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론』
K0596
T1610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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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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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1-09-18_불성론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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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6-001♧
제1권_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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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론』 ♣0596-001♧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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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재검토시작 Lab value 불기2564/05/22/금/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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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론_K0596_T1610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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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부란 소승 부파에서 상좌부 계통에 있는 한 부파다.
>>>
용어풀이
ꊱ불성
‡불성
ω불성
Lab value 불기2561/09/18/월/23:55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Isabelle Boulay - Parle-Moi.lrc
『불성론』을 살핀다.
그런 가운데
논서들에서 공통적으로 만나는 문제를 만나게 된다.
우선 한 논서에 a 라는 입장이 있다면
a 와 상대하는 다른 입장들 b, c, d 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논서의 각 부분에서 어떤 것이 a 의 입장이고
어떤 것이 다른 b,c,d 의 입장을 나타내는 부분인가부터 명료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불성론』에서는 그런 문제를 해소해보고자
일단 불성론을 제시하는 입장을 ○ 로 표시해 보았다.
그리고 그와 상대되는 입장으로 보이는 부분은 ● 로 표시해 구분해 보았다.
물론 읽는 가운데 혼동이 발생해 잘못 표시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이처럼 표시해 놓고 살펴가고자 한다.
대장경 부분=> 불성론_K0596_T1610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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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표시해 놓고 살피면
결국 ○과 ● 사이에서 시시비비를 다투는 형태가 된다.
그리고 독자는 그 가운데 어떤 입장이 보다 타당한가를 놓고
살펴야 하는 법관 입장처럼 된다.
한편 각 부분에서
각 부분의 설명이 상당히 압축되거나 생략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각 부분이 나타내고자 한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편 논서를 대할 때
각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 자체가 모호한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 언어표현만으로는 각 경우마다 기계적으로 의미를 확정해 살파기 곤란하다.
이런 경우 전체 맥락을 통해 가리키는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한편 어떤 주장을 입증하거나
상대 입장을 비판하기 위해
만일 ~ 라면 --- 이 된다라는 식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그런데 그 내용들이 왜 그렇게 제시되는지
정작 그 관계성을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논의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아주 당연한 듯 제시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이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그 사정을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이는 if 형식 구문에서 공통된다.
이는 일정한 전제에서 후건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관계성에 대한 이해문제다.
이를 수학문제 풀이로 비유해보자.
94 곱하기 49 의 문제를 푼다고 하자.
그런데 풀이과정에서 4 곱하기 9 는 36 이므로 답이 4606 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정작 4 곱하기 9 가 왜 36 이라고 하는가부터 이해가 잘 안 될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다.
여하튼 이런 여러 사정으로 논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 할 수 있다.
이런 사정들로 논서 내용을 살피는데 어려움이 많을 수 있다.
이들 시시비비는 오늘 갑자기 생긴 시시비비가 아니다. 내력이 깊다.
그래서 이 논서만 하나 붙잡고 살핀다고 쉽게 해결되는 성격도 아니다.
전반적으로 이들 논의가 제시된 배경을 함께 잘 살펴야 논의를 잘 살펴갈 수 있다.
○ 『불성론』에서 첫 주제는 불성과 관련된다.
두번째는 자성의 유무와 공과 관련된다.
비교적 이해하기가 쉽다.
그러나 논의가 전개되는 각 부분은 내용이 상당히 복잡하다.
여기서는 불성과 관련된 주제를 먼저 살피기로 한다.
불성 유무에 대해 논의할 때
그 표현이 가리키는 의미에 대해 여러방향으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불교사전등에서 제시되는 불성이란 표현의 용어풀이는
다음을 기본적으로 참조하기로 한다.
ꊱ불성
‡불성
ω불성
가장 간단히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로서의 본성.
부처인 본질.
부처의 성질.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잠재된 진실한 인간성.
본연의 마음.
여래장의 별칭.-부처가 되는 결실을 맺게 하는 종자.
각성(覺性) , 불종성(佛種性) , 여래성(如來性)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다의적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논의의 초점이 이 가운데 어떤 의미인가를
잘 판단해야 한다.
○ 불성의 의미 - 부처의 성품이 주제인 경우
표현 그대로만 놓고 보면
불성은 부처의 성품 이런 의미로 보게 된다.
이런 경우 불성이 있다면 곧 부처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이 경우 어떤 특성들을 부처의 성품으로 볼 것인가가 문제된다.
○ 공통성과 차별성 및 성품의 다양한 측면
여기에는 어떤 존재의 성품을 파악하는 과정부터 잘 살펴야 한다.
영희는 무언가라고 현실에서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 경우 영희는 우선 일체 존재와 공통해서 갖는 성품이 있을 수 있다.
한편 일반사람과 공통해서 갖는 성품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영희만 고유하게 갖는 성품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영희의 경우에서도 특수한 경우에 잠깐 갖는 성품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들 성품을 모두 영희가 갖는 성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어떤 측면을 놓고 문제삼는가를 먼저 잘 판단해야 한다.
한편 영희의 이들 각 성품을 파악할 때 그 파악하는 방식에도 논점이 많다.
우선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고 일정 부분이 영희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것이 망집의 하나다. [신견]
이런 경우 영희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런 성품은 과연 그런 감각현실 부분에 그처럼 있다고 할 것인가부터 문제된다.
그리고 다시 그런 성품은 본 바탕에서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다시 그 성품은 실답고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인가도 역시 문제된다.
앞에 제시한 각 성품은 이들 문제와 다 관련된다.
예를 들어 영희만 고유하게 갖는 성품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 성품은 앞과 같은 바탕에서 처음 현실에서 파악한다.
즉 일정부분을 놓고 영희라고 여기고 대한다.
그런 가운데 그런 영희가 다른 이들과는 달리 갖는 고유한 성품을 파악한다.
그런데 이 경우 그 성품이 과연 본 바탕에서도 그처럼 얻어지는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이는 영희만 갖는 고유한 성품이 실재에도 얻어지는가를 문제삼는 논의가 된다.
또 다음도 문제될 수 있다.
한편 영희가 모든 사람들과 공통적으로 갖는 성품이 있다고 하자.
이 경우도 역시 위와 같은 형태로 문제삼을 수 있다.
이제 그런 성품은 그렇게 영희라고 가리킨 그 부분에 있다고 할 것인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위에 나열한 공통성, 고유성 등은 이처럼 다 제각각 각 측면으로 다 논의 대상이 된다.
부처님의 성품을 살필 때도 사정이 같다.
어떤 경우는 부처님을 포함해
일체 중생이 다 공유한다고 보는 성품을 파악할 수 있다.
또 어떤 경우는 현실에서는 제각각 다른 성품과 차별이 있다는 측면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은 소나 돼지와도 다르고, 일반적 사람과도 다르다라고 판단한다.
그런 측면에서 부처님만 갖는 특성을 살필 수도 있다.
그래서 처음 부처님의 성품에 대해서 논의할 때는
우선 어떤 측면의 성품을 논의대상으로 하는가부터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렇게 파악한 성품이
감각현실 영역에 있다고 할 것인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또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 그처럼 얻어지는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그 성품은 실답고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인가도 역시 문제된다.
이처럼 불성의 유무 논의는 다양한 측면에서 살필 수 있다.
그리고 불성의 유무 논의에서 혼동을 일으키는 부분은 이와 관련이 깊다.
○ 부처의 공통적 성품
부처의 본 정체를 파악하려 노력한다고 하자.
부처가 갖는 다양한 내용 가운데
무언가는 일반 생명이 다 갖추고 있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도 이미 갖추고 있는 공통적인 성품도 있다.
그런데 이 역시 부처가 갖는 성품의 하나가 된다.
예를 들어 부처님도 당시 식사를 한다.
또 걸어다닌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일반인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만은 부처나 일반인이나 같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곧바로
일반인을 부처라고 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처음에 자신이 어떤 이를 부처라고 표현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의미가 식사하고 걸어다니는 이를 나타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 경우 부처라는 표현은
수행과 관련해서도 별 특별한 의미가 없는 내용이 된다.
예를 들어 이미 식사하고 걸어다니는 어떤 이가
갑자기 자신이 장차 부처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시작했다고 하자.
그런데 알고보니 식사하고 걸어다니던 이가
식사하고 걸어다닐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라면 이상하다.
○ 부처의 차별적 성품들
현실에서는 소나 말이나 개도 있다.
그리고 이들도 중생이다.
그런데 이들도 부처님과 공통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을 부처님이라고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이상한 결론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소는 무엇을 물어보아도 대답을 해준 적도 없다.
또 늘 소같이 행동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이라고 존중할 만한 내용이나 특성이 파악이 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부처라고 파악하는 존재는
이런 공통성 외에 다른 특성을 더 갖는다고 파악할 수 있다.
일반인이 잘 모르는 것을 우선 잘 안다.
그리고 잘 제시해준다.
이런 것도 그런 특성의 하나다.
한편, 수행을 통해서 수행결과를 얻는 단계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을 나열한다.
다시 아라한과 부처님이 모두 생사의 묶임에서 해탈을 얻은 상태다.
이런 점은 다른 일반인과 다른 차별적 특성이다.
그런데 아라한과 부처는 다시 이런 점에서는 서로 공통성을 갖는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시 아라한과 차별이 있다.
결국 부처는 아라한과 어떤 부분은 공통하지만,
다시 어떤 부분이 공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처만 갖는 차별적 특성이 다시 나열된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오직 부처님만 갖는 내용이 무언가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으로 18 불공법( 18 가지 공통하지 않는 덕목) 이나
180 불공법 등을 나열한다.
그리고 그 차이는 핵심은 법신을 증득에 두게 된다.
즉, 부처는 법신을 증득한 점에서 아라한과는 차별이 있다고 제시한다.
그런 결과 현실에서 부처님은 앞과 같은 차별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이런 성품을 취득하는 것이 기본적인 수행목표점이 된다.
이런 차이는 다음 비유로 이해해야 한다.
우선 병이 든 사람과 건강한 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이가 병에 걸렸다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건강한 상태가 되었다고 하자.
그런 점에서는 의사나 병에서 나은 환자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환자는 단지 자신의 병만 치료를 마친 경우다.
그리고 의사는 수많은 환자들을 맡아 치유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다시 다르다.
한편 의사라고 해도 단순히 환자를 건강한 이로 치유시키는 활동만 하는 의사가 있다.
또 다른 의사는 다시 의사를 양성시키기 위해 의사를 교육시키는 경우도 있다.
또 의과대학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아라한은 전도몽상의 상태와 생사고통을 벗어난 상태다.
한편 홀로 연기를 관해 깨달음을 얻은 연각도 이처럼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런 경우 그런 점에서 아라한과 연각이나 부처님은 차별이 없다.
그러나 다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가 있다.
이런 경우는 그런 점에서 다시 차이가 있다.
○ 부처의 성품과 망집 신견
앞에서 현실에서 영희나 부처님이 갖는
공통성과 차별성을 대강 나열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측면에서 이런 성품을 처음 파악하게 되었는가가 문제된다.
