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소연론석』
K0625
T1625
관소연론석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관소연론석_K0625_T1625 핵심요약
♣0625-001♧
『관소연론석』
cf 관소연연론 [진나]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Weepers Circus - Allumez Les Reverberes.lrc
[##_1N|cfile8.uf@99D8B74F5DE45DFE2FB847.jpg|width="820" height="546" filename="2019_1105_123807_canon_exc.jpg" filemime="image/jpeg"|_##]
진나의 『관소연연론』에 대한 호법의 주석서인 『관소연론석』에서는
현실에서 우리가 대상이라고 잘못 여기면서 대하는 감각현실의 정체에 대해 살핀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사진과 같이
눈을 떠 나무나 사람의 모습을 대한다고 하자.
이렇게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떠 대할 때
그가 그렇게 대하는 내용의 본 정체가 무엇인가가 여기서 주된 주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살피는 것은
일반적으로 거의 대부분 일으키는 잘못된 망상분별을 파악해 제거하기 위해서다.
또 이는 어떤 주체가 생사현실에서 받아가는 극심한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이가 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자.
예를 들어 어떤 길에서 발을 헛디뎌 발이 부러졌다.
극심한 통증을 느낀다.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이도 없다.
이런 상황을 하나 놓고 생각해보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구급 방안도 필요하고
부상을 치료할 의사나 약도 필요하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어떤 주체가
현실에서 생노병사라는 극심한 고통을 해결하려면
그가 놓인 상황의 정체와 함께
그가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는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두가지 측면에서 이 문제를 접근할 수 있다.
우선 그런 상태에서 그가 처한 상황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두번째는 그런 상태는 어떤 원인으로 놓이게 된 것인가를 파악해
원인단계에서 이를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한 주체가 대하는 내용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살피는 것은
바로 이런 취지에서 논의된다.
그런데 이는 그런 고통을 직면한 상태에서
그 상황이 그가 문제삼는 그런 내용이 아님을 이해해서 벗어나게 하는 방안도 되는 한편
원인단계에서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수행을 행하기 힘들어하게 될 때도
이를 원만히 잘 성취하게 하는데에도 이바지한다.
여기에는 그 원인이나 결과상태에서 공통적으로
한 주체가 하나의 현실 단면을 놓고
그 내용의 정체를 엉뚱하게 잘못 파악하고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업을 행하여 그런 상태에 처한다는 기본 사정이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결국 매 순간 한 주체가 대하는 현실 내용의 본 정체가 무엇이고
그런 내용은 어떻게 얻게 되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_1N|cfile8.uf@99D8B74F5DE45DFE2FB847.jpg|width="820" height="546" filename="2019_1105_123807_canon_exc.jpg" filemime="image/jpeg" style="text-align: center;"|_##]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보니
나무가 보이고 걸어가는 한 사람이 보인다고 하자.
이 때 누군가가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라고 물으면
'나무와 걸어가는 사람을 봅니다'라고 보통 답하게 된다.
한편 어떤 경우는 다음처럼 답할 수도 있다.
'지금 나무와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대승경전의 기본 입장은 이 두 입장이 모두 잘못된 망상분별이고
이런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첫번째 방식으로 답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고
이 경우가 비교적 전도된 정도가 심한 망상분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경우를 먼저 살피자.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a 를' 본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그 a 를 자신이 대하는 '대상'으로 여기면서
그 내용을 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자신이 눈을 떠서 볼 때 그 상황에서 눈이 상대하는 대상이 무언가라고 묻게 되면,
그 경우 그는 자신이 그런 나무나 사람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을 가리키면서
그것이 곧 자신의 눈이 상대하는 대상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대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조금 다른 상황을 검토해보자.
철수가 영희를 불러서 사과를 건네려 한다고 하자.
이 때 철수가 사과라고 여기고 대하는 내용도
위 상황과 마찬가지다.
즉, 이 경우 철수가 손으로 붙잡은 것[대상, 객체]는 무엇인가
이렇게 물으면 철수는 일반적으로
앞 경우와 마찬가지 형태로 답을 하게 된다.
즉 그 상황에서 사과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 부분을
손으로 붙잡은 대상이라고 여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철수가 그 순간에
자신의 눈이 상대해 대한 대상도 역시 그런 부분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이런 사과를 보거나 대하는 영희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그래서 철수 자신이나 영희나 일반적으로
손이 무언가를 붙잡을 때 손이 붙잡아 쥐는 그 무엇[대상]의 정체나
또는 눈을 떠 모습을 볼 때 눈이 상대하는 그 무엇[대상]의 정체를
바로 그런 부분으로 여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이들 내용이 과연 옳은가하면 그렇지 않다.
