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에 부처님께서 바라나에 계셨다. 다섯 비구가 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러 비구는 어떤 종류의 약을 간직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 비구들은 진기약(陳棄藥)을 간직하는 것을 허락하며, 나아가 유리(流離) 역시 간직하는 것을 허락한다.” 병을 치료하는 약은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오전[中前]에 복용하는 약은 오후[中後]나 7일이나 종신(終身)토록 복용할 수 없다. 오후 약은 오전에도 역시 복용하나 종신토록 간직할 수 없다. 오후 약에는 7일 동안 간직할 수 있는 것도 있고 간직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종신약 중에는 오전, 오후 내지 7일 모두 복용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약(藥)건도 중에 자세히 밝힌다. 바라문의 아들 시라(尸羅)는 8종의 장(漿)을 가지고 부처님께 보시하였다. 첫째 암라장(菴羅漿), 둘째 첨파장(瞻婆漿), 셋째 조장(棗漿), 넷째 괴미장(壞味漿), 다섯째 다장(多漿), 여섯째 사림비장(沙林毘漿), 일곱째 파유사장(破留沙漿), 여덟째 감장(甘漿) 등이다. 이러한 장들은 부처님께서 비구들이 복용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부처님께서 술에 관해 제정하신 것은 사제(莎提) 비구가 술을 마셔 취한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것을 정하여 술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존자 미사새(彌沙塞)가 말하였다. “사제 비구가 조금씩 술을 마셔 오래도록 몸을 길렀는데, 출가 한 뒤에는 마시지를 않아서 몸이 조화롭지 않기에 여러 비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병자는 항아리 위에서 그것을 냄새 맡는 것은 허락한다. 만약 차도가 있으면 냄새 맡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냄새를 맡아도 차도가 없는 사람은 술로 몸을 씻는 것을 허락한다. 다시 차도가 없으면 술을 밀가루와 섞어 술떡을 만들어 먹고, 만약 또 다시 차도가 없으면 술에 몸을 담그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셨다” 존자 가섭유(迦葉惟)가 말하였다. “어떤 장(漿)은 처음에는 마시는 것이 적당하나 나중에는 적당하지 않다. 어떤 장은 처음에도 마시는 것이 적당하고 나중에도 마시는 것이 역시 적당하다. 어떤 장은 처음에도 마시는 것이 적당하지 않고 나중에도 역시 마시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 어떤 장은 처음에는 마시는 것이 적당하지 않으나 나중에는 마시는 것이 적당하다. 부처님께서 비사리에서 정하신 바와 같이 누룩은 먹을 수 없으며 스스로 발효한 술은 마시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 존자 가섭유가 말하였다. “여덟 종류의 술은 마실 수가 없으니, 누룩으로 빚은 술은 마실 수가 없다. 또 밀가루로 술을 빚어 비록 갖가지 약을 넣었더라도 또한 마실 수가 없다. 또 술이 발효하여 능히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은 마실 수 없으며, 술이 비록 달더라도 능히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은 역시 마실 수 없다. 청주(淸酒)도 마실 수 없고 소초주(小酢酒)도 마실 수 없으며 세말반주(細末飯酒)도 마실 수 없고 서타주(書陀酒)도 마실 수 없다. 이와 같은 등의 술은 많으나 모두 다 마실 수가 없다.” 존자 살바다가 말하였다. “창포와 복숭아와 곡식을 사용하여 술을 빚어도 마실 수가 없으며, 꿀을 사용하여 술을 빚어도 마실 수가 없고, 곡식을 부수어서 술을 만들어도 마실 수가 없으며, 갖가지 여러 과일들을 가지고 술을 만들어도 마실 수 없다. 이와 같은 일체의 술은 마실 수가 없다. 이것을 마시기에 적당하지 않은 술이라고 이름한다.” 나막신을 신은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지 않으셨으니, 야사(耶奢) 동자가 바라강[波羅河]을 건너서 금 나막신은 벗어 버리고 갔는데, 뒤에 이 나막신을 보고 곧 야사가 부처님께 나아가 출가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에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계셨는데 여섯 무리의 비구가 높은 굽의 나막신을 신고 선방에 들어왔다. 나막신의 소리가 높고 커서 좌선하는 비구가 이 소리를 듣고는 적군의 말이 도달하여 큰 황포(惶怖)함을 부리는 줄 알았다. 부처님께서 들으시고는 이를 인해 계를 지으셨다. “지금부터 비구는 일체의 나막신을 신을 수가 없으나 병자와 화장실에 오를 때는 제외한다.” 이를 이름하여 나막신을 인연한 것이라 한다. 이때에 자를 유로노(流盧奴)라고 하는 장자가 있었다. 그가 처음 태어날 때 아버지가 기뻐한 까닭으로 20만억 금전을 보시하였기에 곧 20억이라고 이름하였다. 이 사람은 굉장히 큰 부자로서 태어난 이래로 흙을 밟지 않았기에 나중에 부처님께 출가하여 부지런히 닦고 배워 아라한과를 얻었으나, 길을 갈 때 발에 피가 흘러 고통스러웠다. 부처님께서 그가 아주 어려서부터 부유하고 안락해서 발로 흙을 밟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고는 한 겹으로 된 가죽신을 신는 것을 허락하시니, 유로노가 곧 세존께 아뢰었다. “제자는 능히 뛰어나게 부귀한 이와 같은 가업(家業)도 버렸는데 어찌 다시 한 켤레 가죽신에 탐착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세존께서 모든 비구가 신도록 허락하신다면 제자는 당연히 신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로 인해 비구가 가죽신을 신는 것을 허락하셨으나 가죽신 신은 이는 법을 듣지 못하게 하셨으며, 병자는 가죽신을 신고 법을 들을 수 있게 하셨다. 어떤 비구가 가죽신을 신고 탑으로 들어오니, 부처님께서 곧 계를 제정하셨다. “가죽신을 신고 탑에 들어오거나 탑 주변에 있는 것과 나아가 부라(富羅)를 신고 탑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노라.” 이러한 까닭은 그 땅의 여러 사람이 가죽신이나 부라를 신으면 모두 교만심을 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고로 부처께서는 신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를 가죽신을 신는 인연이라고 한다. 아반제국(阿盤提國)은 추운 연고로 가죽을 간직하는 것을 허락하셨으나 다섯 종류는 제외하였으니, 첫째 사자 가죽, 둘째 곰 가죽, 셋째 말곰 가죽, 넷째 용 가죽, 다섯째 사람 가죽이다. 이와 같은 등의 가죽은 모두 간직할 수 없고, 마땅한 것이 아니다.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코끼리 가죽ㆍ말 가죽ㆍ낙타 가죽ㆍ소 가죽ㆍ나귀 가죽으로, 이와 같은 것들을 축적하는 무리가 많았다. “출가인의 법에는 술을 큰 옹기 안에 담거나 술을 큰 구리병에 담아 간직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등은 사람들이 싫어하고 의심을 하니 간직하지 말라.” 이때에 비사거록(毘舍佉鹿)의 어머니가 승려에게 여섯 가지 물건을 보시하였는데, 하나는 시간을 재는 좋은 상(床)이고, 둘은 구리 바리[銅盔]이고, 셋은 등잔대이고, 넷은 부채이며, 다섯은 빗자루이며, 여섯은 큰 구리그릇이다. 여러 비구가 의문이 생겨서 부처님에게 여쭈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큰 구리그릇은 마땅히 받지 말고 나머지 다섯은 받아라.” 한 기와장이가 있어 커다란 기와 그릇 등을 만들어 가지고 스님들께 보시하였다. 스님들이 의문이 생겨서 부처님에게 여쭈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큰 그릇을 제외하고 다른 것은 모두 받아라.” 이때에 두 상인이 있어 기원정사로 가는데 멀지 않았다. 한 명은 부처님의 말씀을 믿었고 다른 한 명은 믿지 않았다. 믿지 않은 자가 말하기를, “사문 석자는 탐내는 마음이 있는 까닭에 큰 그릇을 많이 축적한다”고 하자, 믿는 사람이 말하기를, “사문 석자는 탐내는 마음이 없고 큰 그릇을 축적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금전 5백을 걸었다. 두 사람 모두 기원정사에 도착하여 여러 단월들이 큰 그릇을 여러 스님들께 보시하는 것을 보았다. 믿는 사람은 같지 않다 하고는 5백 금전을 갚았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들으시고는 곧 제정하셨다. “비구들은 지금부터 술을 담는 큰 그릇을 간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두 상인은 다시 다른 때에 이치를 다투었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말하기를, “사문은 이제 탐심이 많아서 아직도 큰 그릇을 축적한다”고 하였다. 믿는 사람이 말하기를, “사문은 지금 큰 그릇을 모으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같이 논쟁하였는데 다시 천전(千錢)을 걸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커다란 그릇을 많이 가지고 와서는 사문에게 보시하였는데, 여러 비구들이 모두 받지 않았다. 믿지 않는 사람은 도로 빚 천전을 갚았다. 이것을 그릇을 간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때에 바난타(婆難陀) 석자가 지팡이 끝에 양털을 묶어서 짊어지고 가고 있었다. 단월이 보고는 웃으면서 “털을 팔 것입니까?”라고 짐짓 물었는데, 난타가 “팔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와 같이 전하여져 세존의 귀에 들리자, 세존께서는 곧 제정하셨다. “지금부터 비구가 지팡이 끝에 양털을 묶어서 어깨 위에 메고 가는 것을 허락지 않노라.” 지팡이를 잡은 사람을 위해서는 설법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지팡이 끝에 쇠나 사슴뿔을 응당 붙이는데 왜냐하면 지팡이가 닳을까 걱정해서이다. 여러 비구가 물들이는 풀을 삶는 법은 3척의 지팡이를 만들어서 그 끝에 풀을 묶고 끓어 넘칠 때에 지팡이로 그것을 휘젓는다. 만약 물들이는 풀이 익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릇에 물을 뜨고는 지팡이를 잡고서 물들이는 풀을 찔러 즙을 낸다. 걸러서 물을 뜬 그릇 중에 물들이는 풀이 익었으면 즙은 물 아래로 곧장 가라앉는다. 만약 익지 않았으면 물 위로 뜬다. 익게 되면 깨끗하게 걸러서 옷을 염색하고, 염색하고 나서 옷을 말리고자 할 때는 평지에 놓아둔다. 마땅히 네 모퉁이가 오그라들지 않게 하고 옷을 겹치려고 할 때는 당연히 묶어서 축(軸)위에 놓고는 평평하게 한다. 발란타(跋難陀) 석자가 발우주머니에 발우를 담고는 지팡이 끝에 꿰어 머리에 이고 갔다. 여러 대신들이 멀리서 보고는 왕이 깃발을 높이 들고 도착했다고 생각하여 모두 그를 멀리 피했는데, 도착하고서 비로소 그가 사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러 신하가 모두 그를 싫어하니, 부처님께서 들으시고 곧 정하셨다. “비구가 지팡이 끝에 바랑을 꿰어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노라.” 여섯 무리의 비구가 대나무 지팡이를 간직했는데 속인들은 그를 보고 모두 싫어하며 말하기를, “사문이 국왕이나 대신과 차이가 없구나” 하였다. 부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곧 제정하셨다. “만약 병든 비구가 인연이 있어 마을에 들어갈 때에 지팡이가 필요하다면 스님들께 백이갈마를 구해야 한다. 스님들이 갈마하면 발우주머니를 지팡이 끝에 꿰어 갈 수가 있으나, 갈마하지 않으면 그럴 수 없다.” 이때에 세존께서 왕사성에 계셨다. 어떤 비구가 니단림(尼檀林) 속에서 밤중에 가고 있었는데, 마음에 독사나 벌레가 쏘는 것 그리고 여러 악한 짐승 등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것을 인하여 부처님께 아뢰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 비구가 밤에 무서운 곳을 갈 때에 주석 지팡이를 움직여 소리를 내어서 여러 악한 독벌레가 멀리 가게 하여라.” 