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그대들을 위하여
성 법인(聖法印)에 알맞는 위의(威儀)와
청정한 행을 나타내는 것을 말할 것이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고 기억하여라.”◂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설령 어떤 사람이,
‘공(空)을 구하지 않고
무상(無想)에 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뜻을 내어
스스로 거만하지 않은 선정(禪定)의 업에 이르려고 하나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공법(空法)을 본받기를 좋아하며
뜻을 무상(無想)에 두고,
지극한 도[至要]에 이르려는 뜻을 내어
스스로 잘난 체하고 교만한 마음을 없애고
선정의 업에 이르려 한다면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 곧 도(道)에 따라 원(願)을 세우면
소견(所見)이 생기니,
무엇 때문인가.
공(空)을 본받아 좋아하고
무상(無想)을 얻으려고 하며,
교만하여 스스로 잘난 체하는 소견을 없애려 하기 때문이니,
이렇게 하면 혜업(慧業)은 모두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무엇을 비구의 성법인이라고 하는가.
성법인은 늘 닦아 익혀서 청정한 견해에 이르는 것이다. ◂
▸ 만일 비구가 한정한 곳에 있거나
나무 밑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 앉아서
색(色)이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색이 본래 없음을 보아
이미 무상(無常)★★을 깨달아
지극히 공하여 없음을 알면
문득 모두 아득해져서[怳惚]
아(我)도 없고 욕망도 없어져
마음이 곧 쉬게 되니,
저절로 청정하게 되어 해탈을 얻으니,
이것을 아직 교만과 스스로 거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선정의 청정한 소견의 업에 이른 공이라고 한다. ◂
비록 그러하나 유순(柔順)한 정(定)에 이르렀기 때문에
▸ 곧 그 자리에서
모든 색에 대한 상(想),
소리에 대한 상(想)★★,
냄새에 대한 상(想)★★을 제거한다.
그러므로 무상(無想)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
그러므로 아직 스스로 거만함과 교만을 버리지 못하고
선정의 청정한 소견에 이른 무욕(無欲)이라고 한다.
그 마음이 계속 유순한 정(定)에 있으면
▸ 그는 곧 지니고 있던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보고 제거한다. ◂
그러므로 아직 스스로 거만함과 교만을 제거하지 못하고
선정의 청정한 소견에 이른 무욕(無欲)의 정(定)이라고 한다.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 ‘나의 아(吾我)★★가 생겼다가 사라지니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라고 하고,
곧 사유하여
‘나의 아(我)가 의미를 익히고
모든 식(識)을 분별하는 소인(所因)이니
모두 인연에서 이러한 업에 이르고,
이러한 인연에서 신식(神識)이 있게 되었구나’라고 깨달아 안다. ◂
또 생각한다.
‘이들 모든 인연은 유상(有常)할까, 무상할까?’
또 생각한다.
▸ ‘인연이 합하여 이루어진 신식은
모두 무상(無常)★★하고, 근본이 없다.
이 신식이 무상(無常)★★에 의지하여 망상(妄想)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인연에 따라 12인연이 있다. ◂
▸ 모든 것이 소멸[盡]로 돌아가니
무상(無常)★★하고,
괴롭고,
공하고,
무너져 없어지고 이별하고,
욕심을 버리고,
소멸하여 없어진다.’◂
▸ 이것을 분명히 깨달은 이라야
근본이 없음을 알고,
마음을 항복받고,
모든 일어나는 생각이 없어져 도행(道行)에 들어간다. ◂
▸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스스로의 거만함을 없애
교만과 방일이 없는 선정의 업에 이르러
청정한 행이 나타난다.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르고,
구경(究竟)의 본말(本末)인
성법인(聖法印)1)의 청정한 업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모든 비구들은 이것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이 예를 올리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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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원강(元康) 4년(294) 12월 25일 월지국 보살 사문 담법호(曇法護)가 주천에서 이 경을 역출하고 제자 축법수(竺法首)가 필사하여 이 심오한 법을 시방에 널리 유포시켜 대승이 항상 빛나게 하였다.
