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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8일 화요일

아비달마대비바사론_K0952_T1545_001

『아비달마대비바사론』
K0952
T1545

제1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아비달마대비바사론_K0952_T1545 핵심요약





♣0952-001♧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1권



불교용어 

‡마하가전연 =가다연니자. 
납식 = 편, 장, 



● 아비달마발지대비바사론서(阿毘達磨發智大毘婆娑論序)

● 논을 지은이 - 세존

● 가다연니자


● 경률논 3 장의 공통성- 지혜, 깨달음 등력 무외 대비
● 경률논 3 장의 차별성 

● 이름의 차별

● 의처의 차별

● 증승설의 차별

● 소현의 차별

● 등류의 차별

● 소설의 차별

● 소위의 차별

● 분위의 차별

● 진취의 차별


● 발지론을 지은 이유

●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하여
● 무명의 어두움을 깨뜨리기 위함

● 무아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함

● 생사의 강을 건너게 하기 위함

● 계경 등을 비추어 주기 위함

● 선(善) 등의 모든 법을 관찰하기 위함

● 대논사들이 기울거나 동요하지 않음을 드러내기 위함

● 지혜를 늘리고 깨달믐의 뜻을 열고 나를 헤아리지 않게 하기 위함

● 지혜를 더욱 늘려 주기 위함

● 깨달음의 뜻을 열기 위함

● 나를 헤아라지 않게 하기 위함



○ [pt op tr]



아비달마대비바사론


K0952V026P0001a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 제1권


오백 아라한(阿羅漢) 지음

현장(玄奘) 한역

송성수 번역

김석군 개역



아비달마발지대비바사론서(阿毘達磨發智大毘婆娑論序)


● 논을 지은이 - 세존 

【문】누가 이 논(論)1) 을 지었는가?

【답】불세존(佛世尊)이시다.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알아야 하는 법성(法性)은 심히 깊고 미묘하기 때문이니, 

불세존같이 일체지(一切智)를 지닌 분이 아니면 누가 끝까지[究竟]  

평등하게 깨달아서[等覺]  

열어 보이겠는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누가 묻고 누가 대답했는가?

어떤 이는 “사리자(舍利子) 존자가 묻고 세존께서 대답하셨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5백 아라한이 묻고 세존께서 대답하셨다”라고 말하며, 


어떤 이는 “모든 천신(天神)들이 묻고 세존께서 대답하셨다”라고 주장한다.


어떤 다른 논사(論師)는 “세존께서 변화로 만들어낸 비구가 묻고 세존께서 대답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은 으레 알아야 하는 법성을 모든 세간에 반드시 열어 보이셔야 하는데 

묻는 이가 없으면 그때 세존께서는 변화로 비구를 만드시되
생김새가 단정하여 여러 대중들이 보기 좋아하며, 

수염과 머리를 깎아 없애고, 

승가지(僧伽胝)2) 를 입혀 그로 하여금 묻게 하고 세존께서는 대답하시기 때문이니, 

마치 『의품경(義品經)』의 인연을 물은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 가다연니자

【문】만일 그렇다면 이 논은 무엇 때문에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3) 존자가 지었다고 전해오는가?

【답】그 존자가 기억하여 연설해서 널리 유포했기 때문에
이 논의 지은이의 이름을 그에게 돌렸으나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또 어떤 이는 “이 논은 바로 저 가다연니자 존자가 지었다”고 말한다.



【문】어찌 앞에서 “모든 종류의 알아야 하는 법성은 매우 깊고 미묘하기 때문이니, 

불세존같이 일체지를 지닌 이가 아니시면 누가 끝까지 평등하게 깨달아서 열어 보이겠는가?”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 존자가 이 논을 지을 수 있겠는가?

【답】그 존자도 미묘하고 매우 깊으며 날래고 날카로우며 교묘한 깨달음의 지혜[覺慧] 가 있어서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잘 알고, 

글의 뜻과 전제(前際)ㆍ후제(後際)를 통달했으며, 

삼장(三藏)을 잘 이해하고 삼계(三界)의 오염[染] 을 여의었으며, 

3명(明)을 성취했고, 

6신통(神通)과 8해탈(解脫)을 갖추었으며, 

무애해(無礙解)를 얻었고 묘원지(妙願智)를 얻었으며, 

일찍이 과거 5백의 부처님 처소에서 범행(梵行)을 쌓고 닦으면서
‘나는 미래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아비달마(阿毘達磨)를 지으리라’고 큰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
이처럼 말한 것이다.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의 제자들 중에는 으레 모두 두 분의 큰 논사[二大論師] 가 있어
정법(正法)을 맡아 지니니, 

부처님께서 세간에 계실 때라면 사리자 존자와 같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라면 가다연니자 존자와 같다. 

그러므로 저 존자는 서원과 지혜의 힘으로써
법에 이익될 것을 관찰하여 이 논을 지은 것이다.



【문】만일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아비달마는 어떤 것인가?