각 주체가 그런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그런 내용을 얻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얻는 그 부분의 정체나 그 지위에 대해서는
완전히 거꾸로 뒤집힌 전도된 형태로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평소 쉼없이 업을 행한다.
불교 경전에서 일반인들이 욕계 생사현실에서
거의 예외없이 일으켜 임한다고 보는 망상분별 증상의 핵심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서 이처럼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그런 내용을 잘 검토해서
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기본적으로 이해시키는 데 이 논의의 취지가 있다.
● 논서에 사용되는 낯선 표현의 이해문제
본 논서를 이해하려면 결국 이 논서가 해석하고자 하는
진나의 『관소연연론』이 어떤 내용인가부터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관소연론석』에서
다시 이 논서를 호법이 어떤 입장에서 설명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논서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표현들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 내용을 살피기가 대단히 힘들다.
따라서 이 논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가 먼저 문제된다.
즉, 논서에서 사용한 낯선 표현들을 하나하나
불교 사전등을 참조해서
그 의미를 하나하나 이해해가면서 살필 것인가.
아니면 아예 그런 내용을 다 떠나서
자신이 지금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는 상황을 놓고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내용이
무엇이 잘못인가를 파악해볼 것인가부터 생각해야 한다.
과거에 일일단상코너에서 『관소연연론』이란 논서를 살필 때
두번째 방식을 통하여 살폈다.
[참고]
http://buddhism007.tistory.com/4489
불기2562-05-07관소연연론001
과거에 기본 내용을 살필 당시에도
소연연이나 소연, 또는 경 이런 말에 대해서
기초적으로 살폈다.
그런데 그외에도 살펴야 할 낯선 용어가 꽤 많다.
그래서 일반적인 입장에서 제시된 표현을 이해하고
내용을 이해하기 대단히 힘들다.
그런데 일일단상코너가 가장 기초적인 입장에서
해당 경전과 논서의 입문부분을 살피는데 초점이 있다면
경전 코너에서는 전문적인 연구를 지향한다.
따라서 경전코너의 페이지에서는
경전과 논서에서 사용하는 표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결국 불교 경전이나 논서를 이해하려면
기존에 불교 경전이나 논서에서 사용한 표현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논서내용을 살피는 가운데
이해하기 힘든 단어나 구절 부분에 특수기호 【 】로 표시를 붙여 보았다.
【 】기호가 붙여진 부분은
일반적 입장에서 해당 단어나 지시대명사(이것, 저것)가 가리키는 구체적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거나 설명하기 힘든 부분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해당 부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가
또 이해한다면 그것을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게 쉽게 설명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
답하기 힘든 부분을 나타낸다.
그런데 일반적 입장에서 보면
논서란 기본적으로 경전 내용을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취지로 쓰여진 것이고
또 논서 가운데 석이란 말이 붙여진 논서는
그런 논서를 다시 쉽게 설명하기 위한 논서인데
정작 읽어보면 이 논서 자체가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단어의 의미를 몰라서
사전을 찾아 그 뜻을 알아보려고 할 때
그 풀이가 오히려 더 어려워서 그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비유하면 이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
가정해서 '옴훔'이란 낯선 단어가 있다고 하자.
참고로 옴훔이란 단어가 정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가정해서 그런 단어가 있는데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옴훔이란 말이 무슨 말인가 하고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사전에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다고 하자.
옴훔이란, 락샤나 비슷하면서 락샤나가 아니고 삼즈나 비슷하면서 삼즈나 아닌 것으로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하자.
이렇게 되면 옴훔이란 말도 원래 몰랐지만 그 설명에 사용하는 락샤나나 삼즈나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결국 이 풀이를 보고는 무슨 의미인지 알기 힘들다.
원래 경전은 번뇌를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아가는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제시된 내용이다. 그런데 경전내용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거나 내용을 풀이하거나 일정 부분에 대해서 논술을 하게도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논서가 경전보다 더 이해하기 힘들다고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사정이 위와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일정한 사정이 있다.
어떤 내용을 살피는 과정에서 그 분야에서만 특수한 사정으로 반복해서 사용하게 되는
전문용어가 있게 된다.
그것은 오늘날 각 학문분야마다 사정이 비슷하다.
이런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만일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대단히 번잡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전문용어는 그 전문분야에서는 그것을 사용하면 편한데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 전문용어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하기에
이런 단어의 의미 때문에 해당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각 학문분야마다 이런 사정으로 일정한 벽이 있게 된다.
