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K0382
T0309
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2권/전체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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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038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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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별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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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개별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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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2권
5. 요공품(了空品)
6. 근문품(根門品)
7. 광수품(廣受品)
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K0382V12P0353c
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2권
요진 축불념 한역
송성수 번역
5. 요공품(了空品)
그때에 최승(最勝)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게 수성(修成) 보살은 5주(住) 가운데서
그 지(地)를 청정하게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수성 보살[大士]은
언제나 집안에 사는 것을 멀리 여읜다.
그리고 재물을 모으는 일을 멀리 여읜다.
그리고 또한 자주 두미(頭彌)나 음촌(淫村)을 친근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착한 공덕을 닦는다.
그리고 증오[憎]와 질투[질嫉]를 없애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속의 모임이나 세간의 인연을 멀리 여읜다.
그리고 화합을 생각한다.
그래서 성냄이나 다툼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
그리고 말을 할 때는 입을 단속한다.
그래서 피차(彼此)를 어지럽게 함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낮춘다.
그러면서 높은 체 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비록 재주가 많다 하더라도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무명을 끊어 없앤다.
그리고 5음을 소멸시킨다.
그리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일들을 쉰다.
그리고 진로(塵勞)를 일으키지 않는다.
또한 다시 62소견[見]과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한 낮추지도 않는다.
그리고 세간의 여덟 가지 일[事]을 넘어선다.
그리고 높낮이[高下]가 없고 언제나 공순(恭順)할 줄 안다.
그리고 모든 고뇌를 버린다.
그리고 어리석고 어두운 일을 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잠[睡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모든 두려움을 건넌다.
그래서 죄(罪)와 함께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마음의 때[心垢]와도 함께하지 않느니라.
5음을 끊는다.
그리고 이에 다음을 사유한다.
즉 생사의 신마(身魔)ㆍ죄마(罪魔)ㆍ사마(死魔)ㆍ천마(天魔)에 이르기까지 사유한다.
그리고 억제한다.
그래서 그것과 인연을 짓지 않는다.
그리고 들은 것과 같은 지혜로 곧 능히 건립한다.
그리고 마땅히 이와 같은 행을 해야 한다.
그런는데도 아무것도 없다.
진리[제諦]로 지혜의 뜻[慧意]에 들어가서 배운다.
그러되 만족해 함이 없다.
그리고 탐하는 바가 없다.
그리고 그리워하는 바도 없다.
그리고 또한 열심히 함도 없다.
그리고 싫어함[適莫]도 없다.
그리고 기꺼이 여쭙는다.
그리고 받는다.
그러면서 마음에 즐거움을 품는다.
그리고 몸은 가뿐하다.
그러면서 뜻은 안정된다.
그리고 그 뜻은 온화하다.
그리고 청아하다.
그래서 번거로움이 없다.
그리고 심란함이 없느니라.
배우는 법의 근본과 말하는 법은 끝이 없다.
그리고 마음은 언제나 도에 나아간다.
그래서 금계의 법[禁法]으로 스스로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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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르고 참된[正直]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좇는다.
그리고 삿된 부분[邪分]에는 처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직 미묘한 지혜만을 좋아한다.
그리고 모든 도무극을 분별한다.
그리고 보살의 대승경전과 전적[經籍]을 체득한다.
그리고 선권방편으로 앞의 것에 따라 알맞게 한다.
그리고 마음은 다시 자세히 살핀다.
그래서 신통을 환히 안다.
그리고 언제나 생멸이 없는 법을 듣고 싶어 한다.
그리고 12인연을 환히 안다.
그래서 무상(無常)함을 통달한다.
그래서 안다.
그리고 고제(苦諦)를 펴 연설한다.
그리고 역시 나[吾我]라는 것이 없음을 안다.
그리고 공정(空定)을 안다.
그래서 무상(無相)을 분별하느니라.
깊이 무원(無願)을 체달한다.
그래서 생사가 괴로움임을 깨달아 안다.
그리고 공덕을 성취한다.
그래서 들은 바를 힘써 붙잡는다.
그리고 3보를 탐하여 그리워한다.
그리고 또한 세속을 안다.
하지만 다시 도법(道法)을 알고자 한다.
그리고 충성스런 마음으로 가까이 한다.
그래서 동무[伴侶]를 삼는다.
그리고 널리 모든 법에 들어간다.
그래서 가난함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리고 바른 도를 달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지혜 없는 이를 교화한다.
그래서 다 같이 공훈의 업을 성취하게 한다.
그리고 그 근본을 분명히 안다.
그래서 온갖 악(惡)을 피하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몸을 정숙하게 한다.
그리고 지혜를 통달한다.
그리고 겸하여 중생을 이롭게 한다.
그리고 안온한 행에 처한다.
그래서 또한 원한을 품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미묘하고 끝없는 행을 알려고 하느니라.
또 최승아,
수성(修成) 보살이 모든 부처님 법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위없는 도의 요의(道要)를 이루게 되느냐?
들은 것과 같은 지혜로 곧 능히 이루어 마친다.
그리고 들어갈 바에 때를 따른다.
그러되 역시 차례를 뛰어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음향을 듣는다.
그 후에야 바르게 조정된다.
그래서 깊이 관(觀)에 들어간다.
그래서 마음이 행할 바를 안다.
그리고 몸을 제어한다.
그래서 제도되기를 구한다.
그래서 중생을 건진다.
그리고 무상(無常)을 헤아리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집착하는 바도 없다.
그리고 인연으로 시설할 수 있는 바의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과 과거ㆍ
미래ㆍ현재를 더듬어 살핀다.
그리고 공덕의 업을 이룬다.
그래서 선정(禪定)을 분별한다.
그리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지킨다.
그리고 탐욕을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삼매(三昧)에 노닌다.
그러면서 정수(正受)를 닦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수성 보살은 백천의 정(定)에 들어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느니라.
보살은 처소마다 두루하여 이르지 않는 데가 없다.
그러되 오직 무색계(無色界)의 천상과 광음천(光音天)에 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영원히 멸진정(滅盡定) 중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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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제(本際)를 모두 알아 사유한다.
그리고 붙잡아 갖는다.
그리고 또한 본래부터 없음[本無]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증득하지 않느니라.
그렇게 하는 까닭은
모두가 중생들의 더러운 때[구垢]가 아직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그 중생을 안다.
그리고 나[吾我]가 없음을 이해한다.
그리고 대자(大慈)를 익혀 행한다.
그리고 불쌍히 여김[悲哀]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널리 온갖 생사의 재난에 들어간다.
그래서 탐착과 모든 영화로운 것과 더러움을 멀리 여읜다.
그리고 모든 법을 범한 이를 가르친다.
또한 그릇된 일을 하지 않게 한다.
그리고 권방편(權方便)을 행한다.
그래서 교화한다.
그러되 방향이 없다.
그리고 앞의 중생을 따른다.
그러되 마음에 애욕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오로(惡露)를 관한다.
그리고 부정(不淨)의 행을 닦게 한다.
그런 뒤에야 보살은 비로소 취한다.
그리고 다 증득하느니라.
비록 멸도를 나타낸다.
그렇더라도 또한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
수성 보살은 제도할 바가 끝이 없다.
그리고 또한 다할 수도 없는지라.
저마다 그의 처소를 얻게 한다.
그래서 마음에 한(恨)이 없게 한다.
그리고 위의와 예절의 금도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출입에는 편안하다.
그리고 자상하다.
그래서 급작스러움[卒暴]이 없느니라.
곧 다툼이 없으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리고 현성은 잠자코[黙然] 계시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고요하여야 하느니라.
그리고 언설(言說)이 없어야 하느니라.
언설이 없다고 함은 다음을 말한다.
이에 청정하면서 허무(虛無)하다.
그리고 담연(澹然)하다.
이러한 것을 말한다.
또한 모나고 둥글거나 과한(科限)은 다름이 없는 것이다.
현성은 잠자코 계신다 함은 다음을 말한다.
스스로 몸과 입을 지킨다.
그리고 마음으로는 말하는 이를 관한다.
그러나 그와 똑같이 처하지 않는다.
그러니 몸이 동요하지 않으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뀜이 없고다.
그리고 또한 바라는 것도 없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는 바도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수성 보살의 행이니라.
색(色)에 미혹되지 않으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마음을 바로 해야 한다.
그 마음을 바로 함으로써
곧 영원히 고요한 무위(無爲)에 도달하게 되느니라.
欲不色惑
當正其心
以正其心
便爲達至永寂無爲
만일 고요하지 않고 자기만을 돕고 기른다고 하자.
그러면 스스로 칭할 수도 없다. **
그리고 또한 어질지 않을 수 없다.
若不寂靜將養已者
無得自稱
亦莫不仁
無高下者可謂順法 所爲不失亦
無所失解本無空便無所得失等觀三世亦無差特
높고 낮음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법을 순종한다 할 수 있다.
그러니 하는 일이 상실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한 상실하는 것도 없다.
그리고 본래부터 공하고 없는 줄을 안다고 하자.
그러면 곧 얻거나 잃을 것이 없다.
그리고 평등하게 3세를 관한다.
그러면서 또한 차별이나 특이함이 없느니라.
눈의 빛깔[眼色]과 식(識)은 머무르는 바도 없다.
그리고 귀의 소리[耳聲]와 식ㆍ몸의 세활[身細滑]과
식ㆍ뜻의 법[意法]과 식에도
모두 주인[主]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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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머무르는 바도 없다.
또한 나[吾我]도 없다.
모든 법의 행(行)에는 모두 다 아소(我所)가 없느니라.
아(我)라고 함은 본래부터 청정한 것이 변하고 바뀌기 때문이다.
그대로 진리를 살피면
내가 없음을 안다.
내가 없다면 이것이 바로 지혜[혜慧]이니라.
있는 바[所有]를 분명히 안다고 하자.
그러면 마치 아무것도 없는[無所有] 것과 같다.
그리고 또한 모두 다 공하다.
그리고 고요하다.
그래서 근본이나 지말이 청정하다.
그리고 마음은 언제나 모든 법의 근본을 여의지 않는다.
그리고 아홉 중생의 거처를 사유한다.
그래서 멀리 여읜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수레바퀴 돌 듯하다.
그리고 빠지고 빙빙 돌고 내닫느니라.
아홉 가지 처소의 중생의 무리는 몸이 다르다.[身異]
그리고 모든 하늘과 사람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또 최승아,
혹 어떤 중생은 몸은 한 종류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생각[一想]을 성취함이 있다.
이는 범신천(梵身天)을 말한다.
맨 처음에 출현하여 몸이 세간으로 내려온다.
그래서 단맛[甘味]을 탐착한다.
이으로써 점차로 하늘의 위신을 잃게 되었느니라.
다시 어떤 중생은
몸은 하나로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若干] 생각이 있다.
이는 광음천(光音天)을 말한다.
그런데, 공덕과 의용(儀容)과 위신(威神)이 특수하니라.
혹은 어떤 중생은 하나의 몸이다. 그리고 하나의 생각이 있다.
이는 변정천(遍淨天)을 말한다.
이는 마땅한 데에 나아간다.
그리고 오직 행이 지극히 미묘할 뿐이니라.
다시 어떤 중생은 뜻이 한량없다.
그리고 허공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그리고 마음은 유(有)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멸(滅)에 나아가지도 않는다.
이것은 바로 공입천(空入天)을 말한다.
다시 어떤 중생은 뜻이 식이라는 생각[識想]에 매여 있다.
그래서 형체를 버린다.
그리고 다시는 부리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희망하거나 하지 않는다.
이는, 곧 식입천(識入天)을 말한다.
다시 어떤 중생은 탐하거나 하는 바도 없다.
그리고 시비(是非)를 없애버린다.
그래서 마음속이 충족하다.
그래서 모든 맛의 집착[味着]에 대하여
생각을 일으키는 바가 없다.
이것은 또한 불용입천(不用入天)을 말한다.
다시 어떤 중생은 큰 서원을 세운다.
그래서 무위(無爲)를 구한다.
그리고 무색계를 관한다.
그러면서 형질이 없다.
이를테면 무위(無爲)ㆍ무작(無作)ㆍ무조자(無造者)인 열반이니라.
그 뜻하는 원[志願]이 정밀하다.
그래서 반드시 거기에 나게 된다.
그래서 8만 4천 겁수(劫數) 동안 산다.
그러다가 수명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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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는 혼신[神]은 옮아가게 된다.
그래서 5도(道)로 나아간다.
그러되 태어나야 할 곳에 중음(中陰)으로서 곧 간다.
그리고 그의 혼을 맞이할 태실(胎室)로 나아가게 되느니라.
그런 뒤에야 비로소 진실한 멸도가 아님을 안다.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왕성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곧 성을 내게 된다.
그리고 마음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입으로 말한다. **
그러면서 죄를 심는다.
그러니 재앙이 깊어지느니라.
성인의 언교를 배반한다.
그래서 ‘헛되어 진실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간 사람을 미혹하게 한다.
그리고 진실하지 않은 것으로 속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래고 먼 옛적부터 고행(苦行)을 겪었다.
그러므로 열반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그러하여 의심이 없다’
이처럼 말하기도 한다.
또는 다음처럼 말하기도 한다.
‘나는 이제 어찌하여 다시금 생사(生死)를 겪게 되었는가?
나는 이제 비로소 열반도 없음을 알겠도다.
그리고 또한 신통과 도를 얻는 사람도 없음을 알겠도다’
이처럼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혼신은 악도(惡道)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현인과 성인을 비방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수성 보살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등정각을 이루고자 한다고 하자.
그러면 언제나 마음에서는 아홉 중생의 사는 곳[九衆生居]을 버려야 하느니라.
그리고 여의어야 하느니라.
그리고 온갖 중생의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에 바라는 바가 없어야 하느니라.
그리고 짓는 바의 인연은 모두가 다 피할 것을 생각하어야 하느니라.
그리고 또한 세속 사이의 기억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리고 여러 가지의 생각들을 녹여 없애느니라.
수성 보살은 다시 열다섯 가지 특수한 마음으로 이전의 법[向法]과
다음의 법[次法]에 대한다.
그래서 그 도(道)를 이루는 데로 나아간다.
그러되 첫째 법으로부터 고법인(苦法忍)에 들어간다.
그리고 더욱 선근(善根)을 늘려 무루(無漏)의 행을 같이한다.
그리고 5주(住)로부터 여래가 되기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다 선근을 갖춘다.
그러되 욕애(欲愛)를 사유한다.
그렇다해도 5주 보살은 욕애를 끊어 없앤다.
그리고 불선근(不善根)을 소멸시킨다.
그리고 욕계(欲界)에 머물 때는 인(忍)과 고혜(苦慧)를 잡는다.
그래서 괴로움의 근본을 사유한다.
그러나 무형계(無形界) 중의 무색(無色)의 몸으로는 괴로움의 근본을 사유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보살은 무형계에서는 욕계의 법을 제거하지 못한다.
그리고 불선근이 더욱 불어난다.
그래서 90가지의 일[事]이 있다.
그리고 무루의 지혜 약에도 역시 90가지가 있느니라.
열 가지 요긴한 법[要法]으로써
불선근과 욕계의 음욕의 미세한 때[구垢]를 대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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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머지 80가지 법으로써
80가지 불선근의 근본을 끊어 없앤다.
그리고 비록 이것으로 다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점차로 미세하게 하느니라.
진(盡)ㆍ도(道)의 성제(聖諦)에는 또한 무루와 합하는 법이 있다.
그리고 또한 유루(有漏)와 합하는 법이 있기도 하느니라.
수성 보살은 5주 중에서 오직 유루와 합하는 법만을 끊을 뿐이요
그리고 무루와 합하는 법을 끊지 못한다.
유위의 성품[有爲性]에도 역시 합하는 법이 있다.
그리고 무위의 성품에도 역시 합하는 법이 있느니라.
그때에 보살은오직 유위만을 끊을 뿐이다.
그리고 아직 무위와 상응하면서 합하는 법은 제거하지 못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수성 보살은 다시 5분법성(分法性)을 수행한다.
그래서 사유한다.
그리고 분별한다.
그래서 둘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계의 몸[戒身]을 보호한다.
그리고 목숨을 청정히 한다.
그래서 탐함이 없다.
그리고 흠과 더러움이 이미 제거된다고 하자.
그러면 뭇 정(定)이 벌써 성립된다.
그러니 이것을 바로 최승아,
정의 몸[定身]이라 하느니라.
모든 관(觀)을 분별한다고 하자.
그러면 약간의 생각도 없다.
또한 다시 생각이나 집착에 대한 기억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도 없음을 분명히 안다.
때문에 지혜 몸[慧身]이라 한다.
3세에서 해탈한다.
그래서 더러워진 바도 없다.
그러면서 또한 두려워하거나 물러나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
때문에 해탈의 몸[解脫身]이라 한다.
그리고 이미 아홉째 해탈을 이룩하였다.
때문에 해탈지견의 몸[解脫知見身]이라 하느니라.
유위의 연(緣)의 것은 바로 해탈의 몸이다.
그러나 무위의 연의 것은 해탈지견과 지혜의 몸이다.
그러니 유루와 무루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수성 보살이 곧 색의 연이 다하는 법을 익히고 배운 것이다.
그리고 색의 연이 다한 것이 아닌 법이 있다.
이것은 아직 끊어 없애지 못한 것이니라.
어떤 것이 보살의 색의 연이 다한 법인가.
그리고 색의 연이 다한 것이 아닌가?
색의 연이 다한 것은 다음이다.
만일 눈이면 빛깔을 보고 곧 안식(眼識)을 낸다.
그래서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의 법을 분별한다.
그리고 뜻을 일으킨다.
그래서 염착한다.
