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아유월치차경』
K0135
T0266
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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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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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아유월치차경』 ♣0135-002♧
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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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說阿惟越致遮經卷中
ABC_IT_K0135_T_002
불설아유월치차경 중권
서진 월지 축법호 한역
김두재 번역
7. 불환품(不還品)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에 보살에게 불환(不還:
阿那含)을 찬탄하여 말씀하셨는가?
보살은 모든 존재가 곳곳에서 조작되어진 행동을 하지만 이러한 모든 존재를 초월해서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체득하고 모든 행업을 덜어 없애며 이러한 것들을 모두 항복받았으므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일체의 법을 깨달았으므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니라.
범부의 경지를 뛰어넘어 세간의 지혜를 버리고 부처님의 밝은 지혜에 들어가 머무름이 없는 경지를 획득하고 모든 법이 평등함을 깨달아 적멸한 세계를 성취하고 범부의 세계에 동요하지 않기 때문에 성인의 도에도 머물지 않고 모든 악한 길을 막느니라.
정욕(情欲)에서 벗어나기를 힘쓰고 모든 음식에 대하여 집착하여 먹지 않으며,
최상의 밝은 경지를 체득하였느니라.
모든 소견을 뽑아버려서 집착하는 것이 없고 모든 사견(邪見)인 예순두 가지 견해를 없애며,
이미 나고 죽음을 초월하여 니원(泥洹:
涅槃)을 관찰하였느니라.
무위(無爲)의 경지를 뛰어넘어 모든 생각을 버리고 경적(經籍)도 따르지 않고 악한 세계에 물들은 것을 깨끗이 하며,
교만함을 버리고 스스로 크다는 생각을 갖지 않느니라.
지혜롭지 못하여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근원에서 벗어나고 애욕(愛慾)을 깨뜨려 무너뜨리고 숱한 어둠을 없애며,
탐락(貪樂)을 뽑아버리고 진애(塵埃)를 버리며,
교만과 스스로 방자함 등 이러한 장애를 모두 쉬어서 세간의 지혜를 영원히 여의나니,
그런 까닭에 불승(佛乘)만을 생각하고 성인의 평등한 지혜를 획득하느니라.
보살은 생각을 버리고 애욕의 세계도 버리며,
본래부터 청정한 과거 성현의 적멸한 가르침을 익히나니,
그 지혜는 가장 뛰어나서 여러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를 나타나게 하려는 생각을 하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중생들이 극진히 존경하되 이보다 더함이 없느니라.
보살은 이렇게 모든 생각은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라는 평등함을 획득하고 나서 일체의 의심 많은 세계를 제거하여 없애느니라.
보살은 이러한 이치를 체득한 뒤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느니라.”
다시 아난에게 물으셨다.
“저 어떤 사람이 도에 머물지 아니하면 마땅히 이들을 다 어떻게 도에 머물게 해야 하는가.
이것은 곧 깨달음이니 중생들이 그런 것을 밝게 알면 그것이 바로 도에 머무는 것이니라.
능히 이와 같이 깨달으면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어지리니,
왜냐 하면 공(空)한 일과 중생 세계는 불가사의하고도 평등한 도의 지혜[道慧]이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은 것을 분별하여 알면 곧 중생의 종류는 공한 것이고 청정한 세계의 중생도 공한 것이어서 중생이라는 생각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니라.
일체의 여러 사람도 허공과 특별히 다름이 없어서 이 몸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얻을 것도 없으며 머무르는 것도 아니니,
저것은 모두 공하기 때문이니라.
마치 허공의 모양이 공하여 모양이 없는 것과 같아 일체의 생각을 없애서 무념(無念)으로써 도를 성취하고 중생이라는 생각을 덜어 없애느니라.
허공의 모양은 버릴 것도 없고 버리지도 않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모든 법은 다 평등하고 청정하기 때문이니라.
일체 중생은 버릴 것도 없으며 놓아 버려야 할 것도 없고 평등한 까닭에 얻을 것도 없으니,
이미 얻을 것이 없으므로 오지 않는 것이니라.
이렇게 헤아려 아는 것이 곧 불환(不還)이요,
이렇게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모든 법에 대하여 깨달아 알면 모든 걱정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에 불환(不還)이라고 하느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저것은 생겨나는 것도 없고
작용 있는 행업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나니
모든 머무는 바를 덜어 없애면
이것을 불부환(不復還:
阿那含)이라 말하네.
가고 옴에 대하여 밝게 알고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머무는 바도 얻지 않으니
그런 까닭에 여기에 돌아오지 않음이라 하느니라.
저 범부의 행업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연도 아니요 헤아릴 것도 없으니
그런 까닭에 불부환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법은 다시 오는 일이 없고
또한 모든 법은 가는 것도 아니니
가고1) 옴이 없음을 얻으면
이것을 불부환이라고 하느니라.
그 사람은 일찍이 머물지도 않고
세 가지 길에 가지도 않으며
밝은 부처님의 도를 이룩하나니
이것을 곧 불환(不還)이라고 하느니라.
결정코 모든 욕심 끊어버리고
음식에 집착하지 않아
보리도를 증득하면
이것을 곧 불환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소견으로 행하는 바
예순두 가지 견해를 분별해 알면
저 경계에 떨어지지 않나니
이것을 곧 불환이라고 하느니라.
이 법은 처음과 끝도 없고
이미 모든 두려움도 여의었으며
이 지혜는 여여(如如)하여 본래 없는 것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네.
무위적멸(無爲寂滅)에 상응하고
모든 번뇌[塵勞]에 집착하지 않으며
저 모든 생각 제거해 버리나니
이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이미 모든 악한 세계를 끊어버리고
숱한 번뇌의 집착 씻어버리며
적연 무위(無爲)의 경지 닦으면
이것을 곧 불부환(不復還)이라고 하느니라.
저 악한 마왕과
그 관속(官屬)의 무기를 항복받으며
갖가지 생각 영원히 없으니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어리석음과 근심ㆍ걱정 뽑아버리고
애욕의 뿌리 끊어 없애며
왕성한 탐욕과 음욕 끊어버리니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는다 하네.
모든 번뇌를 항복 받아 없애고
수많은 생각 뽑아버리면
구경(究竟)의 높은 지혜에 이르리니
그런 까닭에 불부환(不復還)이라고 하느니라.
온갖 근심 걱정 떨쳐버리고
교만의 산 깨뜨려 무너뜨리며
5음(陰)을 끊어버릴 생각 가지니
그런 까닭에 불부환이라고 하느니라.
불승(佛乘)에 뜻을 두어 광명 밝히니
불승보다 더 높은 것 없네.
애욕의 근심 탐하지 않으면
그런 까닭에 불부환이라고 하느니라.
부처님의 복장처(伏藏處)2) 이미 깨달았으니
모든 복장 가운데 제일이어라.
과거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신 바이니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저들은 불승[尊乘]에 머무나니
불승보다 더 높은 것 없다네.
모든 의심 끊어버렸으므로
이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 받아들여서
불도(佛道)에 머물게 하고
성인의 궤도에 오르게 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공하여 세계 없음을 밝게 깨닫고
중생의 세계도 평등하다는 것 알며
멀리 모든 집착과 생각 여의면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일체 세계를 밝게 깨달으면
법계 또한 이와 같나니
중생은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아 알면
이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중생의 세계를 깨닫고 나면
허공과 같아 생각할 것 없네.
모든 법 이와 같음을 아니
그런 까닭에 여기에 오지 않느니라.
그 사람은 무심(無心)하여
모든 생각 물리쳐 버렸네.
모든 생각으론 도를 이루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불환(不還)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나는 이런 까닭에
불환(不還:
阿那含)에 대하여 찬탄하여 말하였나니
모든 것은 영원히 오지 않고
부처님의 도에 머무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런 까닭에 여래(如來)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께서 보살에게 불환에 대하여 찬탄해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훌륭한 방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라.
8. 무착품(無着品)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무엇 때문에 여래께서는 보살에게 무착(無着:
阿羅漢)에 대하여 찬탄하시고 훌륭하게 여기셨는가?
이 보살은 모든 행업[行]을 소멸하고,
살고 있는 국토에서 떠나며,
모든 부처님께 의지하지 않고 중생들을 해탈시키느니라.
조작함도 없고 번뇌[塵勞]의 때[垢]와 괴로움ㆍ즐거움도 없으며,
색욕(色欲)을 멸하여 없애고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는 까닭에 무착(無着:
阿羅漢)이라고 하느니라.
중생은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욕애(欲埃)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탐내지 않음이 이와 같기 때문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침범함과 속임을 버리고 처소에 머무는 일도 없으며,
모든 법은 공(空)한 것이어서 적정(寂靜)하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모든 생각을 익히지 않아서 여러 가지 생각이 안정되면 모든 생각이 소멸되고 중생이라고 헤아리지도 않아 집착하는 바를 소멸하며,
모든 법은 공한 것임을 지혜로써 깨달아 집착하는 일이 없고 부처님의 도는 생각할 것이 없다고 알며 불호(不怙:
菩提)를 원만하게 성취하면 그것을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전적(典籍:
菩提法)을 연설하여 갖가지 번뇌[瑕]를 파괴하며,
과거 세계의 등정각(等正覺)의 가르침과 미래ㆍ현재의 부처님 가르침을 찬탄하고 방일하지 않고 청정하여 더러운 때를 여의며,
오직 조용하고 고요[寂然]함을 논하는 까닭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보살대사(菩薩大士)가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고 교화하여 부처님 도에 머물게 하고 성인의 길을 구하게 하며,
모든 법에 대하여 흠모하여 집착함이 없게 하고 자비한 마음 원만하게 갖추며 부처님 같은 어짊을 시행하게 하여 영원히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게 하나니 그의 자비가 이와 같은 까닭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중생을 교화하여 성취시키되 중생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며,
끝내는 큰 자비로써 집착하여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밝게 깨달았기 때문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은혜를 베풀고 도법(道法)을 보되 법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나니,
이와 같이 끊어 없애는 까닭에 무착이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깨달음의 힘[覺力]을 찬양(讚揚)하여 원수(願數)가 있음을 헤아려 머무름 없음을 획득하고 모든 감관을 뽑아 제거하며,
중생을 교화하여 청정한 법을 깨닫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도의(道義:
菩提)를 성취하게 하여 영원히 의지하지 않게 하는 까닭에 불착(不着:
阿羅漢)이라고 말하느니라.
의지할 것이 없는 처소를 보고 탐하지 않는 몸을 만들며,
온갖 물질에 대하여 의지하지 않고 중생의 모임을 구하되 온갖 물질을 훼손하지 않으며,
유위법(有爲法)은 이와 같이 근본이 없음을 강설하는 까닭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노닐지만 가더라도 이를 곳이 없고 본말(本末)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부처님의 거룩하고 존경스런 모습을 보고 도를 깨달았으나 적멸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의지할 곳이 있지도 않나니 이와 같은 국토를 건립하여 한량없는 국토에 이 모든 나라가 평등하며,
세계에 대하여 조롱하거나 희롱하지도 않고 청정하되 만족하게 여기지 않으며,
복덕의 경지에 머물되 공(空)하여 모든 국토는 없다고 생각하느니라.
물러남이 없는 경지요 여인도 없으며,
모든 번뇌와 수면(睡眠)의 의지를 놓아 버리며,
부처님의 거룩한 국토를 증득하고 음개(陰蓋)의 국토를 없애며,
마군과 그 권속을 항복받고 모든 원수와 적(敵)을 제거하며,
조용하고 고요한 국토에 들어가 감동을 일으켜 변화시키며,
서원이 있는 나라를 세워 나라와 중생을 구원하느니라.
보살은 부처님의 위엄과 광명을 원만히 갖추고 머무름이 없는 곳에 머물며,
부처님의 의지를 깨달아 획득하고 청정한 법인(法印)으로 중생을 인가하며,
많은 국가를 안락하게 하고 일체의 영락(瓔珞)같은 보배로 장식하는 일과 수많은 번뇌의 티끌을 제거해 버리나니,
이는 최후의 경지인 작용이 없는 지위[無爲地]에 머무는 이로서 모든 중생들 가운데 가장 존귀하니라.
이와 같은 형상과 미묘한 부처님께서 머무는 곳을 성취하면 모든 법은 공(空)한 것임을 깨달아 도행(道行)을 구족(具足)하는 까닭에 무착(無着:
阿羅漢)이라고 말하느니라.
온갖 즐거움을 다 떨쳐버리고 모든 감관[根]에 대하여 옳게 여기지 않으며,
일체의 법에 대하여 성내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적멸하고 평등한 수레를 타면 그것이 곧 부처님의 지혜이니,
몸과 입과 뜻으로 다함께 최상의 적멸한 경지를 닦으며,
성인의 도를 흠모하여 구하면서도 그 궤적(軌跡)에 집착하지 않으며,
중생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고 모든 중생들을 자비로 불쌍히 여기고 마음이란 없는 것이요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무수히 많은 백천억의 중생들에게 권유하고 그들을 교화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큰 도를 머물게 하며,
우매한 중생들을 인도하고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불법을 생각하고 모든 중생은 평등한 것임을 깨닫게 하느니라.
수없이 많은 대중을 인도하여 이롭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보리의 마음을 내어 등륜(等倫:
이와 비교하여 동등한 것)이 없는 데 머물게 하며,
모든 법은 평등하고 공하여 특별히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 본래 공한 것이요,
지혜도 또한 평등하다고 생각하게 하여 그 생각이 없는 데에 머물게 하느니라.
아라한이 이와 같이 의지할 대상이 없음을 이미 알고 난 뒤에 이와 같이 그 중생들의 반응에 따라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되 모든 이익을 흠모하지 않고 경적(經籍)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감관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여의고 이와 같은 법을 강론하되 영원히 말이 없으며,
여러 곳에서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되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도 없으며,
중생들을 구원하여 모든 집착을 끊게 하고 몸을 탐하는 생각을 면하게 하고 교만을 초월하게 하며,
모든 법은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되는 것도 아님을 알게 하느니라.