그런 현상은 어떻게 보면 불가피한 점이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어떤 학문분야의 박사 상태라면
그 지적수준이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다른 분야의 학위 논문을 접하게 되면
역시 마찬가지로 그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그것은 각 분야마다 그런 기초지식이나 전문용어가 바탕이 되어야
그 분야의 논문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연구과정에서 불가피한 점은 있지만,
결국 이런 특성 때문에 일반인이 쉽게 진입할 수 없게 하고
고립되게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 불교는 결국 일반적인 입장에서
그 내용을 이해하면서 이를 통해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는데
본 취지가 있고 초점이 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방치하면 또 곤란하다.
결국 각 분야마다 전문용어나 그 분야에서 기본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해야 이런 논의가 가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각 분야 전문가 상호간에 교류를 하는 경우거나
또는 전문분야의 내용을 일반적 입장에서도 모두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려면
가급적 모든 이가 공통적으로 파악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내용을 풀어 제시할 필요는 있다.
오늘날 보면 초중등학교 수준이 각 분야전문가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내용은 각 분야별로 전문화되기에 다른 분야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된다.
그래서 현재 논서에서 일반적 입장에서 처음 대할 때
내용을 쉽게 바로 알기 힘든 부분을 모두 표시해보았다.
그런데 알고보면 현실에서 이런 부분은
불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입장에서도 사실
그렇게 쉽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이 내용을 바로 쉽게 알 수 있는 이는 현실적으로 극히 드물다.
현재 이 논서를 읽다보면
마치 과거 1900 년대 국한문 혼용체 문장을 보거나
아니면 1500 년대 당시 훈민정음으로 쓰인 문장을 보는 것처럼
한글이기는 한데 무슨 말인지는 의미를 알기 힘든 형태다.
그런데 이것은 이 논서를 처음 저술한 논사나
오늘날 이를 번역한 번역가를 탓할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는 나름 사정이 있다.
이미 앞에서도 어떤 분야에 대해 연구를 하려면
결국 기존에 그 분야의 연구를 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특수용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논의가 쉽게 진행될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제 그 용어가 어렵다고
그 용어를 대체할 쉬운 말을 찾아보려하면
두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현실에 우선 그 단어가 나타내는 의미를 그대로 나타내는 말이 없다.
또 사정이 그렇다고
예를 들어 어렵게 표현된 한자어나 외국어를
쉬운 한글로 표현해보자고 해서
번역하는 이가 혼자서
한글형태로 뜻 풀이를 하고 이를 압축하는 형태로 새로 단어를 만들어 번역하면
이 경우는 그런 말이 기존에 없던 새로운 말이기에
더 문제가 많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단어는 기존에 없기 때문에 원래 용어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봐도 모르게 되는 한편,
원래 용어를 사용하던 이들마저도 새로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용어는 사전을 찾아도 설명을 참조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처럼 없던 낱말을 새로 만들어 번역하면 더 문제가 많아진다.
과거 순한글화라는 전제에서 이런 경우 새로운 말을 한글형태로 만들어 번역했던 경우가
있었는데 무루법을 '샘이 없는 법' 무위법을 '함이 없는 법' 이런 식으로 한자어를 한글로
풀어서 번역했던 경우가 이런 예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런 용어는 사전을 찾아도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 한자어가 의미하는 바를 알면 이런 한글표현이 무슨 의미를 나타내려고
표현한 것인가를 이해는 하지만, 모르면 오히려 엉뚱한 방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무루법은 샘이나 우물이 없는 곳인가. 이런 식으로 엉뚱하게 오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그런 용어에 해당한 더 쉬운 표현이 이미 있었다면 사정이 낫지만,
그런 경우는 오히려 의미 혼동을 불러 일으키기 쉽다.
색을 물질로 번역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다.
물질이라는 말로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내용과 색은 본래 그 뜻이 다르다.
즉 물질은 정신과는 별개로 정신과는 떨어진 것 이런 의미를 은연중 나타낸다.
그런데 색은 넓은 의미의 색이나 좁은 의미의 색이나 감각현실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래서 그렇게 이해하면 색이란 표현은 차라리 색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두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낫다고도 보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사정으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 번역할 수도 없는데
그러면 여전히 기존 용어나 외국어 형태로는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이제 그 단어를 사용할 부분마다
매번 그 용어를 사전처럼 쉽게 길게 다 풀어서 제시하면서 논의를 진행하려면
이제 도무지 논의할 수가 없게 된다.
앞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낱말을 표시했는데
이런 낱말이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 대단히 많이 반복된다.
그래서 그 부분을 그렇게 하나씩 반복해서 일일히 풀어 표현하려고 하면
논의가 곤란해지고 내용을 살피는 입장에서도 내용 파악이 어려워진다.
의타기상 이런 전문용어가 있다면 이것을 매번 '다른 것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모습' 이렇게 표현하고
변계소집상 이런 용어는 ;두루두루 헤아리며 집착을 갖는 모습' 이렇게 풀어 표현하면서
그 용어가 쓰인 곳마다 사용하면 나중에는 전체 문장이 나타내는 의미를 찾아내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가 있게 된다.
