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엄경론』
K1263
T1739
제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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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엄경론』 ♣1263-040♧
제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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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華嚴經論卷第四十 ...
K1263
신화엄경론 제40권
이통현 지음
장순용 번역
39) 입법계품⑨
선재동자의 선지식인 11지의 지위에서 두 번째 덕을 추양해 승진하는 것을 대략 네 문으로 세우겠다.
이 이하는 11지 중의 선지식을 밝힌 것이다.
첫째는 덕을 추양해 승진케 하는 것이며,
둘째는 선우(善友)의 소재를 이 세계에 있다고 제시해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선우의 명칭이 마야(摩耶)임을 든 것이며,
넷째는 공경히 예를 드리고 작별하고 가는 것이다.
이 세계 속에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부처의 경계이니,
선재동자가 마야부인의 처소에 나아가 부처 경계를 관하는 지혜를 얻으니,
이 세계란 것은 바로 부처 지혜의 경계이며,
마야라 이름 붙인 것은 한역하면 천후(天后)이고 또한 부인(夫人)이라고도 말하니,
바로 국대부인(國大夫人)이다.
이는 11지인데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 공용 없는 대자비로 체(體)를 삼아서 보현행문을 출생하는 것이니,
그 뜻을 여덟 가지 문으로 나누겠다.
첫째,
또한 5위 중 10주위 속의 제7주에서부터 휴사우바이는 자비로부터 지혜를 닦는 문을 주재하는 것이니,
제8주 속에 이르면 1분(分)의 공용 없는 지혜가 현전한다.
둘째,
제10주 중에 도달한 사자당 왕녀인 자행(慈行)은 지혜와 자비가 원융하고 구족한 문을 주재한다.
셋째,
10행 중 제7행에서 무염족왕(無厭足王)은 10행 중에서 자비의 방편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문을 주재한다.
넷째,
제8행에서 대광왕(大光王)은 공용 없는 행으로 자비를 행하는 문을 주재한다.
다섯째,
10회향 중 제7ㆍ제8 회향에서 관세음보살과 정취보살이 똑같은 회상에서 나타난 것은 자비와 지혜가 원융하여 둘이 없는 문을 주재한다.
여섯째,
10지 중 제7지에서 수화(樹華)를 꽃피우는 야신(夜神)은 대자비로써 행을 발하여 두루 하면서 과(果)를 나타내는 문을 주재한다.
일곱째,
제10지 중 구파(瞿波)는 대비지(大悲智)가 원만하여 법계를 널리 포함한 문을 주재한다.
여덟째,
이 제11지 초(初)에서 마야부인을 대자비의 으뜸으로 삼은 것은 곧 공용 없는 자비가 원만한 것이니,
자비로 지혜를 일으켜서 환생(幻生)으로 성불하는 것과 아울러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모든 행문(行門)을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위의 법문을 보살의 대원지환해탈문(大願智幻解脫門)이라 칭하는 것이니,
이는 이 11지 중에서 대자비로 으뜸을 삼고 본원(本願)의 자비심으로 지혜를 일으켜 환생(幻生)함으로써 성불과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과 아울러 일체 모든 행문을 나타내 보여서 법계와 허공계에 두루 함을 밝힌 것이니,
이상 여덟 가지 문은 5위의 자비를 닦는 차례와 닦아 나아가는 방편의 차별과 동이(同異)를 융화해 회통하는 것이다.
또 이 11지 중에서 열 가지 문을 장과(長科)하여 간략히 이 지(地)의 행상(行相)의 차례를 알게 하겠다.
첫째,
마야부인은 자비로부터 지혜를 일으켜 모든 행을 환생(幻生)해서 부처를 성취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문을 밝힌 것이다.
둘째,
33천왕의 이름인 정념(正念)과 여인의 명칭인 천주광(天主光)은 지혜와 자비가 자재로워서 시방 모든 법이 빠짐없이 현전함을 정념하는 문을 밝힌 것이다.
셋째,
동자의 스승은 시방에 두루 원만하여 세간법의 사범(師範)을 주재하는 문을 밝힌 것이다.
넷째,
온갖 기예를 잘 아는 것은 시방에 두루 한 자지문(字智門)을 밝힌 것이다.
다섯째,
현승우바이는 세간의 일체 정사(正邪)와 길흉과 제방(諸方)의 기술과 사무(師巫)를 주재해서 일체를 설하여 전수하고 통달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문을 밝힌 것이다.
여섯째,
견고(堅固)장자는 세간에 처하면서도 집착이 없어서 청정해탈을 염하는 문을 밝힌 것이다.
일곱째,
묘월(妙月)장자는 세간에 처해서 청정한 지혜광명문을 밝힌 것이다.
여덟째,
무승군(無勝軍)은 무상법(無相法) 중에서 상(相)을 다함을 얻는 분을 밝힌 것이다.
아홉째,
최적정(最寂靜)바라문은 성원어(誠願語)의 문을 밝힌 것이다.
열째,
덕생(德生)동자와 유덕(有德)동녀는 지혜와 자비가 원만하여 세간에 처한 환주(幻主)의 문을 밝힌 것이니,
이는 「출현품」 중에서 문수와 보현의 두 지위가 가지런한 것과 같아서 법신의 지혜와 자비가 가지런히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 열 가지 문은 11지의 행이며,
이하 자씨(慈氏)여래에게 이르는 것은 1생(生)의 불과가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1생이란 것은 무생(無生) 중의 생(生)으로서 3세의 먼저와 나중이 있는 생이 아니다.
첫 번째,
해당되는 지위에 올바로 들어가는 법문 중에서 “이때 선재동자” 이하는 11단락으로 장과하겠다.
첫째,
“이때 선재동자” 이하 “부처 경계를 관하는 지혜를 얻는다”에 이르기까지 1행 반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승진해서 11지문(地門)에 들어감을 밝힌 분이다.
둘째,
“이렇게 생각했다” 이하 “이 생각을 했다”에 이르기까지 11행 반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마야부인의 몸이 체상(體相)이 자재로운 것을 찬탄함을 밝힌 문이다.
셋째,
“주성신(主城神)이 있는데 그 명칭을 보안(寶眼)이라 한다” 이하 “나아가 반드시 성불한다”에 이르기까지 36행의 경문은 주성신이 선재동자를 위해 심성(心城)을 주재해 다스리는 법문을 설함을 밝힌 분이다.
넷째,
“이때 어떤 신중신(身衆神)” 이하 “일체의 찰토에 부처가 출현함을 목도한다”에 이르기까지 14행 반의 경문은 신중신이 마야부인의 몸을 찬탄하자 마야부인이 이당(耳璫:귀걸이에 달린 구슬)에서 광명을 놓아 선재동자의 몸에 들어감을 밝힌 분이다.
다섯째,
“그때 보살의 법당을 수호하는 나찰귀왕(羅刹鬼王)이 있으니 이름하여 선안(善眼)이라 한다” 이하 “이것이 열 가지이다”에 이르기까지는 나찰왕이 선재동자를 위해 열 가지 선지식을 가까이하는 법을 설함을 밝힌 분이다.
여섯째,
“불자야” 이하 “이 말씀을 설할 때”에 이르기까지 11행의 경문은 나찰왕이 선재동자를 위해 열 가지 삼매법을 설해서 선재동자로 하여금 늘 선지식을 가까이함을 얻게 하는 것을 밝힌 분이다.
일곱째,
“선재동자가 공중을 우러러보니” 이하 “여래의 불가사의한 미묘공덕”에 이르기까지 27행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나찰왕이 시방에 공경히 예를 드리고 선지식을 구하는 법을 설하고 다시 몸과 마음이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줄 관하라는 법을 설하는 것을 보고서,
마야부인의 연꽃과 법좌ㆍ누각의 장엄을 보게 됨을 밝힌 분이니,
이상의 3중신(衆神)은 이 11지에 들어가기 전의 방편이다.
방편에 셋이 있으니,
첫째는 심성을 잘 수호하는 것이며,
둘째는 음성의 성품이 시방에 두루 함을 잘 아는 것이며,
셋째는 나찰왕의 명칭이 수호법당(守護法堂)이란 것은 열 가지 삼매문과 몸과 마음이 몽환(夢幻)과 같은 줄 아는 관(觀)이 바로 법계의 당(堂)을 수호한다는 뜻이다.
나찰왕이란 한역하면 가외(可畏)이고 왕의 명칭은 자재(自在)이니,
삼매로써 관찰하여 심신의 법당을 수호해서 망령된 삿됨과 악귀를 타파하기 때문이다.
마야의 이당(耳璫)에서 광명을 놓아 선재동자의 몸에 들어간 것은 교광삼매(敎光三昧)에 들어감을 밝힌 것이니,
이(耳)는 가르침의 소리를 주관한다.
이 세 가지 법을 11지의 이전 방편으로 삼아야 비로소 11지문에 올바로 들어가게 된다.
여덟째,
“이때 선재동자가 이 같은 법좌를 보고서” 이하 “이미 적멸의 몸을 성취하게 되었다”에 이르기까지 31행 반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마야부인의 환(幻)과 같은 색신이 시방 일체의 중생 앞에 두루 함을 봄을 밝힌 분이다.
아홉째,
“이때 선재동자가 마야부인을 보고서” 이하 “어떻게 보살행을 배워서 성취하게 되었는가?”에 이르기까지 37행 반의 경문은 마야가 일체 모든 색상(色相)을 초월한 몸을 나타내 찰해에 두루 하자,
선재동자도 또한 그와 동등한 몸을 나타내 앞에서 합장해 공경히 예를 드리면서 구하는 바를 신청하는 것과 아울러 모든 삼매문에 증명해 들어감을 얻음을 밝힌 분이다.
열째,
“답하기를,
불자야,
내가 이미 보살의 대원지환해탈(大願智幻解脫)을 성취했다” 이하 “보현의 행원을 수행해서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자에겐 나 스스로 몸을 나타내 다 그의 어미가 된다”에 이르기까지 107행의 경문은 총체적으로 마야가 선재동자가 질문한 법문에 답함을 밝힌 분이다.
열한째,
“이때 선재동자가 마야부인에게 ‘이 해탈의 경문을 증득한 지 얼마나 됐습니까?’ 하고 말씀드리니” 이하 “나는 오로지 이 보살의 대원지환해탈문만을 안다”에 이르기까지 27행 반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질문한 “이 해탈을 얻은 지 얼마입니까?”에 답함을 밝힌 분이다.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면,
무릇 마야부인은 총상(摠相) 중에서는 3법으로 이루어졌지만,
별상(別相) 중에서는 부처의 수와 중생의 수와 동등한 행문(行門)으로 그 명칭을 얻은 것이다.