그리고 끝난 뒤에도 여의지 않는 것이다.
수성 보살은 곧 지혜를 붙잡아 막는다.
그러면서 나지 않게 한다.
그리고 더러운 악[穢惡]과 부정(不淨)한 행을 제거하느니라.
색의 연이 다하지 아니한 것은 다음이다.
지혜로 미칠 바가 아니다.
K0382V12P0355c
안식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시비ㆍ선악의 행을 분별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된 까닭은
그의 경계로 껴잡아 지니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비유를 인용하겠다.
그래서 스스로 깨닫게 하겠다.
큰 지혜가 있는 사람은
비유로써 이해할 수 있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피로가 심하다.
그래서 잠을 잘 적에는 신식(神識)이 편안하다.
그리고 고요하다.
그래서 형상이 동요하지 않는다.
그런데 접촉하거나 흔든 이가 없다고 하자.
그러면 눈은 빛깔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신식이 내닫지도 않는다.
그리고 생각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눈이 이미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바깥의 물질에 즐겁게 놀고 있다.
그렇다 하여도 그 때에는 담연(澹然)하다.
그래서 눈은 공(功)을 더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식(識)은 흩어져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알맞게 나타나는 빛깔도 홀연히 스쳐가기만 한다.
그리고 또한 물러서 거리끼지 않는다.
그리고 막히지 않는다.
이러한 것과 같으니라.
그 까닭은 다음이다.
있는 바가 없는 데에 작용한다.
그래서 성품이 스스로 공(空)하다.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수성 보살은 언제나 사유한다.
그래서 미묘한 관(觀)을 분별한다.
그리고 색의 연이 다한 것이 아닌 법을 끊어 없앤다.
그리고 또한 함께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시설하지도 않는다.
색의 연이 다한 것이 아님을 배운다.
그래서 분명히 안다고 하자.
그러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없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성공도 없다.
그리고 실패도 없느니라.
다시 현성(賢聖)의 8정(正)을 수행한다.
그래서 8사(邪)를 제거한다.
그리고 삼매와 백천의 정의(定意)를 성취하여야 한다.
5사(邪)인 마음의 법[心法]이 있다.
여기에서 세 가지의 사(邪)는 마음이 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염(念)ㆍ정(定)ㆍ방편(方便)은 모든 지(地)에 있느니라.
초선(初禪) 이후에는 곧 삿된 뜻[邪志]이 있다.
그리고 사견(私見)의 뒤바뀐 것은 6식(識)에 있지 않다.
그러나 네 가지의 사(邪)는 모두 다 6식신(識身) 가운데 있다.
그래서 함께 서로 연결한다.
그래서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여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견은 식에 공통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다섯 가지 식으로 비록 결정한다 하더라도
방편의 힘은 없다.
그리고 의식(意識)의 지혜를 알아야 방편의 힘이 있느니라.
중선(中禪) 이상에는 역시 삿된 뜻은 없다.
그리고 다만 사견만이 있다.
그래서 서른여섯 가지 법[三十六法]과 함께 서로 받아들이느니라.
초선에 든 이후로는 오직 삿된 뜻만 있다.
그래서 18법과 함께 서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5식음(識陰) 가운데로 들어갈 뿐이다.
그리고 비록 삿된 뜻이 있더라도
스스로는 서로 알지 못한다.
그리고 중간선(中間禪) 안에서는
비록 사견이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상응하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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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의(發意) 보살이 4주에 이르른다.
그래서 고지(苦智)와 인욕의 지혜를 행한다.
그리고 사견을 소멸시킨다.
그리고 삿된 뜻을 멀리 여읜다.
그리고 수성(修成) 보살은 6주(住)를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현묘하게 통달한 지혜[玄通智]를 행한다.
그래서 3계의 인연을 끊는다.
그리고서야 비로소 진제(眞際)에 상응한 것이다.
그러니, 우선 부지런히 힘쓴다.
그래서 빠르게 내닫는[奔逸] 앙화(殃禍)의 병을 끊어야 하느니라.
어리석음과 망설임으로 5사(邪)를 일으켜 짓는다.
그래서 3계에 두루 편다.
그래서 비거나 이지러진 곳[空缺處]이 없다.
그리고 18결(結)의 근본으로 8백 법을 낸다.
그리고 고(苦)가 있다. 그리고 습(習)은 없다.
그러나 역시 함께 상응한다.
그리고 습은 있다. 그리고 고가 없다.
그러나 역시 함께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음[癡]과 애(愛)는 똑같이 공하다.
그러나 함께 서로 생기느니라.
고의 문[苦門] 가운데서 무명의 번뇌가 제거된다.
그러나 습제(習諦)에서 무명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리어 고(苦)를 낸다.
그리고 애(愛) 또한 제거되지 않는다.
그리고 불수(佛樹) 아래 앉아 뭇 의심을 결단한다.
그리고 바르게 부처의 도에 머문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뜻에 파괴되지 않느니라.
정각(正覺)의 위없는 도를 이루게 된다.
그 때에야 셀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게 된다.
그리고 연의 집착[緣着]과 모든 일어나거나 없어지는 법[起滅法]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또한 공하다.
그리고 고요하다.
그래서 볼 수 없느니라.
5주(住) 보살이 색의 연이 다한 것이 아닌 법과
공한 성품의 법을 얻는다.
그 때에는 모든 티끌과 때의 병이 또한 모두 소멸된다.
그리고 언제나 다섯 가지 법으로써 애착을 제어하느니라.
6식(識)에 통한 병은 두루 3계에 있다.
그러므로 그 근본을 뽑아낸다.
그래서 더 자라지 않게 한다.
그리고 성냄[瞋恚]의 다섯 가지 약(藥)이 6식신(識身)에 갖추어져 있다.
그러되 상류(上流)까지는 미치지 않게 하느니라.
그리고 유독 이 세계에만 있게 하느니라.
만(慢)에는 5 가지 법이 있다.
하나의 의식신(意識身)은 3 곳[三處]에 있다.
그래서 그 뿌리가 깊게 박혀 있다.
그러므로 움직이기 어렵다.
사견(邪見)의 4 가지 약(藥)도 하나의 의식신이다.
그리고 그 또한 3 곳에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왕래한다.
그리고 원(願)과 의(疑) 등 4 가지 행과 의식신도 또한 3 곳에 있다.
그래서 간탐[慳]과 질투[질嫉]를 사유한다.
그러므로 3 곳에 있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수면(睡眠)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러니 마땅히 멀리 여의어야 한다.
그래서 뒤섞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뭇 번뇌를 버려야 한다.
그래서 어리석지 않기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어둡지 않기를 생각해야 한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니
같이 처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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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생각에 일체지의 마음을 세운다.
그리고 슬기롭게 진리를 따른다고 하자.
그러면 마치 허공과 같다.
그래서 막힘이 없느니라.
우리[吾]가 없다고 하자.
그러면 곧 나[아我]가 없다.
그리고 아견(我見)이 제거된다.
때문에 고혜(苦慧)라 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所有]를 수습하여도 존재하는 바가 없다.
그리고 모두 본말이 없다.
그리고 또한 머무른 데도 없다.
그리고 애착에 물들지 않는다.
때문에 습혜(習慧)라 하느니라.
습의 집착은 닳아 없어지는 법이다.
이를 안다.
그리고 바르고 참된 법요[正眞要]를 배운다.
그래서 본제(本際)가 없다고 하자.
그러면 모두 다 소멸하게 된다.
이런 사정을 안다.
때문에 진혜(盡慧)라 한다.
그리고 뭇 마음을 통달한다.
그래서 비추어 밝다.
이러한 것이 마치 구름이 사라지듯 하다.
그리고 현묘하게 통한다.
그래서 밝게 사무친다.
그래서 티끌과 때[塵垢]가 없다.
최승아,
이것을 바로 보살의 도혜(道慧)라 하느니라.
곧 잘 관찰한다.
그래서 5음을 깨달아 안다.
그리고 4대의 근본을 안다.
그리고 6쇠의 병을 이해한다.
그리고 4제(諦)를 분별한다.
그리고 12인연을 통달한다.
그리고 3세에 널리 연설한다.
그래서 모든 번뇌[使]가 일어나는 바를 분별한다.
그리고 5음의 모든 나고 없어짐을 깨달아 안다.
그리고 모든 법의 오고감이 있는 것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티끌과 때가 있는 것도 보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다시 나고 늙고 죽음이 있는 것을 보지도 않느니라.
그렇게 한 까닭은 다음이다.
그 본래 성품[本性]을 말미암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연(因緣)이 소멸한다.
이로써 모든 집착을 여읜다.
그리고 단견을 여읜다.
그리고 모든 법의 때가 다한다.
그래서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언교가 이미 안정된다.
그래서 동요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마치 허깨비와 같다.
그리고 꿈속에서 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파초와 아지랑이와 부르는 소리의 메아리와 같다.
그리고 거울 속의 형상과 같다.
또는 물 속의 거품과 같으니라.
색상(色相)과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을 관한다.
그러되 색(色)은 그와 같다.
그래서 진실로 생기는 바가 없음을 안다.
그리고 이 법을 분명히 안다.
그러면서 모두 청정하다고 관한다.
그리고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고 하자.
그러면 이것이 5음인 줄 깨달아 안다.
그리고 아ㆍ인ㆍ수명은 실로 허깨비와 같다.
그리고 식(識)도 역시 형상이 없다.
그래서 볼 수 없다.
그리고 움직이거나 옮기는 그 처소가 있음을 보지 않느니라.
다시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신(非身)의 업(業)을 깨달아야 하느니라.
그래서 알아야 하느니라.
이것을 아는 이라야 비로소 다음을 통달한다.
즉, 5음을 통달한다.
그리고 모든 법의 지혜의 뜻을 통달한다.
그리고 또한 일어남이 없음을 통달한다.
그리고 없어짐이 없는 것을 통달한다.
그리고 가장자리[邊際]를 통달한다.
생기는 바의 지ㆍ수ㆍ화ㆍ풍도 더하거나 덜함을 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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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계(法界)에 대하여도
역시 굳세거나 부드러움이 없다고 관한다.
그리고 물의 성품[水性]을 궁구하여 찾아도
물에는 적시는 것이 없다.
그리고 화계(火界)를 사유하여도
다시 뜨겁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바람의 경계를 알되
벌여 퍼지거나 동요하는 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4대를 분별하여
나고 없어짐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더하고 덜함이 일어난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곧 말로 헤아리는 지혜[言數慧]를 깨달아 안다.
그리고 넓은 지혜[廣慧]와 깊은 지혜[深慧]를 깨달아 안다.
그리고 견줄 데 없는 지혜[無比慧]를 깨달아 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눈이 빛깔을 본다고 하자.
그러면 곧 식의 생각[識想]을 낸다.
하지만 법계로써 관한다고 하자.
그러면 역시 눈으로 보는 것이 없다.
그래서 모두 다 텅 비고 고요한 것을 아느니라.
다시 법계에서 귀로 듣는 소리를 관찰한다고 하자.
그러면 또한 다시 소리가 어디서부터 온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황홀하게 저절로 생겼다가 다시 저절로 소멸한다.
그리고 코의 냄새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혀의 맛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활(細滑)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뜻의 법에도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단멸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흥하거나 쇠한 것이 없다.
그리고 완전하게 다 갖춘다.
그래서 중생의 성행(性行)과 지조(志操)를 관찰한다.
그러되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리고 모두 다 평등하다.
그래서 따로 여읠 수도 없다.
그리고 약간의 생각도 없다.
그리고 공하여 차이도 없다.
그러니 또한 헤아릴 수도 없다.
그리고 열반과 법신은 평등하기 허공과 같다.
그리고 법계와 진제(眞際)도 허공과 같으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수성 보살은 다시 다음을 관한다.
눈이 공(空)하여야 내가 없다고.
이처럼 관한다.
내가 있지 않는 것도 아닌 것도 공하다.
그리고 내가 없다[無我]는 이것도 모두 다 공하느니라.
내가 공함을 안다.
이는 모든 쇠(衰)와 입(入)에 있다고 하자.
그러면 실마리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진실로 6쇠는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단멸하지도 않다고 헤아린다.
이것이 다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바로 보살이 6쇠의 법에 대하여
일어나거나 소멸하는 것이 없다고.
이처럼 말하는 것이니라.
눈과 색이 쇠하다고 하자.
그러면 뭇 어지러움[衆亂]의 근본이 된다.
그러니, 설령 눈으로 본다 하여도 옮아가지 않는다.
그러면 곧 6쇠는 청정하다.
그래서 하자가 없다.
그리고 큰 과증(果證)을 이룬다.
그래서 다시는 근심이 없다.
또한 두려움이 없다.
그러나 쇠(衰)에서 청정하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도의 성품[道性]이 손상되느니라.
보살은 큰 서원으로 큰 자비를 행한다.
그래서 널리 온갖 중생을 덮는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나 고통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가깝거나 멀거나 험한 재난이 없다.
그리고 두려운 재난이 없다.
그리고 반드시 중생을 제도해야 될 때라고 하자.
그러면 도(道)도 즐기지 않는다.
그리고 부지런히 보시의 덕을 권한다.
그리고 행한다.
그래서 착한 공덕을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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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다음을 뜻한다.
수성 보살이 법을 사유하면서 관한다.
그러되 5음과 6쇠는 모두 다 처소가 없다.
그리고 또한 모양[形兆]과 진지(進止)에 나아갈 바도 없는 것이니라.
또 고(苦)ㆍ습(習)ㆍ진(盡)ㆍ도(道)로써 5음을 분별한다.
그리고 나고 없어지는 것은 더함도 있다.
그리고 덜함도 있다.
그러나 모두 다 형상이 없다.
그리고 다음 괴로움이 또한 괴로운 것이다.
즉, 나는 괴로움[生苦]ㆍ
늙는 괴로움[老苦]ㆍ
병든 괴로움[病苦]ㆍ
죽는 괴로움[死苦]과
근심하고 슬퍼하고 번뇌하는 괴로움[憂悲惱苦]ㆍ
원수나 미워하는 이끼리 서로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ㆍ
사랑하는 이끼리 서로 이별하는 괴로움[恩愛離苦]ㆍ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所欲不得]도 또한 괴로운 것이다.
요점을 들어 말한다면
5음이 성한 괴로움[五盛陰苦]이니라.
최승아,
이것을 바로 괴로움을 안다[知苦]고 하느니라.
근원을 찾아 살핀다고 하자.
그러면 괴로움의 가지들이 생긴다.
이러한 것은 습(習) 때문이다.
애욕을 탐착한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한다.
그리고 보배롭게 여긴다.
그래서 요술인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멀리 여의게 된다.
때문에 익힘을 안다[知習]고 한다.
그리고 모든 때[구垢]가 영원히 없어진다.
그러면 다시는 새로 짓지 않는다.
그리고 원하고 바라는 것이** 다 마쳤다.
때문에 다시는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물질로 나타난 것은
이내 소멸한다.
그래서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익힘[習]은 언제나 고요한 것임을 환히 안다.
그러면 이것을 바로 다함을 안다[知盡]고 한다.
그리고 8정도를 이해한다.
그러되 또한 체성(體性)이 없다.
그리고 친하거나 성기거나 가깝거나 멀거나 머무는 처소가 없다.
변화가 무궁하다.
그리고 다할 수 없다.
그리고 더러운 티끌을 쓸어 없앤다.
그리고 어두움을 환히 비춘다.
그리고 형상도 없다.
그리고 소리나 존재나 멸망[存亡]도 없다.
그러한 바탕이, 모든 미혹한 이를 인도하는 우두머리가 된다.
그래서 무위의 길[無爲路]에 들어간다.
때문에 도를 안다고 하느니라.
보살이 4제를 분별한다.
그러나 역시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모든 중생을 보호하고자 함이다.
그러면서 생사에 있고자 함이다.
그 진리의 모양은 모습이 없다.
그리고 형상도 없다.
그래서 볼 수도 없다.
그리고 여여하게 근본을 자세히 살핀다.
그러면 곧 법성에 상응하느니라.
세속의 언교는 임시로 부르는 이름이 있다.
그리고 그 실제의 이름 자체는 생기지도 않는다.
그리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물드는 바도 없다.
그리고 집착하는 바도 없다.
그리고 거룩한 진리[聖諦]의 마음을 얻는다고 하자.
그러면 있고 없고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근본을 자세히 살펴 안다고 하자.
그러면 모든 물질은 두루 다 평등하다.
그래서 또한 높은 것이 없다.
그리고 낮은 것이 없다.
그리고 약간의 마음도 없다.
그러니, 이것을 바로 거룩한 진리를 분별한다 하느니라.
보살의 거룩한 진리는 그 실제로 하나[一]만 있다.
그리고 둘이 없다.
그리고 집착도 없다.
그리고 지극히 진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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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바라는 바도 없다.
그리고 색(色)을 구하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한 색이 없는[無色] 것을 구하려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리고 생각이나 생각이 없는 데서 평등하다.
그래서 둘이 없다.
그러니, 이것을 바로 진리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이미 자세한 진리와 사실대로의 진리 모양을 얻게 된다고 하자.
그러한 이는 곧 5음의 모양을 환히 안다.
그리고 5음에서 생기는 괴롭고 독한 모양이 있다.
이는 바로 번뇌의 모양이다.
그러니 보살은 다시 사유한다.
그래서 백천 가지 괴로움을 소멸한다.
그러되 모두가 공하고 없다.
그래서 닳아 없어지는 법으로 돌아가느니라.
기억을 일으키지 않는다.
때문에 고제(苦諦)라 한다.
그리고 5음이 나고 생기게 되는 곳을 널리 통달한다.
그래서 애착을 제거한다.
이러한 것을 바로 습제(習諦)라 한다.
그리고 만일 다음과 같다고 하자.
즉, 마음이 내달으면서
모든 생각이나 구하는 것이 많다.
그러되 그 뜻[의意]을 분별한다.
그리고 역시 탐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모하지 않는다.
그리고 3세의 어리석은 마음과 처소를 같이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한 그 가운데 머무른다.
그래서 요행(僥倖)이 있지도 않다.
그리고 진로(塵勞)를 모두 다 버린다.
만일 이렇다고 하자.
그러면 이것을 진제(盡諦)라 한다.
그리고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道]를 이루고자 한 이라고 하자.
그러한 이는 고ㆍ습ㆍ진을 분명히 안다.
그래서 사악한 의심을 끊느니라.
이와 같으니라.
최승아,
수성 보살은 5주 가운데서
그 지(地)를 청정하게 하느니라.”
6. 근문품(根門品)
그때에 최승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게 상위(上位) 보살은 6주(住)의 지위에서
그 행(行)을 청정하게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상위 보살은 언제나 6도무극을 수행한다.
그래서 존재에 대해 연모함이 없다.
그렇기에 본래의 과보와 서원을 이룬다.
성문(聲聞)의 마음을 버린다.
그리고 국토를 청정히 하려 한다.
그리고 연각(緣覺)에 대한 뜻이 없다.
그리고 하는 일은 크고 넓다.