중생들이 온갖 물질의 모양에 집착하면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물질ㆍ아프고 가려운 느낌[痛痒:
受]ㆍ고정관념[思想:
想]ㆍ나고 죽는 행업[生死:
行]ㆍ인식작용을 무너뜨리지 않게 하고 범부를 동요하지 않으면서 해탈케 하여 불법에 머물게 하되 도적(道迹)에 집착하지 않게 하느니라.
의지하지 않도록 교화하여 정진에 힘쓰게 하고 이로움으로 인도하여 의지하게 하되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하며,
힘써 구제하고 권유하여 보살의 마음을 내게 하느니라.
집착함이 없는 마음을 넓히고 도에 인연 있는 이를 구원하며 온갖 혼란한 생각과 어리석고 속이는 마음을 여의게 하며 삼매(三昧)를 원만히 갖추고 정의(定意)을 성취하게 하여 갖가지 생각을 품지 않게 하느니라.
삿된 지혜를 없애서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지혜를 깨닫게 하며 성문의 마음을 일으켜 삿된 길[反迹]을 사모하는 이를 교화하고 부모ㆍ처자ㆍ사택(舍宅)ㆍ형제ㆍ자매를 의지하여 은애(恩愛)를 일으키지 않게 하며,
국토와 재색(財色)ㆍ온갖 물질[萬物]에 집착하여 탐구(探究)하는 생각과 번뇌[塵勞]에 전도된 이를 제도하느니라.
온갖 물질에 집착하는 모든 중생을 인도하고 교화하여 집을 떠나서 적정(寂定)을 닦게 하고 게으름과 하열한 따위의 모든 모습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국토에 들어가서 욕망과 번뇌의 법으로부터 해탈케 하느니라.
도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고 두 가지 마음을 갖지 않게 하니,
일찍이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 곧 무위법(無爲法)이요 생사법(生死法)이니라.
아무런 인연할 것 없는데 인연하고 세속의 마음을 도의 뜻이라 하며 보호하여 금지하는 계율을 범하는 이러한 무리들을 인도하여 교화하고,
두 가지 모양이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이들로 하여금 그런 마음이 없도록 하며,
모든 근본에서 해탈시키기 때문에 무착(無着:
阿羅漢)이라고 말하느니라.
중우(衆祐)와 현성(賢聖)께서는 정진(精進)을 게을리 하고 남자와 여인(女人)으로서 미련하고 총명한 이와 밝고 성스러우며 어둡고 막힌 이러한 이들을 모두 인도하여 이롭게 하고 두 가지 마음을 가지지 않게 하며,
중생들을 구원하여 전진시키기 때문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이 모든 보살은 물러남이 없는 마음을 성취하여 혹 수기[別]를 받더라도 또한 거기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이 모든 보살은 도에 가깝거나 멀거나 간에 이 뜻을 분별해 알아서 두 가지 생각을 내지 않고 성현의 길을 체득하느니라.
다른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반니원(般泥洹:
般涅槃)에 이르며,
모든 망상을 여의고 의지하지 않으며,
이 모든 법을 인연해서 중생을 인도하여 교화하고,
이와 같은 자연의 법칙으로 모든 법을 깨달아 알며,
근본이 없는 법을 연설하는 까닭에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모든 행업 없애고
존중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하며
모든 말과 가르침 다 버리면
그런 까닭에 무착(無着:
阿羅漢)이라 하느니라.
모든 진애(塵埃) 뽑아버리고
괴로움과 걱정에서 벗어나며
중생들을 구제하므로
이를 이름하여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살펴보면 중생도 얻을 수 없는 것이요
욕망과 때[垢:
번뇌]도 또한 그러하며
모든 법도 다 얻을 수 없으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수많은 뒤바뀐 생각 제거하고
마음 다져 의혹 없는 곳에 머물며
모든 법이 공(空)한 것임을 분별해 아니
그러므로 무착이라 하느니라.
공의 이치 깨달아 알아서
모든 생각과 집착 없으며
일체의 뒤바뀐 견해 제거해버리면
이를 이름하여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생각 다 없애고
중생이라는 생각과 악한 생각까지도 소멸하여
마음 속에 삿되고 혼란함이 없으면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공한 이치 깨달아 의지하지 않으니
부처님의 도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것
더더욱 힘써 크게 정진하나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경(經)의 인연을 강설하고
담담하고 고요하여 조롱하고 희롱함이 없으며
중생들을 권유하여 도덕 세우면
이것을 이름하여 무착이라 하느니라.
참된 사람 자비를 수행하여
모든 중생들을 안락하게 하되
중생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깨달아 알면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본래 없는 것인 경적(經籍) 강설하여
중생들에게 은혜 베풀면서도
일찍이 중생이란 생각 하지 않으면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바르고 진실한 근(根)ㆍ역(力)ㆍ각(覺)에 대하여
중생을 위해 밝게 설법해주고
스스로도 이런 지혜 체득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중생들이 적정(寂定) 깨달아
청정한 법으로 보리[道] 이루고
큰 성인의 가르침을 강설하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모든 물질 믿지 않고
눈 앞에 나타난 물체를 보되
일체는 허공과 같아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알면
이것을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부처님 국토에 의지하지 않고
국토에 있을 적엔 인의(仁義) 행하며
평등한 깨달음에 머물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강설하느니라.
진인(眞人)의 바른 가르침 깨달아
볼 게 없음을 관찰하고
성현의 깨달음 자세히 살피면
이것을 무착(無着:
阿羅漢)이라고 하느니라.
자연 그대로의 국토를 성취하고
지금 나를 증득하여 깨달으면
최후의 경지엔 본래 비롯함도 없나니
이것을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알음알이 제거해 버리고
마음 속에 성냄과 해칠 생각 없어서
응진(應眞:
阿羅漢)과 같아 한스러움 없으면
적연한 도[寂然道:
菩提道)를 닦아 성취하리라.
마음 정해져서 멸하지 않고
고요한 데 머물러 일으킴 없으며
도를 생각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하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인물(人物)에 대하여 더하거나 동요치 않고
중생의 세계에 대해서도 이와 같으며
수많은 중생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알아
그들을 교화하여 도의 이치에 머물게 하네.
중생과 보리의
영원히 생각 없는 데 머물러서
밝은 지혜로 헤아려 평등한 줄 알면
이것을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평등하여 다른 형상 없으며
모든 법 또한 이와 같나니
마음에 진정 이와 같은 도 깨달으면
그런 까닭에 생각이 없다 말하네.
이른 바 응진(應眞:
阿羅漢)이란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중생들 위해 밝게 분별하여 깨우쳐 주되
모든 법 고요하여 의지할 게 없다 말하네.
중생 위해 법의 이치 설하되
비록 말은 하나 가르침 없으니
널리 한량없는 중생 제도해도
중생 보고 동요하지 않느니라.
중생이라 해도 얻을 수 없는 것
모든 중생의 집착을 끊어주네.
중생 건져 사견(邪見)을 여의게 하고
모든 중생을 고뇌(苦惱)에서 건져주네.
모든 법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머무르는 처소도 없고 소멸함도 없네.
중생의 모든 생각 관찰하여
중생들을 곤액(困厄)에서 해탈케 하느니라.
모든 물질은 늘어나거나 무너지지도 않고
아프고 가려운 느낌도 이와 같으며
고정관념과 인식작용ㆍ나고 죽는 행업에서
제도하는 것도 다름이 없느니라.
현성(賢聖)의 법에도 동요하지 않고
범부(凡夫)에 대해서도 또한 이와 같으니
부처님 이치에 머물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착의 경지에 이르게 하느니라.
중생들은 과보(果報)에 대한 생각과
연각(緣覺)의 생각을 품고 있으므로
이 생각 초월하여 각의(覺意)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을 위하여 이 법 설하였다네.
도심(道心)을 일으켜
언제나 보시를 의지하며
지계와 인욕도 이와 같이 하므로
그런 까닭에 의지할 대상 아님을 강설했느니라.
뒤바뀐 견해 깨달아
정진하여 닦고 익혀서
이러한 모든 생각 끊어 없애니,
그런 까닭에 법에 집착하지 말라고 설하느니라.
도의(道意)3)의 생각 내거나
삿된 지혜 만약 밝아지면
여기에 의지하지 않으리니
그런 까닭에 집착 없는 법을 설하느니라.
이 법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약간의 그 무엇도 없음을 깨달아서
이와 같은 법 설하나니
그런 까닭에 무착(無着:
阿羅漢)이라고 하느니라.
스스로 자신의 몸 헤아리므로
성문은 이런 생각 많이 하나니
이러한 생각 제거하면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법에 대해 생각함 없고
약간의 그 무엇 없음을 깨달아서
이 근본 없음을 연설하나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고 하느니라.
부모와 형제와 아들은
공적(空寂)한 것이건만 있는 것이라 집착하며
나고 죽은 행업을 인정하니
부처님도 이룰 수 없느니라.
아내와 자매(姉妹)를 사모하여
의지한 채 허망함에 쏠리므로
이를 의지해선 안 된다고 설하나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나고 죽는 일 만들어 내고
친족에 대한 생각 일으키며
인연 따라 정욕(情欲)을 내어
나의 오랜 벗이라 하네.
스스로 제 몸을 나라고 인정하면서
숱한 모든 일에 마음 끄달려
분별심 일으키다가 뒤바뀐 생각에 떨어지나니
기필코 마군의 가르침에 머물게 되리.
나고 죽는 행업과
시종(始終)의 재앙과 환란 다 버리고
니원(泥洹:
涅槃)의 덕 찬양하나니
그런 까닭에 무착을 칭찬하여 설하느니라.
번뇌의 때에 대한 법과
흥망성쇠와 다툼을 강설하지만
이 모두는 말소리에 불과할 뿐이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중생들은 대부분 이익 다투고
방일하며 온갖 물질 탐하나니
이러한 중생들 구제하려는 까닭에
집착 없는 법을 설하느니라.
집을 연모하면서도
마음으론 도 배울 생각 내나니
미련하고 아둔한 생각 이와 같기에
무착을 드러내어 찬양하였네.
오직 비천(卑賤)한 법만 보면서
참되고 오묘한 진리는 보지 않으며
갖가지 생각 살피지 않나니
그런 까닭에 해탈시켜 무착의 경지에 이르게 하네.
범부의 이치 제거해버리고
오로지 불법만을 흠모하여 정진하면서
중생들의 탐욕을 뽑아 없애니
그런 까닭에 무착이라 하느니라.
만약 선악의 행업을 보고도
이와 같이 많은 법에 집착하나니
한량없는 중생들 이렇기 때문에
구원하여 무착의 경지에 이르게 하네.
모든 훌륭한 상호 갖추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정진하면서
이와 같은 모양에 집착하지만
어진 이는 여기에서 해탈하였네.
모든 부처님의 국토 장엄하고서
존상(尊上)의 법 성취하고는
바른 깨달음의 이익에 의지하나니
해탈하여 무착의 경지에 이르렀네.
무위법(無爲法)의 이치
얻었건 얻지 못했건 간에
이것은 성인의 도를 수행함이니
바른 서원 세울 수 있느니라.
계를 지키지 못하느니 범하지 않느니 하거나
방일하느니 지혜롭느니 하면서
어둡고 캄캄하고 연약한 사람이
문득 이 세 가지 일에 집착하느니라.
중생들 이런 모습에 집착하여
모든 생각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니
약간의 생각이라도 덜어 없애야 하므로
그런 까닭에 집착 없는 법을 설하느니라.
거룩하고 많은 복전도 생각하고
또한 덕이 없다는 생각도 내어
범인(凡人)의 법을 분별하나니
그런 까닭에 집착 없는 법을 설하느니라
이와 같은 행업 지어서
남자다 여자다 분별하거나
현성(賢聖)이니 범부(凡夫)니 하고 분별하면
이것은 곧 두 가지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중생들이 이 두 가지 일을 일으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행위로서
이 두 가지 사이에 의지하는 까닭에
해탈시켜 무착의 경지에 이르게 하느니라.
흔들림에 이르러서도 물러남이 없고
조작하면서도 짓는 일 없으니
성인의 도에 가까워지게 하려고
이런 마음 일으켜 이런 생각 하게 하였네.
큰 도를 획득하고서
더 이상 없앨 것 없다는 마음 내지 않네.
마음 속에 항상 이런 생각 품고서
무위(無爲)의 도를 구하느니라.
그들은 중생을 받아들이니
어진 사람이 우매한 중생을 염려하네.
이런 까닭에 무착이라 말하나니
모든 형상을 구하는 중생 제도한다네.
이것은 곧 보살법이니
아라한의 몸으로 나타나되
그런 인해 법인(法忍)4)을 일으키지 않으며
스스로 무착이라고 말하느니라.
아라한의 법 강설하나니
이것은 마땅히 보살이 하는 일
집착 없는 법에 머물면서
최상의 도[無上道]를 증득한다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보살로서 무착행을 하는 일에 대하여 찬탄하셨으니 이것이 곧 훌륭한 방편임을 마땅히 알아야만 하느니라.”
9. 성문품(聲聞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에 여래께서 보살이 성문(聲聞)이 되는 것을 빛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보살대사(菩薩大士)는 수없이 많아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을 인도하고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불법(佛法)을 듣고 경적(經籍)을 분별하게 하기 때문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성현의 도에 대해 듣고 나서 청정하여 방일(放逸)하지 않게 하는 까닭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무위(無爲)의 법을 듣고 편안해 하며 감로(甘露)를 즐기며 근(根)ㆍ역(力)ㆍ각의(覺意)ㆍ의지(意止)ㆍ의단(意斷) 등 이러한 일들을 원만하게 갖추어 빠르게 도혜(道慧)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공혜(空慧)를 증득하여 이 몸은 견고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지만 어둡고 우매한 사람들은 꽉 막혀 깨닫지 못하느니라.
