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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29일 목요일

불기2565-07-29_중론-k0577-002








『중론』
K0577
T1564

제2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중론』 ♣0577-002♧




제2권






♥아래는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페이지 내용 업데이트 관련 안내]

❋본문
◎[개별논의]

○ [pt op tr]






○ 2019_1106_155855_can_ct36_s12 화순 계당산 쌍봉사



❋❋본문 ◎[개별논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中論卷第二
K0577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中論卷第二
K0577

○ [pt op tr]




『중론』 ♣0577-002♧






◎◎[개별논의] ❋본문

● 왜 생겨나는데 생겨남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또 그러니 어떡하라는 것인가.

단 하루만 뉴스를 보아도 매번 새로운 사건 사고가 발생함을 볼 수 있다.
또 수십년간 담배를 태우면서 연기를 관찰해온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단 한대의 담배만 태워도 없던 연기가 생겨남을 보게 된다.
그런 내용을 수십년간 경험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왜 이런 현실에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그래서 이 내용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억지로 그렇다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다시 의문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대부분 지금까지 그런 줄 알고 살아왔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임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경우 다시 다음처럼 엉뚱하게 방향을 잡고 임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즉 본래 생멸이나 생사, 그런 것 일체를 얻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지금부터 아무것이나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
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이렇게 해도 무방하고 저렇게 해도 무방하다.
생사현실은 모두 차별없이 공하고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종전에 망집에 바탕해 행하던 일들을 더 극단적으로 심하게 해도 무방하다.
또는 악행을 극단적으로 해나가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본래 죄와 복이 모두 공하고 머물바가 없기 때문이다.

망집 상태에서는 본래 대부분 자신 마음대로 제멋대로 하고자 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래서 그런 자세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경향이 많다.
그런데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고 한다.
그러니 그렇게 계속 살아간다해도 아무렇지도 않고 무방한 것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방향을 잡는 경우가 많다.

이들 내용은 일부는 맞다.
그런데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
그래서 왜 차별없이 공하다고 하면서, 현실에서는 수행방향을 제시하게 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내용을 그간 많이 반복했다.
그런데 처음에 생사현실에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부터 먼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그런 내용을 잘 이해한 바탕에서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함도 또 다시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부분들이 다 어려움이 많다.

○ 생멸상을 얻을 수 없음

『중론송』을 살피기전에 기초적으로 살필 부분이 많다.
이것은 과거에 『회쟁론』을 살필 때 살폈다.
그런데 과거 글들이 현재 정리 작업중이다.

과거 버전의 연구원은 대단히 길게 만연체로 글을 썼다.
그래서 문장 끊어 읽기를 잘 해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또 비슷한 말을 여러번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압축하고 체계적으로 잘 순서를 배열해야 한다.

다만 계속 정리작업이 늦어지고 있다.
그래도 이미 한 번 적은 내용은 조금은 여유가 있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천천히 정리해가고자 한다.

꽃 08pfl--image/꽃의핌과생멸.jpg
[IMG6] [그림] 꽃 08pfl--image/꽃의핌과생멸.jpg
- 참고 - 잡아함경해설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k0650-t0099-001-01.html
그림에 약간 특수한 장치를 하였다. 꽃이 핀 원 부분을 클릭하면 위 사진이 원래 제시된 위 링크 부분으로 옮겨 간다. ( 다만, 테스트해보니 pc 에서만 된다 )

다음 부분도 참조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은 하나같이 아직 정리가 완전히 마쳐지지는 않았다.
『회쟁론』
관련부분
★★★
[p]불기2561-09-22_회쟁론_001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09-22001.html

[p]불기2561-12-24_회쟁론_001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12-24-001_27.html
★★★

이번에는 「관삼상품」을 살핀다.
여기서 3 상은 생주멸을 말한다.
즉, 생겨난다, 머문다, 소멸한다를 의미한다.
이들은 있고 없음이란 관념을 합해 만든 관념이다.

없다가 있게 되는 것을 생겨남이라고 말한다.
있다가 계속 있는 것을 머묾이라고 말한다.
있다가 없게 되는 것을 소멸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어떤 것의 생겨남, 머묾, 멸함이 있다고 여긴다.

