두 겸하셨다. 6예(藝)를 통달하고 갖추시어 천문ㆍ지리ㆍ음양ㆍ역산(曆算)의 기이한 학문에 이르기까지도 오직 그것을 거쳐갈 마음만 있게 되면 묘하게 그것이 신부(神府)를 꿰뚫었다. 그리하여 양양한 지혜의 바다 속으로 마침내 쏟아져 흘러내리며 마르고 다하는 일이 없었다. 그 아름다운 문학의 동산에는 오랫동안 꽃피어 시들지 않고 지은 문장과 일체경음(一切經音)과 아울러 여러 자서(字書)들이 자못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약 몰랐다면 이것은 글자가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두 번째는 법사의 다능(多能)하심이다. 전자(篆字)ㆍ주자(籒字)에 능하시고 종장(鍾張)36)의 서체를 잘 쓰셨으며, 음악을 듣고 감상하면 종자기(鍾子期)가 산수(山水)로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증명하는 것과 같으셨고, 도끼를 놀리면 장석(匠石)37)이 작은 흙덩어리를 제거하듯 솜씨가 있었으니, 명철(明哲)한 사람은 정해진 그릇이 없다[哲人不器]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세 번째는 법사의 총명과 지혜다. 『열반경』을 읽으시면 하루에 곧 두루 다 읽으셨고, 처음 이 경전을 외우실 때 네 달 만에 전부를 마치셨다. 유종(幽宗)을 연미(硏味)하시고 현묘한 지혜를 탐미하셨으며 어린 동자를 가르치시면 이들을 유인하시는데 반자(半字)로 하시어 참으로 검(劒)을 어루만진다는 의혹이 없었고 큰 기틀을 지닌 사람에게 전수할 때는 이를 완벽한 그릇에 쏟아부어 실로 보배를 받쳐 드는 이익이 있었다. 예전 수(隋)나라의 말년에 도가 쇠퇴하여 미약해지자 법사는 곧 굳은 결심을 하시고 양부(楊府)로 옮기셨으나, 여러 스님들은 설법을 듣고도 모두 우둔한 사람이라 말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외모가 질박하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법사로 하여금 『열반경』을 읽게 하고 두 제자를 시켜 구마다 암송하시는 것을 지켜보게 하였다.
법사께서는 당시에 강개(慷慨)한 목소리로 음성과 뜻을 격양하여 새벽부터 해가 솟아오를 때까지 세 질(帙)을 이미 끝내시니 당시 사람들 가운데 경찬(慶讚)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가 쉬기를 요청하며 드문 일이라고 감탄하고 찬탄하였다. 이 일은 대중들이 다함께 아는 사실이며 내가 개인적으로 찬양하는 말이 아니다. 네 번째는 법사의 도량이다. 시장에서 교역하는 일이 있기만 하면 찾는 대로 이에 응수하여 높고 낮음을 논하지 아니하고 한 번도 값을 깎지 않으셨다. 설사 값을 계산하면 되돌려 받을 돈이 있을 경우에도 다시 그 돈을 받지 않으셨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법사의 아량이 무리 가운데서도 뛰어나다고 생각하였다. 다섯 번째는 법사의 인애(仁愛)하심이다. 의리를 중히 여기시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시어 보살행을 따르셨다. 어떤 사람이 와서 따라 빌면 모두 그 말을 거역하지 않으시고 하루에 삼문(三文)을 보시하는 것이 평상시의 소원이었다. 또 일찍이 몹시 추운 겨울에 객승(客僧)인 도안(道安)이 눈길을 무릅쓰고 먼 길을 걸어오는 바람에 발이 부르터서 갈라졌고, 마을에서 며칠 쉬는 동안에 곪아 고름이 흐르자 마을 사람들이 수레에 실어보내 절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법사는 새로 가사 한 벌을 만들어 겨우 몸에 둘렀는데 문을 나서자 갑자기 그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가사로 그 피고름을 덮어 주니 옆에 있던 사람이 이를 제지하면서 말하였다. “헌 물건을 찾아 덮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새 옷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법사가 말씀하셨다. “서로 매우 심한 고통을 구제하는데 어찌 다른 것을 찾을 여가가 있겠는가?” 당시 사람들은 이를 보고 깊이 찬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이 일은 아주 중대한 일은 아닐지라도 그러나 이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사람은 본래부터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여섯 번째는 법사의 제자들을 다독거려 격려함이다. 팔부(八部) 『반야경(般若經)』38)을 각각 모두 백 번을 두루 읽으셨고, 아울러 『일체경(一切經)』 39)을 다루기를 여러 번 처음부터 끝까지를 마치셨다. 정방업(淨方業)을 닦으실 때는 밤낮으로 발돋음하여 근면하셨으며, 불승(佛僧)의 땅을 맑게 하여 생(生)을 희구하였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셨다. 대부분 맨 발로 길을 걸어으시어 혹 중생이 손상될 것을 두려워하셨으며, 생각을 돌리어 마음을 드러냄에 한 번도 게으른 적이 없으셨다. 향대를 쓸고 물 뿌려 안양정토(安養淨土)40)에서 구품(九品)의 연꽃이 핀 것과 비슷하게 만드셨고, 경실(經室)을 장엄하게 하여 마치 취령(鷲嶺)의 하늘에서 네 종류의 꽃비가 내린 것과 같이 만드셔서 그것을 본 사람은 공덕을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몸소 권태로운 것을 잊으시고 목숨이 다할 때를 기한으로 삼으셨다. 또한 전독(轉讀)하는 여가에는 아미타불을 염불하시어 4위의(威儀)41)에 빠진 것이 없었고 1촌(寸)의 해 그림자가 지나가는 짧은 시간에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셨다. 작은 콩알을 헤아리기를 만 2년 가량 하셨으며 널리 제도하신 실마리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곱 번째는 법사의 명(命)을 아신 일이다. 법사께서 곧 세상을 마치시기에 앞서 한 해에 갖고 계시던 문장ㆍ잡서ㆍ역사 등의 문서를 쌓아 큰 더미를 만들었다. 이것을 쪼개서 종이찰흙을 만들어 절에 금강역사(金剛力士)의 상 2구(軀)를 조성하여 용도에 충당하려 하자 문인들이 나아가 간(諫)하였다. “어른께서 반드시 종이가 필요하시다면 저희들이 기꺼이 공지(空紙)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이에 법사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글에 탐착하여 오랫동안 나를 그르쳐 왔는데 어찌 오늘에 와서 다른 사람을 그르칠 수 있겠는가? 비유하면 짐독(鴆毒:짐새의 독)을 먹게 하는 것과 같고 지름길이라 하여 험한 길을 가르쳐 주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정업(正業)을 폐지하고 방공(傍功)을 익히게 되는 것으로 성인께서 상품(上品)의 스님으로 인정하신 사람이라도 여기에 탐착하면 큰 허물을 이루게 된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 그러자 문도들이 거룩하다고 칭송하면서 물러갔다.
그의 설문(說文)과 자서(字書) 등은 다행히 극진한 하사(下賜)를 받게 되었다. 이어 법사는 교훈을 드리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대략 경사(經史)를 읽어 보았으니 문자는 대충 알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훌륭한 경전에 마음을 두고 흠모하여야 하며 이 누(累)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리고 곧 세상을 떠나시려 할 때 문인들에게 알리셨다. “나는 수삼 일 사이에 결국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마칠 때는 반드시 빗자루를 가슴에 안고 죽을 것이다. 나의 유해는 곧 넓은 못에 버려라.” 그 후 이른 아침에 맑은 계곡물이 굽어보이는 쓸쓸한 백양(白楊)나무 아래 초록색 가지 옆에서 서성거리다가 외롭게 홀로 앉아 빗자루를 손에 잡고 세상을 마치셨다. 문인인 혜력(慧力)선사가 날이 밝자 나아가 알현하였는데 조용하여 소리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곧 손으로 만져보니 오직 뜨거운 기운이 머리로 치밀어 오르는 것만 보았을 뿐 손발은 모두 차가웠다. 이에 마침내 곧 크게 통곡하니 사방 먼 곳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이때 법려(法侶)들의 슬픈 울음소리는 금하(金河)42)의 흐르는 피가 땅에 뿌려지는 것과 같았고, 일반인들의 울부짖고 통곡하는 모습은 옥령(玉嶺)에서 명주(明珠)가 부서지는 것과 같았으며, 모두가 도수(道樹)43)가 일찍 시든 것을 가슴 아파하였고 법주(法舟)가 갑자기 침몰한 것을 한탄하였다. 그리하여 절의 서쪽 뜰에 묻었는데 그때 춘추는 63세였다.