왜냐 하면 그들은 자신의 몸을 탐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법의 경계[入]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색(色)이라 한다는,
이런 이치를 뚜렷이 관찰하게 하여 불안(佛眼)을 성취하게 하나니,
그 눈은 널리 불가사의한 경계를 보게 되리라.
눈에 의지하는 대상을 여의면 끝내는 이 눈을 일체법을 성취한 눈이라고 하리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이 모든 법을 헤아리되 소리는 마치 메아리와 같은 것임을 깨닫게 하여 음성에 집착하지 않게 하고 말한 이도 없고 또한 들은 이도 없으며,
냄새에 대해 냄새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냄새를 맡지도 않나니,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갖가지 냄새를 맡았지만 이 일을 다시 헤아려 보면 아무런 냄새도 맡지 않은 것과 같나니,
이는 바로 사물에 미혹5)되어 그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러한 모든 냄새를 중생들이 맡은 것은,
비유하면 마치 꿈 속의 일과 같아서 견고(堅固)한 것이 아니니라.
이러한 음성을 깨달아 알면 이것을 곧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혀에 대한 맛에 있어서도 그 맛 또한 공한 것이니,
마치 고깃덩이가 혀가 된 것과 같아서 혹 지혜로운 이는 이를 깨달아 맛에 미혹되지 않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거품 덩어리와 같아서 모든 논리에서 벗어나므로 비유할 수도 없느니라.
지혜가 밝은 이는 이를 관찰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아느니라.
만약 이러한 맛에 대하여 집착하고 생각하는 이는 악한 죄를 짓게 되나니,
여섯 경계를 생각하여 맛에 대한 분별심을 내지 말라.
마음으로 이러한 이치를 깨달아서 생각이 방일하지 않아야 하리니,
만일 이런 이치를 알아서 마음으로 작용이 없음을 생각하며 각각 분별하여 들은 이치를 말하거니와 그 듣는 것까지도 공한 것임을 알면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저 모든 경계[入]의 일들을 밝게 깨달아서 그 들음이 공한 것임을 알고 몸도 스스로 조용하고 고요한 것임을 깨달아 일찍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일어나는 바를 알지도 못하니,
생겨나는 것도 없고 생겨나지도 않는 것을 성인의 도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또한 듣는 것도 모두 존재하는 것이 없으니,
이 몸은 자연 그대로일 뿐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는 것도 아님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보시(布施)에 대하여 듣고 은혜로써 그 법을 행하는 것이 불가사의하니,
부처님께서도 이 길을 따라서 부처님의 도를 성취하셨느니라.
마음에 보시하는 바가 있으되 그 마음을 보지 않으며 의지(意志) 없음으로써 성인의 지혜를 체득하나니,
왜냐 하면 종자를 심어서 반드시 그 열매를 얻는다지만 그 과실은 또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과보를 설하는 소리에 불과할 뿐이며,
의식(衣食)의 보시에 대하여 듣고 물질의 보시에 대하여 헤아려 보면 그 보시는 가장 엷을 뿐이기 때문이니라.
모든 희사[捨] 가운데 법시(法施)가 가장 존귀하니,
탐하거나 애석하게 여기지도 말고 보시한다는 생각도 내지 말아야 하느니라.
비록 베푸는 것이 있을지라도 바라는 것이 있어서도 안 되나니,
비유하면 마치 환술로 만든 사람은 마음과 뜻이 없어서 아무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느니라.
수행하여 성취하고자 하면 보시를 한다는 생각은 없어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보시를 하고도 희망하는 것이 없으면 도를 수행함이 순조롭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모든 음성과 일체의 진애(塵埃)를 여의고 전혀 듣는 것도 없으며 모든 유위법을 여의나니,
음성으로써 불법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니라.
모든 음성을 분별하고도 의지하지 않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두 가지 일이 음성을 낼 때 비록 두 가지 일이 있으나 아무것도 존재함이 없으며,
인연이 합해져서 두 가지 일이 있는 것이지만 사람이 법음을 이루는 까닭에 성문이라고 말하느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무앙수(無央數)의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무념법(無念法) 듣도록 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성문(聲聞)이라 말하거니와
이는 곧 용맹한 보살이니라.
적정(寂定:
菩提)의 도 듣고
편안해 하고 방일(放逸)하지 않으며
한량없는 중생들이 법을 듣게 하나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 하느니라.
담박(澹泊)하고 안온(安穩)함을 듣고
모든 즐거움은 형상이 없다 하나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 하거니와
조용하고 고요하여 작용 없는[無爲] 경지에 이르네.
각(覺)ㆍ근(根)ㆍ역(力)의 법 듣고
의지(意止)와 의단(意斷)을 원만히 갖추어
스스로 최후의 경지 이루나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 하느니라.
이 몸은 공한 것으로
얻을 수도 없고 견고하지도 않다는 말 듣고도
어리석고 둔한 사람은 집착하나니
그런 까닭에 이 몸에 대하여 밝게 알아야 하리라.
눈으로 보는 것도 없나니
듣지 못함도 이와 같건만
중생들은 보는 바의 침범을 받아
어둡고 막혀 깨달아 알지 못하네.
만약 불안(佛眼)을 성취하면
평등한 눈6) 불가사의하니
본래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으면
어둡고 우매한 모든 중생 개화할 수 있으리라.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 경(經)전 듣고서
모든 법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깨달으니
이런 까닭으로 명호(名號)를 얻었기에
그 이름 성문이라 하느니라.
저 듣고 받아들임 없는 이치가
메아리와 같음을 깨달으면
말하는 이도 볼 수 없고
듣는 이도 없음을 알리라.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 이름하나니
중생들로 하여금 듣고 받아들이게 하지만
근본을 헤아려 보면 듣는 것도 없나니
음성에 미혹되지 말아야 하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사람이 꿈 속에서
갖가지 향 냄새 맡았지만
황홀하여 얻을 수 없거늘
공한 냄새에 빠진 것과 같느니라.
냄새에 대하여 이와 같이 깨달아
일찍이 냄새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거늘
한량없는 사람들이 그 뜻을 잃어버렸으므로
보살이 그들을 인도하여 깨우쳐 주느니라.
혀를 살펴보아도 의지할 대상 아니니
고깃덩이론 맛을 모르기 때문이네.
가령 고깃덩이가 단맛 안다면
혀도 마땅히 그것을 인식해야만 하리라.
이 모든 생각은 의지할 게 없으니
좋은 것 생각하면 흉하고 위험하리.
여섯 가지 경계 생각하면 안 되나니
모든 맛의 종류 깨달아 알아야 하네.
보살은 매우 용맹스러워
눈으로 보고 분별하여 알며
들음으로 인하여 이룩하나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 하느니라.
스스로 제 몸을 분별해서
이 몸은 자연 그대로 공한 것임을 아나니
이것이 정녕 허무한 것임을 깨달아 알면
나지도 않고 생기게 하는 이도 없음을 알리라.
만약 일으킴이 없으면
이것은 곧 성현의 도 아는 것이니
중생들로 하여금 법을 듣게 하므로
이것을 성문이라고 하느니라.
마음 헤아려보면 본래 청정하여
형체도 없고 얻을 수도 없는 것
이것을 중생이라 말하지 말라.
그 이치 깨달으면 성문인 것을.
마치 요술로 만들어낸 것과 같아
멸하여 없어지면 또한 공한 것
만약 갖가지 모습7)을 보고
깨달아 알면 성문이라 하느니라.
또 보시법에 대하여 듣게 하나니
법시(法施)는 생각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며
이 법은 곧 성인의 길이라서
그대로 따르면 불도(佛道)를 이루리라.
그 본래의 종자 따라서
열매를 얻음도 이와 같으니
보시는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무념대로(無念大道)를 성취하리라.
의식(衣食)을 보시함은 그 복이 엷고
법시만이 가장 뛰어나니
버리되 마음으로 애석해 하지 않으면
이것을 성혜도(聖慧塗:
菩提道)라 하느니라.
생각 없는 마음 키우고
보시하되 집착하지 않으며
이렇게 은혜를 베푸는 이는
빠른 시간에 부처님 도 성취하리라.
모든 분별심(分別心) 다 버리면
귀에 들리는 것도 없을 것이요
합해져서 이룩된 모든 물질에서 벗어나리니
그런 까닭에 성문이라 하느니라.
부름으로 인하여 메아리 생겨나니
그 음성에 집착하지 않으면
중생들 가운데 거룩하고 높은 이 되며
더없이 훌륭한 불법 되리라.
모든 중생으로 소리 듣지 않게 하고
일체 것에 의지하지 않게 하며
두 법도 아니요 약간의 그 무엇도 없음을
드러내 설법하면 성문이라 하느니라.
수많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
그들로 하여금 그 설법 듣게 하여
듣는 것이 메아리와 같음을 깨닫게 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부처님 도 성취하리라.
모든 부처님 국토를 돌아다니면서
듣는 것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평등각(平等覺:
佛) 계신 곳 따라
최상이신 세존을 가까이에서 섬기라.
삼천세계에 들리게 하고
머무는 곳 허공 같으니
중생을 헤아려보면 적멸의 경지에 머문 것과 같고
니원(泥洹:
涅槃)의 형체 없음과 같네.
세상 사람은 생각에 집착하고
4대(大:
地ㆍ水ㆍ風)에 집착하여 의지하지만
그것은 허공일 뿐
니원과 상념(想念)은 다름 없다네.
모든 종자 이와 같음을 알아
견고한 것이라 생각지 말라.
나고 죽음이 본래 없는 것
번뇌[塵勞]도 멸하여 없앨 것 없네.
온갖 물질은 최후의 경지 아니요
중생을 살펴보아도 얻을 수 없나니
이 모든 법은 적연(寂然)한 것으로
중생계는 볼 수 있는 것 아니네.
중생들로 하여금 이 법을 듣게 하여
밤낮으로 그와 같이 수행하게 하면
그들은 온갖 생각 일으키지 않을 것이요
나는 모든 사람 교화하여 듣게 하리라.
중생들로 하여금 이 법을 듣게 하면
그와 같은 사람은 제자 되리라.
들은 법도 들을 대상이 없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성문을 찬탄하였느니라.
웅인(雄人:
世尊)께서 지난 일 기억함은
듣고 받아들인 최상의 법이네.
분별없이 경(經) 보아야 하나니
일체법은 일체법 그대로라네.
보살의 설법은 치우침 없어
이 모임의 중생 구제하고자
중생들 위해 설법하나니
이것을 곧 성문이라 하느니라.
무위(無爲)의 경계 강설하여
청정하여 방일(放逸)하지 않게 하며
말없는 법 자세히 살펴보면
불법 또한 그와 같은 것.
법을 관찰함이 멀리 있는 것 아니니
부처님의 강설이 바로 법이요
저 법 또한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의지할 것도 없느니라.
그런 까닭에 제자에게 강론하여
설법 듣고 이 가르침 따르게 하며
모든 중생에게 권유하고 교화하여
이 설법 듣게 하여라.
이런 까닭에 아난아,
성문의 교화를 강설했으니
임시로 이름 붙여 제자라 하지만
그는 곧 보살대사(菩薩大士)이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보살을 성문(聲聞)이라 찬탄해 말씀하셨으니,
이 이치도 훌륭한 방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10. 연각품(緣覺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에 여래께서는 보살이 연각(緣覺)이라는 것을 선설하셨는가?
이에 보살이 모든 법을 보나니,
무엇을 법을 본다고 말하는가?
모든 법은 공한 것이어서 형상이 없으므로 무너지지 않으며 현재에도 법이 소멸되지 않는 이치를 관찰하여 깨달았으므로 연각이라고 말하느니라.
모든 부처님의 경적(經籍:
法)은 불가사의하나 모든 중생들이 다 니원(泥洹:
涅槃)과 같아서 안과 밖도 없고 또한 얻을 수도 없으며,
모든 법은 생겨나거나 소멸되는 것도 아니라고 밝게 깨달아 아느니라.
중생의 본제(本際)는 곧 니원이요 본래 청정하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다만 말에 집착하는 것일 뿐,
모든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어서 법을 체득할 수도 없으니 이름지어 부르기는 하지만 말로는 통하게 할 수 없느니라.
왜냐 하면 그 말이란 곧 공한 곳이어서 입으로 지껄이기는 하거니와 이미 없는 것을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니라.
모든 법의 본제(本際)가 곧 부처님의 도이므로 분별할 수 없으니,
이렇게 관찰하기 때문에 연각이라고 말하느니라.
스스로 색음(色陰)을 살펴보아도 그것은 다만 소리일 뿐이요,
이 색음에 대하여 그 물질이 생겨나는 것인가 살펴보지만 그것도 오직 이름을 뿐이니,
말과 음성을 여의고 나면 색음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느니라.
저 색음은 몸이 아니요 나도 아니니,
왜냐 하면 입으로 이름을 지어 부르고는 있지만 그 말도 또한 공한 것이요 생겨나거나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며 말이란 자연 그대로일 따름이다.
나에 대해서도 집착해서는 안 되니 또한 영구히 보존 할 수도 없는 것인데 더구나 입으로 내뱉는 말이겠느냐?
눈으로 색음(色陰)을 봄으로 인하여 아프고 가려운 수음(受陰)이 일어나거니와 아프고 가려운 수음이 소멸하고 나면 그 이름조차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니,
입으로 말하는 것을 따라서 아프고 가려운 수음이라 이름하지만 아프고 가려운 수음은 내 몸도 아니고 나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이른바 아프고 가려운 수음이라고 하는 그 말조차도 공한 것이어서 생겨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몸에 집착해서도 안 되니 또한 머무를 곳도 없거늘 더구나 말이겠느냐?