중관론에서는 이런 것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이런 것들은 '얻을 수 없음'은 '있고 없음'을 떠난다는 뜻이다.

다만, 이는 현실에서 이런 관념을 일으키지 못함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관념으로 가리키는 감각현실을 얻지 못함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본 바탕 실재에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먼저 『중관론』에서 밝히고자 하는 초점부터 먼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무언가 있고 없음을 따지게 되는 3 가지 영역이 있다.
본 바탕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내용이 그것이다.

이것을 일단 # - ● - □ 이렇게 구분해 표시해보자.
실재 # - 감각현실 ● - 관념내용 □

이들은 각각 그 특성과 내용이 다르다.
그리고 이들 내용이 매 상황의 각 단면에 있다.

여기서 생주멸을 얻을 수 없음은 다음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이것을 문제삼을 때 이 내용은 관념내용 □ 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감각현실 ●을 일단 '가리킨다'.

예를 들어 꽃이 없다가 핌(생겨남)을 논의하려고 한다고 하자. 
또는 연기가 없다고 '생겨남'을 살피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우선 이런 내용은 관념적 내용 □ 이다.
관념적 내용 □ 인 경우에만 그것을 언설로 표현하고 논의해나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표현으로 가리키는 내용은 자신이 눈으로 보는 감각현실● 이다.

그런데 일단, 기본적으로 그런 감각현실●에서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 무상삼매해탈]

그런데 『중관론』에서 다루고자 하는 초점은 다음에 있다.

이들은 모두 한 주체가 현실에서 그 마음에서 얻어내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주체가 관계하지 않고도 있다고 할 본 바탕 실재가 다시 문제된다.
그리고 그런 실재가 무언가가 본 주제다.
그것은 또 생사현실 내용이 꿈과 달리 실다운 것인가에 논의 초점이 있다.

그래서 우선 다음을 문제삼게 된다.


생사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관념분별을 행한다.

어떤 이가 감각현실● 을 얻는다.
그런 상황에서 일정한 관념분별□ 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는 그런 관념분별 □ 이 실답다고 여긴다.
이 말은 그 관념분별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그처럼 있다'고 여기는 믿음이다.
즉 침대에서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여기는 것이다.

꿈에서 꾼 바다나 황금꿈이 실답지 않음은 그 꿈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바다나 황금꿈은 꿈꿀 때 그런 상황에서는 생생하게 얻는다.
그러나 꿈을 깨면 침대에서는 그런 내용은 얻지 못한다.
그래서 꿈은 비록 생생하지만, 그것은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그래서 먼저 이 구조를 잘 이해해야 한다.

지금 중관론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내용도 이와 같다.

생사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적어도 생사현실에서는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는다.
그러나 본 바탕 실재에서는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실답지 않다.
이런 내용을 밝히는데 논의의 초점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감각현실 ● 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 상황에서 일정한 관념분별 □ 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그렇게 관념분별□ 을 일으켜 얻는다.
그렇지만, 그 관념분별□ 은 우선 감각현실● 에서도 얻지 못한다.
또한 본 바탕 실재 # 영역에서도 얻지 못한다.

관념분별□ 은 감각현실 ● 이 아니다.
관념분별□ 은 또한 본 바탕 실재 #의 지위에 있는 실재내용#도 아니다.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위 내용은 다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관념분별□ 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감각현실● 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본 바탕 실재 #가 전혀 없다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다음이다. 
관념분별 □ 은 감각현실● 안에서 얻을 수 없다. [ 무상 ]
또한 관념분별 □ 이 본 바탕 실재 # 영역안에서 얻을 수 없다. [ 불가득 공]
또한 어느 영역에서도 그 관념분별 □ 을 일으키게 한 참된 진짜 내용인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 [ 무아, 무자성]

그래서 이 논의는 다음에 본 취지가 있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관념 분별이 있다.
무엇이 있고 없음을 따지게 되는 그런 내용들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밝히는데 그 취지가 있다.

즉, 현실에서 일정한 관념분별□을 그렇게 일으킨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영역에서 특히 본 바탕 실재#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런 내용을 일정한 조건 상황에서 그렇게 일으킨 것 뿐이다.
즉 침대에 누어서 꾸게 된 바다나 황금꿈과 그 성격이 같다.
그래서 그것은 비록 현실에서 일으켜 얻지만, 그런 사정때문에 실답지 않다.
이런 내용을 밝히려는데 취지가 있다.