【답】세존께서 세간에 계실 때에 곳곳의 방읍(方邑)에서 모든 유정들을 위하여
갖가지 논의 길[論道] 로써 아비달마를 분별하고 연설하셨는데,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나 세간에 계실 때에 여러 성스러운 제자들이 묘한 서원과 지혜로써
순서에 따라 경을 모아 편찬하여 따로따로 부류(部類)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가다연니자 존자는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역시 묘한 서원과 지혜로써 순서에 따라 편찬하여 『발지론(發智論)』을 지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논의 길 가운데서
장문(章門)4) 을 세워 간략한 게송을 제시하고
따로따로 납식(納息)을 짓고 통틀어 온(蘊)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이른바 갖가지 이상(異相)의 논의 길을 모아 잡온(雜蘊)을 만들었고, 

결(結)의 논의 길을 모아 결온(結蘊)을 만들었으며, 

지(智)의 논의 길을 모아 지온(智蘊)을 만들었고, 

업(業)의 논의 길을 모아 업온(業蘊)을 만들었으며, 

대종(大種)의 논의 길을 모아 대종온(大種蘊)을 만들었고, 

근(根)의 논의 길을 모아 근온(根蘊)을 만들었으며, 

정(定)의 논의 길을 모아 정온(定蘊)을 만들었고, 

견(見)의 논의 길을 모아 견온(見蘊)을 만든 것이다.


모든 오타남송(鄔拖南頌)5) 은 모두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불세존께서 곳곳의 방읍에서 갖가지 유정들을 위하여 형편에 맞게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대덕(大德) 법구(法救)가
차츰차츰 들었던 것을 순서에 따라 모아 편찬하여 품명(品名)을 붙였으니, 

무상(無常)에 대한 게송을 모아 「무상품(無常品)」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나아가 범지(梵志)에 대한 게송을 모아 「범지품(梵志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도 그와 같아서 아비달마는
본시 부처님의 말씀인데
역시 존자가 순서에 따라 모아 편찬한 것이다. 



또 부처님의 말씀이거나 제자의 말에 관계없이
법성에 어긋나지 않으면
세존께서는 모두 비구들이 받아 지니는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에
저 존자는 하나하나 들었던 것을
때로는 서원과 지혜의 힘으로써 관찰하여 그것을 모아 편찬하여
정법이 오래도록 세간에 머무르게 하려고 이 논을 지은 것이다.



또 모든 부처님은 세간에 나오시면 모두 삼장(三藏)6) 을 말씀하시니, 

소달람(素怛纜)7) 과 비나야(毘那耶)8) 와 아비달마(阿毘達磨)이다.



● 3 장의 공통성과 차별성 

이와 같은 삼장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 공통성- 지혜, 깨달음 등력 무외 대비 

어떤 이는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의 지혜의 바다[一智海] 에서 생겼기 때문이요, 

하나의 깨달음의 연못[一覺池] 을 따라 나왔기 때문이며, 

평등한 힘[等力] 과 두려움 없음[無畏] 에 섭수되기 때문이요, 

동일한 대비(大悲)에서 똑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 이름의 차별 
또 어떤 이는 “또한 차별이 있다. 

우선 이름이 서로 다르다. 

이것은 소달람이라 하고, 

이것은 비나야라 하며, 

이것은 아비달마라 한다. 



○ 의처의 차별 
또 의지하는 곳[依處] 이 서로 다르다. 

만일 증상의 마음[增上心] 에 의지하여 논한 길[論道] 이면 소달람이요, 

만일 증상의 계율[增上戒] 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비나야며, 

만일 증상의 지혜[增上慧] 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아비달마이다”라고 말한다.


【문】모든 것 가운데서는 모두를 얻을 수 있다. 

소달람 가운데서도 증상의 계율과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있고, 

비나야 가운데서도 증상의 마음과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있으며, 

아비달마 가운데서도 증상의 마음과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있으므로
이와 같은 삼장에는 당연히 차별이 없어야 하지 않는가?



○ 증승설의 차별 

【답】더욱 뛰어나다는 설[增勝說] 에 의거한 것이니, 

소달람 가운데서는 증상의 마음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더욱 뛰어나고, 

비나야 가운데서는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더욱 뛰어나며, 

아비달마 가운데서는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더욱 뛰어나다.



어떤 이는
“소달람 가운데서 증상의 마음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소달람이요,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비나야이며,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아비달마이다.


비나야 가운데서도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비나야요, 

증상의 마음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소달람이며,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아비달마이다.


아비달마 가운데서도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아비달마요, 

증상의 마음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소달람이며,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비나야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의지하는 곳에 따라 역시 차별이 있다.



○ 소현의 차별 

또 드러내는 것[所顯] 에서도 차별이 있다. 

소달람은 차례[次第] 를 드러내니, 

소달람 가운데서는 마땅히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 이 품(品) 다음에 곧장 저 품을 말씀하셨을까?’라고 차례를 구해야 한다. 


만일 비나야라면 연기(緣起)를 드러내니, 

비나야 가운데서는
마땅히 ‘세존께서 어떤 연기법을 의지해서 저와 같은 학처(學處)를 세우셨는가?’라고 연기를 구해야 한다. 


만일 아비달마라면 성품과 모양[性相] 을 드러내니, 

아비달마 중에서는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과 모양을 구해야만 하고
저 차례와 연기를 구하여 혹은 앞인지 혹은 뒤인지 혹은 연기가 없는지 모두 과실은 없는지 구해서는 안 된다.



○ 등류의 차별 

또 등류(等流)9) 에도 차별이 있다. 

소달람은 힘[力] 의 등류요, 

비나야는 대비(大悲)의 등류이며, 

아비달마는 무외(無畏)의 등류이다.



○ 소설의 차별 

또 말씀한 것[所說] 에도 차별이 있다. 

갖가지를 뒤섞어 말씀하신 것은 소달람이요, 

모든 학처를 말씀하신 것은 비나야이며,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분별한 것은 아비달마이다.



○ 소위의 차별 

또 하는 일[所爲] 에도 차별이 있다. 

아직 선근을 심지 못한 이면 선근을 심게 하기 위하여 소달람을 말하고, 

이미 선근을 심은 이면 상속하고 성숙하게 하기 위하여 비나야를 말하며, 

상속한 뒤에 성숙한 이면 바른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하여 아비달마를 말한다.