현실에서 이런 파악은 사실은 망집에 해당하는 신견을 바탕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파악한 각 성품은
감각현실이나 본 바탕의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한편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아라한이나 부처의 차별성은 그런 기본 사정을
잘 파악하여 망집을 제거한 점에 있다.
그래서 앞에서 파악한 공통성과 차별성은 모두 이런 측면에서 함께 문제된다.
즉 여러 공통성과 차별성을 현실에서 나열한다.
그런데 그런 여러 성품은 관념영역에서 그렇게 분별한 것이다.
그리고 감각현실 영역에서부터 그런 내용은 얻어지지 않는다.
또한 그런 성품은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공하다.
그리고 이들 성품은 진짜라고 할 참된 내용도 아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이들 아라한이나 부처가 모두 같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다.
우선 감각현실의 어떤 부분에도 그런 성품은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감각현실의 각 부분은 모두 같은 내용도 아니다.
그런 가운데 각 주체는 각 부분을 대하는 가운데 일정한 분별을 일으킨다.
사정은 그렇지만, 그 각 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어느 부분에도 그가 분별하는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그리고 관념분별은 또 감각현실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는 어떤 감각현실이든 차별이 없다.
그런데 그런 관념분별을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 얻은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화분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자.
또 어떤 이가 바위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정작 그가 얻는 감각 현실 어느 부분에도 그가 생각하고 분별하는 성품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주체는 바위라고 여기는 부분을 대할 때는 바위라는 분별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 부분에 그런 성품이 있다고 여기는 상태다.
현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감각현실 각 부분이 하나로 똑같은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정은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이가 라이터란 생각을 하게 되면 매번 연기를 떠올린다고 하자.
사정이 그렇다고 연기란 생각이 라이터란 생각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감각현실을 대하여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것도 이와 사정이 같다.
매번 일정한 감각현실을 대해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킬 수 있다.
사정은 그렇지만, 그런 관념분별이 그렇다고 그 감각현실 부분에 그처럼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감각현실 부분이 곧 그런 관념분별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혼동하면 안된다.
그런데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을 때
손가락으로 일정 부분을 가리키는 것은 이런 혼동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이 곧 현실에서 상을 취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망집을 일으킨다.
이것이 곧 신견이 된다.
그래서 일정부분을 대하면서 그 부분이 자신이나 영희라고 여기는 것이 신견의 일종이다.
그리고 이런 망집을 바탕으로 할 때
그 부분에 일정한 성품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부처에 대한 판단도 사정이 이와 같다.
일정 부분을 부처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 부분에 자신이 분별한 성품이 그처럼 있다고 망집을 일으킨다.
그런데 본 사정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여하튼 그 부분은 또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또 각 부분이 하나의 형태로 같은 상태도 아니다.
그런 가운데 망집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일정부분을 대하면 그 부분이 영희라고 여기는 상태다.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해서도 사정이 같다.
그리고 부처에 대해서도 사정이 같다.
이들 어느 부분이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은 차별이 없다.
그런데도 각 주체는 일정 부분에서 다른 부분과 달리 그런 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런 분별은 또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서 얻는 것도 아니다.
그런 관계에 놓여 있다.
한편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영역도 사정이 이와 유사하다.
본 바탕인 실재 영역은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차별없이 공하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있음 없음, 같음 다름을 모두 떠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각각의 상태가 본 바탕에서 완전히 같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각각의 상태는 이런 영역에서 어떤 차별이 있는가가 다시 문제될 수 있다.
이를 아래에서 이어 살피기로 한다.
○ 현실의 부처의 성품은 본 바탕에서도 얻어지는가의 문제
현실에서 부처와 일반적인 상태의 비교를 통해 각 성품을 파악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하여 그런 성품이 실재에도 그처럼 존재하는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도 본 바탕인 실재에서는 다른 일체와 차별없이 공하다.
이는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 어떤 성품이 어떠하게 적극적으로 있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다.
한편, 그것은 다른 존재와 실재 영역에서 모든 측면이 똑같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다.
이는 실재 영역에서 어떤 내용을 얻을 수 없음만을 제시한 것 뿐이다.
이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일체가 실재 영역에서는 차별없이 모두 그러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뿐이다.
차별없이 공하다라는 표현으로 이런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하다.
그런데 여하튼 부처님도 실재의 측면에서는 공하다.
그리고 공한 실재의 측면에서는 일체가 차별이 없다.
그 본래의 상태도 청정한 니르바나다.
이런 점에서는 다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생사현실에서 부처님은 다른 중생과 차별이 있다.
생명을 갖는 생명체를 중생[유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생 뿐만 아니라 무정물까지도 포함하여 일체가 다 자성이 없고 공하다.
이런 측면은 모두 차별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 일체가 다 본 바탕에서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꿈을 놓고 이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해해보자.
현실에서 침대에 누어 잠을 잤다.
그리고 꿈에서 바다나 황금꿈을 꾸었다.
그런데 꿈에서 꾼 일체 내용은 다 차별없이 침대가 놓인 방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 점에서 차별이 없다.
그렇다고 침대가 놓인 방이 다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각과 청각의 관계를 놓고도 살필 수 있다.
시각으로 다양한 색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내용은 청각영역에서는 차별없이 다 얻을 수 없다.
그렇다고 청각 영역이 오로지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여하튼 본 바탕은 차별없이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차별없이 공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다양한 내용을 얻는다.
그래서 현실에서 다양한 차별상을 얻는다.
그런데 이런 차별은 도대체 어떤 사정으로 그렇게 나타나는가가 문제된다.
즉, 실재의 측면이 어떠하기에 현실에서 그런 차별이 있게 되는가를 헤아려야 한다.
부처나 소가 차별없이 공하다라는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표현으로 실재 영역에서 부처나 소가 다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라고 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실재 영역에서는 현실에서 행한 그런 분별과 구분부터 얻을 수 없다.
그런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 실체적 성품의 존부문제
한편 진짜라고 할 실체나 본성[자성]이 있는가의 문제를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부처님도 다른 것과 차별없이 다 함께 무자성 공하다.
중생도 그런 점에서는 차별이 없다.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제시된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런 구절은 앞에서 살핀 측면들과 관련이 깊다.
현실에서 일정한 특성으로 일정한 이는 부처라는 분별을 일으킨다.
그런 가운데 부처라고 여기는 부분을 놓고 그 정체를 파악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어떤이가 부처라고 가리킨 그 부분은
다른 감각현실 영역과 마찬가지로 그런 관념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관념을 바탕으로 그런 부분을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무상해탈]
한편 그 어느 부분이나.
본 바탕인 영역에선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일체는 차별없이 공하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측면은 또 하나의 공통성이 될 수 있다.
일체가 여하튼 실재 영역에서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공통성만으로 어떤 존재를 부처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즉 공하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존재를 부처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는 본 바탕에서 차별없이 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공한 것은 모두 부처다라고는 할 수 없다.
이를 비유를 들어 살펴보자.
예를 들어 경찰관은 다른 사람과 차별없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사람이면 다 경찰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와 사정이 같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
오히려 이런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이로서 다 부처라고 칭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부처가 아니라고 할 어떤 것은 전혀 없다.
또한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라는 표현은
모두가 다 같은 성품으로 되어 있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다.
이는 본 바탕인 영역에서는 그런 같고 다름의 분별을 모두 떠난다는 의미다.
그런 가운데 일반적 입장은
그런 상태에서 전도망상을 일으켜 덧붙인 측면이 부가되어 있다.
그것이 곧 생사고통을 겪게 한다.
그래서 이를 현실에서 제거하는 것이 목표점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탈을 얻은 상태라고 칭하게 된다.
그런데 단지 그것만으로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법신을 증득해야 부처님이라고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법신을 증득한 상태는
그렇지 못한 상태와 비교할 때
실재에서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인가.
또 그런 차이가 없다면 완전히 같다고 할 것인가.
이런 문제가 이런 측면에서 논의된다.
○ 부처가 될 가능성으로서 불성 유무
- 부처가 될 가능성유무가 논의 주제인 경우
한편 불성을 장차 부처님이 될 가능성
이런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조금 문제의 초점이 달라진다.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
이 표현을 이런 입장에서 표현했다고 하자.
이는 곧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개가 불성이 있는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저 개가 부처님이 아니다.
그런데 장래에는 부처님이 될 수가 있다.
이런 의미로 보면 조금 납득할 여지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 될 가능성을
왜 불성이라고 표현했는가부터가 문제된다.
현실에서 a 가 장차 될 가능성을
평소에 a성 또는 a의 성품
이렇게 표현하는가가 의문이 된다.
여하튼 이런 점 때문에
시시비비의 논의과정에서 혼동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중생이 차별없이 장차 된다는 부처는
어떤 특징과 성품을 가진 상태로 파악하고 제시했는가를
다시 잘 파악해야 한다.
그 다음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파악한 부처나 여래의 본 정체는
다시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야 한다.
그래야 부처의 정체가 파악이 된다.
그리고 그 각 경우를 놓고
정말 일반 중생이
그런 각 의미로서 부처님이 될 '가능성'을 차별없이 다 갖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 각 경우 부처님의 성품을 공통성 차별성, 실재 측면 등으로
살핀 내용이 모두 이 문제와 관련된다.
무언가 되어야 할 구체적 내용이 이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먼저 자신이 부처나 부처의 성품이라고 파악한 것이
일체 중생이 함께 갖는 공통적 성품이라고 하자.
또는 일체 존재가 차별없이 공하다고 할 때 공함이라고 하자.
그런데 이미 공통적으로 그런 상태에 있다.
그래서 어떤 이가 다시 그런 상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하다.
그리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
무엇을 행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 역시 이상하다.
그렇지만, 이런 공통성을 놓고 제시할 때도
수행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문제를 비유적으로 쉽게 이해해보자.
사람은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 가운데 도둑도 있다.
그리고 사람 가운데 경찰관도 있다.
그래서 사람이 노력하면 경찰관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사람은 모두 경찰관성이 있다.
이렇게 표현한다고 하자.
그런데 상대를 살펴보니 경찰관이 아니다.
도둑행위만 주로 한다.
그런 관계로 도둑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경우
그 도둑에게 우선 사람이 되라고 말을 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사람성'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도둑은 이미 사람인 상태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이 다시 되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런데 이 경우를 놓고 다음처럼 해석할 수도 있다.
강도나 경찰관이나 다 함께 사람이다.
그런데 강도는 여기에 다시 강도의 성품을 덧붙여 갖고 있다.
그래서 그런 특수하고 좋지 않은 성품이 문제다.
그래서 이를 제거하고 일반인과 같은 공통성만 갖는 상태가 되어야 함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수행의 사정도 역시 마찬가지다.
부처나 일반인이나 본 상태에는 차별이 없다.
그런데 중생은 그런 상태에서 다시 망집을 일으켜 갖고 있다.
그래서 이처럼 덧붙여 일으킨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그런 망집을 제거한다고 다른 상태와 달라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먼저 이런 공통적인 측면에 이르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그리고 이런 측면이 해탈과 관련된다.