이와 같이 자세히 알라. 지팡이에 대해서 꾸짖는 것은 가책(呵責)갈마, 빈출멸빈(擯出滅擯)갈마, 의지(依止)갈마, 참회(懺悔)갈마, 승불견범사자(僧不見犯事者)갈마, 미수참회(未受懺悔)갈마, 불사악견(不捨惡見)갈마 등의 이와 같은 것들은 백사갈마를 짓되, 별주(別住)를 행하는 6일 마나타(摩那埵)나 이어위반(異語違返)이나 복발불어(覆鉢不語)를 주니, 다섯은 백사갈마이고 둘은 백일갈마이다. 이를 이름하여 빈벌(擯罰)이라 한다. 무엇을 발우주머니라 하는가? 걸식할 때에 이르러 발우를 응당 안치하되, 발우주머니 안에 두어야 한다. 여러 단월이 국과 밥을 보시하면 손으로 주머니를 잡아 발우 안에 쏟아 붓는다. 국과 밥이 비록 넘쳐 발우 밖에 나와서 주머니를 더럽히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단지 뜨거운 것이 올 때에 손을 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제자가 있어 걸식할 때에 응당히 발우에 채워 화상 아사리에게 준다. 이때에 왕사성에 큰 장자가 있었는데 전단향 나무를 얻고 장인을 고용하여서 전단 발우를 만들고는 보석을 이용하여 주머니를 만들었다. 정원에 높은 깃발을 세우고 그 주머니를 깃발 머리에 걸고는 말하였다. “만약 왕사성 중에 신통력이 있는 사문 바라문으로서 능히 날아서 손을 펴 그것을 취할 수 있으면 취한 자가 그것을 얻을 것이다.” 외도 부란나가섭이 장자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말하였다. “나는 진정 큰 아라한이니 신통력으로 드러내어 그것을 취할 것이다.” 여러 육사 외도가 각각 신통력을 발휘하였으나 그것을 취할 수가 없었다. 이때에 목련이 큰 돌 위에 머무르면서 거닐고 있었는데 빈두로(賓頭盧)가 목련에게 말하였다. “대덕이시여, 부처님 제자 중에서 신통력이 제일이시니 능히 사자후로써 신통력을 드러내어 그 발우를 취하십시오.” 목련이 답하였다. “신통력을 드러내는 것은 즐겁지 않으니 취할 수가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또한 대덕은 대아라한이고 신통 제일이라고 하셨으니, 능히 사자후를 하며 이제 그것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빈두로가 곧 신통력을 드러내어 큰 돌 위에 올라가서 허공을 타고 왕사성 둘레를 도니, 보는 사람들이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돌이 만약 떨어진다면 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장자가 이때에 높은 누각 위에 있으면서 빈두로가 신통력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만족하고는 손을 깍지 껴서 합장하고 빈두로를 향해 예를 올리고 말하였다. “제자는 이미 존자에게 발우를 공양했으니, 그 발우를 취하십시오.” 빈두로가 그것을 취하자, 장자는 집안으로 들어오기를 청하였다. 발우를 취하여 갖가지 음식을 담아 빈두로를 공양했다. 여러 비구가 이것을 인하여 모두 세존께 말하였다. 세존께서는 빈두로를 불러 말하였다. “너는 실로 저 발우를 위해 신통력을 내었는가?” 빈두로가 세존께 대답하였다. “실로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갖가지로 빈두로를 꾸짖었다. “어찌하여 저 나무 발우를 위하여 여러 재가인에게 신통력을 드러내었는가? 비유하자면 음란한 여자가 반 푼의 돈을 위해서 사람의 형체를 보여준 것과 같으니, 너도 이와 똑같다. 지금부터 전단으로 만든 발우를 간직할 수 없으며 또한 나무 발우를 위해서 신통력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노라. 만약 여러 외도를 항복받기 위해서라면 신통력을 드러낼 수 있다.” 어째서 주머니를 간직하게 하는가? 사미와 정인(淨人)이 같이 바깥으로 다니다가 과일을 얻고서 좋아하는 자는 스스로 먹고 싫어하는 사람은 스승에게 주었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들으시고는 여러 비구들로 하여금 발우주머니를 만들게 하여 과일을 얻으면 그 안에 넣고 입구를 단단히 묶어서 스스로 그것을 지니고는 사찰 내에 이르러 손을 씻고 법답게 받아먹게 하셨다. 존자 살바다가 말하였다. “어떤 비구가 정인과 함께 걸식할 때에 그 정인이 음식을 들고 신경을 쓰지 않아서 외도가 독약을 집어넣었는데도 이를 알지 못했다. 비구는 머무는 곳에 이르러서 먹고는 곧 죽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인하여 여러 비구에게 교시하기를, ‘여러 비구는 지금부터 각자가 발우주머니를 만들어서 발우를 담아 스스로 그것을 지녀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런 여러 인연으로 인하여 주머니를 간직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만약 어떤 늙고 병든 비구가 길을 따라 가다가, 지팡이가 필요하거나 혹은 도중에 갖가지 독벌레의 어려움이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지팡이를 잡는 것을 허락하셨고 지팡이 끝에 쇠 또는 구리 또는 뿔 등을 붙인 지팡이를 허락하셨다. 마늘은 병든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먹을 수가 없었다. 이때에 세존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면서 대중 속에서 설법하실 때 어떤 비구가 마늘을 먹고는 부처님 계신 곳을 멀리해서 대중들의 바깥에 앉으니, 부처님이 아난에게 물으셨다. “저 비구는 무슨 이유로 혼자 멀리 따로 앉아 있는가?” “저 비구는 마늘을 먹어서 그 때문에 따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가 잘 설법하고 있는데 저 사소한 일 때문에 법을 듣지 못하는구나.” 그리고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으로부터 병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늘을 먹을 수가 없느니라.” 한때에 사리불이 풍병을 얻었는데 의사가 마늘을 복용하도록 하자, 곧 부처님께 나아가 아뢰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병자는 복용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때에 세존께서 비사리에 계셨는데 성 밖에 한 단월이 마늘을 크게 재배하고 있었다. 투라난타(偸羅難陀)라는 비구니가 자주 그 마늘 밭 주변을 지나 다녔다. 그 단월은 선심(善心)이 복덕이 되기 때문에 물어보았다. “존자께서는 마늘을 먹지 않습니까?” “본래는 먹을 수가 없지만, 마늘을 먹으면 음식을 내려가게 하는 데 심히 좋습니다.” 단월은 곧 그것을 보시하고 여러 승려들에게 하루에 다섯 쪽의 마늘을 줄 것을 허락하였다. 투라난타는 곧 비구니중에게 말하였고, 그 단월은 하루에 스님에게 다섯 쪽의 마늘을 허락하였다. 스님이 만약 필요로 하면 사미니가 가서 얻게 했다. 어떤 비구니가 마늘을 필요로 하여서 식차마니인 사미니로 하여금 가서 그것을 가져오도록 시켰는데, 마침 마늘 주인은 마늘을 가지고 성안의 시장에 들어갔다. 어떤 정인이 마늘 밭을 지키고 있었는데 사미니가 물었다. “마늘 주인은 어디로 갔습니까?” 정인이 대답했다. “성 안의 시장에 갔습니다.” 사미니는 그에게 마늘을 원했으나 정인이 대답하였다.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단지 마늘을 지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사미니가 화가 나서 말하였다. “주인이 주게 했는데 너는 어찌 지키려고 하는가?” 그리고 손으로 그것을 파서는 “이것은 화상의 몫이요 이것은 아사리의 몫이요 이것은 오늘 몫이요 이것은 내일 몫이다” 하면서, 이와 같은 몫을 마음대로 가지고 가버렸다. 마늘 주인이 돌아와서 그것을 보고는 지키는 사람에게 물었다. “저 마늘을 누가 가져갔느냐?” 정원을 지키는 사람이 위와 같은 연고로써 모든 사정을 주인에게 아뢰었다. 마늘 주인은 곧 여러 비구니를 싫어하고 꾸짖었다. 이와 같이 전하여져 세존께서 그것을 들으시고는 여러 비구니를 불러 꾸짖으면서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비구니는 마늘을 먹을 수가 없다. 먹으면 바야제(波夜提)를 얻느니라.” 어떤 비구가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법에서는 마땅히 어떠한 칼을 사용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동이나 쇠로 칼을 만들어 머리카락을 자르라.” 이미 칼을 만들었으나 안전하게 놓아 둘 장소가 없기에, 또 다시 세존께 여쭈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동이나 철이나 뿔이나 대나무나 갈대를 사용하여 만들라.” 칼을 안치하여 간직하는 법에는 나무껍질 혹은 소나 양의 가죽에다 그것을 안치하여 간직한다. 이것을 머리카락을 자르는 칼을 놓아두는 법이라고 한다. 잡건도 가운데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비구니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법은 마땅히 돌아가며 서로 깎아 준다. 만일 남자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이이면 마땅히 두 비구니가 서로 껴안고 자르게 한다. 만약 비구니가 머리카락을 잘라 주는 남자에게 욕정을 일으키고 남자 또한 비구니에게 욕정의 마음이 있다면 자르게 해서는 안 된다. 수레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가 코끼리 수레요, 둘째가 말 수레요, 셋째가 차 수레이며, 넷째가 가마 수레이다. 그때 구담미(狗睒彌)의 성 밖에 큰 나무가 있어서 이름을 니구타(尼拘陀)라고 하였는데, 이 나무 아래에 각종 수레가 가마를 멈추고 쉬었다. 이것을 수레라고 한다. 만일 법을 듣기 위하여 왔으면서 수레에서 내리지 않는 자에게 설법해서는 안 되나, 병든 경우는 제외한다. 병사왕(甁沙王)이 8만의 4천의 코끼리와 말을 타고 야치림(夜置林)에 당도하여 부처님께 나아가 부처님께 법을 들었다. 그때 또한 가섭형제의 무리 천 사람이 부처님 주변에 이르러 법을 들었다. 그때 세존께서 비리기국(毘梨祇國)으로부터 유행하여 비사리에 당도하셨다. 암라녀(菴羅女)와 이거자(離車子) 등이 모두 갖가지 기묘한 수레를 타고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법을 들었다. 법을 듣고 나서는 세존께 암라원에 이르러 주무시고, 다음날 제자의 미공(微供)을 받으시기를 권청하였다. 이와 같은 모든 사람이 타는 것을 이름하여 모두 수레라고 한다. 그때 여섯 무리의 비구가 여러 가지 수레를 타고 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멀리서 보고, “이는 국왕이나 대신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도하고 나서 이들이 사문인 것을 알고는 사람들이 이를 모두 비난하였다. 부처님께서 이를 들으시고 계율을 제정하셨다. “늙고 병든 비구를 제외하고 수레를 타서는 안 되며 코끼리와 말을 타서는 안 된다. 병든 자는 모두 탈 수 있다.” 그때 마갈제국 병사왕이 다섯 가지 종류의 장식구를 지녔으니, 하나는 금승도(金繩刀), 둘째는 칠보승(七寶乘), 셋째는 칠보관(七寶冠), 넷째는 잡칠보망선(雜七寶網扇), 다섯째는 잡보혁사(雜寶革屣)이다. 이 다섯 종류의 장엄구를 버리고 맨발로 부처님 앞에 당도하여 머리를 땅에 조아려 여래의 발에 예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았다. 그때 마갈제국의 왕을 따라온 8만 4천 인이 우루빈라 가섭 형제가 모두 앉아 있음을 보고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었다. ‘우루빈라 가섭이 대사문에게 나아가 출가한 것인가. 아니면 대사문이 가섭에게 나아가 출가한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모든 이가 마음속으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을 아시고 게송을 설하여 가섭에게 물으셨다.
그대가 행하는 법에서 어떠한 허물을 보아 버리고 출가하여 어떠한 이익 구하고자 하는가.
본래 익혀온 불을 섬기는 법을 어떻게 그치어 받들지 않으며 다시 다른 수승한 법을 보아도 보지 않고도 그것을 버리는가.
가섭은 곧 게송으로 설하여 부처님께 답하였다.
음식의 맛을 우선으로 하면 허물의 근심이 가장 크며 여자를 밝히는 것을 우선으로 하면 그 근심 그에게 미치며
본래 섬기던 불의 법은 그를 괴로움에서 면하게 하지 못하나 출가하여 구하는 법은 영원히 모든 고난(苦難)을 끊을 수 있습니다.
이때 세존이 게송으로 다시 설하여 거듭 가섭에게 물었다.