1)
1) 송본ㆍ원본ㆍ명본에 따라 유성법인(由聖法印)에서 유(由)를 생략하였다.
영원하지 않다. => 무상(無常)
상이 없다. => 무상(無想)
이런 차이가 있다.
한편 혼동을 일으키는 상에 다음도 있다.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
그래서 이들도 함께 살필 필요가 있다.
이것이 현실에서 갖는 망상분별, 아상, 인상[보특가라상], 중생상[생명상], 수자상[목숨상],
이런 내용과 관련된다.
그리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무상해탈삼매와 관련된다.
또 이는 수행자가 넘어야 할 고비 안인 수행과도 관련된다.
그리고 수행자가 증득해야 할 무생법인의 증득과도 관련된다.
그리고 수행자가 얻어야 할 붙퇴전의 상태와도 관련된다.
이는 특히 생사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적용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렇거나 안 그렇거나 별 차이가 없다.
만화의 사정과 같다.
만화도 실답지 않다.
그것이 생사고통과 관련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일으키는 망집은 고통과 관련이 된다.
따라서 위 내용을 이런 상황에 적용해 잘 해결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불설성법인경』에서 처음에 다음처럼 제시한다.
...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설령 어떤 사람이, ‘공(空)을 구하지 않고 무상(無想)에 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뜻을 내어 스스로 거만하지 않은 선정(禪定)의 업에 이르려고 하나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사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각 영역에서 각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다른 내용에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마치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다.
아무리 생생하게 그 내용을 얻어도 그런 조건과 상황에서 얻는 것 뿐이다.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도 성격이 마찬가지다.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불가득, 실재의 공함]
그런 가운데 그런 조건에서 얻는 내용이다.
눈에서 어떤 내용을 본다고 하자.
이런 경우 눈을 감으면 그 내용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경우 그렇더라도 본 바탕에 그 내용이 그대로 있으리라고 잘못 여긴다.
그러나 눈으로 본 내용은 청각영역이나 후각, 미각, 촉각영역에서조차도 얻어지지 않는다.
관념영역에서도 그 사정이 같다.
그리고 나머지 각각도 또 다른 영역과의 관계가 이와 같다.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은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짜에 해당하는 참된 실체가 없다. [무아, 무소유]
그런 가운데 그 내용을 한 주체가 직접 얻을 수 없다. [불가득 ]
따라서 이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 없다.
그래서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같다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좋다 나쁘다 등을
모두 떠난다. [불이법]
그리고 언설표현을 떠난다. [언어도단]
따라서 이런 상태를 어떤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란 표현을 빌려 나타내게 된다. [실재의 공함]
현실은 이런 실재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각 주체가 그런 조건에서 얻는다.
즉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그처럼 얻는 것이다.
그래서 꿈과 성격이 같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그래서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니다. [공해탈삼매]
그런데 이 생사현실은 정작 꿈은 아니다.
그 하나하나는 앞과 같은 성격으로 실다운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다수 주체가 일정한 공간과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에서 엇비슷한 내용을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얻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그래서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꿈처럼 이를 그대로 방치할 도리가 없다.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해결해야 한다.
앞에서 한 주체가 세계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의 성격을 살폈다.
이 일체의 성격은 그 주체가 마음으로 얻어낸 마음 내용물이다.
그런데 특성이 각기 다르다.
재료로서 감각현실과 관념내용만 따로 놓고 살펴보자.
그 재료 자체에는 생사고통이나 생멸은 얻을 수 없다.
단지 있다고 할 것은 관념내용일 뿐이다.
있고 없음은 관념영역에서만 일으켜 문제삼는 내용이다.
그래서 있다고 할 것은 명자 뿐이라고 제시하게 된다.