3법이란 것은,
첫째는 일체 모든 부처와 중생이 똑같이 평등하고 모습이 없는 자체 청정한 법신의 묘리(妙理)로 체(體)를 삼은 것이며,
둘째는 일체 모든 부처와 중생이 똑같이 평등한 이(理) 속에서 보광명의 작위도 없고 의지함도 없는 지혜로써 체를 삼는 것이며,
셋째는 일체 모든 부처와 중생이 동등한 작위 없는 이지(理智) 속에서 작위 없는 성품으로 일체 중생을 길이 양육하여 이익케 하는 대자대비가 일체 중생과 더불어 본래 동일한 체(體)라서 자타의 성품이 없이 항상 이익케 하면서도 은혜의 과보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바로 천진본연(天眞本然)으로 중생의 공유한 것이라서 이 3법에 의지하여 행하면 곧 얻는다.
그러나 비록 중생이 공유하더라도 중생으로서 미혹한 자는 반드시 방편행문을 갖춰 발기해서 명(明)을 드러내야 비로소 얻는다.
무엇을 방편이라 말하는가?
이 방편에 열 가지 대원문(大願門)이 있으니 원(願)대로 닦고 배워야 한다.
첫째,
바라건대 초발심 때에 일체 중생의 수와 같은 자비의 대원을 일으켜 반드시 일체 중생을 구원하고 제도함으로써 삼계의 고(苦) 속을 벗어나게 하여 모두를 성불케 하는 것이다.
둘째,
바라건대 시방 일체 모든 부처를 받들어 섬기고 공경하고 공양하여 헛되이 지나치질 않는 것이다.
셋째,
바라건대 모든 세계 속에 태어나는 곳에서 덕과 기예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받들어 섬기면서 수학(修學)하는데,
비록 모든 기예를 배워서 지혜가 인천(人天)을 능가하더라도 교만을 부리지 않고 늘 대자대비를 으뜸으로 삼는 것이다.
넷째,
바라건대 항상 4념처관(念處觀)으로 병에 따라 다스리고,
4정근(正勤)을 세워서 근력(根力)을 성취하는 것이다.
다섯째,
바라건대 항상 7각분(覺分)으로 심수(心首)를 여의지 않고,
모든 올바른 슬기를 오래 길러서 12연생(緣生)을 비춰서 대지혜 바다를 성취하는 것이다.
여섯째,
바라건대 항상 8정도의 행으로써 비롯함도 없고 마침도 없이 늘 현재에 현전하는 것이다.
일곱째,
바라건대 자기의 정도(正道)가 현전하매 세간에 항상 머물러 인천(人天)의 일체 6도(道) 중생을 이익케 함으로써 자기가 나머지 방향의 정토를 따로 구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일체 법계문을 밝게 보아서 오염과 청정이 본래 망령됨으로부터 일어나지만 진(眞)에 의거하면 본래 없다는 것을 깊이 아는 것이다.
여덟째,
바라건대 보살의 5위 행문에서 법칙을 잘 알아서 10주와 10행과 10회향과 10지와 11지 중의 방편과 모든 삼매와 인천을 이롭게 하는 법을 일념에 두루 하면서 그 취지(趣旨)를 잘 알아 차례로 수행하는 것이다.
아홉째,
바라건대 늘 본원(本願)을 염(念)하는 풍륜으로 근본 지혜를 지녀서 가없는 모든 바라밀행을 고양해 시방계와 동등하게 색신을 대현(對現)해서 근기에 응해 일체 중생을 제접해 인도하는 것이다.
열째,
바라건대 늘 대자비의 몸으로 일체지를 일으켜서 이(理)대로 법계에 두루 하여 대지혜로 널리 비춤으로써 한 물건도 남기지 않고 평등하게 널리 자량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마야부인의 몸으로 성취한 행이라서 만약 수행하는 자라면 반드시 이같이 닦아야 하니,
한 부처도 대원(大願)의 바다와 대비지(大悲智)로부터 생기지 않은 것이 없다.
이 때문에 경문에서 “다만 보현의 행을 행하면,
원(願)이 모두 나로부터 생긴다”고 한 것이니,
이 11지의 지혜가 자비로부터 일어남을 나타낸 것이다.
10지 이전에서는 대자대비의 행이 모두 본원과 근본지로부터 생겨나서 수학(修學)하여 오래 양육함이 있지만,
11지에서는 일체의 공(功)이 종결되매 순수하게 이 대자비를 법계의 체(體)로 삼아 자비로써 지혜를 낳기 때문에 중생의 수와 같은 몸을 환생(幻生)하여 늘 이익케 함으로써 일찍이 휴식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를 이름하여 “부처를 낳음”이라 하는 것이니,
32상과 나아가 97상을 얻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초발심 때에 1분(分)의 진(眞)을 회통해서 지혜와 자비가 똑같이 일어나면,
비록 통화변역(通化變易)하는 자재로움은 얻지 못하지만 법이 동일해서 지견도 진(眞)인 것이다.
이렇게 닦아 배우고 이렇게 깨달아 들어가야 비로소 그 이름이 “초발심 때 문득 정각을 성취함”이며,
또한 그 이름이 부처 지견으로 중생을 깨우쳐서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 지견에 들어가도록 하고자 함이다.
이로부터 마야부인은 11지의 초문(初門)을 나타낸 것이며,
이후 아홉 명의 선지식은 총체적으로 대자비로부터 모체(母體)를 삼아 모두 모행(母行)을 따라서 지혜로 환생(幻生)하여 자비와 지혜가 두루 하매 시방에 널리 나타나서 계급차제의 대치(對治)를 짓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이후의 선지식도 비록 “나는 오로지 이 법문만 알고 나머지는 능히 알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동(同) 속에 별(別)을 갖춤을 밝힘으로써 보현의 차별지가 세속을 따라 두루 함을 나타낸 것이니,
10지 이전에서 장애에 걸려 요달하지 못한 것과는 같지가 않다.
이 11지는 다만 11지의 행을 행함을 수행해서 이 보현의 11지를 채우는 지위에서 덕의 두루 함을 드러냄으로써 행이 진속(塵俗)에 구비되어 출세간을 구하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니,
천주광(天主光)으로부터 이후는 모두 이 세간의 범류(凡流)와 같이하기 때문에 신상(神相)의 특이한 형상(形狀)을 표시하지 않아서 세간 사람과 한 종류이면서도 다만 법으로써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10지 이전은 자비와 지혜를 닦는 자기의 출세간 성도(聖道)의 법문이며,
11지는 스스로 대자비의 심행(心行)으로 세속에 나아가 중생을 구제하는 문을 밝힌 것이니,
자기의 출세간 도가 원만하므로 또다시 해탈을 구하거나 비록 오염되었더라도 오염을 벗어나는 마음을 구하지를 않고,
다만 법성의 배를 타고서 대자비의 돛을 달고 대지혜로 배의 선장을 삼아 본원의 바람을 따라서 모든 바라밀의 그물을 풀면서 늘 생사 바다에 노닌다.
그러면서 집착이 있는 일체 중생이라는 고기를 제도하여 의주(依住)함이 없는 보광명의 지혜 언덕에 안치함으로써 항상 일체의 환(幻)이 머무는 만행공덕의 법계의 걸림없는 보당(寶堂)에 태어남을 나타낸 것이니,
가령 아래의 자씨(慈氏)가 거처하는 누각이 이에 해당된다.
가령 선재동자가 “나찰왕이 선지식의 법을 구하는 것을 설하기 위하여 선재동자로 하여금 시방에 널리 예를 드리고 일체 경계를 정념으로 사유하고 용맹하고 자재롭게 시방에 두루 노닐면서 몸과 마음이 꿈과 같고 환(幻)과 같고 그림자 같음을 관해서 선지식을 구하게 함”을 얻고,
이때 선재동자가 그 가르침을 받아 행하는 즉시 대보련화가 땅으로부터 솟아남을 본 것에서 시방에 선지식을 구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몸과 마음 안팎의 시방을 법으로써 자세히 구해도 어떤 체성이 있겠는가 하면서 법신에 칭합(稱合)케 함을 밝힌 것이며,
또 몸과 마음이 꿈과 같은 줄 관하게 하고 그림자 같은 줄 관하게 한 것은 그 가르침을 요달케 해서 성(性)과 상(相)이 그림자처럼 둘이 없음을 요달해서 문득 지환생문(智幻生門)으로 들게 하는 것이 바로 마야부인을 보는 것이다.
처음에 연꽃이 땅으로부터 솟아남을 본 것은 자성의 청정법신으로 지체(地體)를 삼는 것이니,
일체 만행의 연꽃이 이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금강을 줄기로 삼는다는 것은 근본지인데,
일체의 차별행과 차별지가 법신의 근본지로부터 생겨남을 밝힌 것이니,
설사 이 경계의 장엄이 있을지라도 또한 이것의 의보(依報)일 뿐 끝내는 따로 과보의 인과가 있지 않은 것이다.
묘보장(妙寶藏)이란 것은 자비로 양육한 보생(寶生)이다.
마니를 잎으로 삼는다는 것은 행이 무구(無垢)한 보생이다.
광명보왕(光明寶王)으로 그 대(臺)를 삼는다는 것은 근본지가 나타나매 비추는 작용이 자재로운 것의 보생이다.
온갖 보배의 빛깔과 향기를 그 수(鬚)로 삼는다는 것은 계ㆍ정ㆍ혜ㆍ해탈ㆍ해탈지견향의 보생이다.
무수한 보배 그물로 그 위를 가득 덮는다는 것은 능히 베푼 가르침의 그물의 보생이다.
위로는 누관(樓觀)이 있다는 것은 차별지의 보생이다.
그 명칭이 시방 법계를 널리 용납하는 장(藏)이란 것은 대지혜가 두루 하고 가르침의 그물이 널리 덮는 것의 보생이다.
기묘한 엄식(嚴飾)이란 것은 묘행의 과보로 장엄한 것이다.
금강을 땅으로 삼는다는 것은 법신의 보생이다.
천주(千柱)의 항렬이란 것은 행에 천만 가지 행이 있는 것이다.
일체가 모두 마니 보배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하나의 행마다 더러움이 없는 것이다.
염부단금(閻浮檀金)으로 그 벽을 삼았다는 것은 유화(柔和)와 인욕의 보생이다.
온갖 보배 영락이 사방으로 드리워졌다는 것은 4섭법의 행으로 자비를 드리워서 중생을 제접하는 것의 보생이다.
이하는 이에 준거해서 유례하여 알 것이니,
가르침이 광대하고 경문이 장황해서 갖추어 기술할 수가 없다.
이하에서 마야부인이 나타낸 법계에 두루 한 몸과 일체 중생의 사업(事業)과 함께 하는 동등한 몸과 일체 모든 여래를 낳는 몸은 경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가령 선재동자가 마야부인에게 “이 해탈을 얻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라고 물으니,
마야부인이 “선남자야,
지나간 고세(古世)에 불가사의함을 지나서 최후 신 보살의 신통과 도안(道眼)으로도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오직 부처라야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뜻인즉 시분(時分)으로 알 수도 없고 겁수(劫數)로도 잴 수가 없어서 반드시 부처의 지인(智印)으로 그윽이 합치하여 고금의 양(量)이 다하고 시말(始末)의 소견이 없는 자라야 비로소 능히 그 발심과 법을 얻음이 오래되고 친근함을 앎을 밝힌 것이다.