이런 경우 어떤 중생이나 그 본 바탕에서는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당연히 이런 해탈의 상태가 될 가능성을 갖는다고 해야 한다.
한편, 처음부터 차별성으로서 부처를 파악한 경우는
그런 상태가 될 가능성을 논의하는 것이 의미가 있게 된다.
이는 앞의 상태에서 다시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는 상태와 관련된다.
그래서 이는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갖추어나가야 할 성품과 관련된다.
이 경우 그런 성품들이 무엇들인가를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공통한 기본 상태에서 어떻게해야 그런 상태가 될 수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논의를 살펴야 한다.
◧◧◧ para-end-return ◧◧◧
불성에 대해 살폈다.
그런데 이런 논의를 살피는 효용은 무엇인가.
부처는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상태를 나타낸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상태가 되고자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먼저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이 논의가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 않다면 이에 대한 논의는 별 실익이 없다.
일단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된 상태가 가장 좋고 좋은 상태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서 성취해야 할 목표상태다.
그래서 이는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이 논의는 장차 성불을 하고자 하는 경우에
논의의 효용이 있다.
그런 바탕에서 그 이론적 기초가 무언가를 살펴야 한다.
현실에서 중생은
본래의 상태에서
다시 무명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전도망상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에 바탕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에 집착한다.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는다.
이런 점이 문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자신이 오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앞에서 비유적으로
강도에게 사람이 되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고 하자.
그러나 강도는 기본적으로 이미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사람이 다시 되라고 하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다 공통적으로 갖는 기본 품성만 남기고
강도가 특별히 갖는 특성을 없애도록 노력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수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본 바탕에서 차별없이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망집만 제거하면 본래의 그런 상태가 자연스럽게 된다.
이것이 기본적인 해탈의 의미다.
그런데 그런 상태가 된 후에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다른 중생을 그런 상태로 제도할 필요가 있다.
중생을 그대로 방치하면 이런 사정을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오기가 곤란하다.
그래서 수행자는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생사 즉 열반임을 관하고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상적인 최고의 상태가 법신을 증득한
부처의 상태가 된다.
이 부처의 상태가 다른 상태와 달리 참된 진짜의 실체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런 사정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처음부터 부처가 아닌 경우는
그런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부처가 그런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부처의 상태도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자가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이 수행에서 중요하다.
그래서 이 논의는 수행자에게 다음 효용을 준다.
수행자는 누구나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갖는다.
그래서 노력하면 된다.
이런 효용을 준다.
부처가 되고자 할 때 여러 측면에서 나열되는 성품이 혼동을 줄 수 있다.
여기에서는 기본적으로 본 바탕의 측면에서 차별이 없이 공하다는 측면과
또 한편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뛰어난 성품이 크게 문제된다.
본 바탕에서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키면 상황이 달라진다.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데도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고 임하게 된다.
그리고 집착을 바탕으로 업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이는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그런 상태에서 얻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 성격이 꿈과 같다.
그래서 생사현실은 본래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런데 생사현실은 또 정작 꿈은 아니다.
꿈과 비슷하지만, 꿈은 아니다.
이 생사현실은 무수한 주체가 일정한 공간과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으로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얻는다.
그래서 한번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그것이 무량겁에 걸쳐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무량겁에 걸쳐 과보를 받아나가게 된다.
그래서 비록 하나하나 실답지 않지만, 이를 무시하고 외면할 수 없다.
이런 점이 꿈과는 다른 점이다.
그런데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해탈의 측면만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들은 본 바탕에서 본래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망집만 제거하면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면 된다.
그렇게 수행하면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된다.
이런 측면이 수행자의 기본특성이 된다.
그런데 이는 알고보면 모든 존재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성품과 관련된다.
이 측면에서는 그런 바탕에서 일으킨 망집만 제거하면 된다.
비록 각 중생의 바탕이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측면은 기본적으로 공통하다.
그리고 이는 본래부터 갖춰진 상태다.
이것이 해탈이나 이계과가 갖는 의미다.
수행을 통해서 그런 상태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는 본래부터 갖춰진 상태다.
그래서 이는 생멸을 떠난 상태라고 표현한다.
무언가 실답고 참다운 것이 있다고 할 상태도 아니다.
그러나 또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유무를 떠난 상태다.
다만 망집을 바탕으로 생사를 겪는 상태가 해소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크다.
그런데 이는 번뇌나 업 생사고통을 제거하는 측면이다.
본 바탕에서는 모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망집을 제거하면 그런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는 부처나 일반 중생이나 그 기본 상태는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부처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는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하는 측면과 관련된다.
생사현실에서 중생들은 앞과 같은 상태로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이를 방치하면 중생들이 스스로 알아서 그 상태를 벗어나기가 대단히 힘들다.
무량겁에 걸쳐서 그 상태로 생사를 겪어나가게끔 된다.
하나하나 실답지 않다.
그런데도 망집을 바탕으로 그렇게 임하게끔 된다.
그래서 이 사정을 파악한 이가 다시 자비심을 바탕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현실에 임하게 된다.
이 측면은 앞과 성격이 다르다.
본래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다.
본 바탕의 측면을 100 % 붙잡고 살핀다면 이들 내용은 본래 문제되지 않는다.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앞과 같이 이들이 실답지 않다고 그대로 방치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본 바탕의 측면을 99% 정도 취한다.
그런 가운데 다시 생사현실의 측면을 1% 정도 취하여
생사 즉 열반임을 관하고 생사현실에 임하게 된다.
생사현실 그 재료 자체는 본래 생사고통을 떠나 있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대하면 '생사 즉 열반'임을 관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 임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중생과 눈높이를 맟줘서 임한다.
그런 가운데 중생을 제도할 방편을 찾아나가게 된다.
이는 망집에 바탕한 상태와 반대 방향이다.
중생은 본래 적정열반인 상태를 대하며 생사고통으로 여긴다.
즉, 중생은 '열반 즉 => 생사고통'으로 여기고 임하는 상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런 기본 사정을 잘 관하고 생사현실에 임한다.
이들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망집에 바탕한 업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업을 행하게 하는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서는 스스로 그렇게 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중생제도를 위해서는 이런 중생 상태에 맞추어
중생을 제도할 방편을 취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을 행해 나가게 된다.
먼저 생사현실에서 계를 구족한다.
그래서 자신도 생사에 묶이지 않고 복덕자량을 쌓아 간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할 방편지혜를 구족해간다.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의 정점에 성불상태가 있다.
이는 생사현실에서 일으킨 망집번뇌를 없애는 측면과는 반대방향이다.
생사현실에 임해 적극적으로 무량한 선법을 닦고 구족해가는 방향이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을 잘 이해해야 한다.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이들 내용을 다 함께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런 상태가 중생제도를 위해서 대단히 요구된다.
그렇기에 수행자가 무량한 선법을 닦아 성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생사를 벗어나 머무려는 아라한의 수행과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는 수행은 서로 차원이 달라진다.
질병과 같다. 어떤 이가 병에 걸려 있을 때 노력해 병을 나아 건강해질 수는 있다 .
그러나 그렇다고 곧바로 의사가 되기는 힘들다.
제각각 다른 병에 걸린 수많은 환자를 치유시키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다시 별도의 노력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부처 상태가 기본적으로 해탈을 바탕으로 하는 측면은 아라한과 같다.
그러나 다시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을 성취함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런 수행의 정점에 법신을 증득해 성불하는 부처의 상태를 제시한다.
그래서 아라한과 부처의 상태는 차별이 있다고 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부처의 본 정체가 의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불성 문제는 이런 여러 측면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처음에 제시한 망집 문제와 그 성격이 같다.
생사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모습과 성품이 있다고 분별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생활해간다.
그런데 그것은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 얻을수 없다.
또 각 감각현실 영역에서도 그 사정이 같다.
그래서 실다운 성품은 아니다.
그러나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는 그렇게 얻는다.
다만 그런 각 재료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본래 생멸을 떠난 것이다.
다만 망집을 일으켜 상을 취하는 경우는
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다고 여기고 대하게 된다.
그래서 거기에 생멸이 그처럼 있다고 여기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성불의 상태는 결국 차별없이 공한 바탕을 한다.
그래서 부처의 상태도 역시 차별없이 공하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
그렇지만 그처럼 공한 일체를 그것만으로 부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공한 바탕에서 법신을 증득해야 부처가 된다.
그리고 법신을 증득하는 일은 공한 바탕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그렇게 법신을 증득한다고 하자.
그 상태도 역시 앞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생멸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다.
처음 생사현실이 꿈과 성격이 같다고 했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또 생사현실은 정작 꿈이 아니라고 했다.
그 내용이 실답지 않다.
그래서 그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렇다고 그 내용을 전혀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가운데 얻는다.
그런 상태로 얻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법신을 증득해 성불하는 상태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계를 혼동하면 곤란하다.
이를 ○와 ■ 를 놓고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안에서 ■ 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가 ■ 인것도 아니다.
그리고 ■가 ○ 인것도 아니다.
따라서 ○을 대하며 그 안에 ■가 있다고 망집을 일으키면 안된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이 곧 ■라고 잘못 여겨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와 ○ 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은 ○ 영역에는 얻을 수 없는 것을 그처럼 얻는 것이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이다.
즉 ■을 그렇게 얻는다. 그래서 있다.
그러나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는 형태로 있는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이는 실답게 참된 진짜가 있는 것은 아니다. [ 있지 않다. ]
그렇다고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 없지 않다. ]
그래서 유무 양극단을 떠난다고 표현한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 과 ■ 의 성격이 모두 이와 같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법신을 증득하여 성불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불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공한 바탕에서 가능한 것이다. [여래장]
그리고 그렇게 성불한 상태 자체도 그 사정이 위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불성'이 갖는 다양한 의미를 이런 입장에서 종합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 para-end-retur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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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만약 법대로 외우고 지니며,
모든 중생에게 자비심을 일으키는 자는
내가 이때 일체 착한 신과
용왕과 금강밀적(金剛密迹)을 보내서
그를 항상 따라
옹호하게 하고,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마치 자기 눈동자나
자기 목숨을 보호하고 아끼듯이
하게 하리라.
그리고 곧 분부하며 말씀하시길,
나는
밀적금강사(密迹金剛士)
오추군다앙구시(烏芻君茶鴦俱尸)
팔부역사상가라(八部力士賞迦羅)를 보내
..
마혜나라연(摩醯那羅延)과
금비라타가비라(金毘羅陁迦毘羅)를 보내
..
바삽바루나(婆馺婆樓那)와
만선차발진다라(滿善車鉢眞陁羅)를 보내
..
살차마화라(薩遮摩和羅)와
구란단탁반지라(鳩蘭單咤半祇羅)를 보내
..
필바가라왕(畢婆伽羅王)과
응덕비다살화라(應德毘多薩和羅)를 보내
..
범마삼발라(梵摩三鉢羅)와
오정거등염마라(五淨居等炎摩羅)를 보내
..
제석천과 삼십삼천과
대변공덕바달라(大辯功德婆怛那)를 보내
..
제두뢰타왕(提頭賴咤王)과
신묘녀(神母女) 등 힘센 무리들을 보내
..