현실에서 생멸이라고 여기는 내용은 다음이다.
예를 들어 한 주체가 눈을 뜨고 무언가를 본다고 하자.
눈을 뜨면 보인다.
눈을 감으면 사라진다.
그리고 보이는 내용에 무언가 들고 남이 있다.
이런 것을 놓고 있다 없다라는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일정 부분이 무엇 예를 들어 a라고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a 가 없다가 있게 되었다고 여긴다. [ 생]
또 있다가 없게 된다고 여긴다 [멸 ]
그리고 그렇게 생멸하게 만드는 요소를 그 안에서 찾는다. [인과]
그런데 처음에 다음을 제시했다.
○ 은 ■ 이 아니다.
또 ○ 에는 ■ 을 얻을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 은 ○ 이 아니다.
또 ■ 에는 ○ 이 없다.
그래서 위 내용 전체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있고 없음을 따질 때 그 유무 자체가 관념분별 ■이다.
그리고 그 관념분별■ 은 관념영역안 내용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감각현실 ○ 과 관념내용 ■ 을 함께 얻는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이 두 재료를 대하는 가운데 '분별영역에서' 망상을 일으키게 된다.
즉 ○ 을 대해서 ■ 을 일으키는 상황이 있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그 주체는 ○ 은 ■'이다'라고 잘못 여긴다.
또 ○ 에는 ■ 이 '있다'라고 잘못 여긴다.
예를 들어 영희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이 때 철수가 손가락으로 일정 부분을 가리키는 현상이 이 경우다.
그런데 그 상황의 사정이 그렇지 않다.
심정적으로는 ○ 에는 ■ 이 있는 것처럼 여길 수 있다.
때로는 ○ 과 ■ 이 서로 엇비슷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따로 따로 비교해보기로 하자.
그러면 각 내용에서 다른 영역의 내용은 한 부분 조차도 찾을 수 없다.
○ 의 한 부분에서도 ■의 한 부분도 얻을 수 없다 .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눈을 감고 떠올리는 영희가 있다고 하자.
그 내용에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손으로 만져 얻는 감각현실 한 부분도 없다.
사정이 이렇다.
앞에서 낙엽을 보고 누님을 떠올리는 사례를 들었다.
그 경우에 사정이 그렇다고 낙엽이 누님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연필이란 생각을 떠올리고 난 후 기차란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연필이 기차가 아니다.
연필에 기차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다.
감각현실의 일정부분 ○ 을 대해 일정한 분별 ■ 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현실에 ○ 도 얻고 ■ 도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 은 ■ 은 아니다.
또 ■ 이 ○ 도 아니다.
그렇지만, ■을 ○ 을 떠나 얻은 것도 아니다.
현실 상황이 이와 같다.
그래서 현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 에는 ■ 을 얻을 수 없음을 잘 파악해야 한다. [무상해탈삼매]
그래야 생사고통을 벗어날 해탈문을 찾아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일으키는 쓸데없는 소원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도 제거해야 한다. [무원무작해탈]
이것이 공해탈문과 무상해탈문 무원무작 해탈문이다.
이들 해탈문들은 모두 이와 관련된다.
현실 본 상태에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정려 수행을 통해 이런 현실사정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해탈문을 찾아 들어서서 해탈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점이다.
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이 많다.
그런데 그 상황에 생사고통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이 사정을 정려 수행과 관련시켜 살펴보자.
예를 들어 현실에서 수술을 한다고 하자.
칼로 살을 잘라내야 한다.
이 상황에서 보통 의사는 마취제를 사용하게 된다.
그런다고 살을 잘라내는 수술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문제되는 생사고통의 성격은 이와 같다.
그런데 마취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정려의 사마타 수행으로 이런 상태가 가능하다.
이는 예를 들어 삼국지의 관운장이 화살을 뽑아내는 수술상황과 성격이 같다.