죽은 후에 몸에 연유한 자구(資具)라고는 오직 3의(衣)와 낡은 신발 두 켤레와 편의에 따른 와구(臥具)뿐이었다. 법사께서 세상을 떠나시던 날 나 의정은 단지 열두 살이었다. 대상(大象)이 떠나고 나니 의지하여 투신할 곳이 없어졌고 마침내 외서(外書)를 버리고 마음으로 내전(內典)을 흠모하게 되었으며, 열네 살 때 스님의 대열에 참여하는 은택에 젖게 되었으며, 열여덟 살 때 서천으로 향하려 하다가 서른일곱 살 때에 비로소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나 의정이 돌아오던 날 법사의 묘에 나아가 하직하는 예배를 올렸다. 이때 이미 서리 내린 숲이 둘러쳐져 있었고 해묵은 풀들이 묘역을 메우고 있었다. 신도(神道)가 비록 소원하다고는 하나 살아계실 때와 같은 공경을 펴면서 주위를 두루 발돋움하여 바라보면서 먼 길을 다녀온 마음을 술회하고 유령(幽靈)에 복리를 기원하며 인자한 스승의 두터운 덕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한편 혜지(慧智)선사께서는 뜻을 오로지 율의에 두고 마음을 선정(禪定)의 물결로 맑게 하여 주야로 6시(時)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사부대중을 인도하면서 피로를 잊으셨으니 어지러운 곳에 처해도 시끄럽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 있으면서 더욱 고요한 분이라 말할 수 있다. 도속들이 모두 마음을 맡겨도 극진하게 친한 것은 아니었다. 60여 년 동안 『법화경』44)을 매일 한 차례 두루 외웠으니 헤아려보면 2만여 번을 두루 외운 셈이 된다. 비록 수(隋)나라 말년에 나라 안이 폐허가 되어 운명의 물결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지만 그러나 이 기약한 마음에는 한 번도 그것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 육근청정(六根淸淨)45)과 사대평화(四大平和)의 경지를 얻어 60년 동안 조금도 다른 병이 없었다. 늘 계곡물을 굽어보며 경을 외우면 문득 신령한 날짐승들이 모여들어 앉았으며, 법당 구석에서 전독하면 그것에 감응되어 새벽에 우는 닭들이 모여들어 그것을 들었다. 인연과 정을 잘 알았고 음율에 몸담았으며 더욱이 초서(草書)ㆍ예서(隸書)에 밝았으며 그 창도한 업적은 끝이 없다. 비록 외전(外典)에 마음을 두지 않았지만 하늘에서 타고난 자유자재로운 재능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가 지은 육도송(六度頌)과 발원문(發願文)은 나란히 토굴사(土窟寺)의 등대에 쓰여 있다. 이어 선사께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깨끗하고 청정하게 법화경을 베껴 쓰니 극히 명수(名手)의 솜씨를 다하여 그 최상의 보시를 다하였다. 향기를 머금고 기운을 토해내어 몸을 깨끗이 하면 홀연히 경 위에 사리가 감응되었다. 그리하여 경이 이룩되자 곧 금자로 서첩을 만들어 은고리와 함께 합채(合彩)하여 보배함에 담으니, 옥축(玉軸)과 더불어 함께 빛이 났다. 황제가 태산에 행차하자 자세한 사정을 알고 내전에 들어가 공양하기를 청하였다. 이 두 스승께서는 곧 선대의 성인이신 낭(朗)선사의 뒤로 그 발자욱을 이어온 분들이다. 낭선사는 이진(二秦)시대에 현생하시어 오부대중에게 명성을 드높이신 분이며 분신(分身)으로 공양을 받았다. 몸이 공양하는 사람의 문에 이르러 일에 따라 기회를 이끌었으니, 일은 기회와 마음의 바라는 바에 맞았다. 오직 교화만을 위하여 물외(物外)에 초연한 까닭에 까닭에 신통(神通)이라고 절 이름을 지었다. 그 분의 신비한 공덕은 생각하기 어려웠으며 자세한 것은 따로 전기에 실려 있는 것과 같다. 이때에 즈음하여 군왕은 머리를 조아리고 관료와 서민들은 마음을 경건히 하였다. 처음 절을 짓고자 할 때 처음으로 산에 들어가니 북쪽 시냇물에서 호랑이가 절규하는 것을 보았고 산에서 나오려 하자 다시 남쪽 골짜기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우물은 아무리 퍼도 줄지 않았고 천연의 창고에는 쌀을 퍼내도 뒤따라 평평해졌다. 이러한 신비한 자취는 비록 오래되어 인멸(湮滅)되기는 하였으나 그 여풍은 아직도 다하지 않았다.
그 후 친교사와 궤범사의 두 분 스승과 그밖에 주지하는 대덕ㆍ명덕 선사들은 모두가 훌륭하게 율법의 뜻을 잘 익혔고 경전의 마음을 오묘하게 체득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스님들이었다. 손가락을 불사르고 살갗을 태우는 일은 일찍이 이곳 가르침에서는 없었다. 문도들을 훈계하는 스승은 이런 행위를 제지하여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는 모두 내가 친히 들은 일로서 전해 내려오는 말이 아니다. 또한 자상하게 지난날의 명철하신 분들을 보고 옆에서 전대의 규칙을 들어보니 백마사(白馬寺)46)에 말고삐를 멈춘 처음부터 청상(靑象)에 안장을 건 뒤로 마등(摩騰)47)ㆍ법란(法蘭)48)이 빛남을 열어 신주(神州)의 해와 달이 되어 승회(僧會)ㆍ법현(法顯)49) 스님은 법칙을 드리워서 천부(天府)의 진량(津梁)50)이 되었으며, 도안(道安)51)과 혜원(慧遠)52) 스님은 양자강의 남쪽에 범처럼 버티고 있었으며 혜휴(慧休)와 법려(法勵)53) 스님은 황하의 북쪽에 명성을 드날려 법도들이 뒤를 이어 지혜의 물결이 아직도 맑고 속사(俗士)들이 칭찬하여 방진(芳塵)이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직 손가락을 불사르게 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또한 몸을 태우게 한 일은 보지 못하였다. 규칙의 거울이 눈 앞에 있으니, 지혜 있는 사람은 모두 소상하게 알 것이다. 또한 선사께서는 늘 한가한 밤에는 어린 나를 가련히 여기시어 간곡히 진유(進誘)의 말씀을 하셨으며, 혹 노란 나뭇잎을 금이라고 하며 달래주시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근심을 덜어주셨다.
혹 비유의 말로 까마귀의 효도하는 이야기를 하여서 보양하는 덕을 품게 되기를 바라며, “너는 힘써 삼보를 계승하고 융성시켜 끊어지지 않게 하여야 하며, 마음을 백가(百家)에 방종케 하여 헛되게 일생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 이윽고 내 나이가 열 살이 되었으나 다만 그 말씀만 받아들였을 뿐 아직 그 깊은 뜻을 익히지는 못하여 오경(五更)이 될 때마다 선실에 나아가 진실로 청하였다. 이때 선사께서는 반드시 자비로우신 손으로 약한 어깨를 쓰다듬어 주셨으며 실로 자애한 어머니가 갓난아기를 기르는 것과 같았다. 혹 맛있는 반찬을 먹게 되면 흔히 맛보기를 그만두시고 남겨 주셨으며 오직 취하고 구하는 것이 있기만 하면 청하는 것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선우(善遇)법사는 그 은혜가 엄한 아버지의 격려를 받는 것과 같았으며, 혜지선사는 그 자애하심이 어머니의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과 같았으니, 천성의 후덕함이 참으로 여기에 더할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구족계에 나아갈 나이가 되자 도리어 선사를 화상(和尙)54)스님으로 삼게 되었고 계를 받고 나서는 홀연히 맑은 밤 행도하는 때에 향을 사르며 눈물을 떨구면서 가르침의 말씀을 하셨다. “큰 성인께서는 오래전에 이미 열반에 드셔서 법과 가르침이 와전되고 바꾸어져서 사람들은 받는 것을 즐겁게 여기는 사람만 많고 지니고 지키는 사람은 적다. 너는 오직 굳은 마음으로 금계를 존중하고 초편(初篇)의 죄를 범하지 말아라. 그 나머지 죄와 허물이 있는 것은 설령 그것을 범하였다고 하더라도 내가 곧 너를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 벌을 받겠다. 손가락을 불태우고 몸을 불사르는 일은 하여서는 안 된다.” 나아가 뜻을 받들던 날 다행히 자비를 입어 성계(聖戒)를 내려주셨기에 힘에 따라 뜻을 다하여 감히 허물고 어기는 것이 있게 되면 비록 작은 죄라 할지라도 큰 두려움을 가슴에 품게 되는 것이 있었다. 이에 5년 동안을 율전을 정밀하게 탐구하고 율사들의 글과 해설을 갈고 닦아 제법 깊은 뜻을 논의하게 되었다. 선율사(宣律師)의 초술(鈔述)은 남몰래 중도(中道)의 뜻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범(持犯 : 계율을 지키는 것과 파괴하는 것)의 한계를 알게 되니 스님은 곧 한 차례 두루 강론을 하게 하시고 비로소 대경(大經)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후 걸식으로 하루 한 끼의 밥만 먹으면서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비록 산사(山寺)가 마을에서 멀었지만 한 번도 수행을 그만둔 일은 없었다. 늘 대사(大師)의 자훈(慈訓)을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어디서 나오는지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로소 보살의 은혜는 고통받는 부류를 구제하려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큰 불더미 속에 몸을 던졌고 장자(長者)는 불쌍한 아들을 슬퍼하여 좁고 막힌 작은 문을 엿보았다는 것이 본래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험하게 되었다. 늘 친히 발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멀리 길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 밑에는 또 나의 시중을 들 사람이 있으니 공부를 폐하면서까지 공연히 이곳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알려 주셨다. 이에 곧 석장을 짚고 동위(東魏)땅으로 가서 자못 대법(對法)55)과 『섭론(攝論)』에 마음을 전념하고 다시 책 보따리를 등에 업고 서경(西京)으로 가서 비로소 『구사론(俱舍論)』56)과 『유식론(唯識論)』을 읽고 생각하였다. 수도에서 돌아오던 날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와 친히 큰스님에게 요청하였다. “존자께서는 이미 연로(年老)하신데도 제 마음은 먼 곳을 유행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직 듣지 못한 것을 추람(追覽)하고 큰 이익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마는 아직 감히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승께서는 곧 가르침을 남기시어 말씀하셨다. “너는 큰 인연을 위하여야 한다. 때는 두 번 오는 것이 아니다. 의리에 가로막혀서 어찌 사사로운 그리움을 품어서야 되겠는가? 내가 혹 세상에 남아 있게 된다면 너의 전등을 보게 될 것이다. 곧 가는 것이 좋겠구나. 남아서 뒤를 돌보는 것을 일삼지 말아라. 성인의 발자취를 보고 예배드린다면 나도 진정 따라 기쁘겠구나. 불법을 계승하고 융성시키는 일은 중한 일이니, 너는 틈이 생기게 하여서는 안 된다.”