비루륵차왕(毘樓勒叉王)과
비루박차(毘樓博叉)와 비사문(毘沙門)을 보내
..
금색공작왕(金色孔雀王)과
이십팔부대선중(二十八部大仙衆)을 보내
..
마니발타라(摩尼跋陁羅)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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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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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라용(娑伽羅龍) 이발라(伊鉢羅)를 보내
..
수라(脩羅), 건달바(乾闥婆)와
가루라[迦樓], 긴라라[緊那], 마후라(摩睺羅)를 보내
..
수화뇌전신(水火雷電神)과
구반다왕(鳩槃茶王) 비사차(毘舍闍)를 보내
이 주문을 받아 지니는 자를
항상 옹호하게 하리라.
● 구로구로갈망 俱盧俱盧羯懞<二十七> ku ru ku ru kar maṃ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45
아체엄라 시라
阿砌掩囉<二合>尸羅<四十五>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 삼매_게송퀴즈
■ 오늘의 게송
[261일째]
불고심왕보살언 $ 003▲● 천 욕령제세간입 불소지수량지의 ○□□□□,善,汝,佛,善
□□□□□□□,:「善哉善哉!善男子!
汝今 為 欲令 諸世間 入 佛所知數量之義,而問 如來、應、正等覺。
□□□□□□□,:「선재선재!선남자!
여금 위 욕령 제세간 입 불소지수량지의,이문 여래、응、정등각。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말씀하시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그대가 지금 여러 세간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님이 아는 수량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하여 여래·응공·정변지에게 묻는구나.
[142째]
피모단처제국토 $ 013▲阿伽羅阿伽羅為 一 ● 最勝, ○□□□□,無,有,有,不
□□□□□□□, 無量種類差別住,
有不可說異類剎, 有不可說同類剎。
□□□□□□□, 무량종류차별주,
유불가설이류찰, 유불가설동류찰。
저 터럭 끝에 있는 모든 세계들
한량없는 종류가 각각 다르니
말할 수 없이 많은 다른 종류와
말할 수 없이 많은 같은 종류며
●K0249_T0690.txt★ ∴≪A불설희유교량공덕경≫_≪K0249≫_≪T0690≫
●K0596_T1610.txt★ ∴≪A불성론≫_≪K0596≫_≪T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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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_암기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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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0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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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6-001♧
제1권_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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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M#]
『불성론』 ♣0596-001♧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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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의부분
재검토시작 Lab value 불기2564/05/22/금/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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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글 (☆정리중) (★마침)
○ 논서를 살피는 과정에서 공통주의점
○ 불성의 의미 - 부처의 성품이 주제인 경우
○ 공통성과 차별성 및 성품의 다양한 측면
○ 부처의 공통적 성품
○ 부처의 차별적 성품들
○ 부처의 성품과 망상분별
○ 현실의 부처의 성품은 본 바탕에서도 얻어지는가의 문제
○ 실체적 성품의 존부문제
○ 부처가 될 가능성으로서 불성 유무
- 부처가 될 가능성유무가 논의 주제인 경우
● 불성유무의 논의효용
● 맹목적 활동과 위험한 수익
『불성론』
불성론에 대한 개인 연구용 정리내용은 다음 페이지 참조
불성론_K0596_T1610_001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5/k0596t1610001.html
https://buddhism007.tistory.com/11512
▸ 만약 분별부의 설에 따른다면,
불성없는 중생이 있음을 믿지 않을 것이고,
살바다 등의 설에 따르면,
모두에게 불성이 있음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불성없는 중생이 있음을 믿지 않을 것이고,
살바다 등의 설에 따르면,
모두에게 불성이 있음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분별부란 소승 부파에서 상좌부 계통에 있는 한 부파다.
>>>
용어풀이
ꊱ불성
‡불성
ω불성
Lab value 불기2561/09/18/월/23:55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Isabelle Boulay - Parle-Moi.lrc
○ 논서를 살피는 과정에서 공통주의점
『불성론』을 살핀다.
그런 가운데
논서들에서 공통적으로 만나는 문제를 만나게 된다.
우선 한 논서에 a 라는 입장이 있다면
a 와 상대하는 다른 입장들 b, c, d 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논서의 각 부분에서 어떤 것이 a 의 입장이고
어떤 것이 다른 b,c,d 의 입장을 나타내는 부분인가부터 명료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불성론』에서는 그런 문제를 해소해보고자
일단 불성론을 제시하는 입장을 ○ 로 표시해 보았다.
그리고 그와 상대되는 입장으로 보이는 부분은 ● 로 표시해 구분해 보았다.
물론 읽는 가운데 혼동이 발생해 잘못 표시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이처럼 표시해 놓고 살펴가고자 한다.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5/k0596t1610001.html
https://buddhism007.tistory.com/11512
그런데 이렇게 표시해 놓고 살피면
결국 ○과 ● 사이에서 시시비비를 다투는 형태가 된다.
그리고 독자는 그 가운데 어떤 입장이 보다 타당한가를 놓고
살펴야 하는 법관 입장처럼 된다.
한편 각 부분에서
각 부분의 설명이 상당히 압축되거나 생략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각 부분이 나타내고자 한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편 논서를 대할 때
각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 자체가 모호한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 언어표현만으로는 각 경우마다 기계적으로 의미를 확정해 살파기 곤란하다.
이런 경우 전체 맥락을 통해 가리키는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한편 어떤 주장을 입증하거나
상대 입장을 비판하기 위해
만일 ~ 라면 --- 이 된다라는 식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그런데 그 내용들이 왜 그렇게 제시되는지
정작 그 관계성을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논의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아주 당연한 듯 제시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이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그 사정을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이는 if 형식 구문에서 공통된다.
이는 일정한 전제에서 후건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관계성에 대한 이해문제다.
이를 수학문제 풀이로 비유해보자.
94 곱하기 49 의 문제를 푼다고 하자.
그런데 풀이과정에서 4 곱하기 9 는 36 이므로 답이 4606 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정작 4 곱하기 9 가 왜 36 이라고 하는가부터 이해가 잘 안 될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다.
여하튼 이런 여러 사정으로 논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 할 수 있다.
이런 사정들로 논서 내용을 살피는데 어려움이 많을 수 있다.
이들 시시비비는 오늘 갑자기 생긴 시시비비가 아니다. 내력이 깊다.
그래서 이 논서만 하나 붙잡고 살핀다고 쉽게 해결되는 성격도 아니다.
전반적으로 이들 논의가 제시된 배경을 함께 잘 살펴야 논의를 잘 살펴갈 수 있다.
○ 『불성론』에서 첫 주제는 불성과 관련된다.
두번째는 자성의 유무와 공과 관련된다.
비교적 이해하기가 쉽다.
그러나 논의가 전개되는 각 부분은 내용이 상당히 복잡하다.
여기서는 불성과 관련된 주제를 먼저 살피기로 한다.
● 불성 유무논의
불성 유무에 대해 논의할 때
그 표현이 가리키는 의미에 대해 여러방향으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불교사전등에서 제시되는 불성이란 표현의 용어풀이는
다음을 기본적으로 참조하기로 한다.
‡불성
ω불성
가장 간단히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로서의 본성.
부처인 본질.
부처의 성질.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잠재된 진실한 인간성.
본연의 마음.
여래장의 별칭.-부처가 되는 결실을 맺게 하는 종자.
각성(覺性) , 불종성(佛種性) , 여래성(如來性)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논의의 초점이 이 가운데 어떤 의미인가를
잘 판단해야 한다.
○ 불성의 의미 - 부처의 성품이 주제인 경우
표현 그대로만 놓고 보면
불성은 부처의 성품 이런 의미로 보게 된다.
이런 경우 불성이 있다면 곧 부처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이 경우 어떤 특성들을 부처의 성품으로 볼 것인가가 문제된다.
○ 공통성과 차별성 및 성품의 다양한 측면
여기에는 어떤 존재의 성품을 파악하는 과정부터 잘 살펴야 한다.
영희는 무언가라고 현실에서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 경우 영희는 우선 일체 존재와 공통해서 갖는 성품이 있을 수 있다.
한편 일반사람과 공통해서 갖는 성품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영희만 고유하게 갖는 성품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영희의 경우에서도 특수한 경우에 잠깐 갖는 성품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들 성품을 모두 영희가 갖는 성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어떤 측면을 놓고 문제삼는가를 먼저 잘 판단해야 한다.
한편 영희의 이들 각 성품을 파악할 때 그 파악하는 방식에도 논점이 많다.
우선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고 일정 부분이 영희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것이 망집의 하나다. [신견]
이런 경우 영희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런 성품은 과연 그런 감각현실 부분에 그처럼 있다고 할 것인가부터 문제된다.
그리고 다시 그런 성품은 본 바탕에서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다시 그 성품은 실답고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인가도 역시 문제된다.
앞에 제시한 각 성품은 이들 문제와 다 관련된다.
예를 들어 영희만 고유하게 갖는 성품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 성품은 앞과 같은 바탕에서 처음 현실에서 파악한다.
즉 일정부분을 놓고 영희라고 여기고 대한다.
그런 가운데 그런 영희가 다른 이들과는 달리 갖는 고유한 성품을 파악한다.
그런데 이 경우 그 성품이 과연 본 바탕에서도 그처럼 얻어지는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이는 영희만 갖는 고유한 성품이 실재에도 얻어지는가를 문제삼는 논의가 된다.
또 다음도 문제될 수 있다.
한편 영희가 모든 사람들과 공통적으로 갖는 성품이 있다고 하자.
이 경우도 역시 위와 같은 형태로 문제삼을 수 있다.
이제 그런 성품은 그렇게 영희라고 가리킨 그 부분에 있다고 할 것인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위에 나열한 공통성, 고유성 등은 이처럼 다 제각각 각 측면으로 다 논의 대상이 된다.
부처님의 성품을 살필 때도 사정이 같다.
어떤 경우는 부처님을 포함해
일체 중생이 다 공유한다고 보는 성품을 파악할 수 있다.
또 어떤 경우는 현실에서는 제각각 다른 성품과 차별이 있다는 측면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은 소나 돼지와도 다르고, 일반적 사람과도 다르다라고 판단한다.
그런 측면에서 부처님만 갖는 특성을 살필 수도 있다.
그래서 처음 부처님의 성품에 대해서 논의할 때는
우선 어떤 측면의 성품을 논의대상으로 하는가부터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렇게 파악한 성품이
감각현실 영역에 있다고 할 것인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또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 그처럼 얻어지는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그 성품은 실답고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인가도 역시 문제된다.
이처럼 불성의 유무 논의는 다양한 측면에서 살필 수 있다.
그리고 불성의 유무 논의에서 혼동을 일으키는 부분은 이와 관련이 깊다.
부처의 본 정체를 파악하려 노력한다고 하자.
부처가 갖는 다양한 내용 가운데
무언가는 일반 생명이 다 갖추고 있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도 이미 갖추고 있는 공통적인 성품도 있다.
그런데 이 역시 부처가 갖는 성품의 하나가 된다.
