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懶翁스님 게송偈頌
- 념불念佛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글
1. 깊고 고요해 말이 없으매
뜻이 더욱 깊었나니
묘妙한 그 이치를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앉고 눕고 가고 옴에
다른 일 없고
마음 가운데 생각 지니는 것
가장 당당하여라
2. 자성(自性)인 아미타불 어느 곳에 있는가
언제나 생각 생각
부디 잊지 말지니
갑자기 하루 아침에
생각 조차 잊으면
물건物件마다 일마다 감출 것이 없어라
3. 아미타불 생각할 때
부디 사이 떼지 말고
하루 종일 언제나 자세히 보라
하루 아침에 갑자기 저절로 생각이 붙으면
동쪽 서쪽이 털끝 만큼도 간격 없으리
4. 사람들 잘못 걸어
고향故鄕에 돌아가지 않기에
이 산승은
간절懇切히 또 격려激勵하나니
문득 생각의 실마리마저
뜨거운 곳에 두면
하늘 땅을 뒤엎고 꽃 향기香氣 맡으리
5. 생각 생각 잊지 말고
스스로 지녀 생각하되
부디 늙은 아미타불을 보려고 하지 말라
하루 아침에
문득 정(情)의 티끌 떨어지면
세워 쓰거나 가로 들거나
항상恒常 떠나지 않으리라
6. 아미타불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붙들어
두고 부디 잊지 말지니
생각이 다하여
생각 없는 곳에 이르면
6 문에서는 언제나
자금광(紫金光)을 뿜으리라
7. 몇 겁劫이나
괴로이 6도(六途)를 돌았던가
금생今生에 인간人間으로 난 것
가장 희귀稀貴하여라
권하노니
그대들 어서 빨리 아미타불 생각하고
부디 한가히 놀면서
좋은 기회 놓치지 말라
8. 6도(六途)에 윤회輪廻하기
언제나 그칠 것인가
떨어질 곳 생각하면
실로 근심스러워라
오직 념불念佛에 기대어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세상世上 번뇌煩惱 떨어버리고
그 곳에 돌아가자
○ [pt op tr]
[주]------
나옹
懶 게으를 나(라), 혐오할 뇌(뢰)
翁 늙은이 옹
고려(高麗) 31대 공민왕(恭愍王) 때의 왕사(王師).
초명은 원례(元惠). 속성은 아(牙). 호는 나옹ㆍ강월헌(江月軒). 영해(寧海) 사람.
중국(中國) 서천(西天)의 지공(指空)을 따라 심법(心法)의 정맥(正脈)을 이어받았음.
고려(高麗) 말(末) 선종(禪宗)의 고승(高僧)으로서
조선(朝鮮) 시대(時代) 불교(佛敎)에 크게 영향(影響)을 끼침.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지공(指空)ㆍ무학(無學)과 함께 삼대 화상(三大和尙)이라 일컬어짐.
시호(諡號)는 선각(禪覺). 혜근(惠勤). (1320~1376)
나옹화상은 고려 말 승려 혜근의 호이다. 이름보다 호가 널리 알려졌다.
나옹화상이 “서왕가”를 지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내용이나 시상 전개에 있어 그의 다른 작품들과 일맥상통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나옹화상을 작자로 인정한다.
해인사에 보관된 목판본 〈신편보권문 新編普勸文〉에 〈나옹화샹셔왕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정토사상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어려운 불교 교리나 수행에 관한 초보적인 사항을
되도록 쉬운 말로 풀이해
낮은 신분 계층의 신도를 광범위하게 끌어들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세상만사가 덧없으니
세상의 즐거움에 집착하지 말고
불교에 귀의하여
염불로 공덕을 쌓아 극락왕생하자고 권면하는 내용이다.
[Daum백과] 나옹 화상, 서왕가 – 다음백과, Daum
나옹설화
성격 설화
유형 작품
분야 문학/구비문학
요약 고려 말의 고승 나옹 혜근(惠勤)에 관한 설화.
내용
인물전설로 문헌설화는 「나옹화상행장」에 부분적으로 언급이 있고,
출생에 관한 부분은 『영해군읍지』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나옹의 행장에서는 나옹이 태어날 때 상서로운 기운이 있었다고만 했는데,
출생지인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현지의 구전은 주목할 만한 내용을 갖추고 있으며,
설화 유형의 변모를 살피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
가난해서 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못하는 형편이라
어머니가 관가에 잡혀가는 도중에 나옹이 태어났다 한다.
무도한 관속들이 어머니를 끌고 가자
핏덩이인 채로 버림받았던 아이는 날짐승이 날개로 덮어 주어 살아났다.