○ 분위의 차별 

또 분위(分位)에도 차별이 있다. 

업을 시작한 자리[始業位] 에 의거하여 소달람을 말하고, 

이미 익숙히 익힌 자리[已串習位] 에 의거하여 비나야를 말하며, 

뛰어나게 작의하는 자리[超作意位] 에 의거하여 아비달마를 말한다.



○ 진취의 차별 

또 나아감[進趣] 에도 차별이 있다. 

아직 바른 법[正法] 에 들지 못했으면 바른 법에 들게 하기 위하여 소달람을 말하고, 

이미 바른 법에 들었으면 학처(學處)를 받아 지니게 하기 위하여 비나야를 말하며, 

이미 학처를 받아 지녔으면 모든 법의 진실한 모양을 통달하게 하기 위하여 아비달마를 말한다. 

그러므로 삼장에는 역시 차별이 있다.



● 발지론을 지은 이유

○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하여 

【문】무엇 때문에 존자는 이 논을 지었는가?

【답】다른 이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다. 

저 존자는 ‘어떻게 하면 모든 유정들이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대해
뒤바뀜 없이 받아 지니면서 정진하고 사유(思惟)하고 헤아리고 관찰하여
한량없는 번뇌와 나쁜 행이 앞에 나타나지 않게 하면서
곧장 매우 깊은 법성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게 할까?’라고 생각하여 이 논을 지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어둡고 캄캄한 곳에 크고 밝은 등불을 켜 놓아
눈 있는 이들이 갖가지 색깔을 보게 하는 것처럼, 


존자도 그러하여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이 논을 지어서
지혜 있는 이들이 깊은 법성(法性)에 들 수 있게 하였다.




또 모든 부처님께서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12분교(分敎)를 열어 보이고 연설하신 것과 같으니, 

첫째는 계경(契經)10) 이요, 

둘째는 응송(應頌)이며, 

셋째는 기별(記別)이요, 

넷째는 풍송(諷頌)이며, 

다섯째는 자설(自說)이요, 

여섯째는 연기(緣起)이며, 

일곱째는 비유(譬喩)요, 

여덟째는 본사(本事)이며, 

아홉째는 본생(本生)이요, 

열째는 방광(方廣)이며, 

열한째는 희법(希法)이요, 

열두째는 논의(論議)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정에게 비록 인(因)의 힘은 있으나 연(緣)의 힘이 없으면
깨달음을 일으킬 자도 끝내 뛰어난 곳을 향해 나아가는 행을 닦을 수 없으니
반드시 연의 힘을 만나야 수행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못 가운데에 비록 갖가지 온발라(蘊鉢羅)11) 등 여러 묘한 연꽃이 있으나
해와 달의 광명이 비춰주지 않으면 꽃이 피어서 갖가지 향기를 내지 못하니
반드시 해와 달의 광명이 비춰주어야 종류에 따라 꽃을 피워 향기를 내는 것과 같다.


또 어둠 속에 갖가지 물건이 있으나
등불이 비춰줌이 없으면 끝내 볼 수 없으니
반드시 등불의 비춤을 빌려야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유정도 그러하여 비록 인(因)의 힘이 있으나 연(緣)의 힘이 없으면,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처럼 어떤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비유하면 어두운 방 안에

갖가지 물건이 있어도

등불이 없으면 어둠에 가려져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네.

이처럼 지혜가 있더라도

다른 이에게 법을 듣지 않으면

이 사람은 마침내

선악의 뜻을 분별할 수 없다네.


비유하면 눈 있는 이가

등불로 인하여 여러 빛깔을 보는 것처럼

지혜로운 이도 많이 들음에 의하여야

선악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네.

많이 들음[多聞] 은 법을 알 수 있게 하고

많이 들음은 불선(不善)을 여의게 하며

많이 들음은 무의(無義)를 버리게 하고

많이 들음은 열반을 얻게 한다네.





또 경에서 “두 가지 인연(因緣)이 있어야 바른 견해[正見] 을 내게 되니, 

첫째는 밖으로 다른 이의 법음(法音)을 듣는 것이고
둘째는 안으로 이치대로 사유하는 것[如理作意] 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계경에서 “네 가지 법의 사람[四法人] 이 있어서 많이 짓게 하는 것이 있으니, 

첫째는 착한 벗과 가까이 하는 것이요, 

둘째는 다른 이로부터 법을 듣는 것이며, 

셋째는 이치대로 사유하는 것이요, 

넷째는 법에 따라 법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경에서 “만일 나의 제자가 한마음으로 귀를 기울여 바른 법을 들으면
5개(蓋)를 끊게 되고 7각분(覺分)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12분교를 말씀하신 것처럼
저 존자도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지었다.



○ 무명의 어두움을 깨뜨리기 위함 

또 무명(無明)의 어두움을 깨뜨리기 위해서다. 

등불이 어둠을 깨뜨리는 광명을 내는 것처럼
아비달마도 이와 같아서 무명의 어둠을 깨뜨리고 지혜의 광명을 내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 무아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함 

또 무아(無我)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비유하면 거울의 표면을 잘 닦아 빛나게 하면
갖가지 색상(色像)이 모두 그 안에 나타나는 것처럼
아비달마도 이와 같아서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분별하여
무아의 형상이 분명히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 생사의 강을 건너게 하기 위함 

또 생사(生死)의 강을 건너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견고한 배나 뗏목을 탄 백천의 중생들이
그것에 의지하여 두려움 없이 강의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처럼

아비달마도 이와 같아서 수없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유정들이 이것에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이 생사의 이 언덕에서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 계경 등을 비추어 주기 위함 

또 계경 등을 비추어 주기 위해서다. 