그래서 소인배의 마음이 되지 않느니라.
구걸하는 이를 본다고 하자.
그러면 먼저 스스로 탐욕을 없앤다.
그리고 곧 그 사람에게 나아간다.
그리고 배부르고 만족함을 얻게 한다.
그리고 지니고 있는 진기하고 미묘한 물건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이들을 먼저 그 사람에게 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뉘우치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
그리고 나라는 것[吾我]을 멀리 여읜다.
그리고 항상 있다고 헤아리는 마음을 버린다.
그러니 그 지혜는 한량없다.
그리고 또한 다함이 없느니라.
K0382V12P0357c
깊고 미묘한 법을 듣고 취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몸[신身]과 입[口]과 뜻[의意]을 깨끗이 한다.
그래서 온갖 계율을 범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모든 계율 지닌 사람을 옹호하려 하느니라.
상위 보살은 마음이 항상 인자하다.
그리고 중생에게 상해(傷害)를 끼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살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살생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이가 살생한 것을 본다고 하자.
그러면 권하여 선(善)을 닦게 한다.
그리고 남의 물건은 터럭만큼도 훔치지 않는다.
그리고 가령 범하는 이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고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뉘우치도록 가르치느니라.
또 언제나 마음을 오로지 한다.
그래서 음행[淫泆]을 범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범한 이를 본다고 하자.
그러면 청정한 행을 닦게 한다.
그리고 언제나 지성으로 행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간질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피차(彼此)를 이별하지 않게 한다.
다투는 이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화해시켜 흩어지게 한다.
그리고 충언(忠言)과 간유(諫喩)로 널리 선을 행하게 한다.
그리고 끝내 욕설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을 성내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내는 이를 본다고 하자.
그러면 인욕을 행한다.
그리고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참괴(慚愧)하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말을 할 때는 입을 수호한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온갖 사람에 대하여 평등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미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샘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만을 없앤다.
그리고 중생을 향하여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리고 매양 자신이 극복한다.
그리고 책망한다.
그러면서 상위에 이르기를 바라느니라.
지금 인욕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나중에는 추악해진다.
그리고 비루해진다.
그러니 언제나 마음을 바로 한다.
그래서 후학(後學)을 가벼이 여기지 않느니라.
즐거운 마음을 품는다.
그리고 도법(道法)에 있다고 하자.
이러한 이면 그 마음이 청정하다.
그래서 진로(塵勞)가 없다.
깊고 미묘하여 견줄 데 없는 법을 좋아한다.
그리고 네 가지의 두려울 바 없음[無所畏]으로 외학(外學)을 항복받는다.
그리고 청정한 업을 닦는다.
그래서 그보다 위로 뛰어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지극한 마음으로
도(道)에 있어 인자한 일을 좇는다.
그리고 받든다.
그리고 만일 사문이나
이학(異學)이나 범지(梵志)를 본다고 하자.
그러면 곧 스승처럼 섬긴다.
그리고 힘써 그 처소를 얻게 한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다음이다.
부처님께서 도 이룬 것을 말미암는다.
그래서 일체지를 이룬다.
이로써 마음이 언제나 부드럽다.
그리고 행이 졸렬하지 않다.
그리고 난폭하지 않다.
그리고 만일 다른 이의 잘못을 본다고 하자.
그러면 보호한다.
그리고 자기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처음에는 누실(漏失)하였을지라도
그릇된 법의 행이 있지 않다.
그리고 또한 성문이나 연각의 마음이 없다.
그리고 모든 범한 바에서도 범한 바를 보지도 않는다.
그러니 살고 있는 데서마다 또한 어리석지 않다.
그리고 어둡지 않다.
이와 같이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이니라.
언제나 부지런히 힘써 행한다.
그리고 게으르지 않는다.
그리고 삿된 부류와 함께 한다.
그러고 같이 두루 접하지 않는다.
K0382V12P0358a
설령 폐악(弊惡)하여 보답이 없는 이를 본다 하여도
어떤 일을 함께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말은 은밀하여 다정하게 한다.
그리고 계율을 받든다.
그래서 완전히 갖춘다.
그래서 일찍이 이지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지혜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한다.
그리고 법을 깊이 이해하는 이를 가까이한다.
또한 어기지 않는다.
그리고 거스르지 않는다.
그리고 고달파하는 뜻이 있지 않다.
청정한 계율을 돈독히 믿는다.
그리고 닦는 바가 진실하다.
그래서 바르고 사악한 부류들에게 물들지 않는다.
그리고 삼가 그 법을 지킨다.
그렇지만, 상응하는 대로 행하느니라.
모든 중생이 그의 덕을 노래로 찬탄한다.
그리고 법률을 관장한다.
그리고 수호한다.
그리고 청정히 한다.
그래서 하자가 없다.
그리고 행한 바가 견고하다.
그래서 본래 마음이 결단코 마친다.
그리고 능히 말함에 그릇됨이 없다.
그리고 언구에 하자가 있을 수 없느니라.
그런 까닭에
이것을 말미암아 바른 일을 행한다.
그리고 삿된 도[邪道]를 품지 않는다.
그러니 그는 계율을 완전하게 갖춘다.
그러므로 다시는 미혹되지 않는다.
그리고 연설한 바의 음향은
듣기에 마땅하지 않음이 없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 정각(正覺)의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즐긴다.
그렇지만 또한 구하는 바가 없다.
그리고 언제나 그쳐 만족할 줄 안다.
그리고 탐하는 바가 없다.
그리고 그리는 바가 없다.
그리고 그 마음이 순숙하다.
그래서 뭇 악이 이미 제거되었다.
그리고 몸과 뜻이 담연(澹然)하다.
그러니 기뻐하는 바가 없다.
그리고 즐기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언제나 한가로이 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친근하는 것이 없다.
그리고 어수선한 데에 있다.
그래도 갖춰 분별한다.
그래서 도법(道法)을 안다.
그리고 외도(外道)를 좇아 자문받고 하는 바가 없다.
그리고 근신(謹愼)한다.
그러니 위의가 일찍이 예법을 잃지 않았느니라.
비단으로 된 좋은 옷을 입지 않는다.
그리고 본래의 서원대로 산다.
그래서 덕이 미칠 수 있는 이가 없다.
그리고 맛있는 것을 먹는다.
그래도 마음과 뜻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도력이 있다.
그러면서 덕업을 바르게 지닌다.
그리고 닦는 바의 계율을 순종한다.
그래서 실없이 희롱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늘과 사람들이 호위한다.
그래서 구경(究竟)을 이루게 하느니라.
인자함을 행한다.
그렇지만, 널리 중생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또 가엾이 여김[悲哀]을 닦는다.
그렇지만 무릇 진로(塵勞)를 참아낸다.
그리고 받들어 좇아 수호한다.
그렇지만, 게으르지 않게 한다.
그리고 평등한 마음을 행한다.
그래서 선악이 둘이 없다.
그리고 모든 중생을 위하여
무거운 짐을 짊어진다.
그리고 언제나 살피고 관한다.
그래서 분명히 안다.
그렇지만, 손실되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심식(心識)이 뭇 생각에 내닫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악(惡)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의 잘못을 전하지도 않느니라.
K0382V12P0358b
모든 뜻을 수호한다.
그리고 다 껴잡아 견고히 한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항시 보시할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중생들을 양육한다.
그리고 인욕을 행한다.
그리고 다른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그리고 정진하기를 뜻하고 원한다.
그리고 끝내 회전(廻轉)하지 않는다.
그리고 선(禪)을 생각하여 고요하다.
그리고 안온한 정(定)을 얻는다.
그리고 지혜를 좇고 받든다.
그리고 뭇 이치를 널리 본다.
그리고 연설한 바가 바다와 같다.
그리고 역시 만족해 함이 없다.
때문에 널리 견문(見聞)을 닦는다.
그리고 계율과 요긴한 법을 배우느니라.
착한 벗을 따라 모든 법을 통달하려 한다.
그리고 언제나 나쁜 스승을 여읜다.
그리고 모든 삿된 학문[邪學]을 멀리 하느니라.
삿된 학문이란 참되지 않다.
그리고 바른 도[眞正道]가 아닌 것이다.
몸의 모습[상相]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식(文飾)을 탐하지 않는다.
그리고 집착함이 없다.
그리고 만물은 모두 무상한 데로 돌아가는 줄 아느니라.
그의 계율의 공덕은 청정하다.
그리고 마치 자금(紫金)과 같다.
그리고 베푸는 뜻이 청정하다.
그래서 또한 뉘우침이 없다.
그리고 마음과 뜻이 맑다.
그래서 끝내 허식(虛飾)이 없다.
그리고 배우는 바가 미묘하다.
그래서 또한 번거롭지 않다.
그리고 그 뜻은 산뜻하다. 그리고 밝다.
그래서 때나 혼탁함[垢濁]이 없다.
그리고 본래의 행이 청정하다.
그래서 마음에 초조하지 않느니라.
비록 미혹된 곳에 있어도
음욕을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뜻이 어지럽지 않다.
그래서 언제나 한결같이 안정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결박(結縛)을 쉰다.
그러니 영원히 일어날 것이 없다.
그리고 없앨 것이 없다.
그리고 끝내 잘못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요하게 환히 사무치다.
그리고 계율이 갖추어져 이지러지지 않는다.
그러니 새거나 없어지는 바가 없다.
그 본래의 요의[本要]에 따른다.
그리고 또한 빠뜨리지 않는다.
그리고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정근(定根)으로써
모두 분별한다.
그리고 평등한 마음으로써 중생을 제도한다.
그리고 일체지로부터 해탈문에 들어간다.
그리고 모든 삼매에 노닌다.
그래서 다 눈앞에 나타나느니라.
몸과 목숨을 탐내지 않는다.
그리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이 있지 않다.
그리고 아ㆍ인ㆍ수명에 집착한다.
그래서 헤아리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명(名)ㆍ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사유하지 않는다.
그리고 몸과 입의 4대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물질을 만들지도 않느니라.
그 진리는 생각한다.
그래서 본래와 같이 사실대로 안다.
그리고 만들어진 물질은 하나임을 분별한다.
그리고 둘이 없음을 분별하느니라.
다시 눈의 빛깔[眼色]ㆍ귀의 소리[耳聲]ㆍ코의 냄새[鼻香]ㆍ
혀의 맛[舌味]ㆍ몸의 느낌[身更]ㆍ마음의 법[心法]은
두루 다 청정하다.
그리고 한 모양[一相]도 모양이 없다.
그래서 헷갈리거나 당황하지 아니한다.
K0382V12P0358c
그리고 진실로 모든 법을 관한다.
그래서 공의 행[空行]을 넘어선다.
그리고 생각도 없다.
그리고 원(願)도 없다.
그리고 또한 형상도 없다.
그리고 3계를 건넌다.
그리고 물들지도 않는다.
그리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해탈함도 없다.
그리고 해탈하지 않는 것도 없다.
그리고 또한 얽매는 것도 없다.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하느니라.
다시 기억을 내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한 내는 것을 보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다음이다.
모든 법은 도무지 생기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언제나 인자하고 가엾이 여긴다.
그래서 살생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도둑질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모든 중생을 기른다
그러면서 살아가게 하려 한다.
그리고 또한 망령되이 다른 이의 재보(財寶)를 취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베풀어주기를 좋아하느니라.
삿된 음행[邪淫]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색(色)을 멀리 여읜다.
그리고 처음부터 속임수가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헐뜯지 않는다.
그리고 말할 때는 충실하다.
그리고 신의 있게 한다.
그리고 남의 착한 간언(諫言)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음이 헷갈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당황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모든 노인[耆年]을 본다고 하자.
그러면 한결같이 존경한다.
그리고 돌아다니는 곳마다 어진 마음을 더한다.
그리고 저마다 얻는 바에 여한이 있지 않게 한다.
그리고 넓고도 크게 포용한다.
그리고 바른 가르침[正敎]으로써 보인다.
그리고 생각은 평등하다.
그래서 율법(律法)에 상응한다.
그리고 어떠한 무리에게라도 또한 억울하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온갖 행(行)이 구비된다.
이로써 더 나아갈 데가 없다.
그리고 구경(究竟)을 연설한다.
그래서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
그리고 널리 온갖 것을 위한다.
그래서 덮개[覆蓋]를 열어버리느니라.
상위(上位) 보살은 법의 큰 주인[大主]이다.
그래서 널리 3승의 끝없는 가르침을 연설한다.
그리고며, 덕은 수미산(須彌山)보다 뛰어나다.
그리고 지혜는 강물이나 바다보다 많다. 그리고 넓다.
그리고 도(道)는 허공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비유할 수도 없느니라.
최승아,
모든 사람들은 어리석다.
그리고 게으르다.
그리고 방일한다.
그리고 미혹하다.
그래서 법교(法敎)를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시 생사의 고통을 겪는다.
그러면서 물러난다.
그래서 못쓰게 된다.
그리고 헷갈린다.
그래서 음개(陰蓋)에 얽힌다.
그래서 3취(趣)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이 때문에
여래는 그 모든 미치지 못한 이들을 가엾이 여긴다.
그래서 모든 법의 근본을 좇게 한다.
그리고 모두 다 하나의 법[1법一法]을 위한다.
그래서 익히는 모든 것을 끊게 한다.
그리고 집착하는 모든 것을 끊게 한다.
이런 사정을 알아야 하느니라.
22가지의 병(病)은 갱락(更樂-촉)의 근본이다.
하지만 이 모든 법도 역시 법이 있는 것도 없다.
그리고 법이 아닌 것도 없다.
그리고 또한 언교도 없다.
그래서 도무지 설명할 바도 없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다음이다.
그 없는 법[無法]은 곧 생기는 바도 없다.
그리고 또한 소멸할 바도 없다.
이렇기 때문이다.
K0382V12P0359a
또한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도
설하는 바를 보지 못한다.
이러하기 때문이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상위(上位) 보살은 갱락(:촉)이 생기는 바를 분별하고 사유한다.
그리고 갱락이 소멸하는 바를 분별하고 사유하느니라.
보살은 그것을 관한다.
그래서 갱락을 대치(對治)함이 있다.
그러니 여섯 가지 갱락으로 더불어 근본을 삼는다.
그런 데서도 역시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섯 가지 근본을 삼지 않는다.
그런 데서도 역시 그것을 알아야 한다.
일곱 가지 갱락은 함께 서로 받아들이느니라.
또 보살은 사유한다.
그리고 관찰한다.
그래서 광어(廣語)의 갱락을 환히 안다.
그래서 세 가지의 갱락으로 근본을 짓는다.
그래서 지류(枝流)의 일곱 가지 갱락에는
조금의 분한[分]만이 있느니라.
또 최승아,
보살은 다시 다음을 사유하여야 한다.
명(明)의 갱락과 스스로 상응할 때 그 밖의 네 가지 갱락이 있다.
이를 함께 서로 받아들이는 것을 사유하여야 한다.
또한 염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러한 것도 사유해야 하느니라.
또 보살은 다음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무명(無明) 갱락이 세 가지 갱락과 스스로 상응할 때가 있다.
이 때에는 다시 열한 가지 갱락과는 그 분한이 조금 있다.
그리고 또한 염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사유해야 한다.
또 최승아,
명도 아니고 무명도 아닌[非明非無明] 갱락과 스스로 상응할 때가 있다.
이 때에는 그 밖의 열한 갱락에는 그 분한이 조금만 있느니라.
또 보살은 애욕(愛欲)의 갱락과 스스로 상응할 때가 있다.
이 때에는 열한 갱락에는 조금만 그 분한이 있다.
그리고 가령 성냄[恚怒]의 갱락이 서로 포섭하여 지닐 때가 있다.
이 때에도 열한 갱락에는 조금만 그 분한[分]이 있느니라.
또 낙통(樂痛)의 갱락은 다시 열둘의 갱락과 조금 그 분한이 있다.
그리고 고통(苦痛)의 갱락은 열한 갱락과 조금 그 분한이 있다.
그리고 무고통무락통(無苦痛無樂痛)의 갱락은
역시 열셋의 갱락과 조금 그 분한이 있느니라.
또 보살은 안식(眼識)의 갱락이 스스로 상응할 때가 있다.
이 때에는 여덟 갱락과 조금 그 분한이 있다.
그리고 귀ㆍ코ㆍ혀ㆍ몸에서도 역시 눈의 갱락과 같다.
그래서 차이가 없다.
그리고 색상(色想)의 갱락은 다섯 갱락으로 체(體)를 삼는다.
그리고 곧 일곱 갱락과 서로 함께 이어지느니라.
다시 소리[聲]의 갱락은 세 갱락으로 체를 삼는다.
K0382V12P0359b
그리고 그 때에는 열한 갱락과 함께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냄새[香]의 갱락은 두 갱락으로 체를 삼는다
그리고 그때에 아홉 갱락과 함께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간혹 맛[미味]의 갱락은 네 갱락으로 체를 삼는다.
그리고 이때에 곧 열한 갱락과 서로 이어지느니라.
또 세활(細滑)은 세 갱락으로 체를 삼는다.
그리고 곧 열세 갱락과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간혹 법(法)의 갱락이 스물두 갱락과 함께 서로 체를 삼는다.
그리고 그 때에는 모든 갱락과 서로 이어지느니라.
상위(上位) 보살은 언제나 다음을 사유한다.
즉, 갱락(更樂)의 흥성과 쇠망과 일어나고 소멸하는 곳을 사유한다.
그래서 낱낱이 분별한다.
그리고 더하거나 덜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
곧 모든 티끌[塵]과 욕결(欲結)을 소멸시킨다.
그리고 결을 소멸시킨다.
이로써 마음도 역시 항상하다[常]고 헤아리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다시 아ㆍ인ㆍ수명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생기고 소멸함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집착하고 단멸하는 것을 보지도 않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6주 보살은 진실한 마음으로써 있다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공(空)을 자세히 아는 이다.
그러니, 모든 갱락(更樂)에 대하여
하나[一]임을 분명히 분별하느니라.
보살은 간혹 때로는 갱락을 대치한다.
그러면서 한 가지 근(根)으로 체(體)를 삼는다.
이러한 것도 알아야 한다.
이 때에는 따로 여덟 가지 근(根)과 서로 이어지느니라.
상위 보살은 다시 사유한다.
그러면서 뜻을 오로지 앞에다 둔다.
그래서 낱낱이 분별한다.
그리고 마음은 염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보살은 다시 다음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광어(廣語) 갱락(更樂)이 5근(根)으로 체를 삼는다.
이러한 것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그때에 따로 여덟 가지 근과 서로 함께 이어진다.
그리고 또한 끝내 염착하지 않는 줄 사유해야 하느니라.
보살은 마땅히 다음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명(明)의 갱락은 세 갱락으로 체를 삼는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그때에 따로 아홉 가지 근과 서로 함께 이어진다.
그리고 또 무명(無明)의 갱락이 스스로 체가 된다.
이 때에는 역시 여섯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명도 아니고 무명도 아닌 갱락이 있다.
