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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22일 금요일

불성론_K0596_T1610_001

『불성론』
K0596
T1610

제1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불성론』 ♣0596-001♧


제1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 [pt op tr] 불성론_K0596_T1610 핵심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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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3-12-01
불성론_K0596_T1610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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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6-001♧
제1권_핵심



● [pt op tr] fr sfed--불성론_K0596_T1610.txt ☞제1권
_M#]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불성론

https://buddhism007.tistory.com/3583
출처: https://buddhism007.tistory.com/entry/불기2561-09-18불성론001#gsc.tab=0 [불교진리와실천]


불성론(佛性論) 제1권


천진보살(天親菩薩) 지음
진제(眞諦) 한역
송성수 번역


1. 연기분(緣起分)

【문】부처님께서 어떤 이유로 불성(佛性)을 설하셨습니까?
【답】

○ 여래께서 다섯 가지 잘못을 제거하고 다섯 가지 공덕을 생기게 하기 위해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설하셨다.

다섯 가지 잘못을 제거하는 것은,
첫째 중생들로 하여금 열등하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한 것이요..
둘째 교만하여 남을 무시하는 사람을 없게 하기 위한 것이요.
셋째 헛된 집착을 없애기 위한 것이요.
넷째 진실한 법을 비방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요.
다섯째 아집(我執)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첫번째의 중생들로 하여금 열등하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한 것이란,
모든 중생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불성의 이치가 있음을 듣지 못하여,
자신에게 부처가 될 본질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여,
자신에 대하여 열등하다는 생각을 하여 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발심하여 열등하다는 생각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중생은 모두 불성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설하신 것이다.

두번째의 교만한 마음을 없애는 것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일찍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는 것을 듣고,
이것으로 인하여 발심하고,
발심하고 나서는 ‘나에게는 불성이 있어 발심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다고 경시하고 교만한 생각을 하는,
이러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고 설하신 것이다.

세번째의 헛된 집착을 없애기 위한 것이란,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교만한 마음을 갖는다면,
이법이나 현상적 진리에 부합되는 바른 지혜가 생겨날 수 없고
이 때문에 헛된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설하신 것이다).
허망이란 중생들이 저지르는 잘못으로,
이 잘못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원래 없는 것 (에 대하여 잘못 집착하는 것) 것이고,
둘째는 무상한 것(에 대하여 잘못 집착하는 것)이다.
첫째의 원래 없는 것이란,,
있는 그대로의 진리(如如理) 에는 본래 인아(人我)가 없는데,,
이 인아가 있다고 집착을 일으키니 것이다.

이것은 원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으로,
원래부터 없는 것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무명(無明) 등을 일으키며,
무명으로 말미암아 업을 일으키고 업으로 말미암아 과보(果報)를 받게되는,
이러한 세 가지는 참된 근본이 없는 것으로,
이 원래 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헛된 집착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헛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일으키는
무명과 업과 업의 과보가 모두 허망하기 때문에,
받는 것도 짓는 것도 없는데,
그런데도 이것에 대하여 있다고 집착하니,
이러한 헛된 망상 때문에 원래부터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의 무상하다는 것은,
모든 유위(有爲)법은 모두 찰나찰나에 사라지고 머물지 않아,
꾸짓거나 꾸짓음을 당하는 이 두 가지가 다 있을 수 없고
다만 처음의 찰나가 친구가 되는 반면,
다음의 찰나는 객이 되어,
꾸짓거나 꾸짓음을 당하는 것이 생겼다가 곧 사라질 것이니,
이는 처음의 찰나는 원수(怨)이고 다음은 원수가 아니다,

이 객에서 친구란 집착을 일으키는 이 집착이
실답지 않기 때문에 허망하다고 하니,
만약 이러한 집착을 일으킨다면
바른 지혜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이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불성을 설하신 것이다.

불성이란,
곧 인(人)과 법,
두 가지가 다 공한데서 나타나는 진여(眞如)이니,
진여이기 때문에 꾸짓거나 꾸짓음을 당할 것이 없나니,
이 이치를 깨달아야만 허망한 집착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진실한 법을 비방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란,
일체 중생들이 저지르는 잘못이 모두 이 두 가지 공한 것에 있다.
이 공함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청정한 지혜와 공덕을 일으키므로,
이것을 진실이라 하고,
비방이란 말은 만약 불성을 설하지 않았더라면,
그 공함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곧 실제로 있는 것으로 집착하고 진여를 비방하게 되어 청정한 지혜와 공덕이 다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 아집를 제거하는 것이란,
만약 헛된 잘못과 진실한 공덕을 보지 않았다면,
중생에 대하여 대비심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성을 들어 헛된 잘못과 진실한 공덕을 알면,
중생에 대하여 대비심을 일으킬 것이니,
저것과 이것이 없기 때문에 아집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이유로 부처님께서 불성을 설하시어,
다섯 가지 공덕을 생기게 하셨으니,

그 다섯 가지 공덕이란,
첫째 바른 노력(正勤)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 공경하고 섬기는 마음을 생기게 하는 것이며,
셋째 반야(般若)를 생기게 하는 것이며,
넷째 지혜(闍那:Jñāna)를 생기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 대비심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공덕으로 말미암아 다섯 가지 잘못을 고칠 수 있나니,
바른 노력으로써 열등하다는 생각을 고치고,
공경함으로써 교만한 마음을 고치고,
반야로써 헛된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고치고,
세간적 지혜를 냄으로써 참다운 지혜와 모든 공덕이 드러나기 때문에 진실한 법을 비방하는 것을 고치고,
대비심으로 말미암아 인자하고 평등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집를 고치는 것이다.
아집를 고치는 것은 불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모든 중생이 두 가지가 없음을 관찰하여 스스로 애착하는 마음을 없애고,
모든 중생이 두 가지 공(二空)에 섭수되고,
모든 공덕은 성취될 수 있다고 관찰하여,
다른 이에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반야에 의해 스스로 애착하는 마음을 없애고,
대비에 의해 다른 이에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반야에 의해 범부의 집착을 버리고,
대비에 의해 이승(二乘)의 집착을 버린다.
반야에 의해 열반을 버리지 않으며,
대비에 의해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
반야에 의해 불법을 성취하며,
대비에 의해 중생을 성숙케 한다.
두 가지 방편에 의해 무주처(無住處)에 머물러 퇴전하지 않음으로써
빠르게 보리를 증득하고
다섯 가지 잘못을 없애고
다섯가지 공덕을 생기게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고 설하신 것이다.



2. 파집분(破執分) ①

1) 파소승집품제일(破小乘執品第一)

다시 불성의 유무에 관해 논파와 입론함을 마땅히 알아야할 것이다.
논파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소승의 집착을 논파하는 것이요,
두 번재는 외도의 집착을 논파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보살의 집착을 논파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소승의 집착을 논파하는 것이란,
부처님께서 소승인을 위해 설하시기를,
“어떤 중생들은 불성에 머물지 않아 영원히 반열반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의심하고 불신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해석≫
의심을 내는 까닭은
부처님이 설하신 바에 대하여
소승 제부파의 이해와 집착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 분별부(分別部)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범부, 성현, 중생 모두 공(空)으로써 그 근본을 삼는 것은,
범부와 성현, 중생이 모두 공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공이 곧 불성이요,
불성이 곧 대열반이다.”

● 비담(毘曇)ㆍ살바다(薩婆多) 등 여러 부파의 설명에 따르면,
“타고난 불성은 없고 다만 수행하여 얻을 수 있는 불성만이 있다.”

중생을 분별하면 모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전혀 불성이 없어 영원히 열반을 얻을 수 없는 존재이니 이는 일천제(一闡提)와 중한 금계를 범한 자이다.
두 번째는 (불성의) 유무가 정해지지 않아 닦으면 얻고 닦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현선공위(賢善共位)1)이상의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불성이 결정되어 있는 삼승(三乘)의 사람들로,

첫째 성문은 고인(苦忍)2)의 계위 이상으로 곧 불성을 얻고,
둘째 독각은 세법(世法)3)이상으로 곧 불성을 얻고,
세째 보살은 십회향(十廻向)이상으로 불퇴전위(不退轉位)에서 불성을 얻는다.

왜 그런가?
경전에서 “어떤 중생들은 불성에 머무르지 않아 영원히 반열반하지 않는다”고
설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또한 아함의 설명처럼,
“부처님의 십력(十力)에서 불성의 힘이 비추는 중생의 경계에
갖가지 불성 및 추묘(麤妙) 등의 경계가 같지 않기 때문에
불성의 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고 없음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불성이 있는 자는 갖가지 묘행을 닦고,
불성이 없는 자는 갖가지 추악한 행위를 행한다.



○ 
때문에 소승을 배우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설이 모두 그럴만한 이치가 있다고 보고
어떤 것으로 정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믿지 않는 마음을 내는 것은,
이 두 가지 설에 대하여 각각 한 쪽에 치우쳐 집착하기 때문에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만약 분별부의 설에 따른다면,
불성없는 중생이 있음을 믿지 않을 것이고,
살바다 등의 설에 따르면,
모두에게 불성이 있음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성이 있다는 것을 밝히는 자가
불성이 없다는 것에 집착하는 자에게 묻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불성없는 중생이 있어 아주 반열반하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이에 답하기를,
‘중생은 추하고 묘한 것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치로 보아 불성이 있는 중생과 불성이 없는 중생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이요..
그대가 만약 불성이 없는 중생이 있어 아주 열반하지 못하는 것을 믿지 않고
중생으로서 갖가지 추하고 묘한 경계가 있는 것을 믿는다면,
이는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평등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문】그대가 만약 중생이 갖가지 추하고 묘한 따위의 경계가 있음을 믿음으로 해서
곧 불성이 없는 중생이 있는 것을 믿게 한다면,


또한 감관(根)이 없는 중생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중생은 감관이 있음과 감관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추하고 묘한 따위의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가 만약 감관이 없는 중생이 있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추하고 묘한 따위의 경계가 있는 것을 믿겠는가?.