아프고 가려운 수음에 대하여 깨닫고 나서 상음(想陰)을 관찰하면 상음은 적멸한 것이어서 고정관념이 생길 수 없으니,
상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이름일 뿐이요 몸도 아니고 나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입으로 상음이라고 말하지만 그 말조차도 공한 것이어서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 것을 말로 분별할 따름이니라.
자연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마음에 새겨두는 것도 없어야 하거늘 더구나 말이겠는가?
상음에 대하여 관찰하고 나면 나고 죽는 행음(行陰)도 소멸하리니,
행음은 나고 죽는 행업이 없어서 이른바 내 몸도 아니요 나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행음이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그 말조차도 공한 것이어서 생겨나거나 소멸하는 것도 아닌데 다만 말에 집착할 뿐이기 때문이니라.
오래도록 보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늘 더구나 입으로 내뱉는 말이겠느냐?
행음을 관찰하고 나면 식음(識陰)이 있으니,
설령 식음이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담연(湛然)하고 적멸(寂滅)한 것이어서,
곧 이 식음은 다만 음(陰)이라는 소리일 뿐이니라.
왜냐 하면 식음이라고 이름지어 부르는 것도 곧 공(空)할 뿐이어서 생겨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것이니라.
그 말은 자연 그대로여서 머물러 그침이 없거늘 더구나 언설(言說)이겠느냐?
이 5온(陰)은 모두 존재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니,
본래 없는 이치를 분별해 깨달았으므로 연각이라고 말하느니라.
왜냐 하면 이 입으로 말하는 것들은 모두가 인연을 상대해서 이루어진 것이니 인연이 없으면 연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원인을 강설하는 그 말도 말할 것이 없으니,
5음(陰)의 일이 여기에서 집착함이 영원히 다 없어져서 갖가지 인(因)을 짓지 않기 때문에 연각이라고 말하느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눈앞의 모든 법을 보고
모두가 공한 것임을 분별해 알면
모든 물질에 집착하지 않으리니
최후의 경지엔 아무 모양도 없기 때문이니라.
현전한 이 법을 관찰하여서
공하여 자연 그대로임을 깨달았네.
이것은 담박(澹泊)한 것이어서
그 근원(根源)을 얻을 수 없음을 분별하여 깨달았네.
현전한 법에서 이 이치 획득하여
5음(陰)도 이와 같음을 깨우쳤으니
그것은 곧 평등한 깨달음이요
생각으론 알 수 없는 연각이라네.
중생은 다8) 작용 없으니
그 마음 얻을 수 없고.
본제(本際)도 일어남이 없어
청정하여 없는 모습 무사의(無思議:
不思議)하네.
일체 중생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사라짐도 없음을 관찰했으니
모든 법이 동요하거나 일어남이 없으면
이것을 무위(無爲)라 말하느니라.
중생은 모두 니원(泥洹)과 같아
나아갈 바를 성찰(省察)해 보면
중생 없음이 마치 그림자 같아
그런 까닭에 무위라 하느니라.
이 명칭 쓰지 않아야 하니
중생이 곧 니원이어서
생겨나지도 않으며 소멸되는 것도 없는데
다만 입으로 찬탄하여 말할 뿐이네.
감히 말조차도 모두 공(空)한 것이건만
중생들은 말이 공한 줄 알지 못하네.
이런 까닭에 중생들 위해
니원(泥洹:
涅槃)법을 설하여 나타냈네.
입으로 내는 모든 말은 거짓이어서
처소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네.
입으로써 훈계하는 말
근본을 구해봐도 얻을 수 없네.
음(陰)이란 본제(本際)가 없으니
말로는 나타낼 수 없네.
모든 음성으로 일컫는 말
중생들은 또한 생각할 수 없으리라.
중생과 열반과
본무(本無)와 시제(始際)에 대해
편안함을 얻어 방일함이 없으면
구제받아 돌아갈 곳 있으리라.
본래 청정하건만 메아리에 집착하나니
중생도 또한 그러하다네.
형체가 없어 공하고 고요하니
본래 청정한 것 마음으론 생각할 수 없네.
법의 근본이 이와 같은데
거짓으로 이름붙여 찬양하나니
그 근원 얻을 수 없어
그런 까닭에 언설(言說) 생겼네.
아첨하는 일로서
분별해 알지 못하니
그 실제는 공하여 없는 것
중생의 근본 깨달았다네.
그 말은 강설(講說)에 의지하지 않나니
말로는 나타낼 수 없고
모든 중생들도 이와 같나니
중생의 본제(本際)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리.
음(陰)이라고 하는 것도 공한 것
언성(言聲)으론 분별할 수 없나니
그 언설도 또한 이와 같으며
본제[際]도 역시 그러하니라.
저 본제(本際) 없음도 이와 같아서
깨닫고 나면 생각할 게 없나니
이것이 곧 평등한 도로서
연각(緣覺)의 무사의(無思議:
不思議)라네.
본래의 색음 깨닫고 보면
이 음(陰)은 다만 음성일 뿐이니
이 색음은 적멸(寂滅)한 것이어서
언성조차 있을 수 없네.
자연히 놓아버리면
이것을 형체 없는 것이라 말하리니
나라는 것도 자연 그대로여서
살펴보아도 처한 곳 없네.
말로써 음이라 말하거니와
색음은 본래 몸이 아닐세.
그 음성도 모두 공(空)으로 돌아가나니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소멸되는 것도 아니니라.
입으로 말하는 것은
그 근본 구해봐도 얻을 수 없네.
말이란 어리석음 때문에 생겨나는 것
이를 이름하여 색음이라 하네.
현전한 식음(識陰)을 관찰해보면
모두가 음성일 뿐 존재하는 실체가 없으니
이 음(陰)도 적멸(寂滅)한 것이어서
메아리와 같은 음은 실체가 없네.
여기에서 몸을 멀리 여의어야 하니
여의어야 할 몸은 이른바 나라고 하는 것
헤아려보면 모두가 자연 그대로의 공한 것이어서
일찍이 견고하게 머물지 못하느니라.
입으로 음이라 말하거니와
식음 또한 허공과 같고
입으로 본제를 말하지만 그것도 적멸하여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네.
가령 게송으로 말한 것이라 해도
살펴보면 모두가 본래 없는 것이건만
지혜롭지 못한 이가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색음에 대해 연설하였네.
모든 음은 언설을 여의었나니
한량을 얻을 수 없고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소멸되는 것도 없으며
처소도 없고 결단할 일도 아니라네.
번뇌도 침해할 수 없고
또한 모든 법 조작하지도 않으니
고집할 것도 아니요 버릴 것도 없으며
조롱할 것도 아니요 니원(泥洹:
菩提)도 아니라네.
저것은 적멸(寂滅)도 아니요
볼 것이 있는 것도 아니며
즐겁게 베푸는 것도 아니고 욕애(欲埃)도 아니며
게으름도 아니요 정진도 아니니라.
혼란도 아니요 일심(一心)도 아니며
저것은 또한 지킬 계율도 없네.
성취할 만한 물질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마땅히 가져서 금지하리요.
다섯 가지 세계는 생각할 대상 아니요
생각 없음도 이와 같나니
두려워할 일도 아니요 두려워할 대상도 없고
해탈도 아니요 속박도 아니니라.
비록 강설하더라도 연설한 것이 없는
이것이 색음이 들어갈 곳이며
일체의 법음(法音)도 그러하여
얻을 게 없으니 말에 집착하지 말라.
눈앞에 보이는 것을 체득하고 깨달아
다함이 없는 법 설하였나니
이것으로써 삼매(三昧)를 성취하면
모든 음성에 집착하지 않으리라.
눈으로 보고 스스로 이 이치 분별해 알면
언설이 평등하고 여여하다 말하리니
모든 법 또한 이와 같아
말도 없으며 집착할 것도 아니니라.
인연법을 밝게 깨달은 이는
음성이란 아무런 실체가 없음을 아네.
그런 까닭에 평등도(平等道:
正覺)라 부르나니
이것을 바로 연각(緣覺)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대사(菩薩大士)가 현재 나타나 있는 명(明)과 무명(無明)을 분별하여 알며,
행(行)과 비행(非行),
식(識)과 식이 아닌 것,
색(色)과 색이 아닌 것,
여섯 가지 경계[六入]와 경계가 없는 것,
모든 습(習:
觸)과 습이 아닌 것,
아프고 가려운 느낌[痛痒:
受]과 아프고 가려운 느낌이 아닌 것,
은애(恩愛)와 은애가 아닌 것,
수(受:
取)9)와 사수(捨受),
유(有)와 유가 아닌 것,
생(生)과 생이 아닌 것,
늙고 병들고 죽음의 걱정 등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여서 자세히 살펴보면 본래는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분별하여 알 수 있나니,
이와 같이 관찰하여 깨달았으므로 연각이라고 말하느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현전에 나타나 있는 것이 무혜(無慧:
無明)임을 깨달아
일찍이 의지하지 않았기에 밝아졌네.
형상 있음을 성립(成立)시키지 않음이
마치 물 속에 그림자 같네.
설법 듣고 모든 이치 깨달아
일체의 법에 집착하지 않네.
가령 경(經:
法)에 의지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지혜로운 모습이니라.
명(明)과 몸[身]은 다르지 않나니
모든 법의 모양에 대하여
이런 인연의 이치 깨달아 알면
그런 까닭에 연각이라 하느니라.
몸의 행(行)을 말하지만
그 몸은 조작된 것이 아니니
영원히 안과 밖이 없어서
나고 죽는 몸을 초월하였느니라.
처음과 끝 파초(芭蕉)와 같아
근본도 없고 모양도 없네.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소멸되는 것도 아니니
비유하면 마치 허공과 같느니라.
현전한 법의 이치 깨달아 알면
곧 용맹한 보살이니
그 이름 평등성(平等聖)이라
연각의 무념(無念)과 같느니라.
모든 법을 깨닫고 보면
적멸행[寂行]이 마치 환화(幻化)와 같고
그 식(識)은 자연그대로임을
현전한 법에서 밝게 깨달았으리.
이 마음 홀연히 깨달아
식(識)과 행(行) 여여함을 알았고
말씀하여 나타내 보인 생각 때문에
모든 법이 공한 것임을 분명히 알았네.
식(識)이 그러한 줄 분별하고서
모든 법에 집착하지 말지니
이와 같이 법을 안다면
식 또한 환상(幻相)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되리라.
명색(名色)이라 부르고
몸이라 하는 모든 음성과
갖가지 모양은 공한 것이어서 이룩할 수 없으니
이것을 자연상(自然相)이라 말하네.
마음이 6정(情)에 끄달리지만
환화(幻化)와 같아 말할 수 없네.
말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음성도 아니며
헤아려보면 자연 그대로의 공한 것이네.
구원겁(久遠劫)을 익혀온 탓에
모든 입처(入處)가 생기나니
그것은 분별 때문에 생긴 습(習:
觸)이거니와
자연 그대로여서 공과 같느니라.
습(習)으로 이룩되는 것 다 공한 것이나
생각에 끄달려 갖가지 촉감 일어나니
만일 습이 본래 적연한 것임을 알면
모든 법은 머무르지 않는 것인 줄 알리라.
현전한 습이 자연(自然)인 줄 알고
갖가지 감촉[更:
觸]이 다 적연한 줄 깨달으면
흉한 죄악 일으키지 않으리니
그런 까닭에 연각이라 하네.
모든 아프고 가려운 수음 깨달아
그것이 공하여 본래 청정한 줄 알면
비유하면 생겨났다 바로 없어지는 거품과 같나니
필경(畢竟)10)엔 공하여 형상이 없음을 알리라.
갖가지 은애(恩愛) 끊어버리고
집착 없는 법을 따라서
정욕(情欲)이 이미 다 끊어졌나니
그런 까닭에 연각이라 하네.
느껴도 느끼는 것이 아니요
공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인 줄 알면
형상도 없는데 무엇을 성취하리.
비유하면 마치 아지랑이와 같네.
나라는 생각 일으키지 말라.
몸이 생겨나는 것도 이와 같나니
헤아려보면 본래 저절로 생겨난 것이어서
근본도 없고 형체도 없네.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을 여의면
죽음에 이르러도 두렵지 않고
미래세에 다시는 몸을 받지 않으며
일체가 자재(自在)함을 증득하리라.
현재에 이 지혜 획득하여
영원히 집착하지 않으면
연각이란 소리 듣고
보살행을 닦게 되리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까닭에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보살에게 연각을 찬양하셨으니,
마땅히 이것이 곧 훌륭한 방편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여래께서는 이러한 까닭에 보살대사의 믿음을 지니고 법을 받드는 것과 8등(等)ㆍ도적(道迹:須陀洹)ㆍ왕래(往來:斯陀含)ㆍ불환(不還:阿那含)ㆍ무착(無着:阿羅漢)ㆍ성문(聲聞)ㆍ연각(緣覺)을 찬양한 것이니라.”
11. 석과상품(釋果想品)
현자(賢者) 아난이 게송을 말하였다.
세존께서 연설하신 것처럼
니원(泥洹:
涅槃)이란 임시로 붙여진 이름이니
비유하면 허공과 같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치로써 해탈케 하셨네.
비록 강설(講說)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말이 아니니.
모든 부처님께서 훌륭한 방편으로써
종합하여 설법하셨네.
그때 아난이 이 게송을 설하고 나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天中天:
佛)이시여,
세간의 백성들이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때를 따라서 교화하신 이치를 알지 못하여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여래께서 무슨 까닭에 보살대사의 지신(持信)ㆍ봉법(奉法)에서부터 연각(緣覺)에 이르기까지를 분별하여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 부처님 때에 공을 쌓고 덕을 쌓았으므로 마음이 열리고 생각이 통하여 속임수에 침해받지 않으리라.
