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아비달마잡집론』
K0576
T1606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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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아비달마잡집론』
♣0576-001♧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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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乘阿毘達磨雜集論卷第一
K0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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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제1권
안혜보살(安慧菩薩) 지음
현장(玄奘) 한역
이한정 번역
1. 본사분(本事分)
1) 삼법품(三法品) ①
【頌】 모든 회본(會本)이 참으로 깨끗한 구경의 도리이니
거룩한 행으로 고해를 지나 피안에 이르네.
일체법에서 자재를 증득하고
어질게 권청하여 제도하는 바가 불가사의하네.
한없이 희유한 공덕이야말로
나와 남이 함께 이로운 의지처이니
이 같은 대각(大覺) 세존께 예배드리고
비할 데 없는 묘한 법과 모든 성중(聖衆)에게 예배드립니다.
본 논을 열어 보여주신 스님들과
성지를 몸소 받들어 분별하신 분에게도 예배드리나이다.
계경을 깨닫고 이를 풀이하시되
이에 올바른 닦음을 발휘해서 잘못을 시정하였네.
【釋】 본 게송에서는 전도되지 않은 가장 뛰어난 공덕을 찬양하면서
공경스럽게 예배하여 삼보를 공양하되,
아울러 본 논을 지어 경전을 풀이한 두 스님께도
그 감응하시는 바에 따라 공양드리는 것이다.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은 본 논의 소의(所依)이면서 ‘논’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ㆍ박가범께서는 계경(契經) 따위의 일체 교법의 평등한 소의가 되신다.
스승 없이 모든 법[諸法]의 실다운 성품을 스스로 깨달으셨기에,
1분교(分敎)가 일어나는 소의처(所依處)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량없는 성제자(聖弟子)의 대중이 법을 의지하고
법에 부수되는 학(學)을 의지 삼아 법계(法界)에 유전하기 때문이다.
경전을 풀이한 두 스님도 역시 여래께서 말씀하신 정법에 계합하여
일부분이라도 전도되지 않고
법을 듣고 법을 사유하고 법을 닦는 행의 의지를 삼으려는 까닭에,
본 논을 지은 것이다.
처음 두 구절의 게송은
여래 응공 정등각(如來應供正等覺)의 뛰어난 여섯 가지 공덕을 드러내는 것이니,
소위 자성(自性)ㆍ인(因)ㆍ과(果)ㆍ업(業)ㆍ상응(相應)ㆍ차별(差別)의 이치이다.
【釋】 ‘모든 회본이 참으로 깨끗한 구경의 도리일지니’란 구절은
자성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법신(法身)이 일체종을 진여로 전의하는 것을 바탕으로 삼기 때문이다.
‘거룩한 행으로 고해를 지나 피안에 이르네’란 구절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인’의 이치이니,
불보리(佛菩提)의 일체종지는 극희지(極喜地) 따위의
10지(地)의 거룩한 행을 셀 수 없는 무량한 대겁(大劫) 동안 원만하게 수습해야 원인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자재함을 증득하고’란 구절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과보의 이치’이니,
일체의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및 그에 따른 그 밖의 나머지 습기(習氣)조차 영구히 끊고서 가없이 희유한 공덕인 위없는 삼먁삼보리의 과보를 증득해서 일체법에 처하여 자유로이 전향하기 때문이다.
‘어질게 권청하여 제도하심이 불가사의하다’란 구절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업의 이치이니,
일체지(一切智)의 경계가 아닌 것을 뛰어넘어 신통ㆍ기설(記說)ㆍ교계(敎誡)ㆍ변현(變現) 따위의 무량한 중생을 조복시키는 방편으로 제도가 가능한 유정을 인도하여 그 심계(心界)를 청정케 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희유한 공덕이야 말로’란 구절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상응의 이치이니,
심사(尋思)로 따져보거나 생각해 보더라도 한량이 없는 갖가지 난행(難行)과 고행(苦行)에서 생겨난 위없는 대비(大悲)ㆍ역(力)ㆍ무애(無礙) 따위의 공덕이 법보(法寶)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나와 남이 함께 이로운 의지처이니’란 구절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차별의 이치이니,
여래가 변화를 수용하는 자성신(自性身)은 그 차제에 따라 나와 남이 함께 이로운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의’란 신(身)의 이치이고,
바탕의 이치이니,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또 ‘나와 남이 함께 이로운 의지처’란 구절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수승한 공덕의 이치이니,
수용신(受用身)이야말로 자리(自利)의 가장 뛰어난 처소이기에 법회 가운데에서 제일가는 넓고 크며 심오한 법의 성스러운 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신’이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가장 수승한 것으로,
시방의 일체 세계에 두루하게 무간(無間)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공교업(工巧業) 따위의 여러 변화사(變化事)로써 건립하여 유정에 감응하는 바를 건립하기 때문이다.
‘자성신’이란 여러 선서(善逝)가 공유하는 법신으로 지극히 미세한 일체의 장애를 진여로 변화시키는 것을 바탕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 자신과 남의 이익을 함께 하는 것이 가장 뛰어나기에 이 같은 믿음을 증득하는 것에 연유해서 그 밖의 나머지 믿음도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세 가지 불신(佛身)이 바로 차별의 이치이다.
여기서도 역시 법보(法寶)와 승보(僧寶)의 공덕을 찬양하게 됨을 숙지해야 한다.
‘법보’란 자성ㆍ인ㆍ와 따위의 이치에 수렴되기 때문이고,
‘승보’란 이에 따라 닦는 것에서 학(學)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로서 학자로 하여금 모든 두려움이 없게 하고자,
이 같은 논의 서두를 지어 그 바탕을 건립하는 것이다.
【頌】 본사분(本事分)과 결택분(決擇分)에는
각각 4품(品)이 있으니
삼법품(三法品)ㆍ섭품(攝品)ㆍ상응품(相應品)ㆍ성취품(成就品)과
제품(諦品)ㆍ법품(法品)ㆍ득품(得品)ㆍ논의품(論議品)이다.
종류가 몇이고 이유가 어떻고 그 취하는 모양[相]과
건립(建立)하는 차례를
이치를 새겨 자세히 분별(分別)해서
모두 게송으로 정리해 놓았으니 이를 숙지하여라.
어째서 논의 서두에서 먼저 온(蘊) 따위를 가려보는 것입니까?
학자로 하여금 그 종류는 몇 가지이고,
그 이유는 어떠한지,
여러 가지 사택처(思擇處)에서 선교(善巧)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다.
어째서입니까?
이 같은 선교에 연유해서 두 가지의 칭찬하는 이익을 얻는 것이니,
소위 작의(作意)를 칭찬하는 이익이고,
논의(論議)의 결택(決擇)을 칭찬하는 이익이다.
【釋】 여기서 ‘작의를 칭찬하는 이익’이란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가 선법에 순응해서 증장되는 것이다.
‘선법(善法)에 순응해서 사마타가 증장하는 것’이란,
이 같은 여러 사택처에서 이미 선교를 이루어 무외(無畏)를 성취하는 것이고,
또 즐기는 바에 따라 하나의 경계에 처해서
정관(正觀)이 현전(現前)해서 마음이 쉽게 안정된다는 것이다.
‘선법에 순응해서 비발사나를 증장시킨다는 것’이란
무량한 문으로서 일체의 알음알이가 일어나는 경계를 관찰해서 그 바른 지혜가 속히 구경에 원만토록 하는 것이다.
‘논의의 결택을 칭찬하는 이익’이란 이 같은 여러 사택처를 어질게 통달한 것에 연유해서 일체의 문답에 자재함을 얻어 여러 외도의 논리에 대해서 ‘무외’를 성취하는 것이다.
온(蘊)ㆍ계(界)ㆍ처(處)에는 각각 몇 종류가 있습니까?
‘온’에는 다섯 종류가 있으니,
색온(色蘊)ㆍ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蘊)이다.
‘계’에는 열여덟 종류가 있으니,
안계(眼界)ㆍ색계(色界)ㆍ안식계(眼識界)ㆍ
이계(耳界)ㆍ성계(聲界)ㆍ이식계(耳識界)ㆍ
비계(鼻界)ㆍ향계(香界)ㆍ비식계(鼻識界)ㆍ
설계(舌界)ㆍ미계(味界)ㆍ미식계(味識界)ㆍ
신계(身界)ㆍ촉계(觸界)ㆍ신식계(身識界)ㆍ
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이다.
‘처’에는 열두 가지가 있으니,
안처(眼處)ㆍ색처(色處)ㆍ
이처(耳處)ㆍ성처(聲處)ㆍ
비처(鼻處)ㆍ향처(香處)ㆍ
설처(舌處)ㆍ미처(味處)ㆍ
신처(身處)ㆍ촉처(觸處)ㆍ
의처(意處)ㆍ법처(法處)이다.
어떤 이유에서 ‘온’에는 다섯 종류만이 있습니까?