결국 불교 논서가 어려운 사정은
그 낱말이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말이기도 하고
그 낱말이 가리키는 뜻을 쉽게 달리 표현할 방안을 새로 만들어내기도 힘들고
그렇게 하면 오히려 더 문제가 많아진다는 사정 때문에
그 해결이 쉽지 않다.
결국 이런 내용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걸려도
기초적으로 논서에서 사용하는 낱말의 의미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좀 시간이 걸리고 힘들게 된다.
또 이런 것이 연구과정에서 약간의 부담을 가져다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삶에서 번뇌나 고통을 받을 때
이것을 해결해주고자 하는 취지로
논서나 경전이 제공되는데
그 논서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고
이런 어려운 문제를 가져다 주기에
그전까지는 없던 번뇌를 새로 일으키는 현상도 있다.
그래도 내용을 이해하려면 이를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야 한다.
>>>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낯선 용어를 이해하는 한편
논의를 살피는 이는 또 한편으로는
그 내용을 일반인입장에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가 되게끔
그 방안을 찾고 노력할 필요도 있다.
한편 이 논서의 논의에서는
우선 다음의 기초 내용도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우선 현실 상황에서 일반적인 입장이 갖는 문제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문제라면 그와 달리
현실에서 어떻게 임해야하는가를 먼저 간단히 살펴야 한다.
그래야 이 논의가 향하는 최종 결론을 이해하고 살필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앞에서도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나무와 걸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상황을 놓고
그 상황에서 보게 되는 각 내용의 본 정체를 무엇으로 이해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위에서 그림으로 표시해보았다.
여기서 눈을 떠 그런 모습을 보는 주체를 1 이라고 표현해보았다.
그런데 예를 들어 1과 같은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 눈을 뜨면
다른 사람 2 나 3 도 보게 되고
또 4 와 같은 꽃이나 나무도 보게 된다.
위 그림에서 1로 표시한 부분은 이런 상황을 대하는 1이라는 사람이
평소 눈을 떠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을 나타낸다.
평소 자신이 눈을 떠 무언가를 볼 때는
스스로 자신의 눈이나 눈썹 이마 등을 보지 못하고
또 자신의 허리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처음 1 부분은 그런 내용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1 에게 1 자신의 눈이 대하는 대상이 무엇들인가라고 물으면
결국 2 나 3 , 4와 같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그런 부분이 곧 자신의 눈이 대하는 대상이라고 답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인 전도망상분별 내용이다.
이보다 조금 상태가 완화된 경우는
그런 2,3,4, 와 같은 부분은 눈이 대하는 대상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부분은 자신이 눈을 뜨면 눈을 통해 보게 되는
갑수나 영희 또는 꽃, 나무라고 여기고
그런 입장에서 눈을 뜨면 그런 갑수나 영희, 꽃, 나무가 이처럼 보이게 된다고 답하게 된다.
이것은 앞 입장과는 다르다.
자신이 눈을 떠 보게 되는 내용을
자신의 눈이 대하는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렇게 눈을 떠 보게 되는 그 내용의 각 부분이
곧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갑수나 영희, 꽃, 나무라고 여기면서
그 내용을 대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불교 대승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이 두 입장이 다 제각각 문제가 있어서 잘못된 망상분별이고
또 바로 이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그가 업을 행하고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는 사정을 제시하는데 초점이 있다.
따라서 그런 생사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현실 상황에서 그가 얻는 현실 내용을 놓고
그처럼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임하면 곤란하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바탕에서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한다고 하는가.
현실적으로 거리를 나가 길을 거닐 때
앞 일정한 부분을 영희나 철수 또는 자동차 나무 등등으로 분별을 잘 행하지 못한다면
바로 사고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경전에서 현실에서 열심히 행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수행덕목도
사실은 그런 바탕에서는 잘 행할 수 없게 된다.
수행 가운데 가장 기초는
자신이 평소 아끼고 집착하는 것을 놓고
그에 대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아낌없이 그것을 다른 생명에게 널리 베푸는 보시다.
그런데 이런 수행을 할 때
베풀 물건이나 배풀 상대로서 물건이나 영희나 철수에 대해
일반적으로 분별하듯 분별함이 잘못이라면
현실에서 베푸는 행위도 역시 마찬가지로 잘 행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런 기본 판단이 잘못이라면 그런 전제에서는
이런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내용은 최근
『마하반야바라밀경』을 살피는 과정에서도 일부 살폈다.
https://buddhism007.tistory.com/11385
출처: 불기25631127마하반야바라밀경001
그런데 이 문제가 서로 다 관련된다.