왜냐 하면 모든 법을 밝게 깨달아 알기 때문이니라.
비유하면 마치 환상ㆍ꿈ㆍ그림자ㆍ메아리ㆍ아지랑이ㆍ물속의 달 그림자와 같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보살대사는 이러한 지혜로서 분별해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침해를 당하지 않고 은근히 여래의 법을 닦아서 정진하되 게을리 하지 않으며 스스로도 속임을 당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게송을 설하셨다.
세존께서 찬탄하시고
찬양하신 거룩한 법
이런 인연 때문에
보살은 용감하게 정진하네.
지혜도 적고 게으른 이는
이 이치를 잘 알지 못하기에
마땅히 닦고 정진하게 하고자
여래께서 이 이치를 설하셨느니라.
수행할 마음 가진 중생 위하여
세존께서 인도하여 교화하고자
이런 지혜로 분별하여 말씀하시니
청정하고 밝은 지혜 얻게 함일세.
저들이 도의 뜻[道意] 안다 해도
지혜롭고 거룩함을 얻을 수 없나니
만약 이런 법 깨닫는다면
마음으로 다섯 가지 일이 공한 것임을 깨달으리라.
공하되 공한 것을 알지 못하며
적정(寂定)하여 말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서
일체의 음성 다 제거하나니
그런 까닭에 공한 법을 찬탄하여 말하네.
허공은 잡아도 잡히지 않고
일찍이 얻을 수도 없었으니
가령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공한 이치야 어찌 모르리.
설령 이 다섯 가지를 안다 하여도
공한 지혜를 분명하게 분별한다면
방일하지 않음을 이루어서
곧 스스로 속이지 않으리라.
그때 오백억 비구가 마음 속으로 믿음 지닐 생각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 앞에 나아가 합장하고 스스로 귀의하면서 똑같은 음성으로 게송을 읊었다.
지금 세존 큰 성인께서
저희들의 모든 의혹 없애주셨고
평등각(平等覺:
佛)께서 널리 설하시어
굳은 의지로 큰 도에 머물렀습니다.
또 다른 오억 비구가 이 설법을 듣고 다함께 받들어 행하면서 모두 부처님 앞에 머물러 똑같은 마음으로 게송을 읊었다.
유일하신 세간의 빛이시여.
저희는 이제 의심을 여의었고
거룩한 세존께서 찬탄하셨기에
부처님의 큰 도를 깨쳤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법의 자취 받들어
바른 지혜 얻어 걸림 없으니
도덕은 저절로 이루어지고
시방 중생들 모두 교화되었습니다.
또 천억 비구가 8등(等)의 생각을 내어 이 찬탄하는 게송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서서 다함께 게송을 읊었다.
마음 속에 8등의 법 가지니
이제는 의심의 그물 풀어지고
마음에 이미 분명하게 깨달았으니
그 원인은 8등법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 십억 비구가 도적(道迹:
須陀洹)의 마음을 품고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서서 같은 음성으로 게송을 읊었다.
도사(導師)께서 우리를 깨우쳐서
법의 지혜 획득하게 하였으므로
평등각의 이치 깨달았으니
도적의 법 연설해 주신 탓이옵니다.
또 이백오십만 비구가 왕래(往來:
斯陀含)의 마음을 품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스스로 귀의하며 같은 목소리로 찬탄하면서 게송을 읊었다.
저희들이 본래부터 의지하고 집착했으나
왕래의 마음 품은 뒤로는
오늘에 이르러 영원히 어려움 없고
존망(存亡)에 대해 방일함이 없어졌습니다.
또 오십억 비구가 불환(不還:
阿那含)의 생각을 가지고 게송을 읊었다.
가장 높으신 도사(導師)시여,
이제는 조롱과 희론이 없어져
영원히 모든 과보의 생각 버리고
거룩한 도사의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또 삼십오억 비구가 무착(無着:
阿羅漢)의 생각을 품고 4선(禪)에 머물러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이런 게송을 읊었다.
이제 저는 의심하지 않고
무여법(無餘法:
無餘涅槃)을 체득하였습니다.
모든 승(乘)의 평등함을 깨닫고 보니
비유하면 마치 환상[幻]과 같더이다.
또 오십팔억 비구가 마음 속에 성문의 생각을 품고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서서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저희들이 이 말에 집착하자
세존께선 중생들 제도시킬 마음으로
성문법을 연설하셨으므로
오늘에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또 오억 비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각(緣覺)의 생각을 일으켜 합장하고 서서 같은 마음으로 게송을 읊었다.
오늘 본 현전의 일
연각으로 비롯된 것이나
세존께서 분별하여 말씀하시니
연각의 법 생각으론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또 백만 비구니가 도적ㆍ왕래ㆍ불환ㆍ무착과의 생각을 성취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서서 게송을 읊었다.
저희들은 평등법을 깨달아
여인의 몸 버리고
각각 부처님 도 이루었으니
마땅히 세상에 제일입니다.
또 팔백팔십만 청신사(淸信士)와 청신녀(淸信女)가 모두 도적의 생각과 왕래ㆍ불환의 생각을 품고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부처님의 앞에 서서 같은 마음 같은 생각으로 다함께 게송을 읊었다.
저희들의 마음과 생각 청정하여
비유하면 마치 유리그릇 같나니
이제사 마땅히 집을 버리고
부처님의 법다운 가르침을 닦았습니다.
또 육십억해의 많은 저 모든 천인(天人)들이 허공에 머물면서 하늘꽃을 내려 부처님 위에 뿌려 다함께 세존께 공양하고 곧바로 내려와서 부처님 앞에 서서 게송을 읊었다.
저희들은 본래 모든 승(乘)을 생각하였고
과(果)에 대한 생각도 또한 그러했더니
오늘날 영원히 끊어 없애고
무상도(無想道)를 깨달았습니다.
12. 항마품(降魔品)
그때 무수한 백천 비구와 사리불(舍利弗)ㆍ목건련(目犍連)ㆍ수보리(須菩提)ㆍ아난률(阿難律)ㆍ이월(離越)ㆍ겁빈노(劫賓奴)등의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서서 세존에게 아뢰었다.
“저희들이 오늘 성현의 도를 원만히 갖추어 큰 뜻을 어기지 않고 마군의 원한을 항복받아 물리쳤으나,
5역(逆)을 갖추고,
다섯 가지 욕락을 다 갖추었으며,
삿된 소견을 성취하고 바른 소견을 버렸으며,
이미 무수한 만천 사람의 목숨을 해쳤으나,
저희들은 오늘 모두 부처님 도를 성취하여 무여계(無餘界:
涅槃界)에 이르고 이미 멸도하였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잠자코 계셨다.
그 대중들 가운데 있던 헤아릴 수 없는 백천의 대중들은 모두 그 모임에 와서 이 말을 듣고 의심을 내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뜻하여 나아가는 의미는 뭘까?
우리의 마음은 깜깜하여 알 수 없다.
아라한 같은 이들도 저런 말을 하는데 하물며 범부(凡夫)이겠는가?’
서 있는 이는 똑바로 서 있었고 앉아 있는 이는 잠자코 앉은 채로 일어나지 못했다.
현자(賢者) 아난이 성존(聖尊:
佛)의 뜻을 받들었으므로 무수한 백천 모든 중생들이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 알고는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연로하신 분의 말을 듣고 이 모임에 있는 대중들이 모두 의심하고 있습니다.
논란을 벌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겠고,
또 불ㆍ세존께서는 왜 잠자코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오직 현자 아난이여,
이 경을 불퇴전륜보살(不退轉輪菩薩)의 경지라고 말하나니 이 연로하신 분들이 강설한 것 모두는 불퇴전 보살대사만이 보고 믿음을 낼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난이 또 물었다.
“연로하신 대덕들이 무슨 까닭에 그런 말을 하였습니까?”
세존께서는 잠자코 계셨다.
“이 연로하신 분들은 무상정진불퇴전(無上正眞不退轉)입니까?”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마땅히 정각(正覺)을 이룬 뒤에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현자 아난에게 말하였다.
“지혜롭지 못한 행위를 곧 어머니라 하는데 이 모든 사람들은 끝내 숱한 해로움을 다 제거하게 되며,
훌륭한 생각은 없고 정색(情色)만을 탐하여 집착한 것을 곧 아버지라 하는데 착하지 못한 생각을 제거하고 여러 정념(情念)을 멀리하여 무착(無着:
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고 난 뒤에 범부법(凡夫法)을 버리고 청정하지 못한 생각으로 성속(聖俗)을 구별하는 일을 씻어버리며,
모든 잡념을 깨뜨리고 큰 법은 무너뜨리지 않으며,
여래의 뜻을 일으켜 모든 생각을 제거하며,
일체법에 대하여 마음을 따라가며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연로하신 대덕들은 ‘우리들이 오늘 5역(逆)을 다 갖추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거스름에 오고 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로한 대덕들이 말한 ‘다섯 가지 즐거움을 성취했다’는 것에서 그 다섯 가지 즐거움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다 꿈ㆍ허깨비ㆍ그림자ㆍ메아리ㆍ아지랑이와 같나니,
이 지혜를 또렷이 깨달아서 결함이 없으면 다섯 가지 즐거움이 됩니다.
왜냐 하면 이런 것들은 근본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그 근원이 없다면 모두 제거해야 하리니,
그래야만 비로소 평등과 호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지혜에 대한 강설을 듣고 곧 법인(法認)을 체득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다섯 가지 즐거움을 원만하게 갖추었다고 말합니다.
연로한 대덕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오늘 바른 견해는 여의고 삿된 견해에 머문다’고 한 것은 모든 법을 보고 모두 삿된 견해에 머물면서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거짓되고 허망하여 진실로 존재하는 실체가 모두 없으니,
비유하면 마치 허공엔 아무런 형상이나 모양도 없으며 허(虛)와 실(實),
가고 옴이 다 돌아갈 곳이 없고 획득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 하면 그 근본은 자연 그대로여서 이 모든 법을 살펴보면 다 평등하고 하나이기 때문이니,
여러 가지 법등의 삿된 견해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비구의 무리는 평등하지도 않고 삿됨도 없으니,
왜냐 하면 모든 망상을 여의면 부처님의 거룩한 도를 이룩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깨달음의 법을 획득하여 경의 뜻[經義]에 포만(飽滿)하게 되지만 그 또한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난이여,
이 모든 비구들이 다함께 말하기를 ‘우리들이 오늘날 삿된 견해는 원만하게 갖추고 바른 견해는 버렸다’고 한 것입니다.
이 연로하신 대덕들이 ‘오늘 우리들이 무수한 백천 사람의 목숨을 해쳤다’고 한 것은,
그들이 이런 말을 할 때에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천만 사람과 신(神)들이 이 말을 듣고,
모든 법은 마치 환상이나 꿈ㆍ그림자ㆍ메아리ㆍ아지랑이와 같음을 깨달아 알고는 중생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나라는 집착을 없앴으며,
수명ㆍ중생이라는 집착도 멀리 여의었으며,
갖가지 덕의 근본을 초월하여 큰 도의 마음을 내지만 그 어떤 종자도 심은 바가 없었습니다.
또 비구ㆍ비구니ㆍ청신사(淸信士)ㆍ청신녀(淸信女)들도 모두 나니,
남이니,
수명이니,
이 몸은 없는 것이니 하는 생각을 버리고 다시는 잠시라도 나고 죽는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나니,
남이니 하는 생각과 다함이 없이 영원하다는 생각을 없애서 아주 다 끊어 남음이 없으며 최후의 경지인 생멸이 없는 법인[不起法忍]을 체득하였으므로 ‘우리들이 오늘날 무수한 백천 사람의 목숨을 해쳤다’는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모든 연로하신 대덕들과 그 권속이 말한 ‘오늘 우리들이 부처님의 도를 체득(逮得)하여 무여의 세계[無餘界:
無餘涅槃界]에 이르러 멸도(滅度)의 경지에 든다’고 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억백천의 중생들을 인도하고 교화하여 온갖 번뇌[塵埃]를 다 버리고 그들로 하여금 성현의 도를 획득하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가 무상전진도(無上正眞道)의 생각을 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때에 이들 모두가 생멸이 없는 법인을 체득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감탄하면서 스스로 게송으로 찬탄해 말하기를 ‘오늘 우리들이 정욕(情欲)을 뽑아버리고 부처님의 도법(道法)을 성취했다’고 한 것입니다.
번뇌의 형상도 없고 남은 더러움까지 모두 없앴으니,
그러므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지금 큰 도를 증득하여 무여의 세계[無餘界]에 이르러 멸도(滅度)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현자들은 대승(大乘)에 머물러 있으므로 하늘에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어진 분인 아난이여,
족성자(族姓子)와 족성녀(族姓女)가 무상정진도의(無上正眞道意)를 내어 세속의 일을 초월11)하고 그 마음이 청정해져서 세속의 법에 얽매이지 않고 곧 발심하여 모든 이치에서 초월하였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모두 버리고 최후의 경지인 무여계에 들어가 멸도하였으니 아난이여,
이것이 보살승(菩薩乘)을 익히는 것입니다.
보살행을 하는 이는 해[日]를 따라 익히지 않고,
어리석고 아둔한 사람은 해를 따라 기억할 뿐이니,
이들은 밝은 지혜가 없는 이들입니다.
왜냐 하면 가령 해가 진실로 여러 하늘의 궁전에 비추지 않는다면 광명(光明)이란 없을 것이니,
해는 뜨고 지지 않는 것이라서 과거에도 어둠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밤과 낮이 없으므로 고정관념으로 집착할 필요도 없으련만 어리석고 어두운 중생들이 밤이니 낮이니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보살대사는 고요히 큰 도를 닦고 훌륭한 지식을 익히며 마음 속에 낮이다,
밤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갖가지 생각을 영원히 끊어버리고 곧 불도(佛道)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문수사리가 게송을 설하였다.