다섯 가지 아사(我事)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신구아사(身具我事)ㆍ
수용아사(受用我事)ㆍ
언설아사(言說我事)ㆍ
조작일체법비법아사(造作一切法非法我事)ㆍ
피소의지아자체사(彼所依止我自體事)를 가리킨다.
【釋】 이 다섯 가지 가운데에서 앞의 네 가지는 아소사(我所事)에 해당하고
다섯 번째는 아상사(我相事)에 해당한다.
【釋】 ‘신구’라고 지칭하는 것은
내부와 외부의 색온에 수렴되는 것이니,
수온 따위의 여러 온의 수용이 평등하다는 이치이다.
‘아상사’도 마땅히 해설해야 하리니,
‘피소의지아자체사’란 식온이 신구 따위에 소의하는 ‘아상사의 이치’이다.
어째서입니까?
세간의 유정은 대부분 식온을 헤아려 ‘나[我]’라고 집착하고,
그 밖의 다른 온을 헤아려 ‘내 것[我所]’이라고 집착하는 까닭이다.
어떤 이유에서 ‘계’에는 열여덟 종류만이 있습니까?
신체가 구비된 것 따위에 기인해서
과거와 현재의 6행(行)을 지키고 수용하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釋】 ‘신체’란 안근ㆍ이근ㆍ비근ㆍ설근ㆍ신근ㆍ의근의 6근이고,
‘구비된 것’이란 색경(色境)ㆍ성경(聲境)ㆍ향경(香境)ㆍ미경(味境)ㆍ촉경(觸境)ㆍ법경(法境)의 6경이다.
‘과거ㆍ현재의 6행을 수용한다는 것’이란 6식이고,
‘능히 지속시킨다는 것’이란 6근과 6경이 6식을 능히 지속시키는 소의가 되고 소연이 되는 것이다.
‘과거ㆍ현재의 6식이 그 수용을 능히 지속시킨다는 것’이란
자체적인 모양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니,
열여덟 가지가 모두 ‘능히 지속시킨다는 이치’이기 때문에,
이를 ‘계’라고 이름하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 ‘처(處)’에는 열두 종류만이 있습니까?
신체가 구비된 것 따위에 기인해서
미래의 6행을 유지하고 이를 수용하는 생장문(生長門)이기 때문이다.
과거ㆍ현재의 6행이 수용하는 모습이 안근 따위에서 지속되는 것처럼
미래의 6행이 수용하는 모양도 근의 이치로서 ‘생장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釋】 여기서 ‘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근(根)과 경(境)에 의지해서 12처를 건립하는 것이지
여섯 가지의 모양을 수용하는 ‘식’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째서 ‘취온(取蘊)’이라고 이름합니까?
거둬서 합치기 때문에 ‘취온’이라 이름한다.
어떠한 것을 ‘취(取)’라고 합니까?
모든 온에 있는 ‘욕탐(欲貪)’을 가리킨다.
어째서 욕탐을 해설하여 ‘취’라고 이름합니까?
미래와 현재의 모든 온을 인도해서 버리지 않는 까닭에,
미래를 유추하거나 현재에 염착하는 욕탐을 ‘취’라고 이름한다.
【釋】 ‘욕’이란 간절히 구하는 모양이고,
‘탐’이란 염착하는 모양이니,
‘욕’이 미래의 자체를 구하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미래의 온을 끌어 취하여 현전하게 된다.
탐욕(貪欲)이 현재의 자체를 집착하는 방편이 되기 때문에
현재의 온을 집착해서 취하여 여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를 모두 ‘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계’와 ‘취’를 유취법(有取法)이라 이름합니까?
온에 관한 설명과 동일하다.
계와 처가 서로 취합하기 때문에,
‘유취법’이라 이름하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색온(色蘊)’은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변화를 보이는 모양이 색(色)의 모양이다.
이것에 두 종류가 있다.
첫째가 촉대(觸對)의 변괴(變壞)이고,
둘째가 방소(方所)의 시현(示現)이다.
어떠한 것을 ‘촉대의 변괴’라고 이름합니까?
손ㆍ발ㆍ흙덩이ㆍ돌ㆍ칼ㆍ창ㆍ추위ㆍ더위ㆍ배고픔ㆍ목마름ㆍ모기ㆍ파리ㆍ뱀ㆍ전갈 따위가 서로 접촉하는 것에서 즉시 변화하여 손상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을 ‘방소의 시현’이라고 이름합니까?
방향과 장소로부터 그 모양을 이루는 것은
여차여차한 색이 나투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이러한 색은 정심(定心)에 기인하기도 하고,
또는 부정지(不定地)의 심(尋)심소법이 사(思)심소법과 상응하는 것에 연유해서
갖가지 모양을 그려내기도 한다.
【釋】 여기서 ‘방향과 장소’란 그 처소가 현전하는 것이다.
‘여차여차한 색’이란 자물쇠와 열쇠 따위의 그 인식된 사물이 동일한 종류의 영상인 것을 가리킨다.
‘이러이러한 색’이란 드러난 형체의 차별이다.
‘갖가지 모양을 그려낸다는 것’이란 그 모양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다.
‘수온’은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근접하여 받아들이는 모양이 ‘수온의 모양’이다.
수온으로 인해서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못한 갖가지 업(業)을 받아들여
여러 과보(果報)를 이숙(異熟)시키게 되는 것이다.
【釋】 여기서 ‘청정한 업’은 ‘낙’의 이숙을 받는 것이고,
‘불청정한 업’은 ‘고’의 이숙을 받는 것이고,
정(淨)ㆍ부정업(不淨業)은 ‘불고불락’의 이숙을 받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하면,
정ㆍ부정업에 연유해서 이숙을 감득하는 아뢰아식은
언제나 사수(捨受)와 상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수’야말로 이숙의 실체이니,
‘고’와 ‘낙’의 두 가지 수(受)는 이숙에 따라 생겨나는 때문에,
이를 가설하여 ‘이숙’이라 이름한다.
‘상온’은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인식하는 모양이 ‘상온의 모양’이다.
상온으로 인해서 온갖 모든 법(法)의 모양을 인식하는 것이니,
그 보고 듣고 지각하고 이해하는 이치에 수반해서 갖가지 언설(言說)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釋】 여기서 ‘보고 듣고 지각하고 이해하는 이치’란
눈으로 느껴 받아들이는 것이 보는 이치이고
귀로 느껴 받아들이는 것이 듣는 이치이니,
저절로 생각으로 그려내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지각하는 것의 이치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느껴 받아들이는 바가 ‘이해한다는 것의 이치’이다.
‘갖가지 언설’이란 말로써 풀어내는 이치이다.
행온은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조작하는 모양이 ‘행온의 모양’이다.
행온으로 인해서 마음을 선품(善品)ㆍ불선품(不善品)ㆍ무기품(無記品) 가운데에서 조작하여
그 마음을 부리는 것을 가리킨다.
【釋】 또 갖가지 ‘고’와 ‘낙’ 따위의 지위에서 마음을 부리기 때문이다.
‘식온’은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모양을 구별하여 아는 것[了別]이 식온의 모양이다.
【釋】 식온으로 인해서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의 온갖 경계[境]를 구별하여 알게 된다.
‘안계’는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안근에 색이 직접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아울러 이러한 종자(種子)의 축적을 이숙(異熟)시키는 것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안계의 모양처럼 이계ㆍ비계ㆍ설계ㆍ신계ㆍ의계의 모양도 이와 같다.
【釋】 ‘안근이 색을 본다는 것’이란 과거의 식에 수용된 것을 능히 지속시킨다는 이치로서
그 계의 성품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색이 직접 나타나는 것’이란
현재의 식에 수용된 것을 능히 지속시키는 이치로써 그 계의 성품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종자의 축적을 이숙시키는 것이 이뢰야식’이란
안근의 종자를 가리키는 것이니,
축적된 것만으로도 미래의 안근을 유추하기 때문이고,
이미 성숙된 것이란 현재의 안근에 벌써 생겨난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안계’라 이름하는 것은 안근이 생겨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저 안계의 모양처럼 이계ㆍ비계ㆍ설계ㆍ신계ㆍ의계의 모양도 이와 같다.
‘색계’는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색은 안근에 직접 나타난 것을 가리킨다.
안계가 여기에서 증상(增上)되는 것이 ‘색계의 모양’이다.
색계의 모양처럼 성계ㆍ상계ㆍ향계ㆍ미계ㆍ촉계ㆍ법계의 모양도 이와 같다.
【釋】 ‘안계가 여기에서 증상되는 것’이란
색근이 그 세력을 증상시키는 것에 의지해서 바깥 경계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색계의 모양처럼 성계ㆍ상계ㆍ향계ㆍ미계ㆍ촉계ㆍ법계의 모양도 이와 같다.