만약에 “추하고 묘한 따위의 경계가 있는 그것이
감관이 있거나 감관이 없는 것에 관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나 또한 추하고 묘한 따위의 경계가 있음을 믿는 그것이
불성이 있거나 불성이 없는 이치에 관계되지 않을 것이니,
무슨 잘못이 있는가?.

● 만약에 그대가 “감관이 없는 중생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 나 또한 “불성이 없는 중생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겠다.


【답】

○  그대가 이제 감관이 있는 것과 감관이 없는 것으로써
나의 불성이 있는 것과 불성이 없는 것에 예를 든다면,

● 이치가 맞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가 지적하는 이 감관이 없는 것이란,
중생을 말하는 것인가,
중생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에 중생을 말하는 것이라면,
두 가지 잘못이 있다.
첫째는 아주 지나친 잘못이니,
만약에 여섯 가지 감관(六根)이 없는데도 이것이 중생이라면,
곧 일체 무정(無情)한 저 풀ㆍ나무ㆍ돌 따위도 다 중생이어야 하니,
동일하게 감관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모자란 잘못이니,
본래 여섯 가지 감관을 설하여 이것을 중생이라 했는데
이미 여섯 가지 감관이 없으면 다시 무슨 물체를 중생이라 하겠는가?.

그런데도 그대가 감관이 없는 중생을 설한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때문에 감관이 있거나 감관이 없는 그것을 위해
추하고 묘한 따위의 경계를 설한 것이 아니라,
바로 불성이 있고 불성이 없는 이것을 위해
추하고 묘함을 설했을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논란≫
● 만약에 그대가 나에게 ‘감관없는 중생을 내세운 것은
두 가지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그대가 내세운 ‘중한 금계를 범한 잇찬티카(一闡提)는
불성이 없어서 아주 열반할 수 없다’는 것도 역시 두 가지 잘못이 있으리라.
첫째는 아주 지나친 잘못이니,
중생은 본래 아견(我見)과 무명(無明)으로써 범부의 법을 삼으니,
이 무명을 살펴보면,
무명은 인공(人空)를 어기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이미 무명을 일으켰기 때문에 업보(業報)가 있는 것이니,
만약 인공(人空)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무명과 업보가 없고 이미 무명과 업보 등 삼륜(三輪)이 없다면,
응당 성인도 범부로부터 생겨나야 하거늘,
만약에 중생으로서 불성이 없다고 한다면,
다만 성인은 범부가 될 수 있어도 범부는 성인이 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너무 지나친 것이요,

둘째는 모자란 잘못이니,
만약에 그대가 ‘중생으로서 불성없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공한 성품이 이미 없기 때문에 곧 무명이 없을 것이고,
만약 무명이 없다면 곧 업보가 없으리니,
이미 업보가 없는데 어찌 중생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모자란 잘못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가 ‘중생으로서 불성 없는 자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이미 감관 없는 중생이 있는 것을 믿는지 않는데,
어찌 불성 없는 중생이 있을 것을 믿겠는가?
이것은 바로 두 가지 잘못이 같기 때문이다.

【문】그대가 ‘중생으로서 불성 없는 자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마치 크샤트리야(刹底利) 종족들이
네 가지 성품과 지옥ㆍ사람ㆍ하늘 등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거나
또는 갖추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갖추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응당 사람으로서 아주 모든 도의(道義)를 행할 수 없을 것이고,
만약에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경(經)에 어긋날 것이다.

경에서 “여래의 불성은 그 힘이 능히 갖가지 추하고
묘한 따위의 경계를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설한 것처럼,
이 중생들의 성품이 이미 평등하다는 것을 경에 증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만약에 그대가 ‘중생으로서 전혀 반열반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니,

어떤 사람이 먼저는 크샤트리야(刹底利)가 되었다가
뒤에는 브라흐만(波羅門)이나 혹은 사람,
혹은 하늘이 되어 결정된 상(相)이 없기 때문이며,

만약에 그대가 ‘갖추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비유한 것과 서로 어긋날 것이다.

왜냐하면 함께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니,
그대가 ‘불성이 없는 중생으로선 전혀 부처가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마치 사람이 천성(天性)이 없으면
아주 천보(天報)가 없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천성이 없으면서도 천보를 받는다면,
역시 불성이 없는 중생이라도 열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만약에 갖춘 성품과 비유가 서로 같다면,
불성이 없는 중생이라도 응당 불성을 갖추고 있어야 하리니,
만약에 불성이 있고 불성이 없는 그러한 두 가지 성품이 있다면,
이것을 서로 어긋나는 것이라 하겠는가?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 하겠는가?

만약에 서로 어긋나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는 있고 하나는 없어야 할 것이니,
이것은 가능하지 않다.

또 만약에 열반의 성품이 없는 중생이라면,
응당 열반의 성품이 있지 않아야 할 것인데,
그대가 두 가지 성품을 갖추는 것을 말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크샤트리아에게는 브라흐만의 성품이 없는 것처럼,
두 가지 성품은 서로가 어긋나 결코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뒤에도 브라흐만이 될 수 없는 것은 세간의 도(世道)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 만약에 성품이 갖추어져 있다면,
뒤에도 반드시 얻을 것이고,
성품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뒤에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니
만약에 한 사람으로서 이 두 가지를 갖추고 있다면,
도대체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인가?

다시 그대가 불성이 없는 중생을 내세운 것은
그 불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결코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결코 없지는 않다는 것인가?

마치 대지가 처음에는 금의 성질(金性)이 있다가도 나중에는 있기도 하고,
있고 나서는 다시 없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그대가 불성이 없음을 내세운 것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인가?

만약에 이와 같은 것이라면,
응당 이승(二乘)의 성품을 얻고 나서
뒤에는 다시 얻지 않아야 하는 것이고,
대승(大乘)의 성품을 얻고 나서는 뒤에는 다시 상실해야 하고,
결정된 성품을 얻고 나서도 뒤에는 다시 결정되지 않아야 하며,
비록 통달과 해탈 따위의 공덕을 닦아 얻었더라도 뒤에는 다시 상실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를 닦는 것이 소용이 없고,
결정된 성품을 세운 것도 다 소용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또 묻되 그대가 결정된 성품이 없는 중생을 내세우기를
마치 땅이 혹시 바뀌어 금ㆍ보배 따위의 물질의 성품이 되는 것처럼
불성이 없는 중생으로서 낮은 성품에 머무는 것도
이 사람의 성품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능히 바뀌어 열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금생에 바로 바뀐다는 것인가?
아니면, 미래세에 바뀐다는 것인가?

만약에 그대가 금생에 바로 바뀌는 것이라고한다면,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가?

삼보(三寶)를 만나 해탈의 세 가지 선근(善根)을 얻어서 바뀐다는 것인가?
또는 만나지 않고서도 능히 바뀔 수 있다는 것인가?
만약에 공덕을 닦기 때문에 현재 바로 바뀔 수 있다고 한다면,
어찌 불성이 없는 중생은 영원히 하열한 성품에 머문다고 하겠는가?
그 논리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또 주장하기를,
‘금세에 비록 선근을 닦더라도
금세에는 끝내 바뀔 수 없고
미래세에 가서야 바뀌기 때문에
하열한 성품에 머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성품은 미래세에 가서 선근을 닦기 때문에 바뀌는 것인가?
닦지 않아도 바뀌는 것인가?

만약에 닦기 때문에 바뀌는 것이라면,
금세에 닦고 있는데,
어째서 바뀌지 않으며,
만약에 미래세에 가서 선근을 닦지 않더라도 저절로 바뀌는 것이라면,
현재에도 닦지 않는데 어째서 바뀌지 않는가?

또 만약에 그대가 주장하기를,
‘불성이 없다는 것은 결코 없는 것이니,
마치 불이 뜨거운 성질을 가지고 있어
물의 차가운 성질로 전한될 수 없는 것처럼,
불성도 그와 같이,
불성이 있고 없음이 응당 결정되어 있어서 바뀔 수없다’고 한다면,

만약에 바뀔 수 없다면,
그대가 내린 이 결정은 어떤 이유(因)에 근거하여 결정된 것인가?
아니면 이유에 근거하지 않고 결정된 것인가?

만약에 어떤 이유에 근거하여 결정된 것이라면,
이 결정은 결코 성립되지 않으리니,
왜냐하면 본래 결정되지 않았던 것이
어떤 이유에 근거하여 비로소 결정되었기 때문이며,

만약에 이유에 근거하지 않고서 결정된 것이라면,
이는 큰 잘못이다..


이 때문에 나는 “이 성품이 또한 결정되지 않은 것은
이유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할 것이다.


그대가 말한 것처럼,
결정 등이 모두 이유가 없다면,
그러한 경우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들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은 두 가지가 다 평등하지 않으니 잘못이다.