맛에 묶이게 되어 몸에 밴 지 오래되면 성품이 되니, 천상(天上)과 사람 가운데서 어떤 이익을 보아 해탈하는가.
가섭 또한 거듭 게로서 설하여 부처님께 답하였다.
삼유(三有)의 살고 죽는 것을 보면 공적(空寂)하여 있는 것이 없나니, 모든 법은 생각 생각 사라지고 그러므로 버리어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때 마가다국 병사왕과 모든 따라온 자들은 아직 의심을 풀지 못하고 부처님과 가섭이 각각 두 게송으로서 설하자, 어느 누가 우월한가 하고 생각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아시고 바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부채를 들고 나에게 부치어라.” 가섭은 바로 일어나 부채를 잡고 부처님께 부치었다. 부채질을 하고는 곧 바로 공중에서 신통을 일으키고는 다시 부처님 앞에 내려와 부처님 발에 정례하였다. 그리고 발을 감읍하며 말하였다. “세존은 스승이시며, 나는 제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를 보고 나서 비로소 부처님께서 큰 스승이시며, 가섭을 제도하신 것을 알았다. 그때 부처님은 자리에서 이미 마음속 의심이 풀린 것을 아시고, 다시 법을 설하시어 가르침을 보이고 이익되고 기쁘게 하였다. 왕과 8만 4천 사람들을 모두 수다원과를 얻었으며, 10억 나유타의 모든 하늘도 또한 번뇌의 때를 여의어 법의 눈이 깨끗해짐을 얻었다. 그때 제석천과 사천왕 등이 몸을 바라문의 모습으로 바꾸어, 금부채를 잡고 부처님께 부치었다. 이와 같이 마땅히 널리 알아야 한다. 그때 여섯 무리 비구가 구슬 털이개를 잡고 스스로 휘둘러 중생을 다치게 하였다. 모든 단월이 이를 싫어하여, “어떻게 출가인이 털이개를 간직하여 장식을 하고 일부러 중생을 다치게 하는가”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이로 인하여 계를 제정하셨다. “지금부터 앞으로는 털이개를 잡고 휘둘러 중생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 또한 비구가 털이개를 잡고 여래탑을 터니 부처님께서 바로 그것을 허락하시었다. 그때 주변에 있던 여덟 사람이 털이개를 잡고 부처님을 털으니, 첫째는 가섭(迦葉), 둘째로는 우타이(優陀夷), 셋째로는 사가타(莎伽陀), 넷째로는 미비유(彌卑喩), 다섯째로는 나가바라(那迦婆羅), 여섯째로는 균타(均陀), 일곱째로는 수나찰라(修那刹邏), 여덟째로는 아난(阿難)이다. 이와 같은 비구가 털이개를 잡고 부처님을 털었으니, 이것을 털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때 모든 비구들이 일제히 한곳에 모였다. 그때 볕이 뜨겁고 무더우니, 부처님께서는 모든 비구들이 부채를 지니는 것을 허락하셨다. 만일 부채가 부서지면 수선하도록 허락하셨으니, 부채를 만드는 법은 베나 모직이나 혹은 종이로 모두 만들 수 있다. 그때 어떤 부부가 있어 두 사람이 나이가 들어 함께 출가하였는데, 나중에 이 도인은 걸식하다가 비구니 절에 이르렀다. 이 늙은 비구니가 먹는 자리에서 부채를 가지고 그를 부채질하자, 비구가 말하기를, “모름지기 먹는 자리에서는 부채질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이 비구니는 화를 내어 부채로 비구를 때리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들으시고는 계율을 제정하셨다. “지금부터 비구니는 부채를 잡고 비구를 부채질하여서는 안 된다. 만일 무더울 때 스님들이 모여 있을 때에는 화상과 함께 수행하는 제자들은 화상에게 부채질할 수 있다. 아사리와 같이 묵는 제자는 부채질할 수 있다. 대중이 뽑은 아래 비구는 부채질 할 수 있다.” 가섭 등 여덟 사람이 부채를 잡고 부처님에게 부채질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부채질이라 한다. 이때 여섯 무리의 비구가 일산을 잡고 가죽신을 신고 길을 따라 걸어가니, 여러 단월들이 이를 비난하여 말하길, “어떻게 비구가 제멋대로 일산을 잡고 가죽신을 신고서 길을 따라 걸어 다닐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계율을 제정하셨다. “일산을 잡고 가죽신을 신고 다니지 말라. 만일 절에 있는 경우에는 가죽신을 신는 것과 나무껍질 혹은 풀로 우산을 만드는 것을 허락하나, 마을에 들어가서는 늙고 병들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어느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때 모든 이거자(離車子)가 부처님께 이르렀는데, 타는 말과 수레와 옷과 일체의 몸을 장식하는 장식물이 모두 청색이었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도리천(忉利天)에서 나와서 유관(遊觀)할 때 모습과 외양을 알고자 한다면 지금의 이거자와 다르지 않다.” 이때 발난타가 손으로 기묘한 보개(寶蓋)를 잡고서 길을 따라 갔다. 모든 이가 멀리서 보고 ‘이분은 대국왕이시다’라고 하였는데, 도착하고 나서야 이 사람이 비구인 것을 알았다. 모든 사람들은 이를 비난하기를, “어찌하여 출가한 이가 이와 같이 기묘한 일산을 쓰고 길을 걸어가는가” 하였다. 부처님께서 이를 들으시고 계율을 제정하셨다. “늙은이와 병든 이를 제외하고는 비구가 일산을 잡고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를 일산을 써서는 안 되는 계라고 한다. 무엇을 거울이라 하는가. 신체를 비추어 볼 수 있는 것을 거울이라 한다. 만일 병든 비구가 얼굴 위에 부스럼이 있어 약을 바르기를 원하면 마땅히 비구를 불러 약을 바른다. 그런데 발라줄 비구가 없어서 물이나 발우나 벽에 혹은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곳에 비추어 볼 수 있으면 스스로 바르되, 쇠 거울 가운데 비추어서는 안 된다. 비구가 눈에 통증이 있어서 세존께 나아가 여쭈니, 부처님께서 세 가지 종류의 안약을 만드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첫째는 양담(羊膽)이고, 둘째는 기란선(其蘭禪)이며, 셋째는 소비란선(蘇毘蘭禪)인데, 돌 위에 얇게 그것을 갈아 사용하여 눈에 바른다. 만일 보물이 있어 안약으로 넣는 것은 부처님 또한 그것을 허락하셨다. 약을 드는 법[擧藥法]은 마땅히 죽통에 담아야 하나니, 보물을 사용하여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마땅히 널리 알아야 한다. 또한 비구가 있어 눈이 어두워 볼 수가 없을 때,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피를 사용하여 눈에 바르는 것을 허락하시었다. 사람의 뼈, 사람의 머리카락을 태워서 재로 만들어 얇게 갈아 또한 눈에 붙이는 것도 허락하시었다. 이와 같이 마땅히 널리 알아야 한다. 인도에서는 늘 약을 사용하여 눈에 발라 장엄하게 꾸민다. 여섯 무리의 비구가 속인의 법과 같이 장엄하기 위해서 날마다 약을 발라 눈을 치료하였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를 들으시고 이 약을 사용하여 날마다 눈에 바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병자라면 3종약을 사용하여 눈을 치료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때 여섯 무리의 비구니가 여인으로 장식하였다. 부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비구니를 불러 꾸짖고는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비구니는 여인의 장식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구법에서는 스스로 춤을 추어서는 안 된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춤추는 것을 가르쳐줘서도 안 되니, 부처님께서 금지하신 사항이다. 아범기(阿犯祇) 부나바소(富那婆蘇) 여섯 무리의 비구 등은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고 작기(作伎)하였다. 부처님께서 이를 들으시고 계율을 제정하셨다. “모든 비구들은 노래하고 춤추고 작기해서는 안 된다.” 여섯 무리의 비구가 있어 개가 즐겁게 달리는 법과 같이 달리니, 부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춤추는 법은 어린아이가 추는 것과 같고 노래는 곡소리와 비슷하였으니, 이 법을 비구는 모두 해서는 안 된다. 이빨을 드러내어 웃는 것은 미친 사람의 모습과 비슷하니, 이 또한 허락하지 않으셨다. 여섯 무리의 비구가 노래를 지어 경을 외고 부처님을 찬탄하니,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노래를 짓는 데는 다섯 가지의 허물이 있으니, 첫째는 노래 가운데 스스로 염착이 생기는 것이요, 둘째는 사람에게 염착이 생기는 것이며, 셋째는 모든 하늘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며, 넷째는 말소리가 바르지 않고 정확하지 않게 되며, 다섯째는 말의 뜻이 명료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음악이라 한다. 영락(瓔珞) 꽃다발은 스스로 걸쳐도 안 되고, 이것을 만들어 속인에게 걸치게 해서도 안 된다. 비구가 만약 부처님을 위하여 공양하고 만일 불탑이나 성문탑을 공양하기 위하여 작기하였다면 이는 범한 것이 아니다. 무엇으로 영락 꽃다발을 만드는가? 하나는 우발라화(優鉢羅花), 둘은 파사가화(婆師迦花), 셋은 담복가화(膽蔔迦花), 넷은 아제목다가화(阿提目多迦花), 다섯은 타금작화(打金作花), 여섯은 타은작화(打銀作花), 일곱은 백납화(百鑞花), 여덟은 연석화(鉛錫花), 아홉은 작목화(作木花), 열은 작의화(作衣花), 열하나는 작대화(作帶花)이니, 이를 꽃다발을 만드는 꽃이라고 한다. 존자 가섭유가 말하였다. “부처님을 위하여 만들고 나머지 중생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면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여섯 무리의 비구는 발나향(跋那香)을 몸에 발랐다. 모든 재가자는 그것을 비난하니, 부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여섯 무리 비구가 다시 향도향(香搗香)을 사용하여 몸에 발랐다. 이는 속인이 나무라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비구가 여러 가지 좋은 향을 얻어 불탑이나 성문탑에 바르면 탑을 공양하기 위한 것이므로,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어 모두 그것을 위한 것을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한때 모든 비구가 죽은 사람의 옷[死屍衣]을 입고 탑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어떤 비구가 말하였다. “우리 모두 분소의를 입고 있는데, 어떻게 하여 탑에 들어가서 예배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분소의를 얻었을 때 물에 오랫동안 담가 순수한 잿물로서 빨아 깨끗이 하여, 계묵가향(奚墨伽香)을 위에 바른 후에 입고 탑에 들어갈 수 있다. 모든 비구가 머무는 방안에 만약 냄새가 나서 머물기 어렵다면 여러 가지 좋은 향을 태워 연기를 내게 하라.” 이를 향이라고 한다. 인도의 법에서는 귀하고 뛰어난 남녀는 모두 갖가지 좋은 향을 섞어서 그것을 몸에 바르고 훌륭한 옷을 입는다. 여섯 무리의 비구들이 속인의 법과 같이 향을 사용하여 몸에 바르자, 모든 단월이 그것을 비난하기를, “어찌하여 비구는 속인의 법과 같이 하는가” 하였다. 세존은 이를 들으시고 계율을 제정하셨다. “모든 비구가 향을 사용하여 몸에 바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병든 이가 있어 향을 태워서 차도가 있다면 편리에 따라서 사용할 수 있으며, 이는 범하는 것이 아니다.” 앉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앉는다 함은 모든 스님들이 모여서 용모를 단정히 하고 의복을 정돈하여 가부좌를 하고 관[觀]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앉는다고 이름한다. 또 다시 앉는다 함이란 부처님께서 유행하다가 한 나무 아래 이르러 결가부좌를 하고 앉는 것이다. 관하는 이가 싫어함이 없는 것을 앉는다고 이름한다. 마치 좌선하는 사람처럼 한자리에서 한 겁이 지나도록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모두 앉는 것이라고 한다. 출가인은 여인과 함께 가려고 숨겨진 곳에 앉아서는 안 되니, 이는 속인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가리고 숨겨진 곳에 앉으면 남자는 여자에 대해 욕망으로써 먹을 것을 삼고, 여자는 남자에 대해 욕망으로써 먹을 것을 삼는다. 비구는 이미 이 법을 버렸으므로 마땅히 같이 가리어지고 숨겨진 곳에 앉아서는 안 된다. 파사익왕이 군마를 보내어 길가로 나갔다. 한 작은 절에 객승이 많이 왔는데, 군대를 피하기 위하여 방안으로 모두 들어왔다. 방안은 좁았고 사람은 많아 무릎을 좁히고 앉으니, 이 또한 앉는다고 한다. 존자 이발다(離跋多)가 와서 살바겸(薩婆鉗) 근처에 이르렀다. 살바겸은 이발다가 아주 먼 곳에서 와서 신체가 피로해진 것을 보고 스스로 자리를 좁혀서 이발다를 넓게 앉게 하였다. 이발다는 스스로 속으로 사유하기를, ‘존자 살바겸은 염부제 가운데 제일 윗자리에 있다. 어찌 그 앞에서 해태하고 제멋대로 하겠는가’ 하고는 곧 몸을 거두어 자리를 단정히 하고 생각을 매어 사유하였다. 