예를 들어 부처님도 당시 식사를 한다.
또 걸어다닌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일반인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만은 부처나 일반인이나 같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곧바로
일반인을 부처라고 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처음에 자신이 어떤 이를 부처라고 표현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의미가 식사하고 걸어다니는 이를 나타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단지 식사를 하고 걸어다니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부처라고 표현하였다면
그 표현은 별 의미가 없다.그런데 그 경우 부처라는 표현은
수행과 관련해서도 별 특별한 의미가 없는 내용이 된다.
예를 들어 이미 식사하고 걸어다니는 어떤 이가
갑자기 자신이 장차 부처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시작했다고 하자.
그런데 알고보니 식사하고 걸어다니던 이가
식사하고 걸어다닐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라면 이상하다.
현실에서는 소나 말이나 개도 있다.
그리고 이들도 중생이다.
그런데 이들도 부처님과 공통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을 부처님이라고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이상한 결론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소는 무엇을 물어보아도 대답을 해준 적도 없다.
또 늘 소같이 행동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이라고 존중할 만한 내용이나 특성이 파악이 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부처라고 파악하는 존재는
이런 공통성 외에 다른 특성을 더 갖는다고 파악할 수 있다.
일반인이 잘 모르는 것을 우선 잘 안다.
그리고 잘 제시해준다.
이런 것도 그런 특성의 하나다.
한편, 수행을 통해서 수행결과를 얻는 단계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을 나열한다.
다시 아라한과 부처님이 모두 생사의 묶임에서 해탈을 얻은 상태다.
이런 점은 다른 일반인과 다른 차별적 특성이다.
그런데 아라한과 부처는 다시 이런 점에서는 서로 공통성을 갖는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시 아라한과 차별이 있다.
결국 부처는 아라한과 어떤 부분은 공통하지만,
다시 어떤 부분이 공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처만 갖는 차별적 특성이 다시 나열된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오직 부처님만 갖는 내용이 무언가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으로 18 불공법( 18 가지 공통하지 않는 덕목) 이나
180 불공법 등을 나열한다.
그리고 그 차이는 핵심은 법신을 증득에 두게 된다.
즉, 부처는 법신을 증득한 점에서 아라한과는 차별이 있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이는 결국 이런 측면에서 파악하는 부처의 특성이다.
그런 결과 현실에서 부처님은 앞과 같은 차별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이런 성품을 취득하는 것이 기본적인 수행목표점이 된다.
이런 차이는 다음 비유로 이해해야 한다.
우선 병이 든 사람과 건강한 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이가 병에 걸렸다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건강한 상태가 되었다고 하자.
그런 점에서는 의사나 병에서 나은 환자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환자는 단지 자신의 병만 치료를 마친 경우다.
그리고 의사는 수많은 환자들을 맡아 치유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다시 다르다.
한편 의사라고 해도 단순히 환자를 건강한 이로 치유시키는 활동만 하는 의사가 있다.
또 다른 의사는 다시 의사를 양성시키기 위해 의사를 교육시키는 경우도 있다.
또 의과대학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아라한은 전도몽상의 상태와 생사고통을 벗어난 상태다.
한편 홀로 연기를 관해 깨달음을 얻은 연각도 이처럼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런 경우 그런 점에서 아라한과 연각이나 부처님은 차별이 없다.
그러나 다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가 있다.
이런 경우는 그런 점에서 다시 차이가 있다.
조금 더 살피면 부처가 되는 경우 각 부처마다 다른 명호가 있게 된다.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보염여래, 보성여래... 등과 같다.
이는 이들 부처님이 부처님으로서 공통성을 갖는 한편,
또 조금씩 다른 차별성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석가여래는 정진에 특징이 있다. 세계는 안인을 수행하는 사하세계다.
그런데 아미타여래는 자비에 특징이 있다. 세계는 극락세계 정토다.
그래서 이런 점들이 각 부처님의 차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부처님은 다 함께 법신을 증득한 상태라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다.
결국 한 부처님이 갖는 특성에는 다양한 성품이 있다.
그리고 이런 공통성과 차별성은 서로 상대적이다.
생명 외에 일체의 존재와 다 함께 갖는 공통성도 있다.
그런데 또 생사를 해탈한 수행자들과 갖는 공통성도 있다.
그리고 부처님들과 갖는 공통성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는 다른 차별성이 된다.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보염여래, 보성여래... 등과 같다.
이는 이들 부처님이 부처님으로서 공통성을 갖는 한편,
또 조금씩 다른 차별성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석가여래는 정진에 특징이 있다. 세계는 안인을 수행하는 사하세계다.
그런데 아미타여래는 자비에 특징이 있다. 세계는 극락세계 정토다.
그래서 이런 점들이 각 부처님의 차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부처님은 다 함께 법신을 증득한 상태라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다.
결국 한 부처님이 갖는 특성에는 다양한 성품이 있다.
그리고 이런 공통성과 차별성은 서로 상대적이다.
생명 외에 일체의 존재와 다 함께 갖는 공통성도 있다.
그런데 또 생사를 해탈한 수행자들과 갖는 공통성도 있다.
그리고 부처님들과 갖는 공통성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는 다른 차별성이 된다.
○ 부처의 성품과 망집 신견
앞에서 현실에서 영희나 부처님이 갖는
공통성과 차별성을 대강 나열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측면에서 이런 성품을 처음 파악하게 되었는가가 문제된다.
현실에서 이런 파악은 사실은 망집에 해당하는 신견을 바탕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파악한 각 성품은
감각현실이나 본 바탕의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한편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아라한이나 부처의 차별성은 그런 기본 사정을
잘 파악하여 망집을 제거한 점에 있다.
그래서 앞에서 파악한 공통성과 차별성은 모두 이런 측면에서 함께 문제된다.
즉 여러 공통성과 차별성을 현실에서 나열한다.
그런데 그런 여러 성품은 관념영역에서 그렇게 분별한 것이다.
그리고 감각현실 영역에서부터 그런 내용은 얻어지지 않는다.
또한 그런 성품은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공하다.
그리고 이들 성품은 진짜라고 할 참된 내용도 아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이들 아라한이나 부처가 모두 같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다.
우선 감각현실의 어떤 부분에도 그런 성품은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감각현실의 각 부분은 모두 같은 내용도 아니다.
그런 가운데 각 주체는 각 부분을 대하는 가운데 일정한 분별을 일으킨다.
사정은 그렇지만, 그 각 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어느 부분에도 그가 분별하는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그리고 관념분별은 또 감각현실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는 어떤 감각현실이든 차별이 없다.
그런데 그런 관념분별을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 얻은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화분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자.
또 어떤 이가 바위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정작 그가 얻는 감각 현실 어느 부분에도 그가 생각하고 분별하는 성품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주체는 바위라고 여기는 부분을 대할 때는 바위라는 분별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 부분에 그런 성품이 있다고 여기는 상태다.
현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감각현실 각 부분이 하나로 똑같은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정은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이가 라이터란 생각을 하게 되면 매번 연기를 떠올린다고 하자.
사정이 그렇다고 연기란 생각이 라이터란 생각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감각현실을 대하여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것도 이와 사정이 같다.
매번 일정한 감각현실을 대해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킬 수 있다.
사정은 그렇지만, 그런 관념분별이 그렇다고 그 감각현실 부분에 그처럼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감각현실 부분이 곧 그런 관념분별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혼동하면 안된다.
그런데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을 때
손가락으로 일정 부분을 가리키는 것은 이런 혼동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이 곧 현실에서 상을 취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망집을 일으킨다.
이것이 곧 신견이 된다.
그래서 일정부분을 대하면서 그 부분이 자신이나 영희라고 여기는 것이 신견의 일종이다.
그리고 이런 망집을 바탕으로 할 때
그 부분에 일정한 성품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부처에 대한 판단도 사정이 이와 같다.
일정 부분을 부처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 부분에 자신이 분별한 성품이 그처럼 있다고 망집을 일으킨다.
그런데 본 사정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여하튼 그 부분은 또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또 각 부분이 하나의 형태로 같은 상태도 아니다.
그런 가운데 망집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일정부분을 대하면 그 부분이 영희라고 여기는 상태다.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해서도 사정이 같다.
그리고 부처에 대해서도 사정이 같다.
이들 어느 부분이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은 차별이 없다.
그런데도 각 주체는 일정 부분에서 다른 부분과 달리 그런 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런 분별은 또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서 얻는 것도 아니다.
그런 관계에 놓여 있다.
한편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영역도 사정이 이와 유사하다.
본 바탕인 실재 영역은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차별없이 공하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있음 없음, 같음 다름을 모두 떠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각각의 상태가 본 바탕에서 완전히 같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각각의 상태는 이런 영역에서 어떤 차별이 있는가가 다시 문제될 수 있다.
이를 아래에서 이어 살피기로 한다.
○ 현실의 부처의 성품은 본 바탕에서도 얻어지는가의 문제
현실에서 부처와 일반적인 상태의 비교를 통해 각 성품을 파악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하여 그런 성품이 실재에도 그처럼 존재하는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도 본 바탕인 실재에서는 다른 일체와 차별없이 공하다.
이는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 어떤 성품이 어떠하게 적극적으로 있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다.
한편, 그것은 다른 존재와 실재 영역에서 모든 측면이 똑같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다.
이는 실재 영역에서 어떤 내용을 얻을 수 없음만을 제시한 것 뿐이다.
이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일체가 실재 영역에서는 차별없이 모두 그러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뿐이다.
차별없이 공하다라는 표현으로 이런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하다.
그런데 여하튼 부처님도 실재의 측면에서는 공하다.
그리고 공한 실재의 측면에서는 일체가 차별이 없다.
그 본래의 상태도 청정한 니르바나다.
이런 점에서는 다 문제가 없다.
생명을 갖는 생명체를 중생[유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생 뿐만 아니라 무정물까지도 포함하여 일체가 다 자성이 없고 공하다.
이런 측면은 모두 차별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 일체가 다 본 바탕에서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꿈을 놓고 이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해해보자.
현실에서 침대에 누어 잠을 잤다.
그리고 꿈에서 바다나 황금꿈을 꾸었다.
그런데 꿈에서 꾼 일체 내용은 다 차별없이 침대가 놓인 방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 점에서 차별이 없다.
그렇다고 침대가 놓인 방이 다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각과 청각의 관계를 놓고도 살필 수 있다.
시각으로 다양한 색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내용은 청각영역에서는 차별없이 다 얻을 수 없다.
그렇다고 청각 영역이 오로지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여하튼 본 바탕은 차별없이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차별없이 공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다양한 내용을 얻는다.
그래서 현실에서 다양한 차별상을 얻는다.
그런데 이런 차별은 도대체 어떤 사정으로 그렇게 나타나는가가 문제된다.
즉, 실재의 측면이 어떠하기에 현실에서 그런 차별이 있게 되는가를 헤아려야 한다.
부처나 소가 차별없이 공하다라는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표현으로 실재 영역에서 부처나 소가 다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라고 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실재 영역에서는 현실에서 행한 그런 분별과 구분부터 얻을 수 없다.