그 상황에서 관운장이 바둑에 초점을 맞추어 집중한다고 하자.
그러면 나머지 영역에는 분별이 따르지 않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수술을 하게 된다.
본래 감각현실의 상태에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분별이 대응해 일어나지 않으면 고통을 겪지 않게 된다.
그것이 제거되는 효과를 거둔다.
한편 관념분별 영역도 마찬가지다.
즉 ■ 만 떼어 놓고 보면 사정이 마찬가지다.
■ 에는 ○ 이 없기 때문이다. [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 ]
그래서 이 두 재료 자체엔 생사고통을 본래 얻을 수 없다.
단지 있는 것은 명자 뿐이다.
그런데 감각현실 일정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 은 ■ 이라고 여기는 상태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 상태에 극심한 문제상태가 들어 있다.
가장 간단한 사례는 다음이다.
안경이 필요하다.
그런데 방을 아무리 찾아도 안경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불편함을 느낀다.
그런데 안경을 찾은 상태도 문제다.
그가 안경을 찾아서 저기 안경이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상태가 되었다고 하자.
이 상황이 망상분별 상태다.
그 ○ 부분에 그가 찾던 ■는 본래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망상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사실 감각현실 영역 어디에도 그가 찾는 ■은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는 그 가운데 ○ 부분을 대할 경우
그 ○ 부분은 ■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그리고 다른 부분들은 또 ■이 아니라고 여긴다.
이것이 상을 취한 상태다.
그리고 이것이 망상분별 현상이다.
그리고 그는 이후 매 상황을 이런 망상에 바탕해서 대한다.
그래서 그런 경우 그 안경을 그처럼 찾은 것과 찾지 못한 차이가 크다.
이 사정을 앞에서 살폈다.
예를 들어 그런 경우 밥을 찾아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게 된 상태와
그렇지 못한 경우는 차이가 있다.
그런 상태에서는 다시 그 이후도 이에 바탕해 다르다고 여긴다.
밥을 찾아 먹으면 이후 배가 부른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배가 고프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상태로 오래 있으면 죽는다고 여긴다.
이런 차이가 있다.
그런데 어느 한 단면의 ○ 에도 그가 문제삼는 ■ 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망집을 일으킨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차이가 크다.
망집을 일으킨 경우 그에 바탕해서 업을 행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극심한 상태는 다음이다.
매순간 당장 고통으로 여겨지는 내용을 얻게 된다.
그리고 한편 장래 얻을 고통을 생각하며 극심한 공포를 겪는 상태가 있다.
이 상태가 제일 심한 상태다. [지옥]
한편, 당장 고통으로 여길 상태에 놓여 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얻어지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언젠가는 얻으리라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그 상태에 갈증을 느낀다.
그런 가운데 업을 행하는 상태가 있다. [아귀]
한편, 자신이 매 순간 대하는 것의 본 정체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좋음과 나쁨을 번갈아 얻어 나간다. [축생]
이런 3 악도의 상태가 망집상태를 바탕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상태를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 놓이게 되는 과정을 잘 살펴야 한다.
본래 그 상황을 구성하는 재료 자체에는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매 순간을 실답게 여기며 생생하게 겪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본래 그렇지 않은데도 그렇게 되는 과정을 먼저 살펴야 한다.
한 주체가 한 정지단면에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래서 ○은 ■ 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집착을 일으킨다.
그런데 집착 가운데 자신과 자신의 것에 가장 극심하게 집착을 갖는다.
즉 일정 부분 내용은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또 어떤 부분은 그런 자신의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여기에는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배경 사정이 있다.
○ 부분을 대하면 자신이라고 여길만한 성품이 거기에 들어 있다고 분별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생명이 공통적으로 갖는 성품이다.
또는 자신만 갖는다고 여기는 성품이다.
그런데 이런 성품은 분별 영역에서 일으킨 관념내용■ 이다.