마치 사람이 등불을 가지고 모든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여러 빛깔을 볼 수 있고 미혹함이 없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아비달마로써 계경을 비추면 미혹함이 없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 선(善) 등의 모든 법을 관찰하기 위함 

또 선(善) 등의 모든 법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보물을 감별하는 사람이 금강 등의 보물을 잘 관찰하는 것처럼
아비달마도 이와 같아서 선 등의 모든 법을 잘 분별하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 대논사들이 기울거나 동요하지 않음을 드러내기 위함 

또 아비달마의 대논사(大論師)들이 기울거나 동요하지 않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마치 묘고산(妙高山)12) 이 금륜(金輪) 위에 걸터앉아 있으면서
온갖 사나운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도 기울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아비달마의 대논사도 이와 같아서
청정한 시라(尸羅)13) 에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모든 나쁜 소견을 지닌 이의 업신여김과 헐뜯음과 삿된 이론으로써는
꺾거나 조복할 수 없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 지혜를 늘리고 깨달믐의 뜻을 열고 나를 헤아리지 않게 하기 위함 

또 존자는 세 가지의 인연으로 이 논을 지었으니, 

첫째는 지혜를 더욱 늘려 주기 위해서요, 

둘째는 깨달음의 뜻[覺意] 을 열어주기 위해서이며, 

셋째는 나[我] 를 헤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 지혜를 더욱 늘려 주기 위함 

지혜를 더욱 늘려 준다 함은
안팎의 모든 경론(經論) 가운데서 지혜를 더욱 늘리게 하는 것은 이 아비달마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 깨달음의 뜻을 열기 위함 

깨달음의 뜻을 연다 함은
모든 유정은 무명에 휩싸여 마치 잠에서 아직 깨지 못한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것이 변행(遍行)인가, 

어느 것이 변행이 아닌가[非遍行] , 

어느 것이 자기 경계의 연[自界緣] 인가, 

어느 것이 다른 경계의 연[他界緣] 인가, 

어느 것이 유루의 연[有漏緣] 인가, 

어느 것이 무루의 연[無漏緣] 인가, 

어느 것이 유위의 연[有爲緣] 인가, 

어느 것이 무위의 연[無爲緣] 인가, 

어떤 것이 섭수[攝] 하는 것인가, 

어떤 것이 상응(相應)하는 것인가, 

어떤 것이 인(因)인가, 

어떤 것이 연(緣)인가, 

누가 성취하고 누가 성취하지 못하는가, 

어느 것이 순전구(順前句)인가, 

어느 것이 순후구(順後句)인가, 

어느 것이 4구(句)인가, 

어느 것이 여시구(如是句)인가, 

어느 것이 불여시구(不如是句)인가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알아야 할 경계 가운데서 모든 유정들에게 깨달음의 뜻을 열어주는 것은
이 아비달마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 나를 헤아라지 않게 하기 위함 

나를 헤아리지 않게 한다 함은
존자가 지은 아비달마는
보특가라14) 가 있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항상 모든 행(行)은 공(空)하고 나[我] 가 없음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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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달마의 자성 

【문】아비달마의 자성(自性)은 어떤 것인가?


【답】무루(無漏)의 혜근(慧根)으로써 자성을 삼으니, 

1계(界)ㆍ1처(處)ㆍ1온(蘊)에 속한다.15)

1계란 법계(法界)를 말하고, 

1처란 법처(法處)를 말하며, 

1온이란 행온(行蘊)을 말한다. 


만일 상응(相應)을 겸하고 수전(隨轉)을 취하면
3계ㆍ2처ㆍ5온에 속한다. 


3계란 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를 말하고
2처란 의처(意處)와 법처(法處)를 말하며
5온이란 색온(色蘊)에서 식온(識蘊)까지를 말한다.


계경에서
“이 야차천[藥叉天] 은 오랜 세월 동안에 그 마음이 질박하고 정직하여 아첨이나 속임수가 없어서
묻는 것은 모두 분명히 알기 위해서이고 어지럽히기 위해서가 아니므로
 나는 매우 깊은 아비달마로써
그가 뜻하는 물음에 거리낌 없이 대답하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무루의 혜근이다.

또 계경에서
“이 벌차씨(筏蹉氏)16) 와 선현(先賢) 외도와 범수(梵壽) 바라문은
모두 오랜 세월 동안 그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하여 아첨이 없고 속임수가 없어서
묻는 것은 모두 분명히 알기 위해서이고 어지럽히기 위해서가 아니므로
나는 매우 깊은 아비달마로써 그가 뜻하는 물음에 거리낌 없이 대답하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무루의 혜근이다.


또 부처님께서 서이가(西儞迦)17) 에게
“나에게는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는데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려우며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할 경계가 아니다. 

오직 미묘한 총명과 예지가 있는 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을 뿐이며, 

너의 천박한 지혜로써는 미칠 수 없다. 

왜냐하면 너는 오랜 세월 동안에
달리 보았고 달리 참았고 달리 바랐고 달리 즐겼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공과 무아와 여실한 깨달음[如實覺] 이다. 



왜냐하면 저 외도는 항상 망령되이 나를 헤아렸으므로
공과 무아의 성품은 그가 미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께서 오타이(鄔陀夷)18) 에게
“너는 어리석은 범부요 소경이어서 지혜의 눈이 없거늘
어떻게 상좌 비구와 함께 매우 깊은 아비달마를 논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멸정의 물러남[滅定退] 과 여실한 깨달음이다.