태어나자 버림받는 영웅의 일생을 되풀이하였다 하겠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참혹하고,
미천한 백성에 대한 관가의 횡포를 나타낸 점이 다르다.
세부적인 사정은 이야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어디서도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없었으며 도선(道詵)의 경우처럼 어머니가 외를 먹고 나옹을 잉태했다고도 한다.
열 살쯤 되었을 때, 외를 동냥하러 온 스님을 따라 나서서 출가를 했다는 데서
생명의 상징인 외가 다시 등장한다.
나옹은 득도해서 자기 고장을 떠나면서 지팡이를 꽂고,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나 가지가 무성하면
자기가 살아 있는 줄 알라고 하였다.
그 나무는 지금의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에서 반송(盤松 :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진 소나무)으로 자랐는데,
시들기 시작해서 1965년경에 고사했다.
반송 삽화는 최치원(崔致遠)이 해인사에 꽂아 둔 지팡이나,
유정(惟政)이 표충사(表忠寺)에 꽂은 지팡이,
의상(義湘)이 부석사에 꽂은 지팡이 등과 같이 전국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유형이지만,
고목의 모습을 지팡이를 꽂은 도인의 생사와 연결시키는 점이 특이하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인물전설의 의미와 기능』(조동일,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혜근
나옹(懶翁), 강월헌(江月軒), 선각(禪覺) 惠勤
시대 고려
출생 1320년(충숙왕 7)
사망 1376년(우왕 2) 5월 15일
경력 왕사, 회암사 주지, 원나라 연경의 광제선사 주지
유형 인물
관련 사건 홍건적의 난
직업 승려
성별 남
분야 종교·철학/불교
요약 1320년(충숙왕 7)∼1376년(우왕 2). 고려 후기의 고승.
목차
개설
생애와 활동사항
학문세계와 사상
상훈과 추모
개설
속명은 아원혜(牙元惠),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법명은 혜근(惠勤), 또는 혜근(彗勤).
아버지는 선관서영(善官署令) 서구(瑞具)이다.
중국의 지공(指空)·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 인가를 받고
무학(無學)에게 법을 전하여,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웠다.
생애와 활동사항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서 출가하였다.
그 뒤 전국의 이름 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하고,
석옹(石翁)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승 지공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지내다가
1350년(충정왕 2)에 평강부(平江府) 휴휴암(休休庵)에서 한철을 보내고,
다시 자선사(慈禪寺)의 평산처림을 참견(參見)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
이듬해 명주(溟州)의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육왕사(育王寺)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하였다.
그곳에서 무상(無相)과 고목영(枯木榮) 등의 승려를 만나 법론(法論)을 벌였고,
1352년에는 복룡산(伏龍山)의 천암장(千巖長)을 찾았다.
원나라 순제(順帝)는
그를 연경의 광제선사(廣濟禪寺) 주지로 임명하였고, 1
356년 10월 15일에는 개당법회(開堂法會)를 가졌다.
순제의 만류를 무릅쓰고
주지직을 내놓은 뒤
다시 지공을 찾아갔다가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하였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청으로
잠시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던 중,
홍건적으로부터 신광사를 수호하였다.
그 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
(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졌다.
그 뒤 송광사에 있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였으며,
1376년에는 문수회(文殊會)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다.
왕명으로 밀성(密城: 밀양) 영원사(塋源寺)로 옮겨가던 중,
1376년(우왕 2) 5월 15일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56세, 법랍 37세였다.
학문세계와 사상
그는 참선과 교학을 같이 닦음으로써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승으로,
고려 말의 선풍을 새롭게 선양하였다.
그가 법을 전해 받은 지공의 선풍이
공(空)의 이치를 통해 해탈한다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혜근은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이나 조계종과는 다른
임제(臨濟)의 선풍을 도입하여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의 『귀의자심삼보(歸依自心三寶)』의 주장과
‘염불은 곧 참선’이라고 한 것은
이후의 우리나라 선종에서 계속 전승되었다.
계율관(戒律觀)에서도 3귀의(三歸依)가 아닌 4귀의를 주장하고 있는데,
수정신4귀의(受淨信四歸依)·
참제제3업죄(懺除諸三業罪)·
발홍서6대원(發弘誓六大願)·
최상승무생계(最上乘無生戒) 등이다.
또,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중생 제도의 보살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6 대서원(六大誓願)을 세우기도 하였다.
제자로는 자초(自超)·지천(智泉) 등
2,000여 명이 있으며,
저서로는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1권과
『가송(歌頌)』 1권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이색(李穡)이 글을 지어 세운 비와 부도가 회암사와 신륵사에 있다.
참고문헌
『동사열전(東師列傳)』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조선총독부, 1919)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이능화, 신문관, 1918)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Daum백과] 혜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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