왜냐하면 현실의 한 단면에서
일반적으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
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주체로서 영희나 갑수 을수 병수 등등으로 여기는 부분
그리고 자신이 대하는 대상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놓고
그 부분에 대해 행하는 판단이 일체 잘못된 망상분별이라는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도 한편 필요하지만,
다시 그런 바탕에서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경전에서 제시하는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해서
그런 생사고통을 반복해 겪는 전도망상분별 상태를 벗어나와야 한다는 내용은
서로 다 같이 관련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대승 경전에서 제시하는 핵심은 이런 내용이 된다.
여기서는 가장 먼저
위와 같은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내용이 왜 잘못인가.
그것이 왜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근본원인이 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런 바탕에서는
경전에서 제시하는 수행을 왜 그처럼 해야 하는가.
또 사정이 그렇다면 그런 일반적인 망상분별 자세를 떠나서
대신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추가로 잘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앞 내용은 일일단상코너에서
일반적 입장을 기준으로 이들 논서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초적으로 살필 때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뒷 내용도 최근 일일단상코너에서 『마하반야바라밀경』을 살피는 가운데,
현실에서 문제삼는 것 일체는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으로서
현실에서 일반적 입장처럼 무언가에 대해 상을 취하거나 머물지 말고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경전에서 제시된 수행을 원만하게 잘 성취해야 함을 살폈다.
그래서 중복되지만,
여기서는 가장 간단하게 일반적인 입장에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사정과 관련해
이들 문제를 짧게 살피고 일단 마치기로 한다.
우선 이런 비유를 놓고 쉽게 상황을 이해해보자.
어떤 이가 침대에 누어서 잠을 자면서
바다에서 배를 저어 가면서 황금을 줍는 꿈을 꾸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상황에서 그가 바다나 황금이라는 내용을 보았다[꾸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가 꾼 바다나 황금이
침대에 있는 어떤 내용을 대상으로 그런 내용을 꾼 것인가하면 그렇지 않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그가 꿈에서 꾼 바다나 황금 그 내용을 직접 대상으로 해서
그런 내용을 꾸는 것인가하면 이 역시 그렇지 않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꿈은 꾼 것이다.
이런 사정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지금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눈을 또고 온갖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그것을 어떻게 얻었는가.
그리고 그가 본 내용의 정체나 그 성격 지위는 어떤 것인가라고 물을 때
앞에 꿈의 비유를 들때 엉터리가 되는 형태로 일반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이해하기에
이를 망상분별이라고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눈으로 보는 시각내용 뿐 아니라,
귀, 코, 입, 몸을 통해 얻는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도 공통한다.
이 사정을 다시 다음처럼 쉽게 그 사정을 이해해보자.
눈,귀,코,입, 몸과 같은 감각기관을 통해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을 ○ 라고 표시해보자.
현실에서 이런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그 주체는 이에 대해 그 각 부분이 영희나 철수 또는 나무 바위라는 등으로 분별을 행한다.
이 분별을 △ 라고 일단 표시해보자.
이 분별과 앞의 감각현실은 현실에서 한 주체가 다 얻지만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눈을 뜨면서 앞에 있는 것은 나무라고 여길 때
눈을 감게 되면 그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은 그래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은 관념분별 내용이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눈을 뜨면 그 직전까지는 보지 못한 내용을 다시 보게 된다.
이 부분은 눈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이다.
그래서 앞에서 ○ 과 △ 라는 기호로 구분해서 표시하는 내용이
현실에서 무엇을 나타내는가를 위처럼 잘 구분해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이 결국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다.
그런데 한 주체가 그렇게 감각하거나 분별하지 않아도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으로서 실재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런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 라고 일단 표시해보자.
그러면 현실에서 그 존재를 문제삼을 주요한 내용은
일단 □ - ○ - △ 형태로 표시할 수 있다.
이때 이들 각 내용을 처음 앞에서 꿈의 비유로 든 내용과 함께
잘 대조해서 그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존재가 문제되는 각 내용을 □ - ○ - △ 형태로 표시하고
그 가운데 어떤 관념분별 △을 기준으로 잡고 이 내용을 검토해볼 때
비록 현실에서 △ 라는 관념내용을 일으켜 그런 내용을 얻더라도
△ 라는 내용이 □로 표시한 실재 영역의 내용이 아니고
또한 ○로 표시한 감각현실도 아니다.
그리고 이들 □ - ○ 로 표시한 그 영역에서는 그런 관념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로 표시한 관념내용을 일으켜 얻는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일으키는 관념분별은
알고보면 꿈에서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는 어떤 내용을 꿈꾸는 것과 성격이 같다.