이 두 사람이 앉은 것 같은 것을 앉는다라고 한다. 눕지 않음이란 무엇인가? 여인과는 더불어 같은 방에서 누워서는 안 되고, 빈출된 사미 또한 함께 누울 수 없다. 부구(敷具)라 함은 상(床)ㆍ승상(繩床)ㆍ초부(草敷)ㆍ목엽부(木葉敷) 그리고 도인(道人) 소유의 자리를 펴는 것을 모두 자리를 펴는 것이라 한다. 비구니가 있어 유행하다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였는데, 주인이 없는 집에 잠시 들어가 앉았다. 집주인이 밖에서 와서 비구니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안사람에게 물었다. “그대들 누가 이 비구니를 편안하게 여기에 머물게 했는가?” 안사람이 대답하였다. “비구니 스스로 와서 사람이 없는데도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집주인이 비난하여 말했다. “어찌하여 비구니가 말도 없이 바로 앉을 수 있는가.” 부처님께서 이를 들으시고 제정하시었다. “비구니가 단월의 집에 이르면 묻지 않고 앉아서는 안 된다.” 그때 비구니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출가인이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만약 스님이 많아 방이 좁으면, 사람들은 얼마간의 자리를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 비구니에게 방의 넓고 좁음에 따라 주량(籌量)하여 나눌 수 있다.” 만약 사람이 병이 없는데도 스스로 땅에 크게 누워서 설법해서는 안 된다. 병자가 누워서 법을 듣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설해야 한다. 그때 억이(億耳)비구가 아반제국(阿槃提國) 가전연자 곁으로 출가하였다. 계를 지니어 도를 닦는 데 부지런히 하고 게으르지 않아 아라한과를 얻었다. 아라한과를 얻은 뒤 아반제국으로부터 담파제국(膽婆提國)을 향하여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렀다. 부처님께서 그가 멀리서 오는 것과 아라한과를 얻었음을 보시고, 이러한 인연으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나를 위해 부구를 펴라. 또한 이 비구를 위하여 나의 방안에 부구를 펴라. 이 비구가 부처님 방안에 눕는 법이란 얼굴이 부처님을 향해야 하며 부처님을 등지고 누워서는 안 된다.” 그때 여러 비구가 있어 수면의 즐거움을 탐착하기에 3업을 폐하여 버렸다. 금강역사는 잠자코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여래께서는 3아승기겁이 지나도록 여러 가지 고행을 행하여 마침내 부처님이 되시었다. 지금 여러 비구는 누워 잠자는 즐거움에 탐착하여 다시 도를 행하지 않는다. 어떻게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는 도리를 얻을 수 있을까?’ 여러 비구가 이를 듣고서 더불어 위의 일로써 불세존께 나아가 여쭈니,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에게 이르셨다. “사람들의 신시(信施)를 받아먹으면서 게을러서는 안 된다. 밤의 세 때 가운데 두 때는 마땅히 좌선하고 경을 읽고 경행한다. 한 때는 스스로 숨을 편안히 한다. 이것을 와구(臥具)라고 한다.” 여러 비구가 노지에 앉아 있었는데, 오래 머물러 있던 상좌들이 모두 등의 통증으로 괴로워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퍼져 세존께 전해졌다.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노지에 앉아 있어 등이 아픈 자는 비단과 하얀 피혁을 제외한 나머지 일체를 사용하여 선대(禪帶)를 지어서 앉을 수 있으며, 마땅히 선대를 사용하여 자신을 묶으라. 대를 만들 때에는 넓은 1걸수(磔手)이고, 길고 짧음은 몸의 크기에 따라서 만든다. 이것을 선대(禪帶)라고 한다.” 그때 비구가 처음으로 출가하였을 때에 부처님께서는 아직 끈을 사용하여 니원승을 입는 법을 허락하지 않으셨기에 두 끄트머리를 사용하여 허리 사이에 붙였다. 뒤에 단월의 집에 이르렀는데 무리 가운데서 갑자기 옷이 벗겨져 땅에 떨어졌다. 여러 사람이 비웃자, 비구는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이 인연으로 세존께 나아가 여쭈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후부터 길고 짧은 것을 엮어서 다시 돌려서 허리에 묶되, 나머지가 2척의 길이로 해야 한다. 만약 끈일 경우 세 번 돌려 바로 허리 끝에 묶어 각각 한척 남짓 있게 한다. 이것을 대(帶)의 인연이라 하는 것이다. 함께 수행하는 제자나 함께 묵는 제자는 화상 아사리가 밖으로 나가려 할 때에 이 새끼줄이 있는가 없는가를 관찰하고, 벌레나 쥐가 물어뜯은 곳이 있는가 없는가를 자세히 모두 살핀 뒤에 주어라. 만일 아련야 비구로서 제자가 없다면 아랫사람은 마땅히 이와 같이 자세히 모두 살핀 뒤에 윗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만약 비구가 두통이 있다면 허리띠를 사용하여 마땅히 급히 묶을 수 있다. 만약 허리띠 끝에 수염이 있다면 마땅히 간직해서는 안 된다.” 여섯 무리의 비구가 이와 같은 띠를 간직하였기에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어떤 비구가 장난으로 다른 사람의 허리띠를 감추었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주지 않아 주인을 걱정하게 만드니,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일도 역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때 사리불이 재가인의 집에 들어갔다.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몸에 불어와 가사가 땅에 떨어져 맨몸이 드러나니, 부처님은 이러한 일로 인하여 계율을 제정하셨다. “이제부터 비구는 가사 위에 모두 끈을 묶어야 한다. 한 쪽에 갈고리를 달고, 갈고리에 끈을 묶어 옷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이것을 옷에 끈을 하여 갈고리를 다는 법이라 한다.” 그때 여섯 무리 비구가 니원승을 걷어붙이고 등 위에 무거운 것을 지고 머리를 낮추어 걸어가다 몸을 드러내니, 재가인이 그것을 비난하였다. 부처님은 그것을 들으시고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계율을 제정하셨다. “이제부터 비구가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옷을 걷어붙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인연이 있어 삼보(三寶)를 위하여 옷을 걷어붙이는 것이 필요하다면 스스로 일을 잘 처리하되, 몸을 나타내지 마라. 이것을 옷을 걷어붙이는 법이라고 한다.” 비구는 마땅히 치뇌(稚弩: 활의 일종)를 지닐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적이 있을 때 공중을 향하여 치뇌를 쏘아 적을 놀라게 하여 도망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에 있어 이름은 같으나 쓰임이 다르다. 마치 치뇌와 사탕수수를 모두 억초(億初)라 하는 것과 같다. 도적이 억초를 찾으면 치뇌를 찾는 것으로 알고, 식사할 때 억초를 찾으면 사탕수수를 찾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이름은 같으나 쓰임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비구가 경행을 할 곳에 마땅히 담요를 펴야 하는데 가죽으로 된 부구를 얻을 수가 없었다. 추운 곳에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상 아사리의 경행처에는 제자들이 머물면서 경행을 할 수 없고 주변에 있으면서 경행한다. 늙은 도인이 있어 화상 아사리와 법랍이 비슷한 자의 경행처에서는 나이 어린 비구가 그 가운데 있으면서 경행할 수 없다. 화상 아사리가 경행할 때에 제자들이 물을 것이 있으면 마땅히 합장하여 몸을 굽혀 머리를 숙이고 묻는다. 어떤 누각의 윗층이 부정한 땅으로 향하여 무너져 내리려 하자, 모든 비구가 의심하여 세존께 나아가 여쭈니, 부처님께서 이르셨다. “무너지지 않게 하여 부정처에 떨어지게 하지 말라. 이것을 정방(淨房)이라 이름한다.” 대중 스님들이 머무는 곳에 아직 부엌이 없을 경우 만약 대중 스님들이 제일 좋은 방을 갈마하여 부엌을 만든다면, 이는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마땅히 두 번째 방을 부엌으로 해야 한다. 만약에 먼저 갈마를 지었다면 마땅히 도로 갈마를 풀고서 두 번째 방을 부엌으로 해야 한다. 비단을 경행처에 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까닭은, 단월이 나라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비단을 가지고 와서 승가에 보시하였는데, 승가는 얻어서 경행하는 땅에 깔았다. 단월이 뒤에 와서 그것을 보고 비난하여 말하기를, “어떻게 비구가 아끼는 마음도 없이 이와 같은 귀중한 물건을 경행하는 땅에 펴서 밟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건이 퍼지니, 세존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단월이 보시한 좋고 귀중한 물건을 경행하는 땅에 깔지 말라.” 승가가 함께 기거하여서는 안 되는 두 종류의 비구가 있다. 첫째는 별주(別住)하는 비구이며, 둘째는 법답지 않은 비구이다. 지혜로운 이가 그에게 충고하여도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문득 스스로 절을 나오니, 이 두 사람 등과 각각 함께 기거해서는 안 된다. 단월이 승가에 땅을 보시한 것은 받아쓸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허락하셨다. 이를 땅이라 한다. 비구가 베어서는 안 되는 다섯 종류의 나무가 있으니, 첫째는 보리수, 둘째는 귀신수(鬼神樹), 셋째는 염부수(閻浮樹), 넷째는 아사타수(阿私陀樹), 다섯째는 니굴타수(尼屈陀樹)이다. 석가족의 여러 사람이 출가하고자, 그 집안의 이발사인 우바리를 불러 말하였다. “너는 우리들을 섬긴 지 오래되었으나, 이제 따로 가야겠다. 너에게 남김없이 주리니, 단지 몸 위에 옷만을 걸치고 좋은 보배 옷과 영락(瓔珞)과 환천(環玔)과 칠보로 장엄한 칼 등을 모두 너에게 다 주리라.” 우바리가 이미 얻고 나서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사람들은 가문과 본체가 높고 귀한데도 오히려 버리고 도를 구하거늘, 하물며 나와 같이 미천한 것이 보물을 받아봤자 괴로울 뿐이다’ 하고는 석가족의 사람들을 따라서 부처님께 나아가 출가했다. 비구는 삼보를 위하여 세 종류의 나무를 심으니, 첫째는 과수(菓樹), 둘째는 화수(花樹), 셋째는 엽수(葉樹)이다. 이들은 단지 복만 있으며 허물은 없다. 어떤 비구가 비고 고요한 곳의 나무 아래에서 안거하기를 좋아하여 세존께 나아가 여쭈었다. “나무 아래에서 안거하여도 좋습니까?” “나무 아래에서 안거하여도 된다.” 비구가 마음에 의심이 생기어 다시 부처님께 물었다. “크고 작은 나무 아래서 모두 안거 할 수 있습니까?” “큰 나무는 이롭고 좋다. 만약 큰 나무가 없다면 매우 작더라도 사람의 키보다는 커서 가지와 잎이 사방으로 퍼지고 빽빽하고 치밀하여 비와 눈이 새지 않으며 햇빛이 비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나무 아래에서는 안거하여도 되느니라.” 비구가 나무 위에서 안거하였는데, 나무를 얽어매어 평상을 만들고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대소변을 나무 아래로 하였다. 이 나무에 사는 큰 귀신이 분하여 화를 내어 이 비구를 때려서 죽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앞으로는 나무 위에서 안거하며 나무 아래에 대소변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아직 계를 제정하시기 전에 비구들은 모두 무덤이나 나무 아래나 비고 한가한 곳에서 좌선하고 경행하였다. 연화색(蓮花色)비구니는 집착함이 없는 과위[果]를 얻어 가거나 앉는 데 위의가 모두 법식을 갖추고 있었다. 도적의 우두머리가 오가다가 우연히 그것을 보고 곧 신심이 생겨 돌아가면서 다른 곳에서 먹고 남은 고기를 보자기에 싸서 나무 위에 매달아 놓고 원(願)을 지어 말했다. “만약 아라한의 도를 얻은 자가 있다면 식전에 여기에 오면 음식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연화색 비구니는 육통을 구족하였기에 멀리서 이 말을 듣고서, 다음날 사미니를 보내어 가서 가지고 오게 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길을 따라 가시다가, 한 나무 아래에 이르러 자리를 펴고 앉았다. 다음 날 비뢰타자산기야(毘賴吒子散祇耶)를 만났는데, 60대의 수레에 검은 석밀을 가득히 실고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하였다. 나무에 얽힌 인연은 이와 같음을 널리 알라. 어떤 비구가 한 여인과 함께 나무 아래에 앉았다. 속인은 그것을 보고 비난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사문이 여인과 홀로 나무 아래에 앉아 있을 수 있는가” 하였다. 모든 비구가 이를 듣고 가서 세존께 여쭈니, 부처님께서 이르셨다. “이제부터 앞으로는 비구는 홀로 여인과 함께 나무 아래에 앉아서는 안 된다.” 