마치 사l람들이 말하기를,
“석녀(石女)가 두 아이를 낳았는데,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검다” 하는 것과 같으며,

또 말하기를,
“토끼가 두 뿔이 있는데,
하나는 날카롭고 다른 하나는 무디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이 “이유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이 불평등한 이치가 또한 성립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것들이 곧 그대의 말한 것과 같음이니,
이것이 모두 성립되지 않을 경우엔 그대도 역시 성립되지 않을 것이므로,
이 세 가지 잘못은 외도들과 같은 것이다.
있는 것은 본래 반드시 있고
없는 것은 본래 반드시 없다거나,
있는 것은 사라질 수 없고,
없는 것은 생길 수 없다는 이와 같은 잘못은
그대들이 불성이 없다는 논리에 삿되게 집착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문】만약에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불성에 머물지 않아
영원히 반열반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가?

【답】만약에 대승(大乘)을 혐오하고 등진다면,
이 법은 잇찬티카(一闡提)의 원인으로 중생들로 하여금 이 법을 버리게 하기 때문이니,
만약 잇찬티카의 원인을 따른다면,
오랫동안 윤회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경에 말씀하기를,
“만약 도리(道理)에 근거한다면,
일체중생은 모두 청정한 불성이 본래 있기 때문에,
영원히 반열반할 수 없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이 때문에 불성이 반드시 본래 있으니,
그 유무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2. 파집분(破執分) ②

2) 파외도품(破外道品)

또한 불성을 알지 못하는 외도들을 위해 그들이 주장하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어떤 외도가 말하기를,

“일체 법이 다 자성(自性)이 있어서
모두 공하지 않은 성질이 있는 것은
그 자성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일체법이 모두 공하여 자성이 없다면,
물ㆍ불과 물질과 마음과,
생사와 열반이 모두 자성이 없을 것이고,
자성이 없는 불을 전환시켜 물을 만들 수도 있고,
열반을 전환시켜 다시 생사를 만들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의 불의 성질은 결정코 뜨거운 것이어서 물이 될 수 없고,
물의 성질은 습한 것이어서 불이 될 수 없으며,
열반과 생사도 역시 그러한 것이어서 서로가 전환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두 법은 모두 자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서로가 전환될 수 있는 것이라면
도를 닦는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리니,
그러므로 모든 법은 각각 자성이 있어서
이 때문에 공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
다시 외도들이 말하는 자성을 논파하기 위하여 그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힐란≫

그대가 말하기를,
“모든 법이 각각 자성이 있어서 공하지 않음은 그 성질이 결정코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성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성의 결정이란,
너무 가깝거나 너무 먼 여덟 가지를 떠난 것이어서 그 인(因)의 바깥을 볼 수 없나니,
만약에 어떤 물체가 결정코 있는 것이라면 볼 수 있겠지만,
만약에 물체가 결정코 없는 것이라면
마치 토끼의 뿔과 뱀의 귀와 같이
결정코 보거나 듣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결정된 지혜로써 도리에 의지해 찾아보아도
그 결정을 얻을 수 없는 것은 결정이 아주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자성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라고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병(甁) 따위의 모든 물건이 서로가 각각 다른 것은 마치 병이 옷(衣) 따위와 다른 것과 같다고 한다면,
그 이치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병과 물질 등은 자성이 있는 것인가?
자성이 없는 것인가?

만약에 결정코 자성이 있다거나 자성이 없다면
이러한 뜻은 모두 가능하지 않고,
만약에 똑같은 것이라면 여덟 가지가 있을 수 없으리니,
병과 그 수(數)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똑같다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결정코 다른 것이라면,
빛을 인연해서 병을 얻을 수는 없어야 할 것이니,
마치 사람들이 소(牛)를 인연해서 일찍 말(馬)을 못본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병 등이 자성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없다는 것은 모두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또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어떤 성질이건 성질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이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자성은 공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성질은 있으나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성질이 있는 것이 바로 자성이 있는 것이라면,
공를 떠나서 두 가지 대상이 있지 않을 것이고,
만약에 있는 가운데 또 있는 것이라면,
두 가지 있는 모양이 다 능소(能所)의 작용이 없게 될 것이다.


법이 이미 있는데,
어찌 구태어 자성이 있는 것을 다시 필요로 하겠으며,
만약에 없는 가운데 있는 것이라면,
어찌 토끼 뿔과 거북이의 털 같은 것을 있게 하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두 가지 경우가
다 성립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묻건대,
그대가 말하는 자성이
병 등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에 같다면,
여덟 가지 성질이 없어야 할 것이고,

만약 여덟 가지 성질이 있다면,
같지 않고 괴리될 것이요,

만약에 다른 것이라면,
있는 것에 통하지 않고 말과 지혜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말하기를,
“자성이 있기 때문에 말이 있고,
또 지혜를 생기게 한다” 하였고,
이제 이미 다르기 때문에 말이 없는 줄 알겠고,
말이 없기 때문에 지혜가 생기지 않고,
있고 없음을 다 떠나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자성이 결코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또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도 또한 공하다,
때문에 일체 법은 공하지 않는 것이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은 모든 법에 포함되기 때문이며,
말이 또한 공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다 공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말이란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공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말의 자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고,
말의 그 인연이 갖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거친 심작용(覺)이요,
둘째는 세밀한 심작용(觀)이요,
셋째는 작용(功用)이요,
넷째는 풍기(風氣)요,
다섯째는 여덟 가지 대상이니 그 여덟 가지 대상이란,
배꼽ㆍ가슴ㆍ목구멍ㆍ혀ㆍ목ㆍ이ㆍ코ㆍ입술이 그것이요,
여섯째는 음성이요,
일곱째는 명자(名字)요,
여덟째는 열고 닫음이다.


이 여덟 가지 이치를 갖추기 때문에
말 소리가 나게 되어서
그 분별하는 말이 모두 일체 법이 포섭하는 것에 들어가니,
이 때문에 모두가 다 공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또 그대가 말하기를,
“만약에 그대가 공의 평등함을 설한다면,
어째서 여덟 가지 인연이 다만 말을 생기게 할 뿐이고
다른 법을 생기게 하지 못하는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가 저 이치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주장하기를,
‘인연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말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대는 이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제 인과(因果)가 결정되는 데에 인연이 없지 않다는 것을 말할 것이니,
인과의 결정이란,
원인을 따라 결과를 내는 것이다.


만약에 결과가 원인을 따라 생기지 않는다면,
응당 본래부터 결과가 있어야 하겠고,
만약에 원인이 결과를 내지 않는다면,
그 결과가 어째서 있겠으며,
만약에 원인이나 결과가 다 함께 성질이 없는 것이라면,
자타(自他)가 같이 없어야 할 것이니,
어떻게 스스로만 생기고 다른 것은 생기지 않게 하겠는가?

자신의 결과는 생기지만
다른 것의 결과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성질이 없을 수 없으며,
원인에 근거하여 생기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부터 생긴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인과는 결정적이고 그대의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중론(中論)의 게송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모든 곳의 모든 법은
자신으로부터 생길수도 없고
다른 것으로부터도 또한 그 둘로부터도 그러하고
원인이 없는 것에서도 또한 그러하네

맨 처음 ‘모든 곳의 모든 법’이라는 것은,
그 장소가 세 군데가 있는 것을 밝힌 것이다..


첫째는 네 가지 태어나는 장소를 말한 것으로,
이른바 삼계(三界)의 태어나는 곳과 무류계(無流界)의 태어나는 곳이다.

이 네 군데가 일체 안팎의 모든 장소를 포괄하며,
이 네 곳에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법이 법을 포괄함이 또한 그렇다.
둘째는 내도(內道)와 외도(外道)에 근거한 일체의 모든 법을 포괄하며,
장소는 세간과 출세간 모두에 통하는 것이다..

셋째는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에 근거하여 일체 법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니,
장소는 삼세에 걸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에 ‘모든 곳의 모든 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음의 세가지 구는 네 가지 인연으로써 모든 법이 실제로 생겨나는 것을 살펴보아도 모두 알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첫째 자신으로부터 생기거나,
둘째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거나,
셋째 자신과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거나
넷째 자신과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지 않는 이 네 구절을 살펴보아도
생긴다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이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첫째의 자신으로부터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만약 자신으로부터 생긴다면 생긴 것이 소용이 없을 것이니,
스스로 이미 있는데 어찌 구태여 다시 생기겠는가?
그러므로 게송에서 ‘자신으로부터 생길 수 없다’ 고 한 것이다.


둘째,
만약 다른 것으로부터 생긴다면,
어찌 다른 결과가 생기지 않겠는가?
동일하게 이것은 모두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다른 것으로부터 생길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셋째,
만약 자신과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면,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앞서 이체(異體)상속에 근거하여 자신과 다른 것이라는 의미를 세웠으니,
이는 마치 두 물체가 서로 상대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서로가 자신도 되고 다른 것도 되는 것이다.

장씨(張)가 왕씨(王)를 상대한다면,
장씨는 곧 자신이 되고 왕씨는 남이 되는 셈이며,

왕씨가 장씨를 상대한다면,
왕씨는 곧 자신이 되고 장씨는 남이 되는 셈이니,
이치가 또한 그러한데,

이 두 가지다른 성질을 같은 것이라 하겠는가?.
아니면 다른 것이라 하겠는가?


만약 이 두 가지 다른 성질이 같은 것이라면,
자신과 남이라는 뜻이 없을 것이니,

양 편이 서로 상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만약 저쪽의 남이란,
그 뜻이 이쪽의 남이란 뜻과 서로 다른 것이라면,
저쪽은 곧 남이란 뜻이 성립되지 않으리니,

그 남이란 성질과 다르기 때문이며,


저쪽의 남이 이미 남이 아니라면,
이쪽의 남도 역시 근본을 잃어버릴 것이니,
남이 나를 상대함으로써 내가 남이라는 뜻이 있다.