자비하신 허락을 받고 나니 윗분의 명을 어기기 어려워서 마침내 함형(咸亨) 2년(671) 11월에 배를 타고 광주(廣州)로 가서 남해에 돛대를 올려 인연이 있는 여러 나라를 지나 서쪽 나라에서 석장(錫杖)을 흔들면서 함형 4년 2월 8일에 이르러 비로소 탐마입저국(耽摩立底國)에 도달하였는데 이곳은 동인도의 바다의 입구였다. 그곳에 머물다가 5월에 이르러서야 도반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나란타사(那爛陀寺)와 금강좌(金剛座)에 이르렀고 마침내 두루 성인의 발자취를 순례하고는 불서국(佛誓國)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선지식이라야 범행(梵行)57)이 완전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진실된 가르침이 어찌 어긋나는 말씀이겠는가? 대사께서는 중생에 응하시어 우뚝 뛰어나게 태어나시어 한 시대의 모범이 되셨고 친히 스스로 손잡고 권장하시어서 성인(成人)에 이르게 하셨으니 이는 마치 바다에서 뗏목만을 의지해가다가 좋은 시력을 가진 안내자를 만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곧 인생의 나루터에서 다행스럽게 두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이다. 무릇 이것으로 볼 때 작은 선(善) 작은 혜택을 입은 일조차도 그 아름다움을 거문고와 노래로 전파하는 것인데 하물며 큰 지혜와 큰 은혜를 입고도 글로 전하여 찬양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아름답도다. 부모님이시여. 광겁(曠劫)의 예전부터 서로 지켜서 여기 나 이갈이 하는 어릴 때 손잡고 데려가 밝은 스승께 나아가게 하셨네.
동자 나이 아직 어려서 사랑을 버리니 슬픔이 솟아났으나 배우고 때로 익혀 공덕을 잠규(箴規)에 의지하였네.
운명을 해와 달에 벗하니 그 덕 천지에 비유되고 나의 지혜의 칼날 갈아주시고 나의 법의 살갗 자라나게 하셨네.
상덕(上德)은 덕이 아니오라 멀어서 알지 못하고 광채를 높은 산마루에 묻어서 덕을 끝까지 가장자리에 감추셨네.
양양(洋洋)하도다. 지혜의 바다. 울울하도다. 선(禪)의 가지여. 그 문장 찬란하게 빛나고 그 선(禪)의 광채(光彩) 밝고 밝도다.
갈아도 번쩍거리지 아니하고 누렇거나 검어지지 아니하였고 좌천(坐遷)으로 남다름을 보이셨고 닭이 법문 듣는 일로 기이함을 나타내셨네.
어린 나이라 하나는 남아 있고 하나는 버렸지만 가지고 있는 복업은 모두 훈자(熏資)에 써서 은혜를 사별(死別)한 뒤에 갚고 덕은 살아서 헤어질 때 보답하오리.
원하옵건대 있는 곳마다 만나서 경사를 늘려 나가고 대대로 훈계를 받들어 교체 이루어 같은 산에 의리를 쌓고 못물처럼 청정한 선정(禪定)에 맡겨
용화수(龍華樹)의 첫 모임을 바라며 미륵불의 현오한 물결 법문을 듣고 사생(四生)에 두루 생각을 돌려 삼대의 긴긴 아승기(阿僧祇) 세월을 채우소서.
혹 듣는 사람들이 허망한 것에 근거한 말이라 생각할까 두려워 잠시 법사께서 지은 시를 해설하겠다. 대사께서는 일찍이 2월 15일에 스님과 속인이 함께 남산의 낭(朗)스님의 성적(聖迹)이 있는 곳을 찾아가 천창(天倉)ㆍ천정(天井)의 이적(異蹟)을 보시고 영감(靈龕)ㆍ영묘(靈廟)의 기적에 예배드렸는데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크게 공양을 일으켰다. 이때 제왕(齊王) 이하 문학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 자리에 모였으며 모두가 필해(筆海)를 가슴에 품고 나란히 문봉(文峯)을 마음대로 좌우하는 사람들로 각기 재능을 다투고 함께 자신의 뛰어남을 자랑하여 낭스님의 묘상(廟像)을 시로써 읊고자 하여 함께 법사를 추대하여 먼저 짓게 하였다. 법사께서는 곧 사양하지 않으시고 그 소임을 맡았다. 이에 강물과 못물이 먼저 넘쳐서 문한을 벽에 베껴 쓰는데 조금도 붓 끝을 멈추는 일이 없어 달리듯 써내려 가서 한 편의 시를 이루고 조금도 가점(加點)하는 일이 없었다. 그 시에서 말하였다.
상대의 성인 빼어나게 빛나 그 영유(英猷) 깊은 바다에 펼쳤네. 빈 골짜기에 스스로 깃들어 영예로운 명(命) 헛되게 기다리게 하였네.
만고에 산천은 텅 비어 있으나 천 년을 흘러 사람의 시대는 바뀌었네. 진실로 무생(無生)을 환하게 안다면 다만 단청만 남아 있음을 보는구나.
이에 여러 문사들은 법사가 지은 시를 보고 나서 모두가 속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혹 소나무 가지에 붓을 걸어놓기도 하고 혹 암곡(岩谷)에 벼루를 던지기도 하면서 말하였다. “서시(西施)가 모습을 나타내니 모모(嫫母: 醜女)가 어떻게 얼굴을 드러내겠는가?” 그리하여 재주 있는 선비가 숲의 나무처럼 많았지만 마침내 한 사람의 화운(和韻)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 밖의 문장은 모두 별집과 같다. 의정(義淨)은 공경하게 대주(大周)의 모든 대덕스님들께 아뢰나이다. 이 가운데는 혹 일찍이 빈자리에서 법문을 듣고 받은 사람도 있고, 혹 법문의 뜻을 묻고 논의한 사람도 있고, 혹 약관의 나이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도 있고, 혹 중년에 와서 회포를 통한 사람도 있으나 모두 큰 사람에게는 경례(敬禮)하고 작은 사람에게는 “천만(千萬)에”라고 하면서 나열한 40조의 글은 가늠이 될 일을 요약해서 논한 것이오. 무릇 여기에 기록된 것은 모두가 서방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현행되고 있고 성인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이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오. 무릇 목숨이란 흘러가는 시냇물과 같아서 아침에 저녁 일을 꾀할 수 없으니 혹 얼굴을 마주 보며 말하기가 어려울까 두려워 이렇게 먼저 베풀게 된 것이니, 여가가 있을 때 찾아오셔서 원대한 의견을 밝혀 주시면 다행으로 생각하겠소. 이는 살바다(薩婆多: 설일체유부)에 근거한 것이며 다른 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오. 거듭 말씀하겠소.
공경하게 영칙(令則)을 말함은 큰 계획을 되살리려 함이네. 모두 성인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니 어찌 정으로 구한 것이라 하겠는가?
얼굴 보며 뵙기 어려울까 두려워 이렇게 먼저 갚아 보내오리다. 원컨대 수레바퀴 자락에 묶어두어 버리지 아니하고
보잘것없는 이 사람 거두어 주신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백 대 뒤에 발자취 뒤따라 천추에 아름다움을 전파하리라.
진실로 바라노니 영취산이 소실봉(小室峯)과 가지런하게 되고 왕사성(王舍城)이 신주와 나란히 있게 되소서.