만약 시종의 견해를 세운다면,
설사 무진찰미진(無盡刹微塵)으로 견주어서 수(數)를 이룰지라도 다할 수 없는 것이며,
설사 무진찰미진을 거듭 더해서 견주어서 수를 이루더라도 또한 다할 수 없는 것이니,
수가 없어지고 계박이 다해서 지혜가 나타나야 비로소 아는 것이니,
곧 수법(數法)으로는 그 멀고 가까움을 계산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계산하는 법으로 한다면.
무진겁이 다하도록 털구멍 속의 허공의 양을 계산해도 마침내 그 변제(邊際)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니,
허공은 수량(受量)이 없기 때문에 무량(無量)으로 득시(得時)를 삼은 것이다.
문수사리의 게송에서 “일념으로 널리 무량겁을 관하니,
감도 없고 옴도 없고 머묾도 없다.
이같이 3세의 사(事)를 요달해 알아서 모든 방편을 초월해 10력을 성취했다”고 했으니,
이는 최후신 보살의 대수(大數)이다.
이때 겁의 명칭이 정광(淨光)이란 것은 법신으로 겁의 체를 삼음을 나타낸 것이며,
세계의 명칭이 수미덕(須彌德)이란 것은 부동지를 얻어서 세계의 체를 삼은 것이다.
비록 모든 산과 5취가 섞여서 거처하고 있긴 하지만,
그 국토가 온갖 보배로 이루어져서 청정히 장엄하여 모든 더러움이나 악이 없다는 것은 오로지 그 자기 마음이 청정하매 곧 일체의 경계가 청정해서 만법이 더러움이 없지만,
청정과 더러움의 두 견해를 지으면 곧 자기 마음의 청정하지 못함을 보는 것이니,
대자비가 5취를 두루 포함하고 대지혜가 오염과 청정 등의 견해가 없기 때문에 그 명칭이 ‘온갖 보배로 장엄함’임을 밝힌 것이다.
천억의 4천하가 있다는 것은 만행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지위를 밝힌 것이며,
하나의 4천하가 있으니 이름하여 사자당(師子幢)이라 한다는 것은 대지혜가 두루 해서 시방이 하나의 경계임을 밝힌 것이다.
그 가운데 있는 80억 왕성에서 하나의 왕성이 있으니 이름하여 자재당(自在幢)이라 한다는 것은,
8정도로 10바라밀을 행하니 그 가운데 지혜로 노닐면서 거처하는 바를 이름하여 “윤왕이 거처하는 바”라 하고 명호를 자재당이라 함을 밝힌 것이며,
왕의 명칭이 대위덕이란 것은 이 지혜가 자재로워서 능히 생사를 다스리면서도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그 왕성의 북쪽에 하나의 도량이 있으니 이름하여 만월광명(滿月光明)이란 것은 성의 북쪽에서 북(北)은 감위(坎位)가 되는데,
이 사(師)ㆍ군(君)ㆍ지(智)가 거처하는 바로서 미혹을 다스리는 지위이기 때문에 명호가 도량이며,
능히 열혹(熱惑)을 다스리기 때문에 만월광명이라 이름한다.
또한 그 도량신을 이름하여 자덕(慈德)이라고 말한 것은 지혜로써 미혹을 교화하는 데 자비를 덕으로 삼는 것이다.
보살의 명칭이 이구당(離垢幢)이란 것은 법신으로 행을 일으키니 성품에 스스로 더러움이 없는 것이며,
도량에 앉아서 장차 정각을 성취한다는 것은 성취코자 하는 것이 ‘장차’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악마가 있으니 이름하여 금색광(金色光)이라 하는데,
그 권속인 병사들과 함께 보살의 처소에 이르자,
저 대위덕 전륜왕이 이미 보살의 신통자재를 얻어 병사들을 화작(化作)하니,
그 수가 배나 많아서 도량을 둘러싸매 모든 마(魔)가 겁에 질려 다 스스로 흩어졌다”는 것에서 악마의 명칭이 금색광이란 것은 법신의 지혜 경계가 진가(眞假)가 일상(一相)이라서 한쪽으로는 더러움을 여의었지만 보살이 마음과 경계의 평등을 아직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일체지왕(一切智王)을 빌려야 함을 밝힌 것이다.
또한 마음과 경계의 이(理)가 사무쳐 둘이 없으면 심경이 환(幻)과 같고 일체 경계가 환지(幻智)로 환생(幻生)한 것임을 관하여 곧 경계에 미혹되지 않아서 망상의 심마(心魔)가 총체적으로 법계일 뿐이고,
모두 불사(佛事)가 됨을 이름하여 흩어짐
〔奔散〕이라 함을 밝힌 것이다.
도량신이 자비로 환희한다는 것은 법열(法悅)이다.
도량신이 그 왕에게 자식의 상념을 낸다는 것은,
견해를 타파하는 것이 지혜를 말미암아 행을 일으키고 세속을 교화하는 것이 자비로 말미암을 밝힌 것이며,
이 지위에서 지혜가 자비를 말미암아 낳은 바임을 밝히기 때문에 지혜를 관하는 것을 자식과 같이하고 나아가 합해서 회통하는 것이다.
윤왕이란 것은 비로자나가 이에 해당되고,
도량신은 내 몸이 이에 해당된다는 것은,
사람이 그 뜻을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사(事)에 의탁해 상(像)을 나타냄으로써 알기 쉽게 함을 밝힌 것이다.
끝내는 마음 밖에 따로 경계의 마(魔)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다만 마음이 안팎과 중간과 만법이 없어서 자타가 동체임을 밝히면,
하나도 또한 하나가 아니고 남도 또한 남이 아니지만,
다만 법이 유현(幽玄)하여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에 사(事)에 가탁해서 표명한 것이니,
모든 지혜 있는 자는 비유를 통해 이해하라.
나아가 일체의 위없는 대보리심을 처음으로 발할 때 모두 먼저 대원과 대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교화해서 바야흐로 출요(出要)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을 구하는 것과 아울러 행의 원만함에 이르기까지 이 법이 옮기지를 않으니,
일체 모든 부처가 모두 이와 같아서 먼저 대자비의 대원행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시방 세계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가 장차 성불할 때 모두 배꼽 안에서 대광명을 놓아서 내 몸과 나의 궁전옥택(宮殿屋宅)을 비춘 것은,
비(悲)가 궁(宮)이고 지(智)가 전(殿)이며,
양육함이 옥(屋)이 되고 생사의 바다가 택(宅)이 된다.
배꼽이 몸 가운데 처하니 일체 중생의 생장하는 제(際)라서 이곳이 함생(含生)의 생장하는 장(藏)임을 밝힌 것이니,
나무의 근괴(根魁:나무 부리의 두뇌 부분)의 제(際)가 위쪽으로는 줄기와 가지를 오래 양육하고,
아래로는 뿌리를 낳아 땅으로 들어가서 음양의 중제(中際)와 발생의 원시(元始)에 처하는 것과 같다.
또 갑자순(甲子旬) 속에서 술(戌)을 천괴(天魁)로 삼아서 왼쪽으로 양(陽)을 내고 오른쪽으로 음(陰)을 내는 것과 같으니,
이제 배꼽 속에서 광명을 놓는다는 것은 생을 받는 시원(始元)이 천괴의 상(像)과 같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자비를 일으키는 시초이자 대지혜를 낳는 원(元)이기 때문이다.
인생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처음 낳을 때는 작고 어리지만 점점 자라면서 커지는 것이 또한 제륜(臍輪:배꼽)으로부터 일어나서 기(氣)가 상하의 생장하는 성품에 통하는 것이니,
이 처소가 바로 기(氣)를 받아 생을 시작하는 원(元)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광명을 놓은 것이다.
이는 건위(乾位)이고 시종의 제(際)이고 생장의 원(元)이니,
이 배꼽 안이 이에 해당된다.
또한 지혜와 자비의 중제(中際)에 처함을 나타낸 것이니,
지혜를 성취하는 중심은 미간의 호상이 이에 해당되며,
대자비를 성취하는 중심은 곧 배꼽 안이 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는 11지 보현이 세간에 처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문이다.
10지에서 출세간으로 진(眞)을 반연할 때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재롭지 못해 행이 광대하지 못한 장애를 다스리는 것이니,
가령 「십정품」중에서 모든 보살이 보현을 찾아볼 때 세 번을 찾아봐도 보지 못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대지혜를 따르는 중에서 단바라밀(檀波羅蜜)을 행하는 것으로 주(主)를 삼아서 법계바라밀해(法界波羅蜜海)의 문을 총체적으로 통괄하니,
3세의 일체 모든 부처가 자비를 초생(初生)으로 삼음을 말한 것이다.
자비로 사물을 이롭게 함이 없어서 생사를 싫어함이 있는 것은 곧 이승과 정토보살이니 나중에 마음을 돌이켜야 비로소 진(眞)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이며,
정성(定性)의 부류는 다겁에도 돌이키기가 어렵다.
나머지는 경문에 갖추어져 있다.
“나는 오로지 이 보살의 대원지환(大願智幻) 해탈만을 안다”고 한 것은 덕을 추양해 승진케 함을 밝힌 것이니,
덕을 추양해 승진하는 중에 세 가지 문이 있다.
첫째,
선우(善友)의 처소를 제시하면서 33천(天)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왕의 명칭이 정념(正念)이란 것은 지혜가 청정하고 자재로운 것이 천왕과 같음을 밝힌 것이며,
정념이란 이름 붙인 것은 청정한 지혜가 무념으로 자재해서 이(理)에 맡겨 시위하면서도 하염없어서 만사가 스스로 됨을 나타낸 것이니,
11지의 청정한 지혜가 운(運)에 맡겨 응현(應現)함을 밝힌 것이다.
10주위 속에서는 다만 정념 천자(天子)가 그 범행(梵行)을 물었다고 이름 붙일 뿐 여자가 있다고 말하지 않더니,
이 11지 속에 이르러서는 왕이라 이름 붙이고 여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로써 자비를 냄을 밝힌 것이다.
여자의 이름이 천주광(天主光)이란 것은 작위 없는 지혜 속에서 자비의 오염 없는 성품이 용에 맡겨 사물을 이롭게 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 지위는 지혜의 원만한 용이 먼저와 나중이 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천(天)을 취한 것이니,
생사 속에 처해 자재로워서 신화(神化)가 무방(無方)함을 나타낸 것으로,
곧 처소에 있지 않은 것이다.