그런데 이런 관계나 내용은
감각현실을 어떻게 얻는가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로 준용된다.
즉 자신이 눈을떠서 ○ 과 같은 어떤 내용을 보았다.
이 때 그 내용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형태로 제시할 수 있다.
다시 되풀이하면
비록 현실에서 ○ 라는 감각현실을 얻는 것은 사실이더라도
○ 라는 내용이 □로 표시한 실재 영역의 내용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로 표시한 관념분별 내용도 역시 아니다.
그리고 이들 내용은 □ - △ 로 표시한 그 영역에서는 그런 감각현실을 얻을 수 없고, 또한 없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 로 표시한 감각현실을 매순간 생생하게 얻는 상태다.
이제 이런 상황에서 그 감각현실을 어떤 과정으로 얻는가를 살필 때
앞에서 침대에서 자면서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는 어떤 내용을 꿈꾸는 것과 그 사정이 같은데
그러나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처음 꿈의 비유에서 엉터리 내용이 된다고 제시한 형태처럼 이 내용이나 관계를 이해하려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면
그것은 알고보면 그런 과정으로 그렇게 눈으로 보게 된 내용인데도
그 내용이 곧 그런 내용을 얻게 해준 대상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곧 자신의 눈이 대하는 대상[객체]인 것으로 오해한다.
이는 꿈에서 꾼 바다나 황금은
꿈에서 그 내용을 곧 대상으로 하여 꾸게 된 것이라고
이해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은 감각현실을 얻는 영역 밖에서는
관념영역이든 아니면 본 바탕이라고할 실재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런데도 그는 본 바탕에 그런 것이 실재하기에
그처럼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라고 이해하려고 한다.
이것이 잘못된 판단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현실 내용을 생각하면서 현실에서 임하는 상황이
바로 욕계의 일반적인 망상분별의 특성이다.
또 바로 그런 특성 때문에 그 주체가 임하는 그런 상황을 욕계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것은 다음 상황을 의미한다.
□ - ○ - △ 과 같은 내용을 놓고 이 문제를 살피면
현실에서 한 주체가 일정한 감각현실 ○ 을 얻은 다음
△ 과 같은 관념분별을 다시 일으키면서 그 상황에 임하면
그 주체는 바로 □ - ○ 과 같은 영역에
일단 △ 과 같이 자신이 일으킨 관념분별 내용이 그대로 들어 있다고 잘못 여긴다.
□ - ○ 영역에 그런 내용이 없는데
자신이 ○ 라는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그런 관념분별 △ 을 반복해 일으킨다는 사정으로
마치 그런 ○ 감각현실 영역에는 그런 관념분별 △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기는 한편,
사정이 그렇기에 ○의 일정 부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관념내용 △ '이다'라고 여기면서
현실에 임한다. 그리고 이것이 망상분별 증상이다.
현실에서 예를 들어 자신이 철수나 영희나 나무가 바위를 스스로 안다고 여길 때
그가 철수나 영희 나무 바위로 여기는 것은 현실에서 어떤 부분인가라고 물으면
그는 감각현실 부분을 붙잡고 바로 그 부분이 그런 내용이라고 제시하게 된다.
이것이 곧 욕계내 생명들이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상분별 증상이다.
그 주체는 이후 이를 바탕으로 현실에서 관념내용을 재료로 온갖 희망을 일으킨 후
이를 추구하는 업을 행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업을 행할 때 그가 행하고 취하는 부분은 바로 감각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본 바탕이나 다른 영역에서도 모두 그처럼 있는 실다운 것으로 여기며
집착하고 분주하게 열심히 업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좋음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사정이 이와 같으므로 그 주체는 결국
자신의 뜻과는 다른 상태에 처해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겪는 상테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런데 이렇게 겪는 생사고통은
결국 처음 그런 잘못된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그처럼 업을 행한 가운데
그런 상테에 묶이게 된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려면 그처럼 고통을 겪게 하고 업을 행하게 먼드는
바탕이 되는 망상분별 부분을 잘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면 또 왜 그런 바탕에서
일정한 수행을 그처럼 하라고 하는가도 추가로 잘 이해해야 한다.
처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내용이 망상분별이어서
그것이 꿈처럼 오로지 꿈을꾸는 상태에서만 얻어지고
침대나 다른 영역에서는 얻어지지도 않는 내용이어서
엉터리라면,
현실에서 어떤 이에게 무언가를 베풀거나
계를 지키는 행이 필요한 사정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그런데 일단 현실은 꿈과 성격이 같아서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꿈은 아니다.