남이 역시 근본을 잃어버리는 것이니,
남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남이란 뜻이 이미 없어졌고
나라는 성질이 그 의미를 잃어 버렸는데,
어찌 자신과 다른 것을 따라 함께 생길 수 있겠는가?

때문에 ‘자신과 다른 것을 따르는 두 가지가 다 그러하다’고 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같은 종류의 인과(因果)에 근거하여 자타를 살펴보고 논한다면,,
본래 종자가 원인이 되어 싹과 열매를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싹이 반드시 원인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를 결과라 하고,
종자가 반드시 결과를 생기게 하기 때문에 이를 원인이라 하나니,
그렇다면, 원인과 결과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에 결정코 같은 것이라면,
생겨날 의미가 없겠고,

본래부터 이미 있는 것이라면,
다시 어찌 생길 필요가 있으며,

만약에 결정코 다른 것이라면,
응당 다른 결과를 낳아야 할 것이다.

이미 모두가 다 다른 원인이라면,
어째서 자신의 결과만을 생기게 하고 다른 결과는 낳지 못하겠는가?

이미 자신과 남이 같다든가 다르다는 것이 다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역시 모두 자신과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지 않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게송에 ‘자신과 다른 것,
두 가지가 다 그러하다’고 한 것이니,

넷째 구절에 있는 ‘자신과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지 않는다’는 그것이
바로 원인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모든 법이 원인을 따르지 않고서도 스스로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일체 법이 서로 생기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불이 응당 물을 생기게 하고 물이 불등을 생기게 할 수 있으니,
모두가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원인이 없이 생긴다는 이치는 성립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게송에서 ‘원인이 없는 것에서 생긴다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고 했으며,
네 구절에서 아무리 그 생겨나는 모습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으니,
이 때문에 결정코 생겨나는 것이 없는 것을 알 것이다.


다시 만약 그대가 힐난하기를,
“이는 곧 실지로 증명하여 아는 것(增量)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만약에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면,
주체와 객체가 존재할 수 없어서,
소리가 귀에 이르지 못하고 귀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데,
내가 현재 소리와 귀가 상대되는 것을 보건대,
들리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공하지 않는 줄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주체와 객체,
자성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말하기를,
“자성이 성립되기 때문에 공하지 않는 것”이라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이 자성은 육근(六根)ㆍ육진(六塵)으로 같거나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성은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그대가 “어째서 불가능한가?”라고 한다면,
많은 원인으로 말미암아 성립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법에 자성이 있다면,
원인에 근거하여 성립되지 않아야 하고,
이미 성립된 것은 다시 소용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원인이 많기 때문에 각각 소리의 자성을 생기게 하는 것이니,
마치 북(鼓) 소리가 사람의 손이나 북채(棌) 따위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 손과 북채를 따라서 각각 자신의 부분에서 소리를 내게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앞서 자타(自他) 등 네 구절에서 생겨나는 것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것은 공한 성질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나의 성질도 성립되지 않는데,
어찌 많은 성질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그대가 주장하는 자성은 이 원인을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성이 스스로 존재하는데,
어찌 다시 그 원인을 필요로 하겠는가?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하나의 결과가 하나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성립되는 것은 원인이 체(體)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북을 두드리기 때문에 한 사람만이 들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도 어찌 함께 듣는가?.
만약 많은 사람이 함께 듣는다면,
원인과 결과는 하나의 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많은 결과는 많은 원인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닥치는대로 취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밭 가운데 종자를 뿌릴 경우 사람과 밭은 하나이지만,
종자가 많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는 싹도 역시 적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한 사람이 북을 두드리지만,
북 소리가 많기 때문에 듣는 사람도 역시 많은 것과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본래 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본래 이미 성품이 있었다면 어찌 현재에 와서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북을 두드리고 나서야 바야흐로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소리의 자성은 본래 있지만,
여덟 가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멀거나 가깝더라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본래 자성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하나의 소리가 변해 많은 소리가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와 많다는 것은 그 수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전도된 이치가 성립되고 그대의 취지가 근본적으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하나와 많다는 것은 그 수에 상위가 있다라는 그대가 성립시킨 이치에는 소리가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다만 결과만 서로 서로 어긋나는 것이고,
둘째는 쌍으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어긋나는 것이고,
셋째는 원인만 서로 어긋나는 것이어서 처음 찰나의 소리는 두번째 찰나의 소리와 서로 어긋나며,
최후 찰나의 소리는 원인하고만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다시 다른 결과는 없고 중간의 무수한 소리들이 앞뒤로 상대함으로써 한량없는 원인ㆍ결과가 있게 되어 스스로 함께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하나의 소리가 많은 소리를 낸다는 이 이치는 옳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꺼번에 함께 들리기 때문이다.
만약에 앞뒤로 많은 소리를 낼 때는,
응당 앞뒤로 들려야 하는데,
앞뒤로 들리지 않고 한꺼번에 함께 들리기 때문에 하나의 소리가 한량없는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다시 ‘전도된 의미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하나가 능히 많은 것을 생기게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 또한 “많은 것이 하나를 생기게 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대가 만약에 많은 것이 하나를 생기게 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나 또한 하나가 많은 것을 생기게 하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다시 ‘그대의 이치의 근본이 무너지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그대는 주장하기를,
“실체와 속성과 행위 등의 세 종류가 있는데,
다만 실체에 속성이 있고 행위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속성에 다시 속성을 성립시킬 수는 없다”고 했다.
이제 그대는 소리의 속성을 분별하여 수량의 속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어찌 스스로 본래의 집착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이 수량은 다만 명칭,
장구,
문장에만 의지할 뿐,
소리에 의지하지 않는 것으로,
마치 괴겁의 불이 집을 태우는 것은 사실 이 불이 태우는 것이니,
불은 겁과 상응하기 때문에 사르는 것이고,
겁이 태우는 것은 아니지만,
불이 겁에 의지하기 때문에 겁이 태운다고 말하는 것 같다.
수와 양도 그러한 것이어서 사실 명칭,
장구,
문장에서 얻어진 속성이니,
이 명칭,
장구,
문장이 소리와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에 수량의 속성이 소리에 의지한다고 말하는 것 뿐이다.
이 때문에 나의 주장은 그 근본이 무너진 것이 아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명칭,
장구,
문장이란,
귀의 감관(耳根)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명칭,
장구,
문장을 소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소리가 아니라 하겠는가?.
만약에 소리라고 한다면,
응당 그 속성이 없으니,
모든 속성은 체(體)가 없기 때문이며,
만약에 소리가 아니라면,
그 소리를 들을 적에 명칭, 장구, 문장 얻을 수 없을 것이니,
만약 한꺼번에 얻는다면,
어떻게 또 명칭, 장구, 문장 따위는 수량이 있는데 소리는 없다고 말하겠는가?
때문에 그대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무너졌음을 알아야 한다.


이 이전의 것은 비세사(鞞世師: Vaiṡeṣika)의 주장을 논파한 것이다.
다음에는 승거(僧佉: Sāṁkhya)의 주장을 논파할 것임을 마땅히 알라.


반론.
그대들의 주장에 따르면,
“소리에 자성이 있는 것은 그 소리가 자성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에 소리에 자성이 있다면,
소리가 귀의 근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만약 소리가 곧 귀고 귀가 곧 소리라고 말한다면,
자성이 곧 소리고,
소리가 곧 자성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만약에 귀가 곧 소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또한 그대들이 말하는,
소리가 곧 자성이라는 것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들이 주장하기를,
“소리는 들려지는 것이고 귀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그대는 소리와 귀를 같은 것이라 하는가?
아니면 다른 것이라 하는가?.
만약에 그대들의 주장처럼,
소리는 들려지는 것이어서 귀와는 다르다고 한다면,
이미 들려졌기 때문에 자성과는 또한 다를 것이고,
만약에 소리와 귀가 다르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소리가 귀를 들을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가?.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속성이 귀와 같을 뿐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소리가 사라질 때 소리와 귀가 같기 때문에
귀도 함께 사라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소리와 귀가 같은 것임이 그 예(例)로서 성립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이 성립되지 않는 것도 그러할 것이니,
때문에 모든 것은 결코 자성이 없고 공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에 그대들이 주장하기를,
“감각적 인식이 어떻게 성립하는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이제 나는 감각적 인식에 입각하여 두 가지 공을 명확히 할 것이다.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에 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환영을 볼 때 환영으로 보이는 것은
감각적으로 인식되는 것이지만
참된 존재가 아닌 것과 같이 모든 법도 또한 그와 같다.

보여지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
실체가 참되지 않기 때문이다.

감각적 인식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하다는 의미가 성립하는 것이다.

감각적 인식이기 때문에 임시로 존재하는 것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일체의 모든 법은 자성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연에 의지하여 생기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불이 다른 것에 의지하여 발생하는 것처럼,
섶을 떠나서는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또한 반딧불(螢火)과도 같다.
만약에 불이 자성이 있다면,
마땅히 섶을 떠나서 공중에 저절로 타오를 것이다.

만약에 저절로 타오를 수 있다면,
마땅히 땔감 떠나서 생겨나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쓰임이 있지 않아 불이 할 일이 없음으로 일체 물이 불을 끌 수가 없으리라.