“공경히 구할 바를 편다”에서 “내가 보살의 해탈을 얻으니 이름하여 무애념(無礙念)이라 한다”고 했는데,
그 뜻이 무애념이란 것은 3세의 걸림없는 지혜를 얻어서 일념에 3세의 고금과 미래 일체 중생의 생사의 겁량과 일체 3세 모든 부처의 성도란 겁량을 인(印)쳐서 일념에 두루 알아서 요연(了然)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바로 지금처럼 현전하고 망념 없는 지혜가 현전하여 모든 법이 본래 이와 같으니,
이는 망념 없는 정념의 지혜를 밝힌 것이다.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겁 속의 모든 부처 수(數)가 모든 겁 속에서 혹은 많은 부처에게 공양하고,
혹은 적은 부처에게 공양하여 증감(增減)이 일정하지 않은 것은 이 일념 속의 무념정지(無念正智)로 삼세의 모든 부처를 널리 다 공양한 수(數)이니,
이는 구근(久近)이 없는 가운데 구근의 형상이다.
총체적으로는 때
〔時〕 없는 대원지(大圓智)의 경계가 법이 스스로 이와 같아서 수행을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 아니니,
수행하는 자가는 다만 스스로 12연생(緣生)을 비춰서 망념을 요달해 지혜를 성취하고 지혜가 닦을 바가 없어서 다만 스스로 미혹을 풀지언정,
진(眞)은 만들 수도 없고 또한 3세 고금의 성품도 없다.
이는 11지 중 제2지의 선지식이며,
다음 11지 중 제2지의 선지식 이하는 총체적으로 정념 속의 걸림없는 지혜 작용이 두루 하면서 행을 함께 하여 섭생(攝生)하는 행신(行身)을 밝힌 것이니,
이는 시방 일체 세계가 마찬가지라서 6도에 동등하게 두루 하여 다 마야부인의 대자비해로부터 태어나 정념의 작위 없는 지혜를 체(體)로 삼는 것이다.
이는 11지 중 계바라밀(戒波羅蜜)이니,
지혜로써 자비를 낳는 문이기 때문에 여자의 이름이 천주광인 것이다.
세 번째로 가비라성 동자의 스승은 한역하면 황색성(黃色城)이다.
황색이란 것은 중궁(中宮)의 색깔인데,
동자의 스승이 되어서 중도를 여의지 않고 속전(俗典)을 궤치(軌治)함을 밝힌 것이니,
이 땅에서 공구(孔丘)의 무리들이 세간의 사범문(師範門)을 밝힌 것과 같다.
가령 공자의 정수리가 아래로 들어간 것이 네 귀퉁이가 번쩍 들린 높은 처마와 같아서 세속에 처해 겸손을 행하는 도를 나타내기 때문에 몸으로써 법을 나타낸 것이니,
니구산(尼丘山)과 같다.
즉 산 정상의 가운데가 아래로 내려간 것과 같은 것이지 산에서 기도를 드려 태어난 것이 아니니,
이는 세속의 설(說)이 잘못된 것이다.
성(姓)이 공(孔)인 것은 성인은 이름도 없고 성도 없으니,
덕으로써 이름을 삼고 성을 삼는 것이지,
세속의 성으로 성을 삼는 것이 아니다.
덕을 기준으로 하면 구명(究明)의 덕이 있으므로 공(孔)이라 성을 붙인 것이니,
공(孔)이란 것은 구(究)이고,
행으로써 동몽(童蒙)을 교화하는 것을 이름하여 구(丘)라 하는 것이니,
구(丘)란 산악의 명칭이다.
그리하여 간(艮)이 산이 되고 소남(小男)이 되고 동몽이 되니,
행의 교화하는 바를 말미암아서 명칭을 세우기 때문에 그 이름이 구(丘)이며,
또한 덕이 뛰어나서 세속을 초월함을 구라 이름하고,
또 지극한 덕이 존귀하고 귀중해서 기울거나 흔들리는 성질이 없는 것을 구라 이름한다.
연주(兗州)에서 태어난 것은 간방(艮方)의 분야이니,
소남의 동몽을 교화하는 지위를 주관하다.
연주가 위로는 각수(角宿)를 만나니,
각은 천문(天門)이 되어서 온갖 선(善)의 문을 주재하고,
또한 승(僧)ㆍ니(尼)ㆍ도(道)ㆍ사(士)로써 주재하는 것이니,
각기(角氣)를 타고서 태어나는 것이 세간 법류(法流)가 능히 체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재동자가 여기에 이르자 변우(遍友)가 말하지 않고서 문득 선재동자로 하여금 온갖 기예의 처소에 가게 한 것은 사범(師範)의 법이 올바른 것은 직접 가르치지 않고 부촉을 통해 가르침을 돕게 하고,
결택하지 못하는 일은 묻는 것으로 정사(正師)를 삼는 것이니,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나타냄으로써 그 교화의 행을 성취함을 덧붙여 칭찬한 것이다.
네 번째로 변우(遍友)가 “여기에 동자가 있으니 이름하여 선지중예(善知衆藝)이니,
보살의 자지(字智)를 배운다”고 한 것에서 변우는 스승이고 동자는 배우는 자임을 밝힌 것이다.
이는 가르침에 의거해 명칭을 세운 것이니,
곧 공구(孔丘)의 문인인 안회(顔回)와 같은 부류이다.
선재동자가 공경을 드리고 구하는 바를 신청하자 동자 중예(衆藝)가 “내가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니 이름하여 선지중예라 하는데,
내가 항상 이 자모(字母)를 지니면서 읊는다”고 했으니,
아(阿)자를 읊을 때 이를 한역하면 무(無)이다.
반야바라밀문에 들어가는 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위력으로 무차별 경계에 들어간다고 하니,
일체 법공문(法空門)을 요달하는 것이 바로 보살의 위력임을 밝힌 것이다.
일체 장애를 끊고 공용 없는 지혜에 들어가서 법계와 중생계에 두루 한 것이며,
다(多)자를 읊을 때 반야바라밀문에 들어가는 것을 이름하여 가없는 차별문이라 한 것은 일체의 모든 유(有)가 바로 차별지이고 보현행임을 밝히 것이니,
일체 삼계의 6도 중생 가운데서 법칙의 행해(行解)와 반드시 응화(應化)할 바를 두루 아는 것이다.
이처럼 총체적으로 42반야바라밀을 첫머리로 삼음을 이름하여 자모(字母)로서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는 반야바라밀문에 들어가는 것이라 하니,
경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다섯 번째로 현승우바이는 세간의 의방(醫方)과 온갖 기술과 세간과 출세간을 다 밝히지 않음이 없으며,
사물을 안치하고 중생을 기르는 데 법마다 요달하지 않음이 없다.
그리하여 진속(塵俗)에 거처하면서 방편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니,
혹은 세무(世巫)를 널리 설함을 지어서 아직 요달하지 못한 것을 현점(玄占)하고,
혹은 훌륭한 의사와 좋은 약을 지어서 세상 사람의 불안을 구원하고,
보물(寶物)을 가려내서 진짜와 가짜를 정하고,
명언(名言)을 간행해서 경문의 뜻을 해석하고,
기특한 재주와 특이한 지혜를 널리 밝히지 않음이 없고,
귀신과 도깨비와 온갖 삿됨을 다 능히 다스리고,
보현의 지혜 바다를 포함하고 문수의 법신과 같으며,
불과(佛果)가 몸에 처하자 만유를 화(化)하여 신령스럽게 함으로써 방위마다 이르지 않음이 없고,
찰(刹)마다 두루 하지 않음이 없으며,
행마다 행하지 않음이 없고,
중생마다 제도하지 않음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자비가 되기 때문에 여자 몸을 현작(現作)하고 지혜가 밝지 않음이 없는 것을 현승(賢勝)이라 호칭하는 것이니,
선바라밀문을 주재한다.
성의 명칭이 파달나(婆怛那)란 것은 한역하면 희증익(喜增益)이니,
이는 덕으로 명칭을 세운 것으로서 사람을 많이 이익케 해서 기쁜 일을 더하는 것이다.
의지하는 곳이 없는 도량을 얻는다는 것은 법이 의지하는 곳이 없으매 몸도 또한 의지함이 없어서 만행에 두루 한 것이고,
행에 체(體)가 없는 것이다.
남인도에 거주한다.
여섯 번째로 남방에 성이 있으니,
이름하여 옥전(沃田)이라 하는 것은 이 선우(善友)의 지혜와 덕으로써 윤택하게 자량함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사람이 많고 선(善)이 증가하고 덕이 두텁기 때문에 그 명칭을 세운 것이다.
장자의 명칭이 견고해탈(堅固解脫)이란 것은 법을 구하는 데 게으름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아래에서 스스로 말한 것과 같다.
이때 선재동자가 그에게 나아가 공경을 드리면서 구하는 바를 신청하자,
장자가 “내가 집착 없는 청정한 염(念)의 장엄을 얻었다”고 한 것은 제6 반야의 무상지혜(無相智慧)로 모든 법을 장엄하여 일체 법에 염(念)이 스스로 집착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일곱 번째로 이 성 안에 한 장자가 있으니,
이름하여 묘월(妙月)이라 한다는 것은 이 속의 장자가 제6 무상지혜문을 회통해서 방편 바라밀로 일체를 삼음을 밝힌 것이니,
10지 이전에서 제6지의 3공무상지혜문(空無相智慧門)은 출세간의 해탈이며,
10지 이후에서 11지 속의 3공적멸지혜문(空寂滅智慧門)은 세간에 처해 제7 방편바라밀을 성취하여 대자비와 더불어 일체라서 둘이 없는 것이니,
대자비의 모(母)로부터 지환(智幻)이 않은 바가 이 최후지(最後地)임을 밝힌 것이다.
10주와 10지 중에서는 7,
8 두 지위가 서로 융통하지만,
이 11지 중에서는 6,
7의 두 지위가 융화해서 일체인 것이니,
반드시 승진의 형세가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선재동자가 찾아가서 공경히 이마를 땅에 대어 예배를 드리면서 구하는 바를 신청하자,
묘월장자가 “나는 오로지 이 청정한 지혜광명의 해탈만을 안다”고 한 것에서 묘월장자는 덕을 기준으로 명칭을 세운 것이며,
자비의 지혜 광명은 미혹을 타파하는 뜻인데,
세간 중생의 미혹을 타파하기 때문에 자비로 중생을 이롭게 해서 미혹을 타파하는 것을 말미암아서 명칭을 세운 것이다.
이는 3공과 자비와 청정한 지혜가 모두 하나의 체용원만(體用圓滿)임을 밝힌 것이다.
여덟 번째로 남방(南方)이란 것은 처음의 해석에 의거한 것이며,
성의 명칭이 출생(出生)이란 것은 제8 원바라밀(願波羅蜜)이 모든 법과 온갖 행을 출생함을 나타낸 것이며,
장자의 이름이 무승군(無勝軍)이란 것은 일체의 무명과 교만과 생사와 삿된 견해와 악적(堊賊)의 마군(魔軍)을 이김을 나타낸 것이다.