‘안식계’는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안근에 인연한 색과 유사한 색[似色]을 구별하여 아는 것이다.
아울러 이와 같은 종자의 축적이 이숙되는 아뢰야식을 ‘안식계의 모양’이라 한다.
안식계의 모양처럼 이식계ㆍ비식계ㆍ설식계ㆍ신식계ㆍ의식계의 모양도 이와 같다.
‘처’는 그 모양이 어떠합니까?
계와 같으므로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숙지해야 한다.
이것은 안근으로 색을 보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아울러 이 같은 종자 따위도 그 이치에 따라 해설되어진다.
‘색온’은 어떻게 건립하게 됩니까?
모든 색을 가리키는 것으로,
네 가지 대종(大種)이나 네 가지 대종의 소조색(所造色)이다.
【釋】 ‘소조’란 네 가지 대종으로서 생인(生因)ㆍ의인(依因)ㆍ입인(立因)ㆍ지인(持因)ㆍ양인(養因)으로 삼는 이치이다.
바로 다섯 가지 원인에 의지하기에 이를 해설하여 ‘소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생인’이란 바로 이것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니,
대종색(大種色)을 여의고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의인’이란 바로 이것이 전향되는 원인이니,
대종의 여러 소조색을 버리고서는 어떠한 공용도 없기에 다른 처소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입인’이란 이것이 전향하는 바에 수반되는 원인이니,
대종의 변이에 연유하여 능히 소조색에 의지하여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지인’이란 이것이 머무르는 원인이니,
대종에 연유해서 여러 소조색의 모양이 비슷하게 상속되어 생겨나되 이를 지속시켜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양인’이란 이것을 키우는 원인이니,
대종에 연유해서 그같이 만들어진 색을 기르고 증장시키기 때문이다.
‘네 가지 대종’이란 무엇입니까?
지계(地界)ㆍ수계(水界)ㆍ화계(火界)ㆍ풍계(風界)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지계’입니까?
견고한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수계’입니까?
유동적이면서도 축축한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화계’입니까?
더운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풍계’입니까?
가벼우면서도 움직이는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만들어진 색[所造色]’입니까?
안근ㆍ이근ㆍ비근ㆍ설근ㆍ신근의 5근(根)과 색처ㆍ성처ㆍ향처ㆍ미처의 4처에 접촉받는 일부분과 법처(法處)에 포섭되는 색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안근’입니까?
네 가지 대종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안식에 의지하는 정색(淨色)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이근’입니까?
네 가지 대종에서 만들어진 것[所造]으로 이식에 의지하는 정색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비근’입니까?
네 가지 대종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비식에 의지하는 정색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설근’입니까?
네 가지 대종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설식에 의지하는 정색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신근’입니까?
네 가지 대종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신식에 의지하는 정색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색’입니까?
네 가지 대종에서 만들어진 색으로 안근에 다다른다는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청색ㆍ황색ㆍ적색ㆍ백색ㆍ장(長)ㆍ단(短)ㆍ방(方)ㆍ원(圓)ㆍ추색[麤]ㆍ세색[細]ㆍ고(高)ㆍ하(下)ㆍ정(正)ㆍ부정(不正)ㆍ빛ㆍ그림자ㆍ구름ㆍ연기ㆍ먼지ㆍ안개ㆍ밝음ㆍ어두움ㆍ형색(色)ㆍ표색(表色)ㆍ공일현색(空一顯色)을 가리킨다.
또 세 종류가 더 있으니,
묘색(妙色)ㆍ불묘색(不妙色)ㆍ구상위색(俱相違色)이다.
이 같은 청색 따위의 스물다섯 가지 색의 건립은 여섯 가지 원인에 연유하는 것이니,
그 모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안립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줄거나 늘어남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소의에 순응한 성취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모양을 이루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장엄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 차례에 따라 네 가지 대종색ㆍ열 가지 현색ㆍ여덟 가지 형색ㆍ두 가지 묘색ㆍ한 가지 공일현색이 있다.
【釋】 ‘형색’이란 그밖에 다른 장애를 여의고서도 그 방향과 장소의 접촉이 가능한 것이다.
‘공일현색’이란 앞에서 본 청색 따위의 현색(顯色)을 말한다.
어떠한 것이 ‘소리’입니까?
네 가지 대종에서 만들어진 이근에 섭취되는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가의성(可意聲)이거나,
불가의성(不可意聲)이거나,
구상위성(俱相違聲)이거나,
인수대종(因受大種:執受大種爲因聲)이거나,인불수대종(因不受大種:不執受大種爲因聲)이거나,
인구대종(因俱大種:俱大種因聲)이거나,
세소공성(世所共成:世所極成聲)이거나,
성소인성(成所引聲)이거나,
변계소집성(遍界所執聲)이거나,
성언소섭성(聖言所攝聲)이거나,
비성언소섭성(非聖言所攝聲)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소리는 다섯 가지 원인에서 건립되는 것이니,
그 모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줄거나 늘어남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인의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그 말하는 것의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언어의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釋】 ‘모양에 기인하는 것’이란 이근에서 얻어지는 이치이고,
‘말하는 것의 차별에 기인하는 것’이란 세소공성 따위의 세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니,
그 밖의 다른 것은 그 상응하는 바와 마찬가지이다.
‘인수대종’이란 말소리 따위의 소리이고,
‘인불수대종’이란 수목 따위에서 생겨나는 소리이고,
‘인구대종성’이란 손바닥으로 북을 치는 따위에서 생겨나는 소리이다.
‘세소공성’이란 세속의 말에 수렴되는 것이고,
‘성소인성’이란 모든 성인의 말씀이고,
‘변계소집성’이란 여러 외도의 말이고,
‘성비성언소섭성’이란 사견 따위에 의지하는 여덟 가지 언설이다.
어떠한 것이 ‘향기’입니까?
네 가지 대종에서 만들어진 비근에 섭취되는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좋은 향기[好香]ㆍ나쁜 향기[惡香]ㆍ평등향(平等香:몸에 좋은 냄새)ㆍ구생향(俱生香)ㆍ화합향(和合香)ㆍ변이향(變異香)을 가리킨다.
이 같은 향은 세 가지 인으로 건립되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모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줄거나 늘어남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釋】 ‘구생향’이란 전단향의 향기 따위이고,
‘화합향’이란 여러 가지 향기가 섞인 것이고,
‘변이향’이란 과일이 익으면 생겨나는 향기 따위이다.
어떠한 것이 ‘맛’입니까?
네 가지 대종에서 만들어진 설근에 섭취되는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쓴맛ㆍ신맛ㆍ단맛ㆍ매운맛ㆍ짠맛ㆍ담백한 맛이다.
가의미(可意味)이거나,
불가의미(不可意味)이거나,
구상위미(俱相違味)이거나,
구생미(俱生味)이거나,
화합미(和合味)이거나,
변이미(變異味)를 가리킨다.
이 같은 ‘미’의 건립도 ‘향’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어떠한 것을 ‘접촉받는 일부분’이라 합니까?
네 가지 대종에서 만들어진 신근에 섭취된다는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매끄러움ㆍ까칠까칠함ㆍ가벼움ㆍ무거움ㆍ부드러움ㆍ헐거움ㆍ뻑뻑함ㆍ추움ㆍ배고픔ㆍ목마름ㆍ배부름ㆍ기력ㆍ무기력ㆍ답답함ㆍ가려움ㆍ끈끈함ㆍ병ㆍ늙음ㆍ죽음ㆍ피곤함ㆍ편안함ㆍ용력(勇力) 따위를 가리킨다.
이 접촉받는 일부분도 여덟 가지 원인에 의해 건립되는 것이니,
모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쓰다듬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달아보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접촉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잡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여러 가지가 섞인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계(界)의 불평등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계의 평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수대(水大)와 풍대(風大)가 섞이는 까닭에 차가운 것이고,
지대(地大)와 수대가 섞이는 까닭에 끈끈한 것이고,
계가 평등한 까닭에 편안하고 활력이 있는 것이다.
【釋】 여기서 ‘용력’이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두 가지의 계의 불평등에 기인하는 까닭에 배고픔 따위의 다른 촉이 있게 된다.
어떠한 것이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입니까?
간략하게 다섯 종류의 색이 있으니,
극략색(極略色)ㆍ극형색(極色)ㆍ수소인색(受所引色)ㆍ변계소기색(遍界所起色)ㆍ자재소생색(自在所生色)을 가리킨다.
【釋】 ‘극략색’이란 극미색(極微色)이고,
‘극형색’이란 그 밖의 다른 장애를 여의고 접촉되는 색이고,
‘수소인색’이란 무표색(無表色)이고,
‘변계소기색’이란 영상(影像)의 색이고,
‘자재소생색’이란 해탈정려(解脫靜慮)에서 행해지는 경계의 색이다.
‘수온’을 어떻게 건립하게 됩니까?