그럼에도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자성이 있기 때문에 끌 수 있는 것이고,
만약 자성이 없다면,
마치 환화(幻化)의 불이 진실한 성질이 없어서 다룰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물로서는 끌 수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그대에게 묻건대,이 불이 본래 자성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자성이 없는 것인가?.
만약에 본래 자성이 있는 것이라면,
끝에도 또한 있어야 할 것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 있는 것이라면,
이는 항상 있는 것이어서 끌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자성이 각각 스스로 같지 않아서 서로가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라면,
마치 일을 함에 있어서 뒤에 한 일이 이루어지면 앞서 한 일은 곧 파괴되는 것과 같고,
마치 불로 물을 끄는 것과 같을 것이니,
만약 모든 법이 각각 자성이 있다면,
어찌 서로 파괴할 수 있으며,
만약 그대들이 주장하듯이 자성이 없어 불과 섶이 다를 수 없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많은 잘못이 있으니 주체와 객체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같은 것이어서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주체와 객체인 불과 섶 두 가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섶이 비주는 것이 되고 불이 비춰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니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본래 주장한 같다는 의미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외도들은 말하기를,
만약에 그대들이 주장하기를 “불이 같거나 다름을 여읜 것이라면,
어떻게 불이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하겠는가?”고 하지만,

그대들의 주장을 반박하여 말한다면,,
“섶에 있는 색등의 다섯 가지 대경(五塵)들이
이 때엔 섶을 이루고 있지 못했으나
곧 일시에 모두 뜨거운 성질을 이루기 때문에
사대(四大)ㆍ사미(四微) 등 여덟 가지가 모두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할 것이다.

만약에 “차갑고 뜨거운 따위의 여덟 가지가 같거나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에 같은 것이라면,
차가운 것도 마땅히 뜨거운 것이 되어야 하리니,
이는 곧 상견(常見)에 떨어질 것이다.


또 만약에 다르다고 한다면,
이는 허공에서 듣고 생긴 것이니 곧 단견(斷見)에 떨어질 것이다.
차가움에 인연하여 뜨거움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여덟 가지 불이 있어야 하고,
불이 만약 여덟 가지가 있다면 같은 불은 생기지 않을 것이니,
모두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 때문에 모든 법은 모두 인연을 의지하여 생기는 것이다.

왜 그런가?
상속하고 건너뛰지 않기 때문이다.

상속하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고
건너뛰지 않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으니,
이러한 이치이기 때문에 단견과 상견이 사라지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지만,
세간을 따르기 때문에 역시 같고 다름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인식하는 것(能量)과 인식된 것(所量)의 두 가지 법이 성립된다.
모든 법에 각각 자성이 있기 때문에 공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인식은 자신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된 대상에 근거하지 않고 인식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인식된 것이 없다면 인식의 주체라는 것이 무엇에 대하여 성립하겠는가?

인식에 있어 어떤 인식된 내용이 있겠는가?
만약 그대들이 주장하기를 “인식된 것을 관찰함으로써 인식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만약 앞 대상이 없다면,
어떤 대상을 인식하겠는가?