선재동자가 찾아가서 공경히 예를 드리면서 구하는 바를 신청하자,
장자가 답하기를 “내가 보살의 해탈을 얻으니 이름하여 무진상(無盡相)이라 한다”고 한 것은 일체의 심경이 모두 여래상(如來相)이기 때문에 한 터럭의 처소에서도 생각생각마다 다함없는 모든 상(相)을 출생함을 밝힌 것이고,
무념의 이(理) 속에서 지환(智幻)으로 낳은 것이니,
어찌 다함의 상(盡相)이 있겠는가?
아홉 번째로 성의 남쪽에 하나의 취락이 있으니,
이름하여 법이 된다고 하는 것은 뭇 사람이 거처하는 곳을 취락이라 청하고,
체성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법이라 하고,
그 적정(寂靜)을 취하는 것을 중유(中有) 바라문이라 칭하니,
최적정(最寂靜)이라 이름 붙인 것은 처소와 명칭이 모두 적정하여 역바라밀(力波羅蜜)이 세속을 따르면서도 속되지 않아서 온갖 회상이 시끄럽지 않은 것을 이름하여 역용자재(力用自在)라 함을 나타낸 것이다.
선재동자가 찾아가서 공경히 이마를 땅에 대어 예배를 드리면서 구하는 바를 신청하자.
“내가 보살의 해탈을 얻으니 이름하여 성원어(誠願語)라 한다”고 말한 것은 성(誠)은 실(實)이니 원하는 바가 말의 성실함에 의거하여 허망한 말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이 신사(信士)의 언어가 마음의 원(願)을 따르므로 말하는 바가 진(眞)에 의거해 허망한 속임이 없어서 언어의 체(體)가 진(眞)인 것이니,
원하는 바가 모두 진이기 때문에 명(名)과 구(句)와 문(文)과 소리와 언사(言辭)와 설하는 바가 일체 모두 성진(性眞)인 것이다.
이것이 해탈이 되고 이것이 법사위(法師位)이니,
법계를 취학으로 삼으매 일체의 언설이 스스로 참되어서 인(人)과 법이 다 마찬가지임을 나타낸 것이니,
말이 헛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열 번째로 이 남방에 성이 있으니,
이름하여 묘의화문(妙意華門)이라 한다는 것은 묘한 지혜와 행화(行華)가 다 원만한 것이니,
11지의 열 가지 법이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거기에 동자가 있으니,
이름하여 덕생(德生)이라 하고,
다시 동녀가 있으니 이름하여 유덕(有德)이라고 말한 것은 이 지혜와 자비의 두 행이 균등하여 전각(前却)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동자와 동녀란 것은 지혜와 자비가 가지런히 원만하매 비록 세간에 처하더라도 5욕의 상(相)이 없어서 환주(幻住)에 거처함을 밝힌 것이다.
선재동자가 찾아가서 공경히 이마를 땅에 대어 예배를 드리면서 구하는 바를 신청하자.
“우리들이 보살의 해탈을 증득하니 이름하여 환주가 된다”고 말한 것은 부처의 경계와 중생의 경계가 모두 지환(智幻)의 낳은 바로서 환(幻)의 경계에 거주함을 기준으로 하면 실(實)도 없고 허(虛)도 없고 식정(識情)도 없어서 심경이 다 없어지고 성상(性相)이 걸림이 없어서 지혜의 공덕을 쓴다.
이 때문에 광영(光影)을 환생(幻生)하자 신토(身土)가 중중한 것이 인다라망과 같아서 몸과 경계가 중중하여 시방 신토(身土)의 경계의 상(相)이 서로 들어가매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것이며,
시방 세계가 지혜로움과 범속함의 체(體)가 사무치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고금을 원만히 하면서도 하나의 성품이라서 항상 세간에 머물면서도 의지하는 바가 없다.
이는 세간의 연생(緣生)이 성품이 스스로 여의기 때문이며,
진여가 허망하여 거짓으로 안립하기 때문이며,
허망한 체가 본래 없어서 진(眞)이 머물지 않기 때문이며,
지혜가 의지함이 없어서 허공과 같기 때문이며,
지혜로써 보생(報生)한 것이 모두 환주(幻住)이기 때문이며,
유무(有無)가 자재로워 지혜 작용을 따르기 때문이며,
비록 지혜의 체가 공(空)과 같지만 적멸에 처하지 않기 때문이며,
지혜의 몸이 무량하여 시방에 균등히 두루 하면서도 성품에는 왕래하는 상(相)의 광영(光影)이 없기 때문이며,
신토(身土)가 중중해서 크고 작음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경문에서는 “환(幻) 경계의 자성이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11지 이후는 자씨(慈氏) 일생에서 얻은 불과문(佛果門)을 회통한 것이니,
이 문을 열 개의 단락으로 장과하겠다.
첫째,
“선남자야,
이 남방에 국토가 있으니,
이름하여 해안(海岸)이라 한다” 이하 “작별하고 물러가다”에 이르기까지 대략 반 권(卷)의 경문은 덕생(德生)동자와 유덕(有德)동녀가 자씨보살의 덕을 추양하여 선재동자로 하여금 가까이 해서 승진케 함을 밝힌 분(分)이다.
둘째,
“이때 선재동자가 선지식의 가르침을 입고서 그 마음을 윤택케 했다” 이하 “모두 선지식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이룬 바일뿐이다”에 이르기까지 30행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스스로 과거 인(因)의 잘못과 착하지 않음을 생각해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후회하고,
선지식을 공경하고 공양하며 가까이 함을 일으킴을 밝힌 분이다.
셋째,
“선재동자가 이같이 존중하고 이같이 공양함으로써” 이하 “모두가 보살의 선교방편으로부터 유찰한 바이다”에 이르기까지 32행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누각 앞에서 오체투지하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어 사유해서 이익을 얻음이 한량없음을 밝힌 분이다.
넷째,
“선재동자가 이 같은 지혜에 들어가서 마음을 단정히 하고 생각을 깨끗이 해서” 이하 “선재동자가 게송을 설하다”에 이르기까지 이 한 단락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선지식이 거처하는 누각을 찬탄함을 밝힌 분이다.
이하의 게송은 선재동자가 앞서 자씨보살이 거처하는 누각의 머무는 곳을 거듭 읊은 것이며,
아울러 자씨보살의 덕을 찬탄한 것인데,
경문에서 갖추어 밝히고 있다.
다섯째,
“이때 선재동자가 이 같은 일체 보살의 한량없는 칭찬과 찬탄하는 법” 이하는 선재동자가 미륵보살을 보고자 하니 밖으로부터 왔다는 분이다.
여섯째,
“이때 선재동자가 합장하고 공경하면서” 이하 권말에 이르기까지는 선재동자가 이미 대보리심을 발했음을 펴니,
자씨가 이를 위해 보리심의 선근공력(善根功力)의 부사의함을 찬탄함을 밝힌 분이다.
일곱째,
“이때 선재동자가 미륵보살마하살을 공경하면서 오른쪽으로 돌고는” 이하 이 권말에 이르기까지는 선재동자가 자씨의 누각에 들어가서 과(果)를 관해 인(因)을 앎으로써 3세에 행할 경계인 동이총별인다(同異摠別一多)가 걸림없이 자재로우면서도 동시에 원만함을 밝힌 분이다.
여덟째,
“선남자야,
너는 반드시 문수사리를 찾아 봐야 한다” 이하 5행 반의 경문은 자씨가 선재동자로 하여금 문수사리를 친견케 하여 과(果)에 이르자 인(因)과 동일함을 밝힘으로써 인(因) 속의 과(果)가 본래 둘이 없음을 나타냄을 밝힌 분이다.
아홉째,
“이때 선재동자가 미륵보살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이하 게송에 이르기까지 이 한 단락은 선재동자가 자씨에게서 얻은 일생(一生)의 불과로써 널리 110성(城)의 법문을 인(印)침을 밝힌 것이니,
바야흐로 처음의 신심(信心) 중에서 금강장지보리장(金剛藏智菩提場) 비로자나여래의 사자좌 앞의 일체 보련화장(寶蓮花藏) 법좌 위에 허공계와 동등하고 광대한 열 가지 마음 등을 일으키는 것은 110성을 거치면서 자씨의 일생 불과에 이르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처음 신심의 비로자나여래 금강장지보리(金剛藏智菩提)의 묘리(妙理) 속을 여의지 않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문득 금강장지보리의 묘리 속에서 법계의 불과가 영원한 보현의 법계에 원만히 두루 한 묘행을 일으킴을 밝힌 것이며,
이 이하 선재동자가 보현의 몸 안에서 보살행을 행하자 보현이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것은 바야흐로 법계 속의 영원한 불과와 영원한 보현행이 서로 미치고 서로 응해야 비로소 일체 모든 부처가 이미 성취한 구과(舊果)와 보현의 구행(舊行)에 미치게 됨을 밝힌 것이다.
자씨보살에 이르러서는 3세가 없는 가운데서 일생을 밝힌 것이니,
이는 도를 보아 행을 닦음으로써 처음부터 불과의 지위에 들어가는 생(生)이며,
미래에 신(神)을 내려 하생(下生)하는 것은 미래에 성불하는 생(生)이니 6상(相)의 법문으로 총괄하라.
선재동자 역시 지금의 생은 도를 보아 행을 닦아서 행이 원만한 생이며,
내생은 바야흐로 성불의 생을 밝힌 것이니,
이 미래 일생의 불과로써 근본금강장지보리의 묘리(妙理)인 비로자나여래가 얻은 과(果)와 보현의 구행(舊行)이 본래 일체로 구족해 3세 고금이 둘이 아니라서 때
〔時〕가 다시 옮기지 않으며,
동이(同異)가 자재로워서 법계 인다라망의 걸림없는 법문에 처함을 회통한 것이다.
이 자씨의 1위(位) 법문으로부터 대략 여섯 문을 나누겠다.
첫째는 과(果)를 들어 인(因)을 성취해서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문을 밝힌 것이며,
둘째는 이미 믿으므로 가행해서 수행에 계합하는 문을 밝힌 것이며,
셋째는 가행으로 수행해서 과(果)에 계합하는 문이며,
넷째는 이미 계합한 과를 갖고서 안에 회통하는 문이며,
다섯째는 되돌아 본인(本因)에 의거해서 원융하는 문이며,
여섯째는 구경(究竟)의 법계에서는 시종의 인과가 둘이 없는 동시(同時)로서 옮김이 없는 문이니,
이 여섯 문으로 융화 회통하면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열째,
8행의 게송 이하부터 경문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는 보현이 여래 법계의 과덕(果德)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광대하고 한량없는 공덕을 칭찬함을 밝힌 문이다.