또 부처님께서 아난타(阿難陀)에게
“나에게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모든 연기(緣起)이니라.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려우며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할 경계도 아니어서
오직 미묘한 총명과 예지가 있는 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인연의 성품과 여실한 깨달음이다.



또 계경에서 “나에게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연성(緣性)과 연기이다. 

이것은 매우 깊어서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려우며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할 경계도 아니어서
오직 미묘한 총명과 예지가 있는 이만이 비로소 알 수가 있다. 


또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온갖 의지[一切依] 를 모두 영원히 버리고 여의며
애욕이 다하고 물들지 않으며 고요히 사라진 열반이다. 

이것은 가장 깊으며 매우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인연의 성품과 저 적멸(寂減)과 여실한 깨달음이다.



또 부처님께서 아난타에게
“또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남음이 있는 법[有餘法] 은 서로 비슷하여[相似]  

매우 깊은 것이로되 나는 그 가운데서 스스로가 깨달아서 바르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모든 견해의 갈래[見趣] 와 여실한 깨달음이다.



또 계경에서 “나에게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온갖 법[一切法] 은 매우 깊기 때문에 보기 어렵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깊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온갖 법의 성품과 여실한 깨달음이다.



비록 이들 경에서 따로따로의 뜻[意趣] 에 따라 갖가지로 다르게 말씀하셨으나
아비달마의 으뜸가는 이치[勝義] 의 자성은
오직 무루의 혜근일 뿐이다.



곧 이로 말미암아 세간에서 수소성혜(修所成慧)를 일으키니,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이다. 



4성제(聖諦)를 따로따로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또 이로 말미암아 뛰어난 사소성혜(思所成慧)를 일으키니, 

부정관(不淨觀)과 지식념관(持息念觀) 등이다. 


모든 온(蘊)을 따로따로[別]  

또는 한꺼번에[總]  관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또 이로 말미암아 뛰어난 문소성혜(聞所成慧)를 일으켜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분별하고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건립하며
실물(實物)의 어리석음과 소연(所緣)의 어리석음을 해치고
모든 법에 대하여 더하거나 덜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또 이로 말미암아 수승하게 생(生)ㆍ처(處)ㆍ득(得)ㆍ혜(慧)를 일으키고
삼장(三藏)ㆍ12분교(分敎)를 받고 지니고 헤아리고 관찰하면서
잘못 굴리지 않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또 이와 같은 자량(資糧)을 말미암아
무루의 혜근을 껴잡고 지니어
한층 더 밝고 왕성함을 얻는 것이니, 

이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 무루의 혜근과 그 바탕이 되는 아비달마 

【문】만일 아비달마가 무루의 혜근만을 자성(自性)으로 삼는다면
무엇 때문에 이 논을 다시 아비달마라고 하는가?


【답】아비달마가 밑바탕[具] 이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 부른다. 




○ 경전에서 a 의 바탕에 a 라 칭한 사례들 


경의 곳곳에서 저 여러 가지 바탕에 대하여 그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인 것과 같다. 


이것도 이와 같아서 즐겁게 하는 바탕[樂具] 에 대하여
즐겁다[樂] 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가타(伽陀)의 말과 같다.


구걸한 음식을 먹으면 즐겁고

옷은 얻는 대로 입으면 즐거우며

산과 숲을 거닐면 즐겁고

바위굴에 숨어 살면 즐겁네.



음식이나 의복 등의 바탕[體] 은 실로 즐거운 것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의 즐거움이란 모든 즐거운 느낌[樂受] 이다. 



어떤 이는 “또한 가쁜함[輕安] 도 즐겁다”라고 말했으나
의복과 음식 등은 즐겁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에
가타에서도 역시 즐겁다고 말한 것이다.



또 더럽게 하는 바탕에 대하여
때[垢] 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또한 가타의 말과 같다.



여인은 범행(梵行)의 때이니

여인은 중생을 손상하고 해치네.

고행으로 범행을 깨끗이 할 뿐

물로 씻을 수는 없는 것이네.

여인은 실로 더러운 때가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더러운 때는 탐냄[貪] ㆍ성냄[瞋] ㆍ어리석음[癡] 이다. 

그런데도 가타에서 여인을 더러운 때라 말함은
이것이 더럽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새는 바탕에 대하여 샌다[漏] 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7루(漏)19) 는 손해를 끼치는 것이고
불에 타는 것이며 괴로워하고 번뇌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감관[根]  등은 실로 새는 것이 아니나
이는 새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에 샌다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새는 것은 셋일 뿐이니,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이다.



또 따라다니며 잠자듯 하게 하는 바탕에 대하여
수면(隨眠)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빛깔[色] 은 수면이요ㆍ수증(隨增)이요ㆍ수사(隨死)이다. 

만일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 하면 따라다니며 죽게(隨死) 하는 것이고, 

만일 따라다니며 죽게 하면 따라다니며 취하게[隨取] 하는 것이며, 

만일 따라다니며 취하게 하면 따라다니며 속박되게[隨縛]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빛깔은 따라다니며 잠자듯 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의 수면은 일곱 가지20) 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경에서 빛깔이 수면이라 말함은
따라다니며 잠자듯 하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맛의 바탕에 대하여
맛[味] 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눈[眼] 의 맛은 묘한 빛깔[色] 이며
빛깔은 악마의 갈고리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눈은 실로 맛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의 맛이란 삶에 대한 애착이다. 

그런데도 계경에서 눈의 맛은 빛깔이라 말함은 이것이 맛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욕심의 바탕에 대하여 욕심[欲] 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욕심이란 무엇인가? 