인식된 것은 소연의 대상이다.
인식의 주체는 인식하는 지혜이다.
만약 인식이 이미 성립하였다면,
인식의 주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본래 인식의 주체로 말미암아 인식된 것의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인식의 주체가 없고 이미 인식이 성립되었다면,
인식의 주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에 인식된 것이 인식의 주체와 관계가 없이 스스로 성립될 수 있다면,
어떤 인식의 주체와 객체가 있겠는가?
만약 그대가 주장하기를 “인식의 주체와 객체는 상호 성립되는 것으로,
이 두 가지는 각각 자성이 있어서 서로 화합하기 때문에
하나는 인식의 주체라 하고
다른 하나는 인식의 대상이라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아직 상대하지 않았을 때 두 가지 법이 이미 성립되어 나중에 그 이름을 얻는다면,
네 가지 잘못이 있다.
첫 번째는 서로 상대하는 것이 소용이 없다.
왜 그런가?
모든 법이 아직 반연되지 않았을 때,
이미 인식이 성립되고 인식의 주체 또한 이와 같아서 아직 대상을 인식하지 않았을 때 이미 인식의 주체가 성립되었다면 자성이 이미 성립되었는데 서로 상대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어떤 것이 충족되지 않아 다시 상대를 필요로 할 때,
만약 명칭을 세우기 위해 상대를 필요로 한다면,
체가 이미 성립되었는데 어찌 명칭이 없겠는가?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체의 근본은 자성이 있으나 다만 아직 상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칭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주장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명칭이 없는데 어찌 체가 있겠는가?
세 번째는 인식된 것이 앞서 성립되고 인식의 주체가 뒤에 성립된 것이니,
만약 인식된 것이 이미 성립되었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을 얻고 인식의 주체가 아직 성립되지 않았다면,
다시 무엇을 대상으로 인식의 대상이라 이름하겠는가?
네 번째는 인식의 대상과 주체가 동시에 성립하였다면,
주체와 객체의 의미가 무너지는 것이니 마치 소의 뿔이 나란히 생기는 것과 같으니,
주체와 객체가 없이 전후 동시에 자성을 구해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때문에 ‘모든 법은 다 공하다’고 알라.
다시 그대들이 주장하기를,
‘등은 비추는 것이 되고 병은 비추어진 것이 되는 것과 같다.
등과 병 두 가지 물건이 본래 자성이 있는데 다만 상대할 때에만 비추는 것과 비추어진 것이라 명명하는 것이니 때문에,
인식한다믄 의미가 성립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등의 비유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니 인식한다는 것과 같지 않은데 어찌 비유가 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왜 성립되지 않는가” 라고 한다면,
등에는 어두움이 없기 때문에 자체를 비추지 않기 때문이니,
만약에 자체를 비춘다면,
체는 비춰진 대상이니,
마치 병 등의 비유에서 병이 이미 다른 등이 와서 비춰 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다시 다른 등이 비춰 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거듭 비추는 것으로 무궁한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주장하기를,
“감각적 인식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등을 취해 비유를 삼는 것”이라 하지만,
나는 그것이 서로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가 될 수 없음을 밝힐 것이다.
왜 그런가?
등은 다만 남을 비춰줄 뿐이고,
결코 자체를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체에 어둠이 있다면,
자타(自他)가 와서 비추어 주는 것을 필요로 하겠지만,
체에 이미 어둠이 없는데,
어찌 자타가 애써 비추겠는가?
병 따위의 물건은 자체가 어두워서 스스로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등이 비추어 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만약 등이 다시 비추어 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면,
마땅히 다른 등이 와서 비추어주는 것을 필요로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등은 다만 비추는 것이고 비춰지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인식은 그렇지 않아 주체도 되고 객체도 되니,
앞의 대상을 반연하면 인식의 주체라 하니 스스로의 지혜로 반연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의 지혜를 반연하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이라고 한다.
스스로 반연한다는 것은 마치 안식이 감각적 인식의 주체로 직접 앞에 놓인 색에 대하여 분별하여 이것은 푸른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만약 이것이 푸르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이 의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생기하여 안식은 색을 취하고 스스로를 취하지 못하는 것으로 의식이 청,
황을 분별하고 안식을 취해도 스스로 색경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다만 분별할 뿐이다.
안식이 얻는 바는 곧 인식의 대상을 분별하는 것이니,
안식은 인식의 주체이다.
때문에 감각적 인식은 다른 분별로 말미암아 성립할 수 있다.
등(燈)은 그렇지 않아서 다만 비추는 것일 뿐이고 비춰지는 것이 아니니 다른 것이 비추어주는 것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다.
이 인연으로써 이것을 들어 감각적 인식에 비유할 수 없다.
만약에 등이 스스로 비출 수 있어서 다시 다른 등이 비추어주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병도 역시 스스로의 체를 비추어 다시 다른 등의 와서 비추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등 자체가 어둡기 때문에 스스로를 비추고 다른 등이 비추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병도 역시 그러하여 병 자체가 어두우면 스스로 자체로 비추고 다른 등이 와서 비추어 주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하리니,
병이 스스로 비추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병과 등이 같은 종류이어서 함께 스스로 비추고 모두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병과 등이 다시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또 만약에 등이 비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체를 비출 수 있으며,
만약에 자체에 어두움이 없어서 비추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찌 애써 비추겠는가?
만약에 자체를 비춘다면 두 가지 잘못이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 자체가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비추는 것을 필요로 한다면,
이는 병과 같은 것이 되는 것으로,
병에는 어두움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비출 수 없고,
등도 또한 어둠이 있다면,
어떻게 비출 수가 있겠는가?
둘째는 비추는 것과 비춰지는 것이 같은 것이니,
이미 같은 체라면 도대체 어느 쪽이 비추는 것이고,
어느 쪽이 비춰지는 것인가?
그대의 등 비유가 성립되지 않았으니,
감각적 인식의 의미도 또한 무너진 것이다.
또 한 가지 물질만을 사용하여 병을 만들지 않고 여덟 가지 물질을 합하여 병을 만드는 것이라면,
한 가지 물질만 보고서 어떻게 병을 얻겠는가.
만약에 한 가지 물질만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병이라면 단지 물질만이 병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물질을 증명하는 것이지 병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물질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지극히 미세한 물질(隣虛色)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하기를,
“지극히 미세한 물질이라도 항상 공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많은 것이 모여서 티끌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면,
물질의 이치가 곧 그렇다면,
한 티끌 속에 여섯 방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여섯 방위가 있다면,
곧 여섯 부분이 성립하는 것이니,
만약에 여섯 방위가 없다면 물질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이미 여섯 부분이 있다면 곧 분석할 수 있을 것이고 만약에 방위는 있어도 부분이 없다면,
이는 여섯 티끌이 함께 한 티끌 속에 들어가는 것이어서 한량없는 모든 티끌이 모두 그러할 것이니,
그렇다면 큰 것이 성립하는 이치가 없게 될 것이다.
또 한 티끌에 햇빛이 비출 적에 한 쪽만을 비추겠는가?
아니면 동쪽과 서쪽도 함께 통하는 것이라 하겠는가?
만약에 한 쪽만을 비춘다면 여섯 부분이 있겠고,
동쪽과 서쪽도 함께 통한다면,
물질은 곧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방위와 부분은 진실하지 않아 모두 공하다고 알아야 하니 무슨 증명하여 볼 것이 있겠는가?
이미 감각적 인식이 없으니,
추론등의 모든 인식은 이치로 보아서 당연히 잘못된 것이며,
또 자성(自性)이 물질 따위를 떠남으로써 모든 대경이 비유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병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먼저 반드시 증명해 본 뒤 비교해 아는 것이 마치 불과 연기가 상응(相應)하는 것을 먼저 일찍이 증명해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불이 있으므로 해서 연기를 비교하는 것인 만큼,
뒤에는 연기만 보고 불을 보지 못했더라도 먼저 일찍이 불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때를 비교하여 불이 있는 줄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가 말하기를,
“물질 등의 대상에 근거하여 자성을 비교해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전에 보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물질 따위로 말미암아 비교해 알 수 있겠는가?
병도 또한 그와 같아서 먼저 온 것을 알고 일찍이 증명하여 보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물질을 보겠는가?
추량하여 병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니,
이것은 곧 감각적 인식에 근거하여 이 뜻을 추량한 것이니 증명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그 비량(比量)과 성언량(聖言量) 등이 맞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잘못이 있으니,
원인과 결과가 차별이 없기 때문에 추량하는 지혜(比智)가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자성이 오유(五唯) 즉 성(聲)ㆍ촉(觸)ㆍ색(色)ㆍ미(味)ㆍ향(香)을 생기게 하는 것은 자성이 원인이 되고 오유가 결과가 되나니,
원인 속에 결과가 있고 결과에도 원인이 있어,
오유에 이를 때에도 자성을 끝내 잃지 않는 것은 오유와 자성이 다 본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성과 오유는 그 체가 하나인 것이라”고 하는데,
만약에 그렇다면 원인과 결과가 차이가 없는데 어떻게 오유로써 자성을 비교해 알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이는 곧 자체를 가지고서 자체를 비교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 의미를 말하겠는가?
다시 비세사(鞞世師)의 주장을 논파할 것임을 알라.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병(甁) 등이 물질 등과 다르다면,,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만약 물질의 모든 속성을 떠나서 이 물건이 증명될 수 있다면,
이것은 마치
석녀(石女)에게 아이가 있어서,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거북이의 털로 된옷을 입고 토끼 뿔로 된 신을 신고 허공에 꽃다발을 이고서 건달바성(闥資城)에 들어가 허수아비 여인과 함께 유희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도 또한 증명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이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병 등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물질들이 이미 없는데 병이 어떻게 있겠는가?
병처럼 일체의 모든 인식이 다 성립되지 않으며,
이와 같이 자성도 모두 존재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모든 법이 다 공하다고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승카(僧佉)의 집착을 논파할 것임을 알라.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원인 가운데 결과가 있기 때문에 모든 인식이 성립되지 않은 것이,
마치 모든 법에 자성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가 하나의 체(體)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하기를,
“자성의 원인 가운데 곧 결과가 있고,
모든 법 가운데 결과가 있고,
모든 법 가운데에 곧 자성이 있기 때문에 비교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원인과 결과를 같은 것이라 하는가?
아니면 다른 것이라 하는가?
만약에 같은 것이라면,
체가 같아 다르지 않기 때문에 비교할 수 없으며,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원인과 결과는 같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그대들의 주장과 어긋나는 것이라.
그리고 만약 원인 가운데 반드시 결과가 있다면,
곧 두 가지 잘못이 성립하는 것이다.
첫째는 원인이 곧 결과라면,
원인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자성이 하나이기 때문에 다만 결과만을 얻을 뿐인데 어떻게 원인이 있겠는가?
둘째는 이미 결과가 있다면 원인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본래 원인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인데,
결과가 이미 있는데 왜 다시 원인이 필요하겠는가?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이 원인이 있기 때문에 자성을 잃지 않는 것이라” 한다면,
이 이치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성은 처소가 없기 때문이니,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그 처소가 밀처(密處)와 공처(空處)이기 때문이니 어떻게 처소가 없겠는가”고 한다면,
이 이치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비밀과 공는 그 처소가 모두 없기 때문이다.
비밀이란,
네 가지 원소(四大)와 네 가지 대경(四塵)인 여덟 종류를 말하는 것이고,
공이란,
허공의 원소(空大)와 소리의 대경(聲塵)인 두 종류를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다섯 가지 원소(五大)와 다섯 가지 대경(五塵)의 두 처소가 모두 없는 것이거늘,
자성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는가?
자성이 변하고 달라지지 않았을 때 오유(五唯)와 다섯 원소(五大)가 모두 있지 않기 때문에 허공의 원소는 이 공의 처소이고,
네 원소는 이 비밀의 처소이니라.
그리고 두 처소가 예전에 있지 않았을 때 그대가 자성을 세운다면 이 자성은 어느 처소에 있는 것이라 하겠는가?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이전부터 자성은 공과 밀에 있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생기는 원인이 근본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변하고 달라지기 전에 공과 비밀이 있지 않았다면,
이는 원인이 소용이 없는 것이고,
변하고 달라지는 그 때에 가서 비로소 공과 비밀이 있어서 바야흐로 원인이 소용이 있다면,
이는 변하고 달라지는 그것이 자성을 생기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이 때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그렇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원인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니,
그 어느 쪽 것을 먼저라 하겠는가?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어느 쪽도 먼저 되는 자성은 없는 것이라” 한다면,
이 이치도 그렇지 않으니,
자성이 머물 처소가 없기 때문이고,
만약에 처소가 없다면 그대들의 성전에서 한 말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가비라선(迦毘羅仙)이 아수리바라문(阿修利婆羅門)을 위해 설하기를,
“옛날 최초엔 하나의 캄캄한 어두움이 있을 뿐이었는데,
여기에 다만 지혜가 있게 된 것은 처소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라”고 했으니,
이미 그대들의 성전의 말을 인용할 방법이 없어서 곧 스스로 서로 어긋나고,
자성과 아(我)가 모두 성취되지 않는데,
다시 무슨 비유로써 자성을 세울 수 있겠는가?
만약에 그대가 주장하기를,
“제3의 것이 바로 그 비유이다”라고 한다면,
이것도 역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두 가지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스스로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고,
둘째는 원인의 성품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대가 주장하기를 “차이가 없는 것이 곧 그 비유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제3의 것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약 그대가 주장하기를,
“차이가 없기 때문에 제3의 것이 성립된다”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그렇지 않다.