그런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 실체적 성품의 존부문제
한편 진짜라고 할 실체나 본성[자성]이 있는가의 문제를 살핀다고 하자.
그런 경우 부처님도 다른 것과 차별없이 다 함께 무자성 공하다.
중생도 그런 점에서는 차별이 없다.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제시된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런 구절은 앞에서 살핀 측면들과 관련이 깊다.
현실에서 일정한 특성으로 일정한 이는 부처라는 분별을 일으킨다.
그런 가운데 부처라고 여기는 부분을 놓고 그 정체를 파악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어떤이가 부처라고 가리킨 그 부분은
다른 감각현실 영역과 마찬가지로 그런 관념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관념을 바탕으로 그런 부분을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무상해탈]
한편 그 어느 부분이나.
본 바탕인 영역에선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일체는 차별없이 공하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측면은 또 하나의 공통성이 될 수 있다.
일체가 여하튼 실재 영역에서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공통성만으로 어떤 존재를 부처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즉 공하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존재를 부처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는 본 바탕에서 차별없이 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공한 것은 모두 부처다라고는 할 수 없다.
이를 비유를 들어 살펴보자.
예를 들어 경찰관은 다른 사람과 차별없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사람이면 다 경찰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와 사정이 같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
오히려 이런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이로서 다 부처라고 칭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부처가 아니라고 할 어떤 것은 전혀 없다.
또한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라는 표현은
모두가 다 같은 성품으로 되어 있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다.
이는 본 바탕인 영역에서는 그런 같고 다름의 분별을 모두 떠난다는 의미다.
그런 가운데 일반적 입장은
그런 상태에서 전도망상을 일으켜 덧붙인 측면이 부가되어 있다.
그것이 곧 생사고통을 겪게 한다.
그래서 이를 현실에서 제거하는 것이 목표점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탈을 얻은 상태라고 칭하게 된다.
그런데 단지 그것만으로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법신을 증득해야 부처님이라고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법신을 증득한 상태는
그렇지 못한 상태와 비교할 때
실재에서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인가.
또 그런 차이가 없다면 완전히 같다고 할 것인가.
이런 문제가 이런 측면에서 논의된다.
○ 부처가 될 가능성으로서 불성 유무
- 부처가 될 가능성유무가 논의 주제인 경우
한편 불성을 장차 부처님이 될 가능성
이런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조금 문제의 초점이 달라진다.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
이 표현을 이런 입장에서 표현했다고 하자.
이는 곧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개가 불성이 있는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저 개가 부처님이 아니다.
그런데 장래에는 부처님이 될 수가 있다.
이런 의미로 보면 조금 납득할 여지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 될 가능성을
왜 불성이라고 표현했는가부터가 문제된다.
현실에서 a 가 장차 될 가능성을
평소에 a성 또는 a의 성품
이렇게 표현하는가가 의문이 된다.
여하튼 이런 점 때문에
시시비비의 논의과정에서 혼동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중생이 차별없이 장차 된다는 부처는
어떤 특징과 성품을 가진 상태로 파악하고 제시했는가를
다시 잘 파악해야 한다.
그 다음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파악한 부처나 여래의 본 정체는
다시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야 한다.
그래야 부처의 정체가 파악이 된다.
그리고 그 각 경우를 놓고
정말 일반 중생이
그런 각 의미로서 부처님이 될 '가능성'을 차별없이 다 갖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 각 경우 부처님의 성품을 공통성 차별성, 실재 측면 등으로
살핀 내용이 모두 이 문제와 관련된다.
무언가 되어야 할 구체적 내용이 이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먼저 자신이 부처나 부처의 성품이라고 파악한 것이
일체 중생이 함께 갖는 공통적 성품이라고 하자.
또는 일체 존재가 차별없이 공하다고 할 때 공함이라고 하자.
그런데 이미 공통적으로 그런 상태에 있다.
그래서 어떤 이가 다시 그런 상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하다.
그리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
무엇을 행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 역시 이상하다.
그렇지만, 이런 공통성을 놓고 제시할 때도
수행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문제를 비유적으로 쉽게 이해해보자.
사람은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 가운데 도둑도 있다.
그리고 사람 가운데 경찰관도 있다.
그래서 사람이 노력하면 경찰관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사람은 모두 경찰관성이 있다.
이렇게 표현한다고 하자.
그런데 상대를 살펴보니 경찰관이 아니다.
도둑행위만 주로 한다.
그런 관계로 도둑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경우
그 도둑에게 우선 사람이 되라고 말을 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사람성'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도둑은 이미 사람인 상태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이 다시 되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런데 이 경우를 놓고 다음처럼 해석할 수도 있다.
강도나 경찰관이나 다 함께 사람이다.
그런데 강도는 여기에 다시 강도의 성품을 덧붙여 갖고 있다.
그래서 그런 특수하고 좋지 않은 성품이 문제다.
그래서 이를 제거하고 일반인과 같은 공통성만 갖는 상태가 되어야 함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수행의 사정도 역시 마찬가지다.
부처나 일반인이나 본 상태에는 차별이 없다.
그런데 중생은 그런 상태에서 다시 망집을 일으켜 갖고 있다.
그래서 이처럼 덧붙여 일으킨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그런 망집을 제거한다고 다른 상태와 달라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먼저 이런 공통적인 측면에 이르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그리고 이런 측면이 해탈과 관련된다.
이런 경우 어떤 중생이나 그 본 바탕에서는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당연히 이런 해탈의 상태가 될 가능성을 갖는다고 해야 한다.
한편, 처음부터 차별성으로서 부처를 파악한 경우는
그런 상태가 될 가능성을 논의하는 것이 의미가 있게 된다.
이는 앞의 상태에서 다시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는 상태와 관련된다.
그래서 이는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갖추어나가야 할 성품과 관련된다.
이 경우 그런 성품들이 무엇들인가를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공통한 기본 상태에서 어떻게해야 그런 상태가 될 수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논의를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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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성유무의 논의효용
불성에 대해 살폈다.
그런데 이런 논의를 살피는 효용은 무엇인가.
부처는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상태를 나타낸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상태가 되고자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먼저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이 논의가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 않다면 이에 대한 논의는 별 실익이 없다.
일단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된 상태가 가장 좋고 좋은 상태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서 성취해야 할 목표상태다.
그래서 이는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이 논의는 장차 성불을 하고자 하는 경우에
논의의 효용이 있다.
그런 바탕에서 그 이론적 기초가 무언가를 살펴야 한다.
현실에서 중생은
본래의 상태에서
다시 무명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전도망상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에 바탕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에 집착한다.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는다.
이런 점이 문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자신이 오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앞에서 비유적으로
강도에게 사람이 되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고 하자.
그러나 강도는 기본적으로 이미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사람이 다시 되라고 하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다 공통적으로 갖는 기본 품성만 남기고
강도가 특별히 갖는 특성을 없애도록 노력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수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본 바탕에서 차별없이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망집만 제거하면 본래의 그런 상태가 자연스럽게 된다.
이것이 기본적인 해탈의 의미다.
그런데 그런 상태가 된 후에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다른 중생을 그런 상태로 제도할 필요가 있다.
중생을 그대로 방치하면 이런 사정을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오기가 곤란하다.
그래서 수행자는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생사 즉 열반임을 관하고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상적인 최고의 상태가 법신을 증득한
부처의 상태가 된다.
이 부처의 상태가 다른 상태와 달리 참된 진짜의 실체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런 사정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처음부터 부처가 아닌 경우는
그런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부처가 그런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부처의 상태도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자가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이 수행에서 중요하다.
그래서 이 논의는 수행자에게 다음 효용을 준다.
수행자는 누구나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갖는다.
그래서 노력하면 된다.
이런 효용을 준다.
부처가 되고자 할 때 여러 측면에서 나열되는 성품이 혼동을 줄 수 있다.
여기에서는 기본적으로 본 바탕의 측면에서 차별이 없이 공하다는 측면과
또 한편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뛰어난 성품이 크게 문제된다.
본 바탕에서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키면 상황이 달라진다.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데도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고 임하게 된다.
그리고 집착을 바탕으로 업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이는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그런 상태에서 얻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 성격이 꿈과 같다.
그래서 생사현실은 본래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런데 생사현실은 또 정작 꿈은 아니다.
꿈과 비슷하지만, 꿈은 아니다.
이 생사현실은 무수한 주체가 일정한 공간과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으로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얻는다.
그래서 한번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그것이 무량겁에 걸쳐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무량겁에 걸쳐 과보를 받아나가게 된다.
그래서 비록 하나하나 실답지 않지만, 이를 무시하고 외면할 수 없다.
이런 점이 꿈과는 다른 점이다.
그런데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해탈의 측면만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들은 본 바탕에서 본래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망집만 제거하면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면 된다.
그렇게 수행하면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된다.
이런 측면이 수행자의 기본특성이 된다.
그런데 이는 알고보면 모든 존재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성품과 관련된다.
이 측면에서는 그런 바탕에서 일으킨 망집만 제거하면 된다.
비록 각 중생의 바탕이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측면은 기본적으로 공통하다.
그리고 이는 본래부터 갖춰진 상태다.
이것이 해탈이나 이계과가 갖는 의미다.
수행을 통해서 그런 상태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는 본래부터 갖춰진 상태다.
그래서 이는 생멸을 떠난 상태라고 표현한다.
무언가 실답고 참다운 것이 있다고 할 상태도 아니다.
그러나 또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유무를 떠난 상태다.
다만 망집을 바탕으로 생사를 겪는 상태가 해소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크다.
그런데 이는 번뇌나 업 생사고통을 제거하는 측면이다.
본 바탕에서는 모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망집을 제거하면 그런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는 부처나 일반 중생이나 그 기본 상태는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부처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는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하는 측면과 관련된다.
생사현실에서 중생들은 앞과 같은 상태로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이를 방치하면 중생들이 스스로 알아서 그 상태를 벗어나기가 대단히 힘들다.
무량겁에 걸쳐서 그 상태로 생사를 겪어나가게끔 된다.
하나하나 실답지 않다.
그런데도 망집을 바탕으로 그렇게 임하게끔 된다.
그래서 이 사정을 파악한 이가 다시 자비심을 바탕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현실에 임하게 된다.
이 측면은 앞과 성격이 다르다.
본래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다.
본 바탕의 측면을 100 % 붙잡고 살핀다면 이들 내용은 본래 문제되지 않는다.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앞과 같이 이들이 실답지 않다고 그대로 방치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본 바탕의 측면을 99% 정도 취한다.
그런 가운데 다시 생사현실의 측면을 1% 정도 취하여
생사 즉 열반임을 관하고 생사현실에 임하게 된다.
생사현실 그 재료 자체는 본래 생사고통을 떠나 있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대하면 '생사 즉 열반'임을 관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 임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중생과 눈높이를 맟줘서 임한다.
그런 가운데 중생을 제도할 방편을 찾아나가게 된다.
이는 망집에 바탕한 상태와 반대 방향이다.
중생은 본래 적정열반인 상태를 대하며 생사고통으로 여긴다.