즉, 관념분별이 실답지 않음을 밝히려면,
그것이 '다른 영역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관념분별 □ 이 본 바탕 실재 # 영역안에서 얻을 수 없음을 밝힘에 초점이 있다.

따라서 중관론에서는 다음을 밝히는데 초점이 있다.
그러그러한 관념분별 □ 은 본 바탕 실재 #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위와 같은 내용을 다음 내용으로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 그런 관념분별 □ 을 현실에서 일으키지 못한다. (X)
=> 그런 관념분별 □ 을 일으키는 감각현실 ● 자체를 얻지 못한다. (X)
그런 내용은 아니다.

중관론을 제시하는 입장도 위 사정은 일반인의 사정과 같다.
즉,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관념분별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처럼 그것을 실답다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즉 다른 영역, 특히 본 바탕 실재 영역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종이에 불을 붙이자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고 하자.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경험한다.
이 광경을 눈으로 관찰한다고 하자.

이 경우 눈으로 보는 모습이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보면서
일반적으로 연기와 재가 나타남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종이의 사라짐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이 경우 생겨남과 멸함이 있다고 함이 오히려 상식적인 입장에 적절하다.

일반적인 경우 위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자신이 눈을 떠서 일정한 감각현실 ● 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일정한 분별 □ 을 일으킨다고 하자.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후 그는 그가 분별한 내용 □ 이 우선 그런 감각현실 ● 부분에 있다고 잘못 여긴다.
더 나아가 그런 분별 내용□ 은 본 바탕 실재#에도 그처럼 있는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 부분들이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런 부분에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런 내용이 그처럼 그런 영역에 있다고 잘못 여기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여기므로 그것을 꿈과는 달리, 실다운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또 그렇게 여기기 때문에 그 내용에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매 상황에서 업을 행하게끔 된다.
그런 망집 상태에서는 각 상황에서 도저히 그런 업을 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렇게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러면 이후 그는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장 근본 원인이 되는 망집 부분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위 내용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현실에서 위와 같은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임하게 된다.
그 사정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예를 들어 현실에서 바위가 어디 있는가. 안경이 어디 있는가.
영희가 어디 있는가. 자신이나 자신의 몸이 어디 있는가.
이런 것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래서 일단 그렇게 문제되는 내용을 손으로 가리켜보기로 하자.

이 상황에서 대부분 손으로 가리킨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은 앞에서 ●로 표시한 감각현실● 이다.
그래서 일단 그런 부분에는 자신이 생각한 분별내용□ 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이런 망집을 갖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망집은 실재 영역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그런 감각현실 ● 이나 관념 □ 일체는 본 바탕 실재# 에도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실재 # 영역 사정이 그렇기에 자신이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 ● 과 분별 □ 을 얻는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생사현실 내용 일체를, 꿈과 달리, 실다운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본 바탕 실재 #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한편 감각현실 ● 을 놓고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위와 마찬가지 구조로 제시할 수 있다.
즉 다음과 같다.

감각현실 ● 은 현실에서 얻는다.
또 이를 바탕으로 일으키는 관념분별 □도 있다.

그러나 감각현실 ● 은 관념분별 □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 상무자성 ]
또한 감각현실 ● 은 본 바탕 실재 # 영역안에서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 불가득 공]
또한 어느 영역에서도 그런 감각현실 ● 을 얻게 한 참된 진짜 내용인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 [ 무아, 무자성]

즉 감각현실 ● 이나 관념 내용 □을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즉 그런 내용은 현실에서 얻지만, 그것은 꿈과 같은 성격으로. 얻는 것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꿈과 같음'은 현실 내용이 본래 본 바탕 실재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뜻한다.
즉, 본래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을, 다만 현실에서 그처럼 얻는 것임을 뜻한다.