5묘욕(妙欲)21) 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고 또 게송의 말씀과 같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묘한 욕심은

사랑할 만하고 기뻐할 만하며

뜻에 맞는 것이어서 욕심을 끌어당겨

마음을 물들이고 집착하게 한다.


빛깔 등은 욕심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욕심은 저 애욕[愛] 이다. 

그런데도 경의 게송에서 빛깔 등을 욕심이라 함은
욕심을 내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물러나게 되는 바탕에 대하여
물러난다[退] 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다섯 가지 인연 때문에 시해탈(時解脫)의 아라한이 물러나게 되니, 

첫째는 사업을 경영하는 것이고, 

둘째는 희론(戱論)을 즐기는 것이며, 

셋째는 다툼[諍訟] 에 어울리는 것이고, 

넷째는 멀리 다니기[遠行] 를 좋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오래도록 병을 앓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사업을 경영하는 것 등은 물러나게 하는 자체는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물러난다 함은 온갖 불선(不善)과 유부무기(有覆無記)의 법이다. 

그런데도 계경에서 사업을 경영하는 것 등이 물러나게 한다 함은
물러나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업을 짓게 하는 바탕에 대하여 업(業)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세 가지 뜻[意] 이 있기 때문에 나쁜 업을 생각한다. 

만일 지으면 더욱 자라게 하고 좋지 않은[非愛]  

이숙(異熟)을 받게 되니, 

탐욕과 진에(瞋恚)와 사견(邪見)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탐욕 등은 실로 의업(意業)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의업은 뜻과 함께 조작[思]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계경에서 의업이라 함은 불선의 의업을 짓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이숙인(異熟因)의 바탕에 대하여 이숙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저 무멸(無滅) 존자22) 가
“나는 한 끼 밥의 이숙인을 말미암아 일곱 번 천상(天上)에 나고 일곱 번 인간으로 태어나서
맨 마지막 몸[最後身] 으로는 모든 번뇌[漏] 를 다하게 되었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한 끼의 밥이 이숙인은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의 이숙인은 모든 불선(不善)과 선(善)과 유루(有漏)의 법이다. 

그런데도 저 존자가 한 끼 밥을 이숙인이라 말씀한 것은 그것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경의 여기저기에서 여러 이름으로 여러 바탕을 말씀한 것처럼
이 논도 그러하여
이것이 아비달마의 바탕이기 때문에
또한 아비달마라 한 것이다.



이와 같아서 으뜸가는 이치[勝義] 에서
아비달마의 성품은 무루의 혜근일 뿐이어서
1계ㆍ1처ㆍ1온에 속하며
만일 상응(相應)을 겸하고 수전(隨轉)을 취하면 3계ㆍ2처ㆍ5온에 속한다.

그 밖의 자량(資糧) 등은 모두가 세속의 아비달마이다. 

이것을 아비달마의 성품이라 한다. 






자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나와 물건[物] 의 자체와 상분(相分)과 본성(本性)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 아비달마라 칭하는 사정 

이미 자성을 해설하였으므로
무슨 뜻에서 아비달마23) 라고 이름하는지 그 까닭을 이제 해설하겠다. 



아비달마의 여러 논사들이 말하였다.

“모든 법의 모양[法相] 에 대하여 잘 결택(決擇)하고 극히 잘 결택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모든 법의 성품[法性] 에 대하여 잘 깨달아 살피고 잘 통달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모든 법에 대하여 현관(現觀)으로 증득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법 성품은 매우 깊은데도 그 근원의 밑까지 다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모든 성스러운 혜안(慧眼)은 이를 말미암아 청정해지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깊숙이 숨은 법 성품을 잘 드러내 일으키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하며
알아야 할 법 성품은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깊숙이 숨어 있으므로 이것을 여의고는 드러내거나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말한 법 성품은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만일 아비달마의 자상과 공상에 대하여 지극히 잘 익히고 있다면 아무리 법답게 어려운 것을 물어도
법 성품에서는 반드시 조그마한 어김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온갖 외도와 다른 이론[他論] 을 조복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아비달마의 모든 큰 논사에게는 삿된 무리[邪徒] 와 이학(異學)이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우(世友) 존자24) 는 “언제나 계경 가운데서 모든 법의 성품과 모양을 결택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12연기(緣起)의 법 성품에 대하여 잘 깨달아 알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4성제(聖諦)의 법을 잘 현관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8성도법(聖道法)을 잘 말하고 닦아 익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열반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모든 법에 대하여 한량없는 문(門)으로써 자주자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25) 은 “잡염(雜染)ㆍ청정(淸淨)ㆍ계박(繫縛)ㆍ해탈(解脫)ㆍ유전(流轉)ㆍ환멸(還滅)의 법에 대하여
명신(名身)ㆍ문신(文身)ㆍ구신(句身)의 차례로 결집(結集)하여 순서를 정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협 존자(脇尊者)는
“이것은 마지막의 지혜[究意慧] 요, 

이것은 결단의 지혜[決斷慧] 이며, 

이것은 으뜸가는 이치의 지혜[勝義慧] 요, 

이것은 잘못되지 않은 지혜[不謬慧] 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妙音) 존자는
“해탈을 구하는 이가 바른 행을 닦을 때에 아직 분명히 알지 못한 이치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괴로움[苦] 이요,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因] 이며,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짐[滅] 이요, 

이것은 사라짐으로 나아가는 길[道] 이며, 

이것은 가행도(加行道)요, 

이것은 무간도(無間道)며, 

이것은 해탈도(解脫道)요, 

이것은 도를 향한[向道]  것이며, 

이것은 과를 얻는[得果]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이치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법밀부(法密部)의 학설에 “이 법은 증상(增上)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했으니, 

어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혜[慧] 는 세간에서 높아서

나아갈 방향[趣向] 을 결택하며

바르고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노사(老死)가 다하고 남음이 없네.