만약 승가의 땅 가운데 수목이 말라 있더라도 홀로 취하여 불태워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방승가에 속하기 때문이다. 만약 승지에 좋은 나무가 있을 경우 모두 화합한다면 사용하여 불탑이나 승방을 만들 수 있으나, 화합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대중 가운데 서너 명이 따로 큰방을 만들어 함께 머물렀다. 방을 만들 땅에 이미 나무가 있을 경우 승가 대중이 장소를 나누어 준다면 사용할 수 있으나, 만약 승가가 나누어 주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다. 만일 방을 만들었다면 그 땅에 스스로 나무를 심어 사용할 수 있으나, 원래 지어졌던 방인데 나중에 머무르는 스님이 없을 경우 이 나무가 필요하지 않으면 승가에 아뢰고 사용할 수 있다. 만일 머무는 방처에 공한처가 있어 방의 주인이 이 방을 위해서 나무를 심었다면 방을 고치는 데 사용할 수가 있다. 만일 나무를 심은 사람이 없고 다른 스님이 머무르는데 이 나무가 필요하지 않다면 승가에 아뢰고 사용할 수 있다. 화수와 과수는 승가 대중이 화합하여 탑을 고치고 방을 만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사로이 베어낼 수 없다. 베어서는 안 되는 다섯 종류의 나무가 있으니, 첫째는 보리수, 둘째는 신수(神樹), 셋째는 길 가운데 큰 나무, 넷째는 시타림(尸陀林) 가운데 나무, 다섯째는 니구타수(尼拘陀樹)이다. 다음과 같은 인연은 제외하니, 인연이란 혹은 불탑을 허물때나 혹은 승가람을 허물 때나 물에 잠기거나 불에 탔을 때는 보리수를 제외하고 네 종류의 나무는 벨 수 있다. 다섯 종류의 나무를 마땅히 받아서 사용할 수가 있다. 첫째는 불에 탔을 때, 둘째는 용불에 탔을 때, 셋째는 스스로 말랐을 때, 넷째는 바람이 불어 부러졌을 때, 다섯째는 물에 떠내려 온 나무이니, 이와 같은 나무는 받아서 사용할 수가 있다. 무엇을 투쟁(鬪爭)이라 하는가. 말로써 싸우는 경우, 두 사람이 싸우면 그것을 이름하여 투(鬪)라고 한다. 도당(徒黨)이 서로 도우면 그것을 다툼[諍]이라고 한다. 승가에게 통하게 하는 것을 말[言]이라고 하며, 각 그 이치를 설하는 것을 송(訟)이라고 한다. 다시 네 종류의 다툼[諍]이 있다. 첫째는 말로 하는 다툼, 둘째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다툼, 셋째는 범하게 되는 다툼, 넷째는 짓게 되는 다툼이니, 이것을 다툼이라 한다. 무엇을 파괴[破]라고 하는가. 파괴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법륜(法輪)을 파괴하는 것이요, 둘째는 승가를 파괴하는 것이다. 법륜을 파괴하는 것은 8정도를 행하지 않으며, 삿된 법을 유포하여 지혜를 사특한 것이라 하고 어리석음을 바름이라 하여, 지혜를 가리고 사특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을 법륜을 무너뜨리는 것이라 한다. 승가를 파괴하는 것이란, 첫째는 승가람 가운데 한 사람이 포살하고 내지 다섯 사람이 포살하며 혹은 한 사람, 두 사람이 갈마하고 내지 대중이 갈마하며 대중이 대중을 갈마한다. 이것을 승가를 파괴하는 것이라 한다. 제바달다와 더불어 따르는 자는 모두 투란차(偸蘭遮)를 범하는 것이나, 승가에 다시 돌아와 참회하는 자는 제외된다. 오지 않는 자일 경우, 승가를 파괴하는 것을 조성하였더라도 승가를 파괴하는 죄라고 할 수 없다. 단지 제바달다 한 사람만이 승가를 파괴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다시 일설이 있으니, 승가를 파괴하지 않더라도 법륜을 행하지 않으면 곧 승가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두 종류의 파괴가 있으니, 첫째는 붕당(朋黨)으로 파괴하는 것이고, 둘째는 견해로 파괴하는 것이다. 구담미 비구가 붕당하여 서로 다투어 논ㆍ경ㆍ율에 의지하지 않고 잘못을 옳음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은 어리석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구담미건도 가운데 널리 밝히고 있다. 견해로 파괴하는 것이란 제바달다가 승가를 파괴한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을 견파(見破)라고 한다. 파승(破僧)건도 가운데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위에서 설하는 열여덟 종의 파괴와 같다. 그때 어떤 비구가 홀로 떨어진 곳에서 안거하고 있었는데, 한 비구가 있어 승가를 파괴하는 법을 행하고자 한다는 것을 듣고, 이 비구는 마음속에, ‘만약 가서 충고한다면 안거를 파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일어났다. 그러나 만일 가지 않는다면 악법이 유포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들으시고 이 비구에게 이르셨다. “만일 법사(法事)를 위한 것이라면 이는 안거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며, 비구니 또한 이와 같이 법을 위하여 하는 것은 안거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충고하는 이유는 그가 지옥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을까봐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충고하는 것이다.” 다시 어떤 비구가 이 가운데서 승가를 파괴해 버렸다는 것을 듣고, 가서 그것을 화합하고자 했으나 안거를 놓칠까봐 마음속에 의심이 생겼다. 부처님께서 이를 아시고 이르셨다. “만약 승가를 파괴하는 법을 화합하기 위하여 하는 것은 안거를 잃지 않는 것이며, 비구니도 이와 같다.” 사구법(四句法)을 사용하여 승가를 파괴하니, 법을 법이 아니라 말하고,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 말하고, 비니가 아닌 것을 비니라고 말하고, 비니인 것을 비니가 아닌 것이라 말한다. 범(犯)이 아닌 것을 범이라 말하고, 범한 것을 범하지 않은 것이라 말하고, 가벼운 것을 무겁다라고 말하며, 무거운 것을 가볍다라고 말하는 이 네 구절로써 비구의 마음을 미혹하게 한다. 하나의 승가람 가운데 따로 도당(徒黨)이 있으면 포살, 갈마, 열여덟 종류의 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스스로 따로 지으며 승가와 같이 하지 않으니, 비구경과 비구니경 가운데서 마땅히 널리 알아야 한다. 이것을 파괴라고 한다. 무엇을 화합이라 하는가. 승가를 파괴하는 자를 위하여 설하는 것이니, 법을 법과 같이 설하고, 법 아닌 것을 법 아닌 것과 같이 설하고, 범한 것을 범한 것과 같이 설하고, 범하지 않은 것을 범하지 않은 것으로 설하고, 비니를 비니와 같이 설하고, 무거운 것을 무거운 것과 같이 설하고 가벼운 것을 가벼운 것과 같이 설하고, 내지 포살 갈마를 모두 승가와 같이 하여 다시 따로 짓지 않는 것, 이것을 화합이라 이름한다. 다시 다섯 종류의 화합이 있으니, 첫째는 견법(見法)화합, 둘째는 견초(見初)화합, 셋째는 여욕(與欲)화합, 넷째는 신(信)화합, 다섯째는 묵연(黙然)화합이다. 이 다섯 가지 법을 가지고 승가로 하여금 화합하게 함을 이와 같이 널리 알아야 한다. 우바리가 세존께 여쭈었다. “승가를 파괴하려 하는 것을 화합하게 하면 어떠한 이익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승가를 파괴하려 하는 것을 화합하게 하면 하늘에 태어나 일겁의 과보를 받는다.” 비구가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승가에 쟁사가 일어나 아직 참회하지 않았다면 화합이라 이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회하지 않으면 화합이라 하지 않으며, 법답게 뉘우쳐야만 화합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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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무유정법과 인과이론 -7
수행력이 높아지면 무량한 대원을 향하게 된다.
그래서 수준이 높은 십지보살의 경우에는 천체를 관장하고 천체를 만들거나 이동시켜 천체를 작은 공간으로 넣기도 한다. 그리고 해와 달을 손으로 가리고 산과 바다를 이동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다양한 형태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런 내용이 경전에 나온다.
물론 일반인으로서는 이런 내용들은 잘 믿기지 않는다.
일반인으로서는 모종삽을 가지고 화분의 흙을 조금 퍼 옮기고 화단을 꾸미거나, 비닐봉지에 휴지를 꾸겨 넣는 정도의 능력을 정상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아침에 세면하고 조금 화장하거나 옷을 꾸며 입는 정도를 정상적인 변화능력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능력도 개미나 벌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단한 초능력에 해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하튼 수행자는 생사현실에서 위와 같은 신통력을 취득해 중생을 뜻처럼 잘 제도하고 불국토도 서원과 같이 잘 장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수행자의 능력을 통상 여환삼매라고 칭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능력도 결국 수행자가 실상을 꿰뚫어 잘 관하고 생사현실 안에서 인과의 본 정체를 잘 파악하기 때문이다.
실상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을 관하면 이는 꿈과 같고 환과 같다. 이런 사정을 아는 것이 여환삼매를 취득하는 기본 바탕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생사현실이 꿈과 같고 환과 같다지만, 그 생사현실이 마음대로 나타나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한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은 의타기성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한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지만, 그러나 이는 여러가지 조건에 의존해 나타난다. 그래서 뜻처럼 되지 않는다.
마음안 내용이라고 해서 자신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환삼매를 취득하면 그것이 마음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환삼매의 증득이 높은 수행자들의 요건이 된다. 이는 때로는 현일체색신삼매라고도 표현한다. 삼매로 잘 안되면 현일체색신다라니를 이용해서라도 이런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중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중생을 뜻과 같이 제도해나가려면 필수적이다.
한 때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인과에 대한 법칙을 많이 알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이용하여 뜻을 손쉽게 성취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이 이런 표현을 하게 한다.
물이 끓으면 증기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주전자 뚜겅도 밀어 올린다. 이런 사실을 알았다고 하자. 그래서 이 사실을 응용해 증기기관을 처음 만들었다. 그래서, 힘이 생겼다. 그래서 탄광에서 석탄을 쉽게 캐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기차도 만들어서 많은 물건을 손쉽게 이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본래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인과 지식을 알고 이용하니 그렇게 되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역시 아는 것이 힘이다.
반대로 무지하고 모르면 상대적으로 축생 상태처럼 된다. 결국 산업화가 뒤떨어진 나라들은 선진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축생처럼 부림을 당했다.
공부나 연구를 게을리하고 보내던 많은 후진국들이 비슷하게 고통을 당했다. 한국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거의 반세기동안 선진국에 붙잡힌 축생처럼 부림을 당했다. 그래서 오늘날도 그런 과거사가 발목을 붙잡고 있는 측면이 많다. 그리고 여전히 선진국에 비하면 많은 부분이 뒤떨어져 있는 상태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어리석은 이 자신의 책임이 더 크다. 그리고 그 국가나 한 사회의 지도자가 부담할 책임이기도 하다. 지도자가 어리석고 무능해서 다른 선진국의 침입과 약탈 지배를 받았다고 하자. 그것은 그 선진국의 잘못도 있겠지만, 그 뒤떨어진 나라의 국민과 지도자의 책임이 더 크다. 결국 어리석으면 안 된다.