다만 수(數)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주장하기를,
“수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근본적인 이치와 어긋나는 것이고,
만약 그대가 주장하는 근본적인 이치에 수만 있어서 그 수가 바로 이치라고 한다면,
이것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수가 없어질 때 이치도 또한 무너지기 때문에 변하는 것과 자성이 곧 다르지 않게 되기 때문에 그 같다거나,
같지 않다는 것이 모두 다 성립되지 않는다.
자성과 변하는 것은 차별이 없기 때문에 곧 원인과 결과가 같다는 것도 또한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주장하기를,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면,
언어(言語)가 없기 때문에 그대의 논란도 역시 없어야 하겠고,
만약 원인과 결과가 다른 것이라면,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 가지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스스로 그대의 주장과 어긋나는 것이고,
둘째는 스스로 전도되는 것이고,
셋째는 언어가 그 원인이 없는 것이다.
첫째의 스스로 근본적인 이치와 어긋나는 것이란 어떻게 이러한가?
이제 내가 그대의 주장을 갖고서 다시 그대에게 힐난할 것이니,
그대는 믿겠는가?
믿지 않겠는가?
그대가 만약 나의 논란을 믿는다면,
그대의 이치는 곧 무너질 것이고,
만약 나의 논란을 믿지 않는다면,
그대의 논란도 역시 논란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나의 논란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그대 말의 이치가 성립된다면,
나의 주장이 또한 성립될 것이다.
그대가 주장을 편 것이 언제인가?
나의 논란 이전인가?.
이후인가?
아니면 동시인가?
만약 이전에 있었던 것이라면,
내가 아직 논란한 적이 없었는데 그대가 상대하여 그 누구를 논파할 것이며,
만약 나의 논란 이후에 있었다면 나의 이치가 이미 성립되었는데 그대의 이치가 어찌 성립되겠는가?
만약 동시에 있었다면,
주체와 대상이 없는 것이니,
마치 강물과 바닷물이 한꺼번에 화합한 것과 같으니,
어떻게 차이를 판별하겠는가?
그대와 나의 두 주장이 차이가 없기 때문에,
나의 주장이 성립될 것이다.
두 번째로 스스로 전도된다는 것은,
그대가 만들어낸 주장을 갖고서 내가 밝힌 주장을 논란하는 것은 논란할 바가 아니니,
만약에 내가 만들어낸 이치를 내세웠다면,
그대는 아마 세 때로써 논란을 삼았을 것이라.
내가 만들어낸 이치를 논란한다면 세 때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세 때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이 만들어진 이치도 성립되지 않아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나타내는 이치는 도리(道理)를 말미암기 때문에 성립되나니,
만약에 도리가 있다면,
세 때가 다름이 없을 것이고,
도리가 없다면 이치를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세 때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고,
이제 논란하는 것은 반드시 도리에 의거하는 것이니,
그대가 시간을 가지고서 도리의 이치를 논란하기 때문에 스스로 전도된 것이다.
세번째의 언어가 원인이 없다는 것은,
언어는 의미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으로,
만약에 의미가 없다면 언어가 성립되지 않고,
원인과 결과가 같은 하나의 체라면 다르다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나니,
때문에 언어가 없을 것이니,
만약에 그대가 주장하기를,
“이것이 원인이고 이것이 결과”라고 한다면,
이 이치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무상(無常)하다는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결과가 이미 무상하다면 원인도 역시 그러할 것이고,
원인이 무상하다면 그대의 근본적인 주장과 어긋날 것이니,
그대의 원인은 항상하는 것인데 그 결과가 무상이어서 결과와 물질 등이 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대가 주장하기를,
“물질과 비교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고 한다면,
이 이치가 또한 그렇지 않으니,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앞서 이미 논파한 것과 같이 감각적 인식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추론등도 성립되지 않으며,
공(空)ㆍ밀(密)의 처소가 있지 않고 원인이 머무는 처소가 없기 때문에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주장하기를,
“추론할 수 없다고 하지만,
추론하는 것 또한 성립될 수 있으니,
추론에 사구(四句)가 있는 것과 같다.
첫째 있는 것은 없는 것에 비교하고,
둘째 없는 것은 있는 것에 비교하고,
셋째 있는 것은 있는 것에 비교하고,
넷째 없는 것은 없는 것으로 비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이치도 그렇지 않다.
석녀(石女)의 아이와 토끼의 뿔 따위도 비교할 수 있겠는가?
물질들을 증명할 수 있다거나 증명할 수 없다는 이 이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원인은 도리가 없기 때문에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주장하기를,
“공계(空界)의 물질을 결과를 가지고 원인과 비교하는 것처럼,
자성(自性)도 또한 그러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 이치가 그렇지 않다.
공계의 물질로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 원인과 결과가 다르기 때문이고,
물질 등의 대상을 떠나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유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주장하기를,
“증명할 수 없는 것을 갖고서 증명될 수 없는 것과 비교하는 것이니,
마치 알아볼 수 없는 지하수를 자성과 비교하는 것처럼 나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석녀(石女)의 아이를 거북이의 털과 비교할 수 있다면,
나도 곧 그대가 공계의 물질을 가지고 자성에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 주리라.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등(燈)이 스스로 성립되는 것처럼 추론 또한 그러하다”고 한다면,
이 이치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색 등의 여덟 가지 물질을 떠나서는 등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공계의 물질이 색 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자성을 비교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자성이 없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주장하기를,
“기억해 아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감각적 인식과 추론이 성립되고,
만약에 감각적 인식과 추론이 없다면,
다시 무엇을 기억하겠는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렇지 않다.
만약에 세 가지 아는 것을 떠나서 기억하고 아는 것이 있다면 감각적 인식과 추론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 가지 아는 것이란,
첫째 다른 대상에 대하여 아는 것이고,
둘째 구별하여 아는 것이고,
셋째 하나를 아는 것이니,
첫째의 다른 대상을 아는 것이란,
마치 사람이 병(甁)을 보고 뒤에 가서 옷(衣)을 기억한다는 것은 이 기억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대의 주장도 이와 같다.
색은 곧 다른 대상이니 이미 색을 보았는데 병을 기억하기 때문에 이치가 옳지 않는 것이다.
둘째의 이른바 구별하여 아는 것이란,
마치 장(張)씨가 병을 보았는데 왕(王)씨가 그 뒤에 기억한다는 것은 그런 이치가 없는 것처럼,
그대의 주장도 이와 같은 것이다.
대상을 취하는 인식과 내가 기억하고 안다는 이 두 가지는 별개의 종류로서 같지 않은 것이니,
이 앞서 본 인식과 내가 그 뒤에 기억해 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의 이른바 하나를 아는 것이란,
마치 사람이 바로 병을 볼 적에 기억을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기억하고 안다면 두 가지 잘못이 있으니,
첫째 두 가지 아는 것이 한꺼번에 함께 일어날 수 없는 것은 이 마음이 하나이기 때문이니,
마음이 대상을 취할 때에는 소리를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감관(根)이 바로 대상을 대하면 그 대상을 버리지 못하는데 어찌 다시 다른 대상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인식도 이와 같으니,
오직 하나를 알 뿐이어서 하나 하나의 생각이 사라지지 않고 변하는 처음부터 해탈에 이르기까지 과거가 항상 하나이기 때문에 이 기억하여 아는 데에 다른 기억해 아는 것이 없다.
만약에 이 세 가지 아는 것을 번복하여 기억하고 아는 것이 성립된다면,
이는 대상이 같은 종류이어서 같은 종류를 알 수 있어서 찰나찰나에 사라짐을 아는 것이고 한꺼번에 이 세 가지 이치를 갖추어서 기억해 아는 것이 성립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대의 기억하여 아는 것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 인식과 추론도 성립될 수 없고 이 까닭에 자성(自性)의 논리가 무너지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주장하기를,
“기억해 아는 것은 자성때문에 같고 다름과 있고 없는 등의 조작이 성립될 수 있느니라.
처음 마음이 경계를 취하는 것이 곧 세 가지 이치를 갖추니,
첫째의 경계와 둘째의 사람과 셋째의 지혜가 모두 한꺼번에 함께 있다가 두번째 생각에 이를 때 앞의 세 가지는 이미 사라지고 뒤의 세 가지가 계속해 일어난다.
앞과 뒤가 같은 종류이므로 이것은 같은 이치이고,
앞과 뒤가 각각 하나이므로 또한 같은 이치이고,
앞은 없어지고 뒤가 있게 되므로 이것은 다른 이치이고,
앞이 뒤를 생기게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은 있는 이치이고,
앞이 사리지고서 뒤가 생기므로 이것이 그 없는 이치이다.
이 모든 이치를 갖추므로 해서 이 때문에 기억해 아는 것이 있고,
자성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기억하고 아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해 말할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크게 기뻐할 것이니,
나의 주장을 번복하여 세운다 하여 무슨 손실(損失)이 있겠는가?
이제 내가 이 이치에 근거하여 자성이 없다는 것을 설할 것이니,
마치 앞의 종자가 뒤에 곡식을 생기게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 앞뒤의 곡식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만약에 같은 것이라면,
앞과 뒤가 없어야 하고,
만약에 다른 것이라면,
앞에는 곡식이지만 뒤에는 콩(豆)이어야 할 것이니,
이 때문에 같거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자성도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것은 그 원인이 사라지고 결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원인이 사라지기 때문에 있지도 않고 결과가 생기기 때문에 없지도 않으며,
원인에는 결과가 있지 않기 때문에 있다고 말할 수 없고,
결과가 생길 때엔 반드시 원인을 말미암기 때문에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이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를 기억하고 아는 것이 모두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성이 없다는 것을 설하는 것이다.
마치 곡식이 앞과 뒤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면서 능히 갖가지 일을 하는 것처럼,
기억해 아는 것도 그러하여 앞과 뒤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기 때문에 능히 갖가지 대상을 기억해 아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묻기를,
“기억해 아는 것이 이렇게 무상(無常)한 것이라면,
어떻게 닦아 익힐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면,
이에 대해 대답하리라.
이미 무상하기 때문에 닦아 익힘이 있나니,
마치 겁파바(劫波婆) 종자를 땅에 심어 두고 카타라 즙(佉陀羅汁)으로 적시어 주면 뒤에 싹과 줄기와 가지와 잎이 자라나서 그 자체의 모양에 다른 대상이 없다.
다만 열매가 익을 때에 곧 카타라 빛을 띠어 홍색ㆍ적색의 다른 모양이 될 뿐이고,
겁파바 자체의 모양은 본래의 대상 그대로인 것처럼 마음도 법과 법 아닌 것을 행하되 이 법의 차례가 앞 마음이 뒷 마음을 훈습(熏習)하여 이러한 방편의 훈습을 잃지 않기 때문에 같지도,
다르지도 않으면서 결과(結果)가 성숙할 때에 이르러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과보가 곧 각각 나타나느니라.
이 때문에 자성이 없는 마음으로부터 모든 업이 생기게 되는 것이 마치 겁파바자 종자가 나중에 똑같은 카타라 빛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자성심이 기억하고 아는 것이라는 이러한 집착을 일으키거나 혹은 어떤 사람이 수자(壽者)를 설하는 것도 역시 기억해 아는 것이니라.
만약에 이 집착을 일으키되 곧 기억하고 아는 마음과 수자가 없다면,
자성이 있기 때문에 잊어버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두 가지 잘못이 있으니,
첫째는 기억하여 아는 것이 만약 자성이 있다면 잊어버리는 것이 없어야 할 것이고,
만약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면 기억해 아는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니,
이렇게 잊어 버리는 것을 자성이 있는 것이라 하는가?
자성이 없는 것이라 하는가?
만약에 자성이 있는 것이라면,
이 자성이 기억해 아는 성품과 서로 위배되는가?
않되는가?
만약에 서로가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면,
하나의 물체 가운데 응당 한꺼번에 기억하고 잊어버리는 두 마음이 함께 일어날 것이며,
만약에 서로가 어긋나는 것이라면,
다만 자성이 있을 뿐이고 잊어버림으로 해서 곧 기억해 아는 것은 없으리니,
기억해 아는 것이 이미 없다면,
그 어떤 것을 잊어버리겠는가?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이 아는 것이 먼저 생겨서 뒤에 사라지기 때문에 잊어버림을 설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만약에 그렇다면,
자성(自性)이 곧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기억하여 아는 것이 있으므로 해서 자성이 작용하는 도구가 소용이 없으리니 기억해 아는 것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작용하는 도구로 말미암아 그 때문에 성립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자성이 없는 것이니 잘못이 있기 때문이라,
작용하는 주체와 도구가 동일한 체(體)라면 곧 기억해 아는 것이 없을 것이니 아는 것이 항상 있기 때문이고,
만약에 기억해 아는 것이 없어서 마음이 혹시 없을 때에는 곧 자성이 없을 것이다.
마음이 혹시 있을 때에는 곧 기억해 아는 것이 없을 것이고,
기억해 아는 것이 없다면 마음도 응당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구별되는 물질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함을 얻을 수 있다면,
증명해 아는 때에 기억하고 알지 못할 것이니 증명하여 아는 것으로써 기억해 아는 것을 채우는 것이니,
이 때문에 기억해 아는 본체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이치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에 물질이 항상 머문다면,
자주 익히는(數習)것이 없으리니 같은 종류이고 서로 비슷한 것이라야 비로소 자주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자성이 없다면 비슷한 이치가 성립될 수 있거니와 만약에 자성이 있다면 곧 하나의 대상과 하나의 일만을 지키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 것이 없다.
서로 비슷한 것이 없기 때문에 곧 자주 익히는 것이 없고,
곧 자주 익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기억하여 아는 것이 없다.
만약에 그대가 자성이 기억하고 아는 것을 주장한다면,
추론 등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체(體)이기 때문에 모든 의심은 마땅히 결정된 지혜이어야 할 것이고,
욕심은 곧 욕심을 여의는 것이어야 할 것이고,
훔치는 것이 보시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고,
며느리가 곧 시어머니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인식이 만약 자성과 다르지 않다면,
먼저 있었던 것이라 하겠는가?
아니면 뒤에 있는 것이라 하겠는가?
만약에 먼저 있었던 것이라면 인식된 것이 이미 없는데 어떤 인식된 것이 있겠으며,
만약에 뒤에 있는 것이라면,
곧 원인 속에 결과라는 주장이 저절로 무너지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인식된 것은 무엇인가?
만약에 ”내(我)가 바로 인식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으니,
감각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 등의 두 가지 인식방법으로는 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상이 있다면 이 두 가지 인식방법을 떠나서 얻을 수 없으니,
마치 다섯 대경(大塵)과 같다.
다섯 감관(五根)과 다섯 대경은 인식이 거듭하여 생기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감각적 인식이라고 하고,
이성적 인식은 인식이 거듭하여 생기기 때문에,
이전에 보아서 인식이 생겨난 후에도 근이 추론하여 아니,인식은 인식기관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연기를 본 후에 불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나’라는 것은 그렇지 않으니,
물질 등과 같이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달리 감각기관과 그 대상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인식기관이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상응하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식이 만약 앞에 있을 때는 인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때문에 모든 법은 진실로 자성이 없고 진실된 공만이 그 체성이다.