그래서 그런 망집을 기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 일체는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 그래서 그런 것이 '실답게' 있다는 망상분별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탐욕 분노와 같은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 그리고 다시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망집]에 바탕해 업[행위]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 실답지 않은 생사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되면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 그래서 일단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 그러려면 우선 생사현실에서 만들어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행을 성취해야 한다.
=> 그리고 다시 생사현실에서 좋은 내용을 성취할 방안을 원만히 잘 성취해야 한다.
=> 그래서 결국 생사현실에서 수행덕목을 집착없이 원만하게 성취해야 한다.
=> 그러려면 그런 수행덕목도 실답지 않음을 다시 잘 이해해야 한다.
=> 그래서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한 가운데, 수행덕목은 원만히 잘 성취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본 논의는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함에 초점이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 □ 이 본 바탕실재# 에서 얻을 수 없음을 잘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념분별 내용□ 이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은 어떻게 밝힐 수 있는가.
우선 이에 대한 원칙적인 방안은 문제되는 각 내용을 직접 붙잡고 살펴보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대반야바라밀다경』 등에서 이미 제시되어서 이를 살폈다.

그런데 『중론』에서는 이에 대하여 다시 보조적으로 가정적 항변 방식을 취해 재차 살피게 된다.
이는 다음 사정 때문이다.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다시 고집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이는 현실에서 생활하는 과정에서 생사현실을 실답게 느끼게 되는 경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경우 이를 보충적으로 논파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양한 방식이 동원된다.
예를 들어 상대가 현실에서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데 그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내용들이 하나같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즉 그런 내용은 꿈과 성격이 다르다.
즉, 생사현실에서만 얻는 내용이 아니다.
그런 관념분별 □ 들은 다른 영역에서도 얻을 수 있다.
특히 본 바탕 실재 #영역에서도 그처럼 있는 내용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더 나아가 그런 관념 내용 □에는 참된 진짜 내용으로서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래서 침대에서 꾸는 바다꿈과 같은 성격이 아니다. => 실다운 내용이다.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하자.

『중론』은 이런 상대의 주장을 논파시키는 데 초점이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보조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즉, 일단 그런 상대 주장을 '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즉 임시적으로 일단 논의 대상으로 올려 놓는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다시 보충적으로 제시해 논파하는 것이다.

관념분별 □ 은 현실에서 각 주체가 그처럼 일으켰다.
생주멸이란 관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관념분별 □ 이 실재 영역 # 에 그대로 있다고 한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문제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곤란함을 살피는데 취지가 있다.

그 문제를 밝히는데는 다양한 방식이 동원될 수 있다.

우선 그런 관념이 자체적으로 서로 모순됨을 밝혀 비판할 수도 있다.

한편, 그런 내용은 자체적으로 실재한다고 볼 수 없는 사정을 밝혀서 이를 깨뜨릴 수도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우선 어떤 주체가 일정한 사정에서 일정한 관념은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다. 
어떤 관념적 내용을 단순히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관념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전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도 관념영역에서는 제멋대로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도깨비뿔에 붙은 바퀴 이런 것과 같다. 
이들은 그런 관념영역 밖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기에 본질적으로 희론적 내용이 된다. 


그런데 이와 달리, 그것을 실재한다고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  각 경우 핵심적 차이는 다음이다. 

우선 그 내용이 희론적으로 단순히 관념영역에서만 불러 일으킨 내용이 아니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관념영역 밖에서도 그런 내용이 있고, 또 그처럼 얻어져야 한다. 
한편,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것이 실재 영역에서도 얻어지는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내용은 그런 주체나 다른 내용과 관련되지 않고도, 자체적으로 그처럼 그대로 실재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런 경우라면 그 내용은 꿈과는 그 성격이 달라서, 대단히 실다운 내용이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니, 그런 내용은 다른 일정한 내용과 관계가 되어야만 일으켜 얻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그 내용은 그런 사정으로 위와 같은 실재 영역의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일정한 내용과 관계가 된다고 하자.
그것은 그런 내용과 관계를 떠나면 얻을 수 없음도 함께 말하는 것이다.
또 그렇다면 그것은 꿈과 같은 성격임도 함께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관념분별이 어떤 것과 관계되어서만 성립하는 것임을 빍혀 낸다고 하자.
그러면 그 관념분별이 실재영역에 있음을 깨뜨린 것도 된다.
그래서 상대의 그런 망집을 깨뜨리려면 먼저 상대가 주장하는 관념을 붙잡아 그런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이들은 원칙적인 방식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다.
상대가 주장하는 관념적 내용별로 그런 부분을 하나하나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조적인 방안이 된다.