보시할 마음 갖지 아니하고
자신에 애착하여 제 몸이라 고집하나니
저들이 만약 이 마음 끊지 못하면
동요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진에(瞋恚)에 대해 밝게 깨달아
자연을 두고 생각 일으키지 말라.
성인의 도는 처소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동요하지 않는다네.
저들이 어머니[지혜롭지 못한 행위]로 삼는 것은
처음과 끝이 생겨남이 있으니
이 근원 뽑아 없애면
곧 목숨에 대한 집착 없어지리라.
아비[情欲에 집착함]를 생각하여 따르지 않고
정욕(情欲)의 법 즐기지 않으면
이들은 본래 공(空)하여 없는 이치 깨달아
마침내 그 뿌리 뽑혀지리라.
그들을 교화하여 이 몸 없는 것이라는 데 돌아가게 하고
지혜롭지 못한 이에게 나아갈 길을 밝혀주어
머무름 없다는 말에 동요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지난번에 이런 설법 하였네.
닦아야 할 법은 나한법이요
범부법도 또한 그러하니
애욕(愛欲)을 다 없애기 위해
지난번에 이런 설법 하였다네.
유위(有爲)의 생각 크게 일으켜
내 이 몸 자연(自然)임을 살피고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면
음성(音聲)조차 없는 설법인 것을.
여래께서 아시는 바는
예로부터 생각한 것이라는
이런 뿌리 뽑아버리면
생겨나는 곳 없다 말하리라.
이와 같은 생각과 즐거움 버리면
평등하고 같아서 두 법 없으니
분별하여 이런 이치 밝게 깨달아 알면
이것을 평등교(平等敎)라 말하네.
이른바 5욕락(欲樂)
속인들은 이 다섯 가지 찬양하면서
항상하지 않다는 생각 없애버리고
환화(幻化)와 같은 것을 생각하네.
원만히 갖추어 모자람 없고
애욕의 생각 없는
이러한 무리들 때문에
세존께서 이 앞서 찬탄하셨네.
모든 죄(罪)와 복(福) 분별해 알면
마치 꿈과 같은 것이네.
구경(究竟)엔 생겨난 곳 없으니
밝은 지혜로 이런 이치 깨달아야 하네.
삿된 법과 진에(瞋恚)법도 알고 나면
모두가 공적(空寂)하여 견고하지 못한 것을
삿된 소견에 속는 것임을 알면
저것을 분별력 있는 미묘한 지혜라 하리.
일체법(一切法)은 실상이 없으니
그런 법을 가까이 말게.
헛된 일에 의지하지 않아야 되나니
모두가 허공 같아 머물지 않네.
일체법 살펴 널리 깨달아 알면
그런 까닭에 바른 견해 찬탄12)하네.
이 법은 평등한 것이니
밝은 지혜로 바르고 평등함을 깨달아야 하네.
저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들
중생이라는 생각 일으키면 곧 없애게 해야 하리.
중생이란 찾아보아도 얻을 수 없는 것
죽는 것도 또한 볼 수 없다네.
한량없는 중생들 생멸심 일으키면
수명(壽命)에 대한 생각 버리게 하고.
갖가지 생각 없애야 하건만
수명에 집착하면 그 죄 중하네.
중생이란 생각 덜어 없애고
수명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네.
그런 까닭에 이런 말 하였나니
내가 무수한 중생을 해쳤노라고.
모든 번뇌를 버려라.
법은 호응하는 것도 호응하지 않는 것도 없다네.
도에 형상과 모양이 없음을 알면
무너뜨리거나 없앨 것도 없다네.
모든 마군의 힘 항복 받고
청정한 도법(道法)을 체득하면
모든 법은 다툼이 없고
생겨나고 소멸됨이 없는 이치 깨닫게 되리.
그때 문수사리가 이 게송 설하기를 마치자 때마침 의심을 품고 있던 오천 명의 중생들이 마음이 열리고 의심이 풀려 큰 광명을 얻었으며,
생멸이 없는 법인(法忍)을 성취하고는 제각기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문수사리에게 공양하여 올리면서 동시에 말하였다.
“바라건대 우리들로 하여금 이 법의 지혜를 이룩하여 이런 설법을 하게하며,
중생들을 인도하고 교화하여 깊은 지혜를 분별하게 하며,
걸리고 막힘이 없어서 어지신 문수사리처럼 되게 해 주십시오.”
그때 세존께서 문수사리를 칭찬하며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이것은 참으로 오묘하고 뛰어난 법이로다.
모든 의혹의 그물을 끊어버리고 부처님의 거룩한 진리를 친근하게 하는구나.”
아난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문수사리는 무슨 까닭에 중생들을 인도하고 교화하여 지금 세존에게 이와 같은 칭찬을 받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문수사리는 헤아릴 수 없는 백천 중생들을 깨우쳐주고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큰 도에 들게 하였고,
모두 이 심오한 경의 이치를 깨닫게 하였기 때문이니라.”
아난이 다시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는 물러남이 없는 법륜을 강설하여 성인의 궤도에 들게 하였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아난아.
물러남이 없는 법을 강설하여 큰 도를 일으켰느니라.
왜냐 하면 문수사리는 훌륭한 법우(法友)로서 중생들을 인도하여 이롭게 하였느니라.”
아난이 다시 여쭈었다.
“천중천(天中天:
佛)이시여,
지금 부처님 앞에 서 있는 이 모든 비구들은 모두 얻음을 지니고 법을 받드는 마음과 8등(等)ㆍ도적(道迹:須陀洹)ㆍ왕래(往來:斯陀含)ㆍ불환(不還:阿那含)ㆍ무착(無着:阿羅漢)ㆍ성문(聲聞)ㆍ연각(緣覺)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들은 큰 도의 마음을 낸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 무리들 중에는 게으르고 약하며 뒤떨어지고 마음이 어두워서 개재(愷悌:
精進)의 마음이 없으므로 인도하여 교화하기 어려우니라.
방만하고 게을러서 정진하지 않고 오직 옷과 밥에만 마음을 두며 심오한 법을 배우지 않고 법의 이로움을 흠모하지 않으며,
유위(有爲)의 일과 혼란하고 시끄러운 인연을 일으키고 8등(等)법에 대하여 의심하고 성급하여 편안하지 못하며,
모든 감관이 안정되지 못한 이들도 있으며,
방일하여 마음 속에 교만만 가득하고 제 몸과 수명ㆍ중생에 집착하거나 갖가지 더러움을 버리지 않으며,
계율을 범하고 탐하거나 질투하면서 생각으로 불법을 구하는 이들도 있느니라.
그들은 모두 악한 벗을 따르고 삿된 지혜를 좋아하며 지도무극(智度無極:
智慧波羅蜜)을 받들어 갖기를 좋아하지 않고 바깥 경계에 집착하여 재물ㆍ물질ㆍ의식 따위의 즐거움만 탐하며,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일찍 일어나고 밤에 잠자면서 정진을 일삼지 않고 도의 마음을 어겨 잃어버린 자들이니라.
양설(兩舌:
이간질)ㆍ악구(惡口)ㆍ거짓말ㆍ기어(綺語)에만 뜻을 두어 그 마음엔 해칠 생각만 가득차 끝내는 다툼만을 일삼으며,
죄복(罪福)만 깊이 믿고 공(空)ㆍ무상(無相)ㆍ불원(不願)의 법은 믿지 않으며,
생멸이 없는 온갖 행(行)을 견제하고 일체법을 무너뜨리려는 그런 생각은 아주 없는 이런 자들을 말하는 것이니라.”
이때 부처님께서 잠자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현자(賢者) 아난이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을 받들어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세존께서는 잠자코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최후 말법시대인 5탁악세(濁惡世)에 이르면 많은 중생들이 이와 같아서 심오한 경을 믿지 않을 것이므로 부처님께서는 잠자코 말씀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아난이 또 물었다.
“어떤 중생이 이 법을 믿고 어떤 중생이 믿지 않습니까?”
“믿을 중생들이 적을 뿐입니다.
아난이여,
비유하면 마치 밝은 지혜를 가진 이는 적고,
우매하고 캄캄한 사람은 많은 것과 같습니다.
왜냐 하면 수행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하나니,
이와 같아서 아난이여,
그들이 이 법을 들으면 좋아하고 기뻐하는 이는 드물고,
기뻐하지 않는 이만 많기 때문입니다.
설혹 믿는 이가 있다 해도 대중들에게 버림을 받거나 공경 받지 못하리니,
군(郡)ㆍ나라[國]현(縣)ㆍ읍(邑)ㆍ마을[墟聚] 등지에 들어가면 모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게 됩니다.
왜냐 하면 숙세에 지은 죄업 때문에 번뇌의 일산[陰蓋]이 가려서 본래의 덕이 얇아졌기 때문입니다.”
아난이 또 물었다.
“지난번에 강설한 법에 대하여 믿음을 갖지 않는 이들은 생각이 어디에 있기 때문입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그런 무리들은 부처님을 저버리고 큰 도를 믿지 않습니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바라옵건대 부디 연설해 주십시오.
좋아하는 이가 비록 적다 하더라도 그들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것을 듣고 모두 기뻐서 뛸 것입니다.”
그때 세존께서 사방을 두루 살피시더니 갑자기 혀를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다 덮으시고 그 혀끝으로 큰 광명을 뿜어내어 항하강 모래알처럼 많은 국토를 비추셨다.
그때 사부 대중들이 부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동방의 항하강 모래알처럼 많은 국토를 보니,
모든 불ㆍ세존께서 다함께 이 불퇴전(不退轉) 법륜에 대한 법을 설하고 계셨는데,
그 모임에 있는 이들이 멀리서 설하는 법까지 다 들어 가까이 있는 이와 조금도 차별이 없었다.
그 모임에 참석했던 사부 대중들이 이런 변화를 보고 다 같은 목소리로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바라옵건대 세존이시여,
불퇴전의 법륜을 높이 숭상하시고 찬탄하시니,
만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진실로 틀림없다면 저희들이 목격한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불ㆍ세존께서 강설하신 이 심오한 경이 조금의 차이도 없을 것이요 특별한 것도 없을 터이니 부처님이시여,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그때 세존께서 혀를 도로 거두어들이시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혀를 얻겠느냐?”
아난이 아뢰었다.
“아니옵니다,
천중천이시여.
지성으로 법을 받들고 바른 이치로 인도하고 교화해서 많은 공덕을 쌓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겁을 지내오면서 큰 지혜를 연이라야 만이 이런 혀를 얻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하오니 성존(聖尊)이시여,
꼭 설법하여 주시옵소서.
설령 족성자(族姓子)로서 믿고 즐거워하여 배우려는 이가 아무리 적다 하더라도 이 설법을 듣고 나면 그 증명을 목격하고 곧 틀림없이 기뻐하면서 이를 일으켜 폐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사부 대중들이 이러한 법을 만나지 못해서 이와 흡사한 경전에 뜻을 두지만 비구ㆍ비구니ㆍ청신사ㆍ하늘ㆍ용ㆍ귀신ㆍ아수륜(阿須倫:
阿須羅)ㆍ건답화(健沓和:
健達婆)ㆍ진다라(眞陀羅:
緊那羅)ㆍ마후륵(摩睺勒:
摩睺羅迦)등이 경적(經籍)을 들으면 물러나지 않고 마땅히 무상정진도최정각(無上正眞道最正覺)의 경지에 이르러,
이 국토에 법의 이치를 강설함이 지금 나와 다름이 없을 것이니라.”
그때 사부 대중과 하늘ㆍ용ㆍ귀신들이 기쁘고 반가워하며 크게 기뻐하여 의심의 그물이 영원히 찢어졌고 모두 손에 꽃과 향을 받들어 부처님 위에 뿌렸다.
모든 여인과 천한 사람들도 보배와 영락(瓔珞)을 부처님 위에 뿌리고 마음과 뜻을 같이 하여 부처님께 아뢰었다.
“오늘날 대성현이신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는 두 가지 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정말로 너희들이 말한 것과 같나니,
진실로 다름이 없느니라.
여래는 진정 두 가지 법을 말씀한 것이 아니며 모든 허물이 될 만한 것과 어리석고 몽매한 이들의 탐욕을 없앴느니라.
가령 지혜로써 불ㆍ천중천을 보면 곧 소원대로 얻을 수 있게 되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것이 지혜로써 부처님을 뵙는 것입니까?”
세존께서 물으셨다.
“너는 알지 못하느냐?”
“어리석은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중우(衆祐:
佛)이시여!”
중우께서 말씀하셨다.
“가령 어떤 사람이 능인(能仁)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물러남이 없고 부처님 성현의 길을 성취할 것이니라.
왜냐 하면 부처님의 도는 널리 지혜로워서 이익이 있을 뿐 손해란 없으며,
탐심과 성냄ㆍ어리석음을 없애주기 때문인데,
더구나 한 송이 꽃이라도 여래에게 바친 것이겠느냐?
내가 멸도(滅度)한 뒤에 만약 사리(舍利)를 가지고 공양하며 스스로 귀의하면 틀림없이 모두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니라.”
아난이 또 여쭈었다.
“정진하여 의심하지 않고 마음을 기울여 바른 경(經)을 들으면 모두 물러남이 없이 마땅히 부처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인(能仁:
釋迦牟尼)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틀림없이 모두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부처님의 말씀은 틀린 말이요,
두 가지 법을 말씀하신 것이 되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마치 구류(拘類)나무 그늘에서 오백 대의 수레와 오백 명의 사람이 쉬게 되면 모두가 그 나무 그늘의 혜택을 입는 것과 같나니,
그러한 나무도 애초에 씨앗은 컸겠느냐,
작았겠느냐?”