이러한 갱락이 스스로 체가 될 때가 있다.
이 때에는 열한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느니라.
K0382V12P0359c
애욕의 갱락도 또한 네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성냄의 갱락도 다시 네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낙통(樂痛)의 갱락은 두 가지 근으로 체를 삼는다.
그리고 아홉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고통(苦痛)의 갱락은 두 가지 근으로 체를 삼는다.
그리고 다시 여섯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고통도 없고 낙통도 없는[無苦痛無樂痛] 갱락은
한 가지 근으로 체를 삼는다.
그때에 다시 무근(無根)과 함께 서로 죽어지느니라.
또 보살은 다음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눈[眼]의 갱락이 스스로 체(體)가 될 때가 있다.
이 때에는 아홉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귀ㆍ코ㆍ혀ㆍ몸도 역시 그와 같다.
그리고 뜻[의意]의 갱락은 다섯 가지 근으로 체를 삼는다.
그러니 이 때에는 여덟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느니라.
색(色)의 갱락은 두 가지 근으로 체를 삼는다.
그러면서 곧 다섯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성(聲)의 갱락은 세 가지 근으로 체를 삼는다.
그 때에는 곧 여덟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느니라.
또 보살은 역시 사유해야 한다.
냄새[香]의 갱락은 여섯 갱락으로 체를 삼는다.
그러니 그 때에는 곧 아홉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가령 맛[미味]의 갱락이면
두 가지 근으로 체를 삼는다.
그러니 이때에는 곧 열한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혹은 때로 세활(細滑)의 갱락은 한 가지 근으로 체를 삼기도 한다.
그러니 곧 여덟 가지 근과 함께 서로 이어지느니라.
보살은 다시 관한다. 그러면서 알아야 한다.
법(法)의 갱락은 열아홉 가지 근으로 체를 삼는다.
그리고 곧 열세 가지 갱락과 함께 서로 이어지느니라.
가령 보살이 사유한다.
그리고 헤아린다.
그러면서 탐착을 제거한다.
그리고 갱락을 짓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곧 온갖 소원이 충만하여진다.
그리고 금빛 광명의 상호로써 몸을 장엄한다.
그리고 번쩍거리는 빛이 비추인다.
그래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그리고 모든 법은 죄가 공함을 깊이 이해한다.
그리고 고요한 줄 깊이 이해한다.
그리고 다음을 깨달아 아느니라.
법의 근본은 역시 법이 없다.
그러면서 또한 법이 아닌 것도 없다.
이러한 줄 깨달아 아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 법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곧 생기는 바도 없다.
그리고 또한 멸하는 바도 없다.
K0382V12P0360a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한다.
그리고 설하는 바를 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진실이 아닌 법은 거짓으로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말뿐이다.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안으로는 여섯 수(受)가 있다.
그리고 밖으로는 여섯 입(入)이 있다.
그리고 5음의 모든 종류와 온갖 입(入)은
모두 텅 비었다. 그리고 고요하다.
그래서 다 거짓 이름이다.
그리고 장구(章句)와 일체법(一切法)이라고 분별한다.
하지만 진실한 이치로써 관찰한다고 하자.
그러면 역시 5음은 없다.
그리고 4대의 모든 종류와 스물두 갱락의 근본은
아주 없다[斷滅]는 것도 없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상(常)이라는 것도 없다.
그리고 무상(無常)이라는 것도 없다.
그리고 또한 견고한 것도 없다.
그러니 이것을 바로 ‘모든 법은 말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니라.
모든 법은 근본과 지말이 청정하다.
그리고 모두가 공(空)하다.
그리고 모두가 고요하다.
그래서 그 이름도 없다.
그리고 온갖 법성과 명호는 모두가 또한 자연(自然)이다.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없느니라.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도 역시 그와 같다.
그러니, 처소가 없는 법을 두루 닦아 익혀야 하느니라.
무엇을 ‘처소가 없는 법을 닦아 익혀야 한다’라고 말하는가?
이를테면 담박(憺怕)함을 익힌다.
그러면 다 생기는 바가 없다.
그리고 욕심이 없음[無欲]을 닦는다.
그러면 진실한 이치의 법을 행한다.
그리고 본래 없음[本無]을 익히고 배운다.
그러면 법계를 거닌다.
그리고 또한 본제(本際)를 익혀 다 공인 줄 분명히 안다.
그리고 모든 법은 다 머무르는 바가 없다.
그리고 익히고 행할 바도 없다고 하자.
그러면 행(行)도 없다.
그리고 행하지 아니할 것도 없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6주 보살은 모든 법이 공임을 안다.
그리고 다시 위의와 예절을 닦아 익힌다.
그리고 미래[當來]를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과거를 버렸다.
그리고 현재를 생각하지도 않느니라.
또한 내 것[아소我所]도 없다.
그리고 받아 취할 바도 없다.
그리고 또한 주인도 있지 않다.
그리고 다시 옷을 입은 이도 없다.
그러니 볼 수도 없다.
그리고 구경에 공(空)이다.
때문에 다하는 것도 없다.
그리고 설령 문자가 있다 하여도
역시 임시로 붙인 이름일 뿐이니라.
그 다함이 없다[無盡]고 하자.
그러면 곧 생기는 바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본래 청정하다.
그러한지라 뜻[志意]이 담박하다.
그리고 또한 출생(出生)하는 것도 없다.
그런지라 당연히 생기는 바를 여의어야 한다.
그리고 생기는 바 없는 것도 여의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익히고 배운 바도
역시 소리나 메아리가 없다.
그리고 나아갈 데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또한 물러날 것도 없다.
그리고 가장자리를 미루어 찾아도
곧 그 밑도 없다.
그리고 또한 밑이 없지도 않다.
그리고 생기지도 않는다.
그리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것을 바로
‘본래 공[本空]임을 통달한다’라고 말하느니라.
K0382V12P0360b
평등(平等)을 여러 사람 앞에서 말했다.
그러나 역시 생각이나 기억이 없다.
그리고 가까운 것도 없다.
그리고 먼 것도 없다.
그리고 또한 발자국도 없다.
그러니, 이것을 바로 익힌다[習]고 하느니라.
익힌다고 말하는 것은
법률(法律)에 들어간다.
그래서 모든 법은 임시로 붙인 이름이 있을 뿐이요
또한 오고 가는 것이 없다.
그리고 돌아다니는 곳도 없다.
그리고 얻는 것도 없다.
그리고 잃는 것도 없다.
그리고 듣는 것도 없다.
그리고 보는 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항상하다.
그래서 법계에 머문다.
그러므로 그가 이와 같은 법을 능히 받들어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것을 익힌다고 하느니라.
어떤 것이 법(法)인가?
말한 바 법이라 함은 다음이다.
법은 법을 기억하지도 않는다.
또한 헐어 무너뜨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다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라는 것도 없다.
그리고 설령 바라는 것이 없다 하여도
역시 갚으려고 생각지도 않느니라.
만일 갚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곧 온갖 바라는 생각의 누(累-허물)가 제거된다.
장차 올 세상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그리고 현재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리고 과거를 기억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행하는 이라고 하자.
그러면 곧 완전히 3세에서 평등할 수 있느니라.
3세가 평등하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곧 언설(言說)도 없다.
그리고 머물러 일부러 중생을 제도할 필요도 없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여래는 출현한다.
그래서 이런 언교를 연설한다.
그래서 중생들로 하여금
저 언덕[彼岸]에 건너갈 수 있게 한다.
부처님께서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법성은 언제나 머무른다.
그래서 법계는 자연(自然)이다.
또한 변하지 않는다.
또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법계가 머무른다.
이는 바로 적연(寂然)함을 말한다.
그런데 다시 무엇 때문에 법계가 자연인가?
나[吾我]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이라 하느니라.
간혹 보살은 이 내 것[아소我所]을 헤아린다.
그러면서 스스로 몸과 뜻으로 오로지 집착하는 바가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5음의 형상을 받는다.
그래서 인연(因緣)을 본다.
그래서 이름을 임시로 붙인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헤아린다.
그리고 근본과 지말과 4대의 모든 입(入)을 관찰하기도 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다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반드시 권한다.
그리고 나아가게 한다.
그래서 제도한다.
그리고 반드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병을 버린다.
그리고 도(道)의 가르침을 닦는다.
그리고 익힌다.
그래서 세 가지 해탈문에 들어가게 하여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다.
또 다시 또 다시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도 한다.
‘중생들로 하여금
평등하게 도의 자취[道迹]에 이르게 하리라’라고.
K0382V12P0360c
그리고 또 다시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도 한다.
'아라한이 되어 4과(果)를 얻어 증험한다.
그리고 혹은 다시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도 한다.
‘의지(意止)ㆍ의단(意斷)ㆍ신족(神足)ㆍ근(根)ㆍ역(力)ㆍ7각(覺)ㆍ8도(道)
이 진로(塵勞)를 소멸시킨다.
그리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이 진로(塵勞)를 소멸시킨다.
그리고 4제와 진여가 진로(塵勞)를 소멸시킨다’라고.
이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이 있으면서
안으로 중생에 대하여 권속을 삼는다고 하자.
그러면 곧 법계에 대하여 결감(缺減)이 있느니라.
6주 보살은 이것을 멀리 여읜다.
이로써 연각이나 성문의 마음과 함께하지 않는다.
그리고 보살의 업과 대승의 서원을 행한다.
그리고 크고 넓은 일산[蓋]과 넓고 큰 뜻을 편다.
이러니 마음에서 스스로 다음과 깉이 생각하느니라.
‘만일 내가 부처가 되려고 하여
도혜(道慧)를 힘써 구한다고 하자.
그러면 백천 가지 행에 대하여 줄어지지 않게 하리라.
나는 보시한다.
그래서 간탐과 인색함을 버린다.
그리고 법재(法財)를 베푼다.
그리고 금계를 청정하게 한다.
그래서 더러운 흠을 끊어 없앤다.
그리고 행을 삼가한다.
그리고 지킨다.
그리고 인욕을 세운다.
그리고 성냄을 베어 버린다.
그리고 몸의 행은 부드러워야 한다.
그리고 온화해야 한다.
또 정진(精進)을 닦을 때는 게으름의 때[구垢]를 보호한다.
그리고 부지런히 힘써 좇고 닦는다.
그러면서 처음부터 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또 아무도 없는 조용한 데에 산다.
그러면서 정수(正受)를 닦을 때는 뜻이 어지럽지 않다.
그리고 옮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한 마음[1심一心]을 체득한다.
그리고 삼매(三昧)에서 일어난다고 하자.
그러면 그 뜻을 받들어 행한다.
그리고 여섯 가지 도무극으로 중생을 깨우친다.
그리고 교화해야 한다’
이처럼 생각하느니라.
부처님의 도를 구하여
도과(道果)를 이루고자 한다고 하자.
그러면 반드시 6주로 말미암아 등정각을 이룬다.
그리고 뭇 악마를 항복시킨다.
그리고 위없는 법을 굴린다.
그래서 인민들을 제도 해탈시킨다.
그리고 부처님의 영원한 적멸[永寂]로써 멸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지혜[聖慧]를 궁구하여 다한다.
그리고 주지(住地)를 배운다.
그리고 다스린다.
그래서 여래의 10력(力)의 업을 널리 통한다.
그리고 열여덟 가지 수승하고 특수한 법[十八殊勝不共法]을 널리 통한다.
그리고 네 가지 두려움 없음[4무소외四無所畏]을 널리 통한다.
그리고 변재를 분별한다.
그리고 통달한다.
그래서 막힘이 없다.
그리고 또한 색(色)과 무색(無色)을 생각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리고 탐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워하는 바도 없다.
그리고 그 앞 사람에 상응하게 5음을 분별한다.
그리고 일으키거나 없애는 바도 없다.
그리고 나고 늙고 죽는 괴로움은 바로 고뇌의 모양이다.
그러니 이 공(空)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바로 고제(苦諦)이니라.
5음의 연(緣)으로 좇아 일어난 바를 깨달아 안다.
그리고 보는 바의 만물에는 모두가 생각이나 구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따로따로 그 뜻을 환히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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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비(是非)가 없다.
비록 구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또한 영원히 잊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습제(習諦)이니라.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일과 함께한다.
하지만 진세를 같이하지[同塵] 않는다.
그리고 또한 그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리고 요행의 마음이 있지 않다.
그리고 모두 다 소멸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이런 사실을 안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진제(盡諦)이니라.
도(道)에 이르고자 한다고 하자.
그러면 고(苦)ㆍ습(習)ㆍ진(盡)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84가지 성인이 존중한 바 신령하게 통달하는 지혜가 있다.
이로써 연의 계박[緣縛]을 제거한다.
그리고 망설임[猶豫]을 제거한다.
그리고 번뇌의 그물[結網]을 제거한다.
그러니 이것도 바로 진제(盡諦)이니라.
4제에서 온갖 나타나는 바의 선ㆍ악과 고ㆍ락이 있다.
이를 분별한다.
그리고 마음으로 세간을 안다.
그리고 근본과 지말을 모두 환히 안다.
하지만 구하지도 않는다.
비록 구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도제(道諦)를 행하는 것이니라.
몸이 공하다.
그리고 고요히 사라진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분명히 이해한다.
그리고 또한 재앙이 없다.
그리고 허물이 없다.
그리고 또한 죄(罪)를 제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취함도 없다.
그리고 버림도 없다.
그리고 다시 끊어짐이 없다.
그리고 파괴도 없다.
그리고 몸과 몸이 아닌 것도 없다.
그리고 시설이나 조작이 있는 것도 보지 않는다.
그리고 피차(彼此)에 있지도 않다.
그리고 또한 중간도 없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상위(上位) 보살은 언제나 사유한다.
그리고 스물두 갱락(更樂)의 근본과 서로 관련되는 재앙을 제거하여야 한다.
그래서 비로소 보살의 업(業)을 잘 닦아 익힐 수 있다.
그리고 숭앙할 수 있다.
최승아,
이것이 바로 상위 보살이 6주 가운데서
그 행(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니라.”
7. 광수품(廣受品)
그때에 최승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게 아비바제(阿毘婆帝:不退轉) 보살이
7주지(住地)에서 그 행을 청정하게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언제나 7주 가운데서
반드시 보시의 노고[施勞]에 보답한다.
그리고 끝내 그 원(願)을 이룬다.
그리고 헤아리지 않는다.**
그리고 집착을 버린다.
그리고 내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비록 중생을 제도하더라도
제도함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또한 다시 다음과 같은 것도 보지 않느니라.
즉,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과 단멸(斷滅)을 보지 않느니라.
그리고 항상하다고 헤아리는[計常] 것도 보지 않느니라.
그리고 열여덟 본지(本持)를 보지 않느니라.
그리고 모든 입(入)의 성품도 보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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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쇠(衰)와 입(入)의 뒤바뀐 생각을 멀리 여읜다.
그리고 또한 3계에 나기를 원치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불(佛)ㆍ법(法)ㆍ승[衆]에 의지한다.
그리고 계(戒)와 염천(念天)과 보시와 공ㆍ무상ㆍ무원에 친근한다.
그리고 좇고자 한다.
그리고 또한 다시 도(道)에 드는 이가 있는 것도 보지 않느니라.
비록 공ㆍ무상ㆍ무원의 증득이 있어 알았다 하더라도
처(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경계에 들지도 않는다.
그리고 지혜는 무원(無願)보다 뛰어나다.
그리고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하다.
그리고 온갖 중생들을 가엾이 여긴다.
그래도 다시 자신은 중생을 가엾이 여긴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모든 법은 공(空)하여 주인도 없다.
그리고 또한 들어갈 바도 없다.
그리고 인도하고 어거하는[導御] 이가 되고자 높은 체하지 않는다.
그리고 생기는 바의 인[所生忍]과 보응(報應)의 과보도 없다.
그리고 하나의 도[一道]로써 가르쳐 준다.
그래서 명색(名色)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원히 삿된 업[邪業]을 여읜다.
그리고 집착하는 바가 없다.
그리고 구하는 생각은 멸한다.
그래서 회전(廻轉)하지 않는 줄 안다.
그리고 스스로 그의 뜻을 다룬다.
그래서 지혜에 거리끼는 바가 없다.
그리고 영원히 3도(塗)를 버린다.
그리고 욕심에 물들지 않느니라.
보살이 말하는 바 알맞게 건립하는 때는 나고 든다.
그리고 나아가고 물러간다.
그리고 의용(儀容)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온갖 허망한 생각을 영원히 내지 않는다.
그리고 탐내는 뜻을 영원히 내지 않는다.
모든 받아 취하는 바는 자세히 살핀다.
그래서 안온하게 한다.
그리고 흩어진 것을 시설하는 데에는 착오가 없다.
그리고 또한 마음에 이기거나 진다는 뜻을 품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고요한 법을 사유한다.
그러니 고요하다.
그러한 것을 바로 퇴전하지 않는 법[不退轉法]이라 하느니라.
모든 부처님께서 가상하다고 찬탄하신다.
그래서 이름을 주신다.
그래야 비로소 나는 바가 없는 지혜라 일컬을 수 있느니라.
왜냐하면 일체법에서는 또한 마음이 없다.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곧 남[생生]이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견고하여 퇴전하지 않는 자리[堅固不退轉地]이니라.
또 처음 뜻을 낸[發意] 보살의 마음은 그 뜻이 견고하다.
그래서 언제나 큰 서원의 마음을 수호한다.
마치 금강(金剛)과 같다.
그래서 무너뜨릴 수 없다.
그리고 한량없는 생사의 재난에 노닌다.
그리고 온갖 지닌 것을 보시한다.
그리고 바라는 바가 없다.
그리고 항상 평등한 마음으로 중생에게
복덕을 가(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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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느니라.
‘나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무위(無爲)로써 멸도하게 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느니라.
비록 중생을 제도하였다 하더라도
역시 제도한 사람이 없다.
그리고 무위에 이른 이는 온갖 법이 나는 바가 없음을 안다.
그리고 모든 법을 분별한다.
그래서 분명히 깨달아 안다.