6수신(受身)을 가리키는 것으로,
안촉(眼觸)에서 생겨나는 수온이고,
이촉(耳觸)에서 생겨나는 수온이고,
비촉(鼻觸)에서 생겨나는 수온이고,
설촉(舌觸)에서 생겨나는 수온이고,
신촉(身觸)에서 생겨나는 수온이고,
의촉(意觸)에서 생겨나는 수온을 가리킨다.
이러한 6수신은,
낙(樂)이기도 하고,
고(苦)이기도 하고,
불고불락(不苦不樂)이기도 하다.
또 낙의 신수[樂身受]ㆍ고의 신수[苦身受]ㆍ불고불락의 신수[不苦不樂身受]ㆍ낙의 심수[樂心受]ㆍ고의 심수[苦心受]ㆍ불고불락의 심수[不苦不樂心受]가 있다.
또 낙의 유미수[樂有味受]ㆍ고의 유미수[苦有味受]ㆍ불고불락의 유미수[不苦不樂有味受]ㆍ낙의 무미수[樂無味受]ㆍ고의 무미수[苦無味受]ㆍ불고불락의 무미수[不苦不樂無味受]가 있다.
또 기호(嗜好)에 따르는 낙의 수온이 있고,
기호에 따르는 고의 수온이 있고,
기호에 따르는 불고불락의 수온이 있고,
출리(出離)에 따르는 낙의 수온이 있고,
출리에 따르는 고의 수온이 있고,
출리에 따르는 불고불락의 수온이 있다.
어떠한 것이 ‘신수(身受)’입니까?
다섯 가지의 식(識)에 상응하는 수(受)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심수(心受)’입니까?
의식과 상응하는 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유미수(有味受)’입니까?
그 자체로 애착과 상응하는 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무미수(無味受)’입니까?
이 같은 애착에 상응하지 않는 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기호에 따르는 수’입니까?
다섯 가지의 묘한 욕망에 상응하는 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출리에 따르는 수’입니까?
이 같은 애욕에 상응하지 않는 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같은 것들은 네 가지 원인에 의해 건립된다.
소의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자체적인 바탕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집합의 의존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잡염(雜染)과 청정(淸淨)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釋】 ‘색의 집합’에 의존해서 신수(身受)를 건립하고,
무색의 집합에 의존해서 상수(想受)를 건립하는 것이다.
또 ‘잡염’에 연유해서 유미수(有味受) 따위를 건립하고,
‘청정’에 연유해서 무미수(無味受) 따위를 건립하게 된다.
‘이 같은 애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란 이계(離界)나 이계에 따르는 것이다.
어떻게 ‘상온’을 건립하게 됩니까?
여섯 가지 상신(想身)을 가리킨다.
【釋】 안촉에서 생겨나는 상온이고,
이촉에서 생겨나는 상온이고,
비촉에서 생겨나는 상온이고,
설촉에서 생겨나는 상온이고,
신촉에서 생겨나는 상온이고,
의촉에서 생겨나는 상온이다.
이 같은 상온에 연유하여 유상(有相)의 상온을 요별하거나,
무상(無相)의 상온을 요별하거나,
소상(小想)을 요별하거나,
대상(大想)을 요별하거나,
무량(無量)한 상온을 요별하거나,
소유에 탐착하지 않는 무소유처의 상온을 요별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유상(有相)의 상온’입니까?
말을 배우지 않은,
발음을 여읜 무상(無相)의 계정(界定)과 유정정(有頂定)의 상온 및 그 밖의 나머지 상온이다.
어떠한 것이 ‘무상(無相)의 상온’입니까?
그 밖의 다른 상온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소상(小想)’입니까?
욕계의 상온을 요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대상(大想)’입니까?
색계의 상온을 요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무량한 상온’입니까?
공무변처(空無邊處)와 식무변처(識無邊處)의 상온을 요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무소유처의 소유(所有)에 탐착하지 않는 상온’입니까?
무소유처의 상온을 요별하는 것이다.
【釋】 여기서 ‘불선언설상(不善言說想)’이란 말을 배우지 않는 발성이다.
비록 색에서 상(想)을 일으키더라도 이해할 수 없기에 이같이 이름하는 것이니,
색에 기인하기 때문에 ‘무상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무상계정의 상’이란 색 따위의 일체 모양을 여읜 무상열반(無相涅槃)의 상인 까닭에 ‘무상상’이라 이름하는 것이고,
‘유정정의 상’이란 저들의 상이 명확하지 못하고,
경에 처해서 갖가지 모양을 그려내지 못하기에 ‘무상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소상’이란 욕계의 저급하고 하열함에 기인하는 것이고,
‘대상’이란 색계에서의 증상에 기인하는 것이고,
‘무량상’이란 공무변처나 식무변처에 변제(邊際)가 없음에 기인하는 것이니,
이리하여 저들이 연하는 여러 상을 소상ㆍ대상ㆍ무량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떻게 ‘행온’을 건립하게 됩니까?
여섯 가지 사신(思身)을 말하는 것이다.
【釋】 안촉에서 생겨난 사(思)심소법이고,
이촉에서 생겨난 사심소법이고,
비촉에서 생겨난 사심소법이고,
설촉에서 생겨난 사심소법이고,
신촉에서 생겨난 사심소법이고,
의촉에서 생겨난 사심소법이다.
이 같은 사심소법에 연유해서 사심소법이 갖가지 선업을 짓게 되고,
사심소법이 여러 가지로 물들게 되고,
사심소법에서 분위차별(分位差別)을 짓게 되는 것이다.
또 이 사(思)심소법이 수온과 상온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심소법(心所法)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과 함께 하는 것을 총괄해서 ‘행온’이라 이름한다.
비록 수온과 상온을 제외하더라도 일체의 심소법과 심불상응행은 모두 ‘행온의 모양’이다.
그러나 사심소법이 가장 뛰어나기에 일체행과 더불어 그 으뜸이 된다.
그리하여 따로 항목을 나누어 해설하는 것이니,
이 같은 이치를 드러내고자 사심소법에 연유하여 선법 따위가 조작된다고 해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선법’은 신 따위의 심소법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잡염’은 탐 따위의 심소법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근본번뇌와 탐 따위의 번뇌분은 소분(小分)의 번뇌에 해당한다.
여기서 ‘분위차별’이란 사심소법에서 발휘되는 갖가지 행의 지위에서 심불상응행을 가설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을 ‘그 밖의 다른 심소법’이라 합니까?
작의(作意)ㆍ촉(觸)ㆍ욕(欲)ㆍ승해(勝解)ㆍ염(念)ㆍ삼마지(三摩地)ㆍ혜(慧)ㆍ신(信)ㆍ참(慚)ㆍ괴(愧)ㆍ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ㆍ근(勤)ㆍ안(安)ㆍ불방일(不放逸)ㆍ사(捨)ㆍ불해(不害)ㆍ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무명(無明)ㆍ의(疑)ㆍ살가야견(薩迦耶見)ㆍ변집견(邊執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ㆍ사견(邪見)ㆍ분(忿)ㆍ한(恨)ㆍ부(覆)ㆍ뇌(惱)ㆍ질(嫉)ㆍ간(慳)ㆍ광(誑)ㆍ첨(諂)ㆍ교(憍)ㆍ해(害)ㆍ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혼침(惛沈)ㆍ도거(掉擧)ㆍ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방일(放逸)ㆍ망(忘)ㆍ염(念)ㆍ부정지(不正知)ㆍ산란(散亂)ㆍ수면(睡眠)ㆍ악작(惡作)ㆍ심(尋)ㆍ사(伺)이다.
【釋】 소의의 경우처럼 사심소법 따위의 55법은 변행법(遍行法)이거나 별경법(別境法)이거나 선법(善法)이거나 번뇌법(煩惱法)이거나 수번뇌법(隨煩惱法)이거나 부정법(不定法)이니,
그 차례가 다섯 가지 변행법과 다섯 가지 별경법과 열한 가지 선법과 열두 가지 번뇌와 수번뇌법과 열네 가지 부정법임을 숙지해야 한다.
또 이 같은 여러 심소법에 대해서 그 모양이나 업을 자세히 분별해야 한다.
어떠한 것이 사(思)심소법입니까?
마음을 조작하는 의업(意業)이 그 바탕이다.
선품(善品)ㆍ불선품(不善品)ㆍ무기품(無記品) 가운데에서 그 마음을 부리는 것으로 업(業)을 이루게 된다.
【釋】 ‘마음에서 조작되는 의업이 그 바탕’이란 것은 그 모양을 따져본 것이다.
‘선품 따위에서 그 마음을 부리는 것으로 업을 이룬다는 것’이란 그 업을 따져본 것이니,
선품 따위의 업을 짓도록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작의(作意)심소법입니까?
마음을 발휘시키는 것이 그 바탕이다.