------- 1) 범어로 Aśvaghoṣa라 음역한다. 중인도 마갈타국 사람으로 불멸 후 6백년 경에 출세한 대승의 논사(論師)이다. 본래 외도의 집에서 태어나 논의를 잘하며 불법을 헐뜯었다. 협존자(脇尊者)가 북쪽에서 와서 토론을 하여 설복하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부터 마갈타국을 중심으로 중인도에서 전도하였다. 그 당시 가니색가왕이 중인도를 정복했는데 배상금 대신 마명을 데리고 북인도로 돌아갔다. 마명은 북쪽의 월지국에 들어가 임금의 보호를 받고 대승불교를 전하였으므로 옛적부터 그를 대승불교의 시조라 한다. 저서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1권,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15권 등이 있다. 2) 신시(申時). 곧, 오후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의 사이를 말한다. 3) 비구의 이름으로 모아(母兒)라 번역한다. 중인도 사람으로 다라나타의 인도불교사에 의하면 Canaragupta왕의 아들로 부모를 존중하고 마골 또는 바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처음에 자재천(自在天)을 섬기다 꿈속에서 성다라모(聖多羅母)를 보고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4) 범어로 Asaṅga이다. 불멸 후 1천년 경의 사람으로 북인도 부루사부라성의 바라문 출신이다. 처음 소승화지부(小乘化地部)에 들어가 출가하였다. 뒤에 중인도 아유차국의 강당에서 네 달 동안 밤마다 미륵보살의 설법을 듣는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 5부의 대론(大論)은 이때에 미륵보살이 설한 것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무착은 아유차ㆍ교상미에서 법상대승(法相大乘)의 교리를 선양하고 또 여러 가지 많은 논소를 지어 여러 대승경을 해석하였다. 75세에 왕사성에서 죽었다. 5) 범어로 Vasubandhu이다. 북인도 건타라국 부루사부라성 사람으로 4~5세기 경의 학승이다. 무착의 동생이자 사자각의 형이다. 처음에 형과 함께 소승의 설일체유부에 출가하여 많은 저술을 통해 대승을 비방하다가 마침내 무착의 권유에 의해 대승에 들어가 아유차에서 그 선전에 노력하였다. 아유차 국왕 초일(超日)ㆍ신일(新日)은 차례로 이를 회호하여 크게 교세를 확장하게 된다. 80세를 일기로 아유차국에서 죽었다. 6) 범어로 Diṅnāga라 음역한다. 남인도 사람으로 『인명론(因明論)』을 대성하였다. 7) 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를 말한다. ①문혜:보고 듣고서 얻는 지혜. ②사혜:고찰하여 얻는 지혜. ③수혜:고찰을 마치고 입정(入定)한 뒤에 수득(修得)하는 지혜. 8) 팔지어(八支語). 부처님의 여덟 종류의 말씀으로 ①상수어(上首語:열반에 나아가는 것) ②미묘어(微妙語) ③현료어(顯了語) ④이해어(易解語) ⑤요문어(樂聞語:미묘하고 분명하므로 중생들이 듣기를 바라는 것) ⑥ 무의어(無依語:애착하는 일이 없고, 구하는 바가 없는 것) ⑦불역어(不逆語) ⑧무변어(無邊語)를 말한다. 9) 범어로 Catvāri-āryasatyāni이며 사성제라고도 한다.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의 네 가지이다. 제는 불변여실(不變如實)의 진상(眞相)이라는 뜻이다. ①고제(苦諦):현실의 인생은 고(苦)라고 보는 것. ②집제(集諦):고(苦)의 근거이유. 고의 원인은 번뇌인데, 특히 애욕과 업을 말한다. 위의 2제는 유전(流轉)하는 인과. ③멸제(滅諦):깨달을 목표. 곧 열반. ④도제(道諦):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하는 수단. 위의 2제는 오(悟)의 인과. 10) 중인도 갈야국사국(羯若鞠闍國)의 임금으로 불교를 보호하고 문학을 장려, 현장(玄奘)을 우대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계일왕 제1세는 550년경 사람, 다음 광증왕(光增王)은 580년경에 재위, 다음 그의 아들 왕증왕(王增王)이 즉위하였으나, 동인도 금이국(金耳國)의 설상가왕(設賞迦王)에게 피살되었으므로 그 아우 가증왕(嘉增王)을 계일왕 제2세라 한다. 왕은 겨우 6년 동안에 전 인도를 정복할 만한 무력을 장악하였고 신심이 있는 불교도로서 5년마다 무차대회를 거행하니 바라문도 존경하였다. 그는 또 문학을 장려하여 손수 불교 희곡 Nāgānanda를 짓고, 또 Ratnāvalī의 저작이 있었다고 한다. 이가 곧 계일왕이다. 계일이라고 이름한 왕이 인도에 몇 사람 있었으나, 그중 6백년 경에 임금이 되었던 마랍파국(摩臘婆國)의 계일왕은 가장 유명하였다. 11) 수대나(須大拏)ㆍ수달나(須達拏)ㆍ수제리나(須提梨拏)ㆍ소타사나(蘇陀沙拏)라고도 한다. 번역하여 선아(善牙)ㆍ선시(善施)ㆍ호애(好愛)라고 한다. 석존 전세의 섭파국 태자 때 이름이다. 12) 원만한 적정(寂靜). 번뇌 잡염의 세계를 벋어나 청정한 열반계에 돌아가는 것을 이른다. 13) 세속체(世俗體)의 반대말로 진제(眞諦)ㆍ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도 한다. 승의라 함은 수승한 지혜의 대경, 체는 진리라고 하니, 변치 않는 진리를 말함인데, 진실한 것, 허망치 않은 것, 그대로의 진상 등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하나, 여기서는 성교(聖敎)가 나타내려 하며, 또는 증오의 실체인 진리를 말한다. 14) 범어로 Maheśvara 또는 마혜수라(摩醯首羅), 마혜습벌라(摩醯濕伐羅)라고 한다. 눈은 셋, 팔은 여덟으로 흰 소를 타고, 흰 불자(拂子)를 든 큰 위덕을 가진 신의 이름이다. 외도들은 이 신을 세계의 본체라 하며, 또는 창조의 신이라 하여 이 신이 기뻐하면 중생이 편안하고, 성내면 중생이 괴로우며, 온갖 물건이 죽어 없어지면 모두 이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 신을 비차사(毘遮舍)라 부르기도 하고 초선천(初禪天)의 임금이라 하며, 혹은 이사나(伊舍那)라 하여 제6천주(天主)라고도 한다. 15) 삼라만상은 심식 밖에 실존(實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만 심식뿐이라는 것이다. 16)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아공이란 것은 중생은 5온(蘊)이 화합한 것이므로 아(我)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것이며, 법공이란 것은 5온의 자성(自性)도 공(空)하다는 것이다. 17) 불교를 처음으로 중국에 전한 마등(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을 말한다. 18) 499~569년. 인도 스님으로 양무제가 고승과 대승 경전을 구하자 이에 응하여 546년 중국 땅에 들어갔다. 중국 섭론종(攝論宗)의 개조로 중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 1권을 비롯 경ㆍ논ㆍ기문ㆍ전기 등 64부 278권을 번역했다. 19) 343~413년. 인도 스님. 왕족 출신으로 7세에 출가, 어머니를 따라 각처를 돌아다녔다. 반두달라에게 소승교를, 수리야소마에게 대승교를 배웠다. 383년 전진의 왕 부견의 초청으로 중국에 들어와 『성실론(成實論)』ㆍ『십송률(十誦律)』ㆍ『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ㆍ『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ㆍ『아미타경(阿彌陀經)』등 74부 380권을 번역하면서, 다방면에 힘썼으나 그 중에서도 삼론(三論) 중관(中觀)의 불교를 선전하였으므로 그를 삼론종의 조사로 한다. 20) 중국 당나라 때 스님이다. 12세에 낙양 정토사에서 중이 되고, 혜경(慧景)ㆍ도기(道基)ㆍ보천(寶遷)ㆍ법상(法常)ㆍ승변(僧辨)ㆍ도심(道心) 등에게서 『열반경』ㆍ『섭론』ㆍ『발지론』ㆍ『비담론』ㆍ『구사론』ㆍ『성실론』 등을 배웠다. 그러나 이들의 말이 서로 모순되므로 서역의 스님에게 직접 물어 그 의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629년 29세에 인도로 가서 여러 고승 대덕들을 찾아 불교와 아울러 학문 예술을 연구하고 645년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가 17년 동안 보고 들은 나라가 130여 국이다. 그의 여행기인 『대당서역기』 12권은 역사가들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21) 정(定)은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하고, 혜(慧)는 현상인 사(事)와 본체인 이(理)를 관조하는 것이다. 22) 범어로 Sapta-sambodhyaṅgāni로 음역.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닦는 도행에는 37종이 있는데 그 중의 제6번째이다. 칠보리분(七菩提分)ㆍ칠각지(七覺支)ㆍ칠각의(七覺意)ㆍ칠각(七覺)이라고도 한다. 불도를 수행하는데 지혜로서 참되고 거짓되고 선하고 악한 것을 살펴서 골라내고 알아차리는데는 7종이 있다. ①택법각분(擇法覺分):지혜로 모든 법을 살펴 선한 것을 골라냄. ②정진각분(精進覺分):쓸데없는 고행은 그만두고 바른 도에 전력하는 것. ③희각분(喜覺分):참된 법을 얻어 기뻐하는 것. ④제각분(除覺分):그릇된 견해나 번뇌를 끊어버릴 때 참, 거짓을 알 수 있어 선근을 기르는 것. ⑤사각분(捨覺分):바깥경계에 집착하던 마음을 여읠 적에 거짓되고 참되지 못한 것을 추억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 ⑥정각분(定覺分):정이 들어 번뇌 망상을 일으키지 않음. ⑦염각분(念覺分):불도를 수행함에 있어 잘 생각하여 정(定)ㆍ혜(慧)가 고르게 하는 것. 만일 마음이 혼침하면 택법각분ㆍ정진각분ㆍ희각분으로 마음을 일깨우고 마음이 들떠서 흔들리면 제각분ㆍ사각분ㆍ정각분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23) 인도 스님으로 6세기 중엽에 활동하였다. 나란타사 호법(護法)의 제자로서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해석하였다. 