생주멸 3상이 실답게 있음을 깨뜨릴 때도 마찬가지다.
『중론』에서 이것을 본생과 생생의 관계로 놓고 살펴서 깨뜨린다.
그래서 이들 관념은 그런 관계를 떠나서 실재하는 내용이 아님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살피면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A 라는 내용이 실재한다고 누군가가 주장한다고 하자.
이는 A 라는 내용이 어떤 주체의 주관과 관계없이,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다른 것과 관계를 떠나서도 그대로 그처럼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A 라는 내용은 B 라는 내용이 반드시 있어야만 성립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B 라는 내용이 없으면 A가 없게 됨도 의미한다.
즉 B 가 있으면 A 가 있다.
그런데 B 가 없으면 A 가 없게 된다.
그래서 그것은 B 에 의존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A 는 'B 와의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실재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 A 는 실재 영역에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다.

이제 「관삼상론」에서 살펴는 '생주멸'을 놓고 보자.
현실에서 다양한 생활경험을 하는 가운데 생주멸에 대한 관념을 일으킨다.
이미 이 사정을 보았다.

불을 종이에 붙이니 종이는 사라지고, 연기는 나타난다.
그래서 여기서 '생주멸'이란 관념을 세우게 된다.
그런데 누군가 여기서 그런 생주멸이 '본 바탕 실재 영역에도' 그처럼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부분부터 잘못된 망상분별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은 곧 그런 관념분별이, 꿈과 달리, 실다운 내용임을 내세운 것이 된다.
이는 그런 내용이 관념 영역 외로, 실재 영역이나, 감각현실 영역에 그처럼 있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다시 그런 망집에 바탕한 업을 일으키는 배경이 된다.
그러면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이를 예방하려면, 이런 망집을 일으키는 부분부터 근본적으로 잘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고자 한다고 하자.
그러면 꿈은, 꿈에서는 얻지만, 현실에서 얻지 못함을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일으키는 이들 관념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들이 본 바탕 실재 영역에서는 얻지 못함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 문제가 논의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생주멸이라는 관념내용을 일으킨 경우,
이에 그치지 않고, 그런 내용이 '실재 영역에도 그대로 있다; (=실답다')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이 경우 이런 고집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이것이 중론에서 논의하는 초점이다.

그런데 우선 생주멸하는 내용[=유위법]을 놓고 살펴본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전제 때문에=즉, 그것을 생멸하는 것이라고 하였기에) 그런 어떤 a는 생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A 는 '생멸'을 떠나서는  제시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한편, 생멸을 말하려면, 또 반대로 그처럼 생멸하는 그 무엇 A 를 전제해야 한다.
즉, 그런 무엇, A 없이, 그냥 막연히 생주멸을 세우기 곤란하다.

그래서 여기서도 그 무엇 A 과 '생멸'이란 관념이 서로 의존하는 관계를 살필 수 있다.
즉, 이들 관념은 관념영역 안에서 그런 관계에서만 성립시키게 되는 내용들이다.

또 사정이 그렇다면, 이들 내용은 이런 관계를 떠나 실재하는 내용도 아닌 것이 된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실재한다는 주장을 깨뜨린 것이 된다.



그런데 이제 「관3상론」에서는 다시 '생주멸' 이란 관념자체의 '실재'여부가 문제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이런 '생주멸'이란 내용이 본 바탕 실재 영역에서도 그대로 실재한다고 주장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생주멸이란 내용도 앞과 같은 관계가 필요하다.
즉, 이들 내용도 그런 관계에서만 성립시킬 수 있는 관념적 내용일 뿐이다.

물론 앞처럼 살피려면 먼저 경우수를 나눠야 한다.

즉 처음부터 그런 내용이 생멸을 떠난 내용(무위법)이라고 하는 경우도 나열해서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 경우는 자체적 모순이 발생함을 통해서 깨뜨리게 된다.
이 경우는 풀어 말하면, 생멸함이, 생멸을 떠난 내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생멸하는 내용(유위법)이라는 경우를 살핀다고 하자.
그러면 그 내용[본생]과 그 생멸[생생...]이 다시 서로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어느 경우에도 그런 내용은 실재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을 밝히게 된다.