그 인연하는 바의 경계에 처해서 마음을 지속시키는 것으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인연하는 바의 경계에 처해서 마음을 지속시킨다는 것’이란 이 같은 경계에 처해서 누차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정을 얻는 것을 ‘작의를 얻는다’고 이름하게 된다.
어떠한 것이 촉(觸)심소법입니까?
세 가지 화합에 의해 모든 근(根)이 변하여 달라지는 것이 그 바탕이다.
수온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식이 생겨나는 때에 여러 근에 의지해서 순차적으로 고락 따위의 수가 생겨나서 변이하는 그 행상(行相)이다.
이 같은 행상의 분별에 순응해서 촉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욕(欲)심소법입니까?
저러한 것들의 인발(引發)에서 지어진 희망이 그 바탕이다.
정근(精勤)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저러한 것들의 인발에서 지어진 희망’이란 욕심소법이 보고 듣는 따위의 일체의 작용을 거두어 수렴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승해(勝解)심소법입니까?
일을 결정하는 때에 그 결정된 바를 변동 없이 지키는 것이 그 바탕이다.
전향하지 못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그 결정된 바에 따라 변동 없이 지킨다는 것’이란 이 같은 일이 반드시 이와 같아서 다른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아는 ‘승해’이다.
승해에 연유해서 모든 수승한 연이 인전(引轉)하지 못하게 된다.
어떠한 것이 염(念)심소법입니까?
습관적인 일을 마음속에 분명히 기억해서 잊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산란하지 않은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습관적인 일’이란 예전에 이미 받아 지닌 것이다.
‘산란하지 않은 것에서 업을 이룬다는 것’이란,
생각[念]에 연유해서 경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까닭에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삼마지(三摩地)심소법입니까?
사물을 관찰함에 있어서 마음을 하나의 경계에 전일하게 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지혜에 의지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것’이란 하나의 경계에 대해서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것이다.
‘지혜에 의지한다는 것’이란 마음이 고요한 선정에 처해서 실답게 깨닫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혜(慧)심소법입니까?
사물을 관찰함에 처해서 그 택법(擇法)하는 것을 그 바탕으로 삼는다.
의심을 끊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지혜로 택법하는 것에 연유해서 결정된 성품을 얻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신(信)심소법입니까?
바탕을 갖춘 것,
덕망을 갖춘 것,
공능을 갖춘 것에 대한 인가(忍可)와 청정에 대한 바람이 그 바탕이다.
기꺼이 구하는 바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기꺼이 구하는 바에 의지하는 것’이란 실다운 바탕을 갖춘 것에 대한 인가를 일으켜야 믿음이 행해지는 것이다.
실다운 공덕을 갖춘 것에 대한 청정함을 일으켜야 믿음이 행해지게 되고,
실다운 공능을 갖춘 것에 대한 희망을 일으켜야 믿음이 행해지게 되기에,
스스로 능력이 갖춰져야 성취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참(慚)심소법입니까?
모든 허물과 악행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 그 바탕이다.
악행을 멈추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괴(愧)심소법입니까?
모든 허물과 악행을 남들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업은 ‘참’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어떠한 것이 무탐(無貪)심소법입니까?
제유(諸有:有有)에 모두 집착하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악행에 빠지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무진(無瞋)심소법입니까?
모든 유정의 고통과 고통이 일어나게 되는 구실 따위에 노여워하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악행에 빠지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무치(無癡)심소법입니까?
교증(敎證)의 보득(報得)에 연유해서 지혜로 결택(決擇)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악행에 빠지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여기서 참심소법 따위는 이해하기 쉬우므로 다시 해석하지 않는다.
‘교증의 보득에 연유해서’란 듣고 생각하고 닦는 것에서 생겨나는 생득(生得)의 지혜이니,
그 차례에 따라 숙지해야 한다.
‘결택’이란 지혜에 용맹스러운 정근이 갖춰진 것이다.
어떠한 것이 근(勤)심소법입니까?
피갑(被甲)의 방편이 약해지거나 쇠퇴하거나 도중에 만족하지 않는 굳센 마음으로 그 바탕을 삼는다.
선품(善品)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으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성품을 원만하게 이루는 것에서 업을 이루는 것’이란 계경의 말씀처럼 세력이 있고 근이 있어서 굳세고 견고하되 선액(善軛)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그 차례에 맞춰서 피갑이나 마음이 굳센 것 따위의 여러 구절을 풀이해야 한다.
‘원만한 성품’이란 처음 근본정려(根本靜慮)에 들어가는 것을 모두 원만케 하는 것이다.
‘선품을 이룬다는 것’이란 여기에서 지극한 선법을 닦아 다스리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안(安)심소법입니까?
몸과 마음의 거칠음과 무거움을 쉬게 해서 몸과 마음을 홀가분하게 조절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일체의 장애를 없애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일체의 장애를 없애는 것에서 업을 이루는 것’이란 이 같은 세력에 연유해서 그 전향하는 바에 의지하는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불방일(不放逸)심소법입니까?
정근ㆍ무탐ㆍ무진ㆍ무치에 머물러 모든 선법을 닦되 모든 유루법(有漏法)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것이 그 바탕이다.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복을 원만히 이루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정근 따위에 연유해서 미리 일체의 선법을 닦고 유루(有漏)를 방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리하여 이 같은 사법(捨法)에 의지해서 불방일의 바탕이 가정하여 세워지게 된다.
유루법이란 모든 누(漏)와 누의 처소경계이다.
어떠한 것이 사(捨)심소법입니까?
정근ㆍ무탐ㆍ무진ㆍ무치에 의지하여 잡념에 머무는 상온을 등지는 심법의 평등성(平等性)ㆍ심법의 정직성(正直性)ㆍ심법의 무공용(無功用)에 의지하는 성품이 그 바탕이다.
잡념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심평등성 따위란 초위(初位)ㆍ중위(中位)ㆍ후위(後位)에서 그 차별을 버리는 것을 따지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하면,
사가 마음과 상응하는 것에 연유해서 침몰 따위의 불평등성을 여의는 까닭에 최초로 심평등성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니,
그 마음의 평등함에 연유해서 멀리 여읨의 덧붙여 행해짐이 자연히 성립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심정직성을 증득해야 하니 마음이 정직함에 연유해서 여러 잡염에 처해서 두려운 생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무공용(無功用)에 머무는 성품을 증득해야 한다.
어떠한 것이 불해(不害)심소법입니까?
성내지 않는 선근(善根)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에서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그 바탕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불해심소법이란 무진심소법을 여의지 못하는 것이기에,
이 또한 가정하여 세워진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어떠한 것이 탐(貪)심소법입니까?
삼계에 대한 애착이 그 바탕이다.
중생의 고통이 생겨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중생의 고통이 생겨나는 것’이란 애착하는 힘에 연유해서 5취온(聚蘊)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진(瞋)심소법입니까?
유정(有情)의 고통과 고통이 일어나게 되는 구실 따위에 마음으로 노여워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편안하지 못하게 악행에 머무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편안하지 못하게 머문다는 것’이란 마음속에 증오와 분노를 품기에 고통 속에 자주 머무르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만(慢)심소법입니까?
살가야견(薩迦耶見)에 의지해서 마음을 거만하게 가지는 것이 그 바탕이다.
불경스럽기에 괴로운 삶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불경스러움’이란 스승이나 덕망이 있는 이에 있어서 교만함을 부리는 것이고,
‘고가 생겨난다는 것’이란 후유(後有)가 생겨나는 것이다.
‘삿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란 전도된 지혜를 말하고 ‘의심’이란 머뭇거리는 것이고,
‘잡념이 생겨난다는 것’이란 탐 따위의 번뇌가 현행(現行)한다는 것이다.
‘의지해서’란 어리석음[愚癡]에 연유해서 여러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무명(無明)심소법입니까?
삼계(三界)의 무지(無知)가 그 바탕이다.
제법(諸法) 가운데 삿된 결정을 내리거나 의심을 어지럽게 일으키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의(疑)심소법입니까?
진제(眞諦)를 미심쩍어 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선품(善品)이 생기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진제를 미심쩍어한다는 것’이란 실상의 수렴을 미심쩍어하면서도 멸제(滅諦)와 도제(道諦)의 포섭에 응하는 경우와 같다.
‘선품이 생기지 않는 것’이란 그 결정하지 못하는 것에 연유해서 수행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살가야견입니까?
오취온(五取蘊) 따위를 관찰하여 아(我)와 아소(我所)라고 집착하는,
모든 인(忍)ㆍ욕(欲)ㆍ각(覺)ㆍ관(觀)ㆍ견(見)이 그 바탕이다.
모든 견취(見取)에 의지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변집견(邊執見)심소법입니까?
오취온 따위를 관찰하고서 이를 가장 뛰어나다거나 최상이라거나 묘하다고 집착하는,
모든 인ㆍ욕ㆍ각ㆍ관ㆍ견이 그 바탕이다.