꿈과 같다는 말은 그처럼 실답지 않은 특성이 같다고 한 것이고
사정이 그렇다고 '현실은 곧 꿈이다'라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비록 실답지는 않지만, 현실은 꿈과는 또 달리
다수의 주체가 대단히 장구한 기간에 걸쳐
일정한 관계를 통해 대단히 많이 반복해 얻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런 특성 때문에 그 성격이 꿈과 같다고 해도,
오히려 현실은 꿈과는 달리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 사정을 오늘날 행하는 전자게임을 놓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자게임 화면에서 나오는 내용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
사정이 그런데도 수많은 아이들이
그 전자게임을 대하면 그런 상태에서 같은 형태의 내용을
같은 관계로 수없이 많이 반복하게 된다.
즉 일정 화면에서 일정버튼을 누르면
그것이 실답지는 않지만, 역시 매번 그 상태에서
어떤 보물과 같은 아이템을 얻는다거나
점수를 얻는 식의 관계가 수없이 반복된다.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그 게임내용을 실다운 내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이런 내용을 실답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하면
그로 인해 게임 하나를 놓고도 때로는 대단히 심각한 부작용을 겪게 된다.
그리고 현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리고 현실을 놓고 실답다고 여기고
매 순간 그처럼 업을 행하면
바로 그 업이 원인이 되어
장구한 기간 동안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수행을 통해 해결해야 할 생사고통 문제다.
현실은 비롤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꿈 자체는 아니고
또 현실에서 각 주체가 전혀 얻지 못하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매 순간 대단히 생생하게 얻고
비록 망상분별이지만 각 주체가 매순간
이에 대해 대단히 명료한 형태로 분별을 행하면서 대하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를 방치하면
한 주체는 그런 상태에서
매 순간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각 내용을 얻어가며
생사고통을 대단히 장구하게 받아가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장 근본적으로 한 주체가 대하는 한 현실단면을 놓고
그 정체가 무엇인가를 잘 파악해 이 상태를 벗어나와야 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상황에 놓인 주체는
갑자기 그 상황에 놓인 것이 아니다.
그 주체가 이미 생사현실에서 이런 문제를 대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주체가 대단히 많은 업을 통해서
그렇게 생사에 묶여 있는 상태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 단순히 자신이 대하는 현실이
실답지 않음만 이해해서 그 상황에서 바로 벗어나오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그 생사현실바탕에서 자신을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게끔 하는 업을 일단 중단하고
이미 행해 쌓인 업의 장애를 해소하고 반대로 복덕을 쌓게 할
수행덕목을 취해서 성취해야 비로소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오게 되는 사정이 있다.
이를 게임상황에 비유하면
비록 그 게임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도
그 게임안에서 무사히 벗어나오려면
일단 그 게임에서 필요한 것을 잘 마쳐야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형태로 이를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더욱이 어떤 수행자가 자신만 그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남을 목표로 하지 않고
생사현실에서 다른 이를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함을 목표로 하는 경우에는
이제 자신은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올 수 있게 되었어도
다른 이들이 생사고통을 받는 생사현실 안으로 들어가
그런 이에게 눈높이를 맞춰서
그런 이들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오게 해야 한다.
그런 경우 그는 여전히 그 생사현실에서 요구되는 일정한 내용을 잘 성취해야 한다.
이것이 앞에서 처음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는데도
그러나 일정한 수행을 그 상태에서 성취해야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올 수 있기에
그런 입장에서 수행방안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런 수행은
수행자에게는 이중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셈이 된다.
□ - ○ - △ 라는 각 내용을 놓고 볼 때
이들 각 내용은 실답지 않지만,
그 가운데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은 또 현실에서 생생하고 명료하게 일으켜 얻는다.
그리고 △ 라는 내용을 놓고 보면 그것이 아무리 명료해도
□ - ○ 라는 영역에서는 얻을 수도 없는 것이고
따라서 실답지 않다.
그렇지만, 각 주체가 매순간 이런 분별내용을 바탕으로 현실에 임하는 상태가
바로 욕계 상황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그런 사정을 한편으로 이해해서
그런 망상분별로 인해 묶이게 되는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또 한편으로는 사정이 그런데도 대부분의 중생이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망상분별에 바탕해 그처럼 현실에서 임한다는 사정도 잘 파악해야 한다.
즉 그 내용 자체가 망상분별이고 옳지 않음을 한편으로 잘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대부분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임하고 있다는 사정은
그 사정대로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 이중적인 바탕이 되어야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임해 수행을 할 때
그런 상태에서 다시 업을 잘못 행함으로서 생사고통에 다시 묶이지 않게 될 수 있는 한편
또 그런 바탕에서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필요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도 원만히 구족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이런 사정 때문에 수행자는 한편으로
그것이 본래 얻을 수 없고 실답지 않음을 한편으로 이해하면서
그러나 생사현실에서는 중생에 눈높이를 맞추어서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할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해야만 한다.