화지부(化地部)의 학설에 “지혜는 법을 비춰주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했으니, 

계경에서 “온갖 비춤[照]  가운데서 내가 지혜의 비춤[慧照] 을 말한 것이 가장 으뜸이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비유자(譬喩者)26) 의 학설에
“모든 법 가운데서 열반이 맨 위이며, 

이 법은 그것에 버금가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했다.


성론자(聲論者)는
“아(阿)는 버린다[除棄] 는 말이고
비(毘)는 결택(決擇)한다는 말이니, 

이 법은 버리고 결택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무엇을 버리게 되는가?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이다. 

무엇을 결택하게 되는가? 

온(蘊)ㆍ계(界)ㆍ처(處)ㆍ연기(緣起)ㆍ제(諦)ㆍ식(食)ㆍ사문과(沙門果)ㆍ보리분(菩提分) 등이다”라고 말했다.

불호(佛護) 존자는 “아비(阿毘)는 도와주는 말[助言] 이어서 눈앞에 나타나 있는 뜻을 드러나게 한다. 

이 법은 온갖 착한 법, 즉 모든 각분(覺分)을 이끌어서 모두 눈앞에 나타나 있게 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아비(阿毘)란 도와주는 말이어서 증상(增上)의 뜻을 드러낸다. 

마치 증상의 만[增上慢] 을 아비만(阿毘慢)이라 하고, 

증상의 각[增上覺] 을 아비각(阿毘覺)이라 하며, 

증상의 노[增上老] 를 아비노(阿毘老)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도 그와 같아서 이 법은 증상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노수(老受) 존자는 “아비는 도와주는 말로 공경하는 뜻을 드러낸다. 

마치 공경하면서 머리 조아리는 것을 아비계수(阿毘稽首)라 하고, 

공경히 공양하는 것을 아비공양(阿毘供養)이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도 그와 같아서 이 법은 높고 중하며 공경할 만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 발지론이라고 칭하는 사정 

【문】무엇 때문에 이 논을 발지(發智)라고 하는가?

【답】모든 승의(勝義)의 지혜[智] 는 모두가 이로부터 일어나며[發]  

이것이 첫 기초[基] 가 되기 때문에 발지라 한다.

또 이 논은 마땅히 지혜의 안족처(安足處)라 하여야 한다. 

모든 으뜸가는 지혜는 이것이 근본이 되고 이것에 의하여 성립되기 때문에 지혜의 안족처라 한다.

또 모든 용감하고 씩씩한 지혜는 여기에서 으뜸가게 일으킬 수 있으며 용감한 지혜의 연(緣)이 발생하기 때문에 발지라 한다.

또 모든 지혜의 저 언덕[彼岸] 은 이것에 의지하여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발지라 하고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개발(開發)하는 것은 이 논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또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는 모두가 이 발지의 묘한 문에 의지하기 때문에 발지라 한다.





● 논의 효용 

【문】이 논의 매우 뛰어난 이익[勝利] 은 그 모양이 어떠한가?



【답】해탈을 수순(隨順)해서 얽매임을 끊어 없애고, 

공ㆍ무아를 따라서 나[我] 와 내 것[我所] 을 등지며, 

무아의 도리를 드러내어 삭취취(數取趣)를 차단하고, 

각의(覺意)를 열어 혼미(昏迷)를 쉬며, 

어리석음을 보내어 지혜를 내고, 

의심의 그물을 끊어 결정(決定)해주며, 

잡염(雜染)을 등져 청정한 곳으로 향하고, 

유전(流轉)을 꾸짖어서 환멸(還滅)을 찬탄하며, 

생사를 버려 열반을 얻고, 

온갖 외도의 삿된 이론을 꺾어 부수어 온갖 불법의 바른 이론을 성립시킨다. 

이 논의 매우 뛰어난 이익은 그 모양이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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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서(總序)의 처음으로서 먼저 아비달마(阿毘達磨)의 연원과 그 정리자(整理者)가 누구인가 논구하는 부분이다. 

대개 경(經)ㆍ율(律)ㆍ논(論) 삼장(三藏)은 다 같이 불설(佛說)에 기초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불설아비달마론』의 전래에 관해서 아비달마 논사(論師)의 의제(議題)가 된다. 

이 논이 귀결(歸結)되는 아비달마의 내용은 물론 불설이나 이 아비달마를 정리한 부처님의 제자인 논사들 중에
『발지론(發智論)』의 저자인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는 가장 우수한 정리자이며
거기에 정리된 『발지론』은 참으로 불설의 진의(眞意)를 대표한 것이라고 논단(論斷)하는 이가 많다.


2 범어 saṁghāṭī의 음역어이다. 

세 개의 승려 옷 중에 대의(大衣)이고, 

승가리(僧伽梨) 또는 가사(袈裟)라고도 한다.


3 범어 Kātyāyanīputra의 음역어이다. 

가전연자(迦栴延子) 또는 가전연니자(迦氈延尼子)라고도 한다.


4 여기서는 발지 본론(發智本論)의 조직(組織)을 밝힌 것으로서 『발지론』은 통틀어 8온(蘊)으로 성립되고
각 온은 다시 여러 납식(納息:varga 品)으로 나누어져 있다. 


온은 편(篇)에 해당하고 납식은 장(章)에 해당한다. 