즉, 중생은 '열반 즉 => 생사고통'으로 여기고 임하는 상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런 기본 사정을 잘 관하고 생사현실에 임한다.
이들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망집에 바탕한 업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업을 행하게 하는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서는 스스로 그렇게 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중생제도를 위해서는 이런 중생 상태에 맞추어
중생을 제도할 방편을 취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을 행해 나가게 된다.
먼저 생사현실에서 계를 구족한다.
그래서 자신도 생사에 묶이지 않고 복덕자량을 쌓아 간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할 방편지혜를 구족해간다.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의 정점에 성불상태가 있다.
이는 생사현실에서 일으킨 망집번뇌를 없애는 측면과는 반대방향이다.
생사현실에 임해 적극적으로 무량한 선법을 닦고 구족해가는 방향이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을 잘 이해해야 한다.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이들 내용을 다 함께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런 상태가 중생제도를 위해서 대단히 요구된다.
그렇기에 수행자가 무량한 선법을 닦아 성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생사를 벗어나 머무려는 아라한의 수행과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는 수행은 서로 차원이 달라진다.
질병과 같다. 어떤 이가 병에 걸려 있을 때 노력해 병을 나아 건강해질 수는 있다 .
그러나 그렇다고 곧바로 의사가 되기는 힘들다.
제각각 다른 병에 걸린 수많은 환자를 치유시키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다시 별도의 노력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부처 상태가 기본적으로 해탈을 바탕으로 하는 측면은 아라한과 같다.
그러나 다시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을 성취함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런 수행의 정점에 법신을 증득해 성불하는 부처의 상태를 제시한다.
그래서 아라한과 부처의 상태는 차별이 있다고 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부처의 본 정체가 의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불성 문제는 이런 여러 측면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처음에 제시한 망집 문제와 그 성격이 같다.
생사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모습과 성품이 있다고 분별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생활해간다.
그런데 그것은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 얻을수 없다.
또 각 감각현실 영역에서도 그 사정이 같다.
그래서 실다운 성품은 아니다.
그러나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는 그렇게 얻는다.
다만 그런 각 재료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본래 생멸을 떠난 것이다.
다만 망집을 일으켜 상을 취하는 경우는
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다고 여기고 대하게 된다.
그래서 거기에 생멸이 그처럼 있다고 여기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성불의 상태는 결국 차별없이 공한 바탕을 한다.
그래서 부처의 상태도 역시 차별없이 공하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
그렇지만 그처럼 공한 일체를 그것만으로 부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공한 바탕에서 법신을 증득해야 부처가 된다.
그리고 법신을 증득하는 일은 공한 바탕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그렇게 법신을 증득한다고 하자.
그 상태도 역시 앞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생멸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다.
처음 생사현실이 꿈과 성격이 같다고 했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또 생사현실은 정작 꿈이 아니라고 했다.
그 내용이 실답지 않다.
그래서 그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렇다고 그 내용을 전혀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가운데 얻는다.
그런 상태로 얻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법신을 증득해 성불하는 상태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계를 혼동하면 곤란하다.
이를 ○와 ■ 를 놓고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안에서 ■ 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가 ■ 인것도 아니다.
그리고 ■가 ○ 인것도 아니다.
따라서 ○을 대하며 그 안에 ■가 있다고 망집을 일으키면 안된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이 곧 ■라고 잘못 여겨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와 ○ 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은 ○ 영역에는 얻을 수 없는 것을 그처럼 얻는 것이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이다.
즉 ■을 그렇게 얻는다. 그래서 있다.
그러나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는 형태로 있는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이는 실답게 참된 진짜가 있는 것은 아니다. [ 있지 않다. ]
그렇다고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 없지 않다. ]
그래서 유무 양극단을 떠난다고 표현한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 과 ■ 의 성격이 모두 이와 같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법신을 증득하여 성불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불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공한 바탕에서 가능한 것이다. [여래장]
그리고 그렇게 성불한 상태 자체도 그 사정이 위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불성'이 갖는 다양한 의미를 이런 입장에서 종합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 para-end-retur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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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불기2561/09/18/월/08:53 |
[사진] 2016_0411_151935_canon.jpg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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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0fl--Mireille Mathieu - Il Va Faire Beau Sur Notre Vie.lrc○ [pt op tr]James_Tissot_-_Still_on_Top_-_Google_Art_Project [#M_▶더보기|◀접기|https://en.wikipedia.org/wiki/File:James_Tissot_-_Still_on_Top_-_Google_Art_Project.jpg ]James Tissot (1836–1902) ● [pt op tr] fr _M#]
● 맹목적 활동과 위험한 수익
수익을 얻기 위한 사업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또는 여유자금이 있어 어딘가에 투자를 행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그런 활동으로 많은 수익을 얻기를 원한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많은 수익을 얻고 난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는 경우가 있다. 맹목적인 활동을 하는 경우다. 이런 경우가 가장 위험하다. 그런 경우 계속 많은 수익을 얻기를 원한다. 그리고 갈증을 일으키면서 숫자를 보고 현실에 임한다. 그러나 정작 그 많은 숫자를 통해 무엇을 끝내 얻으려고 하는가에 대해 답이 없다. 단지 그 숫자가 많으면 그 만큼 좋은 것이라고 여기고 임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만으로 계속 갈증을 일으키며 임한다. 그러면 사업활동이나 투자를 해 수익을 많이 거두어도 결국 쓸모없는 상태가 된다. 현재 엄청난 수익을 거둔다. 그런데도 이 수익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부분이 ' 잘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맹목적인 활동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물론 이렇게 적으면 채권채무관계가 있는 이들이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 채권채무관계를 정산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슨 엄청난 수익을 말하는가. 여기서 수익이라고 표현한 것은 다음이다. 무한화폐 무한카드 그리고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무량한 수명 무량한 불국토여행 허가, 비자, 무량한 중생 이런 것들이다. 이런 내용을 이미 연구원들에게 지급한 바가 있다. 이는 현실적인 회계장부로서는 숫자로 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분명하고 뚜렷하게 수행자의 보물창고에 보관되는 수행자 자산이다. 그렇지만, 이들을 얻고도 앞과 같은 문제의 답이 잘 보여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가 잘 파악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역시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수많은 수익을 얻는다. 그러나 이제 그것으로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때문에 그런 수익을 얻고자 하는가 등이 처음부터 파악이 안 될 수 있다. 그러면 결국 위험한 투자를 행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삶은 한 생이 단지 차트판의 숫자로 압축될 수도 있다. 그런데 수행자도 이와 마찬가지가 되기 쉽다. 예를 들어 리히텐쉬타인이란 나라를 관광한다고 하자. 그런데 구글 여행사를 통해 사진만 본다. 또 검색창에서 나오는 정보만 살핀다. 그리고 리히텐 쉬타인이란 나라를 마치 여행한 것처럼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조금 싱겁고 우스운 일이 된다. 그런데 정작 비행기를 타고 차를 타고 그렇게 해서 그곳을 갔다고 하자. 그런데 단지 거리나 상점이 조금 낯설다고 느낀다. 그리고 정작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슨 특성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그냥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왔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일단 자신이 리히텐 쉬타인을 방문해서 그 특색을 음미하고 살펴본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어떤 장소가 리이텐 쉬타인인가 아닌가는 무엇으로 알 것인가. 그것은 결국 앞과 같이 구글여행사가 제시하는 기본 정보를 통해 그곳이 리히텐쉬타인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또 그래서 그곳에서 얻는 정보가 자신이 미리 알고 있는 정보와 얼마나 다른지 같은지도 파악하게 된다. 구글사가 제공하는 사진이나 검색 창에서 제시해주는 기본 정보를 살핀다고 하자. 이는 여행이라고 보기에는 싱거운 측면이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심지어 번거롭기만 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편 여행을 하면 정신없이 몸을 싣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쉽다. 그리고 그리고 그로 인해 몸이 피곤해진다. 그리고 경비가 많이 소모된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되어야 자신이 무언가 여행 다운 여행을 한 것처럼 여기게 된다. 그런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내실이 없이 그저 가진 자산의 숫자만 자꾸 커질 수 있다. 그러면 그로 인해 수익을 잘 얻었다고 여기기 쉽다. 그리고 삶을 잘 살았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런 착시현상과 사정이 비슷하다. 수행자는 칠각지 세계여행을 잘 떠나야 한다. 그런데 수행자가 신경을 기울여야 할 칠각지 여행은 정작 경시하기 쉽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정려 수행을 한다고 하자. 외관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처음엔 들술 날숨을 세면서 숨쉬기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후 그런 집중된 마음 상태로 어떤 대상을 놓고 깊은 삼매에 든다. 그런 경우 외관상 일반 경우와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기기 쉽다. 리히텐 쉬타인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하튼 지도상으로 보면 이곳에도 건물이 있다. 자동차가 다닌다. 그런 가운데 사람이 살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모습을 본다고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보지 않는 것과 본 것의 차이가 별로 없다. 그래서 이런 여행에도 처음에 살핀 위험한 수익 내용이 적용된다. 한 평생 쉼없이 세상 곳곳을 다 훑고 다닐 수 있다. 그리고 수없이 기이한 모습을 다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한 것인가는 모를 수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답할 수 없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자신이 세계 각 곳에 있는 도로표지판이나 도로 자체가 된 것과 같다. 