2. 파집분(破執分) ③

3) 파대승견품(破大乘見品)

다음은 대승(大乘)을 배우면서 편향된 집착을 가진 것을 논파하기 위한 것임을 알라.
만약에 그대가 주장하기를,
“모든 있다는 것은 모두 세속의 진리(世諦)로 말미암아 그러하고,
모든 없다는 것은 모두 진제(眞諦)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문】착한 벗이여,
어떤 것이 진실한 진여의 진리이고 어떤 것이 세속의 진리입니까?
【답】일체 법으로서 자성이 없는 것을 진실한 진여의 진리라 하고,
자성이 없는 그 가운데에 자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세속의 진리라 하니,
없는 가운데에 임시로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문】이것은 사실은 자성이 없으면서도 세속에 의지해 말하기 때문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또는 말로서만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만약에 세속의 말에 의지해 이러한 집착이 있다면,
이러한 집착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왜 그런가?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집착이 말뿐이라면,
뜻을 밝힐 수 없을 것이니,
세속의 말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성립되지 않는 것이 세속이라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또 만약에 그대가 자성 없는 가운데 자성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그것이 곧 세속이요,
이미 있다고 고집한다면 어떻게 이것이 없는 것이겠는가?
【답】전도된 종류들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없는 가운데 있는 것으로 설하고 그리고 상(常)ㆍ낙(樂)ㆍ아(我) 등이 없는 모든 법에도 다 있다고 설한다.
상(常) 등의 모든 속성은 그 체(體)가 사실 없지만,
다만 임시로 있다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집착은 네 가지 전도에 포괄된다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비록 있는 것으로 집착하여 말하지만 없는 것이 되는 셈이다.
묻겠다.
이러한 전도를 있는 것이라 하는가?
아니면 없는 것이라 하는가?
만약에 있는 것이라면,
일체 법의 자성이 없다는 이 이치가 그렇지 않을 것이며,
만약에 없는 것이라면,
이러한 전도에 집착하는 것도 역시 성립되지 않을 것이며,
만약에 자성이 없는 가운데에 자성이 있는 것으로 집착하여 그것을 세속의 진리라 한다면,
이 이치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가지 진리를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를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은 인과 법(人法)이 없기 때문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두 가지 공함(二空)을 나타내기 때문에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세속의 진리도 그러한 것이어서 분별하는 성품이기 때문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다른 것에 의지하는 성품(依他性)이기 때문에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진리란,
인과 법(人法)이 없고 없지 않음(無不無)과 2공(空)이 있고 있지 않음(有不有)이 결정적으로 있다 없다라고 할 수가 없다.
세속의 진리도 그러하여서 분별하는 성품이기 때문에 반드시 없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 의지하는 성품이기 때문에 반드시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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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근을 닦고 번뇌를 조복시킨 소승의 삼현위(三賢位)와 대승의 삼현위(大乘三賢 位)가 있다.
2 고법지인위(苦法智忍位)를 말한다.
무시이래 처음으로 무루혜를 일으킨 계위.
3 난(煖),
정(頂),
인(忍),
세제일법(世第一法)의 사선근 중 가장 높은 계위인 세제일 법(世第一法)을 가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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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자재보살 명호 11 번째는?




23
열다섯 가지 좋은 삶을 누린다는 것은,
첫째는 태어나는 곳마다 선한 왕을 만나고,
둘째는 항상 선한 나라에 태어나고,
세째는 항상 좋은 시절을 만나고,
네째는 항상 착한 벗을 만나게 되고,
다섯째는 몸에 모든 기관이 구족하고,
여섯째는 도의 마음[道心]이 순일하게 익게 되고,
일곱째는 계율을 어기지 않게 되고,
여덟째는 딸린 식구가 항상 은헤롭고 의로우며 화목하여 따르고
아홉째는 살림살이 재물과 음식이 항상 풍족하고,
열째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공경과 보살핌을 받고,
열한째는 가진 재산과 보물을 남에게 뺏기지 않으며,
열두째는 의욕하여 구하는 바가 뜻대로 다 이루어지고,
열세째는 용과 하늘과 선신(善神)이 항상 옹호하여 지켜주며,
열네째는 나는 곳마다 부처님을 뵈옵고 법을 들으며,
열다섯째는 듣게 된 올바른 법의 깊고 깊은 이치를 깨닫게 되옵니다.
대비심 다라니를 외우고 수행하는 자는
이와 같은 열다섯 가지 좋은 삶을 누리게 되므로
일체 사람과 하늘과 용과 귀신들은
항상 외우고 지니되
게으름을 내지 말아야 되나이다.
관세음보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법회에 모인 대중 앞에
합장하고 바로 서서
모든 중생에게 대비의 마음을 일으키시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곧 이와 같은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廣大圓滿無大悲心大陀羅尼)
신묘장구다라니(神妙章句陁羅尼)를 설하셨으니,
곧 주를 설하되,
[ 위에 기재~~ ]
● 마하보리살타 摩訶菩提薩埵<二十三> ma hā bo dhi sa tva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11
바리보라나 아나 나삼바 라
波哩布囉拏<二合>惹拏<二合>曩三婆<引>囉<十一>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 삼매_게송퀴즈


■ 오늘의 게송
[335일째]
수방편지불가설 $ 077▲謎羅謎羅為 一 ● 娑攞荼, ○□□□□,學,無,究,彼

□□□□□□□, 學甚深智不可說,
無量智慧不可說, 究竟智慧不可說,
□□□□□□□, 학심심지불가설,
무량지혜불가설, 구경지혜불가설,

방편 지혜 닦는 일 말할 수 없고
깊은 지혜 배우는 일 말할 수 없고
한량없는 지혜를 말할 수 없고
끝까지 이른 지혜 말할 수 없고



[143째]
불가언설모단처 $ 014▲最勝最勝為 一 ● 摩婆(上聲呼)羅, ○□□□□,皆,種,種,於

□□□□□□□, 皆有淨剎不可說,
種種莊嚴不可說, 種種奇妙不可說。
□□□□□□□, 개유정찰불가설,
종종장엄불가설, 종종기묘불가설。

말할 수 없이 많은 터럭 끝마다
깨끗한 세계들을 말할 수 없고
가지가지 장엄도 말할 수 없고
가지가지 기묘함도 말할 수 없어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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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0596_T1610.txt★ ∴≪A불성론≫_≪K0596≫_≪T1610≫
●K0980_T0192.txt★ ∴≪A불소행찬≫_≪K0980≫_≪T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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