이처럼 본 논의가 결론적으로 향해 나가는 내용을
대강이나마 잘 파악하고
논서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갈 필요가 있다.
다만 논서의 내용은 앞에 이미 제시했듯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을 통해서
어렵게 서술된 점이 있기에
천천히 조금씩 살펴나가기로 한다.
>>>
● 관소연론의 이해와 현실이 실답지 않음의 이해
관소연론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첫 부분에 제시되어 있다.
나중에 다시 이 논서를 살필 때는
앞에 처음 표시한 낯선 용어를 하나하나 살펴야지만,
여기서는 미리 이 내용을 압축해서
도대에 어떤 부분에 논의 초점이 있는가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현실에서 눈을통해 무언가를 본다고 할 때
자신이 무엇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것을 보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되면
처음 자신이 눈을 통해 본 결과내용을 곧 대상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입장이 대다수이다.
그리고 다시 그렇게 이해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내용에 잠재해 들어 있지만, 그러나 눈으로 잘 보이지 않는 어떤 미세한 원소와 같은 것이
그 대상이 된다고 이해하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이해가 잘못임을 여기서 살피게 된다.
그런데 이 상황을 조금 쉽게 이해해보기로 한다.
어떤 곳을 가다보면
산에 일정한 글자를 흰 돌로 표시해서
나타내는 경우를 보게 된다.
예를 들어 ' 파라다이스 방문 환영' 이런 글자와 옆에 꽃그림이
관장지 들어가는 근처 산에 그려져 있는 경우를 놓고 보자 .
그래서 먼 곳에서 보면 그 산에
그런 글자와 꽃그림이 그려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이 때 그가 그런 글자나 모습을 본다면
그 상황에서 그는 무엇을 대상으로 그런 내용을 보게 된 것인가를
살핀다고 하자.
이 때 두가지 방식을 취한다.
처음 방식은 자신이 본 그 내용을 놓고
그것이 곧 자신의 눈이 대하는 대상으로 이해하는 한편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런 내용을 본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앞에서 이런 이해가 엉터리인 사정을 이미 보았다.
그런데 이런 이해가 결국 이런 대상과 눈이 화합을 통해
그런 모습을 보는 것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런 입장이 잘못임을 이해하기 위해
이에 대한 논의가 일정 부분 필요하다.
그런데 이제 또 다른 입장이 있다.
자신이 글자나 꽃모습으로 본 그 흰 부분을 향해
자꾸 걸어가서 찾아 보았더니
알고보니 그것은 글자나 꽃모습이 아니고
하얀 조각돌들임을 다른 기회에 확인하게 된다.
사정이 그러니 먼 곳에서 그런 글자나 꽃으로 볼 때
그런 내용을 보는 것은
바로 그런 흰 조각돌을 대상으로 삼아
그런 모습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이중적인 망상분별이라고 할 만하다.
그 조각돌을 직접 볼 경우에도
처음 꽃모습을 보던 상황에서
제기된 문제가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문제를 이제 다시 조각돌로 바꾼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처럼 극미가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기에 문제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도 잘못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후 그에 대해 상당히 번잡한 논의를 제시한다.
그런데 지금 컴퓨터에서 글자나 그림을 볼 때도 알고보면 사정이 비슷하다.
이 글자나 그림을 자꾸 확대하면 결국 dot 라고 표시하는 점 상태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같은 문제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결국 그런 판단자체도 잘못이지만,
이런 주장을 통해서 취하게 되는 자세 때문에 더 문제가 된다.
즉, 자신이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볼 때
그것은 침대에 누어 침대에는 얻을 수 없는 엉뚱한 바다나 황금꿈을
꾸는 것처럼 칩착을 가질 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이해하고
집착을 버리고 수행을 집착없이 실천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입장은
그와 정반대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기에 문제가 된다.
즉 이들 주장은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은 적절하고 정당하다
그래서 이들내용은 실답다고 여기는 입장이다.
이는 현실에서 얻는 내용 그 자체가 바로 그런 내용을 얻는 대상이기에
실답다고 여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런 내용은 비록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극미라는 실다운 바탕을 놓고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므로
실다운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이런 견해을 취하고 고집하면
결국 처음의 망상분별이 더 심해지고 악화되기에 문제된다.
따라서 이런 각 입장이 어떤 잘못이 있는가를 잘 살피는 한편,
현실의 본 정체와 사정을 잘 파악해서
이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지 않고
또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 않고
수행을 잘 성취하여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잘 벗어나와야 한다.
◈Lab value 불기2563/12/01 |
댓글내용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k0625t1625001.html#1612 |
댓글 없음:
댓글 쓰기
What do you think is the most important?
Do you know why this is the most import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