24) 밀교의 총칭으로 진언종(眞言宗)이라고도 한다. 716년 선무외(善無畏) 삼장이 『밀종론』을 번역하면서부터 중국의 진언종이 비롯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의 혜통(惠通)이 당나라에 가서 선무외 삼장에게서 인결(印訣)을 얻어가지고 664년에 돌아온 것이 진언종의 처음이다. 25) 범어로 Abhidharma이다. 불교의 경전을 경ㆍ율ㆍ논으로 나눈 가운데 논부의 총칭이다. 곧 부처님의 설법을 경, 경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것을 논이라고 한다. 26) 6족론(足論)을 이르는 말. 소승유부종(小乘有部宗)에서 근본소의의 논장으로 삼는 6부의 논으로 『아비달마집이문족론』ㆍ『아비달마법온족론』ㆍ『아비달마시설족론』 ㆍ『아비달마식신족론』ㆍ『아비달마품류족론』ㆍ『아비달마계신족론』이 그것이다. 논마다 족(足)자가 있으므로 6족론이라 하였다. 27) 불문에 처음 귀의할 때 하는 의식으로 불ㆍ법ㆍ승에 귀의함을 말한다. 28) 중인도의 교살라국 사위성의 장자로 자비심이 많아 고독한 이에게 보시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이렇게 일컬어졌다. 29) 사방(四方)의 어느 곳에서 온 수행승이라도 받아들이는 교단을 말한다. 30) 과거 세상에 자력왕이 10선(善)을 행하여, 귀신은 먹을 것이 없었고, 사람은 모두 계율을 지녔다. 그때 다섯 야차(夜叉)가 왕에게 와서 몸을 보시하여 줄 것을 요청하자, 왕은 야차들에게 몸을 내어 주면서 발원하기를 “만일 내가 성불한다면 너희들에게 법식(法食)을 얻게 하고 먼저 제도하리라” 하였다. 자력왕은 지금의 석가모니불이며 다섯 야차는 다섯 비구라 한다. 31) 네 가지 은혜로 부모ㆍ국왕ㆍ중생ㆍ삼보의 은혜를 가리키기도 하고 부모ㆍ사장(師長)ㆍ국왕ㆍ시주의 은혜를 말하기도 한다. 32) 투란차(偸蘭遮)라고도 하는데 방사죄(方使罪)ㆍ미수죄(未遂罪)를 말한다. 말뜻은 추악한 죄란 뜻으로 6취죄(取罪)의 하나이다. 바라이죄(波羅夷罪)나 승잔죄(僧殘罪)에 이를 수 있는 죄를 말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가까이하면서 머리카락으로 머리카락을 서로 닿게 하거나, 손톱으로 손톱을 서로 닿게 하면 투란차를 범한 것이고, 손으로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닿게 하면 승잔죄가 된다. 이것은 중한 죄를 지을 방편으로서, 선근을 끊고 악도에 떨어지게 되는 죄를 말한다. 33) pārājika의 음역이다. 계율중에서 죄가 가장 중한 것은 교단 추방의 형벌이다. 수행승에게는 네 가지의 바라이가 있다. ①부녀자와 간음을 행하는 것. ②도둑질하는 것. ③사람을 죽이는 것. ④아직 수행을 완성하지 않았는데 ‘나는 뛰어난 사람이다’라고 망발하고 다니는 것[大妄語]. 수행니(修行尼)는 그 위에 네 가지를 더하여 여덟 가지의 바라이가 있다. 이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범하면 교단에서 추방된다. 34) 온갖 보살에게 공통한 네 가지 서원. 보살은 이 원으로 마음을 요제(要制)하여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려 한다. ①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고통세계의 중생들은 그 수가 한이 없다 해도 다 제도하려는 소원. ②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번뇌가 한이 없다 해도 다 끊으려는 소원. ③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법문이 한량없이 많지만 다 배우려는 소원. ④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위 없는 불과(佛果)를 이루려는 소원. 35) 고통 세계의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이 중생을 불도에 이끌어 들이기 위한 네 가지 방법이다. ①보시섭(布施攝):상대편이 좋아하는 재물이나 법을 보시하여 친절한 정의(情誼)를 감동케 하여 이끌어 들임. ②애어섭(愛語攝):부드럽고 온화한 말을 하여 친해서 이끌어 들임. ③이행섭(利行攝):동작ㆍ언어ㆍ의념(意念)에 선행(善行)으로 중생을 이익케 하여 이끌어 들임. ④동사섭(同事攝):상대편의 근성(根性)을 따라 변신(變身)하여 친하며, 행동을 같이 하여 이끌어 들임. 36) 위(魏)의 종요(鍾繇)와 한(漢)의 장지(張芝)로 모두 글씨가 뛰어났다. 37) 고대 조각(彫刻)의 대가(大家)로 명목수(名木手)였다. 장석운근(匠石運斤)이라고 하여 장석이 도끼를 휘둘러 물건을 만드는데 조금의 착오도 없었다는 데서 기예(技藝)가 오묘한 경지에 이름을 말한다. 38) 『반야경』은 반야바라밀의 깊은 이치를 설한 경전의 총칭이다. 구역에는 『반야바라밀경』이라 하고 신역에는 『반야바라밀다경』이라고 하였다. 이 경 중에 『인왕반야경』의 일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현장이 번역 집대성한 『대반야바라밀다경』 600권의 일부에 해당된다. 이 경의 내용은 반야로 관조할 이(理)인 만유는 우리가 실물처럼 보는 것과 같은 존재가 아니고 다 공하여 모양이 없는 것임을 말한다. 8부 『반야경』은 『대품(大品)반야경』ㆍ『소품(小品)반야경』ㆍ『방광(放光)반야경』ㆍ『광찬(光讚)반야경』ㆍ『도행(道行)반야경』ㆍ『금강(金剛)반야경』ㆍ『승천왕(勝天王)반야경』ㆍ『문수문(文殊問)반야경』의 여덟 종류를 말한다. 39) 불교의 기본적 전적의 집성으로 수나라 이후의 호칭이다. 석존 일대의 말씀을 섭장(攝藏)한다는 의미로 일대장경이라 하고, 또 대장경ㆍ장경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석존께서 설하신 경전, 인도의 여러 논사의 논서에서 이룬 것인데, 차제에 후인의 저술을 더해 내용도 분량도 같이 증가했다. 40) 아미타불의 국토, 극락정토를 말한다 41) 권2 주 56) 참고. 42) 황금을 낳는 강으로 석존이 구시나가라(또는 시나가라)에서 입멸하기 전에 건넜던 강을 Hisraṇyavatī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땅을 흐르는 강을 말한다. 43) 부처님이 깨달음을 연 나무로 보리수를 말한다. 미륵보살의 경우는 용화수를 말한다. 즉 깨달음을 여는 것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44) 『묘법연화경』의 약칭이다. 이 경은 모든 불교 경전 중 가장 넓은 지역과 많은 민족들에 의해서 수지(受持) 애호된 대승경전 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에서 한역된 후 수나라의 천태대사 지의(智顗)에 의해 이 경에 담겨져 있는 깊은 뜻과 사상이 교학적ㆍ사상적으로 조직ㆍ정리됨으로써 천태사상이 발전을 보게 되어 화엄사상과 함께 중국불교학의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45)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의 6근이 대경(對境)을 대하는 집착을 끊고 8백의 안공덕, 1천2백의 이공덕, 8백의 비공덕, 1천2백의 설공덕, 8백의 신공덕, 1천2백의 의공덕을 얻어 6근을 장엄, 청정케 하며, 6근이 서로 다른 근의 작용을 갖추어 걸림없는 묘용(妙用)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46) 중국 낙양에 있었던 절이다. 67년(후한 명제 영평 10년)에 가섭마등ㆍ축법란이 불상ㆍ경전을 흰 말에 싣고 낙양에 오자 명제가 크게 신봉하여 낙양성 서옹문 밖에 정사(精舍)를 지어 거주케 하고 백마사라 이름하였다. 이것이 중국 사원의 시초이다. 그 후부터 백마사라는 절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47) 가섭마등(迦葉摩騰)을 말한다. 중인도 사람으로 67년(후한 명제 영평 10년)에 축법란과 함께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불교를 전했다. 48) 축법란(竺法蘭)을 말한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중국 최초의 역경이다. 가섭마등이 죽은 뒤에는 특히 역경에 주력하였다. 『소불본행경(所佛本行經)』 등 5부 13권을 번역하였다. 나이 60세로 낙양에서 입적하였다. 49) 중인도 나란타사의 승려로 이름은 법천(法天)이다. 973년 중국에 와서 하동부 개원사(開元寺)의 범학승(梵學僧) 법통(法通)과 함께 『성무량수경칠불찬』을 번역하니, 황제가 궁궐로 청하여 위문하고 자포(紫袍)를 하사하였다. 981년 용흥사에서 『무량수결정광명왕경』 1권을 번역하고 982년 태평흥국사 역경원이 낙성됨에 천식재(天息災) 등과 함께 불리워 전교대사(傳敎大師)의 호를 받았다. 7월에 『길상지세경』 1권을 번역하고, 985년 역경한 공으로 조봉대부 시홍려경(朝奉大夫試鴻臚卿)이 되고 임금의 명으로 법현이라 이름을 고쳤다. 시호는 현각법사(玄覺法師)이고 번역한 경론은 120여부와 170여 권이 있다. 50) 부처가 사람을 제도하는 일을 말한다. 51) 중국의 상산(常山) 부류(扶柳) 사람이다. 유학이 허락되어 불도징(佛圖澄)을 스승으로 섬기고 법제(法濟)ㆍ지담(支曇) 등에게 배웠다. 대법(大法)을 널리 펼치기 위하여 문인들을 양주ㆍ촉ㆍ나부산 등지에 보내고, 또 혜원(慧遠) 등 4백인을 거느리고 양양(襄陽)에서 전도하였다. 진왕(秦王) 부견(符堅)은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군대로 양양을 포위하고 장안으로 초청하여 오중사(五重寺)에서 경전을 번역ㆍ강론케 하였다. 중국 초기의 불교는 주로 인도와 서역에서 온 승려에 의하여 개척되었는데, 도안 때부터 중국인에 의하여 중국 불교가 일어났다. 진(秦)나라 건원 21년, 72세로 입적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인수보살(印手菩薩)이라 부른다. 52) 중국 동진 때 승려로 여산 백련사의 개조(開祖)이다. 안문(雁門) 누번(樓煩) 사람으로 특히 노장학에 정통하였고 21세에 향산정 도안(道安)을 찾아가서 수행 정진하였다. 30년 동안 여산에 있으면서 법정(法淨)ㆍ법령(法領) 등을 멀리 서역에 보내어 범본을 구하고 계빈국 승려 승가바제(僧伽婆提)에게 청하여 『십송률(十誦律)』을 완전히 번역하는 등, 불교학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당나라 선종이 변각대사(辯覺大師)라 시호하고, 송나라 태종은 원오대사(圓悟大師)라 시호하였다. 53) 상부종(相部宗)의 개조(開祖)이다. 나면서부터 이가 났고, 늙을 때까지 갈지 않았다고 한다. 영유(靈裕)에게 출가하였다. 