그런데 망집에 붙잡히면 설령 아무리 상대적으로 뛰어나도 결국 낙타나 곰과 같이 욕계에서 번뇌의 사역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한편 그 자신이 다른 중생을 붙잡아 사역을 하게 된다.
상대적이지만, 이런 관계가 욕계내 중생들 사이에 있다. 예를 들어 개미조차도 진딧물을 붙잡아 소처럼 사육을 한다. 사람이 소를 붙잡아 사육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욕계 안에서 세계곳곳에 도로를 닦고 도시를 건설하는 힘든 일이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누가 다 했는가 하면 결국 그들이다. 이들이 먼저 번뇌의 사역을 당하고 다시 그보다 어리석은 이들을 붙잡아 또 사역을 시키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종합하여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인과이론을 잘 살피면 이 반대로 생각하게도 된다.
인과론은 인과관계에 없는 내용은 아무리 원해도 실현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우선 의미한다.
또 아무리 인과를 알아도 인과관계로 인해 그것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다. 극단적으로 언제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또 개기일식이 일어나는지 안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이것을 이용하기 힘들다. 즉 내일은 1 시간 늦게 해를 뜨게 하기 힘들다.
인과를 알아도 원인에 해당하는 재료를 마음대로 찾아 넣을 수 없다. 원인을 마련하는 일도 인과에 구속당한다. 원인에서 결과가 나타나는 것만 인과에 구속당하고 원인의 마련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과는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에 의한 구속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도 된다.
더 나아가 무엇을 이용한다는 뜻, 어떤 희망을 갖는다는 것도 인과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자신의 뜻도 결국 인과의 구속을 받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이는 인과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기계적 인과율로 나아가게 된다. 그 경우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안다고 해서 자신 뜻대로 한다는 것은 오히려 짧은 견해인 듯 여겨진다.
○ 망집은 어떤 사정으로 발생하는가.
불교에서 여환삼매는 삼매의 일종이다. 즉 마음을 집중하여 정려 삼매에 드는 활동이다. 마음을 집중해 삼매에 드는데 왜 그것이 산하대지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되는가.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사용하는 리모콘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리모콘 버튼만 누르면 TV 가 켜지고 오디오세트가 켜지고 에어콘 등이 켜진다고 하자.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이는 도미노가 쓰러지는 인과관계에서 첫 부분을 리모콘이 해주는 사정 때문이다. 여환삼매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여환삼매는 실상의 정체와 인과관계를 잘 파악하고 그 첫 부분을 여환삼매로 시동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여환삼매에 싣는 그 서원은 또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가 문제된다. 즉 한 주체의 마음안 뜻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또는 어떻게 만들어내게 되는가. 이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수행자가 취득하는 여환삼매는 중생제도를 위한 것이다. 중생제도는 중생이 갖는 망집을 제거하는 데에 초점이 있다. 그러려면 또 중생이 어떤 과정으로 처음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한 주체는 자신의 뜻을 자신의 자유로 일으키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그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구체적인 상황을 놓고 생각하면 다시 그 의미가 모호해진다.
예를 들어 어려운 수학문제가 제출되었다. 그 답을 얻어내야 한다. 어떤 이가 답을 얻지 못한다고 하자. 그것이 그의 자유에 의한 것인가.
또 어떤 이가 다가와 무례하게 대해서 화가 났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자신이 화를 내는 것이 자유롭게 되는 것인가. 또는 화가 날 때 자신이 자유롭게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있는가.
79 구절이나 되는 다라니가 있다고 하자. 이것을 외우려고 한다. 그런데 잘 외어지지 않는다고 하자. 이것도 자신의 자유로 외어지지 않는 것인가.
이런 여러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면 자유라는 말은 단순한 표현에 그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라니를 외우고 자유롭게 그것을 떠올릴 수 없다. 화가 솟구쳐 오를 때 자유롭게 그것을 제거하기 힘들다. 어려운 수학문제가 제시될 때 자유롭게 그 답을 제시하기 힘들다. 이런 경우마다 자유가 있다면 위 내용을 제외한 범위에서만의 자유일 것이다. 각 경우 이런 내용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경우 자유가 있다면, 그냥 잠을 잔다거나, 엉뚱한 답을 내는 정도의 자유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범위 밖을 놓고 고려하면 여전히 그는 일정범위에 묶여 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 상황을 놓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리고 각 경우 어떤 이가 자유롭게 자신의 뜻을 정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어떤 이가 꽃을 보았다. 그 상황에서 그가 어떤 생각을 일으킨다고 하자. 이 과정에 어떤 부분이 자유로운 부분인가를 생각해보자.
자신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는 과정이 자유로운가. 눈을 뜨면 나타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자. 그래서 이 가운데 어떤 부분을 자신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경우 그에게 자유가 있다면 그저 눈을 뜨고 감는 정도 밖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눈을 감고 뜨는 것도 생각해보면 그렇게 자유롭지 않다. 뜰 상황이 되면 뜨게 되고 감을 상황이 되면 감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표현하기 나름이다.
그러나 여하튼 눈을 뜰 때 보게 되는 모습은 대단히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이 눈을 뜨면 곧바로 그런 모습을 얻는 것처럼 여길 수 있다. 그리고 일부 인명론자(인식 논리학자)는 이 과정을 곧바로 내용을 얻는다고 하여 현량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생리과학자의 설명만 참조해도 이 과정은 대단히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빛과 눈과 눈안의 시신경, 로돕신의 흥분. 대뇌 피질의 흥분, 이런 식으로 대단히 복잡한 과정을 제시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내용을 얻는 주체가 그 내용을 얻는 단계만 놓고 보면 그 내용을 바로 얻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이제 다시 이런 배경에서 관념을 일으키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이것도 자세히 보면 복잡하다. 관념을 일으키는 경로는 다양하다. 그런데 여기서 감각현실을 대해 일정한 관념을 일으키는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자. 관념은 감각현실을 대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갑자기 과거 일이 문득 떠오른다는 경우와 같다. 또 관념은 관념이 다른 관념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바나나란 생각을 떠올리니 이로 인해 기차가 연상되어 떠오르는 경우와 같다. 또 그외에도 정려 수행시 어떤 영상을 얻는 경우나, 꿈을 꾸는 경우도 있다.
여하튼 여기에서 감각현실을 대해 관념을 일으키는 경우를 놓고 먼저 생각해보자. 여기에서 이런 작용을 일으킬 때 대상이 되어주는 감각현실은 이미 얻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관념을 일으키는 과정에 눈처럼 기관 역할을 하는 부분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눈의 경우에는 눈이 관계해 대하면 모습을 보고, 관계해 대하지 않으면 모습을 보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념을 얻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즉, 관념을 얻는 과정에서, 자신이 감각현실만 얻으면 늘, 곧바로 관념을 일으키게 되는 것도 아니다. 즉, 감각현실이 있어도 관념을 일으킬 경우도 있고, 때로는 아닐 경우도 있다. 그래서 먼저 이 과정에도 눈처럼 관념을 일으킬 기관 역할을 하는 부분을 생각해야 한다.
한편, 그런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관념내용이 일으켜 얻어져 머무르는 정신영역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앞의 기관과 내용이 머누는 영역을 모두 하나의 정신 영역에서 다 함께 담당한다고 보기 힘들다. 하나의 영역에서 이 둘을 다 담당한다고 가정해보자. 처음 기관은 이런 작용을 할 것이다.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이에 대해 생각을 일으키려고 한다. 또는 하지 않는다. 이런 기능을 담당한다고 하자. 마치 눈을 떠 모습을 볼 때 눈(기관)이 담당하는 역할과 같다.
그런데 일으켜진 관념이 다시 그 기관에 머문다고 하자. 그러면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인가. 문제가 없다면 하나의 영역이 이 두 작용을 다 담당한다고 해도 무방할 듯 하다.
일단 너무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는 이것을 일단 생략하자. 다만 유식학에서는 눈이 물체를 보듯, 관념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기관 역할을 하는 부분을 따로 독립시켜 시설한다. 그래서 이를 제 7 식 말나식이라고 칭한다.
물론 여기서 제시하는 각 마음은 직접 눈으로 보거나 만지지 못한다. 그래도 이것이 있다고 시설하는 사정이 있다. 그것을 있다고 시설하지 않으면 구체적인 현실 내용을 설명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처음 눈으로 모습을 볼 때 이것을 얻는 마음이 있다고 시설하는 것도 사정이 같다. 그 마음도 역시 직접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시설하는 것도 이와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 마음을 없다고 하면 구체적인 현실내용을 설명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단순히 생리학자가 제시하듯 이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즉, 외부물질의 작용 반작용의 물리적 운동관계와 육체내 물질의 자극 반응관계로만 이 과정을 설명하기 곤란하게 된다. 그 내용이 결국 『수능엄경』에서 제시되는 내용이다.
처음 여기서 종소리가 나는가. 들리는가를 구분하게 된다. 즉, 종소리가 날 때 단지 소리가 나는 것이 듣는 현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종소리가 난다는 측면은 같더라도 듣거나 듣지 못하는 경우가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경우 단순히 물리적 인과과정만 고려하면 이 둘의 차이는 없다. 그래서 종소리가 외부에서 나고 귀가 있다면 그런 주체는 그 상황에서 다 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런 각 차이를 설명하려면 이에 개입하는 마음의 존재를 따로 시설해야 한다. 그래서 처음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시설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상황을 달리 설명할 수 있다고 하자. 즉 여전히 물리적인 관계로만 설명할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런 마음의 시설은 필요없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지금 관념분별을 행하는 데 관여하는 제 7 식을 시설하는 문제도 사정이 같다. 이런 제 7 식을 시설하지 않고도 이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제 7 식의 시설은 불필요하다. 그런데 현실 사정이 그렇지 않다.
○ 망집이 발생하는 과정
눈을 떴다. 꽃모습이 보인다. 그 다음 이 상황에서 어떤 주체가 어떤 생각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처음 생각할 내용이 있다.
눈으로 본 모습은 감각현실이다. 그리고 이를 배경으로 자신이 떠올린 생각은 관념내용이다.
이 둘을 먼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둘의 내용을 서로 비교해보자. 대단히 서로 엉뚱하고 다르다.
그런데 대부분 이 두 내용을 접착해 이해한다. 그것이 처음 잘못이다.
관념내용은 이 과정에서 눈을 감아도 계속 어느 정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감각현실은 이와 달리 감관이 관계하는 그 순간에만 얻는다. 이런 차이가 있다.
그래서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면서 이 두 내용을 서로 먼저 구분해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제 안경이 어디 있는가. 문제삼는 꽃이 어디 있는가를 묻는다고 하자. 이 때 이런 질문내용은 그 성격상 관념내용이다.
그런데 대부분 이 질문을 받고 손으로 일정 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이 때 손으로 가리킨 부분은 그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의 일정 부분이다.
그런 가운데 이 두 내용이 어떻게 서로 다르고 같은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먼저 그 상황에서 눈을 감아보자. 그래도 일정한 관념은 계속 떠올릴 수 있다. 안경이나 꽃을 문제삼았다면 그런 관념은 계속 떠올릴 수 있다.
그런 가운데 그런 관념 속에 방금전에 대한 안경이나 꽃 모습이 얻어지는가를 스스로 확인해보아야 한다.
그래야 이 둘의 차이를 스스로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는 직전에 얻었던 감각현실의 단 한 부분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경전에서 다음처럼 표현한다 변계소집상은 상무자성이다. 즉, 관념내용에서는 감각현실을 통해 얻는 자상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뜻이다.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즉, 관념내용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리고 감각현실은 관념내용이 아니다. 따라서 이둘을 서로 잘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 이 상황에서 그런 관념내용은 그 감각현실을 떠나 얻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런 관계를 있는 그대로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기본적인 망집 상황에서 일단 벗어날 수 있다.