처중행(處中行)의 출리(出離)를 장애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처중행’이란 단멸(斷滅)하거나 상주(常住)한다는 연기를 여읜 바른 지혜이다.
어떠한 것이 견취견(見取見)심소법입니까?
갖가지 삿된 소견이나 삿된 소견에 의지하는 5취온 따위를 관찰하고서 이를 가장 뛰어나다거나 최상이라거나 묘하다고 집착하는,
모든 인ㆍ욕ㆍ각ㆍ관ㆍ견이 그 바탕이다.
바르지 못한 견해를 집착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계금취견(戒禁取見)심소법입니까?
갖가지 계율의 금지나 그 계율의 금지에 의지하는 5취온 따위를 관찰하고서 이를 청정하다거나 해탈이라거나 출리(出離)라고 집착하는,
모든 인ㆍ욕ㆍ각ㆍ관ㆍ견이 그 바탕이다.
노력해도 과보가 없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계금취견’이란 사악한 견해에 빠지는 것이고,
‘노력해도 과보가 없는 것’이란 이 같은 것에 연유해서 출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사견(邪見)심소법입니까?
인을 비방하거나 과보를 비방하거나 그 작용을 비방하거나 그 실다운 일을 비방하거나 삿된 분별을 내는,
모든 인ㆍ욕ㆍ각ㆍ관ㆍ견이 그 바탕이다.
선근을 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기도 하고,
불선이 생겨나는 것에서 업을 이루기도 하고,
선업이 생겨나지 않는 것에서 업을 이루기도 한다.
【釋】 ‘인을 비방한다는 것’이란 보시(布施)도 없고 애락(愛樂)도 없고 제사(祭祀)의 공덕도 없고 묘행(妙行)도 없고 악행 따위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과보를 비방한다는 것’이란 묘행이나 악행의 업에서 초래된 이숙 따위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작용을 비방한다는 것’이란 이 세간도 존재하지 않고 저 세상도 존재하지 않고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고 화생(化生)하는 유정 따위도 없다고 하는 것이니,
서로 다른 세상을 왕래하는 그 작용의 비방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종자의 작용의 비방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상속되는 작용의 비방에 기인하는 것이다.
【釋】 ‘실다운 일을 훼손한다는 것’이란 세간에는 아라한 따위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삿된 분별’이란 나머지 다른 분별에 전도된 모든 견해이다.
‘선근을 끊었다는 것’이란 일체종지(一切種知)가 아닌 사견을 증상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사견에 있어서,
증익견(增益見)은 몇 가지이고,
손감견(損減見)은 몇 가지입니까?
네 종류가 증익견에 해당하는 것이니,
알음알이가 일어나는 경계에 처해서 그 자성이 차별되게 늘어난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여러 가지 사견을 으뜸삼아 청정하게 늘어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체의 대부분이 손감견에 해당한다.
【釋】 5취온의 소지무아경(所知無我境)에 있어서 아와 아소의 자성을 늘리는 것이 ‘살가야견’이다.
자아가 상주한다고 하거나 무상하다는 차별을 늘리는 것이 ‘변집견’이고 여러 사악한 소견에서의 증익을 으뜸삼는 것이 ‘견취견’이다.
이 같은 소견의 증익이 청정하다고 여기는 것이 ‘계금취견’이다.
일체의 다분(多分)이 손감견(損減見)이니,
여기서 ‘일체의 대부분’이란 삿된 분별이라도 반드시 손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제와 후제가 존재한다고 헤아리는 모든 견해에는 이 같은 다섯 가지 견해 중에서 어디에 귀속됩니까?
두 종류이거나 전부라고도 말한다.
분석할 수 없는 일[不可記事]에 해당하는 모든 견해는 이 같은 다섯 가지 소견 가운데에서 어디에 귀속됩니까?
두 가지 또는 전부에 귀속된다고도 말한다.
【釋】 ‘두 종류’란 변집견 및 사견의 자체적인 모양에 기인하는 것이고,
‘일체’란 다섯 가지 사견의 권속을 말하는 것이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어떠한 허물을 관찰하셨습니까?
온ㆍ계ㆍ처에서 그 훼손되지 않는 것을 ‘나’라고 집착하는 다섯 가지 모양이다.
저들이 살가야견에 빠지게 되는 것을 관찰해 보면 다섯 가지 허물이 있기 때문이니,
바로 이상과실(異相過失)이고,
무상과실(無常過失)이고,
부자재과실(不自在過失)이고,
무신과실(無身過失)이고,
불유공용해탈과실(不由功用解脫過失)이다.
【釋】 ‘이상과실’이란 색온 따위가 자아의 체성이 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자아의 모양과 다르기 때문이다.
‘무상과실’이란 자아는 색온 따위에 처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이러한 경우 자아는 마땅히 무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하면,
소의(所依)도 아니고 능의(能依)도 아니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자재과실’이란 자아를 유색 따위로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니,
이러한 경우 그 자아는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하면,
자아가 색 따위에 있게 되면 자재로이 전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신과실’이란 색 따위를 여읜 다른 처소에는 자아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이러한 경우 자아는 마땅히 신체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하면,
신체를 여읜 자아를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까닭이다.
‘불유공용해탈과실’이란 설사 자아의 모양을 이와 같이 분별하더라도 이치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니,
무색 따위의 자아는 공용에 연유하지 않고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입니까?
신체의 얽매임이 만약 없다면 그러한 자아는 경계에 처해서 자유로이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5취온에서도 스무 가지의 살가야견이 생겨나는 것이니,
자아는 색에 의해 존재한다고 하거나,
색이 자아의 속성이라고 하거나,
또는 자아는 색 가운데 존재한다고 합니다.
또 이처럼 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을 자아라고 헤아리거나,
자아는 식온에 의하여 존재한다고 하거나,
식온이 자아의 속성이라고 하거나,
식온 가운데 자아가 존재한다고도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견해 중에서 몇 가지가 아견(我見)이고 몇 가지가 아소견(我所見)입니까?
이 가운데에서 다섯 가지만이 아견이고,
나머지 열다섯 가지는 아소견이다.
색을 자아라고 헤아리는 것과 수ㆍ상ㆍ행ㆍ식을 자아라고 헤아리는 다섯 가지가 ‘아견’이다.
나머지 열다섯 가지는 ‘아소견’이다.
무슨 이유로 그 열다섯 가지가 아소견에 해당됩니까?
아소에 상응하기 때문이고,
아소에 수반되기 때문이고,
아소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釋】 ‘아소에 상응하는 것’이란 자아가 유색 내지는 자아가 유식인 것을 가리킨다.
어째서인가 하면,
자아에 연유하여 그것과 상응하기에 그것이 있다고 말하는 때문이다.
‘아소에 수반하는 것’이란 색은 자아의 속성 내지는 식이 자아의 속성임을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하면,
만약 저것이 이것의 자재한 세력에 의해 전향하여 버려지거나 부림받는 경우,
세간에서는 저와 같은 것을 ‘아소’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아소를 여의지 않는다는 것’이란 자아는 색 가운데 존재하는 것 내지는 자아가 식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째서인가 하면,
저들이 실재하는 자아가 온 가운데에 처해서 그 체가 두루한 것에 순응해서 행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살가야견에 따른 해설도 사물에 대해 확실히 요지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 같은 사물에 대한 해설은 확실히 요지하는 것이 없으니,
마치 새끼줄을 잘못 보고 뱀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釋】 ‘사물에 대해 확실히 요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란 만약 색 따위의 실상을 확실히 이해한다면 허망한 아견(我見)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새끼줄이 매어져 있는 것을 얼핏 보고 뱀이라고 집착하는 것과 같으니,
새끼줄의 모양을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뱀이라는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분(忿)심소법입니까?
면전에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지 못하는 모양이니,
진(瞋)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노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지팡이를 쥐고 분풀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분’ 따위도 가정적으로 세워진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진 심소법 따위를 여의게 되면 따로 별도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한(恨)심소법입니까?
이 같은 일이 지나간 다음에도 진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에 머물러서 원망을 그치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참지 못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이 같은 일이 지나간 다음에도’란 분심소법이 일어난 이후의 일이다.
‘참지 못한다는 것’이란 유익하지 않은 일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부(覆)심소법입니까?
죄를 짓고도 다른 이가 이를 바르게 거론할 때에,
치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허물을 감추려는 것이 그 바탕이다.
마음속으로 뉘우치면서 편안하지 못하게 머무르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지은 죄를 숨기게 되면 자연히 마음속으로 필히 근심ㆍ걱정이 있게 된다.
이에 연유해서 편안하게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뇌(惱)심소법입니까?
앞서 설명한 분심소법ㆍ한심소법ㆍ부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에 머물러서 눈물 흘리는 것이 그 바탕이다.