정흥에게 『사분율』을 배웠으며, 나이와 함께 공업이 널리 떨쳐졌다. 항주의 연공(淵公)을 따라 2년 동안 불법의 대의(大義)를 듣고, 강남에 있으면서 『십송률』을 배우고, 업(業)에 돌아와 개도(開導)하였다. 54) 원래 바라문교에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스승을 upā-dhyāya라 불렀던 것을 불교가 받아들인 것이다. 제자를 둘 자격이 있는 자, 제자에게 구족계를 내려주는 스승 등을 말한다. 55) 아비달마(阿毘達磨)라고 하며 논(論)이라고도 한다. 대(對)는 대관(對觀)ㆍ대향(對向)의 뜻이다. 법은 열반 혹은 4제(諦)를 가리키며 법에 대한 법의 연구란 뜻이다. 4제의 도리를 대관(對觀)하고 열반에 향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56)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의 준말이다. 진제(眞諦)의 번역본은 22권, 현장(玄奘)의 번역본은 30권인데, 대개의 경우 후자를 읽는다. 내용은 계품(界品)ㆍ근품(根品)ㆍ세간품(世間品)ㆍ업품(業品)ㆍ수면품(隨眠品)ㆍ현성품(賢聖品)ㆍ지품(智品)ㆍ정품(定品)ㆍ파계품(破戒品)의 9품으로 나누어져 있다. 앞의 8품은 유루(有漏)ㆍ무루(無漏)의 법을 밝히고, 뒤의 1품은 무아(無我)의 도리를 밝히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책은 보수적인 카슈미라 유부(有部)에 대립하는 진보적인 간다라 유부에 속하며, 그 선구로서 법구(法救)의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 등이 지적되고 있다. 논설 중에는 가끔 경량부(經量部)의 설에 따라 유부를 비판하고 있어 세친 자신이 일가견을 이루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러 나라에 많은 주석서가 있는데, 특히 중국의 보광(寶光)ㆍ법보(法寶)ㆍ원휘(圓暉) 등의 주석이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57) 범어로 Brahmacara이다. 범은 청정ㆍ적정의 뜻으로 맑고 깨끗한 행실을 말한다.
『남해기귀내법전』은 의정스님의 글이다. 의정 스님은 유부 계열의 율장을 인도에서 가지고 와 번역에 힘썼다. 당시 중국은 불교를 수입해서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약간 불충분한 점이 많았다. 중국이 이미 갖고 있던 도교나 유교적인 배경에서 불교의 입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불교 가르침에 대해서도 일부 잘못된 오관념을 많이 갖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미 갖고 있는 관념의 틀로 불교 내용을 변형시켜 이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불교가 제시하는 공 사상을 노자가 제시하는 무위나 무로 이해하는 경향도 있었다. 이런 경향을 격의불교라고도 칭한다. 그런 가운데 중국 나름대로 독특한 사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선종 가운데에서도 그런 경향이 많다.
본래 부처님이 정려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은 바가 아니다. 그 방법도 대단히 다양하다. 수식관을 통한 심일경성부터 4 념처 7각지 8 정도 정려 바라밀다. 삼마파티 삼마히타...삼매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이런 수행은 또 종합적으로 계 ㆍ정 ㆍ 혜 3 학을 닦는 과정의 일부로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 들어와서는 조금 경향이 달라진다.
그래서 다양한 종파가 생겨난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원래 부처님이 제시한 정려 수행이나 삼매 방안과 차이가 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을 특별히 강조하고 수행에 임하는가에 따라 조금씩 경향이 달라짐을 볼 수 있다.
화두를 들고 면벽수행을 한다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래 수많은 법 가운데서 선택해 택법을 하고 7 각지를 닦는다. 이것과 무엇이 다른가를 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부처님은 이것을 전체 수행을 제시하는 가운데 한 부분으로 제시한 것이다.
계율도 사정이 비슷하다. 그런데 중국 상황이 인도의 정통적인 계율 수행과 많이 차이점이 있게 되었다.
그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 출가 수행자가 어떤 색깔로 어떤 형태의 옷을 입는가부터 걸식 수행을 하는가. 이런 점들까지 하나하나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크다.
결국 현지 사정에 적당히 맞추어서 수행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의정스님이 정통적인 계율은 어떤 것인가에 초점을 맟주고 이를 주제로 테마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라고 본다.
다만 의정스님이 취한 내용은 유부 계열의 계율이다.
불교 내에서 유부는, 교리적으로는 일반 세간이 망집과 맞닿아 있는 측면이 강하다. 즉 일반 세간의 입장에서 처음 수행에 진입할 때 가장 이해하기 쉽고 기초적인 교리 내용이 주가 된다. 그리고 계율도 그런 입장에 있는 출가수행자들이 승가를 형성해 수행할 때 지켜야 할 계율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불교 내 다른 입장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교리적으로 보면, 불교에서 유부-경량부-중관학파-유식학파의 입장이 다르다. 계율면에서 대승의 입장이 조금 다르다.
그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처음 세간에서 망집을 바탕으로 생활한다. 그러다가 처음 수행에 진입한다.
이런 상태에 눈높이를 맞추어 처음 부처님이 방편적으로 가르침을 베풀게 된다. 그 사정은 상대가 놓인 입장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입장은 그런 정신질환상태에 있는 이가 우선 당장 자신이 그 상태를 벗어나는데 주된 초점이 있다. 그리고 그런 수행자들만 또 따로 모여 집단 수행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필요한 내용들이 주된 내용이 된다.
그래서 이런 목적을 위해서 그 수단으로서 계율 내용이 제시되게 된다.
그러나 대승 입장은 이와 다르다. 물론 자신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성불하는 것도 목표지만, 그와 함께 다른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주된 목표가 된다.
비유하면 병원 상황과 같다. 환자들이 건강한 상태가 되려고 한다. 그 가운데 퇴원할 상태가 가까운 이들만 따로 모여 퇴원훈련을 한다고 하자. 그래서 퇴원하고 건강하게 살게 된다고 하자.
이 경우 필요한 내용이 있다.
그런데 어떤 건강한 이가 이제 병원에서 여러 환자를 치료해 건강하게 만들어 퇴원시키려 하는 활동을 하려고 한다고 하자. 즉 한마디로 병원에 들어가 의사 활동을 하려고 한다고 하자. 이 경우는 앞 경우와 사정이 달라진다.
이 경우는 자신의 병만 치료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병원에 있는 수많은 환자의 증상과 치료방안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 병원에 있는 환자와 멀리 떨어지면 안 된다. 따로 퇴원준비를 하며 격리 생활을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환자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가까이하는 가운데 다양한 증상의 환자들을 상대해 병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점을 초점으로 해서, 필요한 내용이 제시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술 하나를 놓고서도 유부에서 제시되는 계율 내용과 대승에서 제시하는 내용이 서로 차이가 나게 된다.
그런 사정으로 교리나 계율도 각 경전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배경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이 대한 내용만을 맹목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다른 내용을 대하기 쉽다. 그러면 각 경우에 다른 내용이 제시된 사정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결국 각 구체적 사정에 맞추어 각 경전 내용이나 수행방안이 달리 제시된다. 그 사정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처음 상태에서는 이런 내용 자체 파악이 힘들다. 그런 경우는 처음 이해되는 내용을 붙잡고 잘 실천해 성취해야 한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 내용이 이제 필요함을 또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결국 정도가 높아지면 이제 또 다른 내용까지도 이해하고 익혀야 한다. 그래서 그런 각 경우 달리 취하는 수행방안들이 있게 된다. 그것을 불부 보부 연화부 갈마부 금강부 이런 형태로 분류해 세우기도 한다. 그에 따라 식재법 증익법 경애법 구소법 조복법 이런 형태를 주죈 방편으로 취하기도 한다. 즉, 생사고통 및 재난상황에서 일단 구제하고 중생이 소원하는 이익을 제공하고 공경과 사랑을 받게 하고 또 직접 친견해서 1 대 1 레슨도 받고 또 도저히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는 경우 항복시키는 극단 처방까지 동원된다. 금강부가 취하는 조복법을 제외하면 대부분 선교방편의 형태가 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수행자가 상대하는 중생의 상황에 따라 달리 취하게 되는 방편들이다.