제1,
첫 단락에서 “선남자야,
남방에 국토가 있으니 이름하여 해안(海岸)이라 한다”고 한 것은 승진해서 자씨의 일생 불과에 이르기 때문에 그 명칭이 해안이 됨을 밝힌 것이니,
부처의 지혜 바다에 들어가서 생사의 바다에 임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 나라가 바다에 임해 있기 때문이다.
원림(園林)이 있는데 명칭이 대장엄이란 것은 자씨의 거처하는 바가 생사를 원(園)으로 삼고 만행을 임(林)으로 삼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자기 지비(智悲)의 불과를 잠엄하여 이미 다 만족하므로 그 명칭이 대장엄이다.
그 속에 하나의 광대한 누각이 있으니 이름하여 비로자나장엄장이라 한다는 것은 근본지와 차별지의 총체적 보생(報生)으로 명칭 세움을 밝힌 것이다.
비(毘)는 갖가지 광명을 말하며 자나(遮那)는 두루 비춤을 이르는 것이니,
차별지로써 갖가지 광명을 삼고 근본지로써 두루 비춤을 삼는 것이다.
이 두 지혜가 용(用)을 기준으로 해서 명칭을 이루었지만,
그 체용은 하나라서 다 작위하는 자가 없으니,
이 법계의 체용인 보광명지로써 모든 만행을 성취하여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의 보생(報生)이기 때문이다.
이 대장엄 누각의 광대한 양(量)이 허공과 동등해서 일체 세간과 중생이 다 그 안에 처하여 똑같이 머물러 유지(遊止)하면서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나니,
가령 선재동자가 이 누각 속에 들어가서 청정한 세계와 청정하지 못한 세계와 대천세계(大千世界)와 소천세계(小千世界)와 나아가 지옥ㆍ축생ㆍ아귀의 머무는 곳과 나아가 시방 세계의 부처 있는 세계와 부처 없는 세계와 보살의 온갖 회상인 갖가지 사(事)가 다 그 속에 있음을 보니,
널리 경문에서 설한 것과 같다.
부처의 지혜 바다의 대자비로써 사물을 염(念)하고,
만행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고,
대원의 유지하는 바로 다 함께 누각의 체(體)를 성취하여 일체 중생의 생사원(生死園) 속에 머무르고 만행림(萬行林)으로 함식(含識)을 덮어 그늘을 드리움으로써 모두로 하여금 영원히 순백청정한 법신과 청정무구한 지혜의 청량한 즐거움을 얻게 한 것이다.
경문에서 “보살의 선근 과보로부터 나고,
선교(善巧)방편으로부터 나고,
복덕(福德)과 지혜로부터 난다”고 한 것은 나긴 하지만 온 곳이 없고,
멸하긴 하지만 가는 곳이 없어서 모두가 여환지(如幻智)로 생멸에 머무는 상(相)이다.
또한 중생이 업으로써 생멸하면서도 오고가는 체상(體相)을 얻을 수 없어서 취하고 버리는 것에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는 것과 같다.
경문에서 “선남자야,
부사의 해탈에 머문 보살이 대자비심으로써 모든 중생을 위해 이 같은 경계를 나타내고 이 같은 장엄을 모으나니,
미륵보살이 그 가운데 편안히 거처한다”고 한 것은 이하의 경문에서 널리 설한 것과 같다.
이 제1단락을 다시 다섯 단락으로 나누겠다.
첫째,
“선남자야,
이 남방에 국토가 있으니 이름하여 해안이라 한다” 이하 “무엇을 보살선지식을 섬기는 것이라 합니까?”에 이르기까지 20행 반의 경문은 선우(善友)의 소재를 제시한 것과 아울러 권유해서 그곳에 찾아가 법문을 자문케 함을 밝힌 분이다.
둘째,
“왜냐 하면 선남자야,
저 보살마하살이” 이하 “10지의 청정한 불국토에 머물면서 선지식을 섬긴다”에 이르기까지 14행의 경문은 덕생동자가 자씨의 덕을 찬탄해서 선재동자로 하여금 가까이 다가가 받들어 섬기게 함을 밝힌 분이다.
셋째,
“왜냐 하면 선남자야,
보살이 응당 한량없는 모든 선근을 심어서” 이하 “응당 일체의 선지식을 널리 섬긴다”에 이르기까지 49행 반의 경문은 덕생동자가 선재동자에게 응당 배울 바를 가르쳐서 반드시 광대한 법을 행하게 함을 밝힌 분이다.
넷째,
“선남자야,
네가 선지식을 찾는 데 피로하거나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하 “일체의 보리분법을 증장한다”에 이르기까지 34행의 경문은 덕생동자가 선재동자에게 선지식을 섬길 때는 허물을 보지 말고 게을리 해서도 안 되니 선지식을 말미암아 한량없는 이익을 얻는다고 한 가르침을 밝힌 분이다.
다섯째,
“왜냐 하면 선남자야,
선지식이란 능히 모든 장애를 청정케 하니” 이하 “작별하고 물러가다”에 이르기까지 이 한 단락의 경문은 덕생동자가 선지식을 공경하는 법과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광대한 불법을 성취한다고 가르침을 밝힌 분이다.
가령 경문에서 “응당 한량이 있는 마음으로는 6바라밀을 행하거나 10지에 머물거나 불국토를 청정케 하거나 선지식을 섬기지 말라”고 한 것은 6바라밀과 10지가 모두 출세간의 1분(分) 청정한 견해가 없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이 장애 때문에 보현행을 갖추지 못해서 비로자나여래의 보신인과(報身因果)의 경계와 같지 않고 다만 출세간의 화불(化佛)이나 화신(化身)과 같음을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자나의 보상과해(報相果海) 공덕신은 화관(華冠)과 영락(瓔珞)과 환천(環釧)과 온갖 상(相)을 갖춘 복해(福海)의 장엄신이니,
이는 속박을 벗어나 모든 식호(飾好)를 버리면서 생사를 싫어하는 몸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명의 본원(本元)을 요달한 법계 대지혜의 경계가 스스로 가없는 공덕의 보신(報身)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보현행원해(普賢行願海)의 차별지로 이루어진 무한한 공덕을 가함으로써 서로 장엄공덕의 보신이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11지가 원만하자 덕생동자가 선재동자를 법계문에 들어가서 근본의 과체(果體)를 회통하고 세속을 인도하는 교화의 경계를 따라서 정견(淨見)의 한량 있는 행문에 머물지 않게 가르친 것이다.
나머지는 경문에서 갖추어서 밝히고 있으니,
가령 화불(化佛)의 경계는 출세간의 문이기 때문에 타방(他方)에 따로 정토를 나눔이 있다고 말하지만,
보불(報佛)은 시방을 총체적으로 하나의 정토로 삼기 때문에 청정과 더러움을 나누지 않는다.
제2,
“이때 선재동자가 선지식의 가르침을 입어서 그 마음을 윤택케 하고 정념으로 사유하였다” 이하 “모두 선지식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이룬 바일뿐이다”에 이르기까지 30행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스스로 과거 인(因)의 잘못된 악과 착하지 못함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후회하고,
선지식을 공경하고 공양하며 가까이 다가감을 일으킴을 밝힌 분이다.
제3,
“선재동자가 이같이 존중하고 이같이 공양해서” 이하 “모두 보살의 선교방편으로부터 유출한 바이다”에 이르기까지 32행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누각 앞에서 오체투지하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어 사유하면서 이익을 얻는 것이 한량없음을 밝힌 분이니,
경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과 같다.
제4,
“선재동자가 이 같은 지혜에 들어가서 마음을 단정히 하고 생각을 깨끗이 해서” 이하 “선재동자가 게송을 설하다”에 이르기까지 이 한 단락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선지식이 거처하는 누각을 찬탄함을 밝힌 분이니,
경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과 같다.
제5,
“이때 선재동자가 이 같은 등 일체 보살의 한량없는 칭찬과 찬탄하는 법으로써” 이하는 선재동자가 미륵보살을 보고자 하니 밖으로부터 왔다는 분이다.
이는 보살이 항상 자기 과보에 머물지 않고 세속에 따라 중생을 다스림을 밝힌 것이니,
나중을 따르는 중생이 있는 것은 다스리는 바의 중생이 화래(化來)해서 과(果)에 이르는 것이다.
나머지는 경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과 같다.
제6,
“이때 선재동자가 합장 공경하면서” 이하 권말에 이르기까지는 선재동자가 보리심을 발함을 펴자 자씨가 이를 위해 보리심의 선근공력의 부사의함을 찬탄함을 밝힌 분이다.
그 뜻인즉 일체 신통의 도력(道力)과 보살의 만행이 모두 보리심을 근본으로 삼는데,
생사를 멸해 고통의 흐름을 끊고 8만 4천 번뇌문을 청정케 해서 일체지의 바다를 현성하는 것이 다 보리심을 근본으로 삼음을 밝힌 것이니,
경문에서 널리 찬탄한 것과 같다.
그리하여 보리심이 의지함도 없고 머묾도 없어서 체성의 생멸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이같이 현전하면 번뇌가 저절로 없어져서 지혜 바다가 문득 나타나고,
지혜가 나타남을 말미암기 때문에 갖가지 방편과 신통의 만행이 지혜로써 능히 이루어지니,
보리심이 의지하는 것이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지혜도 또한 의지하는 것이 없고,
지혜가 의지할 바가 없기 때문에 일체 머무는 바가 다 작자(作者)와 의주(依住)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로써 생사의 업이 없어지고 오직 지혜만이 자재로워서 대자비의 만행이 지혜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지혜의 체(體)가 의지함이 없으니,
만행이 화(化)와 같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환(幻)과 같으며 신통 도력이 공중의 달이 온갖 물에 널리 나타난 것과 같아서 지혜의 체가 가지도 않고 중생심의 물이 오지도 않지만 자업(自業)의 청정함을 따라서 지혜와 더불어 체가 같고 청정의 깊고 얕음을 따라서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 각각 다르기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다.
만약 시방 모든 부처 여래의 지혜 바다를 보고자 한다면,
다만 스스로 12유지(有支)의 업연(業緣)을 청정케 하면 부처 지혜가 나타나겠지만,
단지 남의 뛰어난 경계만을 구한다면 자기의 법이 문득 숨겨져서 지혜의 법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자기의 공이 성취되어서 공(功)의 과정을 손상시키지 않고 성스러운 지취(旨趣)를 위배하지 않는 것을 선재동자가 한 분 한 분 선우(善友)의 처소에서 5위의 방편가행인 보살법을 갖추는 것과 같이하면서도 다른 법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도 집착하지를 않아 의주(依住)하는 바가 없다.