여기서 망집현상이란 다음이다. 안경이 어디 있는가라고 물을 때 손으로 일정 부분을 가리킨다고 하자. 이 경우 그는 그 일정부분이 바로 그런 안경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 부분에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안경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그렇게 묶고 나누어서 상을 취한다.
그런데 정작 그 부분에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없다. 또 그 부분은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예를 들어 바나나를 떠올리고 이후 이 생각으로 기차를 연상해 떠올렸다고 하자.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그 바나나가 기차는 아니다. 또 그 바나나에 그런 기차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감각현실을 대해 일정한 관념을 일으키는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렇게 이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감각현실과 관념을 함께 접착시켜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곧 망상분별이다.
그가 현실에서 취해 가리키고 붙잡는 부분은 그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부분에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들어 있지도 않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붙잡아 취하고 그런 내용이라고 여기고 임한다. 그래서 이를 망상분별이라고 칭하게 된다.
그런데 욕계내 상황은 대부분 이에 바탕해 이뤄진다. 그리고 욕계에서 겪는 생사고통도 바로 이에 바탕해 겪게 된다. 따라서 이 부분을 잘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여하튼 욕계 상황은 바로 이런 바탕에 있다. 그런데 욕계내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다시 욕계내 중생에 눈높이를 맞추고 임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욕계 내 중생이 이렇게 임하게 되는 배경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물론 가장 간단히 이해하면 그 사정은 다음이다. 욕계 내 중생이 감각현실과 관념을 동시에 함께 얻는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그 주체의 마음 영역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을 겹쳐서 접착시켜 이를 대한다.
이는 마치 비닐마술과 사정이 같다. 또는 수정구슬에 색깔이 있는 빛이 비추이는 상황과 사정이 같다.
예를 들어 비닐 하나에는 세모가 그려져 있고 또 다른 비닐에는 원이 그려져 있다고 하자. 이 둘을 겹쳐 놓고 대한다고 하자. 그려면 그 상황에 가운데는 세모인 도넛츠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그 상황에 어느 비닐에도 이런 내용은 없다. 그래도 이 두 내용을 겹쳐 대하면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계속 그 비닐을 대하면서 임하게 된다.
이를 좀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세모가 그려진 비닐 부분을 대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는 그 부분에 다른 비닐에 있는 원 모양이 거기에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 둘을 겹쳐 대한다. 이 상황에서 동그라미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세모가 그려진 니닐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현실에서 안경이나 꽃이 어디 있는가. 또는 영희나 철수또는 자신의 몸이 어디 있는가를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일정 부분을 손으로 가리킨다. 이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 부분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는 그 부분이 그런 내용이라고 여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은 그런 부분을 그 요소로 갖는다고 여긴다.
감각현실을 자상이라고 칭하는 사정이 있다. 한 사람이 영희가 누구인가를 손으로 매 경우 가리킨다고 하자. 이 모습을 죽 나열해 보자. 그 모습을 다 다르다. 예를 들어 영희가 100m 앞에서 달려온다고 하자.
이 경우 처음에는 영희는 자신의 손가락보다 작게 보인다. 그리고 달려오는 매 과정마다 그 형체나 그 크기가 다르다. 이를 α,β,γ,δ,ε,ζ,η,ι,κ,λ,μ,ν,ξ 로 표시한다고 하자. 그런데 문제는 그는 이처럼 제각각 다른 내용을 모두 영희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것이 모두 영희와 대응된다. 이 경우 영희는 이들 모두 제각각 다른 모습이 공통해 갖는 공상으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들 각 경우 개별적으로 다른 모습은 그런 공상에 대응하는 개별상으로서 자상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런 각기 다른 상을 가리키면서 그것이 모두 영희라고 여기고 대한다.
그런데 그 자상에는 그런 공상이 들어 있지 않다. 또 그 공상에도 그런 자상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두 내용을 놓고 대조하면 서로 대단히 엉뚱하다.
다만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한편 앞 비닐 마술의 비유는 수정구슬 비유과도 사정이 같다. 예를 들어 투명한 수정구슬에 노란 빛을 비추인다고 하자. 그러면 그 수정구슬이 금인 것처럼 여겨진다. 이제 붉은 빛을 비추인다고 하자. 그러면 그 수정구슬이 붉은 루비보석인 것처럼 여겨진다. 이제 녹색 빛을 비추인다고 하자. 그러면 그 수정구슬이 녹색인 에머랄드 보석인 것처럼 여겨진다. 이제 푸른 빛을 비추인다고 하자. 그러면 그 수정구슬이 파란 사파이어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이 상황들에서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이 비유를 잘 이해하고, 현실 사정을 이에 준해 잘 파악해야 한다.
한편 진리판단과정에서는 여기서 이 내용을 잘 파악해야 한다.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에 대해 무엇이라고 판단한다고 하자. 그것은 그 일체가 모두 관념내용이다. 그래서 그 일체는 일단 그 판단이 문제삼는 감각현실과의 관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엉터리다. 감각현실은 관념이 아니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감각현실에 대한 관념판단 일체는 엉터리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망상분별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다만 욕계상황에서는 오히려 이 반대가 일반적이다. 오히려 감각현실을 대해서 일정한 분별을 행하지 못하면 백치로 취급받게 된다. 그래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상태처럼 취급받는다. 그래서 중생을 제도하려는 수행자는 생사현실에서 이런 상태에 일단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그래서 이런 기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런 상태에 눈높이를 맞추어서 그 상태에서도 다시 분별을 잘 할 필요성이 있게 된다.
한편, 수행자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아라한의 상태에 들고자 할 때는 경우가 이와 다르다. 이들 일체는 엉터리 망상분별이며 희론에 해당한다. 이것은 본 바탕 실재에 대한 판단도 아니다. 즉 관념 영역에서 제멋대로 행한 엉터리 판단일 뿐이다. 다만 관념영역에서는 그래도 의미가 있다. 그래서 희론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망집과 생사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이 일체를 모두 제거하고 떠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런 취지에서 회신멸지가 강조되는 것이다.
한편, 인명론 인식론 등에서 감각현실을 대해 곧바로 일으키는 관념판단이 옳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경우도 그 관념은 곧바로 일으켜 얻는다는 사정에서 현량에 넣기도 한다. 그리고 이처럼 곧바로 얻는 관념적 판단(의식-mano-vijñāna)은 그런 사정으로 옳다고 여긴다. 그래서 감각내용 및 정려시 얻는 관념적 내용 및 자증지와 함께 현량에 함께 넣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정이 그렇지 못함을 먼저 위 내용을 통해 잘 이해해야 한다. 즉 이들 내용은 하나같이 그것을 얻게 한 대상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내용들이다. 단지 그런 내용을 그처럼 한 주체가 얻게 되었다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후 현실에서는 계속 이런 바탕에서 업을 행하고 결과를 대하게 된다. 그래서 마치 이들 내용이 현실적으로 유효한 작용을 갖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즉 물을 대해 물이라고 이해하고 마시면 시원함을 느낀다. 그런데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물이라고 이해하고 마시면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이 두 경우는 차이가 있다고 여긴다. 또 그런 의미로 처음 판단은 옳은 지식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다. 처음 물을 물이라고 여겨 마신후 느낀 시원함도 역시 같은 문제다. 처음 망상분별을 일으켰다면 그 바탕에서 다음 내용도 대하는 것이다. 처음이 꿈이었다면 그 뒷 내용도 꿈 안의 내용이다. 그리고 같은 성격의 내용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 하나의 성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 각 내용은 그것을 얻게 한 대상과 대조하면 모두 엉뚱하다. 특히 감각현실을 대상으로 일으킨 관념판단의 경우는 이 두 내용의 차이를 쉽게 현실에서 파악할 수 있다. , 한편 감각현실은 그것을 얻게 한 외부 대상 자체를 끝내 얻지 못한다. 그래서 대상과의 일치 불일치 여부를 판단할 길이 없다. 단지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 내용을 얻고 현실에 임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생사현실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이 각 내용은 그렇게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일 뿐이다. 이런 형태로 얻는다고 그것이 옳다고 이해하는 것 자체가 망상분별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이 사정을 다음처럼 제시한다.
'상은 실로 상이 아니다. 고로 상이라고 칭한다.' ... 만일 상이 상이 아님을 관하면 곧 여래를 보게 된다. ...
이런 내용이 바로 이 부분과 관련된다. 그리고 욕계 생사현실에서 갖는 신견 등은 모두 이런 망집에 바탕한다. 그래서 욕계 생사현실의 생사고통을 제거하려면 일단 이런 정신증상을 벗어나야 한다.
○ 망상분별의 발생과정의 이해
본인이 오래전에 sns 활동을 하다가 모두 제거하고 나왔다. 거기에는 사정이 있다. 대부분 동문 sns 는 상조회처럼 운영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부고나, 결혼식 소식 외에 어떤 내용을 올리면 싫어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글이나 노래나 사진을 올리면 자신 입장에서 엉뚱하게 이것을 대하고 제각각 달리 대하는 것을 또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이 현실에서 다양한 문제를 일으킴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연구활동에 장애를 일으킨다고 여겨서 대부분 sns 에서 활동을 중지하고 나오게 되었다.
한편, 연구하는 과정에서는 외국노래를 랜덤으로 들으며 연구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이나 영어 노래는 노래를 들으면 바로 가사를 알아듣기 쉽다. 그래서 글 작성시 방해가 되어서 이들을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본인이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 노래를 듣고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노래를 반복해 듣다보면 이상하게 외국노래에서 과거 sns 활동에서 알게된 동문친구들의 이름이 자주 반복해서 들리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문장이 이어지면서 노래가 들린다. 그리고 심지어 또 앞 노래와 뒷노래들이 서로 계속 내용이 이어지면서 노래가 들린다.
처음 노래 내용들이 연구에 방해가 되어서 의미를 모르는 외국노래를 들었었다. 그것이 대부분 요즘 올리는 불어 노래들이다. 그런데 이들 불어 노래들이 거꾸로 또 엉뚱한 가사를 전하는 상황이다. 다만 크게 연구에 방해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이 현상을 놓고 잘 생각해보자. 프랑스와 한국은 거리상 대단히 멀다. 그런데 불어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한국어를 가사로 불렀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엉뚱하게 불어가사를 놓고 한국어로 듣게 되는가. 이 현상이 망상분별을 이해하는 과정과 관련된다.
장미 꽃에는 누님이 없다. 그런데 어떤 시인이 장미꽃을 대하면서 누님을 떠올렸다고 하자.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하자.
철지난 장미꽃은 시집간 누님이다. 누님은 늘 잔소리만 한다. 그래서 가시가 아프다. ...
별로 좋은 시는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왜 어떤 시인은 꽃을 대해 누님을 떠올리게 되었는가. 이 부분이다.
심리학 실험에 '흘뿌린 잉크 그림 실험'이 있다.
종이에 잉크를 마구 흩뿌려 놓는다.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그것이 무엇처럼 보이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 실험이 갖는 의미는 다음이다. 본래 그것은 잉크를 그냥 뿌려 놓은 것 뿐이다. 그런데 위 실험을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대부분 그것에서 일정한 형체가 보인다고 답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그것은 거미처럼 보인다고 답할 수도 있다. 또는 여인처럼 보인다고 답할 수도 있다. 그것이 물론 답은 아니다. 그런데 이 실험이 갖는 의미는 다음이다.
이런 실험을 행하면 그 가운데 80 % 정도는 대부분 엇비슷한 답을 한다고 하자.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이는 다른 답을 한다고 하자. 그러면 거기에는 그 나름 독특한 배경 사정이 있다고 추리하게끔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그 잉크 그림을 대하면서 어떤 괴한이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같다고 답했다고 하자. 그런데 다른 이들은 거의 이런 답을 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처럼 답하게 되는 데에는 그 나름의 독특한 배경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추리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이 심리 연구과정에서 이용되기도 한다.
이제 처음 불어 노래 문제로 들어가 보자.
만일 어떤 이가 한국어를 전혀 모른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 불어 노래를 듣고 한국 단어를 떠올릴 리는 없다. 그래서 불어 노래를 듣고 한국 단어를 떠올리는 데에는 일정한 배경이 있다.