수행자가 상대하는 중생의 상태가 낮을수록 수행자가 취해야 할 방편이 힘들고 어려워지게 된다. 반대로 중생의 상태가 높을 수록 수행자가 취해야 할 방편은 가장 표준적이고 원칙적인 형태가 된다.
반대로 말하면 가장 표준적이고 원칙적인 방안은 일반적으로 대부분 취해 행하기 어려운 형태가 된다. 그런 경우 수행자가 이에 맞추어 또 수행에 이끌게 하는 보조 수단 방편이 더 많이 동원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수준이 낮은 중생을 그런 방편으로 제도하려면 거꾸로 수행자는 다른 경우보다 훨씬 더 수행이 강하고 길고 깊어야 한다. 이런 사정이 있다.
현실에서 비유를 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학생이 이미 자신이 알아서 어떤 분야에 대해 연구를 열심히 행하는 상태라고 하자. 학생이 대학원생인 경우와 그와 같다. 그런 경우 이를 지도하는 이는 대강 연구 주제만 던지고 약간의 조언이나 점검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극단적으로 학생이 막 걸음마 정도를 떼고 말을 할 수 있게 된 유치원 생이나 초등학생이라고 하자. 이 경우 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때로는 똥싼 옷까지 빨고, 약까지 챙겨 떠먹이고 등하교 지도까지 해줘야 하는 경우가 있다. 선생님이 하는 일이 더 많아지게 된다. 그래서 이런 차이가 각 경우 달리 나타나게 된다.
유치원생에게는, 전체 교육과정의 다른 사정과 취지를 이해시키기 힘들다. 우선 당장 선생님을 신뢰하고 그날 그날 선생님을 따라 즐겁게 행하는 것이 요구될 뿐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각 과정에 들어가는 교재나 학습 내용은 전체적으로 일관되어 있다.
수행의 사정도 사정이 같다. 각 과정에 있는 입장에서는 그 사정을 헤아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각기 다른 내용은 전체적으로 그런 목표로 일관되어 있다. 다만 서로 상황이 다르면 서로의 각기 다른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 뿐이다.
여하튼 각 수행자는 자신의 사정에 맞추어 그와 관련된 내용을 찾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래서 그런 주제로 늘 테마 여행을 다녀야 한다. 설령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사정이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오늘날도 그 사정이 같다.
◆vrsw1615
◈Lab value 불기256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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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ablo-picasso-still-life-with-bust-and-palette
Artist: pablo-picasso https://en.wikipedia.org/wiki/Pablo_Picasso Title : still-life-with-bust-and-palette Info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우선 주장은 있지만, 그 주장에 치명적인 흠결이 있다. 옳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다. 진리판단 측면도 잘못이고, 가치나 규범측면도 잘못이다. 이 둘이 서로 관련이 있다. 처음 현실의 정체를 잘못 본다. 그래서 현실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나 그 방안도 엉터리다.
그것이 잘못임은 서로간의 다른 주장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또 같은 사정으로 함께 잘못임도 이해할 수 있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그 추종자가 빈약하다. 즉, 어떤 철학의 주장자는 있지만, 그것을 믿고 따라 실천하는 이들도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 역사적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그래도 여전히 철학 부분에서는 논의가 된다. 그런데 이것도 논의나 비판을 위한 입장이 대부분이다. 과거 철학자를 추종하기 위해 임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철학적 입장 가운데 가장 추종자가 많은 철학 학파가 있다. 독식철학 학파다.
물론 이들 독식철학 학파의 사상가들은 그 생각이 서로 다 다르다. 공통적인 철학적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철학을 하는 방식과 경향만 비슷할 뿐이다. 이런 독식철학 학파 사상가가 세계에 꽉 차 있다.
즉 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갖는 자신 나름의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 추구방법론을 펼치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서로가 서로간에 상대를 잘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가 상대를 비방하고 무시 멸시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래서 자신 입장에서 다른 이의 입장을 잘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시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리고 상대의 독특한 입장을 독식철학을 달리 표현해 개똥철학이라고 비하한다.
개똥도 약에 사용하려면 찾기 힘들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개똥은 약에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상대의 독특한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들은 옳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다. 그래서 어디에 사용해보려고 해도 쓸모가 없다. 그런데 그런 인생관을 갖고 있는 이 자체도 거의 보기 힘들다. 설령 대다수가 비슷한 생각을 갖는다해도 그것은 올바른 입장이 아니다. 그래서 그 가치가 개똥과 같다. 이런 입장으로 비하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입장이 세계에 가득하다.
나는 무엇보다도 돈이 최고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세상에 턱 임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그런 경우 개처럼 활동하지만, 정작 정승처럼 쓰는 사례가 거의 드물다. 마음은 벌고 싶지만, 벌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돈을 버는 방법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추가로 다음 방법론을 취한다.
절벽에 나무가지를 한 손으로 잡고 매달리고 있다. 손을 놓으면 떨어진다. 이런 자세로 현금을 대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돈을 번다. 또 하나 방법론이 추가된다. 자신이 하는 사업에 경쟁자가 있다. 그렇다면 전쟁 상태에서 사용하는 병법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를 파산시켜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돈을 벌고 살 수 있다. 이런 방법론을 취한다. 이런 인생관으로 무장한 가운데 현실에 턱 임한다. 이후 그가 매 순간 취하는 자세 행위는 모두 이에 바탕한다.
그런 경우 우선 현생에서 돈을 뜻대로 벌 수도 없다. 그리고 설령 번다하더라도 오래 유지할 수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문제가 있다. 이런 자세로 업을 행한 경우는 다음 생에는 거의 대부분 3 악도 행이 된다. 현생에서 누가 이런 이를 보아도 그 모습은 축생이나 아귀 지옥 중생의 형태다. 그래서 현생에서부터 ~ 벌레라고 부르게 된다. 조금 심하면 아귀같다고도 말하게 된다. 이런 경우 조금이라도 좋은 것이 보이면 서로 아귀다툼을 한다. 그러다가 서로 해친다. 그래서 지옥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평가하고 보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 경우 그 각 주체는 그런 평가대로 이후 생사과정에서 다음 생을그런 형태로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 입장은 우선 자신이 다음 생을 또 이어서 살아가야 한다는 자체를 모른다.
그래서 단멸관을 취하고 현생에만 초점을 맞추는 공통점이 있다. 현생 안에서도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고 임한다.
그래서 생각하는 초점 자체가 다르다.
늘 자신, 아니면 자신의 가족 정도만 초점을 맞추고 고려한다. 그 다음 당장 오늘, 아니면 길어야 3 년 5 년 정도만 고려하고 임한다. 그리고 수많은 측면 가운데 자신이 초점을 맞추는 몇 부분만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사업가라면 활동을 통해서 얻는 수익 이윤액만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희생시키려 한다.
그런데 사업가라면 최소한 이해하고 있어야 기본 회계 원칙도 모르고 임한다. 이익(이윤) = 수익(수입) - 비용 이런 기본 원리의 의미도 모르고 주먹구구로 임한다.
예를 들어 사업가가 어떤 사업활동을 하던 자신의 생명과 신체가 사용된다. 그래서 가장 먼저 자신의 생명 신체의 감가상각비용 정도는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업가 거의 대부분이 이 비용 자체를 계산하지 못한다.
자신의 생명이 우주보다 가치있다고 느낀다면 역시 같은 사정으로 500 조원보다는 가치가 있다고 여겨야 한다. 그렇게 놓고 숫자로 표현하면 자신이 어떤 활동을 하던 하루당 137 억원을 초과하는 감가상각비용이 소모된다. 그래서 위 원리를 이해하면 최소한 현금 137 억원을 초과하는 수익이나 가치를 얻어야만 겨우 손해를 면한다.
그런데 회계 원리를 설령 배웠다 해도 이런 가장 기초적인 원리조차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 직업이 회계사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직업이 회계사인 경우 다른 법인 회사의 회계 장부는 잘 살핀다. 그런데 그런 회계사마저도 정작 그런 활동을 하는 자신의 생명과 신체의 가치나 그 비용은 계산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활동을 계속하면 결국 축생과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리기 쉽다. 위험한 일이다.
이런 상황을 비유적으로 낙타나 곰, 벌의 상황에 비유하게 된다.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활동하기에 그런 상태가 된다. 결국 다른 이(욕계의 마 파순)만 즐겁게 해주면서 힘들게 짐(재산)을 싣고 이 시간대 이 공간에서 저 시간대 저 공간으로 옮겨 놓는 일만 열심히 하면서 생을 반복하게 된다. 또는 열심히 잔꾀를 부려 재주를 피운다. 그런데 결국 재주는 자신이 피우고 그 수익은 조련사(욕계내 마파순)이 갖는다. 그리고 그 재미는 관중만 맛본다. 이런 상태가 된다. 또는 꽃에 취해서 열심히 이 꽃 저 꽃 날라다니면서 꿀을 모은다. 그러나 결국 그 꿀은 양봉업자(욕계내 마 파순)이 다 취해 더 거두고 간다. 그런 가운데 매생을 그런 형태로 반복해간다.
이렇게 되는 사정은 각 주체가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망집을 일으켜 생사에 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망집 번뇌에 스스로 묶여 사역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또 그런 바탕에서 또 다른 이를 그처럼 묶어 사역을 시켜 나가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매순간 행할 도리 밖에 없다고 여기며 취하게 되는 반응과 행위를 해나가면 이런 상태가 된다. 그래서 욕계내 상황은 서로 번뇌에 묶여 서로가 서로를 사역시키며 또 스스로 사역당하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활동을 계속 하는 사정이 있다.