8온이라 함은, 

첫째는 잡온(雜蘊:8納息이 있다)이요, 

둘째는 결온(結蘊:4納息이 있다)이며, 

셋째는 지온(智蘊:5納息이 있다)이요, 

넷째는 업온(業蘊:5納息이 있다)이며, 

다섯째는 대종온(大種蘊:4納息이 있다)이요, 

여섯째는 근온(根蘊:7納息이 있다)이며, 

일곱째는 정온(定蘊:5納息이 있다)이요, 

여덟째는 견온(見蘊:6納息이 있다)이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은 실로 이 8편 44품(品)에 걸쳐서 이를 글자에 따라 해석하고 그 사이에 갖가지 의론(議論)을 곁들인 것이므로 적어도 이 8온의 순서를 늘 염두에 두고 이해하면 본론의 진전을 보다 분명하게 파악하리라 믿는다.

5 범어 udāna의 음역어이다. 

섭송(攝頌)이라 한역하는데, 

경ㆍ율ㆍ논을 말한 후 또는 말하는 데 있어서 뜻 또는 제목을 하나로 정리하여 게송으로 읊은 것이다.

6 경ㆍ율ㆍ논의 내용을 밝혀서 삼자(三者)의 관계를 논하고 특히 아비달마 논장(論藏)이 뛰어난 까닭을 밝히려 하는 문단(文段)이다.

7 범어 sūtra의 음역어로써 경(經)을 말한다.

8 범어 vinaya의 음역어로써 율(律)을 말한다.

9 인(因)으로부터 과(果)를 유출할 때에 원인과 결과[因果] 가 서로 닮은 것을 말한다.

10 경문(經文)은 사람들의 소질에 들어맞고 이치에 합당하기 때문에 계경(契經)이라 한역한다.

11 범어 utpala의 음역어로써 청연화(靑蓮花)를 말한다.

12 묘고산왕(妙高山王)이라고도 하는데, 

수미산(須彌山:Sumeru)을 말한다.

13 범어 śila의 음역어로써 계(戒)를 말한다.

14 범어 pudgala의 음역어이고 실체로써 상정된 아(我)를 말한다.

15 아비달마는 이런 형식 위에서 된 것이므로 삼장 성전(聖典)의 일종이지만 그 임무로 하는 요점[要] 은 진지(眞智)의 개발(開發)에 있다. 

따라서 아바달마의 내용은 진지[淨慧] 에 있으므로 무루(無漏)의 진지를 자성(自性)으로 삼는다는 것이 『대비바사론』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지 즉 무루의 혜근(慧根)을 5온(蘊)ㆍ12처(處)ㆍ18계(界)의 분류에서 보면 5온 중에서는 행온(行蘊)의 일부분이고 12처에서는 법처(法處)의 일부분이며 18계의 설(說)에서 보면 법계(法界)의 일부분이 점(占)하고 있다. 

여기서 1계ㆍ1처ㆍ1온이 속한다는 것은 바로 이 일을 지칭한다.

16 범어 Vatsagotra의 음역어이다.

17 범어 Śreṇika의 음역어이다.

18 범어 Udayī의 음역어이다.

19 견루(見漏)ㆍ수루(修漏)ㆍ근루(根漏)ㆍ악루(惡漏)ㆍ친근루(親近漏)ㆍ수루(受漏)ㆍ염루(念漏)이다.

20 수면(隨眠)은 번뇌가 표면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잠재적인 상태를 말한다. 

7수면은 욕탐(欲貪)ㆍ유탐(有貪)ㆍ진(瞋)ㆍ만(慢)ㆍ무명(無明)ㆍ견(見)ㆍ의(疑)이다.

21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5경을 말한다.

22 무멸(無滅) 존자는 구역(舊譯)에 아니로두(阿泥盧頭)라고 하는 분이며 부처님 제자 Aniruddha를 한역(漢譯)으로 음사한 것이다.

23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rma)는 아비(abhi)라 하는 접두사(接頭辭)와 달마(dharma)가 연결되어 만들어진 성어(成語)로 불교 특유의 술어(述語)이다. 

구역에서는 무비법(無比法)이라 하고 신역(新譯)에서는 대법(對法)이라 한다. 

다 같이 진실을 말하나 그 글자 뜻은 갖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아비달마의 논사들 사이에는 갖가지 이론(異論)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서는 그 일을 밝히려 하는 문단이다.

24 대비바사론 중에 갖가지 문제를 논구(論究)하면서 이름으로 직접 불리는 논사가 적지 않으니 역자가 헤아려 본 숫자만 해도 약 20여 인이나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는 협(脅, Pārśva)과 세우(世友, Vasumitra)와 각천(覺天, Buddhadeva)과 법구(法救, Dharmatrāta)와 묘음(妙音, 

Ghoṣa)이며 특히 이 네 사람은 유부(有部)의 사대 논사라고 한다. 

다만 이 분들이 『비바사론』을 편집한 장소에 실제로 입회했는지의 여부는 많은 의문이 있다.


25 대덕(大德, Bhadanta)는 번역하면 존자(尊者)라는 뜻이다. 

『비바사론』 중에서는 자주자주 이 사람의 의견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가 누구인가는 확연하지 않다. 

구역(舊譯) 『비바사론(毘婆沙論)』에서는 바단다(婆檀多, 

Bhadanta)라고 되어 있으나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이 불타제바(佛陀提婆) 곧 각천(覺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덕이 각천 존자의 이명(異名)인가는 단정하기 어렵다.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하나의 과제이다.

26 경부(經部)의 일파(一派)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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