결국, 그런 생주멸이란 내용은 단순히 생사현실에서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그런 영역 밖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래서 실답지 않다.
=> 그래서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업을 행하려 해서는 안 된다.
=> 그런 망집을 떠나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원만히 행해야 한다.

이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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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uvh1271
◈Lab value 불기256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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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ys-bermu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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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lvie Vartan - Bye Bye Leroy Brown



♥단상♥펜으로 노래하다.

하루 종일 한증막에서 지내면 지치기 쉽다.
요즘 온도계를 보면, 체온과 거의 비슷하다.
여름과 겨울 가운데 어느 계절이 더 힘든가.
그래도 여름이 조금 낫다고 여기게 된다.
노숙하는 입장에서는 여름에는 그래도 밖에서 잠 잘 수도 있다.
그런데 겨울은 곤란하다.

나중에 시원한 거리를 다닐 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 때도 오늘 너무 더워서 힘들던 오늘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덥다고 누어서만 지내는 이에게는 결코 해가 뜨지 않는다.
모 배우가 영화에서 후배 위하는 마음으로 해준 말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나중에 잊혀지기 쉽다.
그러면 지내기 편한 날씨가 되어도 그 가치를 잊어버리기 쉽다.
더운 지금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이렇게 더워서 좋은날에도 그 가치를 모른다.
영하 십도 추위에 공원에서 떨며 지내던 그 상황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정이 현실 생사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3 악도에서 지내던 기억을 잊었다.
그래서 그 부작용이 심하다.



생사현실에서 이런 자세 차이가 중요하다.
생사현실을 대하는 자세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면 생사현실 어느 상황에서도 지극히 평안하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극심한 가난, 질병등과 같은 경우도 이에 포함된다.
그런데 반대로 자세를 잘못 취한다고 하자.
그러면 반대로 지극히 좋다고 할 상태,
건강하고 풍요를 누리는 상황조차도 고통으로 여기고 대하게 되기 쉽다.

이것이 수행에서도 문제된다.
본래 생사현실에서 생멸과 생사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런 사정을 이해하면
생사현실은 곧 그런 생사고통을 떠나 있는 니르바나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 생사 즉 열반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를 반대로 대한다고 하자.
그래서 망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본래 얻을 수 없는 생사나 생멸 고통이 생사현실에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면 본래 생사고통을 떠나 있는 니르바나 상태를 대하면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명료하게 매순간 겪게 된다.
또 그런 가운데 장구한 무량겁을 헤메 돌아다니게 된다.

이 차이가 대단히 크다.
본래 실답지 않은 내용이 어떻게 이런 큰 차이를 발생시키는가.
본래 실답지 않은데 그 주체가 망집을 일으켜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답지 않은 내용을 붙잡고 그것을 매 순간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그것 뿐이다. 그런데 그 상태로 무량겁을 지내게 된다.

이미 이전글에서 이 사정을 밝혔다.
이것을 수행과정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말처럼 그것이 쉽지 않은 배경사정이 있다.
처음 문제를 잘못 대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매 상황을 대하고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번에 살피는 『중론송』은 이 첫 문제와 관련이 깊다.
그런데 보조적인 가정적 항변 성격을 갖는 논의다.
즉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 보충적으로 살피게 되는 논의다.
즉 망집 증상이 아주 심하고 고집이 드센 상대에게 보충적으로 제시되는 논의다.
그러나 망집 증상이 심한 상태에서는 『중론』에서 제시하는 논의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하나의 단면을 붙잡고 그 정체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잘 되면 『중론송』 논의는 모두 다 같은 취지의 결론을 여러 형태로 설명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7/2565-07-29-k0577-002.html#1271
sfed--중론_K0577_T1564.txt ☞제2권
sfd8--불교단상_2565_07.txt ☞◆vuvh1271
불기2565-07-29
θ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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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 10호의 하나. 성문 아라한과 구별하기 위하여 ‘아라하’라고 하나 원어의 뜻은 같음.

답 후보
● 아라한(阿羅漢)
아비달마(阿毘達磨)

아상(我相)
아아소(我我所)
아이다시사흠바라(阿夷多翅舍欽婆羅)
아함(阿含)
악인(惡因)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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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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