우선 자동차가 폐차가 되기 직전까지는 페차장까지도 잘 굴러간다. 그래서 자동차 구입비를 감가상각비용을 반영해야 함을 잘 모를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죽어서 장례식장이나 화장터에 들어가기 전까는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우선 의식하지 못하기 쉽다.
그래도 회계사라면 자동차나 건물 기계의 경우는 감가상각비용을 반영해야함을 이해한다.
그런데 회계사의 경우마저도 정작 다른 사람과 자신의 활동과정에 대해서는 이것을 고려하지 못한다. 이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아이들 동화에 돼지가 소풍가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돼지가 돌아올 때 인원을 센다. 그런데 매번 자신은 빼고 센다. 이런 동화가 있다.
그 사정이 있다.
우선 눈은 눈을 보지 못한다. 마음은 마음을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보게 되는 내용은 잘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자신 자체는 잘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나, 수익은 또 고려하지 못한다.
무언가 행할 때 자신이 느끼는 감각이나 감정 분별은 매 순간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는다. 그래서 이것은 잘 고려한다.
그런데 이 경우 이를 통해 다른 생명이 받게 되는 내용들은 의식하지 못한다. 또 이를 통해 자신이 되돌려 받는 과보도 잘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해 방안을 찾아내 임한다. 그래서 엉터리상태가 된다. 좁고 짧고 얕게 관하면 그렇게 해서 짧은 기간 동안은 자신이 어떤 기대한 결과를 얻는 것처럼 여긴다.
그런데 넓고 길고 깊게 이를 관찰하면 이는 매 경우 대부분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한다.
그래서 우선 단멸관을 잘 해결해야 한다. 왜 자신이 다음 생까지 고려해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도 한 생이 아니라 무량겁에 걸친 생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왜 이 두 내용이 서로 극단적으로 방향이 반대인지를 또 이해해야 한다.
매순간 가장 자신에게 좋은 것을 취한다고 하자. 매순간 이처럼 임해서 이것을 모두 합치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두 내용은 서로 정반대가 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못한다. 간단히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가을에 수확을 하려면 봄에 밭에 씨를 뿌리고 경작을 해야 한다. 밭에 뿌리면 당장은 씨가 썩어 없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종자가 되는 씨는 당장 먹을 수도 없다. 그리고 싹을 키우고 잡초를 뽑고 하는 활동 일체가 성가시고 당장 힘들다.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씨부터 먹을 수 있다. 일단 당장 배가 부르다. 그리고 경작 활동을 하지 않으면 당장 시간이 남고 편하게 놀 수 있다.
이 두 내용이 서로 방향이 극단적으로 다르다. 봄 가을의 사정만 놓고 보아도 봄만 놓고 생각하는 입장과 차이가 크다. 그런데 한 생만 고려하는 입장과 무량겁을 고려하는 입장은 그 차이가 훨씬 크다.
그런데 과연 한 주체가 이런 기간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가.
그것은 지금 한 단면의 정체파악에 바탕한다. 그리고 바로 앞 순간과 뒷순간의 관계파악에 바탕한다. 이 정체를 잘 파악하면 된다.
그리고 조금 길게 자신의 삶을 살펴도 마찬가지다. 갓난아이 - 소년 - 청년 -장년 - 노년 이렇게 삶의 여정을 살핀다고 하자. 매 순간 그 모습이나 그 구성부분이 다르다. 육체적 내용도 그렇고 그 정신적 내용도 사정이 같다.
매 순간마다 엉뚱한 내용을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임한다. 그런데 매 순간 그렇게 임하게 하는 배경사정이 있다. 각 주체의 근본 정신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각 정신의 구조와 기제가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배경사정이다. 그래서 그런 정신 구조와 기제를 바탕으로 망집을 일으킨 후 매순간 그런 내용을 스스로 자신과 외부 세상으로 여기고 취하게 한다. 이것이 망집에 바탕해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렇게 매순간 상을 취한 내용을 죽 이어 벌려 세우면 위 내용들이 되는 것이다. 또 그런 망집에 바탕하면 그런 사정으로 그런 내용들의 생멸과 생사가 그처럼 생사현실에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각 순간의 다른 내용을 모두 자신과 세상 내용으로 여기고 임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사정 전반을 잘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런 사정을 이해하면 같은 사정으로 자신이 장차 다음 생에 또 다른 형태로 살아가게 된다는 사정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이처럼 무량겁에 걸쳐 전개되는 이들 내용을 좋게 하려면 우선 기본적으로 인천교적인 가르침이나 수행에서 계의 덕목을 잘 성취해야 한다. 즉 그런 상태에서는 우선 3 악도에 묶이면 안 된다. 그리고 인간세상과 하늘을 오가는 상태가 일단 되어야 한다.
그런데 끝내 생사의 묶임에서 완전히 벗어나려 한다고 하자. 또 생사현실에 임해서도 마찬가지로 일체 생사현실 상황에서 니르바나 상태처럼 여여하게 임할 수 있으려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먼저 그 수행자 자신부터 현실의 본 정체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한편, 그런 망집을 일으키게 된 배경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는 다음 문제다.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래서 우선 현실이 꿈처럼 가짜이고 실답지 않은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 본래 얻을 수도 없다.
그런데 다시 다음 내용을 또 이해해야 한다. 현실의 각 내용은 가짜고 실답지 않다. 그렇지만 당장 거리에 서서 원하는 곳에 가고 원하는 음식 하나만 먹으려고 해도 그런 내용에 바탕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임하면 이들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게 여겨진다.
그래서 본래 가짜인 이들 내용이 외 현실에서는 그처럼 진짜처럼 실답게 여겨지게 되는가를 또 이해해야 한다.
이런 내용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인천교의 입장도 그 바탕에서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천교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은 기초적 입장이다. 일단 처음부터 그런 망집을 완전히 제거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매 생에서 축생이나 아귀 지옥중생 형태로 묶이게 되면 안 된다. 그래서 매 생 최소한 인간이나 하늘 중생이 되어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런 입장이다.
그런데 이런 입장조차도 현실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더 넓고 길고 깊게 이 문제를 관해야 한다.
그래서 3계 생사과정에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일단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끝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부터 비로소 수행의 필요성을 파악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앞에 나열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보물을 줍으려다. 손과 발이 다 짤리는 사례와 같게 된다.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 자체야, 일반 범부나 수행자나 부처님의 입장이 다르지 않다.
그런데 현실의 본 정체를 실상을 꿰뚫어 관하고 생사현실 안에서도 그 관계를 넓고 길고 깊게 관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그것은 다른 독식철학가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또 다른 독특한 독식철학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은 현실 어느 곳에서나 검증이 된다. 그래서 옳고 올바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저녁에 0뜨는 달이 가짜달임은 어떤 특수한 이만 특수한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눈으로 본 일체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 더 이상 얻어내지 못함을 확인하는 것도 특수한 내용이 아니다. 눈으로 본 일체를 소리나 향 맛 등 다른 영역으로 갖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 각 주체는 생사과정을 통한 시공간 여행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상태가 무량겁에 걸쳐 좋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선 매 생마다 활동을 통해서 가치있는 상태를 많이 성취해야 한다. 이익 = 수익 - 비용 계산식에서 비용은 무량한 마이너스로 나아가고 수익은 수익대로 무량한 플러스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실천해가면 당장 현생부터 그 수익을 거둔다.
그리고 또 그런 수행은 다음 생에도 역시 효용을 준다. 가장 기초적으로는 인천교적인 효용 마저도 그 안에 포함된다. 인간과 하늘을 오가면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는 상태가 된다.
그런 사정들로 인해 부처님의 독식철학은 다른 경우와 달리 시대를 이어 가면서 또 전 세계적으로 그 추종자나 제자가 줄을 잇는다. 물론 전 세계 인류가 그렇지는 않다. 그래도 사리분별을 넒고 길고 깊계 관하는 경우는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이 옳고 올바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결국 그것을 실천해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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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邊分別論 The Zhongbian fenbie lun; abbreviated as Zhongbian lun 中邊論 and also known as the Bian zhongbian lun 辯中邊論: the Madhya^nta-vibha^ga (Analysis of the Middle and the Extremes). A seminal Yoga^ca^ra text that is traditionally said to be a writing of Maitreya 彌勒 with Vasubandhu's commentary, but is considered by scholars to more likely be the joint effort of Asan%ga 無著 and Vasubandhu 世親. The special focus of this text is on the Yoga^ca^ra articulation of the meaning of mistaken discrimination 虛妄分別 vs. the meaning of emptiness of inherent nature 空性, with the aim of breaking attachment to extreme notions of emptiness 有 and existence 無. There are two Chinese translations: (1) Three fascicle translation by Xuanzang (T 1600.31.464-477). (2) Two fascicle translation by Parama^rtha 真諦 (T 1599.31.451a-463) [Muller-jpn-Eng]
二脇士 ニキョウジ (term) two attendants [Glossary_of_Buddhism-Eng]
HORNER, MS I. B.☞ “M.A. (Cantab.). English Pali scholar. Librarian, Newnham College, Cambridge, 1923-36. Student of Mrs Rhys Davids and succeeded her in 1942 as Hon. Secretary of the Pali Text Society. Succeeded Dr. W. Stede as President in 1960. Vice-President of the Buddhist Society, London.” Hump: 90 【book-page-336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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