그리고는 언제나 정진을 더한다.
그래서 빠뜨리는 바가 없다.
그리고 그 지혜로 두루 들어간다.
그래서 도달하지 못하는 바 없다.
그리고 온갖 지혜를 두루 갖춘다.
그래서 미묘한 문[妙門]에 분명히 들어간다.
그리고 모든 사랑하고 중히 여기는 데에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
그리고 탐욕이 없다.
그리고 인색함이 없다.
그래서 모든 망녕된 소견을 끊느니라.
아유월치(阿惟越致)는
비록 3계에 있다 하더라도
뭇 생각[衆想]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만일 생각을 일으켜 집착한다고 하자.
그러면 곧 가장자리에 있게 된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있는 이는
나[吾我]를 헤아린다.
그리고 그 보시한 것에 기댄다.
그래서 서원이 온갖 것에 미친다고 하자.
그러면 복(福)을 입혀 전한다.
그리고 돕게 되느니라.
이렇게 보시한 이는 곧 세 가지 장애[碍]의 아(我)ㆍ인(人)ㆍ상(想)의 보시가 있다.
이로써 생사에 유전하는 세간에 얽매여 있게 된다.
그리고 끝내 세간을 건너는 도(道)는 얻을 수 없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이에 보살이 만일 보시를 할 적에는
나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받는 이가 취하는 바가 있다고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보시하는 바가 있다 하여도
일찍이 바라는 생각이 있지 않다.
그리고 보응을 구하는 일이 있지 않다.
그러니, 보살은 보시하는 것으로써
온갖 중생에게 권한다.
그리고 돕는다.
그래서 그로써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느니라.
3세가 평등하다.
그래서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다.
그리고 하나의 법신[一法身]이다.
이를 분명히 안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에 처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멸도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그리고 온갖 것을 교화한다.
그렇지만 다 머무르는 바가 없다.
그리고 심성이 부드럽다.
그리고 온화하느니라.
모든 재액을 불쌍히 여긴다.
그리고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널리 제도한다.
그리고 선지식(善知識)을 친근히 한다.
그래서 아직 미치지 못한 것을 묻고 받는다.
그리고 경적(經籍)을 익힌다.
그리고 구한다.
그래서 그로써 의심의 결[疑結]을 깨친다.
그리고 자주 집 버리기를 생각한다.
그리고 살림살이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호(相好)를 분명히 안다고 하자.
그러면 형상 없음[無形]에 도달한다.
그리고 모든 법을 평등하게 관한다고 하자.
그러면 분명하게 안다.
그리고 바르게 아느니라.
어디서부터 나는 바가 없다.
그래도 일품(一品)이다.
이런 내용을 널리 펴 말한다.
그리고 뭇 생각을 제거한다.
그래서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버린다.
그리고 모든 사견(邪見)을 버린다.
그리고 진로(塵勞)의 더러움을 없앤다.
그리고 고요히 자세하게 살핀다고 하자.
그러면 그 마음이 조화(調和)롭다.
그리고 뜻은 해칠 것을 품지도 않는다.
그리고 염오(染汚)를따르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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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자리[地]에 들어선다고 하자.
그래서 그 처소에 있게 된 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제야 불퇴전라고 이름하느니라.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중에 들어간다.
그래서 항상 신통으로써 그들을 깨우친다.
그래서 교화한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 국토[佛土]는 공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줄 안다.
그리고 두루 안다.
그러면서 구경(究竟)의 처소에 이른다.
그리고 완전하게 중생의 근원을 깨달아 안다.
그리고 그 좋아하는 바를 따른다.
그래서 그들을 위하여 나타내 보이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7주(住) 보살이 용맹정진한다고 하자.
그러면 여환삼매(如幻三昧)가 언제나 나타나 앞에 있다.**
그래서 그 중생들의 마음과 뜻이 나아가는 바에 따라 제도한다.
그리고 해탈시키느니라.
혹은 5도(道)에 들어가 따라다닌다.
그러면서 구호하기도 한다.
그리고 본원(本願)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본래의 서원을 따른다고 하자.
그러면 용이하게 성취할 수 있다.
그리고 갖가지를 식별한다.
그래서 언사로 말하는 바는 곧 변재가 된다.
그리고 앞의 음향에 보답한다고 하자.
그러면 곧 그를 위한 설법이 된다.
그리고 먼저 통달한다.
그래서 명근(命根)이 나아갈 바를 환히 안다.
그리고 도(道)를 이루기까지 불수(佛樹) 아래에 앉는다.
그래서 도량을 장엄한다.
그래서 공훈이 완전히 갖추어진다고 하자.
그러면 모든 부처님 법을 통달한다.
그래서 두루 다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보살은 항상 물러나는 것과 물러나지 않은 것을 사유하여야 한다.
그리고 극히 미묘한 법으로 모든 관(觀)을 다 통달한다.
그리고며, 그 가장자리를 안다.
하지만 처소가 없느니라.
또한 마지막도 없다.
그리고 또한 나는 것도 없느니라.
보살은 물러나지 않는 지혜 인[不退智忍]을 사유한다.
그래서 모든 법이 모이고 흩어짐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굳고 강한 것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영원히 불퇴지인에서 멸도하게 하느니라.
비록 방일(放逸)에 처해도
모든 법을 환히 안다.
그러면서 불퇴지인에서 빨리 달아남이 없다.
그리고 다시 모든 법에 있을 때라고 하자.
그런 경우는 5음이 일어남과 일어나는 바가 없는 것을 아느니라.
불퇴인(不退忍)은 온갖 법에는 음성이 없음을 안다.
그러니, 이른바 메아리도 없다.
그리고 또한 갔다 돌아오는[往還] 것도 없느니라.
불퇴지(不退智)는 모든 법에 존재한다.
그러면서 온갖 미묘함을 완전히 갖춘다.
그리고 6도무극으로 허공에 두루한다.
그러나 이지러지거나 줄어듦이 없는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비록 모든 법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서고 앉고 눕고 잠잘 적에
상응하거나 상응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K0382V12P0362b
불퇴지란 법성은 항상 머물러 있다.
그리고 머무른다.
그렇지만 머무르는 바가 없다.
그리고 또한 소굴이 없다.
그래서 그 처소가 있는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모든 법에 대하여 존귀함도 없다.
그리고 비천함도 없다.
그리고 높음도 없다.
그리고 낮음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불퇴지란 다음이다.
온갖 법에 대하여 아주 없다고 헤아리는 마음을 버린다.
그리고 항상 있다고 헤아리는 마음을 버린다.
그리고 여읜다.
이러한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모두가 온갖 괴로움을 말미암아
두려움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을 알아야 한다.
본래부터 공[本空]이요
또한 처소가 없다.
이런 일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온갖 법에서 모든 덮개[覆蓋]를 버린다.
그리고 두루한 것이 허공과 같다.
그래서 여섯 가지 일[事]을 버린다.
그리고 없애는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다시 모든 법에서 티끌과 때[塵垢]를 소멸시킨다.
그리고 기억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잊지도 않는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온갖 법은 응(應)함이 없다.
그리고 응하지 않음이 없다.
그리고 또한 합함이 없다.
그리고 흩어짐도 없다.
비록 모든 법에 노닌다 하더라도
진로(塵勞)를 제거한다.
그리고 영원히 남은 것이 없게 한다.
이러한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인(因)을 좇아 그 지혜를 행한다.
그렇지만 익히는 바가 없다.
그리고 다 아는 것이 없다.
그리고 또한 모르는 것도 없다.
그리고 생각[思]도 없다.
그리고 소견[見]도 없는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모든 법은 움직이는 것이 없다.
그리고 능히 흔드는 것도 없다.
그리고 담박하고 고요하다.
또한 생각이나 기억[想念]도 없는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모든 법은 마멸된다.
하지만 물러나는 것도 없다.
그리고 모두가 다 소멸한다.
그리고 다한다.
그래서 더듬을 수도 없는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온갖 법의 근본과 지말은
머무는 것이 없다.
그리고 성품은 스스로 공(空)과 같은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모든 법은 다 그윽하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는다.
또는 고요한 자리[幽隱靜漠之地]에 있다.
그리고 이르는 데마다 걸림이 없다.
또한 환난도 없는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법계의 성품으로 머무른다.
그래서 언제나 때에 따라
모든 법을 일으킨다.
그리고 드러낸다.
그러한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모든 법은 다 공하다.
그리고 고요하다.
그래서 기억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버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집착함이 없다.
그리고 집착하지 않는 것도 없는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모든 법을 태우고 싣는다.
그래서 저 언덕[彼岸]으로 건너가게 한다.
그리고 그것[彼]과 이것[此]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제도[度]가 있고 제도가 없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모든 법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과
모든 입(入)과 근심 걱정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모든 법을 섭수하여 취한다[攝取].
하지만, 얻을 수 없다.
뜻은 깊고 미묘한 데에 있다.
그러면서 6도(度)의 법을 얻는다.
이러한 것이니라.
K0382V12P0362c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모든 법을 헤아린다.
그래서 더러운 때[垢穢]를 여읜다.
이로써 근본이나 지말에 하자가 없다.
이러한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온갖 법을 평등하게 받든다.
그래서 닦고 또한 옮아감이 있지 않다.
이러한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모든 법의 종성(種性)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짓는 바를 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하나[一]임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온갖 법에 대하여 구하는 바도 없다.
그리고 근심이나 걱정도 품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또한 모든 법은 같이 서로 일어난다.
하지만 그 중간에 쉬지 않는다.
그리고 게으름을 품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근본이 없다.
그래서 나가는 것도 없다.
그리고 물러나는 것도 없다.
그리고 또한 약간도 없다.
이런 일을 깨달아 아는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모든 법이 돌아가는 바의 음향을 끊어 없앤다.
그리고 모두가 다 텅 빈 공이다.
그래서 형상과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본래부터 없는 법성은
저절로 그러함을 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온갖 법에서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가는 것도 없다.
그리고 오는 것도 없다.
그리고 집착도 없다.
그리고 해탈도 없다.
그리고 또한 나는 바[所生]도 없다.
이러한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모든 더러운 악[穢惡]을 버린다.
그리고 매우 청정함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퇴지란 다음이다.
모든 법을 널리 편다.
그러면서 온갖 지혜를 조정(調定)한다.
그리고 속박과 집착[縛着]을 항복받는다.
그래서 도의 마음[道心]이 일어나게 한다.
이러한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모든 법의 경만(輕慢)한 무리를 다 제도한다.
그리고 나아가 은애(恩愛)와 보응의 인연을 다 제도한다.
이러한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온갖 법은 명구(名句)를 여읜디고 하자.
그러면 그 이름은 본래부터 없다.
그러니 얻는 것도 없다.
그리고 잃는 것도 없다.
이러한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두루 모든 법으로 하여금
놓아버리는 것도 없다.
그리고 취하는 것도 없다.
그리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생기지도 않는다.
이러한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마음의 탐착을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는 근본이나 지말도
역시 더하거나 덜함이 없는 것이요,
또 불퇴지란 법의 근본에서
특별히 뛰어나다.
그리고 3계에 독보적인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고의 근본[苦本]을 사유한다.
그리고 물러나 찾는다.
그리고 분별한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안다.
이러한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근문(根門)과 의식(意識)의 인연을 분별한다.
이러한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보살의 서원[要誓]은 끝내 틀리지 않는다.
그리고 어기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다.
K0382V12P0363a
불퇴지란 다음이다.
지금의 몸으로써 다시는 태분(胎分)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항시 화생(化生)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니라.
불퇴인이란 다음이다.
다음을 사유한다.
음(陰)과 입(入)의 모든 종류를 사유한다.
그리고 일어나고 쇠퇴하는 지(持)ㆍ입(入)ㆍ음(陰)의 성품을 사유한다.
이러한 것이다.
불퇴지란 다음이다.
몸 안을 분별한다.
그래서 머리로부터 발에 이르기까지
탐낼 만한 것이 없다
이러한 부정관(不淨觀)을 일으킨다.
이러한 것이니라.
최승아,
보살은 언제나 사유하고 분별한다.
그래서 분명히 아는 것이니라.
처음 보살을 배우려는 마음을 일으킨 이라고 하자.
그는 불퇴인(不退忍)으로써 다음을 관찰한다.
일곱 가지의 근본[本]을 관찰한다.
그리고 또한 나거나 없어지거나 집착하거나 아주 없다거나[斷] 하지 않는 이름을 관찰한다.
그래서 분명히 안다.
그리고 7주 보살은 다시 현성(賢聖)의 여덟 가지 근본을 사유한다.
그리고 모두 다 나거나 없어짐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집착하거나 아주 없다거나 하는 것을 보지 않아야 하느니라.
설사 최승아,
생을 받는[受生] 바에 따라 거기에 있다.
그러면서도 헤아림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만일 색계에 난다고 하자.
그런 경우 5지(地)와 16ㆍ4ㆍ3ㆍ2ㆍ1의 아래의 자리[下位]에 있는 이라고 하자.
그렇다 하여도 바로 7가지의 근본이 있다.
그리고 또한 무형계(無形界) 중에도
다시 열하나가 있다고 사유해야 한다.
그리고 공적(空寂)함을 환히 아는 아유월치(阿惟越致)도
고인(苦忍)과 고지(苦智)와 습(習)ㆍ진(盡)ㆍ도(道)의 인(忍)과
현성의 지혜를 능히 이루어 마친다.
이로써 역시 여덟 가지 현묘하게 통한 지혜[八玄通智]를 분별한다고 하자.
그러면 52가지 무명의 번뇌[無明之漏]를 제거하느니라.
7주 보살은 언제나 생각이 초선(初禪)에 의지한다.
그리고 6성지(聖智)를 행한다.
그리고 3삼매(三昧)와 3범당(梵堂)을 닦는다.
그래서 희근(喜根)을 반연한다.
그리고 설령 중선(中禪)에 의지한다 하여도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땅히 일곱 가지의 지혜[智]를 닦는다.
그러면서 각(覺)도 없으나 관(觀)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마음의 작용[心行]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수호하느니라.
가령 보살이 그 2선(禪)을 인하여 여덟 가지의 지혜[혜慧]를 사유한다고 하자.
그러면 각ㆍ관이 없다.
그리고 희(喜)도 없다.
그리고 공ㆍ무상ㆍ무원도 없다.
그리고 또한 증득을 받아들이지도 않느니라.
만약 보살이 다시 3선(禪)을 생각한다고 하자.
그러면 열 가지 지혜를 분별한다.
그리고 각ㆍ관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분병한다.
그리고 공ㆍ무상ㆍ무원과 쾌락을 분별한다.
그래서 스스로 즐기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4선(禪) 가운데서
다시 16가지 거룩한 지혜[聖智]를 분별한다.
그리고 또한 각ㆍ관의 행과 세 범당 등도 없다.
그리고 그 뜻을 수호한다.
그래서 새어 없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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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보살장(菩薩藏)에 능히 들어간다.
그래서 지인(智忍)을 행한다.
그리고 창병(瘡病)이 없음을 안다.
그리고 52가지 번뇌[漏]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리고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법을 분별한다.
그리고 다음의 지위[次地]로 나아가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거룩한 지혜와 물러나지 않는 법[不退轉法]을 체득하느니라.
가령 보살이 16가지 매우 뛰어난 지혜를 수행한다.
그래서 끝내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삿된 소견을 품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곧 온갖 번뇌를 녹여 없앨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굳고 강하다.
그리고 겁내지 않는다.
그리고 나약하지 않다.
그리고 뜻과 기억이 견고하다
그러면서 또한 흐리지 않다.
그리고 망령되지도 않다.
그리고 3계에 독보적이다.
그래서 꺼리거나 어려운 바가 없다.
그리고 뜻은 마치 금강(金剛)과 같다.
그래서 끝내 파리하거나 열등한 것이 없다.
그리고 마음은 참괴(慚愧)한다.
그래서 미치지 못함[不及]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리고 뜻은 밝게 비춘다.
그래서 통달하지 않음이 없다.
그리고 지혜는 여(如)하다.
그러면서도 현묘하고 밝다.
그래서 빛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변재와 언사는 끝내 걸린 것이 없다.
그리고 총지(摠持)를 체득한다.
그래서 일찍이 망실(忘失)하는 일이 없었다.
그릭고 하는 일은 기필코 안다.
그래서 침음(沈吟)하지 않고 있는 데나 사는 데에서마다
문득 부처님 업[佛業]을 행한다.
짓는 일은 평등하다.
그리고 뜻에 더함이 없다.
그리고 덜함이 없다.
그리고 말은 언제나 부드럽다.
그래서 사람을 상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질은 급작스럽지[卒暴] 않다.
그래서 자세히 살핀다.
그리고 편안하고 자상(安詳)하다. **
그리고 사람의 뜻을 안다.
그래서 곧 그를 위하여 설법하느니라.
5음을 분별한다.
그리고 모든 입(入)을 분석한다.
그리고 모든 법을 깨닫는다.
그리고 안다.
그래서 갖추지 않음이 없다.
멀리 3세의 보응과 인연을 본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마음 속을 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하여
옳은 것[是處]ㆍ그른 것[非處]ㆍ선악ㆍ과보에 대하여 설법한다.
그리고 지혜의 마음이 심히 깊다.
그래서 또한 가장자리와 끝이 없다.
그리고 선권(善權)을 분명히 안다.
그래서 때에 따라 알맞게 교화한다.
그리고 때를 알아서
가고 서고 나고 들고 거닌다.
그러면서 옳고 그름의 여부[可否]를 식별한다.
그리고 위의와 예절은 처음부터 마땅함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놀고 사는 곳곳에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일으키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 대사(大士)는 처해 있는 곳곳에서