그리고 그 각 부분에는 본래부터 그런 내용이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그 부분을 대하면서 그런 분별을 일으킨다.
그런 가운데 그 부분에 그런 성품이 '들어 있다'고 여기고 대하는 것뿐이다.
그런 가운데 일정 부분을 자신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업을 행한다.
즉 망집을 바탕으로 관념영역에서 소원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무언가를 행하게 된다.
본래 자신이 일으킨 소원 ■ 에 해당한 내용은 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감각현실 □ 부분에 ■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에 해당한 내용을 감각현실 □ 부분에서 얻어 내기 위해 업을 행한다.
그래서 □ 부분을 휘젖게 된다.
그는 일정 부분 ○ 에는 자신이 찾는 ■ 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런 ○ 가 얻어지면 이제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 이라고 가리킬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런 상태를 찾아 업을 분주히 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이 전제척으로 망상분별으로 바탕으로 진행된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이 과정 처음부터가 잘못 되었다.
그런데 한번 망집을 일으킨 후 매듭이 지어진 상태에서는 이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다.
한편 그런 바탕에서 인과를 대강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한다.
그런 가운데 방안을 찾아 행해 나간다.
그 주체는 그것이 소원을 성취할 방안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러면 그것이 축적되어 결국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
이것이 생사현실 상황의 문제다.
이 전반적인 과정을 살핀다고 하자.
이런 경우 처음 일으킨 망상분별만 놓고 살피면 문제가 비교적 가볍다 .
예를 들어 허구적인 만화나 시나 소설을 대한 것과 성격이 비슷하다.
그런데 생사현실의 사정은 이와 다르다.
망집에 바탕해 그것을 대단히 실답게 여긴다.
즉, 그가 생각하는 ■은 감각현실 ○ 에도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한편 본 바탕 실재에도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침대에서 꾼 바다나 황금꿈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잘못 여긴다.
따라서 자신이 일으킨 분별■이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각 상황에 있다고 할 것은 명자뿐이다.
본 바탕과 감각현실 □ 을 얻지만,
이들 영역에 그가 찾는 ■ 은 본래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사현실에서 한 주체가 문제삼는
자신이나 그 생사나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 사정을 앞에서 계속 살폈다.
그런 사정을 또 정려 수행을 통해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여러 수행은 어떤 바탕에서 무엇이 행하는가를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앞에서 문제삼는 자신이나 생사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했다.
이는 실재가 전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여러 감각현실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단지 문제삼는 내용■을 실재나 기타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는 유무의 극단을 모두 떠난다.
유의 극단은 무언가가 실답게 있음을 고집한다.
무언가 얻으면 그것이 다른 영역에도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 그와 관련된 진짜에 해당한 참된 실체가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렇지 않다.
무의 극단은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잘못 이해한다.
그런데 그런 것은 아니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각 영역에서 각기 내용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즉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그런 조건에서 화합해 얻는 것 뿐이다.
마치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다.
그래서 실답지 않게 있는 것이다.
이 사정을 있는 그대로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분별하는 내용도
성격이 이와 같다.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내용을 ▽ 라고 표시해보자.
▽ 은 그렇게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에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그가 ▽이 곧 자신이라고 망집을 일으켜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 그 사정이 악화된다.
그런 바탕에서 점차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사정을 이해하면 달라진다.
그러면 망집이 제거된다.
그리고 망집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중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미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행을 대신 원만히 행하게 된다.
그렇게 망집을 제거할 때 사라지는 것은 망집뿐이다.
원래 망집을 일으킨 재료 자체는 늘고 줆이 없다.
이 사정이 『불설성법인경』에 다음처럼 제시된다.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 ‘나의 아(吾我)★★가 생겼다가 사라지니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라고 하고, 곧 사유하여 ‘나의 아(我)가 의미를 익히고 모든 식(識)을 분별하는 소인(所因)이니 모두 인연에서 이러한 업에 이르고, 이러한 인연에서 신식(神識)이 있게 되었구나’라고 깨달아 안다. ◂
또 생각한다. ‘이들 모든 인연은 유상(有常)할까, 무상할까?’