날뛰면서 악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고,
복이 아닌 것을 짓는 것에서 업을 이루고,
편안하지 못하게 머무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날뛰면서 악담하는 것’이란 말을 흉악하게 해서 남의 복장을 터지게 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질(嫉)심소법입니까?
이익에 집착해서 다른 사람의 호강을 견디지 못하는 진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질투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마음이 근심스러워 편안하지 못하게 머무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간(慳)심소법입니까?
생활필수품과 같은 이익에 집착하는 것을 가리킨다.
탐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몹시 인색하게 구는 것이 그 바탕이다.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의지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버리지 못하는 것’이란 인색하기 때문에 혼자서 쓰지 못하는 물건조차도 끝끝내 모아 쌓아놓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광(誆)심소법입니까?
이익에 집착하는 탐심과 치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진실되지 않은 공덕을 거짓으로 현전(現前)시키는 것이 그 바탕이다.
사명(邪命)에 의지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첨(諂)심소법입니까?
이익에 집착하는 치심소법와 탐심소법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그릇된 방편을 꾸며 진실을 감추고 악을 행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다른 이의 교수(敎授)를 방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그릇된 방편을 꾸며 진실을 감추고 악을 행한다는 것’이란 다른 일을 핑계대어 나머지 일을 회피하는 것이다.
‘올바른 교수를 방해하는 것’이란 지은 죄를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는 것에 연유하여 교수에 맡기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교(憍)심소법입니까?
나이가 젊거나 병이 없거나 장수하는 모양이나 또는 하나의 유루법인 명예나 이익 같은 일에 의지하는 탐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들떠서 거리낌 없는 것이 그 바탕이다.
모든 번뇌와 수번뇌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장수하는 모양’이란 빨리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서 미리 이 같은 모양을 분별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수명으로 따른 교만함이 생겨나게 된다.
‘하나의 유루법에 의거한 명예나 이익같은 일’이란 문벌ㆍ외양ㆍ기력ㆍ총명함ㆍ재산이 자유로운 일이다.
‘들뜬다는 것’이란 희(喜)의 차별에 물드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해(害)심소법입니까?
진심소법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애처롭게 여기거나 불쌍하게 여기거나 가련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유정을 괴롭히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무참(無慙)심소법입니까?
탐ㆍ진ㆍ치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갖가지 악행을 저지르고도 자신에게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모든 번뇌와 수번뇌를 보조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무괴(無愧)심소법입니까?
탐ㆍ진ㆍ치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갖가지 악행을 저지르고도 남에게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모든 번뇌와 수번뇌를 조반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혼침(惛沈)심소법입니까?
우치(愚癡)심소법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마음이 참고 견디지 못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비발사나(毘鉢舍那)를 방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도거(掉擧)심소법입니까?
탐심소법과 욕심소법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청정한 모양을 염두에 두기에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사마타(奢摩他)를 방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청정한 모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이란 예전에 탐욕이나 놀이 따위에 순응해서 회상하는 까닭에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불신(不信)심소법입니까?
우치심소법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여러 선법을 마음으로 견뎌내지 못하거나 마음속으로 이를 청정하게 여기지 않거나 마음속으로 바라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게으름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 ‘게으름에 의지한다는 것’이란 불신에 연유하여 기꺼이 바라는 가행의 방편이 없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해태(懈怠)심소법입니까?
우치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잠에 취하여 늘 누워 있는 것을 즐기고 마음으로 노력하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선품의 방편을 닦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방일(放逸)심소법입니까?
해태심소법과 탐ㆍ진ㆍ치에 의지해서 선법을 닦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유루법에 처해 있음에도 마음을 지키지 않는 것이 그 바탕이다.
미워하고 싫어하여 손상시키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망념(妄念)심소법입니까?
여러 가지 번뇌가 그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釋】 어지러운 것에 의지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것이 부정지(不正知)심소법입니까?
여러 번뇌가 혜심소법과 상응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이 같은 혜심소법에 연유해서 부정지심소법를 일으켜 신ㆍ구ㆍ의의 행을 훼손하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부정지의 신ㆍ구ㆍ의의 행’이란 죽고 태어나는 일을 바르지 못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하기에 많은 범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산란(散亂)심소법입니까?
탐ㆍ진ㆍ치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이 그 바탕이다.
이것에 다시 여섯 가지가 있으니,
자성산란(自性散亂)ㆍ외산란(外散亂)ㆍ내산란(內散亂)ㆍ상산란(相散亂)ㆍ추중산란(麤重散亂)ㆍ작의산란(作意散亂)이다.
어떠한 것이 ‘자성산란’입니까?
5식신(識身)을 가리킨다.
【釋】그 자체적인 성품에 연유하는 것이기에 내부적으로 고요한 정(定)의 공능(功能)이 없는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외산란’입니까?
선법을 올바로 닦는 때에 다섯 가지 묘한 5욕이 그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것을 가리킨다.
【釋】닦고 익히는 따위의 선법의 방편을 가리킨다.
그 소연을 버리게 되면 마음이 밖으로 치달려 묘한 5욕 가운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내산란’입니까?
선법을 올바로 닦는 때에 혼침(惛沈)하거나 도거(掉擧)하여 미정(味定)에 집착하는 것을 가리킨다.
【釋】정을 닦는 이가 혼침이나 도거를 일으키거나 정에 미착(味着)하는 까닭에,
고요한 정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상산란’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선법의 수행을 잘못 교시한 것을 그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釋】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유덕함을 믿게 하려는 까닭에 이 같은 모양을 나투는 것이다.
이 같은 인연에 연유해서 닦게 되면 선법에서 점차로 물러나게 된다.
어떠한 것이 ‘추중산란’입니까?
아와 아소의 집착에 의지하는 것 및 아만품(我慢品)의 거칠고 무거운[麤重] 세력에 기인하기 때문이니,
선법을 닦는 때에 이미 생겨난 일체의 수온에서 일어나는 아와 아소 및 아만에서 간간이 잡되게 집수(執受)하여 그 모양을 취하는 것이다.
아집 따위의 거칠고 무거운 힘에 연유하는 까닭에 이미 생겨난 낙(樂) 따위의 수 가운데에서 혹 이것을 ‘아’라고 집착하거나 또는 ‘아소’라고 집착하거나 또는 아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같은 것에 연유해서 닦게 되면 선품이 영원히 청정해지지 않게 된다.
【釋】‘집수’란 처음 집착하는 것이고,
‘간간이 잡되게’란 심법(心法) 사이의 잡된 것에 연유하여 여러 심법이 상속되는 것이다.
‘모양을 취한다는 것’이란 이 같은 수에 처해서 누차 다른 모양을 집착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작의산란’입니까?
여승(餘乘)의 여정(餘定)에 의지하거나 들어가게 되면 모든 것이 흩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釋】여승에 의지하거나 여정에 들어가서 예전에 익힌 바를 버리게 되면 산란함이 일어난다는 것을 숙지해야 한다.
수번뇌의 성품에 의지하기에 산란하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수면(睡眠)심소법입니까?
수면의 인연에 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치(愚癡)의 일부분이 대략 그 바탕이 된다.
선(善)하기도 하고,
불선(不善)하기도 하고,
무기(無記)이기도 하고,
시(時)이기도 하고,
비시(非時)이기도 하고,
응이(應爾)이기도 하고,
불응이(不應爾)이기도 하기에,
실념(失念:越失)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수면의 인연’이란 파리하고 수척해서
몸이 피곤하여 수면에 빠져드는 것이 심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사유가 어두워지는 모양에 처해서 여러 가지 지어나가는 바를 버리는 것이 되풀이되는 이러한 때에 그 잠자는 것이 습관이 된다.
또는 다른 사람의 주술이나 신통력에 끌리거나
혹은 부채를 부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따위에 기인하기도 한다.
‘우치분(愚癡分)’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고
또 ‘선법 따위’라고 말하는 것도 이 같은 수면이
정이 아닌 ‘우치분’이란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시’란 한밤중의 시분(時分)을 말하고 ‘비시’란 그 밖의 다른 시분을 가리킨다.
‘응이’란 허락받은 시분이니,
설사 ‘비시’이더라도 질병이나 휴양하기 위한 경우이다.
‘불응이’란 그 밖의 다른 시분을 가리킨다.
‘실념에 의지해서 업을 이룬다는 것’이란 수번뇌의 성품에 의거해서 수면을 해설한 것이다.
어떠한 것이 악작(惡作)입니까?
낙작(樂作)ㆍ불락작(不樂作)ㆍ응작(應作)ㆍ불응작(不應作)을 가리킨다.
이 우치(愚癡)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곧 후회하게 되는 것이 그 바탕이다.
선(善)하기도 하고,
불선(不善)하기도 하고,
무기(無記)이기도 하고,
시(時)이기도 하고,
비시(非時)이기도 하고,
응이(應爾)이기도 하고,
불응이(不應爾)이기도 하기에,
능히 심주(心住)를 장애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낙작’이란 예전에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을 기꺼이 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락작’이란 다른 사람의 세력이나 여러 번뇌에 핍박받는 것에 연유하여 짓게 되는 바가 그에 상응하는 것이다.