사람에게 법을 설한다.
그리고 제도한다.
그래서 도과를 이루게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재난을 버린다.
그리고 영원한 안락을 얻게 한다.
그리고 끝내 여덟 가지의 불한처(不閑處)에 나지 않는다.
그리고 노니는 국토 경계에서 자유자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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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말한 바를 듣는다고 하자.
그러면 곧 제도 해탈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떤 이라도
섬기거나 그의 언교를 받든다고 하자.
그러면 곧 물러나지 않는 법을 체득하게 된다.
그리고 공의 지혜[空慧]를 환히 깨닫는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나는 것도 없이 곧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도를 이루느니라.
보살은 언제나 보시의 선권방편을 행한다.
그리고 또한 스스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제 색상(色相)을 능히 항복받았다.
그리고 본래 나의 소원이 오늘에야 이루어졌구나’라고.
이처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조금도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리고 따라서 취한다.
그리고 증득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바로 보살로서 물러남이 없다고 하느니라.
12인연의 법은 모두가 무명(無明)을 말미암아 곧 생사(生死)에 이르게 된다
이런 일을 분별한다.
그리고 곧 그 생기는 바를 구하여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또한 살필 수도 없다.
그리고 또한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모양이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모양이 없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인연의 근본을 통달한다.
그래서 행하는 바가 바른[正] 것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바른 것이 없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상ㆍ중ㆍ하의 것이라거나 하는 것을 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한 다시 죄와 복의 보응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착하지 않은 행[不善行]을 짓는 것도 보지 않는다.
모든 법은 다 생겨나는 바[所生]가 없다.
이런 일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모든 법의 근본을 닦는다.
그러면서 합함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흩어짐을 보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을 바로 인연으로 일어나는 것이라 하느니라.
가령 연(緣)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곧 근심이 없다.
그리고 걱정이 없는 것이다.
근심이 없다[無患]는 말은 다음을 말한다.
무명(無明)과 행(行)이 소멸한다고 하자.
그러면 노(老)ㆍ사(死)ㆍ우비(憂悲)ㆍ고뇌(苦惱)가 없다.
이러한 것을 말한다.
따로따로 열두 가지의 법을 통달한다.
그래서 안다.
온갖 인(因)이 있는 모든 법의 이름은 인과 연이 합하거나 흩어진다.
그리고 나(我)도 아니다.
그리고 나도 없다.
그리고 그[彼]도 아니다.
그리고 그도 없다.
또한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과 생(生)ㆍ
노(老)ㆍ무상(無常)도 보지 않는다.
그리고 들어가는 바를 보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들어감이 있지 않는 것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식으로 들어가는[識入] 것은
모두 다 들어가는 바가 없는 줄 통달한다.
그래서 아느니라.
이와 같이 들어간다고 하자.
그러면 곧 온갖 물러나거나 물러나지 않는 법을 분명히 안다.
최승아,
이곳이 바로 물러남이 없는 대사[不退大士]이니라.
만일 온갖 법을 완전히 갖추고자 한다고 하자.
그러면 마땅히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비신(非身)을 분명히 알아야 하느니라.
비록 텅 비고 고요하다[虛寂] 하더라도
중생 때문에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보살은 행이 청정하다.
그래서 유위(有爲)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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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은 뿌리[根]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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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유위를 다하지 못한다.
12인연은 바로 유위의 법인 줄 이해한다.
그리고 보살은 인도하여 무위(無爲)를 알게 하느니라.
보살이 비록 무위의 경계에 처하여
공ㆍ무상ㆍ무원의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무위에 머물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 증득을 취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무상(無常)은 닳아 없어지는 법인 줄 분명히 안다.
공덕을 수행한다.
그렇지만 고달픔을 품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생(生)을 받는 여러 가지 괴로움의 근원을 관찰한다.
그리고 중생을 보호한다.
그래서 스스로 자세히 살핀다.
그리고 다음을 관찰한다.
모든 법은 소멸한다.
그리고 또한 구경(究竟)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일을 관찰한다.
통(痛)ㆍ의(意)ㆍ법(法)을 찾는다.
그러나 처소가 없음을 관한다.
그리고 생하는 바가 없음을 관한다.
그리고 생기는 바는 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중생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무거운 임무를 맡았다고 관한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는 3계에서 소멸하지 않는다고 관한다.
그리고 네 가지 평등한 마음[4등심四等心]을 행한다.
그리고 그 후학(後學)을 가엾이 여기고 뜻은
집착이 없는 데에 둔다.
그러면서 제자나 연각의 도(道)를 버리지 않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은 청정한 의지(意志)로 자세히 살핀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좋아하는 바에 따라
그들을 위하여 나타내 보인다.
그리고, 중생에게 알맞고 끝내 손해가 없게 한다.
그래서 온갖 원(願)을 얻는다.
그리고 공덕의 지혜로써 그 마음이 산뜻하다.
그리고 눈으로 보게 되는 빛깔을 구하여도 마침내 없다.
그리고 인욕을 익히고 행한다.
그래서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욕설을 퍼붓고 성내면서 향하는 이가 있어도
오직 그 법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안팎은 공함을 이해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음을 이해한다.
그리고 또한 의심을 일으켜 공(空)에 한정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몸과 다른 사람도 보지 않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아유월치(阿惟越致)는
다른 이로부터 손과 발을 요구 받아도
기뻐하며 그에게 준다.
그리고 설령 또 머리를 요구한다 하여도
그 마음은 갑절 더 기뻐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뜻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그리고 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색해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아내나 아들을 구하는 이에게도
이내 베풀어 준다.
그리고 마음이 변함이 없다.
그리고 달라짐이 없기 때문이니라.
연설한 바 장구(章句)는 오직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만 힘쓸 뿐이요
몹시 은근히 남에게 금륜왕(金輪王)이나 제석(帝釋)ㆍ범천왕(梵天王)이 될 것을 권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연설한다.
그리고 마음을 낸다.
그리고 배움[學]을 일으킨다.
그리고 보살의 도[菩薩道]를 닦는다.
그리고 신통으로 놀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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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10방의 부처님을 뵌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 세존께 예배한다.
그리고 섬긴다.
그리고 공양올리느니라.
바로 삼천대천의 불토에 보배가 가득 찼다 하여도
마음으로 끝내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온갖 있는 바는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그리고 또한 다시 이것은 나의 것[我所有]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뜻이 청정하다고 하자.
그러면 색(色)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구하지 않는다.
하나의 법신[一法身]이라 볼 수 없다.
때문에 온갖 사람을 본다.
그리고 마치 법계의 머무름[法界住]과 같이 한다.
그리고, 도안(道眼)을 체득한다고 하자.
그러면 신족을 빠짐없이 갖춘다.
그리고 혜안(慧眼)을 얻는다.
이로써 다음을 안다.
곧 있는 것이란 도무지 아무것도 없다.
이런 일을 안다.
그리고 점차로 그렇게 진제(眞際)ㆍ법성을 안다.
그리고 곧 불안(佛眼)으로 열여덟 가지 법의 근본을 얻는다.
그리고 법안(法眼)을 분별한다.
그리고 통달한다.
그리고 막힘이 없다.
그리고 10력(力)을 완전히 갖춘다.
그리고 큰 서원을 갖는다고 하자.
그러면 곧 무위의 죽지 않는 경계에 이르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그가 닦는 바의 행은 일체지와 같다.
그리고 머무를 바[所住]를 익히고 행한다.
그렇지만 본디 머무르는 바가 없다.
그리고 이 머무름[住]은 머무른다.
그렇지만 머무르는 바가 없다.
그리고 배운다.
그러나 또한 배움이 없다.
이러한 일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보살은 언제나 공하고 고요한 법을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법을 수순한다.
그래서 거스름이 없다.
그리고 수순한다.
그러면서도 편편하고 바른 데에 있지 않다.
그리고 거스른다.
그러면서도 가장자리를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삿된 것을 익히지 않는다.
그래서 악마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바로 요행(僥倖)한 대승도 배우지 않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법의 견고한 요의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니라.
법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스로 안다.
그래서 다시 짓는 바가 없다.
그리고 곧 마음을 오로지 한다.
그래서 5음을 제압한다.
그래서 지닐 수 있다.
그래서 내닫지 않게 한다.
그리고 곧 악마의 경계를 건넌다.
그래서 능히 중도(中道)로써
보살의 마음을 피곤하게 함이 없느니라.”
그때에 최승보살이 세존께 아뢰었다.
“어떻게 물러나지 않는 보살은 머무르되
머무르는 바가 없습니까.
그리고 배우되 배우는 바가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7주 보살은 3계에 머무른다.
그렇지만 3계에 물들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익히는 바도 없느니라.
익히고 배우지 않는다.
이것을 바로 안이라 한다.
그리고 구하지 않고 익히지 않는다.
이를 바로 바깥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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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바깥을 익힌다 하더라도
제자(弟子)를 따르지 않는다.
그러면서 배울 바가 없음을 관한다.
그리고 또한 배움을 반연하는 것도 아니니라.
이른바 익힘이란 다음을 말한다.
생사(生死)에서 배운다.
보살이 닦는 바는 배운다.
그렇지만 아는 것이 없다.
이러한 것을 말한다.
익히되 익히는 바가 없다.
그리고 배우되 배우는 바가 없느니라.
익힌다는 것은 바로 명색(名色)이요
익힌다는 것은 바로 인연이다.
익힌다는 것은 아견(我見)을 말한다.
익힌다는 것은 바로 아소(我所)다.
그러나 또한 아소가 아니다.
익힌다는 것은 다음읻아.
비록 탐하더라도 보시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니라.
익힌다는 것은 다음이다.
비록 계율을 범해도 계율 지키는 것을 배워 익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계율에 대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익힌다는 것은 다음이다.
성내는 모양에서 인욕을 배워 익히는 것이다.
익힌다는 것은 다음이다.
게으르되 정진을 배워 익히는 것이다.
익힌다는 것은 다음이다.
어지러운 생각에서 하나의 뜻[一意]을 배워 익히는 것이다.
익힌다는 것은 다음이다.
무명(無明)에서 지혜를 배워 익히는 것이다.
익힌다는 것은 다음이다.
과보(果報) 없는 데서 공덕을 배워 익히는 것이다.
익힌다는 것은 다음이다.
세속 일[俗業]에서 도(道)를 배워 익히는 것이다.
익힌다는 것은 다음이다.
해탈이없는 데서 제도되는 것을 배워 익히는 것이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7주 보살은 익히되 익히는 바가 없다.
그리고 배우되 배우는 바가 없느니라.
끝없는 지혜[無極慧]에 이르른다.
그래서 모든 법에서 얻거나 잃는 것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들어가는 바도 없다.
그리고 또한 들어가지 않는 바도 없다.
그리고 색(色)으로써 들어가는 바가 있다고 헤아릴 수도 없다.
그리고, 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또한 그와 같다.
그래서 법수(法數)로부터 지극함이 있는 데에 이르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한 다시 법수가 아닌 데서부터 극함이 없는 데에 이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일체지를 구하느니라.
반드시 지혜와 같이 머무른다.
그래서 스스로 법은 ‘이것은 내가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으면서도 분명히 안다.
이러한 것이 일체지이다.
보살이 일체지를 구하고자 한다고 하자.
그러면 4대로 만든 물질 가운데서부터 구해야 하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몸을 헤아린다고 하자.
그러면 곧 장애가 된다.
그래서 4생(生)을 받기 때문이니라.
몸을 헤아리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곧 애욕(愛欲)을 여읜다.
그러니 보살로서 머무른다면
마치 초월함으로써 머무른다.
그렇지만 머무르는 바가 없다.
생(生)이 있다고 헤아리지 않는다.
어머니에게서 나지도 않는다.
만일 태어난다 하자.
그러면 이것은 모두 태어난 것이 아니니라.
태어남이 없는 것을 안다.
이러한 것을 남이 없는 지혜라 하느니라.
이런 평등을 짓는 것을 바로 평등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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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끝없고 한이 없는 대승의 평등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
이 때에 11나술(那術)의 백천의 천자들이 모두 어디로부터 생겨나는 바가 없는 법인[無所從生法忍]을 얻었다.
그리고, 7만 2천 사람이 모두 위없는 평등한 도의 뜻[無上平等道意]을 내었다.
그 때의 좌상(座上)의 높은 큰 성문으로서
장로 가섭(迦葉)ㆍ사리불(舍利弗)ㆍ마하목건련(摩訶目犍連)ㆍ
아나율(阿那律)ㆍ이월(離越)ㆍ난두바라(難頭婆羅)ㆍ
분뇩문타니불(分耨文陁尼弗)ㆍ공수보리(空須菩提) 등 5백 나한(羅漢)이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사를 가지런히 매만졌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댔다.
그리고 모두 머리 조아렸다.
그래서 부처님의 발 아래 댔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동시에 큰 소리로 슬피 울었다.
그리고 흐느겼다.
그리고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앞에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은 소견이 얕았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성인의 종성[聖種]을 끊었나이다.
부처님의 도(道)는 깊고 깊습니다.
그런데도 깨끗이 씻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어떤 남자나 여인이며 아래로 범부에 이르기까지
3도(塗) 가운데 있으면서
도를 구하려 하는 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마땅히 높은 뜻을 내어야 하리다.
그래서 부처님을 이루어야 하리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오늘 백천의 법으로써
저희들을 위하여 말씀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보살의 뜻을 내고서 사사로이 후회나 원한을 품습니다.
그리고 성취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미칠 수도 없기 때문이옵니다.
지금 비록 도를 얻어서 아라한이라 일컫습니다.
그리고 여섯 가지 신통이 맑게 사무칩니다.
그리고 덕은 3유(有)를 뛰어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음보다 못하나이다.
즉 다음과 같습니다.
본래 백천만 겁 동안 5역죄(逆罪)를 짓습니다.
그래서 무택(無擇)지옥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죄가 소멸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나오게 되는 기약이 있습니다.
그럴 적에 점차로 해탈하여 멸도에 이릅니다.
그러면서 곧 뜻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보살도를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것보다 못하나이다.
지금은 이미 근성[根]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때를 만났사옵니다.
그러나 이익이 없나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보살의 종성이 불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릇이 뚫어지고 비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보살이 되는 도를 받아들여 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날아다니거나 꿈틀거리는 형상 있는 무리로써
한 발 가진 것ㆍ두 발 가진 것ㆍ백천의 발을 가진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땅을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단맛[甘味]을 먹고 부드러운 옷을 입습니다.
K0382V12P0365b
뭇 새들이 허공에 날아다닙니다.
그렇지만 목숨은 땅에 매어 두고 있사옵니다.
저희도 비록 도를 얻었기는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4대를 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나 날짐승이나 무슨 차별이 있겠나이까?
그들은 비록 때[구垢]에 섞여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점점 짐승의 형상을 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덕(德)을 쉬지 않고 심습니다.
그래서 대승의 자취[跡]를 이룹니다.
그래서 모든 하늘이나 사람으로서 모두 제도되고 해탈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거니와 저희들은 비루합니다.
그래서 상존(上尊)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러한 것을 원망하옵니다.