그리고 다시 같은 불어 노래를 듣고 일정한 친구 이름이 들린다고 여긴다고 하자. 여기에도 사정이 있다. 그가 그런 친구를 전혀 본 적이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또 그런 이름이 잘 들리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데에는 일정한 배경사정이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런 배경들이 없으면 그렇게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노래나 그림에 그런 내용은 본래 없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답해도 그것은 답은 아니다. 그리고 일종의 망상분별에 해당한다. 그런데 각 경우 그렇게 엉뚱하게 대하게 되는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망상분별이 일어나는 배경 사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생사현실에는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한 반응이 있다. 그런데 처음의 기초 수행은 이런 반응을 제거하는데 목적이 있다. 즉, 매 상황마다 각 주체가 생사고통을 일으키는 반응[업]을 중단하게 하는데 기본 목적이 있다. 그리고 매 상황마다 그와 반대로 쌓여진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반대방향의 수행을 행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수행은 계를 닦아서 계체를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훈련하면 매 경우, 일반 망상환자와는 달리 반응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아름다운 여인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가까이 있다고 하자. 대부분 남성은 여기에서 리비도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이미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사건을 놓고 이를 살핀 바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결과가 좋지 않다.
그래서 리비도 수행론이 요구된다. 리비도적인 본능적 충동 에너지가 강하다. 그런데 그 리비도 충동을 그대로 실행하면 거의 대부분 3 악도 행이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교도소 아니면 중환자실 행이 된다. 이것은 3 악도라는 열매를 맺기전 먼저 보게 되는 꽃과 같다. 그래서 화과라고 칭한다. 생사과정에서 사후 맞이하는 3 악도의 과보 이전에 현생에서 받는 중간과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경우 그렇게 촉발된 에너지의 방향을 수행방향으로 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리비도 수행방안이다.
그래서 이 경우 넓고 길고 깊게 좋은 반응이 무언가를 먼저 찾아야 한다. 그래서 수행을 닦아야 한다. 그려면 수행자는 그런 경우 다른 경우와 달리 반응하게 된다.
무엇이 이것을 다르게 만들었는가. 그 주체에게 무언가 다른 내용이 들어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계를 닦아서 달리 반응하게 된 상태를 무표색이라고 칭한다. 이는 다음 의미다. 계를 열심히 닦았다. 그래서 어떤 수행자가 매 경우 다른 범부와 다른 반응을 하게끔 그 체계가 바뀌었다. 그래서 계를 성취한 수행자에게는 그렇게 매 경우 달리 반응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그 안에 들어 있다. 다만, 그 내용이 겉으로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무표-색이라고 칭하게 된다. 이런 뜻이다.
여하튼 리비도 수행방안도 현실에 중요하다. 리비도적인 본능적 감성적 충동=> 그 에너지를 그대로 싣고 다만 그 방향을 수행방안으로 돌린다. => '열정적인' 자세로 일반적인 계를 실천함
예를 들어 앞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자. 어떤 이가 노출이 심한 아름다운 여성을 대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상대방이 원하는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또 반대로 극단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무시나 냉대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이 두 극단을 다 상대가 싫어한다. 그런 가운데 비교적 무난한 내용을 찾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상대에 대한 공양, 공경, 존중, 찬탄 정도가 바람직하다고 보게 된다.
이것이 매 경우 잘 안된다고 하자. 그러면 곤란하다. 그 상태로 계속 임하면 결국 3 악도에 들어가 처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일단, 수행을 방해받지 않을 조용한 수행처에 들어가 닦아야 한다. 예를 들어 산 속이거나, 숲 무덤가등 자신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아뇩다라삼먁삼보디를 늘 생각하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이후 보리심을 잘 일으켜 중생을 대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정이 노래에서도 들리는 듯하다.
여하튼 이런 여러 사례를 놓고 망상분별이 나타나는 과정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어떤 이가 자신이 자유롭게 무언가를 추구하고 실천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 실질은 대부분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것이 된다. 그 사정은 그가 매 상황을 대해 일으키는 매 분별이 망상분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그가 자유롭게 뜻을 성취하는 과정은 실질적으로는 욕계에서 그 자신이 3 악도에 끌려가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욕계내 파순을 만족시키는 결과가 된다. 그런 사정으로 계에 어긋나는 행위는 타승이라고 표현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이 실질 의미는 낙타나 곰 벌의 행위라고 보게 된다.
다만 그 주체는 그 사정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과정을 자신이 자유롭게 행해 뜻을 성취한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그 주체의 마음 안을 차지한 내용 자체가 망집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욕계내 마 파순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 주체안에 불어 넣은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반 광고에서도 이용한다. 어떤 유명 아이돌 가수나 배우가 이 음료수가 시원하다고 선전한다고 하자. 그리고 이것을 대한 이 가운데 몇몇은 그 음료수를 찾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렇게 행하는 것이 자신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스스로 여긴다. 그런데 이 과정을 잘 이해해보면 욕계에서 묶이는 현상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욕계 내 중생이 자유롭게 행한다고 여기면서 열심히 행한다. 그리고 그 결과 3 악도라는 수용소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그 배경이 있다.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에 들어가 있는 망집의 정체다. 그것은 본래 그 주체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주체입장에서 보면 마음에 들어온 손님과 티끌[객진]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처음 누가 그 주체에게 심어 놓았는가 그 배경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의 핵심은 이런 망집에 바탕해 일으킨 일체의 소원을 다 제거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것이 무상, 무원무작 삼매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상삼매를 바탕으로 안인을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자비심을 바탕으로 한 서원을 대체해 넣고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실상이 공한 법자리에 앉아 이를 실천해 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중생제도를 행하는 수행자의 기본 자세가 된다.
오늘은 글이 조금 길어졌다. 그러나 망집을 일으키는 배경문제는 좀 더 자세히 살필 부분이 많다. 망집을 일으키는 데에는 과거에 행한 의업,구업, 행업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았다. 이외의 사정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시 살피기로 한다.
여하튼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처방이 필요하다.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다. 그러나 욕계현실에서는 이것이 쉽지 않다.
현실에서 상을 취하지 않고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당장 거리에 나서기도 힘들다.
그런데 망집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3 악도에 처하지 않는 방안을 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망집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일단 평소 망집상태에서 행하는 방식으로 업을 행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 방향인 수행방안으로 매 경우 임해야 한다.
그것이 보시, 정계, 안인, 정진의 수행덕목이다.
일반적으로 좋음(+)에 집착하고 아끼는 경향이 있다. => 이를 아낌이 없이 베푸는 수행을 해야 한다.
자신이 좋음(+)을 얻기 위해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 생명,신체,재산,가족 등등)을 침해하고 나쁨(-)을 가하는 경향이 있다. => 이것을 중지해야 한다.
그리고 반대로 다른 생명이 자신의 좋음(+)을 침해하고 나쁨(-)을 가할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불같이 분노를 일으키고 미움 원망을 갖고 상응해 보복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 이런 경우 생사현실이 꿈과 같은 것임을 관하고 상을 취하고 임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 일체에 분노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좁고 짧고 얕게 관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당장 이익을 가져다 주는 방향에 집착한다. 그래서 그 결과 3 악도에 묶이게 된다.
=> 이런 경우 평소 없는 선을 새로 만들고 있는 선은 키우고 반대로 없는 악은 만들지 않고 있는 악은 키우지 않는 수행 노력을 꾸준히 정진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복덕자량이 쌓인다.
그리고 이렇게 복덕자량이 쌓이게 되면 이후 정려나 반야 바라밀도 닦아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지혜자량까지 구족할 수 있게 된다.
그러려면 우선 망집에 바탕해 행하는 방향과 반대로 꾸준히 수행에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사현실에서 가장 쉬운 일은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보면 이 마음을 바꾸는 것이 또 대단히 힘들다. 우선 자신이 되고자 하는 서원부터 잘 그려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세상을 관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보리심을 일으켜 임하는 자세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바뀌어야 이후 모든 생사현실 내용이 바뀌게 된다.
쉬다가 노래를 듣다보니 심지어, 묻지 않는다는 외국 노래까지 듣게 된다. 그러고보면 외국 노래는 다루는 분야가 넓다. 묻지 않는 일까지 노래를 부르는 주제로 삼는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된다. 그런데 이것이 망상분별이 생기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부처니의 설법은 부처님이 스스로 밝히듯 일체가 희론이다. 그런데 그 희론이 갖는 가치가 크다. 그 희론은 다른 희론과 달리 중생이 망집을 벗어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뗏목 기능을 하는 희론이다. 색상문자나 노래나 향이나 음식 그런 것 일체가 그런 기능을 하면 그것이 불사라고 할 수 있다. 즉 부처님이 중생제도를 하는 사업이 된다.
반대로 수행자가 일체를 그런 시각에서 대하면 또 그것도 마찬가지가 된다.
이는 예술품과 같다. 예술가는 모든 것을 재료로 예술을 만들 수도 있다. 반대로 관객은 또 모든 것을 예술품으로 감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반대가 되면 또 곤란하다. 예를 들어 반대로 임해서 모든 것을 망집으로 대하면 생사고통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대하는 입장에서도 모든 것을 잘못 대하면 부처님 가르침마처도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원인으로 된다.
♥ 잡담 ♥지구의 이상적 기후문제
현재 긴급소식이 인터넷에 올려져 있다. 지구가 현재 23.5 도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큰 일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것도 보살이 이렇게 일부로 기울게 했다고 하는 듯하다. 그 영향으로 현재 날씨가 덥다. 그런데 조금 있으면 날씨가 추워진다. 이렇게 한반도의 날씨를 매년 춘하추동 번갈아 맛보게 하기 위해서 23.5 도를 기울였다고 한다. 조금 더 기울어졌다거나, 조금 덜 기울어졌으면 또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여하튼 그 영향으로 66,6 도 이상의 위치에서 가운데 극단적인 곳에서는 1년 동안 단 한번만 해가 뜨고 진다는 기이한 소식도 듣게 된다. 즉, 해가 뜨면 반년동안 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사실일지 궁금하다.
그런데 여하튼 23,5 라는 숫자에서 이상상태가 무엇인가를 먼저 깨닫자는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노래를 듣다보니, 모 연구원이 앞으로 숙왕화님보다 더 뛰어나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렇게 되기가 쉽지는 않다. 1 m 도 제자리에서 뛰어 넘기 힘든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 모 연구원이 변신해서 또 다른 연구원이 된다는 소식도 듣는다. 노래가 망상을 일으키는 정도가 점입가경이다.
5군비구(群比丘)라고도 함. 석존이 출가하던 때 부왕의 명으로 태자를 모시고 함께 고행하던 이를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녹야원에서 처음 교화하여 비구가 된 다섯 사람. 아야교진여ㆍ아습비ㆍ마하마남ㆍ바제ㆍ바부. 혹은 아야교진여ㆍ알비ㆍ마하남ㆍ발제ㆍ바파. 또는 교진여ㆍ아사바사ㆍ마하나마ㆍ발제리가ㆍ바사파. 또는 요본제(了本際)ㆍ정원(正願)ㆍ대호(大號)ㆍ인현(仁賢)ㆍ정어(正語). 혹은 구린ㆍ알폐ㆍ마남구리ㆍ발제ㆍ십력가섭.
답 후보
● 오비구(五比丘)
오십팔계(五十八戒)
오연(五緣)
오위(五位)
오자진언(五字眞言)
■ 영-중-일-범-팔-불어 관련-퀴즈 [wiki-bud]Fayun [san-chn]
tāḍayati 能打 [san-eng]
kurvavadhānaṃ $ 범어 pay attention [pali-chn]
aṭṭhārasa-buddha-dhammā 十八不共佛法 [pal-eng]
maatughaata $ 팔리어 m.matricide. [Eng-Ch-Eng]
occult 秘蜜 [Muller-jpn-Eng]
毗尼藏 ビニゾウ vinaya collection [Glossary_of_Buddhism-Eng]
ATONEMENT☞ See also: Dedication of Merit. “Early Buddhism (i.e. Theravada) does not stress vicarious atonement; each person must work out his own salvation.
39 나쁜 용과 전염병을 일으키는 귀신이 독기를 퍼뜨려 열병으로 목숨을 마치려 할 때 지성으로 대비주를 소리내 외우면 전염병은 없어지고 수명은 길어지리라. ● 바사바삼 佛沙罰嘇<三十九> va ṣa va ṣaṃ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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