그래서 말 그대로 쓸모없는 투자를 한 상태로 된다. 한편 어떤 사업가가 맹목적으로 사업을 해 수익을 거두려 한다고 하자. 또는 어떤 투자자가 맹목적으로 투자에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총제적으로 그 자신의 삶이 회계장부나 차트판의 숫자와 동일시 되기 쉽다. 옥상기지에서 들은 노래에서는 우주와 사귀어 보라고 하는 듯하다. 세상의 형제들을 도와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는 듯하다. 동영상에서는 아이가 무언가 나무 조각을 나무에 조각 맞추기를 통해 붙이는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것이 종국적으로 무슨 의미와 가치를 갖는가를 스스로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맹목적인 투자를 행하는 경우와 같다. 먼 외국에서 어떤 이가 무엇을 하고 사는 것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별 의미가 없고 쓸데없다. 그런데 거꾸로 이들 입장에서는 사실 자신의 삶도 그처럼 있거나 없거나 큰 관계가 없다. 그래서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가치도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자신은 그런 것을 놓고 집착하며 붙잡고 임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가지가지 고통만 골고루 받는다. 그리고 업을 행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평소 구글여행사를 통해 비용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세계 각곳의 도로나 집이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사정이라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일단 자신이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런 활동은 사실 상당히 소득이 있다. 그 상태에서 다시 무량한 서원을 어떻게 일으키고 추구하는가는 그 다음 문제다. 현실에서 마음안에 객진 번뇌와 자신의 마음을 차지한다. 자신은 그런 가운데 맹목적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행한다. 번뇌는 자신을 그렇게 사역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온갖 쓸데없고 의미없는 것들이 자신의 삶의 공간과 시간을 차지한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이런 것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우주와 사귀는 것이 의미가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정이 다르다. 노래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다. 보고 싶지도 않은데 Tv 방송 채널이 수백개다. 영화가 수만개 제공된다. 그런데 자신이 왜 이것들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망연한 상태가 된다. 그로 인해 결국 잘못된 맹목적 활동을 행하기 쉽다. 리히텐쉬타인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이 본 글의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일단 언급을 했다. 그래서 리히텐 쉬타인에 대해서는 다음을 살펴보기로 하자.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리히텐슈타인 이곳 우표가 세계적으로 대단히 인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국고 수입의 1/3을 차지한다. 여성참정권은 1984년 국민 투표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놀랍다. 그런데 현실에서 불성을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 왜 공한데 매번 좌표를 찍고 움직이는가. 그리고 그런 좌표를 찾아가면 그런 풍광을 또 만나게 되는가. 그런데 왜 공하고 자성이 없다고 반복해 제시하는가. 그런 가운데 또 왜 성불을 향해 수행해가야 한다고 하는가. 이런 문제가 현실에서 제기된다. 그 문제 성격이 비슷하다. 사실 이런 문제를 잘 이해하기 힘들다. 한마디로 현실에서 각 개인이 각기 그런 상황에서 살아간다. mus0fl--Alain Chamfort - Paradis.lrc ☎잡담☎ ♥ 잡담 ♥조각글 성격 오늘은 『불성론』을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 이 조각글 공간은 성격이 이상하다. 하루 중에 생각하게 되는 잡당성 글도 올릴 수 있다. 한편 경전을 살피는 가운데 경전 관련 내용도 적는다. 그런데 경전과 직접 관련되면 그 부분에 적게 된다. 그러나 개괄적이고 일반적인 내용은 주로 조각글란에 적게 된다. 그런데 경전에 대해 적는 내용 가운데 경전과 붙여 놓기 곤란한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이것을 떼내어 놓기 곤란한 경우도 있다. 연구 체계를 바꾼 이후 이처럼 각 조각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가 계속 문제된다. 그런 문제들로 글을 써갈수록 글의 처리가 문제로 남는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연구해 해결해야 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 [pt op tr] ▼Jean-Jacques Goldman - Il Y A.lrc ☎잡담☎ ♥ 잡담 ♥리히텐쉬타인 매일 꾸준히 하면 좋다고 보는 일이 있다. 예를 들어 매일 요가 자세도 한 번 취해본다. 또 한 5 분 정도만 시간 내서 계단 오르내리기를 행한다. 또는 매일 세계 각 지역에서 한 곳 정도 방문해본다. 그런데 이런 일이 쉽게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쉴 때마다 담배로 소신공양하는 일을 열성적으로 하곤 한다. 담배가격이 많이 올라서 담배잎을 파이프로 피는 상태다. 어느 때 귀찮아서 담배를 많이 사놓는다. 그런데 그것이 떨어지지 않으면 거의 밖에 나가지 않게 된다. 오늘은 리히텐쉬타인이란 나라를 방문 중이다. 아쉽게도 구글여행사에서는 이 나라는 지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위스 국경 부분에서 먼 발치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18_142016_Liechtenstein_ar13 [#M_▶더보기|◀접기|googleearth--2017_0918_142016_Liechtenstein_ar13.kml googleearth--2017_0918_142016_Liechtenstein_ar13.txt ● [pt op tr] fr _M#]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18_142016_Liechtenstein_ct38 [#M_▶더보기|◀접기|googleearth--2017_0918_142016_Liechtenstein_ct38.kml googleearth--2017_0918_142016_Liechtenstein_ct38.txt ● [pt op tr] fr _M#]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18_142048_Liechtenstein_ab11 [#M_▶더보기|◀접기|googleearth--2017_0918_142048_Liechtenstein_ab11.kml googleearth--2017_0918_142048_Liechtenstein_ab11.txt ● [pt op tr] fr _M#]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18_142130_Liechtenstein_ab5 [#M_▶더보기|◀접기|googleearth--2017_0918_142130_Liechtenstein_ab5.kml googleearth--2017_0918_142130_Liechtenstein_ab5.txt ● [pt op tr] fr _M#]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18_142130_Liechtenstein_ar23 [#M_▶더보기|◀접기|googleearth--2017_0918_142130_Liechtenstein_ar23.kml googleearth--2017_0918_142130_Liechtenstein_ar23.txt ● [pt op tr] fr _M#]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18_142341_Liechtenstein_ab10 [#M_▶더보기|◀접기|googleearth--2017_0918_142341_Liechtenstein_ab10.kml googleearth--2017_0918_142341_Liechtenstein_ab10.txt ● [pt op tr] fr _M#]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18_142341_Liechtenstein_ct23 [#M_▶더보기|◀접기|googleearth--2017_0918_142341_Liechtenstein_ct23.kml googleearth--2017_0918_142341_Liechtenstein_ct23.txt ● [pt op tr] fr _M#]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18_142341_Liechtenstein_exc [#M_▶더보기|◀접기|googleearth--2017_0918_142341_Liechtenstein_exc.kml googleearth--2017_0918_142341_Liechtenstein_exc.txt ● [pt op tr] fr _M#]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18_142341_Liechtenstein_exc [#M_▶더보기|◀접기| googleearth--2017_0918_142341_Liechtenstein_exc.kml googleearth--2017_0918_142341_Liechtenstein_exc.txt ● [pt op tr] fr _M#]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5/k0596t1610.html#1573 sfed--불성론_K0596_T1610.txt ☞제1권 sfd8--불교단상_2561_09.txt ☞◆vhry1573 불기2561-09-18 θθ |
■ 퀴즈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
대가전연(大迦旃延)의 새 말. ⇒<유사어>대가전연<참조어>대가전연(大迦旃延)
답 후보
● 대가다연나(大迦多衍那)
대바라밀(大波羅蜜)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대법장(對法藏)
대비로자나(大毘盧遮那)
대삼재(大三災)
대승교(大乘敎)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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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ane Foly - On A Tous Le Dro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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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bud] S. N. Goenka
[san-chn] kleśa-jñeyâvaraṇa-dvaya 二煩惱, 二種障
[san-eng] bhīti $ 범어 fear
[pali-chn] paccuppannâddhā 現在世
[pal-eng] sankhaaraloka $ 팔리어 m.the whole creation.
[Eng-Ch-Eng] purgatory 那落
[Muller-jpn-Eng] 萬像 バンショウ myriad phenomena\n\nマンゾウ\nmyriad phenomena
[Glossary_of_Buddhism-Eng] SELFPOWER☞
[fra-eng] art $ 불어 art
■ 다라니퀴즈
자비주 27 번째는?
성관자재보살 명호 45 번째는?
27
만약 법대로 외우고 지니며,
모든 중생에게 자비심을 일으키는 자는
내가 이때 일체 착한 신과
용왕과 금강밀적(金剛密迹)을 보내서
그를 항상 따라
옹호하게 하고,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마치 자기 눈동자나
자기 목숨을 보호하고 아끼듯이
하게 하리라.
그리고 곧 분부하며 말씀하시길,
나는
밀적금강사(密迹金剛士)
오추군다앙구시(烏芻君茶鴦俱尸)
팔부역사상가라(八部力士賞迦羅)를 보내
..
마혜나라연(摩醯那羅延)과
금비라타가비라(金毘羅陁迦毘羅)를 보내
..
바삽바루나(婆馺婆樓那)와
만선차발진다라(滿善車鉢眞陁羅)를 보내
..
살차마화라(薩遮摩和羅)와
구란단탁반지라(鳩蘭單咤半祇羅)를 보내
..
필바가라왕(畢婆伽羅王)과
응덕비다살화라(應德毘多薩和羅)를 보내
..
범마삼발라(梵摩三鉢羅)와
오정거등염마라(五淨居等炎摩羅)를 보내
..
제석천과 삼십삼천과
대변공덕바달라(大辯功德婆怛那)를 보내
..
제두뢰타왕(提頭賴咤王)과
신묘녀(神母女) 등 힘센 무리들을 보내
..
비루륵차왕(毘樓勒叉王)과
비루박차(毘樓博叉)와 비사문(毘沙門)을 보내
..
금색공작왕(金色孔雀王)과
이십팔부대선중(二十八部大仙衆)을 보내
..
마니발타라(摩尼跋陁羅)와
산지대장불라바(散脂大將弗羅婆)를 보내
..
난타(難陁) 발난타(跋難陁)
사가라용(娑伽羅龍) 이발라(伊鉢羅)를 보내
..
수라(脩羅), 건달바(乾闥婆)와
가루라[迦樓], 긴라라[緊那], 마후라(摩睺羅)를 보내
..
수화뇌전신(水火雷電神)과
구반다왕(鳩槃茶王) 비사차(毘舍闍)를 보내
이 주문을 받아 지니는 자를
항상 옹호하게 하리라.
● 구로구로갈망 俱盧俱盧羯懞<二十七> ku ru ku ru kar maṃ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45
아체엄라 시라
阿砌掩囉<二合>尸羅<四十五>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 삼매_게송퀴즈
■ 오늘의 게송
[261일째]
불고심왕보살언 $ 003▲● 천 욕령제세간입 불소지수량지의 ○□□□□,善,汝,佛,善
□□□□□□□,:「善哉善哉!善男子!
汝今 為 欲令 諸世間 入 佛所知數量之義,而問 如來、應、正等覺。
□□□□□□□,:「선재선재!선남자!
여금 위 욕령 제세간 입 불소지수량지의,이문 여래、응、정등각。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말씀하시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그대가 지금 여러 세간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님이 아는 수량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하여 여래·응공·정변지에게 묻는구나.
[142째]
피모단처제국토 $ 013▲阿伽羅阿伽羅為 一 ● 最勝, ○□□□□,無,有,有,不
□□□□□□□, 無量種類差別住,
有不可說異類剎, 有不可說同類剎。
□□□□□□□, 무량종류차별주,
유불가설이류찰, 유불가설동류찰。
저 터럭 끝에 있는 모든 세계들
한량없는 종류가 각각 다르니
말할 수 없이 많은 다른 종류와
말할 수 없이 많은 같은 종류며
●K0249_T0690.txt★ ∴≪A불설희유교량공덕경≫_≪K0249≫_≪T0690≫
●K0596_T1610.txt★ ∴≪A불성론≫_≪K0596≫_≪T1610≫
●K0980_T0192.txt★ ∴≪A불소행찬≫_≪K0980≫_≪T0192≫
법수_암기방안
● [pt op tr] fr
_M#]
[키워드]
논서를_살피는_과정에서_공통주의점,불성의_의미_-_부처의_성품이_주제인_경우,공통성과_차별성_및_성품의_다양한_측면,부처의_공통적_성품,부처의_차별적_성품들,부처의_성품과_망집_신견,부처의_성품과_망상분별,현실의_부처의_성품은_본_바탕에서도_얻어지는가의_문제,실체적_성품의_존부문제,부처가_될_가능성으로서_불성_유무,-_부처가_될_가능성유무가_논의_주제인_경우,불성유무의_논의효용,맹목적_활동과_위험한_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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