다만 그 마음을 광대하게 함으로써 방편 삼매로 이익이 광다(廣多)해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다 고통을 여의게 하고,
또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구경(究竟)의 실다운 법에 이르게 하고,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다 똑같이 얻게 하니,
시방의 모든 부처와 일체 보살의 모든 법과 중생을 이롭게 하는 모든 행과 나아가 한 중생의 법이라도 알지 못하고 요달하지 못하면,
지혜가 원만한 부처가 된다고 이름 붙이지도 못하고 마하살이라고 이름 붙이지도 못하는 것이다.
제7,
“이때 선재동자가 공경히 미륵보살마하살의 오른쪽을 돌면서” 이하 권말에 이르기까지는 선재동자가 자씨의 누각에 들어가 과(果)를 관해 인(因)을 알아서 3세에 행할 경계인 동이총별일다(同異摠別一多)가 걸림없이 자재롭고 동시에 원만함을 밝힌 분이다.
이 단락 속에서 자씨보살이 손가락을 튀겨 소리를 내자 그 문이 곧 열린 것에서 소리는 바로 진동하여 계발한다는 뜻이며,
손가락을 튀긴 것은 티끌을 없앤다는 뜻이니,
티끌이 없어지고 집착이 없어지자 법문이 스스로 열림을 밝힌 것이다.
선재동자가 들어가고 나자 그 문이 다시 닫힌 것은 미혹이 없어지고 지혜가 나타남을 이름하여 열림
〔開〕이라 하고,
지혜가 안팎이나 중간이 없어서 나감도 없고 들어감도 없으며 미혹도 없고 증명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다시 닫힘이라 한다.
그 누각이 드넓고 한량이 없어서 허공과 똑같음을 보는 것은 지혜의 경계이다.
그 중에서 장엄은 모두 지혜를 기준으로 하고 자비심을 기준으로 해서 행하는 모든 행원(行願)의 보득(報得)이니,
하나하나 경문에 갖추어 밝히고 있다.
그 중에서 신화(神化)의 경계는 법계의 지혜 경계가 법이 응당 그러해서 사물마다 신령하지 않음이 없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법을 요달해서 진(眞)에 응하자 일체가 스스로 신령스럽고 나아가 미륵보살이 3세에 행하는 경계를 봄으로써 자씨보살이 과거에 섬긴 적이 있는 모든 부처의 선지식이 또한 선재동자를 위해 법을 설한 것은 법신의 지혜 경계가 본래 스스로 그러해서 3세의 성품이 없어서 고금 3세의 궁겁(窮劫)이 원래 일념도 옮기지 않는 것이니,
이는 신통이 아니라 법이 응당 그러한 것이다.
도사라색(兜沙羅色)이란 것은 우리나라의 서리나 얼음 색깔과 같은 것이다.
나머지는 경문에 갖추어져 있다.
경문에서 “선남자야,
내 염원이 만족해서 일체지를 성취하여 보리를 얻을 때 너와 문수가 다 나를 보게 된다”고 한 것은 3세의 인(因)이 원만함을 회통하니 지혜가 고금이 없어서 곧 3세의 부처가 일시에 서로 보는 동일한 지혜이다.
이 단락을 대략 세 단락으로 장과하겠다.
첫째,
“이때 선재동자가 공경히 자씨보살의 오른쪽을 돌면서” 이하 곧바로 “누각 속의 일체 장엄이 자재로운 경계를 본다”에 이르기까지 8ㆍ9지(紙)의 경문은 부처의 지혜 경계에 들어가 과(果)를 관해서 인(因)과 다름이 없음을 앎을 밝힌 분이다.
둘째,
“이때 미륵보살” 이하 “선지식의 가피와 억념과 위신(威神)의 힘”에 이르기까지 9행 반의 경문은 미륵보살이 스스로 신력을 다스려서 나타낸 일체의 경계가 아울러 없는 것과 손으로 손가락을 튀겨 선재동자를 명해서 일어나게 함을 밝힌 분이다.
셋째,
“성자(聖者)의 이 해탈문은 그 이름이 무엇인가?” 이하 “그대와 더불어 과거에 같이 태어나고 같이 행했다”에 이르기까지 대략 4지(紙)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법문의 명목(名目)을 묻고 아울러 미륵보살이 온 곳과 태어난 처소를 물음을 밝힌 분이다.
법문의 명목을 묻는 것에서는 네 가지 법을 묻는 것이니,
첫째는 누각 속에 있는 법문의 경계에 들어가는 해탈의 명칭을 묻는 것이며,
둘째는 장엄의 일이 어느 곳으로 갔는지 묻는 것이며,
셋째는 미륵보살이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지 묻는 것이며,
넷째는 보살이 태어난 곳을 묻는 것이다.
첫째,
법문의 명목을 묻는다는 것은 이 해탈문의 명칭이 3세의 일체 경계에 들어가서 잊지 않는 염지(念智)로 장엄하는 장(藏)이다.
둘째,
장엄의 일이 어느 곳으로 갔는지 묻는다는 것은,
자씨가 답하기를 “온 곳으로 갔다”고 하며,
“또 어느 곳으로부터 왔느냐?”고 물으니,
답하기를 “보살의 지혜 신력으로부터 오고 보살의 지혜 신력에 의거해서 머문다”고 한 것은 체(體)에 오고 가는 곳이 없음을 잡은 것이니,
경문에 갖추어져 있는 것과 같다.
셋째,
자씨가 “어느 곳으로부터 왔느냐?”고 물은 것은 처음은 법을 잡아서 답한 것이며,
다음은 사(事)에 의거한 것이다.
처음 법을 잡아서 답하기를 “모든 보살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이 이렇게 오고,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이 이렇게 가고,
나아가 대자대비와 대원 속에서 왔다”고 했으니,
자세히는 경문에서 설한 것과 같다.
사에 의거한다는 것에서 “나는 태어난 곳인 마라제국(摩羅提國)으로부터 왔다”고 말한 것은 이 나라가 성자의 덕을 잡아서 명호를 세운 것이니,
성자의 지혜와 덕이 탁월해서 세간에서 능가할 자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장자 아들의 이름이 구파라(瞿波羅)란 것은 한역하면 심지(心地)의 백법(白法)을 수호하는 것이니,
자씨가 불법에 들게 했기 때문이다.
넷째,
태어난 곳을 묻는다는 것은 처음은 법에 의거해 답한 것이며,
다음은 사(事)에 의거한 것이다.
처음 법에 의거해 답한 것에서는 열 가지 태어난 곳이 있으니,
경문에서 “보리심이 보살의 태어난 곳이며,
다음 깊은 마음,
다음 선지식,
다음 모든 지(地)의 바라밀,
다음 대원(大願),
다음 대자(大慈),
다음 대비(大悲),
다음 이(理)대로 관찰하는 것,
다음 대승,
다음 중생을 교화하는 것,
다음 지혜의 방편인 이 같은 것들이 보살이 태어나는 곳이며,
반야를 생모(生母)로 삼고,
방편을 아버지로 삼고,
단바라밀을 유모(乳母)로 삼고,
계율을 지키는 것을 양모(養母)로 삼고,
인욕을 장엄으로 삼고,
정진을 양육으로 삼고,
선정을 완탁(浣濯)으로 삼고,
선우(善友)를 가르쳐주는 스승으로 삼고,
보리분(菩提分)을 반려로 삼고,
온갖 선(善)을 권속으로 삼고,
보살을 형제로 삼으니,
이 같은 것들이 보살이 태어나는 곳이다”라고 하니,
자세히는 경문에 갖추어져 있는 것과 같다.
사(事)에 의거해 답한다는 것은 염부제계(閻浮提界) 마라제국 구타(拘吒) 취락의 바라문 집안이 태어난 곳이다.
구타 취락은 한역하면 다가(多家)이니,
수많은 모든 인가(人家)가 모여서 함께 사는 것을 다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바라문의 집안이란 것은 청정한 종자 속에서 나는 것이니,
지혜의 청정무구함을 밝힌 것이다.
“선남자야,
내가 이 대누각 속에 머물면서 모든 중생심이 즐기는 바에 따라 갖가지 방편을 나타내서 교화하고 조복시킨다”는 것은 대지혜와 대자비가 법계에 두루 해 광대하게 보득(報得)하는 환생(幻生)의 누각 속에 처해서 모든 중생이 즐기는 바에 따라 몸을 나타내는 것이 각각의 업에 따라 달리하여 나타내 보이면서 조복시킴을 밝힌 것이다.
“보살의 복과 지혜의 변화하는 장엄이 일체 모든 욕계를 초월함을 나타내 보인다”는 것은 이 욕계라는 것에 대해 설한 것이다.
일생불과(一生佛果)의 보살로써 계교해 보면,
복과 지혜의 과보 경계가 모두 삼계와 3승과 나아가 아래 지(地)의 일체 모든 경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지혜가 시방 일체 모든 부처의 작용하는 바와 같기 때문에 부처의 지혜와 덕을 나타내서 장애가 없는 것이며,
이미 일생의 차보불위(次補佛位)를 주기 때문에 마치 맏아들이 아버지의 집안일을 지키는 것과 같아서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또한 윤왕의 첫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태자가 32상을 갖춰 아버지와 더불어 그 복과 지혜가 같고 그 보업(報業)이 같은 것이니,
만약 왕명을 받들어서 국사(國事)를 지키게 하면 아버지와 더불어 다를 바가 없지만,
다만 부왕이 다스리는 중생의 화연(化緣)이 아직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위에 처하지 못한 것과 같다.
자씨여래도 또한 이와 같아서 다만 비로자나의 화적(化迹)을 나타내서 다스린 중생의 한 세(勢)가 아직 종결되지 않아서 하생하여 성불함을 나타내 보이는 지위에 처하진 못하지만,
그 실제의 덕을 근거로 한다면 이미 일체 모든 부처와 더불어 지혜의 작용이 차이는 없는 것이다.
다만 여래가 가르침을 시설해서 범부를 인도하기 때문에 출몰을 나타내 보여서 중생으로 하여금 싫어하지 않게 해 오래도록 스스로의 도심(道心)을 기르게 한 것이지,
모든 부처가 여기서 태어나고 저기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만약 법계의 지혜 경계로써 하고 범정(凡情)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면,
시방 일체 국토의 미진 중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서 불해(佛海)가 다함없이 서로 참여하고 사무쳐 비침으로써 불생불멸하고 불출불몰(不出不沒)하는 것이니,
다만 법성신처지경환주문(法性身處智境幻住門)에 들어가서 비추어 보면 일체 중생도 또한 불생불멸해서 한결같이 부처 경계와 같다.
제8,
“선남자야,
너는 응당 문수사리를 찾아뵙고” 이하 5행 반의 경문은 자씨가 이미 승진해서 일생의 불과에 들어가자 도리어 선재동자로 하여금 첫 신심 때에 보광명전 여래지장(如來智藏)에 회통해 들어가게 함을 밝힌 것이니,
불과(佛果) 법계의 적멸대용(寂滅大用)이 항상 그러한 문이 3세의 체(體)가 없어서 다 일시이기 때문이며,
보리의 체가 허공과 같아서 시종과 3세 고금의 들어오고 나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재동자로 하여금 도리어 문수를 보게 함으로써 과(果)가 인(因)에서 옮기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아래 경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과 같다.