‘우치분’이란 수번뇌에 수렴되는 것이다.
‘시’란 출리하기까지이고,
‘비시’란 출리한 이후이다.
‘응이’란 합당한 것이고,
‘불응이’란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어떠한 것이 심(尋)심소법입니까?
사(思)심소법에 의지하거나 혜심소법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말과 그 이치를 헤아리는 작용이 있어 마음을 거칠고 무겁게 전향시키는 것이 그 바탕이다.
【釋】‘사심소법에 의지하거나 혜심소법에 의지한다는 것’은 추리하거나 추리하지 않는 위치에서 그 차례에 맞추어 행상을 추구하는 의(意)와 언어를 분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사(伺)심소법입니까?
사(思)심소법에 의지하거나 혜심소법에 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말과 이치를 세밀하게 헤아리는 작용이 있어 마음을 미세하게 전향시키는 것이 그 바탕이다.
이 같은 두 종류의 그 머무는 것이 안정되거나 안정되지 않는 것에 의지해서 업을 이루게 된다.
【釋】심과 사 두 종류의 행상은 서로 상대되는 것이기에 거칠고 무거움과 미세함으로써 그 차별을 건립하게 된다.
또 모든 선한 심법에 처해서 스스로 그 소치(所治)를 끊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되고
번뇌와 수번뇌가 스스로 능치(能治)하는 것을 장애하는 것에서 업을 이루게 된다.
신과 참 따위가 불신을 능히 끊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참 따위나 탐 따위의 번뇌도 무탐의 대치 따위의 법을 능히 장애하게 된다.
‘장애’라고 말하는 것은 대치가 생기지 않게 하는 까닭이다.
분(忿) 따위의 모든 수번뇌는 자(慈) 따위를 능히 장애하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각각의 대치 또한 이와 같다.
● [pt op tr] fr
_M#]
『대승아비달마잡집론』
♣0576-001♧
◎◎[개별논의] ♥ ❋본문
● 해태와 방일, 심과 사의 구분
『대승아비달마잡집론』은 안혜의 저술이다.
안혜는 유식학 논사다.
그래서 다른 아비달마논서와 조금 설명이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안혜는 유식학 계열에서도 1 분설을 취하고 무상유식학파에 속한다.
그래서 또 다른 유식학 입장과도 조금 다르다.
결국 한 논서에서 제시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다른 논서의 입장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논서를 대할 때는 이런 점을 미리 주의해야 한다.
처음 한 사람이 눈을 뜨면 일정한 모습을 본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다시 각 부분이 무엇무엇이라고 분별을 한다.
누구나 이런 활동을 매일 한다.
그런데 이 간단한 과정 하나를 설명하는데에서부터
각 논사의 입장이 제각각 극단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이 하나를 놓고도 자세히 깊게 살펴야만 한다.
그래야 어떤 논서에서 어떤 내용이 보다 타당한지를 살펴나갈 수 있다.
★1★
◆vbbc4999
◈Lab value 불기2565/06/16 |
Mireille Mathieu - Le Premier Rendez-Vous
♥단상♥랜덤 논문 열람방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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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tirthaka:tirthika 외교(外敎)ㆍ외학(外學)ㆍ외법(外法)이라고도 함. 인도에서 불교 이외의 모든 교학. 종류가 많아 96종이 있고, 부처님 당시에 6종의 외도가 있었음. tirthaka는 신성하고 존경할 만한 은둔자(隱遁者)라는 뜻이나, 불교에서 보면 모두 다른 교학이므로 외도라 함.
답 후보
● 외도(外道)
요익유정발심(饒益有情發心)
욕계정(欲界定)
욕염(欲染)
용수종(龍樹宗)
우두전단(牛頭栴檀)
우바이(優婆夷)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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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중-일-범-팔-불어 관련-퀴즈
[wiki-bud] Kathavatthu
[san-chn] mandika 昧鈍
[san-eng] virala $ 범어 rare
[pali-chn] kumuda 拘物頭華
[pal-eng] pasiiditvaa $ 팔리어 abs. of pasiidatihaving become bright; having pleased or purified.
[Eng-Ch-Eng] 不共法 (1) Characteristics peculiar to each individual person. One's own body that has been created through one's own karma. (2) The characteristics peculiar to the Buddha. 【參照: 不共佛法】
[Muller-jpn-Eng] 淫 イン Loose, free, unbounded
[Glossary_of_Buddhism-Eng] PARABLE: LAMP OF THE OLD WOMAN☞
“King Ajatasatru invited the Buddha to preach and offered as a
token of his piety several tens of thousands of lamps.
■ 암산퀴즈
205* 182
178750 / 250
■ 다라니퀴즈
자비주 11 번째는?
성관자재보살 명호 59 번째는?
11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선남자야 네가 대자대비로
중생을 안락케 하기 위하여
신주(神呪)를 설하고자 하나니
지금 바로 그때라. 속히 설할지니라.
여래께서 네가 설함을 따라 기뻐하니
모든 부처님도 또한 그러할 것이니라."
● 바로기제새바라능다바 婆盧吉帝室佛羅㘄馱婆<十一> ba ru ki te ś va r a ṃ dha va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59
다라사라다가 마라니바사라 가사누 바지다아 다라
哆羅娑囉怛迦<二合>摩羅你婆舍羅<二合>訖叉<三合引>波喞哆誐<引>怛囉<五十九二合>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 삼매_게송퀴즈
■ 오늘의 게송
[167일째]
피제장엄불가설 $ 038▲毘覩羅毘覩羅為 一 ● 奚婆(上)羅, ○□□□□,彼,彼,彼,所
□□□□□□□, 彼諸神力不可說,
彼諸自在不可說, 彼諸神變不可說。
□□□□□□□, 피제신력불가설,
피제자재불가설, 피제신변불가설。
여러 가지 장엄도 말할 수 없고
저 여러 신통한 힘 말할 수 없고
여러 가지 자재함도 말할 수 없고
여러 가지 신통 변화 말할 수 없어
[168째]
소유신통불가설 $ 039▲奚婆羅奚婆羅為 一 ● 伺察, ○□□□□,所,所,所,清
□□□□□□□, 所有境界不可說,
所有加持不可說, 所住世間不可說。
□□□□□□□, 소유경계불가설,
소유가지불가설, 소주세간불가설。
갖고 있는 신통을 말할 수 없고
갖고 있는 경계도 말할 수 없고
갖고 있는 가지함도 말할 수 없고
세간에 머무름도 말할 수 없어
●K0989_T0847.txt★ ∴≪A대승수행보살행문제경요집≫_≪K0989≫_≪T0847≫
●K0576_T1606.txt★ ∴≪A대승아비달마잡집론≫_≪K0576≫_≪T1606≫
●K0572_T1605.txt★ ∴≪A대승아비달마집론≫_≪K0572≫_≪T1605≫
법수_암기방안
38 정강이[Shin]
39 아킬래스건 Achilles tendon
11 위팔 upper arm
59 순[입술] 치아[아] 설 口脣 【구순】 齒牙 【치아】
37310
715
○ 2019_1004_155212_nik_ct19
○ 2019_1004_140114_nik_fix
○ 2019_1004_152952_nik_ct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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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104_121848_nik_exc_s12 구례 화엄사
○ 2019_1104_103102_nik_exc_s12 구례 화엄사
○ 2019_1104_130918_can_Ab31_s12 구례 화엄사 연기암
○ 2020_1114_140044_can_Ar37_s12 삼각산 도선사
○ 2018_1023_172446_nik_bw0_s12 예산 덕숭산 수덕사
○ 2018_1022_142436_nik_BW22 공주 계룡산 갑사
○ 2020_1017_144143_nik_ct33_s12 삼각산 화계사
○ 2020_1017_144041_nik_Ar37 삼각산 화계사
○ 2016_0505_125744_nik 춘천 청평사
○ 2020_1002_124946_nik_AB23 파주 고령산 보광사
○ 2020_0909_144533_nik_ori_rs 무주 백련사
○ 2020_0909_142510_nik_ct19 무주 백련사
○ 2020_0905_141807_can_Ab27 오대산 상원사
○ 2020_0211_134206_can_ct18_s12 불암산 천보사
○ 2019_1105_165600_can_Ab31_s12 순천 조계산 송광사
○ 2019_1105_120249_can_ab41_s12 순천 조계산 선암사
○ 2019_1105_114945_can_AR35_s12 순천 조계산 선암사
○ 2019_1106_115229_can_ab8_s12 화순 영구산 운주사
○ 2019_1105_113107_nik_ct19_s12 순천 조계산 선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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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104_113015_nik_Ab35 구례화엄사 구층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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