또 생각한다.
▸ ‘인연이 합하여 이루어진 신식은 모두 무상(無常)★★하고, 근본이 없다. 이 신식이 무상(無常)★★에 의지하여 망상(妄想)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인연에 따라 12인연이 있다. ◂
예를 들어 어떤 벽돌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벽돌을 자신으로 여기게 된 과정을 12 연기를 통해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종국적으로 그 벽돌이 자신이 아님을 이해했다고 하자.
그런데 이처럼 올바른 이해를 한다고 해서
그런 경우 처음 망상을 일으키게 한 재료 자체가 어디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 경우 자신으로 여겼던 내용이 없어졌다고 허탈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처음 있다고 여긴 그런 자신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있다가 없어지게 된 것이 아니다.
단지 본래부터 없던 것을 없다고 올바로 상응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런 벽돌을 대해 자신으로 여겼던 잘못된 분별만 제거된다.
그리고 이후 그런 분별을 바탕으로 행하는 업이 제거될 수 있다.
그러면 그런 바탕에서 받게 될 생사고통이 제거된다.
이것이 1차 수행의 목표점이다.
그리고 이후 그런 해탈을 얻게 된다고 하자.
그래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후 이를 바탕으로
다른 생사현실에 임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을 해나가게 된다.
그런 경우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할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들 기본 수행이 필요하다.
종합적으로 결론을 내려 보자.
우선 생사현실에 집착을 갖고 대할 자신과 그 생사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바탕으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내용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비유적으로 어떤 벽돌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고 하자.
그런데 잘 살피면 갓난아이때부터 소년 장년 노년을 거치는 가운데
매순간 내용이 다르다.
더 나아가 생사과정을 놓고 보면 더 차이가 크다.
그런데 매 상황 매 순간 이런 것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게 만드는 기제가 있다.
근본 정신과 제 7 식 그리고 이로부터 다시 분화되는 전 5식과 제 6 식 등이 그런 것이다.
서원을 갖는다고 바로 성취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방향을 잡았다는 점에 의미는 있다.
몸이 아프다보니 여러가지 우울하다.
아픔을 공감해주는 이도 주변에 적다.
원래부터 혼자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그런데 주변에 친근한 이가 있으면 그래도 위안이 되고 도움될 수 있다.
좀 더 안락하게 늙고 병들고 죽어갈 수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각자 자기 살아가기 바쁘다.
다른 이의 고통까지 공감하면서 도움을 주는 이가 거의 없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친근한 경우는 그런 기대를 갖기도 한다.
그런데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혼자 외롭게 죽어가게 된다.
그런 가운데 새로 서원을 한번 일으켜 본다.
집착을 가졌던 것은 내려 놓는다.
그간 친근하게 지낸 경우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자칫 기대를 가진 만큼 원망이나 미움으로 성격이 바뀔 수도 있다.
집착을 내려 놓는다는 것과 미움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다.
집착을 내려 놓는 것으로 충분하다. 미움을 갖지 않는다고 다시 집착을 가지면 그것도 또 문제다.
상을 취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가운데 5일째 통증을 겪게 된다.
그러다보니 결국 통증이란 낯선 감각이었을 뿐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본래 생사를 얻을 수 없고 본래 무아다.
그런 사정상, 큰 관계는 없다.
다만 다음 생도 또 수행을 해야한다.
그래서 다음 생을 고려하며 서원을 구상하며 보내게 된다.
그런 가운데 앞으로 수행을 하더라도
수행시작시점부터 마칠 때까지
존중받고 수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야 중생제도의 효과가 크다.
이번 생은 별로 그렇지 못했다.
현재는 연구실 안에서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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