그리고 모두가 근심 걱정합니다.
그러면서 본래 수행했던 바를 후회하옵나이다.”
그때 그 모임 안에 있던 천칠백의 아직 자취를 밟지 못한 이로서
먼저 성문이나 연각의 법을 닦았던 이들은
마침내 뜻이 견고해지었다.
그러면서 위없는 마음[無上心]을 내었다.
그러므로 곧 자리 위에서 좇아난 바가 없는 법인을 체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인하여
6도의 큰 법을 알기 쉽게 연설하였다.
그리고 4제의 고ㆍ습ㆍ진ㆍ도를 널리 폈다.
그리고 4은(恩)과 4등(等)으로 온갖 중생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도의 마음[道心]을 일으켰다.
그때 사리불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았다.
그래서 모인 모든 보살 대중들에게 널리 말하였다.
“들어보십시오.
저는 옛날 아직 굽지 않은 그릇[坏器]과 같았습니다.
그럴 적에 혹은 1주(住)로부터 나아가 5주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도로 다시 떨어져 초주(初住)에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초주로부터 5주ㆍ6주까지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60겁(劫) 동안 지냈습니다.
그러나 끝내 물러나지 않음에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일으켰다가도 곧 뉘우쳤습니다.
그렇기에 역시 구경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설령 다음과 같다고 합시다.
즉, 마음을 지켜 청정하게 계율을 지닌 이라고 합시다.
이로써 원한 바를 반드시 얻었습니다.
그리고 세속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혜의 법으로써 밝게 비추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설령 그렇다 하여도 보살은 물러나지 않는 지위에 머무릅니다.
그래서 역시 또 보시나 보시하지 않음을 헤아리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계율ㆍ인욕ㆍ정진ㆍ일심(一心)ㆍ지혜를 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다시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법을 좇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몸ㆍ입ㆍ뜻의 행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온갖 법에 대하여 모두 집착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다 요술ㆍ허깨비ㆍ아지랑이ㆍ그림자ㆍ메아리와 같이 여깁니다.
그리고 머무른 바의 근본과 지말이 모두 다 청정합니다.
그리고 나[吾我]와 수명의 장단(長短)도 없습니다.
그리고 도속(道俗)이나 시비(是非)나 명호를 보지도 않습니다.
K0382V12P0365c
또한 스스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즉 ‘나는 이것을 구해야 한다.
이것은 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근심이나 기쁘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리고 반연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짓는 것도 없습니다.
또한 나는 바[所生]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보는 바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처소도 없습니다.
이렇게 배우는 이는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하거나 덜하는 배움[學]도 없습니다.
그리고 악취(惡趣)에 떨어지거나 물러나는 마음도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되고자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와 같이 익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죄를 짓지도 않습니다.
또한 복을 짓지도 않습니다.
또한 성취할 것이 없지도 않습니다.
생각이나 생각이 없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법은 다 평등합니다.
그래서 차이나 특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사리불이 이런 말을 하였다.
그럴 적에 다시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백천 중생들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無上正眞道意]을 내었다.
그때에 최승보살이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게 모든 법은
다 마치 요술ㆍ허깨비ㆍ아지랑이와 같다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다음과 같다.
허깨비는 와도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가도 처소가 없다.
이처럼,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다.
그래서 어디서 오는 데도 없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 데도 없느니라.
성품은 저절로 머무른다.
그래서 변하거나 바뀌는 것을 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모든 법은 짓는 것도 없다.
그리고 또한 짓는 이도 없다.
그러한 줄 알 것이니라.
여래의 몸은
첫째는 화신(化身)이요,
둘째는 법신(法身)이니라.
법신이란 볼 수도 없다.
그리고 또한 형상도 없다.
그리고 화신은 이 허공과 같다.
그래서 형상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아유월치가 닦아야 할 행의 근본[行本]이다.
그래서 모든 대중에 있으면서
사자처럼 외친다.
그리고 공혜(空慧)를 행한다.
그러므로 미칠 수 있는 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공훈은 순숙(純熟)하다.
그리고 모든 법은 청정하다.
그리고 끝없이 깊고 미묘하다.
그래서 불가사의하다.
그리고 높이 뛰어나다.
그래서 헤아리기 어렵느니라.
이와 같이 최승아,
불퇴(不退)의 대사(大士)는
7주 가운데서 그 행을 청정하게 하느니라.”
『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2권(K0382 v12, p.353c01-p.365c01)
>>>
『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0382-002♧
◎◎[개별논의] ♥ ❋본문
★1★
◆vljy1779
◈Lab value 불기2569/02/07 |
♥단상♥ ![]()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5/02/2569-02-07-k0382-002.html#1779 sfed--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_K0382_T0309.txt ☞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2권/전체10권 sfd8--불교단상_2569_02.txt ☞◆vljy1779 불기2569-02-07 θ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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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악(惡)과 10선(善)이 있음.
이 선업ㆍ악업을 업도라 함은,
업은 정신의 한 작용인 사(思)를 말하며,
사(思)라는 마음 작용이 여기에 의하여 작용하는 장소라는 뜻으로 업도라 함.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탐ㆍ진ㆍ사견의 3을 제한 나머지 7은 그 자체가 업이고,
또 사(思)라는 심소(心所)가 작용하는 장소가 된다.
때문에 자세하게는 업업도(業業道)라 해야 함.
답 후보
● 십업도(十業道)
십인(十忍)
십중죄(十重罪)
십칠지(十七地)
십현문(十玄門)
아고(阿家)
아나함(阿那含)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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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bud] Mahadharmaraksita
[san-chn] prāpti-hetu 得因
[san-eng] narakasya $ 범어 of hell
[pali-chn] sārī 舍利
[pal-eng] sampa.ticchitvaa $ 팔리어 abs. of sampa.ticchatihaving received; having accepted.
[Eng-Ch-Eng] Great Vehicle Sutra of the Universally Radiant One's Syllable-Detachment 大乘離文字普光明藏經
[Muller-jpn-Eng] 結重 ケツジュウ commission of a grave offense
[Glossary_of_Buddhism-Eng] BUDDHIST FESTIVALS☞
Syn: Festivals.
See also: Rains Retreat; Sacerdotal Age; Ullambana; Vesak.
“Mahayana Buddhist monasteries theoretically celebrate between
thirty-five and forty events a year, but most are of minor importance.
Apart from festivals common to all Asians, especially the Lunar New
Year festival, six are particularly significant for Mahayana Buddhists:
Lunar Calendar:
Second Month (19th): Festival of the Bodhisattva Avalokitesvara.
Fourth Month (15th): Vesak (Birth of Buddha Sakyamuni) [Rains
Retreat Begins].
Sixth Month (19th): Festival of the Bodhisattva Avalokitesvara.
Seventh Month (15th): Ullambana (Festival of Hungry Ghosts);
Ninth Month (19th): Festival of the Bodhisattva Avalokitesvara.
Eleventh Month (17th): Festival of Amitabha Buddha.
The ‘Rains Retreat’ runs from the sixteenth day of the fourth month
(one day after Vesak) to the fourteenth of the seventh … it is the festival which terminates the Rains Retreat, which is the most important
specifically Buddhist festival. The same is the case quite widely in the
Buddhist world.”
In addition to the Ullambana festival, a key festival for all Buddhists
is Vesak. For Theravadins, Vesak commemorates the birth, enlightenment and passing of Sakyamuni Buddha, while for Mahayanists it
commemorates His birth only.
[fra-eng] arraisonner $ 불어 argue
[chn_eng_soothil] 天狗 ulkā, 憂流迦the 'heavenly dog' i. e. a meteor. Also 'a star in Argo' according to Williams.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ṁ] ▼●[羅什]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여래가 멸도(滅度)한 뒤 나중 오백년[後五百年]에도 계(戒)를 지키고 복
(福)을 닦는 이는
[玄奘] 然復, 善現, 有菩薩摩訶薩於當來世, 後時、後分、後五百歲,
正法將滅時分轉時, 具足尸羅、具德、具慧;
[義淨] 妙生! 當來之世有諸菩薩具戒、具德、具慧;
06-04 अपि तु खलु पुनः सुभूते भविष्यन्त्यनागतेऽध्वनि बोधिसत्त्वा महासत्त्वाः पश्चिमे काले पश्चिमे समये पश्चिमायां पञ्चशत्यां सद्धर्मविप्रलोपे वर्तमाने गुणवन्तः शीलवन्तः प्रज्ञावन्तश्च भविष्यन्ति,
api tu khalu punaḥ subhūte bhaviṣyantyanāgate'dhvani bodhisattvā
mahāsattvāḥ paścime kāle paścime samaye paścimāyāṁ pañcaśatyāṁ
saddharmavipralopakāle vartamāne guṇavantaḥ śīlavantaḥ prājñavantaśca
bhaviṣyanti |
그리고 또한 수보리여! 위대한 존재로서 깨달음갖춘이들이 미래세에(도) 있어서, 다음번
때의 다음번 시기의 다음번 오백년에 바른 법이 파괴된 때가 되었을 때 덕목을 지닌
이들、 계행을 지닌 이들、 깊은 지혜를 지닌 이들이 된다면…
▼▷[api] ① api(ƺ.) → [또한]
② api(ƺ. and, also, besides; often used to express emphasis. even, also, very)
▼[tu] ① tu(ƺ.) → [그런데 → 그리고]
② tu(ƺ. on the contrary, on the other hand; ...; used as an emphatic particle)
▼[khalu] ① khalu(ƺ.) → [참으로]
② khalu(ƺ. indeed, certainly, truly)
▼[punaḥ] ① punaḥ(ƺ.) → [다시]
② punar(ƺ. again, once more, anew; back; on the other hand)
▼[subhūte] ① subhūte(ƾ.voc) → [수보리여!]
▼[bhaviṣyantyanāgate'dhvani] ① bhaviṣyanti(fut.Ⅲ.pl.) + anāgate(nj.→ƾ.loc.) +
adhvani(ƾ.loc.) → [있어서(← 있을 것이다)、 미래세에(← 아직 오지 않은 때에)]
▼[bodhisattvā] ① bodhisattvāḥ(ƾ.nom.pl.) → [깨달음갖춘이들은]
▼[mahāsattvāḥ] ① mahāsattvāḥ(nj.→ƾ.nom.pl.) → [위대함갖춘상태인]
▼[paścime] ① paścime(nj.→ƾ.loc.) → [다음번]
▼[kāle] ① kāle(ƾ.loc.) → [때에]
▼[paścime] ① paścime(nj.→ƾ.loc.) → [다음번]
▼[samaye] ① samaye(ƾ.loc.) → [시기에]
▼[paścimāyāṁ] ① paścimāyāṁ(nj.→Ʒ.loc.) → [다음번]
▼[pañcaśatyāṁ] ① pañca+śatyāṁ(Ʒ.loc.) → [오백년에]
▼[saddharmavipralopakāle] ① sat+dharma+vipralopa+kāle(ƾ.abso.loc.) → [바른 법이
파괴된 때가]
▼[vartamāne] ① vartamāne(njp.→ƾ.abso.loc.) → [있을 때]
▼[guṇavantaḥ] ① guṇavantaḥ([nj.→]ƾ.nom.pl.) → [덕목을 지닌 이들이]
guṇavantaḥ(njp.→ƾ.nom.pl.) … : 덕목을 지니고 계행을 지니며 깊은 지혜를
지니게 될 것이다. ☞ ‘여래가 滅度한 뒤 後五百年에도 戒를 지키고 福을 닦는
이는…’이라고 표현한 羅什의 譯처럼, 말세라도 덕목과 계행과 지혜를 갖춘다면
성불할 수 있는 菩薩이 될 수 있음을 나타냄.
② guṇavat(nj. endowed with good qualities, virtuous, meritorious, good, excellent)
▼[śīlavantaḥ] ① śīlavantaḥ([nj.→]ƾ.nom.pl.) → [계행을 지닌 이들이]
② śīlavat(nj.) < * + vat(possessive) < śīla(ƿ. good disposition or character; habit,
custom; a moral precepts)
▼[prājñavantaśca] ① prājñavantaḥ([nj.→]ƾ.nom.pl.) + ca(ƺ.) → [그리고、 깊은 지혜를
지닌 이들이]
② prājñavat(nj.) < * + vat(possessive) < prājña(nj. intellectual; wise, learned, clever: ƾ.
a wise or learned man)
▼[bhaviṣyanti] ① bhaviṣyanti(fut.Ⅲ.pl.) → [될 것이다. → 된다면,]
문장말미의 ‘bhaviṣyanti’가 없을 경우 ‘guṇavantaḥ śīlavantaḥ prājñavantaḥ’ 세
가지는 ‘bodhisattvāḥ’의 단순형용사로 취급될 수 있다.
② bhū(1.ǁ. to be, become; to be born or produced; to spring or proceed from; to happen)
출처 봉선사_범어연구소_현진스님_금강경_범어강의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密多經) - 범어 텍스트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ṁ
♣K0116-001♧
♣K0117-001♧
■ 삼매_게송퀴즈
■ 오늘의 게송
[38일째]
피제장엄불가설 $ 038▲毘覩羅毘覩羅為 一 ● 奚婆(上)羅, ○□□□□,彼,彼,彼,所
□□□□□□□, 彼諸神力不可說,
彼諸自在不可說, 彼諸神變不可說。
□□□□□□□, 피제신력불가설,
피제자재불가설, 피제신변불가설。
彼諸莊嚴不可說,
여러 가지 장엄도 말할 수 없고
저 여러 신통한 힘 말할 수 없고
여러 가지 자재함도 말할 수 없고
여러 가지 신통 변화 말할 수 없어
[39째]
소유신통불가설 $ 039▲奚婆羅奚婆羅為 一 ● 伺察, ○□□□□,所,所,所,清
□□□□□□□, 所有境界不可說,
所有加持不可說, 所住世間不可說。
□□□□□□□, 소유경계불가설,
소유가지불가설, 소주세간불가설。
所有神通不可說,
갖고 있는 신통을 말할 수 없고
갖고 있는 경계도 말할 수 없고
갖고 있는 가지함도 말할 수 없고
세간에 머무름도 말할 수 없어
●K1203_T1128.txt★ ∴≪A최상대승금강대교보왕경≫_≪K1203≫_≪T1128≫
●K0382_T0309.txt★ ∴≪A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_≪K0382≫_≪T0309≫
●K1091_T0974.txt★ ∴≪A최승불정다라니경≫_≪K1091≫_≪T0974≫
■ 암산퀴즈
383* 200
71604 / 442
■ 다라니퀴즈
구족수화길상광명대기명주총지 38 번째는?
불정광취실달다반달라비밀가타미묘장구(佛頂光聚悉怛多般怛羅秘密伽陁微妙章句) 370 번대 10개 다라니는?
부처님 108 명호 38 번째는?
38 기쁨․즐거움․재물․보배 등을 증장시키고,
타계, 託契<三十八>
takki
(이하~) 현세의 왕이시여! 지옥과 불에 떨어진 이들을 보호하고 보호 하소서.
『대승대집지장십륜경』
♣0057-001♧
370 자미가가라하 ◐闍弭迦揭囉訶<如烏鬼三百七十>◑jamikāㆍgrahā
371 사구니가라하 ◐舍俱尼揭囉訶<如馬三百七十一>◑śakuniㆍgrahā
372 만다라난뎨가아라하 ◐漫怛囉難提迦揭囉訶<如猫兒三百七十二>◑mantraㆍnandikāㆍgrahā
373 아람바아라하 ◐阿藍皤揭囉訶<如蛇><三百七十三>◑laṃvikāㆍgrahā
374 라노건도바니아라하 ◐訶奴建度波尼揭囉訶<如雞三百七十四>◑hanuㆍkaṇṭhaㆍpāṇiㆍgrahā//
375 지 바라 예가혜가 덕볘디가 ◐什<入音>皤囉<壯熱瘧鬼>翳迦醯迦<一日一發>德吠底迦<二日一發三百七十五>◑jvarāㆍekāhikāㆍdvaitīyakā
376 뎨리뎨약가 저도리타가 ◐帝哩帝藥迦<三日一發>折咄㗚他迦<四日一發三百七十六>◑tritīyakāㆍcaturthakāㆍjvarā
377 니디야지바라 ◐眤底夜什皤囉<常壯熱鬼三百七十七>◑nityaㆍjvarā
378 비사마지바라 ◐毘沙摩什皤囉<壯熱三百七十八>◑vishamaㆍjvarā
379 바디가 배디 가 ◐皤底迦<風病鬼>背底迦<黃病鬼三百七十九>◑vātikāㆍpaittikā
● 가령 모든 국토의 큰 고을과
작은 고을과 촌락에서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고,
혹은 군사의 난리와 도적난리가 일어나고 투쟁이 벌어지거나,
그 외에 일체 재난이 발생한 곳일지라도,
이 신비한 주문을 베껴서
성의 네 문에 붙이든지,
공양하는 곳[支提]에 모시든지,
혹은 깃대[脫闍]에 달아 올려서,
그 국토 중생들에게
이 주문을 받들어 맞이하게 하고
예배 공경하여 일심으로 공양케 하고,
그 백성들이 각기 몸에 차기도 하고
혹은 각기 살고 있는 집에 모시게 한다면,
일체 재앙[災厄]이 모두 다 소멸하느니라.
불정광취실달다반달라비밀가타미묘장구(佛頂光聚悉怛多般怛羅秘密伽陁微妙章句) -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K0426-007♧
038
삼독(三毒)을 소멸시키신 이께 귀의합니다.
南無滅三毒
『불일백팔명찬』佛一百八名讚
♣1183-001♧
76600
162
법수_암기방안
39 아킬래스건 Achilles tendon
37 종지뼈 ( the kneecap, / the patella무릎 종지뼈)
■ 오늘의 경전 [이야기, 게송,선시 등]
2569_0207_234613 :
대장경 내 게송
출전:
한글대장경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통합대장경
https://kabc.dongguk.edu/m
■요가자세 익히기
요가_옆으로 누운 휴식 자세
●세계사이트방문일자: 불기2568-12-09-월
♡清水寺 きよみずでら 島根県安来市清水町, Japan
安来清水寺 - 厄ばらいの寺
Zuikozan-Kiyomizudera Temple
[사진]
[지도내 사진] https://maps.app.goo.gl
[거리뷰1] https://maps.app.goo.gl
[세계내-위치] https://www.google.nl
[설명 1] https://en.wikipedia.org
https://ja.wikipedia.org
https://zh.wikipedia.org
[설명 2]
[동영상 1] 2:34
https://youtu.be
清水寺(きよみずでら)安来
[동영상 2] 8:37
【清水寺】島根県安来市に紅葉を見に行きました。
https://www.youtube.com
[현지음악]
[위키 그림 감상]
https://www.wikiart.org
비둘기를 품은 여자
디미트리스 미타라스