“매우 작았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구류나무와 같은 것도 그 씨앗은 매우 작았으나 물을 주어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라 그렇게 커졌고 가지와 잎사귀가 퍼져 사방 멀리까지 넓게 덮었는데 하물며 부처님의 도에 독실하고 성현의 존귀한 이름을 들은 것이겠느냐?
그 또한 마땅히 이와 같아서 그 종자는 덕의 근본이 되느니라.
점점 그 행(行)을 닦아 무너지고 썩지 않게 하면 마침내 무상정진(無上正眞)의 도에 이르게 되리라.
왜냐 하면 이 일체의 법은 씨앗을 심는 근본이니 길이 의지하여 머물러서는 안 되느니라.
중생들이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패망하지 않으며 일체법의 종자는 의지할 것이 못된다고 연설하는 것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은 곧 성현의 본원(本願)입니까?
모든 불ㆍ세존의 도법(道法)은 마땅히 그런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내 이름을 들으면 모두 다 물러나지 않고 최상의 경지인 정각(正覺)을 이룰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법은 다 마땅히 그런 것이니라.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의 법은 평등하기 때문이니라.”
아난이 또 여쭈었다.
“가령 평등하다면 무엇 때문에 서원합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대사(菩薩大士)가 이 경 설하는 것을 듣고 가령 원을 일으키거나 혹은 원을 일으키지 않거나 간에 마땅히 증득한 이 법을 들은 것과 같기 때문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일찍이 없었던 일이옵니다.
이 법은 미묘하여 모든 불ㆍ세존께서 곧 큰 지혜로써 중생들을 열어 교화하셨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아난아,
모든 깨달으신 분은 크게 밝아서 중생들을 많이 인도하고 교화하여 성인의 뜻을 세워 우리 불국토에 기행천식(蚑行喘息)13)의 종류까지도 불쌍히 여겨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또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보시하며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고 일체법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느니라.
보살법을 수행하여 공덕을 많이 쌓고 중생을 구원하고자 심오한 경적(經籍)을 닦아서 마침내 부처님의 도를 증득하였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미치기 어렵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이 경을 설하시면,
폐마(弊魔)들이 와서 듣고 수행하는 이를 교란하니 않겠습니까?
또한 그들이 덕을 일으키거나 무상정진도(無上正眞道)의 마음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는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군은 듣지 못하느니라.
왜냐 하면 문수사리의 신통 변화가 있기 때문이니라.”
그때 문수사리가 위신력(威神力)을 거두자 때마침 마왕 파순(波旬)이 멀리 허공에 있다가 불퇴전 법륜을 강설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능인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말씀을 듣고 두려운 마음이 생겨 옷자락과 털이 곤두서자 이런 말을 하였다.
“나를 이길 수 있겠구나.
그 힘의 세력으로 보아 나의 세계는 다 공(空)하게 되어 국토를 회복할 수 없겠구나.”
그리고는 근심과 슬픔으로 슬피 우니 초췌하여 매우 늙은 모습이 마치 백 세 남자처럼 쭈그러들었다.
그때 마왕 파순은 제 몸이 이와 같이 변하자 네 부류의 군대14)를 거느리고 삼천대천세계의 각각 다른 마군과 마군의 관속(官屬) 등 여러 하늘을 모아가지고 부처님께서 계신 곳에 나아가 병사들을 엄숙하게 정렬하고 수많은 마군의 위엄으로 보살에게 핍박을 가하니,
마치 그 위세가 부처님이 처음 성불(成佛)하셨을 때와 같았다.
늙은 몸이 지팡이를 짚고 벌벌 떨면서 얼굴은 쭈그러들고 가죽은 늘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네 부류의 군대를 배치하고 허공에 머무른 채 다함께 멀리서 불퇴전 법륜을 설하시는 능인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으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마왕은 스스로 자기의 소유(所有)가 아님을 알고 혼자 단신으로 시종도 없이 곧바로 부처님 앞에 나아가 세존께 아뢰었다.
“이제 제 한 몸은 시종도 전혀 없습니다.
또한 파리하게 여위었고 매우 늙어서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힘이 없어서 이 몸조차도 지탱할 수 없으며,
제 힘으론 이길 수도 없고,
저의 세계는 모두 공(空)하여 국토가 하나도 없습니다.
여래께서는 큰 자비로 중생들을 모두 슬피 여기시니 또한 저를 어여삐 여겨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마왕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의 종류는 너무도 많아 불가사의하니라.
가령 모든 부처님이 날마다 성불하여 항하강 모래와 같고 또한 한량없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억백 나술(那術:
那由陀) 중생들에게 발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여도 중생의 종류는 다하지 않으리라.”
마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중생의 종류가 비록 많을지라도 지금 저는 혼자입니다.
부릴 사람도 없고 나를 부축해 줄 만한 사람도 없으니,
가령 길을 가다가 갑자기 땅에 걸려 넘어진다 해도 스스로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부디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셔서 저를 즐겁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직 원컨대 세존이시여,
불쌍히 여기셔서 속히 어루만져 길러주시어 권속들을 일으키게 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마왕에게 말씀하셨다.
“우선 너는 안심하여라.
이 법을 듣지 않고 믿음을 여읜 이는 모두가 너의 친구이니라.”
마왕은 곧 기뻤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생각이 떠오르자 이렇게 말하였다.
“내 마땅히 사람들을 교화하여 비록 이 법문을 듣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믿고 좋아하지 않게 할 것이며 마음 속에 의혹을 가지게 할 것이다.
이미 그렇게 의혹을 가지면 틀림없이 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리라.”
그때 마왕 파순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디 바라옵건대 불쌍히 여기셔서 큰 자비를 베푸시어 다시 한 번 위로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저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뛰면서 걱정 근심이 없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지난번에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능인(能仁)의 이름만 들어도 다 물러나지 않고 반드시 무상정진(無上正眞)의 도를 성취한다’ 하셨으니 부디 성현께서는 묵묵히 계시고 이런 법을 널리 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중생들은 법을 들으면 더더욱 정진하여 큰 도를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왕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안심하고 두려운 마음 갖지 마라.
마땅히 중생들로 하여금 도에 대한 생각을 내지 않게 하여 중생의 종류로 남아 있어 사람마다 각기 편안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리라.
물질[色]ㆍ아프고 가려운 느낌[痛:
受]ㆍ고정관념[想]ㆍ나고 죽는 행업[行]ㆍ인식작용[識]에서도 동요하지 않게 하리라.
부처님은 마땅히 중생들을 개화하고 인도하여 삿된 소견을 여의지 않게 하고 바른 견해를 세우지 않게 하리라.
예순두 가지 모든 의혹을 여의지 않게 할 것이요,
한 중생도 동요하지 않게 할 것이며,
과거와 미래ㆍ현재를 기억하지 않게 하며 중생을 해치는 일과 살생ㆍ도둑질ㆍ음욕ㆍ질투ㆍ거짓말ㆍ이간질하는 말ㆍ기어(綺語)와 질투ㆍ성냄ㆍ의심을 여의지 않게 하며,
또한 사람들을 권유하여 바른 도에 들게 하지도 않으리라.
사람들을 교화하여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一心:
禪定)ㆍ지혜를 닦지 않게 할 것이요,
또한 사람들을 가르쳐서 네 가지 은혜를 받들거나 사람들에게 보시하거나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롭게 하는 등의 이익이 되는 일체의 일과 중생을 구제하고 법도에 맞는 행위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중생의 종류를 생각하지 않거나,
부모ㆍ형제ㆍ처자와 아들 딸에 대한 생각이 없거나 친구를 버리게 하거나 밤낮으로 날마다 달마다 또는 한 달 반 달이라도 모든 동요하는 생각이 없는 데에 의지하지 않게 할 터이니 파순아,
너는 안심하라.
내 마땅히 사람들에게 권유하여 그들로 하여금 여섯 가지 도무극(度無極:
波羅蜜)의 생각과 큰 도에 대한 의지와 힘[力]ㆍ두려움 없는 자신감ㆍ근(根)ㆍ역(力)ㆍ각의(覺意)ㆍ여덟 가지 바른 행(行)ㆍ부처님의 법ㆍ성현 대중과 일체지(一切智)ㆍ도의(道義)에 대한 생각을 없애 중생을 교화하거나 일체의 법에 대하여 조금도 동요하거나 변함이 없게 하리라.”
그러자 마왕은 기쁨을 스스로 견디지 못했고 곧 그곳에서 안색(顔色)이 아름다워지고 얼굴과 눈이 빛났으며 부처님 위에 꽃을 뿌리고 부처님의 주위를 세 바퀴 돌고는 곧 게송을 설하였다.
평등각(平等覺)이신 세존이시여,
제 마음 본래대로 즐겁습니다.
정각(正覺)의 말씀 달라짐이 없으시니
제가 하려는 일 마음대로 될 것입니다.
그때 마왕 파순이 이 게송을 설하고 나서 곧 천궁(天宮)으로 돌아가 모든 권속들과 함께 다섯 가지 즐거움으로 스스로 즐기며 다시는 근심 걱정을 하지 않고 큰 뜻을 내었다.
세존께서 이 「항마품(降魔品)」을 설하실 때에 삼천대천찰토(三千大千刹土)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지금 마왕의 위덕(威德)으로 이 땅이 크게 진동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항마품」을 설할 때에 육만 사천 사람이 생멸이 없는 법인[不起法忍]을 얻었기 때문이니라.”
아난이 또 여쭈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의심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지난번에 이것을 보고 모두 의심을 하여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들은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어느 곳으로 돌아가야 할까?’하며 모두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오직 바라옵건대 세존이시여,
빨리 이 모임에 온 중생들을 위하여 큰 광명(光明)을 나타내시어 그 의심의 그물을 풀어주십시오.
여래께서 마왕을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파순아,
안심하라.
내가 중생들을 교화하여 도에 머물지 않게 할 것이요.
또한 중생 세계에 동요가 없게 하여 도에 대한 생각을 가지지 않게 할 것이요,
지혜에 의지하지 않게 할 것이며,
삿된 소견을 버리지 않게 하고 바른 견해에 머물지 않게 하리라.
예순두 가지 의혹에서 옮겨가지 않게 하고 또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생각을 없게 하리라.
살생ㆍ도둑질ㆍ탐욕ㆍ음욕ㆍ거짓말ㆍ기어(綺語)ㆍ이간질하는 말ㆍ악한 말과 질투ㆍ성냄ㆍ의심을 여의지 않게 할 것이요,
중생들로 하여금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ㆍ지혜를 닦지 않게 할 것이며,
부모ㆍ형제ㆍ처자를 따르지 않게 하고 밤낮 없이 혹은 한 달이나 반 달이라도 이 중생의 생각에 대하여 조금의 동요도 없게 하리라.
중생들로 하여금 여섯 가지 도무극(度無極)과 두려움 없는 자신감ㆍ근(根)ㆍ역(力)ㆍ각의(覺意)ㆍ불법(佛法)ㆍ성현 대중과 일체지(一切智)를 받들지 않게 하여 조금도 변화해 옮겨가지 않게 하리니,
파순아,
너는 안심하라.
내 마땅히 모든 중생들을 인도하고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치에 동요하지 않게 할 것이요,
행(行)에 머물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그 원인을 말씀해 주셔서 속히 분별할 수 있게 하여 이 모임에 있는 중생들로 하여금 의혹이 남지 않게 하시고 마음이 열리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후세에 변두리의 여러 나라에서도 거룩한 광명을 만나고 바른 법을 받아 굳게 지켜 읽고 외워서 다시는 의심하여 망설이지 말게 해 주십시오.”
그때 세존께서 게송을 설하셨다.
성인의 도는 머무는 곳 없고
지혜의 자취도 일정한 처소 없나니
이러한 큰 이치 강설할 때에
중생들이 이해하여 행동에 옮겼네.
길[塗:
菩提道]과 일체 중생은
두 가지 법 아니요 머무는 곳도 없네.
부처님께서 이런 이치 설하시니
이제 머무는 곳 없음을 깨달았네.
중생은 본래 움직이는 것 아니요
사람의 종류 또한 마찬가지인 것을
일체법은 형상이 없으니
궁극에 이르러도 얻을 수 없다네.
중생의 종류 모두 공한 것
사람의 세계도 불가사의하네.
저들은 모두 생각이 없어
일체혜(一切慧:
一切智) 밝게 아네.
중생들은 움직이지 않는 것인데
임시로 이름붙여 신명(身命)이라 하나니
4대(大:
地ㆍ水ㆍ火ㆍ風)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것
이것은 적멸하고 공한 것이네.
5음(陰:
色ㆍ受ㆍ想ㆍ行ㆍ識)이 공한 줄 알면
자연 동요하지 않고
멸도(滅度)도 얻을 수 없으니
모두가 변하지 않는 것일세.
모두 음(陰) 멈추어 진동함 없고
나라는 것조차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라.
형체 여의면 조용하고 고요하여 공하니
끝까지 집착하지 않아야 하리라.
몸과 5음은 동일한 것
감관과 그 작용 또한 마찬가지라네.
행위 없음을 행하면
모든 음 허공과 같네.
이른바 적정(寂定)의 세계는
일어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나니
이러한 모든 음(陰)ㆍ개(蓋)ㆍ입(入)은
기울거나 변하지 않으리라.
내 몸이다 나다라고 하는 것
이 법은 동요함이 없으니
오히려 집착할 것도 없는데 어찌 동요하리.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하셨네.
중생들은 속임에 침해받지 않나니
그 근본 헤아려보아 얻을 수 없는 것을
체득하여 무심(無心)해지면
자연 그대로여서 얻을 수 없네.
모든 소견을 말한다면
예순두 가지 견해 있네.
아무것도 없어 자연 그대로임이 이와 같아서
마치 물 속의 달과 같다네.