제9,
“이때 선재동자가 미륵보살마하살이 가르침에 의거해서” 이하 게송에 이르기까지 이 한 단락의 10지(紙) 경문은 선재동자가 자씨보살의 처소에 승진하여 일생불과의 지혜 경계에 들어가서 3세의 일체 경계에 지혜를 염(念)하는 것을 잊지 않는 장엄장(莊嚴藏)의 문을 얻고서 되돌아 110성의 법문이 첫 신심에 들어갈 때 찰나제를 벗어나지 않고 인과의 원만함을 인(印)쳐서 금강장보리장 비로자나여래의 사자좌 앞의 일체 보련화장 법좌 위에 이르러서 허공계처럼 광대한 열 가지 마음을 일으켜서 바야흐로 영원한 법계의 불과와 보현의 영원한 행을 일으킴을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위에서 시방의 불찰미진 중의 보현보살이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서 일시에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것은 불과의 법계행이 원만함을 밝힌 것이니,
뜻인즉 행의 원만이 인(因)을 여의지 않아서 때
〔時〕가 옮기지 않고 지혜가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나아가 불찰미진수의 선지식을 보는 것과 나아가 보현의 몸에 있는 사자관절과 털구멍 속의 국토신(國土身)을 보는 것은 법계 지혜 경계의 행망(行網)이 하나와 많음이 중중(重重)하여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어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항상 그러한 문에 들어감을 밝힌 것이다.
경문에 갖추어서 자세히 밝힌 것과 같으니,
논문에서 경문의 의취를 대략 펴고 있으므로 그 경문을 갖추어 기록하지는 않겠다.
이 단락을 대략 열 단락으로 장과하겠다.
첫째,
“이때 선재동자가 미륵보살마하살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이하 “똑같이 머물러서 보현보살을 목마르게 보고자 하다”에 이르기까지 33행 반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자씨보살의 처소에 승진 수행하여 일생불과에 들어가서 도리어 처음 신심 중의 보리도량 보광명전 지혜 경계의 법계가 항상 그러한 적용(寂用)이 걸림없는 인다라망 경계의 불과인 보현행해(普賢行海)가 늘 원만함을 회통함을 밝힌 분이다.
둘째,
“즉 이 금강장 보리도량 비로자나여래의 사자좌 앞의 일체 보련화장 법좌 위에서 허공계처럼 광대한 마음을 일으킨다” 이하 “선재동자가 이 같은 마음을 일으킬 때”에 이르기까지 8행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처음 신심 중 법계의 금강지장 보리체(菩提體) 속에서 보현의 법계대용을 일으켜 인과가 동시에 걸림없음을 밝힌 분이니,
6상(相)의 뜻으로 총괄하라.
셋째,
“스스로의 선근 여래를 말미암아 보현보살의 똑같은 선근력을 가피하여” 이하 “이것이 열 가지이다”에 이르기까지 11행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열 가지 상서로운 상(相)을 봄을 밝힌 분이다.
넷째,
“또 열 가지 광명의 상(相)을 보고서” 이하 “이것이 열 가지이다”에 이르기까지 17행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열 가지 광명을 봄을 밝힌 분이다.
다섯째,
“이때 선재동자가 이 열 가지 광명의 상(相)을 보고 나서” 이하 “대법(大法)을 증장하여 일체지를 성취한다”에 이르기까지 57행의 경문은 보현보살이 여래 앞 온갖 회상 속에 있으면서 보련화 사자좌에 앉음을 선재동자가 보고,
아울러 보현신(普賢身)의 하나하나의 털구멍 속의 광대한 법계를 봄을 밝힌 분이다.
여섯째,
“이때 선재동자가 보현보살의 이 같은 자재신통을 보고서” 이하 “일체 여래의 유희신통(遊戱神通)”에 이르기까지 23행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보현의 몸을 거듭 관해서 시방 모든 부처와 인천과 지옥이 모든 몸의 털구멍 속에 있음을 봄을 밝힌 분이다.
일곱째,
“선재동자가 보현보살의 이 같음을 보고서” 이하 “선재동자가 이미 이 같음을 얻었다”에 이르기까지 13행 반의 경문은 선재동자가 열 가지 지혜의 일체법에 두루 한 지바라밀(智波羅蜜)을 얻음을 밝힌 분이다.
여덟째,
“보현보살이 곧 오른손을 펴서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어루만졌다” 이하 “얻은 법문이 또한 모두 다 동등하다”에 이르기까지 14행의 경문은 이 방(方)의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것과 얻은 법문과 시방 일체 세계의 일체 미진 중 보현보살이 일시에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것과 아울러 선재동자의 얻은 법문이 다 이 같음을 밝힌 분이다.
아홉째,
“이때 보현보살마하살이 선재동자에게 고하기를” 이하 “선남자야,
너는 응당 나의 이 청정신을 관해야 한다”에 이르기까지 60행의 경문은 보현보살이 선재동자를 위해 설하기를,
스스로 중생이 되어 출리도(出離道)를 구하기 때문에 복과 지혜의 두 행을 수행함으로써 불가설불가설불찰미진수의 겁 동안 보살행을 행해 일체지를 구하면서도 성읍과 취락과 국토의 왕위와 처자와 권속과 눈ㆍ귀ㆍ코ㆍ혀와 몸과 손발과 나아가 신명(身命)으로 보시하는 것이니,
일체지를 구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잠시도 끊임이 없음을 밝힌 분이다.
열째,
“이때 선재동자가 보현보살 몸의 상호(相好)와 지절(肢節)과 하나하나의 털구멍 속을 관해서” 이하 게송에 이르기까지 이 한 단락은 선재동자가 보현보살의 몸의 상호와 털구멍 경계의 법문을 관해서 일념으로 들어간 모든 불찰해(佛刹海)가 앞서의 불가설불가설불찰미진수 지위를 초월함을 밝힌 분이다.
하나의 털구멍이 이와 같으니,
일체의 털구멍도 마찬가지이다.
자세히는 경문에서 밝히고 있다.
게송을 설한 것을 세 단락으로 나누겠다.
첫째는 처음 8행의 게송은 보현보살이 대중에게 자세히 들은 것을 가르쳐서 스스로 부처의 공덕을 설하고자 함을 밝힌 분이다.
둘째는 6행의 경문은 대중이 환희하면서 즐겁게 들음을 밝힌 분이다.
셋째는 게송으로 여래의 공덕을 조금이나마 대략 펼친 분이니,
그 뜻은 게송에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
경문에서 “점차로 행하여 1백 10성을 거치고 나서 보문국에 도달한다”고 한 것은 일체 시방의 모든 부처와 일체 중생이 다 함께 1법계의 국토가 되어서 별개의 체(體)가 없는 것이니,
1백 10성을 거쳤다는 것은 앞서 닦은 법을 일시에 널리 인(印)쳐서 먼저와 나중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사유하고 관찰해서 일심으로 문수사리를 보길 원하자 곧 삼천대천세계미진수의 선지식을 본 것은 문수사리의 법신 지혜가 평등하고 두루 하기 때문에 일체가 문수의 체와 다르지 않음을 널리 봄을 밝힌 것이니,
이는 총상(摠相)을 밝힌 것이다.
이 삼천대천세계미진수의 양이란 것은 보문국 법계의 초수(初數)이자 총상의 차례이니,
뜻인즉 털구멍 속의 삼천대천세계가 곧 시방에 두루 해 하나하나가 다 평등하면서도 법계에 들어가는 방편은 월수(越數)로 헤아릴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다음 이 금강장 보리도량 속 비로자나여래의 사자좌 앞의 일체 보련화 법좌 위에서 허공계처럼 광대한 마음을 일으킨 것은 본래의 신심 속에서 믿고 있는 불과보리(佛果菩提)의 금강지장(金剛智藏)과 오염 없는 대자비의 체(體)로써 일체 법계의 인다라망 경계인 보현의 영원한 행문(行門)을 일으킴을 밝힌 것이니,
이하는 그 뜻이 유래하면 마찬가지이니,
경문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이는 닦아 나간 인과를 총체적으로 거두어서 본래의 양식으로 돌아감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법을 이같이 세워서 개해(開解)하도록 한 것이니,
하나하나 이같이 자기 마음을 관달(觀達)해 수행해서 서로 부합케 하는 것이 바로 뭇 성현의 대의(大意)이다.
그 뜻은 처음 신심 중에 있는 보리체의 근본지를 여의지를 않고 차별지를 닦으며 보현행을 원만히 하기에 시방의 진찰(塵刹)에 겹겹이 충만한 보현행의 바다가 바로 자행(自行)의 원만함인 것이니,
인과가 찰나제(刹那際)를 벗어나지 않으므로 항상 이 법으로 늘 중생을 교화하면서도 찰나제를 벗어나지 않아서 단절이나 시종(始終)의 염(念)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비로자나의 보현 법계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대원명지(大願明智)로 항상 널리 인(印)을 쳐 늘 출몰이나 휴폐(休廢)가 없는 일을 행하는데,
시방에 항상 그러해서 몸이 안팎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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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일째]
피불법신불가설 $ 036▲顛倒顛倒為 一 ● 三末耶, ○□□□□,彼,莊,往,周
□□□□□□□, 彼佛分身不可說,
莊嚴無量不可說, 往詣十方不可說,
□□□□□□□, 피불분신불가설,
장엄무량불가설, 왕예십방불가설,
저 부처님 법의 힘 말할 수 없고
저 부처님 분신(分身)도 말할 수 없고
한량없는 장엄을 말할 수 없고
시방세계 나아감도 말할 수 없고
[37째]
주행국토불가설 $ 037▲三末耶三末耶為 一 ● 毘覩羅, ○□□□□,觀,清,調,彼
□□□□□□□, 觀察眾生不可說,
清淨眾生不可說, 調伏眾生不可說。
□□□□□□□, 관찰중생불가설,
청정중생불가설, 조복중생불가설。
여러 국토 다니는 일 말할 수 없고
중생을 살펴봄도 말할 수 없고
중생을 청정케 함 말할 수 없고
중생을 조복함도 말할 수 없어
●K1257_Txxxx.txt★ ∴≪A신집장경음의수함록≫_≪K1257≫_≪Txxxx≫
●K1263_T1739.txt★ ∴≪A신화엄경론≫_≪K1263≫_≪T1739≫
●K0018_T0240.txt★ ∴≪A실상반야바라밀경≫_≪K0018≫_≪T0240≫
법수_암기방안
36 가랑이 ( crotch / 사타구니, groin )
37 종지뼈 ( the kneecap, / the patella무릎 종지뼈)
36 가랑이 ( crotch / 사타구니, groin )
36 가랑이 ( crotch / 사타구니, gro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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