○ 2019_1105_132510_nik_ar45_s12 순천 조계산 선암사

○ 2019_1106_121421_can_CT33 화순 영구산 운주사

○ 2019_1105_112813_can_BW17 순천 조계산 선암사

○ 2020_0904_130700_can_bw24 원주 구룡사

○ 2020_0904_135858_can_ar47 원주 구룡사

○ 2018_1024_173107_can_ct18_s12 부여 고란사

○ 2020_1114_142654_nik_ab41_s12 삼각산 도선사

○ 2019_1104_102018_nik_Ab35 구례 화엄사

○ 2021_1003_174226_nik_Ab27밀양_영축산_영산정사

○ 2021_0929_164746_can_bw27_pc강릉_괘방산_등명낙가사

○ 2021_1006_104359_nik_ct8해남_봉화산_대흥사

○ 2017_1107_101344_nik_ct18정읍_내장산_내장사

○ 2015_0415_161615_nik_AB7서울_정릉_봉국사

○ 2021_1003_174528_can_BW21_s12밀양_영축산_영산정사

○ 2013_0309_142726-OLYMPUS_ct3강화도_보문사_전등사

○ 2022_1028_152742_can_bw24서울_구룡산_능인선원

○ 2021_1002_211318_can_ab41_s12_pc밀양_재악산_표충사

○ 2021_1008_144156_can_Ar26_s12_pc계룡산_신원사

○ 2021_1004_110444_nik_BW25의령_봉황산_일붕사
● [pt op tr] fr
_M#]

○ 2021_1112_144008_nik_Ab31_s12setec_서울국제불교박람회
™善現智福 키워드 연결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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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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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2권/전체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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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fr
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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