저 예순두 가지 소견
비유하면 마치 그림자와 같네.
형상 여의어 나 없는 이치 깨달으면
자연히 동요하지 않으리.
과거ㆍ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도 이와 같으니
모든 모양은 머물러 있는 곳 없어
비유하면 마치 아지랑이와 같네.
이 법은 공(空)한 것이라 생각 없으니
중생을 헤아려보아도 얻을 수 없고
모든 중생도 머무는 곳 없어
동요(動搖)하지 않으리라.
어떤 중생이 살생을 좋아하면
그로 인해 나고 죽는 크고 넓은 들판에 들어가고
멸도(滅度)에 뜻을 두면
그런 까닭에 동요하지 않으리라.
비록 중생이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것도 존재하는 것 아니니
날마다 헤아려보아도 얻을 수 없어
동요하지 않는다 말하네.
도에 과거가 있다고 말하지만
일찍이 생겨난 적이 없으니
부처님께선 그 이치 깨달아 알므로
중생은 동요하지 않는다 말하셨네.
가령 살생을 한 이라 하더라도
법시(法施)는 무사의(無思議:
不思議)하여
마침내 도혜(道慧)를 성취하리니
그는 동요하지 않으리라.
이른바 사음(邪婬) 범한 이라도
애욕(愛欲) 얻을 수 없네.
그런 까닭에 분별하여 설하였나니
저들은 동요하지 않으리라.
저 망언(妄言)의 법을
일으키는 자를 해탈케 하기 위해
정진하여 홀로 높은 이 되었으니
저들은 동요하지 않으리라.
이간하는 말과 악한 말과
거짓말도 이와 같나니
일체의 가르침 관찰해 보면
환상과 같아 형체가 없네.
모든 것 머무는 곳 없어
의지할 것 되지 못하리라.
모든 음(陰) 메아리 같아
존재하는 실체 없는 것임을 기억하라.
이른바 보시할 마음이 없어
자신에 집착하여 몸이라 생각하나
성인의 도는 머무는 곳 없으니
저들은 동요하지 않으리라.
진에(瞋恚)에 대하여 분별해 알되
자연임을 알아 생각 일으키지 말라.
저것을 만약 끊지 못하면
동요하지 않는다고 말하리라.
온갖 삿된 견해 밝게 깨달아
바른 법 받들어 닦으면
모든 말 초월할 수 있으니
저들은 동요하지 않으리라.
지혜를 권장하고 도와서
일체를 진실로 청정케 하고
물질과 재물에 집착하는 이 불쌍히 여겨
갖가지 죄악 덜어 없애네.
삿된 견해로 지키는 계율을
버려 성인의 도에서 멀어졌으니
지혜 일으키지 않고
바르고 참다움 구하지 않네.
외도[異學]들 삿된 마음 품고
모든 인욕(忍辱) 외면하면서
평등한 도 구하는 것과 같다 하고
무위(無爲)법을 의지하지도 않네.
세 가지 일로 정진하라고
외도들은 분명 설하네.
그들은 성인의 지혜에 귀의하지 않는 것이
밝은 지혜의 행위라 말하네.
흔히 삼매 닦으며
모든 생각에 의존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찬탄하지 않으시고
또한 저들에게 권유하여 돕지 않으시네.
애욕의 번뇌
명철(明哲)하다 말하지 않으나
갖가지 생각 일으키지 않는
부처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네.
보살의 행(行)은 용맹하여
중생들을 거두어들이지도 않나니.
곧 이 이치 설법하시되
비록 받아들인다 해도 동요함이 없네.
중생의 생각 없애 고요히 하고
보리심(菩提心)을 내나니
도의(道意:
菩提)는 일으키는 것 없으므로
저들은 동요하지 않으리라.
부모와 형제라는 생각과
자매와 아들 딸을 생각하지만
이 모든 것 환상과 같나니
저들은 여기에도 동요하지 않으리라.
일체의 저 모든 생각
헤아려보면 실체 없나니
중생법도 모두 공(空)하므로
저들은 동요하지 않으리라.
만일 낮과 밤의 생각이나
한 달이나 반 달이라는 생각
이런 모든 생각은
비유하면 아지랑이나 물 속의 달과 같다네.
보시하고 계율 지키며
인욕과 정진의 생각
이러한 모든 생각들
이 모든 생각에 동요하지 않으리라.
정의(定意:
선정)로 닦는 지혜는
보살의 도력(道力)이니
두려움 없는 자신감 닦아
모든 허망한 생각 제거해 없애라.
각의(覺意)와 사도(思道)는
망념 버리고 성현의 법 사모하네.
밝은 지혜는 일찍이 동요하지 않고
모든 생각과 의혹 일으키지 않네.
부처님 법 구하는 것과
이와 같은 온갖 성현의 생각은
약간의 어떤 생각도 없는 것인데
언행(言行)으로 생긴 동요이니라.
부처님의 지혜는 걸림 없으니
도의 생각으로 의지하는 것은
곧 부처님의 도와
불가사의 한 불 성현을 멀리하는 것이네.
부처님께서「화마품(化魔品)」을 분명하게 설하실 때에 십억 중생들이 의심의 그물을 무너뜨려 없애고 크게 밝은 지혜 성취했으며 생멸 없는 법인을 체득하였다.
법인을 증득한 뒤에 일체 중생은 같은 마음으로 이런 게송을 설하였다.
큰 도 이루신 존성(尊聖)이시여,
부처님의 법은 생각으론 알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대사이시여,
도에 힘쓰시고 모든 의심 끊으셨네.
일체를 밝게 비추고
부처님의 밝은 도에 머물게 하시니
그 광명 시방을 두루 비추어
억천 부처님을 뵈었습니다.
갖가지 법의 근원 널리 보이시어
물질에 집착하지 않게 하시니
세존의 은혜를 입어
저희들의 법안(法眼)이 깨끗해졌나이다.
그때 백억 중생들이 각기 입었던 옷을 벗어 부처님의 위를 덮어 큰 성인에게 공양하고 찬탄하며 말하였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 법문을 듣게 하소서.
그리하여 밝은 광명을 원만히 갖추고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게 하여 주소서.”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마왕을 인도하고 교화하는 경(經)을 듣고 받아 지녀 외우거나 독송하면 어떤 복을 얻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복은 매우 크고 넓으리라.”
아난이 다시 여쭈었다.
“어떤 것을 크고 넓다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이 아침에 백 부처님을 공양하고 아침 해가 뜰 때와 한밤중이나 한낮에 각각 백 불ㆍ세존을 공양하며,
하루 낮 하룻밤 가운데 도합 육백 부처님을 공양하며 모두 편안하게 하고 올바른 것을 따르되 이와 같이 하면서 천 년을 채운다면 그 복은 많겠느냐,
적겠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그 복은 매우 많고도 많을 것입니다,
천중천(天中天)이시여.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령 마왕에게 설법하는 경을 분별하여 듣고 믿고 받아서 의심하지 않으면 그 덕은 저것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니라.”
------------
1)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주(住)’자로 되어 있는데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왕(往)’자로 풀이해야 더 뜻에 맞을 듯하며,
또한 신수대장경 각주에 의하면 “송(宋)ㆍ원(元)ㆍ명(明) 본과 궁(宮)본에는 ‘주(住)’자가 왕(往)자로 되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역자도 이를 따랐다.
2) 흙에 묻힌 보장(寶藏)이란 뜻으로 쓰인다.
가난한 집에 복장(伏藏)이 있었으나 이것을 알지 못하여 곤궁하게 살던 가난한 이에게 이것을 알려 주어 부자가 되게 하는 것처럼 모든 중생이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으면 서로 3계(界)에 유랑하는 것을 불법을 가르쳐 줌으로써 깨닫게 된다는 것에 비유함.
3) 무상도(無上道:
최상의 도)를 구하는 마음.
즉 보리심(菩提心)을 말한다.
4) 지금까지 믿기 어려웠던 이치를 잘 받아들이고 의혹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4제(諦)의 이치를 관하여 인가(認可)하는 것을 법인(法忍)이라 한다.
이 인가에 의하여 점점 의혹을 여의었을 적에 일어나는 4제의 진리를 비추어 보는 지혜를 법지(法智)라 하는데,
법인은 법지를 증득하기 전에 일어나는 인가결정(忍可決定)하는 마음.
5)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혹(或)’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아 ‘미혹하다[惑]’는 말로 풀이해야 할 것 같고,
또한 신수대장경 각주에 의하면 “송(宋)ㆍ원(元)ㆍ명(明)본과 궁(宮)본에 ‘혹(或)’은 ‘혹(惑)’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역자도 이를 따랐다.
6) 고려대장경 원문엔 ‘자(自)’자로 되어 있으나 의미상 통하지 않고 또한 신수대장경 각주에 “송ㆍ원ㆍ명본과 궁(宮)본에 ‘자(自)’가 ‘목(目)’자로 로 되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역자도 의미가 통하도록 하기 위하여 ‘눈’으로 풀이하였다.
7) 고려대장경 원문엔 ‘상(想)’자로 되어 있으나 의미로 보아 ‘모습[相]’이라고 해야 할 것 같고,
또한 신수대장경 각주에도 “송ㆍ원ㆍ명ㆍ궁 네 본에는 ‘상(想)’이 ‘상(相)’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역자도 이를 따랐다.
8)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지(志)’자로 되어 있으나 의미가 서로 통하지 않고,
또한 신수대장경 각주에 의하면 “송ㆍ원ㆍ명 세 본에는 ‘지(志)’자가 ‘실(悉)’자로 되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역자도 이 말을 따랐다.
9)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불수(不受)’로 되어 있으나 의미의 흐름으로 보아 ‘수(受)’가 되어야 할 것 같고,
또한 신수대장경 각주에 의하면 “송(宋)ㆍ원(元)ㆍ명(明)ㆍ궁(宮) 네 본에 모두 ‘불수(不受)’는 소수(所受)‘로 되어 있다”고 하였기에 역자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10)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지경(至敬)’으로 되어 있는데 의미상 ‘지경(至竟)’ 또는 ‘필경(畢竟)’이라야 의미가 통하고,
또한 신수대장경 각주에 의하면 “송ㆍ원ㆍ명ㆍ궁 네 책에 모두 ‘지경(志敬)’은 ‘지경(至竟)’이라고 되어 있다”고 하였기에 역자는 필경으로 번역하였다.
지경(至竟)은 필경(畢竟)의 의미임.
11) 고려대장경 원본에는 ‘기(起)’자로 되어 있으나 의미상 뜻이 통하지 않고 또한 신수대장경 각주에 의하면 “송원ㆍ명ㆍ궁 네 책에 모두 ‘기(起)’는 ‘초(超)로 되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역자도 이를 따랐다.
12)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난(難)’으로 되어 있으나 의미가 통하지 않고,
신수대장경 각주에 의하면 “원(元)ㆍ궁(宮) 두 책에 ‘난(難)’은 ‘탄(歎)’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역자도 이를 따랐다.
13) 발이 달린 동물로서 머리를 쳐들고 천천히 걸으며,
호흡이 급하거나 빠르다는 뜻으로 곤충이나 동물을 총칭하는 말.
14)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나다닐 때 따라다니는 네 가지 병기,
즉 상병(象兵)ㆍ마병(馬兵)ㆍ거병(車兵)ㆍ보병(步兵)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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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Moustaki - Sarah ○ 2016_1008_131012_canon.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iovanni-Battista-Piranesi-cherub-kneeling-releasing-a-bird-by-guercino.jpg!HD [#M_▶더보기|◀접기| Artist: Giovanni-Battista-Piranesi Giovanni Battista (also Giambattista) Piranesi ( 4 October 1720 – 9 November 1778) 이탈리아 예술가로 피라네시 (Piranesi)는 베니스 공화국의 일부인 트레비조 (Treviso ) 근처의 모글리아노 베네토 (Mogliano Veneto )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제 Andrea는 그를 라틴어 와 고대 문명에 소개했으며 나중에 삼촌 마테오 루체시 (Matteo Lucchesi)의 견습생이 되어, 역사적인 건축물을 설계하고 복원하는 Magistrato delle Acque 의 수석 건축가였습니다 .[...이하 줄임...] from https://en.wikipedia.org/wiki/Giovanni_Battista_Piranesi Title : cherub-kneeling-releasing-a-bird-by-guercino.jpg!HD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_M#] ○ 2018_0419_125105_cano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ld_Cherry_Tree_John_Twachtman_c.1901 [#M_▶더보기|◀접기| Author [show]John Henry Twachtman (1853–1902)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_M#] ♥Palace of Versailles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잡담♥ 엎지러진 물 되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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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중묘색불가설 $ 024▲毘伽婆毘伽婆為 一 ● 僧羯邏摩, ○□□□□,色,於,復,此
□□□□□□□, 色中淨光不可說,
於彼一一淨光內, 復現種種妙光明。
□□□□□□□, 색중정광불가설,
어피일일정광내, 부현종종묘광명。
광명 속에 묘한 빛깔 말할 수 없고
빛깔 속에 맑은 광명 말할 수 없어
하나하나 깨끗한 저 광명 속에
또 다시 여러 묘한 광명 나투며
025□
[154째]
차광부현종종광 $ 025▲僧羯邏摩僧羯邏摩為 一 ● 毘薩羅, ○□□□□,不,如,各,一
□□□□□□□, 不可言說不可說,
如是種種光明內, 各現妙寶如須彌。
□□□□□□□, 불가언설불가설,
여시종종광명내, 각현묘보여수미。
이 광명이 다시 여러 광명 나투니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고
이와 같은 가지가지 광명 속에서
각각 보배 나타냄이 수미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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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_암기방안
24 집게(INDEX finger~검지 식지)
25 손바닥( 팜 palm)
75 알머리뼈
45 발등 instep / top (side) of the fo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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